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강의 때문에 신촌에 나갔다가 홍익문고에 들렀는데, 메모를 해두지 않아서 미처 구하지 못한 책이 있다. 하영식의 <얼음의 땅 뜨거운 기억>(레디앙, 2010)이다. 제목에서 연상되는지 모르겠지만, 저자의 시베리아 기행기다. 무려 일곱 차례나 시베리아를 찾았다고 한다. 나도 언젠가는 한번 가보고 싶지만, 현재로선 독서 경험만으로도 더위를 얼마간 덜어보고 싶다(오늘은 태풍이 지나간다고 하니 좀 시원하려나?). 인터뷰기사를 옮겨놓는다.    

  

국민일보(10. 08. 27) “시베리아 7차례 여행하며 찾아낸 키워드는 자유”… ‘얼음의 땅 뜨거운 기억’ 펴낸 하영식씨 

시베리아로 추방됐던 러시아 정치범들은 종종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예르마크! 왜 시베리아를 정복해서 우리를 이렇게 힘들게 하느냐.” 예르마크는 16세기 시베리아 왕국을 정복한 해적 출신 러시아 장군이다. 시베리아 정복 직후 시작된 죄수들에 대한 유형 제도는 20세기 소비에트 혁명이 성공할 때까지 잔존했다.

‘남미 인권 기행’의 저자 하영식(45·사진)이 이번에는 시베리아 이야기 ‘얼음의 땅 뜨거운 기억’(레디앙)을 펴냈다. 겨울이면 영하 50도까지 떨어지는 시베리아의 ‘뜨거운 역사’를 기행문 형식으로 담아냈다.

“러시아를 여행하며 학자들을 굉장히 많이 만났어요. 하지만 시베리아나 데카브리스트(러시아 최초로 근대적 혁명을 꾀한 자유주의자들)의 역사가 별로 알려진 게 없어 역사기행 형식으로 쉽게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인들에게는 추위와 도스토예프스키 정도밖에 떠올려지는 게 없는 곳이지만, 러시아인에게 시베리아는 혹한의 압제에 맞선 투쟁가들의 삶이 가득한 역사의 현장 그 자체다.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 파스테르나크가 펴낸 불멸의 문학도 시베리아라는 척박한 땅 없이는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저자가 시베리아를 7차례 여행하며 찾아낸 키워드는 ‘자유’. 특히 19세기 러시아의 급진적 엘리트였던 데카브리스트들이 시베리아에 남긴 유산에 관한 서술이 눈길을 붙잡는다. 데카브리스트들의 주체는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 당시 러시아군의 젊은 장교들이다. 이들은 프랑스군을 격퇴하고 파리까지 추격하는 과정에서 혁명을 거친 근대 유럽을 보았고 자유를 알았다. 그때껏 농노가 전 국민의 90% 정도를 차지하는 러시아 사회만 보던 이들에게는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대개가 귀족 출신으로서 가만히만 있으면 기득권을 움켜쥐고 살아갈 수 있었던 이들은 1825년 ‘위로부터의 혁명’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차르 니콜라이 1세는 이들 중 다섯 명을 처형하고 121명을 시베리아로 추방했다. 저자는 “기득권을 포기하고 자유를 위해 헌신했던 데카브리스트들은 물신주의로 가득한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희생’의 가치를 전해준다”고 말했다.

실패한 혁명 이후 100년간 절대군주의 압제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던 러시아의 역사를 따라가노라면 책상에 책을 펴놓고 앉아 ‘만약’을 읊조리는 바보가 될 수밖에 없다. 데카브리스트 혁명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죄책감 속에서 평생을 살았던 푸쉬킨과 미국으로 망명을 오라는 솔제니친의 제의를 평생 거부했던 파스테르나크 이야기도 가슴을 울린다. 가벼운 기행문으로 시작했다가 역사의 뒤편 깊숙한 곳까지 들춰내는가 하면, 어느덧 풍경에 대한 감상을 비치는 저자의 자유로운 서술은 독서의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박노해 시인으로부터 ‘지구 시대의 슬픈 여행자’라는 말을 듣기도 한 하영식의 다음 목적지는 티벳이나 아프리카가 될 예정이다. 그는 “가보지 않은 곳이 거의 없다”며 “티벳에 갈 계획을 세워는 놨는데,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책 말미에는 레흐 바웬사 전 폴란드 대통령의 인터뷰도 실려 있다.(양진영 기자) 

10. 09. 02. 

