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부터 프레드릭 제임슨과 씨름하려니까 지겨기도 한데, 잠시 짬을 내 '러시아 이야기' 하나를 올려놓는다. 러시아 관련 뉴스라야 '테러 아니면 에너지'가 주종이었고, 최근에는 단연 에너지 관련 행보가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러한 행보에 대해서 '에너지 파시즘'으로 경계하는 한 칼럼이며 프레시안에 번역 전재된 걸 스크랩해놓는다. 내용 자체는 새로운 게 없지만(푸틴의 박사학위논문 제목은 처음 알게 됐다), '에너지 파시즘'이란 선정적인 용어가 일단 눈길을 끌고 관련정보들을 정리해놓은 의의가 있다. 아래 편집자의 말에 이어지는 것이 그 칼럼이다.  

다음은 미 뉴햄프셔대 마이클 클레어 교수의 '석유 패권과 핵 르네상스기': 에너지 파시즘의 두 얼굴(Petro-Power and the Nuclear Renaissance: Two Faces of an Emerging Energo-facism)'을 완역한 것이다. 에너지정치학의 국제적 권위자인 클레어 교수는 석유 확보를 둘러싼 국가 간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석유 확보를 명분으로 한 파시즘이 초래될 것이라고 경고한 앞의 글('우리의 미래는 에너지 파시즘인가?')에 이어 이번 글에서는 에너지 초강대국으로 급부상 중인 러시아를 모델로 에너지 파시즘의 단면을 제시하고 있다. 개인의 소유하고 있는 에너지 재산을 비합법적 방법으로 국유화 한다든지, 에너지를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도구로 활용한다든지 하는 등 러시아가 에너지 패권을 극대화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몇 가지 모습들이 에너지 파시즘의 어두운 얼굴이라는 것이다. 
  
석유나 천연가스가 고갈된 자리를 원자력이 메우게 되면서 그 시설을 방어하고 그 부산물의 유출을 감시하기 위한 정부 통제권이 강화되라라는 전망 역시 파시즘의 도래를 우려케 한다. 이에 클레어 교수는 "대다수의 정부 지도자들은 이 문제들의 초점을 정부 통제력을 증가시키거나 군사력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는 데 두려 한다"며 '지각 있는 시민'이 이 문제 해결에 나설 것을 당부한다. 원문은 미국 진보성향 인터넷 매체인 <톰디스패치닷컴>에서 볼 수 있다. <편집자>

프레시안(07. 02. 07) 러시아, '에너지 파시즘'의 정점에 서다

전편에서 말한 것처럼 앞으로 수십년간 세상사를 지배하고 일반 사람들의 삶을 어둡게 만드는 것은 '이슬람 파시즘'이 아니라 '에너지 파시즘'이다. 즉 갈수록 줄어드는 에너지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전지구적 군사투쟁이 우리들의 삶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이는 전 세계의 정부 관료들이 국가 에너지 수요를 시장의 힘에 맡겨두기보다는 에너지의 확보, 수송, 할당 등을 정부가 직접 책임지고자 하기 때문이다. 강대국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는 에너지 확보에 저항하는 세력들을 제압하기 위해서라면 무력 사용도 마다하지 않을 준비가 돼 있다.
  
이러한 에너지자원 확보의 절박성은 미국의 경우, 미군의 업무를 '세계 석유 보호기관'으로 전환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이밖에 에너지 파시즘의 도래를 알리는 또 다른 징후로는 러시아의 '에너지 초강대국'으로의 급부상, 원자력에너지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안전 등을 이유로 한 국가권력의 감시 및 통제가 강화될 것이란 점을 들 수 있겠다.

에너지 부국이 곧 강대국이 되는 시대
  
에너지 수요는 증가하는 데 반해 공급은 줄어드는 상황에서(최소한 공급 증가가 수요 증가를 따라잡지 못하는 상황에서) 전 세계는 크게 에너지 부국과 에너지 빈국으로 나뉘게 됐다.
에너지 부국들은 에너지(석유, 가스, 석탄, 수소에너지, 우라늄, 대체에너 자원 등) 자체 보유량이 국내 수요를 충족시키고도 남아 다른 나라에 수출까지 한다. 반면, 에너지 빈국들은 부족한 에너지자원을 수입하기 위해 엄청난 돈을 쓰거나 아니면 에너지 부족의 뼈아픈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지난 50년간(1950~2000년)은 에너지가 풍부하고 값이 쌌기 때문에 에너지 부국과 빈국 간의 차이가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 일본처럼 어마어마한 부자거나 영국, 프랑스처럼 핵무기를 갖고 있거나, 하다못해 나토 동맹국이나 바르샤바 조약기구 가맹국들처럼 '힘센 우방국'이 있다면 에너지를 갖고 있지 않더라도 문제가 없었다. 물론 당시에도 이도저도 없는 국가들은 고생을 해야 했다. 아직도 이들 국가들을 고통 속에 몰아넣고 있는 외채위기는 사실 에너지부족에 기인한 바 크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돈이 많다거나 핵무기가 있다든가, 또는 강력한 우방국을 갖고 있다는 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됐다. 오히려 에너지 부국이냐, 빈국이냐의 차이가 더 중요해졌다. 돈 많고 힘 있는 미국과 일본에게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오늘날 지구상에서 에너지 부국이라고 할 수 있는 나라는 의외로 적다. 호주, 캐나다, 카자흐스탄, 쿠웨이트, 나이지리아, 카타르, 러시아, 사우디아라비아, 베네수엘라, 이란, 이라크(현재의 혼란이 극복된다면) 정도다. 그 외에 몇 나라 더 있을까. 이들 나라는 선망의 대상이다. 일단 엄청난 가격의 석유와 천연가스를 수입하지 않아도 되고, 이들 나라의 지도층들은 충분한 에너지 확보를 원하는 다른 나라 지도층으로부터 정치적, 경제적, 외교적, 군사적 혜택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에너지 소비국들을 싸움 붙여 이득을 챙길 수도 있다. 워싱턴과 베이징으로부터 경쟁적으로 초대받고 있는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은 이런 게임에 아주 능숙한 지도자다.
  
심지어 단순한 경제적 혜택을 보장받는 것에서 더 나아가 에너지 소비국에 대해 정치적인 지배권을 행사할 수도 있다. 에너지 소비국은 국가운영에 필수적인 석유와 천연가스의 안정적인 판매를 보장받기 위해 에너지 공급국의 정치적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전략을 가장 적극적으로 구사하고 있는 나라는 바로 블라디미르 푸틴의 러시아다.

러시아의 가스는 '패권의 방향'으로 흐른다 
  
냉전이 끝난 후 러시아는 희망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초강대국'은 이미 과거의 얘기였고 정신적으로나 재정적으로, 그리고 영향력 면에서도 한물 간 것처럼 보였다.
수 년 간 미국 관리들로부터 모욕적인 대우를 받기도 했다. 미국이 이끄는 나토가 동유럽의 러시아 위성국가에까지 확장됐고, 요격미사일금지협정(ABM)은 일방적으로 폐기됐다. 미국 정부의 수많은 관료들이 러시아를 역사적 유물 이상으로 여기지 않으며 세계사에서 러시아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다.
  
그러나 이제 와서 보면 '최후의 미소를 짓는 자'는 워싱턴이 아니라 모스크바인 것으로 보인다. 엄청난 양의 석유와 우라늄은 물론 유라시아 최대의 천연가스와 석탄 보유량을 자랑하는 러시아는 이제 새로운 '승자'가 됐다.
군사 초강대국이 아닌 에너지 초강대국이 된 것이다. 어찌됐건 초강대국은 초강대국인 셈이다.
  
먼저 큰 그림을 보자. 러시아는 천연가스 생산에 있어 '절대강자'다. 영국의 BP 석유그룹에 따르면 러시아의 천연가스 보유량은 측정된 것만 1700조 입방피트에 이른다고 한다. 전 세계 천연가스 공급량의 27%를 차지하는 양이다. 이 사실은 보기보다 갖고 있는 의미가 더 크다. (러시아 에너지 자원의 주요 고객인) 유럽과 옛 소련국가들의 천연가스 의존 비율이 34%로 전 세계 어느 지역보다 높기 때문이다. (석유를 주 연료로 하는 미국의 경우 천연가스 의존도는 25% 정도다.) 유라시아 가스 공급원을 주도한 덕에 러시아는 다른 에너지 공급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지배적 공급자의 위치를 누리고 있다.

물론 석유 공급에서도 러시아는 강력한 우위를 갖고 있다. 세계 1위인 사우디아라비아를 따라잡을 수는 없겠지만, 하루 1100만 배럴을 생산하는 사우디아라비아에 고작 140만 배럴 뒤져 있을 뿐이다(2006년 초 기준) . 게다가 러시아는 미국 다음으로 많은 석탄이 매장돼 있는 나라이자 현재 31개의 원자로가 가동 중인 주요 원자력 소비국이기도 하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1999년, 집권 직후부터 이 넘쳐나는 에너지를 러시아 패권 부활을 도모할 만한 정치적 무기로 바꾸는 계획을 추진했다. 러시아는 러시아에서 수출되는 에너지뿐 아니라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에서 러시아 송유관을 통해 유럽에 공급되는 에너지까지를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이 있기에 푸틴 대통령은 냉전 시대에 누렸던 소련의 정치적 영향력의 일부나마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계획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1990년 소련 붕괴 이후 민영화됐던 가스 산업을 다시 국유화하고 민간이 소유하고 있는 다른 에너지 산업도 모두 국가의 지배 아래 둬야만 했다. 공산주의 법체계 붕괴 이후 러시아에서는 이 같은 국유화를 합법화할 길이 없었기에 푸틴은 불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방법으로 이 귀중한 자산들을 모두 국유화했다. 여기서도 우리는 에너지파시즘의 도래를 관찰할 수 있다.
  
러시아의 에너지 자원을 국가가 집중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것은 푸틴의 오랜 지론이었다. 푸틴은 1999년 '러시아 경제 발전을 위한 전략상의 광물자원'이란 제목의 박사학위논문 요약본에서 러시아 정부는 국가의 광물자원 활용을 감독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러시아 국민들의 이익의 위해서라면 이미 개인사업자 손에 들어간 석유 부분도 예외가 돼선 안 된다는 것이다. "정부는 천연자원, 특히 광물자원에 대한 획득과 사용 과정을 제어할 권리가 있다. 그 소유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이 문제에 관해서 정부는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움직인다." 에너지파시즘에 대해 이보다 더 나은 정의를 상상하기는 힘들 것 같다.

석유 재벌 체포하고 석유 기업은 정부 품에
  
이 같은 푸틴의 속셈을 보여주는 가장 유명한 사건은 이른바 '호도르코프스키 사건'이다. 지난 2003년 러시아 최대 석유재벌이던 유코스의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 회장이 사기 및 세금포탈 혐의로 체포됐다.
그는 (미국) 엑손모빌과의 합작회사 설립 등 정부의 간섭에서 벗어난 온갖 에너지 판매를 추진해고, 러시아 내 반(反)푸틴 정치세력을 지원했다. 이 두 가지 중 하나만으로도 크렘린의 격노를 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푸틴이 이 사건을 기획한 최종 목표는 유코스의 주요 자산인 유간스크네프트가스를 빼앗기 위한 것이라는 점이 드러났다. 유간스크네프트가스는 러시아 석유 생산의 11% 가량을 담당하고 있었다. 호도르코프스키와 그의 측근들이 재판을 기다리는 동안 정부는 유간스크네프트가스를 경매에 부쳐 명의뿐인 유령회사에 넘긴 다음 곧 국영기업인 로스네프트에 시장가 이하의 가격으로 되팔았다. 푸틴은 순식간에 민간기업인 유코스를 분할해 러시아 최대의 국영석유생산업체 로스네프트를 만들어낸 것이다.
  
