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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을 키워드로 검색하다가 읽게 된 글 하나는 철학아카데미 이정우 교수의 '지젝의 들뢰즈론(1)', "잠재적인 것과 가능적/상상적인 것 - 지젝의 들뢰즈론: 비판적 음미"(05. 05. 26)이다. 실제 강의된 내용인지는 모르겠으나 '잠재적인 것의 실재성(1)'이라고 소제목이 더 붙은 걸로 보아 'Organs without bodies'(2004)의 첫 소절('The Reality of the Virtual')을 자세히 '음미'하고자 했던 듯하다(하지만, 그 '음미'는 (1)에서 더 진척되지 않은 듯하다). 그가 읽고 있는 것은 본문의 첫 페이지, 첫 문단 정도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들뢰즈 전문가'의 의견인지라 그의 '음미'를 참조하면서 지젝의 첫 문단을 읽어보고자 한다. 최근에 나온 국역본 <신체 없는 기관>(도서출판b, 2006)에서 이 문단은 이렇게 옮겨져 있다.

 

 

 

 

"한 철학자에 대한 참된 사랑의 척도는 우리의 일상생활 도처에서 그의 개념들의 흔적을 알아보는 데 있다 최근에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이반 대제>를 다시 보면서 나는 제1부 도입부의 대관식 장면에 있는 멋진 디테일을 발견했다. 이반과 (당분간은) 제일 절친한 사이인 두 친구가 새로 기름을 부은 그의 머리 위로 커다란 접시들에 담긴 금화를 쏟아붓는다. 이때 관객들은 이 말 그대로의 금화 세례가 지닌 마술처럼 과도한 특성 때문에 놀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접시 두 개가 거의 비어 있는 것을 본 이후임에도 우리는 다음 장면에서 이반의 머리에 금화가 계속해서 '비현실적으로' 중단 없는 흐름으로 쏟아지는 것을 본다. 이러한 과잉은 몹시 '들뢰즈적'이지 않은가? 그것은 물체적 원인을 넘어서는 생성의 순수 흐름의 과잉, 현행적인 것(the actual)을 넘어서는 잠재적인 것의 과잉이지 않은가?"(17쪽)

'음미'의 내용을 보다 명확하게 확정하기 위해서 원문 또한 옮겨놓는다: "The measure of the true love for a philosopher is that one recognizes traces of his concept all around in one's daily experience. Recently, while watching again Sergei Eisenstein's Ivan the Terrible, I noticed a wonderful detail in the coronation scene at the begining of the first part: when the two (for the time being) closest friends of Ivan pour golden coins from the large plates onto his newly anointed head, this veritable rain of gold cannot but surprise the spector by its magically excessivecharacter - eveb after we see the two plates almost empty, we cut to Ivan's head on which golden coins 'nonrealistically' continue to pour in a continuing flow. Is this excess not very 'Deleuzian'? Is it not the excess of the pure flow of becoming over its corporeal cause, of the virtual over the actual?"(3쪽)

여기서 지젝이 묘사하고 있는 영화 <이반 대제>(1944)의 장면은 아래의 장면이다. 이반에게 금화를 퍼붓는 두 친구는 나중에 그를 배신하기 때문에 '당분간은'이란 말이 들어가 있다. 참고로, 이 장면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롤랑 바르트의 '제3의 의미'(<이미지와 글쓰기>, 세계사, 1993)에서 이루어지고 있다(영역은 'Image-Music-Text'[1977]에 수록돼 있다). 영화기호학에 관한 필수적인 텍스트인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다룰 수 있을 것이다.

아무려나 일단은 이러한 영화 속 한 장면에서도 '잠재적인 것의 철학자(the philosopher of the Virtual)' 들뢰즈의 잠재적인 것/현행적인 것이라는 개념쌍을 알아보는 데 들뢰즈에 대한 지젝의 '참된 사랑'이 놓여 있다. 참고로, 에이젠슈테인(1898-1948)의 <이반 대제>는 3부작으로 기획되었지만, 2부까지밖에 완성되지 못했고 '전제주의의 일시적 진보성'을 다룬 1부와는 달리 노골적인 스탈린(=폭군 이반) 비판을 담은 2부(1946)는 상영이 금지되었으며(에이젠슈테인은 화병으로 일찍 죽는다) 그의 사후에야 상영될 수 있었다. 물론 스탈린(1879-1953)도 사망한 이후인 1958년의 일이다. 아래는 <이반 대제>의 포스터(이반 대제 역은 스탈린의 영화적 페르소나라고 할 만한 '니콜라이 체르카소프'가 맡아서 연기했다).

러시아사에서 흔히 '이반 뇌제'라고 불리는 이반 4세(1530-1584)는 전횡적 권력을 휘둘렀던 러시아 황제(차르)들 가운데에서도 폭군으로 유명하다(그 '악명'에 있어서 우리의 '연산군'에 비견될 만하다. 물론 연산군은 내면적으로 굉장히 유약했지만). '뇌제(雷帝)'라는 이름은 그래서 얻게 된 것이며, 이것을 영어로는 'Ivan the terrible'이라고 옮긴다. 세계사의 폭군들을 다룬 책 <권력과 광기>(말글빛냄, 2005)나 <폭군들>(이마고, 2005)에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할 정도. 그래서 영화의 국내 출시명이 <폭군 이반>으로 돼 있으며 이전에 EBS에서는 <이반 대제>란 타이틀로 방영한 적이 있다.

 


 

 

바실리 3세의 아들이었던 이반은 1547년 그러니까 그의 나이 17살에 스스로 즉위하면서 자신을 (러시아사에서) 최초로 '차르'라고 부른다('차르'는 로마의 황제 '케사르'로부터 차용한 단어이다). <이반 대제>의 첫머리에서 묘사되고 있는 것도 1547년 왕관을 자신이 직접 머리에 쓰는 젊은 황제의 대관식 장면이며, 금화 세례를 받는 것은 그러한 의식에 이어지는 장면이다. 국역에서 "새로 기름을 부은 그의 머리"(his newly anointed head)라고 직역된 대목은 "새로이 황제의 자리에 오른 그의 머리" 정도의 뜻이다.

이반 대제는 이후에 40년간 모스크바 공국 시대의 러시아를 통치하게 되는데, 생애 말기 그의 최대 비극은 자신의 아들을 왕홀로 쳐죽인 사건이다. 러시아 최대 화가 일리야 레핀의 그림 '1581년 11월16일 금요일의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이반'(1885)가 묘사하고 있는 장면(흔히는 '아들을 죽인 이반'이라고 줄여서 부른다. 모스크바의 트레챠코프 미술관 소장). 이 그림의 초점을 잃은 늙은 황제의 모습에서 더이상의 광기는 읽히지 않는다. 이반 뇌제는 이후에 몇 해 지나지 않아 세상을 뜨게 되는데, 독살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대략 이 정도의 배경지식을 갖고서 다시 텍스트로 돌아가본다. 인용한 첫문단에 대한 이정우 교수의 요약은 이렇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광폭한 이반(Ivan the Terrible)>의 초반부에서 지젝은 매우 '들뢰즈적인' 장면을 포착해낸다. 대관식에서 이반의 친구들이 그의 머리에 금화들을 쏟아 붇는 장면이다. 금화가 거의 다 떨어졌는데도 영화는 금화의 흐름=와류를 계속 보여준다. 이 장면을 지젝은 'nonrealistically'라는 부사로 표현한다. 이 표현은 우리가 흔히 어떤 영화를 보고서 “리얼하다”라고 말하는 방식을 염두에 둔 표현일 것이다. 즉 <광폭한 이반>의 이 장면은 '리얼하지 않은' 장면인 것이다. 지젝에 따르면, 바로 이 점에서 이 장면은 '들뢰즈적'이다. 왜 들뢰즈적인가? 이 장면이 '생성의 순수 흐름이 물체적 원인을 초과하고(excess) 있기 때문'이다. 즉 '잠재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the actual)을 초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역본의 '현행적인 것(the actual)'은 이처럼 '현실적인 것'이라고 옮기는 게 이해하기 쉽다. 다르게 말하면, '사실적인 것', 혹은 '사실임직함'이다. 마치 무한정인 양 쏟아지는 금화의 흐름(=생성의 순수 흐름)은 분명 '물체적 원인' 혹은 '물질적 인과율'을 넘어선다. 바닥이 거의 다 드러난 접시로부터 끊임없이 금화가 쏟아진다는 것은 자연적 인과율로 설명되지 않는, 즉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까 이 장면에서 에이젠슈테인은 '현실적인 것'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잠재적인 것'의 과잉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 계속적인 설명을 들어본다.

"사람들이 어떤 영화를 보고서 '리얼하다'고 할 때 그 'real'은 사실상 'actual'이다. 즉 ‘실재’를 뜻하기보다 ‘현실’을 뜻한다. 이것은 영화란 비현실적인 것이라는 전제 아래에 어떤 장면이 우리의 경험에 합치해서 매우 현실적으로 표현되고 있음을 뜻한다. 지젝도 이 점에 주의해서 'nonrealistically'라는 구절에 따옴표를 치고 있고, 그 후 현실적인 것을 뜻할 때에는 'the actual'로 쓰고 있다. 그렇다면 이 장면은 현실적이지 않은 어떤 것을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상상적인 것을 표현하고 있는가? 금화가 거의 다 떨어졌는데 여전히 폭포수 같은 금화의 흐름이 보인다면 그것은 하나의 환각적인 것, 상상적인 것에 불과한가? 지젝은 그렇지 않음을, 즉 그것은 상상적인 것이 아니라 들뢰즈적 의미에서의 잠재적인 것임을 지적한다. 그렇다면 들뢰즈에게서 잠재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은 어떻게 다른가? 그리고 어떤 점에서 <광폭한 이반>의 이 장면은 들뢰즈적인가?"

참고로, <이반 대제>에서 그러한 잠재적인 것의 과잉을 보여주는 형상은 아래와 같은 이반의 거대한/과장된 그림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그로테스크한) 그림자들 또한 '현실적인 것'을 초과하는 '잠재적인 것'의 순수한 과잉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그러니까 이러한 '과잉'의 영상화는 에이젠슈테인에게서 전략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정우 교수의 설명: "들뢰즈에게서 잠재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은 아니지만 엄연히 실재적인 것이다. 즉 그것은 우리의 경험에 드러나는 현실적인(actual) 것이 아님에도 분명 '실재하는(real)' 것이다. 이 점에서 들뢰즈의 사유 틀은 근대적이기보다는 차라리 고대적이다. 경험을 넘어서는 것을 인간 주체에게서 찾기보다는 경험 너머의 실재에게서 찾고 있기에 말이다. 들뢰즈는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존재론자이며, 칸트처럼 주체의 의식의 틀을 탐구하기보다는 차라리 그가 ‘물자체’로 남겨둔 그 자리에 ‘잠재적인 것’을 놓고 있다 하겠다. 즉 들뢰즈는 인간 주체가 어떻게 그에게 나타난 현상들을 구성하는가를 탐구한 것이 아니라 실재적인 것이 어떻게 현실적인 것으로서 나타나는가를 탐구한 것이다."(강조는 나의 것)

이에 대한 지젝의 설명: "들뢰즈에게 중요한 것은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이 아니라 잠재적인 것의 실재성(The reality of the virtual, 곧 라캉의 용어로는 '실재the Real')이다. 가상현실 그 자체는 다소 초라한 곤념이다. 현실을 모방한다는, 인공적 매체 속에서 현실의 재생한다는 관념. 반면 잠재적인 것의 실재성은 잠재적인 것 그 자체의 실재성을, 그것의 실재적 효과와 결과들을 나타낸다."(17쪽) 

다시 이정우 교수: "들뢰즈에게 가능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은 구분된다. 잠재적인 것은 실재이다. 그러나 가능적인 것은 인간 주관이 그의 경험 결과를 자의적으로 재구성한 것에 불과하다. 즉 사물의 지각을 통해서 형성된 심상(=이미지)을 머리 속에서 이리저리 굴려 상상(=이메지-네이션)하는 것이다. 즉 들뢰즈에게 ‘가능적인 것’은 곧 ‘상상적인 것’이다. 들뢰즈에게서 세계의 실재로서의 잠재적인 것과 인간 주관의 산물로서의 가능적인=상상적인 것은 분명히 구분된다. 따라서 가상현실을 뜻하는 ‘virtual reality’에서의 ‘virtual’은 들뢰즈적 잠재성이 아니라 차라리 가능성=상상적인 것에 해당한다. 들뢰즈 사유의 핵심은 잠재적인 것에 있지 상상적인 것=가능적인 것에 있지 않다."