 

P.S. 시베리아에 관한 책들이 간간이 출간되는데, 가장 최근에 나온 것으로는 리처드 와이릭의 <너의 시베리아>(마음산책, 2010)가 있다. 미국의 작가이자 변호사인 저자가 딸아이를 입양하기 위해 시베리아에까지 갔던 경험을 담고 있다. 일종의 여행기. 감수자로 내 이름이 올라가 있기도 하다. 그리고 콜린 더브런의 <순수와 구원의 대지 시베리아>(까치글방, 2010). 얼마 전에 소개한 책인데, 후배에게 부탁한 원서도 마침내 구한 김에(아직 입수까지 한 건 아니지만) 읽어볼 기회가 생길 것 같다. 더브런의 책은 제임스 포사이스의 <시베리아 원주민의 역사>(솔출판사, 2009)와 함께 리처드 와이릭이 참고한 책이기도 하다. 시베리아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독자라면 필히 챙겨둘 만한 책들이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0-09-02 08: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02 08: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02 09: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업실에 비하면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지만 책으로 가득 차 있기에 나름 지저분한 방에서 혼자 책을 읽고 있으면 '독서가'로선 소원을 성취한 게 아닌가 하지만, 사정이 또 그렇지만은 않다. 이유선 교수의 표현을 빌면, 이런 게 '아이러니스트의 사적인 진리'인지도 모른다. 매일 책을 읽으면서도 책을 좀 읽었으면 하고 바란다는 것. "네가 곁에 있어서 나는 네가 그립다"라는 시구절이 있었던가. 고백의 사연은 이렇다.  

"나는 거의 일년내내 책을 읽으면서도 항상 책을 읽으면서 살았으면 하는 꿈을 꾸면서 산다. 아마도 나는 책을 읽으면서도 그 책이 내가 진정으로 읽고 싶은 책은 아니라고 생각하거나, 책을 읽는 대부분의 상황이 내가 꿈꾸었던 여유 있는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럴지 모르겠다. 내가 읽는 책들은 강의를 하기 위해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이거나, 거의 아무도 읽지 않을 논문을 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읽어야 하는 책들이다. 그리고 늘 시간에 쫓겨서 읽는다."(<아이러니스트의 사적인 진리>, 16-17쪽) 

새로 나온 <역사가들>(역사비평사, 2010)에서 러시아사가 쉴라 피츠패트릭 편을 들추다가 떠올린 대목이다. 스탈린시대의 일상사 연구로 유명한 피츠패트릭의 명성은 익히 알고 있고 여러 권의 책을 구해놓았지만 정작 읽을 시간이 없는 게 또 현실이다. 찾아보니 국내엔 <러시아혁명>(대왕사, 1990)이 소개된 바 있다. 책은 기억이 나는데, 얇은 책이어서 완역본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원서는 현재 3판까지 나와 있다. 간단한 설명은 이렇다.

  

1980년대 초에 피츠패트릭은 볼셰비키혁명에 대한 매우 흥미로운 저서 <러시아혁명>을 출간했다. 그녀는 다양한 관점으로 혁명을 두루 관찰하고 1917년 사건의 전체 조건과 함께 볼셰비키 집권 이후의 사회변화를 묘사했다. 그녀는 이 책에서 중국의 문화혁명에 견줄 만한 소련의 인텔리겐치아 탄압을 스탈린이 아닌 평범한 공산당원들이 주도했다고 주장해 학계에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스탈린 노선이 사회적 기반에 기초해 있었으며, 이러한 인민의 급진주의가 1930년대 정권과 사회가 부분적으로 합의할 수 있었던 기반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한 주장을 제시할 수 있었던 근거는 스탈린시대 일상에 대한 면밀한 연구이다. <스탈린의 농민들>, <일상의 스탈린주의> 등이 그녀의 대표적 저작이다. 말하자면, 연구의 초점이 '아래로부터의 사회사'에 두어졌다.   

