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철학을 인터뷰하다

40자평만 적어놓고 입을 닫으면 '오해'를 부를 것 같아서 <하버드, 철학을 인터뷰하다>(돌베개, 2010)의 번역에 대한 유감을 몇 자 적는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김영사, 2010)에 연이어 '하버드' 간판을 달고 나온 책이라서, 인터뷰이가 된 14명의 철학자 가운데 9명은 '구면'이지만 나머지 5명의 '철학'은 궁금하기도 해서 책은 단박에 구입했다. 공역자 중에 강유원씨도 포함돼 있어서 번역에 대한 자연스런 신뢰도 보태졌다.'오늘날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들이 말하는 철학과 삶의 문제 그리고 공부에 대한 조언'!? 하지만 정작 읽은 책은(나는 1/3을 읽었다) 무척 당혹스럽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무척 괴이하다는 느낌이다. 이럴 땐 어디에다 조언을 구해야 하는지? '철학이란 무엇이고, 철학함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따라가보려고 했지만, 내가 얻은 건 '철학이란 무엇이고, 번역이란 무엇인가?'라는 또 다른 고민이다. 혹 하나 더 붙인 격이다.  

 

번역서는 원서와 차례가 좀 다른데, 존 롤스로 시작하는 것보다는 움베르토 에코로 시작하는 것이 독자들에게 덜 부담스러우리라는 '배려'일 것이다(국내에 좀 지명도가 있는 리처드 로티도 전진 배치되었다). 하지만 번역은 에코의 약력 소개에서 "튜랭대학에서 처음에는 법을 공부하고 그 다음에는 중세철학과 문학을 공부했다."는 대목에서부터 삐걱거린다. '토리노(Turin)'란 지명을 영어로는 '튜랭'이라고 읽어주는지? '밀라노(Milan)'와 '피렌체(Florence)'가 '밀란'과 '플로렌스'로 옮겨지지 않은 걸 보면, 지명은 이탈리아어 표기를 따라준 것인데, 듣보잡 지명인 '튜랭'은 어떻게 해서 살아남았을까? 유려한 번역서였다면 '옥에티'가 되었을 뿐이겠지만, 읽다 보니 여기저기 '튜랭'이다. 리처드 로티까지의 인터뷰를 보다가 나는 원서를 구하기로 했다. 번역서만으론 읽을 수 없다는 판단이 들어서였고, 그게 두 주 전이다. 그리고 엊저녁에서야 잠시 시간을 내서 코넬 웨스트 편을 읽고(이 책에서 가장 흥미를 끈 철학자다) 오늘 스탠리 카벨에서 책을 덮었다.  

한 언론 리뷰에서는 기자가 '기계적인 번역' 같다는 인상을 적었지만 뜻이 통한다면 기계적인 번역이라고 해서 '유감'까지 가질 이유는 없다. 문제는 '작문'을 하고 있다는 데 있다. 정말 제대로 된 '공역' 작업이 이뤄진 것인지 심히 의심스럽다. 그나마 잘 넘어가는 편인 에코의 인터뷰 말미에서(곁다리로 말해두자면, 이 인터뷰의 질문자에는 홍종민이라는 학생이 포함돼 있다. 한국 학생인 듯하다) 에코가 하는 말을 보라.  

"개념이나 사상들이 기호라는 것은 오컴의 사상에서 알 수 있듯이, 로크의 말보다 더 오래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는 공표될 수 없었습니다. 정신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가정해봅시다. 정신과 뇌가 동일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무엇인지 당신이 자유롭게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신을 통해 우리는 사물들을 사유할 수 있습니다."(26쪽)  

17세기 철학자인 존 로크가 "사상조차 기호들이다"란 말을 했다는 질문자의 언급에 실상은 더 거슬러 올라간다는 주장인데, "그러나 그 이전에는 공표될 수 없었습니다"라는 대목은 "But it can be found even before."의 번역이다. "그보다 훨씬 이전에도 발견될 수 있다"는 정도가 '직역' 아닌가. 어떤 심오한 의역의 과정을 거쳐서 "공표될 수 없"다는 내용이 나오게 되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다음 문장 "-라고 가정해봅시다" 다음에 "If Mind=Brain, then what happens are certain physical states"란 문장이 누락됐다. "만약 정신(마음)=뇌라면, 정신에서 일어나는 일은 어떤 물질적 상태들이죠." 그리고 이어서 "정신과 뇌가 동일한 것이 아니라면"이 이어진다. 하지만, 또 "그러나 정신을 통해 우리는 사물들을 사유할 수 있습니다"란 문장 앞에서 "Certainly they are not things"(분명히 그것들이 사물은 아니죠)는 번역이 누락됐다.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문장들은 일부러 생략한 것일까?  

마지막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유럽에선 열두 살과 열여섯 살에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를 읽기 시작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많이 알게 됩니다."라고 말하는데, 조금 더 정확하게 옮기자면 "유럽의 상급학교에선 열두 살때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를 읽기 시작해서 열여섯 살이 되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모든 걸 알아야 하게끔 돼 있습니다."이다. 하지만 <쿠란>은 물론 <성서>도 읽지 않으며 불교 교리에 대해선 구경도 못해본다는 것이 '유럽중심적 교과과정'의 오류이고, 이것이 '보편교육'을 지향하는 쪽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게 에코의 지적이다.   

이어서 로티는 내가 한때 열렬히 관심을 갖던 철학자여서 관심있게 읽었는데, 인터뷰에서 별로 건질 게 없었다. 일단 로티의 약력에서 미국의 주류 분석철학계의 '우등생'으로 프린스턴대학 철학과에 몸담고 있다가 버지니아대학의 (철학과가 아닌) 인문학교수로 가서, 다시 스탠포드대학의 비교문학과로 자리를 옮긴 일이 이렇게 번역돼 있다.   

"직업적으로 보면, 로티는 미합중국 철학과 사랑싸움을 벌였지만 끝내는 이혼을 한 것처럼 끝나버렸다. 로티가 버지니아대학의 소속 학과가 없는 자리로 가면서 프린스턴대학을 그만둔 것이다."(31쪽) 

'미국(America)'을 '미합중국'이라고(혹은 '유에스'라고) 옮기는 것은 강유원씨의 고집이다('미국'이 '미합중국'의 준말이란 사실을 절대로 잊어선 안된다는 취지일까?). 뒷문장은 "Rorty left Princeton for a non-department position at the University of Virginia, and now teaches in the Comparative Literature department at Stanford."을 옮긴 것이다. 물론 로티는 2007년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현재는 스탠포드대학 비교문학부에서 강의하고 있다"는 정보가 '잉여적'이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누락시킬 것까지야 없지 않을까.  

로티의 핵심적인 사상으로 그가 생각하는 '진리'란 무엇인가? 이렇게 정리해주고 있다.  

"로티가 '진리'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의 표상으로서의 진리 개념이라는 잘 정당화된 것으로 생각하는 관점에 대해 '찬사를 보내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31쪽)

번역문은 이미 장황한데, 여기에도 누락이 있다. 원문은 "Rorty argues that 'true' is simply a 'compliment' to views that we think well-justified, as that the notion of truth as the representation of the world 'as it really is' is no more than dogma."이다. 로티의 기본적인 입장은 표상으로서의 진리 개념(진리=자연의 거울)이 도그마에 불과하므로 폐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경우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 대신에 존재하는 것은 '정당화된 견해들'뿐이고, '진리'란 말은 이 '견해들'에 대한 칭찬이라는 것이다.('브라보!' 혹은 '굿잡!') 다시 옮기면, "로티는 '진리'란 우리가 잘 정당화됐다고 보는 견해에 대한 '칭찬'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진리가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에 대한 표상이라는 개념은 도그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진리 없는 세계'에서 살아가기다. "로티는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윤리의 기반으로서의 신을 버리려 했으며, 인간만이 서로에 대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결정할 수 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는 이제 '세계에 대답할 수 있음'이라는 진리의 개념을 포기해야만 하고, 인간으로서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에 대해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상에 대답할수 있음'은 'answerability to the world'의 번역이며, 지배적 진리관이었던 '대응설'로 이해하면 된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을 옹호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은 로티에게 문제가 되며, 매우 중요한 것이다. 특별히 '자연'을 제외하고, 로티에게 인간성 자체 이상으로 호소하는 법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번역문만 보자면, 로티에게는 자연만이 유일하게 "인간성 자체 이상으로 호소하는 법정"이라는 것이 되는데, 이야말로 정반대의 해석이다. 원문은 "To him there is no court of appeal beyond humanity itself, particularly not 'Nature'."이다. 강조한 대목은 '특히 '자연을 제외하고'가 아니라 '특히 자연은 그러한 법정이 아니다'라는 것이다.(*참고로, 'court of appeal'은 '항소법원' 혹은 '최고법원'이란 뜻이라고 한 분이 알려주셨다.)  

  

마냥 붙들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시간관계상, 이 페이퍼를 쓰게 만든 코넬 웨스트 편으로 넘어간다. 1953년생의 중견철학자인 그는 현재 프린스턴대학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비평가와 시민권 운동가이기도 하다고. 이 번역서에 나는 별점을 둘 주었는데, 번역은 아주 실망스럽지만 코넬 웨스트란 저자를 알게 해준 것 때문에 별점 하나를 덧붙인 것이다. 그를 소개하는 서두에 보면, 2000년 봄학기에 웨스트는 하버드에서 힐러리 퍼트넘과 함께 '실용주의와 신실용주의'란 강의를 했다. 웨스트 교수의 강의 습관은 매 시간 공부하게 되는 각 철학자의 중요성을 설명하기 전에 핵심 단어 몇개 쌍을 칠판에 적어놓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어지는 대목. 