여기까지는 두 사람 사이에 의견차이가 없는 듯하다. 차이는 <이반 대제>에 나오는 문제의 장면이 과연 '들뢰즈적인' 장면인가 하는 것: "이렇게 볼 때 지젝이 들었던 장면은 과연 '들뢰즈적인' 장면인가? 이 장면은 '리얼하지 않은' 장면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꼭 '들뢰즈적인' 장면인 것은 아니다. 일견 이 장면은 잠재적인 장면이라기보다는 상상적인 장면이기에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장면은 이반의 심리이든, 대관식 참여자들의 심리이든, 감독의 심리이든, 관객의 심리이든, 일단 어떤 심리가 투영된, 즉 상상적인 장면으로 생각될 것 같다. 두 가지 가설이 가능하다. 첫째, 지젝은 이 영화를 다른 방식으로 읽고 있다. 둘째, 지젝은 들뢰즈의 잠재성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첫 번째 가설의 경우, 이 영화가 표현하고 있는 장면을 단순히 상상적인 것으로 보기보다 더 근본적인 어떤 것, 즉 현실을 넘어서는 잠재적인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꼭 옳다고 할 수는 없다 해도 하나의 의미 있는 독해일 수 있다. 즉 에이젠슈타인이 여기에서 자신의 상상을 투영한 것이 아니라 피상적인 현실 이상의, 그 아래에 깔려 있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 어떤 것을 순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어쨌든 이 독해 자체는 심각한 문제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두 번째 가설을 보자. 지젝이 이 장면을 '들뢰즈적인' 장면으로 보는 것은 여기에서 '생성의 순수 흐름이 물체적 원인을 초과하고(excess) 있기 때문'이다. 즉 지젝은 물체적 원인을 ‘현실적인 것’으로, ‘생성의 순수 흐름’을 잠재적인 것으로 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규정은 매우 거친 규정이다. 들뢰즈에게서 ‘물체적 원인’은 오히려 잠재성의 차원에 위치한다. 현실적인 것은 물체적 원인의 결과들로서의 현상들, 사건들, 이미지들이다. 여기에서 들뢰즈의 ‘물체’ 개념은, 물체와 물질이 분명하게 구분되는 상식적-물리학적 사유에서와는 달리, 물질/물체의 구분 이전의 스토아 학파의 ‘소마’이고 스피노자의 ‘사물’이다. 지젝은 이 점을 간과하고 있다." 요컨대, 필자에 따르면 '물체적 원인'은 '잠재성의 차원'에 위치하기 때문에 지젝이 이 둘을 대비시키고 있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  

"따라서 ‘생성의 순수 흐름’과 ‘물체적 원인’은 대조되는 개념들이 아니다. 들뢰즈에게서는 생성의 순수 흐름은 곧 물질=실체의 흐름이고 그것이 곧 물체적 원인의 차원이다. 그리고 그 표면효과들, 결과들이 사건들, 현상들, 이미지들이다. 아울러 들뢰즈의 잠재성을 ‘생성의 순수 흐름’으로 보든 ‘물체적 원인’으로 보든 이런 식의 표현은 매우 일반론적이고 성긴 표현들이라는 점도 지적해 두자."

내가 보기에 문제로 걸려 있는 것은 잠재적인 것의 해석이 아니라 는 '물체적 원인(corporeal cause)'의 해석인 듯하다. 지젝은 '물체적 원인'을 '현실적인 것'에 위치시키는 반면에 이정우 교수는 '잠재적인 것'의 차원에 위치시키고 있는 것. 그렇다면, 그에게서 '현실적인 것(=상징적인 것)'의 자리는 어디인가?

"지젝은 상상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에 관한 들뢰즈의 구분을 정확히 지적해 주면서도, 잠재적인 것의 이해에는 난점을 드러내고 있다. 왜일까? 그것은 지젝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상상적인 것이며(지젝 스스로는 그것을 ‘실재적인 것’이라고 하겠지만), 때문에 들뢰즈를 독해하면서 그가 자꾸만 잠재적인 것에 상상적인 것을 투영하기 때문이다. 지젝의 들뢰즈 독해는 매우 흥미진진하면서도 철학적으로 정확하지는 않다."

그러니까 지젝이 가장 강조해마지 않는 실재, 혹은 실재적인 것(the Real)이라는 게 필자가 보기엔 (실제적으론) '상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며, 둘을 혼동하고 있다는 것이 되겠다(지젝이 맨날 보로메오 매듭처럼 얽혀있는 RSI의 3항조를 얘기하지만, 실제로 그가 떠들어대는 것은 SI 2항조뿐이다?). 그래서 정작 실재적인 것(=잠재적인 것)에다 상상적인 것을 투영한다는 것('자꾸만'의 근거는 무엇인지?). 이러한 지젝 독해는 다소간 흥미롭지만 얼마나 정확한지는 의문이다('지젝, 너 또라이지?'라는 거 아닌가?).

다만, 내가 잠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필자에게서 들뢰즈에 대한 '이해'는 넘쳐나지만 '참된 사랑(true love)'은 부족하지 않은가, 라는 것. 그가 '자꾸만' 찾아내는 것은 '꼭 들뢰즈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대부분의 들뢰지안들이 염려하는 것은 들뢰즈적인 것의 '과잉'인 듯싶다. 그들에게 들뢰즈는 함부로 손댈 수 없는 것, 언터쳐블(the untouchable)이다. '니들이 들뢰즈를 알아?'라는 물음은 라캉주의적 '케보이Che Vuoi?'(도대체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대응물이자 차폐막이 아닐까? 그런데, 넘쳐나는 건 왜 들뢰즈가 아니라 들뢰지안들일까?.. 

06. 07. 01.

P.S. 이제껏 읽은 건 지젝의 첫 문단이다. 짐작에 '지젝의 들뢰즈론(1)'의 필자 또한 그 글이 씌어진 시점에서는 더 읽었을 성싶지 않다. 이후에 지젝은 보다 많은 걸 말하고 있으며 따라서 지젝에 대한 여하한 비판 역시 보다 많은 뒷받침을 통해 예증되어야 할 것이다. 철학은 '일견'에 의한 예단은 아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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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스 2007-01-06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내 최고 수준(?)의 들뢰즈 전문가의 지젝 비판 치고는 너무 소략하고 좀 심하게 말하면 '치졸'하군요. 작은 얘기를 꺼낸 게 잘못이라는 뜻이 아니라, 작은 얘기로부터 시작해서 더 근본적인 비판, 이를테면 지젝-라캉(-헤겔) 계보의 근본적인 맹점 같은 것을 지적하는 데까지 이르러야 마땅하지 않은가 싶습니다. 이 정도에서 맺을 얘기였으면 아예 시작하질 말던가...

로쟈 2007-01-06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 투어'를 시작하셨나 봅니다.^^ 제 생각도 보다 '본격적인 비판'이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 입니다. 철학을 화두로 대신할 수는 없는 거니까요...
 

지젝의 <신체 없는 기관>(도서출판b, 2006)에 관한 '본격적인' 언론 리뷰는 의외로 늦춰지고 있는데, 서울신문에 도서출판b의 기획위원이자 역자이기도 한 이성민씨와의 인터뷰가 게재되었길래 옮겨온다(인터뷰어는 조태성 기자). 지젝의 들뢰즈론 입구에 있는 독자들에겐 참고가 될 만하다. 기사의 검색 타이틀에 오타가 있는 듯하여 그냥 '지젝과 들뢰즈'를 페이퍼의 제목으로 삼는다.  

서울신문(06. 06. 29) “손쉬운 정치적 번역이 아니라 들뢰즈 본연의 철학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홍윤기 동국대 교수가 노마디즘을 비판(서울신문 6월1일자 보도)한 뒤, 들뢰즈의 ‘정체’에 대한 의문은 커지고 있다.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대표와의 논쟁을 통해 홍 교수는 들뢰즈를 ‘마르크스·엥겔스의 후계자’로 규정한 뒤 그럼에도 ‘탈 영토화’로 상징되는 들뢰즈의 변혁전략이 현실적으로 효과가 없다고 주장했다. 멋들어진 아나키즘 이상의 의미는 없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들뢰즈는 이제 폐기돼야 하는가. 이때 <신체없는 기관>이 번역·출간된 것은 적절한 시점으로 보인다.

 

 

 



-저자는 영화판에서부터 소문이 퍼지기 시작해 상당한 마니아를 거느리고 있는 동유럽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 그는 들뢰즈 사상의 핵심은 초기의 단독 저술에 담겨 있다면서, 가타리와 함께 쓴 후기 저술(<앙티-외디푸스>, <천개의 고원>)이나 미국식 정치적 번역이 담긴 <제국>(네그리·하트)을 통해 알려진 들뢰즈의 모습은 잘못됐다고 주장한다. 아예 가장 대척점에서 서 있는 헤겔에 가장 가까이 다가선 철학자가 들뢰즈라고 규정한다. 번역을 맡은 이성민 도서출판b 기획위원에게 이번 책의 의미에 대해 들었다.

▶최근 노마디즘 논쟁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들뢰즈 본연의 철학과 그 정치적 번역은 다르다.‘유목주의’나 ‘자율주의(아우토노미아)’는 본연의 철학과는 거리가 있다. 홍윤기·이정우 논쟁에서 주목해볼 점은 이정우 대표가 시중의 해석 대신 들뢰즈 본연의 철학으로 되돌아간다는 점이다. 지젝도 후기 들뢰즈적 경향을 ‘손쉬운 정치적 번역’이라 폄하한다.

지젝도 들뢰즈적 실천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 아닌가.
-지젝도 평가하듯 들뢰즈는 스피노자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냈다. 그러나 이 해석은 중립적이다. 예컨대 지젝은 “‘제국’에서 다수성(다중·multitude)은 저항의 힘이지만, 스피노자에게는 근본적으로 애매하다.”고 말한다. 저항도 야만적 폭력일 수 있다. 그래서 유목주의자 혹은 자율주의자는 좀 더 ‘따분한’ 이론적 작업을 해야 한다. 동시에 ‘구좌파’,‘독단주의자’,‘원칙주의자’가 들뢰즈를 받아들였으면 한다. 인간 주체가 여전히 집단적으로 역사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들뢰즈와 진정으로 만났을 때, 변화를 위한 작은 공간이 열릴 것이다.

결국 들뢰즈가 헤겔을 부활시켰다는 것인데, 이게 들뢰즈의 의도인가.
-궁극적으로 들뢰즈를 ‘다르게’ 읽는다면, 헤겔을 부활시킬 수 있다. 지젝은 헤겔이, 들뢰즈가 견디기에는 너무 가깝다고 한다. 그는 둘이 가장 가까운 지점에서 들뢰즈를 다시 읽는다. 물론 여기에는 헤겔을 재해석하는 지젝의 작업이 깔려 있다. 조만간 지젝의 동료 돌라르가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해설서를 낸다는 소식이다. 하지만 이번 책에서 이미 우리는 ‘새로운’ 헤겔을 만날 수 있다.

그렇다면 들뢰즈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내가 느끼기에 지젝은 동유럽 지식인임에도 ‘유럽주의자’다. 지젝은 유럽을 사랑하고 유럽의 가치를 높이려 한다.‘낡은 유럽’이 스스로의 가치를 다시 만들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들뢰즈를 받아들일 때 한국적 현실을 고민하는 것은 패배적인 관점이다. 들뢰즈의 보편성을 껴안아야 한다.‘손쉬운 정치적 번역’ 대신 ‘본연의 철학’을 강조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가장 근본적으로, 가장 과감하게 끌어안아야 한다.

(*)아래는 인터뷰 전문이라고 한다. 역시나 전문이 요약보다는 더 흥미로우며 계발적이다.

최근 들뢰즈의 노마디즘 개념에 대한 혼돈이 많습니다. 대개 철학하시는 분들은 어떤 추상적인 관념으로 이해하시는 반면,다른 분야에 계신 분들은 실제적인 측면에 주목하는 듯 합니다.즉 무조건 대규모의 이동이 일어나야 노마디즘 현상으로 파악한다는 겁니다.단적인 예가 최근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천규석의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겠지요.천규석의 문제의식만이 아닌 것이 노마디즘 관련된 토론장에 들렀더니 모든 분들이 천규석의 문제의식과 비슷한 질문을 던졌습니다.대체,철학적인 개념을 넘어섰을 때 유목주의가 어떤 방식으로 해석되고 이해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종종 한 철학자의 위대함은,진정으로 새로운 개념을 우리에게 선물한 사실에 있습니다.그 점에서 들뢰즈는 위대한 철학자입니다.들뢰즈와 관련해서 우리는 두 가지를 가지고 있습니다.하나는 들뢰즈 본연의 철학입니다.그리고 다른 하나는 들뢰즈 철학의 정치적 번역들입니다.제 생각에,“유목주의”나 “자율주의” 등은 후자에 속하는 것입니다.

-들뢰즈는 자신의 철학이 정치적으로 번역되는 데 스스로 협조한 적이 없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가타리와 협력한 들뢰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하지만 우리가 그곳에서, 즉 <안티-오이디푸스>나 <천개의 고원>에서 보는 것은 들뢰즈 철학 본연과는,들뢰즈의 독창적인 철학적 성취와는 거리가 있습니다.그것들은 그러한 성취가 정치적으로 번역될 수 있는 한 가지 길을 가리킵니다.그것도 매우 손쉬운 길을 말입니다.

-유목주의와 관련된 최근의 논쟁에서 이정우 씨는 분명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을 들뢰즈 본연의 철학적 관점으로,예컨대 <의미의 논리>의 들뢰즈의 관점으로 환원시켜 해석하려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시도를 통해 이정우 씨가, 비록 들뢰즈 철학의 또 다른 정치적 번역을 적극적으로 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러한 길을 열기 위한 작은 이론적 틈새를 열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틈새가 보일 수도 있는 곳에서 그의 말을 경청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가 천규석 씨를 정념적으로 비판하는 곳에서 그의 말을 경청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최근에 유행하는 들뢰즈적 개념들의 해석적 경향성을 비판하면서, 그것을 본연의 철학적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하는 지점에서 그의 말을 경청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천규석 씨와 이정우 씨가 둘다 “승리”할 수 있는 길이 없지 않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들뢰즈 본연의 철학과 들뢰즈와 가타리의 협력적 작업 사이에는 어떤 간극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안티-오이디푸스>나 <천개의 고원>이 최근에 한국에서 쟁점이 된 “유목주의”나 아니면 네그리-하트 식의 “다중”과 관련해 내용적으로 전혀 무관할 수 있는 책은 아닙니다. 지젝은 이와 같은 후기의 들뢰즈적 경향을 비판합니다.그것을 손쉬운 정치적 번역이라고 폄하하면서 말입니다. 저는 그의 말에 동의합니다.

