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 12회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12회를 발췌해놓는다. <실재계 사막> 2장으로 바로 들어가기가 애매해서 아침에 지방에 내려가기 전에 부랴부랴 예전에 쓴 글을 보완했다. 애초엔 '팜므파탈' 얘기를 좀 다루려고 했지만 사정이 여의치가 않았다. 연휴에 여유를 좀 얻었으면 하고 바라는 수밖에... 

<실재계 사막>의 2장으로 넘어가기 전에 ‘사랑의 폭력’ 혹은 ‘폭력적 사랑’에 관한 한 문단을 읽는다. 지젝의 <죽은 신을 위하여>(길, 2007)의 한 대목 읽기이며, 일종의 추석맞이 ‘선물’이다.

"사랑이 폭력이라는 말이 발칸의 저속한 속담 - "나를 때리지 않는 남자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남자다" -과 관련되는 것(만)은 아니다. 폭력은 이미 자체로 사랑의 선택인데, 그것은 폭력이 사랑의 대상을 맥락에서 떼어내어 대상(Thing)의 자리에 올려놓기 때문이다."(57쪽)

인용된 발칸의 속담은 영어로 "If he doesn't beat me, he doesn't love me!"이다. 요즘 공개적으로 이런 말을 했다가는 공인의 지위를 유지하기 어려울 테니 너무 진지하게 경청하진 마시길(속담은 속담일 뿐 오해하지 말자!). 이와 관련하여 얼른 떠오르는 영화는 발칸의 영화가 아니라 스페인 영화이다. 페도로 알모도바르의 도발적인 영화 <욕망의 낮과 밤>(1990)이 그것인데, 이 영화의 원제목이 ‘Átame!’이고 영어제목은 <나를 묶어줘! 나를 풀어줘!>(Tie Me Up! Tie Me Down!)이다. 그리고 물론 한국영화로는 장선우의 <거짓말>(1999)을 떠올려볼 수도 있겠다(한국영화로서는 ‘사랑의 폭력’ 혹은 ‘폭력적 사랑’을 다룬 드문 영화이지 않을까?). 


 
“폭력은 이미 자체로 사랑의 선택”이란 말은 무슨 뜻인가? 원문은 이렇다. “violence is already the love choice as such, which tears its object out of its context, elevating it to the Thing” 곧 “사랑은 이러이러한 의미에서가 아니라 저러저러한 의미에서 폭력”이라는 구문이다. 우리말 번역은 이 대목을 "폭력은 이미 자체로 사랑의 선택인데, 그것은 폭력이 사랑의 대상을 맥락에서 떼어내어 대상(Thing)의 자리에 올려놓기 때문이다"라고 옮긴 것인데, 관계사 which의 선행사는 ‘폭력’이 아니라 ‘사랑’으로 봐야겠다. 그리고 문장은 뒤집어서 이해하는 게 더 용이하다. “폭력은 이미 자체로 사랑의 선택”이 아니라 “사랑의 선택 자체가 이미 폭력”이라고 읽는 게 더 좋겠다는 말이다. 결국에 '사랑=폭력'이라는 것이니까 대차는 없는 것이지만 초점은 달라진다. “폭력이 곧 사랑”이라기보다는 “사랑이 곧 폭력”'이라는 게 여기서는 초점이니까.

전체를 다시 옮기면 “사랑의 선택은 그 자체로 이미 폭력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그 대상을 원래의 맥락에서 떼어내어 ‘숭고한 대상’으로까지 고양시키기 때문이다.” 다른 자리에서 ‘사물/괴물’이라고 옮긴 ‘Thing’을 그냥 ‘대상’이라고 하면 의미전달은 잘 안 되기에 여기서는 ‘숭고한 대상’이라고 옮겼다. 여하튼 이것이 ‘사랑의 폭력’, ‘사랑이라는 폭력’이 뜻하는 바이다. 가령, 2007년의 추석맞이 영화로 개봉됐던 곽경택 감독의 영화 <사랑>의 주인공 주진모(채인호)의 경우를 보자. 한겨레 신윤동욱 기자의 리뷰를 잠시 따라가보면 영화는 이런 구도이다.

태초에 한 남자가 있었다. 소년 채인호(주진모)는 첫눈에 소녀 정미주(박시연)에게 반한다. 그리고 끝까지 이야기는 통속성의 공식을 벗어나지 않는다. 소녀는 예쁘고 소녀의 집은 부자다. 산동네 소년은 괜스레 소녀를 괴롭히는 또 다른 소년과 싸운다. 소녀는 소년을 생일에 초대하지만, 하필이면 소녀의 집은 그날 망한다. 그리고 첫 번째 이별. 고등학생 인호는 또 싸운다. 하필이면 싸우다가 인호를 병으로 찌르는 본드쟁이 복학생은 미주의 오빠다. 그렇게 남자는 인호와 미주의 끊어진 인연을 이어주는 다리가 된다. 우연의 우연, ‘지나친’ 정공법이요 통속성의 기본이다. 미주의 본드쟁이 오빠는 노름쟁이 엄마를 껴안고 불살라버린다. 그리고 남겨진 자들의 사랑의 맹세. “니가 내 지키도. 나도 니 지키주께.” 인호와 미주는 서로에게 사랑을 맹세한다.

여기서 순수한 사랑, 곧 순수한 폭력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맥락(학교와 가족사)에서 박시연(정미주)을 떼어내어 대문자 사물(Thing), 곧 '숭고한 대상'(이건 '괴물'이기도 하다)으로 만드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시연을 바라보는 진모의 시선은 건달세계에서 진모가 휘두르는 주먹보다 앞서는 근원적인 ‘폭력’이다. 영화 <사랑>은 그 맹목적인 사랑의 끝을 향해서 단순무식하게 돌진해나가는 ‘순정영화’다.