"웨스트의 철학에 대한 강좌에서 퍼트넘은 싱긋 웃는 웨스트의 습관을 따라하며, 웨스트가 철학적으로 조망한 주요 관심사로 죽음/욕망, 독단주의/대화주의, 지배/민주주의를 들었다."(49쪽) 

원문은 "When it came to the lecture on West's own philsophy, Putnam, with a playful grin, borrowed West's habbit and wrote what West had acknowledged as the primary concerns in West's philsophical landscape: death/desire; dogmatism/dialogue; domination/democracy."이다. 요는 '싱긋 웃기'가 웨스트의 습관이 아니라 '주요 개념쌍을 칠판에 미리 쓰기'가 습관이라는 것이고, 퍼트남이 웨스트의 철학에 대해 강의하면서 그걸 흉내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는 것이다. 너무 대충 번역했다는 인상이다.  

  

코넬 웨스트는 이스라엘 셰플러(<하버드 대학의 학자들>의 저자)에게서 배우고, 리처드 로티에게서 실용주의를 배운다. 그리고는 "노년의 조시아 로이스를 발견"한다. 번역서는 불친절하게도 조시아 로이스에 아무런 설명도 붙이고 있지 않은데, 미국 철학자 'Josiah Royce(1855-1916)'를 가리킨다. 주저는 <근대철학의 정신>(1892). 'old Josiah Royce'는 '노년의 조시아 로이스'가 아니라 '옛날 철학자 조시아 로이스'를 뜻한다. 별로 주목받지 않은 철학자였던 것 같은데, 웨스트는 그를 아주 높이 평가하며, 주저에 포함된 쇼펜하우어에 대한 강의는 "미합중국 철학의 가장 위대한 순간 중 하나"로까지 꼽는다. 웨스트의 특이한 점이긴 한데, 그는 "키르케고르적이고, 쇼펜하우어적인 경로"를 통해서 실용주의를 알게 되고, 또 그런 관점에서 해석한다.  

웨스트는 미국 분석철학계의 좌장이었던 윌러드 콰인도 실용주의 철학자로 간주할 정도다. 그래서 나온 질문이 "콰인이 천재적인 것은 인간-만들기와 감수성 같은 실용주의적이고 에머슨적인 도식들로 기호 논리학자와 논리실증주의자의 가장 복잡한 담론들에 개입했다는 점 때문"(53쪽)이라고 쓴 구절을 설명해달라는 것이다. 한데 이 인용도 핀트가 맞지 않게 옮겨졌다. 원문은 "The genius of W. V. Quine was to intervene in the most sophisticated discourses of symbolic logicians and logical positivists with pragmatic formulations and Emersonian, i.e., human-making, sensibilities."이다. 구문은 'intervene A with B'이다. 'B를 가지고 A에 개입하다'. 문제는 B에 해당하는 두 가지다. "pragmatic formulations and Emersonian, i.e., human-making, sensibilities"을 "인간-만들기와 감수성 같은 실용주의적이고 에머슨적인 도식들"이라고 옮겼는데, 어떻게 해서 '도식들'이 뒤에 나오는 '에머슨적인'도 받게 되는 건지 이해하기 어렵다. (A)pragmatic formulations (B) Emersonian, i.e., human-making, sensibilities가 따로따로다. '에머슨적인 도식들'이란 엉뚱한 소리가 이상하지 않았다는 것인가.   

"저는 물리주의자들이 우리에게 세계-만들기에 대해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소견에 관해 할 말이 있다고, 굿맨의 언어를 빌리자면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예측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측력에 관해서라면 그들에게 경의를 표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삶에는 예측하는 능력 그 이상의 것이 있으며, 제가 콰인을 비판하는 지점이 바로 그 부분입니다."(54쪽) 

이 대목은 웨스트의 입장이 어떤 것인지 잘 말해주는데, 번역문은 국내에도 소개된 바 있는 넬슨 굿맨에 대한 무지 때문에 일그러졌다. 굿맨의 책은 <예술의 언어들> 번역이 두 종 나왔었는데, 이대출판부판은 어찌된 영문인지 뜨지 않는다. 번역문의 첫 문장은 "And I do believe that physicists have much to tell us, they have their own versions of world-making, to use Goodman's language, and they predict better than any of the other groups."이다. '굿맨의 언어(용어)를 빌리자면"이라고 해놓고, 정작 그게 무엇인지 번역문은 놓쳤다. '세계-만들기'가 굿맨의 용어이고, 그는 <세계만들기의 방식들>이란 저작을 갖고 있다(박이문 교수의 책에서 자주 언급되는 책으로 나는 한때 번역스터디를 한 인연이 있다). 굿맨이 보기엔 예술이나 과학이나 다 대등하게'세계만들기'의 방식들(버전들)일 뿐이다. 물리주의자들의 언어로 기술되는 세계판은 '예측력'에서는 뛰어나지만 그렇다고 그게 유일한 세계판이어야 하는 건 아니다. 예술은 예술대로 독자적인 '세계만들기'로서 정당화된다. 그게 굿맨의 기본적인 예술철학이고 언어철학이다. 대체로 역자는 미국 철학에 별다른 관심도 지식도 없는 게 아닌지.  

"당연히 그것은 흑인 학생이 아닌 학생들, 백인, 종동계, 남미계, 아시아계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결국 용기 있게 그러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인간적인 것이고 전면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더 나은 계층, 와스프(WASP), 남성이 될 수 있지만, 그러한 용기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우리는, 흑인은 흑인 청교도인이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흑인 청교도주의자가 아니라, 보다 나은 계층이며, 와스프이며, 남성입니다. 존재하려는 용기를, 고투를 할 용기만 충분하다면, 그런 것은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됩니다."(67쪽) 

"존재하려는 용기, 고투를 할 용기"(courage to be, to wrestle)는 웨스트 철학에서 중요한 덕목으로 보이지만 여기서 강조할 일은 아니고, 다만 '흑인 청교도인' '흑인 청교도주의자'가 '흑인 프롤레타리아(black proletarian)'의 오역이란 것만 지적한다. '프롤레타리아'와 '청교도(Puritan)'를 혼동한 것이리라. 기독교 얘기가 나온 김에 키르케고르로 넘어간다.  

"키르케고르는 기독교적 삶이란 위험하게 사는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었습니다. 키르케고르는 최초의 니체적 인간이었지만, 그는 기독교의 원조를 받고 있었습니다. 버나드 쇼는 증오란 겁쟁이가 된 비겁한 자의 복수라고 말했는데, 레비나스처럼 하다가는 차이를 연결시키고 소통하는 용기있는 방식으로 타장성과 이질성을 다룰 수 없습니다."(70쪽)  

키르케고르가 '최초의 니체적 인간'이었다고 한 대목은 "Kierkegaard shows Christian life is living dangerously -ah, proto-Nietzschean, but he's got it under Christian auspices, right?"를 옮긴 것이다. '기독교의 원조'보다는 '기독교의 보호' 하에 놓여 있었다고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문제는 그 다음 문장이다. 원문은 이렇다. "Bernard Shaw says hatred is a coward's revenge to being intimidated, so that you can't deal with otherness, you can't deal with stangeness, in the courageous way that trying to relate, commune - it's almost Levinas-like."이다. 번역문은 '그건 거의 레비나스식이죠'라는 대목을 "차이를 연결시키고 소통하는 용기있는 방식으로 타장성과 이질성을 다룰 수 없습니다"와 연결시켜놨는데, 정반대 아닌가? '타자성의 철학자'가 '타자성과 이질성'을 다룰 수 없다니! 번역문대로라면 코넬 웨스트가 멍청이란 소리밖에 되지 않는다.   

이제 비로소, 본론이자 클라이막스다. 코넬 웨스트에게 매력을 느끼게 된 부분인 동시에 번역의 '횡포'에 화가 났던 부분이다(70-73쪽). 어떤 주장을 펼치고 있는지도 잠시 따라가본다.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지적 용기가 철학의 전성기를 만듭니다. 플라톤이나 크세노폰이 소크라테스에 대해 말했던 것이 맞다면, 소크라테스는 심오한 방식의 지적 용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제가 보기에 예수는 그렇게 큰 지적 용기가 없었지만 자비로서의 용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그 점이 결국 소크라테스보다 더욱 더 심오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에 관한 대목은 "And for me, of course, Jesus is not so much intellectual courage, but it's courage as compassion, which I think in the end is much more profound than Socrates."을 옮긴 것이다. 'compassion'을 '자비'라고 옮겼는데(함께 고통을 느낀다는 뜻이다), 뒤에 보면 '눈물 흘리는 예수'를 겨냥한 말이다. "그렇게 큰 지적 용기가 없었지만"은 방점이 잘못 찍혔다. "예수는 지적 용기라기보다는 자비로서의 용기를 보여주었는데, 제 생각엔 결국 그게 소크라테스보다 훨씬 더 심오한 것입니다."라고 옮기고 싶다. 왜 더 심오한가? 소크라테스는 울지 않았지만 예수는 울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점에서 소크라테스는 뭔가 많은 걸 잃어버린 것이라고 웨스트는 생각한다. 체호프가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다.  

"그 점 때문에 체호프로 돌아가게 되는데, 우리는 진정 소크라테스, 예수, 지적인 관심, 과학자, 의사 그리고 뿌리 깊은 기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신앙 면에서는 불가지론자입니다. 기독교적 위안이 없는데도 기독교적 심정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것이 좋은 겁니다!"   

