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를 기르다 청년사 작가주의 1
다니구치 지로 지음, 박숙경 옮김 / 청년사 / 2005년 9월
평점 :
품절


이 작품은 작가의 실제 경험에 근거해서 나온 이야기이다. 작가가 15년 동안 키우던 개가 죽고 얼마 뒤, 장편을 기획했지만 과감히 버리고 마지막 일년의 시간만 그리기로 결정했단다.  결과는 오히려 더 좋았다.  많은 호평을 받았고 굵직한 상도 받았다.

부부가 14년 동안 가족으로 지내온 개 탐탐은 이제 늙어 다리에 힘도 없고 산책을 할 때에도 줄로 몸의 무게를 덜어주어야 할 정도로 힘에 부쳐 한다.  집 안에서는 절대로 볼일을 해결않던 탐이 차차 실례를 하게 되고, 몸에는 욕창도 생겨버린다. 음식물을 넘기지 못해 영양제에 의지하기까지 탐은 끈질기게 생명을 놓지 않는다. 자신의 최후의 최후까지 온전히 다 지켜보려는, 감당하려는 눈빛을 하고서 말이다.  결국 탐은 14년 하고도 10개월을 더 살고서 세상을 떠났다. 한 생명의 시작과 끝을 올곧이 지켜본 부부의 마음에 큰 멍울이 생겨버렸다.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회한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일년의 시간이 지나고, 이번엔 얼떨결에 페르시안 고양이를 키우게 되었다.  흔히 알고 있는 고양이의 습성과 달리 녀석은 좀 게으른 편이었다.  알고 보니 뱃속에 새끼를 갖고 있었던 것인데, 세마리의 귀여운 새끼 고양이가 이어서 태어난다.  새끼가 생기자 고양이는 모성본능을 제대로 보여준다.  네 마리의 고양이를 키울 수가 없어서 두 마리는 다른 집에 보내기로 했지만, 가장 귀여웠던 키키만 성공적으로 보내고 다른 아이들은 여차저차하다가 함께 키우게 되었다.

개도 기르고 고양이도 키워보았지만 자식이 없는 부부에게는 은연중 그늘이 생겨버렸다. 사춘기에 접어든 조카 아이가 방학을 이용해 와 있는 동안, 부부는 더 화기애애해진 집안의 분위기를 실감한다. 그러나 인력으로 어쩔 수 없는 일.  작품은 큰 굴곡 없이 감정의 기복 없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이들의 이야기를 마친다.

가장 인상 깊었던 이야기는 마지막에 실린 '약속의 땅'이다. 히말라야 등반 이야기인데, 그곳에서 젊은 날 만났던 눈표범과의 감동적인 재회 이야기.  산을 알지 못하는 나지만, 산을 향한 주인공의 열망과 그리움은 쉽게 이해가 갔다.  이제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지만 산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을 접기는 힘이 들었다.  동물원에서 만난 우리에 갇힌 표범을 보고서, 자신 역시 우리에 갇힌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주인공.  그 마음을, 아내가 먼저 알아차린다.  그리고 반드시 살아돌아오라는 약속을 새긴 채 히말라야로 남편을 보내준다.  나이 마흔이 되어, 젊어서도 성공하지 못했던 히말라야 등반을 성공시킨 주인공.  그리고 거기서 환영처럼 기억에 남아있던 눈표범을 다시 만난다.  산을 사랑해야 오를 수 있지만, 살아 돌아가기 위해서는 산이 사랑해 주어야 한다는 말이 가슴에 남는다.