   

<일상의 스탈린주의>에 대해 한 서평자는 이렇게 말했다. "피츠패트릭은 독자들에게 스탈린이라는 군주의 지옥과도 같은 끔찍한 서커스 속에서 사는 것이 실제로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러시아사 연구에서 이러한 입장은 '수정주의'라 불리는데, 쟁점은 이런 것이다. 

보수주의 학파는 소비에트 사회의출현을 '역사의 논리가 적용되지 않는 역사의 일탈'로 간주했지만, 피츠패트릭을 비롯한 수정주의자들은 1970년대와 1980년대 보수주의 학파가 사용한 '전체주의'라는 용어를 비학술적인 용어로 공포했다. 수정주의자들은 스탈린과 그의 정치국을 사악한 존재로 보면서도, 소비에트 정치 엘리트들에 대해서는 "다른 평범한 정부에 존재하는" 상층부와 유사하다고 인식했다.

   

20세기 러시아문학을 공부하려면 아무래도 당시의 일상에 대한 자세한 연구가 요긴하다. 그래서 관심을 갖게 된 러시아사가 중 한 사람이 피츠패트릭이지만, 요는 아직 읽을 시간이 없다는 것. 현재 읽는 책들을 그렇다고 '억지로' 읽는 건 아니지만, 필요에 의해 제약을 받는 건 사실이다. 멀리 가지는 못하는 것이다. 피츠패트릭의 러시아사 연구에 대한 소개를 읽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다시금 떠올라 몇 자 적었다.   

참고로, 피츠패트릭은 1941년 호주 태생으로 주로 시카고대학에서 소련사를 강의했다... 

10. 08. 11.


댓글(7)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yamoo 2010-08-11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유선 교수의 글...완전 공감합니다~~ 그나저나 전, 러샤의 문학과 철학에 문외한이라서욤..문학에는 관심이 없구 러샤 철학자들은 관심이 많은데 아는게 하나도 없습니다..작년에 엔날 고려원에서 나온 러샤철학사를 발견해서 기쁜 맘에 데리고 오긴 했지만 역시 아직 읽지는 못한 상태구요..단지 실존철학자 베르자예프는 관심이 많은데, 이 사람 저서를 구하기가 힘들다는 거에요~ 혹시 번역 출간 된 책이 있는지요?

로쟈 2010-08-11 18:41   좋아요 0 | URL
'베르댜에프'로 검색하시면 발췌번역서들이 몇 권 뜹니다. 예전에 <러시아사상사>, <러시아지성사>들이 번역됐었는데, 지금은 구하기 어렵죠. 이사야 벌린의 <러시아 사상가>도 좋은 책입니다. 그리고 러시아는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가 '철학자'입니다. '철학' 개념이 서구와 좀 다릅니다...

yamoo 2010-08-11 23:09   좋아요 0 | URL
엔날에 종로서적에서 나온 베르댜예프의 <러샤지성사>를 보고 다른 저서들을 찾고 있는데, 아예 책이 없어서 넘 아쉬워하고 있는 중입니다..벌린의 <러샤 사상가> 입수하도록 하겠습니다^^ 문학으로 철학을 했군요..러샤는..ㅎ 여튼 넘 감사합니다~

미지 2010-08-11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시아의 철학 개념... 흥미롭네요.