원문은 "And that takes us back to Chekhov, because you really do have Socrates, Jesus, intellectual curiocity, scientist, medical doctor, and deep Christian backdrop but agnostic in belief. Christian temper without the Christian consolation, see, that's good stuff!"이다. 간단히 말하면 '소크라테스+예수=체호프'이다. 그런데, 번역몬은 그 의미상 주어로서의 '체호프'를 '우리'라고 옮겨놓았다. 우리는 모두 체호프다!? 이어지는 문장도 부정확하게 옮겨진 건 마찬가지다.  

"사랑, 열정, 용기 그 모든 것은 지적인 개입의 관점에서 보면 여전히 소크라테스적인 것인데, 그 결론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사랑을 가지고 있습니다. 심연을 들여다보십시오, 그것이 체호프입니다. 보세요, 체호프 안에는 쇼펜하우어의 모든 것이 있지만, 그는 끝내는 저희 할아버지가 하는 소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사랑, 사랑, 사랑, 사랑할 용기, 존재하려는 용기를 가지고 내려가서 싸우라는 겁니다. 휴! 그것이 체호프가 말하는 겁니다, 틀림없어요. 그는 유일무이한 사람이었습니다."

체호프에 대한 연이은 경탄이고 찬사다. 그런데, 첫 문장 "사랑, 열정, 용기 그 모든 것은 지적인 개입의 관점에서 보면 여전히 소크라테스적인 것인데, 그 결론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사랑을 가지고 있습니다."을 보면 역자는 자신이 무얼 옮기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한 듯싶다. 즉 이게 모두 체호프에 관한 설명이란 걸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체호프를 읽은 적은 있는 것일까?). 첫 문장의 원문은 "All that love and compassion, courage, but still Socratic, in terms of intellectual engagement, go wherever the conclusions take you and so forth, but you're still loving."이다. 다시 옮기면, "체호프는 사랑과 자비, 그리고 용기를 다 갖고 있어요. 그러면서도 여전히 소크라테스적입니다. 지적인 개입이란 관점에서 어떠한 결론에 도달하든지 간에 거기엔 또 사랑이 있구요." "휴, 이건 마치 심연을 들여다보는 듯해요! 그게 바로 체호프입니다."(Look into the abyss, whew! That's Chekhov.)  

이 '유일무이한 사람' 체호프에 견줄 만한 철학자가 있는가? 웨스트가 보기엔 없다. 비트겐슈타인이 후보로 떠오르지만 그는 겁이 많았다. "그는 사상의 측면에서는 용기 있었지만 삶을 견뎌내지는 못했어요"라는 게 웨스트의 평가다.  

"저는 비트겐슈타인이 20세기의 위대한 천재이고 그의 삶 속에서 철학적 대화를 재연했다고 말하겠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용기를 불러일으키지는 못했습니다. 학생들을 난폭하고 가혹하게 대했고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는 그의 삶 속에서 충분히 용기를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사소하고 개인적인 방식이므로 그의 잘못이 아닙니다. 다른 많은 것들이 비트겐슈타인을 형성하고 있지만, 결코 체호프 같은 인물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비트겐슈타인과 체호프의 차이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바로 이어지는 문장이다.  

"체호프는 그의 작품에서 천재성을 드러내지 못했지만 오스카 와일드가 말했던 것처럼 체호프의 재능은 그의 삶 속에 있었습니다. 체호프, 와일드 두 사람 다 그랬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니체적 기준을 만나게 됩니다. 체호프는 주로 낮에는 의사였지만 문학예술 작품을 만들어냈습니다. 믿기지 않지요."

이 대목도 원문을 봐야만 이해할 수 있다. "...Chekhov, who didn't just invest his genius in his work, his talent in his life as Oscar Wild talked about; it was both."이 첫 문장의 원문이다. "체호프는 그의 작품에서 천재성을 드러내지 못했지만"? 망발이자 엉터리 번역이다. "체호프는 자신의 천재성을 작품에만 쏟아붓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오스카 와일드가 체호프에 대해서 뭐라고 말했다? 그것도 아니다. 유미주의의 대표적 작가인 오스카 와일드는 삶이 예술을 모방해야 한다고 말했다. 체호프는 자신의 재능(천재성)을 그의 삶 속에도 실현했다는 내용이다. 체호프와 와일드 두 사람이 다 그랬다? 정확히 말하면 이 대목에서 한숨이 나왔다. "it was both"라는 건 체호프가 자신의 천재성을 작품과 삶 양쪽 모두에 쏟아부었다는 것, 곧 그의 재능은 작품과 삶 모두에서 빛을 발한다는 것이다(그는 작가이면서 의사였다. 그리고 그는 냉정한 관찰자이면서 풍부한 연민의 작가였다). 그리고 이런 체호프야말로 "너의 인생을 예술작품으로 만들라"는 니체적 기준(요구)에 부합하는 사례라는 얘기다. 믿기지 않는가?!    

그래서 코넬 웨스트가 기대하는 철학 또한 체호프적인 철학, 체호프를 닮은 철학이다. "저는 결국 갈망을 불러일으키는 무엇인가가 있다면, 그것은 체호프와 철학적으로 유사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것이 웨스트 자신의 바람을 말하는 거라고 이해한다. 그는 '철학에서의 체호프'가 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철학과에서는 체호프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셰익스피어, 소포클레스, 아이스킬로스 등은 철학 강의실에서 만날 수 있지만 체호프는 아니다. "체호프는 정말로, 철학적으로 사유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작가"라는 게 그의 결론이므로 체호프에 관한 그의 책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당장은 <코넬 웨스트 독본>이라도 구해서 읽어봐야겠다...  

'코넬 웨스트와 체호프'에 대해 적었으므로 번역에 대한 시비는 대충 마무리하도록 한다. 알고 보니 코넬 웨스트는 지젝, 아비탈 로넬, 주디스 버틀러 등과 함께 아스트라 테일러의 다큐영화 <이그재민드 라이프>(2008)에 출연하기도 했다(마이클 하트, 마사 누스바움, 피터 싱어 등이 더 출연하는군). 겸사겸사 다시 만날 기회가 있겠다.  

 

정작 써야 할 원고와 해야 할 번역이 산더미인 상황에서 너무 오래 붙들고 있었다. 요긴한 책이 번역돼 나온 듯해서 반가워했지만, 아무튼 기대에는 한참 못 미치는 번역이어서 유감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역자들은 서문에서 이렇게 적었다. 

이 책은 일종의 철학 혹은 인문학 입문서라고도 할 수 있다. 철학이라는 학문이 궁금한 사람, 철학을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 철학은 공부하고 있는 사람, 철학을 공부하다가 다른 인문학과의 연계가 궁금해진 사람, 그 누구보다 철학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는가라는 냉소를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 적절할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책'이 가리키는 건 번역서가 아니라 원서다. 때문에 우려스러운 건 잔뜩 기대를 안고서 책을 펼쳐든 독자가 오히려 철학에 대한 냉소나 품게 되지 않을까란 점이다. 역자들의 바람에 걸맞게끔 좀더 온전한 번역서가 나왔더라면 좋았을 뻔했다... 

10. 08. 01.  

P.S. 책은 스탠리 카벨의 인터뷰까지 읽었지만, 시시비비를 더 옮겨적지는 않겠다. 카벨은 예전에 철학과 대학원 강의를 들을 때 귀동냥을 한 덕분에 여러 권의 책을 구했던 기억이 있다. 그는 분석철학을 전공했지만 미학을 강의하고 또 영화와 오페라에 대해서도 정통한 드문 철학자다. 소로의 <월든>과 하이데거와의 친연성을 주장하기도 하는 게 그의 강점이자 매력이다. 그가 에머슨과 소로를 재발견하게 된 일에 대해 회고하는 대목의 번역만 인상적이어서 옮겨놓는다.  

"저는 소로를 환영 꽃다발을 들고 있는 소년으로 제시할 생각이 없었습니다."(93쪽)

'환영 꽃다발을 들고있는 소년'으로서의 소로? 원문은 "I wasn't intersted in holding up Thoreau as a flower child"이다. 여기서 '플라워 차일드'는 1960년대 히피 세대를 가리킨다. 당시 자연주의자 소로는 히피들의 숭배대상이었고. 이를 테면, '원조 히피'? 그러니 "환영 꽃다발을 들고 있는 소년" 곧 '화동'과는 의미가 다르다. 카벨은 소로를 그런 '원조 히피'로 숭배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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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하버드, 번역을 인터뷰하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8-08 00:39 
    <하버드, 철학을 인터뷰하다>(돌베개, 2010을 겨우 다 읽었다. 무더위에 다른 일들과 겹쳐서이기도 했지만 별로 흥미를 끌지 않는 분석철학자들의 인터뷰가 줄줄이 배치돼 있어서 진도가 빨리 나가지 않았다. 게다가 내달에 나올 서평집('책을 읽을 자유'란 타이틀이다) 교정도 보고 있는 형편이어서 집중적으로 책을 읽진 못했다. 중간에 건너뛴 법철학자 앨런 더쇼비츠 편을 맨마지막에 읽었는데(찾아보니 그의 책도 두 권이 국내에 소개됐다), 그래도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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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10-08-06 01:30   좋아요 0 | URL
일이 있어서 아직 안 자고 있습니다. '리콜'을 하는 수도 있지만 아주 드물죠. 그냥 1쇄가 빠지길 기다리면서 대충 손보는 게 보통입니다. 너무 많이 손을 봐야 한다면 그것도 문제이긴 합니다. 정오표 정도로 끝날 게 아니면요...