이에 대해 홍윤기는 들뢰즈는 영락없이 맑스와 엥겔스의 후계자이지만, 그 문제의식은 높게 평가해도 구체적인 실천의 효과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지젝이 하고 있는 작업이 홍윤기의 주장과 비슷해 보이는데,그렇게 이해해도 될까요. 차이가 있다면 어디서 차이가 날까요.

-들뢰즈 사상의 핵심적 측면은 전통적 맑스주의자들이 놓치고 있는 부분을 볼 수 있게 해줍니다. 그는 스피노자의 사상을 현대적인 것으로 재해석해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오늘날의 사회를 분석하려고 하는 사람이 무엇을 먼저 고려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지젝은 들뢰즈의 그러한 공헌을 인정하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존재의 일의성이나 정서적 강도 같은 개념들은 그 자체로 매우 강력한 개념들입니다. 지젝은 우리가 오늘날 일상생활에서조차 그러한 개념들을 매번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현실은 추상적 개념과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반지성적 분위기에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이러한 개념들이 그 자체로 좋은 것이거나 나쁜 것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지젝의 말처럼 그것들은 그 자체로 “중립적인” 것입니다. 예컨대 지젝은 <신체 없는 기관> 76쪽에서 “‘제국’에서 다수성(다중)은 저항의 힘으로 찬양되는 반면, 스피노자에게서 군중으로서의 다수성 개념은 근본적으로 애매하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적실한 통찰들입니다. 다수성이랑 권력에 대한 저항인 동시에 야만적이고 비합리적인 폭력의 폭발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대중들의 이와 같은 “유목적” 특성을 곧바로 정치적으로 긍정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겠지만, 우선은 그 지점에서 멈추어서,좀더 고민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유목주의자들이나 자율주의자들은 제 생각에 바로 그렇게 사색을 위해서, “따분하고” 순수한 이론적 작업을 좀더 밀고 나아가기 위해서, 사유의 근본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잠시 멈추어 설 필요가 있습니다.

-들뢰즈의 성취는 우선은 “철학적으로” 흡수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날 아쉬워해야 하는 것은 들뢰즈 사상의 정치적 해석이 다양한 논쟁들과 더불어 풍요로운 가운데, 들뢰즈 본연의 철학적 측면이, 다시 말해서 “현대성 그 자체”에 대한 논의가 심도 있게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들뢰즈는 현대의 바로 그 철학자입니다. 따라서 저는 맑스주의자들에게 또 한 번의 기회가 남아 있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서 저는 구좌파적 문제의식을 놓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이제라도 들뢰즈를 이론적으로 읽기 시작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들은 오늘날도 역시 간단한 세미나나 포럼을 마치고 그 유명한 뒤풀이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들은 공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들뢰즈는 피해갈 수도, 간단히 정치적으로 번역할 수도 없습니다. 저는 저 유명한 “포스트모던적” 주체들이 들뢰즈를 받아들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저는 여전히 구좌파적인 사람들이,“독단주의자들”이,“원칙주의자들”이 들뢰즈를 받아들이기 바랍니다. 사회의 거시적 변화를 아직도 믿고 있는 사람들이 들뢰즈와 진정으로 조우할 때, 인간 주체가 여전히 집단적으로 역사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들뢰즈와 진정으로 조우할 때, 그때 진정한 변화를 위한 작은 공간이 열릴 것입니다.

그렇다면 들뢰즈는 헤겔의 부활을 꿈꾸는 또 다른 헤겔의 얼굴에 지나지 않는다고 봐야 합니까.들뢰즈가 궁극적으로 의도한 것은 헤겔을 죽이겠다는데 있는게 아니라 철저하게 죽이는 액션을 취함으로써 헤겔을 부활시키는 것이었습니까.그렇다면 진정한 의도였을까요 아니면 고려하지 못한 역풍이라고 봐야 할까요.



-흥미로운 물음입니다. 들뢰즈가 결국 그러한 일을 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군요. 헤겔을 부활시킨 것이 지젝이 아니라 들뢰즈일지도 모른다는 물음은 우리로 하여금 시간의 변증법을 성찰하게 만드는군요. 시간의 경과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어떤 “운명”이나 어떤 “필연성” 같은 것을 말입니다. 저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우리가 궁극적으로 들뢰즈를 “다르게” 읽는 데 성공한다면, 그로써 헤겔을 부활시킬 수 있다고 말입니다. 지젝의 말처럼 헤겔은 들뢰즈가 견디기에는 들뢰즈에게 너무 가까운 철학자였습니다. 지젝은 바로 그 지점에서, 그 둘이 가장 가까운, 혹은 거의 차이가 없어지는 지점에서, 들뢰즈를 다시 읽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지젝의 독자적인 공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들뢰즈가 헤겔을 부활시키기 전에 헤겔 그 자신이 재해석되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지젝의 몫이었습니다. 라캉도 그것을 해내지는 못했지요.오늘날 라캉주의가 철학과 그 자체를 장악하고 있는 유일한 대학인 류블랴나 대학에서 그들은 그것을 해내고 있습니다. 조만간 지젝의 동료 돌라르가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해설한 책을 낸다는 소식이 들립니다(*슬로베니아어로는 이미 출간된 걸로 안다). 하지만 이미 이루어진 지젝의 작업을 통해서도 우리는 “새로운” 헤겔을 맛볼 수 있습니다(*아래는 류블랴나 대학).



감히 추론입니다만은, 들뢰즈를 이런 방식으로 읽는 것은 지젝이 동유럽 지식인이라는 점도 작용하고 있는 걸까요. 하트가 들뢰즈를 미국식으로 독해해버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지젝이 시사하는 가장 중요한 점은 서구 선진국의 잣대를 함부로 끌어들이지 않는다는 점이 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런 측면,즉 맥락의 차이를 간과해버린 것이 한국에서의 들뢰즈 열풍이 놓치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저는 “인상”만을 가지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 경우는 그래야 하겠군요. 그러니 제 말이 그 이상으로 읽히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제 인상이 “독서”에서 나온 것이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제가 받은 인상으로,지젝은 “유럽주의자”입니다. 오늘날 진정한 유럽주의자가 서유럽이 아닌 동유럽에서 나오고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현상입니다. 하지만 여하간 지젝은 유럽의 유산을, 유럽의 문명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정신분석도 유럽에서 탄생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보다 유구한 역사를 가진 철학을, 라캉과는 달리, 비판하지 않고 궁극적으로 껴안는 것은 그가 유럽주의자이기 때문입니다.

-조 기자 님의 말씀처럼, 그는 “서구 선진국의 잣대”를 함부로 끌어들이지 않습니다. 그 대신 그가 하는 일은 역으로 바로 그것의 가치를 높이는 일입니다. 그는 “낡은 유럽”이 스스로의 가치를 바로 그 유럽적 방식으로 재창안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민주주의를 창안했듯이 말입니다. 그는 지성적 영역에서 스스로 그 과제를 떠맡고 있습니다.

-들뢰즈를 우리가 수용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하면 그것을 한국적 현실에 적용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패배적인 관점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들뢰즈 사상의 가장 보편적인 측면을 껴안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제가 들뢰즈 사상의 “철학적” 논의를 강조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좀 역설적이게 들리겠지만, 서구 선진국의 잣대를 함부로 끌어들이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가장 근본적으로, 가장 과감하게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적용”이라는 모호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지젝은 들뢰즈를 해석하는데 있어 알랭 바디우를 지속적으로 인용하고 있는데, 지젝이 알랭 바디우에서 벗어나는 지점은 어디 입니까.아 니면 전적으로 바디우적 해석 위에 서 있다고 봐야 합니까.

-바디우는 라캉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몇 안 되는 철학자 가운데 한 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디우와 지젝 사이에 공통점이 생기는 것이지요.하지만 지젝의 해석은 바디우에 토대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라캉과 헤겔에 토대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지젝과 바디우의 차이에 대해서는 제가 아직 답변을 드리기 곤란합니다. 저는 바디우의 철학의 핵심을 관통하고 있지 못합니다. 그리고 관통하고 있지 못한 그 무엇에 대해,이 경우라면 입을 다물고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라도 어떤 인상에 근거해서 말하자면, 바디우는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진지한 철학자인 반면, 지젝은 진지하지 않은 것에서도 내기를 걸 줄 압니다(*아래 사진은 지젝과 바디우).



도서출판b와 자신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주신다면.

-저는 현재 도서출판b에서 기획일을 하고 있습니다. 공식적인 직함은 “기획위원”입니다. 제 관심사는 한국에서 진정한 지적인 전통이 “부활”하는 것에 일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는 이와 관련하여 지적인 담론의 장을 심화시키기 위해 번역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가끔씩 기고를 하거나 강의를 하거나 하지만 말입니다.

-저는 대학(서울대 영어교육과)에서 언어학에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촘스키의 언어학이 유행이었지요.덕분에 저는 언어학과 분석철학에 입문하게 되었고, 당시의 맑스주의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습니다.하지만 졸업을 하면서 맑스주의와 유럽의 철학에 몰두하게 되었지요. 분석철학의 장점은 그것에 매료된 사람으로 하여금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을 동시에 깨닫게 해주는 데 있습니다. 제가 마이클 하트의 들뢰즈에 대한 책을 번역하게 된 것은 그 무렵이었습니다. 저는 일정정도 자율주의자인 조정환 씨와 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저는 라캉에게 귀착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서울대 미학과 대학원을 진학하면서,라캉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궁극적인 학문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앞서 말한 지적인 전통의 부활을 위해 가장 시급한 일 가운데 하나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에 있다기보다는 선생들을 길러내는 데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라캉이 말하는 “주인담론”의 시대에, 혹은 권위주의의 시대에, 권위자들은 선생을, 즉 가르칠 사람을 키우는 데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더욱 혹독한 도제 시절을 겪게 했지요. 오늘날 이러한 연결고리는 무너졌습니다. 저는 이러한 연결고리를 다시 소생시키는 일이라면 바로 그곳에 기여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생산”이 아닌 “재생산”을 강조해야 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생산은 생산물을 만들어냅니다. 잘 교육받은 교양 있는 학생들을 말입니다. 하지만 재생산은 선생이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유능한 선생들입니다(*역자가 사범대학 출신이란 걸 다시금 상기하게 된다).

저는 제가 번역한 책들이 앞으로 선생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읽히기를 원합니다. 저는 제가 번역한 책들이 대철학자를 꿈꾸면서 언제까지나 학생으로 남아 있을 운명인 사람들에게 읽히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얼마전 도서출판b는 출판사를 확장했습니다. 그래서 작은 세미나 공간이 생겼지요. 그곳은 신림동 혹은 난곡에 위치하고 있는데, 저는 그곳을 “난곡연구소”라고 부르는 것을 선호합니다. 저는 거기서 학생들을 데리고 세미나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거기서 선생들을 키우는 작업에 헌신할 생각입니다. 라캉주의의 교조적인 모습이 저를 매혹시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오래된 진리를 새롭게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06. 07.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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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07-01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퍼갑니다. 국문학 전공자들이 너무 빨리 지젝, 들뢰즈를 해석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하고, 조금 더 근원적으로 읽기 위해서 다시 헤겔을 읽는 모험을 행하려고 하는 중입니다. 그러다가 헤겔을 빠져나가지 못할 수도 있지만, 뭐.. 아직 젊으니 길게 보고 헤겔을 읽으려는 중입니다. ㅎㅎ :)

로쟈 2006-07-01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년은 늙기 쉽습니다.^^

yoonta 2006-07-02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들뢰즈 철학의 "손쉬운 정치적 번역"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그것이 들뢰즈 본연의 철학과는 어떻게 다른지...들뢰즈를 통한 헤겔의 부활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인 설명은 없는 질문과 답변들이네요. 아무래도 책을 읽어봐야 실체를 확인할수있을 듯.

