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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교수신문에서 <로마 제국 쇠망사> 번역자의 번역기를 옮겨놓았는데, '번역을 말한다' 코너가 계속 연재되는 모양이다. 이번주에는 윌리엄 호스킨스의 <잉글랜드 풍경의 형성>(한길사, 2007)이 다루어졌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6810). 필자는 책의 번역자인 이영석 교수이다. 자료삼아 스크랩해놓는다(이 연재는 아마도 계속 옮겨놓을 듯싶다). 

교수신문(08. 09. 16) 역사적 지층의 의미를 찾아서

윌리엄 호스킨스의 『잉글랜드 풍경의 형성』은 영국사학계에서 역사지리학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연 고전으로 평가받는다. 호스킨스는 우리의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단순한 자연이 아니라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역사적 형성물이라는 전제 아래 잉글랜드의 구릉과 평야, 경지와 목초지, 촌락과 도시 등을 탐사한다. 이 책의 개요는 1970년대 중엽 BBC 텔레비전에 방영돼 사람들의 열띤 호응을 얻었다.

내가 이 책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지금부터 거의 20년 전의 일이다. 그 당시 나는 존 해리슨의 『영국 민중사(The Common People of Great Britain)』를 번역하고 있었는데, 거기에서 발췌한 호스킨스의 글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 후에도 영국사회사를 다룬 책들에서 간혹 그 책을 인용한 구절을 발견하곤 했다. 1990년대 중엽 런던의 한 헌책방에서 펭귄판 책을 구입하기는 했지만, 서가에 꽂아놓았을 뿐 눈여겨보지 않았다.

1990년대 말 근대 영국 사회경제사를 다룬 연구서를 내놓은 후, 나는 자신의 역사 연구에 깊은 회의감을 느꼈다. 아마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 탓이 아니었나 싶다. 우선 무엇보다도 무미건조한 사회사 서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렸다. 역사서술의 문학성을 중시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이곳저곳에 눈길을 돌리며 암중모색하던 내게 호스킨스의 책은 한 줄기 섬광처럼 감동으로 다가왔고 새로운 지적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2003년 영국에 체류하면서 이 책을 본격적으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 해 내내 나는 호스킨스의 체취에 깊이 빠져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사료에서 문제를 찾고 그 문제를 수수께끼처럼 풀어나가는 그의 지혜와 잉글랜드 자연풍경 하나하나에 기울이는 깊은 애정과, 그리고 특히 그의 뛰어난 문학적 상상력에 사로잡혔다. 미들랜즈 동부의 시골길을 걷다가, 책에서 읽은 정경이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호스킨스의 책은 농촌 풍경에 남아 있는 ‘역사적 지층’의 의미와 비밀을 해독하려는 시도다. 여기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하나의 풍경이 역사적 시간을 중층적으로 담고 있다는 점이다. 비유하면 풍경은 ‘거듭 새긴 양피지’(palimpsest)와 같다. 우리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는 역사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자취와 그들이 그린 흔적이 남아 있다.

후대 사람들은 그들 선대의 자취를 반쯤 지우고 그 위에 자신들의 삶의 흔적을 덧칠한다.  호스킨스는 바로 이 거듭 새긴 양피지에서 과거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뒤쫓는다. 현재의 촌락과 발굴된 촌락터를 답사하면서 그곳에서 옛날 켈트인들의 정착과 후대 앵글로색슨인들의 이동과 중세 농민의 생활과 그리고 상승하는 부농의 새로운 모습을 그림처럼 되살린다. 말하자면 낯익은 풍경에 대한 해독을 넘어 그 속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재현하는 것이다.

호스킨스는 자연 모두가 사람의 활동과 관련되며 우리가 무심히 지나치는 미미한 경관과 풍경 속에도 인간의 삶이 깃들어 있다는 믿음을 가졌다. 그는 풍경이라는 창을 통해 인간의 삶의 모습을 되살린다. 그렇다면 2차 대전 직후 호스킨스를 비롯한 일단의 역사가들이 풍경의 역사에 관심을 기울인 까닭은 무엇인가. 그들의 움직임은 자연 자체의 위기를 목격하기 시작한 데서 비롯한다.

2차 대전의 폐허와, 그리고 냉전기에 군사기지와 군비행장을 건설한다는 명목으로 구릉과 경지와 산림을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들은 잉글랜드 지방 곳곳을 답사했다. 물론 역사적 풍경을 탐사하는 작업은 호스킨스 개인의 노력만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20세기에 들어 새롭게 대두한 지명 연구와 고고학과 그리고 무수한 아마추어 지방사가들의 작업에 힘입어 호스킨스와 그의 동료들은 잉글랜드의 역사 속에서 풍경을 재구성하는 일에 매달릴 수 있었다. 사실 호스킨스의 책은 시론적인 것이며, 그의 책이 나온 뒤에 각 지방별로 풍경의 변화를 탐사하는 작업이 계속 이어졌다.

2005년판 서문에서 키스 토머스는 호스킨스의 책이야말로  20세기 ‘불후의 명작’ 가운데 하나라고 단언한다. 사실 호스킨스가 이 책을 펴낸 1950년대 중엽만 하더라도 그의 목소리는 주위의 소음에 묻혀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오히려 그의 나직한 목소리는 한 세대가 지난 후 환경과 생태에 대한 우려와 관심이 증폭되면서 설득력을 얻게 됐다.

호스킨스의 책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높은 호응과 관심을 얻고 있다. 특히 근래 영국의 환경과 생태는 1950년대 냉전기의 변화보다도 더 커다란 변화를 겪고 있는데, 오늘날 호스킨스에 대한 관심이 다시 고조되고 있는 것 또한 의미심장한 일이다. 영국 경제의 호황과 더불어 곳곳에서 새로운 건축물이 들어서고 대규모 토목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호스킨스가 살아 있다면, 그는 냉전기의 폐해보다도 현재의 변화가 더 심각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2005년 판 서문을 쓴 키스 토머스도 두 세대 전 호스킨스가 느꼈던 것보다 더 심한 자괴감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암암리에 내비친다. 돌이켜보면, 근대의 지적 전통에서 자연은 사람과 상호작용하는 유기체가 아니라, 그 사람들에 의해 개조되고 변형되는 수동적 존재로만 여겨졌다.