푸틴은 석유 및 가스의 수출, 공급도 국가가 장악하려 했다. 민간 기업의 송유관 건설을 원천봉쇄해 버린 것이다. 이에 따라 국영기업 가스프롬의 천연가스 독점과 역시 국영기업인 트랜스네프트의 송유관 독점은 확고해졌다. 미국과 다른 에너지 소비국들은 민간 기업의 송유관 건설을 오랜 기간 압박해 왔다. 유럽과 다른 해외 시장에 공급되는 에너지의 양을 늘리는 동시에 가스프롬과 트랜스네프트의 권한을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렘린은 제도적으로 이 같은 노력을 배제시켜버렸다.
  
에너지 자산에 대한 소유권을 합법성 여부가 의심되는 방법으로 정부가 장악해버린 것이 러시아가 보여준 에너지파시즘의 한 단면이라면, 러시아가 자원을 이용해 자원 빈국들을 러시아 주변에 묶어두는 데에서 또 다른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그 악명 높은 사례로는 2006년 1월 1일 우크라이나로 공급되던 천연가스를 끊어버렸던 것을 들 수 있다. 표면적으로는 가스 가격을 두고 분쟁을 벌이던 가스프롬이 가스 공급을 중단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태를 지켜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크라이나의 빅토르 유센코 대통령의 친서방 정책에 대한 러시아의 경고로 믿고 있다.

이 사건이 한 겨울에 일어났음을 유념하라. 구소련 국가들과 동유럽 국가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천연가스는 우크라이나의 주 난방 연료였다. 결국 가스프롬은 막판까지 가격 협상을 하다가 서유럽의 요란한 불만에 못 이겨 가스 공급을 재개했다. 우크라이나가 유럽에 공급하던 가스를 내수로 돌려버리자 공급받던 가스에 결손이 생긴 서유럽이 큰 소리를 낸 것이다. 이제껏 러시아 정부가 해 온 모든 일이 결국 에너지를 공급하는 '수도꼭지'를 외교 정책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한 준비였음이 명확해지는 순간이었다.
  
그 이후 러시아 정부는 '근린국가(Near Abroad)'라고 부르는 이웃 국가들을 협박하기 위해 종종 이 전술을 사용해 왔다. 2006년 7월 29일에는 트랜스네프트가 누출 위험을 이유로 리투아니아 최대 정유소인 마제이큐에 대한 원유 공급을 중단했다. 마제이큐의 회장이 이 정유소를 러시아가 아닌 폴란드에 매각키로 했다는 발표가 나온 직후였다. 이 같은 움직임을 지켜본 사람들은 러시아 정부가 러시아 회사가 정유회사를 인수하는 데까지 힘을 쓰고 있다고 풀이했다.
  
이어 11월에는 가스프롬이 그루지야에 공급하던 천연가스 가격을 1000입방미터 당 110달러에서 230달러로 두 배 이상 올리겠다고 협박했다. 가격을 올릴 수 없다면 공급을 중단하겠다고 했다. 이 역시 그루지야의 친서방 정부가 다양한 분야에 걸쳐 러시아 정부에 반항해 왔던 점이 일정 부분 감안된 정치적 압력으로 여겨졌다. 가스프롬은 12월 벨로루시에도 같은 장난을 쳤다. 주변의 헐벗은 국가들이 조금이라도 독립의사를 보이면 여지없이 가격인상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러시아가 보여준 에너지파시즘의 다른 얼굴이다. 자신들이 갖고 있는 에너지를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도구로 사용해 국경을 맞대고 있는 자원 빈국에 압력을 가하는 것이다.
유라시아 그룹의 자문역인 클리프 쿱샨은 <파이낸셜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에너지가 새로운 종류의 핵무기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러시아는 석유권력을 공격적이고 영리하게 사용해 자국의 외교적 영향력을 증대시킬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원자력과 함께 르네상스를 맞을 '빅 브라더'
  
에너지파시즘의 마지막 얼굴은 원자력의 사용이 증가함에 따라 국가 차원의 억압과 감시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가스와 석유 매장량이 줄어들수록 정부와 산업계 지도자들은 원자력 의존도를 높여 추가 에너지를 공급하려 할 것이 분명하다. 지구온난화에 대한 높은 우려도 이 계획을 부추길 것 같다.
  
석유, 가스, 석탄 등을 태울 때 나오는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지구온난화의 주범으로 꼽히기 때문이다. 부시 대통령은 원자력 의존도를 높여가겠다는 계획을 거듭 말해 왔고 2005년 정부가 마련한 '2005 에너지 정책법'에도 미국에서 새로이 원전을 짓는 전기 사업들에 대한 다양한 인센티브를 보장하고 있다. 프랑스, 중국, 일본, 러시아, 인도 등 다른 나라에서도 원자력 의존도를 높여 가려는 계획을 갖고 있고, 이는 원전이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결과를 불러올 것이다.

소위 '원자력의 르네상스기'라고 말하는 길에는 몇 가지 문제가 버티고 있다. 엄청난 부대비용이나 핵 쓰레기를 장기적으로 보관할 수 있는 안전장치가 마련되지 않았다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원자력 발전소의 안전성이 상당부분 개선됐음에도 1979년 '쓰리 마일 아일랜드' 사건이나 1986년 체르노빌 사건 같은 핵사고 위험에 대한 우려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 원자력 산업이 성장할 미래에 대해 우려되는 점 두 가지만 들어보겠다. 원전 부지의 결정권이 연방정부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과 테러리스트, 범죄자, '불량 국가' 등에 대한 핵무기 이전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개인에 대한 국가권력의 억압이 강화될 것이라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까지도 미국에서 원자력 시설을 세우려면 (연방정부가 아닌) 시, 카운티, 주 정부 등 지방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이에 따라 각 지역의 시민들은 자신들의 뒷마당에 원전이 설치되는 것을 반대할 권한을 갖는 것이다. 이는 지난 수 십 년간 미국 내 새 원자력 시설을 건설하는 데 주요한 장애물이 됐다. 법이 정한 대로 주 의회와 카운티 의회, 그리고 환경단체들의 반대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비용을 부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규칙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진정한 '원자력 르네상스기'를 절대 볼 수 없을지 모른다. 시민들의 저항이 거의 없는 가난한 촌 동네에 원자로 몇 개가 세워질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원자력에 대한 의존도를 높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 허가권을 연방정부가 장악해서 지역단체를 따돌리고 연방정부 관료들에게 새 원자로를 건설할 수 있는 허가서를 발부할 수 있는 무한한 권한을 허락하는 것이다.
  
불가능할 것 같다고? 다음 정황들을 잘 살펴보라. '2005 에너지 정책법'은 지역 관료들로부터 '천연가스 재기화(再氣化) 플랜트' 설치를 허가할 수 있는 권한을 빼앗아 연방정부의 권한으로 만드는 의미심장한 전례를 만들어 놓았다. 이 거대한 시설은 해외 공급자로부터 배로 수송된 액화천연가스를 미국 전역의 파이프를 통해 배달할 수 있도록 다시 가스로 바꾸기 위한 것이다. 몇몇의 동서부 해안 지역에서는 해당 지역 항구에 이 플랜트가 세워지는 것에 반대해 왔다. 폭발할 위험이 있고(완전 억지 주장은 아니다) 테러리스트의 표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저항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을 잃었다. 아, 지방자치여 안녕.
  
내 걱정은 여기서 출발한다. 미래의 정부는 '천연가스 재기화 플랜트'의 전례를 따라 원자로 설치에 관한 권한도 연방정부에 넘기는 방향으로 '에너지 정책법' 수정을 추진할 것이다. 그리고선 보스턴, 뉴욕,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덴버 등 대도시 인근에 수십 개 혹은 수백 개의 원자로 신설 계획을 발표할 것이다. 추가 에너지 필요량의 긴급성을 강조하면서 말이다. 시민들은 궐기할 것이고 이들의 저항에 공감하는 지방정부는 시위대에 대한 집단 연행을 거부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주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명령에 대한 반발과는 경우가 다르다. 엄연한 연방정부에 대한 반발인 것이다. 고로 시위대를 제압하고 원자로 주변을 방어하기 위해 주 방위군이나 정규군이 소집될 수 있다. 에너지파시즘의 발동이다.
  
마지막으로 원자력 확산이 낳을 또 다른 위험은 원자력과 연관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먼 관계더라도 정부의 조직적 감시 하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우라늄 농축시설, 원자로, 핵 폐기장 등 모든 핵 관련 시설과 거기서 나오는 부산물들은 테러리스트나 암시장 불법거래상인, 그리고 이란과 북한 같은 '불량국가'의 손에서는 핵 무기화 될 수 있는 소재들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물론 이 같은 시설에 종사하고 있는 개인과 하청업자, 그리고 재하청업자와 그들의 가족들까지 항시적으로 불법 가능성을 조사받을 수 있으며 24시간 엄격한 감시 하에 처하게 된다는 얘기다. 더 많은 원자로와 더 많은 핵 시설이 생길수록 일종의 감시 대상이 될 관여자들의 수도 늘어나고, 이들을 감시하는 보안 관계자들 역시 정부 정보국 차원의 더 높은 단계의 감시 아래 놓이게 될 것이다. 매우 광범위한 '빅 브라더' 공식이다.
  
그런가 하면 '증식형 원자로'에 대한 문제도 있다. 증식형 원자로는 투입한 것보다 더 많은 핵분물질들을 만들어 낸다. 플루토늄의 형태로 만들어 내기도 하는데 플루토늄은 원자로에서 태우면 전기를 생산해 내기도 하지만 핵무기원료로 이용되기도 한다. 비록 미국에서는 증식형 원자로의 건설이 금지돼 있지만 일본을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는 화석 연료와 그 역시 한정 자원인 천연 우라늄에 대한 의존도를 줄인다는 명목으로 건설 중에 있다. 원자력에 대한 수요가 늘어날수록 더 많은 나라들이 증식형 원자로를 짓지 않으면 안 될 것이고 여기엔 미국도 포함될 수 있다. 이는 폭탄에 가까운 플루토늄의 세계적 공급을 광범위하게 증가시킬 것이고 모든 면에서 원자력 산업에 대한 정부의 더 강한 감시를 요구할 것이다.
  
지각있는 시민의 힘으로 에너지 파시즘의 도래 막아야
  
2회에 걸쳐 논의된 모든 현상- 석유보호 서비스로 미군의 주요 업무 전환, 군비 경쟁에 비견할 만한 강대국간 에너지 확보 경쟁의 격화, 러시아의 에너지 초강대국 부상, 원자력 산업에 관한 감시감독 필요성의 증가-은 모두 에너지의 생산, 획득, 이전, 분배 등에 관한 통제력을 확대하려는 정부의 경향성에서 비롯된 결과물이다. 이는 전 세계적 자원 고갈의 대가인 동시에 북반구에서 남반구로 에너지 생산의 거점이 이동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 같은 흐름은 얼마 전부터 진행돼 온 것이긴 하지만 앞으로 몇 년간 더 큰 모멘텀을 갖게 될 것이 분명하다.
  
아폴로 얼라이언스, 로키 마운틴 인스티튜트, 월드워치 인스티튜트 등 많은 지각있는 시민들과 단체들이 에너지 고갈과 에너지 생산지의 불안정성, 그리고 지구온난화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한 이성적이고 민주적인 해법을 개발하려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정부 지도자들은 이 문제들의 초점을 정부 통제력을 증가시키거나 군사력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는 데 두려는 의도를 보이고 있다. 만약 이러한 경향을 막지 못한다면 에너지 파시즘은 바로 우리의 미래가 될 수 있다.(번역 이지윤 기자)

02. 07.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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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7-02-07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지하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또 엉뚱한 생각이 드네요.그래서 석유재벌이 첼시구단을 인수해서 축구선수들을 사모으는건가?? ^^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세요.
원자력의 문제가 근원적으로 '무결점사고방식' 위에 구축되었다는 것이라더군요...

