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원에 좀 다녀오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예전에도 엄마는 곧잘 하셨다.
익숙하고 편한 문명과 떨어진다는(그래봤자 인터넷 사용 못하는 것 정도지만) 걸 상상도 못하는 나는 늘 싫다고만 했다.
'기도원'이라고 말을 하니 어쩐지 거시기하게 들리지만 꼭 조용한 절에 들어가서 참선을 하며 수련을 한다...이런 식의 느낌으로 받아들이면 통할 듯 싶다.

암튼. 늘 싫다 하는 나였는데, 이번엔 정말 다녀와야겠단 절박감이 들었다.
한의원에 다닌지 한달 더 지났지만 차도가 거의 없다. 원인은 '스트레스'였다.
집에 오면 늘 만나야 하는 사람. 말을 섞지 않은 지 꽤 흘렀지만 그렇다 해도 풀어지지 않을 관계의 카테고리, 그리고 내가 대신 치루고 있는 오랜 희생들. 그 무한대의 수열은 나를 삼킬 것 같은 미움으로 천착하는 중이었다.  그 사람이 너무 미웠는데, 계속 미워하다 보면 결국엔 내가 더 미워졌다.  칼로 물베기 같은 싸움도 지쳤고, 뒷감당 해주기도 너무 버거웠고, 도대체가 끝이라는 게 보이질 않아서 이러다 내가 미치겠구나... 이런 생각도 들어버렸다.

미워하는 것도 힘들다면 용서라도 해야 하는데, 그럴 만한 그릇을 내가 갖지 못했다. 최소한의 '사과'정도는 받고 싶었는데 입도 벙긋하지 않는 그 사람의 뻔뻔함에 다시 또 치를 떨고... 헌데, 너무 미안해서 말도 못하는 거라 누군가 내게 말을 한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해야 하는 거라고 나는 또 말했다. 죽을 만큼 미안해서 미안하단 소리가 안 나와도 죽을 만큼의 노력으로 해야하는 것 아니냐고.  우리에게 좋았던 시절이, 고마웠던 시간이 없는 것도 아닌데, 나는 죽도록 때려주고 싶었을 때의 감정들만 자꾸 되새기며 미워할 이유들만 찾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팽팽했던 긴장의 끈이 터지고 말았다.  얼룩진 옷의 때를 금방 세탁하지 않으면 찌든 때가 되니까 어여 손을 쓰란 말에, 얼룩을 만든 사람이 세탁을 해야지 왜 나더러 빨라고 하냐고 울화통을 터트리곤 했는데, 문득... 내가 먼저 빨면 또 어떠랴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만든 얼룩 아니라도, 내게 더 필요하고 소중한 옷이라면, 내가 먼저 빨아서 깨끗하게 만드는 게 더 나은 거란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칼로 물베기였던 싸움은 내가 먼저 입을 여는 순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오랜만에 그 사람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본다.  내가 먼저 손내밀어 주기를 기다렸던 사람의 갈망이, 갈증이 느껴진다.  바보같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어제, 마음에 자유를 주는 훈련(득도?)을 하려고 기도원에 가려고 짐을 싸려고 하는데, 어무이께서 과연 찾아갈 수 있겠냐고 하신다. 데려다 줄까? 하시기에, 혼자 갈수 있다고 했다. 내 나이가 몇 갠데...;;;; 워낙에 길치라서 믿음도 안 갔을 테고, 엄마 눈에 여전히 어리게만 보일 막둥이란 생각이셨겠지. 내가 나이 서른 넘어서도 어리광 부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쫌 감동. 그리고 쫌 슬프기도 하더라.

암튼, 그러던 찰나에 영등포에 있는 모 중학교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다음 주 수요일 하루 시간강사 뛰어달라고. 2학기에 정년퇴직하는 선생님이 계시니 그때 자리 빌 것을 염두에 두고 와달란다.
일년 뒤의 자리, 몇 달 뒤의 자리란 정말 내 손에 쥐어주기까지는 믿을 수 없는 의미 없는 약속임을 이젠 알고 있기에 그것이 매력적일 수는 없고, 거리도 너무 멀지만, 그래도 노느니 하루라도 일하자고 생각하고 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다시 또 다른 중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병가 대체 한달 기간제. 한달 기간제와 하루 강사를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나는 앞서 전화온 학교에 못 가겠다고 전화 연락을 드렸다. 교감샘인지 교무부장샘인지 몹시 언짢아 한다. (양심이 없군요!)

