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 20세기를 온몸으로 살아간 49인의 초상
서경식 지음, 이목 옮김 / 돌베개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제목이 주는 느낌이 묵직하다.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이라니... 사라질 수 없는, 사라져서는 안 될 사람들을 힘주어 꼽아보는데, 애석하게도 이 책에 등장한 47인의 이름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잊혀졌거나 혹은 젼혀 알려진 바 없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20세기의 거대한 혼돈과 독재라는 재앙에 맞서 싸우거나 혹은 저항했던 이들인데,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그들의 이름이 낯설거나 혹은 관심을 크게 두지 않는다.

많은 숫자의 사람들을 한꺼번에 언급하기 때문에 1인당 큰 지면을 할애하지는 못했지만, 그 사람의 마지막 장면, 그리고 그 사람이 태어날 때의 배경, 그리고 성장과정과 행적 등을 짧고 굵게 지나가면서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다.  혹여라도 그들의 생애에 더 관심이 간다면 참고도서로 올려준 책들이 큰 도움을 줄 것이다.  내 경우 참고도서 다음에 실어준 보충 페이지가 더 인상 깊었는데, 본문 속에서 언급된 사람 혹은 사건 등에 대한 부연 설명이다.  아마도 출판사에서 덧붙인 참고자료가 아닐까 싶은데 쉽고 간결하게, 압축적인 문장으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들을 잡아주었다.

책에 등장한 사람들은 독재와 전체주의, 부당한 폭력과 차별에 항거하거나 혹은 거기에 저항하는 의미로 자살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또 어떤 이들은 자아와의 고된 싸움 끝에 분열된 모습을 보여주거나 비참한 종말을 맞기도 했는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위인'의 반열에 충분히 드는 사람들도 있지만 꼭 거기에 맞춰지는 느낌은 아니다.  누군가에게선 본받아 마땅한 교훈을 얻을 수 있겠지만, 또 누군가를 향해서는 아련한 동정과 긍휼의 마음을 느낄 수 있고 어떤 면에선 반성으로 조용한 사색의 시간을 가져야 할 필요도 느낀다.

개인적으로는 앞쪽에 등장한 스페인 내전에서 용감히 싸우고 또 희생되었던 사람들과 라틴 아메리카에서 독재자에 항거하다가 스러진 인물들이 유독 마음에 남았다.  파블로 네루다나 파블로 카잘스보다 프랑코나 피노체트 같이 악명을 떨친 인물들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이 비극인지 희극인지 모를 일이다.  독재자는 이곳이나 그곳이나 반성 없이 보상 없이 저 세상으로 갔는데, 남겨진 희생자들은 여전히 그 가난과 고통을 되물림하고 있고, 독재자들의 후예들은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는 현실에는 답답한 한숨이 치민다.

나치 치하에서 수용소 생활을 겪고도 살아남은 시대의 증언자 프레모 레비.  그러나 남은 생애를 온전히 살아내기엔 그가 겪었던 치욕의 깊이가 너무도 어두웠다.  그의 마지막은 자살로 마감되어졌으나 그의 저작물들은 여전히 남아서 '증언'을 멈추지 않고 있다.  가네코 후미코는 박열보다 더 내 기억에 오래 남아있는 이름인데, 사형에서 무기형으로 형이 감면되자 오히려 그 사법조치를 치욕으로 알고 자살을 택한 그녀.  그녀은 천황의 이름으로 '은총'처럼 부여된 삶을 온 몸으로 거부한 것이다.  죽음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던 자들로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들의 죽음'도 빼놓을 수 없다.  나치 독일의 만행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당당하게 선전물을 뿌렸던 숄남매.  그들은 자신들이 죽으면서 사람들을 자극시켜 분연히 일어날 것을 기대했지만, 현실은 그렇게 유연하지 않았으니, 오히려 그들의 죽음에 환호하는 군중들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게 단시간 내에 평가되지 않는다.  결국 독일은 전쟁에서 패배했고, 전쟁 발발과 학살에 대해 깊이 사과했으며, 그들의 과오는 역사책 바깥에서도 자연스럽게 회자되고 있다. 