로쟈 2007-02-07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돈이 좀 남아도니까요.^^ '에너지 파시즘의 시대'가 아니더라도 석유시대의 종언 같은 게 얘기되고 있으니까 뾰족한 수를 찾긴 찾아야 하겠습니다...
 

올해는 1917년의 러시아혁명 90주년이 되는 해이다. '10월 혁명'이라 불리지만 지금의 달력으론 11월이고 그때쯤이면 러시아 내외에서 이 역사적 사건(이자 소위 '과거의 사건')에 대한 활발한 조명이 이루어질지 모르겠다. 국내에서도 대학가에서는 이미 이러한 조명이 기획되고 있는 듯하다. 마침 최근에 러시아계 한국인이면서 노르웨이 대학의 교수로 있는 박노자의 글방에 '러시아 혁명'에 관한 짤막한 글이 올라왔다. 예전부터 '당신들의 러시아'를 읽고 싶던 차에 흥미롭게 읽었다. 여기에 스크랩해놓는다(http://wnetwork.hani.co.kr/gategateparagate/list.html?blog_board=4).

박노자 글방(07. 01. 29) 1917년 러시아 혁명, 배울 것 배우고 미화하지 말기를

지금은 사회 전체가 비판 의식이 좀 강화해서 덜하지만, 제가 1991년에 처음으로 서울에 왔을 때만 해도 소위 "운동"하시는 분들 사이에서 레닌과 1917년의 러시아 혁명에 대한 의견은 대체로 "성경 무오류설"을 믿는 기독교인들과 다를 게 없었습니다. 소련이 몰락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레닌을 따라 배우자"는 사람을 제가 살았던 안암골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었어요.

사실, 제가 그러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좀 어리둥절했었지요. 빛이 있는데에서 꼭 어두움도 따라 생기고 각종의 어두운 그림자들이 따른다는 것은 이미 도교나 불교에서도 잘 알려진 변증법의 기본인데, 그 "자생적 볼세비키" 분들에게 그러한 이야기가 안통할 때가 많았어요. 그 분들께서 제게 "혁명을 어떻게 보느냐"라고 물었을 때에, 사실, 저는 단순한 "호불호"를 갖다가 답을 못했었지요. 하도 진보와 퇴보, 문화의 대중적 보급과 야만적 잔혹성, 상당수의 신분상승과 일부의 몰락이 얼키고 설킨 것이 혁명이기에 말씀입니다.

글쎄, 1917혁명의 덕분이 아니라면 저부터 러시아에서 태어날 리도 없었을 걸요. 제 조상인 가난한 유대인들은, 제정 정권이 지속되거나 반동적 "백군"이 이겼을 때에 아마도 pogrom (유대인 학살)에 죽거나 미국으로 도망쳤을 것이고, 저도 러어를 모국으로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혁명이 제게 개인적으로 '생명의 은인'에 가까운 것이지요(*박노자가 유대인 가계라는 건 처음 알았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1905년 혁명 때에 행동대 일하다가 경찰의 수배를 피해 아르헨티나로 이민간 제 조상의 친척 한 분은, 본인도 사회주의 혁명가이었음에도 1920년대 중분에 소련에 잠깐 왔다가 너무 실망이 커서 남미로 돌아갔답니다. 물질적 가난에만 경악한 것이 아니고 본인과 같은 아나키스트들에게 최소한의 표현의 자유도 없었다는 사실에 가장 크게 경악한 것이지요.  본인이 목숨을 걸고 행동대에서 일했던 것은, 제정 정권과 같은 부자유, 탄압, 사상적 획일화의 정권을 탄생시키기 위한 것이었느냐 이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레닌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저로서 간단히 답하기가 아주 힘들었어요.

그건 그렇고 1917년 혁명의 성격을 생각해봅시다. 이 혁명이 사회주의적이라고 하는데, 그게 일면으로 맞을 것입니다. 20만 명의 볼세비키 당원의 대다수가 "사회주의 지향적인" 대규모 공장의 숙련공과 중, 하급 지식인이었고 그 지도부 역시 주관적으로 사회주의를 위해 평생 투쟁하려는 사람들이었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과연 "사회주의"를 구체적으로 무엇으로 생각했을까요? 이건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아주 길겠지만, 간단히 축약하자면 그들에게 어떤 구체적인 "사회주의"의 청사진은 없었던 것 같아요. 거의 "임기응변"의 가까운 방식이었지요.

일단, "부르주아 민주주의" 자체도 제대로 연습을 못한 후진국에서는 이 분들을 기본적인 민주적 절차 (제헌의회 등등)를 다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했으며, 권력을 잡은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벌써 비밀 경찰 격의 "체카"를 만들어 사형제를 부활시켰지요. "체카" 자체의 통계를 그대로 믿어도, 18-20년간 사형집행된 "반동 분자"들은 12700 여명이었는데, 그들 중에서는 상당수는 "유산계급 출신"이라는 이유로 마구 붙잡혀 "반동 분자 준동에 대한 집단적 응징"이라는 명목으로 총살된 "인질"들 이었지요. 레닌이 직접 지시한 것은 아니겠지만 지방 체카들은 고문과 부녀자, 아동의 학살 등 제정러시아 암흑의 통치하에서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반혁명 분자 근절 방법"들을 이용했어요.

국방부 장관 트로츠키가 구 제정러시아 군의 장교들을 혁명의 "적군" (Red Army)에다 다시 징병했을 때에 그들의 가족들을 "인질"로 특별 관리하다가 해당장교의 탈영/"반역 행위"시에 그 노모나 아이들을 수용소에 보내거나 총살하도록 조치해놓기도 했어요.  그런데 부녀자와 아이들을 마구 죽이면서 저들이 건설하고자 하는 사회는 도대체 무엇이었는가요?

1917년의 10월 혁명을 앞두고 레닌이 "국가의 소멸", "직접 생산자들의 직접적인 생산 과정의 전국적 관리" 등, 참 듣기 좋은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국가가 진짜 언젠가 소멸됐으면 아주 좋았을 터인데, 레닌 등이 국가를 운영하는 입장이 됐을 때에 그 말도 점차 바뀌기 시작했어요. 1919년말-1920년초에, 레닌이 "전시 공산주의"의 "알곡 징발제도"와 배급제를 '사회주의의 맹아', '사회주의에의 이행 방법'이라 이야기하고, 그 뒤에는 "공산주의란 전국의 전기 보급과 소비에트 권력 장악"과 같은, 자본주의적 개발주의를 그대로 방불케 하는 이야기도 서슴지 않았어요.

[Photograph of Lev Davidovich Trotskii]

 

 

 

 

 

 

 

 

 

  

 

국방부 장관 트로츠키는, 자기 부처에 대한 애착이 강해서 그런지 "전국 노동의 군사화"를 주장하여 "노동 군대"를 만들어서 생산 요충지에 배치시키는 것이 바로 사회주의에의 첩경이라고 선전했어요. 이와 같은 "노동의 군사화"가 전시 공산주의라는 특수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필요했는지 몰라도, 볼세비키 지도자들은 이를 "사회주의적 덕목"으로 취급한 것은 그들의 "사회주의 프로젝트"의 "해방 지향성"을 의심케 합니다. 나중에 1921년초에 전국적 농민 반란과 크론스타드 수병 봉기 등 민중의 저항에 정신들 차려 "알곡 징발제"와 같은 반인륜적 폭력을 정지하고 어느 정도 민중의 숨통을 트이게 했지만, 권력의 독점을 또 끝까지 지키려 했었지요.

1921년까지만 해도 일부 소비에트에서 멘세비키 등 비폭력, 민주주의 지향의 "선진형" 사회주의자 들이 계속 참여했지만 (사실, 인쇄노동자의 노조나 화학 노조 등이 1921년까지 거의 멘세비키들이 장악했었지요), "신경제 정책"을 발표하여 경제에서의 국가적 폭력을 줄임과 동시에 멘세비키, 에세르, 아나키스트 등의 "비 볼세비키" 혁명 세력들을 크게 박해하기 시작했어요(*박노자의 포지션은 비폭력, 민주주의 지향의 '선진형 사회주의'쯤에 해당하겠다). 

이미 1918년4-5월부터 간헐적으로 멘세비키 계통의 노조 활동가들을 총살하거나 체포하는 개별적인 소수의 경우들이 있었지만, 1921년에 그 탄압이 커져 1922년초에 전국에 체포된 멘세비키 활동가 (대다수 노조 간부들이지요)만 해도 무려 1500 명이었어요. 아니, 의견을 달리 하는 사회주의적 노동자 활동가들을 마구 붙잡아 감옥에 집어넣는 것은, 무슨 놈의 "노동자 민주주의"입니까? 1920-1921년까지 노동자 민주주의의 일부 요소들이 분명히 존재했지만 그 뒤에는 거의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어요.  

한 마디로, 과거 혁명들의 장점을 아는 동시에, 그 단점도 좀 배우도록 합시다. 볼세비키들의 혁명적 열성과 같은 장점도 알아야 하지만, 그 조급성, 그 인명 경시의 정신, 그 절차적 민주의 무시를 이 시대의 혁명가들은 제발 따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청년 레닌의 둘이 없는 지기로서 1890년대 중반에 그와 함께 "노동계급 해방 투쟁 동맹"을 이끌었다가 나중에 멘세비키의 길을 걷게 된 율리 마르토브(1873-1923, 사진) 선생의 1918년의 레닌 관련의 논평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낮에 총살 명령에 사인해놓고도 편안히 밤잠을 잘 수 있는 이 사람을, 난 이해 못한다". 글쎄, 제가 꼭 마르토브의 노선에 동의하지 않습니다만, 역시 촌철살인의 평이었지요. 저도 낮에 인간의 목숨을 빼앗아놓고 밤에 편안히 자는 사람을 이해 못하지요.그러나, 레닌의 잠은 정말로 편안했을까요? 

1917년, 한 군 부대에서의 혁명적 집회의 모습. 그러나, 1918년5-6월에 일부 멘세비키 노동자들은 독립적인 노조의 전국적 총회를 열려고 하자, 레닌 정권이 경찰 박해로 맞섰습니다. "노동자 민주주의"는 이미 그 때도 사실 빛좋은 개살구에 가까웠지요.

07. 02. 05.

 

 

 

 

P.S. 내가 갖는 의문은 "볼세비키들의 혁명적 열성과 같은 장점"과 "그 조급성, 그 인명 경시의 정신, 그 절차적 민주의 무시"가 과연 별개의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러니까 조급하지 않게 인명을 존중해가면서 그리고 절차적 민주주의를 실현해가면서, 즉 어떠한 '과잉' 혹은 '광기'도 배제하면서 우리는 '혁명적 열성'을 유지해나갈 수 있는가? 박노자의 인도주의적/민주주의적 사회주의란 것도 '참 듣기 좋은 이야기'에 속하는 건 아닌가? 해서 경청할 만하지만 내게 '리얼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낮에 총살 명령에 사인해놓고도 편안히 밤잠을 잘 수 있는 이 사람" 레닌의 '속사정'에 대해서는 역시나 지젝의 레닌론 <혁명이 다가온다>(길, 2006)를 참조할 수 있다. 정리해놓을 시간이 좀처럼 나지 않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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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2-05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프라하 다녀와서, 무엇보다도 밀란 쿤데라의 '농담'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으면서 우울했는데, 다시 기운을 차려야 겠지요. 어쨌든 다시 레닌과 러시아 혁명을 공부해볼 생각입니다. ^^

로쟈 2007-02-05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예 노문과로 오심은?^^

나비80 2007-02-05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그런지 현실 사회주의 붕괴 이후에는 속절 없이 무너져 중심을 이탈한 선배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학원가로 투항해 누구보다 매몰차게 돈을 버는 사람들 중 많은 수가 그렇다는군요.
그나저나 로쟈님의 영업은 언제 끝날른지...^^

로쟈 2007-02-05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영업은 '책선전' 말씀이신가요?^^ 저도 주변에 돈버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떼돈을 버는 사람들은 한 다리 건너가야 되구요. 해서 '혁명가=기업가'란 등식에 공감하는 편입니다...

