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대학신문의 메인서평이 <레닌 재장전>(마티, 2010)을 다루고 있기에 스크랩해놓는다. '본격적인' 서평의 모양새여서 흥미롭게 읽었다. 필자는 홉스봄의 <혁명가>(길, 2008)와 아렌트의 <폭력의 세기>(이후, 1999) 등을 옮기고, <대중과 폭력>(이후, 1998)을 쓴 김정한 박사다.

대학신문(10. 04. 11) '레닌’이라 쓰고 ‘혁명’이라 읽기 

혁명은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일어나는 것이다. 한 천재적인 수완을 가진 개인이나 음모적인 비밀결사로 만들어지는 혁명은 없다. 그것은 다양한 사회적 힘들이 복잡하게 교차하는 정세 속에서 어떤 우발적인 사건이 도화선이 돼 일어날 뿐이다. 1917년 러시아혁명도 그 시작은 이와 다르지 않았다. 3월 8일(구력 2월 23일) ‘세계 여성의 날’에 식량 부족에 항의하는 여성들이 거리 시위를 벌였고, 이를 진압해야 할 일부 군인들이 시위에 동참해 부패의 온상인 관공서를 점령하면서 차르가 퇴임하는 ‘2월 혁명’이 일어났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갑작스런 상황이었다. 당시 레닌은 스위스의 취리히에 망명해 있었고, 1917년 1월의 한 연설회에서 “우리 나이 든 세대는 이제 다가올 혁명의 결정적인 전투를 보지 못하고 죽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레닌에게도 혁명은 죽기 전에 이루지 못할 꿈과 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2월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페트로그라드로 돌아온 레닌은 결정적인 한 걸음을 내디뎠다. ‘4월 테제’를 제시한 것이다. 그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을 앞세워 즉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차르 독재가 무너진 후 꾸려진 임시정부는 자유민주주의 성향의 인물들로 채워져 있었지만 러시아 인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니! 처음에는 볼셰비키조차 레닌의 구상에 냉담하게 반응했고, 그가 오랜 망명생활로 말미암아 정치적 감각을 상실했다고 여겼다. 하지만 결국 ‘4월 테제’는 대중들을 사로잡았고, 마침내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하고 공산주의를 선포하는 ‘10월 혁명’의 초석이 되었다.

레닌은 무엇을 한 것일까? 볼셰비키조차도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말하지 않을 때, 또는 멘셰비키처럼 그것이 시기상조라는 입장을 당연한 듯 고수하고 있을 때, 그는 대중들의 흐름을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항하는 것으로 전환할 길을 모색했다. 이는 근본적인 사고의 좌표를 전복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예컨대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자본주의가 ‘성숙’한 다음에나 가능하며, 그러므로 후진국인 러시아에서는 부르주아 혁명을 통한 자유민주주의 수립이 당면한 과제라는 당대의 ‘상식’을 뛰어넘어, 레닌은 혁명에 관한 모든 것을 새롭게 사고했다. 이것이 『레닌 재장전』의 핵심 전언이다. 현존 질서에 근본적으로 도전하는 정치적 기획에 대한 ‘사고금지’(Denkverbot)가 불문율이 된 오늘날, ‘레닌’이라는 이름을 다시 불러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유민주주의가 강요하는 ‘사고금지’를 무력화시키고 근본적인 사고의 좌표를 바꾸자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단순히 ‘레닌으로 돌아가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레닌’이라는 이름을 학계에 불러들이는 데 크게 공헌한 지젝이 말하듯이, 레닌을 반복한다는 것은 그의 말과 행위를 똑같이 되풀이한다는 것이 아니라, 진보적인 해방의 정치가 붕괴하고 상상할 수조차 없던 시대에 ‘혁명의 기획을 재창조하려는 레닌의 제스처’를 반복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레닌이 실제로 한 일이 아니라 하지 못한 일, 끝내 소련의 몰락으로 귀결했으나 세상을 바꿀 가능성의 문을 열었던 시도를 반복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금융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자본주의나 자유민주주의를 변혁하는 정치를 사고하지 못하는 한계를 돌파하는 데에서 시작될 것이다.

물론 이런 전체적인 주제에도, 이 책에 수록된 논문들은 대부분 2001년 독일에서 열린 한 국제콘퍼런스의 발표문들에 기초해 있어서, 모두 레닌을 재장전하고는 있지만 그 조준하는 방향은 저자에 따라 다양하고 차별적이다. 레닌의 정치가 지닌 현재적 의미를 탐색하는 글도 있고, 그의 철학적 입장을 되짚어보는 논문도 있으며, 레닌 하면 떠오르는 악명 높은 전위당 문제를 파헤치는 것도 있고, 단순히 레닌의 여러 한계를 소묘하는 데 머무는 것도 있다.

여기서 이 책에 담긴 수많은 내용을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그 가운데 인상적인 쟁점은 크게 두 가지를 꼽을 수 있겠다. 하나는 헤겔의 변증법이다. 예컨대 미카엘-마차스, 앤더슨, 쿠벨라키스가 지적하듯이, 레닌은 1914년 제2인터내셔널이 해체돼 세계적인 좌파 연대가 무산된 후 베른도서관에서 헤겔을 읽기 시작하는데, 이 헤겔의 변증법이 레닌의 정치적 사고를 전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이런 논조는 프랑스에서 구조주의 철학이 등장하면서 반헤겔, 반변증법의 기치가 대세를 이루었던 점과 대조적이다. 물론 지젝은 이미 오래전부터 마르크스, 라캉, 헤겔을 결합하는 철학적 작업을 계속해왔지만, 과연 레닌과 더불어 헤겔이 복권될 것인지 사뭇 지켜볼 일이다.  



