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잭 웨더포드 지음, 정영목 옮김 / 사계절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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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몽골비사'라는 책을 꺼내보았다. 엄청 두꺼웠다. 목차만 대략 살펴보고는 우리나라의 '용비어천가' 비스무리 하지 않을까 지레 짐작했었다. 물론 나는 지금도 몽골비사를 읽어보지 못했고 용비어천가도 1차사료로 접해보진 못했다. 그럼에도, 두 책은 무척 다를거란 짐작을 또 다시 감히 해본다.  이 책, '칭기스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란 책을 접한 이유로 말이다.

몽골인들에게는 우상과 다름 없는 이름이었다. 지금도 너무 사랑 받고, 존경 받고, 추앙되는 이름. 그러나 역사 속에서는 꽤 오랫동안 증오의 대상이 되었던 이름이기도 했다. 특히 유럽 지역에서. 헌데 이 책의 저자인 인류학자 잭 웨더포드는 그가 잠들었던 유럽을 깨웠다고 말했다.  어떻게?

시대사를 공부하게 되면, 중세까지는 동양의 역사가 압도적으로 서양의 역사를... 아니, 바꿔 말해보자.  동양의 살림살이가 서양의 살림살이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윤택했었다. 여러 요인들이 있을 것이다.  땅의 기름짐이 다르고 식생활이 다르고 문화의 차이가 있다.  그러던 것이 근세로 넘어가면서 역전된다.  그 필연적 까닭을 '결핍에의 욕구'라고 생각했다. 부족했기 때문에 갖기를 원했고, 갖기를 원해서 찾아 헤맸고, 갈 수 없기에 돌아서 갔고, 그리고 정복했다.  대항해의 시대는 그렇게 열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윤택했던 땅덩어리는 늘 '중국'이라는 나라로 대표되었다.  그런데, 그게 과연 '중국' 혼자만의 역할이었을까? 다시 생각하게 해 본다. 그 사람, 칭기스 칸과 그 후예가...

지금도 그렇지만 그가 살았던 그 시대에도 몽골인들은 유목으로 먹고 살 수 있는 자연환경을 갖고 있었다.  칭기스 칸의 아버지가 그의 어머니를 납치해서 혼인했던 것처럼, 칭기스 칸도 부인을 약탈당했다가 찾아온 이력이 있다. 호전적인 성격 탓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방법 자체가 약탈이었던, 그래서 싸움이 벌어지면 가장 힘센 남자가 가장 튼튼한 말을 타고 제일 먼저 도망을 쳐야 '다음'을 기약할 수 있었던 삶을 살고 있었다.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앞서서 먼저 빼앗고, 제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끝없이 싸워야 했던 사내 칭기스 칸. 그가 덜 핍박 받고, 덜 고단하고, 덜 가난한 삶을 살았더라면 인류의 역사는 많은 부분 달라졌을 것이다.  있을 수 없는 가정 '만약에'를 허락한다면.

전쟁사를 살펴 보면 감탄이 나오는 이야기들이 참으로 많다. 카르타고의 한니발, 로마의 카이사르, 가까이에는 조선의 이순신까지.  그런데 차지한 땅의 단순 면적을 비교한다면 그 누구도 칭기스 칸을 따라잡을 수가 없다.  그가 훌륭한 전략가이기도 했지만 몽골인의 태생이 전사의, 전사를 위한, 전사에 의한 삶을 살기 때문이다.  그들은 멈추지 않고 달릴 수 있다. 비상식량을 상비하고 있으며 날 것으로도 식용이 가능했고, 보급병을 데리고 다니지도 않았다. 그들의 가볍고 날랜 말을 철갑장비를 두른 중세의 무사를 태운 유럽의 살찐 말이 감당해 낼 수 없었고, 그들의 강력한 활도 따라잡을 수 없었다.

어쩌면, 칭기스 칸 자신도 자신이 구축한 땅이 그토록 넓어질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다만 멈출 길이 없어서, 멈출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 그렇게 달렸을 지도 모르겠다. 그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그것이 단순히 '욕심' 때문이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의 아들, 그리고 손자 대에 이르면 또 달라지지만 적어도 그가 살아있는 동안의 발자취는 그러했을 거라고 느껴진다.

그는 위대한 전략가였고 또 타고난 싸움꾼이었고 보기 드문 경영자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의 마인드를 아들들이 함께 나눠갖지 못했다.  당연하게도 제국은 분열되었고 그들은 칸의 자리를 두고서 서로 싸웠다.  몽골의 흔적을 전 세계 곳곳에 뿌렸지만 각각의 '칸국'으로 갈리어 그들은 따로 또 같이 성장한다.  그들은 가장 앞서가고 있던 무슬림들의 땅을 철저히 밟아버렸고, 오랫동안 공을 들였던 중국 땅을 삼켰다. 그러나 가져갈 게 별로 없었던, 그래서 탐나지 않았던 유럽 땅은 방치했다. 칸의 죽음으로 비어버린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서둘러 초원으로 돌아가야 했던 기막힌 우연도 물론 한몫을 해냈다.

바람처럼 나타났다가 바람처럼 사라진 그들의 존재가 유럽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했다. 그들은 두려워했고 동시에 혐오했다. 자신들보다 훨씬 관용을 베풀었고 잔인하지 않았지만 몽골의 존재는 마녀사냥의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몽골을 이야기한 여러 저작물들을 살펴보면 그들의 공포가 얼마나 극에 달해 있었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쿠빌라이 칸은 칭기스 칸의 손자다.  그는 할아버지의 기질을 가장 닮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할아버지의 제국 경영 능력은 가장 빼닮은 사람이었다.  그는 말을 타고 그 넓은 제국을 달리지 않았지만 제국과 제국, 문명과 문명 사이의 소통의 장을 열었다.  그의 나라는 배타 대신 국제적인 감각을 갖고 있었고, 법을 집행함에 있어선 관용을 앞세웠고, 경제 관념에 있어선 합리성을 최선으로 여겼다.  그의 제국을 보고 감탄한 흔적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중국이라는 나라가 참 독특하긴 하다.  여러 정복왕조가 그 땅을 넘보았고 또 차지했지만 끝내 살아남지는 못했다. 철저히 한화되어서 지배하다가 사라지기도 하였고, 철저히 거리를 두다가 또 금세 밀려나기도 하였다.  몽골의 원 왕조는 두 가지를 다 거친 케이스로 보인다.  그렇게 대단했음에도 불구하고 고작 백년을 지배하고는 다시 초원으로 밀려난 몽골족.  그것이 단순히 한화를 거부한 까닭이라고 알아왔는데 이 책에선 더 흥미롭고 더 설득력 있는 데이타를 제공한다. 바로, '흑사병'의 유행이다.  유럽을 휩쓸고 지나가면서 어마어마한 사망자를 낸 바로 그 죽음의 전염병이 중국에서부터 시작되어서 몽골이 개척한 그 교역로를 통하여 유럽으로 갔다고 저자는 말한다.  병을 옮기는 것은 쥐였고, 그 쥐에 붙어있던 벼룩이었다.  당연하게도 교역로는 모두 막혀버린다.  물자의 유통으로 유지되고 있던 원 왕조. 거의 자본주의 사회의 그 거대한 흐름을 연상케 하던 제국으로서는 타격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황실의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그 제국을 버텨주던 유통은 막혀버렸다.  고립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악을 쓰다 보니 기존과 달리 배타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고 인구수에서 결코 비교할 수 없는 중국인들을 박해해 버린다.  당연한 수순으로 반란이 일어나고 저항이 거세어진다. 제국의 몰락이 다가온 것이다.