나비80 2007-02-05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론 로쟈님의 인식 범위에서 말씀하신 '책선전'을 조금 재미있게 표현한 겁니다.
저도 로쟈님의 다단계에 얼른 편입되어야 할 텐데요. 아직 턱없이 부족한 역량때문에....
또 기인님은 아무래도 저와 전공이 비슷하신 것 같아서 노문과로 스카우트 해가려는 댓글에 장난삼아 드린 말씀입니다.^^
제가 위에 단 글이 속삭인 꼴로 되어 있네요. 잘못 클릭 했는 모양입니다.^^

yoonta 2007-02-05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알기론 박노자씨는 멘셰비키라기보다는 아나키스트적 포지션에 더욱 가까울겁니다..^^ 님 생각은 좀 다르신것 같은데 저는 박노자씨의 위 시각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편이네요. 인명을 경시해야만 한다면 그런 방식의 혁명은 아예 할 필요가 없단거죠..박노자씨도 그런 관점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 같네요..근데 그 레닌의 "속사정"은 무엇인가요? 지젝의 책을 안봐서 잘 모르겠네요.

로쟈 2007-02-05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명을 경시해야만 한다면 그런 방식의 혁명은 아예 할 필요가 없단거죠" yoonta님도 (짐작대로) '깨끗한 손'을 주장하시는군요(마치 카뮈처럼). 그렇다면, 테러리즘을 제거한 아나키즘으로 이해하면 될까요? 혹은 '아나키즘은 휴머니즘이다!'

yoonta 2007-02-05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머니즘적? 아나키즘이 아닌 아나키즘은 전 당연히 거부합니다..^^ 아나키즘이던 코뮤니즘이던 뭔 이즘이던간에 "인명을 경시"하는 모든 이즘은 거부하는 입장이라..^^ 그건 단순히 "손을 더럽히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므로..

로쟈 2007-02-05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경우 인명에 대한 존중은 동물에 대한 존중도 함축하게 되나요? 혹은 더 나아가 모든 생명에 대한 존중도? 에코-아나키즘? 혹은 묵가의 겸애설?..

2007-02-06 0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eEe 2007-02-06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동자 국가 창출을 위해 노동자 정당이 존재하고, 당은 진공상태가 아닌 계급투쟁이라는 엄혹한 조건에서 존재하는 바, 당의 일상적 존재양식은 투쟁일 것입니다. 그리고 투쟁에서의 승리와 민주주의, 인권 등의 가치가 양립할 수 없을 때 후자의 폐기를 선택할 수 있는 결단은 이 가치들의 이상적 구현은 혁명의 완성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신념에 근거할 것입니다. 민주주의, 인권 등의 가치의 진정한 담지자는 제도, 불문율 등의 형식이 아닌 주체라는 것, 노동자 당에서의 민주주의의 달성은 이러저러한 형식이 아닌 혁명적 주체의 재생산에 달려있다는 것, 따라서 사회주의자는 당의 일상적 실천 가운데서 당과 함께하고 단련되어야 한다는 것은 계급투쟁이라는 명제를 인정하는 이들에게는 1903년 이래로 공식화된 합리적 결론일 것입니다. 우리가 열사에게서 삶을 뜨겁게 사랑하는 이유가 삶을 불살라버린 근거가 되어버린 모순을 발견하듯이,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무를 각오가 되어 있지 않은 이들은 사회주의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선진형 사회주의'란 결국 적당히 사회주의 교양을 공부한 자유주의자의 탁상공론에 불과하다고밖에 여겨지지 않습니다.

로쟈 2007-02-06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농반진반입니다.^^
울라님/ 정답입니다. 마치 모범답안 같습니다...

푸하 2007-02-06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제는 부정적인 것의 담지자가 되고 싶은 개체가 있는가? 하는 것 같아요.

기인 2007-02-07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개체는 있을수도 있는데, 제가 문제삼고 있는 부분, 또는 고민하고 있는 부분은. "다시 돌아온 주체"입니다. 과연 혁명적 주체라는 것은 무엇인가. 내용없는 당위가 아니라, 규정된 법률같은 것이 아니라, 실천 속에서 담금질 되는 혁명적 주체라는 것. 그리고 그 실천과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 사이의 역사적(현재 시점에서) 긴장. 당의 일상적 실천 가운데서 당과 함께하고 단련된다는 것. 그런데 현재 당이 과연 있는가? 아니면 당 또한 만들어가야 하는가?
계속 회귀하는 이유는,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충분한 이론적 반성이 부재하다는 것 때문인 것 같습니다. 울라님이 말씀하시는 '합리적 결론'이 더 이상 모든 '사회주의자'가 흔쾌하게 받아들이기 힘든 것 또한 이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가 너무 쉽게 그것은 '사회주의'가 아니였어, 또는 그들은 맑스를 '곡해했어' 정도로 덥고 넘어갈 수 없다는 것. 결국 그래서, 전망이 뚜렷하지 않고, 어떻게 가야하는지, 정말 무엇이 옳은지 모르겠으니, 답답한 것 아닐까요. '답답'하다라는 말은 너무 나이브하고, 오히려 '절망'과 '답답'의 중간에 가깝습니다.

eEe 2007-02-07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바른 전망 / 올바른 전망의 구체화로서의 혁명 / 구체화의 매개로서의 사회주의자 => 올바른 관념없이는 역사도 없다!?
의문) '진정한' 사회주의 사회가 현존하지 않는 데/존재한 적이 없는 데 사회주의 사회에 대해 올바른 전망/개념을 갖는 것은 가능한가?
'사회주의는 전망이 아니라 운동이다. 이 운동은 자본주의가 산출하는,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운동으로서 자본주의와 함께 모순적 통일체을 구성한다. 우리는 모순적 통일체로서의 이 역사의 시기의 종착지를 사회주의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는 목적으로서의 사회주의없이도 스스로 운동한다. 이 운동은 목적인이 아닌 근거를 갖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전망이 불투명해서 못한다 = 적정이윤이 보장이 되지 않아서 투자 안한다> 사회주의는 투기가 아닙니다.
*전진하는 운동으로부터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배우리라 믿습니다.

기인 2007-02-07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진하는 운동으로부터 배워야 하고 배울 수 있다는 것에는 원칙적으로 동의. 그런데 '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는 목적으로서의 사회주의 없이도 스스로 운동한다. 이 운동은 목적인이 아닌 근거를 갖기 때문이다'라는 판단은 역시 의심이 갑니다. 그렇다면 '전위'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또는 '전위'라는 주체는 불필요하고, pt가 역사적 운동과정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주체의 역할(또는 주체효과)를 하기만을 기다리면 되는 것일까요? 그래서 제가 물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현재는 '당'이 있습니까?
현 시점이 '전망'이 불투명한 시점이라는 것은 바로 '전진하는 운동'으로부터 무엇을 배우고 있지 못한 시기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또한 의문을 던지신 것처럼, '진정한' 사회주의 사회가 현존하지도 않았고, 존재한 적이 없다는 것은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의 역사적 '국가 사회주의'에 대한 이론적 반성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에 면죄부를 줄 수 있는 것일까요? 그 실패에 대한 (이론적) 책임은 누가 져야 합니까? 그리고 이러한 이론적 반성도 하나의 실천으로서 기능하는 것이 아닐까요?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에 날고, 철학의 임무는 세계를 변혁시키는 것이고, 주체는 실천을 통해 구성되지만, 이론 또한 물질화된다는 것. '전진하는 운동'에 따른 새로운 '이론'이 전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현재 그 '이론'이 확고히 없어서 그것을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고요.
울보님 지적에 대해서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따로 제 페이퍼에 정리해 두겠습니다. ^^

yoonta 2007-02-07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상하게 길게만 쓰면 댓글이 잘 등록이 안되고 있습니다. -_- 짧게 쓰면 이렇게 올라가고..할말이 많은 내용의 글인데

로쟈 2007-02-07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디터로 쓰기'로 해보시죠... 그래도 그런가요?..

yoonta 2007-02-08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마찬가지라는...알라딘에 상담해봐도 원인불명이라는군뇨..ㅜ.ㅜ

푸하 2007-02-08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다면 짧은 글의 무한연쇄를 시도해봐도 괜찮을 듯합니다.^^:

로쟈 2007-02-08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댓글이 아닌 페이퍼를 쓰시는 게 빠를 듯하네요.^^

yoonta 2007-02-08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페이퍼쓰는 걸 별로 선호하지 않는 것은 독백처럼 혼자 주절거리다보면 독선에 빠지기가 쉽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물론 완성도의 차원에서는 페이퍼가 더 좋지만 말이죠. 어떤 분은 댓글이 주렁주렁달리는게 싫다고 하시는데 저는 진흙탕속에서 뒹굴게 되더라도 댓글처럼 대화를 주고받는 글이 더 좋더군요. 그러는 과정에서 자신이 미처 생각치 못했던 생각들도 발견하게 되구요.^^ 근데 문제는 페이퍼도 안올라가네요..-_- 아 근데 어느정도분량까지 올라가는지는 실험안해봤는데 이정도까지는 올라가나보네요.

eEe 2007-02-08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위는 전능하지 않습니다. 저 오래된 미래에 대한 초월적 인식이 가능하다는 환상에 종지부를 찍어야 됩니다. 구시대의 전위는 노동자 국가 건설까지에만 가교를 놓을 수 있을 뿐입니다. 이후의 사회주의운동의 발전은 신시대의 주인에게 과제로 남겨놓으면 됩니다."라고 생각합니다.
정세와 과제, 정세와 과제, 정세와 과제... 이 쉼없는 무한연쇄의 짐을 지고서 지금 이 땅에 '당'을 건설하기 위해 투쟁하는 이들의 안식일을 기원합니다.

