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움직인 리더십 천재들 - 어린이를 위한 가치 인물 시리즈 1
정영화 지음, 최숙희 그림 / 스콜라(위즈덤하우스)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어린이를 위한 책답게 쉽고 재미있게 잘 서술되어 있다.  책의 내용상 교훈을 주는 것도 물론이다.
남극탐험에 도전했던 새클턴에게선 낙관주의 리더십의 대표주자로 내세웠는데, 그의 낙관주의가 대원들을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극한 상황에선 너나 할 것 없이 두려움에 떨게 될 테지만 리더는 그럴 수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누구보다 의연해야 하고 살아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끊임 없이 주지시켜야 한다.  그런 면에서 새클턴은 최고의 리더였고, 몸소 실천으로 그것을 보여주었다.
그를 상징하는 녹색에서 희망과 편안함을 독자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시저는 개인적으로도 아주 좋아하는 인물이다.(그런데 '카이사르'라고 표기해야 하지 않을까? 시저는 영어식 표현이다.)
로마인 이야기에서 카이사르 편은 흠뻑 빠져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가 루비콘 강을 건널 때의 일화는 몹시 인상적이었다.  대의나 공의를 위해서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다. 그는 솔직하게 자신의 명예를 지켜달라고 했고, 그간에 쌓아왔던 믿음이 병사들로 하여금 그의 뒤를 따르게 하였다.  그렇게, 역사를 움직인 인물인 것이다.  그야말로 '동기부여 리더십'의 최강자라고 할 수 있겠다.  그를 나타내는 색깔로 충성스러움과 책임감을 뜻하는 파란색을 고른 것은 설득력 있다.
카이사르 편의 이야기는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되었는데, 현대에서 건너간 기자와 카이사르의 대화가 재미있었고 좀 더 피부 가까이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황희 정승은 '서번트 리더십'으로 내세웠다.  타인을 위한 봉사에 초점을 맞추고 헌신하라가 그의 주제다. 희곡의 형식으로 일반 백성들의 대화로 이야기를 끌어 나가는데 황희에 대한 느낌이 입체적으로 전달된다.  "사화로 보는 조선 역사"를 보면 황희 정승에 대한 에피소드가 많이 나오는데, 실록을 살펴 보더라도 기대에 못 미치는 부분들이 더러 있다.  공직자의 청렴결백과 검소함을 최고 미덕으로 여기던 조선시대의 대표 정승으로서는 아닌다 싶다.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이 정도로만 알려주는 게 적당하지 않을까 싶다.

몬테소리는 소외된 이에 대해 열린 눈으로, 배려를 베풀어준 '배려 리더십'의 대표 인물이다.  자신의 일기 형식으로 이야기를 진행해 나가는데, 그녀의 성장과정과 당시 사회적 분위기가 어떠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게 해준다.  우리가 자주 보곤 하는 몬테소리 교육/유치원 등등의 그 주인공을 만날 수 있는 기회였다.

정주영은 도전적 리더십의 주인공으로 빨강색을 상징으로 했다.  고아원 아이들을 방문한 노사업가의 연설을 가상으로 꾸민 내용이었다.  "발상의 전환을 통해 꿈을 키우고 도전하라!"는 그의 메시지가 카랑카랑하게 울리는 듯하다.  다소 아이들에게 전달하기 어려운 문장이 있었고, 아이답지 않은 질문이 있었는데 거칠고 투박하지만 역시 어린이의 눈높이에 잘 맞춘 내용이라고 하겠다.

선덕여왕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이다. 당시 신라의 정세를 주변국들과 맞춰 살펴볼 수 있게 해주었고 여왕의 지혜로움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에피소드들이 소개되었다. '자애로운 리더십'이 그녀의 주제인데,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자애보다는 '현명, 지혜'쪽이 더 어울리지 않나 싶다.

