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크샵 참석차 2박 3일간 지방에 다녀왔다. KTX를 타고 대구에 내려가 팔공산에서 1박하고 경주 보문단지에서 2박을 한 후에 다시 KTX를 타고 올라왔다. 대구는 처음 내려가보는 것이었고, 경주는 11년만이었다. 그래봐야 별로 구경한 것이 없는지라 들러본 자취조차 벌써 지워졌겠다. 

 

직접 제 발로 걸어보지 않은 여정이란 별로 의미가 없다. 보문단지의 경우도 4월의 벚꽃이 진해만큼 아름답다고 하는데, (물론 아직 이르긴 하지만) 그 눈부신 벚나무길을 걸어보지 않았으니 경주에 다녀왔다는 말도 삼가해야겠다. 그러니, 경주에 다녀왔지만 '생활'은 발견하지 못했다(다음엔 새마을호를 타봐야할까?). 그나마 우산을 챙겨가서 쫄딱 비를 맞지 않은 게 다행인 것인지?(어제 대구에는 비가 좀 내렸다.)

  

텍스트를 읽는 것 또한 그러하다. 직접 텍스트의 가로수길을 제 발로 걸어보지 않는다면, 그저 KTX식 다이제스트로 대신한다면, 제대로 읽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니 '읽었지만 읽은 것 같지 않은 책들'은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의 목록에 포함되어야 한다. 나는 가급적 그 '슬프게 하는 것들'의 목록을 좀 줄여보고 싶다. 이런저런 텍스트들을 자세히 읽고자 하는 건 그런 이유에서이다('텍스트의 발견'이 없다면, 읽기는 얼마나 단조롭고 무의미한가!).

그런 생각과 맞물려서 마침 생각이 나서 여기에 옮겨오는 건 고진의 텍스트 '에크리튀르와 내셔널리즘'에 대한 자세히 읽기이다. 2003년 1월에 쓴 것이니까 그 또한 벚꽃과는 인연이 없던 계절에 작성된 것이다.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먼지를 털어서 창고에 넣어둔다(나중에 좀 때깔을 내서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읽기'에 부록으로 포함시킬 예정이다).

 

 

 

 

가라타니 고진의 '에크리튀르와 내셔널리즘'과 관련하여 내가 갖고 있는 텍스트는 세가지이다. 첫째는 우리말 번역서 <유머로서의 유물론>(문화과학사, 2002)에 실린 '에크리튀르와 내셔널리즘'(E1이라고 부르겠다)이고, 둘째는 박유하 교수의 번역으로 <세계의문학>(94년 겨울호?)에 실린 '언어와 정치'(E2라고 부르겠다)이며, 셋째는 박 교수의 글을 쿤데라(소조)님이 교정해서 올린 카페(비평고원) 자료실의 '내셔널리즘과 에끄리뛰르'(E3라고 부르겠다)이다.

<유머로서의 유물론>에 실린 비평문들 가운데 내가 가장 관심있게 읽은 글이 바로 <에크리튀르와 내셔널리즘>이다. 쿤데라님에 의하면, "이 글은 맨 처음 <비평공간> 92년 10월호에 발표되었다가, 93년 고진의 <유머로서의 유물론>이란 책에 실리게 된다. 그러다 이 논문을 수정 보완한 <내셔널리즘과 에크리뛰르>이란 논문으로 95년, <인문학 담론에 관한 국제회의>에서 재발표된다. 이때 이 논문에 대한 데리다의 서설이 유명하다."(데리다의 텍스트는 http://www.pum.umontreal.ca/revues/surfaces/vol5/derrida.html을 참조할 수 있다). 

고진이 데리다에게서 많은 시사를 얻었다는 이 글에서 고진은 거꾸로 데리다의 몇몇 논점을 비판하고 있고, 데리다 또한 그 비판이 부적절함에 대해서 반박하고 있기에 옆에서 지켜보기에 퍽 흥미로운 텍스트이다. 그러나 흥미로운 관전에 앞서 먼저 해결되어야 할 것은 문제의 텍스트를 확정하는 것이다. 즉 우리가 어떤 자리에 앉아서 '게임'을 관람할 것인가를 확정하고, 자리 정리라도 해두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한 일이 필요한 것은 세 텍스트가 정확히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며, 부분적으로 (내가 생각하기에) 오역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에크리튀르'란 불어의 번역. 보통, 문자, 글말, 문어 등으로 번역되는데, E2에서 박교수는 '문장어'라는 말로도 번역하고 있다. 하지만, 적절한 번역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문장과 계열관계를 이루는 단어나 구, 문단 등을 떠올려 보라). 어쨌든 에크리튀르는 구어(입말)와 대비되어 쓰이고 있다. 고진의 첫 번째 논점은 음성중심주의가 서양의 경우에만 국한되지/한정되지 않는 문제라는 것이다(E1, 62쪽). 그런데, 이 논점은 좀 이상한 논점이다. 그것은 음성중심주의(phonocentrism)란 것이 서양 형이상학적 전통에 국한된다라는 전제에 대한 반박으로서 제기된 것일 텐데, 그러한 전제를 주장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자신이 한번도 그러한 주장을 한 적이 없음을 자신의 반박문에서 분명히 하고 있다. 고진이 좀더 정확하게 말하려면, 데리다가 말하는 음성중심주의가 서양뿐만 아니라 (데리다가 미처 다루지 않은) 동양에서도 발견된다라고 해야 한다.

어쨌든 이 문제는 음성중심주의가 근대 내이션의 문제와 분리될 수 없다는 고진의 두 번째 논점(사실 이것이 고진의 핵심적인 주장이자 우리가 음미해 볼 필요가 있는 주제이다)과 함께 다음에 '메인-이벤트'를 다룰 때 다시 확인하기로 하고, 이 자리에서는 '텍스트 비판'에만 초점을 맞추도록 하겠다. E1과 E2/E3는 같은 내용을 담고 있지만, 그 문단의 배열은 사뭇 다르다(비교하는 작업마저 어지러울 지경이다). 고진 자신이 원텍스트를 수정한 듯한데, E2/E3가 <비평공간>(1992년 10월)에 발표된 걸 번역한 것이라고 하니까 <유머로서의 유물론>(1993)에 실린 E1이 더 나중에 발표된 것이고, 따라서 수정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참고로 우리말 번역은 99년판을 옮긴 것이다(거기에 증보나 개정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따라서 여기선 E1이 저자의 생각을 더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겠다.

E1의 두 번째 대목(64쪽 이하)에서 고진은 데리다의 소쉬르 독해를 소개하고 그것의 불충분성 혹은 결함을 비판한다. E1의 역자는 differance(디페랑스)를 옮기지 않았고, E2에서는 그것을 '차연'이라, E3에서는 '차이'라 옮겼다. 물론 일반적인 역어는 '차연'이다. 고진의 논점은 데리다처럼 소쉬르를 형이상학 비판이라는 문맥에서만 읽을 필요는 없다라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소쉬르가 문자를 언어학의 대상에서 제외시킨 점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 "소쉬르가 문자를 언어학에서 배제한 것은, 그것이 음성보다 이차적이라는 생각 때문이 아니다. 문자가, 배제될 수 없을 정도로 음성 언어에 침투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E1, 65쪽) "소쉬르가 문자를 언어학에서 배제시킨 것은, 문자가 음성에 비해 이차적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문자에, 배제할 수 없을 정도로 음성 언어가 침투되어 있기 때문이다."(E2, 108쪽/E3) 여기서 E1과 E2/E3의 내용이 상반되는데, 물론 E1이 논리적으로도, 그리고 문맥상으로도 맞는 말이다. E2의 경우 역자가 오역을 했거나, 아니면 그보다 가능성은 낮지만 고진 자신이 잘못 썼거나 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문제의 소쉬르 인용(내가 '문제적'이라고 하는 것은 이 대목을 확인하기 위해서 반나절 이상을 소비했기 때문이다). 세 텍스트 모두 <언어학 서설>에서 인용한 걸로 돼 있는데, 이건 전부 오역이다. 왜냐하면 고진이 인용하고 있는 텍스트는 소쉬르 <일반언어학 강의>이기 때문이다. 그걸 일본에서는 <언어학 서설>로 부른다 하더라도 우리말로 <언어학 서설>로 번역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고진의 인용.

"언어와 문자. 이는 연대적인 듯이 생각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것들은 근본적으로 구별될 필요가 있다. 입말만이 언어학의 대상인 것이다. 언어학의 시간 속으로의 분류는 오직 언어가 받아 씌어지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문자의 중요성을 완전히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다. 실제로 그것들은 문명의 어떤 단계와, 언어활동의 사용상 어떤 완성도의 단계를 각인하고 있다. 그러므로 글말과 문자는 입말에 반작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글말과 입말의 혼동은 초기에 셀 수 없을 정도의, 유치한 잘못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E1)

이 대목에서 E2/E3는 '입말'을 '구어'로 '글말'을 '문장어'로 번역한다. 틀렸다고는 할 수 없지만, 문어(written language)/구어(spoken language)를 굳이 글말/입말로 번역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것도 의문이고('음성'이나 '문자' 같은 한자어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말이다), '문어'를 '문장어'로 번역한 것은 이미 지적했듯이 타당하지 않다. 그런데, 문제는 또 있다. 문제의 인용을 우리말 <일반언어학 강의>에서도 찾을 수 없다는 것. 알다시피 <일반언어학 강의>는 소쉬르가 쓴 책이 아니라 그가 제네바 대학에서 세 차례 강의한 내용을 그의 제자들이 세 번째 강의를 중심으로 노트를 모아 편찬해낸 책이다. 그런데, E1에서 '<언어학 서설>1908-1909'라고 한 건, 1908-9년에 행해진 소쉬르의 두 번째 강의를 말한다. 따라서 우리말 <일반언어학 강의>(민음사, 1990)과 그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인용문의 핵심은 문어가 아닌 구어만이 언어학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관련한 우리말 번역은 "언어적 물체는 쓰여진 낱말과 발음된 낱말의 결합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후자 하나만으로써도 이 물체를 구성한다."(최승언 역, 35-6쪽)이다. 나는 밤중에 소쉬르 관련 책들을 쌓아놓고 뒤적이다가 이 대목을 보고 눈이 번쩍 뜨였다. '언어학의 대상'을 정말 황당하게도 '언어적 물체'라고 번역해놓고 있는 것이다! '숨어있는 오역찾기' 게임이 있다면 거의 골든벨 수준에 해당하는 오역이다.