헌내 2010-08-11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양인 출판의 문제적 인간 시리즈 '스탈린'과 트로츠키의'배반당한 혁명'이 생각나네요. ^^
(국내 '배반당한 혁명'은 책 번역이 엉망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영어 원서가 아예 절판이라는 겁니다.ㅋ)

2010-08-12 03: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2 2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난 2004년 <갈매기> 공연으로 호평을 얻은 러시아의 연출가 지차트콥스키의 <벚꽃동산>이 지난주부터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공연되고 있다. 내주에는 나도 시간을 내보려고 하는데, 일단은 공연 소개기사와 관람평을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10. 05. 28) 희극적이고 비극적인 그 집안

예술의전당이 올해 러시아가 낳은 위대한 소설가이자 극작가 안톤 체호프(1860~1904)의 탄생 150돌을 맞아 그리고리 지차트콥스키(51) 연출의 <벚꽃동산>을 28일~6월13일 토월극장에서 공연한다.

지차트콥스키는 러시아 황금마스크상을 수상한 연출가이다. 이달 초 러시아 말리극장을 이끌고 엘지아트센터에서 <바냐 아저씨>를 선보였던 레프 도진(66)과 더불어 러시아의 최고 현역 연출가로 손꼽히는 인물. 그는 2004년에도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 <갈매기>를 올려 국내 연극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기며 ‘올해의 연극상’, ‘동아연극상 특별상’, ‘올해의 연극 베스트3’을 수상하기도 했다.

체호프는 연극이란 ‘인생 그 자체’이며 인생을 탐구하는 것을 근본 목적으로 삼는다. 그의 4대 희곡 <갈매기>와 <바냐 아저씨>, <세 자매>, <벚꽃동산>에는 일상적이며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그러면서도 알 수 없는 인생의 내적 아이러니가 담겨 있다.

특히 체호프가 죽기 한해 전인 1903년에 쓴 <벚꽃동산>은 19세기 말 러시아 봉건 귀족의 붕괴와 그 과정에서 떠오른 계층 갈등을 그린 작품이다. 과거의 습관과 낭비벽으로 벚꽃동산을 잃는 여지주 라넵스카야 부인과 자립심 없는 그의 오빠 가예프, 농노의 자식으로 부를 일군 로파힌, 가정교사 샤를로타와 수양딸 바랴, 늙은 하인 피르스 등 주변 인물들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과 겹친다.

체호프의 작품은 시대와 역사를 관통하는 동시대성과 해석의 다양함을 제공한다. 실제로 체호프는 <벚꽃동산>을 코미디(희극)라고 생각했고, 1904년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초연한 연출가 스타니슬랍스키는 비극으로 해석했다. 두 사람의 이견은 이 작품의 양면적 성격을 어떻게 연출할 것인가에 대해 후대의 연출자들에게 숙제로 남겨두었다. 따라서 이번 토월극장 무대에서는 사실적이고도 서사적인 무대와 텍스트 자체를 깊이 있게 해석해내는 지차트콥스키의 연출이 더욱 관심을 모은다.  

지차트콥스키는 최근 국내 언론 인터뷰에서 “러시아의 몰락한 귀족 여성 라넵스카야를 기존의 노부인으로 표현하지 않고 세상을 향해 전진하는 당당하고 아름다운 40대 여성으로 그릴 것”이라고 연출의도를 밝혔다.

“체호프 작품을 할 때마다 강하고 깊이있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작품의 등장인물은 사실적이고 역동적인 인물이라서 고정적인 이미지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작품을 읽을수록, 이해할수록 다양한 표정과 특징을 가진 인물들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소리는 들려도 받아들이는 것은 다르다’라는 러시아 속담이 있다”며 “작품을 받아들이는 관객마다 그 느낌이 다를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번 공연에서는 2004년 <갈매기> 공연에서 강렬한 시청각적인 무대효과로 극찬을 받았던 무대디자이너 에밀 카펠류시가 30m에 이르는 토월극장을 깊이있게 입체적으로 사용할 독특한 감각의 무대미술도 기대된다. 또한 원로 연기자 신구씨를 비롯해 지차트콥스키가 까다롭게 뽑은 이혜정, 장재호, 이찬영, 이지혜, 박성민, 안순동, 이춘남, 이안나, 김태균, 이종무, 지니 등 한국 배우들의 연기 또한 관심거리. 한국 공연을 마친 뒤 11월 러시아 볼코프 국제 연극 페스티벌에도 초청돼 본고장인 러시아 관객과도 만난다.(정상영 기자)

