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교외강좌에서 3주 연속으로 한국 현대시에 대한 강의를 맡게 됐다. 오늘이 첫날이었는데,  대략 '한국 현대시 개관'이란 제하의 강의였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강좌이기 때문에(모두 여성이고 대부분이 주부) 가급적 평이해야 한다는 게 제1원칙이고, 웬만큼은 재미있어야 한다는 게 제2원칙이다(요즘은 대학강의에서도 이런 원칙들이 요구되는 듯해서 유감스럽지만). 모두가 경청해주신 건 아니지만 고개를 끄덕이시는 분들이 더러 계셔서 보람이 없지는 않았다(요즘은 대학에서도 고개를 끄덕이는 학생은 드물게 만난다).

강의자료로 쓴 것 중 일부는 이미 6년전에 써두고 강의했던 것이어서 이번이 말하자면 '재탕'이었는데, 그간에 늘어난 건 시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이래저래 순발력을 발휘하는 '능청'이 아닌가 싶다. 이전에 '기형도 시에 대한 편집증적 읽기, 분열증적 읽기'에 포함돼 있었던 간략한 현대시사를 조금 보충해가며 다시 올려놓는다. 이 또한 '재탕'일 텐데, '이미지-버전'이란 핑계가 없지는 않다(능청과 핑계가 어쩌면 나의 왼팔과 오른팔인가?). 읽기에/보기에 편하면 좋은 것 아니겠는가? 대신에 군더더기말들을 더러 집어넣었다.

강의는 시 일반론에 대한 얘기로 시작해서 20세기 초반부터 최근에 이르는 한국시의 대표적 시인들을 거명하는 식이었는데, 여기서는 20세기 시사에 대한 간략한 리뷰만을 정리해둔다.

 

 

 

 

<황무지>(1922)의 시인이자, 아마도 가장 유명한 20세기 시인, T. S. 엘리엇은 시뿐만 아니라 시론에서도 정력적이었는데, 그가 유달리 강조한 것은 전통과 역사의식이었다(러시아에서 '토마스 엘리어트'의 두툼한 비평적 에세이 선집이 작년에 나왔었는데, 나는 그가 '티. 에스. 엘리엇'이란 걸 뒤늦게야 알았다. '토마스'란 이름이 너무 낯설었기에! 거기에 러시아어로 번역된 평문 '전통과 개인의 재능' 등이 포함돼 있었을 터인데, 애석하게도 책을 구입할 여유가 내겐 없었다. 참고로, 엘리엇은 우리 시단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외국 시인의 한 사람이다. 비록 요즘은 '4월은 잔인한 달(April is the cruelest month)'이란 <황무지>의 시구를 읊조리는 중고생들을 만나기가 아주 힘들 뿐더러 젊은 시인들조차도 '열심히' 읽는 것 같지 않지만).

 

 

 

 

모름지기 25세 이후에도 시를 쓰려는 자는 역사에 대한 '감'을 먼저 연마해야 한다는 것. 그가 말하는 역사는 단순한 시사(詩史)를 넘어서 종교사, 종교적/상징적 상상력의 역사에 걸쳐 있지만, 하여간에 시란 것이 젊은 날의 겉멋이나 치기가 아니라는 것을 그는 줄곧 강조하였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김춘수는 (25세 이후에도?) 시론(詩論)을 갖고 있지 않은 시인은 천재이거나 아마추어라고 평했는데(<시의 위상>), 시에 대한 자신만의 주관, 혹은 관념(idea)이 없다면 일찌감치 시는 그만두는 것이 좋다는 뜻을 그의 주장은 함축하고 있는 듯하다(참고로, 시작법이 아니라 작시법이 거의 부재하는 한국 현대시에서 '천재'가 나오기는 매우 힘들다. 그것이 우리의 '언어적 조건'이다. 그러니 '치기'나 '도취'로 시를 쓰는 경우가 아니라면 시론은 필수적이다. 새삼 확인해두자면, '시론'이란 시에 대한 로고스, 즉 논리를 갖추는 걸 말한다).

그런데, 시론이란 것이 모국어에 대한 감각과 시사(詩史)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 없이 가능하지 않다고 할 때, 모름지기 시인이라면 시의 전통과 역사적 전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에 대한 부단한 의식 속에서, 그것과 맞서며 아주 조금씩 전진해나갈 따름이다. 시에 대한 이러한 태도를 편집증적이라 부를 수 있을까?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시인은 그 이전에 씌어진 모든 시를 다 읽고 나서야 거기에 한 문장, 혹은 한 글자 덧붙일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한 시의 역사를 재구성할 때, 20세기 한국시란 무엇이었나?(한국 현대시의 세 가지 원천으로 나는 민요, 한시, 그리고 번역시를 꼽는다. 김소월과 이육사는 각각 민요적 전통과 한시적 전통의 핵심에 놓여 있는 시인들이다. 이상은 많이 밝혀진 바이지만, '한국어'라는 자연어가 아닌 '기호'로 시를 썼던, 보다 정확하게는 문학행위를 했던 시인/작가이다) 20세기 초에 한국시의 기초를 이룬 시인들의 이름으로 김소월(혼의 시), 이육사(정신의 시), 이상(기교의 시) 등등의 계보를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김윤식의 분류이다). 

 

 

 

 

 

 

 

 

 

하지만, 20세기를 통틀어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시인을 꼽으라면, 단연 시업(詩業) 60년을 넘긴 미당 서정주를 들 것이다(물론 미당에 버금가는 시인으로 백석을 꼽을 수 있겠지만, 그의 시업은 상대적으로 너무 짧았다. 때문에 백석은 '제도로서의 문학'과는 거의 무관한 시인이다. 물론 그의 계보를 따르는 시인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가령, <외롭고 높고 쓸쓸한>의 시인 안도현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의 정치적 과오 때문에 폄하되기도 하지만 그가 우리 부족시의 족장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이 '부족시'는 상대적으로 '국가'나 '민족'과는 무관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현역’을 자임하던 그의 시를 보라.

 

 

 

 

 

 

 

 

내 나이 80이 넘었으니/ 시를 못쓰는 날은

늙은 내 할망구의 손톱이나 깎어주자./ 발톱도 또 이쁘게 깎어주자.

훈장 여편네로 고생살이 하기에/ 거칠대로 거칠어진 아내 손발의

손톱 발톱이나 이뿌게 깎어주자.

내 시에 나오는 초승달같이/ 아내 손톱밑에 아직도 떠오르는

초사흘 달 바래보며 마음 달래자./ 마음 달래자. 마음 달래자.


 

 

 

 

 

 

 

시를 못쓰날에 할망구 손톱 발톱 깎어주며 마음 달래는 일도 '이뿌게' 시로 만드는 그의 솜씨는 대가급이다. 그러나 서정주의 시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되어 있는, 체념적 달관 혹은 달관적 체념의 세계(비평가 김현은 서정주의 정신주의에 대해서 “그의 정신주의는 그가 그의 삶을 정면에서 바라보지 않는 데서 기인하는 태도의 희극”이라고 적은 바 있다. 김윤식/김현의 <한국문학사> 참조)는 이념(idea), 혹은 형이상(形而上)을 배제한 세계이다(“西으로 가는 달 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추천사(鞦韆詞)>는 구절에는 그의 체념적 달관이 집약되어 있다(참고로, 요즘 중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는 '친일파' 미당의 시들이 거의 빠져 있다고 한다. 문학 교과서에서 경우 명맥을 유지할 정도라고. 대개 학생들은 교과서에 실린 시들을 '부정적으로' 인지하곤 하므로, 역설적이지만 미당 시의 독자들에겐 유감스러운 일이 아니겠다. 학생들에게 미당의 시를 안 읽히는 방법은 교과서에서 빼는 게 아니라 너무 많이 집어넣어서 '물리도록' 혹은 '신물이 나도록' 하는 것이다). 

 

이 이념-이후에 그는 “가난이란 한낱 襤樓에 지나지 않는다/.../ 靑山이 그 무릎 아래 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엔 없다”(<無等을 부며>)는 사실에 만족한다. 그것이 또한 달관적 체념의 세계이다). 참고로, 한국시에 형이상학적 깊이가 결여돼 있다는 비판은 김우창 교수의 평문 '한국시와 형이상'을 참조할 수 있다(<궁핍한 시대의 시인> 혹은 <김우창 전집1> 참조. 나는 이 절판된 전집에 재출간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기이하며 유감스럽다. 더불어 유감스러운 건 김화영 교수의 <미당 서정주의 시에 대하여>(민음사, 1984)도 절판된 채로 다시 구해보기 어렵게 된 것. 본격적인 시인론이자 시분석론인데 당시로서는 드문 시도였다).


 

 

 

 

 

 

 

‘시인부락’의 동인으로 같이 활동했던('부락'은 일본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천민집단'을 뜻하는 걸로 안다) 청마 유치환은 서정주와 달리 이념적 ‘깃발’을 표나게 내세운 바 있으나, 언어적 조탁에 있어서 그에 미치지 못했고, 한자어투로 이루어진 그의 남성적 어조는 계보를 얻지 못했다(청마를 가까이 한 이에 김춘수가 있지만, 김춘수의 여성적 세계는 유치환의 남성적 세계와 대조적이다. 김춘수 자신이 시인하는 바이지만, 그의 초기시는 서정주의 계보에 속한다). 그리고 그의 시업(詩業) 또한 너무 일찍 한국시사에서 단절되었다. 그리하여 멀리는 40년대부터, 한국시단은 미당과 그 일가(一家)에 의해 접수된다(이른바, '미당스 패밀리' 되시겠다. 문단 용어로는 '미당 사관학교'라 하고).

