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오늘도 나는 광야를 달려간다"에 이어지는 브리핑이다. 들뢰즈의 <비평과 진단>에 실린 에세이 '문학과 삶'  읽기인데, 지난번 브리핑에서 다룬 건 <비평과 진단>의 서문이었다. 텍스트 '문학과 삶'의 국역본은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내가 지속적으로 불만을 표시하고 있는 번역서 <비평과 진단>(인간사랑, 2000)에 실린 것이고(15-24쪽), 다른 하나는 계간 <세계의 문학>(2000년 봄호)에 실린 것이다(246-253쪽). 이 후자에 붙여진 제목이 "문학은 두더지의 죽음과 더불어 시작된다"이다.

발행년도는 갖지만 후자가 먼저 출간되었는데, 가독성이 앞엣것보다는 낫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예비적인 정보 없이 두 텍스트를 읽어본다면, 후자가 전자를 교정한 번역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한데, 문장이나 문투가 유사한 대목이 많다. 나는 <비평과 진단>의 번역이 <세계의 문학>의 번역을 베꼈을 거라는 의혹을 갖고 있다. 동일한 오역이 발견되는 대목도 있기 때문이다(나는 년도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세계의 문학> 번역이 <비평과 진단>을 베끼면서 교정한 것인 줄 알았다). 한데, 흔히 공부 못하는 학생이 컨닝하는 식의 번역이어서 베끼면서도 더 알아먹을 수 없도록 개악한 형국(그러기도 쉽지 않을 터인데).

아무려나 들뢰즈의 문학론을 집약하고 있는 텍스트를 정리해보도록 한다. 내가 주로 인용하는 것은 <세계의 문학>의 번역이며, <비평과 진단>은 필요할 경우에 대조하는 방식으로 글은 전개될 것이다. 처음 몇 문장은 이렇다.

  

 

 

 

"확실히 글쓰기는 체험한 재료에 표현형식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문학은 곰브로비치(Gombrowicz)의 말과 행동처럼 오히려 비정형이나 미완성을 향한다. 글쓰기는 늘 미완성으로 끝나는, 늘 일어나고 있는 생선/변화의 문제이다. 그것은 체험할 수 있거나 체험된 모든 재료를 벗어난다."(246쪽) 맨마지막 문장만 <비평과 진단>에는 "살기에 편하거나 체험된 모든 재료를 벗어난다"로 옮겨져 있을 뿐 두 번역본이 동일하다. '체험할 수 있거나/살기에 편하거나'는 불어의 le vivable(영어의 the livable)의 번역인데, 나는 언젠가 (<세계의 문학>에 대한 참조 없이도) '살기에 편하거나'란 번역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밝힌 바 있다. '가능한 삶'이란 함축을 갖는 '체험할 수 있거나'가 내가 보기엔 더 정확한 번역이다.

Gombrowicz photo

 

 

 

 

 

 

폴란드 작가 비톨트 곰브로비치(1904-1969)의 작품은  <페르디두르케>(민음사, 2004)와 <포르노그라피아>(민음사, 2004)가 거의 동시에 출간됨으로써 국내에 소개되었다(<비평과 진단>에는 생몰년대가 '1905- '로 역주에 표기돼 있는데 무얼 참조한 것인지 모르겠다). 알라딘에 소개돼 있는 간단한 약력은 다음과 같다.

"1904년 폴란드 남부의 말로시체에서 부유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독실한 가톨릭 집안의 뜻에 따라 귀족적인 가톨릭 학교를 거쳐 바르샤바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법학에 흥미가 없던 차에 대학 졸업 후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철학과 경제학 공부를 시작했지만 곧 집안의 반대에 부딪혀 중단하고 귀국했다. 변호사 개업을 준비하는 틈틈이 작품을 쓰기 시작해서 1933년 첫 작품집 <미성숙한 시절의 회고록>을 출간했다. 평단의 비난과 대중의 지지를 동시에 받으며 작가의 길을 결심하고 희곡 <부르고뉴의 공주 이본>과 첫 장편 <페르디두르케>를 발표했다. 1939년 아르헨티나에 대한 기사를 쓰기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한 다음 날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소식을 듣고 귀국을 포기했다. 그 후 그의 작품은 나치에 의해 긴 판금에 들어갔다. 지방 신문사와 은행을 전전하며 생계를 꾸리면서 두 번째 장편 <대서양 횡단선>을 완성했다. 1933년부터 잡지 <쿨투라>에 관여하면서 경제적 사정이 나아지자 다시 전업 작가로 돌아섰다. 1957년 폴란드 자유화 운동의 결과 일시적으로 검열이 약화되면서 몇몇 작품들이 출간되었지만 정치적 성향을 이유로 다시 금서로 묶여 1960년대 중반까지 판금되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고국 폴란드에서와는 달리 30개 언어로 번역, 소개되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세 번째 장편 <포르노그라피아>를 발표한 후 1963년 포드 재단의 기금을 받아 아르헨티나를 떠나 베를린으로 이주했다. 네 번째 장편 <코스모스>를 발표하고, 1968년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다. 1969년 프랑스 방스에서 별세했다."

그러니까 네 편의 장편소설이 그의 주저인 듯한데, 작년에 출간된 이 번역본들을 나는 아직 안 읽어봤기 때문에 논평할 처지는 못된다. 하지만 작년 모스크바 체류시에 러시아어로도 번역본들이 나와 있는 걸 확인했었다(기억에 구입하지는 않았지만). 참고로, 최근에 폴란드 문학의 거장 헨릭 시엔키에비치(Henryk Sienkiewicz, 1846-1916)의 노벨문학상 수상작(1905) <쿠오바디스>(민음사)가 수상 100주년 기념으로 출간됐다(폴란드어 완역본은 최초가 아닐까 싶다). 라틴어 'Quo Vadis?'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란 뜻이다. 오래전 내가 본 영화에서는 라스트 신에서 베드로의 대사였다.

1905년이면 곰브로비치가 한 살 때이고, 프랑스에선 사르트르가 태어나던 해이다. 미하일 바흐친은 10살이었고, 그해 러시아에서는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났다(<닥터 지바고>의 초반부에 묘사된다). 아래는 1905년 1월 '피의 일요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벌어진 차르 군대에 의한 시민 학살 장면이다(올해가 가기 전에 기억해 두도록 한다).  

Bloody Sunday Attack

아무려나 그해 가을 러시아와는 역사적으로 앙숙인 나라 폴란드의 작가 시엔키에비치가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도 건너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는 것. 그리고 곰브로비치는 그 폴란드 문학의 또다른 거장이라는 것. 다시 들뢰즈로 돌아오면 첫문단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그것은[글쓰기는] 과정, 다시 말해서 체험할 수 있거나 체험된 것을 가로지르는 삶의 이행이다. 글쓰기는 생성/변화와 불가분의 것이다. 우리는 글을 쓰면서 여성이 되거나 동물이 되거나 식물이 되기도 한다. 또한 미립자가 되어 지각 불가능한 것이 되기도 한다."

 

 

 

 

여기서 여성-되기, 동물-되기, 식물-되기, 지각불가능한 것-되기 등은 들뢰즈 문학론의 '표지' 같은 것이어서 요즘은 우리 주변의 비평이나 논문들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구호들'이다(가장 쉬운 안내는 콜브룩의 <질 들뢰즈>를 참조할 수 있으며 구체적인 작품론에의 적용은 <들뢰즈와 문학-기계>에 실린 글들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되기'의 사례들로 최근 시의 경향들을 분석해 보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과제 중 하나인데, 가령 황병승의 <여장남자 시코쿠>(랜덤하우스중안, 2005)가 여자-되기 혹은 여장남자-되기의 사례라면 김민정의 <날으는 고슴도치아가씨>는 동물-되기(보다 구체적으론 고슴도치-되기)의 전형적인 사례라 할 만한다(이에 대한 '읽기'는 다음 기회로 미룬다. 당장 돈이 되는 일도 아니므로).

들뢰즈의 이어지는 문단: "이러한 생성/변화들은 르 클레지오의 한 소설 작품에서처럼 특정한 선을 따라 서로 연계되어 있거나 아니면 러브크래프트의 힘찬 작품에서처럼 세계 전체를 구성하는 문, 문지방, 지역 등에 따라 모든 층위들에서 공존한다. 생성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남자가 모든 재료에 강요되는 지배적 표현형식으로 제시되는 한 남자들은 인간이 되지 못한다." 그러니까 거들먹거리는 남자들은 들뢰즈적 생성(되기)에서 열외라는 얘기겠다(하긴 그들은 필연코 뭐가 돼야 할 만큼 뭐가 아쉬울 리 없을 테니까).  

<비평과 진단>에서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은 "따라서 인간은 모든 재료에 강요된다고 주장하는 지배적 표현형식으로 표상되는 한, 사람들은 인간이 되지 못한다."(16쪽)라고 돼 있다. 전혀 감을 잡고 있지 못한 번역이라는 걸 알 수 있다(클브룩의 <질 들뢰즈>에서도 역자는 '남자/남성'이라고 옮겨져야 더 적합한 대목들에서 'man'을 '인간'이라고 옮기고 있다). "사람들은 인간이 되지 못한다"라니?

  

 

 

 

프랑스 작가 르 클레지오(1940- )의 책들은 데뷔작인 <조서>(세계사, 1989; 민음사, 2001)를 필두로 해서 이래저래 20여 권 가까이 번역/소개돼 있다(그는 지난번 서울 국제문학포럼에 참석차 내한한 바 있으며 작가 황석영과 대담을 나누기도 했다. 2001년인가에도 방한한 적이 있으니까 우리에게 '친숙한' 작가). 내가 읽은 건 <조서>뿐이어서(그것도 15년쯤 전에 읽은!) "특정한 선을 따라 서로 연계되어 있"다는 르 클레지오의 작품(들)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다, 라고 쓰려는데, 들뢰즈의 각주에 따르면 "작품 <조서>에서 르 클레지오는 여자로의 생성, 쥐로의 생성, 그리고 지작할 수 없는 생성 속에 소멸해 가는 한 인물을 거의 완벽하게 보여주었다." 하지만 나로선 계속 도망다니는 주인공이 등장한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H. P. 러브크래프트(1890-1937)는 내게 생소한 작가인데, '미국 출신의 호러 작가'라니까 그럴 만하다(호러는 소설이건 영화건 잘 보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 소개를 잠시 옮겨오면 "미국 로드 아일랜드주에서 태어났다.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그가 8살 때 사망한 아버지, 신경질적인 어머니 아래서 악몽에 시달리는 유년기를 보냈다. 그 자신 18세에 정신쇠약으로 학교공부를 포기하고 독서광으로 지냈다. <위어드 테일즈> 등의 잡지의 인기작가였던 그는 생전에는 크게 인정받지 못했으나 현재는 진정한 '미국적 판타지의 창조자'로 평가받고 있다. 암으로 사망했다."

생전에 인정받지 못하고 47살에 사망했으니까 애드가 앨런 포우만큼이나 불우한 작가의 계보에 속하는 모양이다. 국내에는 1992년부터 띄엄띄엄 소개된 걸로 나오는데, 올해 <러브크래프트 코드(전5권)>(책세상)이 한꺼번에 나왔으니까 그의 독자들에겐 '기념비적인' 해가 될 만하다. 판매율이 저조한 걸로 보아 그가 국내에선 '대중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것 같지 않지만. 어쨌든 영미문학 애호가인 들뢰즈에 따르면, 그의 "힘찬 작품에서처럼 (생성은) 세계 전체를 구성하는 문, 문지방, 지역 등에 따라 모든 층위들에서 공존한다."