최용준 2010-08-06 09:29   좋아요 0 | URL
로쟈 님, 대답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도 책을 번역할 계획을 세우고 있어서 출판 후 오역이나 번역 누락, 오탈자 등의 처리 문제가 궁금했습니다. 물론 출판되기 전에 꼼꼼하고 성실하게 번역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말입니다.

dayfornight 2010-08-06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날도 더운데 한 여름 밤의 썩은 개그에 욕 보십니다.

로쟈 2010-08-06 01:06   좋아요 0 | URL
러시아에선 유로지비라고 하지요.--;

로쟈 2010-08-06 0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근주스/ "로티가 '진리'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의 표상으로서의 진리 개념이라는 잘 정당화된 것으로 생각하는 관점에 대해 '찬사를 보내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란 번역문은 "우리가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의 표상으로서의 진리 개념"과 "잘 정당화된 것으로 생각하는 관점"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맞나요? 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의 표상으로서의 진리 개념"은 로티가 줄기차게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것 대신에 로티는 "잘 정당화된 견해"로 충분하다고 봅니다. 그러니 번역문은 로티의 생각을 전혀 엉뚱하게 옮긴 것이죠. 이해하시겠습니까? 이해가 안되시면, 로티를 다시 꺼내보세요. 물론 이 영어문장만 독해해도 되지만, 그걸 기대하긴 어려운 듯하네요...

로쟈 2010-08-06 10:57   좋아요 0 | URL
너무 일찍 일어나셨나 봅니다...

2010-08-06 01: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6 02: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6 0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6 02: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6 02: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하 2010-08-06 0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근주스님, 강유원님의 게시판에서 '공표'관련 부분의 지적에 대한 대답으로 <"그러나 그 이전에는 공표될 수 없었습니다."는 '심지어 그 이전에도 그러한 생각이 있었습니다'로 고치려 합니다.">라는 대답이 나왔습니다. 이를 보건데 번역자 또한 님이 제기한 에코의 문맥을 읽어내진 못한 듯합니다.
위 댓글에서 당근주스님은 로쟈님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바로 제가 위에서 말한 '공표'가 잘된 의역이라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오캄,로크,퍼스 등을 단서로 잡고 에코의 말을 뜯어보면 휼륭한 의역이라는 말입니다. 감을 못 잡는 것은 로쟈님의 문제이니 알아서 판단하세요."
이를 통해 당근주스님은 로자님에 대해서 '감을 못 잡는다'라는 주장(이 표현은 이후에도 계속되는군요.)의 근거로 "'공표'가 잘된 의역"이라는 점을 모른다는 점을 들어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번역자는 '의역'을 한 것이 아니라 '오역'을 하였기 때문에 로자님에 대한 '감을 못 잡는다'는 표현은 당근주스님의 것이 돼 버렸습니다.

번역자가 실수로 맥락을 꿰뚫는 것처럼 '보이는' 번역하여도 그게 실수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 여부에 대한 독자로서의 감을 익히실 필요가 있습니다.

콩세알 2010-08-06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덧글들을 보니 이 책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루라도 빨리 1쇄가 다 나가서 오역을 고칠 수 있는 기회가 올 수 있도록..^^;; 강유원님의 인문고전강의 오디오 파일이 저에게는 상당히 도움이 되었는데 공짜로 그런 강의를 들은 것이 왠지 빚진 기분이었거든요. 이번 기회에 빚을 조금이라도 갚아야 될 것 같다는...^^;;

로쟈 2010-08-06 11:09   좋아요 0 | URL
한가지 방법이긴 합니다. 그렇담 한 10권은 사셔야겠는데요.^^;

ON 2010-08-07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을 읽어 보지도 않았고 위와 같은 논쟁을 보면 제 지적 수준으로는 공부를
많이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페이퍼는 "철학이란 무엇이고, 번역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댓글이 늘어나면서 점차 '번역비평이란 무엇이가'라는 의구심을 갖게되었습니다.

인문학이나 어학 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비평은 있을것입니다.
저는 건축설계 분야에서 일하면서 비평은 일상화 돼 있습니다.
건축은 특히나 번역과 달라서 쇄를 거듭하면서 수정한다란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수정의 영역이 개인의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으니까요.
그러니 얼마나 비평이 냉정하겠습니까.

하지만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비평하기 전에 그렇게 한 "의도"를 먼저 묻는다는 것입니다.
의도(컨셉)가 다르면 현상에 대한 해석도 그에 따른 전개 과정도 다를 것입니다.

그래서 제대로 된 비평가는 발표(사적인 대화가 아닌 발표입니다)자의
"의도"를 묻고 그 의도에 부합하게 설계하였는지 비평을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의아했습니다. "번역 비평"이란 무엇인가.
번역도 하나의 학문이고 번역자의 "의도"가 있을진데 발표자의 의도를 묻는
그런 노력을 하셨는지.

왜 그런 노력을 해야 하냐고 하신다면 그건 비평이 아니라 비난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설계한 작품에 누군가가 의도를 묻지 않고 비평을 한다면 그 사람은
제 의도를 다 알고 있는 스승님이거나 비트루비우스 정도의 위대한 인물 아니겠습니까

쿼크 2010-08-07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근주스님...

먼저 제 글이 당근주스님에게만 감정을 추스리라고 읽히는 점에 대해서 사과드립니다. 사실 두분(로쟈님과 당근주스님)과 혹시나 모를, 그러니까 다른 분들도 댓글 올리실때 조금만 부드러웠다면 좋겠다는 의미에서 올린 글인데 당근주스님의 댓글에 댓글을 달다보니 그렇게 보이게 된 듯 합니다. 역시나 사람의 생각 그대로 글로 표현하는 것은 어렵네요...

처음엔 번역자체에 대해 흥미를 가졌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감정이 더불어 읽히는게 조금은 거북스러웠습니다. 자칫 생산성 있는 토론이 비효율적으로 흐를 수 있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들게되었습니다.

저야 대충 이미지화 시켜 영어를 이해하는 수준뿐이기에 번역문제에 직접적으로 끼어들 수가 없지만, 그래도 어깨너머로 공부는 되거든요.

저야 앞으로도 계속 지켜볼 수 밖에 없지만 좀 더 좋은 방향의 이야기들이 오고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사실 생각이 평행을 달리면 절충이고 뭐고 없잖아요. 문제는 어떻게 끝맺음을 하느냐인데 너무나 완벽한 결론만을 내려고 하지 않았으면 하네요. 실상 책의 번역하신 분들이 주석을 좀 달아줬더라면 하는 생각도 있지만, 주석 단다는 문제도 또 다른 이야기를 불러 올 수 있기에 뭐라 하기는 힘드네요. 사람마다 호불호도 있고 말이죠. 그래도 출판사가 신경 좀 썼으면 좋겠네요. 제가 알기로는 이 책 출간 좌담회도 있어서, 번역하신 분들이 얘기도 들려줄거라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쪽 이야기를 듣고 다시 이야기해보는 것도 좋을 듯 하구요. 책은 읽어보지 않았지만 좌담회에서 무슨 이야기들이 오고 갈지 궁금해지는군요.

제가 조금 경솔했던 점 사과드리고요, 제 댓글에 답변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제가 많이 배우고 갑니다~~.


Rousseau 2010-08-09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쿼트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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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를 한 달 못 되게 남겨놓은 탓에 방안은 책으로 거의 포화상태다. 지난주 교수신문 기사를 스크랩해놓으려고 두리번거리다 김욱동 교수의 <번역과 한국의 근대>(소명출판, 2010)도 10분만에 찾았다. 손 닿는 곳에 놓았다는 책도 그 모양이다. 이런 상황에서 뭔가 글을 쓴다는 나 자신이 신기하다(가끔은 차포 떼고 장기를 두는 기분이다). 여하튼 책을 찾았으니 관련 리뷰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교수신문(10. 07. 19) “번역은 근대화의 빗장 연 열쇄” … 金億, 번역사의 분수령이었다  

2007년 한국번역비평학회가 출범한 이래 번역에 대한 관심 역시 증가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 번역의 역사를 훑는 통사적 접근은 드물었다. 이런 와중에 김욱동 서강대 명예교수(영문학)가 번역과 관련한 두 권의 책 『번역과 한국의 근대』(소명출판), 『근대의 세 번역가』를 상재해 눈길을 끌고 있다.

특히 두 책은 근대와 번역의 관계에 초점을 맞췄다. 『번역과 한국의 근대』는 번역과 한국의 근대가 일본과 달리 ‘重譯된 근대’란 익숙한 주장을 펼친다. 『근대의 세 번역가』는 서재필, 최남선, 김억 등 근대에 활동했던 세 명의 번역가를 통해 중역에서 직역으로 넘어가는 근대 번역의 모습을 인물에 집중해 풀어냈다.

번역은 한국 근대화에 어떤 역할을 했는가. 『번역과 한국의 근대』는 갑오개혁에서부터 기관지 <해외문학>이 발행되던 1920년대 말엽까지 한국번역의 역사를 육하원칙에 따라 심도 있게 밝힌다. 김 교수에 따르면 번역은 일본과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근대화의 빗장을 열어젖히는 열쇄가 됐다. 때문에 만약 서구 문헌이 번역을 통해 한국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한국의 근대화는 뒤늦게 이뤄졌거나 지금과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전개됐을 것이란 주장이다.