그리하여 자연은 언제나 사람들의 삶에 걸맞게 변형된 ‘인간화된 자연’이었다. 그 전형이 풍경이다. 이제 자연은 더 이상 자신의 인간화를 감내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세계 곳곳에서 자연의 복수가 시작되고 있다. 이제는 풍경에 가까이 다가서려고 한 호스킨스의 작업을 넘어서 인간화된 자연이 과연 앞으로 지속 가능한지 심각하게 되묻지 않으면 안된다.

호스킨스의 책은 자연과 환경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해준다. 우리는 잃어버린 자연과 환경만을 뒤쫓아 갈 수는 없다. 그러나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관심을 내면화하고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잃어버린 자연을 일부나마 다시 되살리며 남아 있는 자연이 우리의 삶과 공존할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책을 번역할 때 한 가지 궁금증이 오랫동안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동안 우리의 풍경은 어떻게 변했는가.  무엇을 잃어버리고 또 무엇을 얻었는가. 지난 반세기에 걸쳐 산업화라는 이름 아래 급속하게 뒤바뀐 우리 풍경에 관해 과연 호스킨스의 작업과 같은 그런 연구와 탐사가 가능할 것인가.(이영석 광주대 서양사)

08. 09. 16.


 

 

 

 

 

 

P.S. 생소한 책이지만 리뷰를 읽다 보니 또 관심을 갖게 된다. 역자의 <역사가가 그린 근대의 풍경>(푸른역사, 2003)이 이 책의 번역과정에서 얻은 소출임을 짐작할 수 있다. 나란히 읽어봄 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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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9-17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를 매혹한 역사가들>에서 호스킨스를 소개하더니 이번엔 번역을 냈군요.영국 사회사가들을 많이 소개하더라구요.

로쟈 2008-09-17 17:43   좋아요 0 | URL
저는 풍경이라고 해서 '풍경화'만 떠올렸어요.^^;

릴케 현상 2008-09-17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본 <추억은 방울방울>이라는 애니메이션 대사가 떠오르네요


도시오: 도시사람은 삼림과 숲과 물이 흘러가는 것을 보고 곧, 자연이다. 자연에게 감사하겠죠. 그렇지만, 산은 물론이고 시골의 경치라는 녀석은 모두 인간이 만든 것이죠.
다에꼬: 인간이?
도시오: 예. 농부가.
다에꼬: 저 삼림도?
도시오: 예.
다에꼬: 저 숲도?
도시오: 예.
다에꼬: 저 작은 시내도?
도시오: 예. 논과 밭뿐이 아닙니다. 모두 분명히 역사가 있습니다. 어디어디의 증조할아버지가 심 었다든지 개간했다든지, 먼 옛날부터 장작과 낙엽 등과 버섯을 얻어 왔다든가……
다에꼬: 아아……그렇군요.
도시오: 인간이 자연과 싸우기도 하고, 자연으로부터 여러 가지 것을 받기도 하며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 훌륭하게 만들어져 온 것이 경치예요. 이것은.
다에꼬: 인간이 없었다면 이런 경치로 되지 않았다는?
도시오: 농부는 끊임없이 자연으로부터 얻음을 계속하지 않는다면 살 수 없게 되겠죠?
그렇기 때문에 자연에게도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농민 쪽도 여러 가지 일을 해주어 온 거죠. 말하자면, 자연과 인간과의 공동작업이라고 하는 것, 그런 것이 아마 시골이라 할 수 있겠죠.
다에꼬: 그렇군……그래서 그리웠던 거였구나…… 태어나서 자랐던 일도 없으면서 어째서 이곳이 고향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일까……계속 생각해 왔었어요. 아……그래서였구나……
다카하타 이사오, 에니메이션〈추억은 방울 방울〉중에서

로쟈 2008-09-18 00:12   좋아요 0 | URL
대사를 다 받아적으신 건가요?^^

릴케 현상 2008-09-18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그럴리가요^^

2008-09-23 0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9-23 14: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최근 프랑스 작가 마르탱 뒤가르의 소설 <티보가의 사람들>(민음사, 2000/2008)이 완역됐다. 이미 지난 2000년에 완역된 줄 알았더니 '별권'이 하나 남아있었고, 이번에 나온 것이다. 이 대하장편소설에 '일생'을 바친 정지영 교수의 노작인데, 관련 인터뷰가 있어서 스크랩해놓는다.  

동아일보(08. 09. 11) 정지영 교수 “오역은 죄… 준비 안된 번역 경계해야”

소설 하나를 번역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면 고개부터 갸우뚱거릴 사람이 많다. 하지만 정지영(71·사진) 서울대 불문과 명예교수는 스스로 그 길에 뛰어들었다. 정 교수는 1984년부터 프랑스 작가 로제 마르탱 뒤가르의 소설 ‘티보가의 사람들’(민음사)의 번역에 나서 최근 ‘별권·회상’ 편으로 완역을 마쳤다. 이 소설은 1922년부터 1940년까지 18년여간 발표된 작품으로 번역본은 6권으로 완간됐다. 24년간 원고지 2만 장이 넘는 대역사를 마친 노학자는 어떤 소회를 가슴에 담았을까. 10일 오전 카랑한 목소리로 너털웃음을 던지는 정 교수의 말을 들어봤다.(정양환 기자) 



○ “학자로서 조금이나마 학문에 기여해 뿌듯”

―오랜 작업을 끝내 기분이 남다를 듯합니다.

“시원합니다. 이제야 내 할 바를 다한 것 같아요. 불문학자로 살아온 인생, 조금이나마 학문에 기여를 했다는 생각도 듭니다. 허허.”

―‘티보가의 사람들’을 번역하게 된 연유가 궁금한데요.

“1963년인가, 대학원에 있을 때였죠. 은사이신 이휘영 선생께서 이 소설 가운데 ‘회색 노트’ 편 번역을 우리에게 맡겼습니다. 변변한 불한사전도 없던 시절이라 포기했죠. 이후 마음에만 담아뒀는데 1984년 청계연구소라는 출판사를 하던 동서가 권유를 합디다. 일본에선 위대한 소설이라며 많이 읽는데 왜 국내엔 번역본이 없냐고요. 안 그래도 기억이 생생한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지요.”



―소설을 간단히 소개해주신다면….

한 편의 대하소설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노년까지 인간이 겪고 생각하는 보편적인 것들이 담겼습니다. 알베르 카뮈는 이 소설의 작가를 ‘영원한 현대인’이라고 불렀죠. 20세기는 물론이고 21세기에 읽어도 문제가 없습니다. 소설을 끝낸 작가에게 다음 작품은 뭐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말했답니다. ‘여기에 모든 게 있으니 더 쓸 것이 없다’고.”