두런두런, 조용조용, 잔잔한 감동을 주는 다니구치 지로의 이야기를 만났다.  작가의 다른 책들도 찾아보련다.  사랑받는 이유를 나 역시 알 듯 하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오기 2007-11-17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일본 작가들이 많이 낯설어서... 개 이야기는 게리 폴슨은 '개와 나의 인생', 고양이 이야기는 엘케 하이덴라이히의 '검은 고양이 네로'가 아주 좋았어요.
알라딘 서재는 좋은 책을 소개받는 즐거움이 최고겠죠! 그중에도 마노아님 서재에서 듬뿍... ^^

마노아 2007-11-18 10:29   좋아요 0 | URL
저야말로 순오기님께 많은 책을 소개받고 있죠. 개와 나의 인생도 찾아봐야겠어요. 검은 고양이 네로는 우리에게 노래로 익숙한 그 책일까요? 어떤 그림일지 궁금해요^^

2007-11-18 1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18 17: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18 18: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19 0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19 08: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L.SHIN 2008-04-02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헤헤헤...(>_<)
왜 웃는지 아시죠?

마노아 2008-04-02 14:22   좋아요 0 | URL
나도 에헤헤헷, 나도 읽으면서 에쓰님 잔뜩 떠올렸죠. 게다가 지금 이미지 사진과도 딱 맞아 떨어지네요. 기막힌 타이밍. ^^
 
온 1 - 애장판
유시진 지음 / 시공사(만화)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온라인 만화로 이미 보았지만 다시 차분하게 만나고 싶었던 온이다.

작품엔 두 명의 주인공이 두 가지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현대판 하제경과 이사현. 그리고 온의 세계에서의 나단과 사미르.

하제경은 판타지 소설 작가이고, 이사현은 동화 일러스트레이터다.  같은 도시에 살고 있다는 것을 핑계 삼아 자주 이사현을 찾게 된 하제경.  그의 모습에서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작품 속 주인공의 모습을 발견하며, 그것이 실마리가 되어 두 사람을 이어주는데...

새 작품의 세계는 '온'이라는 공간이다.  그곳은 물질 세계로 대변되는 '데온'과 정신 세계로 풀이되는 '에온'이 존재한다. 마치 성리학에서 '이'와 '기'의 세계를 보는 느낌이랄까.  에온의 최고 사제이자 수장인 사미르.  그는 온의 세계에서 계승서열도 높은 이였지만 욕심이라곤 없는 사람이었다.  그와 나단은 3년 동안 사제지간으로 묶여있는데, 에온을 인정하지 않는 나단은 자꾸만 사미르를 도발시키지만 궁극의 평화를 알고 있는 사미르는 결코 넘어가는 법이 없다.

처음 하제경은 이야기를 멀찍이서 바라보며 잘 진행시키지 못했는데 이사현의 충고로 1인칭 시점-나단의 눈으로 작품을 끌어낸다.  어느덧 작품 속 나단은 하제경이 되어 있고, 사실상 나단은 그 자신이기도 했다.(본인이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이렇게, 현실의 이야기와 '온' 세계 속의 이야기가 겹치는데, 왜 그들이 이 세계로 나와버렸는지(혹은 쫓겨나거나 도망쳤는지), 왜 하제경은 나단으로서의 자아를 기억하지 못하는지, 또 사미르의 제자인 젤(이사현의 고양이 디)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는 지가 3권에 걸쳐 차분히 진행된다.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 모르겠는데, 뒷권으로 갈수록 페이지가 두춤해진다.  작품의 표지는 판타지 느낌이 물씬나는 문양으로 덮여 있는데 '온'이라는 제목에서 이미 포스가 강하게 느껴진다.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세계에 대한 동경과 갈망, 그것을 깨부수거나 혹은 차지하고 싶었던 욕망, 또 사랑이 지나쳐 희생을 가져온 순애보까지.  작품 속에서 인간의 많은 감정을 함께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너무나 무심한 눈으로, 무욕의 소유자였던 사미르는, 그러나 이사현으로 살아야 하는 천형을 받게 되면서, 원망보다도 그저 알고 싶은 궁금증이 있었다.  그리고, 작품의 끝에서 그는 원하던 답을 얻는다.  원래부터 욕심이 없었던 그는 '불행하지 않다' 정도로 만족하는 인물이었지만, 이제는 '행복하다'가 뭔지 아는 사람이 되어 있지 않을까.  이제는 한 인간으로서도 그는 자유를 배워나갈 것이다.  나단이었던 하제경도, 그리고 젤이었던 디 역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눈뜬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눈먼 자들의 도시 완결편 '눈뜬 자들의 도시'다. 앞의 책에서 작품의 배경이 어디인지 전혀 알려준 바가 없었는데, 이번 작품을 통해서 작가의 고국인 포르투갈이 배경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시간적 배경은 도시 전체가 한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눈이 멀어 버렸던 바로 그때로부터 4년 뒤의 일이다.  이번엔 도시가 온통 암흑으로 변해버리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때만큼이나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지니 백지투표 사건이 그것이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에 있었던 선거일.  그 투표장에서 우익 정권의 표가 손 꼽을 만큼 나오고 중도표는 그보다 적게, 좌익 표는 더 적게 나왔다. 그리고 무려 70%가 백지 투표였다.  당황한 정부는 날짜를 바꾸어 재토표를 선언해 보지만 앞서보다 더 처참한 결과가 나온다. 무려 83%의 백색투표가 나왔던 것.