이 책을 보고서 아이들이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관심과 감각을 가지고, 또 주제로 나타나는 리더십에 대해서 충분히 공감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교육적으로 좋은 메시지를 전달해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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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의 은밀한 사생활 - 탐미의 시대 유행의 발견, 개정판
이지은 지음 / 지안 / 2006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작년 생일 선물로 받은 책인데 꼬박 일년 지나서 읽고 말았다. 그나마도 리뷰는 거의 한달이 다 지난 시점에서 쓰게 되다니... 그렇지만 몹시 재밌게 읽었고 지적충만감에 포식했던 즐거운 책이었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제목에서 '은밀한'이라고 방점을 찍어서 낯간지러운 상상도 좀 해보았지만 그런 기대로는 전혀 충족을 시켜줄 수 없는 책이었다. 나름대로 자극적인 제목을 썼지만 '알려지지 않은 프랑스 귀족 문화 미시사' 정도가 이 책의 진짜 정체라고 할 수 있겠다.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의 시간을 훑어보고 있는데, 앞시절부터 전해져온 그림이나 판화, 가구와 같은 오브제에서 그 시절의 역사와 문화, 풍습을 읽어 내려가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짐작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내용들이 많이 담겨 있는데, 우아할 것 같았던 왕의 식사 풍경이 시장 장터 같은 분위기를 자랑(?)한다던지, 그들의 여행이라는 것이 거의 피난민 수준이었다는 것은 놀랍기도 하면서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그 시절 유럽의 식수라는 게 워낙에 열악했고 목욕 문화가 정착되어 있지 않다는 것도 익히 알고 있었지만, 저 대단하다는 태양왕 루이 14세도 일생동안 스무 번 남짓만 목욕 횟수를 자랑했고, 그나마 일반인들은 평생동안 단 한 차례도 목욕을 하지 못하고 살았으니, 조선 시대 우리네 민중들은 청결로 치면 꽤나 바람직한 습관을 지녔다고 할 만 했다.

책의 흐름이 시간 순서를 따르고 있고 공간적 배경이 궁궐과 귀족들의 생활상이 많이 차지하기 때문에 역사적 인물들의 등장과 행보에 대해서도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루이 14세와 루이 15세의 애첩, 그리고 너무도 유명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역시나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고 있던 많은 부분들이 착각되어진 부분들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는데,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죽어간 왕과 왕비의 모습이 특히나 기억에 오래 남는다.  루이 16세가 악의적 루머에 의해서 조작된 것처럼 멍청한 바보가 아니었고, 마리 앙투아네트 역시 소문처럼 사치에 눈 먼 여자는 아니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죽음에 아무 위로가 되지 않을 테지만 조금 더 애도를 표할 수 있는 근거는 될 수 있었다.

책에는 펼침 메뉴로 그림들이 실려 있는데 앞면엔 그저 그림이나 판화가, 뒷면엔 그 디테일의 이름들이 박혀 있다. 오로지를 쓴 것 같은데 특유의 광택 덕분에 몹시 '있어' 보인다는 사실!

그밖에도 당시의 모습을 보여줄 그림 자료를 적극 사용하는데 그것들을 따라 읽노라면 시간이 꽤 걸리지만 절대로 지루할 틈은 없다.





프랑스 혁명기를 거치면서 훌륭한 오브제들이 대다수 파괴되고 불태워지는 비극을 겪게 되었는데, 시대의 요청이라는 절대성을 감안하고서도 충분히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비단 프랑스만의 일이 아니라 우리나라도 또 무수한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의 비극을 겪었지만 말이다.

늘 '통사'로서의 역사나 풍습을 들여다보곤 했는데 이렇게 '미시사'로서 프랑스의 몇 세기를 들여다 보니 한결 친숙해지고 가까워진 느낌이 든다.  저자의 남다른 관심에서 시작된 공부가 많은 사람들에게 큰 기쁨을 주게 되어서 참으로 다행이다. 이런 노력의 결과물들이 보다 대중적으로 많은 사람들과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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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의 은밀한 사생활 - 탐미의 시대 유행의 발견, 개정판
이지은 지음 / 지안 / 2006년 6월
구판절판


중국에서 말하는 ‘大人’의 풍모를 기본 소양으로 여긴 당시(16세기...) 프랑스 왕이나 대영주들에게 ‘구두쇠’보다 치욕스러운 평판은 없었다.
-17쪽

샤를 9세 재위 시절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매년 1월 1일을 한 해의 시작으로 정하기 전까지는 해마다 날짜가 바뀌는 부활절이 새해의 첫날이었다.
-23쪽

16세기 왕족들의 생활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로맨틱하지 못했다. ...... 사실 당시 공주는 자매인 다른 공주들뿐 아니라 자기 시종들까지 데리고 한 방에서 잤다. 시종들은 여자만이 아니라, 남자인 호위병과 기사들까지 포함된다. 한 방에 50명 남짓한 남녀가 혼숙을 한 것이다.
-25쪽

