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이기도 한지라 주기적으로 러시아 관련기사들을 모니터링한다. 오늘은 최근 빚어진 러시아와 영국의 외교 갈등에 관한 기사들을 찾아보다가 우연히 눈에 띈 기사를 옮겨놓는다. 외교와는 무관한, 발레 이야기이다. 러시아발레단(발레 뤼스)의 전설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와 작곡가 스트라빈스키와의 인연을 소개하면서 말미엔 최근의 '신정아 파문'을 언급하고 있는 칼럼이다(물론 새로운 인재를 발굴하는 안목은 예술분야에서 더욱 중요할 터이다). 나로선 그냥 러시아 발레사의 한 에피소드 정도를 상기시켜주는 자료로 스크랩해놓는다. 몇 가지 이미지들과 함께.

중앙일보(07. 07. 28) 디아길레프와 스트라빈스키, 그리고 신정아

20세기 예술사를 얘기할 때 러시아발레단의 단장이었던 세르게이 디아길레프(1872~1929)를 빼놓을 수 없다. 1909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20년에 걸쳐 러시아발레단을 이끌며 전 세계적 센세이션을 일으킨 디아길레프. 

그는 독단에 가까울 만큼의 추진력을 갖고 일에 몰두해 ‘독재자’로 불렸다. 파격에 가까운 인선 방식이 그런 악명을 낳게 했다. 명성이 채 확립되지도 않은 신진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을 발굴하고 일을 맡겼다. 모험에 가까운 인재 기용은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지만, 결국에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파격적인 인사는 작곡가 이고리 스트라빈스키(1882~1971)를 채용한 일일 것이다(*사진은 디아길레프와 스트라빈스키).

친구의 아버지인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문하생이었던 스트라빈스키는 정작 대학에서는 법학을 전공했던 무명의 젊은이였다. 디아길레프는 그의 관현악 작품 ‘꽃불’을 듣고 단번에 발레작품 ‘불새’의 작곡을 맡겼다. 원래 기성 작곡가인 리아도프에게 작곡이 의뢰돼 있던 터라 단원들의 반발은 극심했다. 하지만 디아길레프는 스트라빈스키의 재능에 대한 확신 때문에 계약을 철회하지 않았다.



“기억해 두는 게 좋을 거야! 이 남자는 곧 유명해질 테니까.” 디아길레프가 스트라빈스키를 두고 이렇게 말하자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비웃었다. 그러나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불새’는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스트라빈스키는 유럽 전역에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이어 디아길레프와의 재계약을 통해 완성된 ‘페트루슈카’(1911년)와 ‘봄의 제전’(1913년)으로 스트라빈스키는 31세에 일약 거장으로 떠올랐다.(*'봄의 제전' 관련영상은 http://www.youtube.com/watch?v=t8lY6gBqHmM 참조)

바츨라프 니진스키를 발탁해 20세기 최고의 발레리노이자 안무가로 만든 것도 그였다. 디아길레프의 동성 연인이기도 했던 니진스키는 ‘봄의 제전’에서 스트라빈스키 음악에 못지않은 혁신적인 안무를 보여주었다. 자연히 디아길레프의 주위에는 재능 있는 예술가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아래 사진은 스트라빈스키와 니진스키).

프랑스를 대표하는 지성이며 멀티예술가였던 장 콕토도 러시아발레단을 위해 대본을 썼다. 장 콕토의 권유로 그의 친구인 파블로 피카소가 후안 미로와 함께 의상과 무대장치를 맡았다. 라벨·드뷔시·프로코피예프도 발레곡 작곡에 참여했다. 이렇게 해서 러시아발레단은 몰락 위기의 서유럽 발레를 되살린 구세주가 됐다.