이중번역이 근대를 왜곡했다
김 교수는 한국의 근대를 ‘중역한 근대’로 결론짓는다. 이 같은 주장은 일본의 두 학자 마루야마 마사오와 가토 슈이치의 대담집 『번역과 일본의 근대』(1998), 리디어 류(Lydia H. Liu) 컬럼비아대 석좌교수의 『통언어적 실천』(1995)이 모태가 됐다. 특히 류 교수는 중국이 서양 문헌을 번역함으로써 근대화를 이룩했다고 주장하면서 중국의 근대를 ‘번역한 근대’라고 설명했다. 김 교수의 ‘중역한 근대’가 비롯되는 지점이다. 한국의 번역은 대개 서구 언어에서 일본어를 거쳐 다시 한국어로 번역하는 이중 번역이었다. 심지어 서구 언어에서 일본어와 중국어를 거치거나 제3세계 언어에서 서구 언어와 일본어를 거치는 삼중 번역도 있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의 근대화는 굴절되고 왜곡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자못 안타깝다는 지적이다.

일본인 번역가나 중국인 번역가들이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번역해 놓은 것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다 보니 때론 한국에는 필요 없거나 오히려 해롭기까지 한 문헌까지 무작위로 들어오게 됐다. 이것은 일찍이 1909년 1월 <대한매일신보>의 논설 ‘번역가에게 일고함’에서도 지적된 사항이다. 번역자는 서양 문헌을 번역하되 반드시 국익에 도움이 되는지를 먼저 따져야 한다는 내용이다. 유길준 역시 서구 문물의 맹목적인 수용을 경계하면서 겉모습만 따르는 개화를 ‘개화의 병신’이라고 날카롭게 꼬집는다. 중역의 문제는 언어의 문제가 아닌 근대 사상이 문제다.

그러나 김 교수는 중역의 문제를 당시 어쩔 수 없었던 차악의 선택이라 변호한다. “만약 이러한 중역마저 없었다면 우리는 어두운 중세의 터널을 지나는 데 좀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라며 “‘중역한 근대’가 바로 우리 근대의 모습이더라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김욱동 교수의 두 책은 한국번역사 연구에 선구적 역할을 한 김병철 교수의 『한국근대번역사연구』(1975), 『한국서양문학이입사연구』(1980)에 맥이 닿아있다. 그러나 기존의 번역 이입사 연구는 자료 수집 차원에 머물러 있었던 게 사실이다. 김욱동 교수는 김병철 교수가 이룩한 작업을 토대로 번역과 근대화의 상관관계를 규명함으로써 기존 성과를 한 단계 구체화 한다.

공리성의 굴레 벗어난 ‘김억의 번역’ 
『번역과 한국의 근대』가 근대 계몽기 번역이 한국 근대화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규명한다면 『근대의 세 번역가』는 한국 근대 문학을 본 궤도에 올려놓는 데 가장 공헌한 세 번역가를 집중 조명한다. 세 번역가는 바로 松齋 서재필, 六堂 최남선, 岸曙 김억이다.

김 교수는 이들 세 번역가를 역사의 시대 구분에 빗대 국내 번역사에서 서재필은 고대, 최남선은 중세, 김억은 근대에 해당한다고 설명한다. 서재필을 번역가로 부르는 데 다소 무리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는 분명 문명개화를 부르짖는 과정에서 번역의 중요성을 역설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또한 단편적이나마 직역을 피하고 의역을 주장하는 등 나름의 번역이론을 전개했다.

최남선은 신문화 운동의 일환으로 비록 중역의 형식을 빌려서나마 외국문학 작품을 한글로 번역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그는 <少年>(1908)과 <靑春>(1914) 등을 창간해 서구 문학작품을 집중적으로 번역해 소개했다.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작품 창작 과정에서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번역의 영향을 받았다.

한국 번역사는 김억을 분수령으로 중역에서 직역으로 전환한다. 김억은 특히 프랑스 상징주의 시와 러시아, 영국의 시를 집중적으로 번역했으며 1921년 한국 최초의 번역 시집 『오뇌의 무도』를 출간한다. 김 교수는 김억의 번역시가 한국 근대시에 미친 영향을 천착한다.

한국 최초의 순수문예지 <창조>(1919)와, <폐허>(1920)의 탄생에 산파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근대 문학으로 하여금 공리성의 굴레를 벗어나게 했다. 문학의 심미성과 쾌락성에 좀 더 무게를 실은 김억의 번역시로 인해 공리성에 기울어져 있던 당시 문단은 어느 정도 균형점을 찾게 된다. “김억에 이르러 비로소 번역은 일본 식민주의 굴레에서 해방을 맞이하였다”는 결론이 가능한 이유다.

김 교수는 “1920년대 말엽 한국 번역사를 화려하게 장식한 외국문학연구회의 활동을 미처 다루지 못한 것은 이번 저술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이라며 과제를 남겼다. 1926년 가을 일본에서 외국문학을 전공한 유학생들이 결성한 외국문학연구회는 그 이듬해 기관지 <해외문학>을 간행해 한국의 번역 수준을 한 단계 올려놓았다. 김 교수는 이들의 활동을 다룬 단행본을 계획 중이라며 다음을 기약했다.

국내 출간 도서 중 30퍼센트는 번역서가 차지한다. 그럼에도 국내 번역은 늘 오역시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오뇌의 무도』가 번역된 지 한 세기가 가까워 오는 지금 김 교수의 이 같은 작업이 국내 번역의 안정된 기반 구축에 한 계기가 될지 그 행보를 기대해 본다.(우주영 기자) 

10. 07. 25.    

P.S. <번역과 한국의 근대> 서문에서 저자가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대목이지만, 두 가지 사항을 덧붙인다. 먼저, 김병철 교수의 공적. "나는 이 책을 쓰는 데 누구보다도 기병철 교수님한테서 진 빚이 무척 크다. 교수님께서는 <한국근대번역문학사연구>(1975)를 집필하시어 한국번역사 연구에 그야말로 선구적인 역할을 하셨다."고 저자는 정당하게 지적한다. 일반 독자에겐 그냥 '자료집'처럼 여겨질 테지만 "한국번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는 마치 금강석 원석을 보관하고 있는 창고"와 같은 책이다. 러시아문학 번역사와 관련하여 나도 참고한 적이 있는데, 아쉬운 것은 도서관에서나 이용할 수 있는 절판된 책이라는 점. 시중에 남아있는 건 속편으로 나온 <한국현대번역문학사>(상, 하) 정도다(그마저도 알라딘에서는 품절이다). 다시 나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적어둔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제목에서 이미 풍기고 있지만 저자가 이 책을 쓰는 데 자극이 된 책 두 권. 기사에서도 "일본의 두 학자 마루야마 마사오와 가토 슈이치의 대담집 『번역과 일본의 근대』(1998), 리디어 류(Lydia H. Liu) 컬럼비아대 석좌교수의 『통언어적 실천』(1995)이 모태가 됐다."고 밝혔다. 저자는 두 사람의 책이 "내 책의 어버이"라고까지 했다. 한데, 특이한 건 <통어적 실천>이란 책의 번역서가 '리디아 리우'의 <언어횡단적 실천>(소명출판, 2005)이라고 나와 있음에도 참조되지 않은 점이다(참고문헌에도 빠져 있다). 저자가 번역서의 존재를 몰랐거나 의도적으로 무시한 모양새다. 전자일 걸로 짐작되지만, 문제는 출판사쪽. 다른 곳도 아니고 같은 출판사에서 낸 책의 서지사항을 "리디어 류의 <통언어적 실천>"이라고 기재되도록 '방치'한 건 너무 무심한 처사다. 그들은 자기가 무슨 책을 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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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지 2010-07-26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소명은 참 좋은 출판사인데... 마지막 부분은 좀 .. 희비극적이네요.

로쟈 2010-07-26 01:07   좋아요 0 | URL
주로 독자의 무관심을 탓하게 되는데, 가끔씩 출판사들도 무심할 때가 있지요.^^;

2010-07-26 06: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26 09: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26 1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번역이냐 반역이냐

격주간 <기획회의>(274호)에서 '<기획회의>'가 만난 사람' 꼭지를 읽었다. 인터뷰이는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이다. 밀턴과 칼라일 연구자이자 <서양 문명의 역사> 등 다수 번역서의 역자, 그리고 <번역은 반역이다>의 저자. 인터뷰의 타이틀은 '인문학, 지금부터 '새 역사'를 써야 한다'인데, 번역 문제와 관련하여 경청할 만한 대목들이 있어서 옮겨놓는다.   

우리의 경우 인문학의 황금기가 따로 없었기에 인문학 '부흥'을 말할 수 없다고 단언한 박 교수는 그럼에도 인문학 부흥을 위해 다져야 할 기본기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먼저 독서 문화가 뿌리를 내려야 하는데 우리 현실은 뒷걸음만 치고 있군요. 90년대만 해도 인문서 초판을 2,000-3,000부도 찍었는데 요즘은 500부, 1,000부더군요. 점점 더 책을 안 사본다는 거지요. 게다가 대학 교수들은 마치 올림포스 산 정상의 신들처럼 고고한 상아탑에 유폐된 채 대중과의 소통을 위해 노력하지 않습니다. 아니, 소통이 왜 필요한가에 대한 문제의식조차 없는 것 같아요. 평생 인문학 교수 했다면서 대중과 소통 가능한 저서 한 권 없이 정년을 맞이하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이런 분을 과연 인문학자라고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어요. 제도권 속에서 요구하는 논문만을 줄곧 쓴다는 점에서 '인문 기능인'이라고 해야지 않을까요?" 

그리고 인문학의 위기와 번역 문제는 어떤 연관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이렇게 답한다.  