당시 왕들은 궁전의 옥좌에 앉아서 신하들에게 점잖게 명령만 내렸을 것 같지만 사실은 다르다. 왕의 삶이란 그야말로 여행과 이동의 연속이었다. ...... 왕들은 지방에서 일어나는 잦은 민란을 평정하기 위해서, 또는 반란군에 쫓겨서 자주 궁을 떠나 여행길에 올라야 했다. 대책 없는 전염병을 피해 급히 피난을 가는 경우도 있었다. 평시에도 고분고분하지 않은 지방의 귀족들을 찾아가 어르고 겁도 줘야 했고, 세금도 직접 챙겨 와야 하는 등 친히 지방을 돌면서 수행해야 할 업무가 많았다.
-27쪽

당시 여행은 말을 타고 유유히 거니는 낭만적인 모습과는 한참 멀었다. 제대로 닦인 도로가 없이 진창길을 헤치며 늪을 건너야 했고, 곳곳에 도사리는 비적이나 암사자의 테러에도 맞서야 하는 고생길이었다.

여러 성을 오가며 생활했던 당시의 궁정은 집기며 기본적인 가구들을 각 성마다 비치하고 몸만 옮긴 것이 아니라, 한 번 움직일 때마다 궁정 전체가 통째로 이사를 가는 것과 다름없었다. 당시는 가구나 집기를 놓아두고 간다고 해도, 돌아올 때 그대로 온전히 남아 있을 리 없던 시대였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수도원의 가구들을 제외한 16세기 가구 대부분은 옮기기 쉽게 고안되었다.
-29쪽

19-17세기에도 요즘처럼 거울을 여자들의 전유물로 여겼다. 당시 여성의 가장 큰 덕목이란 ‘아름다운 한 송이 꽃’이 되는 것이었다. 모범답안으로 여겨진 르네상스 미인들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세 가지 하얀 것, 피부, 치아, 손
세 가지 검은 것, 눈, 속눈썹, 눈썹
세 가지 빨간 것, 입술, 뺨, 손톱
세 가지 긴 것, 몸통, 머리카락, 손가락
세 가지 짧은 것, 치아, 귀, 발
세 가지 가는 것, 입, 허리, 발볼
세 가지 굵은 것, 팔뚝, 허벅지, 다리
세 가지 작은 것, 젖꼭지, 코, 머리
-알랑 드코, <미의 기준> 중에서
-37-38쪽

머리카락에 신경을 많이 쓴 당시 사람들은 염색을 하기도 했다. 빨간 머리카락은 은화 30개에 예수를 팔아넘긴 가롯 유다처럼 불길하다 해서 남자는 검은 머리를, 여자는 금발을 최고로 쳤다. ...... 여자들은 물론 남자들까지도 피부를 하얗게 보이기 위해 아침마다 백분을 온몸에 뿌리는 데 한 시간을 기꺼이 투자했다.
......
이렇게 두터운 화장을 한 번 하면 보통 일주일 동안 지우지 않고 매일 덧칠만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몸에서 좋지 않은 냄새가 풍겼고, 당연히 향수가 필수품으로 자리잡았다. 17세기 향수의 중심지는 문화적으로 앞선 이탈리아였다. ...... 당시 프랑스 사람들은 이탈리아에서 수입한 향수를 한두 방울 뿌리고 마는 것이 아니라 몸은 물론이고 겉옷이며 속옷, 신발, 장갑 등등에 뿌렸다.
......
씻지 않아서 생기는 악취를 가리려고 향수를 뿌려대는 와중에 사람들이 유일하게 매일 씻는 신체 부위가 있었다. 바로 옷으로도 가릴 수 없는 손이었다.
-44-45쪽

당시 같은 무게의 금보다 비쌌던 샤프란, 귀족의 식탁에 필수품이었던 후추, 약재로도 쓰였던 계피, 영혼마저 녹일 듯한 단맛을 전해준 설탕 같은 향신료들이 들어와 단박에 프랑스 사람들의 혀도 녹여버렸다.
-59쪽

아무리 넓고 큰 성에서도 오븐을 집에 두지 않고 성 밖에 놓았던 까닭은 오븐의 열기가 종종 큰 화재를 불렀기 때문이다. 빵은 지금처럼 사고파는 것이 아니라 각자 집에서 만들어 먹는 음식이었다.
-60쪽