디아길레프는 1929년에 급사하고 러시아발레단도 해체됐지만, 스트라빈스키는 현대음악의 최고 거장으로 남아 노년까지 계속 창작을 했다. 71년 89세로 사망한 그는 베네치아에서 디아길레프 근처에 묻혔다. 러시아발레단의 멤버들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영국과 미국의 발레를 키워낸 주역이 됐다.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신정아씨의 가짜 예일대 박사 소동에 이어 각계 인사들의 가짜 학력이 드러나면서 곳곳에서 파문이 일고 있다. 물론 최대의 피해자는 당사자인 신정아씨 자신이다. 학력 위조가 드러나면서 미술계에서 쏟아부었던 10년간의 노력과 성취도 한순간에 물거품이 됐기 때문이다(*특이한 논리이다. 같은 논리라면 최근 불거진 병역파문의 최대 피해자는 싸이이며 대선 후보검증의 최대 피해자는 이명박이겠다. 반대로 별걸 다 들추는 이들은 가해자이고). 신뢰라는 사회적 가치를 파괴한 그의 행위는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하지만 한국 미술계, 아니 한국 사회에도 가혹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말로는 실력을 중시한다면서도 간판과 연고를 따지는 풍조에 대한 왜곡된 대응으로 신씨의 학력위조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유럽 예술계를 좌지우지했던 디아길레프는 발레단을 위해 말 그대로 ‘올인’했다. 그는 작품의 주제를 직접 결정했다. 각 분야 담당자를 직접 선정하고 작품이 통일성을 갖도록 최선을 다했다. 높은 직위를 즐기면서 일은 적당히 하는 허위의식을 철저히 경계했다. 그가 베네치아에서 사망했을 때 은행 잔액에는 돈이 한 푼도 없었고, 가진 것이라고는 코트 두 벌뿐이었다.(*이미지는 <디아길레프와 그의 시대>(2001)란 책의 표지) 

한국 사회와 예술계에도 돈과 간판보다는 오직 실력 제일주의로 예술가의 자존심을 지켰던 디아길레프식의 열정이 살아나야 한다. 그래야 ‘신정아 쇼크’에서 벗어날 수 있다. ‘천재를 발견하는 천재’로 불렸던 디아길레프의 선입견 없는 시각이 절실해지는 때이다.(이하경 문화·스포츠 부문 에디터)

07. 0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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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7-07-29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그렇겠네요. 러시아어 발음으론 '쟈길레프'입니다...

로렌초의시종 2007-07-29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트라빈스키도 젊었을 때는 꽤 미남이었군요~~!!^^ 그가 베니스에 묻혔단 얘길 듣고 왜 그곳이었을지가 궁금했답니다.ㅋㅋ

로쟈 2007-07-29 23:54   좋아요 0 | URL
이목구비가 똑바른 걸 기준으로 하면 그렇겠습니다...

드팀전 2007-07-29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옛날에 기분 꿀꿀할때 소리 크게 틀어 놓고 듣던 음악이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이었어요..^^ 원시적 쿵쿵거림은 헤비메탈 저리가라죠.^^

로쟈 2007-07-30 00:31   좋아요 0 | URL
말씀 덕분에 관련영상을 본문에 링크해놓았습니다.^^

드팀전 2007-07-30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링크 연결해서 봤는데...로쟈님 확실하시네요.재미있는 화면입니다..스트라빈스키 인터뷰 부터 자막을 이용한 곡 해설..그리고 무용까지..유투브의 힘이 저런거구만요.전 첨봤어요.^^
덕분에 피나 바우쉬 프로덕션의 영상물까지 볼 수 있게 되었군요..
피아 바위쉬 영상물도 함께 링크해주시면 어땟을까..야하다고 뭐라할라나..^^

로쟈 2007-07-30 19:48   좋아요 0 | URL
피나 바우쉬 공연은 관심있으신 분들은 바로 클릭해서 보시겠지요 뭐...

테렌티우스 2007-07-30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등학교 시절 국립극장에서 페트루슈카보고 나오던 기억이 새롭네요. 그때 디아겔레프랑 니진스키 책 사서 읽으며(어느 출판사였나? 청하였나?) 혼자 환상에 빠져 있던 생각이 불현듯 난다는 ...^^
 

찾는 책이 눈에 띄지 않아(방안에 있는 책들이 거의 포화상태에 도달하고 있다) 해야 할일을 미뤄두고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러시아 관련서 두 권에 관한 기사를 옮겨놓는다. 한 권은 전설적인 무기상 자하로프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한권은 러시아 혁명기의 테러리스트 사빈코프의 자전적 소설이다... 

문화일보(07. 07. 20) 전설의 무기상 자하로프의 생애

많은 사람들이 책을 훑는 버릇 중의 하나는 책 속의 도판부터 보는 것이다. 20세기 초 전설의 무기상으로 알려진 바실 자하로프의 생애와 시대를 다룬 이 책에도 몇 컷의 사진이 있다. 수염을 기른, 20세기 초반의 전형적인 인물 사진에서 다른 인물과 구별되는 점은 차갑게 빛나는 눈빛이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한 것도, ‘죽음의 상인’이란 제목 못지않게 바실 자하로프의 눈빛에 흥미를 느껴서였다.



10대 시절 매음굴의 문지기 등으로 일하며, 사람 심리 읽기를 배운 그가 무기상으로, 가상적국인 그리스와 터키에 잠수함을 판매한 것은 1877년이었다. 그가 무기를 파는 방식은 이랬다. 먼저 그리스에 가서 터키의 위협을 과장하며 잠수함 한 척을 판매한 뒤, 이번에는 터키에 가서 그리스의 위협을 강조하며 두 척을 팔았다. 그리고 계약이 성사되자 이번에는 러시아에 네 척을 팔았다.