"반면에 여성이나, 동물, 미립자는 자신의 고유한 형식화를 벗어나는 도피 성분을 항상 지닌다. 남자라는 수치심, 이것보다 더 좋은 글쓰기의 이유가 있을까? 주체가 여성일 때조차도 그녀는 여성으로 생성되어야만 한다. 이 생성은 그녀가 간청할 수 있을 어떤 상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생성은 어떤 형식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여성, 어떤 동물, 어떤 분자와 더 이상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의 인접지역이나 식별이 불가능한 미분화된 지대를 찾아내는 것이다."(247쪽)

세 가지가 지적될 필요가 있다. 먼저, "남자라는 수치심, 이것보다 더 좋은 글쓰기의 이유가 있을까?" 다시 말해서, 글쓰기는 남자임(being a man)으로부터의 도주이다. '글쓰는 자'는 자신이 '남자'라는 사실에 대해 거북해 하고 부끄러워하는 자이다. 그리고, 둘째, "주체가 여성일 때조차도 그녀는 여성으로 생성되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생물학적 여성은 들뢰즈의 여성-되기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그러니까 여자라고 해서 이 '여성-되기'에서 무슨 특권을 갖는 게 아니다). '여성'은 '소수자'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기에. 그리고 끝으로 이 되기의 지향점은 "어떤 여성, 어떤 동물, 어떤 분자"와 더 이상 구분/식별되지 않는 익명적, 비인칭적 장에 들어서는 것이다.

Andre Dhotel

서동욱의 <들뢰즈의 철학>(민음사, 2002)의 에필로그는 '하나의 삶'이란 제목을 갖고 있는데, 그때 '하나의 삶(une vie; a life)'에서 '하나'가 뜻하는 바는 고유성이나 단독성이 아니라 이 '익명성'이고 '비인칭성'이다. 그 사례로 들뢰즈가 들고 있는 것은 앙드레 도텔(Andre Dhotel; 1900-1991)의 성상체(aster)이다. 들뢰즈의 각주에 따르면, 이 '성상체-되기'는 도텔의 <우화 같은 연대기(La Chronique fabuleuse)>의 225쪽을 참조할 수 있다(번역본엔 222쪽이라고 오기돼 있다). 나는 표지의 이미지만을 참조할 수 있는데(두번재 이미지), 혹 세번째 이미지의 풀 같은 종류가 아닐까 싶다(마지막 이미지는 작가 앙드레 도텔과 그의 캐리커쳐).

문학을 그러한 '성상체'로 만든다면, 거기서 "성(sexes)이나 속(genera), 계(kingdoms) 사이를 무언가가 지나간다." 여기서 '계'란 '동물계', '식물계'라고 할 때의 '계'이다. 이 사이로 지나간다는 말은 동물도 아니고 식물도 아닌,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분류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지나간다는 뜻이겠다. "예컨대 여자들 사이의 여자, 동물들 중의 하나처럼 생성은 언제나 <-사이>이거나 <-중에>이다."(영역: "Becoming is always 'between' or 'among': a woman between women, or an animal among other.") 그러니까 들뢰즈의 생성(되기)란 '군계일학(群鷄一鶴)' 즉 닭의 무리 속에 끼여 있는 한 마리 학이 되는 걸 뜻하는 게 아니라 '군계일계(群鷄一鷄)' 곧, 닭의 무리 속에 끼여 있는 한 마리 닭이 되는 걸 말한다. 왜 이런 노래 있잖은가. "나는 한 마리 이름없는 닭/ 닭이 되어 살고 싶어라" 이 닭털 같은 나날들을?!

 

 

 

 

05. 12. 25-27

P.S. 분량상으론 '문학과 삶'의 한 페이지를 읽었다. 글이 늘어지고 있는 탓에 몇 차례 분재해야겠다. 저녁시간이 다가온바 육신을 위한 '닭고기 수프'라도 먹어야겠고. 우리의 '두더지'는 다음 연재에서 죽을 것인바, '문학'도 그때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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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ai 2006-09-19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뒷북입니다만, 동서의 H. P. 러브크래프트(HPL) 선집 판매가 저조한 건 수준(그리고 상식) 이하의 번역 때문일 겁니다. 동서에선 그 선집을 내기 전에 이미 몇 작품을 묶어 [공포의 보수]라는 한 권으로 낸 적이 있는데, 이번 선집에도 그 번역을 재탕했다고 하며 나머지 작품들 번역수준도 과히 기대 이하라고 하거든요. 국내 HPL 매니아들은 황금가지 쪽의 전집을 (기약도 없이) 기다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로쟈 2006-09-20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언제나 걸림돌이 되는 번역...
 

Критика и клиника: подробнее

들뢰즈의 <비평과 진단>(인간사랑, 2000)은 거의 신뢰할 수 없는 번역이지만(나는 이전에 밝힌 바대로 '비평과 진료'란 제목이 더 적합하다고 본다), 들뢰즈의 대표적인 비평문들을 포함하고 있기에 참조하지 않을 수도 없는 책이다(그의 마지막 책이기도 하다). 오독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 나는 영역본(1997)과 러시아어본(2000), 그리고 (간혹) 불어본을 참조한다. 다른 비평문들을 다루기에 앞서 일단은 제1장인 '문학과 삶'을 읽고 정리해두는 것이 나의 오래된 '숙제'인데, 오늘은 워밍업으로 '머리말'을 읽어보기로 한다. 이 머리말은 네 개의 문단으로 구성돼 있는데, 먼저, 국역본의 첫 문단이다.

-이 책에 실려 있는 텍스트들  중 일부는 미발표 원고이지만 나머지 다른 텍스트들은 이미 발표된 것들이다. 이 텍스트집은 몇몇 문제들을 중심으로 구성한 것이다. 글쓰기의 문제: 마르셀 프루스트가 말한 것처럼 작가는 언어 속에서 새로운 언어를, 어느 면에서는 낯선 언어를 만들어낸다. 작가는 문법적이거나 통사적인 새로운 힘들을 내보인다. 작가는 언어를 그 관습의 밭고랑 밖으로 끌고가 언어를 정신없게 만든다. 하지만 글쓰기의 문제 역시 보기(voir)와 듣기(entendre)의 문제와 따로 떼오놓을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어떤 다른 언어가 언어 속에 만들어질 때, 언어 전체야말로 '반(反)통사적'이고 '반(反)문법적'인 한계에 가까워지거나 아니면 자기 자신의 밖과 소통한다.(13쪽)  

핵심은 인용된 프루스트의 말처럼, 작가는 언어 속에서 새로운 언어, 일종의 외국어(낯선 언어)를 창조/발명해낸다는 것. 이를 위해서 그들은 새로운 통사적, 문법적 힘(역량)들을 선보인다. 이때의 힘(power; puissance)은 어떤 잠재력이며 작가는 그러한 언어 속의 힘을 가시화/현실화한다는 것. 어떤 방식으로? 관습적인/일상적인 밭고랑 바깥으로 언어를 끄집어냄으로써, 언어로 하여금 정신없게, 정신 못차리게(delirious; delirer) 만듦으로써이다.  

시대적인 문맥을 제외하면, 이상화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 '논길을 걷는 어른-화자'(=언어)를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만드는 것이다(작가는 '봄 신령'이 되겠다).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이때 글쓰기(writing)의 문제는 보기(seeing), 듣기(hearing)의 문제와 분리되지 않는다. 즉, 문학은 뭔가 다른 것을 보고, 다른 것을 듣게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시에서의 표현을 빌면, 그건 '푸른 웃음, 푸른 설음'을 보고 듣게 하는 것이다. 푸른 웃음? 푸른 설음? 이러한 '시적 허용'은 비록 규범적인 통사나 문법의 테두리 안에 놓여 있지만, 의미론적으론 반-규범적이다. 언어 안에서 다른 언어(another language)를 창조한다는 것은, 그런 식으로 언어가 통째로 규범성의 한계 너머/바깥과 소통한다는 걸을 뜻한다. 그럼, 이 한계/바깥이란 무엇인가?  

-한계는 언어의 밖에 있지 않다. 한계야말로 언어의 바깥인 것이다. 즉 한계는 비언어적 보기와 듣기로 만들어진다. 하지만 언어만이 보기와 듣기를 가능케 한다. 말들을 뛰어넘는 색과 소리의 효과처럼 글쓰기에 적합한 회화와 음악도 있다.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은 바로 말들을 통해서, 말들 사이에서이다. '이면에 숨은 것'을 보거나 듣기 위해서는 '언어의 구멍을 파야 한다'고 사뮤엘 베케트는 말하곤 했다. 작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대해서 말할 때는 귀가 뚫린 사람이라거나 눈이 밝은 사람, '잘못 보이고 잘못 평가된 사람', -색채주의자, -음악가라는 말을 곧잘 쓴다.(13-4쪽)

들뢰즈가 말하는 언어의 한계/경계는 언어의 바깥을 의미하는 게 아니며 그 한계/경계 자체가 바깥이다. 즉 그것은 언어가 아닌 '보는 것', '듣는 것'들로 구성되지만, 오직 언어만이 그러한 보기/듣기를 가능하게 한다. 요컨대, 언어이면서 언어가 아닌 것, 그게 언어의 한계이며, 문학은 언어를 그러한 한계로 밀어붙인다. 이종격투기 선수들이 기진맥진한 상대방을 코너쪽으로 밀어붙이듯이 말이다. 이렇게 해서, 회화와 음악은 글쓰기의 특징이 된다. 즉, 회화적인 글쓰기, 음악적인 글쓰기가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순전히, 단어(말)들을 통해서이다. 베케트의 표현에 따르면, 이건 (규범적인) 언어의 벽에 드릴로 구멍을 뚫는 것과 같다. 그러면 언어 속에서 뭔가 다른 것이 보이고 들릴 테니까. 해서, 모든 작가는 '뭔가를 보는 사람'이고, '뭔가를 듣는 사람'이며, 칠쟁이이고 딴따라이다.   

-이러한 보기와 듣기는 사적(私的)인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끊임없이 재창출되는 역사와 지리의 형상들을 형성한다. 세계의 처음부터 끝까지 말들을 이끌어가는 과정으로서의 역사와 지리를 만드는 것은 바로 착란과 열광이다. 그건 언어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인 것이다. 하지만 착란이 임상학적 상태까지 회복되면 말들은 이제 더 이상 아무것에도 이르지 못한다. 또한 자신의 역사, 색, 노래를 잃어버린 밤 말고는 그 말들을 통해서 더 이상 아무것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다. 문학은 일종의 건강이다.(14쪽)

문학의 글쓰기가 내보이는 보기/듣기는 사적/개인적인 것이 아니며, 따라서 일종의 역사와 지리(혹은 지층)를 갖는다. 그러한 지리와 역사를 만들어내는 것은 착란(delrium; delire)이다. 즉,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혼이다. 단어(말)들을 우주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몰고가는 과정. 마치 야생마를 몰듯이. 이문세의 <야생마>가 여기에 걸맞을 듯하다.  

오늘도 나는 광야를 달린다/ 잊혀져 가는 맑은 꿈을 찾아서
누구보다도 자유롭고 싶어서/ 바람이 부는 대로 달려간다
아무도 내 마음 모를 때/ 때로는 슬프고 혼자서 가는 길이 너무나 외로워져도
오늘도 나는 광야를 달린다 꿈속에 보던 날개를 찾아서
멀리 저멀리 타오르는 태양이 내젊은 가슴을 부르네
아무도 나를 기다리지 않아도 오늘도 나는 광야를 달려간다
누구보다도 자유롭고 싶어서 오늘도 쉬지 않고 달려간다
때로는 거친 바람과 소나기 맞으며
혼자서 가는 길이 너무나 외로워져도
가다가다가 쓰러진다고 해도 오늘도 나는 광야를 달려간다
누구보다도 멀리 가고 싶어서 오늘도 쉬지 않고 달려간다

문학은 그렇게 쉬지 않고, '말들'을 광야로 내몬다(이런 게 '탈영토화'일 것이다). 그러한 보기/듣기는 언어의 한계/경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다. 중요한 건 이러한 착란이 질병이 아니며 질병으로 간주되어 진료의 대상이 되어서도 안된다는 것(그건 생의 환희를 노래하는 새들을 새장에 가두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착란으로서의 문학은 절대적으로 건강의 징표이기에. 이제 마지막 문단.