로쟈 2006-07-02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속히 읽어봐주시길...

palefire 2006-07-02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골수 들뢰즈주의자들은 물론 들뢰즈 철학의 '손쉬운 정치적 번역'으로 거명된 '제국론자'(네그리-하트, 특히 마이클 하트)들을 건드리고 있는 듯합니다. (하트가 번역한 자율주의는 오죽하면 포스트콜로니얼리즘 쪽에서도 저항적 주체의 구체성과 적대의 문제에 둔감하다는 이유로 공격당하곤 하니까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국내로 보자면 모 연구실과 모 네트워크쪽이 이에 대해 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재 노마디즘 논쟁 등이나 과거 '들뢰즈'를 중심으로 선회했던 담론들의 양상에서 볼 때 이 두 진영이 되돌려줄 유일한 반응이라곤 '냉소'일 것 같습니다. (저는 작금의 노마디즘 논란은 개념적인 해석의 정확성보다는 들뢰즈를 표방하면서 등장하는 '타자들'에 대한 냉소로 전락하고 있다고 봅니다) 라캉과 들뢰즈 사이의 협상 속에서 그럴듯한 철학적 체계를 세우는 건 현대철학과 미학, 정치학의 가장 매혹적인 기획일 듯하지만 적어도 국내의 - 하긴 영미권에서도 그랬다고 하는데 - 들뢰즈주의자 연하는 사람들에게는 요원한 이야기겠죠. 다른 건 몰라도 슬로베니아학파가 이 점에서 한 가지 옳다면, 그들은 냉소주의를 비판하고 '행위로의 이행'을 중시한다는 거겠죠~

yoonta 2006-07-02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alefire님 님 댓글보고 질문드려봅니다. 님이 말씀하시는 들뢰즈주의자들의 "냉소주의"는 이정우나 이진경씨처럼 들뢰즈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떠들어라라는 태도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다면 슬로베니아학파는 그런 냉소주의를 비판하고 "행위로의 이행"을 한다는 건데 이 "행위로의 이행"이 말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요? 설명부탁드립니다..^^

로쟈 2006-07-02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alefire님/ 오랜만에 댓글을 달아주셨네요(살아계셨나요?^^). 다른 건 몰라도 맨마지막 문장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냉소'에 대해서는 <신체 없는 기관>에 관한 다른 페이퍼에서도 넌지시 언급한 부분이기도 하구요. 제가 지젝을 신뢰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아름다운 영혼'들의 냉소주의를 그가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palefire 2006-07-03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oonta님/제가 언급한 냉소주의는 사실 국내 들뢰지언들이 여타 철학적/정치적 입장에서 들뢰즈 철학에 개입하는 양상들에 대한 '무관심'에 가깝습니다.(정말로 무시일 수도 있고 사실은 그 개입들이 깔고 있는 전제와 논변들의 속내에 대한 무관심이기도 하겠고요) 물론 그 무관심에는 말씀하신 그런 태도도 들어있습니다. 이진경씨의 경우는 김재인씨가 '문학동네'에 기고한 개념적 문제제기에 대해서도 그런 태도였던 듯해요. 그리고 슬로베니아학파의 그 부분은 로자님이 이해하신 그 맥락대로 보시면 됩니다. 슬로베니아학파에서 영미권 들뢰즈주의자들의 냉소주의에 대해 '행위로의 이행'으로 답했다는 내용은 아니고, 보다 일반적으로 그쪽에서 이야기하는 태도 혹은 윤리에 대한 지지를 언급했을 뿐입니다.
로자님/반갑습니다(신상의 중요한 변동 때문에 페이퍼는 챙겨읽었으나 오랜만에;;^^)

yoonta 2006-07-03 0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행위로의 이행이라는 말은 "태도 혹은 윤리에 대한 지지"라는 이야기군요. 그렇다면 그 윤리란 무엇인가요? 니체적인 긍정의 윤리인가요? 아니면 헤겔적, 라캉적 윤리? 제가 묻고 싶었던 건 바로 그 것입니다. "행위로의 이행"이란 무엇인가...단순히 "윤리"다라는 말씀으로는 님 말씀의 배경을 이해하기가 좀 너무 막연하군요..

제 질문이 좀 무성의하다는 감은 드는데..제가 워낙 지젝에 대해서 무지해서요..^^;;

yoonta 2006-07-04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이 없으시군요.. 이런 경우는 두가지로 볼수있는데 답변불가능이거나, 답변하기 귀찮거나.. "냉소"가 아니길 바랄뿐입니다.. -_-

로쟈 2006-07-05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거들 자리는 아닌 듯하지만, 문맥에 가장 걸맞는 윤리는 주판치치가 <실재의 윤리>에서 제시해놓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행위로의 이행'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도 설명되고 저도 언젠가 다른 자리에서 정리한 적이 있는 듯한데,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yoonta 2006-07-05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이 대신 답변해주셨군요..감사합니다^^
읽다가 만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을 다시 한번 뒤적여봐야 겠네요..
 

슬라보예 지젝의 문제작 <신체 없는 기관: 들뢰즈와 결과들>(도서출판b, 2006)이 드디어 번역/출간됐다. 원서는 2004년판으로 돼 있지만, 기억에는 2003년말에 출간됐고 나는 그 즉시 아마존에서 구입했었다. 한데, 1년간 러시아에 나가 있느라 책을 뜯어볼 시간이 없었고 귀국 후에도 책을 읽는 일은 이래저래 미뤄졌었다. 그건 단지 게으름 때문만은 아니고 곧 번역서가 나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천천히' 읽어보자는 계산이었다. 그리고 이제 때가 된 것.

책은 아마도 (지젝의 독자들 때문이 아니라) 들뢰즈의 독자들 때문에 꽤 팔려나가고 한동안 회자될 듯싶지만, 지난주 언론의 리뷰에서는 '지젝의 그림자'도 찾기 어려웠다(예상할 수 없는 일은 아니다. 기자도 읽어야 쓸 것 아닌가? 아마 내주쯤에는 '정상적인' 리뷰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나마 내가 읽은 기사들 중 가장 비중있게 다룬 것이 '들뢰즈 속 헤겔의 그림자'란 타이틀을 달고 있는 한국일보의 리뷰였다.   

"라캉 정신분석학과 헤겔, 마르크스를 융합해 현대 분석철학의 독창적인 영지를 확보한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들뢰즈'라는 또 하나의 우람한 정신의 새 면모를 선뵌다(*'현대 분석철학'? 이 얼마나 '독창적인' 해석인가!). 들뢰즈가 제기한 개념인 '기관 없는 신체'(기관으로서 부여된 기능적 고정성에서 탈피해 다른 '기관'으로 변형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질료)를 뒤집어 놓은 책의 제목처럼, 그는 들뢰즈의 공저서가 아닌 '의미와 논리' 등 단독 저서들을 텍스트 삼아 그 속에 내포된 헤겔의 그림자를 포착한다. 그리고 들뢰즈가 '생성' 이전의 '잠재'의 철학자임을 부각하고 있다."

그렇다, 이게 전부다! 해서 좀더 기다렸다가 괜찮은 리뷰를 읽게 되면 옮겨올까 생각했지만, 기다리는 동안 마당이나 쓰는 기분으로 몇 마디 거들기로 한다. 러시아 영화감독 지가 베르토프와 관련한 대목을 중심으로.

 

 

 

 

들뢰즈와는 다른 진영에 속해 있는 철학자의 들뢰즈론이라는 점에서 <신체 없는 기관>은 여타의 들뢰즈론과 구별되며 바디우의 <들뢰즈 - 존재의 함성>(이학사, 2001)에 근접한다(사실 지젝과 바디우는 절친한 사이라고). 그리고 두 사람은 모두 들뢰즈에게서 헤겔의 그림자를 보거나 그 목소리를 듣는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들뢰즈가 살아있다면 뜨끔하거나 기겁할 일이겠다). 그 문제는 복잡하니까 남겨놓도록 하고, 여기서는 지난 2003년 방한시 지젝이 '신체 없는 기관'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던 내용 중에서(이 강연 내용은 단행본의 후반부에 포함돼 있다) '신체 없는 기관'의 전형적인 사례라 할 만한 '카메라의 눈'과 관련하여 지가 베르토프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대목을 따라가본다. 아래에서 강연문 '신체 없는 기관'이 포함돼 있는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이데올로기>(철학과현실사, 2005)로부터의 인용은 쪽수만을 적어준다. 

"(*히치콕의 <현기중>에서) 주체로 귀착되지 않으면서 주관화된 두 쇼트는 다름 아닌 순수하고 전-주체적인 현상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초과분은 봉합-논리에 수용도어 객관적 쇼트와 주관적 쇼트의 표준 절차의 수준으로 환언(*환원)된다. 우리가 이 과도함(*과잉)에서 맞닥뜨리는 것은 특정 주체의 완력으로부터 자유로운 '대상으로서의 응시'다. 그렇다면 (혁명영화의 절정기였던) 1924년에 지가 베르토프가 만든 옛 소련 무성영화의 고전인 <영화의 눈(Kino-Eye/ Kino-glaz)>에서 베르토프가 (카메라의) 눈을 영화의 상징으로 삼고 이 '자율적 기관'으로서으 눈을 통해 신경제정책(NEP) 하에서 구소비에트연방의 현실의 단편을 제시하며 1920년대 초반의 모습을 전달하는 것은 그리 낯설게 보이지 않는다."(332-3쪽, 강조는 지젝의 것)

"무엇을 흘깃 훔쳐보다(to cast an eye over something)'라는 관용구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눈에서 안구를 뽑아 주위에 던진다는 뜻인데, 이것이 바로 프랑스 동화에 나오는 엽기적 백치 마르탱이 어머니가 아들이 영영 맞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아들에게 교회에 가서 그곳에 있는 여자들을 좀 훝어보고(cast an eye over the girls there) 오라고 했을 때 한 행동이다. 그는 우선 푸주한에게 가서 돼지의 안구를 샀으며, 그후 그것을 교회로 가져가 그곳에서 기도하고 있는 여인들을 향해 던졌던 것이다. 후에 마르탱이 어머니에게 여자들이 자기의 행동에 그리 좋은 인상을 받은 것 같지 않다고이야기하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혁명 영화의 소임이다: 즉, 카메라를 부분대상으로 사용하여 주체에게서 도려내어져 주위로 자유롭게 던져질 수 있는 '눈'으로 만드는 것이다."(334쪽, 강조는 나의 것)

"베르토프 자신을 인용하면: 영화의 카메라는 손부터 발까지, 또 발부터 눈이나 다른 부분까지 가장 효율적인 순서로 관객의 시선을 이끌고(관객의 안구를 질질 끌고 다니고)(drags the eyes of the audience), 세부를 조직할 때는 일반적으로 몽타주 기법을 구사한다."(*강조는 원문에 따름. 리차드 테일러와 이안 크리스티 편, <영화 공장: 러시아-소비에트 영화 문건 1896-1939>로부터의 인용인데, 334쪽 각주에는 <영화의 요인(The Film Factor)>로부터의 인용으로 잘못 기재돼 있다. 'Factory'를 'Factor'로 잘못 본 것. 참고로 테일러는 헉명기 러시아 영화에 정통한 영화학자이다.)

이어서 지젝은 카메라에 대한 이러한 베르토프적 통찰을 자신의 일상적 경험과 연계시킨다: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괴이한 순간들 중 하나는 자신의 영상과 얼핏 맞닥뜨렸을 때 그 영상이 자신에게 시선을 되돌려주지 않는 것이다. 한번은 거울 두 개로 머리 측면에 이상하게 돌출된 부분을 살펴보려 한 적이 있는데, 그때 갑자기 내 옆얼굴이 흘깃 보였다. 그 영상은 내 모든 몸짓을 이상한 일관성 없는 방식으로 본뜨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우리의 거울상이 우리로부터 분리되는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우리의 시선이 더 이상 우리 자신을 향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다리언 리더)"(334-5쪽) 즉, 전-주체적, 혹은 탈-주체적 영상(이미지)가 태어나게 되는 것.

"이 괴기한 경험은 자신의 영상의 한 부분이지만 거울과 같은 대칭적 관계를 회피하여 라캉이 '대상 소타자(*대상 a)로서의 응시'라고 부른 것을 예증한다. 이 불가능한 지점으로부터, 즉 '밖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볼 때의 외상적 특징은 내가 응시를 위한 외부대상으로 대상화되었다는 사실이라기보다는 대상화된 것이 내 응시 자체라는 것이다. 대상화된 응시는 외부에서 나를 바라보므로 내 응시가 더 이상 내 소유가 아니며 내가 그것을 도둑맞았음을 뜻한다."(335쪽) 즉, '내 것이(었)지만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응시', 그것이 '신체 없는 기관'의 가장 전형적인 사례라 할 만하다.

이러한 주제에 잘 들어맞는 영화가 김성호 감독의 <거울 속으로>(2003)가 아닐까 싶다. (아직 보지 않았지만) ''동일한 형상의 사물을 비춰주면서도 반대적인 면을 보여주는 거울의 양면성을 세심하게 포착한 심리스릴러"라면 말이다. 더구나 "'스릴러의 거장'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고전영화 <현기증>의 뼈대에 거울공포란 소재를 도입해 현대적인 공포영화로 만든 작품"이라고 하지 않는가?..

지젝은 잠시 <로스트 하이웨이>를 경유해서 다시 <현기증>(1958)에 대한 분석으로 돌아간다. 스코티(제임스 스튜어트)가 금문교 밑 샌프란시스코 만에서 마들렌(킴 노박)을 구한 다음인 그의 아파트 장면을 자세히 분석해볼 것을 제안하면서.

하지만, 이 본격적인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다루어야겠다. 스코티는 마들렌을 들고 가는 게 무거웠겠지만, 독자들은 지젝을 이 정도 읽는 것도 버겁다! 벌써부터 '이론적 현기증'을 느낀다면 엄살이라고 해야 할까? 겨우겨우 버티고(Vertigo) 버틴 분들은 이제 <신체 없는 기관>으로 손을 뻗으시면 되겠다. 굿럭!..

06. 0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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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6-25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읽어보고 싶어라!!!! 근데 제대로 읽으려면 적어도 몇 년이 걸릴 듯 하네요..


근데 지젝이 분석철학의 대가였군요.ㅋㅋㅋ
글고 저 신체없는 기관이 맞나요, 신체 없는 기관이 맞나요?

로쟈 2006-06-25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잘못 썼나요? 단순한 국어 상식에 의지하시면 될 거 같은데요... 덧붙여,'제대로' 사는 건 더 오래 걸립니다!..

비로그인 2006-06-25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단순한 국어 상식인가요? 책들 마다 표기가 달라서.....

근데 제목만 훝어봐도 재기가 철철 넘치는 군요.
제목이 죄다 패러디인데.

언제가, 아마도 경험일원론의 세기가 될 것인가?
들뢰즈 뒤에 달라붙기
스피노자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가능한가?