"인문학이란 기본적으로 글읽기와 글쓰기라고 봅니다. 그런데 우리의 한글 콘텐츠는 정말 빈약하지요. 읽을 글이 태부족입니다. 한글은 창제된 후 상당히 오랫동안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으면서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고, 20세기 전반기에는 식민지 지배를 겪으면서 활용의 기회를 놓쳤습니다. 결국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비로소 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인데, 번역을 통한 양질의 한글 텍스트 확보는 시급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온전한 콘텐츠 확충을 위해서는 번역이 절실해요. 전 세계 모든 지식과 정보를 모국어로 습득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포부와 비전이 있어야죠. 모국어에 대한 이런 포부와 야망마저도 없다면 이런 나라를 '국가'라고 할 수 있을까요?" 

사실 '전시작전권' 환수도 버거워하는 국가인지라(이유야 어찌됐든 소위 '군사주권'을 방기하는 것인데) '지식주권'까지 바란다는 건 너무 무리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어지는 건 현재 우리나라의 번역과 인문학 수준에 대한 박 교수의 평가인데, 인터뷰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이다. 

"서구 편향적 교육을 받아온 우리는 이슬람 문명을 하찮게 보는 경향이 있지만 이슬람교가 창시된 직후 수백 년 동안 아랍인들은 찬란한 문명을 창조해냈습니다. 이슬람 문명권은 750년에서 900년 사이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저작'을 아랍어로 번역했지요. 그것을 12세기 서유럽인인 라틴어로 중역해서 만든 것이 기독교 신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결합한 스콜라 철학이고요. 그런데 21세기 우리는 아직도 한글 <아리스토텔레스 전집>이 없습니다. 아랍보다 1,100년, 서유럽보다는 900년 뒤졌네요.   
시인 김수영은 1960년대 중반에 쓴 산문에서 '1930년생'을 기준으로 세대를 구분했어요. 1930년 이전에 태어난 '구세대'는 해방되던 1945년에 15세 이상이었고 따라서 일본어를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이죠. 반면 1930년 이후에 태어난 '신세대'는 일본어를 읽지 못하는 세대입니다. 김수영은 구세대가 일본어를 통해 문학의 자양을 흡수한 데 비해, 신세대는 일본어 해독 능력의 결여로 지적 수준이 현저하게 떨어진다고 지적했습니다. 김수영은 신세대 문학 청년들을 '뿌리 없이 자라난 사람들'이라고 혹평했어요. 일본어를 읽을 줄 모른는 까닭에 세계문학의 흐름에서 차단된 그들에게 가장 결핍된 것은 '지성'이라는 겁니다. 그는 산더미같이 밀린 외국 고전을 우리말로 번역해 한글 콘텐츠를 일본어 못지 않게 늘리는 일이야말로 국운에 관계되는 문제라고 지적했어요.     
흔히 일본을 번역 천국이라고 하죠. 일본어로 세계의 고급 정보와 지식을 다 습득할 수 있어요. 2008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마스카와 도시히데 쿄토산업대 교수는 "영어를 못해 물리학을 택했다"고 농담할 만큼 영어와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았어요. 대학원 시험 때 지도교수가 그의 외국어 시험을 면제해줄 정도였고 평생 외국도 못 나가 여권도 없었습니다. 저는 한글만 갖고서도 노벨상을 탈 정도가 돼야 선진국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봅니다." 

19세기 메이지 시대에 아예 '번역국'을 설치하여 국가 주도하에 수천, 수만 종의 서양 학술서를 번역했던 일본의 처지와 견주어 보면 우리는 100년 이상 뒤진다는 것이 박 교수의 냉정한 평가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일본이 이미 19세기에 어머어마한열정으로 시작한 일을, 우리 사회는 지금도 그 필요성을 조자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번역에 대한 학계의 무관심과 제도적 냉대에 대해서 박 교수는 이렇게 꼬집는다. 

"인문학자들에게 정체성 자각이 없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자신의 모국어를 튼실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 인문학에 얼마나 큰 의미를 갖는지 성찰할 줄 몰라요. 미국이나 독일 등지의 대학원은 외국학(동양학) 연구자들에게 석박사 학위논문으로 번역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외국학을 할 경우 번역을 연구 실적으로 인정해야 마땅하지요. 그런데 그런 주체성에 입각한 사고와 발상의 전환을 할 줄 모르는 것 같아요. 자신이 한국사람이 아닌 미국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있나 봐요." 

마지막 멘트는 농담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최소한 절반은 '미국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사실 자녀들은 '미국인' 아닌가. 끝으로, 나도 개인적으로 관심을 환기시키려고 애쓰고 있는 주제인데, 번역 문제와 민주주의의 관련성이다.  

"외국어를 자유자재로 읽고 쓸 수 있는 인구는 극소수입니다. 미국에 가서 박사 학위를 10개 땄다고 해도 영어책을 한글책처럼 자유자재로 읽을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한글 콘텐츠를 확충해서 영어가 아니더라도 한글만으로 전 세계의 고급지식과 정보를 다 접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지식과 정보의 민주화가 되는 거지요.
조건이 여의치 않다고해서 번역가와 출판인들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외세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의병을 일으켜 위기를 극복한 역사적 경험을 갖지고 있어요. 어려운 상황일수록 긍지와 사명감을 갖고 좋은 번역서를 출간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출판의 정도를 걸어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번역의 힘'을 만끽하도록 하는 일, 그것은 21세기 지식정보사회의 민주화운동이며 나라살리기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의병운동'과 '나라살리기 운동'까지 가지는 않더라도 '지식정보사회의 민주화운동'으로서 번역이 갖는 가치는 충분히 인정받고 평가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에 대한 관심을 다시금 환기시키고픈 의도에서 박상익 교수의 인터뷰를 옮겨적었다... 

10. 07. 02.  

 

P.S. 박상익 교수와 마찬가지로 번역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온 영문학자 김욱동 교수가 번역과 한국 근대를 다룬 책 두 권을 한꺼번에 출간했다. <번역과 한국의 근대>(소명출판, 2010), <근대의 세 번역가: 서재필, 최남선, 김억>(소명출판, 2010)이 그 두 권의 책이다. 관심분야의 책이라 바로 주문을 넣고 기다리는 중이다. 우리는 100년 전에 번역 문제를 어떻게 인식했고 또 어떤 작업을 했던가 살펴볼 수 있겠다. 지금 우리가 하는 일 또한 100년 뒤에 똑같이 평가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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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바다 2010-07-02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올 선생이 거의 25여년 전에 했던 주장이 거의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군요... 그래도 지금은 많이 나아지지 않았나요?

물론 전체적인 문제의식에는 십분 공감은 하지만 예로서 거론 된 것들이 좀 부적절하다 싶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번역에 1100년 900년 뒤졌다고 하는 건 좀 어폐가 있는 것 같아요. 우리나라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전달된 후 100여년 지났을 테니 그 시점 이후부터 따져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기원전 인물임을 전제한다면 아랍어 번역이 나오는 데 거의 1000년 이상 걸린 셈이고 그리스 문명에 매우 친화적이었던 라틴어 번역도 아랍어 중역을 통해 거의 130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에 나온 셈이니까요. 물론 문화교류의 스피드를 그 시대와 단순 비교할 수는 없겠지요. 아마 번역에 열심이었던 일본에 아리스토텔레스 번역이 얼마만에 나왔나와 비교한 예를 들었다면 더 설득력이 있었을 거에요. 그리고 중세시대에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당시 학문의 중추였음을 생각해 본다면 과연 아리스토텔레스가 현대 사회에 그정도의 비중을 갖고 있는지도 의문이구요.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예는 암암리에 서구 중심주의에 대한 세뇌도 보입니다...

김욱동 교수님 책은 저도 관심이 가는 군요.^^

로쟈 2010-07-02 21:38   좋아요 0 | URL
약간 '과장'된 면도 있지요. 서양사 전공자라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예로 든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동시대 문제작들도 바로바로 소개되는 건 아니니까 저는 사정이 그다지 나아진 것 같지 않습니다. 하기야 번역을 기다리는 우리 '고전'도 산적해 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을 듯해요...

안티고네 2010-07-20 23:28   좋아요 0 | URL
그렇게 연대만 가지고 단순 비교하시면 곤란합니다.
아랍어 번역이라고 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이슬람 문명권에서의 번역이라고 해야겠죠. 이슬람신학의 쳬계화를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를 받아들인것이니까요. 622년 시작한 신흥종교 이슬람교가 750-900년에 모든 번역을 마쳤으니 이슬람기원으로부터 130년이 경과된 뒤 본격 번역작업을 시작한 거죠. 이슬람교 초창기 모든 것이 체계가 잡히지 않고 어수선한 그 시대에 불과 130년 지나서 공부 한번 제대로 해보자고 작심을 했으니 정말 대단한 겁니다.
그리스문명에 라틴어가 친화적이었다는 것도 고대로마시대에 국한된 얘기입니다. 로마 멸망 후 500년 넘도록 과거와의 엄청난 단절이 있었습니다. 서유럽 게르만족이 라틴어를 겨우 읽고 쓰기를 배우기 시작한 것이 샤를마뉴 시대인 800년경이었지만 11세기 중반까지 서유럽의 문맹률은 99% 이상이었습니다. 대단한 문맹시대였죠. 샤를마뉴 황제도 문맹이었으니 말 다했죠. 한마디로 거의 동물처럼 산겁니다. 굶주림에 허덕이면서...유럽은 1050년 이후에야 겨우 농업혁명으로 경제가 피어나고 먹고살만해져서 교육시설이 늘어나고 라틴어 해독능력자도 많아진거죠. 그러니 기아상태에서 벗어나고 사람답게 산지 1세기가 채 안되어서 비록 중역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를 번역한 겁니다.
그때와 지금의 시간을 똑같은 시간이라고 인정한다 해도(그럴 리가 없지만) 우리는 그들보다 동작이 신속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현대의 엄청난 변화속도를 감안하면 우리는 그야말로 느려터진 굼벵이 수준이고요.
그리고 로쟈 님이 말씀하셨지만 서양사 전공자가 아리스텔레스 예를 들었다고 '서구중심주의의 세뇌' 운운하는 것은 생뚱맞은 오바로밖에는 안 보이네요. 모국어로 세계의 모든 지식을 습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서구 중심주의로 딱지 붙이는 건 심히 억지스러워 보입니다. 비판을 하면 좀 멋져 보이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공정성은 있어야겠죠?