“터키는 두 척의 잠수함을 구입했습니다. 전쟁이 일어날 경우, 터키 해군은 이 잠수함 덕분에 흑해에서 귀국의 함정을 위협하고, 공격할 수 있습니다. 터키 같은 약소국은 두 척이면 충분하지만, 강대국인 귀국의 안보를 위해서는 네 척은 필요할 것입니다.”

바실 자하로프가 러시아에 잠수함 네 척을 팔기 위해 보낸 편지다. 그의 정세 분석은 예리하고도 정확했지만, 세일즈 법칙은 간단했다. 인간의 약점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예리한 정세분석에 더해 불안을 부추기는 그의 기법은 성공률이 매우 높았다. 1894년에는 영국의 최대 무기제조회사로 자리를 옮겨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전함 4척, 순양함 3척, 잠수함 54척, 항공기 5500대, 중포 2328문을 팔아치우는 괴력을 발휘한다.

그가 개입한 전쟁은 제1차 세계대전뿐만이 아니었다. 1890년대 남아프리카에서 벌어진 보어전쟁을 비롯해 러일전쟁, 발칸전쟁 등의 교전국에도 무기를 공급했다. 1차 대전 뒤 그는 그리스 터키 전쟁을 다시 일으켜 전쟁 경기를 부추기려 했으나 실패하고 은퇴, 몬테카를로에서 도박장을 운영하다 1936년 사망했다. 그는 전쟁 무기상으로서뿐만 아니라, 장 조레스와 로자 룩셈부르크 등 평화주의자 살해사건의 유력한 배후로도 지목된다.

‘죽음의 슈퍼 세일즈맨’이라 불리며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까지 활약한 바실 자하로프의 생애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고 한다. 책은 베일에 싸인 바실 자하로프의 생애를 복원하기 위해 방대한 취재를 바탕으로, 퍼즐 맞추기를 계속해 나간다. 이런 과정에 점차 뚜렷해지는 그의 모습과 함께 드러나는 것은 역시 베일에 가려있는 동시대의 역사다. 그가 활약한 지 100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각종의 명분으로 계속되는 시대, 지금은 어떤 뛰어난 상인이 배후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김종락기자)

연합신문(07. 07. 18) 어느 테러리스트의 테러 일기

"나는 사는 것이 지겹다. 하루가, 일주일이, 일년이 단조롭게 늘어진다. 어제는 오늘과 같고, 오늘은 내일과 같다. 똑같은 우윳빛 안개이고, 똑같은 잿빛 평일이다. 사랑도 똑같고, 죽음도 똑같다. 삶은 좁은 길 같다."(191쪽)



20세기 초 러시아 혁명 직전 테러리스트로 활동했던 소설가 보리스 사빈코프(1879-1925)의 자전소설 '창백한 말'은 소설이라기보다 한 개인의 내면적 기록이자, 사실에 대한 기록으로 읽히는 작품이다. 사빈코프가 테러리스트로 활동했던 1904-1905년은 러시아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는 뿌리부터 흔들렸고, 로마노프 왕조의 전제정치에 반발한 노동자들은 곳곳에서 궐기했다.

당시 사회혁명당원으로 활동했던 사빈코프는 1904년 러시아 내무장관이던 바체슬라프 플레베를 암살하고 1905년에는 모스크바 통치자였던 세르게이 알렉산드르비치 대공을 살해했다. '창백한 말'의 무대 역시 러시아 혁명 직전의 모스크바다. 작가는 사회혁명당에서 활동하는 조지 오브라이언이라는 테러리스트의 세 차례에 걸친 총독 테러 과정을 통해 자신이 저질렀던 테러의 이유와 목적, 그리고 테러의 정당성을 반성적으로 성찰한다.

주인공은 "억압받는 민중을 위해" 테러를 선택했다. 그러나 그의 뇌는 "왜 테러의 길을 가고 있는지 모른다"고 중얼거린다. 총독에 대한 1차 테러시도가 무위로 돌아가자 광장에 운집한 사람들을 보며 "전부 폭탄을 먹여줘야해"라며 알 수 없는 분노를 터트리기도 한다. 그러나 주인공이 끝까지 기대려 했던 '테러의 정당성'은 질투심 끝에 연인의 남편을 살해하면서 산산조각나고 만다. 그것은 전혀 "명분 없는" 테러였다. 이윽고 그는 장관을 테러하라는 상부 지시에 이렇게 반문한다. "어째서 살인을 합니까?"