-이러한 문제들은 가야 할 길의 총체를 보여준다. 이 책에 소개한 텍스트들과 거기에 연구해 놓은 작가들은 이러한 길에 부합한다. 개중에는 짧은 텍스트들도 있고 훨씬 길다란 텍스트들도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교차하거나 동일한 장소를 다시금 거치거나, 서로 가까워지거나 떨어지면서 서로에게 어떤 시각(vue)을 준다. 어떤 텍스트들은 질병으로 닫힌 막다른 골목이다. 모든 작품은 여행이자 도정이다. 이것은 작품을 구성하고 작품의 풍경이나 조화를 이루는 길과 내적 역정에 의해서만 그런 외적 길에 이른다.(14쪽)

그러니까 들뢰즈가 모아놓은 텍스트들은 모두가 저마다의 '길'을 보여준다. 해서 모든 문학작품은 여정이며 여행이다(간혹 막힌 골목들이 되기도 하는). 이들은 서로서로에게 새로운 전망이 되어주기도 한다('가지 않은 길'이 되기도 하면서). 그런데, 이 길은 그것을 구성하는 내적 경로들(paths)과 궤도들(trajectories)에 의해서만 여행할 수 있다. 그러니까 들뢰즈가 이제부터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텍스트의 그러한 내적 경로/궤도들일 테다. 자, 준비됐나요? Are You Ready?..

05. 12.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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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01 2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5-12-01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헝가리 인명에 '나지'라고 있는 듯한데, '너지'라고 읽는 건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헝가리어가 러시아어 하고도 다르니까요). 궂은 일이 있으셨다는 얘기도 들리던데 ***님도 남은 한 달 마무리 잘 하시길...(그리고 탄력 받은 게 아니라 볼일상 PC방에 죽치고 있다보니 이잡는 셈치고 쓴 것들입니다.^^)
 

 

 

 

 

최근에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연구 과정에 대한 윤리적 논란이 사회적 파문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직접 참견할 형편은 아니기에, 나는 나대로 그냥 '니체와 여성'이란 주제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권장할 만한 책들은 니체의 저작들 이외에 고병권의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그린비, 2003)과 신경원 교수의 <니체, 데리다, 이리가레의 여성>(소나무, 2004), 그리고 데리다의 <에쁘롱>(동문선, 1998) 등이다. 이리가레(이리가라이)나 사라 코프만 등의 책들은 아직 번역돼 있지 않다.  영어권에서 이 주제에 관한 책들은 여럿 나와 있지만, 내가 맘에 들어하는 책은 켈리 올리버(Kelly Oliver)의 <니체를 여성화하기('Womanizing Nietzsche : philosophy's relation to the "feminine")>(Routledge, 1995)이다. 저자의 <크리스테바 읽기>(시와반시사, 1997)가 국내엔 소개돼 있다.

물론 이 책들을 이 자리에서 모두 다 읽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시간을 내보려고는 하지만, 알다시피 시간은 여성만큼이나 붙잡기 어려우며 변덕스럽다), 여기서는 다만 고병권의 <니체의 위험한 책>의 한 장 "여자의 해결책은 임신이다"(192-208쪽)를 따라가보기로 한다. 많지 않은 분량이지만 문제의 윤곽을 잡아주고 있어서 유용하다. 일단 시작은 여성에 대한 니체의 '마초적' 언명들이 여성 독자들을 불편하게 한다는 전제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문제제기: "하지만 니체가 정말 마초였을까? 전통적 서구문화에 그토록 급진적인 비판을 가했던 그도 여성에 대해서는 전통적 견해를 반복했던 것일까? 노예이기를 거부하라고 외쳐댄 그가 여성에게만은 노예로 머물 것을 강요한 것일까?.. 혹시 니체가 여성을 잘못 이해한 게 아니라 우리가 니체의 '여성'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193-4쪽) 

이후에 검토되는 것은 <차라투스트라>의 초반에 나오는 '늙은 여인들과 젊은 여인들에 대하여'란 장이다. 이에 대해서는 나도 지난 여름 모스크바 통신에서 자세하게 다룬바 있다(이 참에 다시 읽어봤는데, 읽어볼 만하다). 복습을 겸하여 다시 좀 따라가보기로 한다. 내가 그때 참조한 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니체전집13권, 책세상, 2003 개정1판)이다. 거기에서 “늙은 여인들과 젊은 여인들에 대하여”(109-112쪽)를 ‘그냥’ 옮겨놓고 읽어보는 방식이었다(여성에 대한 니체의 편견을 보여준다는 ‘악명 높은’ 장이기도 하다). 약간 발췌하겠다. 

-“차라투스트라여, 어찌하여 그대는 누가 볼세라 그토록 조심스레 어스름 속을 걷고 있는가? 그리고 외투 속에 무엇을 그리도 정성스레 감추고 있는가? 누군가가 그대에게 선물한 보물이라도 되는가? 아니면 그대에게서 태어난 아이라도 되는가? 그대, 사악한 자의 벗이여, 그것도 아니라면 도둑의 길에 들어서기라도 했는가?” 차라투스트라는 말했다: “진실을 말하거니와, 형제여! 그것은 내게 선물로 주어진 보물이다. 내가 지금 갖고 다니는 것, 그것은 작은 진리이다. 그런데 이 진리는 어린아이처럼 버릇이 없다. 그 입을 막지 않으면 너무 요란하게 소리를 질러대니 말이다.”(그러니까 이 장의 이야기는 차라투스트라가 조심스레 잘 싸고 감추고 있는 물건, 즉 ‘작은 진리’가 무엇이며, 그가 어떻게 선물 받았는지를 설명해주는 내용이다.)

-오늘 해질녘, 혼자서 길을 가고 있을 때였다. 어떤 늙은 여인이 다가와서는 내 영혼에다 대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우리 여인들에게도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면서도 정작 여인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늙은 여인에게 대답했다. “여인에 대해서라면 사내들에게나 이야기할 일이다.” “내게도 좀 이야기해달라. 너무 늙어 듣자마자 잊고 말 터이니.” 그 여인의 말이었다. 나는 그의 청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리하여 이렇게 말했다.

-“여인은 어느 모로 보나 수수께끼이다. 그리고 여인에게 있어서 모든 것이 하나의 해결책을 갖고 있으니, 임신이 바로 그것이다. 여인에게 사내는 일종의 수단일 뿐이다. 목적은 언제나 어린아이다. 그렇다면 사내에게 여인은 무엇인가? 진정한 사내는 두 가지를 원한다. 모험과 놀이가 그것이다. 그래서 사내는 위험스럽기 짝이 없는 놀잇감으로 여인을 원하는 것이다. 사내는 전투를 위해, 여인은 전사에게 위안이 될 수 있도록 양육되어야 한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그러니까 "여자의 해결책은 임신이다"라는 장제목은 여기에서 얻은 것이다. 이하는 나의 주석이다.)  

니체는 다윈의 진화론에 대해서 신랄한 비판을 일삼았지만, 그의 사고는 상당히 생물학적이고 진화론적이다(그는 ‘위버멘쉬’로의 ‘당위적’ 진화를 제창한다). 지극히 당연한 얘기지만, 생물체로서의 여성(=암컷)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임신’이며(누구의 아이를? 얼마나?), 그것이 여성의 거의 모든 수수께끼를 해결해준다(그녀의 히스테리, 그녀의 자존심, 그녀의 어리석음, 그녀의 아줌마다움, 그녀의 행복 등등). 그런 여성에게서 사내(=남자)들이란 일종의 수단에 불과하다. 즉, 정자의 제공자이면서 성실한 부양자(모든 여성이 바라는 ‘사내’란 밖에서는 ‘능력 있고’ 안에서는 ‘자상한’ 사내이다). 만약에 어떤 여성이 ‘임신’에 관심이 없었더라면(여성은 ‘임신 기계’가 아니다!), 비록 임신과 어린아이들이란 굴레로부터는 자유로웠겠지만, (지극히 당연하게도) 우리의 조상(=이브들)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더불어 그 ‘수수께끼’로부터도 소외되었을 것이다.

그럼 남자(=사내)에게 여자란 무엇인가? 니체가, 아니 차라투스트라가 주장하는바, 남자가 원하는 건 모험(=위험)과 놀이(=게임)이다. 그런데, 여자야말로 그 둘의 결합체라는 것. 즉 위험한 놀잇감! 그때의 위험(=모험)이란 건, 다르게 말하면, ‘책임’이다. 남자에게 여자는 놀잇감이고 장난감이지만, 즉 유희에 대상이지만 까딱하면 다 뒤집어써야 하는 것. 왜 있지 않은가? 하룻밤 불장난의 대가라는! 진화생물학에서는 상식적으로 하는 얘기지만, 남녀간의 성적 계약에 있어서, 쌍방의 초기 조건이 동일하지 않다. 두 사람이 관계를 갖고 아이(=2세)를 얻을 경우 쌍방이 얻을 수 있는 유전적 이익은 똑같이 1/2이지만, 초기 투자 지분에 있어서는 엄청난 차이가 난다. 단도직입적으로, 난자와 정자의 상대적 크기를 비교해 보면 된다.

 

 

 


흔히 정자경쟁에서(혹은 ‘정자전쟁’에서) 3억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수정에 성공했다는 얘기를 하지만, 다르게 말하면, 난자는 산술적으로 말해서 최소한 정자의 3억 배 이상에 해당하는 가치를 갖는 것이며, 이걸 경제학 버전으로 바꿔서 말하면, 여자는 남자보다 초기에 3억 배 이상의 투자를 한다는 것이 된다(정자는 수정시 세포핵만 제공하며 모든 영양분(=세포질)은 모두 난자로부터 공급된다). 게다가 아이가 태어나도 수유/양육 기간으로 최소한 2-3년은 아이에게 매달려 있어야 한다(그러니 섣부른 임신은 여자의 인생을 때로 망치기에 충분하다).



 

 

 

경제학에서의 ‘숏다리 법칙’에 따르면 언제나 짧은 쪽이 유리하다('숏다리 법칙'은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에서 얻어온 것이다). 즉 사업에서는 같은 이익을 얻을 경우 적게 투자한 쪽이 유리하다. 때문에, 관계(=수정)를 갖기 이전에는 투자자(=여성)에게 별이라도 따다 줄 것 같던 남자도, 그 이후에는 간혹 배째라는 식으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배우자 선택에 있어서 여성이 보다 신중한 건 당연한 일이다. 여성의 성전략은 자신의 난자를 선뜻 내주기 전에 자신의 초기 투자 지분을 상쇄할 만한, 최대한의 정서적, 경제적 투자를 이끌어내는 것이다(달랑 정자만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럼으로써, 이 남자가 다른 데 또 한눈을 파느라 정서적, 경제적으로 부담을 무릅쓰느니 그냥 한 우물이나 파자고 눌러앉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즉, 사소한 일이다. 해서, 니체는 너무도 생물학적이다! 계속 읽어보자.

-“너무나도 달콤한 열매를 전사는 좋아하지 않는다. 바로 그 때문에 전사는 여인을 좋아하는 것이다. 아무리 달콤한 여인이라 할지라도 쓴맛을 내기 때문이다. 사내보다는 여인이 어린아이를 더 잘 이해한다. 그러나 사내와 여인 가운데 더 어린아이다운 것은 남자다. 진정한 사내 내면에는 어린아이가 숨어 있다. 그 아이는 놀이를 하고 싶어한다. 그러니 여인들이여, 사내 안에 숨어 있는 어린아이를 찾아내도록 하라! 여인은,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그런 세계의 여러 덕의 빛을 받아 반짝이는 보석처럼 순수하고 섬세한 놀잇감이 되어야 한다.”(그러니까 남자는 어린아이이고, 여자는 그 놀잇감이다.)

