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지만 없는 아이들 - 미등록 이주아동 이야기
은유 지음, 국가인권위원회 기획 / 창비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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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은유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의뢰를 받아 미등록 이주아동을 포함한 관련자들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책으로 묶어냈다. 


책을 읽기 전 나의 짧은 지식은 '불법체류자' 각 분야에서 필수노동력이 된지 오래이고, 불법을 빌미로 열악한 환경에서 열악한 대우를 받으며 일하고 있다는 것. 이들의 위치가 올라가야 한국 노동자들의 위치도 올라갈 수 있다는 것. 정도였다. 화재나 사고로, 폭염이나 아주 추운 날 동사로 그들의 열악한 거주지를 보여주는 뉴스에서나 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 책은 이주노동자들이 데리고 온, 혹은 한국에서 태어난 이주아동들에 대한 이야기인데, 책을 읽기 전 생각해보지 못했고, 책을 읽으면서 이게 말이 되는지, 황당했다. 우리 사회의 많은 썩은 고리들 중 하나를 이 책을 통해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신분증 없이 사는 삶

얼마 번 동생이 공항에 가는데 신분증이 없어서 마침 가지고 있던 주민증을 찾아 준 적이 있다. 그 신분증마저 잃어버렸지만, 생각해보니, 이전에 등록해둔게 있어 손바닥 찍고 공항에 잘 들어갔다고 한다. 내가 근래 신분증을 내밀어야 했을 때는 도서관 회원증을 만들 때와  공항, 도민 무료 관광지에 들어갈 때였다. 


이 신분증은 그 신분증이 아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주민등록번호다. 주민등록번호가 주어지지 않는 아이들. 주민등록번호가 없으면, 핸드폰도 통장도 만들 수 없다. 코로나 시대에 QR 체크도 할 수 없다. 청와대에 견학을 가서도 들어가지 못하고, 봉사 사이트 봉사 포털에 가입하지 못하고, 역사 골든벨에서 우승할 정도로 역사를 잘 알아도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 응시할 수 없다. 좋아하는 아이돌 콘서트에 예매를 못해 가지 못하고, 아이들끼리 떡볶이를 먹고 계좌이체를 할 때 현금을 꺼내야 한다. 


졸업을 하면 현행 법체계 안에서 언제든 강제퇴거명령이 내려질 수 있다. 고등학교까지 공부를 열심히 해도 대학에 갈 수 없다. 한국말밖에 모르는데 가본 적도 없는 부모의 국적국으로 쫓겨갈 수도 있다. 단속을 피해 저임금으로 그림자 노동을 하면서 있어도 없는듯 살아간다. 


히잡을 쓴 달리아는 백석 시인을 좋아하고, 한국어로 시를 쓰는 아이다. 대학에 진학할 수 없어 오빠 카림이 그랫듯이 대학을 포기한다. 고3때 아이들이 모이면 대학 이야기하는데 낄 수 없어 고3 생활이 너무 길었다고 한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한국사회 일원으로 살아왔고, 한국 경제에 기여하고 있다. 모 대학병원 근처에 살 때 이주노동자들이 한국 간병인들을 거의 대체했다고 들었다. 이들 없이 간병돌봄이 돌아가지 않는다고. 농사도, 공장도. 이미 이들 없이 돌아가지 않는다. 이미 한국 사회의 필수 존재가 된 그들을 미비한 사회제도를 빌미로 인권을 무시한채, 법 테두리 안에서, 법 테두리 밖에서 이용하고, 학대하고 , 모르는 체 하고 있다. 


아이들의 경우는 더하다. 아주 어릴 때부터, 혹은 한국에서 태어나 평생을 한국땅에서 살아온 이들을 성인이 되어 말도 환경도 모르는 본국으로 추방하는 것은 인도적이지도 않을 뿐더러, 비합리적이다. 


되지도 않는 저출산 정책들로 세금낭비 그만하고, 있는 아이들을 제대로 케어해야 한다. 사람들이 아이를 낳고 싶은 사회를 만들려면, 이미 존재하는 아이들을 잘 돌보는 사회가 선행해야 할 것이다. 