오늘 담주부터 근무하기로 한 학교에 다녀왔다. 버스 타고 죽가면 되는데 잘못 내려서 세 정거장을 헤매고 장렬히 도착해 주셨다.  일년 만에 신어본 7cm샌들에 휘청휘청거리며.

이곳 생활수준이 무척 열악하며 공부에 대한 희망이 없는 아이들이라고 인수인계 해주시던 선생님이 말씀해 주신다.  내 인상을 보더니 애들이 좀 거칠다며 많이 휘둘리게 생겼다고... 상처 너무 받지 말라고 충고해 주신다. (저 겁 많아요! ㅠ.ㅠ) 곧 기말고사고, 그리고 방학까지의 2주 간의 시간은 가장 진도나가기 어려운 씨즌이니 여러모로 걱정이 되지만, 설마 백수로 지내는 것보다 무섭겠어? (뭐 이런 각오로 덤빌 생각...;;;)

집으로 돌아오는데 이번엔 서울K상고에서 연락이 왔다. 자기 학교 와서 일하라고. 허걱이다. 왜들 갑자기 나를 찾는가? 여태 캔디폰이었는데...  집에서는 더 가깝지만 이미 서류까지 넘기고 온 학교에 가야지 또 어딜 바꾸겠는가. 방학과 동시에 나와야 한다는 것이 서글프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정시 출근해서 정시 퇴근하는 일자리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고, 방학이 가까워오는 그런 시점이니까 가능한 일일 수도 있는데, 내심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마음을 좀 더 풀고, 원망의 마음을 좀 거두었을 때 내가 간절히 바라던 일들이 조금 풀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그런 타이밍.  당신이 저지른 일 제발 스스로 수습까지 해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래도 지금으로서는 이 상황이 일주일 전보다는 훨씬 행복해진 거니까. 그러니까... 오늘도 맑음!

ps. 기도원은 결국 못 갔다. 계속 안 가도 되었으면 좋겠다. 마인트 컨트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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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6-19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용서하는게 미워하는거 보다 훨씬 힘이 들지요. 죽을만큼...
종교적인 것을 떠나서 내 마음을 풀어야 모든 일이 풀리는 것은 맞는 거 같아요~~ 오늘도 맑음이라 같이 기뻐요!^^

마노아 2008-06-19 17:48   좋아요 0 | URL
기뻐해주는 순오기님을 알고 있어서 또 맑음 모드에요! 지난 주 광주 다녀온 게 또 한몫을 한 것 같아요. 순오기님 쵝오!

hnine 2008-06-19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운동을 해보세요. 저한테는 운동이 약이 되던데요...

마노아 2008-06-19 21:33   좋아요 0 | URL
저한테도 약이 될 테죠? 산에 가야겠어요. 의사샘도 산에 가서 맑은 공이 쐬라고 강추했어요^^

2008-06-19 2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6-19 23: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돌이 2008-06-19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족인가봐요. 그것도 아주 가까운.... 마노아님 마음이 약간은 이해도 될듯 합니다. 저도 오랜 시간동안 미워했던지라.... 지금이라고 나아진건 아니지만 나이가 드니 제 맘이 변하는거겠지요. 그냥 견디기가 좀 나아지네요. 힘내세요. 제일 중요한건 마노아님이예요.

마노아 2008-06-19 23:04   좋아요 0 | URL
예, 그래서 더 힘이 들었어요. 지금도 완전히 자유로워진 것은 아니지만, 원래 제 힘으로 안 되는 일은 빨리 포기하자는 주의라서요. 피해갈 길이 없다면 감수하고 살아야죠.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라고 말해주니 고마워요. 힘이 되었어요. ^^

웽스북스 2008-06-19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일에 시간 괜찮으실 때 예수원에 한번 가보세요
기도원은 저도 좀 부담스러운데, 예수원은 참 좋다고 하더라고요
평일밖에 예약이 안되서 가려면 휴가를 내고 가야하는 터라 저는 못가봤는데
갔다온 친구들은 휴가를 내고서라도 또 갈 계획을 세우곤 하더라고요

마노아 2008-06-20 00:19   좋아요 0 | URL
많이 들어본 것 같아요. 찾아봐야겠어요. 당분간은 저도 평일에 움직이기 힘들겠지만 기억해두었다가 꼭 다녀와야겠어요. 은혜의 단비를 좀 맞아야지요. ^^ 고마워요, 웬디님!