정부는 회의에 회의를 거듭하지만 딱히 답이 없다.  그들은 도시 전체에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시민들을 남겨둔 채 몰래 도시 밖으로 빠져나간다.  그리고는 버려진 수도를 향해 치안부재 상황에 대한 협박을 내지르나, 도시는 여전히 평화로웠고 일상의 삶을 유지해 나간다.  약이 오르는 것은 정부쪽.  살인, 방화 기타 등등의 범죄가 판을 칠 것이라 여겼는데, 도시와 그곳의 시민들은 스스로 나가버린 정부 따위 안중에도 없는 것이다.  뭔가 극적인 반전의 순간을 마련하길 원했던 정부는 열차 폭파 사건을 일으켜 도시를 전복시키려는 음모 집단이 있다고 죄를 뒤집어 씌우기까지 한다.  이때까지 정부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시장은 이 사건에 회의를 느끼며 사직을 청한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놀라운 편지 세통이 도착한다.  각기 다른 수신자를 가진 같은 내용의 편지는 4년 전 이 나라가 모두 실명 상태에 빠졌을 때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았던 한 여인을 소개한다.  이제 작가의 시선은 전작 '눈먼 자들의 도서'와 겹치기 시작한다.  그때 등장했던 인물들이 다시 나와서 당시 상황을 간단히 언급할 기회도 가진다.  이제 그 뒤를 쫓는 자는 경찰의 경정.  정부의 음모에 따라 그는 이 백색투표의 배후에 눈멀지 않았던 그 여인이 놓여 있다고 몰아가지만, 앞서 시장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행보에 회의를 느낀다.  정부는 치명적인 희생양으로 여인을 점 찍었고, 신문과 방송은 마녀 사냥하듯 그녀를 규탄한다.  경정은 신문사에 기고를 하여 이 일의 부당함을 알리지만 그의 앞에 예정된 끝은 절망에 가까우니 자작극으로 폭파 사고도 일으킬 수 있는 정부가 못할 일이란 보이지 않는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인간이 이룩해 낸 그 문명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무하게 무너질 수 있는지, 인간이 앞장세우는 윤리 도덕이라는 것도 얼마나 쉽게 허물어질 수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는데, 이제 눈뜬 자들의 도시에서도 같은 패턴을 반복한다.  국민을 위해서 존재해야 할 정부는 폭력으로서 제 존재 가치를 증명하려 하고, 제가 받아들일 수 없는 국민의 심판에 대한 불복 역시 폭력으로 해결하려 한다.  그들이 갖고 있는 공권력이란 결국 국민의 손에서 나온 것이고 그들을 다시 끌어내릴 수 있는 것 역시 국민의 선거에 의해서 가능한 것인데, '백지투표'를 통해 그들이 가져야 할 반성이나 책임에는 아무 관심이 없고 오로지 불순분자를 만들어 내어 사회 전체를 공포로 휘감아 공황상태로 만드는 것이 대통령과 총리와 장관들의 태도였다.