경향신문(10. 06. 04) [객석에서]연극 ‘벚꽃동산’ 

막이 오르는 순간, 객석 여기저기에서 “와” 하는 탄성이 새어나왔다. 관객의 시선을 단숨에 잡아끄는 매혹적인 무대였다. 30m가 넘는 깊이를 그대로 살려낸 갈색 톤의 질감 있는 무대. 전면은 널찍하고 뒤로 갈수록 점점 좁아지면서 사다리꼴 모양새를 취했다. 라네프스카야 부인의 오래된 영지 ‘벚꽃동산’에 자리한 대저택의 실내다. 오랜 세월 간직해온 풍요로움과 당당함, 그 저택에서 대를 이어 살아온 숱한 가솔들, 하지만 러시아가 새로운 질서로 재편되면서 점점 쇠락해갈 수밖에 없는 벚꽃동산의 슬픈 운명을 고스란히 담아낸 무대였다. 삐걱대는 나무 틈새로 간신히 스며 들어오는 햇살. 그것은 마치 앓아 누운 노인의 팔목처럼 앙상했다.

지난달 28일 서울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막을 올린 체호프의 <벚꽃동산>(사진). 에밀 카펠류쉬가 디자인한 무대는 기대한 대로 미학적 완성도가 높았다. 그는 6년 전에 같은 장소에서 공연한 체호프의 <갈매기>에서도 그렇게 근사한 무대를 펼쳐보인 적이 있다. 무대의 폭과 깊이를 남김없이 활용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사실과 상징을 적절히 배합해 강렬한 이미지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이번 무대도 역시 그의 작품으로서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연극은 첫인상의 강렬함을 뒷받침할 만한 뒷심을 별로 보여주지 못했다. 배우들의 덜 익은 연기 탓이었다. 그것이 캐스팅의 실패이거나 연습 부족이었는지, 아니면 연출자 그레고리 지차트콥스키와 한국 출연진 사이의 소통에 문제가 있었던 것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공연 첫날인 28일, 가예프 역을 맡은 배우 이찬영을 비롯한 몇몇 외에는 어설프게 겉도는 연기를 펼쳤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당연히 앙상블은 무너졌다. 각자의 역할을 제대로 소화하면서 서로 조화를 이뤄내는 앙상블이야말로 체호프 연극의 관건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체호프 연극은 산만하고 시끄러운 소동에 가까워질 가능성이 크다. 체호프는 언제나, 힘주어 말하지 않지만 은근히 뭔가를 이야기한다. 그래서 치밀한 연기와 앙상블이야말로 체호프의 내밀한 속내를 푸는 열쇠다.

우리는 그것을 한 달 전 LG아트센터에서 확인한 바 있다. 러시아의 거장 레프 도진이 연출한 <바냐아저씨>에서였다. 당시 이 연극은 러시아어로 공연됐음에도 관객에게 체호프 연극의 짙은 울림을 전해줬다. 하지만 이번에는 한국어로 공연됐음에도 울림이 짧다. 주지하다시피 올해는 체호프 탄생 150주년. 상반기에 이미 여러 편의 체호프 연극이 공연됐고 관객의 눈높이는 당연히 올라갔다. 이 정도의 <벚꽃동산>으로는 현재의 관객을 충분히 만족시키기 힘들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마지막 장면. 늙은 하인 피르스 역을 맡은 관록의 배우 신구가 휘청거리던 연극의 중심을 간신히 일으켜 세운다. <벚꽃동산>의 마지막 방점이라 할 수 있는 그 적막감을, 배우 신구가 ‘홀몸’으로 보여준다. “인생이 다 지나갔어. 그런데도 도무지 산 것 같지가 않아…. 아무것도 남은 게 없어, 아무것도.”(문학수 선임기자) 

10. 06. 04.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BK 2010-06-07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겨레 현대철학 종강타임때 추천해주신 덕분에 지차트콥스키의 벚꽃동산 잘 보고왔습니다. 로쟈님이 프로그램에 쓰신 글을 읽고나니 왜 체홉을 코미디로 읽게되는지 공감이 가더라구요. 감사합니다.