우리나라를 생각해 보았다. 세계 무역 규모 11위의 경제 대국이란 꼬리표가 늘 따라다닌다. 보잘 것 없는 자원에 좁은 땅덩어리, 면적 대비 인구수만 많아 우글우글 바글바글 아둥바둥 살아가고 있다.  이미 커질대로 커진 경제 규모, 또 채워도 채워도 채울 수 없는 욕망. 그러니 끝이 아득한 FTA도 우리가 살기 위해서 해야만 한다고 말하고, 그 주장이 먹힌다.  맨발로 살 때는 거친 땅이 그닥 부담스럽지 않았는데, 신발의 편안함과 아늑함을 알아차린 뒤에는 모래밭도 맨발로는 걸어갈 수 없게 되는 게 사람의 생리다.  경제 성장의 순기능을 모르거나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꼭 거대해진 채 내실이 부실해졌던 몽골 제국과 겹쳐 생각하게 된다.  그들은 다 버리고 초원으로 돌아가서는 전통 그대로 다시 살아갈 수 있었지만, 우리는 이미 그러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생각이 들어버렸다.  또 그런 우리나라를 몽골에선 선망해 마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는 것도 아이러니하지만.

몽골은 로마나 알렉산드로스나 그밖의 여러 정복자와 달리 자신들의 문화를, 전통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이 사라지고 난 뒤 그 자리에 그들의 자취를 남기지 못했다.  다만 뚜렷했던 그 기억을 역사로, 문학으로 남겼을 뿐이다.  가장 잔인했다고 알려졌던 그들이지만 실상 그들이 보여주었던 행적은 지극히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오히려 타국과 타문명의 발전과 소통의 장을 마련했을 뿐.

볼수록 재밌고 또 신기했다. 그래서일까. 유독 몽골의 경영감각, 리더십을 배우자란 책들이 눈에 띈다.  칭기스 칸과 또 몽골 제국이 걸었던 발자취를 살펴 보면 오늘날의 눈으로도 감탄하고 배울 점들이 많이 보인다.  그들은 단순한 땅부자가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저자는 칭기스 칸과 몽골의 업적 및 행적에 꽤 경도된 사람이었음에 분명하지만 인류학자로서의 객관적인 눈을 잃지 않으려고 시종일관 노력했다. 여러 문명사를 통사적으로 꿰뚫으며 전개해 가는 연출력이 설득력 있었고, 몽골의 성장과 쇠퇴를 짚어가는 흐름은 꽤나 드라마틱했다.  가벼운 이야기가 아님에도 책은 즐겁게, 동시에 진지하게 읽힌다.  여러 관련 자료들이 사진과 함께 삽입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좀 진하게 남지만.

너무 많은 밑줄을 그어버려, 정리할 때 추리고 추렸는 데도 밑줄 긋기가 세 편이나 나와 버렸다.  길어서 다른 사람들이 읽기엔 힘들겠지만, 내가 찾아보기엔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인상 깊었던 한 대목을 옮겨본다.

역사상 대부분이 제국은 정복한 땅에 자신의 문명을 강요했다. 로마는 라틴어, 신, 와인, 올리브 기름, 밀농사를 강요했다. 밀농사에 적합하지 않은 지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터키의 에페소스에서 독일의 쾰른에 이르기까지 로마의 모든 도시는 도시 설계와 건축양식이 똑같았다. 시장과 목욕탕으로부터 기둥이나 문간의 아주 미세한 곳까지 마찬가지였다. 다른 시대로 가면 영국은 봄베이에 튜더 왕조식 건물을 지었고, 네덜란드는 카리브 해에 풍차를 세웠고, 스페인은 멕시코에서 아르헨티나까지 자신의 양식을 적용한 성당과 광장을 만들었고, 미국은 파나마에서 사우디아바리아에 이르기까지 그들만의 독특한 주거단지를 건설했다. 따라서 고고학자들은 어떤 장소에 남아 있는 물리적 흔적을 연구하기만 하면 힌두, 아스텍, 말리, 잉카, 아랍 제국의 성정을 추적할 수 있다.

그러나 몽골은 자신이 정복한 땅에 가벼운 몸으로 왔다. 그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건축양식을 가져오지 않았다. 정복당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언어나 종교를 강요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외래 작물의 경작을 강요하지도 않았고 주민의 집단적인 생활방식을 갑자기 바꾸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몽골은 대규모의 사람들을 움직이고 전쟁을 목적으로 새로운 과학 기술을 활용하는 솜씨가 뛰어났기 때문에 몽골 평화 기간에도 똑같은 관행을 유지하여 유목민 사회의 이동 원칙을 생활과 문화가 매우 보수적인 지역에 적용했다. – 325쪽

 

일종의 의무감을 갖고 몽골에 대한 공부를 하기 시작했는데, 알면 알수록 신비롭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새로이 몽골 관련 책이 또 나왔던데 출판기념 행사에 참가해 볼까 한다. 전통 악기 마두금 연주도 들을 수 있다고 하는데 제법 기대가 된다.  이러다가 언젠가 몽골로 훌쩍 떠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아득해 보이지만 그런 날을 꿈꾸어 보며 괜히 두근거려 본다. 상상만으로도 벌써 즐거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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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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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베스트셀러를 읽은 듯하다. 출간 전에 결말을 봉인한 예약주문을 받는 등 떠들썩한 신고식을 치렀었다.  퓰리처 상에, 영화로도 제작되고 있고, 작가의 걸출한 명성까지 모든 박자를 다 갖춘 듯했다.  제목에선 비장미가 느껴지고 칙칙한 표지의 암울한 색에서 한차례 심호흡을 하게 만든다. 이 작품, 어떤 느낌으로 읽힐까.

어제 펼쳐들고 오늘 다 읽었다. 한 번 잡으면 계속 읽게 되는 소설이었다. 단락은 끊어져 있지만 장의 구별은 없고 문장 부호도 쉼표와 마침표 외에는 없다. ('눈 먼 자들의 도시'가 생각나는 스타일이다.)게다가 등장인물도 아버지와 아들 외에 거의 없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왜 이들은 끝없이 이 길을 걷고 있는지 작가는 친절한 설명을 보태지 않는다. 좀 더 읽으면 나오려나? 좀 더 읽으면 구체적인 단서가 나오려나? 호기심을 갖고 계속 덤비지만, 읽으면서 차차 그런 단서들이 의미 없어짐을 독자도 깨닫게 된다. 그저, 황량하기 그지 없는 그 찬바람을 함께 느끼며 읽어나갈 뿐이다.