ㅋㅋㅋ
 

월드컵 축구 '한국:토고'전을 보고(이 게임은 호주:일본 전 다음으로 재미있었다) '프랑스:스위스'전을 기다리는 막간에 재작년 가을 모스크바에서 지젝의 <이라크>의 제2장 '민주주의와 그 너머'를 읽으며 정리했던 내용을 옮겨놓는다.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야 새삼스러울 게 없지만, 최근에 최장집 교수의 논문집 <민주주의의 민주화>(후마니타스, 2006)가 출간된 것도 민주주의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보도록 유인한다.

 

 

 

 

한데, 나는 <민주주의의 민주화>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 이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고 주문했지만, 막상 책이 온 걸 보니 그건 아니었다. '민주주의' 전문출판사(?)로 나선 후마니타스 편집진의 '작품'이었던 것. 내가 기대했던 건 <민주주의와 민주주의가 아닌 것>이란 근간인데, 마저 출간되어야 최장집 교수의 '한국민주주의' 3부작이 될 듯하다. 물론 그 원조로 꼽을 수 있는 책은 10년 전에 출간된 <한국 민주주의의 이론>(한길사, 1996)이 되어야겠지만.  

<민주주의의 민주화>와 함께 내가 주문했던 책은 정치이념(이데올로기) 사전용으로 적합한 <현대 정치사상의 파노라마>(아카넷, 2006)이며, 샹탈 무페의 <민주주의의 역설>(인간사랑, 2006)과 미국 민주주의론의 권위자 로버트 달의 <미국헌법과 민주주의>(후마니타스, 2004) 등을 같이 읽어둘 만한 책으로 꼽아두고 있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게 실현가능한 기획인지는 의문이지만... 

그럼, 이 정도에서 마이크를 2004년 9월 22일 모스크바대학의 본관 강당으로 넘긴다. 그날 모스크바대 학생들을 대상으로 당시 방러 중이었던 노무현 대통령의 '초청강연'이 있었고(노무현 정부는 최장집 교수의 신랄한 비판대상이기도 하다), 나도 그 현장에 있었다. 자세한 현장 중계는 시효가 많이 지난 관계로 생략하고 한러 관계의 우호적 전망에 대한 대통령의 강연이 끝난 이후부터 따라가 보기로 한다(참고로 푸틴의 지지율은 줄곧 70%를 넘어서고 있다. 노대통령의 지지율과 합하면 얼추 100%가 되겠다. '노빠 파시즘'이나 '대중독재'란 표현은 누구를 겨냥한 것인지?).

강연에 이어서는 노대통령에 대한 명예박사학위 수여와 (학교를 대표하여) 총장의 기념품(나무로 조각한 수공예품 백조였다) 증정이 있었고, 끝으로 한 한국인 성악가(여기 유학생인가?)와 모스크바대학 합창단이 우리 가곡 ‘선구자’를 불렀다(이 노래가 3절까지 있는 줄은 새삼/처음 알았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 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생각나는 대로 가사를 적어놓고 보니(다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 구절은 모호하다. “거친 꿈이 깊었나?” 왜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가란 뜻인가?(선구자는 이미 어딘가에 묻혀 있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불러서 될 일이 아니고 발굴해야 될 일 아닌가?)

‘선구자(先驅者)’란 말 그대로, ‘먼저 말을 달린 자’란 뜻이다(왜 ‘강가’에서 달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어떤 일에 앞장 선 사람을 말한다. 무엇인가를 기획하는, 프로젝트(project)하는, 즉 앞으로(pro) 내던지는(ject) 사람. 기업가이기도 하고 혁명가이기도 한 사람. 지젝의 표현에 따르면, 그것은 ‘레닌주의’이다. 지젝이 <이라크>(도서출판b, 2004)의 두 번째 장 ‘민주주의와 그 너머’의 결론에서 하고 있는 얘기를 잠시 들어보자. 러시아의 (생각하면 눈물나는) 현대사와도 무관하지 않은 내용이다.

 

 

 



“1990년은, 즉 공산주의의 붕괴는, 통상 정치적 유토피아의 붕괴로서 지각된다. 고귀한 정치적 유토피아가 어떻게 전체주의적 공포로 끝나고 마는가에 대한 혹독한 교훈을 배운 오늘날 후-유토피아적 실용주의적 행정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우선 주목할 것은 이른바 유토피아의 붕괴라는 것에 뒤이어서 최후의 거대한 유토피아, 즉 ‘역사의 종말’인 세계적 자본주의의 자유민주주의라는 유토피아가 10년간 지배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9.11은 바로 이 유토피아의 종말을 가리킨다.”(159쪽)

즉, (지젝에 따르면) 우리는 지난 세기에 두 가지 유토피아의 종말을 경험했다. 하나는 70여 년을 버티던 ‘정치적 유토피아’로서의 공산주의의 붕괴(=종말)이고, 다른 하나는 그 이후 10여 년을 기고만장했던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자유민주주의 유토피아의 종말이었다. 전자의 종언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89년의 베를린 장벽 붕괴였다면(그때 나는 군복무중이었다), 후자의 종언을 보여주는 ‘실재적’ 사건이 바로 9.11이다.

그러니까, 1차 유토피아(1917-1991), 2차 유토피아(1991-2002)가 모두 끝장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종말 이후에, “베를린 장벽의 붕괴에 뒤이어 새로운 갈등의 장벽들이 실재적 역사(=역사의 현실)로 회귀”했다. 궁극적 유토피아는, 그러니까 ‘있지도 않은 것’에 대한 환상은 “유토피아의 종말 이후에 우리가 ‘역사의 종말’에 접어들었다고 하는 바로 그 관념이다.”

“우선적으로 우리는 여기서 유토피아란 말의 의미를 특화해야만 한다. 가장 내밀한 곳에서 유토피아는 불가능한 이상적 사회를 상상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유토피아를 특징짓는 것은 문자 그대로 자리가 없는(u-topic) 공간의 건설이다. 즉 기존의 매개변항들 – 기존의 사회 세계에서 무엇인 ‘가능한’ 것으로 나타나는가를 규정하는 매개변항들 – 바깥에 있는 사회적 공간의 건설이다. ‘유토피아적인’ 것은 가능한 것의 좌표를 바꾸는 제스처이다.”(159쪽)

여기서 지젝이 제안하는 것은 유토피아에 대한 새로운 정의, 아니 올바른 정의이다. 그에 따르면, 유토피아는 ‘불가능한 이상적 사회’란 관념과는 어떠한 관련도 없다. 유토피아는 말 그대로, ‘자리가 없는’ 공간의 건설이다. 왜 자리가 없는가? 기존의 사회 세계에서, 즉 사회적 좌표계 내에서는 자리가 할당되지 않기 때문이다(‘매개변항’이란 건 ‘parameter’의 번역 같은데, 여기선 그냥 ‘변수’나 ‘한계’(혹은 울타리)라고 옮기는 것이 더 읽기에 편하겠다).



지젝이 유토피아적인 제스처의 사례로 들고 있는 것은 레닌이다: “제2인터내셔널의 정통을 청산하는 과정에서, 1914년 재앙(러시아어 번역은 ‘비극’)의 잿더미로부터 등장한 레닌주의적 ‘유토피아’의 핵심은 바로 거기에 있다. 국가 그 자체를 뜻하는 부르주아 국가를 분쇄하고, 상설적인 군대나 경찰이나 관료가 없이 만인이 사회적 문제들의 관리에 참여할 수 있는 새로운 코뮨적 사회 형태를 발명하라는 근본적 명령. 레닌에게 그것은 어떤 머나먼 미래를 위한 이론적 기획이 결코 아니었다. 1917년 10월에 레닌은 '이천만 인민이 아니라면, 열명으로 구성되는 국가기구를 즉시 작동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그 순간의 절박함이 진정한 유토피아다.”(160쪽)


 

 

 

레닌주의의 핵심으로서의 근본적인, 즉 래디컬한 명령(=요구)는 무엇인가? 그것은 (1)부르주아 국가, 즉 국가라는 것 자체를 분쇄하고 (2)새로운 코뮨적 사회형태를 창출하는 것이었다. 이 새로운 코뮨에서는 만인이, 즉 모두가 사회적 문제들의 결정(‘관리’?)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레닌에게 단지 ‘이론적인’ 기획이 아니었다는 것. 이어지는 레닌의 발언은 레닌주의를 집약하는 것으로 지젝이 자주 인용하는 것인데, 따라서 그만큼 중요한 것인데, 유감스럽게도 잘못 번역돼 있다. “이천만 인민이 아니라면, 열명으로 구성되는 국가기구를 즉시 작동시킬 수 있다”는 건 굳이 레닌이 아니더라도 만인이 떠들 수 있는 말이다. 이게 레닌주의와 무슨 관계가 있으며, 그가 구상했던 코뮨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지젝은 이 발언을 닐 하딩(N. Harding)의 <레닌주의>(Duke University Press, 1996), 309쪽에서 인용하고 있는데(지젝이 레닌과 관련하여 자주 참조하는 책이다), 내 생각엔 하딩이 잘못 번역했거나 (그보다 확률이 높은 건) 우리말 역자가 잘못 번역했다(설마 지젝이 잘못 인용했을까?). 아마도 <국가와 혁명>에 나오는 구절인 듯하므로, 국역본 <국가와 혁명>을 참조해볼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어로는 <레닌전집> 34권, 316쪽에 나오는 말인데(요즘 러시아에선 <레닌전집>을 좀처럼 구하기 어렵다), 레닌이 실제로 한 발언은 이렇다. “우리는 이천만명이 아니더라도, 천만 명으로 구성된 국가기구를 즉각 도입할 수 있다.”

내가 읽은 러시아어 원문(레닌은 러시아어로 말했으므로, 이 경우는 영어본의 번역이 중역이다)은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분명 그런 내용이며(지젝이 쓴 <레닌의 13가지 경험>이란 책까지 뒤졌는데, 거기도 같은 문장이었다), 영어본의 문장도 특별히 난해할 것 같지 않은데, ‘이천망명-천만’조차 ‘이천만-열명’으로 탈바꿈한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바로 앞에서 만인이 사회적 문제들의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새로운 코뮨이라고 했으므로, 이천만명은 아니더라도 천만 명이 내각의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것이 문맥상 ‘논리적’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방식이야말로 레닌주의에 값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 “이와 같은 그 순간의 절박함이 진정한 유토피아다.”는 러시아어본에서 “이러한 어떤 순간의 절박한 요구(=명령)가 진정한 유토피아이다.”라고 옮겨지고 있다. 어쨌든, “우리는 바로 이러한 레닌주의적 유토피아의 (엄밀히 키에르케고르적 의미에서의) ‘광기’를 고수해야 한다. 그리고 스탈린주의는, 어느 쪽인가를 따져본다면, 현실주의적 ‘상식’으로의 회귀를 나타낸다.” 즉 여기서의 대비적 구도는 ‘레닌=유토피아주의=광기’ 대 ‘스탈린=현실주의=상식’이다. 그러니까 역설적으로 스탈린식의 ‘현실 사회주의’가 잃어버린 것은 레닌주의의 ‘유토피아적 광기’이다(그런 ‘광기’를 계승했던 이는 내 생각에 영구혁명론을 주장한 트로츠키였다).

 

 

 

 

(*)최근에 읽은 <공산주의>(을유문화사, 2006)에서 저명한 러시아사학자 리처드 파이프스가 전해주는 바에 따르면, "바체슬라브(*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고위의 비밀직책들을 갖고 어떤 볼셰비키보다도 더 오랫동안 레닌과 스탈린 두 사람을 섬겼다. 노년에 두 사람 가운데 누가 더 '엄격했느냐'는 질문에 그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물론 레닌이지. 레닌이 스탈린에게 너무 부드럽고 진보적이라고 꾸짖던 일이 생각나네.'" 파이프스의 결론: "이것으로 스탈린주의가 레닌주의의 거부를 뜻한다는 신화(처음에는 트로츠키가, 다음에는 흐루시초프가 유행시킨 신화)는 당연히 사라져야 한다." 즉, 스탈린주의가 광기였다면, 그것은 레닌주의 충실한 계승이라는 것(이 경우 스탈린의 '상식'은 광기의 일상화가 낳은 상식이다).  아래는 1917년의 스탈린과 레닌.

이런 대목의 지젝은 ‘페레스트로이카’의 기치를 높이 들고서 스탈린주의의 청산과 레닌주의에로의 복귀를 주창했던 고르바초프를 연상시킨다. 현실 사회주의가 더 강력한 (유토피아적) 사회주의로 재건/재구축될 수 있다고 믿었다는 점에서 고르바초프는 유토피아적이었다(즉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지만, 역사가, 그리고 러시아 국민이 선택한 것은 (쿠데타군의 탱크 위에 올라가서 열변을 토한) 옐친이었고(그 옐친은 ‘욕조=스탈린주의’와 함께 ‘아이=레닌주의’도 과감하게 내다버리는 걸로 이에 화답했다), ‘현실 자본주의’였다. 그건 상식적인 것이었을까? 91년 이후 몇 년간의 러시아사(=역사적 혼돈)는 남의 나라 역사임에도 나를 눈물나게 한다.