 

 

 

 

 

 

 

 

한편으로, 한국시사에서 지나치게 과대평가된 사례인 ‘청록파’의 경우, 박두진의 몇몇 시편들을 제외하면 비이념적 정관적(靜觀的) 세계관에 침윤되어 있다. 박목월의 경우가 대표적이지만, “구름에 달가듯”한 세계엔 이념이 틈입할 여지가 없다. 그림(=풍경)만 남고 목소리가 빠진 시는 왜소하다(지난주 고종석도 자신의 연재 '시인공화국의 풍경들'에서 지적한 것이지만, 이러한 '과대평가'에 한몫한 것은 이 세 시인이 모두 훌륭한 인격으로 후배 시인들이나 학인들에게 존경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덕분에, 이들과 다른 경향의 시(인)들이 문학사에서 상대적으로 소홀한 대접을 받았다).    

 

 

 

 

 

 

 

 

그리하여 여기에 유사-오디푸스 콤플렉스가 개입한다. 미당 이후의 시인은 하여간에 시인으로서 자신의 이름을 얻기 위해서는 미당과 싸워야 했다(김현의 어투이다). 그를 넘어서거나 그와 다른 세계로 질주해야만 했던 것이다. 50년대 모더니즘 시운동이 잠시 시림(詩林)을 떠들썩하게 했지만(박인환, 김수영 등이 참여한 사화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이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곧 빈수레였다는 것이 들통난다. 그들은 木馬를 타고간 소녀의 옷자락 얘기만 잠시 늘어놓았을 뿐이었다. ‘언어(말부림)’를 가지고 미당에 맞서 그보다 윗길로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고은 정도가 서정주의 어법을 가지고도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남은 희귀한 사례이다. 그의 시업이 60년을 넘길 수 있을는지? 한편, 미당학교의 '장학생'이었던 박재삼 등도 거명할 수 있을 것이다). 

 

 

 

 

 

미당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한 대안이라는 것은 미당의 이념적 ‘퇴행’을 걸고 넘어질 수 있는 이념이어야 했다. 60년대 김수영과 김춘수는 이 점에서 제각각의 방식이긴 하지만, 뚜렷하다. 60년대 한국사회를 지배했던 이념적 화두가 ‘자유’였다는 점에서 김수영은 6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손색이 없다. “달나라의 장난” 같은 그의 시가 처음부터 끝까지 줄기차게 노래, 아니 절규한 것이 바로 자유였기 때문이다. 산문적인 그의 시의 어법 또한 미당과는 전혀 종류를 달리하였다. 4.19 이후에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렸다”(<그 방을 생각하며>)고 그는 적고 있는데, 조금 다른 맥락에서, 김수영은 미당의 그늘 아래 놓인 해방 이후 한국시사에서 자신의 ‘방’을 마련한 드문 예에 속한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김춘수는 조금 다른 방향에서 미당의 빈 자리를 물고 늘어진다. 그는 언어의 이념(이라기보다는 관념)을 자신의 탐구 대상으로 삼는다. 이 또한 의미(=역사)로부터의 도피, 혹은 퇴행이라는 혐의를 지우기 힘든 경우지만, 어쨌거나 언어의 가지 끝에 매달리는 데는 성공한다. 이념의 부재로 미당의 시를 특징지울 수 있다면, 김춘수의 시는 한술 더 떠서 의미의 부재를 지향한다. 언어적 자의식을 대표하는 그에게 시는 “未知의 까마득한 어둠”이고 “얼굴을 가리운 나의 新婦”이다. 그것은 말부림의 세계가 아니라, 말 비우기의 세계, 의미의 빈 그릇의 세계이다. 그리하여 어쨌거나 김수영과 김춘수에 와서 한국시는 미당시에서 탈색된 근대성(=시대성)을 다시 획득한다. 그러나 그것은 김수영의 이른 죽음을 대가로 치른 것이었다. 그리고 맞은 70년대에도 미당시는 여전히 도전/극복의 대상이다.

 


 

 

 

 

 

 

젊은 전사들의 이름으로 평론가 김현은 황동규, 정현종, 오규원 등을 지목하고 있는데,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즐거운 편지>)의 황동규는 “물 빛 라일락의 빛과 香”을 가진 미당의 '永遠' 대신에 비극적 세계인식의 '자세'를 대립시키고,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눈물 같은 女子, 슬픔 같은 女子, 병신 같은 女子, 시집 같은 女子...”(<한 잎의 女子>)의 오규원은 대상과 언어와의 관계를 의혹이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연기(緣起)론 세계인식에 딴지를 건다. 거기에 “나는 별아저씨, 바람 남편이지”의 시인 정현종의 '숨통'과 '걸음걸이'가 미당의 행보를 뒤쫓는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70년대를 증언할 수 있는 시인은 70년대의 포문을 연 <오적(五賊)>(1970)의 김지하이다. 그는 대뜸 이렇게 시작하지 않았던가. “詩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 이 황토(黃土)의 땅에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를 외치는 일에 비하면, 조곤조곤한 시들은 좀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가 70년대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낸 것 또한 그의 ‘대표성’을 수긍하게 한다. 시 또한 감옥에 들어가 있어야 마땅했을 시기가 아니었던가.

 

 

 

 

 

 

 

 

 

80년대 한국시는 80년 광주에서 시작된다. 그보다 조금 먼저 등단한 이성복은 이 “정든 유곽”의 땅에서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는 진단서를 제출한 바 있지만, 가장 명료하게 80년대를 규정한 이는 황지우이다. “여기는 초토입니다/ 그 우에서 무얼 하겠습니까”(<에프킬라를 뿌리며>) 여기서 황지우의 '초토'는 김지하의 '황토'에 견줄 만하다. 80년대는 죽음의 연대였고, 시인들은 네크로필리야(necrophilia)에 들린 파리떼처럼 몰려들어 그 죽음을 파헤치고 음미하였다. 죽음에 분노하였고, 그 부채의식에 통곡하였다. 간혹 미치기도 하였다. “아싸라비야, 도로아미타불”이나 “내가 살아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일찍이 나는>)고 한 최승자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성복의 어법을 빌리자면, “모두 죽었는데, 아무도 죽은 줄 몰랐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러한 죽음의 기운이 조금씩 떨쳐지는 것은 87년 이후이다. 그 이후 한국사회는 개량적․형식적 민주화의 길로 접어든다. 그리고 이어진 90년대에 80년대는 이미 '과거'가 돼 버리고, '후일담'이 횡행한다(한국사회는 가끔 (나쁜 쪽으로) 정신분열증적이다. 과거-망각(청산이 아니다!)에 있어서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듯하다. 정신분열증적인 포스트-모던사회에서의 선전을 기대해볼 수 있을까?). 이 '시대의 우울'을 이렇게 정리해볼 수 있을까? "서른, 잔치는 끝났다, 이 돼지들아!"

 

 

 

 

 

 

 

90년대적인 시(현상)으로 장정일과 유하의 경우를 들고 싶다(비록 그들이 등장한 건 80년대 말이지만). <햄버거에 대한 명상>(1987)의 장정일과 <무림일기>(1989),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의 유하는 키치적인 상상력과 패러디적인 기법으로 무장하고 “진지한 시”의 전통에 냉소를 퍼붓는다(이미지가 지원되지 않는군. 이게 언제적 유하인가?). “쇠고기와 돼지고기를 곱게 다졌으면,/ 이번에는 양파 1개를 곱게 다져 기름 두른 프라이팬에 넣고/ 노릇노릇할 때까지 식혀놓는다/ 소리내며 튀는 기름과 기분 좋은 양파 향기는/ 가벼운 흥분으로 당신의 맥박을 빠르게 할 것이다...”; “그 무렵 하남 땅에서 민초들의 항쟁이 있었다/ 아, 이름하여 하남의 대혈겁(大血劫)/ 광두일귀는 공수무극파천장(空輸無極破天掌)을 퍼부어 무림잡배의 폭동을/ 무사히 제압했다고 공표, 무림의 안녕을 거듭 확인했다”

 

 

이들의 “가벼운 흥분”과 재미의 세계는 80년대적인 무거움과 극적이면서 단호하게 결별한다. 이는 새로운 시이면서, 시의 끝(=종말)이다. 근황? 장정일은 일찍이 시를 그만 두었고(소설을 쓰다가 급기야는 <삼국지>까지 옮기고 방송진행자까지 되었다. 오래 살고 볼일이다!), 유하는 영화계 주변을 맴돌다가 다시 시의 초심(初心)으로 되돌가겠다며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를 발표하고 욕을 먹는다. 하지만, 다시 영화를 만들고 이번엔 성공한다. 영화를 만든다는 건 생각만큼 미친짓은 아니다. 특히 요즘은.

 

 

 

 

 

 

 

 

 

그리고 기형도. 그의 시가 자리하는 건 80년대 말이다. 이 글은 전체가 사실 기형도론의 서론으로 씌어진 것이기도 했다. 물론 100년의 한국시사가 두 쪽 분량으로 요약될 리는 만무하지만, 적어도 (편집증적인 시읽기에 있어서) 시의 전사(前史)를 모르고 한 시인에 대해 말한다는 건 어불성설이기 때문에 이러한 사전공작이 필요하다고 당시엔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시에 대해선 얼마전에도 몇 자 적어둔 바 있다. 언젠가 제대로 된 규모의 글을 쓴다면, 아마도 이 전사(前史) 또한 제대로 된 규모로 재구성되어야 하리라. 제대로 읽는다는 건 제대로 사는 것만큼이나 어렵고도 힘든 일이다...   

