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 8회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8회를 발췌해놓는다. '실재에 대한 열정'이 어떤 의미인지 다루면서 그것이 쿠바 혁명의 경우엔 어떻게 나타나는지, 까지가 따라 읽은 대목이다.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세기>라는 책에서 20세기의 특징으로 ‘실재계에 대한 열정(passion for the Real)’을 지목한다. 불어본은 2005년, 영역본은 2007년에 나왔지만 아직 우리말 번역본은 나오지 않은 책이고, 지젝이 참고한 건 책의 초고다. 바디우의 주장을 지젝은 이렇게 정리한다.

“유토피아적인 혹은 ‘과학적인’ 프로젝트와 이상들, 즉 미래에 대한 계획들을 목표로 삼던 19세기와는 대조적으로, 20세기는 물(物) 그 자체의 전달에 그 목표를 두고 있다. 20세기의 궁극적이고 결정적인 순간이라는 것은 일상적인 사회적 현실과 대조되는 실재계의 직접적인 경험이었으며, 실재계라는 것은 현실의 현혹적인 껍질 층들을 벗겨낸 작업에 대해 지불해야 될 대가로서의 극단적인 폭력 속에 있다.”(<실재계의 사막>, 30쪽)

무슨 말인가? 19세기와 20세기는 뭔가 대조적이며, 20세기에 중요한 것은 ‘실재계의 직접적인 경험’이었다, 정도인가? 조금 더 읽어내기 위해 다른 번역도 참고해본다.

“19세기가 유토피아적이거나 ‘과학적인’ 기획과 이상들을 꿈꾸고 미래를 설계했다면, 그와는 반대로 20세기가 겨냥한 것은 사물 자체가 나타나도록 하고 새로운 질서에 대한 갈망을 직접적으로 실현하는 데 있다. 20세기를 규정하는 궁극적 경험은 실재에 대한 직접적 경험이다. 이때 실재는 일상의 사회적 현실에 대립하는 것이고, 이런 실재는 환멸을 낳는 현실의 층위들에서 벗어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에 해당하는 극단적 폭력 안에서 경험된다.”(<탈이데올로기>, 16쪽)

‘물(物)’과 ‘사물’로 옮겨진 단어는 독어의 ‘das Ding’의 번역어인 ‘the thing’이다. <실재계의 사막>의 역주에는 “언어의 밖에 존재하고 무의식의 외부에 위치하여 상징화를 넘어서는 알 수 없는 x로서 칸트의 물자체와 매우 유사한 개념”이라고 설명돼 있다. 상징계 바깥에 있는 것이란 점에서 ‘실재’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겠다. 그러한 ‘사물’을 전달하거나, 갈망하던 새로운 질서(New Order)를 직접 실현하려고 한 게 20세기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실재를 직접적으로 경험한다는 건 무슨 뜻인가? ‘일상의 사회적 현실(everyday social reality)’과 대립하는 어떤 것을 경험한다는 의미다.  



브레히트의 경험을 예로 들자면, 그는 1953년 7월 극장으로 가던 길에 노동자들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진주한 소련 탱크들의 대열과 마주치게 됐다. 일상적으로 경험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현실과 직면하자 당원이 아니었던 그는 생애 처음으로 공산당에 가입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고 한다. 미래에 대한 전망 때문이 결코 아니었다. 이 ‘가혹한 폭력’이 어떤 진정성의 표지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실재’는 그렇게 기만적인 ‘현실’의 더께를 벗겨내는 폭력으로 경험된다.

그런 경험의 맥락에서 보자면, ‘현실 대 실재’의 대립은 ‘가짜 대 진짜’의 대립이라고 할 만하다. 현실에서 우리는 각자의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지만, 어느 순간 그런 건 다 연기일 뿐이고 진정성이 결여된 걸로 비칠 때가 있다. 대신에 계급장 떼고 맞장 뜨는 게 ‘진짜’처럼 여겨진다. 혹은 폭탄주를 돌려 마시고 바지는 걷어붙인 채 넥타이를 머리에 동여매는 수준에 도달해야 ‘진짜’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전장에서라면 일 대 일 육박전으로 맞붙는 것이야말로 ‘진짜’라고 고집할 수도 있다. 가볍게 입 맞추는 걸로는 성에 차지 않아서 아예 입술을 깨물어준다거나 긁어도 피가 나게 긁는 것 따위도 이런 ‘진짜 경험’의 목록에 올려놓을 수 있겠다. 그렇듯 ‘진짜’라고, 어떤 진정한 무엇의 경험이라고 간주되는 것, 그것이 바로 ‘실재의 열망’이고 ‘실재의 경험’이다.  

(...)

지젝은 실재에 대한 이러한 열정의 또 다른 예를 쿠바 혁명에서 찾는다. “사회적 현실에서 ‘물자 공급’과 대조되는 ‘실재계에 대한 열정’의 또 다른 변형은 쿠바 혁명에서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다.”(<실재계 사막>, 31쪽) 이 대목에서 ‘물자 공급’은 ‘servicing of goods’의 번역이다. <탈이데올로기>에서는 ‘선의(善意)의 봉사’라고 옮겼는데, 선의의 오역이 아닌가 싶다. 쿠바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선 <실재계의 사막>이 <탈이데올로기>보다 조금 더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공통되는 결론은 이런 것이다.

“쿠바에서는 단념 그 자체가 혁명적인 사건에 대한 진실성의 증거로 경험되고 강요되는데, 그것을 정신분석에서는 거세의 논리라고 부르다. 쿠바의 전반적인 정치-이데올로기적 동일성은 거세(castration)에 대한 충성(fidelity)에 놓여 있다(지도자를 Fidel Castro라고 부르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실재계의 사막>, 33-34쪽)

“쿠바에서는 포기 승인장 자체가 혁명적 사건의 진정성을 입증하는 증거물로 경험․부과되고 있는데, 이는 정신분석에서 거세의 논리라 불리는 것에 해당한다. 쿠바의 정치-이데올로기적 정체성 전체는 충실한 거세(fidelity of castration)에 기초하고 있다(그러므로 지도자의 이름이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라는 것은 하등 놀라운 일이 아니다!)”(<탈이데올로기>, 17쪽)