90년 간행 이후에 여러 판을 찍은 책에서(요즘은 절판된 걸로 나오는데) 어떻게 이런 오역을 발견할 수 있을까? 처음엔 재미있었지만(!) 차츰 처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2006년판이 12월에 새로 나왔다. 오역들이 수정됐는지는 아직 확인해보지 못했다). 요컨대, (나도 그랬지만) 우리말 번역 <일반언어학 강의>를 아무도 읽지 않은/않는 것이다! 지난주(2003년) 한겨레 책세상에선 김재기 교수가 <일반언어학 강의>를 권유하는 리뷰를 실은 바도 있지만, 이런 번역이라면 핵생들에게 권하기 부끄러운 수준이다. 물론 딱 이 부분만 어처구니없는 오역을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학 3학년만 돼도 이 정도의 오역은 하지 않는다.

어쨌든 흥분을 가라앉히고, <일반언어학 강의>의 옛날 번역판을 도서관에서 찾았다. 오원교 역(형설출판사, 1973)에서 이와 관련된 대목은 "언어와 문자법은 서로 다른 두 개의 기호 체계다. 후자의 유일한 존재 이유는 전자를 표기하는 일이다. 언어학의 대상은 쓰여진 낱말과 말해진 낱말의 결합인 것으로는 정의되지 않는다. 말해진 낱말만이 그것의 대상이다."(41쪽) 역시나 흡족한 번역은 아니지만, 최승언 역만큼의 오역은 아니다. 참고로 이 부분에 대한 바스킨(W. Baskin)의 영역은 이렇다: "Language and writing are two distinct systems of signs; the second exists for the sole purpose of representing the first. The linguistic object is not both the written and the spoken forms of words; the spoken forms alone constitute the object."

나는 이어서 혹시 두 번째 강의에 대한 번역은 없을까 하고 찾아봤는데, 다행히 도서관에서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두 번째 강의, 1908-1909'에 관한 책을 발견할 수 있었다. Eisuke Komatsu(예스케 고마츠?) 교토대 교수와 G. Wolf 교수가 편집한 불영 대역본이었다. 그리고 이 두 번째 강의의 발췌역이 작고한 김방한 교수의 <소쉬르>(민음사, 1998)에도 부록으로 실려 있다.

해당 부분에 대한 김교수의 번역은 이렇다: "언어의 위치를 정하고 분류할 수 있는 것이 따로 있을까? 시간 속에서 언어의 분류가 가능한 것은 언어가 쓰여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문자의 중요성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초기의 언어학이 범한 그 수많은 유치한 과오는 쓰여진 언어와 말하는 언어를 혼동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말하는 언어만이 언어학의 대상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206-7쪽)

이 인용부분은 불영대역본과 일치한다. 즉 고진이 인용한 부분과 비슷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지만, 의아하게도 똑같지는 않다. 차이가 나는 부분은, "언어와 문자. 이는 연대적인 듯이 생각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것들은 근본적으로 구별될 필요가 있다... 실제로 그것들은 문명의 어떤 단계와, 언어활동의 사용상 어떤 완성도의 단계를 각인하고 있다. 그러므로 글말과 문자는 입말에 반작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하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 부분들은 내가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다. 글말과 문자의 입말에 대한 반작용 운운하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리고 왜 불(영)어 원전에도 없는 내용이 일역본에는 들어가 있을까?

고진이 인용한 <일반언어학 강의>에 대해서 나로선 그 출처를 찾을 수 없었다는 얘기를 했는데, 그 문제는 일단 미루어두기로 한다. 대신에 인용문을 쿤데라님이 다시 번역해 주셨는데, 조금 이해가 용이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명료하게 이해되는 건 아니다. 쿤데라님의 번역: "언어와 문자. 이것은 흔히 동일한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때에 따라선 근본적으로 구별될 필요가 있다. 구어만이 언어학의 대상이다. 통시적인 언어학적 분류는 언어가 쓰여지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문자의 중요성을 완전히 부정해선 안 된다. 실제로 문자에는 문명의 단계와, 언어활동에서 있어 사용상 완성도 단계가 각인되어 있으며, 문어와 문자는 구어에 대해 반작용한다. 하지만, 문어과 구어의 혼동은 초기에 수많은 유치한 잘못의 원인이 되었다."

여기서 처음에 언어라고 번역된 건 불어의 '랑그'(=언어)일 것이다. 알다시피 소쉬르는 언어활동으로서의 랑가주를 랑그와 파롤로 구분하고 랑그만을 언어학의 대상으로 설정한다(랑그가 언어란 뜻이니까 언어가 언어학의 대상이라는 말은 아주 상식적이지만). 그런데, 사람들이 보통 언어라고 할 때 그것을 '쓰여진 말'과 동일시하는 바, 소쉬르는 거기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참고로 E2/E3의 경우 인용문의 '문장어' 옆의 원어 병기가 모두 잘못됐다. 'langue ecrite'를 E2는 'langue ercite'로 잘못 표기했고, E3는 'langue ereite'로 잘못 타이핑했다. 다시 읽어본 결과 E3는 E2의 '내이션'을 전부 '국민'으로 통일한 것과 각주가 미주로 돌려진 것 말고는 눈에 띄는 차이가 없다. 따라서 이후엔 E1과 E2만을 비교하도록 하겠다.)

요컨대 랑그(언어)는 다시 문어와 구어로 나뉘는 바, 구어만이 언어학의 대상이라고 소쉬르는 확정짓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데리다는 소쉬르의 음성중심주의를 비판하며, 고진은 음성(중심)주의는 그런 식의 형이상학 비판이라는 문맥에서 벗어나 정치적인 문맥에서 이해할 때 보다 생산적이라고 주장한다.


 

 

 

 

 E1이나 E2 모두 영어로 'historical linguistics'에 해당하는 것을 '역사적 언어학'이라고 번역하는데, 내 생각엔 '역사언어학'이라고 옮겨야 한다('역사적 언어학'이란 말은 보지 못했다). 소쉬르가 공시언어학을 제창하면서 의식했던 것은 당시 언어학계를 풍미했던 '역사-비교 언어학'이고, 이러한 학풍(지금은 언어학의 한 분야가 됐지만)을 우리 언어학계에서는 관행적으로 '역사언어학'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와 같은 것을 일본(학계)에서는 '역사적 언어학(歷史的 言語學)'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말이 나온 김에 E1 번역에서 이런 관점에서 불만스런 부분 몇 곳을 지적하기로 한다.

"따라서 이런 데이터 없이는 왜 민족지학자가 결코 재정(裁定)을 내릴 수 없었을까가 질문되고 있습니다."(E1, 68쪽)에서 '재정'이란 말은 (내 감각으로는) 잘 쓰이지 않는 일본식 한자어이거나 일본어이다. 그것을 E2에서는 "그렇기 때문에 민족지학자는 왜 이러한 자료 없이는 결코, 판단을 내리지 못했는가 하는 것이 의문시되고 있습니다."(120쪽)라고 하여 '재정'을 '판단'으로 옮겼는데, 우리말로는 훨씬 더 자연스럽다(E1에서는 '재정'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결정함'이라고 각주를 달았는데, 그렇게 거창하게/거추장스럽게 처리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목에서 E1은 "언어학자가 **어라고 동정(同定)하면"이라고 옮겼는데(이건 사실 실사는 놔두고 토씨만 옮기는 격이다), 이때의 '동정'은 한국어가 아니라 거의 100% 일본어이다. 그것은 마치 "언어학자가 **어라고 디파인(define)하면"이라고 옮기는 것과 같다(이런 게 독자를 우롱하는 일이란 걸 역자들은 알 필요가 있다). 다행히 E2에서는 "언어학자가 **어라고 규정하면"이라고 옮기고 있다.

하나만 더 예를 들자. E1에서 "나치스의 '제3제국'(아리아 인종에 의한 근대국가의 양기(揚棄) 출현으로 적중했던 것이다"(70쪽)라고 옮긴 부분. 제대로 교정도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인데, 원래대로라면 "나치스의 '제3제국'(아리아 인종에 의한 근대국가의 양기(揚棄))의 출현으로 적중했던 것이다"일 것이다. 여기서도 문제는 '양기'라는 일본어이다. 떨칠 양(揚)에다 버릴 기(棄)자를 쓴 걸로 미루어 짐작할 도리밖에 없는데, E2의 역자는 그것을 지양(止揚)이라고 제대로 옮겼다: "나치의 '제3제국'(아리아 인종에 의한 근대국가의 지양)에서 적중한 것이다."(122쪽) 지양은 물론 헤겔의 개념인데, 그것을 일어로는 '양기'라고 옮기는 모양이다.

여하튼 이런 몇 가지 사례를 놓고 볼 때, E1의 역자의 일어실력이란 게 신뢰할 만한 수준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덧붙여 불만스러운 것은 각주 문제. E1의 경우 각주가 원주인지 역주인지가 밝혀져 있지 않고(모두 역주인가?), E2에는 붙어 있는 원주가 빠져 있다(고진이 뺀 것인가?).

다시 원래의 문맥으로 돌아와서, 고진이 가장 많이 인용하고 있는 글은 소쉬르의 <제네바 대학 취임강연>이다. 이걸 E1의 역자는 '쥬네브 대학'이라고 옮겼다. 사실 국내의 소쉬르 학자들도 불어인 '쥬네브'(혹은 주네브)라고 옮기는 수가 많은데, (무)의식적으로 티내는 치레에 불과해 보인다. 프랑스 파리를 영어식으로 '패리스'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이니까. E1에는 내용이 빠져 있지만(66쪽의 각주로 처리돼 있다), 이 강의는 E2에 의하면 마에다 히데키(前田秀樹)가 번역/주석한 것이다(마에다의 저작은 <침묵하는 소쉬르>이다).

 

 

 

 

일단 감탄스러운 건, 이전에도 언급했지만, 일본의 소쉬르학 수준이고(이 취임강연을 도서관 등지에서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 궁금한 건 고진의 소쉬르론이 얼만큼 독창적인 것인가 하는 점이다. 즉 그가 일본의 소쉬르학에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가 하는 점. 내가 알기에, 그리고 내가 읽은 소쉬르 입문서 등에서 소쉬르 언어학에 관한 정치적 해석은 눈을 씻고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대개는 기호학의 창시자로서의 소쉬르 조명으로 채워져 있다). 여담이지만, 최근엔 동경대 시리즈 <지의 논리>(경당, 1996)에서 소쉬르와 동시대 화가 파울 클레를 비교하는 글을 읽었는데, 역시나 계발적이었다(덕분에 클레의 책들을 사고 있다!). 일본 지식인들이 구조주의, 포스트 구조주의에 강한 면모를 보이는 것은 다 그런 베이스 때문이 아닌가 싶다.