 

05.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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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5-12-28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으로 공들인 글이네요. 잘 읽고 갑니다~~

poptrash 2005-12-29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학기에 미당의 제자이신 노교수님께 한국 문학사를 배웠어요. 비록 달리고 달려도 해방직전까지 겨우 배울 수 있었을 뿐이었지만. 좋은 글 잘봤습니다.

jiwok 2005-12-29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십니까? 로쟈님.
잘 읽었습니다.
저는 2차대전 러시아 사회에 대해 관심이 있는 회사원 입니다. 실례되는 것은 알지만 마땅한 자료를 구하지 못해서요. 궁금한 것은 한국에 번역된 서적 중 1940년대 독-소 전쟁 시기에 대한 경험담/개인적인 회고록/소설/ 역사서 등이 있는지요? "여기 들어오는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와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은 읽었습니다만 자주 인용되는 서적 중에 Vasilli grossman의 "Life & Fate"가 있던데 매우 궁금했습니다만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로쟈 2005-12-29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을 검색해보니까, 그로스만의 책은 8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고 불역본이 들어와 있네요(원저는 물론 러시아어본입니다). 말씀대로라면 영역본도 있겠습니다. 스탈린시대에 관한 회고록 등은 차고 넘치치 않을까 싶습니다. 최근에 그와 관련한 국내 논문들을 교정할 일이 있었는데, 요즘은 학술논문들이 원문 서비스가 되므로 그쪽을 검색해보셔도 되겠습니다. 톰슨의 20세기 러시아사 책도 참고할 만하겠고, 역자가 전문가이므로 저보다는 더 확실한 답변을 드릴 수 있을 듯합니다. 한번 문의해보시길...

jiwok 2005-12-29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1.
스탈린 시대에 관한 회고록 등이 차고 넘친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모두 학술논문인가요?

2. 저의 구체적인 관심사는 독-소 전쟁 시기의 전쟁을 경험한(전선 또는 후방에서) 사람들의 이야기 입니다. 전투 그 자체에 대한 자료들은 많이 보유하고 있거든요.

건강하십시오.

추신) 로쟈님의 글을 읽을 때마다 직업적 연관성이 높다해도 이다지도 분야의 포괄성과 깊이를 모두 안고 갈 수 있다는데 신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로쟈 2005-12-29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회고록'들을 다룬 논문들도 많이 씌어지고 있고, 당연히 그 재료가 되는 회고록들은 넘쳐날 거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올해가 러시아에서는 승전 60주년이었기에 이에 대한 관련서들이 쏟아져나왔을 거라는 짐작도 보태보고요. 개인적으론 스탈린주의와 그 시대 문학에 관심을 갖고 있지만, '회고록' 같은 1차 자료는 문학도들보다는 역사학도들의 관심대상입니다. 때문에, 제가 자세한 도움의 말씀을 드리지는 못합니다. 혹 관련서 집필 계획을 갖고 계신 건가요?

니브리티 2005-12-30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jiwok님/2번 항목의 독-소 전쟁 경험과 관련한 소설이라면 볼프강 보르헤르트의 <이별없는 세대>가 잘 알려져 있는 거 같아요.(꽤 유명한 소설임)

니브리티 2005-12-30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전에 말씀드렸던 공간 오픈겸 해서 사람들을 오늘 30일 저녁 7시에 초대했거든요. 너무 늦게 말씀드리는 것 같은데,,;;;; 혹시 관심있으시면 나중에라도 한번 들러주시면 고맙겠습니다....www.800.or.kr (800은 서지분류상 문학 항목...--;;)

로쟈 2005-12-30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브리티님/ 저는 아이와 함께 지금 코엑스몰에 와 있습니다. 초대에 응하지 못해서 죄송하지만, 좋은 시간, 공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로쟈 2005-12-31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햇빛비둘기님/ 새해 인사에 감사드립니다. '내년에도' 열씸히 쓰겠습니다(생계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 한도에서). 열씸히 읽어주시고 가끔은 코멘트도 해주시길. 물론 생계에 지장을 받으시지 않는 한도 내에서...
 

 

 

 

 

'어린 딸에게'는 '목마와 숙녀'로 잘 알려진 박인환(1926-1956)의 잘 알려지지 않은 시이지만, 언젠가 그의 평전을 읽으면서 그래도 가장 인상에 남았던 시이다(이미지에는 윤석산 교수의 평전이 올라와 있지만, 내가 읽은 건 이동하 교수의 평전 <박인환>(문학세계사, 1993)이다. 대표시들도 모두 포함하고 있는 책인데, 요절한 시인인지라 작품집이 한권으로 카바된다). 흔히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로 시작하는 시와 노래(박인희)대표작의 감상성에 기대어(과거 음악다방에서 가장 많이 접할 수 있었던 시인이 박인환과 (성산포의 시인) 이생진이었다. 혹 이런 시의 낭송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살아서 고독했던 사람
그 빈 자리가 차갑다
아무리 동백꽃이 불을 피워도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그 빈 자리가 차갑다

나는 떼어 놓을 수 없는 고독과 함께
배에서 내리자 마자 방파제에 앉아 술을 마셨다
해삼 한 토막에 소주 두 잔.
이 죽일 놈의 고독은 취하지 않고
나만 등대밑에서 코를 골았다

술에 취한 섬. 물을 베고 잔다
파도가 흔들어도 그대로 잔다

저 섬에서 한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달만 뜬 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달만
그리움이 없어질때까지

(...)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죽어서 실컷 먹으라고 보리밭에 묻었다
살아서 술을 좋아했던 사람,
죽어서 바다에 취하라고 섬 꼭대기에 묻었다
살아서 그리웠던 사람,
죽어서 찾아가라고 짚신 한 짝 놓아 주었다

삼백육십오일 두고두고 보아도
성산포 하나 다 보지 못하는 눈.
육십평생 두고두고 사랑해도 다 사랑하지 못하고
또 기다리는 사람.

하여간에 이름은 카페로 돼 있는 다방에 앉아 있으면 누굴 기다리거나 말거나 들려오는 건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아니면 "살아서 고독했던 사람"이었다(거의 유사한 목소리의 성우가 낭송했던 듯하다. 언제였던가? 스무살이 되던 무렵?). 아, 하나 더 있긴 했다. 서정윤의 '홀로서기'.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로 시작되는. 내가 살던 소도시에는 카페를 겸하던 서점의 이름조차 '홀로서기'였다(그 시를 내게 또박또박 적어서 보내준 여학생도 지금은 다 학부모가 되었겠군). "가슴이 아프면/ 아픈 채로,/ 바람이 불면 고개를 높이 쳐들면서, 날리는/ 아득한 미소." 해서 연배는 다 제각각이지만 박인환, 이생진, 서정윤은 내게 한국시의 센티멘탈리즘 3인방이다('센치멘탈리즘'이라고 읽어야 한다). '어린 딸에게'는 그런 박인환이 남긴 몇 안되는 '리얼리즘' 시이다(1955년에 발간된 <박인환선시집>에 수록돼 있다).  

기총과 포성의 요란함을 받아가면서
너는 세상에 태어났다 죽음의 세계로
그리하여 너는 잘 울지도 못하고
힘없이 자란다.

엄마는 너를 껴안고 3개월 간에
일곱 번이나 이사를 했다.
서울에 피의 비와
눈바람이 섞여 추위가 닥쳐오던 날
너는 입은 옷도 없이 벌거숭이로
화차 위 별을 헤아리면서 남으로 왔다.

나의 어린 딸이여 고통스러워도 哀訴도 없이
그대로 젖만 먹고 웃으며 자라는 너는
무엇을 그리우느냐.

너의 호수처럼 푸른 눈
지금 멀리 적을 격멸하러 바늘처럼 가느다란
기계는 간다. 그러나 그림자는 없다.

엄마는 전쟁이 끝나면 너를 호강시킨다 하나
언제 전쟁이 끝날 것이며
나의 어린 딸이여 너는 언제까지나
행복할 것인가.

전쟁이 끝나면 너는 더욱 자라고
우리들이 서울에 남은 집에 돌아갈 적에
너는 네가 어데서 태어났는지도 모르는
그런 계집애.

나의 어린 딸이여
너의 고향과 너의 나라가 어데 있느냐
그때까지 너에게 알려줄 사람이
살아 있을 것인가.

내가 시를 다 암송하지는 못하는 대신에 자주 중얼거렸던 구절은 "엄마는 너를 껴안고 3개월 간에/ 일곱 번이나 이사를 했다"이다. 딸아이가 생기기 훨씬 이전의 일인데, 얼마전 딸아이의 방을 만들어주려던 '혁명'이 불발로 그친 뒤에 간혹 떠올리게 된다. '혁명'이 아니라 '전쟁'인 셈인가? "엄마는 전쟁이 끝나면 너를 호강시킨다 하나/ 언제 전쟁이 끝날 것이며/ 나의 어린 딸이여 너는 언제까지나/ 행복할 것인가"? 얼마전부터 집사람과 자주 '냉전'에 돌입하는 까닭에 나는 자주 딸아이의 '행복'에 (디딤돌이 아닌) 걸림돌 노릇을 하고 있지만(덕분에 딸아이는 '스트레스'란 단어를 내 방에 와서 써놓고 가기도 한다. '아빠 미워'란 말과 함께), 그런 상황이 달가울 리는 없다. 

20대 총각시절 나의 소망은 나중에 딸아이가 7살이 되면 한방 가득 도서관을 차려주는 것이었다. 딸아이도 한때는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지만, 요즘은 '아빠처럼 책 좋아하는 남자는 안 만날 거야'라고 미리 선언을 한다. 적어도 한 여자에게서만큼은 존경받는 남자이고 싶었고, 딸이라면 아빠를 존경해주지 않을까 라는 게 나의 '얄팍한' 계산이었는데, 일이 만만치 않게 됐다(이러다간 인생 헛사는 게 시간문제겠다). 그 아이의 가장 최근 모습이다.

'조작' 시비가 있을까 하여 사이즈는 그대로 놔두었다. 스스로 발가락만 아빠를 닮았다고 하니까(더 추궁해야 입술도 닮았다는 정도의 얘기를 듣는다) 내가 기여한 바는 별로 없어 보이지만, 하여간에 아이는 나의 DNA정보를 1/2 공유하고 있는 유일한 동료 인간이다. 참고로, 아이가 언젠가 그린 아빠 얼굴은 아래의 모습이다(거의 닮은 바가 없어, 옆집 아빠를 그려놓은 게 아닌가 의심스럽긴 하지만 그나마 웃는 모습이어서 다행이다).