다른 하나는 역시 국가 문제이다. 레닌 자신은 “모든 혁명의 중요한 문제는 국가권력이다”라고 말한 바 있지만, 라자뤼스나 네그리가 그러하듯이 최근의 국가 비판은 혁명을 국가권력의 장악으로 이해하는 것을 비판하고 ‘비국가주의 정치’를 요청해왔다. 그러나 이 책의 일부 저자들은 그런 시도가 국가권력을 너무 쉽게 기각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예컨대 벤사이드는 대항권력이라는 수사학으로 정치권력의 쟁취라는 문제를 제거함으로써 혁명의 난점을 회피하는 데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우리가 권력을 모른 척할 수는 있을 테지만, 권력이 우리를 모른 척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본격적인 논쟁이 없지만, 차후 ‘레닌과 헤겔’, ‘레닌과 국가’라는 쟁점에 대해서는 더욱 깊이 있는 검토가 이뤄져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맥락에서는 레닌을 반복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1980년대 말에 등장한 이른바 PD(민중 민주) 계열의 좌파들이 레닌주의를 모델로 삼아 전위당 노선을 추구했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물론 소련의 해체와 더불어 레닌주의 노선은 폐기됐지만, 그 유산은 오랫동안 좌파들을 악몽처럼 짓눌렀다. 이런 이유로 한국에서 ‘레닌에 대해 말하지 않기’라는 암묵적인 금기는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견고했다. 이와 관련해서는 『레닌과 미래의 혁명』에 실려 있는 2부의 난상토론을 일독해보길 권한다. 특히 2008년 촛불시위를 평가하면서 레닌이 우리에게 어떤 정치적 함의를 제시하는지 고민해볼 수 있는 유용한 자료이다.(김정한 박사_대안지식연구회 연구위원) 

10. 0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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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0-04-15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을 이렇게 소개하시니까 1만명이 안 낚이는 겁니다...포맷을 바꾸시면 어떨까요? <(지젝의) 혁명 고전 강의>, <그 괴물은 (레닌에게서) 무엇을 보았나>, <혁명을 부탁해> 뭐 이런...^^;; 썰렁한 흰소리 한 죄로 재빨리 도망갑니다.(이 댓글이 페이퍼에 문제가 되면 삭제요청을 해 주세요~ 아무튼 도망갑니다.)

로쟈 2010-04-15 22:46   좋아요 0 | URL
그 점은 저도 고민하고 있습니다. 기획중인 책도 있지만 당장은 곤란하기에 이렇게라도...^^;
 

어제 온라인에서의 블로거 활동에 관해 한 주간지와 인터뷰를 가졌다. 요즘 '1인 3역'을 계속해나가는 게 불가능하지 않나란 자기반성도 하던 차였는데(이러다간 조만간 침몰하지 않을까 싶다), 내친 김에 '로쟈'가 언론에 처음 노출된 게 언제였던가 찾아봤다. 온라인에서의 활동은 1999년부터였지만, 언론에 처음 이름이 오른 건 2003년 가을 지젝의 방한을 다룬 오마이뉴스 기사를 통해서였다('지젝'도 2001년 6월 한국경제의 한 칼럼에서 처음 이름이 비친다. 네이버 검색으로는 그렇다). 마침 지젝의 번역서 몇 권에 대한 서평을 올려놓던 시절이다. 그렇게 처음 기사화된 이름을 보고 좀 재미있으면서도 낯설게 느꼈던 듯싶다. 하지만 일회적이었고, 2007년 1월초 '오피니언 리더'로서의 '인터넷 서평꾼'을 다룬 한겨레 기사에서 언급된 이후에야 비로소 '로쟈'란 이름은 주목을 받는다. 한겨레21에 '로쟈의 인문학 서재' 칼럼을 연재하는 건 그해 8월부터다. '로쟈'란 이름을 언제까지 끌고 나갈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우려되기도 한다. 오래전 오마이뉴스 기사를 '아카이브' 자료로 챙겨놓는다.  

 

오마이뉴스(03. 10. 09) 어려운 지젝, 사람들 왜 모이나

지젝이 왔다. 그런데 과연 온 것인가. 자연적 실체로서 그는 비행기를 타고 입국하여 몇몇 강연을 진행 중에 있다. 오긴 온 것이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그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아니 오래 전에 도착하였으나 그 학문적 실체가 제대로 구성되거나 조명되지 않았다. 상상적 실재로 우리 주변에 머물러 있을 뿐, 지젝은 늘 오고 있는 중이다.

몇가지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사상계의 거목에 대한 탐사가 손쉬운 접근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말은 그가 단순히 '철학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최신의 서구 철학계(이 용어에 대하여 지젝은 거부하겠지만)가 모든 종류의 정보를 종횡으로 가로지르며 어마어마한 질량을 압착한 한 권의 사유물을 토해내기 때문이다. 어지간한 지적 바탕이 없고서는 그의 저작, 심지어는 목차조차 도대체 어떤 사유의 그물로 짠 것인지 짐작하기 어렵다.

플라톤에서 코소보 사태까지, 구조주의에서 공포소설까지, 그저 두루두루 아울러서 지식을 자랑하는 게 아니라, 거의 한 문장 속에 동시에 출현시켜 그 자체로 세계의 복합성을 문자로 드러내버리는 지젝의 사유는 전공자는 물론이거니와 '국영수 중심'으로 성장해온 우리의 인문 환경에서는 도무지 해독 불가능한 암호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지젝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적도 있는 박학다식한 동구권 학자'에 머무르고있다.

방한한 지젝, 하지만 그의 학문은 여전히 오고 있는 중
두번째 이유로는 성실하지만 부주의한 번역물과 불성실하고 빈약한 오역물이 지젝에 대한 관심을 차단시킨다. 문학과 영화에 대한 약간의 관심만으로도 충분히 그 착오를 가려낼 수 있을 <환상의 돌림병>(인간사랑)이나 <향락의 전이>(인간사랑)의 오역은, 저작권법에 따라 다른 이가 좀더 섬세하게 번역할 수 있는 기회를 차단했다는 점에서도 문제적이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 지젝의 저작에 대한 리뷰를 쓴 '로쟈'씨가 작년 12월 말에 쓴 내용에 따르면 <향락의 전이>(인간사랑)의 경우 "일반 독자가 이 교양서를 읽어낼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고 한다. 또한 "지젝의 작업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이 역서는 짜증만을 불러일으키며, 처음으로 그에게 다가가는 독자들에겐 고역만을 선사한다"고 쓰고 있다.