○ 번역 도중 3년 걸려 불한사전 펴내기도

―번역하는 데 어려운 점도 많았겠습니다.

“힘들 게 뭐가 있겠소, 얼마나 즐거운 일인데. ‘티보 가의 사람들’은 재밌는 소설입니다. 읽다 보면 끌려들어가요. 언어학적으로도 흥미롭죠. 프랑스 사전들도 단어 용례를 쓸 때 이 소설의 문구를 많이 가져다 쓸 정도지요.”

―불한사전을 내신 적도 있는데요.

“번역을 하다 보니 아쉬운 점이 많았어요. 다음 세대는 좀 더 편하게 프랑스어를 배웠으면 하는 바람이었습니다. 1995년부터 졸업생 20명과 3년 동안 작업해 ‘프라임 불한사전’을 펴냈습니다. 언어학자들은 사전 편찬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정확한 해석을 도와주는 사전이야말로 문화와 문화를 이어주는 가교입니다.”

―우문인지 모르겠지만 번역이란 무엇입니까.

번역은 글 쓰는 것과 똑같습니다. 오랜 기간 공부해 실력을 쌓아야 합니다. 요즘 젊은 번역가들이 속성으로 번역물을 내놓는 것은 스스로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급한 오역은 원작가는 물론이고 독자에게도 죄를 짓는 거니까요. 인생도 마찬가지 아니오. 제대로 된 준비 없이는 일을 그르칠 뿐입니다.”

―평생의 작업을 마쳤으니 이제 뭘 하십니까.

“할 일 많습니다. 사전도 다시 손봐야 하고 공부할 것도 많고요. 건강에 문제없으니 계속 일해야죠. 몸이 허락하는데 아무것도 안 하는 건 죄악이지요.”

08. 09.15.

P.S. 관련기사를 검색하다 보니 작가 김영하씨가 <퀴즈쇼>(문학동네, 2007)를 낼 무렵에 한 인터뷰도 눈에 띈다. "그에게 대하소설을 쓸 생각이 없냐고 묻자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언젠가는 프랑스의 작가 R. 마르탱 뒤가르의 대하소설인 '티보가의 사람들'과 같은 작품을 꼭 한번 써보고 싶다"고 답했다."라는 기사다. 그의 마지막 소설이겠다.

내가 읽은 <티보가의 사람들>은 기사에서도 언급된 이휘영 교수 번역의 <회색노트>(문예출판사)가 전부다. 알려져 있다시피 <티보가의 사람들> 8부작 중 제1부에 해당하며, 유독 국내에서는 여러 종의 번역본이 출간되었던 작품이다. 고등학교 때 읽어서 주인공의 학창시절을 다루었다는 것 말고 지금은 기억에 남아있는 바가 거의 없지만. 완역본을 소장해둘 만한 여건이 되면 한번 다시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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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9-15 0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개인적으로 불어라는 '미지의 언어'를 조금이나마 곁눈질 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던 것도 돌이켜보면 다 저 프라임 불한 사전 덕분인데, 이는 <티보가의 사람들> 완역 출간이 '남 얘기' 같지 않게 너무나 반갑게 느껴지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도 이 완역 소식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축하받아 마땅한 일이라는 생각이 드네요(저도 5권까지가 완간인 줄 알았습니다^^;). 정지영 선생의 노고와 열정에 큰 박수를 보냅니다.

로쟈 2008-09-15 09:55   좋아요 0 | URL
제가 배울 때만 해도 민중서림판 불한사전이었는데, 세대 교체가 된 모양이군요.^^;

람혼 2008-09-15 23:17   좋아요 0 | URL
그러고 보니까 민중서림 사전의 편저자는 이휘영 선생이었고 프라임 사전의 편저자는 정지영 선생이었다는 흥미로운 사실에 생각이 미치면서, <티보가의 사람들>의 번역과 불한 사전의 편집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묘한 '연결 관계'를 감지하게 됩니다. 여담이지만, 로쟈님과 제가 딱 민중서림 사전과 프라임 사전 사이만큼의 세대차이(?)가 나는 것 같습니다.^^;

로쟈 2008-09-15 23:37   좋아요 0 | URL
네, 민중서림판이 아직 현역이어서 다행입니다.^^

paviana 2008-09-15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경이 시원스레 바뀌었네요.
고등학교때 저도 <회색노트>읽고 친구랑 교환일기 쓰던 기억이 나네요. 저도 아마 이휘영 교수번역의 책을 읽은거같은데 어째 저 표지를 보니 전혀 읽어보고 싶은 맘이 안드네요.아이들 보는 축약판 기분이에요.
언제 기회가 된다면 전권읽기에 도전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요.

로쟈 2008-09-15 18:42   좋아요 0 | URL
좋은 완역본이 있다면 더더욱 그렇죠.^^

딸기 2008-09-21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회색노트... 저도 그거 하나 보고 땡 쳤는데...
친구와의 회색노트 추억도 새록새록~

로쟈 2008-09-21 12:11   좋아요 0 | URL
여학교에선 유행이었나 보더군요...
 

얼마전부터 새로 완역되기 시작한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민음사, 2008)의 번역관련 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6780). '번역을 말한다'라고 분류돼 있는데, 연재물인지는 잘 모르겠다. 직접 이 완역본 시리즈에 참여한 번역자 송은주 씨의 번역체험담이어서 눈길을 끈다. '번역과 번역가'로 분류해놓는다. 

교수신문(08. 09. 08) 사료의 도서관, 유려한 문체의 정원에서 넋을 잃다

1776년부터 1788년까지 12년에 걸쳐 전 여섯 권으로 간행된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는 깊이 있는 통찰력, 방대한 분량에 담긴 상세한 기술, 해박한 역사적 고증 등으로 무수히 많은 로마사 책들 중에서도 대표적 작품으로 손꼽힌다. 유려한 명문으로 영문학사에서도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에 국내에 번역 소개된 『로마제국 쇠망사』는 일부를 간추린 발췌 번역본이나, 완역이라 해도 일어판의 중역본 정도가 고작이었다.

발췌 번역본은 여섯 권이나 되는 전체 분량을 한 권으로 줄인 것이어서 원작의 방대한 세계를 접하기에는 부족하고, 중역본은 일어판을 바탕으로 옮기다 보니 생소한 일본식 한자어가 여과없이 들어가고 지나치게 고어투로 서술됐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고전을 수용하고 연구하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원전의 충실한 번역이 우선돼야 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와 같이 이미 오래 전에 고전의 반열에 오른 주요 저작이 제대로 번역된 적이 없다는 것은 전공자들에게나, 역사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에게나 크게 아쉬운 일이다.