고진은 그 취임강연을 근거로 소쉬르의 음성주의를 마치 <라쇼몽>에서처럼 상식과는 다르게 재구성한다. 그 주요 내용을 발췌하면 이렇다. "역사언어학에서는 문화=문명과 음성언어가 동일시되고 있다. 다시 말해 거기에서는 외적인 것의 우연적인 소산(이것도 '산물'로 옮겨야 하지 않을까?)이 마치 '내적'인 연속성인 것처럼 상정된다. 언어학은 언어 외적인 것, 또는 '외적 언어학'의 결과를 언어의 법칙으로 취급해 왔다... 따라서 소쉬르가 '내적 언어학'에 구애되는(E2는 '천착하는'으로 옮겼다) 것은 '외적'인 것을 무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외적'인 것의 소산을 내면화하고 있는 언어학을 비판하기 위해서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소쉬르가 언어학의 대상을 어디까지든 음성언어에 한정하는 것은, 그가 음성주의자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역사언어학이 지닌 음성중심주의의 기만을 폭로하기 위해서이다."(E1, 66-67쪽/ E2, 110-1쪽)



소쉬르가 보기에 문자화된 음성("역사언어학자가 말하는 음성은 이미 문자이다"), 즉 에크리튀르의 외부성으로서의 음성은 "넓은 의미의 정치적 제관계"를 의미하며, 소쉬르가 비판하고자 했던 것은 그러한 정치성을 내면화시킴으로써 (마치 없는 것처럼) 소거해버리는/소멸시켜버리는 언어학이다. 그렇다면, 소쉬르를 음성(중성)주의자로 몰아붙이는 데리다의 태도는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이다(물론 데리다는 이에 대해 변호한다). 고진이 보기에 (흔히 내적 언어학이라 불리는) 소쉬르의 언어학이야말로 대단히 정치적이며("역사언어학에 대한 소쉬르의 비판에는, 분명히 역사언어학의 이데올로기적 기능에 대한 비판이 있다." 70쪽), 소쉬르야말로 음성(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자인 것이다...

06. 0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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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16 16: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2-16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농담도.^^

paby 2006-02-16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말"과 "입말"은 (한자어를 배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어", "문어"가 좋지 않은 번역이라고 생각해서 선택한 번역어들이 아닐까 싶군요. "구어"와 "문어"는 대부분의 경우 표현상의 차이를 나타내는 말인 것 같습니다. 음성언어냐 문자언어냐를 구별해서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요. 그래서 구어로 쓰여진 소설이 있을 수 있고, 문어로 이야기하는 (좀 이상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요. 역자는 아마도, "글말"과 "입말"은 잘 사용되지 않는 말들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그러한 오해의 소지가 적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군요. (*그리고 "문장어"는 혹시 "문자어"의 오타가 아니었을까요?)

곰집 2006-02-16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일한 텍스트를 읽는 다양한 방법을 로쟈님을 통해 "실제로" 그 흐름을 확인하게 되어서 기쁩니다.

로쟈 2006-02-17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aby님/ '동정'이나 '양기' 같은 일어를 그대로 노출시키는 역자가 '입말'/'글말'에 대해서 그렇게 고심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문장어'는 반복해서 쓰고 있는 걸로 보아 오타 같지는 않지만, 현재 텍스트를 갖고 있지 않아 확인이 어렵습니다...

earthmt 2020-02-16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isuke Komatsu(예스케 고마츠?), 는 小松英輔(현행 일본어 표기법에 따르면, 고마쓰 에이스케)인 듯합니다.
http://webcatplus.nii.ac.jp/webcatplus/details/creator/2532467.html
 

 

 

 

 

데리다에 관한 페이퍼를 두 편 쓰는 것이 오늘의 일정 중 하나이다. 그게 단지 '하나'일 뿐이니 다른 일정들을 어찌 소화해야 할는지 의문이지만, 하여간에 할일은 많고 갈길은 멀다(곧 도서관에도 다녀와야 하고). 데리다의 <법의 힘>(문학과지성사, 2004)에 수록된 두번째 텍스트 '벤야민의 이름'을 어제부터 읽기 시작했다. 첫번째 텍스트는 재작년에 읽고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이란 글로 정리한 바 있다. 데리다의 벤야민 읽기에 대한 정리는 차후로 넘겼었는데, 대충 그 '차후'의 시간이 된 것. '법과 폭력'을 키워드로 한 논문을 준비하면서 계획했던 책들을 더는 미룰 수도 없고 해서 읽어나가고자 한다.

'폭력'에 관한 책들은 세상의 폭력만큼이나 많이 나와 있지만, 벤야민의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와 함께 내가 일차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었던  책들은 아렌트의 <폭력의 세기>나 메를로퐁티의 <휴머니즘과 폭력> 등이다. 만약에 더 여유가 생긴다면, 르네 지라르의 <폭력과 성스러움>이나 피에르 클라스트르의 <폭력의 고고학> 같은 인류학 책들로 눈길을 돌릴 수도 있겠다(진중권의 <폭력과 상스러움>은 예전에 읽었다). 그리고 아직 번역되지 않은 조르지오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나 <예외 상태> 같은 책들이 필독 목록이다.  

국역본 <법의 힘>을 읽으면서 내가 참조한 책은 불어본과 영역본이다. 영역은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Deconstruction and the Possibility of Justice)>(Routledge, 1992)에 실린 것인데, 이 텍스트는 영어판 데리다 선집인 'Acts of Religion'(Routledge, 2001)에도 재수록돼 있다. 사정이 허락한다면, 데리다의 텍스트를 끝까지 읽고 정리하겠지만, '현지 사정'이 또한 그렇지가 않아서 일단은 텍스트의 문턱까지만 정리해두도록 한다('읽기 위하여'란 제목은 그래서 붙여졌다).

영역본의 경우 국역본 72쪽의 "만약 내가 여러분의 인내심을 바닥내지 않았다면"으로 시작되는 문단부터가 본문이고, 이 강의의 '서언'에 해당하는 부분(63-72쪽)은 미주로 돌려져 있다. 그걸 읽겠다는 얘기이다. 이 '서언'에서 데리다가 하고자 하는 얘기는 '나치즘과 궁극적 해결책'이란 제목의 컨퍼런스에서 자신이 왜 벤야민의 텍스트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에 대한 독해를 시도하는가에 대한 해명이다. 그 해명을 그는 몇 가지로 나누어 제시한다. 

(1)먼저, "나는 의도적으로 이 텍스트가 말살적 폭력이라는 주제에 (신)들려 있다고 말"한다. 즉, 그것은 '유령의 논리'에 들려 있고, "죽은 것도 아니고 살아 있는 것도 아니며, 죽은 것 이상이고 살아있는 것 이상"인 이 유령의 논리 혹은 법칙은 (나치의 유태인 '청소'라는) '궁극적 해결책'에 대응하는 논리로서 적합하다. 게다가 벤야민 자신이 '유대인'이며, 그의 텍스트는 '유대적 관점' 속에 기입되어 있다.

(2)그리고 또 관심사가 되는 것은 벤야민의 특유의 언어관이다. 벤야민은 표상(=재현)으로서의 언어를 명명(=이름부름)으로서의 언어와 대립시키는데, 전자가 기술적, 효용적, 기호론적, 정보적인 차원에서 언어를 사고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명명과 호명, 이름 속에서 현전의 선사 내지는 호출"을 언어의 소명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이름에 대한 사상이 신들림 및 유령의 논리와 접합되는지 묻게 된다."(65쪽)

  

(3)벤야민의 폭력비판론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1921)는 한편으로 형식적인 의회/대의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이며 때문에 1920년대초의 반의회주의적, 반계몽주의적 흐름과 맞닿아 있다. <독재론>의 저자 칼 슈미트가 벤야민의 논문을 칭찬한 것은 우연이 아닌 셈이다(칼 슈미트에 관한 문장은 영역본에 빠져 있다).   

(4)벤야민의 이 기묘한 논문에서 대의(=표상)이라는 다면적/다의적인 문제는 그가 제시하는 정초적/보존적 폭력의 문제와도 결부된다. "소위 정초적 폭력은 때로는 보존적 폭력에 의해 '표상/대리'되고 필연적으로 반복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아이디어를 확장하여 데리다는 "'궁극적 해결책'이라는 주제에 대해 벤야민이라면 무엇을 생각했을까?"를 질문한다. "벤야민이라면 어떻게 말했을까?" 데리다가 제시하는 잠정적인 의견에 따르면, "여러 징표들로 미루어볼 때, 벤야민은 '궁극적 해결책'이었던 게 될 이 표상불가능한 것 이후에는 담론 및 문학, 시가 불가능하지 않게 될 것으로" 본다. 오히려 "표상의 언어에 대립하는 이름들의 언어 및 명명의 언어나 시학의 복귀, (...) 그것들의 도래를 말하게 될 것"으로 본다.  

정리하면, 데리다는 1942년의 '궁극적 해결책'이라는 역사적 지평에서 벤야민의 1921년 텍스트를 읽고자 하는 것이다. '오래된 미래'의 텍스트로 읽겠다는 것. 그게 그의 취지이다. 그리고 이 취지가 놓여 있는 두 가지 맥락.  