아마도 핵폭발이지 싶다. 건물들이 열에 녹아 내렸다는 표현이 있었다.  문명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서로를 경계하고 강탈의 대상으로 여기며 식량 확보에 혈안이 되어 있다. 이 남자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그는 아들을 데리고 있다. 아들을 지키는 것. 그것 이외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며, 그것만큼 지키기 어려운 것도 없었다.  자신이 한 일중 가장 용감했던 일이 오늘 아침 눈을 뜬 것이라는 남자의 말. 차라리 다 끝내버리고 싶다고 재촉하는 죽음에의 충동 속에서 어린 아들을 지키려는 부정으로 남자는 모질게 하루를 버텨간다.  영화 우주 전쟁에서 탐 크루즈가 딸을 지키기 위해 모질어지는 모습들이 떠오른다. 좋은 아버지는 되지 못했지만 적어도 딸은 지켜내려고 했던 그 아버지.  이 작품 속의 아버지는 좀 더 상냥했다.  아들이 상처받지 않기를 바랐고, 보다 아름다운 꿈을 꿀 수 있기를 소망했다. 설령 그것이 거짓이라 할지라도.

사람을 마주치기 어려웠지만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나같이 그들처럼 헐벗고 굶주린 상대였다. 멀리서 놓쳐버린 어린아이가 눈에 밟혔다.  굶고 있던 노인을 두고 가지 못하는 소년의 요청에 남자는 마지 못해 식량을 나눈다. 그들의 식량과 담요를 모조리 훔쳐갖고 달아난 상대에게서 똑같이 약탈 행위를 하지만, 소년의 비난에 아버지는 그에게도 일말의 자비를 베푼다.  생존 앞에서 동정이란 사치스러웠는데도 아버지는 아들을 설득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설득되지 않을 때에는 아들의 말을 따라준다. 그것이 어떤 결말을 가져올지 알고 있음에도, 아버지는 아들의 마음이 다치고 닫히는 것이 싫었다.

그들은 남쪽을 향해 걷고 또 걸었다.  남쪽으로 가면 좀 더 따뜻해질 것이라 생각했고, 바다를 만날 것이라 생각했다. 그들은 불을 운반한다고 소명의식을 가졌다. 불. 그들은 갖고 있는 게 없었다. 몸을 덮을 담요와 통조림 몇 개. 불...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문명이라고 말을 하기엔 죽어버린 세계의 절망이 너무 깊었고, 희망이라고 감히 말하기엔 그들 앞의 시간이 가혹하게 길었다.  그럼에도 꺼뜨릴 수 없는 그들의 '불'.

푸른 바다를 기대한 아들은 까맣게 죽어 재가 덮인 바다만 만날 수 있었다. 그런 바다라도 추위를 무릅쓰고 들어가 몸을 적시고 싶어한 아들.  실망하고 놀랄 것을 알면서도 보내주는 아버지. 푸른 바다를 보여주지 못해서 미안해하는 아버지의 마음.  작가는 결코 흥분하는 목소리 없이 아주 건조하게 서술하고 있는데, 그들이 마주치는 상황상황들, 또 갖게 되는 마음마음들이 애잔하여 독자의 마음은 촉촉해진다.

인류는 끝을 모른다는 듯이 군비를 올려왔고 무기를 생산했고 욕심을 버리지 않았다. 종말론은 인류가 시작된 이래로 계속 있어왔던 말일 테지만, 현대에 다가설수록 더 설득력 있게 사무쳤을 것이다.  핵폭발, 3차 대전 이후의 인류의 삶에 대한 상상력은 자주 발휘되어 왔다. 영화든 소설이든 만화든, 어디든 가능했던 이야기들.  이 작품을 통해서 평화의 소중함이라든가, 문명의 양면성, 애끓는 휴머니즘... 이런 것들을 강렬히 느끼기는 힘들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그 건조하고 살벌한, 지루하면서도 집중할 수밖에 없는 꼭 그런 느낌을 이 책에서 함께 느낀다.  보여주지 못해서가 아니라 딱 여기까지만 보여주고 말겠다는 작가의 저지선도 함께.

인류 멸망에 대한 눈물나는 비참함과 가혹함, 또 동시에 그럼에도 타오르는 뜨거운 인류애를 느끼고 싶다면 차라리 타무라 유미의 '세븐 시즈'를 권하고 싶다. 더 많이 울고 더 많이 감동받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작품 '로드'가 영화로 완성된다면 나는 그 작품 역시 빠뜨리지 않고 또 찾아볼 듯하다.  아마 대사보다도 영상으로, 소리보다도 적막함으로 관객을 압도할지도 모른다.
길은 외롭게 펼쳐져 있고, 끝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가보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아니 갈 수도 없는 그 길. 함께 갈 수 있는 맞잡은 손이 있다면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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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2008-07-05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부지런하다는걸 느껴요..
촛불집회도 나가시고 틈틈히 책도 이렇게 보시고..리뷰도 잊지 않고 쓰시고..마노아님..저도 멀리서 응원합니다..
몸 잘 살피시고 챙기시며 ~!

마노아 2008-07-05 08:26   좋아요 0 | URL
책 읽고 리뷰 쓰는 건 참 오랜만이에요. 요샌 계속 가벼운 책만 읽곤 했어요.
배꽃님 흔적을 보니 참 좋아요. 주말 잘 지내셔요^^

순오기 2008-07-05 0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구드룬 파우제방의 '핵폭발 뒤 최후의 아이들'이 생각났어요~~
딱 여기까지만 보여주겠다는 작가의 저지선~ 이 책을 궁금하게 하네요.
미래를 가상으로 만들어진 영화들이 점차 현실이 되어간다는 불안감... 어쩌죠?

마노아 2008-07-05 08:27   좋아요 0 | URL
리뷰 쓰고 나서 이 책에 실린 다른 분들의 리뷰를 보니 참 다양한 느낌들이 이색적이었어요.
평점도 천차만별이었구요. 메마른 느낌의 문체가 참 맘에 들었어요. 느낌이 다르긴 하지만 일견 김훈을 떠오르게 하는 맛이 있었거든요.
광우병에 관한 진실을 처음 알았을 때 인류 멸망에 대한 공포를 직접적으로 느꼈어요. 어휴, 정말 큰일이에요...ㅜㅜ

다락방 2008-07-05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의 마지막 단락이 참 와닿네요. 리뷰에서 적막함과 고요함이 그대로 묻어나네요. 잘 읽었어요, 마노아님.