이 책은 원래 초역판이 2001년 7월에 출간되었다가 번역 과정의 미비점을 보완하여 2002년 9월에 '개역판'으로 내면서 책값을 무려 9000원이나 인상하여 하드커버로 출간하였는데, 의미있는 교정과 보완은 전무하다는 것이 로쟈씨의 의견이다.

세번째 이유는 단순하면서도 복합적인 이 세계의 불가해한 속성 때문이다. 그의 저작이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는 것은 지적 유희가 아니라 전체를 조망하기 위한 다양한 접근의 실례이다. 현대사회의 본질은 (그것이 미국이든, 이라크든, 슬로베니아든, 한국이든) 기본적으로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적인 억압적 융합과 긴장과 대립에 따라 매우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현상 속에 감춰져 있으므로 그 실체에 대한 접근은 어쩔 수 없이 다양한 이론적 바탕을 필요로 하게 된다. 그의 말대로 전통적인 이데올로기의 억압은 사라지거나 축소되지 않고 일상 속에 깊이 스며든다. 그리고 '귀환'한다. 다양한 시선이 필요한 이유가 된다. 



지젝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세 권의 책
지젝과 더불어 사색하는 것은 흥미롭지만 괴롭다. 누구보다 소통을 열망하는 학자지만 우리의 허약한 지적 기반은 의미있는 최소한의 소통, 곧 '독서'조차 불편하게 만든다. 지젝은 말한다. 현대는 '카페인 없는 커피, 알코올 없는 맥주, 아편을 대신한 마리화나, 사이버 섹스 등 실체가 없는 가상현실에 대해 열망'한다고.

그에 따른 반작용으로 현대는 혁명, 테러리즘, 파시즘, 스탈린주의 등 '실재에 대한 강렬한 열망에 따른 근본주의적 충동'에 사로잡힌다고 지젝은 말한다. 따라서 그 사이 제3의 길, 곧 자유·다양성·인권·관용 등의 민주적 가치를 모색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이렇게 '정치적으로 올바른' 발언만 따로 추스르고, 그 정치적 발언록의 즙만 짜낼수록 지젝은 우리로부터 멀어진다. 그러므로 세 권만 따로 추려 읽도록 하자

<삐딱하게 보기>(시각과언어. 김소연 옮김). 홀로코스트, 후천성 면역결핍증, 체르노빌, 그리고 현실 사회주의 몰락 이후를 성찰하는 지젝의 진지하면서도 날렵한 시선이 충만한 저작이다. 라깡식 판독법으로 유토피아에 대한 열망을 경쾌하게 드러내준다.

<항상 라깡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새물결. 김소연 옮김). 지젝이 영화학자들과 더불어 라깡의 정신분석학 방법론으로 히치콕의 영화를 분석한 책이다. 리얼리즘,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이 골고루 지적 소유권을 주장하는 히치콕 영화의 분석을 통해 현대 사회의 주체 형성을 다루고 있다.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한나래. 주은우 역). 할리우드로 집약되는 현대 대중문화의 풍부한 사례를 통해 라깡을 재구성한다. 라깡을 사이에 두고 푸코, 하버마스, 롤스 등이 얽힌다.(정윤수/박형숙 기자) 

10. 04. 15. 

P.S. 본기사에 딸린 박스기사에는 이런 지적도 들어 있다. "한편 지젝 학문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헤겔, 마르크스, 프로이트, 라깡 등에 대한 출판 인프라가 빈약한 우리네 인문학 풍토에서, 그들을 '뛰어넘는' 지젝에 대한 과도한 열광은 또 다른 '지적 패션'이라는 지적도 들린다." 그간에 '빈약한 출판 인프라'가 괄목할 만큼 좋아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지젝의 책은 이후에도 매년 3-4권씩 출간됐고, 올해도 예외는 아닐 듯하다. 지젝의 이미지를 아바타로 내걸고 '로쟈'는 그 '지적 패션'을 '지적 일상'으로 바꾸려고 나름 애써왔지만(1만명의 독자층을 만드는 것이 잠정적인 목표치가 될 수 있다), 낙관적으로 말해서 전망이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10년, 혹은 20년이 걸리면 가능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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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0-04-16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어를 첫머리에 쓰면 안보이나요? <하우 투 리드 라캉>을 엊그제 배달받고 들여다봤는데 제게는 읽는 것이 괴롭지만 흥미롭습니다. 라캉의 다음을 읽는데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로쟈 2010-04-16 01:11   좋아요 0 | URL
어느 책인지는 모르겠지만(네 < >로 묶으면 안보이게 되더군요) 흥미로움이 괴로움보다 점점 커지기를 바라겠습니다.^^

푸른바다 2010-04-16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3년 서울대에서 지젝이 강연할 때 가보셨는지요?^^

로쟈 2010-04-16 22:22   좋아요 0 | URL
물론이지요.^^
 

이번주 교수신문에 실은 동향기사를 옮겨놓는다. 슬라보예 지젝에 관한 글을 청탁받고 처음엔 사양했지만 결국은 쓰게 됐다. 대신에 마감에 쫓기느라 <시차적 관점>을 다룬 대목은 예전에 쓴 글을 약간 편집해서 옮겨놓았다. 대표작에 대한 소개도 포함해달라는 주문이 있어서다. 기사의 첫문단은 편집자의 멘트이다. 덧붙여, 현재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은 품절상태인데, 만약 절판된 거라면 조만간 새 번역본이 출간되면 좋겠다...  

교수신문(10. 40. 12) [흐름] 국내 학술출판계의 아이콘 ‘지젝’  

국내 학술번역서 리스트 맨 앞에 놓인 이름은 누구의 것일까. 슬라보예 지젝이다. 지젝 열풍까지는 아니더라도 여전히 번역계에는 확실히 그가 ‘잘 팔리는’ 아이콘이다. 문제적인 철학자이자, ‘가장 위험한 철학자’로 평가받는 지젝, 과연 그가 지식사회에 ‘아이콘’으로 자리잡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지젝을 읽는 데는 이런 문제의식이 놓여 있다.   