-“별의 광채가 너희들의 사랑 속에서 빛나기를! ‘나 위버멘쉬를 낳고 싶다!’ 이것이 너희들의 희망이 되도록 하라. 너희들의 사랑 속에 용기가 깃들여 있기를! 너희들은 사랑으로 무장, 너희들에게 공포심을 불어넣고 있는 자에게 덤벼들어야 한다. 너희들의 사랑에 너희들의 명예가 깃들어 있기를! 그렇지 않을 경우 여인은 명예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언제나 받는 사랑보다 더 많은 사랑을 할 일이며, 사랑을 하는 일에서 결코 둘째가 되지 말 일이다. 이것이 너희들의 명예가 되도록 하라.”(*아이를 낳되, 니체가 요구하는 바는 위버멘쉬, 즉 초인을 낳는 것이다.)

-“사내여, 여인이 사랑할 때 여인을 두려워하라. 사랑하는 여인은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기 때문이며, 그 밖의 모든 것들은 그에게 무가치하기 때문이다. 사내여, 여인이 미워할 때 여인을 두려워하라. 사내는 그 영혼의 바탕에서 사악할(bose) 뿐이지만 여인은 바로 그 바탕에서 열악하기(schlecht) 때문이다. 여인은 누구를 가장 미워하는가? 쇠붙이가 자석에게 이렇게 말한 일이 있다. ‘나 너를 더없이 미워한다. 너는 잡아당기긴 하면서도 이미 잡은 것을 놓지 않을 만큼 강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사내의 행복은 ‘나는 원한다’는 데 있다. 여인의 행복은 ‘그는 원한다’는 데 있다.”

 

 

 



남성은 사악하지만, 여성은 열악하다고 하는데, ‘열악하다’란 말은 보통 매우 빈궁한 처지를 일컫는 말이다(‘열악한 환경’에서 어쩌구저쩌구). 여기서 ‘사악한’과 대비되는 용어로는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여성은 바탕이 열악하니까 두려워해라?(그럴 경우, 보통은 안쓰러워 해야 정상이다.) 문맥상으로는 ‘사악한’보다 더 나쁜 말이 와야 하는데, 나는 ‘악질적’이나 ‘멍청한’ 중 어느 말이 거기에 더 합당한지 잘 모르겠다(*다른 번역서들을 보니까 '저열한'이라고 옮겨져 있다. 그게 타당하다). “사내의 행복은 ‘나는 원한다’는 데 있다. 여인의 행복은 ‘그는 원한다’는 데 있다.”에서는 주격 조사가 ‘는’에서 ‘가’로 바뀌어야 할 것 같다(*찾아보니까 그렇게 옮겨진 번역서들도 있다). 해서, “사내의 행복은 ‘내가 원한다’는 데 있다. 여인의 행복은 ‘그가 원한다’는 데 있다.” 이건 세상의 속설과도 일치하면서, 정신분석학적으로도 음미해볼 만한 문구이다. 말하자면 남성과 여성의 비대칭성에 대한 주장인 것이다. 그리고 이 비대칭성에 대한 최적의 문헌들은 <성관계는 없다>(도서출판b, 2005)에 실려 있다.

-“‘보라, 방금 세계는 완성되었다!’ 온 마음으로 사랑하여 순종할 때 여인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여인은 순종해야 하며, 그 자신의 표면에 대해 어떤 깊이를 찾아내야 한다. 표면은 여인이 정서, 일종의 얕은 물위에서 요동치는 격한 살갗이다. 이와 달리 사내의 심정은 깊다. 그리하여 그의 강물은 지하의 동굴 속으로 좔좔 소리를 내며 흘러간다. 여인이 이러한 사내의 힘을 짐작은 하겠지만 이해는 못한다.”(러시아어에서는 ‘정서’와 ‘심정’을 모두 ‘영혼’ 혹은 ‘넋’이라고 옮기고 있다. 이 경우 마지막 문장의 ‘사내의 힘’은 ‘그 영혼의 힘’이 된다. 어쨌든 여자의 정서, 혹은 영혼이 표면적이라는 말은 맞는 것 같다! 사소한 일들에도 어찌나 요동을 치는 것인지! 참고로, 다른 번역서들은 '마음'이라고 옮기며 나는 그게 더 마음에 든다.)

-이에 그 늙은 여인이 내게 대답했다. “좋은 말이다. 누구보다도 그런 말들을 받아들이기에 부족함이 없는 젊은 여인들을 위해서는. 기이한 노릇이다. 여인들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는 것이 차라투스트라인데도 그의 이야기는 옳으니! 그것은, 여인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 아닌가? 자, 감사의 표시로 이 작은 진리를 받아라! 그 진리를 터득하고 있을 만큼은 나 늙어 있으니! 그것을 천으로 감싸라. 그리고 그 입을 막아라. 그렇지 않으면 이 작은 진리는 너무도 크게 소리치게 될 것이다.”(*이 대목엔 사소한 오역이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여인들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는 것”이 아니라, “아는 여자가 별로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산에서 내려온 지 얼마 안 됐으니. 대신에 그는 여인들에 대해서 아는 것이 많다. 늙은 여인이 인정하는 바대로.)

내가 재미있게 생각하는 건 그 다음이다. 차라투스트라의 이야기가 옳은 것은 “여인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 아닌가?”라는 반문이다(러시아어본의 주석에는 이 말이 누가복음 1장 37절을 패러프레이즈한 것이라고 돼 있다). 늙은 여인의 이 말은, 내가 읽기에는, 여인들에 대한 차라투스트라의 모든 말을 ‘심연처럼’ 집어삼키고 있다. 여인들에겐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규정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들에 대해서 무슨 말을 다 해도(=무어라고 규정하든 간에) 맞는 말이 된다는 얘기. 그렇다면, 차라투스트라는 여성이라는 ‘바다’에서 고작 헤엄치고 있었던 게 된다. 즉 그는 여인들에 대해서 많은 걸 알고 있지만, 그것이 결코 ‘전부는 아닌’ 것이다. 이제 마지막 문장.

-“여인이여, 내게 그 작은 진리를 다오!” 나는 말했다. 그러자 그 늙은 여인이 말했다. “여인들에게 가려는가? 그러면 채찍을 잊지 말라!”

이 채찍에서 다시 고병권의 <니체의 위험한 책>으로 돌아간다. "채찍 이야기나 나왔으니 말인데, 니체와 여성, 채찍이 함께 등장하는 사진이 하나 있다. 서로 미묘한 감정을 지녔던 니체, 살로메, 레 세 사람이 찍은 것인데, 니체와 레는 마차 앞에 말처럼 서 있고, 살로메는 채찍을 들고 마부 자리에 앉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아마도 니체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연출한 것일 텐데, 어떻든 채찍을 든 건 여성인 살로메고, 니체는 채찍을 맞을 말처럼 서 있다. 이건 또 뭔가? 그는 여성에게 휘둘러 달라고 채찍을 가져간 건가?"(195쪽)

이 물음에 대한 나의 견해는 지난 여름에 제시한 것과 같다. “여인들에게 가려는가? 그러면 채찍을 잊지 말라!”는 늙은 여인의 말을 다시 음미해본다면, 먼저 흥미로운 건, 이게 차라투스트라(혹은 니체)의 말이 아니라, ‘늙은 여인’의 말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진리’가 아니라 ‘작은 진리’라는 것이다. ‘작은 진리’라는 건 달리 말하면, 아직 (어린아이처럼) 미성숙한 진리이고, 부분적인 진리이며, ‘전부는 아닌’ 진리이다. 다시 이 단장의 처음으로 돌아가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진실을 말하거니와, 형제여! 그것은 내게 선물로 주어진 보물이다. 내가 지금 갖고 다니는 것, 그것은 작은 진리이다. 그런데 이 진리는 어린아이처럼 버릇이 없다. 그 입을 막지 않으면 너무 요란하게 소리를 질러대니 말이다.” 이때 그가 말하고 있는 ‘작은 진리’가 “여인들에게 갈 때는 채찍을 잊지 말라!”는 진리이다. 이 진리가 하도 요란하게 떠들어대기(혹은 빽빽거리기) 때문에 그는 이 진리의 입을 틀어막고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5) 바로 이후에 발표한 <선악의 저편>(1886) 서문에서 니체는 “진리가 여성이라면, 어쩔 텐가?”(책세상 번역은 “진리가 여성이라고 가정한다면, 어떠한가?”)라는 도발적인 물음으로 시작하고 있다(독어로는 모르겠지만, 진리란 뜻의 러시아어 ‘이스찌나’의 문법적 성은 여성이다). 그러면서 철학의 모든 (남성적) 독단론은 “여전히 고상한 어린아이 장난이거나 신출내기의 미숙함에 불과하다고 단언할 이유는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남성이 갖고 있는 (독단적) 진리는 어린아이의 진리이며, ‘작은 진리’이다. 그것은 고작 “여인들에게 갈 때는 채찍을 잊지 말라!”는 충고(그것도 자신이 발견한 진리가 아니라, 늙은 여인이 일러준 진리이다. 즉 그것은 늙은 여인에게 부탁해서 합법적으로 ‘도둑질한’ 진리이다)를 마치 ‘보물’처럼 모시고 다니는 자의 진리이다. 그 작은 진리(=어린아이)는 대문자 진리(=여성) 앞에서 안절부절이며 속수무책이다.

니체가 “진리란 무엇인가?”를 물을 때, 그 물음은 동시에 “여성이란 무엇인가?”란 물음이며, 그것은 “여성은 무엇을 원하는가?”란 프로이트의 물음과 정확히 겹친다. 니체의 연보에 따르면, 아버지의 이른 사망(목사였던 그의 아버지 칼 루드비히 니체는 맏아들 프리드리히가 다섯 살 되던 해인 1849년에 사망한다)에 따라 여자들로만 둘러싸인 가정에서 양육된다. “아버지의 부재와 여성들로 이루어진 가정, 이 가정에서의 할머니의 위압적인 중심 역할과 어머니의 불안정한 위치 및 이들의 갈등 관계, 자신의 불안정한 위치의 심적 대체물로 나타난 니체 남매에 대한 어머니의 지나친 보호 본능 등으로 인해 그는 불안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며 이런 환경에서 아버지와 가부장적 권위, 남성상에 대한 동경을 품게 된다.”(560쪽) 그런 니체에게서 압도적인 자기규정은 ‘어린아이’이며, 그가 하는 모든 말은 ‘어린 진리’ 즉 ‘작은 진리’이다. “우리 프리드리히가 이런 말을 다 하네!”

그런 의미에서, 여성 철학자 뤼스 이리가레가 <프리드리히 니체, 바다의 연인>에서 니체에게 던지는 충고는 좀 잔인하다. “당신은 생산력이 하늘에서만 내려올 줄 알고 계속 위로만 올라간다. 정상인이여! 이것이야말로 주변 경관에 전혀 무관심한, 놀라울 정도로 순진한 모습이 아닌가!”(신경원, <니체, 데리다, 이리가레의 여성>, 162-3쪽, <텍스트>(2004, 4월호), 43쪽에서 재인용) 산의 정산에서 심연(=바다)을 들여다보는 차라투스트라, 혹은 니체는 이제껏 여자들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다가 가까스로 육지에 발을 딛고서 산으로 올라간 것이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그의 나이 서른이 되던 해에 고향과 고향의 호수를 떠나 산속으로 들어갔다.”(12쪽) 그러니 주변 경관(=바다)에 대한 그의 무관심은 적극적인 관심의 결과이며, 필사적인 관심의 결과이다. 그런 그에게, 너는 ‘바다’를 잊고 있으니 다시 내려오라고?!