(1)먼저, 데리다 자신이 '철학적 민족성 및 민족주의'라는 3년짜리 세미나를 기획하면서 '칸트, 유대인, 독일'이라는 주제의 세미나를 이미 1년간 진행했다는 것. 칸트에게서 '독일적인 것이란 무엇인가'란 물음을 던지면서 자연스레 유대계 독일 사상가/작가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얘기이다. 그러면서 데리다가 주목하게 된 것은 몇몇 유대인 독일 사상가와 비유대인 독일 사상가들 사이의 유사점들(analogies)이다. "독일 식의 어떤 애국주의(대개는 민족주의이지만, 때로는 1차 세계대전 기간과 그 이후의 군국주의이기도 하다)"(굵은 글씨는 국역본에 누락된 부분)가 코헨이나 로렌츠바이크, 그리고 부분적으로 후설 등에 나타난다는 게 결코 전부가 아니다(아마도 이 점에 대해서는 지적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보다 주목되어야 하는 것은 벤야민과 칼 슈미트, 그리고 심지어는 하이데거의 텍스트들 간에 보이는 어떤 '친화성'이다. "이는 단지 의회 민주주의나 심지어 민주주의 일반에 대한 적개심이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계몽주의에 대한, 폴레모스와 전쟁, 폭력 및 언어의 특정한 해석에 대한 적개심이라는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또한 당시에 널리 확산되어 있던 '해체'라는 주제 때문이기도 하다."(70쪽) 이 대목은 약간의 교정이 필요해 보이는데(굵은 글씨 '적개심'이 빠져야 한다), 영역본을 인용하면 이렇다:

"Not only because of the hostility to parliamentary democracy, even to democracy as such, or to the Aufklarung, not only because of a certain interpretation of the polemos, of war, violence and language, but also becasue of a thematic of 'destruction' that was very widespread at the time."(66쪽)

구문상으로는 'Not only A, not only B, but also C' 형태이며, 'A나 B뿐만 아니라 C도'란 뜻이겠다. 여기서 '적개심(hostility)'은 A에 나열된 항들에만 걸리며 '해석에 대한 적개심'으로 확장되지 않는다(내가 본 불어본의 문장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벤야민, 슈미트, 하이데거가 공유하는 것은 (1)의회 민주주의, 심지어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적개심과 (2) 투쟁(polemos)과 전쟁, 폭력, 그리고 언어에 대한 특정한 해석 (3)해체/파괴라는 주제, 세 가지인 것. 물론 하이데거식의 '해체/파괴(Destruktion)'와 벤야민의 '해체/파괴(destruction)'론은 구별되어야 하지만, 양차 대전 사이에 '해체/파괴'라는 주제가 거의 강박적인 수준이었다는 데 데리다는 주목한다.

(2)또 다른 맥락은 뉴욕 예시바 대학의 카르도조 법학대학원에서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이란 주제로 개최된 콜로키움(사진은 이 콜로키움에서 강연하는 데리다의 모습). (서문에서 밝혀진 바이지만) 여기서 데리다는 '법의 힘: 권위의 신비한 토대'(<법의 힘>의 제1부)라는 강연문을 읽어나갔으며, '벤야민의 이름'은 비록 낭독되지 않았지만 참석자들에게 배포되었다. 데리다가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그리고 궁극적으론 '벤야민의 이름'이란 데리다 텍스트의 제목을 낳은 것은 벤야민 텍스트의 마지막 문장이다. "이 텍스트의 마지막 단어들, 마지막 구절은 한밤중의, 또는 우리가 더 이상 또는 아직 알아듣지 못하는 기도의 밤의 쇼퍼(=나팔)처럼 울려퍼진다." 나중에 다시 반복되겠지만, 벤야민의 그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Die gottliche Gewalt, welche Insignium und Siegel, Niemals Mittel heiliger Vollstreckung ist, mag die waltende heissen. Walter Benjamin.(징표이고 봉인이지만 결코 신의 집행 수단은 아닌 신성한 폭력은 아마도 주권적인 것이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발터 벤야민)"(125쪽, 서명은 내가 집어넣은 것이다) 

이 대목에 대한 데리다의 설명을 따라가면, "텍스트의 마지막에서 마지막 문장, 종말론적인 마지막 문장은 서명과 봉인을 명명하고, 이름(Walter)과 '주권적인 것(die waltende)'이라 불리는 것을 명명한다. 발텐발터 사이의 이러한 '유희'는 어떠한 논증도, 어떠한 확실성도 산출할 수 없다. 더욱이 그것의 '논증적' 힘의 역설은 이 힘이 인지적인 것과 수행적인 것의 분리에서 생겨난다는 데 있다."(71쪽)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고틀리히 게발트(신의 폭력)... 발텐데(주권)... 발터(벤야민)'라고 하여, 시적인 음성논리에 따르자면 '신의 폭력=주권=벤야민'이라는 유사 계열체가 형성된다. 이러한 '유희'는 합리적/논리적인 근거를 갖는 것이 아니기에 "어떠한 논증도, 어떠한 확실성도 산출할 수 없다." 한데, 역설적으로 '논증적(demonstrative)' 힘을 갖는다(이것은 '논증 아닌 논증'이기에 '역설적'이다) . 이때 '논증적'이라는 것은 '말이 되게 하는 힘', 곧 (신비한) '설득력'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그리고 '인지적인 것'과 '수행적인 것'이 분리라는 것은 쉽게 말하면, 기의 논리와 기표 논리의 분리이다. 가령 아래서 (A)의 번역문은 기의의 논리를 따른 것이고, (B)를 음역해서 읽을 경우 기표의 논리를 따른 것이 된다(그러니까 '벤야민의 이름'이 갖는 효과는 낭독할 경우에만 발휘될 수 있다).  

(A) 징표이고 봉인이지만 결코 신의 집행 수단은 아닌 신성한 폭력은 아마도 주권적인 것이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발터 벤야민.

(B) Die gottliche Gewalt, welche Insignium und Siegel, Niemals Mittel heiliger Vollstreckung ist, mag die waltende heissen. Walter Benjamin.

벤야민 텍스트에서 이 두 논리는 서로 따로 논다. 그래서 유희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유희'는 전혀 유희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벤야민이 특히 '괴테의 <친화력>'이라는 논문에서 우연하지만 의미심장한 일치들(고유명사들이야말로 이것들의 고유한 장소이다)에 대해 아주 관심이 많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이러한 유희는 한편으로 의도된 것이면서 신비주의의 아우라를 거느리고 있는 것이다. 이어지는 데리다의 본격적인 독해가 드러내고자 하는 것에는 벤야민 텍스트의 이러한 면모가 포함된다. 그리하여 우리가 마침내 도착한 곳은 데리다 텍스트의 입구이자 문턱이다(그리고 이 글의 출구이다).

"만약 내가 여러분의 인내심을 바닥내지 않았다면, 이제 다른 스타일로, 다른 리듬에 따라 벤야민의 짧지만 당혹스러운 한 텍스트에 대해 약속했던 독해를 시작해보자."(72쪽)   

06. 01. 31.

P.S. 데리다에 대한 또 다른 페이퍼는 시간관계상 다음으로 미룬다. <목소리와 현상> 번역본에 대한, 역자의 취향에 대한 낭패감과 유감을 담은 글이 될 텐데, 몇 마디 앞당겨 쓴 글은 조금 전에 날아가버렸다. 때로 신의 은총과 폭력은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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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01 17: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TheSe 2009-02-21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퍼갑니다. http://cafe.naver.com/hanthese/38
 

 

빌헬름 라이히의 <파시즘과 대중심리>에 관하여 내가 갖고 있는 책들은 독어본을 제외한 4종의 번역본이다. 이번에 나온 황선길 역의 <파시즘과 대중심리>(그린비, 2006)와 함께 오세철/문형구 역의 <파시즘과 대중심리>(현상과인식, 1980/1987), 그리고 영역본 'The Mass Psychology of Fascism'(1970 )과 러시아어본 'Психология масс и фашизм'(2004)이다(러시아어본은 여러 권이 나와 있으며 내가 갖고 있는 것은 악트출판사의 2004년판이다).

 

재작년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어본을 구입할 당시에 내가 염두에 두고 있었던 책은 현상과인식사판의 국역본이었지만, 작년에 새로운 번역본이 출간될 거라는 소식을 접하고 은근히 고대한 바 있다. 이번에 나온 책은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라이히 정본으로서 흠잡을 데 없어 보인다. 이젠 독자들이 좀 읽어주기만 하면 되는 것. 

 

한데, 새 번역본을 읽어나가다가 좀 의아스런 대목들과 마주치게 됐다. 본문 첫장인 '제1장 물질적 힘으로서의 이데올로기'의 첫 페이지부터이다: "독일에서 민족사회주의가 권력을 장악한 지 몇 개월이 지났을 때, 여러 해 동안 자신들의 혁명적 굳건함과 자유를 위한 출격준비를 행동으로 증명한 사람들조차도 사회적 사건에 대한 맑스주의적 기본개념의 정당성에 대하여 자주 의혹을 표명했다."(33쪽)

 

굵은 글씨로 표시한 건 처음 읽으면서 낯설게 느낀 대목들인데, 일단 예전에 '국가사회주의'라고 주로 번역해온 단어 'Nationalsozialistische'(영어로는 'National Socialism')이 최근에는 '민족사회주의'로 번역된다는 걸 처음 알게 됐다. 학계에 따르면, 나치즘의 이론이 국가보다 민족을 더 우위에 두고 있는바, '국가'는 '민족'을 위해 존재하는 식이라는 사고 방식을 고려한 수정된 번역이라 한다(물론 독어나 영어 등에서는 '국가'와 '민족'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nation'이라 통칭하므로 이런 번역문제가 제기되는 건 한국, 일본 등 아시아권에 국한될 듯하지만). 어쨌거나 새 번역어가 단번에 입에 익지는 않을 테지만 새로운 '관행'에 따라야 할 터이다.

 

이어서 '자유를 위한 출격준비'. 그린비판의 번역은 <파시즘과 대중심리> 독어본이 아니라 라이히재단에서 제시한 라이히 '수고본'을 옮긴 것이기에 다른 번역본들과 차이가 나는 대목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서 '자유를 위한 출격준비'까지 그러한 차이와 관련되는 것인지는 좀 의심스럽다. 현상과인식사판의 이 대목 번역은 이렇다: "독일에서 국가사회주의가 권력을 장악한 지 몇 개월이 지났을 때, 혁명적 굳건함을 가지고 혁명에 투신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인정된 사람들까지도 사회과정에 대한 마르크스의 기본개념의 정확성에 대해서 의문을 표시하였다."(37쪽)

 

그리고 영역본: "In the months following National Socialism's seizure of power in Germany, even those individuals whose revolutionary firmness and readiness to be of service had been proven again and agian, expressed doubts about the correctness of Marx's basic conception of social process."(3쪽)

 

오세철본은 영역본을 옮긴 것이고 러시아어본의 번역도 영역본과 일치한다. 나로선 황선길본 번역이 부정확한 게 아닌가 싶다('자유'라는 단어가 어떻게 끼어든 것인지 모르겠다. 거기에 '출격'?). "자신들의 혁명적 굳건함과 자유를 위한 출격준비를 행동으로 증명한 사람들"이란 짐작에 "(사회주의)혁명에 대한 투철한 신념과 행동의지(준비)를 갖춘 사람들" 정도의 뜻이기 때문이다. 아무려나 우리말로 어색하며 가독성이 떨어지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사회적 사건에 대한 맑스주의적 기본개념". 이에 대한 영역이 "Marx's basic conception of social process"인 것에서 알 수 있지만, '사회적 사건'보다는 '사회과정'이라는 역어가 더 적절해보인다(러시아어본도 '사회과정'이라고 옮기고 있다). 해서, '정당성'과 '정확성'은 문맥상 호환의 여지가 있다고 쳐도 이 대목의 새 번역의 '정확성'에 나로선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다른 곳도 아니고 첫 페이지이기 때문에 더더욱.