하나의 유령이 우리의 인문학 동네를 떠돌고 있다. “마돈나가 싱글 앨범을 발표하는 것보다 더 정기적으로 책을 발표”하면서 “동시대의 정치적 무관심에서부터 이웃집 닭한테 잡아먹힐 걱정을 하는 남자에 관한 조크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지절대는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그 유령의 이름이다. 슬로베니아 출신의 이 ‘괴물’ 철학자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1989)을 통해서 영어권 지식사회에 등장했을 때, 그가 우리 시대의 가장 문제적인 철학자이자 ‘가장 위험한 철학자’가 되리라고 점친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슬로베니아 라캉학파의 일원으로 지젝을 처음 소개하면서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조차도 “포스트 마르크시즘적 시대에 사회 민주주의적 정치 프로젝트를 구축하는 문제”에 대해 ‘이론적’으로 관심이 있는 독자에게 필독서가 되리라고 데뷔작의 의의를 한정했었다. 하지만 지젝은 이듬해 슬로베니아 대선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이후에 더 본격적으로, 그리고 전방위적으로 열정적인 ‘이론투쟁’을 개시한다. 그 결과 영어로는 이미 60권에 육박하는 단행본을 출간했고, 국내에 번역·소개된 것만 해도 30종이 넘는다. 가히 ‘지젝 현상’이라고도 할 만한 이러한 현황의 이면에는 그의 부지런한 다산성 못지않게 그의 이론적 사유에 대한 지식사회의 수요도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MTV 철학자’라는 일부의 비아냥거림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이론-실천 잇는 지적 다산성과 사유의 매력
그렇다면 무엇이 그에 대한 이러한 열광을 낳는 것일까. 개인적으론 그를 통해서 비로소 헤겔의 철학과 라캉의 정신분석에 대해 진지한 흥미를 갖게 됐다는 걸로 이유를 대신할 수 있지만, 애초에 이것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부터 지젝이 목표로 한 바이기도 하다. 그는 이데올로기 이론에 기여하고 싶다는 바람 외에 라캉 정신분석의 기본개념에 대한 개설을 제공하는 것과 ‘헤겔로의 회귀’를 목표로 내세웠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세 가지가 서로 연계돼 있다는 점이다. 그는 ‘헤겔을 구출하기’ 위한 유일한 방안이 라캉을 경유하는 것이라고 믿으며, 이러한 라캉적 독법과 헤겔의 유산이 이데올로기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가능하게 해줄 것이라고 판단한다. 비록 “민주주의는 모든 가능한 체제들 중에서 최악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어떤 것도 그보다 낫진 않다는 것이다”라는 처칠의 주장을 반복하던 초기의 입장은 곧 철회하지만, 이데올로기의 종언 이후,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그의 집요한 탐색은 그가 줄곧 견지하고 있는 과제다.   

흔히 ‘슬로베니아 라캉주의 헤겔주의자’라고 불리지만 지젝의 사유에는 마르크스와 대중문화가 이론적 틀로 더해진다. 그는 가장 난해한 두 사상가, 헤겔과 라캉을 자유자재로 다루면서, 헤겔을 어떻게 라캉으로 읽을 수 있으며, 반대로 라캉은 어떻게 헤겔로 읽을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독해가 우리 시대의 이데올로기적 지형과 대중문화를 이해하고 돌파하는 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물론 이러한 작업에 대해서 그의 담론이 세련된 라캉적 분석과 덜 해체된 전통적 마르크스주의 사이에서 분열돼 있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그의 철학 ‘퍼포먼스’가 고상한 철학을 대중문화로 더럽힌다는 비난도 가해진다.

하지만 라캉을 따라서 ‘메타언어’는 없다고 주장하며 고상한 담론과 범속한 담론의 이분법을 의도적으로 해체하는 지젝은 그러한 비판에 별로 개의치 않는다. 그의 헤겔 독법에 유보할 지점이 많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헤겔에 대한 새로운 독해가 자신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기여라고 응수한다. 굳이 그러한 철학적 기여가 아니더라도 지난 20년간 현 세계의 다양한 정치경제적 이슈에 대해 지속적인 철학적 성찰과 정신분석학적 분석을 제시하고 있는 철학자가 지젝 말고 더 있는지 궁금하다. 분명 손에 꼽을 정도이지 않을까. 게다가 그는 가장 ‘대중적인’ 철학자가 아닌가!  



대체 지젝은 어떤 사유와 이론을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인가. 철학적 이슈와 정치적 쟁점을 종횡무진하는 지젝의 행보와 재담을 모두 따라가는 건 지젝의 애독자라도 어려운 일이지만 다행히도 그는 자신의 주저를 몇 권 꼽아놓은 적이 있다.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외에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까다로운 주체』, 그리고 『시차적 관점』까지 네 권의 책이 그것이다. 그 중에서도 『시차적 관점』은 “철학이란 문제를 다시 정의하는 것”이란 그의 주장에 충실한 책으로 지젝의 이론적 사유를 따라가거나 그와 대결하기 위해서라면 필독해야 할 책이다.

지젝이 말하는 ‘시차’란 과학용어로 동일한 대상을 서로 다른 곳에서 보았을 때 서로 다른 위치나 형상으로 보이는 것을 말한다. 가장 단순하게는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을 각각 한쪽씩 가리고 보았을 때 나타나는 약간의 차이가 시차다. 서로 다른 시각(관점)이 만들어내는 차이를 시차라고 하면, 이것은 다양한 영역에서 나타난다. 양자물리학에서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 신경생물학에서 의식현상과 회백질 더미, 철학에서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 정신분석학에서 욕망과 충동 사이의 간극, 그리고 성적 삽입의 대상이면서 출산의 기관이기도 한 질(바기나)의 시차 등등. 지젝은 이러한 두 층위 사이에 어떠한 공통 언어나 기반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변증법적으로 매개·지양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율배반’을 시차로 재정의한다. 그리고 철학과 과학, 정치라는 세 가지 주요 양식에 나타는 시차적 간극에 개념적 질서를 부여하고자 한다.   