책의 맨 마지막에는 70년대 군부 독재에 의해 정치범으로 모진 옥살이를 해야 했던 두 아들을 둔 어머니. 바로 저자의 어머니의 이야기가 소개된다.  식민지배와 가난에 휩쓸려 이국땅 일본에서 터전을 잡고 열심히 살았던 그녀이지만, 해방 후 조국도 일본도 편안한 안식처가 될 수는 없었다.  재일 조선인으로서의 한계를 자각하며 조국에서 공부하기를 희망했던 두 아들은, 그러나 부르기도 버거운 조국 땅에서 죄인의 탈을 쓰고 말았다.  사상전향을 설득할 것을 강요당했지만, 배움이 없었던 어머니는 그것이 자신이 해서는 안될 몫이라고 판단하셨다.  결국 아들들이 풀려나기 전에 먼저 세상을 등진 어머니이지만, 자식 사랑에 눈이 어두울 법도 한 그녀에게도 세상의 부조리는 완연히 눈에 비친 모양이었다.  그렇게 '저항'은 혈기 왕성한 젊은 청년들에서부터 등굽은 어머니에게까지 모두의 몫이 되어 있었다.

인류의 역사는 새로운 세기에 접어들었음에도 지난날의 폭력과 부조리함이 그대로 남아 있다.  지금껏 희생되었던 사람들의 그 땀과 피눈물을 아직도 요구하는 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이전보다 덜 순진해졌고 훨씬 더 약아졌으며 감동에 무뎌지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투쟁하는 시대의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 기억을 올곧이 안고 가는 것 또한 작은 투쟁의 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명확한 감시와 전달, 그것이 우리에게 놓여진 가장 기본적인, 동시에 필수적인 사명이 아닐까.   그렇게 우리 또한 역사의 한 부분으로 남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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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11-10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말씀처럼 묵직한 내용이네요.
한 사람 한 사람은 작은 존재지만 역사라는 물줄기를 이루게 되지요.

마노아 2007-11-10 21:03   좋아요 0 | URL
그 역사 속에 우리도 한 몫을 하고 있네요.

멜기세덱 2007-11-15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저 안 읽었어요....마노아 님의 평이 좋으니,,,읽고 싶어요...ㅎㅎ(추천 한 방~~~)ㅋㅋ

마노아 2007-11-15 16:17   좋아요 0 | URL
헤헷, 주문완료 했습니다~ 내일쯤 도착할 거야요.
저는 멜기님의 리뷰를 기다려야겠군요.^^

2007-11-15 15: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 20세기를 온몸으로 살아간 49인의 초상
서경식 지음, 이목 옮김 / 돌베개 / 2007년 9월
절판


프랑코 장군(1892-1975)
1936년 인민전선 정부가 수립되자 그해 7월 모로코에서 반정부 쿠데타를 일으켰다. 군부, 왕당파, 우익 정당, 가톨릭 교회의 지지와 히틀러/무솔리니의 지원을 바탕으로 1939년 내전에서 승리하고 팔랑헤당 독재체제를 수립했다. 내전 기간 중 100만여 명이 사망했으며, 프랑코 독재 시기 공화파 인사 5만 명이 처형당하고 30만 명이 해외로 추방되거나 망명했다. 1975년 사망하면서 ‘정적에게 용서를 빌며 정적들을 진심으로 용서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21쪽

1938년 11월 15일, 국제여단은 정식으로 해산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39년 3월 28일, 마침내 프랑코군이 마드리드에 입성했다. 영국, 프랑스에 이어 4월 1일에는 미국 정부가 프랑코 정부를 승인했다. 내전 후 스페인에서는 프랑코 정부에 의해 인민전선파의 패잔병 10만 명이 사살되고 200만 명이 투옥되었으며, 50만 명이 해외로 망명을 떠나야 했다. -33쪽