알비스 2010-07-04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 출판 뿐만 아니라 음반시장을 봐도 일본이 부럽게 느껴집니다. 어느 나라에서도 구하지 못하는 음반을 일본에서는 구할 수 있을 정도로 정보를 기록하고 보관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죠.
그리고 요즘 출판업계에서도 서서히 전자책이 도입이 되고 있는데 열악한 우리 출판계에 이것이 대중화 되면 불법복제로 출판상황이 더욱 더 악화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섭니다.

로쟈 2010-07-05 08:50   좋아요 0 | URL
촐판계에서도 불법복제 차단 기술에 대해선 다들 회의적이더군요...
 

대출할 책이 있어서 동네 도서관에 갔다오다가 편의점에서 한겨레를 손에 들었다. 북리뷰보다 먼저 읽은 것이 황현산 교수의 칼럼인데, '불문과에서는 무얼 하는가'란 제목이 눈에 들어서다. 요즘 대학가에서는 인문학, 특히 어문계열 학과들의 통폐합(상투어론 '구조조정'이라고 한다) 문제가 분란거리가 되고 있는데, 무엇이 문제인가를 생각해보게 한다. 정작 이런 '생각'이 필요한 이들은 이런 칼럼도 읽지 않을 테고, 이런 서재에도 드나들지 않을 테지만. 아래 사진은 어제 학교측의 '구조조정'에 반대하여 중앙대 학생들이 삭발식을 하는 장면.  

한겨레(10. 05. 01) 불문과에서는 무얼 하는가   

우리 세대가 대학을 다닐 때 지방에서 상경한 학생들은 주로 두 사람이 방 하나를 같이 쓰는 하숙집에서 기거했다. 내가 만난 ‘룸메이트’ 가운데 법대생이 둘 있었다. 하나는 노무현 대통령 시절 노동부 장관을 지낸 이상수 변호사다.

이 변호사는 학창시절 온갖 책을 가리지 않는 독서광이었고, 글을 잘 썼으며, 입을 열면 시정이 넘치는 말을 쏟아냈다.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또 한 사람은 오로지 고시공부에만 전념하는 학생이었다. 새벽부터 밤까지 도서관에서 살았다. 나도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은 크게 뒤지지 않았지만 그에 비하면 내 공부는 늘 산만했다. 어느 날 그가 나한테 왜 고시공부를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자기도 그 질문이 뜬금없다고 느꼈던지 어조를 갑자기 힐난조로 바꾸었다.

불문과에서는 도대체 뭐 하는 거지? 나는 고작 이렇게 대답했다. 불문학과니까 불문학을 하지. 대답이 아니라 대답의 회피였다. 그러나 저 고시생의 확실하고 단단한 신념 앞에서 내 공부의 내용과 목표를 차근차근 이야기한다는 것이 나로서는 너무나 아득한 일이었다. 문제는 내 생애에서 이렇게 질문해오는 사람이 그 사람으로 끝난 것이 아니란 점이다.

언젠가는 교육부의 관리가 프랑스의 불문학박사보다 한국의 불문학박사가 더 많다는 얼토당토않은 낭설을 티브이 방송으로 퍼뜨렸으며, 가끔은 대학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이제는 영어 하나면 어디서나 통하니까 프랑스어 교육은 필요 없지 않으냐고 넌지시 묻는다. 교육부 관리의 말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프랑스어 교육 불필요론 앞에서 나는 프랑스어가 무역이나 여행을 하기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거나(실은 그런 일에도 여전히 필요하지만), 불어불문학과에서 프랑스어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먼저 해야 하는데, 상대방은 이어질 말을 듣고 싶은 기색이 아니다. 



프랑스의 역사가 현재 세계의 문화적·정치적 지형도의 형성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나, 프랑스어로 작성되었으며 지금도 작성되고 있는 많고도 중요한 문헌에 관해서는 말할 틈조차 없다. 그 질문은 처음부터 내 의견을 듣기 위한 것이 아니라 봉쇄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내가 사회의 발전에서 앞으로 오게 될 세계의 그림을 문학이 항상 먼저 그려왔으며, 우리 사회의 민주화 과정에서도 그 점은 마찬가지라고 말한다면, 그는 어쩌면 자신의 세계관에 적대할 사람들을 불어불문학과에서 기르고 있다고 아연 긴장하게 될지도 모른다.

사실 불어불문학과를 비롯한 유럽어문학과는 졸업 후 취직이 특별히 어려운 학과도 아니다. 대기업에 무더기로 취직하는 것은 아니지만, 언론계에서 연예계까지 각종 문화산업의 미묘한 자리에는 유럽문학과 출신들이 어김없이 끼어 있다. 다양한 장르의 문필가들은 말할 것도 없고, 유럽문학으로 함양한 개성과 재능을 토대로 특별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영화감독, 작곡가, 디자이너도 적지 않다. 외국문학을 포함한 인문학의 효과는 우리가 마시는 공기처럼 이 삶의 안팎에 퍼져 있으나 그것을 의식하는 사람은 적다. 그 효과가 어디서 오는지 아는 사람은 더욱 적다. 불어불문학과에서 무엇을 공부하는지 설명하기가 그만큼 어렵다.

그러나 이 말은 해두자. 어느 젊은 출판인이 교수신문에 칼럼을 기고하여, 근래 프랑스에서 발간된 인문학 서적들을 번역하는 일이 시급한데, 마땅한 번역자를 구할 수 없다고 한탄했다. 그 까다로운 문장을 읽어내고, 그 의미를 깊이 파악하고, 그것을 우리의 구체적인 삶과 연결지어, 이 서적들을 번역해낼 만한 소수의 사람들은 저 모욕적인 질문을 자주 받으며, 제 공부의 터전에 위기까지 느끼면서 노력해온 사람들이다.(황현산 고려대 불문학과 교수, 문학평론가)  

10. 05. 01. 

P.S. 그 '어느 젊은 출판인'의 칼럼은 얼마전에 나도 읽었는데, 아래와 같은 내용이다.    

교수신문(10. 04. 20) 번역자를 찾을 수 없는 이유

매년 엄청난 종수의 학술서들이 쏟아져 나온다. 출판 통계에 따르면, 그 가운데 번역서가 차지하는 비율은 세계 선두권에 있다고 한다. 예전에는 일본에서 번역된 학술서를 보고 기획을 했지만, 지금은 일본보다 빨리 학술서가 번역ㆍ출판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하나의 현상을 여러 가지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겠지만 솔직히 책을 만드는 사람으로서는 반가운 현상으로 일단 생각해본다. 우리 학문의 자생성 문제를 떠나 이제 인문학은 ‘세계’의 문제에 대해 사유하는 단계로까지 우리의 시야를 넓혀놓았기 때문에 우리 바깥에서 논의되고 사유되는 문제들을 신속하게 ‘수입’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근들어서는 학술 번역을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인문 출판인들이 많다. 가장 큰 이유는 책을 번역할 ‘전공자’가 점점 고갈돼 간다는 데 있다. 지난 20여 년간은 인문학술 번역 출판이 풍요를 누리던 시기였다. 1980년대와 90년대를 거쳐 200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다양한 분야의 전공자들이 곳곳에 포진하고 있어 출판인 입장에서는 어떤 한 책에 대해 1순위, 2순위 하는 식으로 번역자 레벨을 매기는 분야까지도 있었다. 그렇게 많은 전공자들이 어떻게 생겨났을까. 시대상의 반영이겠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순수’한 학문적 열정이 지금에 비해서는 훨씬 많았던 때가 아니었나 싶다. 그래서 푸코와 들뢰즈를 찾아 프랑스로, 하버마스를 찾아 독일로 떠나거나 또는 이 땅에 머물면서 최한기나 정약용을 공부했다. 물론 지금 이 시대에도 그런 연구자들이 많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지금 우리 시대의 분위기는 ‘순수’ 학문에 대한 열정이 많이 식어버린 것 같다는, 다시 말해 때로는 학문이 순수 학문으로서 존재해야 할 그 가치를 잃어가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른바 상아탑 같은 학문적 토대도 필요할 터인데, 지금 우리 시대는 기능적 지식인 양성에만 힘을 쏟는 것 같아 씁쓸하다. 물론 우리 사회에 기능인이 많아야 함은 당연하다. 그러나 기초과학 없는 응용공학이 존재할 수 없듯이,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사회적 인프라로서 튼실하게 축적된 인문학적 사유이다.

