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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관련 국내기사는 대부분 (1)북핵 (2)에너지 (3)테러에 집중돼 있는 듯하다. 우리의 관심과 맞닿아 있는 탓이겠다(하긴 어제는 러시아의 곰들이 불면증을 앓고 있다는 기사가 뜨기도 했다. 지구 온난화가 이유라고). 예전에 러시아의 국영 에너지기업 '가즈프롬'에 관한 페이퍼를 올려놓은 적이 있는데, 오마이뉴스에 '러시아 에너지'의 근황에 관한 기사에 올라와 있어서 옮겨놓는다. 같이 읽어볼 만한 관련서들이 많지는 않은데, 요는 에너지 주권시대를 대비해야 한다는 것.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러시아 제국'은 무엇보다도 '에너지 제국'이기 때문이다.

 

 

 

   

오마이뉴스(06. 11. 23) 에너지의 힘... 러시아가 돌아왔다

러시아가 돌아왔다. 과거의 '핵'을 버리고 신무기인 '에너지'로 무장했다. 소련 붕괴 이후 '종이 호랑이' 신세로 전락했던 과거의 러시아는 어디를 둘러봐도 없다. 소련이 붕괴했을 때 유럽연합은 언젠가 러시아가 다시 위협으로 다가올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빠르게 다가올 줄은 몰랐다.

올초 러시아는 유럽연합에 잊을 수 없는 새해 선물(?)을 선사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 가격협상 논쟁을 벌이다 급기야 유럽으로 향하는 천연가스 공급을 일시 중단했다. 가스중단은 우크라이나에 한정되어 우려했던 '비상사태'는 없었지만, 수송관이 우크라이나를 지나 유럽으로 향하는 모습을 볼 때 그 의미는 분명했다.

이후 유럽연합은 해결해야 할 최선의 문제로 '에너지 독립'을 주장했다. 하지만, 이렇다할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풀리지 않는 과제로 남게 되자, 유럽연합은 에너지 부문의 자유시장 관계를 규정하는 '에너지 헌장' 문제를 부각시켜 러시아에 대응했다. 유럽연합은 러시아 이외의 국가에 대한 가스 수송망 자유 이용을 위한 국제 에너지 헌장의 비준을 요구했다(러시아는 1994년에 서명은 했지만, 현재까지 비준을 하고 있지 않다).

러시아 "EU는 이중잣대를 버려라"

러시아 측 입장은 간단하다. 러시아에게는 불공정하고 불이익을 가져다주는 비준일 뿐이다, 따라서 '유럽연합이 러시아에 진출하면 투자와 국제화의 시각으로 해석하고, 러시아가 유럽연합에 진출하면 러시아 독점기업의 시장 확대'라는 이중잣대를 버리고 러시아에게도 공정한 기회와 게임의 룰을 보장해 달라는 것이다. 한 예로 최근 러시아 국영가스기업 가즈프롬은 영국의 에너지 회사 센트리카(Centrica)를 인수-합병하려다 영국정부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지난 22일 러시아 외무장관인 세르게이 라브로프는 "러시아는 에너지 헌장에 비준하지 않겠다, 이에 대해 이미 러시아는 여러 차례 밝혔다"고 말했다. 러시아에게 가스는 '피'와 같은, 가스 수송관은 '핏줄'과도 같은 존재이다.

한편, 세계 시가총액 톱10에 진입한 러시아 에너지 독점기업 '가즈프롬'은 인수-합병과 투자에 집중하며 에너지 분야와 가스 파이프라인 확대에 더욱 더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 15일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가즈프롬의 올해 9월까지의 순이익은 작년보다 무려 76.6%나 증가한 약 2360억 루블(약 90억달러)이라고 한다.



러시아 '가즈프롬' 제국 탄생

가즈프롬은 유럽연합에게 있어서 '공포의 대상'이다. 유럽연합에 약 25%의 가스(러시아 가스 수출의 약 67%)를 수출하고 있고, 우크라이나 가스분쟁 사태의 중심에 서있었다. 가즈프롬의 경영진은 모두 푸틴의 최측근들이고 회사의 전략과 비전은 러시아 에너지 정책을 대변한다.

석유와는 달리 수송관을 통해 들어오는 가스는 유럽연합을 러시아에 더욱 더 의존하게 만들고 있다. 하지만, 독일은 가즈프롬과 발트해를 통해 독일로 들어오는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건설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미래의 안전한 가스 보급망을 확보했고 프랑스는 제2의 가스공급자인 알제리와 두터운 친분관계를 유지하며 원자력 에너지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유럽연합을 이끌어가는 프랑스와 독일의 이런 발빠른 전략과 책략은 러시아 가스에 의존도가 높은 동유럽과 발틱국가들에게 위기와 배신감을 가져다 주고 있다. 독일과 러시아로부터 따돌림을 당한 폴란드의 입장을 대변하듯, 폴란드 국방부 장관은 러-독 가스관 사업(Nord Stream)을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독-소 불가침 조약)이라고 비꼬아 불렀다.