또 다른 장편 '검은 말'은 러시아 내전 당시 백군, 녹색군 등으로 신분을 바꿔가며 적극적인 반 볼셰비키 투쟁을 전개했던 시기를 담은 작가의 마지막 유작이다. 1917년 혁명 이후 조국으로 돌아온 작가는 케렌스키 임시정부 하에서 국방차관까지 지냈다. 그러나 정치적 이유로 제명되자 러시아 장교들을 이끌고 볼셰비키 정부에 대항했다. 1924년 체포돼 이듬해 감옥에서 삶을 마감했다.

"내가 이 땅에 발 딛고 서 있는 한 볼셰비키와 끝까지 투쟁하리라"고 선언했던 작가의 볼셰비키 정부와의 투쟁사가 소설 형식을 빌려 자세히 담겨있다.(이준삼 기자)

07. 07. 21-22.

P.S. '보리스 사빈코프'란 이름이 생소하면서도 왠지 낯설지 않다는 느낌을 주는데, 내가 스쳐지나갔던 책들의 저자이어서인 듯하다. 위의 이미지는 '한 테러리스트의 회고록'이란 제목의 책으로 '나의 20세기'란 시리즈의 한 권이다(모스크바에서 내가 탐내던 시리즈였다). 그리고 그의 두 자전적 소설은 내가 러시아에 있던 2004년에 <죽음이라는 이름의 기사>로 영화화되었다(내가 소장하고 있는 영화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Савинков Б. - Всадник по имени Смерть: Конь бледный; Конь вороно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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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디너라면 알겠지만 페이퍼를 다 마무리하고 등록을 누르자 로그인 화면이 뜨는 것만큼 황당한 일도 없다. '영어 광풍'에 관한 페이퍼와 함께 이 '시베리아'에 관한 페이퍼가 어제 연이어 그렇게 골탕을 먹게 했는데(마음 같아선 '시베리아 유형'을 보내고 싶다!), 홧김에 방치해둘까 하다가 간단히 마무리한다.

시베리아에 관한 책들이 종종 출간된다. 바이칼호 관광을 다녀온 분들이 주변에 드물지 않은 것처럼 시베리아나 시베리아 횡단열차 또한 아주 먼나라 얘기만은 아니게 됐다. 아, 올렉 멘쉬코프 주연의 <러브 오브 시베리아>(원제는 <시베리아의 이발사>) 같은 영화도 대번에 떠올려 볼 수 있겠다. 왠지 친근한 자작나무숲이 지평선을 가득 채우고 있는 동토의 땅. 유형지. 거기에 요즘엔 석유, 가스 매장지란 이미지가 들러붙은 땅 시베리아에 대한 책이 한권 더 출간됐는데, 이번엔 러시아 정치사 전공자의 저작이라 좀더 깊이 있는 내용을 담고 있을 거라고 생각된다. 저자 인터뷰 기사를 읽어둔다.   

경향신문(07. 07. 14) [이사람]“문화·야생의 인프라 넘쳐납니다”

김창진 성공회대 교수는 2000년부터 매년 한번씩 시베리아에 다녀왔다. 총 7번이다. 올해에도 지인들과 곧 시베리아 여행을 떠날 예정이다. 매년 찾을 만큼 시베리아는 그에게 매력적이다. 그래서 책도 쓰게 됐다. ‘시베리아 예찬’(이룸). 하지만 단순한 여행서는 아니다. “시베리아를 소재로 근대 자본주의 문명을 비판적으로 보고자 했다. 시베리아는 자본주의 문명의 대안적 공간이자 상징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김교수가 러시아, 그 속의 시베리아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어쩌면 88서울올림픽 때문이다. “냉전으로 80년, 84년 올림픽이 모두 반쪽으로 치러졌습니다. 88올림픽은 오랜만에 전 세계가 참여했죠. 북한과 함께 적대국가로 여겨졌던 (당시) 소련의 선수들이 서울에 와 경기를 하면서 소련에 대한 관심이 크게 늘었습니다.” 이런 분위기가 이어져 90년 한국과 소련은 수교했다.