하지만, 니체가 정말로 바다를 잊은 건 아니었다. 아니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그의 삶에 각인돼 있는 것인데! 때문에, “심연으로 한없이 내려가길 두려워한, 여성의 육체를 심연에 매장해 둔 채 산의 정상으로만 오르려 한 우리의 초인은 조금 외롭지 않을까.”(<텍스트>, 43쪽)란 추정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산으로 올라간 자의 책이 아니라, 산에서 내려온 자의 책이기 때문이다. 즉 ‘몰락’을 자청한 자의 책이며, 다시 어린아이가 된 자의 책이다(“차라투스트라가 변하여 어린아이가 되었구나.”).

인간이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으로 정의하면서 그가 내세우는 것이 초인, 즉 위버멘쉬인바, 그는 무어라고 덧붙이는가? “보라, 나 너희들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노라. 이 위버멘쉬가 바로 너희들의 크나큰 경멸이 그 속에 가라앉아 몰락할 수 있는 그런 바다다.”(19쪽) 어떤 경멸인가? 행복에 대한, 이성에 대한, 덕에 대한 정의에 대한, 그리고 연민에 대한 경멸이다. 그 모든 크나큰 경멸이 가라앉아 몰락할 수 있는 그런 바다가 바로 위버멘쉬라는 것. 그리고 바다란, 여성이고 생명(의 고향)이지 않은가? 생명의 연쇄이지 않은가?..

 

 

 

 

"늙은 여인들과 젊은 여인들에 대하여"와 함께 '니체와 여성'의 기본 문헌은 <즐거운 학문>(<즐거운 지식>)의 제2판 서문이다. 고병권의 인용을 재인용하면 이렇다: "어쩌면 진리란 그녀의 이유를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는 것에 대해 이유를 가지고 있는 여자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녀의 이름은 그리스어로 말하자면 바우보(Baubo)가 아닐까? 아, 그리스인들! 그들은 정말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생각이 깊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피상적이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되돌아 보아야 할 점이 아닌가?"(199쪽)

이에 대한 해설을 따라가본다: "여성들은 표면이 심층을 가리고 있는 게 아니라, 심층에 대한 열망이 표면의 다양성을 가리고 있음을 이해한다. 여성들은 표면에 얼마나 다양한 진리들이 반짝이고 있는지 이해한다. 아마도 여성들이 화장을 잘하는 것은 무엇보다 표면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표면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남성들만이 '화장발에 속았다'고 분개한다. 남성들은 무언가를 벗겨야 진실이 나온다고 생각하는데, 여성들은 그런 남성들의 기이한 욕망을 다스릴 줄 안다. 여성들은 저 깊은 심층까지도 껍질로 위장한 양파처럼 되는 것이다."(롤랑 바르트-라캉의 정의를 비틀면, 남성은 문체(style)를 갖고 있고, 여성은 문체 자체이다.)

 

 

 

 

그리고 바우보. "원래 바우보는 음란한 여신으로 여성의 생식기를 신격화한 것이다(*즉 버자이너이다). 어떤 학자들은 여성 생식기에서 어떤 규정으로도 좁힐 수 없는 '거리'의 개념을 발견한다. 그들에 따르면 여성은 자궁과 같다. 그것은 모든 것들을 발생시키는 비어 있는 공간이고, 일종의 거리이다. 여성은 거리를 두고 존재하는, 즉 공간 속에 있는 대상이 아니라, 그 거리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여성은 어떤 고유의 본질을 갖고 실존하지 않는다. 철학자들이 찾는 진리가 없듯이 고유한 여성성도 없는 것이다."(200-1쪽) 정신분석학에서의 명제를 반복하자면, "여성은 없다!(There's no such a thing like Woman!)"

계속. "하지만 바우보는 달리 이해될 필요가 있다. 자궁에서 강조될 것은 결핍이나 공허가 아니라 생산이나 창조이다. 자궁은 결핍의 공간이 아니라 넘침의 공간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자궁이 임신기관이기 때문이다. 여성에게 하나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게 불가능한 이유는 영원히 채울 수 없는 빈틈 때문이 아니라, 아무리 막아도 태어나는 새로운 아기들 때문이다. 임신한 여성에게는 하나의 정체성이 부여될 수 없다. 진리가 바우보인 이유도 그것이 임신한 여성이기 때문이다."(201쪽, 강조는 나의 것)

여기서 저자는 니체에게서 '임신한 여성'의 중요성과 임신 테마의 중요성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차라투스트라에게도 임신은 중요한 테마이다... 인간은 위버멘쉬를 낳을 수 있는가? 아마도 이 물음들은 이렇게 변형될 수도 있을 것이다. 너에겐 여성이 있는가? 너는 자궁을 갖고 있는가?(*요즘 어법에 따르면, "너는 난자를 갖고 있는가?") 너는 여성-되기를 할 수 있는가?" 정리하자면, 두 가지가 핵심이다. 차라투스트라-니체는 (1)임신과 관련해서 여성을 이해한다는 것과, (2)여성성은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문제가 된다는 것. 니체는 한 메모에서 이렇게 적은 적이 있다고: "무엇이 내 삶을 유지시키는가? 그것은 임신이었다."(202쪽)



 

 

 

여기서 음미해볼 대목은 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바로 ‘몰락하는 자’로서의 인간에 대한 규정. 책세상판의 번역을 여기에 옮기면, “사람은 짐승과 위버멘쉬 사이를 잇는 밧줄, 심연 위에 걸쳐 있는 하나의 밧줄이다. 저편으로 건너가는 것은 위험하고 건너가는 과정, 뒤돌아보는 것, 벌벌 떨고 있는 것도 위험하며 멈춰 서 있는 것도 위험하다. 사람에게 위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교량이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사랑받아 마땅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의 과정이요 몰락이라는 것이다. 나는 사랑하노라. 몰락하는 자로서가 아니라면 달리 살 줄을 모르는 사람들을. 그런 자들이야말로 저기 저편으로 건너가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21쪽)

우리들(=사람들)은 과거의 인간(=짐승)와 미래에 도래할 인간(=위버멘쉬) 사이를 연결하는 밧줄이고 교량이다. 우리의 존재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우리는 과정일 뿐이고 몰락일 뿐이며, 몰락하는 자로서가 아니면 달리 살 줄을 모르는 자들이다. 처음에 지적한 바대로, 이것은 지극히 생물학적이고 진화론적인 존재 규정이다. 보다 확증적인 건 “아이와 혼인에 대하여”(116-9쪽)에서 읽을 수 있다(결혼과 출산을 앞둔 이들이라면 반드시 음미해 보아야 할 단장이다!).

-형제여, 여기 너만을 위한 물음 하나가 있다. 다림추를 내리듯 나 네 영혼 속에 그 물음을 내려본다. 네 영혼이 얼마나 깊은가를 알아내기 위해다. 너는 젊다. 그리하여 아이를 원하고 혼인을 원한다. 그러나 묻노니, 너는 한 아이를 원할 자격이 있는 그런 자인가? 너는 무적의 강자, 자신을 제압한 자, 관능의 지배자, 네 자신의 덕의 주인인가? 그것은 나 네가 묻노라. 그것이 아니라면 네 안에 짐승이 있고 절박한 욕구라는 것이 있어 그 같은 소망을 갖도록 하는 것인가? 아니면 외로움 때문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네 자신과의 불화 때문인가?(*너는 한 아이를 원할 자격이 있는 그런 자인가!?)

-나, 네가 거두어들인 승리와 네가 쟁취한 자유가 아이를 갈망하기를 바라노라. 너는 너의 승리와 해방을 기리기 위해 살아있는 기념비를 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너는 지금의 너를 뛰어넘어 저 위에 네 자신을 세워야 한다. 그럴려면 너의 신체와 영혼이 먼저 반듯하게 세워져 있어야 할 것이다. 앞을 향해서뿐만 아니라 위를 향해서도 생식을 해야 한다! 이를 위해 혼인이라는 동산이 너를 돕기를 바란다! 너는 더욱 고상한 신체를 창조해내야 한다. 최초의 운동, 제 힘으로 돌아가는 바퀴를 창조해야 한다. 창조할 자를 창조해야 한다는 말이다.(*네가 승리한 자라면, 너의 아이는 너의 승리를 기리는 ‘살아있는 기념비’가 될 것이다. 그러니, 삶에 복수하기 위해서 아이를 낳으면 안된다! 역설적이지만, 생물학에서는 거꾸로 규정된다. 아이를 낳은 자가 승리한 자, 즉 성공한 자이다. 성공한 자가 아이를 낳는 것이 아니라.)

-혼인. 그것을 나는 당사자들보다 더 뛰어난 사람 하나를 산출하기 위해 짝을 이루려는 두 사람의 의지라고 부른다(*이것이 결혼에 대한 니체의 정의이다). 이와 같은 의지를 갖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것으로서 서로를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 그것을 나는 혼인이라고 부른다(*그러니까 혼인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의 의지, 혹은 정념과 서로에 대한 존경이다. 나는 그걸 ‘사랑과 존경’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은 것이 네가 하는 혼인의 의미가 되고 진실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면 많은 너무나도-많은-자들(=어중이떠중이들), 존재할 가치가 없는 자들이 혼인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 아, 그것을 나는 어떻게 부를까?

-아, 짝을 이루고 싶어하는 영혼의 저 구차함이여! 아, 짝을 이루고 싶어하는 영혼의 저 더러움이여! 아, 짝을 이루고 싶어하는 영혼의 저 가엾은 자기만족이여! 이런 것 모두를 저들은 혼인이라고 부른다. 그러고는 말한다. 저들의 혼인은 하늘이 맺어준 것이라고. 좋다, 나는 존재할 가치가 없는 자들이 떠벌리고 있는 그 하늘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같은 천상의 그물에 걸려든 짐승들도 좋아하지 않고! 자기가 맺어준 것이 아닌데도 축복을 하겠다고 절름거리며 다가오는 신 또한 먼 곳에 물러나 있기를 바란다! 그렇다고 이러한 혼인을 비웃지는 말라! 어버이로 인하여 통곡할 까닭을 갖고 있지 않은 아이가 어디 있겠는가?(*아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을 것인가!)

-여기 이 사내, 품위 있어 보였고 또 대지의 뜻을 헤아릴 수 있을 만큼 성숙해 보였다. 그러나 그의 아내를 보자, 이 대지는 정신병원처럼 보이지 않던가. 그렇다. 성자와 거위의 결합, 나는 그때 이 대지가 경련을 일으켜 부르르 떨기를 바랬다. 그 성자는 원래 영웅과도 같이 당당하게 진리를 찾아 나섰었다. 그러나 결국은 화려하게 치장한 작은 거짓 하나를 노획하는 데 그쳤다. 그리고는 그것을 자신의 혼인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원래 사람들과의 교제에서 신중했으며 선택에서도 까다로웠다. 그런 그가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자신의 교제를 망쳐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고는 그것을 자신의 혼인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화장한 거위들을 주의해야 한다!)

-그는 원래 천사의 덕을 갖춘, 그런 계집종을 찾고 있었다(*간단히 말해서, ‘천사 같은 하녀’가 모든 남자의 이상형이다). 그러던 그가 졸지에 여자의 종이 되고 만 것이다(*“예, 부르셨습니까요, 마님!”). 이제 그는 그것을 넘어서 천사가 되어야 한다(*이건 좀 이상한 번역이다. 내용은 “이제는 그가 천사가 되어야 한다.”이다. ‘천사 같은 머슴’으로서의 남편!). 물건을 사는 사람들은 신중하기 마련이다. 그런 자들은 하나같이 교활한 눈을 갖고 있다. 그러나 더없이 교활한 자조차도 아내를 사들일 때는 자루를 열어보지도 않는다. 그 흔한 한때의 어리석음. 그것을 너희들은 연애라고 부른다. 그리고, 너희들은 혼인이라는 하나의 ‘긴 어리석음’으로써 그 흔한 한때의 어리석음에 종지부를 찍는다.(*제일 좋은 건 자루를 열어보고도 사지 않는 것이다.)