‘단념’ 혹은 ‘포기 승인장’은 ‘renunciations’의 번역이다. 욕망의 ‘자제’나 ‘금욕’도 가리키는 단어다. 구체적으로 쿠바에서는 “폐기물과 계획된 진부화라는 자본주의적 논리(the capitalist logic of waste and planned obsolescence)”를 계속해서 영웅적으로 거부하고 있는 걸 염두에 둔 말이다. ‘계획된 진부화’ 혹은 ‘계획적 구식화’란 제품이 계획적으로 구식이 되도록 하는 걸 말한다. 제품의 평균수명이 정해져 있어서, 가령 냉장고의 수명이 10년이라고 하면 사용자는 10년 정도 사용한 이후에 새 냉장고로 교체하는 식이다. 그렇게 제품을 폐기하고 제 때 새로운 걸 구매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없을 것이다. 너무 튼튼한 물건을 만들었다가 망했다는 기업들은 이런 ‘자본주의적 논리’를 간과했던 게 된다. 하지만 쿠바에서는 그렇게 쓰레기로 폐기처분됐을 만한 물건들이 여전히 사용된다. 1950년대 미국산 자동차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캐나다산 노란색 스쿨버스가 돌아다닌다. 그래서 쿠바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역동성(dynamics)이 아니라 혁명적 정체(standstill)다. 벤야민이 말하는 ‘정체 변증법(Dialektik im Stillstand)’, 혹은 ‘정지 변증법’을 떠올릴 정도다.

이러한 포기와 단념이 쿠바에서는 ‘혁명적 사건에 대한 진정성’으로, 곧 ‘진짜’로 경험되며, 정신분석 용어를 갖다 쓰자면 이런 게 ‘거세의 논리’다. 즉 쿠바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정체성은 ‘거세에 대한 충실성(fidelity to castration)’에 놓인다. ‘피델리티 투 카스트레이션’이란 말에서 음성적으로 쿠바의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를 연상하게 되는 것은 우연의 일치이긴 하지만 절묘하다(그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우리는 은연중 ‘거세’를 상기하게 되는 것일까?). 하지만 이러한 ‘충실성’의 이면은 낡아가는 건물들과 함께 사회적 삶이 점점 더 타성과 무력증에 빠져든다는 점이다. 역설적인 것은 이것이 혁명을 배반한 결과가 아니라 그 혁명적 사건에 오히려 충실한 결과라는 점이다. “이런 더렵혀진 타성이 혁명적인 숭고함의 ‘진실’이다.”  

 

이 대목에서 지젝은 쿠바 혁명의 특수성에 대해 각주로 보충하고 있는데, 그것은 “피델과 체 게바라라는 이원성”에 의해서 가장 잘 표현된다. “실제적인 지도자이고 국가의 최고 권위로서의 피델은 체와 대조되는데, 체는 국가 경영을 포기할 수 없었던 영원한 혁명적인 반항아가 된다.”(<실재계의 사막>, 35쪽) 국가 경영을 포기할 수 없었던 영원한 반항아?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데, 그건 오역 때문이다. 원문은 “the eternal revolutionary rebel who could not resign himself to just running a state”이고, “단지 국가 경영을 위해 물러날 수는 없었던 영원한 혁명적 반항아”를 뜻한다. 거기에 덧붙이는 지젝의 지적은 소련의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란 것이다. 물론 트로츠키가 혁명의 반역자로 숙청되지 않았더라면, 이란 가정 하에서다(실제로는 스탈린이 보낸 자객에게 암살당했지만). 지젝이 상상하는 시나리오는 이런 것이다. 체와 피델 대신에 트로츠키와 스탈린을 대입한 시나리오다.  

(...) 

10. 09. 02.  

P.S. 남미와 쿠바에 관한 책들은 체 게바라 관련서만은 아니더라도 적잖게 출간돼 있다. 그 중에서 비교적 최근에 나온 건 헨리 루이스 테일러의 <쿠바식으로 산다>(삼천리, 2010). 현실사회주의 붕괴 이후에도 쿠바가 생존할 수 있었던 '비결'을 쿠바 고유의 이웃공동체에서 찾고 있는 책이다. 박세열, 손문상 두 저자의 남미 여행기 <뜨거운 여행>(텍스트, 2010)은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에 그려진 바 있는 체 게바라의 젊은 날 남미 여행 행적을 그대로 따라가본 기록이다.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는 이 여행기의 의미를 이렇게 짚었다.  

손문상과 박세열의 '뜨거운 여행'이 의미 있는 것은 혁명 박물관에서 박제화된 체 게바라를 찾는 여행이 아니라 그의 이상을 실현하는 현실적인 방식을 찾는 또 하나의 몸부림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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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idersens 2010-09-02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the eternal revolutionary rebel who could not resign himself to just running a state" 부분에 대한 재고를 부탁드립니다.

"국가 경영을 포기할 수 없었던 영원한 혁명적인 반항아"를 오역이라 하시면서, "단지 국가 경영을 위해 물러날 수는 없었던 영원한 혁명적 반항아"를 제시하셨는데요. 동명사 "running"을 원형으로 보시고는 to부정사의 부사적 용법("~하기 위해")으로 옮기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resign oneself to"는 "~에 몸을 맡기다; ~에 순순히 따르다"라는 의미가 있어서, 다시 옮겨보면 "그저 나라를 운영하는데 몸을 맡길 수 없었던 영원한 혁명아"가 되고, 이는 알려진 그의 행적과 일치되기에 제대로 옮겼는지에 대한 검증도 된다고 봅니다.

로쟈 2010-09-03 00:23   좋아요 0 | URL
말씀대로 옮기는 게 좀더 정확합니다. 다만 번역문을 최소한으로만 수정하려다 보니 조금 어색하게 됐네요...

헌내 2010-09-02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 게바라 하니 아침이슬 출판의 '체 게바라 파울루 프레이리 혁명의 교육학'이 생각나는군요..

파울루 프레이리 (페다고지 저자) 하고 체 게바라를 좌파 교육학적인 측면에서 흥미롭게 연관시킨 책이었는데... ^^

로쟈 2010-09-03 00:24   좋아요 0 | URL
책은 어떻게 선별해서 읽는지 궁금하네요.^^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 7회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7호를 발췌해 놓는다. 어젯밤에 시작을 했지만 대부분은 오늘 아침에 쓴 것이다. 외출에서 돌아와 저녁에서나 연재된 글을 읽었다. 지난주에 나온 <좌파들의 반항>(들녘, 2010)이란 책에 지젝에 대한 언급이 있어서 주말에 읽어봤는데, 그 내용이 서두를 차지하고 있다.   