일반인은 방문조차 할 수 없었던 소련 사회에도 틈이 생기면서 모스크바대학 유학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한국정치(현대사)로 국내에서 석사를 마치고 영국 유학을 생각하고 있었던 그에게 새로운 길이 열린 것이다. “학생운동을 하면서 사회주의에 대해 관심이 많았습니다. 인류 최초의 사회주의 체제라고 자부한 소련이 왜 붕괴하고 있는지 구체적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학문적 관심으로 소련을 택했고 91년 모스크바로 갔다. 하지만 그 곳에서 기대하지도 않았던 것에 매료당하게 됐다. 러시아문화였다. “80년대 초반 학생운동을 하면서 문화예술을 즐기는 건 용납이 안됐죠. 대학 때 세종문화회관 한번 가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모스크바, 페테르부르크 등 러시아 곳곳에서는 고급문화를 일상적으로 즐기고 있었어요. 모스크바 볼쇼이극장에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발레공연을 봤습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공연을 우리 돈 단돈 몇 백 원으로 볼 수 있었어요.” 모든 인민이 예술을 저렴하게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사회주의 이념 정책으로 예술은 생활 곳곳에 넘쳐났다. 그의 딸이 매일 보던 TV 만화영화도 “그렇게 서정적이고 자연친화적일 수가 없었다”고 회상했다.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것이 96년. 시베리아에 처음 간 것은 한·소 수교 10주년을 기념해 간 2000년도의 연구여행 때였다. 유학 당시에는 돈과 시간이 없어서 가지 못했다고 한다. 유학 시절에는 러시아 문화에 매료당했다면, 시베리아 여행에서는 자연에 감탄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이어지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가면서 중간중간에 다섯 개 도시에서 내렸습니다. 공장, 농장 등에 들러 사회주의 체제에서 자본주의 체제로 변해가는 모습을 현장조사했어요. 17박18일 동안 이어진 일정에서 바이칼호수 등 시베리아의 아름다움에 눈뜨게 됐습니다.”

그가 꼽는 장소는 알혼섬. “바이칼호수의 진면목을 보려면 호수 안에 있는 알혼섬에 가 봐야 합니다. 정답고 아름다운 풀밭, 바다 같은 호수, 원주민의 성소. 그 속에 있으면 도시생활의 각박함에서 벗어나 자연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자기를 돌아볼 수 있고, 우주에 대해 성찰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 부족한 문화 인프라, 자연친화적·영적인 환경 등을 갖고 있기에 러시아, 또 시베리아에서 배울 것이 많다고 김교수는 강조한다. 책의 부제가 ‘야생의 숲, 문명의 영혼’인 이유다. 그는 “러시아라고 하면 ‘마피아’나 ‘가난한 나라’를 떠올리는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고 지적한다. 책은 시베리아의 자연·사람·문학·사상에 대해 말하고 있다.(임영주 기자)

07. 07. 14.

P.S. 시베리아 하면 또 떠오로는 책은 블라디미르 아르세니에프의 <데르수 우잘라>(갈라파고스, 2005)이다(관련 페이퍼는 http://blog.aladin.co.kr/mramor/897491). 사둔 지는 꽤 됐지만 읽을 짬을 못내고 있는 책인데 당장 시베리아로 '피서'를 갈 수 있는 형편도 아닌 김에 관련서들과 함께 그냥 미친 척하고 한번 읽어볼까 하는 생각도 든다. 시베리아가 좀더 실감나지 않을까 싶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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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으로는 미처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던 기사들을 지면으로 읽으면 챙기게 되곤 한다. 지난 주말 신문을 읽다가 '발견'한 건 '세계 최고의 소총'이라고 할 만한 AK-47과 그 발명자 칼라시니코프에 관한 것이다. 내용이야 옮겨놓은 두 건의 기사를 죽 훑어보시면 된다. 기사에도 적혀 있지만, AK-47이 '47년산 칼라시니코프 자동소총'이란 뜻이니까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애용된다는 이 '대량살상무기'가 계속 애용되는 한 칼라시니코프의 이름도 길이 남을 만하다. 푸틴의 언급대로 '러시의 자랑'인지는 좀 헷갈리지만('칼라시니코프'는 철자대로 표기하자면 '칼라슈니코프'나 '칼라쉬니코프'가 더 자연스러운데, 개정된 외국어 표기안에 따라 '칼라시니코프'라고 통일된 듯하다).

 

경향신문(07. 07. 07) [여적]칼라시니코프

2차 세계대전 중인 1941년 소련군 탱크부대 하사관 미하일 칼라시니코프는 독일과의 전투에서 심한 부상을 입었다. 병상에서 그는 자동화기에 대한 구상을 시작했다. 소련군이 독일에 밀린 것은 자동화기가 열악했기 때문이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1947년 그는 마침내 뛰어난 성능의 소총을 개발했다. 모델명은 AK47이었다. ‘칼라시니코프가 1947년 개발한 아프토마트(자동소총)’란 뜻이다.