독-러 공동가스관 사업 = 독-소 불가침조약?

한편, 오는 24일 유럽연합 25개 회원국들은 핀란드의 헬싱키에서 유럽연합·러시아 정상회담을 통해 새로운 '전략적 파트너십' 협약을 맺을 계획이다. 그런데 이 정상회담을 앞두고 폴란드가 자국의 육류 제품에 대한 러시아의 금수조치를 이유로 유럽연합·러시아 정상회담에 보이콧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유럽연합의 규정은 회원국 전원의 동의하에만 러시아와 새 협약을 체결할 수가 있다.

따라서 유럽연합은 폴란드를 설득하는 입장이고 의견 차이로 대립하는 모습마저 나타나고 있다. 유럽연합은 러시아와의 에너지 분야를 포함한 전략적 파트너십이 적극 필요한 상황에서 폴란드의 돌출 행위가 부담으로 다가오고 있다. 한편 폴란드의 이번 행동은 유럽연합내에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고 러시아에 압박을 가하려는 모습이다.

하지만 러시아는 오히려 유럽연합의 분열과 대립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다. 지난 22일 대통령 보좌관 세르게이 야스트르젬브스키는 기자회견을 통해 폴란드의 딴지를 이렇게 비꼬아 말했다. "유럽연합은 자신의 문제에 봉착해 있다. 유럽연합 회원국이 아닌 러시아로서는 안타깝게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입장이다."

유럽연합은 최근 러시아의 '여기자 살해 사건'과 영국에서의 '전 KGB요원의 독살사건' 등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언론의 자유를 탄압하고 테러를 자행한다고 러시아를 비난하며 정치적으로 압박하고 있지만, 러시아는 오히려 유럽연합의 이중잣대를 비난하고 있다.

중요한 건 유럽연합의 어떤 공세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푸틴 대통령의 강력한 에너지 국유화 정책과 강한 러시아 건설은 전세계에 '러시아의 힘'을 과시하고 있다. 이전보다 더 위협적이고 지능적인 무기를 가지고 돌아온 러시아 제국은 부활하고 있다.(정인고 기자)

06.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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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도스토예프스키 탄생 185주년이 되는 날이다. 작가는 1821년 11월 11일 빈민구제병원의 의사였던 미하일 도스토예프스키와 마리야 도스토예프스카야의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그는 1881년 2월 9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니까 해마다 '빼빼로 데이'가 그의 생일이니만큼 기억하기도 편하다. 기념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작가의 초상화로는 가장 유명한 바실리 페로프의 초상화(1872)를 아래에 옮겨놓는다. 모스크바의 트레챠코프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별달리 준비한 것도 없어서 도스토예프스키 '입문'으로 읽을 만한 책들을 몇 권 나열해본다. <30분에 읽는 도스토예프스키>는 물론 가장 쉽고 짧은 입문서가 되겠다(하지만 얄팍한 정보나 나열하고 있는 책은 아니다). 문제거리를 발견하는 데 초점을 맞추면 되겠다. 그리고 얀코 라브린과 콘스탄틴 모출스키의 <도스토예프스키>는  평전이다(앙드레 지드와 슈테판 츠바이크의 평전도 시중에는 나와 있다. E. H 카의 전기는 절판됐다). 후자는 세밀한 작품해설까지 포함하고 있어서 교양서를 겸한다. 그리고 두번째 아내였던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의 회고록 <도스또예프스끼와 함께한 나날들>은 가장 가까이에서 그와 삶을 같이했던 이의 생생한 육성을 담고 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위대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위대한 건 작가로서이다.

 

 

 

 

어쨌거나 잠시 도스토에프스키 문학에 대해서 명상해보는 시간을 가져도 좋을 11월의 하루이다.

06. 11. 11.

P.S. 보다 자세한 도스토예프스키 이야기는 '푸슈킨과 도스토예프스키'란 페이퍼를 참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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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손 2006-11-11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출스키 책에 10월 30일이라고 되어있는 걸 저는 종이에 적어놓아서 로쟈님이 잘못 쓰셨나 잠깐 어리둥절했습니다만 하하 러시아라는 걸 깜빡했습니다.

닉네임을뭐라하지 2006-11-11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H.카의 전기를 몇 달 전 우연히 헌책방에서 구했다죠.
아, 오늘은 또 키에르케고르가 고인이 된 날이기도 하더군요.
(우연히 YTN 뉴스에서 본 사실)

로쟈 2006-11-11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융아님/ 어디선가 본 사진인데요.^^ 구력 10월 30일인지라 지금의 달력으론 11월 11일입니다. 10월혁명 기념일이 11월 7일인 것도 그 때문이구요...
연랑님/ 카의 전기는 제 기억에 홍성사판도 있고 기린원판도 있지요? 키에르케고르는 요즘 <불안의 개념>을 읽을 만만의 준비를 해놓고 있는데, 시간은 잘 안 나네요(--;)...
 