 

로버트 미지크의 <좌파들의 반항>(들녘, 2010)을 보면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나온다. 2005년에 독일에서 출가된 책인데, 슬라보예 지젝을 소위 ‘래디컬 시크(Radical Chic)’라고 보는 부정적인 견해를 소개하고 있다. 독일 일간지 <차이트(Zeit)>의 문화부 편집장이자 중도파 지식인 외르크 라우가 막 출간된 지젝의 <혁명이 다가온다 - 레닌에 대한 13가지 연구>(2002)에 자극을 받아 그를 가리켜 ‘선량한 테러’를 꿈꾸는 위험한 인물이며 ‘겉멋만 부리는 영웅(Radical Chic)’이 되려 한다고 비난했다는 것이다.

‘겉멋만 부리는 영웅’이란 표현은 ‘시크’하지 못한 번역인데, 아마도 그냥 음역하는 게 나을 듯싶다. 이 말의 저작권자는 뉴욕의 저널리스트 톰 울프다. 그가 1960년대 후반 미국 상류사회의 좌파 자유주의자가 블랙 팬더당(흑인 과격파) 기금 모집 파티를 열었을 때 그걸 비꼬는 의미로 처음 쓴 표현이라 한다. “한가한 부르주아지들과 아무런 의무감도 없이 반항이라는 몸짓으로 스릴을 즐기며 의미를 찾으려고 애쓰는 중산층 젊은이에 대한 조롱”을 담고 있다고. ‘반항의 이미지’를 과시하고 소비할 따름인데, 가장 비근한 예는 체 게바라의 얼굴이 인쇄된 티셔츠 같은 것이다.   



지젝의 얼굴이 새겨진 티셔츠는 눈에 띄지 않는 걸로 보아 아직 ‘래디컬 시크’는 못 되는 듯싶지만(래디컬 시크가 되려 한다?), 좌파 상업주의 혹은 ‘유행 좌파’에 대해 미심쩍은 시선은 온당하다. 그들의 제스처가 기껏해야 공허한 반항에 불과한 것 아니냐고 생각하는 것도 충분히 일리가 있다. 하지만 미지크는 이 문제를 라우보다 좀더 복잡하게 생각한다.

“체 게바라의 얼굴이 인쇄된 T-셔츠를 입었다고 놀림감이 되는 젊은이들이 만일 바리케이드를 치고 방화를 한다면 좋게 받아들여질까? 무엇이 과연 공허하지 않은 몸짓일까? 그 몸짓은 대체 언제쯤 완벽하게 공허해질 수 있을까? 애석하게도 이 문제에 관해서는 <차이트>와 <뉴욕 타임스>처럼 세계적인 유력지의 문화부에 근무하는 전문가들조차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유명인사들이 반항의 몸짓을 보이고 반항아들이 유명인사가 된다는 사실에 그저 놀랄 뿐이다.”(13-14쪽)

그러니까 지젝과 같은 ‘과격한 급진주의자’가 유명인사가 되는 것도 한갓 유행에 불과하며 알고 보면 그 또한 자본주의 상품화에서 포섭된다는 비판은 절반만 옳다. 네 책이 많이 팔렸으니 너도 자본주의의 수혜자가아 아니냐는 비판이다. 대개 그런 비판은 근엄한 온건좌파에게서 나온다. “적지 않은 주류가 그를 허풍을 심하게 떨면서 공허한 제스처 속으로 빠지고 마는 래디컬 시크와 학문적으로 잘난 체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혐오감을 주는 인물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99쪽) 독일 지식사회에서 지젝에 대한 숭배 못지않게 반감도 크다는 걸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미지크의 판단은 양가적이며 유보적인 것처럼 보인다. 다소 길지만, “그들은 지젝을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해 하시는 분들을 위해(이건 대타자의 시각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세 가지 단락을 인용해본다.

“지젝은 잘 나가는 급진좌파들 가운에서 놀라울 정도로 ‘이성적’이며, 테제의 소실점으로 빠져들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균형과 중도를 유지하는 사람으로 꼽힌다.”
“지젝이 세계화된 이론의 상류계층의 진귀한 현상 중의 하나라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냉소가이며 광적이며 정치적으로 오류를 지닌 그는 한편으로 위대한 도덕주의자이기도 하다.”
“지젝은 진지한 사고의 물꼬를 터주기 위해 진지하지 않은 질문을 던진다.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총명한 그가 종종 어릿광대짓을 하는 까닭은 사람들이 배를 잡고 웃지 않으려는 순간을 역으로 이용해서 원하는 바를 이끌어내는 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전부는 아니지만 동의할 수 있는 구석이 많다. 특히 마지막 인용이 그러한데, 지젝의 ‘어릿광대짓’이 전술적이라는 것이다. 영어권에서는 ‘MTV 철학자’로 불린 그가 독일에서는 ‘래디컬 시크’로 비꼼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지젝은 그것을 ‘의도와 다르다’며 피해가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그러한 상황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이용하려 한다. 한 연극의 대사를 빌자면,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자본주의를 몰아낼 수 없다”고 말한다. “자본주의의 바깥은 없다!”는 말로 정리할 수 있겠다. “반항의 제스처만 가지고는 우리에게서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할 것이다.”란 엄포도 들린다. 체계(시스템)는 물론 막강하다. “시민들의 권리는 편협한 논리에 따른 생산시스템, 말하자면 경제체계에 편입된다는 이유 때문에 점점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라는 점도 맞다. 하지만 아킬레스건이 없는 건 아니다. “어떠한 시스템이든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으려면 제반 조건들이 주체의 결정권을 장악해서는 안된다.”는 점이 그것이다. 지젝이 노리는 바도 바로 그 점이다. 주체가 문제라는 것. 

(...)
 
잠시 우회하였는데, 다시금 방향을 <실재계의 사막>으로 틀어본다. 1장의 제목은 ‘실재계에 대한 열정, 모사에 대한 열정’이라고 붙어 있는데, 이 대목은 2003년 방한 강연을 담은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이데올로기>(철학과현실사, 2005)의 제1강연과 동일하지는 않지만 많은 부분이 겹친다. 그래서 같이 참조하면 도움이 된다. 이미 실재(계)에 대한 예비적 설명은 앞에서 다루었기 때문에 ‘실재계에 대한 열정’ 혹은 ‘실재의 열망’이 어떤 의미인가는 대충 짐작하실 수 있을 터이다.  