로쟈 2010-06-07 19:42   좋아요 0 | URL
아, 저도 수요일에 볼 예정인데요. 제가 그런 얘기도 했던가요?^^;
 
체호프와 바냐 아저씨의 해
레프 도진과 말리드라마극장

안톤 체호프 원작의 <숲귀신>이 이번주 일요일까지 대학로 게릴라극장에서 공연된다. 여유가 없다 보니 관람기회는 놓쳤는데, 그래도 리뷰는 챙겨놓는다. 드디어 내달초에 찾아오는 러시아 말리극단의 <바냐 아저씨>공연 안내와 함께. 이미 여러 차례 예고한 바 있지만 도진의 공연을 다시 보게 될지는 아직 모르겠다... 

뉴스컬처(10. 04. 19) 121년 만에 빛을 본 연극 [숲귀신] 

러시아의 문호 안톤 체호프의 탄생 150주년을 맞아 숨겨진 명작 [숲귀신](연출 전훈)이 무대화됐다. 국내 초연된 이번 공연은 1889년 당시와 같이 소극장 무대에서 공연되며, 전훈 연출은 노컷, 노어레인지로 연출해 작품의 초기 모습 그대로를 무대에서 보여줬다.

연극 [숲귀신]은 체호프의 4대 희곡 중 하나인 ‘바냐 아저씨’의 전신(前身)으로, 체호프가 발표한 세 번째 장막극이다. 초연 당시 참담한 실패를 기록했는데, 공연은 물론 희곡 자체에 대한 평가도 부정적이었다. 이에 체호프는 죽기 전까지 [숲귀신]의 출판 및 공연을 불허하고 작품을 봉인했다.

121년 만에 봉인이 해제돼 게릴라 극장에서 공연 중인 [숲귀신]은 ‘바냐 아저씨’와 비슷한 이야기를 가졌다. 퇴임한 교수 세레브랴코프, 그의 젊은 둘째 아냐 옐레나 그리고 딸 소냐가 두 작품에서 똑같이 등장한다. 옐레나를 짝사랑하는 바냐는 본디 이고르였으며, 숲 속에서 살던 의사 아스토르프는 ‘숲귀신’이라는 별명으로 의사 일보다는 숲을 지키는 일에 더 열성적인 흐루쇼프였다.

[숲귀신]은 ‘바냐 아저씨’보다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고, 3시간 동안 공연되는 희곡 또한 방대하다. 무대는 나무와 식탁, 창틀, 의자 등을 이용해 대저택의 정원과 식당, 응접실 그리고 숲 속 물레방앗간을 보여준다. 1막이 2명으로 시작해 2명으로 끝나는 등 인물 등장과 구성이 구조적이며, 전개는 다소 산만한 듯 나열된다.

그러나 [숲귀신]은 ‘바냐 아저씨’보단 한결 가볍다. 종종 웃음이 터져 나오고,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사랑한다는 고백과 함께 키스를 퍼붓는다. 특히, 4막만 봐서는 체호프의 작품이라고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쉽게 말해 ‘바냐 아저씨’의 로맨틱코미디 버전이자 100년 뒤 시대를 내다본 트랜디 드라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숲귀신]의 주인공은 옐레나를 사랑하는 이고르가 아닌 흐루쇼프다. 그는 실리를 위해 숲을 벌목하는 것을 반대하며, 후세를 위해 숲을 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숲에 대한 자신의 의견에는 거침없지만 소냐를 향한 사랑의 마음 앞에서는 소극적이고 방어적 자세를 취한다. 소냐와 흐루쇼프의 엇갈리는 마음은 극을 재미있게 만들어준다.