다시 지젝으로 돌아오면 이어지는 내용은 이렇다. “몬테네그로의 민담에서 악의 근원은 아름다운 여성이다. 아름다운 여성은 주위의 남자들이 균형을 잃게 만들고, 우주에 그야말로 불안정을 초래하며, 모든 것에 편파성의 색조를 입힌다.”

여기서도 떠오르는 영화는 몬테네그로 영화가 아니라 이탈리아 영화 <말레나>(2000)이다. ‘세기의 미녀’라는 모니카 벨루치 주연의 이 영화에서 여주인공 말레나는 마을에서 모든 남성의 시선 끌어 모으는, 그럼으로써 “주위의 남자들이 균형을 잃게 만들고, 우주에 그야말로 불안정을 초래하는” 여인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2차 대전이 한창인, 햇빛 찬란한 지중해의 작은 마을. 이 마을의 매혹적인 여인 말레나가 걸어갈 때면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 그녀를 훑어 내리고 여자들은 시기하여 쑥덕거리기 시작한다. 레나토는 그녀를 연모하는 열세 살의 순수한 소년이다. 남편의 전사소식과 함께 말레나는 욕망과 질투, 분노의 대상이 된다. 남자들은 아내를 두려워해 그녀에게 일자리를 주지 않고, 여자들은 질투에 눈이 멀어 그녀를 모함한다. 결국 사람들은 독일군에게까지 웃음을 팔아야 했던 말레나를 단죄하고 그녀는 늦은 밤에 쫓기듯 어딘가로 떠나게 된다. 레나토만이 진실을 간직한 채 마지막 모습을 애처롭게 지켜볼 뿐이다. 그리고 1년 후, 전쟁의 상처가 아물어 갈 때쯤 말레나가 다시 마을에 나타난다. 그녀의 곁엔 죽은 줄 알았던 남편이 불구가 되어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도 근원적인 폭력은 말레나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폭력 이전에 말레나를 무자비하게 탈맥락화함으로써 ‘숭고한 대상’의 지위로까지 고양시키는, 소년-레나토의 순수한 연모의 시선에 자리한다. 이러한 폭력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 

10. 0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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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7 01: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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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7 01: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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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go 2010-09-17 0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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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0-09-18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니카 벨루치와 박시연! 오! 이런 누나들이 옆집에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벨루치 누나는 이제 나이가 꽤 드셨겠군요.

로쟈 2010-09-20 08:44   좋아요 0 | URL
네, 그나마 덜 끔찍해졌지요.^^;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 11회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11회를 발췌해놓는다. 원고가 밀려 있어서 오늘 아침까지 헉헉대며 쓴 것이다. 내주엔 한 주 쉴 예정이어서 그나마 숨통이 좀 트일 것 같다. 아니, 트이기를 바래본다.

 

“현실을 허구로 오인하지 말라”라는 주장과 함께 지난 회에 다룬 건 신체 자해자들이나 <피아니스트>의 여주인공의 ‘실재에 대한 열정’이 피하고자 한 것이 비현실성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실재 자체라는 지젝의 지적이었다. 그렇다면, 이 ‘실재의 열망’, ‘실재에 대한 열정’은 거부되어야 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런 입장을 취하게 되면 마지막까지 가기를 거부하는 태도, “외양들(appearances)을 보존하자”는 태도밖에 남지 않기 때문이다. 20세기의 ‘실재의 열망’이 던졌던 문제는 그것이 실재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단지 가짜의 열망이었다는 데 있고, 이 가짜의 열망이 외양들 배후에서 무지막지하게 실재를 찾으려고 노력했다면, 그런 노력은 실재와 마주치기를 회피하려는 궁극적 전략이었다는 데 있다.(<탈이데올로기>, 23쪽; <실재계 사막>, 61쪽)

 

어떻게? 이번에는 프란시스 코폴라의 영화 <지옥의 묵시록>(1979, 감독판 2000)을 예로 들어보자. 지젝을 즐겨 읽은 독자라면 친숙한 예이기도 할 텐데, 영화 속에서 말론 브란도가 연기한 주인공 커츠(쿠르츠) 대령은 “프로이트적 의미의 ‘원초적 아버지’에 해당하고, 어떠한 상징적 법에도 종속되지 않은 외설적 향락의 아버지, 소름끼치는 향락의 실재와 직접 대면하려고 나서는 절대적 주인을 대신한다.”(<탈이데올로기>, 27쪽; <실재계 사막>, 65쪽) 중요한 것은 그가 야만적인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서구 권력 자체의 필연적인 결과물로 제시된다는 점이다. 커츠는 완벽한 군인이었지만 군 권력체계와 자신을 과도하게 동일시했고 결국은 체계가 제거해야 할 과잉이 되었다. “이 영화의 궁극적 지평은 권력이 그 자신의 고유한 과도 잉여를 낳고, 자신이 싸우고 있는 상대를 모방해야 하는 작전을 통해 이 잉여를 없애야만 하는 과정에 대한 통찰이다.” 즉 여기서 문제는 체계로부터의 병리적 일탈이 아니라 체계 자체가 필연적으로 생산해내는 과잉이다. 윌라드는 커츠를 제거하는 비밀작전에 투입이 되는데, 그의 임무는 공식기록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 작전을 지시하는 장군의 말대로 “그것은 결코 없던 일이다.”  

(...)