행복희망꿈 2008-06-19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블로그에 오셔서 좋은말씀 남기고 가신 발자국 따라 들렀어요.
이렇게 인사드리니 좋네요.
어렵게 구한 직장 짧은 기간이지만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마노아 2008-06-20 00:20   좋아요 0 | URL
행복희망꿈님 반가워요^^
어렵게 구한 만큼 더 열심히 일해야지요. 화이팅을 외쳐봅니다. 감사해요^^

2008-06-20 1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6-20 17: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6-20 2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6-20 2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저 어린 아이들이 헤쳐가야 할 대한민국이 적어도 지금보다는 더 따뜻하고 믿음직스럽기를....ㅠ.ㅠ

고작 콩 열개뿐이지만, 그래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전기, 수도.. 이런 거는 인권과 직결되어 있다고 말한 진중권 교수님 얘기가 떠오른다. 어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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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6-19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기막힌 사연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많아요~~ 이러면서 또 내 삶에 감사하는 이기심을 발견하지요.ㅠㅠ

마노아 2008-06-19 17:49   좋아요 0 | URL
그렇게 살지요. 모두가... 네이버를 이런 식으로라도 이용해야겠단 생각을 했어요. 매달 콩 열개씩 기부하기^^ㅎㅎㅎ

2008-06-20 02: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6-20 0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뜨거운 물이 찬물보다 빨리 언다? [제 773 호/2008-06-18]


뜨거운 물이 빨리 얼까, 차가운 물이 빨리 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차가운 물이 빨리 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답은 ‘뜨거운 물이 차가운 물보다 빨리 얼 수도 있다’이다. 뜨거운 물이 차가운 물보다 먼저 언다는 것은 사실 납득이 잘 되지 않는다. 50도의 물과 30도의 물을 얼릴 때, 50도의 물이 얼려면 온도가 30도까지 떨어져야 하는데, 그만큼 시간이 더 걸리는 것은 상식처럼 보인다. 이 상식을 깨는 위대한 발견은 고정관념을 벗어난 한 고등학생으로부터 비롯되었다.

1969년,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고등학생 음펨바(Erasto Mpemba)는 학교에서 끓는 우유와 설탕을 섞어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실습을 하고 있었다. 원래 아이스크림을 만들 때는 혼합 용액을 충분히 식힌 다음에 냉동실에 넣어 얼려야 한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실습실의 냉동고에는 자리가 충분하지 않았고, 음펨바는 냉동고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채 식지 않은 혼합용액을 그대로 냉동실에 집어넣었다. 얼마 후 냉동실 문을 연 음펨바는 희한한 현상을 발견했다. 다른 학생의 아이스크림보다 자신의 아이스크림이 먼저 얼어 있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여긴 그는 선생님에게 이 현상을 질문했지만, 선생님은 음펨바가 착각한 게 분명하다고 대답했다.

의문이 생긴 음펨바는 같은 실험을 몇 차례에 걸쳐서 반복하였다. 결과는 항상 같았다. 뜨거운 물이 더 빨리 얼었다. 물론 선생님과 친구들은 믿어주지 않았다. “그건 음펨바의 물리학이야.” “음펨바의 세계에서나 그렇겠지.” 라는 놀림을 받았다. 이때 인근 대학의 물리학자인 오스본(Denis G. Osborne) 교수가 음펨바의 고등학교를 방문했다. 음펨바는 자신의 관찰에 대해 오스본 교수에게 질문했다. 오스본 교수는 자신도 그 이유를 모르지만, 실험실에 돌아가서 꼭 실험해보겠다고 약속했다. 음펨바의 주장대로 실험해 본 오스본 교수의 연구팀은 결국 뜨거운 물이 차가운 물보다 떠 빨리 언다는 음펨바의 주장이 사실이라고 인정하게 되었다. 실험 결과는 1969년 ‘Physics Education’저널에 게재되었다(vol 4, p.172-175).

뜨거운 물이 차가운 물보다 더 빨리 언다는 사실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가 기록으로 남겼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는 갈릴레오 시대까지 대단했고, 17세기 초에는 뜨거운 물이 차가운 물보다 더 빨리 언다는 사실은 상식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직관과 배치되기 때문에 수백 년 동안 잊혔다가 음펨바에 의해 다시 살아난 것이다.