마노아 2008-07-05 23:48   좋아요 0 | URL
부러 감정을 압축한 듯한 소설을 만나고 나니 제 기분도 그렇게 가라앉더라구요. 나쁘지 않은 고요함이었어요. 다락방님 주말 잘 보내고 계신가요? 오늘 습도 100%인가봐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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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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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배낭을 등 위로 추켜올리며 황폐한 땅을 건너다보았다. 길은 텅 비어 있었다. 밑의 작은 골짜기에는 움직이지 않는 잿빛 뱀 같은 강이 있었다. 어김없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강변에는 죽은 갈대들이 짐짝처럼 쓰러져 있었다. 괜찮니? 남자가 물었다.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그들은 암회색 빛 속에서 아스팔트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발을 질질 끌며 재를 헤치고 나아갔다. 서로가 세상의 전부였다.-10쪽

남자는 회색 빛 속으로 걸어나가 우뚝 서서 순간적으로 세상의 절대적 진실을 보았다. 유언 없는 지구의 차갑고 무자비한 회전. 사정없는 어둠. 눈먼 개들처럼 달려가는 태양. 괴멸하는 시커먼 우주의 진공. 그리고 어딘가에는 쫓겨다니며 숨어 있는 여우들처럼 몸을 떠는 두 짐승. 빌려온 시간과 빌려온 세계와 그것을 애달파하는 빌려온 눈.-149쪽

남자는 고개를 돌려 소년을 보았다. 어쩌면 남자는 그 자신이 소년에게는 외계인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이해한 것인지도 몰랐다. 이제는 사라진 행성 출신의 존재. 그 행성에 고나한 이야기는 수상쩍었다. 아이를 기쁘게 해주려고 자신이 잃어버린 세계를 구축할 때마다 그것을 잃어버렸다는 사실도 함께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소년이 자신보다 이 점을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꿈을 기억하려 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남은 것은 꿈의 느낌뿐이었다. 어쩌면 그 생물들이 그에게 경고를 하러 온 것인지도 몰랐다. 무엇을 경고하러? 그 자신의 마음 속에서 이미 재가 된 것을 아이의 마음속에서 불로 피워올릴 수는 없다는 것. 지금도 그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들이 이 피난처를 찾아내지 못했기를 바라고 있었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늘 어서 이 모든 것이 끝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174쪽

있지도 않았던 세계나 오지도 않을 세계의 꿈을 꿔서 네가 다시 행복해진다면 그건 네가 포기했다는 뜻이야. 이해하겠니? 하지만 넌 포기할 수 없어. 내가 그렇게 놔두지 않을 거야.-215쪽

아팠죠, 그죠?
그래. 아팠어.
아빠는 정말로 용감해요?
중간 정도.
지금까지 해본 가장 용감한 일이 뭐예요?
남자는 피가 섞인 가래를 길에 뱉어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난 거.
정말요?
아니. 귀담아 듣지 마라. 자, 가자.-307쪽

남자는 카트의 손잡이를 엇갈려 쥔 두 팔 위에 이마를 묻고 기침을 했다. 피가 섞인 침을 뱉었다. 걸음을 멈추고 쉬는 횟수가 늘었다. 소년이 남자를 지켜보았다. 다른 세상이었다면 아이는 이미 남자를 자신의 삶에서 비우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에게는 다른 삶이 없었다. 소년이 밤에 잠에서 깨 남자가 숨을 쉬는지 귀를 기울이며 확인한다는 것을 남자도 알고 있었다.-3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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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잭 웨더포드 지음, 정영목 옮김 / 사계절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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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안에 산소가 부족하고 살갗 밑에 피가 말라붙기 때문에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시커멓게 변해갔다. 이 극적인 변화 때문에 이 병은 ‘흑사병’이라고 알려졌다. 환자는 보통 며칠 동안 몹시 괴로워하다가 죽었다.
상당히 그럴듯한, 그러나 확인할 수 없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병은 중국 남부에서 발생했고 몽골 병사들이 북쪽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 병의 세균은 벼룩 속에 살며, 벼룩은 쥐의 몸을 타고 남쪽에서 오는 식량이나 다른 공물과 함께 옮겨다녔다. -343쪽

중국의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 지역, 그리고 훗날 다른 도시의 수많은 쥐는 이 세균에게 완벽한 거주환경을 제공했다. 사람들은 쥐가 오랫동안 인간과 아주 가까운 곳에서 살아온 동물이라 이 병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1331년 연대기 기록자는 허베이성(하북성) 주민의 90%가 사망했다고 기록했다. 중국은 이 병 때문에 인구가 1/2 내지 1/3로 줄어든 것으로 전해진다. 13세기 초에 이 나라에는 1억 2300만 명 정도가 살았는데, 14세기 말에는 인구가 6,500만 명까지 줄어들었다.
중국은 몽골 세계체제에서 제조업의 중심 역할을 했다. 따라서 중국에서 물자가 쏟아져 나가면서 병도 따라갔다. 이런 식으로 페스트는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진 것으로 보인다.
페스트는 교역으로 옮겨지는 전염병이었다. 몽골이 상인을 위해 건설한 도로와 역참 또한 의도와 관계 없이 벼룩, 따라서 병 자체가 이동하다 머무는 지점으로 이용되었다. -344쪽

1348년 페스트는 이탈리아의 도시들을 파괴했으며, 그해 6월이 되자 잉글랜드에 진입했다. 1350년 겨울에는 페로 제도에서 북대서양을 건너 아이슬란드를 통과하더니 그린란드에까지 이르렀다. 페스트는 아이슬란 정착민의 60%를 죽인 것으로 보이며, 그린란드에서도 살아남으려고 안간힘을 쓰던 바이킹 거주지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346쪽

페스트는 로마의 몰락 이후 유럽을 지배했던 사회질서를 거의 파괴해 버려, 대륙에는 위험한 무질서만 남았다. 이 병은 도시 거주자를 더 쉽게 공략했기 때문에 교육 받은 계급과 숙련된 장인들이 많이 죽었다. 도시 안이든 밖이든 수도원이나 수녀원 같은 폐쇄된 공간은 병이 안에 있는 사람들을 몰살할 수 있는 이상적인 기회를 제공했다. 유럽의 수도원 제도, 나아가서 로마 가톨릭 교회 전체는 이 비극의 충격으로부터 다시 회복되지 못했다.
-347쪽

사람들은 이 병의 진짜 원인이나 전염 경로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곧 도시 안팎의 교역이나 사람의 이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 정도는 인식하게 되었다.
즉시 교역, 통신, 운송이 중단되었다. 유럽 전역의 지방당국은 페스트의 전파를 막고 대중의 반응을 통제하기 위해 페스트 법을 만들었다.