국제여단(International Brigades)
2차대전의 전초전이자 파시즘과 진보적 민주주의의 국제전이던 스페인 내전에서 인민전선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공화파 국제의용군. 국적과 언어를 넘어 총 4만여 명이 파시즘을 저지하기 위해 참가했다. 1938년 해체. 많은 작가와 지식인들도 참가해, 헤밍웨이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와 다큐멘터리 <스페인 땅>의 대본을 썼고, 앙드레 말로는 소설 <희망>을 발표했으며, 의용군으로 참전한 조지 오웰은 르포 <카탈루냐 찬가>를 썼다. 국제여단을 다룬 영화로는 켄 로치 감독의 <랜드 앤 프리덤>이 있다. -35쪽

카탈루냐
스페인 북동부 자치지역. 바스크와 함께 대표적인 분리주의 운동 지역이다. 상공업이 발달한 경제 중심지로, 스페인어와 함께 공용어로 쓰이는 고유어를 가지고 있는 등 독자성이 강하다. 19세기 후반부터 사회주의/아나키즘 운동과 자치독립운동의 중심지로 기능했다. 1931년 공화제 실시 후 다시 자치권을 획득했고, 내전에서 인민전선파의 거점으로 최후까지 프랑코에 저항했다. 프랑코 사후 다시 자치권을 얻으면서 급진 민족주의자와 일부 좌파가 독립운동을 벌였다. 화가 피카소, 달리, 미로와 건축가 가우디 등 많은 20세기 예술의 거장을 배출했다.-41쪽

제1차 세계대전 후 미국으로 유입된 이민자의 수는 1920년대에는 43만 명, 1921년에는 80만 명으로 증가했다. 이에 대해 ‘전통적 미국’의 수호를 주장하는 아메리카니즘의 대두나 KKK단의 발호와 같은 배외주의 풍조가 급속하게 강화되면서 1921년부터는 인종차별적인 이민제한 입법이 시행되기에 이른다. 이 법률에 따른 이민자 할당 기준은 영국과 북유럽계에는 유리하고 이탈리아계나 동유럽계 유대인에게는 불리했다. 덧붙이자면, 동양인은 ‘귀화 자격 없는 이민’으로 간주되었다. -45쪽

바이마르공화국(1919-1933)
1차대전으로 독일제국이 붕괴한 후 군부, 관료, 대자본가 등 보수 세력과 사회민주당의 타협에 의해 성립한 민주공화국. 1919년 1월 총선에서 승리한 사회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민주공화파가 연립내각을 구성하고 그해 8월 헌법을 반포하면서 출범했다. 베르사유 조약 체결 후 극우 세력의 카프 반란, 좌파의 루르 봉기 등 반대파의 거센 반발에 시달렸고, 막대한 전쟁배상금 지불과 1923년 프랑스/벨기에 연합군의 루르 점령으로 심한 인플레이션을 겪었다. 1920년대 중반 배상 문제를 일단락하고 다시 선진공업국으로 변모하면서 짧은 안정기를 누렸다. 그러나 국력이 회복됨에 따라 강대한 독일 전선을 꿈꾸는 우익의 권력이 강화되고, 1929년 대공황에 휘말리면서 공화국은 급격히 쇠락했다. 실업자가 급증하고 경제가 파탄 지경에 이르면서 극좌와 극우 세력이 강해졌는데, 분열한 좌파와 달리 우파는 군부, 관료, 자본가뿐 아니라 중산층까지 나치를 중심으로 결집했다. 1933년 1월 나치 정권이 수립되면서 바이마르공화국은 14년 만에 무너졌다.-73쪽

피노체트(1915-2006)
칠레 발파라이소 출생. 1973년 미국 CIA의 지원을 받아 육/해/공군 및 경찰군 총사령관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아옌데 정권을 전복하고 군사평의회 의장에 취임, 1974년 대통령이 되었다. 재임 기간 동안 시카고 대학 출신 경제학자들을 등용해 급진적 신자유주의정책을 시행했으며, 반대 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체포, 구속, 고문, 살해 등으로 악명을 떨쳤다. 1988년 집권 연장 찬반투표에서 패배해 1990년 대통령직을 사임했으나 군 총사령관직은 계속 유지했다. 1998년 영국 방문 중 스페인 성직자 납치/살해 혐의에 따른 스페인 법원의 요청으로 가택연금되었으나, 대처의 지원과 칠레 정부의 요구로 1년 반 만에 칠레로 송환되었다. 그후 수없이 기소되었지만 끝내 법정에 서지 않았고, 2006년 말 자연사했다. 사망 직전, 재임 기간 중 발생한 문제에 대해 ‘정치적 책임’을 느낀다고 밝혔지만 반인권 범죄에 대해서는 인정도 사죄도 하지 않았다. 피노체트에 의해 학살당한 이들은 총 4,00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91쪽