그런데 음펨바 효과는 왜 일어날까? 여러 가지 가설들은 있지만 아직 정확한 원리는 밝혀지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뜨거운 물 분자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증발이 더 잘 일어나기 때문에, 뜨거운 물의 질량이 상대적으로 작아져서 더 빨리 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용기를 밀폐해서 증발효과를 제거해도 음펨바 효과는 관찰된다. 또 뜨거운 물에는 녹아있는 기체의 양이 적어서 빨리 언다거나, 뜨거운 물이 용기 주변의 환경을 변화시켜서 냉각 과정을 바꾼다는 주장도 있다.

대류현상도 원인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뜨거운 물은 차가운 물보다 초기에 외부로 잃는 열의 양이 많아서 대류현상이 뜨거운 물에서 더 활발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 뜨거운 물이 차가운 물보다 외부로 열을 더 빨리 잃게 된다. 하지만 대류현상은 용기의 모양에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이 가설은 보편화되기가 어렵다.

최근에는 과냉각 이론이 거론되고 있다. 물이 얼음으로 되려면 응결핵이 필요한데 응결핵이 없으면 물은 0도에서도 얼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을 과냉각이라 한다. 뜨거운 물이 약 영하 2도에서 얼은 반면에 차가운 물은 영하 8도에서 얼었다는 연구 결과가 있긴 하지만, 그 원인이 확실치 않아서 음펨바 효과를 뒷받침해주기에는 부족하다.

이 모든 가설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음펨바 효과가 나타난다고 말하기도 한다. 온도, 증발, 대류, 용존 기체, 전도와 같은 현상이 동시에 작용하여 뜨거운 물이 식을 때 물이 증발하고, 이 증발로 인해 많은 열을 잃고 또 물의 양이 줄어서 빨리 얼게 된다는 것이다.

다양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아직 음펨바 효과의 결정적인 원인을 알려주는 이론은 없다. 언제 누가 그 원인을 밝힐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 이론을 주장하는 아이의 말을 경청해 주는 어른과 또 어른들이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아도 반복해서 실험해 보는 아이가 있는 곳에서 그 답이 나올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글 : 이정모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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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6-19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 그렇구나~ 급하게 열려야 할 때 뜨거운 물을 넣으면 되겠네요.^^

2008-06-19 1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6-19 14: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븐시즈 7SEEDS 12
타무라 유미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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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각오했던 것 이상으로 감탄하고 감동 받는다. 이번 편에선 지난 번과 같은 처절한 사투는 그닥 없었기에 덜 슬펐지만 찌르르 찔리는 느낌의 깨달음을 많이 주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나뉘어 이미 멸망해 버린 미래 세계로 보내진 아이들.  처음으로 '일반인'이 아닌 준비된, 훈련된, 그리고 알고서 보내진 자들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만남이 축복이, 행운이,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들은 철저하게 생존을 위한 프로젝트로 길러진 사람들이고 그랬기에 이 세계의 생존자로서 자격 미달이라고 여긴다면 얼마든지 생명도 취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문명이라는 것이 완벽하게 사라진 곳에서 자연이라는 무서운 적과 마주한 이들이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 가졌던 기대와 흥분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관계였던 것이다.

여름 B팀의 나츠에 대해서 여러모로 생각하게 된다. A팀과 달리 가장 열성(!) 분자로 분류되어 미래로 보내진 아이들.  성격이든 환경이든 무엇이든 생존 조건에서 변수로 짐작된 아이들. 그 안에 나츠가 있다. 소심하고 사람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도 못하고 속의 말을 하지도 못하는 이 아이. 바느질 하는 것도 청소하는 것도 무엇 하나 똑부러진 것 없이 엉성하고 어설프다. 그런 나츠가, 조금씩 변하게 된다.  아직도 많이 수줍고 머뭇머뭇거리지만 조금씩 능동적으로 생각하려고 애쓴다. 그 변화의 계기에 아라시가 있다. 살아있을 거라고 굳게 믿는 연인 하나에 대한 감정을 가슴 깊숙이 집어넣고 이제는 팀의 분위기 메이커로 가장 적극적으로 생존을 위해 싸우는 아이다.  사흘 후의 목표, 3주 후의 목표, 그리고 일년 후의 목표를 세우고 나가자고 말을 하는 아라시. 거기에 세미마루와 나츠가 화들짝 놀란다. 그런 생각을 해본 적도, 그런 생활을 해본 적도 없는 아이들이었다. 독자도 같이 감탄한다. 그런데 한 번 더 놀라게 된다.  계획하지 않고 되는 대로 살겠다고 외치는 세미마루지만, 그런 세미마루에게서 아라시는 실전에 강한 타입이라고 말을 한다. 작가 타무라 유미는 언제든 하나의 명제만 제시하지 않는다. 하나의 현상에서 두개 세개, 그리고 여러 개의 답을 끌어낸다. 하나만 옪은 것이 아니고 모두가 옳을 수 있고 또 동시에 모두가 옳지 않을 수도 있음을, 작가는 늘 말해준다.