-여인을 향한 너희들의 사랑, 그리고 사내를 향한 여인의 사랑. 아, 이것이 고뇌하는, 감추어진 신들에 대한 연민이라면! 그러나 대개의 경우 두 마리의 짐승이 서로를 알아볼 뿐이다.(*‘신들의 교제’라면 좋겠지만, 혼인은 대개 ‘두 마리 짐승의 교미’로 마무리된다.) 너희들이 말하는 최상의 사랑이란 것도 하나의 황홀한 비유일 뿐이며 고뇌에 찬 열화일 뿐이다(러시아어 번역은 ‘병적인 격정’). 그것은 너희에게 좀더 높은 길을 비추어주도록 되어 있는 횃불이다(러시아어 번역은 “사랑이란 (그런 게 아니라) 횃불이어야 한다”는 식이다). 언젠가는 너희들 자신을 뛰어넘어 너희들 이상의 것을 사랑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먼저 어떻게 사랑을 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배우도록 하라! 그러기 위해 너희들은 사랑의 쓴잔을 마셔야 했던 것이다.(*언제나 쓴잔만 마시는 사람은 뭔가?)

-더없이 감미로운 사랑의 잔 속에도 쓴맛은 있다. 그리하여 그런 사랑은 위버멘쉬를 동경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너 창조하는 자를 목타게 하는 것이다. 창조하는 자의 목마름, 위버멘쉬를 향한 화살과 동경. 말하라. 형제여. 이것이 바로 너로 하여금 혼인하도록 만드는 의지인가? 나 이와 같은 의지와 혼인을 신성시하노라.(*즉 혼인에의 의지는 위버멘쉬에 대한 동경이다. 우리는 우리보다 더 나은 인간을 창조하기 위한 과정이고, 수단이다.)

다시 반복하자면, “진리가 여성이라면, 어쩔 텐가?”라고 니체는 물었다. 나는 그때의 진리가 다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여성의 수수께끼로서의 임신과 출산이다. “창조의 근원적인 힘의 원형이며 그것 자체인 여성의 출산을 대치하기 위해 고심한 끝에 위버멘쉬가 탄생했다”(<텍스트>, 43쪽)고 이리가레는 주장하는 모양인데, 내가 보기엔, 위버멘쉬는 출산에 대립하거나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이리가레와 데리다의 니체론을 아직 본격적으로 읽지 않았지만), 그것에의 전면적인 투항이다(니체 철학은 ‘아줌마 철학’이라고까지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그의 철학은 또 얼마나 유미적인가! 덧붙여 말하자면, 윤리학에서의 ‘아줌마 철학자’에 레비나스가 있다. 그에게서 궁극적인 타자의 모델 또한 ‘신생아’이다).

“여인들에게 가려는가? 그러면 채찍을 잊지 말라!”로 큰소리친 걸로 돼 있는 니체이지만(그마저도 늙은 여인이 일러준 말이었다!), 오히려 길들여진 건 여인들이 아니라 니체이다(그는 채찍을 들고 가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저를 길들여 주세요!”). 해서, 내 생각에 그가 말하는 위버멘쉬란 오직 남자들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즉, “남자들이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Superman이나 Overman도 다 마찬가지이다. 삶이 다른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라는 동경과 모험 속에서 아직도 장난치면서 놀이하는 어린아이-남자들이 극복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Superwoman이나 Overwoman은 불필요한바, 이미 그들은 ‘거기에’ 도달해 있기 때문이다. 즉 Wo-man으로 충분하다. 그러니까 Man과 Woman이 있는 게 아니라, Woman과 Woo-man(졸라대는 남자, 궁시렁대는 남자, 우둔한 남자)이 있을 뿐이다. 여자들의 목적은 이미 언제나 어린아이였기 때문. 그 핏덩이, 혹은 살덩이!


 

 

 

서양철학의 전통은 그 피와 살로부터의 고상한 거리두기였다(소크라테스는 “삶은 질병”이라고 말했다). 삶에 대한 부정과 이데아에 대한 동경(이건 무성(無性)의 철학이자 동성애 철학이다)은 언제나 어린아이에 대한 억압, 어린아이로부터의 도피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니체는 이걸 거꾸로 세운다. 진리란 여성이고, 바다이고, 위버멘쉬의 창조라는 것. 그 위버멘쉬를 낳을 때까지 우리의 삶의 과정은, 몰락의 과정은 영원히 지속되고 반복될 것이다. 하여, 카뮈를 패러디해서 말하자면, “참으로 진지한 생-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임신(=출산)이다. (이 남자의) 아이를 (또) 낳을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생의 근본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그밖에 다른 것들은 다 애들 장난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바, '바다의 연인'이자 아줌마 철학자 니체의 메시지이다.

고병권의 결론은 조금 다르다. "차라투스트라에서 여성성은 영원회귀와 같다. 그러나 '여성성'이라는 말조차 그리 적합해 보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차라투스트라의 여인은 생물학적 여성도 아니고, 특정한 어떤 정체성을 가진 존재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에게 여성은 영원한 생성을 의미할 뿐이다. 남성에게도 여성에게도 '여성이 되는 것', '여성을 갖는 것'은 중요하다. 가장 나쁜 것은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불임증'에 걸린 인간이다."(208쪽, 강조는 나의 것)

 

"진리는 여성(바우보)이다"와 "진리가 바우보인 이유도 그것이 임신한 여성이기 때문이다"에서 얻을 수 있는 논리적 귀결은 "진리는 임신한 여성이다"이다(이것이 늙은 여인들과 젊은 여인들을 구분해줄 수 있는 준거이다). 나는 이러한 구체적/직설적 메시지와 "여성은 영원한 생성을 의미할 뿐이다"라는 다소간 추상적/비유적 메시지 사이에는 얼마간의 간극이 있다고 보며, 이 간극은 우리가 여전히 '니체의 진리'에 밀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내게 더 매력적인/파괴적인 철학자는 '영원한 생성'을 말하는 철학자 니체가 아니라 '진리는 임신한 여성'이라고 말하는 아줌마 니체이다. 이 문제는 '영원회귀'와 관련하여 나중에 한번 다루도록 하겠다...

 

05.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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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5-11-29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로쟈 님 스타일의 티저 광고군요.^>^

로쟈 2005-11-29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시간쯤 쓰던 페이퍼를 한번 날려버린 이후로는 수시로 저장하게 됩니다. 광고효과까지 겸한다면야.^^

2005-11-30 23: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5-12-01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한 논문을 읽으니 당대 진보적인 여성들은 저마다 자신을 '초인'이라고 생각했기에 니체의 '마초적' 발언들에 괘의치 않았다더군요...

아리 2009-06-03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들뢰즈는 자신의 저서들의 영역판에 새로이 서문들을 붙이고 있는데, 이 서문들에서 자신의 핵심적인 주장들을 잘 정리해놓고 있기 때문에 입문자들에게는 더없이 요긴하다. 국내에 출간되고 있는 들뢰즈 번역서들이 영역판에서 중역을 하는 대신에 불어원전을 옮겨오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한편으로 이 영역판 서문들이 소개되지 못하는 것은 아쉽다. 예외적인 경우라면, 영역판 서문을 부록으로 옮겨놓고 있는 <베르그송주의>(문학과지성사, 1996), 그리고 불어판을 옮기고 있는 <니체와 철학>(민음사, 1998/2001)과는 달리 영역판을 옮긴 <니체, 철학의 주사위>(인간사랑, 1993) 등이다.

 


 

 

 

 

 

 

<니체와 철학>(1962) 영역판(1983) 서문은 역자인 '휴 톰린슨(Hugh Tomlinson)에게‘라는 헌사를 달고 있는데, 우리말로 옮겨진 첫문장은 이렇다: “어떤 책이 번역된다는 것은 항상 흥미로운 일이다.”(11쪽) 이에 대한 원문은 “It is always exciting for a French book to be translated into English."이다. 즉, ”어떤 불어 책이 영어로 번역된다는 것은 언제나 흥분되는 일“이라는 것.


우리말 번역대로, 이 흥분은 ’번역 일반‘의 것일 수도 있지만, ’불어에서 영어로‘라는 특정한 번역에 한정된 것일 수도 있다. 들뢰즈가 다른 언어의 번역본들에도 매번 서문을 달았는지 모르겠지만, 그에게서 영어와 영미문학/철학이 갖는 의미가 좀 각별하다는 점을 여기서는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경험론자로서 당대의 이질적인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를 나는 ’영국 철학자‘로 분류하고픈 유혹을 자주 느낀다).  


그에게서 왜 영어와 영국이 문제되는가? “니체가 가장 많이 오해되어 온 것은 아마 영국에서일 것”이기 때문이다. “니체가 프랑스 합리주의와 독일 변증법에 맞서서 투쟁한 주요 주제들은 결코 영국식 사유들에 있어서도 중심적인 것은 아니었다. 영국인들은 이론적으로 사용하기에 별다른 불편함이 없는 경험주의와 실용주의를 소유했었다. 그것은 니체를 통한 우회가 그들에게는 별로 큰 가치가 없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그들의 ‘양식’에 어긋나는 니체의 바로 그와 같은 특별한 경험주의와 실용주의를 통한 우회로를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 국역본에는 생략돼 있지만(Tomlinson suggests), 이러한 지적은 영역자 톰린슨의 견해를 들뢰즈가 수용한 것이다.


즉, 합리주의와 변증법에 감염돼 있지 않은 영국인들에게 ‘니체 철학’이라는 처방(우회로), 혹은 '백신'은 불필요했다는 것이다. 이미 그들은 면역돼 있는 상태였으며, 니체의 ‘망치로 하는 철학’ 대신에 이미 경험주의(empiricism)와 실용주의(pragmatism)라는 영국식 망치를 잘도 쓰고 있었던 것. 해서, 영국에서 니체는 (철학자들에게가 아니라) 소설가들, 시인들, 그리고 극작가들에게나 겨우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철학적으로 수용된 것이 아니라 문학적으로 수용됐다. 


여기서 상기해둘 것은 들뢰즈의 철학이 독특하게도 ‘장소’에 대해 질문하는 ‘지리철학(geophilosophy)’이라는 점이다. 그리스를 기원으로 하는 서구 형이상학과 철학을 동일시한다면, 그의 철학은 반철학(anti-philosophy)이기도 하다. 그는 다른 기원, 다른 계보, 다른 종족의 철학을 기획했었다(작년에 나온 들뢰즈 가이드북 하나는 'Deleuze and Geophilosophy'란 제목을 갖고 있다).

 


 

 

 

 

 

아무튼 니체 철학에 대한 자신의 해설을 영어권 독자들에게 소개하면서 그가 처음에 전제하고자 하는 것은 니체 철학이 영국인들에게 오해될 수 있는 소지가 있으며 그것은 일면 필연적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하에서 그는 비로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는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들 중의 한 사람이다”라고 단언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왜 위대한가? 철학의 이론과 실천 둘 다를 뒤바꿔놓았기 때문이다. “그는 사유자(thinker)를 날고 있는 화살에 비유한다. 그것은 또다른 사유자가 그 이외에 다른 곳에 그것을 쏠 수 있기 위하여 그 떨어진 곳을 찾는 그러한 화살이다. 그에 따른다면, 철학자는 영원하지도 역사적이지도 않으며 ‘반시대적(untimely)’, 언제나 반시대적인 것이다.”(12쪽) 그래서, 이 반시대성은 니체 철학의 표지이다.  