외교사절단과 편지도 오가지 않았다. 몽골 운송체계의 가동이 중단되자 가톨릭 교회와 중국 선교단의 연락이 끊겼다. 겁에 질린 사람들은 외국인이 병을 가져온다고 비난했고, 이로써 국제교역은 더 위축되었다. 유럽에서 기독교도는 다시 유대인을 공격했다. 유대인은 교역이나 동방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는데, 이 두가지는 또 페스트하고도 관계가 깊었기 때문이다. 유럽 사람들은 유대인을 집에 가두고 불을 지르기도 했다. 끌어내어 죄를 자백할 때까지 형틀에 묶고 고문하기도 했다. 1348년 7월 교황 클레멘스 6세가 유대인을 보호하고 유대인 박해를 중단하라는 교서를 내렸음에도 유대인 탄압은 오히려 증가했다. -348쪽

페스트는 유럽을 고립시켰을 뿐 아니라 페르시아와 러시아에 사는 몽골인을 중국이나 몽골과 차단했다. 중국의 황금 가족은 러시아와 페르시아로부터 물자를 얻을 수 없었다. 각 지파 사이에 연결이 끊어지자 서로 맞물리는 소유제도도 붕괴했다. 페스트는 국토를 유린했고, 살아 있는 사람들을 타락시켰고, 교역과 공물을 차단하여 몽골의 황금 가족으로부터 일차적인 소득원을 빼앗았다. 몽골인은 거의 100년 동안 서로간의 물질적 이해관계 덕분에 그들을 가르는 정치적 단층선을 극복할 수 있었다. 그들은 정치적 통일ㅇ성이 흔들릴 때에도 문화적, 상업적으로는 통일된 제국을 유지했다. 그러나 페스트의 살육이 시작되면서 중심이 버틸 수가 없었고, 그 결과 복잡한 체제는 붕괴했다. 몽골 제국은 사람, 물자, 정보가 제국 전체를 끊임 없이 빠르게 돌아다녀야 생존할 수 있었다. 이런 연결이 없으면 제국도 없었다. -349쪽

몽골인이 외국인 정복자이면서도 때로는 자기들보다 열 배나 더 많은 신민을 큰 탈 없이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은 군사력이 약해진 뒤에도 교역물자가 계속 대규모로 흘러다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페스트의 여파로 교역도 이루어지지 않고 다른 지파에서 지원병을 보내줄 가능성도 사라지자 칭기스칸의 황금 가족 각 지파는 신민이 언제라도 적대적으로 변할 수 있는 매우 가변적인 상황에서 스스로 꾸려나가야 했다. 군사적 힘과 상업적 이득이라는 두 가지 이점이 사라지자, 러시아, 중앙아시아, 페르시아, 중동의 몽골인은 자신의 신민과 결혼을 하고 의식적으로 그들의 언어, 종교, 문화를 따름으로써 권력과 정통성의 새로운 양식을 찾아나갔다.
-349쪽

조정의 관리들은 중국인에게 자유를 너무 많이 주었고, 몽골인이 지나칙 중국 생활에 동화되었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중국 문화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대신 자신들의 이질적 정체성을 강화하면서 중국의 언어, 종교, 문화, 중국인과의 혼인 관계로부터 벗어나려 했다. 극단적인 탄압을 하자 중국 신민은 불만이 늘었으며, 몽골 통치자들을 더 불신하고 두려워하게 되었다.
몽골인은 가능한 한 중국인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새로운 노력의 일환으로 다양한 종교를 공정하게 대접한다는 전통적 정책을 버리고 불교, 특히 티베트 불교를 우대하여 특혜를 주었다. 티베트 불교는 중국의 유교적 이상과 거리가 멀었다.-351쪽

중국의 몽골 칸들은 페스트의 확산도 효과적으로 막지 못하고 신민들로부터도 점차 고립되자 티베트 불교의 영적 세계에서 피난처를 구했다.

중국의 몽골 통치자들이 자신의 영성과 성을 표현하는 데 집중하고 있는 동안 수도의 ‘금단의 도시’의 담 너머 바깥 사회는 붕괴하고 있었다. 가장 뚜렷한 증상은 몽골 당국이 그렇게 힘겹게 또 꼼꼼하게 만들어낸 화폐제도를 통제할 힘을 잃었다는 점이었다. 몽골 행정부가 약해진다는 조짐만 보여도 지폐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져 가치가 폭락하는 대신 구리와 은의 가치는 상승했다. 인플레이션도 매우 심해져 1356년에 이르자 지폐는 가치를 거의 잃고 말았다. -352쪽

페르시아와 중국에서 몽골 사회는 빠르게 붕괴했다. 각각 1335년과 1368년에 몽골인의 지배가 무너졌다. 페르시아 일 칸국의 몽골인들은 사라졌다. 죽음을 당하거나 자신보다 훨씬 더 큰 신민에게 흡수된 것이다. 중국에서 대칸 토곤 테무르(순제)와 약 6만 명의 몽골인은 명의 반군을 피해 가까스로 달아났다. 그러나 뒤에 남은 약 40만 명은 체포되어 죽음을 당하거나 중국인에게 흡수되었다. 간신히 몽골로 돌아온 사람들은 전과 다름없이 목가적인 유목민 생활을 계속했다. 1211년부터 1368년까지 중국을 다스렸음에도, 그저 남쪽 여름 숙영지에서 조금 오래 머물다 온 듯이 다시 옛날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러시아의 킵착칸국은 작은 무리로 나뉘어 이후 400년이라는 긴 기간에 걸쳐 서서히 쇠퇴해갔다.
-353쪽

명의 통치자들은 몽골이 중국에 정착하도록 권유했던 무슬림, 기독교도, 유대인 상인들을 쫓아냈다. 또 그렇지 않아도 힘을 잃어가던 지폐를 완전히 없애고 금속화폐로 돌아감으로써 몽골이 세워놓았던 상업체계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들은 몽골이 후원했던 티베트의 라마교 계열의 불교도 배격하여 그 자리에 전통적인 도교와 유교의 사상과 전통을 집어넣었다. 새로운 통치자들은 몽골의 교역체계를 소생시켜다 실패하자 대양을 다니던 배들을 태우고, 외국인의 중국 여행을 금지하고, 외국인은 못 들어오고 중국인은 못 나가게 할 목적으로 국민 총생산의 큰 부분을 투여하여 육중한 새 성벽을 쌓았다. 이 과정에서 동남아시아 여러 항구에 살던 수천 명의 중국인이 옴짝달싹 못하게 되었다. -354쪽

명은 새로운 몽골 침략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중국식 도시라 할 수 있는 남쪽의 난징으로 천도했다. 그러나 이미 통일중국의 통치는 북부의 수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고, 주민 다수의 태도와 행동방식도 하루아침에 바꿀 수가 없었다. 명은 결국 옛 몽골의 수도 칸발릭으로 돌아갔다. 대신 명은 몽골의 외양을 제거하여 도시를 다시 만들기로 했다.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새로운 ‘금단의 도시’(자금성)를 세우려 한 것이다.
-354쪽

티무르의 후손은 역사에서 인도 무굴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519년 무굴 왕조를 창건한 바부르는 칭기스 칸의 둘째 아들 차가타이의 13대손이다. 무굴 제국은 바부르의 손자 악바르 치세(1556-1608)에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는 칭기스 칸과 마찬가지로 행정의 천재였을 뿐 아니라 무역도 중시했다. 악바르는 원성의 대상이던 지즈야 세금, 즉 무슬림이 아닌 사람들에게 물리는 인두세를 철폐했다. 그는 기병대를 전통적인 몽골의 십진법에 따라 편성했으며(5000명까지), 공무원 체계를 확립하여 공과를 기준으로 사람들을 평가했다. 몽골이 중국을 당대에 가장 생산적인 제조와 교역의 중심으로 만들었듯이, 무굴은 인도를 세계 최대의 제조와 교역 국가로 만들었으며, 무슬림과 힌두 전통과는 반대로 여성의 지위를 높였다. 악바르는 종교에 대한 보편주의적 태도를 유지했으며, 모든 종교를 하늘에는 하나의 신이 있고 땅에는 하나의 황제가 있다는 내용의 하나의 ‘거룩한 신앙’, 즉 디니 일라로 융합하려 했다.
-356쪽