 

조금만 더 읽어보자. 황선길본 35쪽에서 라이히가 맑스주의자들을 비판하고 있는 오토 슈트라서(1897-1974)를 인용하고 있는 대목이다. 참고로, 그레고르와 오토 슈트라서 형제는 나치당 형성기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이들로서 바이에른의 중산층 출신이고 1920년 신생 나치당에 입당, 1923년 히틀러의 '비어 홀 폭동'에 참가했다. 히틀러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그레고르는 불법화된 나치당을 이끌었고, 설득력 있는 대중 연설가이며 타고난 조직가였던 그는 동생 오토와 함께 요제프 괴벨스의 도움을 받아 대중운동을 조직했다. 그들은 민족주의적·인종주의적인 색채가 가미된 사회주의를 역설함으로써 중하층 계급과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갔다. 해서, 1928년 이후 나치당이 얻은 대중적 지지는 부분적으로 이들 형제의 노력에 기인한 것이었다고 한다(하지만, 이후에 이들은 히틀러의 노선에 환멸을 느껴서 탈당하게 되며, 그레고르는 1934년 에른스트 룀의 숙청기간에 살해되었고, 오토는 간신히 탈출하여 캐나다에 정착했다가 1955년 독일로 돌아와 정계복귀를 기도했지만 실패했다 한다). 

 

그는 무어라고 연설했는가: "당신들 맑스주의자들은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서 맑스의 이론을 즐겨 인용한다. 맑스는 이론을 실천에 의해서만 검증된다고 가르쳤다. 하지만 당신들은 항상 노동자 인터내셔널의 실패에 머무르고 있다.(...) 1880년 이후 실천을 통한 사회혁명의 가르침에 대한 검증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이에 대한 오세철본의 번역: “마르크스주의자 당신들은 당신들의 방어를 위해 마르크스의 이론을 인용하기를 좋아한다. 이론은 실천에 의해서만 입증된다고 마르크스는 가르쳤으나 당신들의 마르크스주의는 실패로 판명되었다. 당신들은 항상 노동자 인터내셔날의 실패에 대한 설명에 머무르고 있다.(...) 80년이 지났는데도 사회혁명 이론구체적인 확신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39쪽)

 

그리고 영역본: "You Marxists like to quote Marx's theories in your defense. Marx taught that theory is verified by practice only, but your Marxism has proved to be a failure. You always come around with explanation for the defeat of the Workers' International.(...) Eighty years have passed, and where is the concrete confirmation of the theory of social revolution?"(5쪽)

 

 

 

 

 

 

  

 

 

 

굵은 글씨는 일단 차이가 나는 대목들인데, 비교해 보면 알겠지만 일단 황선길본에서는 '당신들의 맑스주의는 실패로 판명되었다'란 대목이 누락됐다. 그리고, "80년이 지났는데도"가 "1880년 이후"로 옮겨졌다. 나는 이 대목을 읽고 처음에는 오세철본이 오역인가 보다라고 생각했지만, 영역본과 러시아어본에서 모두 '1880년'이 아니라 '80년'이라고 돼 있었다. 연설시점이 언제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기점을 <공산당선언>(1848)으로 삼은 게 아닐까 싶다. 이후 80년이면, 대략 1928년 이후가 되며 슈트라서 형제가 활동하던 시기이다. 그렇다면, '1880년 이후'란 번역은 픽션에 속한다. 나머지 '사회혁명의 가르침' 대 '사회혁명의 이론'이나 '검증' 대 '구체적 확신' 등의 차이가 선택적인 걸로 용인된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고작 몇 페이지를 읽은 소감이긴 하지만(역자는 열번 이상 읽지 않았을까?), 모처럼 출간된 <파시즘과 대중심리>의 새 번역본이 기대에 값한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필요한 대목들이 2판에서라도 수정/교정되어 라이히 정본으로서 널리 읽히고 인용되기를 기대해본다.   

 

06. 01. 18.

 

 

 

 

 

 

 

 

 

P.S. 몇 페이지밖에 안 읽었어도 건질 건 건져야겠다. 당대 맑스주의의 문제점(결점이면서 태만)을 꼬집으면서 라이히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이런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맑스주의적 정치는 그 정치적 실천에 있어서 대중들의 성격구조와 신비주의의 사회적 영향을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36쪽) 그렇다면, 거꾸로 라이히가 이 책에서 고려하고자 하는 것도 분명해진다. 그것은 '대중의 성격구조'와 '신비주의의 사회적 영향'이다. 여기서 '신비주의'란 '파시즘 이데올로기'를 가리키는바, 그 '영향'이란 건 이데올로기의 '물질적 힘'이다. 이제나 저제나 좌파 관념론자들이 간과하거나 사고하지 못하고 있는 어떤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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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le 2006-01-18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서재에 가져가서 볼게요.

Joule 2006-01-18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참, 홀링데일의 니체요. 루 잘로메 말고 나머지 번역상태는 괜찮은가요.

로쟈 2006-01-18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홀링데일의 책은 도서관에서 대출했다가 바로 반납했기 때문에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어려운' 책은 아니므로 별 문제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lefebvre 2006-01-18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글을 로쟈님 글 앞쪽으로 옮겨놓았습니다. 이유는......양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

로쟈 2006-01-18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문점들을 해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라이히의 독일어 수고를 직접 옮긴 것이라는 점"에서 이번 번역의 의의를 찾아볼 수 있겠습니다(독일에도 없는 책이죠!) 한데, 이미 나와 있는 독어본, 영어본들이 수고본과 결정적인 차이를 갖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 차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관심사항이 될 만한 것 정도인지 궁금합니다. '의미있는 차이'일 경우, 아마 역자도 기존의 독어본을 같이 참조했을 터이므로 국역본에서 언급해주었더라면 보다 완벽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1)'민족사회주의'는 제가 의문을 제기한 게 아니고 (2)'자유를 위한 출격준비'는 라이히의 '시적인' 표현으로 이해하면 되겠군요.^^ (3)그렇다면, '사회적 사건'에 대해서만 옮긴이와 '해석'을 달리하는 듯합니다. '독일 파시즘(즉, 나치즘)의 등장과 성공'에만 국한된다고 보진 않지만, 그 경우에도 '특정한 사건'이라기보다는 일련의 '흐름'이나 '진행'이 아닐까 싶습니다. (4)'정확성'과 '정당성'도 선택(해석)의 문제로 보이며, 저는 어느 한쪽이 오역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본문에서도 오역이라고 하진 않았습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사소한 '옥에 티'도 커보이는 걸로 생각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瑚璉 2006-01-18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직접 옮기신 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느니 참 좋군요.

그런데 로쟈 님께 하나만 질문드리자면, 저로서는 정확성과 정당성을 상호교환이 가능한 개념이 아닌 것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만 저 개념들이 선택이 가능한 것일까요? (그냥 딜레탕트의 질문으로 간주해 주십시오)

로쟈 2006-01-18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말에 '맞다' 같은 경우 '옳다'의 함의도 갖기 때문에 '정확성'과 '정당성'을 모두 가리킬 수 있습니다. 영어의 'correct'에도 두 가지 뜻이 다 있구요. 우리말이 '너무 예민해서' 생기는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메일 확인을 위해 PC방에 왔다가 시간이 약간 남아서 진행중인 페이퍼를 조금 더 적어둔다. 들뢰즈의 '문학과 삶'에 대한 정리 말이다. 바흐친에 대해서, 에밀 시오랑에 대해서, 그리고 벤야민에 대해서 써야 할 페이퍼들이 모두 해를 넘기게 되었다. 이럴 땐 '음력' 설을 핑계 되는 수밖에 없겠다. 2006년이지만, 아직 새해 인사를 건네지는 않는 시간에 나머지 일들은 모두 해치울 작정이다(해서 세밑이지만, 새해 인사는 당분간 생략하도록 하겠다). 물론 '작정'으로 모든 일이 해결되었다면 (내가 아니라) 내 아내의 팔자가 많이 달라졌을 테지만!

<비평과 진단>의 17쪽 맨마지막 문장, 그리고 <세계의 문학>(2000년 겨울호) 248쪽 중간 대목부터이다. "언어는 여성, 동물, 분자라는 우회로에 반드시 도달해야 하며 모든 우회로는 죽음의 생성이다. 사물에도 언어에도 직선이란 없다. 통사법은 사물 속에 삶을 현시하기 위해 매번 창조된 필요한 우회로들의 총체이다." 이 대목에 있어서 두 국역본의 차이는 거의 없다. 영역은 이렇다: "Language must devote itself to reaching these feminine, animal, molecular detours, and every detour is a becoming-mortal. There are no straight lines, neither in things nor in language. Syntax is the set of necessary detours that are created in each case to reveal the life in things."(2쪽)

 

 

 

 

'죽음의 생성(a becoming-mortal)'은 불어로 'un devenir mortel'이며, '죽어가는 것-되기'란 뜻이겠다. 그러니까 이 '죽는 것-되기' 혹은 '죽어가는 것-되기'가 '여성-되기, 동물-되기, 분자-되기를 모두 포괄한다는 것. 그리고 흔히 도주선/탈주선이라고 옮겨지는 그러한 생성(되기)으로의 여정은 언어학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새로운 통사론을 만들어내는 것에 다름아니다. 우리말로는 흔히 '활로'가 불려지는 것인데, 들뢰즈의 관심은 말하자면 '통사론적 활로'에 집중되며 이후에 그 사례들이 언급될 것이다. 황지우의 시 '활로를 찾아서'가 문득 떠오르는군. 