그런 점에서 『로마제국 쇠망사』의 번역 작업은 힘들지만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작업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번 번역판은 가장 뛰어난 편집판으로 인정받고 있는 J. B. 버리 판을 토대로 했으며, 전체 8300개 각주 가운데 버리가 편집한 각주 4700여개 중 본문 내용과 관계없는 350개만 삭제하고 나머지는 그대로 살린 국내 최초의 완역판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로마제국 쇠망사』는 서기 2세기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부터 동로마 제국의 멸망에 이르기까지 약 1400년 간의 역사를 다루었다. 기번은 이 장대한 역사를 다루면서 입수할 수 있는 모든 자료를 철저히 조사하고 연구한다는 자세를 취했다. 그가 수집하고 연구한 엄청난 양의 역사적 사료는 그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을 보여주는 유려한 문체로 한데 어우러져 방대한 大河劇을 이루었다. 기번의 최고의 미덕은 무엇보다도 실증적이고 균형잡힌 시각으로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면서도 엄청난 분량의 로마사를 다양한 인간군상들이 빚어내는 흥망성쇠의 장으로 박진감 있게 그려냈다는 점일 것이다.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역사 속에서 행하는 행동과 결단, 운명의 변전은 웬만한 문학작품을 능가하는 재미를 준다.



유려한 문장에 실린 생동감 넘치는 인물과 사건 묘사는 역사서는 딱딱하고 지루하다는 편견을 털어내며 이 작품이 어떻게 오랜 세월이 지나서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생명력을 지니게 됐는지를 보여준다. 기번은 성실한 역사가로서의 자세를 견지하면서도 엄청난 사료에 눌리지 않고 이를 자유자재로 요리해내는 탁월한 솜씨를 발휘했다. 덕분에 역사 전공이 아니라 영문학을 전공한 역자로서도 번역 작업을 하면서 로마사의 일부가 됐던 수많은 인물들의 삶 속으로 흠뻑 빠져들 수 있었다.

이에 더해 『로마제국 쇠망사』의 가치를 높이는 것은 이슬람교와 기독교를 균형 잡힌 시각으로 대하는 그의 역사가로서의 공평무사한 안목이다. 간혹 인종이나 민족에 대한 편견이나 그릇된 정보에서 나온 대목이 눈에 띄기도 하지만, 그가 18세기 인물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놀랄 만한 중립적 시각을 유지하고 있다. 이 또한 『로마제국 쇠망사』가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어 독자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덕목일 것이다.

로마의 멸망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많지만, 기번은 기독교의 성장으로 인한 사회심리학적 요인을 가장 큰 요인으로 들고 있다. 무려 14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지속된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제국이니, 아마도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로서는 로마제국이 언젠가 멸망하리라는 것은 세상의 종말이 온다는 것만큼이나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기나긴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천년이 넘는 긴 세월도 지나간 과거의 일부일 뿐이다. 자기가 살아가는 시대 안에서는 그 시대를 전체적으로 조망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그러나 과거의 역사를 읽는 것은 과거에 비추어 현재를 보는 통찰력을 제공한다.  

기번의 로마사를 자세히 읽어나가며 몰입하는 즐거움과는 별개로, 번역 작업에는 상당한 노력이 요구됐다. 기번의 작품은 수많은 역사적 자료를 치밀하게 엮어서 쌓은 거대한 산맥과도 같아서 접근을 쉽사리 허락하지 않았다. 기번의 역사 서술은 읽는 이가 이미 어느 정도의 기본적인 역사와 서양 문화에 관한 소양을 지니고 있음을 전제로 하고, 그 위에 자신이 섭렵한 방대한 자료를 거침없이 풀어나가는 식이다. 따라서 기번이 요구하는 만큼의 기본 지식이 부족한 역자로서는 이를 따라가기 위해 많은 공을 들여야 했다.

또한 기번은 해박한 역사적 지식뿐 아니라 그리스어, 라틴어, 히브리어 등 각종 언어에도 능통하여 원사료를 읽어낼 수 있었으며, 이를 본문과 각주에도 무수히 인용했다. 툭하면 여기저기서 등장하는 이러한 특수 언어들의 인용문 또한 본문을 이해하는 데 장애로 작용했다. 특히 역자들을 괴롭혔던 것이 본문에 육박하는 방대한 양의 각주였다.

기번의 ‘잡담’이라고도 불리는 총 8300여 개(버리 판 4700개)의 각주는 본문 내용과 관련돼 본문의 이해를 돕는 것도 있지만, 본문과 별 관계없이 엉뚱하게 자신의 지인들 이야기를 늘어놓는다든가 말 그대로 잡담도 상당수였다. 따라서 편집 과정에서 일부 각주는 생략됐다. 또한 영문학사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는 기번의 명문장도 번역하는 데 많은 애로가 따랐다. 한 문장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만연체로 서술된 부분이 많아서, 어떻게 하면 기번 특유의 유려한 문체를 최대한 살리면서도 되도록 읽기 편하고 자연스러운 우리말로 옮길 것인가의 문제를 번역하는 내내 고민해야 했다.

『로마제국 쇠망사』는 방대한 역사서이면서 동시에 위대한 문학작품이므로, 가장 이상적인 경우를 말한다면 역사를 전공해 풍부한 전문 지식을 갖추었으면서 동시에 기번의 까다로운 문체를 정확하면서도 매끄럽게 옮길 수 있는 영어 실력과 문학적 소양을 구비한 역자가 번역을 맡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기번의 작품을 완벽히 소화할 수 있는 모든 자질을 두루 갖춘 역자가 번역을 맡는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다 보니 역사 전공자도 아닌 영문학 전공의 역자들이 번역을 맡게 됐다. 기번의 저작을 국내 최초로 완역한다는 자부심과 사명감을 가지고 몇 년간에 걸친 고된 작업에 매진했으나, 끝나고 보니 새삼 부족함을 아쉽게 느낄 수밖에 없다.

비전공자로서 번역을 하면서 무엇보다도 아쉬운 점은 로마의 여러 관직명이나 제도명 등의 명기에 완벽을 기하기 어려웠다는 것이었다. ‘고전은 매 시대마다 그 시대의 언어로 새롭게 번역되어야 한다’고들 말한다. 『로마제국 쇠망사』의 국내 최초 완역으로 이제 이 책을 국내 소개하는 데 본격적인 첫발을 떼었다고 생각한다.