아이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갖게될 무렵 사람의 손가락을 다 그려놓는다고 한다. 그러니 아이는 이미 '자기'에 대한 주관과 고집과 땡깡을 고스란히 갖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며칠전 책정리 기념으로 내 방에 들어와서 찍은 사진(사진은 모두 엄마가 찍어준다).

하필이면 의자도 아닌 애매한 박스 위에 앉아서 찍었는데(그것도 잠옷만 입고) V자에 좀 어정쩡한 미소가 아이의 전형적인 포즈이다. 우리 부부가 싫어하는 포즈이기도 한데, 이건 어떻게 살아남은 사진이군. 서재의 한쪽 벽면에는 주로 철학책들이 꽂혀 있다(교양과학과 정신분석학쪽도 포함해서). 이 방면이 지난번 '쓰나미'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생존률이 높다. 아직 안 읽은 게 많다는 얘기이고, 니체 등과 관련해서는 계획중인 글들이 많이 남아 있어서이기도 하다. '쓰나미' 이후엔 상당히 깨끗해져서 요즘은 '들어갈 수 있는' 서재의 전경이다(사진이 흐릿하게 나와서 무슨 책들이 꽂혀 있는지는 다 염탐이 안 되실 듯하다). 눈밝은 이라면 왼편 상단에 프로이트 전집 몇 권이 꽂혀 있는 걸 알아보실 수 있을 듯. 그 아래로는 대개 정신분석학 관련서들이고, 가운데 서가는 대부분 현대 프랑스 철학책들이다. 하단부엔 벤야민과 손택, 아렌트의 책들도 몇 권 보이는데, 읽기 위해서 혹은 쓰기 위해서 가까이에 배치해 놓은 것들이다. 전공서적이나 문학관련서들은 대부분 다른 방에 가 있다(아이의 방으로 꾸며주지 못한 방).

아이와 언제나 사이가 안 좋았던 건 아니다. 어린이집에 다니던 4살 때는 엄마가 시기할 정도로 절친한 관계를 유지했었다. 그래서 아이가 거의 최초로 무슨 '어린왕자' 같은 그림을 그려놓았을 때도 나는 혹시 '아빠'를 모델로 한 게 아닌가 생각했었다. (아직 손가락도 그려넣지 않았던) '좋았던 시절'에 관해 가끔 얘기가 나오면, 아이는 "옛날에, 내가 4살때..."라고 말한다. 옛날이라! 하긴 여섯 살 평생을 살아온 아이에게 재작년의 일들은 먼 옛날일 법하다. 내가 20대 초반을 회고적으로 기억하듯이 말이다. "이젠 내 곁을 떠나간 아쉬운 그대이기에..."

그리고 이건 아이가 옛날에, 그러니까 4살 때 한글을 처음 배우면서 연습장에다 처음으로 써놓은 한글 모음들이다. 그렇게 배운 한글로 작년엔 모스크바로 '아빠 사랑해요'라고 또박또박 적은 생일 축하카드를 보내오기도 했었다(이젠 그렇게 배운 한글로 '아빠 미워'라고 써놓는다!). 해서, 나는 루소나 레비스트로스처럼 이 야만적 문명, 혹은 문자의 폭력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순수했던 시절, 그러니까 옛날에, 4살때, '성스런 야만인' 시절 아이는 이런 모습이었다. 겨울이었고 눈이 많이 왔었나 보다. 아, 옛날이여, 이젠 다시 돌아올 수 없나, 그으날, 그날이여!..

05. 12.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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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일레스 2005-12-14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가 너무너무 귀엽네요! 저 깜찍한 브이 하며... 허허. 앞으로는 더 존경받는 로쟈님이 되실 수 있을 겁니다. :)

깍두기 2005-12-14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공주님과 디엔에이 1/2을 공유하고 계시다면 로쟈님도 상당한 미모이실 듯^^

외로운 발바닥 2005-12-14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이쁜 공주님이네요. ^0^
20대 총각인 저도 로쟈님과 같은 꿈을 꾸어보야야 겠네요.

stella.K 2005-12-15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따님이 정말 귀티나네요. 저만하면 딸래미를 위한 훌륭한 도서관 아닌가요? 딸에게 박인환의 시를 읽어주면 정말 멋질 것 같군요. 그렇다면 로쟈님은 멋쟁이신가요?
송구합니다. 사실은 오래전에 즐찾해놓고 인사드릴 기회가 없었습니다.
소개하시는 책들이 저 보단 세수쯤 위라 섣불리 아는 척했다 민망한 일 당할까봐 도둑처럼 드나 들었습니다.
그나마 따님 얘기하시는 이 수준이 저에겐 딱 좋군요. 반갑습니다.^^

yoonta 2005-12-15 0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딱봐도 울집에 있는 책이 벌써 여러권 눈에 띄는군여..진리와 방법..저 영어본은
꽤 오래된 판본인가보군녀..

지나간 일이지만 정말 아깝슴당...로쟈님 책 2500여권..ㅠ.ㅠ

로쟈 2005-12-15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들 저보다는 제 딸내미에게 더 관심들이 있으시군요. 그나마 책에 먼저 눈길이 가는 yoonta님이 예외이시듯한데, 필시 아직 미혼이실 듯하고 (제 전철을 밟으실 듯한) 장차의 부녀지간이 눈에 보일 듯합니다(말씀하신 <진리와 방법> 영역본은 89년쯤에 산 거 같군요. 번역 세미나를 두어 달 한 거 같습니다).^^

로쟈 2005-12-15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tella09님/ 어젯밤에 '헨젤과 그레텔'을 읽어주는데(제가 읽은 것만 두번째), 아이가 미리 선언을 하더군요. 언젠가 자기한테 물려줄 거라고 한 아빠 책들은 나중에 다 갖다 버릴 거라고. 지금은 책읽는 거 좋아하지만, 크면 안 좋아 할 거라고. 해서, 제가 아빠 책들은 나중에 도서관에 기증하면 된다고 얼버무리고 말았습니다. '아이의 도서관'은 물건너 간 거 같습니다...

이럴수록 2005-12-15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 속에 그대를 못잊어 그리워한다..........

이네파벨 2005-12-15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님이 정말 이쁘네요....
동그란 이마랑 뽀얀 피부랑 웃는 눈이랑...

아빠에게 상처주는 미운 말 하는 모습이 상상이 안되지만...
미운 일곱살이라는 말이 달리 있는게 아니라는걸 저 역시도 실감하고 있답니다
(제 아들내미도 일곱살이거든요.)



기인 2007-05-18 0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글도 벌써 햇수로 2년 전이니.. '먼 옛날'의 일이군요 ^^
따님은 이제 또 어떻게 변했을지.. :)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세계사)는 1994년초에 나온 진이정(1959-1993)의 유고시집이다. 시인은 그 전해 가을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등졌고, 나는 그해 가을에 그의 시집을 읽고 일기에 몇 마디 독후감을 남겼다. 지난주 책정리, 복사물 정리를 하다가(대부분 갖다버리기 위해) 이젠 파일도 남아있지 않은 그 독후감의 프린트를 발견했다. 글의 말미엔 94. 10. 20.이라고 씌어 있다. 그 독후감의 제목이 '진이정, 거꾸로 선 꿈의 세계 혹은 허망한 나라'이다. 그 덕분에 거의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10여년 전 기억의 저편이지만, 그날 하루만큼은 무슨 일을 했는지 알겠다. 다시, 10년쯤 후에 돌이켜보기 위해서 이 또한 '창고'에 넣어두기로 한다('즐거운 책읽기'로 분류하기엔 내용이 너무 우울하다).

진이정의 유고시집, 아니 그냥 시집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를 읽는다. 도서관에서 비려온 책이라 오늘 반납해야 한다. 엄정화의 노래 '눈동자'를 들으면서. 생각해보니 유하의 영화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1993)에 삽입된 노래이고(*음악은 신해철이 맡았다), 그 영화를 소개하는, 아니 영화보다는 젊은 감독을 소개하는 무슨 '인간시대' 같은 프로에서 나는 진이정을 보았다(*진이정은 유하의 스승이자 친구였다). 그리고 그게 마지막이다. 그가 영양실조로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것은 지난봄이던가 아니면 작년 어느때이다(*작년 어느때이고 사인이 폐결핵인지 영양실조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그는 뛰어난 시인은 아니다. 몇 사람이 그의 유고 특집까지 만들어 책을 냈지만 시에서만큼은 대단하지 않다. 가장 쉬운 말로 하면 절제되어 있지 않고, 가장 뻔한 말로 하면 시적 언어의 밀도(재미)를 갖고 있지 못하다. 이걸 요설적이라고도 하고 너무 풀어져 있다고도 한다. 건성으로 읽은 바에 기대면 기지촌에서의 어린시절과 불행한 가족사 따위에 그는 너무 억눌려 있다. 시적 소재로서 그가 다만 그러한 기억들을 가져온 것이라고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때문에 상상력의 비약이랄까 자유 같은 것이 그에게는 위축돼 있다. 그래서 너무도 직설적으로 허무하다고 말한다: "아트만이 무너진 마당에/ 인생이 꿈이란 건, 그 얼마나 뻔한 비유인가/ 이제부터 나의 우파니샤드는/ 거꾸로 선 현실이다"('아트만의 나날들') 그 '거꾸로 선 현실'이란 아마도 시일 것이며 그것은 그의 말대로 '허망한 나라'(!)이다. 그는 그 '허망한 나라'에서 오래 버티지 못했다.