최근 고려대생 김예슬 씨의 사건이나 중앙대 사태는 그런 점에서 우리 대학 사회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 될 터이다. 기능적 지식인 양성에만 몰두하는 대학 내에서 철학이니 역사학이니 사회학이니 하는 학문들은 ‘찬밥’ 신세가 돼버렸다. 공부하고자 하는 학생들도 별로 없고, 더 많은 공부를 위해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유학 가는 사람도 거의 없다. 이른바 ‘스펙’ 쌓기에 여념이 없는 대학의 분위기 속에서 고고한(?) 순수 인문학적 열정을 쏟기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결국 전공자의 절대 빈곤 속에서 ‘다양성의 담론’이 생명인 인문학은 그 토대를 잃고 말았다. 지금도 우리 밖에서는 새로운 이론들과 사상들은 버거울 정도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 옥석을 가려 우리 것으로 만드는 것이 전공자와 인문 출판인의 임무일 텐데, 그 수가 절대적으로 빈곤하다 보니 여기저기서 아우성이다. 새로운 이론과 사상을 국내에 소개하기 위해 적당한 번역자를 눈 씻고 찾아봐도 해당 전공자를 찾을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현재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책을 이탈리아어 원어로 읽고 제대로 번역할 전공자가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의 철학이 일류냐 이류냐를 따지는 것은 이후의 일이고, 우선 중요한 것은 그것을 우리말화해 우리 사유 속에서 논의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탈리아를 예로 든 것이 너무 협소할까. 조금 시야를 넓혀 프랑스 철학으로 눈을 돌려도 형편은 별반 나을 것이 없다.
 
출판인의 입장에서 학술 번역과 관련한 이러한 안타까운 현실은 대학 밖의 시선이겠지만, 이미 대학 내부 구성원 사이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는 현상은 그나마 기능적 지식인에 머무르고자 하는 데 대한 저항으로 읽혀 다행스럽다. 대학을 구성하는 다양한 구성 요소들이 오직 취업과 국가경쟁력만을 향해 일방통행할 때,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문화적 근간은 사상누각이 될 것이다. 칼 폴라니는 “우리 시대에서 이제 인간은 사회 실재의 현실 앞에서 스스로 체념하게 되었으며, 이는 인간이 예전에 믿었던 모습의 자유가 종말을 고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렇게 가장 밑바닥의 체념을 받아들이게 되면 다시 새로운 생명이 솟구치게 된다”고 말했다. 지금 우리가 그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닐까.(이승우 도서출판 길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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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공부는 여가가 아니다
    from 라무레트의 입맞춤 2010-05-01 22:32 
    가끔 연구실 울타리를 벗어나, 직장인이 된 학부시절 친구들을 만나거나, 혹은 술에 취해 택시 아저씨와 예상하지 않았던 친밀한 사담을 나눌 때, 나오는 초반부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oo야, 너 지금 전공이 뭐라고?", "학교는? 그럼 전공은?" 그럼 나는 머릿속에 조금 계산을 해야 한다. 내 전공명을 미리 밝히자면, "영상커뮤니케이션"이다. 좀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 그럼 뭐 영화 이런거 공부하나?"이렇게 묻는다. 하지만, 대부분 "
 
 
푸른바다 2010-05-02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마침 황현산 교수님의 컬럼을 읽었고 '교수신문의 칼럼'이 궁금하던 차였는데 마침 올려주셨군요. 한마디로 말해서 本을 망각하고 末의 花만 쫓고 있는게 한국의 자칭 주류세력의 불행입니다. '崇本息末'의 의미를 좀더 깊이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로쟈 2010-05-02 16:54   좋아요 0 | URL
이심전심이네요.^^

노이에자이트 2010-05-02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양이라면 미국만 있는 줄아는 사람들...아...답이 안 나오네요.

로쟈 2010-05-02 23:29   좋아요 0 | URL
소위 '주류'죠...

사과나무 2010-05-26 01: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교수신문에서 번역 문제에 대한 황현산 고려대 교수의 칼럼을 옮겨놓는다. 현 한국번역비평학회장이기도 한 황교수는 번역 행위의 다층적 의의와 번역 비평/평가의 필요성에 대해서 짚어주고 있다. 안 그래도 개인적으론 번역의 바다에 '잠수'하고 있는 형편이어서 눈길이 가는 칼럼이다.    

교수신문(10. 04. 26) 번역과 학문적 위선  

극렬한 찬성과 극렬한 반대는 많아도 비평은 없는 것이 우리 사회라는 말이 있다. 이 비평부재의 현상은 번역이 관련될 때 더욱 두드러진다. 몇 년 전에 외국문학을 전공한 어느 교수가 한 유명 번역가의 번역문에 나타나는 허점들을 격렬한 어조로 지적해 한 권의 책으로 발간한 적이 있다. 내 친구이기도 한 번역가는 그 지적에 수긍하면서도 자신이 소홀한 번역가를 넘어서서 ‘나쁜 놈’으로까지 매도된 데에 깊은 불만을 표시했다. 여기서도 역시 문제가 되는 것은 비평의 풍토이다.  

번역자는 신문·잡지의 단평을 벗어나서 자기 번역을 평가받을 기회가 없었으며, 교수는 자신이 발견한 중요한 오류와 그 처방을 공개적으로 개진할 기회가 없었다. 말해야 하나 말하지 못한 말들은 상처가 되고, 그 상처에서 어느 날 화산이 폭발하듯 솟아나온 말들은 다른 사람에게도 그만큼의 상처를 주기 마련이다. 상처는 늘 비평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비평 없는 사회의 분노에서 온다. 



한국번역비평학회가 창립된 것은 4년 전이다. 그 동안 학회는 월례발표회와 춘하추동의 학술발표회를 통해 뛰어난 학문적 성과는 거두지 못했어도 몇 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확인할 수는 있었다. 무엇보다도 한 언어로 실현된 텍스트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작업인 번역은 그 텍스트에 담긴 진리성과 미적 효과를 다시 검토하는 매우 정교한 절차라는 점이 자주 논의 됐다. 인간사회에 어떤 절대적 언어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 언어와 관련해 모든 언어는 하나의 방언일 터인데 한 방언의 역량을 토대 삼아 그 사용자들의 역사와 풍속과 주관성 안에서 성립된 텍스트를 다른 방언의 역량을 토대로 다른 주관성 안에서 다시 재현하는 번역 작업은 그 텍스트를 다른 문화에 비춰 객관화하는 한 방편이 된다. 이 객관화의 시련은 그 텍스트를 최초에 성립시킨 언어뿐만 아니라 그것을 번역으로 재현하는 언어에도 해당되는 것은 물론이다.

번역할 가치가 있는 텍스트라면 어떤 텍스트건 그것을 우리말로 번역하기 위해서는 어휘적으로건 통사적으로건 논리적으로건 미학적으로건 우리말에 본래 내장된 힘을 밑바닥까지 동원해야 하며 그 텍스트를 둘러싼 문화와의 관계에서 우리의 역사와 풍속과 주관성을 다시 성찰해야 한다. 두 언어에서 말과 사물의, 생각과 표현의 관계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도 이때이다. 따라서 진지한 번역자가 자기 작업에서 현대 인문학의 크고 작은 주제들을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학술 테스트나 문학 텍스트의 번역은 외국어 텍스트에 대한 우리말 텍스트를 마련하는 일에서보다도 언어에 미치는 이 번역 효과에서 더 중요하다. 번역비평은 궁극적으로 이 번역효과를 토론하는 데 이르러야 한다.

번역평가의 이론과 방법은 학술 테스트나 문학 텍스트보다도 외교문서, 계약서, 제품의 매뉴얼 등을 대상으로 하는 실용번역에서 먼저 정립됐다. 이런 문서의 번역에는 한 국가나 기업의 운명, 때로는 개인의 생사가 걸려 있는 만큼, 그 평가도 오류의 지적에 치중하게 돼 있는 것이 당연하다. 문학 텍스트라 하더라도 오류의 지적은 매우 중요한 사항이지만 현재 주로 사용하는 평가방법 곧 충실성과 가독성이라는 말로 환원되는 평가방법은 의미이해의 층위, 문체의 적합성, 낱말의 경제적 효과, 언어역량의 개발 등 숱한 문제를 섬세하게 다룰 수 없는 탓에 시비를 토론으로 발전시키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평가방법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좋은 번역 이를테면 번역시학이나 비교문체론 같은 좋은 비평을 촉발시킬 수 있는 번역이 드물다는 점도 말해야 한다. 질 높은 번역은 질 높은 비평의 토대가 된다.

늘 되풀이하는 말이지만 번역과 번역가의 낮은 위상도 문제가 된다. 정신적인 가치까지도 시장이 평가하는 사회에서 전문번역가들이 감내해야 하는 고투는 말할 것도 없고, 생활이 안정된 대학교수들에게도 모든 업적이 양으로 평가되는 평가 체제에서는 정교한 번역을 기대하기 어렵다. 많은 노력과 시간을 투자한 연구번역이 소논문 한 편의 대접을 받거나 받지 못하는 정황은 일종의 학문적 위선과 연결된다. 우리말 사전에는 번역서에만 나오거나 그 쓰임이 번역에서 특별한 어휘들이 등재돼 있지만 번역서의 문장이 용례로 소개된 적은 한 번도 없다. 번역비평에 관심을 지닌 사람들은 학문의 이런 위선과도 싸운다.(황현산 고려대·불어불문학과) 

10. 0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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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0-04-27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과 사전편찬을 무시하는 나라는 문화대국이 될 수 없습니다.

로쟈 2010-04-28 20:23   좋아요 0 | URL
'문화'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지부터 둘러봐야 하지 않나 싶어요...

노이에자이트 2010-04-29 00:02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4-28 0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이에자이트님 말에 공감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4-29 00:0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미지 2010-04-30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국역본 읽을 만한가요?...

로쟈 2010-05-01 09:48   좋아요 0 | URL
2종의 국역본을 같이 읽으시면 될 듯합니다. 국내에선 최고 권위자들의 번역입니다...

BonBon 2010-05-10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통번역을 전공하는 대학생인데요, 많은 걸 생각하게 만드는 글이네요..
좋은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