계속 지젝을 따라가본다. “다시금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유토피아가 실제 삶을 추상한 이상적 사회에 관한 꿈꾸기와 아무 상관도 없다는 것이다. ‘유토피아’는 가장 내밀한 곳에 있는 절박함의 문제이며, ‘가능한 것’의 매개변항들 내에서는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을 때 생존의 문제로서 우리가 떠밀려 들어가게 되는 어떤 것이다. 이 유토피아는 정치적 유토피아들에 대한 표준적 개념, 즉 실현되어야 한다는 의도조차 기본적으로 없었던 기획들을 포함하는 책들에도 분명하게 대립되는 것이며 우리가 자본주의 자체의 유토피아적 실천으로 통상 언급하는 것에도 분명 대립되는 것이다.”(160-1쪽)

즉 유토피아는 실제의 삶으로부터 유리된 이상적 사회에 대한 몽상과는 무관하다. 유토피아는 우리가 더 이상 ‘가능한 것’의 한계(=울타리) 내에서 살아갈 수 없을 때 제기되는 생존의 문제이며, 가장 심층적인 차원에서의 어떤 불가피성(=필연성)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건 우리의 상식적인/표준적인 유토피아 개념과는 다른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지젝은 ‘유토피아’란 개념을 발명하고 있다)

이제 남은 건 디저트 같은 언급인바, 유토피아 전략의 심미적 차원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유토피아 전략들 가운데 하나는 심미적 차원에 놓여있다. 종종 제기되는 주장에 따르면, 자크 랑시에르는, 심미적 차원을 정치에 내재한 것으로서 열정적으로 지지하는 가운데, 이미 그 시대가 확실히 가버린 19세기의 포퓰리즘적 반란들을 회향적으로 동경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정말로 그런가?” 디저트니까 중요한 건 아니지만, 여기에도 사소한 오역이 있다. 일단 우리말로, “자크 랑시에르는 무엇을 동경하고 있다”는 게 종종 주장으로 제기될 만큼 중요한 일인가? 정말로 그런가, 즉 랑시에르는 그런 걸 동경하고 있는가?

물론 그건 넌센스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건 랑시에르가 무얼 어쨌다는 게 아니라 어떤 시대가 완전히 지나가버렸다는 것이고, 지젝이 반문으로 제기하는 건 정말로 그런가, 정말로 (그런 시대는) 지나가 버렸는가, 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시대인가? 랑시에르 얘기는 그 시대를 수식하기 위해 삽입된 것이다. 즉 19세기 민중 반란의 시대이다. 랑시에르가 주장하는 건 그러한 정치적인 사건에 내재한 심미적 차원인 것이고. 지젝은 그러한 심미적 차원의 정치성을 포스트모던적 정치상황에서도 읽어내고자 한다. 즉, “피어싱이나 옷바꿔입기에서 공개적 스펙터클에 이르기까지 ‘후근대적인’ 저항의 정치야말로 심미적 현상들로 물들어 있지 않은가?”(161쪽) 하는 것.



‘공개적 스펙터클’이란 말이 나오는데, ‘포스트모던적’ 저항으로서의 ‘공개적 스펙터클’ 사례로 지젝이 들고 있는 것은 ‘플래시 몹’이다. “플래시 몹이라는 진기한 현상은, 최소한의 뼈대로 환원된 가장 순수한 심미-정치적 항의를 나타내지 않는가? 사람들은 정해진 시각에 지정된 장소에 나타나서 어떤 짧은 행위를 수행하고 그런 다음에 다시 흩어진다. 플래시 몹이 아무런 실제 목적도 없는 도시의 시(詩)로서 묘사되는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이 플래시 몹은 일종의 ‘정치의 말레비치’가 아닌가? 그것은 최소한의 차이의 표식인 그 유명한 ‘흰 표면 위의 검은 사각형’에 대한 정치적 대응물 아닌가?”



말레비치는 물론 ‘절대주의’를 주창한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화가이다. 그리고 그의 대표작은 '흰 바탕 위의 검은 사각형'이다(‘흰 표면 위의 검은 사각형’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라크>에서 말레비치는 한번 더 언급되는데, 라캉의 네 가지 담론을 설명하는 절에서이다. “(네 가지 담론의) 전체적인 구성은 상징적 재배가라는 사실에, 즉 하나의 존재자를 그것 자체와 그것이 구조에서 차지하는 자리로 재배가하는 것에 기초해 있다. 그 자리는 말라르메의 ‘자리만이 발생한다’나 말레비치의 흰 표면상의 검은 사각형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다. 둘 모두는 자리 그 자체를 공식화하려는 노력을, 혹은 차라리 요소들간의 차이에 선행하는, 하나의 요소와 그것의 자리 사이의 최소한의 차이를 공식화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173쪽)

인용문에서 재배가는 reduplicatio(=reduplication)를 옮긴 것인데, 이건 ‘배가’라고 해야 맞다(<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의 역자도 그렇게 옮기고 있다). 뜻은 하나를 둘로 만드는 것, 즉 두 배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걸 우리말로 ‘배가(倍加)’라고 한다. ‘재배가’는 배가된 걸 다시 배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산술적으론 네 배가 된다(영어에서 duplication이나 reduplication은 거의 같은 뜻이다). ‘존재자’로 옮긴 entity(‘실체’로도 많이 번역된다)는 being과 함께 하이데거의 용어인 ‘존재자’의 영어 역어로 사용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경우에 entity가 우리말 ‘존재자’로 옮겨지는 것은 아니다(우리말에서 ‘존재자’란 말은 극히 제한적으로 사용된다). 영어의 소문자 being처럼, 그냥 우리말 일상어의 ‘존재’로 충분하다.



말레르메의 시구 ‘자리만이 발생한다(rien n’aura eu lieu que le lieu)’는 어느 시에 나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주사위 던지기>에 나오는 시구이다), 뒤에 붙은 설명으로 봐서 불충분한 번역이다(러시아어본에서는 불어를 따로 옮겨주고 있지 않기 때문에 나로선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지만). 그렇다면, 말라르메와 말레비치와 나란히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즉, <흰 바탕 위의 검은 사각형>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자리(=장소)가 이미 하나의 요소로서 다른 요소들간의 차이에 선행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러한 자리 자체를 분리/규정해내고자 한 것(*한 말라르메 전공자는 "장소 이외에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옮기고 있다. 이해하기 편하다).

즉 말레비치의 그림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검은 사각형’이란 요소만이 아니다. 거기엔 ‘흰 바탕’이란 요소가 이미 선행해 있는 것이다. ‘검은 사각형’이 드러내고 있는 것은 오히려 ‘흰 바탕’이라고 할 만하다. 그리고, 라캉의 네 가지 담론에서 이 ‘흰 바탕’ 즉 ‘자리’에 해당하는 것이 작인(agent), 타자(other), 진리(truth), 산물(production)이다(나로선 ‘작인’이란 역어가 내키지 않지만,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의 역자부터 ‘작인’이란 역어를 선택하고 있다).

‘정치의 말레비치’란 표현을 사용하고는 있지만, 정말로 지젝 자신이 플레시 몹 같은 같은 ‘포스트모던적’ 저항의 정치에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거기에 대해선 보다 본격적인 분석과 제안이 뒷받침되어야 하리라. 다만, 이 자리에서는 지젝이 새롭게 규정/제안하고 있는 유토피아적 제스처와 전망을 우리가 이해하고 공유하는 것이 필요할 따름이다. 지젝은 3장 ‘지배와 그 너머’의 끝부분에서도 다시 유토피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이 대목을 확인하면서 나는 ‘공식적인’ <이라크> 읽기를 마무리짓도록 하겠다.

“보다 일반적 수준에서, 이른바 금지된 지식의 실정적, 구성적 지위 개념은, 즉 우리의 욕망이 만족에 도달하기 위해 직접적 충족은 지연되어야 하며 심지어는 포기되어야 한다는 발상은 보기보다 더 복잡하다.”(226쪽) 왜인가? “핵심적인 사실은 금지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그것은 반성적으로 재배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반성적이란 역어는 reflective(ly) 정도를 옮긴 것일 텐데, 우리말이 너무 ‘조밀하기’ 때문에 번역이 까다로운 경우이다. 즉, 영어의 reflection은 우리말의 반성, 반영, 반사, 성찰이란 뜻을 모두 포괄하며 reflective나 reflexive는 ‘재귀적’이란 뜻도 갖는다. 바로 앞에서 인용한 문장은 “중요한 것은 금지가 작동하기 위해선 그것이 재귀적으로 배가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용이하다. 재귀적인 배가? “금지 자체가 금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227쪽)



“즉 금지는 그 실정적인 차원 속에서 금지처럼 보여서는 안되고 욕망의 대상에 대한 우리의 접근을 가로막는 단순한 외적 장애물처럼 보여야 한다. 다시 말해 나는 내가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여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혼잣말할 수는 없다. '그건 진정으로 그녀는 아니야, 그녀는 평범한 여자에 불과해. 그녀를 그토록 매력적이게 만드는 것은 위반의 아우라, 금지된 영역에 들어가는 것의 아우라야. 그것은 그녀의 현실을 넘어서는 나의 상상력의 힘과 과잉이야!' 그런 직접적인 통찰은 분명 ‘실용주의의 모순’인데, 그것은 실상 가정되면 나의 욕망을 망쳐놓는다.”

실용주의의 모순? 물론 오역이다. ‘Pragmatic contradiction’ 정도의 역어일 듯싶은데, ‘화용론적 모순’이라고 옮겨야 한다. 이 ‘화용론(話用論)’을 일어에서는(일본사전을 베낀 영한사전에서도) ‘어용론(語用論)’이라고 옮기는 듯하다(우리말에서 왜 어용론이란 역어가 기피되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그건 ‘어용(御用)’이란 말과 혼동되기 때문이다). 약간 변칙이지만, 더 이해하기 쉽게 옮기려면, ‘수행론적 모순’이라고 해도 무방하다고 본다. 즉, 그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남자는 어떤 여자를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남자가 아니다. 거기서 그런 류의 혼잣말(=통찰)과 열정은 양립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금지된 지식은 사랑하는 사람의 현실에 대한 완전한 지식이 아니라 대상의 현실에 관해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대상을 나의 욕망의 원인으로 만드는 것은 그것이 차지하는 금지된 자리라는 정황에 관한 바로 그 지식이다.”

<이라크>를 두 번 통독하면서 가장 난해했던 문장인데(그래서 여러 번 반복해 읽어야 했다), 평범한 듯한 번역문이 잘 안 읽혔던 것은 뭔가 논리적으로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번역문은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여, 이 부분을 ‘능력’에 관한 걸로 옮겼지만, 전후 문맥상 ‘금지’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다시 옮기면, “따라서 진정으로 금지된 지식은 사랑하는 사람의 실상에 대한 완전한 지식이 아니라, 대상(=사랑하는 사람)의 ‘아무것도 아님’이라는 실상에 관해서 결코 알아서는 안 된다는, 대상을 나의 욕망의 원인으로 만들어주는 것(에 대한 앎)이 금지돼 있다는 바로 그 지식이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무엇에 대한 금지가 아니라, 무엇이 금지돼 있다는 앎 혹은 언표 자체의 금지이다. 해서, 스탈린 시대의 허식재판(show trial)에서도 결정적이었던 것은 공산주의 지배체제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공식적으론 보증/허용되었지만 은밀하게는 금지돼 있던, 자유발언(=비판) 권리 자체의 ‘실행’이었다.

따라서, “사랑하는 대상의 마력을 깨지 않기 위해 그것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자세가 가짜 사랑의 확실한 징표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진정한 사랑은 ‘너무 가까워지는 것을 겁내’지 않는다. 그것은 사랑하는 대상을 그것의 일체의 통속적 현실 속에서 떠맡는 것과 동시에 그것의 숭고한 지위를 유지할 각오가 되어 있다. 즉 마르틴 루터에 대한 헤겔의 주해를 말바꿔(=바꿔 말해) 보자면 진정한 사랑은 일상적 저속함의 십자가에서 숭고함의 장미를 알아볼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228쪽) 나라면 ‘저속함’이란 역어는 ‘비속함’으로 바꾸고 싶다(나의 취향이 비속한가?). 여기서 지젝이 말하는 사랑은 욕망에서 해방된, 아니 욕망을 초과하는 사랑이 아닐까 싶다. 이어지는 ‘정치적 교훈’은 러시아어본에는 빠져 있는 내용이다.

“그리고 ‘일상적 저속함의 십자가에서 숭고함의 장미를 알아본다’는 이런 자세가 갖는 정치적 교훈(혹은 차라리 함축)은 기존 현실을 신비화하는, 그것에 가짜 색깔을 칠하는 일이 아니라, 완전히 그 반대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숭고한(유토피아적) 전망을 힘껏 일상적 실천으로 번역해내는 일, 요컨대 유토피아를 힘껏 실천하는 일이다.” 마치 무슨 강령이나 구호처럼 돼 있어서 피부에 와 닿지 않지만, 유토피아적 전망과 일상적 실천이 서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지젝의 결론을 우리의 문맥에서 조금 일상적인 용어로 번역하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진정한 사랑은 일상적인 ‘비속한’ 한국 여자들에게서 ‘숭고한’ 러시아 여자들을 알아볼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자세가 갖는 일상-정치적 교훈은 기존의 한국 여성들을 (러시아 여성들처럼) 신비화하는, 그것에 분칠하고 떡칠하는 일이 아니라, 완전히 그 반대이다(*이 통신문의 원제목은 '크레믈린-보드카-러시아여성'이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러시아 여성의 이미지(=비전)를 힘껏 한국 여성의 일상으로 번역해내는(=옮겨오는) 일, 요컨대 이상적 여성이란 유토피아를 먼 나라에서 구할 게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힘껏 찾아보는 일이다. 너무 가깝다고 주저하지 말고 말이다…”

04. 09. 23./ 06. 0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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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ts 2006-06-14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요, 감사~^^

기인 2006-06-14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로쟈님도 월드컵 보시나요? ㅎㅎ 저는 기분이 야릇해서 잘 못 보겠습니다 ^^;

로쟈 2006-06-14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에 한 경기 정도는 보게되네요. 오늘밤엔 스페인과 우크라이나 전 같은. TV에서 다른 거 하지도 않으니까요.^^
 

재작년 8월 중순에 '열차 속의 이방인 농담'이란 제목으로 올렸던 모스크바 통신문에서 히치콕/지젝의 맥거핀 이야기만을 정리해서 옮겨놓는다. 지젝의 히치콕 읽기를 예전에 대략 다 정리한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어제오늘 비가 좀 흩뿌린 휴일이었던 만큼, 비 얘기부터...