그의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연작 10편을 차례로 읽는다. 읽으면서 나의 눈길을 붙잡는 부분들만을 옮기겠다. 먼저, '거꾸로 선 꿈의 세상'이 시의 세상이라는 걸 밝히고 있는 부분: "나는 운수를 믿는다 바다 없이 항해할 때처럼/ 눈물도 없이 운다 울었다/ 너무 팔아먹을 것이 없었으므로/ 거꾸로 선 꿈의 세상에서, 가끔 나는 바로 선다/ 깜빡 꿈이란 걸 잊은 채 말이다/ 허나 고런 때래야,/ 겨우 시가 되는 것이다"('거꾸로 1')

시인은 제대로 된 세상에서는 팔아먹을 것이 없다. 팔아먹을 것이 없다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생존능력이 결핍되어 있다는 걸 말한다. 이 결핍을 그는 꿈으로 보충하지 않는다. 결핍을 보충하는 꿈이란, 나도 언젠가는 남보란 듯이 폼잡고 살 때가 오리라는 믿음을 혹은 갈망을 바탕에 깔고 있는 꿈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러한 꿈조차 포기한다. 그는 그 꿈을 거꾸로 세운다. 그리하여 그 꿈이 가리키는 방향은 이젠, 보다 나은 현실이 아니라 그저 시이다. 시일 따름이다. 그것은 겨우! (너무 팔아먹을 것이 없어서 꿈을 품팔이하려는 시인에게, 그러나 시는, 우리의 잘난 시는 얼마나 냉정한 것이랴!)

그의 인생: "미안해, 나는 성욕을 딱 잃고 말았다/ 왜 사람들은 날 걱정할까/ 순두부처럼 살고 싶었다/ (...)/ 몽정의 나날이여, 꿈의 정액이여: 어디 마땅한 질을 찾아가거라."('거꾸로 2') 거꾸로 선 세상의 시민이 되기로 작정한 시인에게 현실에서의 성욕이란 생존에의 욕구 만큼이나 부질없다. '순대 먹기 위해서' 살아가는 현실이 싫고, '똥폼과 장난 속에서 교살되는' 현실의 예술'(=제대로 된 꿈)이 싫다. 그는 그런 일들에 속아서 결국 그의 인생이 '소위 보람있다는 일로 낭비되었다'는 걸 이제 누구보다도 잘 간파한다. 그는 그래서 투덜거린다: "진짜 연애, 진짜 아이, 진짜 인생에서 나는 멀리 떨어져 있다/ 나는 구호식품에 의존해 있으므로, 시인이다."('거꾸로 4')

그는 환멸과 자조에 의지하여 삶을 버틴다. 아니 그런 삶을, 그러나 그는 진짜 시인의 삶이라고 우긴다. 자신의 무지와 무기력을 변명하면서: "나, 걸어가리라, 허망을 딛고, 낯선 인연을 따라서/ 백과사전도 없이, 나는 지식인 노릇을 한다/ 나를 가르친 건 휘중당의 담쟁이 덩쿨이었다/ 나는 여태까지 참기만 해왔어/ 그게 인생이란다; 개 같은/ 나의 무지와 무기력에 혐오를 느끼는 분들께,/ 나는 변하지 않으렵니다"('거꾸로 5') 그리고 그는 정말로 변하지 않았다! "엇박으로 돌아가고 있"는 그의 인생. 그는 그저 대책 없는 횡설수설로 시간을 죽인다. 그리고 자주 운다: "눈물의 성분엔 미량이나마 진리가 들어 있는 듯해/ 울고 나면, 천국에 들어온 느낌"(그의 죽음이 몇 사람을 천국에 보냈는지?)

그의 종말: "음식이 들어가면, 내 몸이 화를 낸다/ 사실은 마음의 분노이리라". 의학적으로는 신경성 거식증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자해(自害)를 시인은 묵인한다. 이제 그의 인생이 바야흐로 종말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그의 마음의 세 허씨("허전해, 허무해, 허망해")가 한몫 거든다(*5공때 잘나갔던 '쓰리 허'를 떠올리게 한다. '허전해, 허무해, 허망해'는 '허문도, 허삼수, 허화평'들이 만든 세상의 이면, 즉 '그늘'이기도 하다). 왜 세상이, 삶이 허전하고 허무하고 허망한가? 그것은 자존심의 근거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사람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그것이 나의 유일한 자존심이었는데/ 이제는 믿을 게 없다"('거꾸로 9') 대개의 자존심이 그러하듯 시인의 자존심도 제법 유치한 것이지만, 그러나 인생이란 게 너무 자주 유치해지곤 하니까 시인을 탓할 수는 없다. 어쨌든 그는 자진하여 윤회의 길을 떠났다: "날 말려줘, 날 때려줘, 날 눕혀줘"라고 시인은 애원했지만 아무도 귀답아 들어주지 않았다. 세상 또한 시에 못지 않게 냉정한 것이니까...

진이정의 시 읽기를 끝낸다. 59년생. 34세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시들은 건성으로나마 읽으며 뒤늦게 느껴지는 것은, 시인이 지닌 여성 콤플렉스이다. 보다 정확하게는 정결 콤플렉스. 그의 시이에는 타락한 여성의 이미지가 빈번하게 나온다. '포르노의 진리' 앞에서 위축된 시인은 장가를 가라는 주위(특히 어머니)의 요구에 "저 이제 여자의 맛을 잃었나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도피'는 그 안에 뜨거운 갈망을 숨기고 있는 것이 예사이다. 그의 비논리적인/요설적인 연상들에 의거한 시들은 한편으로 이러한 갈망을 드러내면서 감추는 전략일지도 모른다. 이런 방향에서 그를 읽은 글이 있나 찾아봐야겠다.(*아래 사진은 플라스틱 포르노 전시회를 알리는 러시아의 광고 포스터)

기억에, 이후에 내가 그런 글을 더 찾아본 것 같지는 않다. 이 글을 옮겨두기 위해 자료를 검색하다가 알게 된 건데, 올해 부산일보의 신춘문예 평론 당선작이 진이정론이다. '실존적 헤르메스의 탄생: 경계의 시학 -진이정의 시세계'(박대현). "모리스 블랑쇼가 예술가를 일컬어 '죽음을 자기의 작품으로 만들고자 하는 자'라고 했을 때,예술가는 죽음을 '낯선' 것이 아닌 '고유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죽음을 통해 삶을 사는 자로서의 질적 전환을 이룬 존재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데(블량쇼는 문학에서 죽음이란 주제의 문지기이다), 나의 독후감보다는 '본격적인' 이 평문의 결론만을 여기에 옮겨둔다. 혹 얻을 것 없는 나의 글에 허기진 독자들이 계실 듯하므로(괄호안의 숫자는 시집의 쪽수일 것이다).


진이정은 해탈욕망의 경계에서 다시 실존의 그리움을 뿌리치지 못하고,'옛 장의사 자리엔 무지개 룸살롱이 들어와 있'고,'잠자는 죽음의 코털을 건드린 줄도 모르는'(105) 자본주의 문명의 속악한 진창으로 돌아와 버렸다. 그 진창이란 '짜장면 젓는 폼만 보아도 양갈보 똥갈보를 용케 구분하던 양민들'(115)과 '일용할 봉지쌀과 함께 퇴근하던 외삼촌'이 살았으며,'외국군대에게 언제까지 의지해야 하'(66)고 '민족반역자들이 출세하'(78)는,'개같은/ 나의 무지와 무기력에 혐오를 느'(78)낄 수밖에 없는 '식민지' 현실이다. 그래서 '이탈리아 거지가 강남 중산층보단 행복'(44)할 만큼 비참한 현실이다.

죽음을 한껏 체험한 자에게 진창의 현실이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죽음으로 인한 실존의식과 초월(해탈)의 욕망은 현실에 대한 무관심으로 귀착되는 것일까? 그러기엔 진이정의 사회과학적 상상력은 그의 실존적 상상력 속에서 너무나 치열하게 살아 숨쉬고 있으며,그 자신을 생생한 현실의 환부 한가운데 서 있게 한다.

데뷔작 '일터에서 보낸 편지'(주:진이정은 '민중시대의 문학적 실천'이라는 슬로건을 내건 <실천문학>을 통해 등단하였다. 이 사실은 진이정이 해탈이라는 관념의 세계를 처음부터 지향했던 것이 아니라,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개혁과 구원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죽음과 맞물려 현실과 해탈이 뒤얽히는 실존적 상상력이라는 독특한 시세계를 형성하였음을 보여준다)에서 알 수 있듯이, 진이정의 시세계는 현실과 유리된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출발하여 육체적인 유한성에서 비롯된 실존적 자각과 해탈의 관념까지 아우르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시세계가 관념적으로 흘렀다는 비판적 논의보다는 보다 폭넓은 세계관으로 확대되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가능하게 한다. 구체적인 현실의 문제와 죽음,그리고 근원에의 절망적인 탐구에 이르기까지 그의 시세계는 관념성을 극복하고 시적 진정성을 확보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해탈의 상상력과 죽음의 감수성을 치열하게 보여준 진이정이지만,그가 지닌 시세계의 근저에는 현실에 대한 사회과학적 자각이 깔려 있는 것이다.

단전호흡은 우리 사장님의/비술입니다/할딱거리면서/간신히 횡경막을 위아래로 오르내리는/저희들의 숨쉬기와는 질적으로 다르지요/지난번 조회시간에 사장님은/고맙게도 자신의 호흡법을/저희들에게 소개를 했는데요/(…중략…)/그 때부터 우린 감히 사장님과 마찬가지로/단전호흡을 시작했는데요/우리 공장에 있던 분진,카바이트,납,소음,악취가/어느새 기가 되어/이제 우리들의 단전 속으로 모두 들어와 있고/언젠가 심부름 가는 길에 보았던 사장님 댁의/안뜰같이/세상은 다시 청정해진 것처럼 우리들의 눈에는 비쳤답니다 안녕('일터에서 온 편지' 중,<실천문학>, 1987)

단전호흡을 매개로 자본가와 노동자의 선명한 계급적 대립구도를 보여주는 위 시에서 진이정이 등단 초기에 가지고 있었던 시적 세계관의 전모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그의 나머지 데뷔작 '사슴목장에서 온 편지''무허가 시장''상도동 무당집에서'에서도 노동자가 시적 화자로 등장하거나 시의 제재로 쓰이고 있다. 죽음이 그의 육체에 스며들기 전,그는 민중 문학적 실천을 통해 사회변혁과 개조를 이루어 내고자 하는 민중시인을 지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육체가 병들어 가면서,개조되어야 할 이 현실은 점점 추억의 공간으로 전화된다. 죽음과 가까워질수록 이 생생한 현실은 추억이 되고 마는 것이다. 폐질환으로 인해 죽음을 서서히 확신하던 그는 '어둡고 초라한 이국의 병사들 틈에서'(19)에서 '딱딱한 미제 사탕을 입에 물고 예배당을 두리번거리던'(20) '유년의 기지촌'(18)을 추억한다.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현실이 무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생하게 되살아나며,더 나아가 '아아 이 몸은 그 진창의 아들일 터이니'(115)라고 절규한다. 자신의 다가오는 죽음으로 인해 해탈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도 못했던 그가 다시 되돌아보는 이 현실의 추억은 그를 '감전'(57)되게 한다.