송은주 번역가
이화여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성과 감성』, 『순수의 시대』 등을 번역했다.

08. 0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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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9-17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친 김에 기번 자서전 번역도 해주었으면 좋겠어요.명저라고 하더군요.쇠망사는 로마사 전공자보단 영문학하는 사람이 번역하는 게 더 나을까요? 번역하면서 공부를 엄청나게 했을 것 같군요.

로쟈 2008-09-17 17:39   좋아요 0 | URL
짐작엔 협업이 최선이었을 것 같습니다...

shimy 2011-02-11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읽다가 너무 화가 나서 웹서핑 중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로마제국 쇠망사 4권을 읽고 있는데 해도해도 너무하군요. 발번역이라는 말이 있던데 4권에 딱 어울립니다. 그래도1~3권까지는 괜찮았는데 갑자기 번역의 질이 확 떨어지더군요. 로마제국 법체계 설명하는 부분에선 번역기 돌려 번역한 수준이고 p469에선 '성 세례 요하네스 교회'라는 단어를 보곤 열이 확 올라오네요. 세례 요하네스라니요. 이게 어느나라 말입니까. 영어도 아니고 독일어도 아니고 한국말도 아니네요. 아마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성 세례 요한교회'를 말한 것이겠죠. 역사 전공자인지는 제쳐두고 기본적인 역사 소양도 없는 것 같습니다. 성모 마리아를 동정녀도 아닌 성처녀라고 해놓질 않나...
 

개역개정판 성경의 오역을 지적하는 책이 출간되어 기독교계에서는 화제가 되고 있는 모양이다. 강원주 목사가 <개역개정판에 대해 말한다>(도서출판 소망, 2008)에서 제기한 것이다. 책은 이달에 나왔을 듯한데, 둘러보니 아직 파는 곳도 없고 이미지도 전혀 뜨지 않는다. 관련기사만 번역관련 자료로 스크랩해놓는다.

강원주 목사는 장신대 기독교교육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총회신학연구원 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한국세계선교회 대표를 맡고 있으며, 포항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크리스천투데이(08. 09. 02) “개역개정판, 8백여곳 잘못 번역됐다”

개역개정판 성경의 오역 논란이 재점화되고 있다. 예장합동과 통합, 고신 등 주요 교단에서 이미 개역개정판을 사용하고 있는 가운데 장신대 출신 강원주 목사가 1일 서울 연지동 한국교회언론회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개정개역판은 개정(改正)이 아닌 개악(改惡)”이라고 주장했다. 강원주 목사는 이날 자신이 쓴 ‘개역개정판에 대해 말한다(도서출판 소망)’을 들고 나왔다. 이 책에는 개역성경의 바른 번역을 개역개정판에서 왜곡한 8백여곳의 사례를 분석하고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문과 대조해 해설했다.

기자회견에서 강 목사는 “‘7만3천여곳이 수정됐으므로 그래도 개역판보다는 개역개정판이 낫지 않겠느냐’고 개정위원들은 말하지만 이는 어불성설”이라며 “수정된 부분의 대다수는 현행 맞춤법에 따라 고친 것이지만, 문제는 원문과의 비교 검토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이라고 밝혔다.

강 목사는 구체적인 오역 사례로 창세기 27장 34절의 ‘에서가 그 아비의 말을 듣고 방성 대곡하며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의 ‘방성 대곡’을 개역개정판에서는 ‘소리내어 울며’로 바꾼 것을 들었다. 그는 “히브리어 원문으로는 에서가 우는 모양을 ‘매우 크게, 격동적으로 심히 울부짖는’이라는 뜻의 6개나 되는 단어를 사용해 수식하고 있다”며 “개역개정판의 번역은 원문의 의미를 약화시킨 것”이라고 설명했다.

민수기 11장 6절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를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라고 개정한 것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개역판은 만나 외에는 먹지 못해 기운이 다 빠졌는데도 먹을 것이라고는 만나밖에 없다는 뜻인데, 개역개정판은 기력이 다 빠져서 다른 음식이 있음에도 만나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해석될 수 있다”며 현대어로 바꾸려면 차라리 ‘우리의 기력이 다하되’로 바꿔야 한다고 했다.

기자들이 신학적으로 결정적인 문제를 불러올 수 있는 오역이 있느냐는 물음에는 신약 고린도전서 1장 30절과 로마서 4장 17절을 들었다. 고린도전서 1장 30절의 개역판에는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라고 돼 있으나, 개역개정판에는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라고 돼 있다. 강 목사는 이에 대해 “구속과 구원은 엄연히 원문상으로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며 “이것(구속과 구원의 차이)은 신학교에 가면 가장 기초적으로 배우는 것들”이라고 주장했다.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는 로마서 4장 17절 말씀도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분을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로 번역한 것이 잘못됐다고 밝혔다. 개역개정판의 번역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표현이며, 신학적으로 중요한 오류를 범한다는 것이다.

강 목사는 개역개정판을 만들 당시 개정감수위원들의 발언을 인용하며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개정감수위원회 서기였던 김중은 총장(장신대)은 강 목사와 지난 2004년에 만난 자리에서 “감수작업을 위해 최소한 3개월의 시간을 더 달라고 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고 말했다고 강 목사가 밝혔다. 당시 김 총장이 그에 대한 보수를 받지 않겠다고까지 하면서 개정감수위 측에 강력히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개정감수위원회의 또다른 서기였던 도한호 총장(침신대)의 논문 ‘개역개정의 의의와 방법’에 나와있는 진술도 언급됐다. 도 총장은 논문에서 “시간에 너무 쫓겨 처음 계획대로 할 수 없었고, 작업을 서두르다 원문 확인없이 개정될 우려가 있었다”고 했다고 강 목사는 덧붙였다. 강 목사는 “개정개역판을 사용하는 교회들은 곧바로 이를 중단해야 하며, 성경공회(*성서공회) 측은 한국교회 앞에 사과하고 개역개정판 보급을 당장 중지하며, 이를 회수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이대웅기자)

08. 09. 07.

P.S. 기사를 읽다 보니 생각나는 책은 앙드레 라콕과 폴 리쾨르(리꾀르)가 쓴 <성서의 새로운 이해>(살림, 2006)이다. 부분적으로 읽다가 말긴 했는데, 모름지기 기독교인이라면 성서 무오류주의를 신봉하며 전문쓰기 같은 것에 정성을 들이기보다는 이런 책이라도 음미해가며 읽어봄 직하다. 책의 요점은 이렇다.