아주 많은 제국들이 정치에서부터 예술에 이르기까지 몽골 제국의 환상을 유지하려 했기 때문에 여론 역시 몽골 제국이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완강하게 믿지 않으려 했던 것 같다. 몽골 제국에 대한 믿음이 그 어느 곳보다 더 오래 지속되고 또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던 곳은 유럽이다. 마지막 칸이 중국을 통치하고 나서도 100년 이상이 지난 뒤인 1492년 유럽에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자신이 바다를 통해 대칸의 몽골 조정과 다시 접촉하여 허물어진 교역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고 이사벨과 페르난도를 설득했다. 몽골의 교통체계가 무너지면서 유럽인은 제국의 몰락과 대칸의 패배 소식을 듣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콜럼버스는 유럽에서 몽골 조정으로 가는 육로는 무슬림이 막고 있지만 유럽에서 서쪽으로 항해를 하여 ‘세계의 바다’를 건너 마르코 폴로가 묘사한 땅으로 가겠다고 주장한 것이다.
-357쪽

콜럼버스에게 마르코 폴로는 영감이었을 뿐 아니라 실질적인 안내자였다. 그는 몇 개의 작은 섬을 찾은 뒤에 쿠바에 이르렀을 때 자신이 대칸의 영토 가장자리에 이르렀고 곧 몽골의 카타이 왕국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몽골인의 대칸의 땅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만난 사람들이 몽골인의 나라 남쪽에 자리잡은 인도 주민이라고 판단했으며, 그래서 아메리카 원주민을 인디언(인도인)이라고 불렀다. 이 이름은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다.
-357쪽

황화의 공포는 필리핀인이나 한국인 등 어떤 집단에도 적용될 수 있었지만, 그 가운데도 중국과 일본이 가장 위험해 보였다. 일본은 산업화를 이루고 대군을 육성했다. 중국은 식민지화를 계속 거부하고 기독교로 개종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러자 아시아인은 서구 대중의 눈에 적으로 비치기 시작했다.
19세기 내내 유럽에는 아시아인에 대한 공포가 쌓여갔다. -364쪽

르네상스와 몽골 제국의 시대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칭기스 칸은 인간 역사에서 가장 낮은 수준으로까지 격하되었다. 근대 유럽은 새로 발견한 식민지 정복의 힘과 스스로 내세운 세계 지배의 임무 때문에 아시아의 정복자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칭기스 칸과 몽골의 잔혹성은 문명화된 잉글랜드, 러시아, 프랑스의 식민주의자들이 아시아를 통치할 수밖에 없는 구실이 되었다.

유럽 과학자나 정치가들과는 정반대로 이 이데올로기의 피해자인 아시아의 지식인과 활동가들은 칭기스 칸에게서 새로운 영웅을 발견했다. 이것은 유럽의 우월성이라는 교조를 반박하는 생생한 증거였다. -365쪽

20세기 전반에 점차 아시아의 지도자로 자처하던 일본은 유럽과 다른 모습을 보이고 싶어하면서 범몽골주의에 강하게 끌리기 시작했다. 일부 일본 학자들은 칭기스 칸이 사무라이 출신으로 권력투쟁에서 실패한 뒤 고향을 떠나 초원지대 유목민 사이에 살면서 힘을 길러 세계 정복에 나섰다는 이야기를 퍼뜨리기도 했다.
-367쪽

우리가 서 있는 곳은 범상한 장소가 아니었다. 이곳에서 몽골 민족의 어머니가 공격을 당하고, 납치를 당하고, 폭행을 당했다. 그녀를 빼앗기자 어린 테무진은 자신의 젊은 목숨을 포함해서 모든 것을 걸고 그녀를 되찾으려 했다. 테무진은 결국 그녀를 구했으며, 이후 평생 동안 자신의 민족을 외침으로부터 보호하려고 싸웠다. 이를 위해 쉬지 않고 외부인들을 공격하며 돌아다니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테무진은 세계를 바꾸었고 민족을 창조했다. -3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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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잭 웨더포드 지음, 정영목 옮김 / 사계절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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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 칸이 입성했던 1220년 그날부터 1920년에 소비에트 군대가 진입할 때까지 꼭 700년 동안 칭기스 칸의 후손들은 칸과 아미르로서 부하라를 통치했는데, 이 통치자 가문은 역사상 가장 긴 가족 왕조로 손꼽힌다.
-48쪽

초원 문화에서는 냄새가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다른 문화에서는 만나거나 헤어질 때 끌어안거나 입을 맞추지만 초원의 유목민은 뺨에 입을 맞추는 것과 흡사한 동작으로 서로 냄새를 맡는다. 냄새 맡기에는 매우 깊은 감정적 의미가 담기는데, 여기에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 이루어지는 가족간의 냄새 맡기에서부터 연인 사이의 성적인 냄새 맡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준이 있다. 각 사람의 숨결과 독특한 체취는 그 사람의 영혼의 일부로 여겨진다.
-53쪽

초원지대의 모든 부족 가운데 몽골족과 가장 가까운 친족은 동쪽의 타타르족과 거란족, 그리고 더 동쪽으로 만주족, 서쪽으로 중앙아시아의 여러 투르크족이었다. 이 세인종 집단은 시베리아의 일부 부족들과 문화, 언어 유산을 공유하고 있는데, 실제로 이들 모두가 시베리아 출신일 가능성도 있다.
-55쪽

나이든 여자와 아기는 보통 피해를 입지 않았다. 싸울 수 있는 나이의 남자는 보통 가장 빠르고 튼튼한 말을 타고 가장 먼저 달아났다. 그들이 죽을 확률이 가장 높았고, 전체 집단의 미래의 생계가 그들에게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58쪽

몽골족에게 싸움이란 진짜 전쟁이나 지속적인 분쟁이라기보다도 생계를 위한 일상적인 약탈에 가까웠다. 복수도 약탈의 구실이 되곤 했지만, 진짜 동기가 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중요한 것은 살인이 아니라 물자였다.
-59쪽

다른 군대와는 달리 몽골군은 얼어붙은 강이나 호수에서도 쉽게 움직이고 심지어 싸움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인은 얼어붙은 볼가 강이나 도나우 강이 외침의 방어선 노릇을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몽골족에게는 오히려 상대의 방비가 가장 허술한 철에 말을 타고 성벽까지 다가갈 수 있는 간선도로가 되었다.
-66쪽