샌프란시스코가 게이들의 수도가 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은 1,600만 명의 미국 젊은이들을 병사로 동원했다. 전쟁은 그들을 가족들로부터 떼어내고 고향 마을에서 대도시로 끌어내어 동성만이 존재하는 환경을 만들었다. 그 결과 수만 명의 남자들이 자신이 오랫동안 감춰왔던, 또는 자신도 깨닫지 못했던 자기 본래의 성적 기호에 눈을 떴다. 군항 샌프란시스코는 태평양전쟁으로 출병하는 최대 근거지이기도 했다. 동성애라는 이유로 군에서 불명예제대를 당한 많은 병사들이 기독교적 도덕관이 지배하는 고향으로 되돌아가지 않은 채 이 관대한 고장에 머물렀던 것이다.-134쪽

다이쇼 데모크라시
다이쇼 천황 재위기간(1912-1926)을 중심으로 일본의 정치/사회/문화 각 방면에서 나타났던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경향. 1905년 러일강화조약 체결에 반대한 시민운동을 시작으로 군비확장 반대, 악세 폐지운동 등을 거치면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사회적인 흐름이 형성되었다. 정당내각제 성립, 보통선거제 실시를 통해 정치적 민주주의의 진전이 이루어졌으며 대학 아카데미즘의 확립과 출판/저널리즘의 발전 등 문화적인 자유주의 경향도 확대되었다. 1930년대 들어 군부와 우익단체 등이 의회주의를 부정하는 ‘혁신운동’을 전개하면서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붕괴하고 일본은 군국주의의 길로 치달았다.-145쪽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
미국은 일본의 항복을 앞당기고 군사력에서 소련보다 우위를 점하기 위해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각각 투하했다. 지상 500~600미터 상공에서 폭발한 원폭은 뼈까지 태워버리는 열선과 7km 떨어진 집 유리창까지 날려버리는 폭풍, 그리고 방사능으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초토화했다. 원폭으로 1945년 말까지 히로시마에서 14만 명, 나가사키에서 7만 명이 사망했다. 또한 히로시마에서는 부상 13만 명, 완전 연소 및 완파 가옥 6만 2천 호, 반소 및 반파 가옥 1만 호, 이재민 10만 명이 발생했고, 나가사키에서는 부상 5만 명, 완전 연소 및 완파 가옥 2만 호, 반소 및 반파 가옥 2만 5천 호, 이재민 10만 명이 발생했다. 징용 혹은 포로로 끌려간 조선인과 중국인 피폭자도 7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들 비일본인 피폭자는 오랫동안 일본 정부의 피폭자 원호정책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고통을 홀로 감수해야 하는 이중의 피해를 겪었다.-181쪽

‘죽음’을 스스로의 것으로 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자유와 해방을 쟁취한 가네코 후미코. 그녀의 싸움은 근대 일본에서 거의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국가에 대한 개인의 독립투쟁이었다.
-187쪽

(하세가와 데루)
원한다면 나를 매국노라고 욕해도 괜찮습니다. 나는 결코 두렵지 않습니다. 타국을 침략하는 것도 모자라 죄 없는 난민들 위에 태연자약하게 이 세상의 지옥을 만들어 내고 있는 자들과 똑같은 나라에 속해 있다는 사실, 그것을 나는 더 큰 수치로 여깁니다. 참다운 애국심은 결코 인류의 진보와 대립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배외주의일 따름입니다. 그러나 이 전쟁 속에서 얼마나 많은 배외주의자들이 일본에 생겨났습니까?(중국의 승리는 전 아시아의 미래를 여는 열쇠다-일본의 에스페란티스트에게 보내는 편지)-190쪽