지금 우리가 읽는 구약성서는 기원전 3세기에 그리스어로 번역되면서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이 서로 융합된 결과물이다. 이 책은 이 점에 힌트를 얻어 헤브라이즘의 편에 서 있는 구약학자(앙드레 라콕)와 헬레니즘의 정신을 이어받은 철학자(폴 리꾀르)가 성서를 두 가지 관점에서 새로이 이야기한다. 선악과, 십계명, 하나님의 이름 등 구약성서의 주요한 주제들을 주석학과 해석학의 방법론을 통해 다룬다. 이 책에서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철학과 신학은 서로의 빈 공간을 채우는 방식으로 생산적인 담론을 구성한다. 성서학자인 라콕의 연구결과에 대해 철학자인 리꾀르가 응답을 하면 두 저자는 서로의 글을 읽고 각각의 글을 보완하는 식이다. 십계명이 원래는 금기가 아닌 '한계'를 의미했다거나, 선악의 인식이 결국엔 인간에게 필요한 도전이었다는 성찰 등 흥미로운 해석과 견해를 담았다. 더 나아가 성서 번역의 역사 자체가 해석의 역사임을 보여주려 노력했다.

마지막 멘트처럼 "성서 번역의 역사 자체가 해석의 역사"라는 것 정도는 상식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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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9-07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신도가 성서해석학이나 교회사 공부하면 성직자들이 그다지 안 좋아하는데...그러고 보니 성경해석 공부한지도 꽤 되었네요.폴 리꾀르가 이런 책도 냈군요.

로쟈 2008-09-07 22:48   좋아요 0 | URL
사해문서와 관련해서도 음모론이 있더군요. 권력은 무지를 선호하는 듯해요...
 

지난주에 필요 때문에 에드워드 사이드의 <권력과 지성인>(창, 1996)을 뒤적거렸는데, 이미 알고 있었던 바이지만 한심한 오역들이 속출하여 짜증스러웠다. 원제가 '지식인의 표상(Representations of the Intellectuals)'이지만 '오역의 표상'이라고 해도 무방한 책이다. 이에 대한 맛보기 지적은 <박홍규의 에드워드 사이드 읽기>(우물이있는집, 2003)의 1부 3장을 참조할 수 있다. 책은 서경식 교수도 '영향과 격려를 많이 받은 책'이라고 토로하는데(http://blog.aladin.co.kr/mramor/1938368), 한국어로 이 책을 읽고 영향과 격려를 받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참고로, 일본어본과 중국어본의 제목은 모두 <지식분자론>이다). 젊은 세대가 어제의 야구 한일전에서처럼 일본을 '이기고자' 한다면 이런 대목에도 관심을 가져주면 좋겠다. 혹시나 해서 서평을 검색해보니 수년 전 <말>지의 기사가 뜨기에 스크랩해놓는다. 제목 그대로 '구조화된 졸속 번역, 부실한 한국 인문학'에 대한 지적 대부분이 아직까지도 유효하다는 게 씁쓸하다.  

말(2001년 2월호) 구조화된 졸속 번역, 부실한 한국 인문학

최근 대학원생들이 발간한 무크지 <모색>은 사제지간이 아니라 도제가 되어버린 대학원생의 실태, 그리고 교수와 학생간 침묵의 카르텔을 폭로했다. "번역을 제자들에게 시키는 것은 그나마 애교로 봐줄 만하다.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되는 글, 논문, 심지어 책까지 대부분을 제자들이 집필하는 일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수천만원짜리 프로젝트의 대부분을 수행한 대학원생들에게 돌아가는 것은 수고비 명목의 몇십만원에 불과하다."

'허리 아래' 이야기는 누구도 공개하지 않듯, 이 공공연한 비밀은 지금껏 우리 모두를 '비밀결사대'로 만들었다. 결사대란 한사코 비밀을 유지하는 데만 급급해 현실의 상처부위가 내뿜는 악취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특성이 있다. 그런데 누군가 폭로했다. 몇 사람(필경 폭로한 사람이리라)이 다칠 테고 문제의 교수는 도덕적인 질책으로 얼굴을 들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도의적 책임을 지고 교수직에서 물러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뒷말이 나올 것은 뻔하다. "왜 나만 갖고 이러냐. 그런 교수가 어디 한둘이냐." 맞다. 한둘이 아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 '한둘이 아닌 상황을 만드는 문화 혹은 구조'로 옮아간다.

교수와 대학원생 사이의 대역비리는 공모적인 것이 아니라 착취관계에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석박사과정 학생 가운데 지도교수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는 '느긋한' 처지는 거의 없다. 출신학교가 평생을 따라다니고, 이후 학문적 행로의 대부분을 결정하는 '순종주의' 풍토에서는 더욱 그렇다. 서양 철학자 김상봉씨는 이런 현실에서 건실한 학술번역이 나올 수 없다고 꼬집는다. "박사 후 연구원 과정에 지원한 제자에게 지도교수가 학술서적 대역을 요구한 사례를 알고 있습니다. 학생 입장에서는 자신의 장래를 쥐고 있는 교수의 요구를 부당하다 해서 거절할 수 없는 입장으로 난처해하더군요. 그런 상황에서 학생이 책임 있는 번역을 하리라 보기는 힘듭니다."

"왜 나만.... 어디 그런 교수가 한둘이냐"
지난해 언론과 여론을 들끓게 했던 영어공용어화론의 중심에 있던 소설가 복거일씨는 "모국어와 이별한다는 것은 당장은 쓰라린 일이지만, '큰마음 먹고' 후손을 위해서 한국어를 버리자"고 진심 어린 걱정을 털어놓았다. 영어에 주눅들어 있는 이들에게는 다만 '엽기적인' 농담으로 들리겠지만, 논쟁의 거품을 걷으면 언어기능주의의 뼈대가 드러난다. 당시 복거일씨의 주장에 『신동아』2000년 9월호에 반론을 제기했던 정시호 교수(경북대 독어교육과)가 "언어를 '가지고'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통해' 사고한다"고 말했던 것처럼, 학술서적의 번역을, 해당 외국어를 '좀 하는' 학생들에게 맡긴 교수들은 언어기능주의자라는 혐의를 벗을 수 없다.