다문화 이해 교육 커리큘럼을 만들고 한참 열심히 하다보니 ‘도대체 교육이라는 게 효과가 있나? 인간이 교육으로 변하나?‘ 하는 의문도 들었어요. 당근과 채찍 전략으로 한편으로는 교육, 한편으로는 규제, 이렇게 바꿔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걸로 해결이 안 되는 부분이 분명히 있는 것 같았고, ‘감수성‘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하지만 그 감수성이라는 게 하루 아침에 바뀌는 건 아니잖아요. 제 스스로의 생각이나 의식이 바뀌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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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번째 달 일곱 번째 밤 - 아시아 설화 SF
켄 리우 외 지음, 박산호 외 옮김 / 알마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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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설황, 제주설화와 SF의 만남으로 기대 이상이었던 작품집이다.

견우 직녀의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따 온 켄 리우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마침 7월 7일에 이 책을 읽고 있었어서 더 기억에 남는다. 10대 레즈비언 커플들 중 한 명이 미국으로 유학가게 되어서 칠월칠석에 긴 헤어짐을 앞두고 있다. 거리가 멀어지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이제 정말 열심히 공부해야 하기 때문에 이별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한 명은 긴 거리 연애도 가능하다, 어떻게 헤어지냐고 생각하고 있다. 이렇게 각자 마음 아파하는 두 커플은 오작교를 만들려고 올라가는 까치들에 휩쓸려 하늘로 올라가 견우와 직녀의 만남을 보게 된다. 그렇게 롱디의 아이콘인 견우직녀에게 연애 조언을 받게 되고.. 


두번째 단편인 왕관유의 '새해 이야기'는 새해에 대한 이야기이다. 새해라는 전설의 동물은 빨간 것과 불을 무서워하고, 인간의 공포를 먹고 산다. 인간들이 새해를 쫓아내고, 망한 현실을 버리고, 모두 가상 세계에만 빠져 있던 미래의 어느 시점에 새해를 무서워하지 않는 존재가 새해를 깨워내서 부탁한다. 


홍지운의 '아흔 아홉의 야수가 죽으면'은 아흔아홉 골 설화에서 모티브를 따온다. 박력 있고, 아련하며, 위트 있다. 옛 설화의 야수와 미래의 헌터, SF 적인 요소들이 잘 버무려져 있고, 여운도 길다. 


요즘 좋아하는 작가인 남유하의 작품을 보게 되어 기뻤다. 설문대할망 설화를 모티브로 한 '거인 소녀' 는 가슴이 웅장해지는 이야기이다. 남유하 작가 다이웰 주식회사에서도, 그리고, 이 작품 '거인 소녀'에서도 엄마와 딸 이야기가 묘하게 까슬하게 나오는데, '사라지는 건 여자들뿐이거든요' 의 발문에서 강지희 평론가가 이야기했던 한국 소설의 모녀 관계에 대한 글 읽고 나니, 계속 사례로 모으게 된다. 


이 작품집 읽고, 제주설화 관심가게 되서 제주설화 책도 주문했는데, 남유하 작가의 후기가 흥미롭다. 


"제주도 설화에는 거인이 많이 등장합니다. 재미있는 점은 그 거인들이 할머니, 할망이라는 것입니다. 제주도를 만든 설문대할망, 바다를 안전하게 지켜주고 풍요를 가져다주는 영등할망. 저는 두 할망이 몹시 마음에 들었고 이 이야기를 모티브로 소설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설화에서 나타난 두 할망에게는 세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거인이라는 점, 인간을 사랑한다는 점, 그리고 그들의 사랑이 보답을 받지 못했다는 점. (..) 거인 할망. 힘을 가진 여성이 왜 이토록 외면받거나 끔찍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을까? 이 이야기는 이러한 의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너무 커져 버렸기 때문에 사회에서 배척당하는 소녀들. 다르다는 이유로 세상에서 고립된 아이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부디 소녀들이 그들만의 섬, 이어도를 찾을 수 있기를." 


진짜 너무 좋다!! 


다음 작품은 남세오의 서복 설화에서 모티브를 딴 서복이 지나간 우주에서.

불안정한 탐라라는 행성에 살면서 우주로 잠수하는 이야기. 바다에 뛰어드는 해녀 대신 우주에 뛰어드는 잠수의 이야기를 썼는데, 멋지다. 작가들 대단해. 


그 다음은 후지이 다이요의 아마미섬 설화 


곽재식의 한라산 우인은 곽재식이 곽재식했네의 느낌. 