바다에서 건진 히바리가 나츠에게 고약하게 구는 대목에선 울컥했다.  공주님처럼 자란 유서깊은 집안의 무녀 아이는 나츠의 약점을 제대로 쥐고서 뒤흔드는데 자기 나름대로는 그것이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이라고 한다.  나로서는 이해할 수도 동의할 수도 없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세미마루의 얘기에 허를 찔린다.  퉁명스럽게 굴었지만 그것이 히바리로서는 사과하려는 것이었다고.  얼마 전 내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아니, 지금도 진행 중이다.  나로서는 절대 미안해하는 거라고 느껴지지 않는 그 사람의 태도에서, 누군가는 미안해하고 있는 감정이 느껴진다고 했다.  내가 보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못 알아차린 것일까? 난 억울했다.  정말 미안하면 미안하다고 말을 해야 하는 것이고, 그 감정을 알게끔 시도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이름 한자락을 부르는 노력도 하지 않고, 내가 붙이는 말에 대꾸 한자락을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미안해하는 감정을 알라는 것인지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아직도, 나는 내가 너그럽지 못한 까닭이라고 인정하긴 억울하다. 다만, 조금은 이해해보려는 노력을 더 기울일 여지를 찾게 되었다.  작품 속 나츠처럼. 히바리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모두 죽어 없어진 지 수백 년.  아는 사람도 없고, 익숙한 문명도 없고 생존을 위해서 끊임없이 싸우고 조심해야 하는 그런 상황. 내일 아침 해가 뜨는 것이 충분히 두려운 그때에, 내일 아침을 기다릴 수 있는 희망 한자락, 마음 조각 하나를 가질 수 있음을, 작가는 긴 템포의 글 속에서 조금씩 보여준다. 그 무서운 희망이 그래도 아름답다고, 작가는 독자로 하여금 느끼게 해준다.

처음 광우병 쇠고기의 무서움을 알게 되던 날, 인류 멸망의 징후가 느껴지는 것 같아 잠이 오질 않았다.  이토록 환경을 망가뜨리고 사는 인류는 언젠가 모두 멸망하고 말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지만 나 살아있는 동안 그런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해본 적이 없다.  그 이기적인 기대감이 무서웠다. 광우병 쇠고기 만큼이나, 이런 마음들이 참으로 무섭구나... 생각했다.  아주 작은 가능성 하나에도 예견치 못한, 대비하지 못한 재앙에 이토록 두려움을 느끼는데 작품 속의 이 아이들을 얼마나 무서운 세상을 사는 것일까.  인간이 놀랍고 대단하고, 그래서 작가가 또한 놀랍고 대단하다.(존경한다!)

작품 안에선 간간히 노래 이야기가 나온다. 죽음에 다다른 사람들이 노래에서 찾는 위안과 안정에 공감한다.  그런 것들이 '예술'이 우리에게 선사해 주는 선물 중 가장 큰 부분일 것이다.  그들의 희망 노래가 오래오래 울렸으면 좋겠다. 어렵게 구한 흙피리가 부숴졌지만 희망만은 깨지지 않기를...

스케일이 워낙 커서 단행본으로 호흡을 따라가긴 좀 힘들다. 어릴 적에 '아르미안의 네 딸들'을 읽을 때에 뒷권이 막 2년 뒤에 나오고 그래서 다음 권 나올 땐 꼭 앞에서부터 다시 읽고 읽고를 반복했는데, 이 책은 그 정도로 간격 없이 나오진 않지만 워낙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야기가 잘 생각 안 날 때가 있다. 역시 큰 흐름과 더 깊은 감동은 완결 뒤에 또 이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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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18 1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6-18 1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냐 2008-06-24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랏. 이 책! 까먹고 있었어요. 몇권까지 읽었더라. 전 7권 정도 본거 같은데.;;; 역시 안 끝난 작품을 읽으면, 중간에 깜빡깜빡. 대단히 쇼킹하게 봤는데....이거 기다렸다가 마노아님이 완결편 리뷰하심..그때가서 봐야할까여. 흠흠.