혹은 그들이 '나쁜' 교수이기 때문인가. 그런 면도 없지 않다. 만약 '학자적 양심'이란 것이 있다면 최소한의 양심이 없는 교수들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법학전공 C교수가 십 수년 전에 출간한 『위대한 법사상가들』은 일본어로 된 논문을 학생들에게 번역시켜 출간했다는 사실은 이미 학자들 사이에서 공공연하다. 자연히 오역 투성이에 한글도 아닌 일본어식 표현이 곳곳에서 튀어나오지만, 이 역시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 공개적으로 문제제기하는 이들은 없었다. C교수는 최근에도 번역서를 자신의 저작으로 둔갑시키는 등 학자의 명예를 훼손시키고 있다는 학계의 평가가 이미 퍼져 있다.

오역문제가 공론화된 사례는 물론 있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권력과 지성인』(도서출판 창. 1996)이 번역상의 오류로 인해 완전히 재번역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 적이 있다. 『오리엔탈리즘』(교보문고)을 번역해 국내에 사이드를 최초로 소개한 박홍규 교수(영남대 법학과)는 지난 1996년 『교수신문』 지면을 통해 간접적으로 오역사례를 나열하고 재번역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공동번역자인 당시 전모 서경대 교수와 서모 고려대 강사의 반론도 있었다. 지상논쟁은 끝났고, 오역사례는 회자되고 이슈를 낳아 책임 있는 학술번역의 중요성은 학계에 어느 정도 환기되었다.(실제 번역을 맡았던 이는 이름이 실렸던 교수가 아니었다고 한다.)

오역으로만 따지자면 우리 시대의 스승들도 예외가 될 수 없다. 학문적 존경의 최상급에 위치한 고 함석헌 선생 역시, 일본어 중역으로 인한 과실의 표적을 피할 수 없는 지경이니, 오역의 역사는 길고도 길다. 선생의 간디와 칼릴 지브란 번역본은, 일어 외에는 다른 언어를 배운 적 없는 해방 이전 식민지 시대에 공부했던 60, 70년대 지식인들의 공통된 문제를 함축하고 있다.

지금껏 검증된 결정적인 오역사례는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이다. 에리히 프롬의 『건전한 사회』에서 'trade union'을 '노동조합'이 아니라 '무역협회'로 번역한 경우는 번역작업이 사회현실에 따라 영향을 받게 되는 가장 희극적인 사례이다. 마샬 버만의 『현대성의 경험』에서 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one-dimentional man)이 '평면적 인간'으로, 제랄드 그라프의 '문학에 대항하는 문학(Literature against itself)'이 '자신이 적이 되어가는 문학'으로 오역되는 등, 이들 오역의 심각함은 원서가 갖는 날카로운 현장감과 정치성이 두루뭉수리로 희석되어 버리는 데 있다.

잘못된 번역서라도 없는 것보다 낫다는 유종호 교수(연세대 국어국문학과)는 번역의 기술적인 어려움에 주목하기도 한다. "출판사에서 다급하게 요구해서 졸속으로 번역되고, 공부하는 학생들이 아르바이트로 하는 경우 일어와 영어 중역으로 번역을 망치는 경우도 있지만, 번역 자체가 쉽지 않은 작업이라는 근본적인 한계도 간과할 수 없지요."

하지만 '번역은 반역'이라는 문학작품 번역의 원초적 불가능성을 염두에 두더라도, 번역이 어렵다는 사실에 호소하기에는 국내 학술서 번역의 오류는 이미 정도를 넘어서 있는 실정이다. 인문학 강의실에서 교재로 번역서를 쓰다가 실패했던 경험을 토로하는 교수들이 적지 않고, 번역서를 '해독'하다 결국 원서를 찾아 확인절차를 거치는 낭비는 흔한 사례이다.

번역은 반역 아닌 졸역, 오역인 현실
오역과 졸역의 문제가 영세한 우리의 출판현황과 얽혀 있다는 지적은 비약이 아니다. 특히 인문학 번역서는 '돈이 안 되기' 때문에 '저렴한' 비용으로 단기간에 번역되기 일쑤다. 자연히 번역자는 출판사와의 게임에서 제2의 창작자가 아닌 '계약직 노동자'에 불과한 위상을 갖게 될 뿐이다. 굵직한 오역사례가 자주 발생하는 '현대미학사' 역시 그러한데, 전문적인 학술서의 경우 번역자에게 출판의 대가로 인세를 주지 않는 것은 물론 저작권 로열티의 일부를 부담하도록 요구하기도 한다.

지난해 윤건차 교수의 『현대 한국의 사상흐름』(당대)를 번역한 장화경 성공희대 교수는 번역자가 대접하지 못하는 현실을 지적했다. "출판사에서는 두꺼운 학술서적을 두세달 만에 번역해달라고 합니다. 그런 경우엔 꼼꼼히 번역하기 힘들어요. 게다가 팔리지 않을 것이 뻔한 학술서적의 번역료를 형편없는 인세로 계산하는 경우가 많고, 그나마 재판을 찍을 때 인세를 챙겨주질 않는 일도 있습니다."

최근 한 일본문학 전문번역가는 출판사가 15일만에 책 번역을 요구하는 황당한 경험을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출판사를 악덕기업으로 몰아붙일 수는 없다. 출판사와 번역자 모두 척박한 학문현실의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학술서적은 대학도서관과 공공도서관에서 의무구매하도록 돼 있다. 책값이 비싸고 소장에 적합한 도서관용 하드커버와, 저렴하고 휴대하기 편한 시장판매용 소프트커버의 두 종류로 출판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어떻든 미국의 학술전문 출판사는 좋은 책만 출간한다면 '싸고 빠른' 번역자에게 맡겨 비용을 최소화하는 데 몰두하지 않아도 적자는 면한다.

번역에 손놓고 있는 교수들에게 일말의 면죄부가 있다면, 그건 번역을 연구업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학계의 풍토다. 니체의 저서를 영어로 번역한 월터 카우프만이 니체 전문학자로, 롤랑 바르트를 영어로 옮긴 수잔 손탁이 미국에서 바르트에 관해 일가를 이뤘다고 인정받는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가. 우리나라에도 리처드 로티를 줄곧 번역해온 김동식 육사 교수가 있지만, 김 교수의 작업을 학문적인 성과로 인정하기보다는 성가시고 고된 작업을 대신 해내서 감사하다는 정도이다.