<지옥의 묵시록>의 지평선 너머에 있는 것은 그 계통의 악순환을 일으키는 집단적인 정치활동의 전망이 되는데, 그 계통은 그의 초자아 과잉을 만들어내고, 그 다음엔 그것을 완전 제거하도록 강요된다. 더 이상 초자아의 외설성에 의지하지 않는 혁명적인 폭력이다. 이런 ‘불가능한’ 행동은 진정한 모든 혁명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이다.(<실재계 사막>, 66쪽)

이 대목은 다소 부정확하게 번역됐는데, 첫 문장은 “What remains outside the horizon of Apocalypse Now is the perspective of a collective political act breaking out of this vicious cycle of the System which generates its superego excess and is then compelled to annihilate it”을 옮긴 것이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의 지평 바깥에 있는 것, 그러니까 거기에 빠져 있는 것은 정치적 집단행동이란 전망인데, 이 정치적 행위란 체계의 악순환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벗어나는’ 것이다. 체계의 악순환이란 이미 예시된 대로 체계가 그 자체의 과잉으로서 커츠와 같은 ‘초자아적 과잉’을 만들어내고 또 그것을 제거해야만 하는 악순환을 가리킨다. 혁명적 폭력은 더 이상 그러한 초자아적 외설성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렇게 ‘불가능한’ 행위, ‘불가능해 보이는’ 행위가 모든 진정한 혁명적 과정의 표지가 된다.  

그러한 행위를 회피한다면 ‘실재에 대한 열정’은 진짜가 아니라 가짜다. 그리고 그 핵심은 권력의 더럽고 외설적인 이면과의 동일시이다. 그 동일시는 영웅적 수임이라는 제스처를 취하는데, 그것은 “누군가 그 더러운 일을 해야 한다면 그렇게 하도록 놔두자!”(<실재계 사막>, 70쪽)가 아니라 “누군가 그 더러운 일을 해야만 한다면, 그래 하자!”(Somebody has to do the dirty work, so let's do it!)는 태도다. 이것은 “그래 내가 책임진다!”고 말한다는 점에서,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는 ‘아름다운 영혼’적 태도의 뒤집힌 거울상이다(“우리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보아요”라는 말에서 나는 가끔 ‘아름다운 영혼’을 느낀다). 우리가 우파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세가 또한 그러한 ‘영웅적’ 태도에 대한 찬양이다. 국가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것은 차라리 쉽다.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은 국가를 위해 범죄까지 저지르는 것이다, 라는 논리가 그러한 찬양에는 깔려 있다.  

지젝이 실제로 거론하고 있진 않지만 그가 사례 목록에는 1980년대 이란 콘트라 사건도 포함돼 있을 것이다. 레이건 행정부가 이란에 비밀리에 무기를 판 돈으로 니카라과 우익반군 콘트라를 지원한 스캔들이다. 이 사건에 대한 의회 청문회에서 작전의 ‘악역’을 맡았던 올리버 노스 중령이 당당하게 국가를 위한 자신의 애국심과 신념을 밝혀서 ‘영웅’으로 부상하기도 했었다. 자신이 ‘범죄’를 저질렀다고 하지만 그것은 국가를 위한 것이었다는 변호였다. 레이건에서 노스가 있었다면, 히틀러에겐 히믈러가 있었다. 이건 지젝이 직접 들고 있는 사례인데, 히믈러는 1943년 10월 4일 포젠에서 SS 지휘자들에 대한 연설을 통해 유대인 대량학살이 “우리 역사의 영광스러운 한 페이지이자 결코 씌어진 적도 결코 씌어질 수도 없는 한 페이지”라고 노골적으로 말했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는 여자와 어린아이들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느냐는 물음과 직면하게 됩니다. 나는 여기서도 전적으로 명쾌한 해결책을 찾기로 했습니다. 나는 남자들을 절멸시키는 것이 스스로 정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즉 그들을 죽이거나 죽이도록 한 일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들의 아이들이 자라나서 나중에 우리의 아이와 손자들에게 복수하도록 내버려두는 것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이 민족이 지구상에서 사라지도록 하는 어려운 결단을 내려야만 했습니다. 

바로 다음날 SS 지휘자들은 히틀러가 소집한 회의에 참석해야 했는데, 히틀러는 전황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최종 해결책’을 공개적으로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히믈러가 ‘총대’를 맨 터라 그들 간에 공유된 음모를 넌지시 암시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독일 국민 전체는 이것이 사활이 달린 문제라는 걸 잘 알고 있다. 후방의 다리는 파괴되었다. 오직 전진만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맥락의 연장선상에서 지젝은 실재에 대한 ‘반동적인’ 열정과 ‘진보적인’ 열정을 이론적으로는 대립시킬 수 있으리라고 본다. ‘반동적’ 열정이 법의 외설적 이면에 대한 보증․배서라면, ‘진보적’ 열정은 (‘정화에 대한 열정’에 의해 부인된) 적대라는 실재와의 대면이다. 좌파와 우파 모두에서 실재(계)는 적대를 도입하는 과잉적 요소를 파괴함으로써 접촉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 여기서 지젝은 실재를 우리가 직접 대면할 수 없는 ‘끔찍한 괴물(terrifying Thing)’로 보는 표준적인 비유를 포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궁극적인 실재는 상상적인 베일이나 상징적인 베일에 감춰진 어떤 것이 아니다. 기만적인 외관 밑에 우리가 직접 쳐다보기엔 너무나 두려운 ‘궁극적 실재라는 괴물(ultimate Real Thing)’이 존재한다는 생각 자체가 궁극적인 외관(ultimate appearance)이다. 이 실재라는 괴물은 그 존재를 통해서, 혹은 존재한다는 가정을 통해서 우리의 상징적 세계의 일관성을 보장해주는 한편, 그 구성적 비일관성(적대)과의 대면은 회피하게 해주는 환영적 유령(허깨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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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0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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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4 17: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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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5 01: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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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 10회

진도가 안 나가는 원고를 오래 붙들고 있다 보니 포스팅이 늦었다. 오늘 아침에 원고를 보낸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10회를 발췌해놓는다. 아직 '실재계 사막'을 못 벗어나고 있으며,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 <피아니스트> 얘기를 약간 다루고 있다.  

(...)