기인 2007-02-08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위가 전능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구시대의 전위'라고 하신 것이 현시대의 전위를 의미하는 것 같은데, '노동자 국가 건설' 자체가 반성되고 새롭게 이론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 아닌가요? (pt의 정치권력 장악과 국가독재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자율주의가 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 어떠한 길도 적확한 '전망'으로 제게 떠오르지 않기 때문에 저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구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과 전혀 상관없이 또 다시 '노동자 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는 것을 문제삼은 것입니다. 이에 대한 반성을 통해 이론이 재구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또 현실적으로 실재적으로 '당'이라는 것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일종의 '최종심급' 비슷한 의미에서의 '당' 건설이라고 하며, 또 이는 정세와 과제의 '무한'연쇄 속에서 투쟁-실천의 '무한' 연쇄 속에서 먼 지평선으로 다가가는 것 뿐이라면! 지구가 둥글고 유한하다는 확신 속에서만이 먼 지평선으로 다가가는 행위가 유의미하다면, 그 본질적 전제에 관한 반성이 과연 확고히 이루어졌느냐가 의문입니다.
물론 사회주의에 대한 전망은 원칙적으로 전진하는 운동에 대한 이론적 반성으로서 이루어지겠는데, 그 '전진하는 운동'이라는 것이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도 포함되는 현정세라는 것입니다.

eEe 2007-02-08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소 스타일대로 말하겠습니다. "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는 목적으로서의 사회주의없이도 스스로 운동한다. 이 운동은 목적인이 아닌 근거를 갖기 때문이다."에서 제가 전달하고자 했던 것은 "자본주의가 X 같아서 운동하고, 무릅 꿇고 사는니 서사 싸우다 죽겠다는 뒤틀린 심정으로 운동하지, 해방/평등/우리의 아름다운 사회주의 여신을 추앙해서 운동할 수 있을 것 같냐"는 것입니다. 이념이 없어서 못하는 게 아니라 이 사회에서 아직도 가진 것이 많아서 못 하는것 아닙니까? 자기가 가진 알량한 것들이랑 죄다 버리고 낮은 곳에 임하소서~ 이 X같은 곳에서 팔뚝질 안하고 살 수 있나...
그리고 노동자국가 권설이란게 뭐 대단한 것 이야기 한 것도 아니고, 억압받는 자가 권력을 장악하지 않고서 억압을 끝장낼 수 없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물론 구체적인 강령이야 절대적으로 필요하죠. 근데 이 강령이란게 골방에서 책만 파서는 나오는게 아니라는 겁니다. 상아탑 안주인들의 ddr에 기대하느니...
아! 소련의 경험에 대한 반성이야 정말이지 중요하죠. 근데 전 91년 이전의 삶, 러시아어, 러시아인, 그들의 고통과 희망에 직접 맞닿아 있는 활동가가 쓴 글이 나오면 읽으렵니다. 2차문헌에서 짜집기한 논문들의 자기재생산을 바라보는 심정이란... 흐미~~

'이루어야 할 상태로서의 사회주의'라는 개념이 미친 해악은 두 가지이다. 첫째 역사는 이 정당하기 그지없는 목적을 향해 달려간다는 객관주의의 유포. 둘째 이 훌륭하기 그지없는 관념에 많게 세계를 끼어맞추어야 한다는 주관주의의 유포. 역사의 관조자 혹은 절대군주가 되려는 자 환상에서 깨어나소서.

yoonta 2007-02-08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라/소위 레닌주의적 전위당주도의 노동자국가라는 것이 실패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짜집기한 논문들"을 보지 않아도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 쯤은 이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요? 죄송합니다만 제가보기엔 아직도 님은 한국의 80년대식 맑스레닌주의라는 협소한 시야안에 갖혀계신듯 합니다. 제가 바로 그랬거든요..-_-

eEe 2007-02-08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0년대 스탈린주의 밀수품과 1917년 레닌의 사유를 구분못하는 이가 지금도 있습니까? 전위/당/노동자국가 등 이런 단어들만 나오면 깍~깍~ 소리치며 저기 아직 시체가 걸어다닌다며 질색하는 분들. 한 번 세상 엎어보세요. 그러면 믿어줄게요.

80년대 값싼 낭만으로 어쩌구저쩌구 주변에서 맴돌던 이들. 당신들이 반 푼어치의 값싼 입으로 '동지'라 불렀던 어떤 이들이 수인이 되어서도 꺾지 않았던, 그리고 지금도 키워나가고 있는 그 신념에 발언할 자격이 있습니까?

로자님의 서재를 별 시덥잖은 말들로 어지럽혀 미안합니다.

로쟈 2007-02-08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 말씀을. 한데, 견적상 댓글로 카바될 수 있는 말씀들이 아닐 듯한데요.^^

기인 2007-02-08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말씀에 동의 ^^; 처음의 논점과는 다른 부분으로 많이 나아갔지만, 분명 울라님이 말하신 것처럼 제가 절박한 노동자의 상황에서 비정규직 투쟁이나 생존권 투쟁에 어느정도 거리가 있는 상황이라서 (꾿꾿하게 공익월급 받아가며 사교육으로 연명하며 자기변명하고 있는 학삐리!라는 상황) 전망이다 뭐다, 고민하고 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저와같은 '계급'의 사람들이 한때나마 노동자 중심주의와 pt독재를 믿었던 사람들이 요즘 전반적으로 회의하고 있는 까닭에 대해서 묻는 것입니다. 휴머니스트적 동질감으로서 노동자 계급에 투신하는 것이 아니라면
계속 되풀이되는 논점이지만, 울라님이 말하신 것처럼 pt독재, 공산주의, 꼬뮨, 다 좋습니다. 그런데, 그 구체적 내용이 소련에 대한 반성으로 채워지거나, 적어도 어떤 길은 '아닌지'를 과거 잘못된 길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통해서 반성되어야 될 것이 아닙니까? 물론 확고한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유토피아적인 저술과 블루 프린트를 말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닫힌 체계로서, 목적론적으로 공산주의를 바라보는 것의 폭력성과 실패(즉 교조적 맑시즘)로부터 우리는 배운것이 많으니까요. 그리고 앞으로의 전진하는 운동을 통해서 이론이 조직화되는 것도 동의합니다.
그런데 계속 돌아오는 지점은,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맑스가, 레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구시대의 맑스가, 레닌이 아니라. 지금의 맑스와 레닌 말입니다. 제 의문점이 어느정도 전달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도 레닌의 전위당주도의 노동자국가는 실패한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렵지만, 그 '스탈린'이라는 지점부터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럼 스탈린은 사회주의 외부에서 나온 괴물입니까? 스탈린에 의해 조성된 그리고 그가 '발명한' 여러 것들은 비-사회주의라고 처단하면 그만인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스탈린이라는 괴물이 등장하게 된 배경이 레닌주의 안에 분명 있었고, 스탈린주의도 그렇게 쉽게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면 스탈린 이후, 지금 소련은 당연히 부정하시겠지요. 그렇다면 이러한 실패를 말미암은 '원인'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일국-사회주의의 한계이든, 치졸하게는 서방넘들의 압박이든 간에. 그러기에 반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울라님 말처럼 91년 이전 러시아 활동가의 글이 나오면 읽게다라고 하셨는데, 저도 읽고 싶습니다. 도대체 러시아는 무엇이었는지. 이것이 해결이 안 되면, '팔뚝질'은 하나의 상황에 대처하는, 또는 '조직'의 판단에 따르는 일 밖에 더 되겠습니까?

yoonta 2007-02-09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라/ 당시에도 스탈린은 취급도 안해줬습니다. 주 텍스트는 레닌저작집과 MEW같은 것들었죠. 모르긴 몰라도 님보다는 제가 접한 맑스레닌 저작들이 더 많을걸요? 그리고 위에처럼 말씀 격하게 하시는것보니 제가 무슨 코리아혁명의 배신자쯤으로 보이시나보네요.? 님같은 분들이 과거에도 있었죠. 그런 분들이 소위 혁명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동료사회주의자들을 학살하곤 했었죠..한마디만 더하면 세상은 "한번 엎"는 것으로 변하지 않습니다. 제가 님에게 하려는 이야기는 결국 이겁니다.

eEe 2007-02-09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머니스트적 동질감... 자본주의 모순이 여전히 '그'의 문제이고 운동이 '그'의 고통에 공감해야 할 문제인가요. '그'의 해방없이는 '나'의 해방이 없다는 인식이 심장을 뛰게합니다.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을, 나의 해방의 가능성을 믿습니다. 기인님의 대안에 대한 사유가 올곧은 지도력을 고민하는 것이라면 이 엄혹한 시기에 뜻있는 동지를 만난듯 기쁨니다. 그렇지만 그 고민의 성패여부가 행동의 기준이 되는 것은 스스로에게도 떳떳하지 못하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열심히 하세요. 불편한 글에 인내해주셔서 고맙습니다.

yoonta/ 동료사회주의자를 학살하고 학살당했던 시대를 체험한 듯 말하네요... 몇마디 댓글로 상대방을 값싼 낭만, ~주의, 학살자로 규정짓는 것 또한 학살의 인터넷버전이라고 생각되네요. 우리는 어쩌면 그토록 미워하며 깔보는 스탈린에게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요즘같이 칠흑같은 시기에 눈 막고 귀 막고서 운동에 뛰어드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자신만 반성과 성찰의 터널을 통과했으리라는 착각은 착각일 뿐이죠. 존립을 위태롭게 할 정도의 수많은 회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말해지고 있는 '말'들에는 그만한 근거가 있을 것입니다. 이 근거에 접속해 보시겠습니까?
(80년대 그것들을 읽으셨으니 일어는 정말 잘하시겠네요^^)

yoonta 2007-02-09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그런사람(학살한사람) 없다...라고 말씀하고 싶으신가요? 원래 그런겁니다. 소위 레닌주의란게. 줄줄이 읊어드릴 생각 없고 또 그러지도 못하니 역사책 좀 보세요. "짜집기 논문"이라고 비아냥거리기 이전에 기본 소양은 익히셔야죠. 그리고 기본 매너하고.."몇마디댓글로 상대방을 값싼 ~주의"자로 규정한것은 누가먼저인지 위 댓글들을 다시한번 읽어보시길.

eEe 2007-02-10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oonta님 하나 제안하겠습니다. "소위 레닌주의적 전위당 주도의 노동자국가라는 것이 실패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을 정리해서 올려주기를 바랍니다. 그럼 거기에 제가 가능한 한 성심껏 답하겠습니다.
저도 학교라는 공간에 거주하고 있을 때에는 반-레닌주의자였습니다. 자율적인 활동가들의 동등한 관계맺기를 기획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제 몸에 쓰여지고 있는 세계는 점점 "강고한 규율의 당을 달라"는 목소리를 높여 가고 있습니다.
님은 협업에 의한 자본주의의 생산력 발전을 칭송해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를 변혁하는 '노동'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의 협업을 왜 거부합니까? 적의 압도적인 힘을 체험하고 있노라면 전 감히 이러한 거부에 대해 이제는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세계를 변혁하는 '노동'은 집단적 협업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집단적 '노동'은 공동으로 노동하고 공동으로 향유하는 공동노동이기도 합니다. 이 공동노동은 규율없이는 자신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전 동지들의 노동의 축적물/공동의 노동수단을 제 실책으로 소진시켜서는 안 된다는, 제한된 역량을 집중해서 돌파해야 된다는 최소의 조직적 책임을 규율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평가받고 제 역량에 맞추어 알맞은 위치에서 활동하는 것. 전 이것을 규율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이러한 규율에 대해 억압이라고 낙인찍을 것입니까? 세계를 변혁하는 노동에 참여하기 위해서, 제가 주체로서 존재할 수 있는 곳에 있기 위해서 전 이 억압을 달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자유로운, 너무나 자유로운 그러나 무력한, 너무나 무력한 개인이기를 거부하겠습니다. 전 개인이기보다 '지도'받는 인자가 실상 더 자유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쓰여지지 않은 세계가 너무나 광할합니다. 글로 세계를 인식하기에 앞서, 그 한계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기인 2007-02-10 0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라님/ 저도 그 '휴머니스트적 동질감'이 아니라, 이를 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의 해방 속의 '나'의, '우리'의 해방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라는 지점은 저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문제는 '우리'의 해방의 궁극적 길이 아닌, 그 '매개'단계 내지는 방법론이 반성되었는가의 문제라는 것이죠. 울라님과 대화하면서 내 고민이 '형이상학적' 이었는지 자문해보기도 합니다. 문제는 세상을 변혁시키는 것이라면, 이 지점부터 즉 '어떻게 변혁시킬 것이고' '변혁을 하려면 나의 세계관은 어때야 하는가' 부터 사유해야 되는 것은 아닌지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실천의 문제로 돌아오게 되더라도, 실제 (어쨌든) 성공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역사적 반성과 '함께' 우리는 실천의 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고, 그것 자체가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울라님 말씀처럼 이것이 '지도력'을 고민하는 것인지, 아니면 제 고민의 성패여부가 행동의 기준이 되는지가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천적 고민이냐, 형이상학적 고민이냐, 변증법적 사유냐, (소부르주아적) 합리주의적 사유냐를 가르는 것이 그 지점이 되겠지요. 기본적으로 제 입장은, 제 고민 또한 나름의 '실천'으로 보는 것이기 때문에 '고민'후 '행동'이 아니라, 행동으로서의 고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 외 활동으로는 모 단체의 당비나 또 다른 모 단체의 후원금 정도로 자위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말입니다. 결국 우리의 고민이 하나의 '지도력'이 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고 이 부분을 뚤어내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절박한 심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인 2007-02-10 0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이렇게 말하면 거창하지만, 아직 80년 이후의 서구 맑시즘의 기본 문제틀 자체도 따라가기 벅찰지경이라서, 어떻게 하면 적어도 '내'가 확신을 갖고, '우리'로 확장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수준이죠;;

기인 2007-02-10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으로 제 생각을 정리하자면, 구조주의적으로 '주체' 물음을 주체를 발생시키는 호명하는 힘의 문제로 변신(?)시키더라도 그 '구조'가 '주체'의 자리를 대체할 뿐이 아닌가하는 문제로 나아가고, 여기서부터 탈구조주의자들에게 배우는 것이 있어야 할터이지만, 저는 아직 어떠한 확신도 없습니다. 계속 고민을 하면서도 현정세와 '현재'라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하겠음은 물론이죠. 힘듭니다. 여기까지 페이퍼에 정리해 놓겠습니다.
 