[숲귀신]이 그 옛날 혹평을 받았고, ‘바냐 아저씨’보다 가벼워 웃음을 유발하는 경우가 많다 하더라도 체호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변함없다. 이고르의 권총자살로 마을은 쑥대밭이 되었지만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은 마음을 추스르고 새로운 시작의 발을 내디딘다. 떠나지 않았던 옐레나를 용서하고 다시 받아들이던 교수는 “일을 합시다”라고 말한다. 좌절하더라도 삶을 살아내야 하는 ‘바냐 아저씨’의 주제가 약하게 나마 드러난다.

사실 안톤 체호프는 초기 희곡에서 큰 난항을 겪었는데, 희곡 자체의 문제 말고도 그에게는 작품을 이해하는 연출과 배우가 없었다. 당시 [숲귀신]은 “훌륭하게 각색된 소설이지 드라마는 아니다”라는 혹평을 들었을 정도. 이후 다행히도 체호프는 그의 작품 세계를 잘 이해해준 연출가 단첸코와 스타니슬랍스키를 만나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체호프는 혹평으로 인해 ‘숲귀신’을 봉인시켰지만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개작에 착수, 10년 뒤 ‘바냐 아저씨’를 발표했다. ‘바냐 아저씨’는 1899년 10월 스타니슬랍스키 연출로 모스크바예술극장에서 초연해 큰 성공을 거뒀다.

오는 5월, 연극 ‘바냐 아저씨’가 세계적 명성의 레프 도진 연출과 상트 페테르부르크 말리극장이 스타니슬랍스키의 어법을 바탕으로 공연할 예정이다(5/5~5/8, LG아트센터). 전신인 [숲귀신]과 개작 후 명작이 된 ‘바냐 아저씨’를 비교해 볼 만하겠다.(양훼영기자)    

한국일보(10. 04. 21) 3시간 짜리 대하연극 "이것이 인생이다"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말리 극단은 무대를 삶의 축도로 만든다. 2001년의 '가우데아무스', 2006년의 '형제 자매들' 등 두 차례 내한 공연에서 그들은 무대가 곧 삶의 현장을 그대로 모사한 것일 수도 있음을 실증했다. 객석에게는 무대와 현실이 구분되지 않았다. 그들의 무대는 뚜렷한 방향을 갖고 생생한 삶을 그렸다. '대하(大河)'라는 말이 연극 무대에서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웅변했다.

그들이 다시 온다. 이번에는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다. 작은 실험극단으로 출발했던 이 극단을 23년의 세월과 함께 세계적 극단으로 키워낸 연출가 레프 도진(66)의 이번 무대도 상연 시간이 3시간여다. '전원 생활의 정경'이란 원래 희곡의 부제대로 시골을 배경으로 19세기 말 러시아의 세태를 보여준다. 그러나 대하가 흐르듯 유장하게 진행되는 도진의 무대는 연극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사실적 수법에 의지해 최대한으로 확장시킬 수 있음을 증명한다.

도진은 이 무대를 "체호프의 작품 중 가장 아름다운 정수"로 꼽는다. 20여년 간 무대 구상만 하다 2003년에야 첫 상연한 데에는 그 같은 경외심이 가장 큰 이유였다. 이 무대는 또 연극을 유흥이 아니라 계몽과 학습의 장으로 여기는 러시아 특유의 연극관이 빚어낸 작품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도진의 배우들은 테크닉을 넘어서, 등장인물의 심성과 감각에 자신을 동화시키는 훈련을 거친다. 대연출가 피터 브룩이 "말리 극장은 세계 최고의 앙상블"이라 감탄했던 그 진면목을 확인할 기회다. 5월 5~8일, LG아트센터. (02)2005-0114 (장병욱기자)  

10. 04. 22.   