 

그래도 지젝은 실재에 대한 열정이 어떤 것인가를 설명하기 위해 브레히트보터 에른스트 융어, 오시마 나기사 등의 많은 사례를 동원하고 있는데, 오시마 나기사는 <감각의 제국>의 감독으로서 오시마를 가리킨다. 두 연인의 성애 관계가 서로를 고문할 정도로 과격해지다가 결국 죽음에까지 이르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컬트영화’였다. 이런 것이 말하자면 ‘실재에 대한 열정’이다. 그 궁극의 형상으로 지젝은 여성의 성기를 보여주는 포르노영화의 장면도 예시한다.

“가령 여자 성기의 안쪽을 들여다보는 장면, 게다가 진입 중의 남자 성기의 머리에 설치된 소형 카메라의 눈으로 들여다보는 장면을 생각해보라. 하지만 이런 극단적인 지점에서는 어떤 전회가 일어난다. 욕망의 대상이 너무 가까이 다가오게 되면, 성적 매혹은 구토로 전환된다. 고기 덩어리의 실재 앞에서 구토하게 되는 것이다.”(<탈이데올로기>, 16쪽)

다른 대목의 번역은 <탈이데올로기>가 <실재계 사막>보다 수월하지만 이 대목만은 그렇지 않은데, 소형 카메라를 ‘남자 성기의 머리’에 설치했다고 옮겼기 때문이다(그런 설정이 엽기적이다). 그것은 실제 성기가 아니라 ‘모조 음경(dildo)’을 가리킨다. 과연 여성적인 것의 핵심에 무엇이 있을까란 호기심에 그 ‘욕망의 대상’에 가까이 근접하지만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살의 실재계(the Real of the bare flesh)’일 뿐이다(‘고기 덩어리’도 좀 과도한 번역이다). 요는 9.11 테러, 곧 “근본주의적 테러라는 것도 실재계에 대한 열정의 표현이 아닐까?”라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는 다음 회에서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10. 0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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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0-08-31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의 책이 그린비에서 나오던데...하여간 엄청 비싸다는..--;;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지젝 입장에서는 책을 거의 무료로 해서 팔아야 쫌 어필할거 같은데..ㅋㅋ 제발 책값좀 인하하고 뭐라 좀 말했음 좋겠습니다..ㅎㅎ 비싸서 사서 볼 염두가 안난다는..ㅎㅎ

로쟈 2010-08-31 22:04   좋아요 0 | URL
지젝의 영어책은 그리 비싸지 않습니다. 번역본은 수요가 한정돼 있어서 그렇겠지요. 인문서 독자가 소설 독자만큼만 돼도 책값이 1/3은 떨어질 텐데요...

chihyun7 2010-09-02 02:20   좋아요 0 | URL
지젝은 원서가 한국어 번역본보다 더 싼 경우가 많더라고요^^ 그러니까 지젝이 책으로 돈을 챙기려는 의도는 없다고 봐야한다는...

비로그인 2010-09-01 0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들이 생각하는 지젝' 중 마지막 인용이 마음에 드네요.
지젝의 강연 동영상을 본 적이 있는데 땀을 뻘뻘 흘리며 끊임없이
얼굴을 만지고 쓸어내면서 말을 쏟아내는 모습을 보고
저러다 '자연발화'되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에너지를 얻고 고양되는 느낌이었달까요.
건강하게 오래 활동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로쟈 2010-09-01 23:48   좋아요 0 | URL
틱 증세라고 합니다. 여하튼 열정만큼은 존경스럽죠.^^

chihyun7 2010-09-02 02:23   좋아요 0 | URL
지젝이 방한했을 때, 친구가 간사로 일했었는데, 지젝이 당이 딸린다고 해서 구경하러간 저보고 얼른 초콜렛 사오라고 부탁한 적이 있죠. 여러모로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증상이 많은 사람인듯합니다.

로쟈 2010-09-02 08:44   좋아요 0 | URL
네, 그때 당뇨가 있다고 했었는데, 좀 나아졌는지 모르겠네요...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 6회

지난 주 이사로 원고들이 밀린 데다가 외부 일정들까지 겹쳐서 아주 긴 한 주를 보내고 있다. 점심을 먹고 이번주 마지막 원고에 들어가기 전에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6회를 발췌해놓는다. 부산에 내려가기 전 어제 새벽에 쓴 글이다.   

<실재계 사막>의 서문에서 지젝이 자주 드는 예를 만날 수 있다(다큐영화 <지젝!>에도 인용된다). 구동독의 농담인데, 이런 것이다. 한 노동자가 시베리아에서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그는 친구한테 이렇게 미리 일러둔다. “모든 우편물이 검열될 테니까 암호를 정하자. 나한테 받은 편지가 파란 잉크로 쓰여 있으면 진실이고, 빨간 잉크로 쓰여 있으면 거짓이야.” 친구는 한 달 후에 파란 잉크로 쓰인 편지를 받게 된다. 시베리아의 친구는 모든 것이 풍부하고 쾌적하며 만족스럽다고 적는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훌륭해. 가게에는 상품들이 가득하고, 음식이 풍부하며, 아파트는 크고 난방도 적절해. 영화관에서는 서양영화를 보여주고 관심을 끌 만한 아가씨도 많고…….” 그러고는 끝에 가서 한 가지를 덧붙인다. “단 하나 빨간 잉크만 없어.”

영화 <식스 센스> 마지막 장면의 반전이 연상되지 않으신지? “단 하나 빨간 잉크만 없어.”라는 마지막 멘트가 앞에 나오는 모든 메시지를 무효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란 잉크로 썼기 때문에 모든 것이 진실인 것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그것이 실제로는 빨간 잉크로 쓰였어야 한다는 걸 암시함으로써 이 노동자는 자신이 처한 상황의 진실을 친구에게 성공적으로 전달한다. 설사 “빨간 잉크를 사용할 수 있었을지라도, 사용할 수 없다는 거짓말이 이런 특수한 검열상황에서 진실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된다.”고 지젝은 덧붙인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이야말로 이데올로기 비판의 효과적인 모체(matrix)이며, 전체주의가 아닌 자유주의적 검열상황에서, 곧 우리의 현실에서 더 효과적이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어떤 점에서 그런가.