밀린 원고 때문에 대학원 MT도 따라나서지 못하고 집안에 죽치고 있다. 이런 날은 적당한 긴장상태에 있게 되는데, 그러한 긴장에 맞멎는 '배짱' 때문에 한편으론 여유롭기까지 하다(그 배짱의 유일한 근거는 원고를 쓰지 못한다고 바로 죽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라면으로 점심을 때우며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뒷북성' 기사를 읽게 됐는데, '대한제국의 모델은 러시아였다?'란 학술쟁점 기사가 그것이고, 작년말 교수신문 기사이다(작년까지만 해도 내가 교수신문에 자주 들락거리진 않았나 보다). '자료'의 가치가 있어서 보관해놓도록 한다.

교수신문(05. 12. 20) "대한제국의 모델은 러시아였다?"

대한제국의 개혁 모델이 '러시아'라는 특이한 주장이 제기되었다. 허동현 경희대 교수(한국근대사)는 최근 출판된 '러일전쟁과 동북아의 변화'(선인 刊)란 책에 실린 한 논문에서 "대한제국의 국제는 그 전제성으로 볼 때 러시아 차르 체제를 모델로 삼은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허 교수는 '대한제국의 모델로서의 러시아'라는 논문에서 "대한제국이 추진한 황제권 강화는 민국이념을 계승한 것이라거나 중국의 천자나 일본의 천황제를 본떴다기보다 러시아의 차르체제를 참용했다고 생각한다"라고 전통계승설과 일본모방설에 강한 의구심을 표출했다.허 교수는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할 위기에서 러시아에 기대어 등장한 황제국 대한제국의 모델이 제정 러시아였음은 자명하지 않을까?"라는 질문도 던진다.

그런데 이 정도의 문장으로라면 황제권이 강하다는 형태적 유사성, 정치활동을 억압했다는 식의 전권적 지배, 급할 때 도와준 강국의 국가지배체제를 당연히 본받지 않았겠느냐는 식의 추론에 근거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허 교수가 동원하는 것은 주한 러시아 공사 스파에르의 보고서가 전부다. 스파에르가 "고종의 충신인 척하면서 실제로는 여지없이 미국화 되어버린 서재필의 산물인 독립협회는 반러 활동을 전개하는 일본과 영국 공사관의 괴뢰"라고 보고했다는 것이다. 허 교수는 이를 근거로 "고종의 독립협회 해산에는 러시아 측의 암묵적 지지도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펼친다.

임오군란 이후 조선이 러시아의 힘을 빌어 일본 세력을 견제하고 대한제국으로 무사히 돌입할 수 있었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러시아가 방패막이 이상의 존재였다는 점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사료나 논리가 있어야 하는데 허 교수의 논문에서는 그것이 빠져 있다.

그렇다면 이런 빈약한 근거로 왜 허 교수는 이런 무리한 주장을 펼치는 것일까. 그것은 교수신문에서 지난해 벌어졌던 '고종시대 논쟁'에서 '광무개혁'이 성공적이었다고 평하고, '대한제국'을 이끈 고종은 영정조의 민국이념을 계승한 개명군주라는 이태진 교수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서이다. 고종이 밀려오는 외세에 대응해 동도서기론을 취했던 이유에 대해 이태진 교수는 "고종은 서양의 입헌군주제나 입헌공화제에 대해 소상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섣불리 이를 모방하기보다 선왕들이 추구한 민국정치 이념을 계승해 실현하는 것이 훨씬 더 내실있는 왕정이 되리라고 믿었던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허 교수는 "과연 군주 중심의 동도서기론적 대응이 민국이념이라는 자기역사의 전통에 기반을 둔 것이었을까"라는 회의를 표한다. 그는 "민국이념을 계승하였다는 사진속의 고종황제는 어째서 차르의 복장을 입고 있는 것일까"라고 계속 따진다.

이 질문은 그럴싸한 측면이 없지 않다. 공식복장이 그랬다면 그것은 은연중 고종의 지향을 드러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교적 차원의 겉치레였을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한다. 또한 그간 대한제국의 성립에 영향을 준 국가모델을 명치유신을 거친 일본에 국한해서 논의해온 측면을 지적한 부분은 새로운 역사적 변수를 도입해 좀더 꼼꼼하고 종합적인 시야를 확보하자는 차원에서 받아들이면 의미가 있다.

하지만 허 교수는 대한제국의 러시아 모방설을 대한제국의 후진성을 증명하는 도구로 삼고 있어 아쉽다. 즉, 러시아는 모델로 삼을 만한 게 못된다는 것. 그는 이승만의 저서인 '독립졍신'에 러시아가 아주 저급한 국가로 취급되고 있는 걸 예로 들며 "당시 서구중심주의자들이 러시아를 반면교사"로 삼고 있었음에 비해, 고종은 그걸 몰랐다는 것이다. 그는 나아가 고종의 대한제국이 "비밀경찰이 사회 구석구석을 감시하는 보수적 반동 전제정치가 강화된 알렉산드리(*알렉산드르) 3세의 시대"와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식의 부조적 방식에 대해서는 '고종시대 논쟁' 중에 많은 비판이 있어왔다. 러시아의 도움을 받았고, 전제군주 등 유사성을 부각시켜서 무언가를 주장하는 방식은 현실과 다를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허 교수의 논문은 대한제국이 러시아를 모방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 상황이나 내적 동기 등을 밝혀내지 못한채 단지 '왜 러시아는 논하지 않나'라는 착상에 의존하면서 유사성을 지나치게 발견하려고 노력한 듯한 흔적을 많이 보여준다.