16-17세기 프랑스 식탁의 중심은 육류였다. 기록을 보면, 당시 부자들은 하루에 1kg 정도의 고기를 먹었고, 수도원에서 주는 음식 배급으로 살아가는 빈민들도 일주일에 네 번은 고기를 먹었다고 한다. 사냥이 일상화된 시대였기 때문에 고기를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 직접 사냥을 하지 못하는 도시인들은 주로 정육점에서 고기를 사다 먹었다. ...... 유일하게 먹지 못한 고기는 말뿐이다. 교회에서 대기근이 닥칠 때를 제외하고는 먹어치우기보다는 없어서는 안 될 이동수단으로서 이용가치가 컸다.
일상적으로 먹을 수 있었던 육류에 비해 생선은 무척 귀한 것이었다. 파리를 비롯해 내륙 지방에서는 보존상의 문제로 생선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안동 간고등어처럼 소금을 듬뿍 쳐서 보관하기에는 소금이 너무나 비쌌다. ....... 당시 사람들은 고기를 맛으로 먹는 음식이라 생각했던 반면, 야채는 약으로 먹는 음식으로 여겼다.
-63-64쪽

17세기 때 음식 재료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육류였다면, 일상생활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음료는 포도주였다. 정화 시설이 없었고, 수인성 전염병에 걸리기 쉬웠기 때문에 당시에는 물 대신 와인이나 맥주를 마셨다.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다섯 살이 지나면 와인이나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 요즘이야 오래 숙성시킬수록 좋은 와인으로 치지만, 당시에는 압착해서 짜낸 지 1년 내의 것을 최고로 쳤다. 포도주를 오래 숙성시키는 기술이 없던 탓에 포도주는 신선한 상태로 마셔야 하는 음료였다. 당시 포도주는 알코올 농도가 아무리 높아도 3%가 되지 않았다. 애주가 입장에서 보면 와인이 아닌 포도 주스였던 셈이다.
-65쪽

17세기의 기본 식사는 하루에 두 끼였다.

루이 13세의 경우는 보통 300명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저녁을 먹었다고 한다 남들 앞에서 식사를 하는 것이 권력의 과시로 여겨지던 시대의 풍속이다.

17세기 유럽인들은 음식을 손으로 집어 먹었다. 우아하기만 할 것 같은 왕조차 스프에 손가락을 넣어 고기를 건져 먹은 것은 물론이다. 물론 포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당시 포크는 커다란 고기를 썰기 위해 고정하는 도구로 쓰였다. 더구나 포크 무게는 500g 정도로, 한 사람이 들고 휘두르기에도 무거웠다.

손가락 식사에도 나름의 예절이 있었다. 왼손은 절대로 사용하지 않고, 오른손의 세 손가락으로 식사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냅킨은 반드시 왼손에 걸치며, 식사 전후에 반드시 오렌지 향을 가미한 물에 손가락을 씻고 냅킨에 닦았다.

18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포크가 보편화됐지만, 가장 기본적인 식사 예절들은 당시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68-69쪽

루이 14세는 절대 권력을 휘둘렀지만 일방적으로 목소리만 높이는 군주는 아니었다. 그는 주로 대신들의 보고와 논의를 경청하기만 하고 언쟁을 벌이지는 않았다. 왕의 역할은 대신들의 의견을 귀 기울여 듣고 결정을 내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 열린 귀를 가진 왕이었지만 정적에 대해서는 과격할 정도로 잔인함을 보였다.

-84쪽

베르사유는 성의 명칭이 아니라 마을 이름이다. 루이 14세가 살던 성이 베르사유라는 마을에 있어서 베르사유 성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119쪽

베르사유는 우리나라 경기도의 일산이나 분당, 충청도의 신행정수도처럼 계획도시이다. 이는 베르사유 성을 둘러싸고 있는 마을 역시 성의 연장이란 의미이다.

-121쪽

왕이 사는 궁전에 아무나 출입한다는 것은, 왕가 일가친척이라도 되어야 의관을 갖추고 겨우 궁궐에 들어갈 수 있었던 우리의 경우와는 사뭇 다르다. 당시 프랑스 사람들에게 왕은 만인의 아버지 같은 존재로 여겨졌다. 언제든지 아버지가 사는 곳을 방문하고, 아버지가 식사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일처럼 여겨졌다. 심지어 루이 14세가 카비네에서 업무를 볼 때는 실내화를 빌려 신고 왕의 침실까지 구경할 수 있었다. 이토록 왕궁 출입이 자유로웠으니 당시에도 유럽 전역에서 베르사유를 구경하러 오는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았다.