오역문제를 지적해온 박홍규 교수는 일본과 비교하면서 번역작업의 학문적 가치를 재차 역설한다. "일본에서는 산스크리트어같이 희귀한 언어로 된 저서나 경전의 번역이 탁월할 때는 석박사 학위 논문으로 인정하기도 합니다. 책임 있는 번역판이 구비돼 있기 때문에 원전을 인용할 때도 번역서의 페이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번역물이 '지적인 공유재산'이라는 인식이 일반화돼 있지요."

박교수는 졸속한 국내 번역실태에 분기탱천 '번역 윤리'를 언급하고, 급기야 '번역감시단'을 만들자는 주장을 펼칠 만큼 졸역으로 인한 지적태만과 허위의식이 심각하다고 진단한다. 다른 모든 것을 제쳐두고라도 우리말이 학문언어로 더 이상 사용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은 이미 학계에 팽배해 있다. 김상봉씨는 우리말이 근대적인 학문언어로 성장하는 계기를 번역작업의 활성화에서 찾고 있다. "번역은 우리말의 가능성을 시험하는 장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모국어의 발전이라고까지 봅니다. 졸속한 번역은 우리말을 발음기호로 전락시켰습니다. 가능한 한 우리말을 개발하려고 애쓰고 끊임없이 학문적인 말을 길러내는 것이 철학(인문학}에서 번역작업이 할 일입니다."

마루야마 마사오의 『번역과 일본의 근대』(이산)가 지난해 발간되면서 그간 잠수해 있던 문제의식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번역의 문제조차 근대성이라는 체에 걸러야 하며, 알다시피 우리의 근대라는 체는 엉성하기 이를 데 없다는 것이다. 번역자 임성모 씨에 따르면 "한국의 근대는 서구, 중국, 일본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형성된, 말하자면 '삼중 번역된' 근대"다. 지금에 와서야 '저항으로서의 번역'(윤지관)이 회자되지만, 그것 역시 삼중 번역된 근대의 상처를 끌어안고 시작해야 할 프로젝트다.



주체적 번역으로 근대성 이룬 일본
반면 일본은 서양 근대의 산물을 일찌감치 철저히 번역해 모방했다. 그 결과 이제 주체적 모방으로 나아가는 활주로를 뚫어낸 것이다. 일본사상사 전공자인 강재언 교수의 구분법에 의하면, 18세기 초반에 네덜란드어 번역으로 난학(蘭學)이 활성화된 사실을 두고 "한국과 일본의 근대화의 갈림길이 여기에서 시작된다"고 했다. 2백년 번역 역사를 거치면서 일본은 근대를 형성하고 완성했으며, 번역에서도 '주체적 번역'이라는 역설적인 단어의 배합을 허용할 정도에 이르렀다. 이를 증명하듯 얼마 전에는 한 학자가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마치 소설처럼 번역해 대단한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오랜 번역의 역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번역을 괄시하면서 원서와 저자의 권위를 숭배하는 국내 학계에서는 언간생심 생각지도 못할 시도다.

이제 오역(욕?)의 역사를 마감할 시기라는 의식은 합의에 이르렀다. 한길사에서 출간하고 있는 그레이트북스 시리즈처럼 정전들을 '번역'하여 우리의 고전으로 '변형' 시키는 기초작업이 절실하다. 학문 식민주의, 원서 숭배를 벗어나면서 창조의길을 모색하는 출발점은 오히려 철저히 '번역의 시대'를 겪어내는 데 있다. 그것만이 서구 근대의 오류를 극복하는 길이라고 한다면 학술번역의 막중함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것이 번역과 일본의 근대를 보며 다시 새길 교훈이다.

제도적으로 학술번역을 육성할 필요도 있다. 다행히 그런 움직임도 미약하나마 포착된다. 학술진흥재단에서는 올해 번역지원사업을 벌일 예정이다. 교육부에서 지난달 초 발표한 '2001 학술연구 지원 기본계획'에 따르면 동서양 학술 명저와 고전 번역사업 지원비가 10억원으로 확대됐다. 다만 한국문학의 세계화라는 섣부른 당위를 내세워 우리 문학작품을 외국어로 번역하는 것에만 집중투자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어차피 제도 바깥에서 가능한 것이 인문학이므로 제도적 개선은 출발이 될지언정 도착점은 될 수 없기 때문이다.(이옥진기자)

08. 08. 17.

P.S. 이후의 상황과 문제제기에 대해서는 재작년에 나온 박상익 교수의 <번역은 반역인가>(푸른역사, 2006)를 연속해서 참조해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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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rtuepeak 2008-08-17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 교수의 저작 목록이 제법 긴데 몇 개 읽어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냥 다양한 주제를 놓고 요약 정리한 수준밖에 되지 않던데, 저런 사정이 있었군요..

로쟈 2008-08-17 23:53   좋아요 0 | URL
법학 교재들의 표절 시비도 있었지요...

book소리 2019-01-13 0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도서관 서가에서 우연히 카우프만의 인문학의 미래를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같은 제목의 책이 다른 출판사에서 각각 출간했더군요. 이런 경우 괜찮은 책이라 훗날 다시 출간했거나 이전 책이 번역상 문제가 있어서 번역을 다시하여 재출간 했을 거 같아 두 책을 동시에 펼쳐두고 비교해보면 재밌겠다 싶어 둘다 책꽂이에서 꺼내 들었습니다. 98년 아무 곳이나 펼치고 몇 줄 읽었는데 제가 영어문장을 읽고 이해했을 때의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것이라는 대명사를 그대로 옮긴다거나 더욱 더 추구한다 같은 부분에서는 도대체 무얼 더 추구하는가 싶어 추구의 대상을 앞뒤로 수색했네요. 그래서 같은 부분을 12년 판에서 찾아보고 다른 부분도 이런 방식으로 몇 군데 비교읽기를 해보니 처음엔 거친 번역에 실망했다가 나중에는 원서를 구해서 직접 해석해보고 두 권과 비교해보면 영어실력이 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번역을 꼼꼼하게 하고, 자국어로 글을 잘 엮어 내는 문화가 확고히 자리 잡을 때야 비로소 한국의 학문 역량이 세계와 견줄 준비가 될 것 같습니다. 번역자에게만 문제가 있다면 번역자만 비판하면 되는데 번역 관련 전반적인 토대가 문제라 이런 상황이 오래 지속될 거 같다는 게 문제죠. 영어 강의를 한다느니 외국인 학생을 유치한다느니 등등의 억지 코스프레 글로벌 대학을 운운하는 거 보면 처음에는 씁쓸하다가 종국에는 쓸쓸해지더군요. 카우프만이 여러 생각이 들게 하다가 로 선생님 블로그까지 오게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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