이제 지난 회에서 다룬 ‘가상과 실재의 변증법’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들어보자. 9.11 사건이 “현실이 우리의 이미지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지가 우리의 현실로 들어와서 우리의 현실을 산산조각 낸 것”이라고 말하는 대목까지 인용했는데, 이에 대한 설명을 보충하기로 한다. 물론 지젝의 설명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가상(semblance)과 실재의 변증법이 일상적 삶의 가상화(virtualization)와는 다른 문맥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하루가 다르게 일상적 삶이 가상화되고 우리가 갈수록 인공적으로 구성된 세계에 살게 되었다는 경험은 “실재로 복귀하고” 어떤 “실재적인 현실”에 굳건히 뿌리를 다시 내리고자 하는 참을 수 없는 충동을 낳는 것이지만, 가상과 실재의 변증법은 이런 초보적인 사실로 모두 환원되거나 설명될 수 없다. 다시 돌아오는 실재는 어떤 (다른) 가상의 지위에 있다. 정확히 말해서 실재는 바로 실재적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외상적이고 과도한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실재를 우리의 현실 안으로 통합해낼 수 없고, 그래서 그 실재를 어떤 악몽의 출현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다.(<탈이데올로기>, 21-22쪽; <실재계 사막>, 52쪽)

일상적 삶이 가상화되고 있어서 더욱 확고한 ‘실재적 현실’에 뿌리 내리고자 하는 충동을 갖게 된다는 점은 ‘자해자들’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는 ‘초보적인 사실’이고 지젝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돌아오는 실재’, 다시 ‘귀환하는 실재’는 좀 다른 가상의 지위를 갖는다는 것이다. ‘실재’란 그 정의상 외상적이면서 과잉적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현실’로 통합할 수 없다. 즉 현실이란 틀에 다 담을 수가 없다. 그것은 넘쳐난다. 때문에 실재는 언제나 악몽 같은 것으로 경험될 수밖에 없다. 9.11 때 무너진 쌍둥이빌딩의 이미지가 바로 그렇다. 그것은 ‘이미지’이자 ‘가상’이고 어떤 ‘효과’였지만, 동시에 ‘사물 자체(the thing itself)’였다.

만약 실재가 가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고 악몽으로서만 경험된다면, 거기서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은 무엇인가? “허구를 현실로 오인하지 말라”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주장을 정확하게 뒤집어서, “현실을 허구로 오인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현실의 어떤 부분이 환상을 통해 ‘기능 변화’를 겪는지 식별하고, 그래서 그것이 현실의 일부임에도 불구하고 허구적인 양태로 지각되고 있음을 제대로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실재적인 현실(real reality)’ 속에서 허구의 부분을 알아내는 것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이 허구의 가면임을 폭로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고 지젝은 덧붙인다. 라캉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동물들은 가짜를 진짜로 속일 수 있지만, 유일하게도 인간은 진짜를 가짜로 속일 수 있다고. 그러니 중요한 것은 그 진짜 속에서 가짜를 가려내는 것이다. 실재적 현실 속에서 허구를 식별해낸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그런 관점에서 지젝은 면도칼(면도날) 자해자들의 사례도 다시 해석해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일 실재의 참된 대립 항이 현실이라면, 면도칼로 스스로 자해할 때 이들이 실제로 도망치고 벗어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비현실성에 빠져 있다는 느낌이나 일상적 삶의 인공적 가상성이 주는 느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실재 자체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것이고, 이 실재는 우리가 현실에 내린 닻이나 뿌리를 상실하는 순간 출몰하기 시작하는 통제 불가능한 환각의 형태를 띠면서 터져 나오는 것이다.(<탈이데올로기>, 23쪽; <실재계 사막>, 53쪽)

요컨대, 신체 자해자들이 회피하고자 하는 것은 비현실성이 아니라 오히려 실재라는 것이다. ‘현실’에 내린 닻을 잃어버리자마자 우리에게 출몰하기 시작하는 이 실재의 환각에 대해서는 헤겔이 말하는 ‘세계의 밤’에서 기원적 이미지를 찾을 수 있을 듯싶다. 지젝이 자주 인용하는 대목이기도 한데, 참고삼아 인용한다(이 대목에 대한 설명은 토니 마이어스의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를 참고할 수 있다).  

"인간은 이런 밤, 즉 모든 것을 단순한 상태로 포함하고 있는 이 텅 빈 무이다. 무수히 많은 표상들, 이미지들이 풍부하게 있지만, 이들 중 어느 것도 곧장 인간에게 속해 있지 않다. 이런 밤, 여기 실존하는 자연의 내부, 순수 자기(self)는 환영적 표상들 속에서 주변이 온통 밤이며, 그때 이쪽에선 피 흘리는 머리가, 저쪽에선 또 다른 흰 유령이 갑자기 튀어나왔다가 또 그렇게 사라진다. 무시무시해지는 한밤이 깊어가도록 인간의 눈을 바라볼 때, 우리는 이 밤을 목격한다.”(<까다로운 주체>에서 재인용)

여기서 좋은 사례가 돼주는 것은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 <피아니스트>(2001)이다. 노벨상 수상작가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소설 <피아노 치는 여자>(문학동네)를 원작으로 한 영화로 젊은 피아니스트와 연상의 여자 선생님 사이에 벌어진 ‘정열적이지만 도착증적인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자벨 위페르가 문제의 선생님 역을 맡아 뛰어난 연기를 선보였고, 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원래는 19세기말 빈에서 상류가정의 성적으로 억압된 여성이 자신의 피아노 선생과 열정적인 사랑에 빠진다는 상투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것인데, 이것이 한 세기 뒤에는 남녀의 성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오늘날의 관용적․방임적 시대에는 이런 이야기 자체도 도착적으로 비틀리게 된다는 점이다.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이 성적으로 구애를 해오자 ‘억압돼 있던’ 피아노 선생은 그녀의 요구조건을 상세하게 적은 편지를 그에게 보냄으로써 자신을 폭력적일 만큼 격렬하게 내보인다. 편지의 내용은 자신을 묶는 법, 항문을 강제로 핥게 하기, 그리고 따귀를 때리고 매질하기 등등, 기본적으론 피학증적 성관계의 시나리오를 담은 것이다. 그녀의 이 가장 내밀한 환상 자체는 너무 외설적이고 외상적이어서 입에 담을 수 없기에 글로 쓰였다. 이러한 환상의 직접적 노출은 남자에게 그녀의 지위를 ‘매혹적인 사랑의 대상’에서 ‘혐오스런 실체’로 변환시키지만, 그는 처음엔 거부감을 느낀 그 시나리오에 몰입한다. 그녀의 뺨을 때려서 코피가 나게 하고 난폭하게 걷어찬다. 그러고 나서는?