국내에 출간된 가장 두꺼운 레닌 평전 <레닌>(시학사, 2001)의 저자 로버트 서비스(1947- )의 신작 <스탈린, 강철 권력>(교양인, 2007)이 번역돼 나왔다. 이번엔 1,000페이지가 넘으니 거의 '사건' 수준이다. 작년에 같은 출판사의 '문제적 인간'  시리즈에서 <네차예프, 혁명가의 교리문답>(교양인, 2006)을 번역해낸 역자 윤길순씨의 작품인데, 반 년도 지나지 않아 이만한 분량을 번역해낸다는 게 어떻게 가능한지 경이롭고 경탄스럽다(이 정도면 스탈린시대의 노동 영웅 스타하노프 수준 아닌가?!).

 

 

 

 

어쨌든 그 경이로운 '노동' 덕분에 표트르 대제와 함께 러시아사의 '주인'이자 20세기 최고의 권력자 스탈린의 삶을 우리말로도 따라가볼 수 있게 되었다. 트로츠키의 반스탈린주의와 우리식의 반공주의적 시각으로 덧칠돼 있던 스탈린의 모습을 그 실물에 가깝게 복원해줄 것으로 기대된다. 이전에 국내에 소개된 가장 방대한 전기는 아이작 도이처의 <스탈린>(한림출판사, 1972; 원저는 1960)이며, 이 책은 '정치적 전기'란 부제를 갖고 있다. 알다시피 <무장한 예언자 트로츠키>(필맥, 2005) 등 트로츠키 전기 3부작을 쓴 도이처는 트로츠키의 시각에서 스탈린을 조명한다.

참고로 <스탈린, 강철권력>의 원서 'Stalin'은 2004년에 나왔으며 736쪽의 영어 보급판은 작년 10월말에나 출간됐다. 가격은 아마존에서 14.16달러이니까 배송료를 포함해서 25,000원이 안 들겠다(국역본은 40,000원대. 왜 더 비싼가? 번역 비용이 추가되어야 하니까!). 

저자인 서비스는 "러시아 혁명사 연구에서 탁월한 업적을 인정받은 영국의 역사학자이다. 19~20세기 러시아의 정치사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사 분야까지 폭넓은 영역에 걸쳐 선구적 연구 성과를 낸 러시아사의 권위자이다. 이데올로기적 편향을 배제하고 냉정한 분석을 앞세우는 그의 연구 방법은 학계와 평단의 찬사를 얻었으며, 치밀한 연구 태도와 방대한 자료 조사, 간결하고 힘이 넘치는 문체는 수많은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한국의 독자들도 사로잡을 수 있을는지.

작년에 내가 <레닌>을 구하면서 도서관에 신청했던 서비스의 책은 <러시아 현대사: 니콜라이 2세부터 푸틴까지>(하버드대학출판부, 2005)였다(조만간 대출해봐야겠다). 이런 책과 함께 그와 공동 저작을 여러 권 같이 낸, 역시나 20세기 러시아사 전문가인 제프리 호스킹의 책들이 더 번역/소개되면 좋겠다(호스킹의 책은 <소련사>(홍성사, 1988)이 소개됐지만 현재는 구할 수 없다. 물론 소련 몰락 이전의 시각을 담은 책이라 재출간에는 한계가 있겠고 대신에 <러시아와 러시아인(Russia and the Russians)>(하버드대출판부, 2001) 같은 책이 소개됨 직하다).

가디언지의 서평에 따르면, "<스탈린, 강철 권력>은 결함도 많지만 그 이상으로 재능이 풍부했던 스탈린이라는 정치가의 복합적인 내면 세계를 되살려냈다. 저자는 트로츠키가 주조한 스탈린의 고전적인 이미지에 도전해 그 이미지를 깨뜨린다. 이 책은 스탈린이 어떻게 마음 속까지 철두철미한 계급 투사가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혁명의 심장부의 권력 투쟁에서 일반 당원들의 믿음에 부응했는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스탈린의 전모' 혹은 수수께끼는 다 풀리지 않은 모양이다. 또다른 전문가의 서평을 읽어본 바로는 그렇다. 바로 지난주 'The Moscow Times'지에 이 책에 대한 서평이 재수록돼 있는데, 자료삼아 옮겨놓는다. 필자인 쉴라 피츠패트릭은 스탈린시대 전문가로서 그녀가 엮은 책 'Stalinism : new directions'(Routledge, 2000)은 지젝의 <혁명이 다가온다>(길, 2006)에서도 참조되고 있다.  

Closing In on Stalin

Josef Stalin preferred to be seen from afar -- larger than life, inaccessible. In a major new biography, Robert Service tries to cut him down to human size.

By Sheila Fitzpatrick
Published: April 15, 2005

There have been so many new biographies of Josef Stalin lately that we may almost be reaching the point of Stalin fatigue. Not that the subject has become fully comprehensible -- far from it -- or that any of the biographies has the instant-classic status of Ian Kershaw's two-volume "Hitler." Simon Sebag Montefiore's contribution from last spring, "Stalin: The Court of the Red Tsar," added a new dimension with his lively and highly readable, but still well-researched, portrait of Stalin in the company of his political associates and in his social and family milieu. Service, who thanks Montefiore in his preface and was warmly thanked by him in Montefiore's introduction, has taken another tack. Already the author of a history of Soviet Russia, Service sets out to give us Stalin in his historical context.(*몬테피오레의 책은 러시아어로도 번역됐다.)

Although Service is well-equipped for this task and has done his homework in the archives, including the newly opened Stalin papers, the dictator's personality seems to elude him. Again and again he dutifully lays out alternative motivations for Stalin's actions, a procedure which, fair-minded and historiographically useful though it is, doesn't necessarily help the reader understand what kind of man Stalin was. Still, he offers some valuable corrections to a number of the received opinions about Stalin. Service's Stalin is highly intelligent, even intellectual, despite what Leon Trotsky said about him. He was never a "gray blur" or colorless organization man, as Nikolai Sukhanov wrote. And he was absolutely not, as Trotsky liked to claim, a mere cog in the bureaucracy, but rather someone who very definitely ran the show.

All of these points are well taken, and it is particularly useful to have the ghost of Trotsky's interpretation, once hegemonic in leftist as well as Sovietological circles, chased away. No one who has looked at the new archival materials could doubt Stalin's intelligence. Moreover, it's clear that he thought like an intellectual (that is, analytically), read prodigiously and widely, and had the habit when faced with a new political task -- thinking about Soviet diplomatic options in Europe in the 1930s, for example, or directing the Soviet military effort in World War II -- of systematically researching the topic in preparation. It turns out that not only was he an intellectual, he was a compulsive and professional editor who corrected any manuscript that crossed his desk for style and grammar as well as for ideology.

Stalin's sense of national identification has been the subject of much speculation. In Service's version, Stalin was not particularly hung up on this question, being neither a passionate and absolute convert to Russianness, as Robert C. Tucker argued, nor, as others have suggested, an unreconstructed Georgian whose bloodthirstiness as a ruler can be explained in terms of age-old Caucasian patterns of machismo and revenge. Service's sensible comment is that, like many other people who live somewhere other than their birthplace, Stalin had a sense of himself as both Georgian and Russian, the balance between the two changing according to circumstance. In addition, he was a serious Marxist, whose commitment to internationalism effectively ruled out any form of passionate nationalism.

Service's take on Stalin's relations with Vladimir Lenin, especially in the difficult years of Lenin's last illness, when Lenin became increasingly critical of Stalin and finally pronounced him unfit to be general secretary, is particularly interesting. This is a topic Service knows well from his work on "Lenin: A Biography," in which he showed clearly how much Lenin's intellectual coherence and emotional balance were affected by his strokes. Telling the story from the other side, Service presents Stalin as largely a victim of Lenin's unreasonableness and his own obligations as a Central Committee go-between. This applies not only to the famous "rudeness to my wife" incident, in which Lenin, already seriously ill, rebuked Stalin for his behavior to Nadezhda Krupskaya, but to Lenin's criticism of Stalin's interpretation of Soviet nationalities policy, which many historians have taken to be rational and justified, rather than the confused intervention by a sick and angry man.

This interaction between Stalin and a dying Lenin is a comparatively rare example in Service's biography of an episode in which Stalin appears more sinned against than sinning. The only other similar case is Stalin's relations with his second wife, Nadezhda Alliluyeva, where Service, like Montefiore, foregrounds her difficult personality and psychological fragility. Stalin may have been a neglectful husband, like many another man in public life, but their correspondence when he was absent shows him as the more affectionate and conciliatory partner in what was clearly a volatile marriage. Understandably, Stalin had a sense of betrayal, as well as grief and loss, when she committed suicide in 1932.

Any biography of Stalin must try to explain key episodes in his career, including the dramatic initiatives of the Great Break at the end of the 1920s, when Stalin embarked on all-out collectivization and industrialization; the Great Purges of the late 1930s; the ups and downs of wartime leadership; and the swing into anti-Semitism of the postwar years. Service sees the purges as an intensification of rather than departure from Stalin's earlier patterns, pointing out what many other scholars have missed -- that Stalin distinguished himself by ruthlessness and indifference to the scale of casualties as early as the Civil War. (This may be another occasion where Trotsky's picture was misleading. As the other great Bolshevik proponent of bloodshed from this period, he presumably had little interest in identifying this as one of Stalin's notable characteristics.)


MT Archive

In his new book, Robert Service attempts to go beyond previous portraits of Stalin as an intellectual fraud or a gray bureaucrat.

 

 

 

 

 

 

 

 

 

On other big issues, however, Service has fewer insights to offer. What propelled Stalin into the wildly ambitious gambles of the Great Break and the First Five-Year Plan remains obscure, as does the mechanism by which he gathered his team of devoted executants. Vyacheslav Molotov appears suddenly in the narrative as a totally reliable No. 2 to Stalin, though all the reader has previously heard of him is that he and Stalin clashed in 1917 before Lenin's return from exile. As for the postwar period, the biography really trails off here. Service doesn't regard Stalin as a dyed-in-the-wool anti-Semite, probably correctly, but leaves the reader uncertain as to why he made the lurch into covertly state-supported anti-Semitism in the late 1940s and early 1950s. Stalin's striking retreat from hands-on leadership in the last years of his life, apart from a few favored issues which almost certainly included the anti-Semitic demarche of the Doctors' Plot, gets only perfunctory discussion.