‘시차적 관점’이라는 아이디어는 가라타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틱』에서 얻어오는데, 이미 『이라크』(2004)에서도 ‘시차’란 개념을 사용해 이라크전쟁의 ‘진리’를 설명한 바 있다. 곧 “민주주의는 인류에 대한 신의 선물”이라는 부시의 말이 집약해주고 있는 대로 서구민주주의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믿음이 이 전쟁의 첫 번째 이유이고(상상계), 새로운 세계질서 안에서 미국의 헤게모니를 주장하려는 것이 두 번째 이유라면(상징계), 석유의 안정적인 공급이라는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세 번째 이유(실재계)라는 것이다. 여기서 요점은 어느 하나가 나머지의 ‘진리’라는 게 아니라, ‘진리’란 관점의 이동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것이 말하자면 시차적 관점에서의 진리다.

이러한 시차적 관점의 도입을 통해서 지젝은 궁극적으로 변증법적 유물론을 재건하고자 한다. 그가 보기에 시차란 개념은 변증법적 사유의 장애물이 아니라 그 전복적인 핵심을 간파하도록 해주는 열쇠다. 이 열쇠는 어떻게 활용될 수 있을까. 가령 ‘저항’의 교착상태에 대해 생각해보자. 지젝은 알랭 바디우를 따라서 시스템이 더욱 부드럽게 작동하게끔 만들어주는 국지적 행동에 참여하기보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오늘날 진정한 위협은 수동성이 아니라 유사-행동이며, ‘능동적’이고 ‘참여적’이 되려는 이 충동은 실제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은폐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視差’ 개념 통해 변증법적 유물론 재건 시도
예컨대, 사람들은 언제나 개입해 ‘뭔가’를 하고, 학자들은 무의미한 ‘논쟁’에 참여한다. 가령 자유주의적 좌파 또는 민주적 사회주의자들도 혁명을 말하지만, 그들은 혁명을 위해 치러야 할 실제적 대가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자신의 학술적 특권이 전혀 위협받지 않는 한도 내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옹호하거나 급진적인 담론을 쏟아내는 데 열중하는 ‘강단좌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한 발언을 뒷받침하고 있는 발언 위치, 곧 물적 토대와 시스템 자체는 결코 건드리지 않으며 위험에 빠뜨리지도 않는다. 

이러한 유사-행동에 대해 지젝은 비판적인 참여와 행동을 통해서 권력을 쥔 자들과 ‘대화’에 나서기보다는 ‘불길한 수동성’으로 퇴각하는 것이 오히려 진정 어려운 일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달리 제국주의, 식민주의, 세계대전이라는 1914년의 파국적 조건 속에서 혁명의 기획을 재창조하려고 했던 레닌의 제스처를 오늘날 반복해야 한다는 그의 요구와도 맞닿아 있다. 사회주의 운동사에서 전례 없는 패배의 국면이었던 1914년에 레닌은 좌절하지도, 그렇다고 즉각적인 정치적 해답을 내놓지도 않았다. 대신에 스위스 베른의 도서관에 틀어박혀 이듬해 5월까지 헤겔의 『논리학』 연구에 매진했다. 알다시피, 그가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키게 되는 것은 불과 그 2년 뒤의 일이다. 

10. 0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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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비의 알림
    from seoulrain's me2DAY 2010-04-16 10:23 
    슬라보예 지젝이라는 숭고한 대상 — 로쟈
 
 
poptrash 2010-04-14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데올로기라는... 은 출판사에 전화한 결과, 절판이고 다시 낼 계획도 없다고 해요. 이유가 뭘까요. 수요가 없는 책도 아니고, 인간사랑 출판사 중에서는 잘 나가는 축에 드는 책이었을텐데... 계약 만료라면 다른 곳에서 계약을 했다는 이야기인데, 과연 언제 나올런지.

로쟈 2010-04-14 00:18   좋아요 0 | URL
짐작엔 계약기간이 만료된 거 같아요. 출판사만 바뀔지, 역자도 바뀔지는 두고봐야겠네요. 몇몇 대목을 교정하면 예전 번역도 나쁘진 않았는데요...

구보 2010-04-14 0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를 이제 막 읽었습니다.
앞으로 가서 다시 읽기를 반복하며 진도 나갔는데 로쟈님 글로는 왠지 정리가 잘 되네요.
몇몇 문장은 요령부득이라 과외라도 받고 싶습니다^^

로쟈 2010-04-14 23:33   좋아요 0 | URL
저도 아직 뒷부분은 남겨놓고 있는데요.^^;

빵가게재습격 2010-04-14 0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대중적인'이 '대중이 쉽게 읽을 수 있고 좋아할 수 있는'은 아니죠?!^^;;; 뒤적거려보다가 혼났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레닌의 제스처'가 좀 선정적인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체제가 생각만큼 견고한 게 아니다. 체제를 넘어서는 질적변화는 단번에 포착될 수 있다. 란 암시를 주고 싶었던게 아닐까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만, 굳이 레닌이라는 거인까지 나와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분명 제가 이해 못해서 그런 것이겠지만요.^^;;) 페이퍼 잘 읽고 가면서 몇 마디 끄적이고 싶어 댓글 남겼습니다. 아 그리고 외람되지만, 로쟈님 서재에 '책을 너무 읽어야 해서 자살'해야 하는 즐거운 비명이 가득 차기를 기원합니다. 그 비명 들으러 자주 들를께요. 건강하세요.^^

로쟈 2010-04-14 23:34   좋아요 0 | URL
네, 비명은 아니더라도 신음은 넘쳐나는 것 같습니다. 흠...