이 때부터 칼라시니코프 소총은 숱한 전쟁과 분쟁·내전지역을 누비며 전설을 만들어 나간다. AK47의 최대 강점은 단순과 견고다. 따라서 고장이 적고 분해 조립과 조작이 쉬웠다. 제작비도 쌌다. 미국이 1957년 개발한 M16에 비해 길이가 짧아 휴대도 간편했다. 물에 젖거나 모래가 들어가도 큰 문제가 없었다. 베트남전쟁 당시 늪 속에 파묻혀 있는 녹슨 AK47을 발사해 보니 아무 이상이 없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그래서 베트콩한테서 노획한 AK47이 미군들에게 M16보다 인기가 높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장점 덕분에 칼라시니코프 소총은 전세계로 팔려 나갔다. 지금까지 1억정 이상이 유통된 것으로 추산된다. AK47에 이어 1974년 개발한 AK74, AK101∼AK105 시리즈 등 자매모델들이 속속 나왔다. 아프리카 내전 지역 10대 초반 소년병의 어깨에 걸린 총도 십중팔구 칼라시니코프 모델이다. 이렇게 AK가 널리 유통되는 이유는 싼 가격이다. 제3세계에서 유통되는 중고 AK47은 ‘닭 한마리 가격’이란 말도 있다.

칼라시니코프 소총은 어떤 무기보다 많은 사람들을 살상하고 있다. 매년 이 총으로 죽는 사람은 25만명으로 추산된다. 그렇다면 진짜 대량살상무기(WMD)로 불릴 만도 하다. 작년 말 워싱턴포스트는 “이라크에서 미국이 애타게 찾던 WMD가 나왔다. 바로 낡은 AK47이다”는 칼럼을 실었다. 상당수 미군이 AK47에 희생되는 현실을 비꼰 것이다.

AK47이 5일로 개발 60주년을 맞았다. 푸틴 대통령은 AK47이 러시아의 창조적 천재성의 상징이라고 치하했다. 하지만 올해 87살인 칼라시니코프 자신은 어떤 감회일까. 필시 침략군을 물리치겠다는 애국심에서 개발한 무기가 강도와 테러리스트, 소년병의 손에 들려진 현실을 보고 후회막급일 것 같다.(김철웅 논설위원)

AK-47 소총을 만든 미하일 칼라시니코프가 6일 러시아 모스크바의 러시아 공군 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소총 발명 60돌 기념식’에 참석해 총을 들어 보이고 있다. AP 연합

한겨레(07. 07. 07) 옛소련 자동소총 ‘AK-47’ 개발 60년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옛 소련군 탱크부대 하사관으로 나치 독일과 싸우다 부상당한 미하일 칼라시니코프(21)는 요양중 자동소총 개발에 몰두했다. ‘나치 침략에 맞서 조국을 지키겠다’는 사명감에 불탄 칼라시니코프는 마침내 자동소총 개발에 성공했고, 이 소총은 소련군 개인화기로 채택됐다. 이 소총이 AK-47이다. AK-47의 A는 자동소총, K는 개발자 칼라시니코프, 47은 소총 개발이 완료돼 소련군 개인화기로 채택된 해를 뜻한다.

AK-47는 전세계 소총 시장의 80%를 차지하며 전세계에 1억정이 넘게 돌아다닌다. 알카에다 지도자 오사마 빈라덴은 메시지를 담은 비디오를 녹화할 때 옆에 AK-47을 세워둔다. 아프리카 모잠비크의 국기에는 국방을 상징하는 AK-47이 들어 있다.

AK-47이 전세계 분쟁지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무기가 된 비결은 단순함과 튼튼함, 높은 명중률이다. 구조가 단순해서 사용하기 쉽고 싼값에 대량생산할 수 있다. 분쟁지에서 중고 AK-47은 ‘닭 한마리 값’에 유통되며, 미국돈 20~30달러에 암거래된다. 워낙 튼튼해서 정글, 사막, 눈, 비 등 악조건에도 좀체로 고장나지 않았다.

<워싱턴포스트>는 지난해 11월26일 “이라크에서 미국이 그토록 찾던 대량살상무기(WMD)가 나왔다. 미군 병사의 목숨을 앗아간 WMD는 낡은 AK-47 소총이었다.”고 보도했다. 이 총에 맞아 전세계에서 해마다 25만명이 숨지는 것으로 추산된다.