우리 에스페란티스트들에게 민족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민족이란 단지 언어, 습관, 문화, 피부색 따위의 차이를 뜻할 따름이다. 우리는 서로 ‘인류’라는 하나의 대가족에 속한 형제라고 생각한다. (......) 우리 역시 자신의 조국을 깊이 사랑한다. 하지만 그 조국애는 타민족에 대한 사랑과 존경과 양립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 지금 내 앞에는 자유의 바다가 가로놓여 있을 뿐이다. 바다는 나를 조국으로부터, 친구들로부터 갈라놓는다. 그러나 동시에 나를 새로운 생활로, 새로운 친구들에게로 이끌어줄 것이다. 안녕, 나의 조국이여, 나의 친구여.(<투쟁하는 중국에서>-하세가와 데루)
-191쪽

안우생
안중근의 막내동생 안공근의 장남. 해외에서 항일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동시에 에스페란토를 통한 문학활동으로 민족해방과 항일의식을 고취했다. 1910년 안중근이 처형된 후 일가족은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했다가 1919년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다시 상하이로 옮겼다. 안우생은 임시정부에서 운영하던 인성학교를 거쳐 베이징 복건대학과 광둥 중산대학에서 수학했다. (......) 해방 후 김구의 대외담당비서로 활동하며 김구의 남북연석회의 참석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 뒤 행방이 묘연했으나 1991년 북한에서 사망 소식이 발표되었다. -195쪽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안중근은 법정에서 자신은 "한일 친선을 방해하고 동양 평화를 어지럽힌 장본인" 이토 히로부미를 의병 중장의 자격으로 제거한 것이라고 밝히며 이토 히로부미 사살을 ‘동양 평화를 위한 의로운 전쟁’으로 규정했다. 그가 1910년 2월 밝힌 동아시아 평화구상은 뤼순을 개방해 한중일 3국이 동아시아 평화회의체를 세울 것, 뤼순에 3국이 공동으로 은행을 세우고 3국 공용화폐를 발행할 것, 3국 연합군을 창설해 서양 침략에 맞설 것 등 5가지 주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세계적, 지역적 차원의 협력기구 등장에 수십 년 앞서 역내국들의 협력과 통합을 제시한 것이자, 일본이 평화지향적 국가로 탈바꿈해야 한다는 바람이 담긴 구상이다. 안중근은 자서전을 쓴 후 1910년 3월 15일부터 이러한 구상을 담아 <동양평화론>을 썼지만, 안타깝게도 11일 후 사형이 집행돼 <동양평화론>은 머리말과 1장 일부만 작성되었다.-235쪽

김구와 안중근 가문의 인연
김구와 안중근 가문의 인연은 임시정부에서 다시 맺어져 해방 후까지 이어졌다. 감옥에 갇힌 아들 안중근에게 "살려고 몸부림하는 인상을 남기지 말고 의연히 목숨을 버리라"고 당부한 조마리아 여사는 상하이 독립운동계의 정신적 대모였으며, 동생 안정근은 연락과 재정 업무를 담당한 임시정부의 핵심으로 해방 후에는 김구의 밀서를 들고 김일성, 김두봉과 만나 남북연석회의를 이끌어냈다. 막내동생 안공근도 김구의 최측근으로 활약했으며, 김구의 대외담당비서로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연석회의 참석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김구 암살 후에도 민주화외 통일운동에 앞장선 안중근 가문은 그러나 5.16 후 군사정권에 의해 반국가사범으로 몰려 안경근이 7년형을, 숙부 안태건의 손자 안민생이 10년형을 선고받는 등 탄압을 받았다.-241쪽

조선어학회사건은 해방 후 한국에서 일본 식민지시대의 대표적인 탄압사건으로 이야기되어 왔다. 그러나 그 중심인물인 이극로에 대해서는 대개 간단히 언급하는 정도에 그쳤다. 그 이유는 그가 ‘월북자’였기 때문이다.
-264쪽

제2차 세계대전 후 전범으로 처형된 일본군 관계자 984명 가운데에는 조선인 23명과 타이완인 21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배의 희생자일 조선인과 타이완인들이 왜 일본군의 전범으로 죽어야만 했을까. 일본 후생성에 따르면 일본군에 군인/병사로 소속되었던 조선인의 수는 11만 6천명 남짓이었으며, 이와는 별도로 약 12만 6천 명의 군속이 근무했다고 한다. 총 24만 명 이상의 조선인이 전장에 끌려나갔던 것이다.
-268쪽