모스크바에는 하루 종일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렸다. 제법 많이 비가 내렸고, 토요일과 무관하게 나날이 '휴일'인 룸메이트와 나는 오후에 감자를 삶아먹고 마지막 남은 ‘바지락 칼국수’를 끓여먹었다. 비 오는 날 창밖이나 바라보며 감자를 삶아먹는 일이, 어릴 적 내가 꿈꾸었던 ‘행복한 삶’, 곧 ‘더 바랄 나위 없는 삶’이었는바(그 이상을 바라는 건 몰염치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오늘 하루치의 ‘유토피아’를 산 셈이다. 게다가 저녁을 잔뜩 먹고 저녁잠까지 잤으니, 누릴 호사는 다 누린 셈이다.

정신을 차리고(=각성하고!), 요일과 무관한 본업에 또 착수하기 위해, 먼저 커피 한잔 마시려고 룸메이트의 방에 갔다가(주전자가 그 방에 있다), 룸메이트가 지난번에 공수해온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에 손이 갔다(내가 그에게 추천한 책이기도 하다). 룸메이트가 보드카를 마시러 간 사이에 잠시 둘러본다는 게 그만 뭔가를 쓸 만한 ‘구실’까지 찾게 되었다. 그건 ‘맥거핀’이다. 맥거핀에 대한 정의 그대로, 그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액션이 이루어지기 위한 순수 구실”의 역할을 하는 맥거핀. 이 글쓰기(=액션)는 순수하게 그 맥거핀 때문에 씌어진다.

 

 

 

 

모스크바에서 내가 읽을 수 있는 지젝의 책은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새물결, 2001),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인간사랑, 2003, 초판2쇄), <이라크>(도서출판b, 2004), 이 3권이다(앞의 두 권은 룸메이트의 것이다). 이미 <히치콕>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읽은 바 있고(러시아어로 번역되지 않은 몇 편을 제외하곤), <이라크>는 두 번째 읽고 있으며(따로 읽을 책도 없으니!), <숭고한 대상>은 가을에 다시 읽어볼 생각이다(영어본으로도 절반쯤 읽었었다). 읽는다는 건, 읽고 교정하고 그에 대한 리뷰를 쓴다는 얘기이다. 이번 가을-겨울 시즌에 나의 할 일로 현재 확정된 것은 몇 편의 논문을 쓰는 것과 릴케와 지젝, 들뢰즈를 읽는 것 등이다. 그래야 나의 밥값이 떨어진다(*결과적으론 밥값을 다 치르지 못하고 나는 귀국했다).

적어도 역자들만큼은 자세하게 읽은 <이라크>에 대해서는 조만간(그래도 9월이나 돼야 가능할 것이다) 정리한 글들을 올릴 예정이다(*어느 정도는 계획을 이행했다). 그런 정리를 자청하는 건 일단 나 자신을 위해서이지만, 지젝에 입문하는 독자들이 좀더 ‘편하게’ 그의 책들을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나는 지젝이 좀더 많이 읽히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그리고 우리에겐 그런 기회가 주어지고 있다). 그런 건 ‘좋아하는 사람’의 의무이기도 하다(좋아한다는 건 많은 일의 ‘구실’이 되어준다! 자신과 남들을 괴롭히는 일까지도?!). “진정한 사랑은 너무 가까워지는 것을 겁내지 않는다”는 지젝의 말을 약간 비틀면, 책에 대한 진정한 사랑은 너무 자세히 읽고 떠들어대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더불어, 적당히 입다물며 침묵하는 건 ‘가짜 사랑’의 확실한 징표이다.) 그래서, 장정일의 표현을 빌면, 거의 자신이 저자인 걸로 착각한다(왜 아니겠는가!)...

 

 

 



이 글을 시작한 구실이 되었던 맥거핀은 앞에서 나열한 세 권의 책에 모두 나온다. 그건 히치콕 자신이 ‘열차-속의-이방인’ 농담이라고 불렀다는 것인데, 그가 종종 인용했다는 이 이야기의 주된 출전은 트뤼포가 쓴 <히치콕과의 대화>이다. 먼저, 세 권의 책에서 관련 대목을 인용한다(<히치콕>에서의 직접적인 인용자는 지젝이 아니라 믈라덴 돌라르이다).

(1)히치콕은 그 대상에 이름을 부여했던 농담을 실제로 ‘열차-속의-이방인’ 농담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또한 유고슬라브 판, 하나의 대안적 결미를 갖고 있다: “선반 위의 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맥거핀이오.” “뭘 하려는 것이지요?” “하이랜드의 사자들을 죽이기 위한 것이지요.” “하지만 하이랜드에는 사자가 하나도 없는데요.” 급소를 찌르는 말 A: “사실 이건 맥거핀이 아닌데요.” 급소를 찌르는 말 B: “보시오. 그건 작용합니다.” 우리는 두 개의 판을 다 독해해야 한다. 대상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고 실제로 맥거핀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작용한다.(<히치콕>, 72-3쪽)

(2)히치콕적인 대상인 그 유명한 맥거핀을 생각해보자. 그것은 오직 이야기를 가동시키는 역할만을 하고 있는, 하지만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닌’ 순수한 구실이다. 맥거핀의 유일한 의미는 그것이 등장인물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그것이 그들에게 생사를 좌우할 정도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는 사실에 있다. 그것에 관한 일화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두 남자가 기차에 앉아 있다. 그 중 한 명이 묻는다. “저기, 짐칸에 있는 꾸러미는 무엇이죠?” “아, 그거요, 맥거핀이에요.” “맥거핀이 뭐죠?” “아, 그건 스코틀랜드 고지방에서 사자를 잡을 때 쓰는 장비예요.” “그런데, 스코틀랜드 고지방에는 사자가 없는데요.” “아, 그럼 그건 맥거핀이 아니에요.” 좀더 딱 들어맞는 또 다른 판본이 있다. 나머지는 동일하고 마지막 대답만 다른 것이다. “그래도, 그게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 몰라요.” 그게 바로 맥거핀이다. 순수한 무(無)이지만 효과는 확실한 것. 맥거핀이 라캉이 대상 a라고 부르는 것, 다시 말해 욕망의 대상-원인으로서 작동하는 순수한 구멍의 가장 순수한 사례라는 사실은 덧붙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숭고한 대상>, 276-7쪽)

(3)히치콕의 ‘맥거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단지 이야기를 작동시키는 데 봉사하는, 그러나 그 자체로는 어떠한 가치도 없는 공허한 구실. 그것을 예시하기 위해 히치콕은 종종 다음의 이야기를 인용했다. “두 신사가 기차에서 만난다. 그리고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운반하는 이상한 짐가방에 놀란다. 그는 ‘당신이 운반하는 그 이상한 짐가방 속에 무엇이 있나요?’하고 동행자에게 묻는다. 그 동행자는 ‘맥거핀이지요’라고 대답한다. ‘맥거핀이 무엇입니까?’ 그가 묻는다. 동행인이 말한다. ‘맥거핀은 스코틀랜드 고지에서 표범을 죽이는 데 사용되는 장치입니다’. 당연히 그는 ‘하지만 스코틀랜드 고지에는 표범이 없는데요.’라고 말한다. 동행인이 말하길, ‘글쎄, 그렇다면 그것은 맥거핀이 아닙니다. 안 그런가요?” (여기서)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는 맥거핀의 지위에 완벽하게 부합하지 않는가? (<이라크>, 21-2쪽)



트뤼포의 <히치콕과의 대화>는 물론 우리말로 번역돼 있지만, 내가 이 대목을 읽어보지 않아서(그리고 분실했다) 이 일화가 어떻게 번역돼 있는지는 모르겠다. 현재 내가 참조할 수 있는 건 러시아어본 <히치콕과의 대화>이다. 제목은 <히치콕이 말하는 영화>(모스크바, 1996) 정도의 뜻인데, 불어본과 영어본을 대조하여 번역한 걸로 돼 있다. 러시아어본 역자의 설명에 따르면, 이 책은 1962년에 두 사람 사이에 이루어진 52시간 분량의 대화를 정리한 것이며(사실 이런 류의 책으론 최초의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의 경우, 작년인가 나온 정성일의 ‘임권택과의 대화’는 바로 이 트뤼포의 전범을 따르고 있다), 헬렌 스코트가 통역을 맡았다(그러니까 트뤼포는 불어로 얘기하고, 히치콕은 영어로 얘기했다).

해서, 나온 책이 불어본(파리, 1966)과 영어본(런던, 1967)이며, 1980년(4월 24일) 히치콕이 사망하자 트뤼포는 마지막 16장을 추가하여 다시 책을 내는데, 제목을 <히치콕/트뤼포>(1983)라고 다시 붙였다(러시아어본의 겉표지 제목이 <히치콕/트뤼포>이다). 한국어본은 어느 판본을 옮긴 것인지 모르겠지만, 하여간에 ‘맥거핀’과 관련하여 가장 먼저 참조해야 할 책은 바로 이 책이다. 지젝이 맥거핀에 관해서 무슨 얘기를 하든지 간에 그 출처는 바로 이 책의 일화(=농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앞의 세 인용보다 먼저 인용되어야 할 것이 바로 <히치콕과의 대화>인 셈이다. 하지만 ‘현지사정상’ 지젝(돌라르)의 인용 번역만을 가지고 맥거핀 일화(번역)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한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그러나 저마다 다르게!



먼저, 일화로 안내하는 내용. “(1)히치콕은 그 대상에 이름을 부여했던 농담을 실제로 ‘열차-속의-이방인’ 농담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또한 유고슬라브 판, 하나의 대안적 결미를 갖고 있다.” 러시아어본 <히치콕과의 대화>를 보거나 <히치콕>을 보더라도, 히치콕이 이 ‘농담’을 ‘열차-속의-이방인’ 농담이라고 불렀다는 내용은 없다. 러시아어본의 이 대목을 옮기면, “히치콕은 이 대상에 이름(=맥거핀)을 붙여준 일화(=농담)을 얘기하는데, 우연찮게도 ‘열차 속의 이방인’ 종류의 일화이다. 이 일화에는 결말이 다른 유고슬라비아 판(본)도 있다.” ‘우연찮게도’라는 건 같은 <열차 속의 이방인(Strangers on a train)>(1951)이란 영화를 히치콕이 찍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류’라고 했는데, 만약에 이 농담이 여럿이라면 열차-속의-이방인 ‘시리즈’라고 해야 할 것이다(거기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다음, “(2)히치콕적인 대상인 그 유명한 맥거핀을 생각해보자. 그것은 오직 이야기를 가동시키는 역할만을 하고 있는, 하지만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닌’ 순수한 구실이다. 맥거핀의 유일한 의미는 그것이 등장인물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그것이 그들에게 생사를 좌우할 정도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는 사실에 있다.”와 “(3)히치콕의 ‘맥거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단지 이야기를 작동시키는 데 봉사하는, 그러나 그 자체로는 어떠한 가치도 없는 공허한 구실.” 핵심은 맥거핀이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닌 순수한 구실”이라는 점이다.

번역에 대한 참견하자면, 읽기에 편한 번역은 내용의 핵심과 주변을 구분해주는 번역이다. 사진으로 치면, 핵심은 뚜렷하게 배경은 흐릿하게 처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초점을 잘 맞춰야 한다는 말이다. 같은 대상을 놓고 같은 구도로 사진을 찍으면 누가 찍더라도 대충 대상이 무엇인지는 가늠할 수 있다. 하지만, 잘 찍은 사진과 평범한 사진의 차이는 그 초점 맞추기에 있다. 이야기를 가동/작동시킨다고 할 때, 초점은 ‘이야기’일까, ‘가동/작동’일까? 내가 보기엔 ‘이야기’인데,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려면 아마도 ‘operate’를 옮긴 듯한 ‘가동/작동시키는’은 좀더 약화되어야, 즉 흐릿하게 되어야 한다. (이야기를) ‘끌고가는’이나 ‘진행시키는’으로. ‘작동시키는 데 봉사하는’ 데까지 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serve to operate’의 번역일까?).

같은 맥락에서 “그것이 그들에게 생사를 좌우할 정도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는 사실”도 너무 강하다. 그것과 병렬관계에 놓여 있는 구절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라는 점에 견주어서 그렇다. “특별한 중요성” 정도라고 하면 되고, 실제로 <히치콕과의 대화>에서 히치콕의 사용하고 있는 단어는 (러시아어본으로 짐작해 보건대) ‘unusual’ 정도이지 않을까 싶다(국역본에 따르면, ‘fatal’인 듯도 하고). Unusual을 ‘생사를 좌우할 정도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이라고 옮기는 것은 좀 과장이다. 아무런 의미/가치도 안 갖고 있는 맥거핀이 그들(=등장인물)에게는 아주 중요하다는 뜻을 전달하는 게 이 문장에서는 ‘핵심’이며 나머지는 부수적이다.