그녀가 환상의 실현으로부터 움츠러들면서 쓰러져갈 때, 그는 그녀에 대한 승리를 확인하기 위해 그녀에게 행위로의 이행과 구애를 한다.(55-56쪽)

(...) 

여하튼 그녀의 환상을 거쳐서 그는 직접적인 성행위(삽입)로 넘어갔지만, 그녀에게 환상에 의해 지탱되지 않는 성행위 자체 아주 혐오스런 경험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 혐오스러움은 그녀를 다시금 냉담하게 만들고 자살로 내몬다. 무엇이 문제인가? 그녀의 환상의 노출을 진정한 성적인 행위에 대한 방어형성으로 해석하고 그 행위를 즐기러 갈 수 없게 만든 그녀의 무능함의 표현으로 해석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해석이라고 지젝은 말한다. “그와 반대로 노출된 환상은 그녀 존재의 핵심을 형성하는데, 그것은 ‘그녀 안에 있는 그녀 자신보다 더 많은 것’이다. 실제로 환상 속에 구체화된 위협에 대한 방어형성이 되는 것은 바로 그런 성적인 행위이다.”  

‘그녀 안에 있는 그녀 자신보다 더 많은 것’은 ‘in her more than herself’의 번역이다. 이전에 한번 다룬 대로, 그녀 안에 있는 ‘사물’ 혹은 ‘괴물’이라고 해석해도 좋겠다. 우리에게 이질적이고 낯설지만 우리 안에서 있으면서 우리 존재의 핵심에 더 가까운 어떤 것을 가리킨다. ‘환상’이 형태로 삐져나오긴 했지만, 그것이 핵심이고 실재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실재의 위협에 비하면 실제 성행위란 그에 대한 방어 형성물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이 <피아니스트>에서 얻을 수 있는 메시지다. 현실을 허구(환상, 가상)로 오인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10. 09.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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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10-09-09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에 대해선 <피아니스트>에서 약간의 호감을 갖게 되었고, <하얀 리본>에서 결정적 지지를 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그것이 담고 있[다고 생각되]는 사상적/역사적 주제에서가 아니라 순전히 그 미학적 형식미의 측면에서요. 어쩌면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에서 영화 <하얀 리본>을 다뤄도 상당히 문제적일 것 같다는 생각이 살짝 들었습니다.^^

로쟈 2010-09-10 07:14   좋아요 0 | URL
<하얀리본>은 예고편만 봤어요. 영화를 통 못보고 있어서요.--; 저보다도 먼저 한번 다뤄주시죠.^^
 

'지젝 읽기' 연재 원고를 쓰다가 새로운 글이 없나 검색해봤는데, 중앙대 대학원신문에 한보희 연세대 강사가 쓴 글이 올라와 있다(사실 내가 다리를 놓은 글이기도 하다). 오랜만에(?) 지젝 관련 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중앙대 대학원신문(10. 09. 01) 진리의 심연을 떠안는 주체의 정치  

슬라보예 지젝의 첫 영문 저서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은 1989년에 출간되었다. 1989년은 대단히 상징적인 해이다. 그 해 봄 중국 공산당은 천안문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던 시위대―인민들!―를 탱크로 깔아뭉갰고 가을에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으며,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이 도미노처럼 잇달아 붕괴하더니 마침내 소련의 해체로 끝장을 보고 말았다. 오늘날 1989년은 ‘사회주의의 공식적 사망년도’로 통용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가 현실 사회주의와 운명을 같이하게 되리라는 게 모두에게 분명해 보였던 바로 그 무렵, 놀랍게도 지젝은 마르크스주의의 부활을 준비하는 책을 내놓으며 두더지처럼, 만장일치의 합의를 무너트릴 땅굴을 파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이 놀라운 데뷔작 이후 상재된 일군의 초기 저작들은 지젝을 단박에 서구 인문학계의 스타로 만들어주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지젝이 이때부터 구가해온 성공 가도에는 아주 기이한 면이 있다. 그것은 지난 20년 간 소위 대세라고 여겨지던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 최종적 승리, “역사의 종언”, 그리고 신자유주의와 냉소적 회의주의 등등의 주류적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며 성취된 것이니 말이다.

지젝의 책이 국내에 처음으로 번역된 1995년, 이 싱싱하고 매력적인 이론가가 방금 우리가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린 ‘변증법적 유물론’의 혁신적 계승자란 생각은 당시 누구도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지금도 지젝을 대하는 태도는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지만 중요한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지젝의 ‘레닌론’은 그 시금석이다.  



마르크스와 레닌의 ‘2인 3각’
1989년 이래로 좌파와 우파가 공유한 불문율 중 하나는 ‘마르크스는 괜찮아. 그러나 레닌은 안 돼!’였다. 지젝이 이 불문율에 제기하는 반론은 우선 이런 것이다. “레닌에 관해 말하지 않으려면 마르크스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어라!” 어째서? 레닌이라는 이름은 마르크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코뮤니즘이라는 잠재력의 현동화(actualization)를 표상한다. 그는 마르크스의 교양적 독자가 아니라 실천적 마르크스주의자, ‘살아있는 마르크스주의’였다. 실천(praxis)이라는 끈에 의해, 마르크스와 레닌은 ‘2인 3각’ 달리기에서처럼 하나가 된다.  