국민총력조선연맹
일본의 대륙 침략을 지원하기 위해 조직된 한일합동단체. 침략전쟁 선전, 전시공출 독려, 학도병지원 선동 등 노골적인 친일행위를 주도했다. 국민협회, 시중회, 조선기독교연합회, 조선불교중앙총리원, 천도교중앙총리원, 조선문예회, 조선상공회의소 등의 단체와 윤치호, 천도교의 최린, 여성계의 김활란, 재계의 박흥식, 언론사주이던 동아일보의 김성수와 조선일보의 방응모, 김사량과 함께 중국 전선에 파견되었던 시인 노천명, 음악가 홍난파 등이 참여했다.-280쪽

생체실험 의혹
의문에 싸여 있는 윤동주의 사망 원인으로 제시되는 것 중 하나가 생체실험 의혹이다. 윤동주와 같은 형무소에 갇혔던 고종사촌 송몽규의 증언에 따르면, 두 사람은 윤동주가 죽기 얼마 전부터 매일같이 규슈제대 레지던트들에게 이름 모를 주사를 맞았으며, 그 주사를 맞고부터 살이 빠지고 걸음이 느려졌으며 물체도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송몽규 역시 윤동주가 죽은 한 달 후에 세상을 떠났다. 한국문학 연구가 고노 에이지는 1980년 그 주 사의 성분이 당시 규슏제대에서 실험하던 혈장 대용 생리식염수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혈장 대신 소금물을 주입해 신체가 견딜 수 있는 한계를 측정하는 생체실험이자, 전쟁에서 다친 병사에게 귀한 혈장 대신 값싼 생리식염수를 사용하는 방법을 연구한 실험이라는 것이다. -287쪽

동백림 사건
1967년 7월 8일 중앙정보부가 유럽 거주 예술인 등 194명이 동베를린을 거점으로 간첩 행위를 했다고 발표한 사건. 윤이상을 비롯해 화가 이응로, 시인 천상병, 한일회담 반대 운동을 펼쳤던 김중태/현승일 등이 이 사건에 휘말렸다. 박정희 정권은 이 사건을 이용해 부정선거 규탄시위 등을 잠재우고 3선개헌과 장기집권의 초석을 만들었으며, 유럽 거주 관련자 17명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독일과 프랑스의 공식적인 항의를 받기도 했다. 관련자들은 북한 방문, 금품 수수 등은 인정했지만 간첩혐의는 부인했다. 핵심인물로 분류된 34명은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 등으로 유죄를 선고받았으며, 정규명 등 2명에게는 사형이 선고됐다. 국제적 항의가 빗발치자 박정희 정권은 3선개헌 작업이 마무리된 1970년까지 관련자를 모두 특사로 석방했다. 2006년 1월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중앙정보부가 의도적으로 기획한 것은 아니지만 피의자들에게 간첩죄를 무리하게 적용하고 범죄 사실을 확대 과장했다’고 발표했다.-308쪽

1910년의 ‘한일합방’에 의해 그때까지 대한제국의 신민이었던 조선인들은 모두 일본 신민이 되고 말았다. 조선인들이 일본에 옮겨가 살게 된 것은 기본적으로는 일본의 식민지배로 말미암은 경제적 궁핍 때문이었고, 그 뒤에는 탄광과 광산, 그리고 군수공장 등으로 강제연행 되었기 때문이었다. 전쟁 말기에는 일본 내지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수가 약 240만 명에 달했는데, 그중 약 60만 명은 일본의 패전 뒤에도 일본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1952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발효와 더불어 그들에게 법무부 민사국장의 일방적인 통보로 ‘일본 국적 상실’을 선고한다. 자신의 의사에 반해 일본의 신민이 되어버렸던 이들이 이번에는 다시 국가에 의해 마음대로 국적을 빼앗기게 되었던 것이다. -3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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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 A N O A

 

이야, 이거 생각보다 재밌네요^^

n과 o는 같은 디자인이 나왔어요.