결국 허 교수가 골인하는 것은 대한제국이 근대국민국가가 '아니'라는 결론이다. "고종과 그 측근세력이 차르체제를 '잠재모델'로 만든 대한제국은 국민을 국가를 담당하는 주체가 아니라, 백성을 신민으로 잠자게 하려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국민국가로 보기 어렵지 않을까"라고 지적한다.

이런 주장들에 대해 20년 가까이 대한제국 정치구조를 연구해온 서영희 한국산업대 교수(한국사)는 "읽어보지 않아서 뭐라 말하기 어렵지만, 상당히 독특한 주장인데 나는 대한제국이 러시아를 모델로 삼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잘라 말했다. 주진오 상명대 교수(한국사) 또한 "읽지 않고 판단할 수 없다"는 전제를 달면서도 "만약 사료나 논리적 근거가 없다면 고려해볼 가치가 없는 주장"이라는 의견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대한제국'이 국민국가인가 아닌가에 대한 허 교수의 논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허 교수는 대한제국이 서구 근대국가의 일반적 요건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국민국가가 아니라고 본다. 문명화의 정도, 통합기제의 유무, 국가간의 대등관계 등에서 볼 때 '택'도 안된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에 대해서도 기본적으로 이런 관점에서 접근한다. 명치 이래 일본의 문명개화는 "서구 근대와 일본 고대의 유착"이며 "서구근대가 오역, 날조된 것"이라는 시각이다. 하지만 그는 일본이 헌법과 의회, 삼권분립 등의 정체를 갖추고 있었기게 일본적 국민국가 정도는 된다는 주장을 한다.

비서구권의 역사진행을 서구와의 관련 속에서 파악하는 일은 필수적이다. 전근대와 근대의 틀 속에서 살펴보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비서구권의 역사를 '근대의 결여태'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이제 '선택'과 '관점'의 문제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허 교수뿐 아니라 이 결여태를 상정하는 학자들은 비서구권 국가들이 '번역'이라는 방식을 통해 부족한 것을 보충하는 '캐치 업' 근대화를 걸어갔다고 보고 있다.

이 때 '번역'이라는 어휘는 역사적으로 볼 때 문명권에서 비문명권으로 지식이 흘러들어간 방식을 의미한다. 어떻게 보면 '번역'이라는 수사는 매우 오리엔탈리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번역=이식'이고, 더 세분화시켜봤자 번역->번안->통언어적 실천(토착화)인 셈이다. 하지만 서구와 비서구의 관계를 '미메시스'의 차원에서 생각할 수는 없을까. 미메시스는 상호적인 것, 즉 상호모방이다. 번역에서는 원전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최고이지만, 미메시스는 그와 달리 원래의 대상에는 없는 무언가를 '창조'하는 과정이 최종적인 과정으로 포함된다. 

물론 예술에서 주로 쓰이는 이 미메시스의 개념을 역사과정에 확장시켜 대입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겠으나, 서구의 결여태로서 비서구사를 규명하려는 논의구조가 왜 아포리아인지를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기자의 아이디어는 책 한 권을 쓸 만한 주장이다. '무리'가 아닌 걸 보여준다면 주목할 만한 업적이 되지 않을까?).

대한제국이 '진정한' 근대국민국가가 아니었다고 결론내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건 대한제국이 진정한 국민국가라는 주장이 대세를 이룰 때 그 반박으로서는 의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서구와 역사과정이 다르고, 국가 구성원들의 사회화과정, 교육정도 등에서 큰 차이가 있는 조선이라는 특수한 왕조가 어찌어찌 당시의 대세를 따라 국체를 바꿔보려 했었던들 어찌 '진정한' 서구를 이루었을 것인가가 진정한 의문이다.

차라리 "외세가 없었다면 대한제국은 어떤 제3의 길을 걸어갔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게 그나마 과거사에 대한 아쉬움의 표현으로서 훨씬 인간적으로 다가오지 않는가. 따라서 대한제국이 일본, 러시아와 청국, 미국 등 어느 한 나라를 모델로 삼았다는 주장을 하기 전에, 조선이라는 그릇에 이들을 해체재구성하는 혼성모방을 선택했다고 보는 게 손쉬우면서도 역사적 진실에 가깝지 않을까.(강성민 기자)

06. 11. 10.