P.S. '3시간짜리 연극'은 러시아에서 통상적인데, '대하연극'이라고까지 한 것은 다소 과장이다. 연출가 전훈의 체호프 공연 대본은 <안똔 체홉 4대 장막전>(제이앤북, 2005)으로 나왔었지만 현재는 품절상태다(<숲귀신>까지 포함해서 다시 나오면 좋겠다). 레프 도진과 말리극단에 대해서는 최근에 나온 세프초바의 <레프 도진과 말리드라마극장>(동인, 2010)이 매우 요긴한 참고문헌이다. <숲귀신>과 <바냐 아저씨> 등에 대한 국내 연구는 김규종 교수의 <극작가 체호프의 희곡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신아사, 2009)를 참고할 수 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0-04-22 0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러시아문학을 전공한다지만, 러시아 아동문학에 대해서 내가 아는 바는 거의 없다. '러시아 아동문학의 아버지'라고도 불린다는 코르네이 추콥스키(1882-1969)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데(아, 시인 알렉산드르 블록에 대한 책은 읽은 적이 있다), 그럼에도 그의 동화집이 번역되고 있다니 반갑다(그는 동화작가이면서 시인, 역사학자, 언어학자, 번역가이기도 했다). 아직 어린 조카들에게는 용도가 닿을지 모르겠다.  

  

일단 그의 동화론으로 <두 살에서 다섯 살까지>(양철북, 2006)가 출간돼 있다(영역본도 있다). 소개를 보면, "코르네이 추콥스키가 40년 동안 수집하고 채록한 아이들의 말에 대한 기록을 담았다. 저자는 아이들이 쉴새없이 뱉어내는 말을 조사하고 연구해서 어떤 아동학자나 심리학자들도 접근하지 않았던 아이들의 생각에 대한 여러 가지 규칙을 발견했다."고 돼 있다.   

물론 아이들을 읽을 책이 아니라 부모나 유치원 교사, 동화작가들이 참조해볼 만한 책이겠다. 아이들을 위한 동화집으론 두 권이 출간됐다. <악어>(양철북, 2009)와 <강도 바르말레이>(양철북, 2009)가 그것인데, 계속 더 나오는 듯싶다.

 

러시아판을 찾아보니 15권짜리 전집 가운데 첫 권이 '아이들을 위한 창작'으로 돼 있고, 600쪽 분량이다.    

 

영어로 번역된 책들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추콥스키의 일기다. 무려 69년간 쓴 일기. 저명한 러시아문학자 빅토르 어얼리치가 편집자다. 이건 한번 구해봐야겠다...

 

10. 03. 22. 

P.S. 아래는 러시아어판 <강도 바르말레이>의 표지다. 짐작대로 애니메이션 버전도 있다(http://www.youtube.com/watch?v=XJqAMtyv4mg)


댓글(1) 먼댓글(2)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jjjismy의 생각
    from jjjismy's me2DAY 2010-03-22 23:31 
    코르네이 추콥스키가 40년 동안 수집하고 채록한 아이들의 말에 대한 기록을 담았다. 저자는 아이들이 쉴새없이 뱉어내는 말을 조사하고 연구해서 어떤 아동학자나 심리학자들도 접근하지 않았던 아이들의 생각에 대한 여러 가지 규칙을 발견했다.
  2. 서울비의 알림
    from seoulrain's me2DAY 2010-04-13 16:58 
    [책] 《두 살에서 다섯 살까지》 — 코르네이 추콥스키가 40년 동안 수집하고 채록한 아이들의 말에 대한 기록 (via @julymon)
 
 
igor5474 2010-03-23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동문학에 대해서 잘 모르면 함부로 서평 쓰지 마세요!
아동문학에서는 올바른 한글이 엄청나게 중요합니다.
이오덕 선생이 얘기한 올바른 한글!
아동문학을 함부로 건드려서 대중들을 현혹하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