부르칸 칼둔의 숲에 숨은 테무진은 그의 평생을 좌우하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아내의 납치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부르테를 다시 빼앗아올 희망을 접을 수도 있었다. 사실 이것이 예상되는 선택이다. 그의 작은 집단으로는 강력한 메르키트에게 도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다른 부인을 찾을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의 어머니를 납치했듯이 테무진도 여자를 납치해야 했다. 더 힘센 남자들에게 부인을 빼앗긴 사람한테 자발적으로 딸을 내줄 가족은 없었기 때문이다.
-79쪽

7은 몽골족에게 불운한 숫자
-91쪽

칭기스 칸은 주권자를 포함한 모든 개인보다 법이 우위에 선다는 사실을 선포했다. 통치자를 법에 복속시킨 것은 그때까지 어떤 문명도 이루지 못했던 업적이었다.
-128쪽

13세기에 현재 중국이 차지하고 있는 몽골 남부 지역에는 수많은 독립 국가와 왕국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세계 인구의 1/3이 살고 있었다. 주르첸 왕국은 인구가 약 5,000만으로, 현재 중국에 포함된 영토를 차지하고 있던 수많은 왕국들 가운데 두 번째로 큰 나라였다. 가장 크고 가장 중요한 영토는 수백 년 중국 문명의 상속자인 송 왕조의 행정부(정확하게 말하자면 남송!) 관할하에 있었으며, 그들은 항저우(당시에는 임안이라고 불렀다.)를 수도로 삼아 중국 남부에서 약 6,000만 명의 인구를 다스리고 있었다. 몽골 고원과 송나라 사이에는 유목민의 국가들이 한줄로 늘어서서 완충 역할을 하고 있었다.
-145쪽

몽골인은 장거리 여행에 이상적인 조건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각기 반드시 필요한 것만 지니고 다녔다. 이들은 발목까지 내려오는 전통적인 양털 겉옷 밑에 바지를 입고, 귀덮개가 달린 모피 모자를 쓰고, 밑창이 두꺼운 승마용 장화를 신었다. 이렇게 각 전사는 악천후에도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옷을 입었을 뿐 아니라, 불을 피울 수 있는 부싯돌, 물과 젖을 담을 수 있는 가죽 그릇, 화살촉을 날카롭게 갈 수 있는 줄, 짐승이나 포로를 묶을 수 있는 밧줄, 옷을 수선할 수 있는 바늘, 뭔가를 자르는 데 사용하는 칼과 자귀, 무엇이든지 담을 수 있는 가죽 부대 등을 지니고 다녔다. 그리고 십호마다 작은 천막을 하나씩 가지고 다녔다.
-147쪽

몽골군의 이동과 대형은 두 요인에 의해 결정되었는데, 이 점에서 이들은 다른 모든 전통적인 문명의 군대와 분명하게 달랐다. 첫째, 몽골군은 모두 기병으로만 이루어졌다. 행군하는 보병 없이 무장한 기병만 있다는 뜻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다른 나라의 군대는 대개 다수의 전사가 보병이었다.
몽골군의 두 번째 독특한 특징은 병사들과 함께 다니는 예비의 많은 말들 외에는 따로 병참부나 거추장스러운 보급 대열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동하면서 가축의 젖을 짜고, 가축을 도살하여 식량을 만들고, 사냥과 약탈을 통해 배를 채웠다. 마르코 폴로는 몽골 전사들이 불을 피우거나 음식을 조리하느라 멈추는 일이 없이 열흘 동안 여행을 할 수 있으며, 말의 피를 마시고, 각 사람이 5kg의 마른 젖 덩어리를 가지고 다니다가 매일 그 가운데 500g 정도를 물이 담긴 가죽 용기에 풀어 식사를 해결한다고 전했다. 전사는 가늘게 자른 육포와 마른 응유를 가지고 다니다 말을 탄 채로 먹었다. 새로 고기가 생겼는데 조리할 시간이 없으면 날고기를 안장 밑에 넣었다. 그러면 곧 씹을 수 있을 만큼 부드러워졌다. -148쪽

주르첸 병사들과 비교할 때 몽골군은 훨씬 더 건강하고 튼튼했다. 몽골족은 고기며 우유며 요구르트 같은 유제품으로 이루어진 식사를 꾸준히 했으며, 적들은 여러 가지 곡물로 이루어진 죽을 먹었다. 농민 전사들은 곡물 식사를 하기 때문에 뼈의 발육이 좋지 않았고, 이도 썩었고, 몸에 힘이 없었고, 병에 잘 걸렸다. 반대로 몽골 병사는 아무리 가난해도 주로 단백질을 먹었으며, 따라서 이와 뼈가 튼튼했다. 탄수화물이 많은 식사를 하는 주르첸 병사들과는 달리 몽골 병사들은 식사를 하지 않아도 하루 이틀은 너끈히 버텼다.
전통적인 군대는 긴 열을 이루어 똑같은 길을 가고, 식량을 잔뜩 운반하는 사람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러나 몽골군은 광대한 지역에 흩어져서 이동했다. 그래야 가축이 풀을 충분히 뜯을 수 있고, 병사들이 사냥을 할 기회도 최대한 늘어났기 때문이다. -149쪽

몽골족은 우월한 무기 때문에 승리를 거둔 것이 아니었다. 무기를 만드는 기술은 오랫동안 비밀이 유지될 수 없다. 한쪽 편에서 유용하게 써먹은 무기는 전투를 몇 번만 하고 나면 상대편도 사용하게 된다. 몽골의 승리는 작은 무리를 지어 다니던 유목민이 수천 년 동안 다져온 단결과 규율에서 나온 것이며, 지도자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어디서나 전사들은 지도자를 위해 죽어야 한다고 배운다. 그러나 칭기스 칸은 부하들에게 자신을 위해 죽을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전쟁을 할 때 무엇보다도 몽골군의 생명을 보전하는 것을 중요한 전략적 목적으로 삼았다. 수십만 명의 병사들에게 쉽게 죽으라는 명령을 내렸던 역사 속의 다른 장군이나 황제들과는 달리 단 한 명의 목숨이라도 함부로 희생하려 하지 않았다. 칭기스 칸이 군대를 위해 만든 가장 중요한 규칙들은 인명 손실과 관련된 것이었다. 몽골 전사는 전장의 안팎에서 죽음, 부상, 패배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생각만 해도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153쪽

중국의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전쟁의 승리는 하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얻는 것이었다. 칭기스 칸이 계속 승리를 거두어나가자 중국의 농민이나 주르첸 전사들은 그가 하늘의 명령에 따라 싸우는 것이며, 그에게 대항하는 것은 곧 하늘에 대항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161쪽