그 광기 앞에서 모두가 눈 멀었을 때 홀로 세상을 보았던 한 여인도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그녀의 눈물을 핥아주었던 개 역시 눈을 감는다.   정부의 부재 속에서도 침착한 모습을 보여주는 듯했던 그 도시의 사람들이 한 순간에 이성을 잃고 조작된 진실에 쓸리는 모습에, 황우석 사태나 디워 논란 때 보여진 파시즘적 행태가 겹친다. 

눈을 떠도 진실을 보지 못하고, 진실을 보아도 인정하지 않는 진정한 눈먼 자들의 세상은 아직도, 그리고 이곳에서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으며, 따옴표 하나 나오지 않고 인용문도 없이 그저 서술로만 작품은 진행된다.  대화의 맥을 놓쳐버리면 누구의 대사인지도 알아차리기 힘들어져 작품은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한다.  책도 무겁지만, 마음도 역시 무거워지는 독서였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07-11-17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 놓고 아직도 읽지 못하고 있는 책중의 하나입니다. 흑-

마노아 2007-11-18 10:27   좋아요 0 | URL
저도 오래 묵혔다가 요번에 읽었어요. 눈먼자들의 도시가 훨씬 재밌긴 해요^^

멜기세덱 2007-12-14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살펴보니 4개씩이나 당첨되셨더군요....대박^^

마노아 2007-12-14 14:54   좋아요 0 | URL
히힛, 감사해요. 멜기세덱님을 이제 덜 부러워 하려구요. 푸핫^^
 



 
황당 지구특공대 회의 : 대체에너지 [제 681 호/2007-11-16]
 



어두운 방이었다. 시멘트가 그대로 드러난 벽, 창호지가 발린 작은 창문, 허리를 굽혀야 겨우 지나다닐만한 철문, 그리고 조그마한 원탁 하나. 방을 밝히는 조명은 원탁 한가운데 세워진 작은 촛불 하나뿐이었다. 촛불이 가늘게 일렁이며 원탁 주변을 둘러싼 이들의 그림자를 벽에 드리웠다. 유령처럼 너울대는 그림자는 총 네 개였다.

“우리가 이렇게 모인 이유는 다들 잘 알고 계시리라 믿소.”
그림자1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지막한 중저음이 어울리는 풍만한 체구의 남자였다. 다른 그림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자1은 만족하는 듯 웃으며 원탁을 세 번 두드렸다.

“지금부터 ‘대체에너지를 찾으라’는 주제로 제42회 지구특공대 회의를 시작하겠소. 이번 의장은 미천하지만 이 몸, ‘대’가 맡겠소. ‘공’은 불의의 사고로 참석하지 못 했으니 여러분의 너른 양해 바라오. 그럼, 지구를 구하기 위한 지구특공대 여러분의 고언을 들려주시기 바라오.”

묵직한 저음이 사라지자마자 가느다란 그림자 하나가 손을 들었다. ‘대’가 원탁을 한 번 두드리자 그게 신호인 듯 그림자2가 말을 쏟아냈다. 높고 빠른 목소리였다.

“‘공’이 무슨 사고를 당한 거죠?”
“미국에서 조력에너지를 이용하기 위한 부표 형태의 발전기를 개발했다는 소식은 들어봤을 거요. ‘공’은 실험 현장에 갔다가 그만 바다에 빠졌소. 수영을 못해서 허우적대다 부표에 머리를 부딪힌 게 치명상이라고 하오. 큰 상처는 아니지만 1주일간 입원해야 한다는군.”
“제 친구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어요!”
“오늘 회의의 주제와 관계없는 말은 그만해요, ‘구’. 그렇게 말을 하고 싶으면 발표나 해보시죠.”