이제 본론이다. (1)“선반 위의 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맥거핀이오.” “뭘 하려는 것이지요?” “하이랜드의 사자들을 죽이기 위한 것이지요.” “하지만 하이랜드에는 사자가 하나도 없는데요.” (2)두 남자가 기차에 앉아 있다. 그 중 한 명이 묻는다. “저기, 짐칸에 있는 꾸러미는 무엇이죠?” “아, 그거요, 맥거핀이에요.” “맥거핀이 뭐죠?” “아, 그건 스코틀랜드 고지방에서 사자를 잡을 때 쓰는 장비예요.” “그런데, 스코틀랜드 고지방에는 사자가 없는데요.” (3)“두 신사가 기차에서 만난다. 그리고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운반하는 이상한 짐가방에 놀란다. 그는 ‘당신이 운반하는 그 이상한 짐가방 속에 무엇이 있나요?’하고 동행자에게 묻는다. 그 동행자는 ‘맥거핀이지요’라고 대답한다. ‘맥거핀이 무엇입니까?’ 그가 묻는다. 동행인이 말한다. ‘맥거핀은 스코틀랜드 고지에서 표범을 죽이는 데 사용되는 장치입니다’. 당연히 그는 ‘하지만 스코틀랜드 고지에는 표범이 없는데요.’라고 말한다.

(1)에서 돌라르는 아예 대화체로 옮기고 있는데, 그것이 예시적으로 잘 보여주는바 이 일화/농담에서 핵심은 두 사람이 대화이다(그리고 물론 가장 중요한 건 결말이다). 나머지는 다 약화되어도 무방하다. 즉 두 사람 혹은 두 남자가 기차를 타고 가는데, 한 사람이 상대방의 꾸러미/짐가방에 대해서 물어본다는 내용. 일단 (1)에서 ‘하이랜드’는 좋은 번역이 아니다. 나처럼 ‘하이랜드?’하면서 영한사전을 뒤져봐야 하기 때문이다. 사전에 ‘the Highlands’는 ‘스코틀랜드 북부의 고지’로 돼 있다. 그러니까 이건 보통명사가 아니라 고유명사이며, 스코틀랜드 사람이 아닌 이상 고유명사 ‘하이랜드’가 어딘지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러니까 ‘스코틀랜드의 고지/고지대’ 정도로는 옮겨줘야 한다(그렇다고 해서 ‘스코틀랜드 북부의 고지’라고 친절하게 옮겨주는 것도 초점을 잘못 맞춘 과잉친절이다).

“하지만, 하이랜드에는 사자가 하나도 없는데요.”도 “하지만, 하이랜드에는 사자가 없는데요.”로 충분하다(농담은 리듬과 타이밍이 중요하므로 짧게 받아쳐야 한다). ‘꾸러미/짐가방’으로 옮겨진 건 ‘pack’ 종류 같은데, 가장 무표적인 건 ‘가방’이다. 그런 의미에서, (3)은 좀 비경제적이다. 일단 ‘두 신사’가 만난 것부터가 그렇다. 히치콕은 그냥 ‘two men’이라고 했을 거 같은데, 지젝이 ‘two gentlemen’이라고 다시 고쳐 말했을까? 이 농담에서 신사냐 아니냐는 전혀 중요한 정보가 아니기 때문에, 가장 무표적인 ‘두 사람’ 정도가 가장 무난하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옆사람’ 혹은 ‘앞사람’이면 된다. ‘운반하는’은 ‘갖고 가는’. “당신이 운반하는 그 이상한 짐가방 속에 무엇이 있나요?”라고 실제로 ‘이상하게’ 물어봤을까? 적어도 농담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자’가 ‘표범’으로 바뀐 건, 지젝의 착각인지 유희인지 모르겠다. 원문에 ‘충실한’ 역자의 ‘창작’일 리는 없을 테니까(주전자가 항아리로 바뀌는 것처럼). 어쨌든, ‘맥거핀은 스코틀랜드 고지에서 표범을 죽이는 데 사용되는 장치입니다.’도 좀 어색하다. (1)에서 “하이랜드의 사자들을 죽이기 위한 것이지요.”라고 한 것도 마찬가지인데, 물론 ‘죽이다’는 ‘kill’의 번역일 테지만, 이런 경우에 우리말로는 (2)에서처럼 ‘잡는다’고 한다.



이제 가장 핵심이 되는 결말. (1)급소를 찌르는 말 A: “사실 이건 맥거핀이 아닌데요.” 급소를 찌르는 말 B: “보시오. 그건 작용합니다.” (2)“아, 그럼 그건 맥거핀이 아니에요.” 좀더 딱 들어맞는 또 다른 판본이 있다. 나머지는 동일하고 마지막 대답만 다른 것이다. “그래도, 그게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 몰라요.” (3)동행인이 말하길, ‘글쎄, 그렇다면 그것은 맥거핀이 아닙니다. 안 그런가요?”

“사실 이건 맥거핀이 아닌데요.”(1)과 “아, 그럼 그건 맥거핀이 아니에요.”(2)/”글쎄, 그렇다면 그것은 맥거핀이 아닙니다.”(3)는 뉘앙스에서 차이가 나는데, 보다 적절해 보이는 건 다수인 (2)/(3)이다. 그리고, “그것은 맥거핀이 아니다”의 원문은 “it is not McGuffin.” 같은데(“McGuffin is not”이란 표현이 가능할까?), 러시아어본은 마치 “So, it means, McGuffin is nothing at all.”을 옮긴 것처럼 돼 있다. 그리고, 이게 좀더 흥미롭다. 즉, “맥거핀이 아닙니다”란 부정/부인 대신에, “맥거핀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란 뉘앙스의 ‘정의(definition)’가 이 농담에는 함축돼 있는 걸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래야 지젝이 말하려는 바가 더 잘 전달된다. 즉 “대상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고 실제로 맥거핀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작용한다.”라거나 “순수한 무(無)이지만 효과는 확실한 것.”

아무것도 아니지만, “but it works!” 어떤 도구가 잘 작동/작용한다는 뜻을 우리말 구어에서는 어떻게 전달하는가? “잘 들어요?” “잘 먹혀요?” 그럼, 이제까지의 내용을 재구성해보기로 하자. <숭고한 대상>의 번역을 바탕으로 ‘의역’하면: 두 사람이 기차를 타고 가는데, 한 사람이 묻습니다. “저기, 짐칸에 있는 가방은 뭔가요?” “아, 그거요, 맥거핀입니다.” “맥거핀이 뭐지요?” “아, 그게 스코틀랜드 고지에서 사자를 잡을 때 쓰는 거예요.” “그런데, 거긴 사자가 없잖아요?” “맞아요, 그럼 그건 맥거핀이 아니네요.” 좀더 딱 들어맞는 또 다른 판본이 있다. 마지막 대답만 다르다. “그래도, 얼마나 잘 먹혀 드는데요!” 그리고 실상 <이라크>에서 지젝이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는 맥거핀의 지위에 완벽하게 부합하지 않는가?”라고 말할 때 누락하고 있는 것은 그 작용/효과이다. 그게 맥거핀이라는 걸 누가 모르는가? 하지만, 효과는 “확실한 것”이었다.

맥거핀이 작용한다, 효과가 있다라고 말할 때, 그 작용/효과의 대상은 무엇인가? 히치콕에게선 이야기이다(부시에게선 전쟁이었지만). 그건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구실(만)을 성공적으로 해치웠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대상(=밥)은 누구인가? 맥거핀에 말려든/먹혀든 순진한 동승인이다(그리고 파병 중인 한국이다). 그 기의만을 옮길 때 맥거핀에 가장 적합한 우리말 번역어는 ‘헛물’이다. 마신다고는 하는데 실제로는 없는 물이 ‘헛물’이다. 히치콕의 농담에서 직접적으로 헛물을 들이킨 사람이 바로 동승인이며(한국이며), 그의 영화에서는 관객들이다(궁극적으로는 그 헛물을 들이킨 자가 부시이기를 나는 바란다). 그리고 여기까지 읽어온 당신(들)이다.

사실, 아무것도 아닌 맥거핀에 대해서 내가 덧붙일 말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지젝을 반복하자면, “맥거핀이 라캉이 대상 a라고 부르는 것, 다시 말해 욕망의 대상-원인으로서 작동하는 순수한 구멍의 가장 순수한 사례라는 사실은 덧붙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거기에 굳이 덧붙이자면, 유사 이래로 가장 성공적인 맥거핀은 신이라는 것! “신은 한 가지만 빼놓고 모든 걸 갖췄다. 그 한 가지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맥거핀 신자들이 맥거핀 전쟁을 비난하는 건 따라서 모순이다.)

04. 8. 14-15.

 

 

 



P.S.1. 이 글의 절반 이상은 토요일 저녁 이곳 NTV에서 방송된 히치콕의 <프렌지(Frenzy)>(1972)를 보면서 작성한 것이다. 나머지는 기타노 다케시의 <하나비>를 보면서. <프렌지>는 히치콕 말년의 작품으로, 그는 1976년에 <가족의 음모(Family plot)> 한 편만을 더 만들었을 뿐이다. 다음주 토요일에도 히치콕의 영화를 방영한다는 걸로 봐서 NTV에서는 한동안 히치콕의 영화들을 내보낼 모양이다(좋은 기회이다!). <프렌지>는 여자들을 넥타이로 목 졸라 죽이는 연쇄살인범의 얘기니까, 제목이 뜻하는 바는 ‘미친 놈’ 정도이겠다. 그렇다면, 그 정도는 야코죽이는 ‘유영철’을 다룬 (가상의) 영화 제목은 <프렌지, 프렌지, 프렌지>쯤이 되어야 할 것이다.

P.S.2. 맥거핀 번역에 대해 몇 가지 참견의 말을 했는데, 실상 이론서 번역은 그렇게까지 섬세한 걸 요구하지 않는다. 문학작품의 번역이라면, 섬세하지 않은 건 ‘오역’이라는 비난을 뒤집어쓸 만하지만, 이론서는 내용(=뜻)만 정확하게 전달하면 되기 때문이다. 즉, 이론서 번역은 ‘이해한 내용’만을 옮겨주면 된다. 반면에 문학작품 번역은 ‘이해한 내용’을 다시 ‘작문’해야 한다(기표, 혹은 형식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당연히 더 쉬운 쪽은 이론서 번역이다. 거기서는 다만, 이해의 난이도가 문제될 따름(그래도/그래서 나는 이론서 번역에서 한국어의 유려함이 이해의 정도에 비례한다고 생각한다). 해서, 나의 ‘참견’은 공허하다. 다만, 공허한 참견을 일삼는 것은 모든 번역에는 ‘긴장’이 필요하다는 걸 새삼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나부터도 번역에 매달려 있지만, 그것이 오역을 줄이는 지름길이다.

<이라크>의 번역도 마찬가지인데, 문학작품의 번역이라면 아쉬움이 많이 남을 테지만, 이론서 번역으로서는 무난하다. 그렇다고 오역이 없는 건 아닌데, “흠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란 랭보의 말을 비틀면, “오역 없는 번역이 어디 있으랴!”이다. 이 자리에서 크고 작은 오역의 사례들을 다 열거할 수는 없고, 중요한 것 한 가지만을 일단 지적해둔다. 사드에 관한 것이다(중요하다고 한 것은, 사드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사드의 <규방철학>에서 돌망스는 “우리에게서 작열하는 빌어먹을 천국 불의 홍수 속에 빠뜨리려고” 외제니를 부른다. 이것은 휠덜린이 시인의 개념을 ‘천국에서 온 불’로 인해 괴로워하는 자들이라고 전개한 것과 동일한 해에 쓰여졌다.”(225-6쪽)

동일한 해라는 건 1806년을 가리키는 것 같은데, 시기적으론 사드(1740-1814)의 말년이며, 그래서 <규방철학>은 그의 ‘철학’을 집약하고 있는 책이라 할 만하다. 사실 이 책은 <안방철학>이란 제목으로 국역돼 있지만, 역자가 참조한 것 같지는 않다(나는 절판된 그 책을 국립도서관에서 복사했었는데, 내 기억에는 마광수 교수가 서문인가를 썼다). 일곱 개의 대화로 구성돼 있는 이 책은 분량이 200쪽 정도이기 때문에, 읽기에도 부담이 없다(그러니까 책을 다시 낼 만하다는 얘기이다). 지젝이 인용하고 있는 대목은 세 번째 대화에 나온다.

인용에서 ‘천국의 불’ 혹은 ‘천국에서 온 불’이란 비유가 뜻하는 바는 도덕 법칙이고 양심이다(혹 역자는 ‘천국의 불’을 ‘향유’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따라서, 사드의 주인공인 ‘향락주의자’ 돌망스가 자신의 파트너인 외제니를 “도덕률의 홍수 속에 빠뜨리려고” 부른다는 것은 논리적으로/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이론서 번역에서 그런 경우는 대부분 오역이다). 도덕법칙을 향유하기 위해서? 영어 원문이 어떻게 돼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러시아어본을 다시 옮기면, 돌망스는 “우리의 가슴에서 불타고 있는 천국의 불을 정액의 물줄기(=홍수)로 끄기 위해서” 외제니를 부른다(그래야 말이 되지 않는가?).



러시아어본 <규방철학>(1992)은 이 대목에서 ‘정액’이란 말을 (사전에도 안 나오는) 은어로 썼다(*이 글이 씌어진 이후에 국역본 <규방철학>이 재번역돼 출간됐다). 그래서 짐작에 ‘빌어먹을’이라고 역자가 옮긴 것이 정액을 뜻하는 영어 은어이지 않을까 싶다. ‘거시기의 물줄기’. 아무래도 역자가 사드를 너무 칸트적으로 (점잖게) 읽어서 빚어진 오역이 아닐까 한다. 알다시피, 라캉의 ‘칸트를 사드와 더불어(Kant with Sade)’란 ‘교훈’이 뜻하는 바는 사드를 칸트적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칸트를 사드적으로 읽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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