 

 

 

 

P.S. 허동현 교수는 박노자 교수와의 역사 대담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역사학자이다. 그 대담에서는 '건강한 보수주의자'의 역할을 맡았었다. 이 '쟁점'에서도 시사받을 수 있지만, 한국근현대사 연구에 있어서 러시아는 빼놓을 수 없는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 비중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 러시아쪽 사료들을 검토/분석할 수 있는 연구자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으로 안다. 국문학도/국사학도들이 일본과 중국쪽 사료 못지 않게 러시아쪽 사료들도 참조할 수 있도록 하는 지원이 필요하지 않을까. (특히나 해방공간에 관한 사료들이 그러한데) 우리가 몰랐던 우리 자신의 모습이 거기에 있는 건 아닌가...

P.S.2. 동향기사에 대한 허동현 교수의 반론도 게재되었던 걸 뒤늦게 발견했다. 공정을 기하기 위해서 마저 옮겨놓는다.

교수신문(06. 01. 06) ‘강한 주장 약한 사료’(교수신문 제384호)에 답한다

제정 러시아의 차르체제가 대한제국 광무황제가 꿈꾼 개혁모델이었다는 필자의 견해(「대한제국의 모델로서의 러시아」, 『러일전쟁과 동북아의 변화』, 선인, 2005)에 대해 “강한 주장을 뒷받침하기에는 사료적 근거가 취약하다“는 강성민 기자의 논평은 정당하다. 허나 대한제국의 역사적 성격에 대한 기존 연구 모두가 이러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한다. 여러 가지 가설의 등장은 역사에 관한 우리의 이해를 증진시켜준다는 점에서 환영할 일이다.  

필자가 보기에 기존의 연구는 개화파, 농민(민중), 국왕, 그리고 일본 중 누구를 근대 개혁의 주체로 보느냐에 따라 대한제국에 대한 평가를 달리한다. “광무개혁”의 실재를 부정하는 신용하 교수는 개화파를, “광무개혁”은 호평하면서도 대한제국은 “의사절대왕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 김용섭 교수는 농민을, 대한제국이 주체적 근대 국민국가였다고 본 이태진 교수는 국왕을, 그리고 식민지 근대화론의 입장에서 “광무개혁”의 근대성을 부정한 이영훈 교수는 일본을 근대화의 주체로 본다. 강 기자의 논평에 힘을 실어 준 서영희 ․ 주진오 교수는 어떤 입장일까? 서 교수는 국왕을, 주 교수는 농민을 개혁의 주체로 보는 쪽에 서있는 것 같다.

시민사회와 산업화를 이룬 오늘 그 “발전”의 뿌리를 놓고 한국사학계의 내재적 발전론과 경제사학계의 식민지근대화론이 평행선을 달린다. 외세를 배격한 민족의 자주를 강조하는 대한제국 높이기는 과거사에 대한 성찰일까? 망국의 책임을 일본에 떠넘기는 과오 감추기라는 느낌을 감출 수 없다. 그렇다고 개화기의 근대화 노력을 외면하며 오늘 우리가 이룬 경제성장의 뿌리를 식민지 시대에서 찾는 식민지근대화론에 입각한 대한제국 때리기도 정당하지는 않은 것 같다.  

종래 연구 동향을 일별할 때, 필자가 품은 의문은 다음과 같다. “급진” 개화파는 일본을, “온건” 개화파는 중국을, 친미 개화파는 미국을 근대화의 모델로 삼았을 뿐 아니라 그 힘을 빌리려 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반면 고종과 주변세력은 갑신정변 실패이후 청국을, 그리고 아관파천 이후 러일전쟁 전까지 일본을 막기 위해 러시아를 이용하려했던 것으로 알려져 왔다. 왜 그들은 러시아에 의지하려고만 하고 러시아를 개혁모델로 삼지 않았을까? 일본이 자국의 제도를 모델로 한 갑오경장을 유도했듯이, 러시아도 삼국간섭 이후 자국을 모델로 한 조선의 개혁을 이끌어 내려하지는 않았을까? 졸고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갖고, “민족”과 “자주”를 오용하는 국수적 성격의 대한제국과 고종황제 띠우기에 보이는 맹점을 지적하려는 데 그 주목적이 있었다.

이러한 물음에 대한 잠정적 결론 하나는 대한제국은 그 개혁모델로 러시아의 차르체제를 참용하였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엄밀히 말하자면 일본과 러시아 사이의 힘의 균형 위에서 연명하던 허울만 남은 제국인 대한제국은 국민국가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필자의 생각은 추후 실증적 작업이 뒷받침될 때 좀 더 설득력을 얻는다. 최근 필자는 웨베르 주한 러시아공사가 아관파천 때 의정부를 다시 설치한 것에 대해 "고종이 러시아의 국무회의(Gosudarstvennyi Sovet) 절목을 참고하여 부활시켰다"고 보고한 러시아 문서를 찾았다. “강한 주장”을 입증하는 충실한 사료가 앞으로 속속 발견될 전망이다.