우리의 부자유를 표명할 수 있는 바로 그 언어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로움을 느낀다.” 바로 이런 빨간 잉크의 결여가 의미하는 바는 오늘날 우리가 ‘테러와의 전쟁’이라든가, ‘민주주의와 자유’, ‘인권’ 등등과 같은 현금의 갈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하는 모든 주요 용어들이 거짓된 용어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 상황에 대해 사유할 수 있게끔 허용하는 대신에 우리의 상황인식을 신비화하고 있다. 바로 이런 정확한 의미에서 우리의 ‘자유’ 그 자체는 우리의 좀더 내밀한 부자유를 가려버리고 지속시켜 준다.(<실재계 사막>, 25쪽)

우리에게서 ‘자유’란 말이 오히려 현실인식을 오도하고 ‘내밀한 부자유’를 은폐시켜준다는 것인데, 이러한 지적은 이미 G. K. 체스터턴(1874-1936)이 100년 전에 한 것이다. <브라운 신부> 시리즈로 유명한 영국 작가 체스터턴은 언론인이자 평론가, 그리고 기독교 변증가이기도 했다. 그는 <정통신앙(Orthodoxy)>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이단(Heretics)>이란 책과 짝을 이루고 있기에 <정통신앙>이라고 옮겼다. 우리말 번역본은 <오소독시>(이끌리오, 2003)이고, <실재계 사막>에서는 제목을 <정설>이라고 옮겼다). 

“우리는 자유사상이 자유를 지켜내는 가장 안전한 보호물이라고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다. 현대 스타일로 말해서, 노예의 마음의 해방이 노예해방을 가로막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가 자유롭게 되길 원하는지 어떤지 그에 대해 고민하라고 가르쳐라. 그러면 그는 스스로를 해방시키지 않을 것이다.”

첫 문장은 “We may say broadly that free thought is the best of all safeguards against freedom.”의 번역이라서 오해의 소지가 있다. “against freedom”의 번역이란 걸 고려하면 “자유를 지켜내는”은 “자유를 막아내는”이라고 해야 맞다. 번역본 <오소독시>에서는 이 대목을 “우리는 대체로 자유사상이 자유를 방지하는 안전장치 중에서 으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제대로 옮겼다. 여기서의 역설은 물론 ‘자유사상’이 실제적인 ‘자유’의 장애물이라는 주장에 놓인다. 자유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도록 하면 오히려 자신이 자유롭다는 환상을 갖게 돼 더 이상의 요구를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노예로 하여금 자신이 자유로워지기를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에 관해 고민하도록 가르쳐라. 그러면 그는 스스로 자유로워질 수 없을 것이다.”(<오소독시>, 204쪽)

 

여담을 덧붙이자면, ‘역설의 대가’로도 불리는 체스터턴은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극작가 버나드 쇼(1856-1950)와 동시대인이었다. 체스터턴과 비교하자면 쇼는 ‘독설의 대가’로 명성이 높았는데, 어느 날 두 사람이 거리에서 만났다. 버나드 쇼는 말라깽이였고 체스터턴은 한 덩치 하는 뚱보여서 서로 대조적이었다. 체스터턴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선생님을 보면 지금 영국이 기근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알 것 같군요.” 쇼가 응수했다. “그렇지. 그러나 그 원인은 자네 때문이 아니겠나?” 두 사람이 서로 만만찮은 호적수였을 법하다. 참고로, 국역본 <오소독시>는 현재 품절상태인데, 교정해서 읽을 대목이 있어서 막간에 지적해둔다. 서문에서 체스터턴이 자신의 책을 누구 읽어야 하는가를 밝히고 있는 대목이다.

“꽃밭의 꽃이나 저작집 한 권 속의 문장들, 정치적 사건과 젊은 날의 고통이 어떤 질서 체계 속에 함께 모여, 어떻게 그리스도교 정통신앙에 대한 어떤 확실한 신념을 낳았는지 알아가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그에 합당한 노동이 따르기 마련이다. 나는 이 책을 썼다. 그러므로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책을 읽지 않을 것이다.”(18쪽)

체스터턴은 이 책에서 자신이 어떻게 하여 정통 기독교인이 되었는가를 보여주는데, 그런 과정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읽어봐도 좋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읽지 않겠다고? 인용문 후반부의 원문은 이렇다. “But there is in everything a reasonable division of labor. I have written the book, and nothing on earth would induce me to read it.” 번역문이 생략한 건 ‘분업(division of labor)’이란 말이다. 모든 일에는 합당한 분업이라는 게 있고, 자신은 책을 썼으니까 읽는 일에서는 면제된다는 논리는 거기에서 나온다. 체스터턴의 은근한 유머를 배여 있는 대목이다.

다시 자유의 문제로 돌아오면, 지젝은 체스터턴의 말이 우리의 ‘포스트모던’ 시대에, 스스로를 해체하고 의심하고 거리를 두려는 시대에 더없이 잘 들어맞는 게 아닐까라고 말한다. 가령 “생각하지 말고 복종하라!(Don't think, obey!)”는 낡은 모토(이건 전형적인 군대식 모토인데)는 요즘 같으면 오히려 역효과만 낼 뿐이다(물론 아직도 그런 것이 통용되는, 강요되는 나라가 없지는 않다. 대낮에도 군대처럼 조인트 까고 까이는 나라 말이다). 이럴 때 사회적 예속상태를 안전하게 지속시킬 수 있는 방책은 사상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다(다시 말하지만, 이런 건 언론의 자유가 뒷걸음치고 있는 한국보다는 미국사회에 더 적합한 지적이다). 물론 그런 예속에서의 탈피, 곧 자유를 위한 투쟁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도그마에 대한 참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 체스터턴의 또 다른 역설적 주장이다. 정리하면, 체스터턴의 역설은 상호 연계적이며 양면적이다. (1)자유사상은 진정한 자유의 장애물이다. (2)진정한 자유는 도그마를 필요로 한다.

(...) 

10. 0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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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 5회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5회를 발췌해놓는다. <실재계 사막으로의 초대>를 읽기 전에 이번 회까지는 '실재계'란 말에 대해 먼저 살펴보았다. 이제 겨우 '문턱'을 넘어서고 있는 셈이다...  