그러나 ‘하나가 된다’는 말에는 언제나 주의가 필요하다. 경기를 해본 사람은 누구나 알겠지만 ‘2인 3각’은 둘이 하나가 되는 조화의 경험과는 사뭇 거리가 멀다. 기본적인 느낌은 ‘마음대로 되지 않음’과 ‘뒤뚱거림’이다. ‘살아있는 마르크스주의’란 표현에서 강조되어야 할 것도 바로 그 대목이다. 살아있음의 구체적 체험들―예컨대 사랑―이 대개 그러하듯, 그것은 이질적인 타자와의 마찰, 부조화, 마치 장애물을 안고 뛰는 듯한 불편함을 선사한다. 물론 2인 3각의 묘미는 바로 그런 상호 타자성을 견디고 넘어설 때, 나의 다리도 너의 다리도 아닌 저 ‘세 번째의 다리’가 마치 내 다리인 것처럼, 보다 정확히 말해 내가 그 ‘타자의 다리’에 붙은 신체인 것처럼 움직일 때의 향락(juissance)이다.

마르크스와 레닌이라는 2인 3각에서 세 번째 다리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코뮤니즘’이다. 이 세 번째 다리―음탕한 농담에서 언제나 남근(phallus)을 가리키는―가 포퓰리즘적 지도자의 형상을 띠거나 파시즘적인 ‘우리’로 변질될 위험이 있다는 점을 외면할 필요는 없다. 아니, 외면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러한 위험을 과감히 가로질러가야 한다. 레닌의 위대함은 그가 (나중에 스탈린주의라 불리게 될) 그런 위험과 끝까지 투쟁하며 혁명적 실천을 거듭했다는 점에 있지, 애초 그런 위험을 멀리한 신중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    



‘레닌을 반복하자’는 지젝의 말
지젝이 강조하는 레닌은 1914년의 재난으로부터 1917년의 혁명에 이르기까지의 ‘불가해한 레닌’이다. 1914년 제2인터내셔널이 1차 대전을 용인하기로 결정했을 때, 이제까지의 사회주의 이념은 깡그리 무너져버렸다. 당시 레닌은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엉뚱하게도 스위스 베른의 도서관에 처박혀 헤겔의 <논리학>을 정독했다. 지젝은 레닌이 헤겔 <논리학> 독해에서 통찰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큰 타자(Autre)는 없다’는 라캉의 명제와 연결시킨다. 그는 레닌이 그 큰 타자의 ‘빈자리’에서 허무가 아니라 주체의 자유를 실현할 장(場)을 발견하는, 혹은 바로 그 간극(빈자리)을 주체적으로 떠안는 '실재(the Real)의 행위'를 보여주었다고 말한다.

지젝이 거듭 강조하는 것은 레닌의 바로 이 행위, 혁명에 대한 어떠한 전제나 보장도 사라진 큰 타자의 공백을 주체적으로 떠안는 몸짓(gesture)이다. 그것은 무조건적 의지주의가 아니며 레닌이 책에서 읽은 것을 현실에 과감하게 적용했다는 뜻도 물론 아니다. 마르크스라는 미완의 텍스트가 레닌이라는 ‘사라지는 매개자’를 통해 미완결의 현실이라는 텍스트와 조우한 이 사건의 변증법적 핵심은 사랑에 관한 라캉의 통찰―사랑은 두 개의 결핍이 만나 발생시키는 잉여이다―의 정치적 버전이라 할 만하다. 또한 그것은 주체와 객체가 자신의 간극을 열어 서로에게로 침투하는 사건이다. ‘역사의 종말’이라고 일컬어지는 후기 자본주의적 봉쇄와 교착상태 속에서 우리가 지금도 그런 주체와 객체의 동시적 ‘열림’을 경험할 수 있을까. 지젝은 이 물음을 화두삼아 1989년 이래로 자본주의적, 자유민주주의적 상징계로 꽉 닫혀버린 우리시대에 꾸준히 ‘구멍’을 내왔고, 독자들은 그가 뚫는 구멍들을 해방의 가능성을 향한 ‘열림’으로 체험해왔다. 이것이 지젝의 기묘한 ‘반시대적’ 성공의 이유가 아닐까.

포퓰리즘을 넘어서
오늘날 파시즘의 유사 버전으로 도처에서 자라나고 있는 좌파적, 우파적 포퓰리즘들은 사람들이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치형식으로 봉합할 수 없는 자본주의적 간극의 실재를 감지하기 시작했다는 표지이다. 비록 그것이 인기에 영합하는 정치지도자와 대중들의 무분별한 요구가 직접적으로 결합하는 형태로 나타기는 하지만 그래도 거기에는 치안이나 행정서비스로 환원되지 않는 본래적 ‘정치’가 여전히 가능하다는 긍정적 표식이 들어있다. 이런 맥락에서 지젝은 포퓰리즘을 돌출적인 악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이 구성되는 하나의 방식으로 이해하는 라클라우에 동의한다.  