허나 필자는 비서구권의 역사를 “근대의 결여태”로 보았다는 비판에 동의할 수 없다. 차라리 졸고가 개화기 한국이 근대화에 실패한 원인을 찾다보니 결과적으로 이미 시효가 끝난 "근대화 예정론"에 불과하다고 평한다면 수긍이 간다. 물론 근대화란 역사적 필수가 아닌 하나의 가능성 일 수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근대 기획의 문제는 근대 자체를 비판하여 넘어서려는 탈근대의 문제와 구별되어야 할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한국에서 근대 기획―식민지 근대 극복과 하나 되는 국민국가 수립―은 아직도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傳言만으로 一針을 주신 주진오, 서영희 교수께 감히 졸고 일독 후 가편을 청한다.(허동현 / 경희대·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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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11-10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신이 가장 이해하기 쉬웠어요.(>_<)

로쟈 2006-11-10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번째 추신을 덧붙였습니다.
 

지젝이 권하는 레닌에 관한 책 <혁명이 다가온다>(길, 2006)에 관한 몇 마디 글을 준비하면서 레닌에 관한 자료들을 검색해보다가 지난봄 오마이뉴스에 게재된 기사를 읽게 되었다. 크레믈린에 안치된 레닌 묘 이장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어서 옮겨놓는다. 필자인 최광은 기자는 러시아국립사범대학의 교환학생이라고 한다.

오마이뉴스(06. 05. 05) '죽은' 레닌 '산' 러시아를 괴롭히다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들어서면 붉은색 화강암으로 말끔하게 단장된 레닌 묘가 눈에 선명하게 들어온다. 그렇게 화려하지도 크지도 않고 마치 조그만 무대처럼 느껴지는 레닌 묘. 실제로 구소련 시절 붉은 광장에서 무슨 기념일 퍼레이드를 펼치거나 큰 환영행사가 있을 때 그의 묘는 단상으로 이용되었다.

최근 이 레닌묘의 존폐 문제를 놓고 다시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해묵은 이 논쟁이 이번에는 과연 어떻게 매듭지어질지 주목된다. 이번 논란 재개의 발단은 외형적으로 대통령도 정치권도 아닌 러시아과학아카데미 러시아역사연구소가 최근 발간한 한 보고서로부터 시작되었다. '반공산주의 당 선언'으로도 불릴 수 있는 <역사의 선고> 보고서의 한 대목을 우선 보자.

"주권국 러시아는 공산주의적 유토피아, 적색테러와 사회주의 혁명 수출의 상징과 같은 맑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과 결별하지 않고서는 성공적인 민주주의적 발전의 길로 나아갈 수 없다. 역사학자들의 결론에 따르면, 레닌과 스탈린은 인류에 반하여 시효가 없는 범죄를 저질렀다."

법률적으로는 유족들의 뜻에 반하여 유골을 처리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보고서는 레닌 묘를 철거하는 데 법률적 걸림돌을 최소화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문구를 인용했다.

"레닌 형제자매와 부인의 뜻은 심지어 임시 묘소의 건립도 반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실제로 문서상 기록이 남아있는 것이 아니고 레닌의 사후 시신의 보존 방안에 관해 논란이 있을 때 단지 간접적인 증언으로 등장했던 내용이다. 그리고 레닌 묘 건립 이후에는 다시 거론되지 않았다. 정작 레닌 자신은 사후에 샹트페테르부르크 볼코비 수도원 묘지에 있는 자신의 어머니 무덤 옆에 묻히기를 원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레닌의 유언에서는 이에 대한 언급이 어디에도 없으며, 그의 생전에 공식적으로 천명된 바도 없다. 현재 그의 유일한 혈육인 조카딸 올가 드미트리예브나 울랴노바는 단호하게 레닌묘의 이장을 반대하고 있다.

한편 <역사의 선고>는 "정부는 납세자들의 돈을 공산주의 당 지도자 시신의 유지, 검사, 복구에 지출해서는 안 된다"며 경제적인 이유까지 들어 레닌 묘의 제거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레닌 묘 보존지역 자선사회단체' 의장인 알렉세이 아브라모프의 말에 따르면 이는 전혀 사실과 다르다. "공산주의 당 지도자의 시신 보존과 관리를 위한 비용을 정부가 단 한 푼도 지불하지 않은 지 벌써 15년이나 되었다. 모든 비용은 우리의 기금과 다른 몇몇 조직들이 지불한다."(<이또기(결산)>, 2006년 4월 17일자)

결론적으로 <역사의 선고>는 다음과 같은 방안의 실행을 제안하고 있다. 첫째, 붉은 광장의 레닌 묘지를 완전히 제거하고, 19세기 말의 모습처럼 '비정치화된 외관'을 광장에 돌려준다. 둘째, 레닌, 스탈린을 비롯한 '대중 억압의 책임이 있는 다른 인물들’의 유해를 친지 혹은 그 계승자들에게 돌려준다. 셋째, 도시, 거리, 지하철역 등의 명칭에서 레닌, 스탈린과 그의 동료들의 이름을 제거한다. 넷째, 그들의 동상을 박물관으로 옮긴다. 다섯째, 크레믈린 망루에 있는 루비색의 별 장식을 황금 독수리로 대체한다.