 

 

 

 

나갔다, 들어온다, 잠잔다, 일어난다.
변보고, 이빨닦고, 세수한다, 오늘도 또, 나가 본다.
오늘도 나는 제 5공화국에서 가장 낯선 사람으로,
걷는다. 나는 거리의 모든 것을.
읽는다. 안전 제일.
우리 자본. 우리 기술. 우리 지하철. 한신공영 제4공구간.
국제그룹사옥 신축 공사장. 부산뉴욕 제과점.
지하 주간 다방 야간 맥주홀. 1층 삼성전자대리점.
2층 영어 일어 회화 학원. 3층 이진우 피부비뇨기과의원.
4층 대한 예수교장로회 선민중앙교회.
5층 에어로빅 댄스 및 헬스 클럽. 옥상 조미료 광고탑.
그리고 전봇대에 붙은 임신. 치질. 성병 특효약까지.
틈이 안 보이는데. 들어가면.
또 틈이 잇는 벽보판까지.
그리고, 낯선 사람 살펴보고 수상하면 신고하자.
까지. 아 하루 종일 육교에.
빗과 손톱깎이와 혁대와 귓밥파기와 손수건과 동전 지갑을 놓고 앉아 있는.
노파의 일당 2천원내지 3천원의 現世를.
나는 건너왔다.
또합 2만원도 안 될 좌판을 들고.
단속반에 쫓기는. 아아 현세요. 아아아 육교여.
아아아아 현세의 척추가 휘청휘청하다.
아아아아앙 현세의 다리가 후둘후둘하다.
거리는 미래가 안 보이고.
미래가 빤히 보인다.
좃도 뭘 모르면서. 재잘거리고.
조잘거리고 소곤거리고 쌕쌕거리고 헉헉거리는.
거리는 여색이 가득하다. 썩기 전에.
잔뜩 달아오른 화농처럼. 부강한 근육이.
타워 크레인이. 철근 하나를 공중 100M 높이로 끌어올리고 있다.
아아아아아아 나는 모모성을 본다.
근면과 광기. 성실과 맹목. 나는 보고 또 보고.
굴착기는 맹렬하게 아스팔트를 뚫고. 자갈을 뚫고. 암반을 뚫고.
정신없이 퇴적층을 퍼올리는 포크레인이 그러나.
의외로 곱고 새하얀 그 순결한 흙을 퍼올리는
포크레인이 지하 20M에 있다는 것은.
열정도 신념도 아닌. 연민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으로서 나는.
하지만 세상을 연민으로 바라보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으로서 나는. 그러나
아아아아아아아 가엾어라. TNT 사제 폭탄을 들고
은행엘 쳐들어간 청년은 자폭했고(중앙일보 9월2일자).
술집 호스티스는 정부에게 알몸으로 목졸려 죽었고(한국일보 6월 15일자).
방범대원은 한밤에 강도로 돌변하고(경향신문 12월 7일자).
아들은 술 취한 아버지를 망치로 내리쳐 죽이고(서울신문 4월 11일자).
노름판을 덮친 형사가 판돈 몽땅 꼬불치고(MBC라디오12시 뉴스 7월 26일자).
교사가 여학생을 추행하고(조선일보 11월 30일자).
신흥사 주지들 칼질 뭉둥이질(KBS제2라디오 8월 3일자).
디스코홀서 청소년들 집단적으로 불타 죽고(연합통신 4월 14일자).
前 중앙정보부차장이 억대 사기를 치고(동아일보 3월 6일자).
아 세월은 잘 간다.
눈 먼 세월. 잘 간다.
나는 손 한번 못 댄 세월. 잘 간다.
아직 오지 않은 사고와 사건과 사태와 우발과 자발과 불발의 세월. 속으로.
잘 간다.

"나는 양식을 파괴한다. 아니 파괴를 양식화한다"라고 선언했었던 황지우의 '파괴시학'은 그 나름으로 통사론적 활로의 모색이었으며, 그 활로는 이 시에서 "나갔다, 들어온다, 잠잔다, 일어난다"란 표현을 얻고 있다. "아 세월은 잘 간다./ 눈 먼 세월. 잘 간다./ 나는 손 한번 못 댄 세월. 잘 간다." 또한 비아냥의 통사적 (재)구축이다. 시는 그렇게 읽히며 그렇게 다시 읽힐 수 있다. 그리하여 다시 질문하게 되는 것. 문학이란 무엇인가, 글쓰기란 무엇인가?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추억, 자신의 여행, 자신의 사랑과 슬픔, 자신의 꿈과 환상 등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현실성이나 상상력 과잉이라는 결함을 갖는 것과도 같은 이치이다." <비평과 진단>에서 이 대목은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추억, 여행, 애상(哀傷), 꿈, 환상 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현실성이나 상상력 과잉으로 죄를 범하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라고 돼 있는데, 모두 오역이다(이 오역이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면, 뒤에 나온 번역이 앞엣것을 베낀 게 된다). 'Ecrire n'est pas'(To write is not to-)로 시작하는 부정문이 어찌하여 (억지스럽게도) 긍정문으로 옮겨졌는지 모를 일이다. 글쓰기에 대한 역자들의 선입견이 반영된 것인지?

 

 

 

 

다시 정정해서 말하자면, "글은 쓴다는 것은 나 자신의 추억이나 여행담, 나 자신의 사랑과 슬픔, 나 자신의 꿈과 환상 따위들을 늘어놓는 게 아니다." 이어지는 번역문 "그것은 현실성이나 상상력 과잉이라는 결함을 갖는 것과도 같은 이치이다."나  "현실성이나 상상력 과잉으로 죄를 범하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도 부정확한데, 일단  '그것은'이란 대명사는 가주어이기에 생략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문장은 앞의 문장과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뒷문장과 연계되는 것이다. 나대로 옮기면, "상상력의 과잉이나 현실성의 과잉이나 마찬가지로 죄를 범하는 것이다. 이 두 경우 모두에서 현실 속에 투사되거나 상상계에 투입/내사(內射)되는 것은 아빠-엄마라는 영원한 오이디푸스 구조이다."

사실, <앙띠-오이디푸스>란 대표적 저작의 제목이 상기시켜주는 바대로, 들뢰즈/가타리가 격렬하게 저항하는 것은 그 오이디푸스 구조이며(모든 내러티브의 오이디푸스적 종결/해석), 그 대표적인 이론가로 거명하고 있는 사람이 마르트 로베르이다: "문학에 대한 유아적인 인식 속에서, 꿈의 한가운데에서와 마찬가지로 여행의 끝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바로 아버지이다. 그의 아버지-엄마를 위해 글을 쓰는 것이다. 마르트 로베르는 사생아나 업둥이말고는 소설가에게 별다른 선택을 남기지 않으면서 문학의 이러한 유아화, 정신분석화를 끝까지 밀고 나갔다."(사진은 <정신분석혁명>의 저자이기도 한 마르트 로베르 여사. <카프카에게서 정체성의 문제>란 책을 내던 시절이라고.)

"문학에 대한 유아적인 인식 속에서, 꿈의 한가운데에서와 마찬가지로 여행의 끝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바로 아버지이다."란 문장은 <비평과 진단>에서 "꿈의 한가운데에서와 마찬가지로 여행의 끝에서 문학이라는 유치한 개념으로 찾게 될 것은 바로 아버지이다."로 옮겨져 있다. '문학에 대한 유아적인 인식'과 '문학이라는 유치한 개념' 간의 차이는 모든 것이 '아빠-엄마'로 종결되는, 문학에 대한 '유아기적 개념'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이러한 유아화, 혹은 '정신분석화'를 극단에까지 몰고 간 이론가가 마르트 로베르이며, 그녀의 대표적인 저서가 <기원의 소설, 소설의 기원>(문학과지성사, 1999)이다(로베르의 소설론에 대해서는 김현의 <마당 깊은 집>론에서 처음 언급된 걸 본 기억이 있다).  

책에 대한 소개를 참조해 보면, 이 이론서는 "프로이트의 <신경증 환자의 가족소설>을 이론적인 출발점으로 삼아 '소설이란 무엇인지'를 규명하고자 한 것으로, 독창적이며 설득력 있는 방법으로 높이 평가받는 문학이론의 고전이다. 마르트 로베르는 소설을 쓰는 방법을 두 가지로 나눈다. 그는 모든 작가들을 업둥이와 사생아, 다시 말하면 낭만주의적인 작가들과 사실주의적인 작가들이라는 두 범주로 나눈다. 낭만주의적인 작가는 오이디푸스 이전의 잃어버린 낙원으로 돌아가길 원하며 부모 양쪽을 모두 부정하는 업둥이다. 반면에 사실주의적인 작가는 오이디푸스의 투쟁과 현실을 수락하며 아버지를 부정하고 어머니를 인정하여 아버지와 맞서 싸우는 사생아이다."(강조는 나의 것) 즉, 아주 강력한 환원주의인데, 모든 작가는 '업동이거나 사생아'로 분류된다는 것.  

 

 

 

 

흥미로운 건 본래 독문학자인 마르트 로베르 또한 손꼽히는 카프카 전문가라는 사실. 국내엔 그녀의 <프란츠 카프카의 고독>(동문선, 2003)만이 소개돼 있는데, 들뢰즈/가타리의 <카프카>(동문선, 2001)와는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는 셈이겠다(이 '빅 매치'에 대한 관전평을 가까이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게 유감이다). 참고로, 이 '빅 매치'를 관전할 요량이 있는 독자라면 카프카의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국내에는 2종의 번역본이 나와 있다)를 먼저 일독하는 게 순서일 것이다('아버지 전상서'로 씌어졌지만, 카프카 생전에는 발송되지 않았던 소위 '오프 더 레코드' 편지이며, 카프카 문학의 많은 수수께끼를 풀어준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쨌든 '안티-오이디푸스'로서의 들뢰즈는 그런 식의 오이디푸스적 환원에 비판적이다. 심지어는 '나의 고양이, 나의 개'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조차 경계한다: "동물로의 생성(동물-되기)조차도 오이디푸스적 환원을, '나의 고양이, 나의 개' 같은 오이디푸스적 환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 사례로 들뢰즈는 로렌스를 인용한다. "내가 기린이고, 나에 대해 글을 쓰는 보통의 영국인들이 잘 키운 얌전한 개들이라면, 모든 진실이 여기 있으니 동물들은 서로 다르다... 당신은 나라는 동물을 본능적으로 싫어한다." 

이 대목에 대한 <비평과 진단>의 번역은 내가 기린이라면, 잘 키운 얌전한 개들을 갖고 있는 나에 관해서 글을 쓰는 보통의 영국인들이 모두 거기 있다면, 동물들이 서로 다르다면 당신은 나라는 동물을 본능적으로 싫어한다.”인데, 예전에 모스크바통신에서도 한번 지적한 바 있지만, 말도 안되는 오역이다. 당시에 러시아어본에서 내가 다시 옮긴 바는 이랬다: 내가 만일 기린이라면, 그리고 나에 대해 글을 쓰는 보통의 영국인들이 애교있고 잘 길들여진 강아지들이라면, 이걸로 모든 게 설명이 된다. 동물들이란 서로 닮은 구석이 없는 법이니까 당신은 본능적으로 나 같은 동물을 싫어하는 것이다. 로렌스가 자신을 비판하는 여론에 대해 한 편지에서 일갈하고 있는 대목.