쉰 목소리의 남자가 속삭이듯 ‘구’의 말을 끊었다. ‘구’는 헛기침을 하며 서류를 하나 내밀었다. 하지만 너무 어두워 내용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머쓱해진 구는 서류를 집어넣으며 목소리에 애써 힘을 실었다.

“미국 펜실베니아주의 동지들이 제출한 결과물인데요. 바닷물을 태우면 에너지가 발생한다는군요!
“호오? 그건 또 듣다듣다 처음 듣는 소리군요.”
“조사하다 만난 K 박사라는 분이 있는데, 이 분 말로는 자신들이 만든 무선주파 발생기로 바닷물을 태워서 소금을 빼내는 방법을 찾고 있었대요. 그런데 전파 때문에 바닷물의 산소와 수소 결합이 약해져서 수소가 계속 밖으로 나온다고 하는군요. 이 수소를 연료로 이용한다는 거죠!”
“어쩐지 거짓말 같은데….”
“아니에요. 20년 전만 해도 수소전지 자체가 거짓말 같은 얘기였지만 이젠 실용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걸요. 수소를 이용하는 연료전지는 현재 세계 각국에서 개발 중이죠.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 무인비행기용 초소형 수소액체연료 전지가 개발되기도 했죠. 또 2004년 일본 삿포로맥주와 히로시마대 연구팀은 미생물로 빵을 분해해 수소와 메탄을 만들어내는 공법을 개발했어요. 일반적인 메탄 발생용 발효통에 수소 공정도 함께 첨가해 실험한 결과 폐기용 빵 1kg으로 수소 100L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고 해요. 이 연구도 상용화를 목표로 하고 있어요. 즉 K 박사의 연구결과도 활용만 잘 한다면 실용화할 수 있다는 얘기에요.”

‘구’는 의기양양하게 말을 끝맺은 뒤 좌중을 돌아봤다. 그러나 고개를 끄덕이는 이는 의장을 맡은 ‘대’ 뿐, 다른 이들은 자기 연구결과 발표 준비에 몰두하느라 제대로 들어주지 않았다. ‘구’는 “이 모임이 늘 이렇지 뭐”라고 중얼대며 어깨를 으쓱했다. 혀를 한 번 찬 ‘대’가 다시 원탁을 두드렸다.
“다들 집중해주시기 바라오. 이번엔 ‘특’의 발표를 들어보겠소.”

“별건 아니구요…. 그냥 발소리를 이용하는, 그 뭐시기냐.”
‘특’이 더듬대며 말을 꺼냈다. 쉰 목소리의 남자 ‘지’가 “말 좀 똑바로 해라”고 빈정대기 시작했다. 더욱 기어들어가는 ‘특’의 목소리에 ‘구’도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결국 의장이 원탁을 4번쯤 더 두드린 후에야 상황이 진정될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미국 MIT 건축학과 대학원생들이 고안한 신선한 내용이에요. 그…사람들이 다니는 바닥에 압전체를 이용한 발전용 기기를 설치해서 운동에너지를 전기에너지로 바꾸는 방법입니다. 1번 걸을 때마다 60W 전구 2개를 밝힐 정도의 전력이 생산된다고 하네요. 물론 1사람 분으로는 겨우 눈을 한 번 깜빡거릴 정도의 짧은 시간만 버틸 수 있지만, 많은 사람이 드나드는 곳에 설치하면 한 번에 얻을 수 있는 전력량도 늘어나겠죠. 한꺼번에 2만8527보를 딛으면 1초 동안 기차를 움직일 수 있을 정도래요.”
“실현 가능한 얘기요?”
“이탈리아의 토리노 기차역에서 의자에 실리는 몸무게를 이용해 비슷한 실험을 했다고 해요. 2007년 한 재단의 ‘환경을 파괴하지 않고 지속가능한 건설 부문’에 입상했다는 소식도 있어요. 대도시 좋다고 모인 인구를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데다 다른 에너지원을 투자하거나 오염이 발생하지 않으니 ‘꿩 먹고 알 먹기’ 아니겠어요.”