이영인의 용두암 설화에서 온 '불모의 고향'은 이 작품집에서 제일 좋아하는 단편이다. 제주의 기류, 해류, 용류와 인류의 탄생에 대해 하필이면 탐라섬에 정착해서 악착같이 살아가는 초기 인류에 대해 그리고, 섬을 만들어 별을 관찰하고, 용류와 해류와 기류를 타고 노는 신과 같은 존재의 가문에 대해 나오는데, 여전히 미친 바람과 자연에 둘러쌓인 제주섬에 살다보니, 이 이야기가 정말 벅차게 와닿았다. 


윤여경의 원천강 오늘이 설화를 소재로 한 소셜무당지수도 좋았다. 오늘이 매일이 장상이, 고양이 로투스 (연꽃) 무당, SNS, 유튜브에서 성공해서 부자되기, 등등 블랙코미디 같으면서도 설화 모티브가 잘 드러났다고 생각된다. 


이 단편집의 단편들은 너무 좋거나 좋거나였는데, 마지막 단편에서 한숨난다. 


이경희의 산신과 마마신 


산신, 마고신, 마마신이 나오는데, 설화를 소비하는 방식이 저급하다. 

나쁜 왕이 있어서 산신과 마고신이 나쁜 왕에 맞설 아이를 낳는다. 그 아이가 마마신이다. 


나는 요즘 픽션의 윤리에 대해서 종종 생각하는데, 이 작품 보고도 또 생각했다. 

재미도 없고, 설화 모티브 작품인데 설화가 후져졌고, 이야기도 결말까지 별로고, 별 생각 없이 지나가는 장면들이 별 생각 없이 안 지나가진다. 


산신과 마고신이 별상을 강하게 만들어 성주에게 대적하게 하기 위해 하는 것은 괴롭힘이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시켜 왕따 시키고, 옥상으로 불러 폭력을 가하게 한다. 배 걷어 차고, 연초빵 하고 막 그런 장면 나와. 

별상은 자기를 낳아준 마고에게 사랑을 느끼고, 발기하고, 그걸 알게 된 마고에게 따귀 맞고 쫓겨남. 이 때 별상은 열다섯살의 몸을 가진 다섯살 아이였다. 마고의 반응으로 장면을 더럽게 만듬. 산신과 마고가 질척하게 자기 위해 울고불고 난리 난 별상을 매몰차게 내침. 별상이 성주를 만나게 되었을 때 성주는 여자들 잔뜩 끼고 있고, 가슴을 주무르고, 별상에게 여자를 대주고 이런 장면들이 이야기에 필요한가? 


나는 장르 소설을 많이 읽었고, 예전 소설들도 많이 읽어, 예전보다는 많이 가리게 되었지만, 그래도 여혐이군 생각하고 넘어가는 편인데, 예전 소설도 아니고, 이제 쓰인 소설에 별 상관도 없어 보이게 저런 장면들이 들어가면 더이상 술술 읽히지 않는다. 


작가 후기 보면, 이야기에는 망할, 드러운, 죽어 마땅한 성주 얘기만 써 놓고, 성주가 별의 주인이라 멋있대. 참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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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또 무슨 헛소리를 써볼까 - 책상생활자의 최신유행 아포칼립스
심너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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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의 이야기를 처음 한 것이 심너울 작가인지 모르겠는데, 아닌듯. 더 전에 다른 지면에서 읽었던 것 같다. 글이 안 써질 때, 막 잘 쓰려고 하지 말고, 헛소리를 쓴다 생각하고, 일단 쓰기 시작하라고. 아, 어떤 감독이 쓴 책이었던 것 같다. 쓰레기를 쓴다고 생각하고, 일단 쓰라는 얘기였던 것 같은데. 여튼, 제목이 의미하는 바는 완벽하게 쓰려고 끙끙대지 말고, 일단 헛소리든 쓰레기든 쓴다고 생각하고 쓰기 시작하라는 얘기 였다. 


심너울 작가 트위터도 팔로우 하고 있었고, 특이한 작가 이름과 근래 신간으로 책도 (제목만) 종종 본 것 같은데, 에세이를 제일 먼저 읽게 되었다. 소설가가 되고 연 2500만원을 버는 것이 목표이고 거기까지는 이루었다고 하는 걸 보고 인상적이어서 사게 되었는데, 책 읽고 나니, 역시 그 부분이 인상적이다. 천선란 작가랑 친한거랑. 