마노아 2008-06-24 06:58   좋아요 0 | URL
전 계속 사 모으다가 6권 정도 나왔을 때부터 읽기 시작했어요. 그랬더니 푹 빠지게 만들더라구요^^;;
작품이 완전 대하서사시에요. 과연 20권 안에 끝날지 자신이 없네요. 으하핫, 완결편 리뷰까지 열심히 달리겠습니다^^ㅎㅎㅎ
 
소년, 아란타로 가다 나를 찾아가는 징검다리 소설 13
설 흔 지음 / 생각과느낌 / 200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여기, 조선의 한 소년이 있다. 역관 출신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가졌던 중인 계급의 아이는 부산의 거부 역관 이정의 딸을 연모한다.  이정의 딸 연희를 각시로 삼기 위해 출세하고팠던 소년은 인삼 밀매를 조건으로 조선통신사 행렬에 따라가게 된다. 이 사건이, 소년의 인생 행로를 확 바꾸어 버린다.

통신사 행렬에는 이언진이라는 역관이 있었다. 천재 시인 소리를 듣던 이언진은 통신사 일정 중에 있었던 숱한 고비에서 소년을 구해주었고 의미심장한 질문들을 던지며 우물 안 개구리였던 소년의 작은 틀을 깨어부순다.  작은 나라 조선 안에서, 또 신분이라는 굴레 안에 갇히어 오로지 부자가 되겠다는 나름의 포부만을 품고 살던 소년은 이언진을 만나면서 조금씩 성장한다.  이 책이 조선판 성장 소설로 읽힐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년 청유는 일본에 도착해서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조선에서 일본은 늘 미개한 나라였다. 그들의 문화와 풍속은 오랑캐의 것이었고 손가락질 받아 마땅했다.  그러나 청유의 눈으로 목격한 일본은 별천지였다.  조선과 구별되는 지극히 다른 풍속과 문화야 어찌 평가할 수 없을지라도 그들이 일궈낸 '문명'은 진일보된 것이었고 조선이 따라가지 못한 세계였다. 그 까닭을 이언진은 '개방'으로 설명했다.  나가사키 항에서 네덜란드와의 교류를 허락했던 일본, 때문에 서구의 과학문명과 기술을 일찌감치 받아들인 그들은 이미 조선을 저만치 따돌릴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진기한 경험은 소년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조선 땅에서 괴퍅한 천재 박지원으로부터 망신을 당했던 이언진의 시는 일본 땅에서 없어서 구하지 못하는 귀한 대접을 받는다.  그의 천재성을 일본 땅의 사람들은 알아주었지만 이언진이 인정받고 싶었던 것은 조선 땅이었다.  그리고 줄어들지 못한 그 간극이 이언진을 죽게 만든다.  실존인물인 이언진은 실제로 박지원으로부터 참혹한 평을 받은 것에 몹시 마음 아파했고 그 마음의 병을 이기지 못해 37의 나이로 요절한다. 박지원은 그의 천재성이 자만심으로 망가질까 하여 나름의 애정있는 충고를 했던 것이지만 그의 차가운 애정은 뜨거운 이언진이 소화시킬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이언진은 소년 청유에게 문을 두드리지 말고 박차고 나가라고 하였다.  그가 제시한 명제는 뚜렷했고 해답처럼 보였으나 정작 그 자신은 스스로를 둘러싼 문을 두드리지도 박차고 나가지도 못한 채 그 안에 갇히어 애석한 죽음을 맞고 만다.  혈육은 아니었지만 혈육의 정만큼이나 가까웠던 이언진의 죽음은 소년을 더욱 매섭게 단련시키게 된다.  아버지의 죽음에 이정이 연루되어 있고, 연희는 일본에 가 있는 동안 이미 시집을 간 상태다.  소년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문을 받차고 나가는 대신 다른 세계의 문을 열기로 결심한다.  그것이 바로 '아란타'(네덜란드)로 가는 것이다.