그런데 이 보고서의 내용뿐만 아니라 그 작성과정에도 여러 가지 의혹이 일고 있다. 우선 이 보고서의 최종 서명이 연구소장인 안드레이 사하로프가 아닌 부소장 블라디미르 라브로비에 의해 이뤄졌다는 점이 의문을 낳고 있다. 이렇게 중요한 보고서를 하필 왜 연구소장이 휴가 갔을 때 부소장이 결재했을까 하는 점이다. 안드레이 사하로프는 언론들의 추궁에 <역사의 선고>는 "연구소의 견해"라고만 말할 뿐 더 이상의 자세한 언급을 회피했다.

이러한 의혹은 레닌묘의 보존을 지지하는 측뿐만 아니라 정작 러시아과학아카데미 고위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제기되고 있다. 러시아과학아카데미 부원장 발레리 꼬즈로프는 지난 달 17일 <이또기>와 인터뷰에서 이를 두고 "직접적인 정치적 계략"이라는 신랄한 평가를 내렸다. 그는 또한 "아카데미 연구소들은 공공기관으로서의 공신력이 있기 때문에 더욱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면서 "여기에 어떤 분명한 주문이 있었다"고 강조했다.

또 알렉세이 아브라모프는 이러한 묘지 제거 캠페인의 선동자와 주문의 실체가 행정부의 고위 관리 중 하나가 아니겠냐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그는 "대통령은 현재 신중하게 이 문제를 보류하고 있다"(<이또기(결산)>, 2006년 4월 17일자)고 여지를 남겼다.

그가 푸틴 대통령의 의중에 대해 이 같은 생각을 품는 것은 사실 무리는 아니다. 왜냐하면 푸틴 대통령은 수차례 레닌 묘의 철거를 시도했으나 매번 잇따른 정치적 위기로 성공시키지 못한 전 옐친 대통령과 분명 다른 태도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까지 레닌 묘 처리 문제와 관련, 가타부타 언급을 한 적이 한번도 없다. 다만 올해 2월 스페인 언론들과 인터뷰에서 레닌 묘의 운명을 묻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을 뿐이다. "나는 국민들 다수를 계속 짓눌러온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이 곳 정치평론가들의 상당수는 현재 문제해결이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앞서 언급한 러시아역사연구소 보고서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징후들이 포착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두마 부의장,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장, 통합러시아당의 주요 인사들, 기타 수많은 정치인들이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 문제가 그리 간단히, 단시간에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역사에 대한 평가와 보존의 문제를 떠나 러시아 정치의 중심으로 파고들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2008년 대통령 선거라는 커다란 정치 일정을 앞둔 정치적 이해득실 계산은 이 문제의 해법과 그 실행을 제약하는 큰 변수이다. 레닌묘를 비롯하여 크레믈린 성벽 아래 있는 400여 개에 달하는 무덤(유리 가가린, 막심 고리끼의 것도 이들 중에 있다)의 제거를 둘러싼 문제는 단순히 공산주의자와 반공산주의자의 대립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평범한 시민들도 다양한 입장을 갖고 있다. 한 칼럼니스트는 "문서상으로 공산주의의 장례를 치르는 것은 쉽다. 그러나 실제로 무덤을 파내는 것은 매우 골치 아픈 것이고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다"고 반대했다.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원장 유리 오시포프 역시 이렇게 말했다. "역사를 불사르는 것을 용인할 수 없다. 만일 각 세대들이 이전 세대의 결과물들을 제거한다면, 그로부터 아무런 훌륭한 것도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이또기(결산)>, 2006년 4월 17일자)

만일 레닌 묘를 둘러싼 해법이 2008년 대선 이전에 도출된다고 하더라도 그 실행은 대선 이후에나 가능하리라는 관측이 지배적인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러시아의 탈소비에트화 프로그램과 이를 둘러싼 논란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이를 통해 러시아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상징의 제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상징은 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만일 필자에게 결정 권한이 있다면 어떤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상징을 고집하는 쪽도 상징의 제거를 고집하는 쪽 어느 곳에도 찬동하기 어렵다. 그냥 있는 것을 그대로 놔두고 새롭게 길을 가면 어때서. 그러나 붉은 광장을 지나칠 때면 항상 이런저런 생각이 뒤죽박죽되곤 한다. 붉은 광장 입구에는 레닌을 꼭 빼닮은 사람이 관광객을 상대로 호객행위를 하고 있다.

자신과의 기념촬영을 대가로 그는 돈을 번다. 그 사람을 볼 때면 그 곳에서 차라리 죽은 레닌이 사라졌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세상을 뒤흔든 한 혁명가의 모습이 그런 초라한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을 보는 느낌은 유쾌하지 않다.

