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모데라토 칸타빌레 ㅣ (구) 문지 스펙트럼 19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정희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에는 책 표지에 반했어. 그 다음엔 제목이 눈에 들어왔고. '모데라토 칸타빌레' . 뭐였더라, 책에 나오겠지 뭐. 그리고 나서는 마르그리트 뒤라스. 소녀랑 어른 남자랑 사랑하는 그런 영화였지 아마? 그래. 그 양갈래로 머리한 배우. 생각난다. 하얀 원피스에 하얀 모자에. 약간 못난 이에 활짝 웃는 모습. 활짝 웃는데 디게 쓸쓸하고 씁쓸하기까지 해보이던 그 모습.
그리고 오늘 점심시간 이 작은 책을 꺼내들고 표지를 다시 봤다. 이런 짧은 앞머리에 굽슬한 파마의 숏커트머리는 절대로 프랑스 여자에게만 어울리는 머리야. 단정하고 부드러운 눈썹에 눈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짙고 긴 속눈썹. 오만해 보이는 코에 도톰한 입술은 자존심이 강해보여. 동그란 얼굴에 감춰져 있는 귀는 아주 귀여울 것 같아. 브이자로 파인 검은 옷을 입고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여자.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어. '악보 위쪽에 뭐라고 씌어 있는지 읽어볼래? ' 피아노 선생이 물었다. '모데라토 칸타빌레' 하고 아이가 대답했다.
고집스런 아이는 백번도 더 말해준 그 뜻을 끝끝내 말하지 않는다. '보통 빠르기로 노래하듯이' . '보통빠르기로 노래하듯이' 가만히 따라해본다. 소리지르는 피아노 선생 앞의 얼굴 굳어진 아이 대신 가만히 되뇌어 본다. '보통 빠르기로 노래하듯이'
그날 그 시간. 피아노 레슨 중. 아이가 '모데라토 칸타빌레'의 뜻을 이야기 하지 않아 혼나고 있는 그 시간 밖에는 여느때처럼 사이렌 소리가 들렸는데, 평소와 달랐던 것은 여자의 비명소리였다. 길게 이어지는 비명소리. 그리고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났음에 분명한 사람들의 웅성이는 소리. '내일이면 무슨 일인지 알겠죠' 아이의 엄마와 피아노 선생은 이야기 하고, 레슨은 계속되고, 피아노 선생은 계속 화내고, 아이는 고집 부리다가 피아노 치다가 다시 멈췄다가 다시 치기를 반복한다. 아이의 엄마는 어쩔줄 몰라하면서도 아이를 끊임없이 독려하고 피아노 선생님에겐 변명을 늘어 놓는다.
레슨이 끝났다. 피아노 선생님집에서 내려와서 거리로 나선 엄마와 아이.
'여자의 비명' 이 끝난 그 까페 앞을 지난다. 광기에 휩싸인 한 남자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여자를 애무한다. 남자는 피범벅이다. 여자에게 키스하고 여자 옆에 눕는다. 경찰이 오고 그를 데려간다.
그 강렬한 사건후의 소진. 재로 남은 남자. 를 본 여자는 몹시 흔들린다. 그녀를 십여년동안 지탱하고 있던 받침 하나가 빠지면서 이제 그녀가 기울어 쓰러지는건 시간문제로 보인다. 그러나 아직 그녀의 티내지 않으려는 노력이 먹히는 시간이다.
소도시 공자주의 아내 '안' 그녀는 엄마로서, 아내로서 움쭉달쑥 못했던 십여년동안에서 벗어나려 한다. 저택 밖의 창문으로 공장노동자들이 일을 마치고 나오는 모습을 보고, 그 중에 한 둘은 목련꽃 향기가 짙은 밤이면 떠올려 보곤 한다. 그녀의 일탈의 징조이다.
부둣가로 산책을 나가 노동자들의 까페로 들어가 쇼벵을 만난다. 그 둘은 어쩌면 예전부터 알았고, 어쩌면 알았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고 본인만이 알 수 있는 말을 한다. 그러면서 그 날 사랑해서 여자의 부탁에 의해서 사랑해서 총을 쏜 사랑해서 파멸한 연인에 대해 이야기 하고 본인들을 거기에 대입시켜 사건을 되풀이 한다. 사랑을 되풀이 한다.
그녀의 의심. ' 아이가 정말 존재하는지 '에 대한 의심은 나로 하여금 '쇼벵'의 존재에 대한 의심. 나아가서 '그녀는 살아 있는 것인가' 에 대한 의심까지 들게 한다.
책의 마지막은 그들이 예정했던 수순으로 끝난다.
소소한 내용이 머리에 박히기보다는 그 여운만이 길게 남는 책이다. 후르륵 마셔야 했지만, 맛이나 향따위 음미하며 마실 수 없었지만, 카페인과 같은 각성제가 나도 모르는새 더 빨리 흡수되어, 그 여운이 더 긴 책이다. 그렇게 또 빨리 잊혀질 책이려나.
보통 빠르기로 노래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