푸른바다 2010-04-14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이 책방에 널려있을 때는 왠지 하나의 유행서에 불과한 것 같아서 거들떠 보지도 않았는데 로쟈님 덕분에 관심을 갖게되어 막상 읽어보려고 하니 절판되어 구하기 힘든 책이 되어 버렸더군요. 이 책은 헌책방에서도 매우 드문데, 저는 운좋게 헌책을 구해서 작년 중하순 쯤에 완독을 했습니다^^

로쟈 2010-04-14 23:35   좋아요 0 | URL
지젝의 남은 책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푸른바다 2010-04-15 09:51   좋아요 0 | URL
위에 이미지를 로드하신 지젝의 책들 중에 두권 빼고 모두 소장하고 있습니다^^ 이미지를 로드하지 않으신 책들도 몇 권 더 가지고 있지요. 그 책들을 모두 읽으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지 모르겠습니다^^

로쟈 2010-04-15 18:42   좋아요 0 | URL
그러시군요. 그게 몇 권만 완독하셔도 되긴 합니다.^^

허스키 2011-11-07 0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색하다보니 김서영씨께서 번역하신 <시차적 관점>의 번역에 대해 문제점을 지적하는 글들이 몇몇 보이던데 로쟈님께서 보시기엔 어떤가요? (워낙 오래된 포스팅에 붙이는 질문이라 보시게 될지 모르겠네요)
 

저녁강의가 끝나고 집으로 오는 좌석버스에서 내일자 한겨레를 읽다가 점찍어둔 기사를 옮겨놓는다. 포퓰리즘에 관한 두 권의 책이 근간 예정이라는 걸 알려준다.   



한겨레(10. 03. 18) 포퓰리즘 민주주의 ‘병리현상’ 아닌 ‘필수요소’ 

4대강 포퓰리즘, 세종시 포퓰리즘, 교육 포퓰리즘, 등록금 포퓰리즘, 무상급식 포퓰리즘…. 무슨 말이든 ‘붙이는 족족’ 언표화돼 인구에 회자되니, 말 그대로 ‘언어의 인플레’가 따로 없다. 정견이 다른 상대방을 향해 언제든 ‘포퓰리스트’란 화살을 날려보낼 준비가 돼 있다는 점에서도 집권당과 야당, 좌파와 우파가 다르지 않은데, 이것이 한국사회에서 갖는 의미는 비교적 명확해 보인다. 포퓰리즘이란 상징이 좌파를 공격하기 위한 우파의 전유물이던 시대는 지났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포퓰리즘은 여전히 ‘선동’과 ‘중우정치’, ‘대중영합주의’라는 부정적 정치현상을 일컫는 비난의 수사, 경멸의 언어로 통용된다



눈여겨볼 대목은 포퓰리즘 이론의 진원지인 서구 학계가 최근 포퓰리즘을 현대 정치의 병리적 이상 징후로만 바라보던 관점에서 벗어나, ‘현대정치의 일반화된 특성’이자 ‘민주주의의 필수불가결한 구성요소’란 차원에서 새롭게 조명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는 점이다. 이런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학자가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이론>으로 유명한 아르헨티나 출신의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자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오른쪽 사진)와 멕시코 출신의 소장 정치학자 벤자민 아르디티(왼쪽)인데, 포퓰리즘을 재해석한 이들의 문제작인 <포퓰리즘의 근거에 관하여>와 <자유주의 가장자리의 정치>가 각각 후마니타스와 그린비 출판사에서 출간을 기다리고 있다. 

이들의 이론이 주목받는 것은 ‘인민에 대한 호소’나 ‘선동적 지도자에 의한 감성 자극 정치’를 포퓰리즘의 특성으로 규정해온 종래의 시도들이 20세기 말 본격화 된 정치지형의 변화 때문에 설득력을 잃게 된 상황과 무관치 않다. 냉전이 해체되고 좌·우파의 구분이 모호해지면서 대부분의 서구 정당은 전통적인 계급노선을 포기하고 국민 전체를 상대로 지지표를 구하는 대중주의 전략을 취하게 됐는데, 이에 따라 정책이나 논리보다는 수사와 이미지로 유권자의 감성을 움직이는 정치가 세력과 진영을 막론하고 각광을 받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실제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오바마 진영이 취한 선거 전략이나 이후 금융위기 수습 국면에서 오바마 행정부가 펼친 정책들 역시 전형적인 포퓰리즘 양상을 띠고 있다는 데 이견을 다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렇다면 라클라우는 대체 포퓰리즘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그의 포퓰리즘론은 “모든 정치는 기본적으로 포퓰리즘”이란 진술 안에 집약돼 있다. 그가 포퓰리즘을 정치와 동일시하는 것은, 포퓰리즘이 주어진 질서에서 소외되거나 배제된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그들을 새로운 정치적 주체로 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요컨대 좌파든 우파든 그들이 추구하는 정치는 기존의 합의구조에서 밀려난 다양한 인민의 요구를 관통하는 통일된 슬로건을 제시하고, 이를 통해 그들을 기존 질서에 대항하는 정치 주체로 맞세우는 전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다를 게 없다는 얘기다. 이런 포퓰리즘의 세 가지 유형으로 라클라우는 아르헨티나의 페론주의와 미국 인민당, 터키의 케말 파샤를 꼽는데, 이들은 각각 좌와 우, 중도파의 포퓰리즘을 대변한다.

책을 번역한 임승준 인권의학연구소 연구원(정치학 박사)은 “라클라우의 저작은 대표작인 <사회주의와 헤게모니 전략> 이후 자신의 오랜 이론활동을 마무리하는 작업으로, 소외된 대중을 정치적 주체로 구성하는 포퓰리즘이 일탈이나 비정상이 아니라 모든 정치 행위를 관통하는 근원적 특성임을 보여주는 중요한 저작”이라고 평가한다. 



반면 아르디티는 포퓰리즘을 ‘민주주의의 증상’으로 이해한다. 여기서 ‘증상’이란 개념은 프로이트에게서 빌려온 것인데, 자아의 형성을 위한 본능의 억압과정에서 만들어지는 ‘대리표상’이자 ‘내부의 주변부’ 같은 것이다. 요컨대 포퓰리즘이란 민주주의에 이질적인 어떤 것이나 적대적 타자가 아니라, 민주주의에 속하면서 동시에 민주주의에 불안과 소요를 일으키는 ‘민주주의의 내적 주변부’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아르디티의 판단 근거는 민주주의에 내장된 이중성이다. 민주주의는 일상적으로는 정치인·관료 등 전문가 집단에 의해 관리되고 운영되지만 동시에 선거라는 대중의 직접 참여를 통해 자신의 정당성과 작동 근거를 확보해야 한다. 이 때문에 민주주의는 정치의 영역 안으로 주기적으로 대중의 개입을 초래하게 되는데, 이런 이중성이야말로 포퓰리즘의 존재론적 뿌리가 된다는 게 아르디티의 견해다. 따라서 민주주의가 이 두 측면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포기하지 않는 한, ‘인민 의지의 직접적 표현에 대한 열망’으로서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에서 결코 사라질 수 없다고 아르디티는 단언한다.