 


 

 

 

 

 

 

그로 인한 당연한 귀결이겠지만, “니체는 (철학사에서) 어떤 선배도 거의 갖고 있지 않다. 그는 단지 오래전의 전-소크라테스학파(Pre-Socratics)와, 그로부터 따로 떨어져 있는 단 한 사람의 선배인 스피노자만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해서 니체 철학의 계보는 단촐하다. 사실 소크라테스에 대한 니체의 비판은 잘 알려진 것이다. 니체가 보기에 소크라테스는 우리의 삶을 ‘질병’으로 간주한 최초의 철학자이다. 그러한 ‘병적인 철학’에 맞서서 니체는 삶과 철학에 건강을 다시 되돌려주려고 한다. 그리고 이 ‘건강’의 문제는 들뢰즈에게서도 핵심적이다. 소크라테스의 금언이 “너 자신을 알라!”라고 하면, 니체-들뢰즈의 금언은 “너 자신이 되라!”이다.

 


 

 

 

 

 

 

그렇다면 누가 불건강한, 병약한 자들인가? 주제를 파악한 자들이다. 그리하여, 삶을 두려워하는, 그래서 삶을 향유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삶을 (긍정하는 대신에) 부정하며 진정한 삶을 내세의 삶으로 유예시킨다. 말하자면, 감히 살려고 하지 않는다. 자의에서건 타의에서건. 가령 체홉의 <벚꽃동산>에서 늙은 하인 피르스의 마지막 대사: “인생이 다 지나갔군. 산 것 같지도 않게!..” 왜 그런가? 자신의 자발적인 의지에 따른 긍정의 삶을 산 것이 아니라 노예로서 타성과 관습에 의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해서 자신의 삶을 어떠한 술어로도 고정/한정시킬 수 없는 고유한 것으로, 유일무이한 것으로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의 표어는 "삶은 다른 곳에 있다!(Life is elsewhere!)"이다.


반면에 건강한 자들이란 주제 파악 못하는 자들이다. 삶에 대한 넘치는 식욕으로 잠못 이루는 자들이다. 자기 자신이 되고 싶어하는 자들이다. 이들의 구호는 "삶은 지금/여기에 있다!(Life is here/now!)"이다. 그들은 언제나 앙콜(Encore!)을 외친다. "좋아, 한번 더!" 하지만, 이러한 긍정은 '이대로!'라고 건배하는 '부유한 노예'의 나르시시즘적 동일시와는 다른 것이다.

 

이 ‘너 자신이 되는 것(To become what one is)’에 대한 주판치치의 창의적인 주해에 따르면, ‘자신이 존재하는 바가 되는’ 순간은 합일의 순간이 아니라 순수한 분열의 순간이다.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아는 순간’은 주체화로 진입하는 순간이자 합일의 순간이고, 니체의 ‘너 자신이 되는 순간’은 주체로 퇴거하는 순간이자 분열의 순간이다('주체화'와 '주체'의 차이는 토이 마이어스의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앨피, 2005) 참조. 한편, 이 ‘분열적 주체’는 막바로 들뢰즈의 ‘안티-오이디푸스’를 떠올리게 하지 않는가?).

 

 

 

 

 

 

 

 

“이 분열의 표현들 중 하나는 퇴락 또는 부정의 원칙과 시초 또는 긍정의 원칙 사이의 구분이다.”(<정오의 그림자>, 43쪽) 그리고 이 분열에 대한 ‘개념적 인물들’이 그리스도(십자가에 못박힌 자)와 디오니소스이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디오니소스란 그 분열 자체를 가리킨다는 것. “디오니소스는 십자가에 못박힌 자 뒤에, 완전히 다른 어떤 것으로서 오는 게 아니다. 디오니소스는 단순히 새로운 다른 가치들의 등가물이 아니다. 디오니소스는 낡은 것의 몰락 이후에 오는 새로운 시대의 시초, 신기원의 아침이 아니다. 디오니소스는 한낮으로서의 시초이며, ‘하나가 둘로 변하는(one turns to two)' 순간이며 다시 말해서 새로운 그 무엇으로서의 바로 그 '둘이 됨(becoming two)' 또는 분열의 순간이다."(43쪽)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에게 위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교량이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사랑받아 마땅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의 과정이요 몰락이라는 것이다. 나는 사랑하노라. 몰락하는 자로서가 아니라면 달리 살 줄을 모르는 사람들을. 그런 자들이야말로 저기 저편으로 건너가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책세상판, 21쪽) 내가 좋아하는 번역본은 아니지만, 당장 옆에 있는 거라서 인용한다(내게 친숙한 것은 최승자 역의 청하판이다. 나는 5종의 국역본을 갖고 있다).

독어의 'Untergang'은 이행과 몰락의 뜻을 동시에 갖는 것으로 안다. 내가 읽은 서론에서 주판치치가 들고 있는 사례는 아니지만, 디오니소스란 따로 하나가 둘이 되면서 이러한 과정(이행)과 몰락을 동시에 수행하는 자, 그러한 순간의 이름이 아닐까도 싶다. 그런 것들은 새로이 니체 전집도 완간된 김에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나는 불어본과 함께 영어본, 러시아어본, 2종의 국역본을 갖고 있다)과 주판치치의 <정오의 그림자>를 마저 읽어나가면서 확인해볼 작정이다. 

얘기가 길어졌는데, 어쨌든 여기까지가 영역본 <니체와 철학>에 들뢰즈가 붙인 서문의 첫 페이지 '브리핑'이다. 원문보다 길어지는 것도 브리핑에 속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점점 쌓여가는 머리속의 글들을 처치(!)하기 위해서 이 글의 초안은 어제 자정 넘어 (아주 드문 일이지만) 집에서 작성한 것이다. 하지만, 몇 시간 걸려 한 페이지를 소화하는 걸 보면, 위대하기는커녕 내 위장이 얼마나 작은지 알겠다(떠들어대는 것들을 조지기 위해서는 깍두기들이라도 동원해야 할 모양이다). 언제쯤이나 주제 파악을 하게 될는지!..

05. 11. 23.

P.S. 그러니까 들뢰즈의 이 서문의 '본론'에 대한 브리핑은 또 미뤄지는 셈이 됐다(덕분에 애초의 제목과는 달리 니체는 아무말도 하지 않은 게 돼버렸다!) 그런 식으로 미뤄지는 만큼 수명도 연장되는 것이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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쎈연필 2005-11-23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너 자신이 돼라"에서 '되다'는 피동형이 아닌가요. 그래서 문맥과 상충하는 어미인 듯합니다. '하다'가 더 적합할 것 같습니다. 하다형으로 하자면 문장을 변형해야겠지만요.
퍼가겠습니다.

로쟈 2008-11-14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다'는 어떻게 결합되는 것인지요? 문맥상 '하다(do)'와는 관계가 없는 내용이라...

포월 2005-12-29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자님의 식욕(?)에 까무라칠 지경입니다. @_@ 몇년 사이에 들뢰즈의 글 모음집이 프랑스에서 두 권으로 나왔는데, 그 중 첫번째 권이 영역되었고 둘째권은 잘 모르겠습니다. 뭐 ... 판권계약해서 한국어번역도 진행중일텐데, 프랑스어판 둘째권은 들뢰즈가 쓴 영역판 서문이 모조리 모아져있더군요.
 

오늘자 한국일보 문화란에 '요즘 시'의 경향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오늘이 '시의 날'인 걸 기념해서인 듯한데, 며느리도 모를 법한 이 날의 유래는 이렇다고: "11월1일은 제19회 '시의 날'이다. '시의 날'은 우리나라 현대시의 효시로 알려진 최남선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1908년 11월 잡지 '소년' 창간호에 실린 것을 기념해 1986년 제정됐다." 1986년이면 전두환 정권하이다. 5공 때 이어령 선생이 문화부 장관을 한 적도 있으니 그 분 아이디어인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딱 이어령표 마인드의 산물 같다. 어쨌거나, 그런 날이 벌써 19번째이건만, 무슨 행사를 벌인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는다. 시시한 날인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저런 기념일을 챙기는 건 문화부 기자의 본분에 충실해 보이며, 덕분에 나는 아침부터 '요즘 시'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볼 수 있었다. 그리고 연예인들만한 사이즈로 지면에 오른 요즘 시인들의 면면들을 구경해볼 수 있었다. 혹 기사를 지나쳐버린 분들을 위해서 내용을 정리하고, 생각할 거리를 챙겨두도록 한다.

"일군의 젊은 시인들에 의해 시도되고 있는 우리 시의 새로운 경향을 짚"고자 하는 기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요즘 시(詩)가 어려워졌다는 말이 심심찮게 들린다. 시인 평론가들조차 불편함을 토로할 정도다. 한 두 사람 한 두 편의 돌출적인 현상이 아니라, 최근 등단했거나 한 두 권의 시집을 낸 젊은 시인들을 중심으로, 뚜렷한 경향을 형성하고 있다." 그런 경향을 다른 말로는 '엽기시'라고 한다.

 

 

 

 

얼마전 미당문학상 수상작이 발표되었는데, 수상자는 작년에도 시인들이 뽑은 최고작을 쓴 바 있는 문태준 시인이며 수상작은 <누가 울고 간다>이다. 짧은 시이므로 옮겨본다.  

밤새 잘그랑거리다/ 눈이 그쳤다

나는 외따롭고/ 생각은 머츰하다

넝쿨에/ 작은 새/ 가슴이 붉은 새
와서 운다/ 와서 울고 간다

이름도 못 불러본 사이
울고/ 갈 것은 무엇인가

울음은/ 빛처럼

문풍지로 들어온/ 겨울빛처럼
여리고 여려

누가/ 내 귀에서
그 소릴 꺼내 펴나

저렇게/ 울고
떠난 사람이 있었다

가슴속으로/ 붉게/ 번지고 스며
이제는/ 누구도 끄집어낼 수 없는

특별히 덧붙일 것도 뺄 것도 없는 소품인데, 사실 이런 정서와 리듬감, 시상 전개 등이 한국 서정시의 주류를 형성해왔다(문태준 이전에는 장석남이 있었다). 기형도 이후에, 혹은 장정일, 유하 이후에 여전히 이러한 시가 씌어지는 것은 어찌보면 '퇴행'이면서도 '관례'이다. 유구한. 그리고 그런 시인과 시들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건 당연해 보인다. 2000년도 이후에 나는 시도 쓰지 않고 읽는 것도 게을리 하고 있지만(나는 시에 대한 '기대'를 거의 접었다) 요즘 동태를 보아하니 그 사이에 꽤 특이한 젊은 시인들이 여럿 등장한 모양이다. 세태의 변화와 함께 새로운 문학적 성감을 찾아나선 이들의 이름은 김행숙 황병승 김민정 김근 김언 이민하 김이듬 등이다. 기사에는 8명의 시인들이 8인방처럼 거명돼 있는데, 요약하면 1:8이요, '문태준과 아이들' 혹은 '문태준과 엽기들'이다. 이들을 차례로 호명해보자.