칼라시니코프는 야전병원에 후송된 소련군 병사들이 “우리도 독일군 기관단총 MP40처럼 좋은 총이 있었으면…”하는 한탄을 듣고 소총 개발에 나섰다고 회고한 바 있다. 그러나 그는 지난해 6월 국제 총기확산방지회의를 앞두고 “조국을 지키기 위해 만든 내 총을 갱과 테러리스트가 쥐고 있는 텔레비전 화면을 보면 가슴 아프다”며 테러의 상징처럼 된 AK-47에 대한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5일로 AK-47 완제품이 세상에 나온지 60년이 됐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이날 열린 AK-47 개발 60주년 기념식에서 “유명한 칼라시니코프 소총은 대담한 발명 정신 뿐아니라 우리 국민들의 재능, 창조적 천재성의 상징이 됐다”고 치하했다. AK-47이 식민지해방전쟁에도, 민간인에 대한 테러에도 사용되긴 했지만, 세계에서 으뜸가는 소총이며 러시아의 힘과 안보의 상징이란 점은 분명하다는 자부심의 표현이다.(권혁철 기자)

07. 07. 08 - 09.



P.S. 칼라시니코프란 이름과 관련된 건 '소총' 외에 '보드카'도 있다(알콜 도수가 41%란다). 러시아에서 여러 주종을 섭렵해본 건 아니어서 보드카 칼라시니코프가 얼마나 고급인지, 또 얼마나 애음되는지 모르겠지만 이 '러시아의 영웅'과 보드카는 이미지가 잘 들어맞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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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07-08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통력과 살상력은 뛰어난 반면 반동과 소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소총이라고
하더군요.이 총과 반대개념에 있는 소총은 M16보다는 H&K사에서 나온 자동소총
들이라고 생각됩니다..테러리스트들의 피를 먹고 자랐다라고 하더군요..

로쟈 2007-07-09 17:44   좋아요 0 | URL
그런 반동과 소음에도 가장 애용된다고 하니까 '명품'이긴 한가 봅니다...

잉크냄새 2007-07-09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이너마이트를 개발한 노벨과 비슷한 심정인가 봅니다.

로쟈 2007-07-09 17:45   좋아요 0 | URL
보드카를 마실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죠.
 

오랜만에 러시아 관련 기사를 옮겨놓는다. 현재 과테말라에서는 동계올림픽 개최지 선정을 놓고 러시아의 소치와 한국의 평창이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와 함께 한판 승부를 벌이고 있고, 러시아는 푸틴 대통령까지 현지에 가세하여 대대적인 유치 공세를 거들고 있다(러시아의 대표적인 여름 휴양지 소치의 최대 약점은 기반시설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유치가 결정되면 다 만들어놓겠다는 게 '러시아식' 계산이다).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다. 과테말라로 향하기 전 푸틴의 마지막 일정은 부시가(家)의 별장에서 농어 낚시를 한 것이었다(그가 동계올림픽도 낚을 수 있을까?). 그의 거침없는 행보는 한반도 주변 정세와도 무관하지 않기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2일(현지시간) 美 메인주 케너벙크포트의 부시 가문 별장 부근에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낚시를 하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농어를 낚고 기뻐하고 있다.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고, 왼쪽부터 부시 전 대통령, 낚시 가이드인 빌리 부시 그리고 현 대통령 부시다. 푸틴 대통령은 "잡은 농어를 다시 바다에 놓아주자"고 제의해 세계 최강대국 대통령의 전 ·현직 대통령인 부시 부자와 푸틴이 함께 잡은 농어는 '자유의 몸'이 됐다. (AP) 

한국일보(07. 07. 04) 러시아, 품격의 페레스트로이카

푸친 러시아 대통령의 최근 행보가 그야말로 거침없다. 지난달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세계적 기업의 CEO 등 6,000명의 기업인들을 초청해 개최한 포럼에서 새로운 국제금융무역기구의 창설을 역설하며 서구 중심의 국제경제질서 재편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또 미국의 동유럽 미사일방어체제 구축에 대해 ‘나치의 제3세계’에 비유하며 맹비판하는 등 미국과의 대립각 세우기에도 한창이다. ‘강한 러시아’를 되찾겠다는 취임 당시의 공언대로 미국과 서구를 향해 당당하게 큰 소리를 치며 보폭을 넓히고 있는 것이다.

여기엔 소비에트 붕괴 후 오랜 경제 사회적 혼돈 속에서 잃어버렸던 러시아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미국과 서구 중심의 패권에서 벗어나 새로운 국제질서의 주도권을 잡겠다는 야심찬 포부가 깔려있다. 이는 곧 러시아의 대외정책이나 국가이미지 제고 전략과도 맞닿아 있다. 무엇보다 러시아의 초고속 경제성장이 이 같은 자신감 넘치는 행보의 든든한 받침대다.