말을 더듬다가도 가끔 쓸데없이 심각해지는 ‘특’의 버릇이 또 나왔다. ‘대’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를 가리켰다. 하지만 너무 어두운 탓에 또 아무도 보지 못했다. ‘대’는 “원탁 두드리는 힘도 어떻게 에너지로 못 바꾸나”라고 투덜대며 원탁을 세게 내리쳤다.

“다음은 ‘지’의 차례요. 발표하시오.”
미국의 한 엔지니어가 집 수영장에 인공태풍을 만들어 에너지를 생산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인공태풍의 원심력으로 웬만한 발전소 1개분의 전력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아쉽게도 아직 확실하지는 않은 정보입니다.”
“그렇다면 소용없는 거 아닌가요? 제가 만난 한 박사님이 태풍을 연구하시는데….”
“잠깐, ‘구’. 내 얘기 아직 안 끝났어요. 사실 태풍에너지는 제대로 이용할 수만 있다면 아주 괜찮은 대체에너지로 쓸 수 있습니다. 풍속이 초속 30m인 태풍 1개의 에너지는 1945년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 1만개 분이죠. 이를 풍력에너지로 바꾼다면 어떻겠습니까. 물론 피해를 최소화하고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찾기 위해서는 아직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가능하다는 관점으로 접근하는 사람이 많다는 얘기죠. 실제 우리나라에서도 정부 차원에서 태풍을 포함한 미개척에너지 분야 연구에 대한 지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지’의 발표가 끝나자 ‘대’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원탁을 3번 내리쳤다.
“알겠소. 인공태풍 얘기가 부족한 건 아쉽지만, 자료가 부족하다니 어쩔 수 없지요. 이로서 오늘 회의를 마치겠소. 각각 문서를 제출해주시오. 의견은 내가 정리해서 수정·보완할 부분을 지시하도록 하지요. 이번에 나온 대체에너지가 만약 상용화된다면 그 때 다시 문서를 제출해주시면 감사하겠소. 다들 수고 많았소.”

그저 의견만 모인 채 회의가 끝났다. ‘서울 지하철 2호선에 발소리 시스템을 갖추면 얼마나 많은 전력을 생산할 수 있을까’는 주제로 ‘구’와 개별 토론을 벌이던 ‘특’이 문득 손을 들었다.
“저…저어 의장님, 의장님은 의견을 아직 말씀하시지 아니한 듯한 느낌이 드는데요?”
“오늘 나온 얘기를 다 정리해서 게시판에 올리는 것만 해도 벅차오. 알면서 뭘 그러는게요.”

‘대’는 한숨을 쉬며 원탁을 다시 두드렸다. 그 소리가 신호인 듯 촛불이 마지막 빛을 깜박이다 꺼졌다. 창문 새로 들어오는 희미한 빛에 의지해 ‘지구특-대’는 몸을 일으켰다. 회의에 나온 정보들이 정말 상용화가 될 수 있을 지, 4명은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중요한 사실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인간과 지구가 공존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대책 없어 보이는 얘기가 정말로 새로운 대체에너지로 이어질 수도 모른다. 무엇보다 ‘뛰어난 실천방법’을 찾느라 백날 고민하느니, 황당한 일이라도 한 번 저지르는 게 백번 낫다. (글 : 김은영 과학칼럼니스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
다이 시지에 지음, 이원희 옮김 / 현대문학 / 200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학수학능력 시험을 치르고 원서를 쓰고 결과를 기다릴 때, 내가 합격하기를 바랐던 학교의 커트라인은 내 성적보다 높았다.  그래도 최종에 최종까지 기다리면 추가 합격이라도 하지 않을까 내심 기대에 고대에 희망을 품고 있을 때에, 만약 합격만 시켜준다면 내가 무엇을 포기할 수 있을까 상상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 내가 스스로에게 가장 큰 의미를 부여했던, 또 나를 가장 즐겁게 했던 행위는 만화책 읽기였다.  합격을 갈망하던 그 순간에는, 평생토록 만화책을 안 볼 수도 있다!라는 나름대로의 거창한, 그러나 말도 안 되는 결심도 해보았다.  결과는 불합격이었고, 나는 재수 기간에도 만화책을 많이 보았다.  물론, 지금도 많이 읽는다.  아마 합격을 했더라면 결심 따위 잊고서 역시 만화책 열심히 보았을 거란 짐작은 충분히 가능하다.  공교롭게도 오늘은 대학수학능력 시험을 보는 날이기도 하다. ;;