Service had the laudable intention of writing a biography that would show Stalin as a human being rather than as a stereotypical personification of evil, but he only partially succeeds. His Stalin does seem human, though unattractive, and Service does not take the easy way out of suggesting that his suspicious and even paranoid characteristics amounted to madness. But Service fails to achieve the kind of vivid recreation of a personality that leads the reader to feel he has finally understood what made Stalin tick. Why was he so bloodthirsty as a ruler, and why did his associates follow him even after the debacle of the German attack in June 1941, when Stalin clearly expected to be overthrown? Service's historical landscape is quite precisely drawn, but the protagonist who inhabits it remains shadowy and distant -- which is no doubt the way Stalin, a great editor of his own personal archive as well as other people's manuscripts, intended it.

Sheila Fitzpatrick is the author of "Tear Off the Masks! Identity and Imposture in Twentieth-Century Russia," to be published by Princeton University Press this summer.

서평 말미의 필자 소개에는 근간으로 돼 있지만 이 책 <가면을 벗겨내라! : 20세기 러시아에서 정체성과 사칭>(프린스턴대출판부, 2005)은 이미 출간되었다. 아주 흥미로울 듯한 책이다. 참고로, 피츠패트릭 여사의 책으론 <러시아혁명 1917-1932>(대왕사, 1990)이 번역돼 나온 바 있다(놀랍게도 아직 절판되지 않았다!)...

07. 02. 01.  

Неизвестный Сталин

P.S. 러시아서점 오존을 둘러보니까 스탈린 관련 최신간은 저명한 역사학자 로이와 조르스 메드베제프 형제(로이의 책들은 국내에도 여러 권 소개돼 있다)의 <알려지지 않은 스탈린>(2007)이다. 750쪽이 넘는 두툼한 책이고 물론 스탈린의 비밀 문서고를 뒤져서 얻은 '알려지지 않은'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궁금한 신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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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7-02-15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이 엊그제 나왔는데, 제가 빠를 수가 있나요. 전 이번달 구입한도 초과여서 다음달에나 구입할 수 있습니다.--;

털세곰 2007-02-20 0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딴지는 아니구요, 원본 책값 약 15달러에 비해 40,000원대로 책정된 번역서 가격이 비싸다는 지적은 아주 약간은 과한듯^^... 나탸샤 댄스도 40,000원대(원본 보급판 역시 약 15불대에 할인 판매중)였는데. 조금은 관련있는 얘기인데, 요즘 한국책 활자들이 너무 큰 것 같아요. 그러니 한 페이지에 25줄 이상 넣기 힘들고(사실은 결코 넣지 않는 것 같고), 자연히 쪽수 늘어나고... 전 책은 아직 보지 못했지만 위의 바람구두 님 말처럼 편집자의 노력이 돋보이면(상대적으로 나타샤 댄스는 이 부분에서 꽤 무성의했죠?) 그 노력의 댓가는 알아줘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책을 사는 우리 입장에서는 비싼 책이 결코 달갑지 않지만^^... 아, 그리고 영어권 책이 소화되는 시장은 우리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크겠죠? 규모의 경제란 말이 괜히 있는 것도 아닐테고.
폭등하는 작금의 책값에 저도 갑갑해 하는 마당이라 딴지는 결코 아니니까 맘상하지 마시구요, 다만 그 굵은 활자들만 좀 줄여 페이지수 줄이면 책값 내려가지 않을까 하는 소박한 욕심은 분명합니다.

로쟈 2007-02-20 0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lovo님의 생각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책값이 비싸지는 거 다 이해하구요. 한데, 말씀대로 분량이 부풀려지는 건 좀 못마땅합니다(일단 종이가 많이 듭니다). 거기에 무성의한 번역/편집이면 열불나는 거구요.^^; 그건 그렇고, 'slovo'는 러시아어인데요.^^

2007-02-20 21: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털세곰 2007-02-21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마지막 p.s.에 다신 로이 메드베제프의 "알려지지 않은 스딸린"은 책이 좀더 이전에 나왔나 봅니다. 혹시나 하고 아마존에 보니 로이/ 죠레스 메드베제프 형제의 언급하신 책이 엘렌 다렌도르프(E. Dahrendorf)란 사람의 번역으로 "The Unknown Stalin"이란 같은 제목으로 이미 2003년 출판되었고, 2004년 하드커버 본으로 재출판도 되었네요. (링크 겁니다; http://www.amazon.com/Stalin-Roy-Medvedev/dp/1585675024/ref=reader_req_dp/103-1810962-8412617)

2003년 초판 영어번역본은 스딸린의 급작스런 죽음에 얽힌 수수께끼부터 시작해 2차 대전, 핵무기, 르이센코 사건 등의 학문분야, 그리고 그의 알려지지 않은 신변에 관한 얘기 등이 15개의 장으로 나누어져 300페이지 이상 집필되어 있네요.

로쟈님 말씀하신 2007년의 메드베제프 선생 형제의 새 책은 750페이지를 넘는다는 분량으로 볼 때, 아마 그 이전 책에 대한 증보판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선생들의 나이와 건강을 생각해 보면 아르히프 등을 뒤지는 작업으로 새 책을 최근에 내기는 아마 힘들지 않을까도 싶은데, 놀라울 따름입니다.

2007-02-21 15: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2-21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익한 정보 감사합니다.^^
 

연극리뷰를 두 편 옮겨놓는다. 지난주 한국일보에 리뷰가 실렸었는데, 컬처뉴스에도 같은 리뷰가 실려 있길래 모아놓는다. 지난 1월 중순 명품극단(이거 고유명사다!)의 '고골 3부작' 공연이 있었다. <비>, <광인일기>, <행복한 죽음> 세 작품을 묶어서 3부작으로 만든 것이고, 모두 원작은 드라마가 아니라 (단편)소설들이다(<비>는 귀신 얘기이고, <광인일기>는 제목대로 정신병자 얘기이며, <행복한 죽음>은 <옛기질의 지주들>로 국역돼 있는, 먹성좋은 노인네들 얘기이다). 이 '각색'만으로도 새로운 시도인데, 새로운 연극언어를 발견하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은 모양이고, 그 점이 주목받고 있어서 반갑다. 연출자를 비롯해서 스탭들 가운데 다수가 러시아연극학교 출신들이어서도 그렇다. 사적인 인연을 보태자면, 조연출을 맡은 친구가 모스크바통신에 가끔 등장하던 나의 룸메이트였다. 거의 매일 같이 공연을 보러 외출했었고, 내가 본 공연도 대부분은 그와 같이 본 것들이다(그러니 미리 광고라도 했어야 하는데, 나조차도 공연이 끝난 뒤에야 알게 됐으니!)...  

컬처뉴스(07. 01. 26) 몸, 충동적 에너지의 물화

‘고골 3부작’(명품극단, 김원석 작/연출) ― <비>, <광인일기>, <행복한 죽음> ― 은 ‘연극의 정체성 찾기’란 화두를 다소 색다른 방식으로 자극하는 연극이다. <고골 3부작>은 19세기 러시아의 소설가 고골의 단편소설 세 편을 극화한 연극인데, 주목되는 것은 이 연극이 연극의 정체성 모색에 있어 ‘왜’와 ‘어떻게’란 문제제기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이 연극은 연극과 타 예술매체와의 구별 지점에 대해 파고든 듯 하다. 즉 ‘연극이란 무엇인가?’라는 ‘극 언어로서의 연극 언어에 대한 질문’을 근간에 깔고 있는 듯 보이는데, 이는 차이의 주장을 통해 생존 근거를 찾기 위한 시도로 읽힌다.

‘고골 3부작’은 무용수에 버금케 훈련된 신체의 배우들이 아크로바틱을 응용한 미장센을 통해 요소요소 신선함을 제공한다. 가면과 인형, 악기 등 오브제의 놀이적 사용은 가벼운 눈요기로 흘러가지만, 강도 높은 신체 훈련의 흔적이 역력한 배우들의 역량이 만들어내는 육체 에너지는 연극적 구조 짜기의 또 다른 방향을 느끼게 한다.

이 단체의 개성이 가장 효과를 드러낸 경우는 이 연작의 첫 번째 공연 <비> ― 숲 속에서 길을 잃은 세 명의 신학생이 마녀(혹은 귀신)를 만나게 되는 이야기 ― 다. 비현실적 소재의 환상성이 극의 논리적 해명의 ‘빈틈’ ― 마녀가 신학생의 억압된 성적 욕망의 상징인지 아니면 그 지방 고유의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단순 지시인지에 대한 해석의 유보 ― 을 메워주며, 밤마다 다시 살아나는 처녀 귀신과 그녀의 영혼을 떠나보내기 위한 한 신학생의 장례 치러주기 한판 승부가 팽팽히 펼쳐진다.

흥미로운 것은 이 극이 신체 에너지의 물리적 변용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길 잃은 청년들의 공포와 절박함을 세 명의 배우가 극장 공간 전체를 원형으로 도는 행위로 전환시킨다. (분장 안 한 맨 얼굴에 땀이 줄줄 흐를 정도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이어 간신히 찾은 집에 묵기를 사정할 땐 여태껏 뛰어온 에너지를 간직한 채 배우 두 명이 다른 한 명의 몸 전체를 들어 그대로 집주인에게 들이밀며 장면을 연결시키는 등 극은 움직임 이전의 충동인 에너지의 물화(혹은 외면화)를 시도한다. 즉 <고골 3부작>의 새로움은 말이 아닌 ‘행위로 이야기 이어가기’를 의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말은? ‘고골 3부작’의 가장 취약한 지점은 (이 단체의) 언어에 대한 다소 소홀한 대접에서 나온다고 볼 수 있다. 세 작품 중 가장 대사량이 많았던 <광인일기>의 경우 들리지 않는 대사에 극은 나아가는 대신 흔들리며 오브제들의 ‘놀라운’ 사용 ― 눈을 즐겁게 해 주는 ― 의 순례가 되고 만다. 대사가 거의 없거나 혹은 중요 대사 외에는 의미 없는 말로 처리한 <비>나 <행복한 죽음>의 경우 갖가지 소품들은 배우의 신체 리듬에 합세해 고유의 극 리듬을 만들어 간다. (<행복한 죽음>의 중요 오브제인 세 개의 커다란 공은 술단지란 극의 설정과 어우러져 배우들이 공 위에서 이리저리 튀기며 놀 때 인생의 ‘제어되지 않는’ 자유분방함을 전달한다).

‘고골 3부작’을 통해 독특한 연극 만들기 메소드를 선보인 이 단체는 작년 객석과 평단 모두에게서 호평을 이끌어낸 박근형이나 이윤택, 김낙형, 김한길의 연극과는 또 다른 방향에서 연극의 생존을 위한 움직임을 보여주는 듯 하다. 가장 큰 구별점은 개인의 시선이 놓이는 자리에 다수의 배우들의, 상대의(동료 배우이든 관객이든)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한 예민하게 다듬어진 몸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간에 거르는 ‘막’이 없어져서인지 이 연극은 실험적 극언어들로 넘쳐남에도 전복적인 의미에서 ‘새롭지는 않다’. 오히려 고골 고전으로, 즉 텍스트의 원의미로 회귀하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이들은 고유의 방법론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시대의 경향을 좇아 비슷비슷한 연극 만들기를 반복하는 우리 연극계를 되돌아보게 하기에 반갑다. 일정한 메소드로서 연극을 만들어 내고 있는 이 단체의 작업이 한국 연극에서 하나의 분명한 목소리가 될 것인가. 프로듀서 시스템에 대한 저항이 한 개인의 예술 세계의 깊어짐으로만 가능한 것일까. 흥미롭게 지켜볼 일이다. 메소드이기에 희망적이지만, 무엇보다 아직은 메소드다.(엄현희 _ 연극평론가) 

한국일보(07. 01. 20) 고골의 광대놀음… 그게 바로 인간세상인걸!