좀 더 다양한 걸로 해보면 예쁠 것 같아요. 이를테면...

 

A L A D D I N

같은 d인데도 다르게 묘사가 되는군요. 제 이름의 'n'하고도 구별되구요. 와, 재밌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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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춘 2007-11-10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글자 클릭했더니 멀리 날아가요.
I자는 좀... 엄머...

마노아 2007-11-10 08:55   좋아요 0 | URL
담배 꽁초 같기도 한 것이^^ㅎㅎㅎ
요게 랜덤이어서 할 때마다 같은 문자도 모양이 바뀌더라구요. 은근 재밌어요^^ㅎㅎㅎ

무스탕 2007-11-10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네요. 마노아의 M 멋져요 *_*

마노아 2007-11-10 12:01   좋아요 0 | URL
저는 알라딘의 첫번째 D가 탐났어요^^

웽스북스 2007-11-10 23:36   좋아요 0 | URL
전 알라딘의 i요

마노아 2007-11-11 10:34   좋아요 0 | URL
i가 많이 귀여워요^^ㅎㅎ
 



 
번개와 벼락의 차이는? [제 678 호/2007-11-09]
 

지난 8월 러시아 일간지 ‘프라우다’는 벼락을 사랑으로 이겨낸 한 부부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시베리아 남서부 쿠즈바스의 벨로보 마을에 사는 사포발로프스 씨 부부는 어린이 캠프에 참가 중인 딸을 만나러 갔다가 마을 외곽에 있는 강가 풀밭에 앉아 쉬고 있었다. 이때 하늘이 시커멓게 변하더니 갑자기 천둥이 쳤다. 겁에 질린 아내는 남편에게 바짝 몸을 기댔다. 아내를 안심시키려던 남편은 아내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런데 입술이 맞닿는 순간 벼락이 두 사람을 덮친 것이다.

보통의 경우라면 이들은 즉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부부는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남편의 몸에 들이친 번개가 아내의 몸을 지나 땅으로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키스한 순간 서로 달라붙은 몸이 도체처럼 작용, 충격이 반감됐다는 얘기다. ‘사랑의 힘’이 번개를 이긴 셈이다. 부부의 사랑을 제대로 확인시켜 준 번개, 그것에 대해 알아보자.

번개는 보통 적란운, 즉 소나기 구름에서 발생한다. 구름 내부에는 작은 물방울이나 얼음 알갱이가 존재하는데 이들이 움직이고 서로 부딪히면서 전하가 발생한다. 작은 물방울은 상승기류를 타고 올라가다 물방울(얼음)은 음전하로, 주변 공기는 양전하로 대전된다. 그 외에도 구름 속 얼음 알갱이들이 깨지거나 서로 부딪힐 때 마찰전기가 생기기도 한다. 미국의 과학자인 워크맨과 레이놀즈는 얼음 알갱이와 과냉각 물방울이 공존할 때 많은 전하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실험을 통해 알아냈다.

대체로 적란운의 상층부에는 양전하가, 하층부에는 음전하가 모인다. 상층부와 하층부의 전위차가 일정 수준을 넘으면 순간적으로 전류가 흐르는 방전 현상, 즉 번개가 나타난다. 번개는 이 같이 구름 속에서 나타나는 전위차 때문에 생기고, 90% 이상의 번개는 구름 속에서 친다.

가끔 구름과 땅 사이에서 이런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것이 ‘벼락’이다. 즉 번개 중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번개가 벼락이다. 많은 전하를 가진 구름이 물방울이나 얼음이 밀집한 지역, 즉 음전하가 강한 곳을 지날 때 구름의 음전하는 더욱 강해진다. 이렇게 되면 구름 속의 음전하들은 지상을 향해 움직인다. 이를 ‘선도낙뢰’라고 부른다. 선도낙뢰는 빛이 나지 않는다.