왜 갑자기 십년 전 일이 떠올랐냐 하면, 이 책 때문이다.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  발자크도 바느질 소녀도 이 책의 주인공은 아니다.  책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데, 작가의 자전적 소설인지라 작가 자신으로 바로 대입해도 아무 무리가 없을 듯하다.  주인공과 주인공보다 한 살 많은 절친한 친구 뤄는, 부르주아 부모님을 둔 덕분에 '재교육'을 명 받았고, 고작 중학교 를 졸업했을 뿐인데도 지식인으로 분류된 두 사람은 고된 노동을 강요당하며 산골 마을로 흘러들어간다.  양파를 한번 썰면 온 동네에서 다 알아차릴 만큼의 작은 이웃 마을 용징까지 가는데도 무려 이틀이나 걸리는 그런 산골 마을.  그곳에서 뤄와 주인공은 농사를 짓고 탄광 일을 하는데, 그들이 유일하게 갖고 있는 문명의 흔적이라는 것은 바이올린과 자명종 뿐이었다.  불태워질 뻔한 바이올린을 구해내기 위해서 뤄가 보여준 기지가 눈이 부셨는데, 모차르트 소나타를 설명하기 위해서 등장한 '모차르트는 언제나 마오주석을 생각한다'라는 명제엔 웃지 못할 당시의 시대 상황이, 그러면서도 해학을 보여주는 작가의 필력이 같이 깃들어 있다.

두 사람은 간혹 힘든 노동에서 해방될 때가 있는데, 이틀이나 걸려서 이웃 마을에 가서 영화를 보고, 다시 이틀 걸려 돌아온 마을 주민들을 모아놓고 영화의 얘기를 할 때가 그 순간이다.  영화 상영 시간보다 모자라서는 안 되는 이야기의 재포장.  뤄는 이야기의 천재인지라 두 사람은 매 달 4일 간의 해방을 만끽할 수 있었다.  사상과 생각이 강요당하는, 이념적 성격이 강한 영화를 줄기차게 반복할지라도, 산골 마을에서 도심으로 해방될 수 있다는 그 자유가 있는 한, 나라도 고된 걸음걸이를 절대 뿌리치지 못했을 듯하다.