하지만 포퓰리즘은 주체(대중)가 자신의 수치와 대면해야 할 사회적 적대의 심연을 사이비 적대―이른바 좌빨과 촛불좀비에서부터, 열폭하는 찌질이와 쥐박이에 이르는 온갖 혐오의 형상들―를 통해 회피하고 기성의 욕망체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요구만을 계속하는 ‘증상’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비판받아야 할 무책임과 비진리, 그리고 비주체의 정치이다. 포퓰리즘의 문제는 그것이 인민의 열망과 불만을 정치적 비전으로 발언하지 못하고 번역하지 못한 (정치 엘리트만이 아니라) 인민 자신의 무능력에 대한 기념비라는 데 있다. 라클라우의 포퓰리즘 이론에 대한 지젝의 비판은 결국 이 주체의 간극과 그것을 떠안는 ‘행위’의 문제로 집약된다. 포퓰리즘 정치에서 대중은 여전히 지도자와 구분되는 객체(대상)의 자리에 머문다. 거기에는 (상상적, 상징적) 자기를 부정할 때 비로소 생성되는 ‘실재의 주체’로서의 대중 자신이 결여돼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포퓰리즘에 대한 라클라우의 담론에도 이 ‘실체이자 주체’로 도약하는 대중의 ‘행위’, 한마디로 ‘레닌적 제스처’가 결여돼 있다.

포퓰리즘을 넘어서는 레닌적 ‘진리의 정치학’은 진리를 소유한 자―그는 언제나 물화된 진리의 소유물이 될 수밖에 없다―의 독단적 통치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안의 타자를 향한 우리 자신의 물음(問)이 열리는 구멍(口)에 뛰어들어 자신을 새로운 역사적 형세(constellation)를 여는 문(門)으로 변화시키는, 실체이자 주체인 진리가 되어가는, 우리 삶의 과정 자체이다. 지젝은 이를 “생성 중인 레닌”이라 불렀다. 우리가 지젝의 텍스트와 ‘2인 3각’ 달리기를 해야 할 운동장도 그 주체적 생성의 시공간으로서의 ‘삶-정치’이다.(한보희/ 연세대 강사)  

10. 09.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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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 9회

제목에서 이미 눈치챈 분들이 많을 텐데,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9회를 발췌해놓는다. 연재를 시작한 지 한 달이 됐지만, 아직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의 첫 장도 다 읽지 못했다. 예상보다 진도가 더딘 편인데, 초반에 개념 설명이 좀 들어가서 그런 걸로 봐주셔야겠다. 그렇다고 이후엔 진도가 더 빨라질지 아직은 장담할 수 없다. 아무튼 다음주까지는 1장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실재계의 사막>은 총 5개의 장으로 돼 있다. 

  

다시 반복해보자. “소위 근본주의자의 테러라는 것도 실재계에 대한 열정의 표현이 아닐까?”(<실재계의 사막>, 35쪽)라는 것이 지젝의 물음이다.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는 많은 사례들을 동원하여 따져본다. 지젝의 주된 방식이지만 안팎을 뒤집어가면서.  

 

영화 <바더 마인호프>(2008)를 통해서 우리가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던 풍경이지만 지젝은 먼저 1970년대 초 독일의 적군파(Red Army Faction) 테러의 배경에 주목한다. 신좌파 학생운동이 붕괴된 뒤 곁가지로 빠져나온 것이 적군파였는데, 그들은 학생운동 실패의 교훈을 이렇게 짚었다. (1)대중들이 비정치적 소비주의에 너무 깊이 침윤돼 있다. (2)통상적인 정치교육과 의식화로는 그들을 각성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 (3)따라서 그들을 이데올로기적 무감각과 최면 상태에서 흔들어 깨우려면 더 폭력적인 개입이 필요하다(슈퍼마켓 폭파 같은). 이와 동일한 논리가 오늘날의 근본주의적 테러에도 그대로 적용되지 않을까? 이 역시도 일상적 이데올로기의 세계에 푹 빠져 있는 서방 시민들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 아닐까? 

여기서 지젝이 주목하는 것은 이러한 ‘실재에 대한 열정’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역설이다. 그러한 열정은 그 정반대적인 ‘연극적 스펙터클’에서 절정에 도달한다는 점에서 역설적인데, 바로 그런 맥락에서 ‘실재에 대한 열정’은 ‘가상(semblance)에 대한 열정’이기도 하다(<실재계의 사막>에서는 ‘모사에 대한 열정’으로 옮겨졌다). 실재=가상? 그래서 역설이다. 지젝은 이렇게 정리한다.

만일 실재계에 대한 열정이 극적인 실재계 효과의 순수한 외관으로 끝난다면, 그와는 정반대로 외관에 대한 ‘포스트모던’의 열정은 실재계에 대한 열정으로의 맹렬한 회귀로 끝나게 된다.(<실재계의 사막>, 37쪽)

(...)

여하튼 우리 주변에서도 면도날이나 담뱃불로 자해하는 경우를 아주 드물지는 않게 볼 수 있다. 그건 어떤 의도에서인가? ‘현실 자체’를 주장하기 위해서, 단언하기 위해서다. 거꾸로 말하면, 뭔가 사는 것 같지 않고, 현실이란 실감이 나지 않아서다. 자해는 그런 가운데 자아를 신체적 현실 안에 확고하게 근거지우기 위한 시도이다. “면도칼 자해자들에 대한 표준적인 보고에 따르면, 스스로 자해한 상처에서 붉고 따듯한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고나면 느낌이 다시 살아나고 현실에 확고히 뿌리내린 기분이라는 것이다.”(<탈이데올로기>, 19쪽) 물론 이러한 자해행위는 병리적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어떤 정상성을 회복하고, 완전한 정신병적 붕괴를 피하기 위한 병리적 시도이다 즉 자해자는 정신병자가 아니라, 정신병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다하는 자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해 현상과 상관적인 것이 바로 우리 주변 환경의 ‘가상화(virtualization)’이다. 실체가 제거됨으로써 현실이 점점 더 가상현실화 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다. 예컨대, 카페인 없는 커피, 지방을 뺀 크림, 알코올 없는 맥주 등등. 섹스 없는 섹스로서 가상섹스(혹은 사이버섹스)도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고, 전쟁 없는 전쟁, 곧 아군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는 전쟁에 대한 콜린 파월의 독트린도 추가할 수 있다(<실재계의 사막>에서 ‘아무런 인관관계도 없는 전쟁’은 ‘아무런 아군 사상자도 없는 전쟁(warfare with no casualties)’의 오역이다). 거기에 정치를 행정으로 대체한 ‘정치 없는 정치’와 타자성이 제거된 타자 경험으로서 관용적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까지 ‘가상화’는 전면적이다. 여기서 ‘타자성이 제거된 타자의 경험(experience of the Other deprived of its Otherness)’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두 가지 번역본이 모두 잘못 옮기고 있어서 잠시 짚고 넘어간다. 원문과 그에 대한 두 번역이다.   