그의 추억은 너무 생생하다. 너무 생생해서 '악몽이다'. '크레용의 햇님이 고향을 북북 문대'(17)던 진창 속의 연꽃 같은 어린 시절까지도 그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렇다면 그는 왜 '추억실조'(16)에 걸려 있다고 엄살을 떠는 걸까? 그의 추억은 그의 사회과학적 상상력 속에서는 더 이상 아름답지 못한 '진창',죽은 추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추억 다오/나는 추억 거지/나는 추억 부랑자'(17)라고 절규한다.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고 말했던 기형도나 '나는 사라진다/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라는 종시를 남겼던 박정만과는 달리,해탈의 관념에서 다시 현실의 '진창'으로 되돌아온 그는 '남자인 희망의 입 속으로 혀를 들이'밀고 '희망을 아직 그녀라고 부르'는 '희망의 호모'(51)가 되어 '슬픔의 화폐개혁'(36)을 꿈꾼다. 그것은 불가능한 꿈이지만,그의 죽음조차 그 꿈을 걷어 들일 수 없었다.

눈물도 없이 나는 운다 울었다/너무 팔아먹을 것이 없었으므로/거꾸로 선 꿈의 세상에서, 가끔 나는 바로 선다/깜빡 꿈이란 걸 잊은 채 말이다/허나 고런 때래야,/겨우 시가 되는 것이다('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1' 중)

이미 죽어버린 그는 '눈물도 없이' 운다. 살아생전 이미 죽음에 깊숙이 침잠해 버린 그의 어조는 죽음 이후의 생에 대해서 말하는 듯하다. '거꾸로 선 꿈의 세상'이란 이미 죽어버린 그가 꿈꾸는 이 세상을 암시한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가 죽었다는 사실을 깜빡 잊고 ('깜빡 꿈이란 걸 잊은 채') 가끔 살아 있는 사람처럼 행동한다.('가끔 나는 바로 선다') 그런 때라야,겨우 시가 되는 것! 죽음을 체험한 자만이 이 세상을 제대로 사랑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전언! 이 전언은 그의 다른 시구를 통해서도 암시되고 있다.

나는 건넌다,다리는 곧 없어질 터이다/사라진 다리로 돌아올 테다/그림자 다리를 건너 빛의 나무에 오르겠네('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8' 중)

삶 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경계의 신이지만,이미 죽음을 체험한 '실존적' 헤르메스의 모습으로 그는 돌아온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수시로 넘나들면서 이 세계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진이정은 헤르메스를 닮았다. 하지만,그는 속악하고 추악한 이 현실을 이해할 수는 없으되 버릴 수 없는 실패한 헤르메스이며,삶의 경계를 넘어 '영원'으로 돌아가기를 포기한 실존적 헤르메스다. 그는 실존의 피가 뜨겁게 살아 숨쉬는 현실의 우리에게,'살아있던' 그가 듣고 싶어 했던 '시인의 목소리',즉 '이미 저승에 가버린 시인들의 목소리'(51)를 이미 '죽어버린' 그가 들려준다. 그리고 '그림자 다리를 건너 빛의 나무에 오르'며 비로소 삶과 죽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죽었다. 하지만,'구토를 걱정할' 만큼 '시인의 기침은 너무 상투적이'고,'기계로 쓴 시를 읽는 사람들,뜬소문처럼 우주에 떠 있'(70)는 삭막한 시대이기에 '거꾸로 선 꿈' 속을 헤매는 그의 목소리는 우리의 귓전을 내내 울릴 것이다. 다만,유하의 말대로 '이 추억의 저녁을 지나,마침내 울음이 나를 버릴 때,/세상의 병을 다 앓고 난 마음이/내 안의 그대를 영영 데려'(유하 '상수리나무숲에서')간다면,우리는 더 이상 '다시 인생이라는 중고시장에서 마치 새것처럼'(19) 인생을 앓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죽은 시인의 전언은 무섭다. 진이정이 남긴 시편들은 무섭고 눈물겹다. 그의 죽음이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어 오랜 공명을 가지고 폐부를 울리게 하기 때문이다. 이 세계의 사소한 그림자 하나하나에도 '꽃이라고 별이라고 그대라고 잎이라고 눈이라고 풀씨라고'(14)라고 명명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진이정의 시편들은 그가 가진 이 세계의 눈물겨운 사랑이 어떤 것이었나를 보여준다. 그것은 죽음이라는 검은 강물에 서서히 가라앉는 자만이 토해 낼 수 있는 육성이며,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자가 얻을 수 있는 새로운 감수성의 탄생이다.

덧붙이자면, 나는 진이정이 남긴 시편들이 (무섭지는 않지만) 눈물겹다는 데 동의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자가 얻을 수 있는 새로운 감수성'을 진이정과 비슷한 연배이면서 조금 먼저 보여준 이가 그보다 몇 해 전에 세상을 뜬 기형도이다. 이젠 나보다 한참(?) '젊은' 시인들의 죽음을 애도한다...

05.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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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정리하고 옛날 파일들을 뒤적거리다가 '창고'에나 들어갈 만한 걸 발견했다. 8년전 조교 시절에 쓴 것인데, 옮겨놓는 것은 (연말을 맞이하여 쓴) 1. '30세의 겨울, 혹은 97년을 보내며'와 (대학 신입생들에게 주는) 2. '98학번, 혹은 이제 막 꽃피는 나무들에게'이다(98학번들? 이젠 대부분 졸업했다!). 격세지감(혹은 만사지탄?)이 좀 있긴 하지만, '서른의 추억'을 한번 더 되새겨본다...   

 

 

 

1.

대학 생활에서 12월은 한가한 계절이 아니다. 분주하다. 그런데 그 분주함은 6월의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12월의 분주함은 어딘가로 떠나기 위한 분주함이 아니라 떠나간 것들을 다잡아서 추스리기 위한 분주함이기 때문이다. 그런다고 떠나간 것들이 다시 돌아올 리는 만무하지만, 그런 분주함의 기억이 사소한 위안이 될 수는 있으리라. 혹은 이런저런 궁색한 자기변명을 조금이라도 거들어 줄 수는 있으리라. 그런 분주함의 시간이 이제 두어 주 남았다...

는 식으로 나는 쓰지 않겠다. 이젠 그럴 나이가 아닌 듯싶다. 나는 나날이 분주하고 나날이 한가하다. 12월이라고 예외가 아니며, 97년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하려고 했던 것, 물론 다 못했다. 반도 못했다. 하지만 후회나 반성은 하지 않는다. 그런 것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98년엔 나아질까? 나도 또 익숙한 희망에 마음이 들떠본다. 대충 그런 식이다. 다만, 그런 식에 간혹 감동할 때도 있다는 것만을 말해 두기로 하자. 우리의 생활은 보기 보다 따분한 만큼, 한편으론 감동적이니까.

  

 

 

 

무엇이 감동적인가? “인간들아, 삶을 즐기려면 ‘죽음이 항상 뒤를 쫓아다닌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리고 체리향기를 맡아보아라. 그것은 영원하지 않다.”는 시구를 인용하며 한 영화감독은 이런 말은 한다: “나는 영화 속에서 순간순간의 존엄성을 다루고자 했다.” 나는 이런 문장들에 감동을 받으며 밑줄을 그어둔다. 또 이런 것: “즉 인간은 아무렇게나 살 수 없다는 것이며, 이성이란 아무렇게나 살 수 없다는 의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날 한 일간지의 외신란에는 프랑스에서도 스웨덴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신박약 여성들에게 (불법적으로?) 불임수술을 해왔다는 기사가 실렸다. 약 1만 5천명 가량이 그런 수술을 당했다고, 그래서 논란이 일고 있다고. 나는 한편으로 생각한다. “정말 우리는 아무렇게나 살아서는 안되겠구나. 과연 선진국은 다르구나!” 또 무엇이 감동적인가?

 

 

  

 

월요일이 죽고, 화요일이 죽고 그리고
비가 내린 다음 수요일이 죽어갔다 나는 그리운
햇볕 한 조각 만나지 못하고 주말까지 계속해서 죽어갔다
세상의 물빛 머금은 모든 것들은 경건한 자세로
꽃을 피울 태세였지만 꽃의 어깨를 건드려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월요일이 죽고, 화요일이 죽고
그리고 주말까지 계속해서 비가 내려 습기찬 들판이거나 어두운
영화관에서 팔짱을 낀 채 들꽃이 죽고 들꽃의 視線이 죽고
자막처럼 빠르게, 자동차들은 거리를, 물방울들을
튕기며 사라져갔다
일주일간의 죽음 끝에 햇살은 輓章처럼 나부낀다 (박정대, '물질적 황홀 6'에서)

이런 시들이 감동적이다. 나는 자기 전에 몇 번이나 읊조리다가 잠이 든다. 그렇다. 내겐 “월요일이 죽고, 화요일이 죽고” 하는 날들이 그 옛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하던 날들보다 몇 배는 더 감동적이다, 기타 등등. 어쨌든 내가 이 자리에서 나열할 수 있는 것들은 이런 것들이다. 내가 97년에 만난 것들, 그리고 기억하고 있는 것들. 언젠가는 모두 희미한 추억으로만 남을 테지만, 나는 그것들을 사랑하였다...