그러나 이들의 포퓰리즘 재해석 역시 약점은 있다. 진태원 고려대 연구교수는 “라클라우의 재해석은 포퓰리즘을 정치 일반과 무리하게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며 “이 경우 포퓰리즘이 아닌 것은 정치가 아니라거나, 좌파의 포퓰리즘이 극우파의 포퓰리즘(심지어 파시즘)과 아무런 차이도 갖지 않는다는 결론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고 꼬집는다. 하지만 이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포퓰리즘 다시보기’가 오늘의 변화된 지형에서 갖는 정치적 의미는 반감될 수 없다고 진 교수는 말한다. 가난한 이들을 정치의 영역에서마저 추방하고 배제하는 신자유주의의 ‘반(反)정치’가 지속되는 한 포퓰리즘에 드리운 어둠과 비합리의 그늘을 걷어내려는 사상적·이론적 신원작업 역시 꾸준히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이세영기자) 

10. 03. 17.  

P.S. 라클라우의 <포퓰리즘의 근거에 관하여>는 <레닌 재장전>(마티, 2010)에 실린 지젝의 글 '오늘날 레닌주의적 제스처란 무엇인가: 포퓰리즘의 유혹에 맞서'에서 자세하게 검토/비판하고 있어서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는 책이다(국내서로는 서병훈 교수의 <포퓰리즘>(책세상, 2008)이 있다). 다지원에서의 강의도 있고 해서 이달 안으로 출간되면 좋겠다. 참고로, 기사에서 오른쪽 인물사진은 '에르네스토 라클라우'가 아니라 '리처드 로티'다. 비슷하게 보여서 담당자가 혼동한 모양이다. 아래가 라클라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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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하는 법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3-19 11:53 
    지방선거를 앞둔 때문인지 정치 관련서가 많이 나오고 있는데, 정치인들이 홍보용 책자도 있지만 정치이론서나 비평서도 드물지 않다. 인터넷 논객으로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안병길 박사의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방법>(동녘, 2010)도 그런 범주에 속한다. '대통령도 모르는 자유민주주의 바로 알기'가 책의 부제인데, 대략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하는 법'으로도 읽힌다. 포퓰리즘에 관한 참고사항이 있어서 메모해두
 
 
비로그인 2010-03-18 0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빌딩 숲 콘크리트 바닥에 꽃들이 참 많이도 뒤엉켜 피었네^^ 참! 멋진 사진..

로쟈 2010-03-18 09:21   좋아요 0 | URL
그런 시절이 있었죠...

푸른바다 2010-03-18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 새번역본은 작년 출간 예정이었는데 왜 안나오는 지 모르겠군요.^^ 그 이후 많은 논의의 바탕이 된 '현대의 고전'인 것 같은데... 번역본 기다리다 지쳐서 원서라도 사서 볼까 고민 중입니다^^

로쟈 2010-03-19 10:42   좋아요 0 | URL
네, 나온다던 책 나오지 않고, 네요...

비로그인 2010-03-19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혹시,라클라우의 사진으로 업로드하신 것이,실은 리차드 로티의 그것이 아닌지요?^^;아무리 봐도 로티의 사진으로 보여서 구글에서 라클라우의 이미지를 검색해보니 아뿔싸! 둘이 너무도 닮은 얼굴이네요ㅠ 지나가는 길에,외람되이 로쟈님의 페이퍼에서 '옥의 티'하나 발견하여 폭로(?)하고 갑니다^^;

로쟈 2010-03-19 10:42   좋아요 0 | URL
한겨레 기사에도 제가 올려놓은 사진으로 수정돼 있던데요. 외모는 비슷하지만 인상이 좀 다릅니다...

비로그인 2010-03-19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가요? 다시 보니까 그런 것도 같네요. 라클라우가 좀 더 꼬장꼬장하게 생긴 것같은^^;모쪼록 로쟈님 환절기에 감기 조심하시고...참 그런데 로쟈님의 빼어날 지젝 번역은 단행본으로 언제쯤 볼 수 있을까요? 무척이나 고대하고 있습니다만^^

로쟈 2010-03-20 09:16   좋아요 0 | URL
번역은 저도 고대하고 있지만 일들의 쓰나미 때문에 좀 미뤄지고 있습니다.--;

하영-이룰수없는아련한첫사랑- 2010-03-19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같은 세태에서는 포풀리즘이 오히려 필요하다고 느껴지는 건 왜일까요? 누가 우리 편 좀 들어줬으면 좋겠다(?)는 느낌 말입니다.^^
내용과 관계없지만 늘 궁금했던 거 여쭙니다. 저희 같은 지식 없는 사람들이야 여기나 파란 여우님 같은 분들의 권유(?)로 책을 선택하면 되는데...(값없이 얼마나 큰 일을 해주시는지~믿을만한 분들의 소개가 있어야 안심하고 책을 집어들 수가 있게 되어 버렸으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읽을 책을 고르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워낙 부지런하신 분들이라...다 따라가려면 직업도 버리고 책속에서 헤엄치는 즐거운 삶이라야 가능할 듯합니다.) 이전부터 있던 책들,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번역서, 다양한 장르의 책들이 있는데 로쟈님은 어떤 기준으로 책을 선택하고 추천(-제가 여기서 대부분의 책을 추천받고 있기에...)하시는지요^^ (-믿을 만한 작가, 번역가, 출판사의 삼박자이면 금상첨화이겠요-)

로쟈 2010-03-20 09:17   좋아요 0 | URL
관심도서는 언론의 리뷰와 제 관심사에 따라 고르고 있습니다. 일률적인 기준이 있는 건 아니고요. 그냥 오래하다 보면 생기는 '감'입니다.^^;

하영-이룰수없는아련한첫사랑- 2010-03-20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그 단순하지 않을 감...부러울 따름입니다.^^
 