"the idealized Other who dances fascinating dances and has an ecologically sound holistic approach to reality, while practices like wife beating remain out of sight."

“매혹적인 춤을 추고 현실에 대해 생태학적으로 건전한 심신상관학설의 접근방법을 보이면서도 안 보이는 곳에서는 아내 구타를 일삼고... 그러한 이상화된 대타”(<실재계의 사막>, 38쪽)

“그 타자는 매혹적인 춤을 추고 생태학적으로 건전하고 유기체적인 접근법을 통해 현실에 접근하지만 남편을 구타하는 아내 등과 같은 모습에는 눈감고 있는 이상화된 타자다.”(<탈이데올로기>, 20쪽)

인용문 전체는 ‘타자성(Otherness)’이란 말 뒤에 괄호로 묶여서 등장한다. 그 타자성이란 어떤 타자성인가? ‘매혹적인 춤’을 춘다고 할 때 먼저 떠올리게 되는 건 서남아시아나 동남아의 춤이다. 뭔가 이국적인 춤. 동아시아의 춤이어도 무방하겠다. 그리고 ‘holistic approach’을 ‘심신상관학설의 접근방법’이나 ‘유기체적인 접근법’이라고 옮긴 건 좀 한정적이다. 전체론적 접근, 전일론적 접근을 뜻하는데, 분리적 접근과 반대되는 의미다. 몸과 마음을 분리시켜 사고하지 않으며, 부분과 전체를 분리시켜 사고하지 않는다는 것도 포함하지만. 간단한 예를 들자면 수지침 같은 것이다. 손바닥에 전신의 부위에 해당하는 대응점이 있어서 여기에 자극을 주어 질병을 치료한다는 원리다. 발 마사지도 마찬가지다. 손이나 발은 몸의 일부이지만 전체를 반영한다는 것이 ‘전일론적 접근’이다. 서양의 기계론적, 분리론적 접근과는 다르기에 낯설고 ‘타자적’이다. 이 정도 타자성에 대해서는 관용적인 태도를 보이는 게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다.  

하지만 그 타자성에도 불편하고 께름칙한 게 있다. ‘아내 구타’ 같은 관습이다. ‘practices like wife beating remain out of sight’는 ‘아내 구타 같은 관습’은 ‘이상화된 타자’를 구성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 관습은 배제된다. “안 보이는 곳에서는 아내 구타를 일삼고... 그러한 이상화된 대타”는 “안 보이는 곳에서는 아내 구타를 일삼는 이상화된 타자”라는 식으로 이해되는데, ‘아내 구타’와 ‘이상화된 타자’는 서로 충돌한다. “남편을 구타하는 아내 등과 같은 모습에는 눈감고 있는 이상화된 타자다”라는 번역도 ‘wife beating’이 어떻게 ‘남편을 구타하는 아내’로 둔갑하는지 의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습에 ‘눈감는’ 주체는 ‘이상화된 타자’가 아니라 ‘우리(서양인)’이다.  

‘아내 구타’는 빼놓고 매혹적인 춤과 전일론적 현실관 같은 타자성만을 수용하는 것, 그것이 ‘타자성 없는 타자’의 경험이다. 거기엔 카페인 없는 커피나 알코올 없는 맥주처럼, 우리식으론 ‘앙꼬 없는 찐빵’처럼 뭔가 실체가 빠져 있다. 그렇듯 뭔가 빠진 현실을 일반화한 것이 ‘가상현실’이다. “그것은 실체를 잃어버린 현실 그 자체를 제공하고 있는데, 다시 말해 실재계의 견고하고 저항적인 핵심을 잃어버린 것이다.”

 

(...) 

10. 09.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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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야 2010-09-09 0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속 눈팅만 하다가 이렇게 처음으로 댓글 올려봅니다. 그동안 로쟈님 블로그 통해서 좋은 책들 많이 알게 되어서 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나저나 wife-beating이 남편을 구타하는 아내로 번역되다니 정말 아연실색이네요..

Spidersens 2010-09-09 07:45   좋아요 0 | URL
>> 그나저나 wife-beating이 남편을 구타하는 아내로 번역되다니 정말 아연실색이네요..

그렇게 놀라실 일은 아닙니다. 원문에서는 "-" 없이 "wife beating"으로 되어있는데요. 급히 지나가면서 보면 동명사 "beating"이 앞의 "wife"를 수식하는 현재분사처럼 보이고, 일반적으로 현재분사를 옮길 때 쓰는 "~하는"을 쓰다 보니 "(누군가를) 구타하는 아내"로 생각하게 되고, 생략된 구타의 대상을 당연히 남편이겠거니 하고 짐작하고 "남편을 구타하는 아내"라고 옮겼을 겁니다.
또다른 예로 등장한 "casualties"의 경우도 빨리 지나가면서 보면 "causality"로 보일 수 있죠. 그러니 "인과관계"로 잘못 옮겼을 테고...
문제는 이런 실수를 했다는 것이 아니라, 옮기고 나서 다른 사람의 책을 보듯 검토를 했어야 하는데, 역자가 그걸 하지 않은 듯 하다는 겁니다.

로쟈 2010-09-09 09:04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실수는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인데, 문제는 걸러내는 사람이나 시스템이 없다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