 

 

 

 

아, 빼먹을 수 없는 한 여자가 있다. 부산에서 서울로 오는 아침 첫차 기찻간에서 도시락을 까먹고는 졸면서 삶은 계란을 먹으며 캔맨주를 마시던 여자. 턱에 살이 조금 붙은 이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자, 그리고 아마도 술집 여자. 말 한 마디 붙여보지 못했지만, 한동안 나를 감동시켰던 그 여자를 나는 또한 기억하리라. 97년에 내가 만난 사람들, 그리고 헤어진 사람들 틈에서.

30세의 겨울을 맞으며 또 보내며, 어쨌거나 나는 이런 것들을 말하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는 더 잘 말할 수 있었으면 한다. 그밖에 다른 일들은 비교적 사소해 보인다. 다음 주면 벌써 새 대통령이 결정되어 있을 것이고, 환율은 더 올라가 있겠지. 그리고는 온나라가 한동안은 떠들썩해질 것이다. 또 새해가 밝겠지. 올겨울엔 눈이 많이 내릴 거라고도 한다. 나는 어디 갈 일이 없을 것이다(아니다, 2월엔 이사를 가야 한다). 곧 98학번들이 재잘거리겠지. 삶이 다시금 봄눈처럼 푸석푸석 부드러워질 것이다. 우리들 주변에선 크고 작은 아이들이 계속 자라날 것이고, 햇살은 보기 보다 따뜻해질 것이다. 됐다, 그걸로 충분하다. 그런 생각에 나는 다시금 황홀해진다...

는 식으로 나는 쓰고 말았다. 후배들의 기대에 못 미치는 바가 있겠지만, 내 딴에는 금쪽같은 시간을 쪼개어 쓴 것이다. 게다가 할 일은 얼마나 많은가! 조교 생활에서 12월은 결코 한가한 계절이 아니다. 남들처럼 리포트도 내야 되고, 성적 처리, 연말 정산도 해야 된다. 정말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도 싶지만, 그나마 돈도 없다. 방은 춥고, 나이 서른에 애인도 없다. 그저 하는 일없이 분주하기만 하다. 한심한 일이다. 그런 분주함의 시간이 아직도 두어 주나 남았다니!...

 

 

 

2.

내게 특별히 무슨 할말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제 막 꽃핀다는데, 꽃피겠다는데, 그걸 두고 이렇다저렇다, 이래라저래라 참견할 수야 없는 일이 아닌가. 나이가 되어, 또 마침 볕이 좋아(요즘은 머리도 좋아야 한다고?) 꽃피는 시절을 맞이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막무가내인 것이어서 우리네 두 팔을 다 벌려봐도 사방팔방이 다 빈틈이요 구멍이다. 그런 일을 두고 중과부적(혹은 오리무중)이라고 한다, 아무려면.

 


 

 

 

  

 

 

일월 송학에 이월 매조에, 칠월은 횡재수, 오월은 술 아니면 떡이라

팔월 공산에 어느 님 만나 이 한시절 삼월에 산보하랴마는

淑아, 물고기같이 동그란 눈뜨고 일하러 같던 누이가 눈맞아 돌아오지 않던 그 길

- 인생은 그 날이 꽃과 같아 (함성호, '고향집, 폐허'에서)


하여간에 다시 생각해보면, 내게도 분명 그런 시절이 있었건만, 새삼스럽게도 분명 이곳은 이제 어제 놀던 꽃그늘이 아니다. 정말 꽃향기에 취해 세월아 네월아 꿈결에 묻혀가던 시간들이었는데(다 지나간 일들인데, ‘좋게’ 말하자. 어느 시인의 말을 빌면, 지나간 일은 일도 아니라니까), 어느덧 나는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해 말을 해도 농담이 아닌 나이가 되어 버렸다. 그런 내가 굳이 이런 자리에서 몇 마디 거들어야 한다면, 그건 무슨 책임감에서라기보다는 억울함 때문이라는 걸 먼저 분명히 밝혀두어야겠다.

 

그렇다. 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스물 한두 살에 ‘잘가라, 내 청춘…’을 입에 달고 다니긴 했지만, 그런 말이 이젠 겉멋이 아니게 되어 버린 것이다(이젠 내가 그런 소리를 하면, 우리 97학번, 98학번들은 진담으로 알 것이 아닌가!). 울며 겨자먹기로 요즘은 ‘나이 서른에 아직…’이란 말을 입에 달고 다닌다. 그래서 좀 부럽다는 생각도 든다. ‘내 스무 살, 푸른 영혼’이라고 떠벌릴 수 있는 그대들이. 아직 여드름이 다 가시지 않은 얼굴에 나보다 밥도 많이 먹는 그대들이. 내친 김에 연애도 많이 할 그대들이(아이도 많이 낳을?). 비록 경제는 거지꼴이지만, 자유를 숨쉴 수 있는 시대에 청춘을 맞이한 그대들이.

 

하여간에 이유를 붙이자면 한정이 없겠지만, 결론은 부럽다는 것이고, 그대들이 잘났다는 것이다(여기 ‘잘났다’에서 ‘잘’은 타이밍을 말한다. 굳이 덧붙이지면, 이 타이밍은 재능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자, 이 정도면 나는 제법 예의를 차린 것이 된다(이제 막 꽃피는 나무들을 기죽이지 않기 위해서 나름대로 노력한 것이다). 그래, 내친 김에, 부디 잘 살아다오, 성공을 빈다, 누가 조국의 미래를 묻거든, 고개를 들어 ××를 보게 하라, 등등등. 아직 자신의 정서적 발육이 미진하다고, 그래서 미성숙하다고 생각하는 98학번은 여기까지만 읽어주기 바란다. 안녕!


내게 특별히 무슨 할말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죽하면. 개인적인 얘기지만, 언제였던가 87년, 나는 20세(만19세)의 대학 신입생이었고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꿈도 없었다. 이른바 5공화국 말기였고, 세상은 개판이었다(무서운 일이지만, 그런 세상도 죽치고 있다보면 정이 든다). 야외수업을 하던 어느 볕좋은 봄날 나는 한 친구에게 “너는 왜 죽지 않니?”라고 쓴 쪽지를 건넸고,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선 세상이 빨리 끝장나기만을 빌었다. 요컨대 나는 얼치기였고 바보였고 멍텅구리였으며 개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꽃이 피기도 전에 꽃핀 나무들의 괴로움에 대해서 너무 많은 걸 알아버렸고 겉늙어버렸다.

 

성숙한 98학번들에게만 하는 얘기지만, 사실 근본적인 사정은 이제나그제나 다를 바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내가 보기엔 여러분도 얼치기고 바보고 멍텅구리다(‘성숙’이란 건 그런 사정을 요리조리 잘 견뎌낸다는 뜻이다). 한두 가지 정도 개보다 나을까, 그것도 많이 봐줘서 그렇다는 거다. 그러니 그런 그대들이 부럽다는 건 말짱 거짓말이다. 그저 겉멋이거나 한때의 기분일 뿐인 것(이런 말이 있다: “내가 너라면 자살한다!”). 사실대로 말하자. 나는 그대들이 딱하고 불쌍하다(그런 생각만 하면 잠도 오지 않는다). 그대들은 앞으로 꼬박 10년을 더 고생하며 늙어야 비로소 30대가 되는 것. 그때까지 그대들의 스무 살, 푸르죽죽한 영혼은 되지도 않는 고민거리들로 바람잘 날이 없을 것이다(그런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난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조금 걱정이 되지 않는가? 내가 몇 마디 거들려는 부분은 바로 이 대목이다. 

 


 

 

 

 

 

 

나이가 좀 어리기 때문에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은 극히 한정되어 있다. 아침 저녁으로 만지는 책상, 좀전에 같이 앉아 있었던 별로 말이 없는 고향 친구, 며칠 전에 내 손가락을 물어뜯은 하숙집 개의 이빨의 촉감, 이런 것들 말이다. 늙은 사람들이 머리 속에 집어 넣어준 돌자갈 같은 관념들을 바닷물 속에 쏟아버린 후로는 늘 멍청해서 거리를 걸어다닌다.(이제하) 


나는 개에게 물려본 적이 없지만, 이 한 작가의 말에 공감한다. 비록 요즘은 믿는 구석이 많아졌지만(늙어가는 징조이다). 하여간에 중요한 것은 자기가 믿을 수 있는 것이 극히 한정되어 있다는 믿음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모든 걸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세상을 다시 보고, 다시 생각하고, 다시 만들어나가기 바란다. 그래서 다르게 보고,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만들어나가기 바란다. 우리가 진짜 성숙한다는 것, 그래서 개보다 나은 인간이 된다는 것(내가 보기엔 이것이 인문학의 목표인데)은 오직 그런 ‘다른 삶’ 속에서만 가능하다. 생은 다른 곳에 있다는 어느 시인의 말을 나는 그렇게 새기고 있다. 언젠가 그런 다른 삶 속에서 그대들은 예감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오고 있다는 것을. 전혀 다른, ‘위대함’에 대한 전혀 다른 비전을 가진, 추운, 추운 나라의 사람들이 오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어떻게 오는가?