구름속의 음전하가 서서히 내려오면 지면은 양전하로 유도된다. 구름에서 동아줄처럼 내려온 음전하와 지면의 양전하가 마침내 만나는 순간 엄청난 기세로 양전하가 위로 솟구친다. 이를 ‘귀환낙뢰’라고 부른다. 이 순간 음전하의 흐름이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빛으로 나타난다. 선도낙뢰는 한 번 치는 데 0.02초 걸리지만 귀환낙뢰는 0.00007초밖에 안 걸린다.

벼락이 칠 때는 땅을 향해 곧장 직선으로 떨어지지 않고 지그재그를 그리며 떨어진다. 이는 벼락이 온도나 습도 등 당시 기상 조건에 맞게 가장 빨리 움직일 수 있는 길을 더듬기 때문이다. 마치 고성능 내비게이션을 장착한 것처럼 이리저리 움직이며 전류가 가장 빨리 흐를 수 있는 길을 찾아내는 것이다. 벼락이 칠 때 맨 처음 친 길을 따라 전하의 흐름이 몇 번 반복되는 이유다.

흥미로운 점은 ‘벼락이 어떻게 절연체인 공기를 뚫고 지상을 엄습하는가’이다. 비유하자면 고무장갑을 끼었는데도 감전 당한 이유를 찾는 것이다. 열쇠는 번개의 엄청난 힘에 있다. 번개가 한 번 칠 때 전압은 보통 10억 볼트(V)에 이른다. 가정의 전압이 220V이고 초고압선도 수십만 볼트를 넘지 않는다는 점을 볼 때 번개의 전압이 얼마나 높은지 짐작할 수 있다. 벼락 치는 순간 흐르는 전류는 5만 암페어(A). 전압과 전류를 에너지로 환산하면 100W 전구 7000개를 8시간 동안 켤 수 있는 어마어마한 양이다. 또 벼락의 온도는 태양표면 온도(6000도)의 4배가 넘는 2만7000도에 이른다.

지구상에 번개가 가진 높은 전압과 온도를 완전히 방어할 수 있는 절연체는 없다. 공기라는 ‘울타리’는 있지만 이를 가볍게 부술 만한 힘이 번개에 있는 셈이다.

막을 수 없다면 피해야 한다. 벼락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의 높이를 주위보다 최대한 낮추는 것이다. 나무 옆에 자리를 잡거나 서서 평지를 걷지 않는다. 낚싯대나 골프채, 우산처럼 막대형 물건을 들고 있지 않는다. 여러 명이 무리지어 있는 것도 피해야 한다. 빗물 웅덩이 주변도 위험하다.

야외에서 벼락이 칠 때 가장 안전한 곳은 어디일까. 놀랍게도 금속으로 온통 뒤덮여 있는 자동차 안이다. 벼락이 자동차에 내리치면 전류가 차 표면을 따라 땅으로 흘러내리기 때문에 탑승자는 보호받는다.

최근엔 흥미로운 연구결과도 나왔다. 지금까지 설치돼 온 피뢰침의 끝이 너무 뾰족하다는 내용이다. 미국의 랭미어 대기연구소는 7년간 다양한 모양의 피뢰침으로 실험한 결과 “지름이 12.7mm에서 25.4mm에 이르는 피뢰침이 뾰족한 피뢰침보다 벼락을 훨씬 잘 빨아들였다”고 말했다. 앞으로는 고층건물마다 속이 채워진 빨대 같은 피뢰침이 세워질 날이 올지도 모를 일이다. (글 : 이정호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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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11-09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개와 벼락의 차이점을 알고 싶었는데 마침 해답을 들었네요.
그런데 벼락을 사랑으로 이겨낸 부부의 이야기는 대단합니다.

마노아 2007-11-09 22:06   좋아요 0 | URL
벼락보다 짜릿한 사랑을 이 부부가 보여주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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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7-11-09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어 그런가요? 전 리뉴 예전에 사건 터지고나서는 일부러 리뉴만 빼고 사는 중인데~ 이제 문제가 없겠죠?

마노아 2007-11-09 14:38   좋아요 0 | URL
저도 그때 의심스러워서 조심스러웠는데, 물어보니 이름이 다르더라구요. 뉴스에 나왔던 문제시된 제품은 리뉴는 맞는데 세분화된 이름이 달랐어요. 그래서 그냥 안심하고 써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