두 사람은 마을에서 가장 예쁜 재봉틀집 소녀에게 반하고, 뤄는 그녀와 연인 관계로까지 발전한다.  언뜻 보면 이들의 성장소설로도 읽힐 이 작품의 또 다른 축은 제목에서도 등장한 '발자크'가 담당하고 있다.  역시 '재교육'을 받기 위해 노동을 하던 안경잡이는 몰래 책을 숨겨두고 있었는데, 그 책의 존재를 안 순간 뤄와 주인공의 눈이 번뜩인다.  그것은 억눌린 자유와 자아의 분출 장치이기도 했고, 무료한 일상으로의 탈출이기도 했으며 무엇보다도 문명에 대한 갈망을 채워주는 달콤한 미끼였던 것이다.  책 한권을 얻어내기 위한 눈물겨운 사투(온 몸을 간지럽히는 이와의 싸움..;;;)도 불사했고, 심지어는 안경잡이가 마을을 떠날 때 숨막히는 절도 행위도 불사했다.  그렇게 해서 만나게 된 발자크, 스탕달, 위고, 뒤마, 롤랑, 루소 등등의 작가들.   문자를 아는 것 조차도 신기했던 그 마을에서, 금서로 분류된 책들과의 조우는 소년에서 청년으로 넘어가는 두 사람과 또 그들이 같이 사랑한 한 소녀의 삶을 온통 뒤흔들어 놓았다.  심지어 재봉틀 기술자인 소녀의 아버지 역시 몬테크리스토 백작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무려 9일 밤을 투자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언급되어진 책들의 우수성도 크게 한몫을 해내었지만, 그곳에선 어떤 책이라도 고귀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작가는 크게 흥분하는 법 없이 차분하게 이야기를 진행시키는데 오밀조밀 올망졸망 사근사근한 재미가 내내 유지된다.  문화대혁명이라는 거창한 이름 하에 희생되었던 이들이지만, 그럼에도 이들은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즐기며, 거기다가 연애까지 한다.  그러나 25세가 되어야지만 결혼이 가능한 그곳에서 열여닯 아가씨가 임신을 했으니 이들이 받았을 충격이 얼마나 컸겠는가.  여기에서 또 한 번 작품은 큰 긴장감을 휘두르는데, 낙태를 해줄 의사와의 만남에서 '발자크'가 다시 한 번 큰 일을 해낸다.  금지된 그 이름에서 의사와 주인공이 함께 느낀 동질감과 안도감 그리고 서러운 감정이 독자에게도 진하게 전달되고 만다.  아마도 그 순간 바이올린을 갖고 있었더라면 레퀴엠 한 곡조를 뽑아냈을지도 모르겠다.

발자크는 뤄와 소녀의 사랑을 이어주는 좋은 매개체가 되었지만, 동시에 두 사람의 이별을 만들어내는 중추 역할을 해낸다.  책을 통해 만난 새로운 세상, 문명, 사랑까지...  매력을 넘어 마력을 지닌 그것들을 향한 동경은 그들의 풋풋한 사랑으로도 막지 못했다.  사랑을 잃어버리는 순간, 우정에 배신당하는 순간 책들은 분서대로 향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니, 그렇게 그들은 한 세대를 마감하고 이제 어른이 될 것이다.   시간이 흘러 문화대혁명은 중국 사회의 총체적인 후퇴를 낳았다는 것이 기정사실이 되어버렸고, 그 시절을 온몸으로 겪은 주인공들은 그때를 떠올리며 씁쓸한 웃음을 지을 것이다.  그러나 불타버린 발자크와 뒤마는 여전히 그들의 가슴 속에서 뜨겁게 살아있을 것이다.  청춘과 성장이라는 낙인과 함께.

간혹, 그런 상상을 해볼 때도 있다.  무인도에 떨어졌을 때, 혹은 그에 준하는 고립된 공간에 갇혀 있을 때.  무료한 시간을 달래고 공포로부터 주변 사람들을 지켜주고 싶을 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아마도, 나는 '이야기'를 택할 것이다.  그것이 동화든, 소설이든, 영화든, 만화든... 어떤 이야기든지 쉬지 않고 떠들며 우리의 시간을 견뎌내게 만들 것이다.  기왕이면 재미나고 희망을 주는, 큰 웃음도 줄 수 있는 이야기를 골라야 할 테지.  어떤 이야기를 말할 수 있을까.  머리 속에 스쳐가는 제목들이 있다.

김혜린의 비천무, 신일숙의 아르미안의 네 딸들, 황미나의 안녕 미스터 블랙,
박민규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또 향수, 사신 치바, 눈먼 자들의 도시 등등...
그리고, 이 책도 같이 기억하고 말하련다.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  누군가 바이올린을 연주해 준다면 더없이 좋겠다.  그러면 나는 말할 것이다.  바느질하는 소녀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