이제 정리 모드. "일반적으로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환상은 부정관사를 인칭사 혹은 소유사의 가면으로만 취급한다. '한 아이가 매를 맞았다'는 금세 '내 아버지가 나를 때렸다'로 바뀐다. 하지만 문학은 정반대의 길을 따라가며, 겉으로 드러난 인칭들 밑에서 결코 보편성이라고 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극도에 달한 개체성이라고 할 수 있는 비인칭 - 남성, 여성, 짐승, 복부, 어린이... - 의 힘을 발견했을 경우에만 존재한다." 마지막 문장을 <비평과 진단>은 "하지만 문학은 반대의 길을 따라가다가, 보편성이 전혀 아닌 최상의 특수성인 어떤 비인칭의 힘을 명백한 인격체의 모습으로 발견하면서 비로소 멈춰선다."라고 옮기는데, 역시나 요령부득이다(특히 '겉으로 드러난 인칭들 밑에서(sous les apparentes personnes)'를 '명백한 인격체의 모습으로'라고 옮긴 대목).

다시, 문학은 언제 존재하는가? "겉으로 드러난 인칭들 밑에서 결코 보편성이라고 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극도에 달한 개체성이라고 할 수 있는 비인칭의 힘을 발견했을 경우에만 존재한다."(Literature ... exists only when it discovers beneath apparent persons the power of an impersonal - which is not a generality but a singularity at the highest point: a man, a woman, a beast, a stomach, a child...) 인용한 번역문은 여기서 '극도에 달한 개체성'의 사례를 '남성, 여성, 짐승, 복부, 어린이...'라고 옮겼는데, '보편성'이 아닌 '비인칭적 개체성'의 사례이므로, ''한(=어떤) 남자, 한 여자, 한 마리 짐승, 하나의 복부, 한 아이...' 등으로 옮겨지는 게 타당할 것이다. 문제는 '내 아버지가 나를 때렸다'를 거슬로 올라가 '한 아이가 매를 맞았다(a child is being beaten)'라는 익명적, 비인칭적 사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요컨대, "문학적 발화행위의 조건으로 기능하는 것은 처음의 두 인칭들, 즉 일인칭과 이인칭이 아니다. 문학은 우리에게서 를 말할 수 있는 힘을 앗아가는 삼인칭(블랑쇼가 말하는 '중성')이 우리 내부에서 태어날 때 시작된다." <비평과 진단>의 번역으론 "문학적 발화의 조건 구실을 하는 것은 두 1인칭이 아니다. 나(블랑쇼의 표현을 빌면 '중성')를 말할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서 앗아가는 3인칭이 우리 내우베서 태어날 때만 문학은 시작된다." '두 1인칭'이란 표현은 오류이며, 블랑쇼의 '중성'을 1인칭과 동일시하는 것도 오류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문학은 '나'와 무관하다. 그리고 '너'와도 무관하다. 앞에서 "글은 쓴다는 것은 나 자신의 추억이나 여행담, 나 자신의 사랑과 슬픔, 나 자신의 꿈과 환상 따위들을 늘어놓는 게 아니다."라고 단언한 것은 그 때문이다. 대신에 그것은 어떤 비인칭의 공간을 펼쳐놓는 것이다. '어떤 개인 날' 의 '어떤 미소'처럼 말이다(사강의 <어떤 미소>는 고등학교 때 읽은 듯하다. 20년도 더 전의 일이다!). '너'에 대한 모든 기억을 이젠 지우고 떠나는 자의 발걸음 처럼 말이다... 

 

 

 

나의 마음속에 항상 들려오는 그대와 같이 걷던 그 길가에 빗소리
하늘은 맑아 있고 햇살은 따스한데 담배연기는 한숨 되어

하루를 너의 생각하면서 걷다가 바라본 하늘엔
흰 구름 말이 없이 흐르고 푸르름 변함이 없건만

이대로 떠나야만 하는가 너는 무슨 말을 했던가
어떤 의미도 어떤 미소도 세월이 흩어가는걸...

05. 12. 31- 06. 01. 02.

 

 

 

 

P.S. 아마도 가장 강력한 비인칭적 공간은 '세월'이 펼쳐지는 공간일 것이다. 어제로써 새해가 밝았고, 나는 전년에 못다한 일들과 올해 해야 할 일들 사이에서 망연하다. 거듭 인용하자면, "아 세월은 잘 간다./ 눈 먼 세월. 잘 간다./ 나는 손 한번 못 댄 세월. 잘 간다." 하지만, 한번쯤 손봐줄 때가 올 수도 있지 않을까(부지런히 칼을 갈아야겠다). '문학'을, 그리고 삶'을 이대로 흘려보내기엔 아무래도 좀 멋쩍은 일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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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01-01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도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오.

니브리티 2006-01-03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이란 무엇인가?>와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는 그 용법에 있어서 차이가 있는 것 같은데요...
마르트 로베르가 여자였군요... <기원의 소설, 소설의 기원>의 서장이던가.. 아직 정의되지 않은 문학에 대한 시론은 아주 감명깊게 읽었는데, 그 뒤부터 업둥이 어쩌고 하는데에서는 그의 서론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인상을 받았었습니다...
요즘 쓰고 있는 글의 요지가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어떻게 문단에 문학적 알리바이와 윤리적 면죄부로 기능하는가에 대한 건데요... 완성되면 한번 봐주세요...^^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로쟈 2006-01-03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쓰기가 문학을 포괄하는 더 넓은 개념이라면, 글쓰기의 조건은 문학의 조건이기도 하지 않을까요? 요즘 쓰시는 글이 혹 '소설'이신지요?^^ 니브리티님도 새해 복많이 받으시길...

니브리티 2006-01-03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소설은 아니고, 소설집 뒤에 들어갈 작가후기 겸 저의 소설론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실제로 작가나 시인들이 자신의 문학관을 피력할 수 있는 기회는 매우 한정되어 있습니다. 시인들의 경우는 짧은 '서시'(문지 시인선의 경우 책 뒤에 원고지2~3매 분량 정도)가 전부이고, 소설가들의 경우 10매 남짓의 작가후기가 전부죠. 그나마 주어진 분량을 누구누구에게 감사의 말씀...으로 채우고 보면, 정말 없다고 봐야하겠죠. 비록 비평을 하지는 않지만, 전 이 기회에 좀 길지만(60매 정도) 작가후기를 충실하게 쓸 생각입니다...반 정도 썼는데...

음...작가란 종류의 인간들은 좀 뉘앙스에 민감하니 로쟈님이 비록 의도하지 않으셨다고 해도 사실 로쟈님의 말이 가시가 되어 저를 폭폭 찌르기도 합니다....^^ 그치만 로쟈님의 편집증을 사실 저도 즐기고 있다고 말해도 그닥 틀리지는 않는 거 같아요.... 새해에는 돈 버는 글도 좀 쓰시기를...^^;;;

로쟈 2006-01-04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돈버는 글'의 노하우를 좀 전수해주시길!..

니브리티 2006-01-05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걸 알면 제가 이렇게 버벅 거리겠어요...ㅋㅋㅋ
 

 

 

 

 

"문학은 두더지의 죽음과 더불어 시작된다"에 이어지는 브리핑이다. 멀리 가진 못해서 <세계의 문학>((2000 봄호), 247쪽, 그리고 <비평과 진단>(인간사랑, 2000), 17쪽부터가 이 글에서 다루어질 범위이다. 두 국역본이 부분적인 차이가 드러내는 대목이기도 한데, 이어지는 내용을 비교하여 읽어보면 이렇다.

(1)하지만 부정관사는 자신이 생성시키는 용어가 정관사, 'le', 'la'를 말하게 하는 형식적 성격을 상실한 경우에만 그 힘을 발휘한다. 르 클레지오가 인디언이 될 때, 그는 항상 미완의 인디언, 즉 "옥수수를 재배할 줄도 나무를 잘라 카누 한 척 만들 줄도" 모르는 인디언인 것이다. 그는 형식적 성격들을 획득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인접지역으로 들어간다. 마찬가지로 카프카에 따르면 헤엄을 칠 줄 모르는 수영 챔피언이 생성되는 것이다. 모든 글쓰기는 운동경기를 포함하고 있지만, 이런 운동경기는 결코 문학을 스포츠와 조화시킨다거나 글쓰기를 올림픽 게임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인 도피와 탈퇴 속에서 실행된다. 앙리 미쇼는 '침대에 누워있는 운동선수'라는 말을 곧잘 쓰곤 했다."(<세계의 문학>, 247-8쪽) 

(2)하지만 부정관사는 자신이 생성시키는 용어가 정관사 'le', 'la'를 나타내게 하는 형태적 문자기호들을 빼앗길 때에만 그 힘을 발휘한다. 르 클레지오가 인디언이 될 때 그는 항상 미완의 인디언, 즉 "옥수수를 재배할 줄도 나무를 잘라 카누 한 척도 만들 줄" 모르는 사람인 것이다. 그는 형태적 문자기호들을 얻는다기보다는 오히려 이웃관계의 지대로 들어간다. 마찬가지로 카프카에 따르면 일류 수영선수도 예전에는 헤엄칠 줄 몰랐다. 어떠한 글을 막론하고 운동경기 같은 것을 내포하고 있지만, 문학과 스포츠를 조화시킨다거나 글로 올림픽게임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러한 운동경기는 도피와 유기적 탈퇴에까지 미친다. 앙리 미쇼는 '침대에 누워있는 운동선수'라는 말을 곧잘 쓰곤 했다.(<비평과 진단>, 16-7쪽)

(3)But the power of the indefinite article is effected only if the term in becoming is stripped of the formal characteristics that make it say the. When Le Clezio becomes-Indian, it is always as an incomplete Indian who does not know "how to cultivate corn or carve a dugout canoe"; rather than acquiring formal characteristics, he enters a zone of proximity. It is the same, im Kafka with the swimming champion who does not know how to swim. All writing involves an athleticism, but far from reconciling literature with sports or turning writing into an Olympic event, this athleticlsm is exercised in flight and in the breakdown of the organic body - an athlete in bed, as Michaux put it.(영역본, 2쪽) 

 

 

 

 