-124쪽

규모로는 1664년 재상 콜베르가 만든 왕립 도서관이 제일로 꼽힌다. 18세기 프랑스에서 출간된 모든 책들은 여기에 두권씩 보관하도록 의무화한 법이 만들어져 장서는 날로 늘어갔다. ...... 18세기 파리의 공공 도서관이 종종 박물관 역할을 겸했다. ...... 18세기 사람들은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하루 종일 일반인에게 개방된 공공 도서관에서 맘껏 빌려보며 지적 호기심을 채울 수 있었다. ....... 당시 파리는 도서관뿐 아니라 유명한 출판사 겸 서점들이 널린 유럽 제일의 교양 도시였다.

-193-194쪽

원래 살롱이란 말은 둥근 방에 천장이 돔 형태로 된 공간을 가리키는 건축 용어다. 그런데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살롱이란 단어에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사교적 의미가 추가되었다. 주로 아름다운 여주인이 자기 집 응접실을 개방하여 예술가나 철학자, 학자를 초대해 담소를 나누는 모임을 뜻했다. 요즘 식으로 하면 문학 동아리나 미술 동아리 같은 분위기의 모임이다.

-197-198쪽

오페라를 감상할 때는 조용히 앉아 우아하게 듣는 것을 에티켓으로 생각하는 지금과는 달리, 당시 사람들은 아이돌 스타의 콘서트를 찾은 10대 팬이 할 법한 행동을 거리낌 없이 했다. 아리아를 따라 부르고, 수건이나 꽃을 던지고, 마음에 드는 성악가가 나오면 괴성을 지르며 손을 흔드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당시 유명 극작가나 오페라 가수는 요즘 유명 소설가나 대중음악 가수들을 뺨 칠 만큼 대중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연극과 오페라가 끝나면 다음날 신문에 어김없이 공연평이 실리고, 파리의 살롱 이곳저곳에서 공연 소감을 나누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었다.

-204쪽

toilette(투왈렛)이란 말은 현대 프랑스에서는 화장실을 가리키지만, 18세기에는 몸을 치장하는 모든 행동을 총칭하는 단어였다. 화장을 하고, 옷을 입는 것뿐 아니라 목욕을 하고, 이를 닦는 것까지 모두 투왈렛이라고 했다. 투왈렛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당시 모든 사람의 생활습관이었다.

-212쪽

루이 14세 시대의 베르사유는 외양처럼 화려하지만은 않았다. 복도마다 오줌 냄새가 진동했고, 가발에서 나온 비듬과 벼룩이 반질한 대리석 위로 우수수 떨어졌다. 루이 14세는 유럽의 태양이라 불렸지만, 평생 목욕한 횟수를 꼽으면 20번 정도에 불과하다. 3-4일도 아니고, 3-4년에 한 번씩 목욕을 한 셈이지만, 이마저도 당시 사람들에게는 무척이나 놀라운 기록이다. 보통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목욕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13쪽

17세기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세수란 포도주를 엷게 탄 물에 흰 천을 적셔 얼굴과 손에 문질러서 닦는 것을 뜻했다. 물속에 들어 있는 나쁜 균이 모공을 통해 몸속으로 들어온다고 믿었기 때문에 물에 몸을 담가 목욕하는 것을 심하게 두려워했다. 당시 수인성 전염병이 흔했던 탓에 사람들은 그러한 속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깨끗한 물을 구하기도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214쪽

당시 파리는 유럽 최고의 도시였지만 시내를 통틀어 공동 우물은 고작 35개뿐이었다. 물이 귀했으니 단지에 담을 물은 당연히 돈을 주고 사야 했다. 파리 거리에서는 물장수들이 2만 명을 헤아렸다. 이들이 파는 물은 맑은 지하수가 아니라 바로 센 강에서 퍼 온 거무튀튀한 물이었다. 상하수도 시설이 갖춰지지 않은 터라 집집마다 각종 오물을 모두 센 강에 버렸고, 치안이 불안해서 강물에 시체가 떠오르는 일이 다반사였다. 여기서 퍼 온 물을 돈 주고 사서 음식을 해 먹으니 병이 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다. 물이 부족한 여건은 18세기 후반까지 개선되지 않았다.

-215쪽

루이 14세 시대에는 ‘뚫린 의자’들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방 한가운데 있었다. 사람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다른 사람들이 방 안에 있건말건 엉덩이를 드러내고 볼일을 봤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볼일을 보는 것은 사적인 용무, 남에게 보이기 부끄러운 일이 되었다. 18세기 여성들은 이 의자를 침실에 두고 혼자 조용히 볼일을 보아TEk.