 

우리 안의 ‘괴물’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자면, 쇼펜하우어가 ‘의지’라고 부른 것을 프로이트는 ‘욕망’이라고 불렀다. 반복하자면, “욕망은 의미에 무심하고 매우 비인간적인 과정이며, 그것이 오로지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감추고 달콤하게 우리를 조종한다. 욕망은 사적인 것이 아니다. 욕망은 바깥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고통이며, 우리가 비자발적으로 쓸려가는 도착이자 강제적 매개다. 우리는 출생과 더불어 욕망 속으로 내던져진다.”(테리 이글턴, <반대자의 초상>, 305쪽) 여기서 ‘욕망은 사적인 것이 아니다(Desire is nothing personal)’란 말은 음미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나의 욕망’이란 말이 애초에 성립할 수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인간적이면서 동시에 비인칭적인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욕망을 어디에 두었더라?”거나 “너, 내 욕망 가져갔니?”라고 말할 수 없다. 욕망이 관심을 두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다. 그 정도면 ‘괴물’이라 부름직하지 않을까.

이 ‘괴물’과 관련하여 참고할 수 있는 것이 <HOW TO READ 라캉>의 4장 ‘실재의 수수께끼’다. 라캉의 ‘라멜라’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하는 장인데, 단순하게 말하면 라멜라는 프로이트가 말하는 ‘부분대상(partial object)’이다. “신체 없이도 존속하는 신비로운 자동성을 지닌 기이한 기관”이 부분대상이다. 젖먹이 아이들에게 물려주는 ‘공갈 젖꼭지’ 같은 걸 떠올리면 되겠다. 엄마의 ‘신체’ 없이도 엄마의 젖가슴을 대신하며 존속하는 젖꼭지 말이다. 지젝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체셔 고양이의 미소를 예로 든다. 고양이가 사라졌는데도 남아있던 미소가 생각나시는가? 우리의 앨리스는 이렇게 말했다. “저런, 나는 미소 없는 고양이를 본 적은 있어. 하지만 고양이 없는 미소라니! 이건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흥미로운데!” 


 
라캉의 라멜라는 존재하지는(exist) 않지만 고집스럽게 존속하는(insist) 어떤 것이다. 이런 ‘고집’, ‘리비도의 맹목적이고 파괴 불가능한 고집’에 대한 프로이트의 명명이 ‘죽음충동’이다. “생명의 기괴한 과잉, 삶과 죽음, 생식과 부패의 (생물학적) 순환 너머에서 지속되는 ‘죽지 않는’ 존속에 붙여진 이름”이다(분자생물학의 ‘불멸의 이중나선’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프로이트는 죽음충동을 일종의 반복강박으로 보았는데, 이것은 “고통스러운 과거의 경험을 반복함으로써 유기체에 주어진 자연적 한계를 벗어나, 심지어 유기체의 죽음까지 초월하여 존속하는 기괴한 고집” 같은 것이다. 그런 죽음충동과 부분대상의 관계를 잘 설명해주는 사례가 안데르센의 동화 <빨간 구두>다. 알다시피 이 동화에서 주인공 소녀가 신는 마술 구두는 소녀의 의사와 무관하게 강제로 춤을 추도록 만든다. “그 구두는 모든 인간적 제한을 무시하고 고집스레 존속하는 소녀의 무조건적 충동을 상징한다. 그래서 그 불쌍한 소녀가 구두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그녀의 다리를 잘라내는 것뿐이다.” 쇼펜하우어와 프로이트가 말년에 모두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인생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겠다.  

 

참고삼아 말하면, 안데르센의 <빨간 구두>의 성인용 버전은 잘만 킹의 성애영화 <레드 슈 다이어리> 시리즈다. <X-파일>에서 멀더 요원으로 등장하는 배우 데이비드 듀코브니가 자신의 우편함으로 오는 여성들의 편지들을 읽으면서 그들의 사랑, 열정, 음모, 배신에 대한 에피소드를 따라가는 이 시리즈에서 ‘빨간 구두’는 말 그대로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우리를 지배하는 욕망의 은유다. 다시 이글턴을 인용하면, “프로이트는 우리를 인간 주체로 만드는 것은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바로 이 이질적인 부분이라고 여겼다. 그것은 마치 치명적 세균같이 우리 살갗을 파고들었지만,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 개념이 그렇듯이, 우리 자신보다 더 우리에게 가깝다.”

혹은 마치 거울에서 자신의 모습을 뚫어지게 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섬뜩해지는 것처럼 우리에게 아주 낯익지만 갑자기 아주 낯선 것으로 돌변할 때가 있다. ‘안’과 ‘밖’이 뒤바뀌는 것이다. 이것을 라캉은 하워드 혹스의 영화에서 힌트를 얻어 장난스럽게 ‘괴물(thing)’이라 불렀다는 것이고, 그것이 다름 아닌 실재(the real)를 가리킨다는 게 이글턴의 설명이다. 라캉이 만년에 리들리 스콧의 영화 <에일리언>(1979)을 볼 수 있었다면 더욱 만족했을는지도 모른다. 지젝에 따르면 “이 영화의 기괴한 외계 생명체는 라캉의 라멜라와 닮았는데, 이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전에 라캉이 이 영화를 본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 정도다.”    



라캉의 라멜라와 ‘에일리언’에 대해선 기회가 닿을 때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그보다 더 쉬운 경로로 실재(계)에 대한 설명을 보충한다. 지젝이 드는 건 채플린의 영화 <시티 라이트>이다. 주인공 떠돌이가 실수로 호각을 삼키고, 딸꾹질을 할 때마다 뱃속에서 호각 소리가 나는 코믹한 장면이다. 떠돌이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자신의 신체 ‘안’에서 나는 소리를 감추려고 애쓴다. 지젝은 이것이 ‘부끄러움’의 가장 순수한 모습이 아닌가라고 말한다.  