먼저 첫문장. 상식적으로 알아둘 일이지만, 들뢰즈가 예찬하는 것은 정관사(le/la; the)가 아닌 부정관사(un/une; a/an)의 세계이다. 익명적 혹은 비인칭적 세계(그걸 '다중'적 세계라고 애써 해석하게 되면 들뢰즈와 네그리의 접점이 마련된다). (2)의 번역이 (1)을 베꼈다는 건 이 첫문장에서도 확인된다. 대략, '형식적 성격'을 '형태적 문자기호들'로 대체했을 뿐이다. 물론 이 대체는 엉뚱한 것이다. 불어의 caracteres가 영어 character와 마찬가지로 '문자'나 '부호'로 뜻도 갖고 있(겠)지만, 여기서는 부정관사 대신에 정관사를 말하게 하는 특성들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어떤 걸 말하는가? 시 한편을 예로 들어보자. 이성복의 '남해금산'.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여기서 1행의 '한 여자(a girl)'가 어떻게 2행에서 '그 여자(the girl)'로 한정되는가? '돌 속에 묻혀 있었던 한 여자'라고 구체화/인칭화됨으로써이다. 그때 '돌 속에 묻혀 있었던'이란 한정어구가 들뢰즈가 말하는 '형식적 특성들'이다. 그러한 특성들/한정들에 의해서 '한 여자'는 비인칭성(4인칭)의 평면에서 인칭화된 공간으로 이동한다. 번역에서 '자신이 생성시키는 용어'라는 건 좀 불친절한데, 가령 '여성-되기'에서 '여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니까 '거시기-되기'가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거시기'가 아무런 한정을 받지 않아야 하며, 따라서 정관사를 수반하지 말아야 한다. 그건 언제나 '어떤 거시기-되기'인 것이다.

이로써 유추할 수 있는 것이지만, '베컴-되기'나 '박지성-되기' 등의 고유명사-되기는 유사-생성의 사례들이다. 진정한 생성(되기)은 거꾸로 침대에 누워 있는 운동선수(an athlete in bed)' 되기이다. (르 클레지오에 따르면) 그것은  미완의, 되다 만 인디언, 즉 옥수수를 재배할 줄도 나무를 잘라 카누 한 척 만들 줄도 모르는 인디언-되기이고, (카프카에 따르면) 헤엄을 칠 줄 모르는 수영 챔피언-되기이다(<비평과 진단>에서 "마찬가지로 카프카에 따르면 일류 수영선수도 예전에는 헤엄칠 줄 몰랐다."라고 옮긴 건 문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소치이다).

정리하자면, "글쓰기는 운동경기를 포함하고 있지만, 이런 운동경기는 결코 문학을 스포츠와 조화시킨다거나 글쓰기를 올림픽 게임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인 도피와 탈퇴 속에서 실행된다."

'도피'란 건 흔히 '도주'나 '탈주'로 옮겨지는 걸 말한다. 보지는 못했지만, 빔 벤더스의 영화 중에 <페널티 킥을 맞은 골키퍼의 불안>(1971)이 있는데, 그의 이 장편 데뷔작은 페터 한트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그는 <베를린 천사의 시>도 각본 작업에도 참여했다). 참고로, 한트케의 최신작은 작년에 발표된 <돈후안>(이며 우리말로 번역돼 있다. 작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던 오스트리아의 여성 작가 옐리네크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노벨 문학상을 받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페터 한트케다. 내가 노벨 문학상을 받은 건 여자였기 때문이다." 하여간에 그 영화는 주인공인 골키퍼 브루노가 페널티 킥을 맞은 불안 때문에 경기장을 빠져나가 배회하는 걸 줄거리로 하고 있고 있다. 그런 게 '도주'이다('탈주'는 좀 낭만화된 표현이다).

 

 

 

 

그리고 국역본들에서 '유기적 탈퇴'라는 건 좀 부정확해 보이는데, 그냥 몸(유기체)이 고장나거나 부상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운동선수이지만, '침대에 누워 있는 운동선수'라는 것. 해서 '슈팅 라이크 베컴'이 아니라 '브레이크다운 라이크 베컴'이다(베컴에 언제 누워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몇 문장만 더 읽어보자: "사람들은 동물이 죽는 만큼 더욱 동물이 된다. 정신주의적 편견과는 정반대로 제대로 죽을 줄 알며, 죽음을 느끼거나 예감하는 것은 바로 동물이다. 문학은 로렌스에 따르면, 고슴도치의 죽음과 더불어, 카프카에 따르면 두더지의 죽음과 더불어 시작된다. '부드러운 연민의 몸짓으로 내밀어진 우리의 붉고 작은 발들.' 죽어가는 송아지를 위해 글을 쓴다고 모리츠는 말하곤 했다."

 

 

 

 

D. H. 로렌스(1885-1930)는 자타가 공인하는 20세기 영문학 최대 작가 중 한 사람이지만, 내가 별로 읽은 바가 없는 탓에 '고슴도치의 죽음'이 어느 작품(혹은 에세이)에 나오는 얘기인지는 모르겠다(캥거루라면 몰라도). 그의 작품들은 주요 장편들을 포함해 대부분 번역/소개된 걸로 알지만.   

 

 

 

 

그리고 문학은 두더지의 죽음과 더불어 시작된다는 카프카. 그의 작품들 또한 전집 규모로 소개돼 있으므로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없을 듯하고 남은 건 그냥 읽어주는 것이겠다. 또한 아마도 들뢰즈의 카프카론에 대해서는 물론 책 한 권 분량을 써도 모자랄 테니까 여기선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참고로 올해 나온 카프카 책들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빌헬름 엠리히의 <카프카를 읽다(전2권)>(유로서적). 카프카 연구자 빌헬름 엠리히가 1958년에 발표한 <프란츠 카프카. 그의 문학의 구성 법칙, 허무주의와 전통을 넘어선 성숙한 인간>을 번역하여, 총2권에 나누어 담은 책인데, "막스 브로트의 카프카 해석이 지배적인 시점에서, 막스 브로트와 다른 견해로 카프카를 해석한 작품으로, 오늘날의 카프카의 작품해석에 다양성을 부여했다고 평가받는"단다. 카프카 애독자들의 즐거움이겠다. 전집판으로 <소송>(솔출판사)이 얼마전 출간된 것도 기록해둘 만하다.   

그리고 모리츠. 칼 필립 모리츠(K. P. Moritz)를 말하는데, 그의 작품 중 <안톤 라이저>(문학과지성사, 2003)가 번역돼 있다. "괴테가 당대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한 바 있는 칼 필립 모리츠의 심리소설"로서 "'안톤 라이저'라는 한 소년의 유년시절과 성장과정을 성인이 된 화자의 시점에서 그리고 있다"는데, 소개에는 "보잘것 없는 신분, 가난한 집 자식으로 태어난 소년의 성장사는 사회의 무시와 멸시, 냉대로 얼룩져 있다. 주인공은 진정한 배웅과 교양에 목말라하지만, 한살 한살 나이를 먹어갈수록 영혼의 훼손과 마음의 상처는 더해만 간다. 야비한 세상에 주눅든 안톤은 자폐와 분열, 감정의 과잉 상태에 빠져든다. 경건주의 신앙의 실상과 그 이면, 허영과 위선으로 가득찬 중간계급의 행태에 대한 비판적 묘사는, 18세기 독일의 사회사라 볼 수 있다."고 돼 있다.

모리츠는 "1756년 독일 북부 소도시 하멜른의 궁핍한 소시민 가정에서 태어나 모자 제조 기술을 익히는 견습생 생활을 했다. 에어푸르트 대학과 비텐베르크 대학을 다니며 신학을 전공하고 교사로 일하다가 1786년 이탈리아 여행길에 괴테를 만나 2년간 교류했다. 독일로 돌아온 뒤 1789년 바이마르 공국의 칼 아우구스트 공의 중재로 베를린 대학의 문학이론 및 고전문헌학 담당 교수가 되었다. 1793년 6월 26일 베를린에서 사망했다." 그의 <안톤 라이저> 역자해설이 "'고통의 역사(Pathographie)와 소설의 형식"이란 제목을 갖고 있는 걸 보면, 사회사의 이면에서 '고통'이란 주제에 민감했던 작가로 보인다. "죽어가는 송아지를 위해 글을 쓴다"는 인용이 이해가 갈 만큼.

이해하기 까다로운 건 인용문의 첫문장인데, "사람들은 동물이 죽는 만큼 더욱 동물이 된다"(<세계의 문학>)나 "동물은 죽는 존재이기에 사람들은 더더욱 동물적이 된다."(<비평과 진단>) 같은 번역문들은 그 까다로움을 풀어주지 못한다. 영역본엔 "One becomes animal all the more when the animal dies."로 돼 있다(불어 원문은 "On devient d'autant plus animal que l'animal meurt."). 러시아어본은 "동물-되기는 동물이 죽을 때 더욱 확실해진다" 정도로 옮기고 있다.

 

 

 

 

문맥상, 그러니까 바로 앞에 나왔던 정관사/부정관사 문제와 연계시켜보자면, 여기서도 주목해야 할 것은 'the animal(l'animal)'라고 생각된다. 우리가 동물이 된다는 것은 특정한 동물이 되는 게 아니라 불특정의 동물이 되는 것이며, 죽음은 '그 동물'이라는 특정성으로부터 도주하는 것이자 해방되는 것이다. '남해금산'의 표현을 가져오자면, 죽음은 '그 여자'를 '한 여자'로 해소하고 다시 환원한다. 다시 '한 잎의 여자'로.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女子, 그 한 잎의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女子만을 가진 女子, 女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女子,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눈물 같은 女子, 슬픔 같은 女子, 病身 같은 女子, 詩集 같은 女子,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女子, 그래서 불행한 女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女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女子

이 시의 결론에서 "그러나 구누가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라고 규정되는 것은 '한 여자'(=한 잎의 여자)가 결코 '그 여자'로 특칭되지 않는 것과 관련돼 있을 것이다(이 사랑은 '방법적 사랑'일까, '소유하지 않는 사랑'일까?). '여성-되기'라고 할 때 그 '여성'은 그러한 '한 여자'이면서 '한 잎의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여자'이다. '동물-되기'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우리는 죽어가는 동물이 될 때(동물들은 각자의/고유한 죽음을 죽지 않는다), 비로소 제대로 동물-되기에 이르며, 문학은 그때 거기서 시작된다. 이것이 들뢰즈 문학론의 핵심을 이룬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여간에 시간관계상 오늘은 여기까지 읽도록 하겠다(이런 진도라면 올해 안에 끝내긴 글렀다)... 

05. 12. 2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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