18일 아르코 예술극장 소극장에서 막을 내린 극단 명품극단의 ‘고골 3부작’은 러시아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연극학도들의 성실한 연구공연이자 도전적인 출사표로 느껴졌다.(지난해 9월 같은 작품이 공연됐으나 당시 출연진의 건강 악화로 2부까지만 공연되고 중도에 막을 내려야 했던 아쉬움이 있었다.)

이번에 3부에 해당하는 <행복한 죽음>까지 보고 나니, 별난 이름의 이 극단이 러시아 연극 전통에 대해 갖고 있는 매혹과 탐구심을 짙게 느낄 수 있다. 원작의 문화적 배경에 해당하는 우크라이나 지역의 토속적 색채와 질감을 재현하고, 러시아의 민속악과 정서를 충실히 옮겨놓은 고골 3부작은 <비이> <광인 일기> <행복한 죽음>(원제 <옛 기질의 지주>) 등 세 단편에서 줄기를 취해 왔다.

고골의 소설들은 본질적 속성상 소극(笑劇)으로의 장르 전환이 용이하다. <외투>와 <코>는 이미 2005 2인극 페스티발에서 연출가 박근형과 반무섭에 의해 공연됐다. 해외 연극제 출품 목록에서도 고골의 각색물은 간간이 눈에 띈다.

고골에 의하면 인간은 그다지 품위 있거나 정신적인 존재가 아니다. 상황과 사회적 환경에 짓눌려 있으며, 게걸스레 먹고, 배설하고, 침 튀기고, 땀에 절어 번질거리고, 겁에 질려 다리나 떨어대면서도 한편으론 발정이 나 날뛰는 존재들이다. 연극 고골 3부작은 이러한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소극적 본질을 취하는 한편 소극에 걸맞는 곡예적 연기, 인형극, 광대 연행 등 다양한 쇼 비즈니스를 선보인다. 이는 신체적 기량을 갖춘 배우들이 있기에 가능하다. 희극 연기에 자질을 보인 주용필, 손경숙과 일인극 <광인 일기>를 그로테스크한 개성으로 끌고 간 조하석 등 눈여겨볼만한 배우들이 이 극단에는 포진해 있다.

문화에도 본격 펌프질 직전의 마중물이 있다. 우리 삶의 마른 대지를 적시기 위한 예술가들의 쉼 없는 펌프질을 생각해 본다. 이제 이 땅에 돌아와 연극을 막 시작하려는 이 젊은이들에게 러시아 연극은 우리 연극의 수원지에 숨은 물을 퍼 올리기 위한 한 바가지의 마중물이 돼야 한다.

그 동안 선학들이 걸어온 러시아 문학을 향한 흠모와 근대 연극의 심리적 사실주의 연기 방법론에 거리를 두고, 메이어홀드의 신체 역학과도 다르며, 러시아의 민속 문화와 대중극 전통의 원형을 탐구하는 듯 보이는 이 극단의 독자적 방향성이 다음엔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들려줄까. ‘소극’과 ‘광대극’이라는 만국 공통어 안에서 극단의 방향성을 잘 수렴해낸 고골 3부작 이후가 궁금해진다.(극작ㆍ평론가 장성희) 

07. 01. 28.

P.S. 참고로, '공식적인' 공연 소개를 옮겨놓는다.

니꼴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1809-1852)은 그리바예도프, 뿌쉬낀으로 대변되는, 러시아 문학의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작가이다. 고향 우크라이나 이야기, 수도 뻬쩨르부르크 이야기, 러시아 관리의 세계, 러시아 지방의 삶, 종교적 성찰 등, 폭넓은 주제를 통해 혼란하고 무질서한 삶의 실상을 때로는 날카로운 현실 바판과 고발의 형태로, 때로는 통렬한 풍자의 스타일로 그려내어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의 토대를 닦은 작가이기도 하다. 고골은 이러한 사회성 짙은 주제를 자유로운 상상의 세계에 기반을 둔 언어로 그려나가며 환상적 리얼리즘, 일명 ‘판타스마고리야’라는 독특한 자신만의 스타일을 창조하며 러시아 문학사의 발전에 기여하게 된다. 이는 자칫 센티멘털적 습성으로 빠질 수 있는 작품의 낭만주의적 경향을 그로테스크한 형상으로 극복하며 작품이 내재하고 있는 공간과 시간을 확대하고 있다. 그의 대표 희곡 작품인 ‘검찰관’은 물론이거니와 산문 작품들 또한 이미 오래 전부터 현대 연출가들의 무대적 영감의 재료가 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명품극단 창립작품인 고골 삼부작 시리즈는 한국연극 무대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초기 그의 우크라이나 이야기 시리즈 중의 하나인 ‘비이’, 고골의 뻬쩨르부르그 단편중의 하나인 ‘광인일기’, 그리고 죽음과 삶에 대한 새로운 의미의 발견이 감동적인 ‘행복한 죽음’이다. 각각의 작품들은 ‘봄’, ‘여름’, ‘ 가을, 그리고 겨울’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으며, 이는 삼부작 시리즈를 하나의 통일 된 작품으로 이루게 하는 역할을 한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세계적 거장 음악가 프라꼬피예프, 러시아의 전통 민속음악과 로망스 등, 낭만과 열정의 대명사인 러시아 음악을 바탕으로 역동적인 배우의 신체연기가 어우러져 새로운 연극세계를 창출을 기대한다. ‘비이’와 ‘광인일기’와 는 이미 러시아 국립 연극원 기티스 극장과 모스크바 슈킨 연극대학극장에서 공연을 가졌으며, 러시아 관객들로부터 한국연극의 미래를 예견할 수 있는 작품이라는 극찬을 받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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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신문을 읽다가 깜짝 놀란 기사가 있다. 몇 차례 페이퍼에서 다룬 바 있는 러시아 작가 다닐 하름스의 <엘리자베타 밤>이 국내에서 공연된다는 기사였다(이 작품은 <작가세계> 겨울호에 번역돼 있다. 장면번호와 지문들이 대거 생략된 판본을 옮긴 것인지라 좀 아쉽지만). 러시아의 연출가 유리 바실례프를 초빈하여 경기도립극단에서 내달초에 공연한다는 것인데, 러시아에서도 (내가 알기론) 거의 공연되지 않는 작품이라 더더욱 놀랍고 흥미롭다. 연출자의 구상대로 '러시아 부조리극의 진수'를 보여줄 수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경향신문(07. 01. 24) 바실례프 “하름스 부조리극 진수 보여줄것”

‘부조리극’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베케트나 이오네스코를 떠올린다. 기승전결의 드라마 구조가 확실한 서사극에 익숙해진 국내 관객들에게 앞뒤의 인과관계가 전혀 없는 부조리극은 마냥 어렵기만 하다. 부조리극의 개념조차 생소한데 하물며 이름마저 낯선 러시아 작가 다닐 하름스의 부조리극을 무대에 올린다니, 참으로 모험이다.

오는 2월1일 경기도문화의전당에서 다닐 하름스의 ‘엘리자베따 밤’을 국내 처음 선보이는 러시아 연출가 유리 바실례프는 “러시아에서도 하름스의 이름이 알려진 지 얼마 안됐기 때문에 한국에서 그를 생소하게 여기는 건 당연하다”며 “하지만 어둡고 철학적 내용을 다룬 베케트, 이오네스코와 달리 일상적 이야기를 가볍게 풀어내는 그의 이야기에 분명 매료될 것”이라고 말했다.

경기도립극단의 초청으로 지난 7일 한국에 도착한 바실례프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연극대학 교수로 연극 연출가이자 이름 난 신체·발성 훈련의 전문가다. 이번 방한에서 그는 도립극단 배우들을 상대로 발성과 언어, 신체 훈련을 위한 세미나를 진행하는 한편 하름스의 작품 ‘엘리자베따 밤’을 무대에 올리는 프로젝트를 지휘하고 있다.



1905년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난 하름스는 스탈린 시대를 살다간 불우한 작가다. 어린이 글로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며 소설·드라마·희곡 등을 썼다. 그러나 37세의 나이로 요절할 때까지 어린이 글을 제외한 그의 작품은 전혀 빛을 보지 못했다. 1980년대 이후에야 서방과 러시아에서 그의 작품이 출판되기 시작했다. 국내에서는 학계를 중심으로 하름스에 대한 연구가 서서히 이뤄지고 있는 가운데 2004년 처음으로 ‘집에서 한 남자가 나왔다’가 출판됐다.



“하름스는 베케트나 이오네스코보다 20년이나 앞서 부조리극을 썼습니다. KGB가 한 여자를 체포하는 과정을 그린 ‘엘리자베따 밤’은 상관없을 듯한 여러 에피소드들이 소극을 이루지만 결국 퍼즐처럼 연관성을 가지고 있어요. 특히 각각의 에피소드들이 사실주의, 코미디, 음악극, 오페라 등 현존하는 모든 연극 장르를 보여주는 게 흥미롭죠. 때문에 한국 관객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특히 독재정권을 경험한 나이든 세대는 작품에 깔린 공산주의 분위기를 잘 이해할 것입니다.”

바실례프는 부조리극에 대한 관객들의 거리감에 대해 “며칠 전 동대문운동장 벼룩시장을 방문했는데 왜 상인들이 거기서 장사를 하고 있는지, 사람들은 왜 그곳을 찾는지도 생각해보면 다 웃기고 이해가 안가는 부조리”라고 설명한 뒤 “일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부조리가 곧 우리의 인생이며 유머로 부조리를 이해해야 우리는 남을 덜 미워하고 마음을 가볍게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하름스와 같은 고향에서 태어나 스탈린 정권의 독재를 직접 경험했다. 이로 인해 이번 ‘엘리자베따 밤’에는 그의 경험이 녹아있다. 원작과 달리 무대의 배경을 한 집에 다수의 가족들이 사는 공산주의식 아파트로 설정한 것 등이 한 예이다.

한국 배우들과의 작업에 대해 그는 “도립극단 배우들은 살아있는 배우들로 배움에 대한 열정이 크고 흡수도 빠르다”며 “그러나 전반적으로 한국 배우들은 내면세계에 대한 학습이 부족한 듯해 아쉽다”고 지적했다.

바실례프는 2년6개월 전에도 경기도립극단을 방문해 배우 훈련을 맡은 적이 있다. 이번에는 지난해 8월 극단의 예술감독으로 취임한 배우 전무송씨가 그를 다시 초빙했다. 서양고전무대, 현대극 위주의 실험무대, 한국창작무대 등을 매년 한편씩 시도하겠다는 전감독은 “첫 실험무대로써 바실례프가 추천하는 하름스의 작품이 눈에 띄었다”며(*'실험무대로서'의 오타가 눈에 띄는군) “배우들을 창의적으로 이끄는 바실례프의 훈련과 하름스의 작품을 통한 새로운 연극적 도전은 배우들뿐 아니라 한국 연극 발전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연극 ‘엘리자베따 밤’은 다음달 1일 공연된 후 2월부터 넉달간 한 달에 한 번 상설무대로 관객들에게 선보일 예정이다.(문주영 기자)

07. 01. 24.

P.S. 드물게 보는 공연 사진이 있어서 옮겨놓는다(짐작엔 '연습' 장면 같다).

Елизавета_Бам_Шпица&Юсупов.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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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1-24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 체코가서는 인형극과 오페라를 보고 오려고요. ㅋㅋ 애인 뜯어먹기 --;; 그나저나 이 연극 보고 싶은데, 애인 없어서.. ㅋ 대학원 사람들 이끌고(?) 가야겠네요. 러시아 연극이라 하면 '혹'해서 갈 것 같은데용 ㅎㅎ

로쟈 2007-01-24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인'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건가요? '애인 없어서'라 하심은?..

기인 2007-01-25 0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애인은 체코에 4개월 동안 남아서 공부할 꺼라서 ^^; 체코 다녀오면 애인이 한국에 없어서라는 뜻입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