낯선 나라 일본보다도 더 낯설고 험할 게 분명한 아란타.  그곳에서 소년이 새로 일궈나갈 삶이 장밋빛이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조선 땅에 의지할 이 아무도 없는 청유에게는 '도전'이라도 가능한 그곳이 더 큰 가능성을 줄 수 있는 기회의 땅이라는 것만 알 뿐이다.  기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의 문이라는 것이 분명 존재하지만, 스스로 쌓아 가둬버리는 자아의 문도 분명히 있다.  안타깝지만 이언진은 그 문을 뚫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소년 청유가 아란타로 떠나면서 작품이 끝났기 때문에 청유가 과연 새 문을 어찌 열었을지 알 수 없지만 독자는 그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며 새길이 활짝 열리기를 기대하고 또 응원할 뿐이다.

닫힌 사회 조선에서 가진 재능을 다 펼쳐보지 못한 이가 어디 이언진 뿐이었겠으며, 새로운 문을 열고자 발버둥친 이가 어찌 소년 청유뿐일까.  그것은 200년이 훨씬 지난 오늘에서도 여전히 통용되는 질문이 될 수도 있다.  오늘, 낮에 시내에 나갔다가 국제 엠네스티에서 활동 중인 시민 단체 사람들을 만났다. 홍보 활동에 잠시 귀를 기울였는데 자신들과 함께 일해보지 않겠냐는 권유를 한다.  당장 내 앞가림도 못하고 있는 나로서는 당연하게도 거절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는데 그 사람의 마지막 말이 가슴에 맺힌다.  우리의 인권을 누가 대신 찾아주지 않는다고. 행동할 때에야 비로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백번 옳았다. 옳았고 동의하기 때문에 더는 더욱 미안함을 느꼈다. 모두가 행동가로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누군가의 희생과 봉사에 무임승차하는 것 같아 생계를 걱정하는 내 변명이 스스로 구차했다.

나를 둘러싼 문을 생각해 본다.  한 달 이상 한의원에서 진료를 받고 있지만 좀처럼 차도를 보이지 않고 있다.  한의사 샘께서는 아마도 스트레스가 원인일 거라고 말씀하셨다.  그게 정답일 거라고 나 역시 생각했다.  내 안의 문이 너무 견고해서 좋은 약을 먹고 꼭 필요한 치료를 받는다 할지라도 그것들이 나에게 해방을 주지 않는다. 근본적인 대책은 다른 데에 있다. 그 문을 깨부수는 것이 나의 몫이다.  이언진처럼, 좌절할 이유들이 내게 많다. 하지만, 그가 그랬듯 좌절하다가 속절없이 죽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안 되는 이유를 자꾸 생각지 말고, 될 수 있는 이유를, 가능하게 만드는 이유를 만들어 보자.  소년 청유처럼 새로운 문을 만드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겠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용서'라는 단어다. 용서할 수 없는 이유를 자꾸 생각지 말고, 용서할 수 있는 이유를 찾는 것. 그래야 내가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

내일부터는 사흘 정도 자숙(?)의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나를 가둔 문을 박차고, 부수고 나갈 힘을 만들기 위한 시간이다.  결과를 알지 못한다. 다만 노력할 뿐이다.  소년 청유도 어린 나이에 도전했다.  나도 해보자.

갑작스레 흥분해버려서 개인적인 얘기를 너무 많이 쏟았다. 책의 포장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작가의 이름은 설흔이다. 본명인지 모르겠는데 무협작가 이름 분위기이다. '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라는 책을 지었다.  선물받은 책인데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 이 책으로 인해 작가의 전작에도 더 관심이 쏟아진다.

책의 표지가 감각적이다. 소년이 고래를 붙잡고 유영하는 이미지인데 작품 속 꿈과 관련이 있다. 그림만으로 보면 꼭 치마 입은 댕기머리 소녀같지만, 댕기동자라고 생각하자..;;; 푸른 표지의 노란 띠지가 거의 보색을 이루는데 촌스럽지 않고 강조하는 포인트로 보인다.  청소년 소설을 표방했지만 어른들이 읽기에도 나쁘지 않다. 책의 맨 뒤에 조선통신사에 대한 친절한 설명이 보태어져 있는데 그림과 함께 즐겁게 참고할 수 있다.  다소 짧은 페이지가 아쉽게 느껴진다. 별 넷 반 정도 생각했는데 반점을 줄 수 없어 별 다섯이다.  오늘 나에게 '문'이라는 화두를 던져준 고마움에 대한 보답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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