“내가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내 몸속의 과잉(excess)에 직면할 때다. 이 장면에서 부끄러움의 원천이 소리라는 점이 중요하다. 내 몸속에서 울려 나오는 유령 같은 소리, 신체 없는 자율 기관으로서의 소리, 내 몸 깊숙이 자리 잡고 있지만 통제할 수 없는 기생충이나 낯선 침입자 같은 소리 말이다.”(<HOW TO READ 라캉>, 111-112쪽)

공갈 젖꼭지부터 체셔 고양이의 미소, 빨간 구두, 뱃속에서 나는 호각소리까지 공통적인 것은 이들이 일종의 ‘신체 없는 자율 기관’이라는 점이다. 그것을 ‘탈실체화(de-substantialized)’돼 있다고 말한다. 실체와 무관하다는 뜻이다. 즉 “실재란 상징적 네트워크로의 포획에 저항하는 외재적 사물이 아니라 상징적 네트워크 자체 내부의 틈이다.” 사실 “상징적 네트워크에 포획되지 않는 외재적 사물”은 실재에 대한 가장 흔한 정의다. 하지만 지젝은 방향을 전환하여 실재를 “상징적 네트워크 자체 내부의 틈”으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실재란 ‘실체적 사물(the substantial Thing)’이 아니라 상징적 네트워크, 곧 상징계의 간극이 불러낸 효과라는 것이다. 라캉-지젝에 따르면, 이러한 관점의 전환은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에서 일반상대성이론으로의 전환에 상응한다. 아인슈타인이 휘어진 공간이란 개념을 도입할 때 그는 그러한 공간의 휘어짐이 물질의 효과라고 보았다. 즉 물질이 원인이고 공간의 휘어짐이 그 결과다. 그러한 관점에서 기술되는 것이 특수상대성이론이다. 반면에 일반상대성이론에서는 이 원인과 결과가 전도된다. “물질의 현존은 공간을 휘게 하는 원인이 아니라 그 휘어짐의 효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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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08.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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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4 1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poptrash 2010-08-24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대자의 초상... 살까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자꾸 이렇게 보여주시면... ㅜ_ㅜ

로쟈 2010-08-25 21:51   좋아요 0 | URL
한번만 더 보여드리면 넘어가시겠네요.^^

lo초우ve 2010-08-25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좌우지간....
책 한권 읽는데 일주일에서 열흘이나 걸리는구만... ㅡ,.ㅡ;;
암튼...
로쟈님때문에 부지런히 아주 열심히 읽어야 소개해주신 책들을 볼 수 있는뎅...
보고싶은 욕심은 많은데 진도가 안늘어서리.....
아이겅 미치고 환장할 노릇....
휴~~~~~~~~~~~~~ ㅡ,.ㅡ;;
그래도 천천히.. 천천히라고??
이런 된장~!! ㅡ,.ㅡ;;
아휴~~~~~ 천천히는 무슨....
부지런히 읽어야징..ㅋㅋ

로쟈 2010-08-25 21:51   좋아요 0 | URL
두꺼운 책은 일주일도 더 걸리죠.^^;

2010-08-25 15: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25 2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yoonta 2010-08-26 0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게 잘 보고 있습니다. 한 100회정도분량으로 길고 굵게 해주시길 기대해 봅니다..그래서 단행본으로 나올수 있다면 더 좋겠네요 ^^

로쟈 2010-08-27 13:05   좋아요 0 | URL
네, 무사히 완결되면 단행본은 내년 상반기쯤 나올 거예요.^^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 4회

어제와 오늘 사이에 하루가 지나갔을 뿐이지만 체감 시간으론 몇 년이 흐른 듯하다. 이사준비로 어젯밤 늦게까지 땀을 빼고 오늘 하루 종일 분주했던 게(포장이사이니 힘이 들 건 별로 없었지만) 이유랄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결정적인 건 공간이 달라졌다는 점(2004년에 러시아에 체류한 걸 고려하면 5년만이다!). 다시 '정상적인' 일상의 리듬과 감각을 찾기까지는 시간이 좀더 걸릴 듯하다. 그때까지는 '1박2일' 같은 기분이지 않을까 싶다. 그런 기분으로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을 따라 읽는다. 엊저녁에 교정을 봤건만 '토끼굴'에 굴러떨어진 것처럼 새삼스럽다. 전문은 연재코너에서 읽으실 수 있고 여기에 옮겨놓는 건 그 일부이다.   

“토끼굴은 일정한 직선 방향으로 터널처럼 뻗어 있다가, 갑자기 곤두박질하기도 했다. 어찌나 갑작스럽던지 앨리스는 너무 깊어 보이는 곳으로 떨어지기 전에 멈춰야지 하는 생각을 할 틈조차 없었다.”(<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자, 이제 네오와 함께 모피어스를 따라 굴러 떨어진 ‘토끼굴’이다. 이런 경우엔 보통 인원 점검을 다시 하지만, 그럴 형편은 아니어서 대신에 ‘RSI’에 대한 복습만 간단히 하도록 한다. 실재계-상징계-상상계 얘기다. 교재는 다시 <HOW TO READ 라캉>이다. 상징계에 대한 지젝의 설명을 따라가 본다. 멕시코에선 TV 드라마를 가공할 만한 속도로 찍는다고 한다. 매일 25분짜리 에피소드를 찍어대는데 배우들에겐 미리 대본을 받아보고 연습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당일 아침에 그날 찍을 대본을 나눠준다는 홍상수 감독보다 더 심한 경우라 할 수 있을 텐데, 그래도 찍을 건 찍는다. 어떻게? 멕시코 방식은 이어폰을 활용한다. 이어폰을 통해 들려오는 연출자의 지시에 따라 배우가 즉석에서 연기하는 것이다. “자 이제 뺨을 한 대 갈기고 그를 증오한다고 말을 해. 그리고 껴안아!” 지젝이 보기엔 바로 이런 것이 라캉이 말하는 ‘대타자(the big Other)’이다.  

이 대타자는 상징적 차원에서 작동한다. 말하는 존재로서 우리가 타인과 대화할 때, 우리의 발화 행위는 여러 복잡한 규칙과 전제에 의존한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선 문법 규칙을 공유해야 하고 동일한 생활 세계를 배경으로 갖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박쥐와 소통하기 어려운 것은 박쥐와 우리 사이에 그런 것이 없기 때문이다. 상징적 차원 혹은 상징적 공간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 스스로를 재볼 수 있는 일종의 척도다. 대타자가 단일한 대행자(agent)로 인격화되거나 사물화될 수 있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세상의 모든 일을 관장하면서 언제나 나를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혹은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신이 인격화의 예라면, 내게 명령을 내리고 나의 삶을 바치도록 만드는 자유니 공산주의니 민족이니 하는 대의(Cause)는 사물화의 예이다. 요컨대 우리의 현실을 관장하고 조정하며 인도하는 ‘신’, 자유’, '공산주의’, ‘민족’ 등등이 모두 대타자에 속한다. 우리가 ‘소타자(small other)’라면 이 소타자(개인)들의 의사소통에는 항상 대타자가 끼어든다. 말이 좀 어려운가? 이럴 땐 지젝식 EDPS를 활용하자.  