-219쪽

애교점을 눈 옆에 붙이면 정열적인 사랑을, 볼 가운데 붙이면 우아함을, 보조개에 붙이면 주저하는 마음을, 코에 붙이면 남자에게 별 관심이 없음을 나타낸다.

-225쪽

‘바구니 드레스’라고 불리던 넓고 평평한 치마 드레스는 18세기 전 유럽의 최대 히트상품이었다. 한 벌을 만들려면 3m 60cm 나 되는 옷감이 들어가야 하는 이 드레스 덕에 프랑스의 직조 산업은 날로 번창했다.

-227쪽

17세기 중후반 까지도 자그마한 거울은 말 한 마리 값과 맞먹을 정도로 비싼 물건이었다.

-228쪽

커피는 18세기 사람들에게 일종의 만병통치약이었다. 임신부들이 보약처럼 즐기는 음료였다. 근엄한 바흐조차 1732년 커피에 대한 칸타타를 작곡하기도 했다. 커피 외에 18세기 사람들이 열광했던 음료로 초콜릿이 빠질 수 없다. 당시 초콜릿은 요즘처럼 딱딱한 고형이 아니라 죽처럼 걸쭉했다. 초콜릿 음료는 커피보다 고급이었다. 당시 초콜릿은 요즘의 부드러운 초콜릿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거칠었다. 사람들은 초콜릿이 몸을 데워서 최음제의 효과를 낸다고 믿었다.

-273쪽

18세기 이전의 사람들은, 아무리 제 자식일지라도, 아이란 그저 아직 인간이 되지 못한 ‘짐승’같은 존재로 여겼다. 특히 아직 걷지 못하고 기어 다니는 아이들은 애완동물이나 다를 바 없었다. 여유 있는 집안에서는 아이를 낳자마자 시골에 있는 유모에게 보냈고, 걸음마를 떼고 말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야 집으로 데려왔다.

-276쪽

지금은 결손가정이 아닌 다음에야 아이들이 부모 슬하에서 자라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당시에는 아홉 살이 되면 남자아이들은 수도원으로, 여자아이들은 수녀원으로 보내졌다. 어려서 집을 떠난 아이들은 열여섯 살 정도가 되어서야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어린 시절을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라고 생각하는 지금과 달리, 당시 어린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아동 학대에 가까운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278쪽

흔히 18세기를 ‘가족사의 전환기’라고 부른다. 한편에서는 아이를 내다버리는 부모들이 넘쳐났지만, 새로운 유형의 부모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신세대 부모들은 자식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고 출세와 교육을 위해 남다른 정성을 쏟았다.

-279쪽

오스트리아의 왕녀 마리 앙투아네트가 열다섯 살, 4년 뒤 루이 16세로 왕좌에 오르게 될 왕세자의 나이 열여섯 살. 결혼식을 마치자 곳곳에서 축복의 환호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오랜 앙숙이었던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평화라는 중차대한 임무를 띠고 정략적으로 맺어진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시작부터 순탄하지 못했다.

훗날 혁명정부가 유포한 온갖 악의적인 이미지 탓에 사람들은 루이 16세를 뚱뚱하고 무능력한 왕이며, 매사에 무관심하고 냉정한 남자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 루이 16세는 부르봉 왕가에서는 보기 드물게 지적인 인물이다. 그는 프랑스에서 제일 처음으로 전기를 일으키는 기계를 들여와 조작했고, 지리에 밝았으며, 일곱 살 때부터 완벽하게 라틴어를 읽고 썼다. 또한 당시에는 드물게 영어를 포함해 5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자물쇠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끈기있게 연구하는 모습은 왕이라기보다는 과학자나 수학자가 어울릴 법했다.

-315쪽

모국어인 독일어조차 제대로 읽고 쓰지 못한 마리 앙투아네트는 정략결혼이 결정되자마자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이 초빙한 교사에게 프랑스어 강습을 받아 간신히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천성이 가볍고 천진난만한 그녀에게 문학이나 철학, 과학은 참을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주제였다.
루이 16세와 앙투아네트만큼 성격이 정반대인 부부가 또 있을까? 그는 너무 진지한 반면 그녀는 너무 경박했고, 그는 매사에 신중한 반면 그녀는 모든 일에 즉흥적이었다. 그는 오랜 생각 끝에 말을 꺼냈지만, 그녀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대답을 했다. 그가 검소했다면 그녀는 화려했다. 규칙적인 일과를 따르는 그가 잠자리에 드는 밤 11시는 오페라와 무도회, 게임을 즐기던 그녀에게는 본격적인 하루의 시작이었다. 두 사람이 처음부터 사랑에 빠졌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노릇이다.