중앙대학교 독어독문학과와 독일연구소가 주최하는 학술 콜로키움 '중앙게르마니아'의 이번 학기 일정을 소개한다(http://ikdk.net/germania.html). 이번주 3월 19일(금)부터 3주에 한번 꼴로 진행이 되는데, 세번째 순서가 슬라보예 지젝이고 나는 지난 겨울에 발표자로 초청을 받았다. 일정을 확인하기 위해서 중대신문의 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중대신문(10. 02. 28) 2010 학내 콜로키움 프리뷰 : 중앙게르마니아  

독어독문학과와 독일연구소가 11회에 거쳐 공동으로 기획 시행해온 <중앙게르마니아>가 올해는 21세기 담론 지형에 대해 탐구한다. 류신 교수(문과대 독어독문학과)는 “과거에 포스트모더니즘이 폐기한 진리들인 ‘역사’, ‘정치’, ‘윤리’ 등을 살아있는 현역 학자들의 책들로 재조명 하려고 한다” 고 말하였다.   

올해 첫번째 일정인 3월 19일엔 프랑스 학자인 자크 랑시에르의 『감성의 분할』이 예정되어 있다. 『감성의 분할』은 부재로 “미학과 정치”를 내세우는데, 이는 랑시에르가 『무지한 스승』에서 얘기한 것과 유사하다. 랑시에르는 『무지한 스승』에서 현재 교육의 문제점을 교육이 아닌 정치로 삼았었다. 이와 유사하게 예술에서도 정치와 연관시켜서 설명한 책이 바로 감성의 분할이다. 자크 랑시에르의 『감성의 분할』은 경희대 이택광 교수가 진행할 예정이다.   

그리고 4월 9일엔 이탈리아의 학자인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가 준비되어 있다. 『호모 사케르』는 『감성의 분할』과는 다르게 생명과 정치에 대하여 풀어내는 책이며 연세대 박진우 교수가 진행한다.   

그리고 4월 30일에는 동구권의 지성이라 불리는 슬라보예 지젝의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로 선택되었다. 지젝은 라캉과 마르크스 그리고 헤겔을 접목한 학자로서 책 제목의 ‘대의’는 마르크스를 지칭하며 한림대 이현우 교수가 진행할 예정이다.   

5월 14일에는 노르베르트 볼츠의 『구텐베르크 은하계의 끝에서』로 정해졌다. 『구텐베르크 은하계의 끝에서』는 유현주 교수(첨단영상대학원 영상예술학과)가 맡는다. 유현주 교수는 “볼츠는 문자매체와의 결별과 동시에 미디어믹스 시대가 왔다고 이야기한다. 볼츠의 글을 택한 이유는 볼츠가 현대시대를 매력적으로 해석하였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마지막 6월 4일에는 한스 요아스 『행위의 창조성』으로 막을 내린다. 『행위의 창조성』은 현 사회과학계의 합리주의적 행위이론과 진화론적 근대화 모델에 대한 깊이 있는 비판을 담은 저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중앙게르마니아는 대학사회에서 인문학의 위상이 낮아진 현실을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동시에 인문학의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콜로키움이란 ‘함께 모여 이야기한다’는 라틴어 콜로키움의 어원적 의미에 따라 지적,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동등한 자격으로 함께 모여 이야기하는 자리라는 뜻이다. 2000년도 당시엔 콜로키움이라는 단어는 유럽 대학들에서는 상당히 익숙한 반면 국내대학에서는 심포지엄이나 학술대회로 일축되었다. 이로 인해 학생들의 참여가 낮아지고 결국 인문학이 위기를 맞게 되었다고 판단한 독어독문학과와 독일연구소에서는 콜로키움이라는 단어를 필두로 지정 토론자 없이 참석자 모두가 동등한 자격으로 담론 생산의 현장에 직접 참여하는 ‘끝장 토론’의 문화를 만들어 냈다. 중앙게르마니아의 성공은 다른 학과와 다른 대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중앙대 안에서는 영문과 사회학과 등에 학부생이 참여하는 정기 콜로키움이 생겼고, 서울대 독일어문화권 연구소도 2005년부터 ‘현대를 다시 읽는다’는 주제로 관악 블록세미나를 시작했다. 중앙게르마니아의 목표는 학생들에게는 생소한 인문학에 대해서 깊이 있고 즐겁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학생들에게 지적 자극을 주고, 이를 바탕으로 국내 대학들에서 인문학이 살아 숨쉬는 풍토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10. 03. 15. 

 

P.S.중앙게르마니아 콜로키움의 결과물은 책으로 묶인 것도 있다. <현대문화 이해의 키워드>(이학사, 2007) 같은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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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민주주의에서 신의 폭력으로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5-01 00:13 
    엊저녁에 중앙게르마니아 강좌 강의가 있었다. '21세기 담론의 지형'이란 전체 주제에서 내가 맡은 건 슬라보예 지젝의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그린비, 2009)였다. '슬라보예 지젝과 '잃어버린 대의'에 대한 옹호'라는 발표문 가운데, 마지막 절은 <민주주의는 죽었는가?>(난장, 2010)에 실린 지젝의 글 가운데 후반부를 발췌한 거였다. 따로 주석을 붙일 만한 시간이 없었지만, 그냥 읽어도 대충 지젝의 주장
 
 
노이에자이트 2010-03-16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림대 교수로 소개되어 있는 게 눈에 들어옵니다.

로쟈 2010-03-16 23:23   좋아요 0 | URL
앞에 '연구'를 빼먹었네요...

hikrad 2010-03-16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한림대에 오신 줄 몰랐네요. 춘천에도 오시나요?

로쟈 2010-03-16 23:23   좋아요 0 | URL
가끔 갑니다.^^

2010-03-19 0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19 1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0-03-18 0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반인도 참석가능한 거예요?

로쟈 2010-03-18 09:21   좋아요 0 | URL
대학내 행사이지만 제한은 없는 걸로 알아요.^^

비로그인 2010-03-19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마.. 이아가씨 스토커아니야? 하시는 것 아니겠죠?

로쟈 2010-03-19 10:43   좋아요 0 | URL
흠, 강연 스토커는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