한 가난한 농부가 난파를 당해 무인도에 표류하게 됐는데, 알고 보니 신디 크로퍼드와 단둘이었다. 요즘 젊은 세대는 잘 모르겠지만 한때 세계 3대 모델로 불리기도 했던 미녀다. 그렇다고 굳이 신디 크로퍼드를 고집할 이유는 없으며 각자가 알아서 다른 미녀로 대체해도 좋다. 하여간에 둘이 섹스를 한 후에 신디가 농부에게 어땠냐고 물었다. 대답은 물론 “그레이트!” 하지만 자신의 만족을 완성하기 위해서 한 가지 사소한 부탁을 들어달라고 농부는 말한다. 바지를 입고 얼굴엔 콧수염을 그려서 자기 친구처럼 분장해달라는 것이다. 자신이 변태가 아니라고 겨우겨우 안심시킨 농부는 신디가 그의 원대로 분장을 하자 그녀에게 다가가 옆구리를 쿡 찌르고 씩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내가 말이야 방금 전에 신디 크로퍼드와 섹스했다!” 

여기서 “언제나 증인으로 현존하는 이 제삼자는 방해받지 않은, 순수하게 사적인 쾌락의 가능성을 배반한다.”(<HOW TO READ 라캉>, 21쪽) 즉 “방해받지 않은, 순수하게 사적인 쾌락”이란 건 없다. 그런 건 거짓말이다. 아무리 최소한이라도 섹스는 언제나 ‘전시적’이며 다른 사람의 응시에 의존한다. 남이 봐줘야 하며 알아줘야 한다(그래서 비디오로 찍어두기도 한다). 제삼자가 개입하지 않는 섹스가 ‘상상적 섹스’라면 농부가 자신의 만족감을 더 극대화하기 위해 원했던 건 그 ‘상상적 섹스’를 ‘상징적 섹스’로 전화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자기 친구라는 제삼자가 필요했다. 이 ‘제삼자’를 가리키는 말이 바로 ‘대타자’이다. 그렇다면 바야흐로 대타자는 무소부재하며 전지전능한가? 그렇지는 않다. 대타자는 무인도에 난파당한 농부가 신디의 분장을 통해 불러낸 친구처럼 ‘주관적 전제(subjective presupposition)’ 혹은 ‘주관적 가정’의 산물이다. 때문에 비실체적이며 말 그대로 가상적(virtual)이다. 그렇다면 지젝의 이런 주장이 이해가 될 것이다.  

“대타자는 마치 그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행위하는 한에서만 존재한다. 대타자의 위상은 공산주의나 민족 같은 이데올로기적 대의의 위상과 같다. 그것은 자신이 대타자 속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개인들의 실체적 토대이며, 개인들의 존재적 기반이며, 삶의 의미 전체를 제공하는 참조점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지만, 존재하는 것은 개인들과 그들의 행위뿐이다. 그래서 이 실체는 개인들이 그것을 믿고 따르는 한에서만 현실적으로 작동한다.”

간단히 말해서, 대타자라는 비실체적 ‘실체’는 그것을 믿고 따르는 개인들이 존재할 때만 힘을 갖는다. 대타자가 규칙 같은 것이라면, 그것이 존속하기 위해서는 규칙을 지키는 이들이 존재해야만 한다. 가령 체스 경기의 규칙이 의미를 가지려면 체스 경기자가 있어야 하며, 축구의 규칙이 의미를 가지려면 손을 사용하지 않고 공을 다루려는 축구 선수들이 있어야만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체스 경기자와 축구 선수들만으로 게임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게임이 게임으로서 성립하려면 거기엔 규칙(대타자)이 적용돼야 하고 작동해야 한다. 이 규칙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우리는 지난번 남아공 월드컵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조금 오래 전에 쓰인 서평이긴 하지만 라캉-지젝의 ‘실재’ 개념을 능숙하게 정리한 문학평론가 테리 이글턴의 글을 잠시 따라가 본다. <반대자의 초상>(이매진, 2010)에 수록돼 있는 “즐거운 시간 되세요!”라는 서평이다.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영원히 괴물을 품고 사는 존재이며, 우리 존재의 핵심에는 잔인할 정도로 낯선 무언가가 있다고 보았다. 우리를 구성하는 재료이지만 우리에게 전혀 무관심한 그것, 쇼펜하우어가 의지라고 일컬은 이것은 우리에게 목적이라는 환상을 부여하지만, 그 자체로는 목적도 감각도 가지고 있지 않다. 쇼펜하우어에 깊은 관심을 가진 프로이트는 욕망이라는 개념을 이 괴물성의 비형이상학적 양상으로 제시한다. 욕망은 의미에 무심하고 매우 비인간적인 과정이며, 그것이 오로지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감추고 우리를 조종한다.”(305쪽)

흥미로우면서도 섬뜩한 점은 우리를 인간 주체로 만드는 것이 바로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이 ‘이질적인 부분’ 혹은 ‘괴물성’이라는 데 있다. 적어도 프로이트는 그렇게 보았다. 그리고 라캉은 한 공포영화에서 착상을 얻어 이것을 ‘괴물(Thing)’이라고 불렀다. 다음 회에는 이 ‘괴물’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 것이다.

참고로, <반대자의 초상> 역주에서 라캉이 착상을 얻은 영화가 존 카펜터의 <괴물>이라고 해놓았는데, 착오다. 라캉이 본 건 카펜터의 <괴물(The Thing)>(1982)이 아니라 하워드 혹스의 <괴물>(1951)이다(라캉은 1981년에 세상을 떠났다). 사실 나도 하워드 혹스의 영화는 보지 못했고, 카펜터의 영화만 흥미롭게 본 기억이 있다. 한 대중연예지가 ‘역대 최고의 SF영화 톱 25’를 뽑았을 때 10위에 선정된 수작이다. 그럼 1위에 오른 작품은? 바로 워쇼스키 형제의 <매트릭스>! 

10. 0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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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0 0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20 07: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blanca 2010-08-20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대타자의 개념을 완전 잘못 이해하고 있었어요.. 정말 이해하기 쉽고 명확합니다.

로쟈 2010-08-20 23:29   좋아요 0 | URL
도움이 되셨다면 다행입니다. 제 역할은 가이드라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