루이 16세는 포경수술을 해야만 남자 구실을 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특유의 신중한 태도를 견지하는 바람에 7년이나 수술을 망설였다고 한다.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란 눈에 금발 머리를 가진 앙투아네트의 아름다운 외모는 루이 16세에게는 아무 감흥을 일으키지 못했다.-316쪽

트리아농 궁에 가보면 그 주인이 사치로 유명한 왕비였다는 것이 쉽게 믿기지 않는다.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과 달리 당시 그녀에 대한 비난 여론이 들끓은 것은 트리아농 궁의 공사에 든 돈 문제가 아니었다. 앙투아네트는 비교적 검소했다. 그녀는 트리아농 궁을 증축하지 않았고, 심지어 마담 뒤 바리가 쓰던 가구들을 그대로 사용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정작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왕가의 위대함을 보여주기 위한 공사에 들인 돈이 아니라, 트리아농 궁전에 틀어박혀 혼자만의 비밀스런 생활을 고집하는 왕비의 행동이었다. 실제로 트리아농 궁에는 왕을 위한 방이 한 개도 없었다.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은 왕비의 사생활은 곧 ‘국민을 적대시하는 왕비’라는 부정적인 여론을 불러 일으켰다. 그곳에서 그녀가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국민들 사이에는 왕비의 사생활에 대한 갖가지 억측이 난무했다.

-322쪽

더군다나 당시 프랑스 사람들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해 여전히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우리가 일본의 공주를 왕비로 맞이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당시 선입견을 제치고 보면 사실 앙투아네트는 권위적이기보다 섬세하고 우아한 취향과 가족적이고 따스한 생활을 꿈꾸는 왕비였다. 그녀는 위선적이고 딱딱한 베르사유의 인간관계와 냉랭한궁정보다는 따뜻하고 안락한 트리아농 궁에서의 친밀한 관계를 원했을 뿐이다. 앙투아네트의 가장 큰 불행은 아마도 자신의 바람을 절대로 이룰 수 없는 나라의 왕비라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325쪽

프랑스의 왕비는 왕실 예법상 반드시 만인이 보는 앞에서 아이를 낳아야 했다. 왕족들의 삶은 태어날 때부터 죽는 순간까지 반드시 관객이 있어야 하는 한 편의 연극 같은 것이었다.

-326쪽

루이 16세는 비록 좋은 왕은 되지 못했을지언정 좋은 아버지였고, 나름의 방식으로 앙투아네트를 사랑한 좋은 남편이었다.

-326쪽

흔히 바스티유가 왕실의 감옥이라 해서 엄청나게 크리라 짐작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많아야 50명 정도를 수감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감옥이었다. 크기도 작고 14세기에 지은 낡은 성이라 성난 군중의 힘에 감옥의 성벽은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343쪽

‘앤틱’이건 ‘디자인’이건, 그 속에 담긴 정신은 본질적으로 같다. 인간이 만든 모든 문화예술이 그러하듯, 오브제 역시 그것이 태어난 시대의 철학과 생활이 반영된 창조 정신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앤틱 오브제의 진정한 가치는 그 정신을 이해하는 사람들의 몫이다.

-3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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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물 ‘똥’이 나노튜브!? [제 700 호/2007-12-31]
 


‘흙 한 자밤의 우주’라는 재미있는 제목의 책이 있다. 여기서 ‘자밤’이란 두 손가락으로 집어 올릴 만큼의 분량이라는 뜻이다. 아주 적은 양이다. 그런데 그 속에 우주가 있다는 말이다. 뒤뜰에 나가 풀뿌리 언저리에 엄지와 검지를 쑤셔 넣고 흙 한 자밤을 집어 올려보자. 그러면 두 손가락은 거의 10억 마리에 달하는 생명체를 들어 올리게 된다. 여기에는 적어도 1만 가지의 다른 종류의 생명체가 있다.

이들의 정체는 바로 미생물이다. 그것도 대부분 그 정체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다. 수많은 미생물 중에 극히 운이 좋은 일부만 이름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런 미생물의 행운은 과학자들에게 달려 있다.