소설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조금 더 들긴 했지만, 에세이는 안 사도 될 뻔 했다. 이십대 남자 작가 이야기 별로 안 궁금해서. 리뷰 보니, 너무 웃겼다고 하는데, 뭐가 웃겼던걸까? 어떤 책을 웃기게 보나 서재 들어가봤더니 리뷰가 이 책 하나네. 


ADHD 진단을 받았다고 하는데, 요즘 관심 있는 부분이라 많이 나오지는 않지만 유심히 봤다. 병이라고 부르면 병이 된다는 이야기에 동의한다.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을 인지하고, 고쳐 나가기 위해 이런저런 수단을 강구하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힘들면 병원에 가는게 맞겠지만. 


작가 성별 헷갈리지 않는편인데, 헷갈렸던 두 명이 다 한국 SF 작가였다. 다른 이모 작가는 다 읽고도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인터뷰 사진 보고 알아서 놀랐다. 이 책은 첫 장부터 소집해제 이야기가 나와서 알았다. 


지금까지 책 열 권 사면 아홉 권이 남작가 책이었던 것 같다. 의식하고 사기 시작한건 몇 년 안 되지만, 아직 3(남) 대 7 정도인듯. 여성작가를 밀어주기 위해 뭐 그런거보다는 남작가 책 많이 읽어서 여자 눈으로 보고 그린 이야기가 훨씬 재미있고 와닿아서 그렇다. 


아, 힐다를 보겠어요. 힐다. 

그리고 심너울 작가 소설책도 읽어보겠어요. 사둔 책들 중 한 두 권은 더 있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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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1-07-08 16: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심너울 소설집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 읽었어요. 제목에 비해서 (?!!) 소설은 재미있어요. 특히 중년남 중성화 시키는 이야기!

하이드 2021-07-09 04:51   좋아요 0 | URL
저는 이런 제목들을 좀 싫어하긴 하는데 궁금하니깐 읽어봐야겠어요. ㅎㅎ
 
어느 맑은 날 약속이 취소되는 기쁨에 대하여 - 내 마음대로 고립되고 연결되고 싶은 실내형 인간의 세계
하현 지음 / 비에이블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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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맑은 날 약속이 취소되는 기쁨에 대하여' 라는 제목과 '내 마음대로 고립되고 연결되고 싶은 실내형 인간의 세계' 라는 부제를 보고, 외향형인줄 알고 살다가, 내향형 인간으로 거듭나서 이제야 이해가는 내향형의, 실내형의 약속에 취소되는 기쁨에 대한 이야기인가보다 하고 샀는데, 별로 그렇지는 않았다. 


책 읽고 나서 어떤 책이라고 말하기가 어려웠는데, 내향형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기대하고 읽었어서 그럴 수도 있다. 

살면서 만나는 이런저런 일들에 대한 저자의 이런저런 이야기들이고 술술 읽히며, 중간 중간 좋은 이야기들도 있었다. 


비혼에 대한 이야기, 정혈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책에서 만나게 되는 일이 더 많아져도 좋을거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 이어 읽고 있는 이야기가 올리비아 랭의 '외로운 도시' 인데,내가 이 책의 제목을 보고 생각했던 것, 이 책 처음에 나오는 것, 그리고, '외로운 도시'까지 연결되는 정서가 있다. 


친구들과 만나는 것도 좋고, 피자 먹는 것도 좋고, 노래방도 좋은데, 약속이 깨지면 미안할 정도로 기쁜 저자. "원하는 만큼 충분히 혼자 있고 싶지만 그렇다고 해서 외톨이가 되고 싶지는 않은 마음" 그 모순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람을 만나면서 에너지를 얻는 사람이 있고, (놀랐다. 정말 그럴 수 있다니) 혼자 있을 때 에너지가 쌓이는 사람이 있다. 나는 혼자 있을 때 에너지가 쌓이는 사람이라 전자의 사람이 너무 신기하다. 좋은 자리와 만남과 사람은 '좋은' 에 방점이 찍혀있는한 당연히 좋고, 에너지 깎임을 감수하고 기꺼이 나가지만, 분명 에너지 깎이는 일이라서, 만나도 좋고, 취소되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내향형 인간에게 취소되어 아쉬운 약속이란게 있을까 생각해봤는데, 고양이 병원 약속 정도인 것 같다. 이건 아쉬움을 넘어서는 속상함이겠지만. 내 병원 약속도 별로 안 아쉽고 집에 있어 좋을 것 같다고. 