 

 

 

 

 

 

이제는 세상을 떠난 내 아버지에게는 세상을 모두 내버린 자의 무서움이 있었다(主여, 亡者에게 평안함을 주소서). 그는 하해(河海)와 같은 억겁의 술을 마시며 그 괴로운 세월들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겨울의 새벽 4시에 통금해제 사이렌이 울리면 소년인 나는 내 아버지의 쓰라린 위장을 위하여 남비를 들고 시장거리로 가서 가슴에 안고 돌아오곤 했다. 어느 겨울 새벽에 나는 해장국집 문지방에 낀 얼음 위에 자빠져서 끓는 국물을 뒤집어쓰고 허벅지에 화상을 입었다. 나는 선지와 콩나물을 바지에 뒤집어쓰고, 빈 남비를 들고 춥고 어두운 새벽거리에서 울었다. 나는 이 세월들과 내 아버지의 생애를 뛰어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하면서 이를 갈면서 울었다(主여, 亡者를 당신의 품 안에).(김훈)


나는 해장국 심부름을 한 적은 없지만, 허벅지에 화상을 입은 적은 있고 또 당연히 이를 갈면서 울어본 적도 있다(한번쯤 이를 갈며 울어보지 않은 98학번이 혹 있더라도 좌절하지 말 것. 기회는 두고두고 온다!). 그래서 이 또다른 한 작가의 말에 공감한다. 아버지의 생애를, 선배의 생애를 뛰어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다짐없이 어물쩍 대학생활을 시작하려는 98학번에게는 달리 할말이 없다(부디 잘 살아다오, 성공을 빈다). 그럼 이제 몇이나 남았는가? 이쯤에서 남아있는 그대들에게 나는 선배로서의 사랑과 기대를 표한다. 물론 이 사랑과 기대는 이제는 운명이 되어버린 한 ‘선배’로서의 책임감에 빚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 책임감을 고마움으로 바꿔나가는 것은 그대들의 몫이다.

 

쑥쓰러운 얘기는 그만 줄이도록 하자. 입에 발린 소리지만, 거듭 이 새(배움)터에 오게 된 것을 축하하며 환영한다. 곧 같이 늙어갈 날이 있을 것이다...

 

05. 12. 08.

 

P.S. 작년 모스크바 체류시절 룸메이트가 98학번이었다. 우리는 같이 생활하면서 1년간 이미 같이 늙어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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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 2005-12-08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때 그 시절의 로쟈님이 더 맘에 들어요. 으하핫.

로쟈 2005-12-08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늙어가는 게 더 맘에 듭니다. 어디 쑤시고 고장나는 거 빼고는...

비로그인 2005-12-08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술 진창 마시고 하룻밤 샌 다음 초췌한 얼굴로 올라와 과방에 앉았을 때 만난 선배가 해주는 지난 청춘의 이야기 같아요. 쯥. 후후후...

2005-12-09 16: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5-12-09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나간 세월'에 대한 한담에 감회들이 있으신가 보군요.^^ 금요일 마저 죽이시고, 즐거운 주말들이 되시길...
 

 

 

 

 

잘 알려져 있다시피, 제목의 시구는 김수영의 것을 비튼 것이다. 그는 1960년 10월, 4.19의 흥분이 가라앉을 무렵에 '그 방을 생각하며'란 시를 썼다. 주말 3일을 무슨 고아원에 아이들을 갖다 맡기듯이(시원섭섭하다!) 책들을 옮겨놓는 데 쏟아부은 내가 막간에 잠시 떠올린 시가 '그 방을 생각하며'이다. 그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내가 의도했던 건, 내 방을 딸아이의 방으로 만드는 '혁명'이었지만, 결과적으로 혁명은 안되고 나는 책들만 옮겨놓았다. 지난주에 내내 '책 빼라 책 빼라 책 빼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귓전을 맴돌았고, 다행히 시화공단 내 한 사무실에 여유공간을 얻어서 책을 갖다 쌓아놓게 됐지만, 지난 금요일 막상 책을 빼면서 내가 떠벌인 '혁명'이란 게 얼마나 헛소리였는가를 절감했다(물론 주변의 그 싸늘한 시선이라니!). 2,500권 가량을 빼서도 그 모양이니 애당초 2,000권 정도의 책을 뺀다는 게 턱도 없는 견적이었다(참고로, 몇 군데 분산돼 있긴 하지만, 어림짐작에 나의 장서수는 대략 8,000권 안팎이다). 아이의 방을 만들어주려고 했던 책방은 이런 모양새였다.

짐을 싸던 중간에 집사람이 디카로 찍은 사진인데, 이후에 사진에서 보이는 책의 1/3 정도가 더 끈으로 묶여서 박스로 들어갔지만 옆방 서재의 책들이 다시 대거 이사오는 바람에 결국엔 3면의 책장 9개(5단 3개, 3단 6개)를 그대로 보존하게 되었다. 해서, 내가 들은 건 혁명의 노래가 아니라 구박의 합창이었다.

나는 모든 노래를 그 방에 남기고 왔을 게다
그렇듯 이제 나의 가슴은 이유없이 메말랐다
그 방의 벽은 나의 가슴이고 나의 사지일까
일하라 일하라 일하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나의 가슴을 울리고 있지만
나는 그 노래도 그 전의 노래도 함께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나도 하느라고 해가며 책을 빼왔지만(사진은 3/4쯤 작업이 진행된 모습), 쌓아도 쌓아도 딸아이의 방은 비워지지 않았다(조이스의 <율리시즈>도 베르그송의 <웃음>과 함께 '고아원'에 보내졌다). 그리하여 이제 나의 가슴은 충분한 이유로 메말랐다. 책을 싸주러 오신 아버지의 말씀(사진에서 아버지의 손이 보인다. 쌓아올린 책들은 모두 아버지 혼자서 묶으신 거다. 참, 장인 어른도 잠시 다녀가시고. 나는 책 빼오는 일만 했다): "하나밖에 없는 딸아이한테 방도 못 만들어주고 네가 아빠냐?" 그리고 조용히 덧붙이시길, "한심하다!" 비록, "책 빼라 책 빼라 책 빼라"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나의 가슴을 울리고 있지만, "나는 그 노래도 그 전의 노래도 함께 다 잊어버리고", '겨우 이럴려고 책을 뺐어?"라는 핀잔을 가슴에 묻은 채 사태 수습에나 매진했다. 그게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 밤까지였으니...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나는 인제 녹슬은 펜과 뼈와 광기 -
실망의 가벼움을 재산으로 삼을 줄 안다
이 가벼움 혹시나 역사일지도 모르는
이 가벼움을 나는 나의 재산으로 삼았다

결국 혁명은 안되고 나는 책들만 옮겨놓았다. 나는 인제 아직은 녹슬지 않은 펜과 뼈와 광기(집사람은 정신과에 예약해 놓겠다고 했다), 그리고 실망의 가벼움을 재산으로 삼을 줄 안다(비록 아내의 실망은 무거울지 모르나). 혹시나 역사일지도 모르는, 하지만, 나의 이력임에도 분명한 이 가벼움을 나는 나의 재산으로 삼았다. 왜 흔히 하는 말이 있잖은가? 키크고 싱겁지 않은 사람 없다는.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었지만
나의 입속에는 달콤한 의지의 잔재 대신에
다시 쓰디쓴 냄새만 되살아났지만
방을 잃고 낙서를 잃고 기대를 잃고
노래를 잃고 가벼움마저도 잃어도

해서 다시, 혁명은 안되고 나는 책들만 옮겨놓았지만, 나의 입속에는 딸아이의 달콤한 뽀뽀 대신에 다시 쓰디쓴 냄새만 되살아났지만(도망가는 딸아이!), 방을 얻은 대신에 기대를 저버렸지만... 

이제 나는 무엇인가 모르게 기쁘고
나의 가슴은 이유없이 풍성하다
 

 

 

 

 

딴은 이렇게 생각한다. 어차피 결딴난 일에 대해서 굳이 미련한 미련을 남겨두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이유없는 기쁨과 풍성함의 비결이 아닐까? 어제 녹초가 되도록 다시 정리해둔 방에서 나는 '고아원'에 간 책들에 대한 안쓰러움보다는 살아남은 책들을 쓰다듬어보는 기쁨을 택하기로 했다. 그 사이에도 딸아이의 꿈은 자라나 이젠 자기 방뿐만 아니라  마당이 넓은 집을 원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아빠, 돈 많이 벌어야돼!" 그 당부의 말을 나는 아이의 혼잣말로 간주하여 대답없이 방을 나왔다(나는 마루에서 잔다). '마당 깊은 집'은 알겠는데, '마당 넓은 집'이라?..  

05. 12. 5.

P.S. 책을 빼면서 얻은 교훈 중 하나는 책을 읽고 정리한/소화한 만큼 책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이다. 앞으론 좀더 많은 책을 좀더 빨리 읽어치울/먹어치울 작정이다(그러자면, 일년에 책 10권 분량은 써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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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5-12-05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아원'으로 간택되지는 못했지만, 간택을 기다리면서 '책 2500권을 어떻게 쌓지?"라고 상상하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

로쟈 2005-12-05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또 깨달은 거지만, 한 사람이 책을 좋아하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민폐를 입게 되더군요. '즐거운 악몽'은 아니셨기를.^^

blowup 2005-12-05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귀여운 페이퍼라... 읽으며 웃음이.^.^ 특히 앙증맞은 마지막 사진을 보며... 푸하.

프라즈나 2005-12-05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득 중국 禪宗의 어느 고승이 깨닫고 난 다음, 수많았던 경전들을 모조리 다
불태워버렸다는 고사가 생각나네요..^^ 정리한 만큼 자유로웠다는 것은 깨달음(?)의 경지이신가요? ^-^..

바람구두 2005-12-06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서 연구실을 장만하시게 되길....

로쟈 2005-12-06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namu님/ 제 주변 사람들도 웃었으면 좋겠습니다. 프라즈나님/ 그 지경에 이른 깨달음이지요. 바람구두님, 의 연구실을 언제 구경하고 싶군요.^^

cawa92 2005-12-14 0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만에 방문했는데,,, 언제나처럼 그냥 나가려다,,, 차마 찢어지는 마음을 가누질 못하고 위로랍시고 한마디 던지려고 폼잡다가,,, "니나 잘 하세요.."란 금자 언니의 일갈이 떠올랐습니다.... 줄기세포 제공원이 난자가 아니라 딸깍발이들의 기형적 뇌세포였다면 어떨까,, 하는 낭설만 뱉고 갑니다... 라훌라~~

로쟈 2005-12-14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awa님/ 어문데 걱정말고 니나 잘하세요(우울증 조심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