광주과학기술원의 허호길 교수와 이지훈 박사는 전라남도 해남군 우항리의 공룡발자국 퇴적층에서 ‘슈와넬라’(Shwanella HN-41)라는 미생물을 발견했다. 슈와넬라는 아주 특이한 미생물이다. 대부분의 생명체는 에너지를 얻기 위해 산소를 들이마시고 이산화탄소를 뱉어낸다. 그런데 슈와넬라는 산소 대신 금속을 흡수해서 에너지를 생산한다.

허 교수는 이를 이용해 폐수에 녹아 있는 중금속을 제거할 수는 없을까 생각했다. 허 교수팀이 비소(As, 원자번호 33번)이온 용액에 슈와넬라균을 넣자 슈와넬라균은 비소이온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흡수한 것이 있으면 배설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 비소이온을 먹은 슈와넬라는 ‘배설물’로 노란색의 황화비소를 분비했다. 황화비소는 물에 녹지 않고 침전되며 인체에 해가 없다. 이렇게 비소라는 맹독성 중금속을 제거할 수 있는 미생물이 새롭게 발견된 것이다.

허 교수팀은 연구를 여기서 끝내지 않았다. 이들은 슈와넬라의 ‘똥’을 우습게 여기지 않았다. 원하는 결과를 얻는데 만족하지 않고 황화비소를 가지고 엉뚱한 실험을 했다. 황화비소를 잘 말린 뒤에 자외선을 쪼였더니 전류가 흐르는 성질이 나타났다. 즉 슈와넬라가 만든 ‘똥’에 광전도성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쉽게 말하면 박테리아가 폐수를 정화하면서 전기까지 만들 수 있다는 얘기다.

놀라운 사실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황화비소를 현미경으로 관찰하니 굵기가 20~100nm(나노미터, 1nm=1억분의 1m)인 튜브 모양을 하고 있었다. 즉 미생물의 ‘똥’이 황화비소 나노튜브였던 것이다. 그동안 미생물을 이용해 다양한 나노입자가 만들어졌지만 튜브 모양은 처음이다. 이 황화비소 나노튜브를 모아 물리적인 특성을 확인해 보니 반도체와 같았다. 슈와넬라는 폐수를 정화하며, 전기를 만들고, 반도체까지 만드는 것이다.

이제는 익숙한 단어가 된 나노튜브는 1991년 처음 발견됐다. 이때 발견된 것은 탄소나노튜브다. 그 뒤 높은 강도 및 탄성계수, 낮은 마찰계수 같은 기계적으로 우수한 성질이 밝혀지면서 고강도 구조용 소재 분야에 활용하기 위한 연구가 활발해졌다. 하지만 언제나 제일 큰 문제는 엄청난 생산비용이다. 그런데 미생물을 이용해 생물학적으로 나노튜브를 생산할 수 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무수히 많은 미생물을 이용하면 매우 저렴한 비용으로 엄청난 양의 나노튜브를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환경 문제도 동시에 해결된다. 컴퓨터에서 태양전지에 이르기까지 모든 전자장비는 화학적 생산과정을 거친다. 이때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되고 많은 독성 중금속과 화학물질이 남는다. 슈와넬라는 친환경적인 반도체 생산의 길을 열지도 모른다. 만약 황화비소 외에도 다른 반도체 물질의 나노튜브를 만들 수 있다면 ‘옵토-나노 전자공학’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열릴 것이다. 하지만 슈와넬라 연구는 이제 막 첫걸음을 내딛었을 뿐이다.

신기한 물질을 만드는 미생물에 대해 더 알고 싶은가? 의외로 아주 가까운 곳에 있을 수 있다. 뜰에 나가서 풀뿌리 언저리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흙을 집어 올려 보라. 손가락 사이의 ‘흙 한 자밤의 우주’ 속에 기상천외한 성질을 가진 미생물이 들어있을 지도 모른다. (글 : 이정모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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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날은 동화책 10권 선물하기가 2007년도엔 어쩌다 보니 정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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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너도
앨리슨 맥기 지음, 김경연 옮김, 피터 레이놀즈 그림 / 문학동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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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7-12-29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조카는 좋겠다~~~

마노아 2007-12-30 00:11   좋아요 0 | URL
이젠 제가 숨겨놓는 곳을 자기가 막 뒤져요...;;;; 다른 보금자리(?)를 찾아야겠어요^^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