고유가 상황이 지속되면서 막대한 석유 수출로 러시아 경제는 최근 몇 년간 6~7%의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또 외환보유액도 3,000억달러가 넘어서며 ‘오일머니’가 넘쳐나고 있고 2000년 1,778달러에 불과했던 1인당 국민소득도 지난해 7,000달러 수준으로 올랐다. 세르게이 이바노프 러시아 부총리도 최근 “러시아가 2020년까지 세계5위 경제국으로 부상할 것”이라며 ‘경제대국로서의 러시아 부활’을 알리는데 열을 올리고 있다.

■ 전방위적 러시아 알리기 총력
경제 회복에 따른 자신감으로 국제무대에서 발언권을 높여가는 러시아 정부는 국가이미지 제고를 위해서도 총력을 기울이는 중이다. 그 중추 기관이 바로 ‘러시아 국제 과학문화 교류협력 센터’다. 1925년 설립돼 여러 조직체계를 거친 후 2002년 러시아 외교부 산하 기관으로 재편된 이 센터는 37개국에 설치된 43개의 센터 지부와 20여개국에 파견된 직원 등을 통해 현대 러시아의 이미지를 시시각각으로 전파하는 전진기지다.

당장의 러시아 국내외 정책을 홍보할 뿐만 아니라, 각종 문화 행사를 통해 러시아의 문화적 자산을 전파하고 러시아어를 보급하는 등 문화 보급진지의 역할도 맡고 있다. 영국의 브리티시 카운슬이나 독일의 괴테 인스티튜트가 장기적인 문화교류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데 반해 이곳은 정책 홍보 및 경제협력 지원까지 아울러 담당하는, 그야말로 전방위적인 국가홍보 및 문화ㆍ경제ㆍ과학 교류 기관이다.

센터는 최근 러시아 주변 국가와의 교류 협력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데, 지난해 중국의 각 도시에서 대규모의 ‘러시아의 해’ 행사를 개최해 러시아 알리기에 대대적으로 나섰다. 1년 동안 영화제, 미술전시회, 학교간 교류행사 등을 열며 문화ㆍ교육ㆍ경제ㆍ과학 분야에서 무려 1,500여개의 이벤트를 개최했다. 이를 통해 중국 신문이나 TV보도에서 러시아 관련 기사가 15배 이상 증가했다고 한다.

올해는 러시아에서 ‘중국의 해’ 행사도 열리고 있는데, 센터는 향후 2~3년 내에 인도 등 12개국에서 이와 비슷한 행사를 개최할 계획이다. 특히 러시아 정부는 올해를 ‘러시아어의 해’로 정해 러시아어 보급에도 힘을 쏟고 있다. 러시아어는 주로 옛 소비에트 연방에 속했던 독립국가연합(CIS) 지역와 동유럽 등에서 1억7,000만명이 사용하는 세계 4번째 언어. 러시아어가 소비에트의 몰락과 함께 한동안 쇠퇴했지만, 러시아 정부가 올해 페스티벌, 세미나, 전시회, 언어 연수 등을 실시하며 다시 본격적으로 러시아어 위상 강화에 팔을 걷어부치고 있는 것이다.

■ 새로운 국제질서 재편을 꿈꾸는 러시아의 발걸음
이 같은 대대적인 국제 교류 협력 및 국가 홍보, 러시아어 강화 등의 작업은 결국 CIS, 동유럽 및 아시아 지역에서 러시아의 주도권을 확고히 다지겠다는 대외정책의 연장 선인 셈이다. 실제 푸틴 대통령은 지난달말에 열린 흑해경제협력기구 정상회의에서 “흑해연안과 발칸반도 지역의 구심점으로 복귀하겠다”고 천명하는 등 이들 지역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국제기구나 경제기구의 창설을 잇따라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러시아의 이 같은 행보에 대해 새로운 패권국가의 부활을 우려하는 주변 국가의 반발이 터져나오는 등 아직은 진행 초기단계다. 새로운 국제질서 재편을 꿈꾸는 러시아의 발걸음이 성공하느냐의 여부는 러시아의 새로운 국가 이미지 구축 작업의 성과와도 궤를 같이 할 것으로 보인다.(모스크바=송용창 기자) 

07. 07. 03.

P.S. 러시아의 인터넷서점 오존을 검색해보니 푸틴 관련서가 현재 139종이 나와 있다(중복 포함). 가장 많이 팔린 것으로 돼 있는 책은 아래의 글모음집인데, <우리의 밝은 미래, 혹은 푸틴 만세>(2004)이다. 그에 대한 비판 세력들도 없진 않지만 러시아는 아직은 애국주의라는 '대세'를 따르는 듯하다... 

Наше светлое будущее, или Путин навсегда

P.S.2. 우리로서는 유감스런 일이지만, 결국 소치가 동계올림픽 후보지로 선정됐다. 여하튼 푸틴이 또 하나 낚아올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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