올리비아 랭의 '고독'은 좀 더 병적이고, 문제적이어서 좀 다른 결이긴 하지만, 내가 공감한 구절은 


"언어를 불신하게 되고, 언어가 사람들 사이의 간극을 극복하게 해줄 능력이 있음을 의심하게 되어 (...)침묵은 상처를 피하는 방법, 참여를 전적으로 거부함으로써 잘못된 소통 때문에 겪을 고통을 피하는 방법일 수 있다." 라는 것. 


다시 하 현으로 돌아와서, 저자는 아동용품 박람회에서 이어지면 기차가 되는 자동차를 판매했던 경험을 이야기한다. 이어진다고 하면, 사람들이 좋아하면서, 왜 이어지지 않으면 소용없을 것을 한 개만 사가냐고 하소연하자, 사장이 말하길 사람들은 나중에 마음이 바뀌어 더 사서 연결할 수 있는 그 가능성을 좋아하는 거라고.  


혼자인건 홀가분하지만,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은 좋아하는 것. 편의에 따라 자유롭게 연결하고 분리할 수 있는 모듈형 인간. 외톨이는 아니지만, 혼자일 수 있는 사람. 


아무런 에너지도 쓰지 않고, 노력도 하지 않고,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 만 바란다는 것은 이기적이고, 비겁하고 게으르다고 생각한다. 생각은 하는데, 역시 사람들 만나면서 에너지 깎이는 한, 그 사람들이 친구나 애인이나 좋아하는 지인이 아닌 이상, 내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고, 나에게 쓰고 싶은 것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사교적인 내가 나와야 하는 자리는, 유체이탈되는 느낌이다. 


곽두팔 아세요? 여자 이름으로 택배 받으면 불안해서, 세 보이는 이름을 적을 때 최고가 곽두팔이었고, 그걸 쓰면서 외려 혼자 살고, 그걸 무서워 한다는 정보까지 밝혀지게 된다는 거. 그런 팁들이 돈다. 빨래건조대에 남자 옷 걸어두기, 현관에 남자 신발 놔두기. 그리고, 그 후의 이야기도 봤다. 그게 누가봐도 티나서, 배달원들이 보면 혼자 사는데, 남자랑 사는 척 남자 신발 현관에 둔 것까지 안다고. 그 얘기 봤을 때는 좀 참담했다. 


미용실에 석달에 한 번씩 가는데, 스몰토크 하는게 너무 괴로워서 간만에 발견한 스몰토크 없는 미용사가 머리는 맘에 좀 안 들게 자르지만, '머리 잘하는 미용실은 많으니 다른 걸 잘하는 미용실도 하나쯤 있으면 좋겠지.' 하고, 그 쓸모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세 달에 한 번씩 그 곳에 간다는 이야기. 


에세이를 너무 사회학책이나 인문학 책으로 보려고 했나. 리뷰 쓰면서 생각해보니, 내향형 인간 에세이 맞네. 


마트 아르바이트 이야기도 좋았다. 마트에서 주 3일 커피 시음하는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마가 낀 날로, 진상 퍼레이드였던 어느 날, 마트 언니들이 불러서 대보름 오곡밥을 얻어 먹는다. 땅콩 깨물며 "새로운 한 해의 안녕을 빌고, 몸에도 마음에도 부스럼 나지 않기를 , 좋은 손님만 만나기를, 우리의 밥벌이가 우리를 해치지 않기를." 빈다. 


그래요. 우리의 밥벌이가 우리를 해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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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서 자기 스스로답하는 과정이라고 본다. ‘예술은 사회에 꼭기여해야 한다‘라든가 이런 것보다도, 오히려자기 혼자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확인하고, 그걸 제대로 한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본다.

그것도 어렵다, 사람한테는, 그런데 나를 알려면나의 의식을 사로잡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하고, 그게 나에게는 고향의 역사였다.
- P27

폭풍 칠 때, 찬 바람 불 때, 어스름할 때
이게 진짜 제주도다.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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