 

 

 

 

 

 

 

 

 

 모두가 올해 데뷔시집이나 새시집을 낸 젊은 시인들이다. 김이듬, <별모양의 얼룩>(천년의시작, 2005); 진수미, <달의 코르크마개가 열릴 때까지>(문학동네, 2005); 김근, <뱀소년의 외출>(문학동네, 2005); 김언, <거인>(랜덤하우스중앙, 2005); 이민하, <환상수족>(열림원, 2005); 김민정,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열림원, 2005); 황병승, <여장남자 시코쿠>(랜덤하우스중앙, 2005); 김행숙, <사춘기>(문학과지성사, 2005)

(평론가 이장욱에 의하면) '외계어'로 시를 쓰는 이들은 (평론가 권혁웅에 의하면) 우리 시단의 '미래파'이다. 물론 이들이 떼로 몰려다니는지는 모르겠지만(외계인들끼리는 소통가능한가?) 하여간에 앞에서 인용한 문태준류의 시와는 달리 알아먹을 수 없다는 것이 이들 시의 특징이고 특장이다. 기자도 이 점을 표나게 지적하고 있다: "그 변화의 선두에 김행숙(35) 시인의 비교적 짧은 시 ‘달무리’를 보자. “그의 진동이 그에게 후광을 만든다. 그가 문둥이같이 뭉개질 때/ 배는 출렁이고 있었다. 내가 깔고 누운 파랑은 나를 통과한 그의 뒤편일까? (중략) 그의 뭉개진 코가 킁킁대며 누구니? 누구니? 묻고, 다시 물을 때// 아으, 부풀어 오르는 한 그루 버드나무.” 그의 시는 이성적 사고체계로 스며들지 않는다. 오히려 무의식과 느낌, 환상ㆍ분열적 내면 풍경에 철저히 기대고 있는 듯하다. 전통 서정시의 독법에 따라 어떤 의미나 이미지를 포착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하고 무모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사실 알아먹을 수 없는 시가 문학사에 새로운 건 아니다. 이미 1930년대의 이상이 '욕먹는' 시 <오감도>를 썼다. 1950년대에는 '초현실주의 시'를 쓴 조향 시인 같은 분도 있었고(<조향 전집>(열음사, 1994)), 김춘수 시인의 무의미시나 이승훈 시인의 비대상 시들도 다 낯선 시들이었다. 그렇다고 이성복과 황지우의 시는 주류적인 시였나?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요즘의 '엽기시' 경향에 대해 특별히 호들갑을 떨 이유는 없어 보인다. 다만, 최근의 나온 시집들이 주된 경향을 이루면서 하나의 '트렌드'를 형성하고 있다는 게 눈에 띌 뿐. 더불어, 현란한 이미지들이나 수사의 국적, 계보, 혹은 전통을 종잡을 수 없다는 게 이채로울 뿐. 해서 새로운 시 독법이 필요하다? 

"이들 시의 메커니즘은 다양하다. 빛이나 공기 입자의 산란처럼 어지럽게 좌충우돌하는 사유의 혼종성, 세계와 자아의 대립과 반영을 넘어 자아분열적이기까지 한 현란한 이미지, 성적ㆍ관능적 환상과 잔혹하고 그로테스크한 상징 등…. 이성과 관념 이전의 원초적 시어들이 은닉하고 있는 ‘무엇’을 감지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 독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이와 관련 김행숙 시인은 문학적 감성의 변화를 말한다. “어떤 시는 시인/평론가보다 시를 잘 알지 못하는 일반 독자들이 오히려 뜨겁게 반응합니다. 폭 넓게 소통한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좁은 대신 깊이 소통하는 층이 분명히 있어요.” 그는 그것을 생물학적 세대차이라기 보다는 차별화한 문화체험에서 비롯된 문화적 세대차이일 것이라고 말했다."(강조는 나의 것) 참고로 기자가 나열하고 있는 찬반론은 이렇다. 

이들 시에 대한 비판도 있다.

-문학의 본령이 문자언어를 통한 소통이다. 암호에 가까운 자의적 기호와 자폐적 무의식의 흔적들이 어떻게 문학인지 모르겠다.

-환상이 없는 문학은 없다. 두보의 시에도, 카프카의 글에도 환상은 있다. 하지만 이들의 시는 삶의 리얼리티를 상실한 채 머리(환상) 속에서 떠오른 느낌들을 시적 긴장 없이 풀어놓은 것 같다.

-하나 하나의 작품을 놓고 보면 참신하지만 모아놓고 보면 시를 형성하는 문법이나 문장을 엮는 방법 등이 흡사하다. 일종의 유행 같다는 생각이다.

그에 대한 반론이다.

-나는 말쑥하고 균형 잡힌 시를 혐오한다. 안정감 있고 깨달은 자는 침묵하면 좋겠다. … 나는 내가 쓴 시에 관해서 말하기가 뭐하다. 낯설고 잘 모르겠고, 몰라서 쓴다.… ‘노력’해야 한다면 그때는 안녕.(김이듬, ‘시와 반시’여름호-현대시와 퇴폐)

-시단에서 유일하게 죄악인 것이 있다면 바로 다양한 꼴을 못 보아주는 태도이다. 시적으로 봐도 그렇고 생물학적 측면에서도 굉장히 위험한 태도다.… 자신 안에 스스로 잡종의 비율을 높여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김언, ‘웹진 문장’ 10월호-우리 시의 다양성과 새로움)

-아름다움은 움직이는 거다. …최근 시들을 비판하는 이들이 논거로 삼은 자리는 절대로,항구적인 진리의 자리가 아니다. 차라리 최근 시들이 진리로 간주되어온 그 자리를 비판의 대상으로 겨누고 있다고 말해야 옳다. (권혁웅 비평집 ‘미래파’-2005년 젊은 시인들)

긍정적인/전향적인 관점에서 이러한 경향을 바라보는 세 평자의 의견:

-황현산(고려대 불문) 교수는 “한국 현대시단의 양대 흐름을 형성했던 농경사회적 정서와 도시적 정서의 굳은 틈을 비집고 서울의 하위정서 혹은 지방도시적 정서들이 새로운 경향을 형성하는 듯하다”며 “하기에 따라서는 향후 2~3년 내에 우리 시단의 지형도가 바뀔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소통의 문제와 관련, 그는 “승리한 자의 말은 상식에 근거하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소통되지만, 억압 받는 자는 말 한 마디 하기도 힘들고 하더라도 타박 당하기 일쑤”라며 “하지만 그 말은 우리가 반드시 소통해야 할 말“이라고 말했다.

-2003년 김행숙씨의 첫 시집 ‘사춘기’(문학과지성사)의 해설에 이장욱(시인ㆍ소설가ㆍ평론가)씨는 “우리가 도달해가는 현대시의 어떤 징후”라는 조심스러운 표현을 쓴 바 있다. 이제 그 징후는 좋든 싫든 하나의 도도한 경향으로 자리잡았다. 그는 “최근 젊은 시인들의 경향이 우리 현대시의 다양성을 확장하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지배적 경향을 형성할 지는 미지수”라고 말했다.

-최근 낸 비평집에서 이들 젊은 시인들의 경향을 ‘미래파’라 명명한 권혁웅(시인ㆍ평론가)씨는 “60년대의 김수영, 80년대의 이성복이 당대 시단에 충격을 준 것처럼, 이들 시가 낯설고 불편한 것은 새로운 미학과 세계관을 한 발 앞서 반영한 것이기 때문”이라 했다. “먼 훗날, 이들의 작품이 낡았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날이 분명히 올 것이다. 다르게 말해서 이들의 작품이 가까운 미래에 우리 시의 분명한 대안이라는 것을 인정할 날이 올 것이다.”(‘미래파’ 171쪽)

이어서 기자는 두 편의 시를 예시하고 있다. 나의 독후감으론 황병승과 진수미의 예시된 시는 종류가 좀 다르다. 그것은 시가 그 독법에 있어서 어느 만큼의 논리를 허용하는가, 혹은 어떤 종류의 논리를 요구하는가에 달려 있다. 더불어, 시의 난해성이 시적 주체의 개성과 연관되는 것인지, 아니면 개별성 이전의 전주체성(presubjectivity)과 연관된 것인지 구별할 필요가 있다. 어쨌든 '요즘 시'를 한번 읽어보시라. 그리고 해독/해석해 보시라. 나의 생각은 조만간 다른 자리에서 정리해두도록 하겠다.

▲ 커밍아웃 / 황병승

나의 진짜는 뒤통순가 봐요
당신은 나의 뒤에서 보다 진실해지죠
당신을 더 많이 알고 싶은 나는
얼굴을 맨바닥에 갈아버리고
뒤로 걸을까 봐요

나의 또 다른 진짜는 항문이에요
그러나 당신은 나의 항문이 도무지 혐오스럽고
당신을 더 많이 알고 싶은 나는
입술을 뜯어버리고
아껴줘요, 하며 뻐끔뻐끔 항문으로 말할까 봐요

부끄러워요 저처럼 부끄러운 동물을
호주머니 속에 서랍 깊숙이
당신도 잔뜩 가지고 있지요

부끄러운 게 싫어서 부끄러울 때마다
당신은 엽서를 썼다 지웠다
손목을 끊었다 붙였다

백년 전에 죽은 할아버지도 됐다가 고모할머니도 됐다가…

부끄러워요? 악수해요

당신의 손은 당신이 찢어버린 첫 페이지 속에 있어요

▲ 그러다가 어느 날 / 진수미

유방은 부풀어오른다 터질 듯이 고요한 프로펠러
갈증을 느낀 비행선이 그림자를 몰고 나타난다.
보라색 태양일랑 내가 오려냈다오.

승냥이들이 거품 무는 파도가 쫓아오고
내장 없는 배의 항로를 걱정하는
어머니, 이 배에 앓는 항구가 누워 있어요.

사랑스런 임차인들아,
나는 그들에게 돌려줄 것이 있다오.

당신의 장기를 물어뜯는 거리의 개들
적선은 더 큰 바람을 부를 거예요.

소유를 짤랑이는 열쇠와 함께
집달리들이 득달같이 들이닥친다.
그들은 신부의 의상을 하고 있어요.

냉장고는 머리가 깨져 시큼한 국물을 지리는데
벌레들이 바람의 커튼을 흔들며 날아올라요.

뒤엉킨 서랍의
껍질 벗고 교미하는 실뱀 한 꾸러미,
그들은 신부의 의상을 하고 있어요.

05. 11. 01.

P.S. 다시 생각해보니까, '시의 날'은 5공때 문공부 장관을 지낸 정한모 시인의 '작품' 같다. 이어령 선생은 노태우 정권때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냈다. 확실하진 않지만, 내 기억이 말해주는 건 거기까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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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5-11-01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귀빈께서 다녀가셨네요.^^ 저도 가끔 검은비님의 그림 구경을 하는데, 제가 참견할 형편이 못되더군요. 그림을 보는 만큼 보듯이 시도 읽는 만큼 읽으면 되는 거 아닐까요...

파란여우 2005-11-01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계어로 씌여지는 시에 외계어로 반응하는 정서가 요즘 시가 아닌가해요
퍼 갑니다^^

로쟈 2005-11-01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중에 밝히겠지만, 유사-외계시들도 더러 눈에 띕니다. '더듬거리며 말하기' 혹은 의미를 다리 절게 만드는 것은 (들뢰즈식의) 소수문학적 전략으로 유효하지만, '트렌드'는 언제나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현재의 문학장, 문학제도와 무관한 문제도 아니구요. 시집들이 모두 얌전하게, 시인 누구누구의 시집 뭐뭐로 출판되는 것 자체는 전혀 '소수적'이지 않은 현상이며, 지극히 이해 '잘되는' 현상입니다.

urblue 2005-11-01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퍼 갑니다.
시는 잘 모르나 아는 시인의 이름이 언급되었군요.

kimji 2005-11-01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보,라 하기에는 울림까지 포함되어 있어 그저 '고맙게 잘 읽었습니다'라는 인사로 대신하겠습니다. 가을, 시 읽기 좋은 계절이라는,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를 주억거리면서-
(첫인사,이지요? 두루두루 종종 뵙겠습니다,라는 인사도 동봉하면서- )


로쟈 2005-11-01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쓴 것도 별로 없는데, 많이들 내왕하시는군요. 제가 쓰는 분량을 점점 줄여야겠습니다.^^

도서관여행자 2005-11-01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어요. 퍼갈게요 ^^

검둥개 2005-11-01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퍼가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 .^ (꾸벅)

페일레스 2005-11-01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농담이라도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지금껏 쓰시는 분량도 모자르십니다. 흐흐. ^ㅡ^

깜소 2005-11-02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저두 퍼갈께요..

로즈마리 2005-11-02 0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너무 착한 시들에 짜증이 잔뜩 났었드랬어요. 말그대로 순 깨달음의 시들. 그렇다고 젊은 시들의 외계성이 과연 좋은가..역시 의문입니다. 젊은 피들의 치열함이 의미있게 형상화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로쟈 2005-11-02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들 이렇게 시에 관심이 많으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시 얘기도 가끔 올려야겠네요...

젠틸레냐 2005-11-10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