매주 토요일 점심 무렵에는 일군의 공산주의자들이 레닌 묘를 단체로 참배한다. 그들은 현재 러시아연방공산당을 부르주아지 정당에 가깝다며 비판하는 공산주의자들이다. 그들은 레닌 묘 앞에서 약식 집회를 하고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며 차례차례 레닌을 알현한다.

그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여전히 레닌그라드라고 부르길 고집한다. 그들 앞에서 페테르부르크라고 부르다가 야단을 맞은 기억이 있다. 백발이 성성한 그 신실한 레닌주의자들을 떠올리면 '레닌을 그냥 그대로 그 곳에 두지'하는 생각도 든다.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하고 있는 레닌, 아무튼 그는 모진 운명을 타고 난 것이 분명하다. 무덤에 잠든 뒤에도 좌우될 운명이 남았으니 말이다. 내가 붉은 광장의 레닌 묘를 보며 할 수 있는 일은 주문을 외는 일밖에는 없다. "레닌에게 영원한 안식을!"(최광호 기자)

06. 11.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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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06-11-05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번 꼭 가보고 싶은 공간입니다. 역사가 빠르게 흐르니 어제의 영웅이 오늘은 골치아픔에 되는군요. 한 세대가 과거를 부수려고 하면 모든 왕가의 묘를 파헤쳐야 하나요?

로쟈 2006-11-06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일(11.07)은 10월 혁명 89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레닌과 레닌주의의 운명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보게 됩니다...

Nabi 2006-11-06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광은씨는 최근 귀국해서 다시 사회당의 정책실장으로 복귀했답니다...

로쟈 2006-11-06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시군요(레닌과 무관하지 않으시네요.^^)...
 

조간신문에 실릴 러시아 관련기사 하나를 옮겨놓는다. 모스크바에서는 어제까지 '백만장자 박람회'가 열렸던 모양인데 그에 관한 것이다(러시아의 부자들에 관해서는 언젠가 따로 페이퍼를 올린 적이 있다). 언젠가 루카치는 "최악의 공산주의도 최상의 자본주의보다는 낫다"고 호언한 바 있지만 그 '최악의 공산주의'를 벗어던진 러시아는 간혹 '최악의 자본주의'로 곧장 돌진해가는 듯한 인상을 던져준다. 과연 "최악의 자본주의도 최상의(지상낙원의) 공산주의보다는 낫다"는 걸 입증해주려는 것인지...    

한겨레(06. 11. 01) 갑부 돈냄새에 코막은 ‘레닌들’

4200만원짜리 향수, 17억원짜리 부가티 스포츠카, 19억원짜리 소형 헬리콥터, 235억원짜리 파나마 섬….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30일(현지 시각) 막을 내린 ‘백만장자 박람회’ 품목이다. 영국 일간 <더타임스>는 이 박람회에서 4만명의 러시아 갑부들이 7200억원 어치를 거래했다고 31일 보도했다. 이 화려한 백만장자 박람회 이면에는 러시아의 ‘두 얼굴’이 숨어 있다.

박람회의 주고객은 이른바 ‘올리가르히야’(과두재벌)와 ‘노비예 루스키예’(신흥부자). 지난 91년 옛소련 해체 당시 석유·광산·국유기업 등을 헐값에 사들여 떼돈을 챙긴 엘리트 계층이다. 지난해 3월 발간된 <포브스>를 보면, 러시아에서 약 10억원 이상 현금자산을 보유한 재력가가 8만8천명에 이른다. 한 공산당원은 28일치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기생충 같은 박람회 참가자들을 모두 총으로 쏴버려야 한다”며 “정직하게 돈을 번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적개심을 드러냈다. 러시아의 첫번째 얼굴이다.

백만장자들의 돈 자랑을 뒷받침하는 것은 가파른 경제성장이다. 대외무역의 68%가 석유·가스 무역인 러시아는 고유가를 등에 업고 2000~2005년 연평균 6.8%의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기록했다. 한 패션작가는 “박람회에서 다이아몬드를 걸친 사람들이 몇 년 전까지 화장지를 배급받으려고 줄을 섰던 것을 생각하면 우습다”고 말했다.

가파른 경제성장의 이면에서 고통받는 빈곤층은 러시아의 또다른 얼굴이다. <로이터통신>은 30일 “러시아 인구의 약 20%가 빈곤선 이하에 산다”며 “박람회는 연간 소득으로 5천달러를 버는 대다수 러시아인들의 삶과는 극명하게 달랐다”고 전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이재영 부연구위원(모스크바대 경제학 박사)은 “이번 박람회는 초기 자본주의의 천박한 소비행태이자, 성장하고 있는 러시아 경제의 여유있는 자기과시이기도 하다”고 평가했다.(김순배 기자)

06. 11.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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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01 0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11-01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다시 안 읽어보고 잠시 딴짓을 했더니 오타들이 있었군요(흔한 일이지만).^^ 대학원에 간다고 했던가요? 청출어람, 일취월장하기를!..

기인 2006-11-01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효. 언제 러시아/소련이 공산주의를 하기는 했나요 뭐;; 어쨌든 시급 300원인 저로서는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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