13세기 무슬림의 땅에는 아랍, 투르크, 페르시아 문명이 결합되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들이 모여 살고 있었으며, 이 나라들은 천문학이나 수학에서부터 농학이나 언어학에 이르기까지 학문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가장 높은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또 일반 주민의 문맹률도 세계에서 가장 낮았다. 사제만 글을 읽을 수 있는 유럽이나 인도, 정부 관료만 글을 읽을 수 있는 중국과 비교할 때 무슬림 세계에는 어느 마을을 가나 쿠란을 읽고 무슬림 법을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은 있었다. 유럽, 중국, 인도가 지역 문명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면, 무슬림은 상업, 기술, 일반 학문의 높은 수준으로 볼 때 세계 수준의 문명에 가장 근접해 잇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머지 세계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추락할 거리도 그만큼 길었다. 몽골 침략군의 말발굽은 다른 어느 곳보다 이곳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174쪽

이 시대의 문명화된 군대가 공포를 자아내는 행동을 하는 것과 비교할 때 몽골군의 행동은 잔인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들이 공포를 자아낸 것은 특별히 잔혹해서가 아니라, 정복이 매우 빠르고 능률적이었으며 부자나 권력자의 목숨을 경멸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원정은 그들이 피에 굶주린 행동을 했거나 사람들 앞에서 잔혹성을 과시했기 때문이 아니라 막강한 군대와 난공불락으로 보이는 도시들과 싸워 전례 없는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눈길을 끌었다.
-184쪽

몽골군이 정복한 도시의 유적을 조사해보면 실제 주민의 수가 희생자로 계산된 주민 수의 1/10을 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은 건조한 사막 토양이기 때문에 뼈가 수백 년, 때로는 수천 년씩 보존된다. 그러나 어디를 보아도 몽골군이 살육했다고 하는 수백만 명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칭기스 칸은 주민 살육자라기보다는 도시 파괴자라고 묘사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는 복수를 하거나 공포심을 자아내는 목적 외에 전략적인 목적에서 도시를 완전히 파괴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186쪽

도시 주민에게는 일 년 내내 항상 먹을 것을 공급해주어야 했다. 그러나 식량을 생산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고비 사막 남쪽에서 큰 대가를 치르고 들여오는 물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카라코룸은 넓은 초원지대에 있었으므로 매서운 겨울바람을 피할 수가 없었다. 가축은 산이 있는 곳으로 피할 수 있었지만, 도시는 철마다 자리를 옮길 수가 없었다. 몽골의 수도 카라코룸은 이런 문제들에 시달리다 결국 사라지고 만다.
-206쪽

몽골인이 기독교에 끌린 데는 예수라는 이름도 하나의 이유가 되었던 것 같다. 예수라는 말은 몽골의 신성한 숫자인 9를 가리키는 말과 비슷하게 들리며, 왕조의 창건자라고 할 수 있는 칭기스 칸의 아버지 예수게이의 이름과 비슷하게 들리기도 한다. 기독교인이 높은 지위를 차지하기는 했지만 카라코룸이라는 작은 도시는 아마 당시 세계에서 종교적으로 가장 개방되고 관용적인 곳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많은 종교인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며 자기 신앙을 지키는 곳은 달리 찾아볼 수 없었다.
-208쪽

말을 탄 러시아의 공후들은 반짝거리는 창과 검, 화려한 기를 들고 문장이 박힌 옷을 자랑하며 육중한 군마 위에 앉아 있었다. 이 유럽의 군마들은 힘의 과시를 위해 키웠기 때문에 연병장에서 고귀한 승마자의 갑옷 무게는 어렵지 않게 감당했지만 전장에서 속력이나 민첩성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러시아 귀족은 육중한 금속 갑옷을 입어도 전장에서 다른 유럽 귀족을 만났을 때는 걱정할 것이 없었다. 상대방 역시 비슷한 과시용 말을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사방에서 보병이 패주하는 상황이라 그들 역시 달아나야 했다. 그들의 말은 아름답기는 했지만 무거운 짐을 싣고 오래 달릴 수는 없었다. 몽골군은 철갑을 두른 전사들을 따라잡았고 러시아의 도시국가를 다스리는 공후들은 하나씩 죽음을 당했다. 몽골군은 전투가 시작되었던 흑해로 돌아가는 길 내내 러시아군을 추적하여 도륙했다. 1224년의 노브고로드 연대기에 따르면 몽골군과 싸우러 나간 대군 가운데 오직 "1/10만 고향에 돌아왔다." 거의 1000년 전 훈족이 유럽을 공격한 이래 처음으로 아시아 군대가 유럽을 침공하여 대군을 완파한 것이다.
-216쪽

몽골은 늘 똑같은 방식을 따랐다. 어떤 영토를 원정할 때면 먼저 공식 사절을 보내, 항복하여 몽골 가족에 합류하고 대칸의 봉신이 될 것을 요구한다. 상대가 동의를 하면 사절은 새로운 봉신을 적으로부터 보호해주겠다고 약속할 뿐 아니라, 권력과 신앙을 유지하는 것도 허용했다. 다만 속국은 이런 보호의 대가로 모든 재산과 물자의 10%를 몽골에 조공으로 바쳐야 했다. 그러나 항복 제안을 받아들이는 도시는 거의 없었다.
-221쪽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의 극도의 사악함" 때문에 죄 없는 자신들이 몽골인의 진노의 피해를 입고 있다고 비난했다.
-236쪽

유럽인은 자신들의 문명의 경계를 위협하는 몽골군을 물리칠 수는 없었지만, 국내의 적이라고 상상하는 유대인은 제압할 수 있었다. 요크에서 로마에 이르기까지 도시마다 성난 기독교인 군중이 유대인 거주 구역을 공격했다. 기독교인은 몽골인이 원정에서 사용했다고 하는 방법으로 유대인을 벌주려 했다. 그들은 유대인의 집에 불을 지르고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을 학살했다. 간신히 도시를 빠져나온 유대인은 피난처를 찾아 떠돌았지만, 어디를 가나 더 심한 박해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피난민 가운데 유대인이 기독교 공동체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교회는 유대인에게 누구나 금방 알아볼 수 있도록 남들과 구별되는 옷을 입고 상징물을 달라고 명령했다.
-237쪽

몽골군은 도나우 강 너머를 정찰하기는 했지만 서유럽 전면 침공은 현실로 나타나지 않았다. 1241년 12월 11일, 우구데이는 술에 취해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죽었다고 한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은 카라코룸으로부터 6,500km 떨어진 유럽의 몽골군에게 4주에서 6주 내에 전해졌다. 차가타이도 비슷한 시기에 죽었다. 칭기스 칸이 죽고 나서 불과 14년이 지난 시점에 아들 넷이 모두 죽은 것이다. 그러자 칭기스 칸의 손자들은 다음 대칸이 되기 위한 경쟁을 계속하기 위해 고향으로 달려갔다. 가문들 간의 투쟁은 이후 10년간 계속된다. 적어도 이 10년 동안은 세계가 몽골의 침략을 걱정하지 않을 수 있었다.
-238쪽

몽골의 남자들이 전장에 머물며 다른 나라들을 정복하느라 바쁠 때 여자들은 제국을 운영했다.
우구데이는 대칸으로 재위하는 동안 술에 취하는 일이 너무 잦아 제국을 제대로 이끌 수 없었다. 그는 제1부인은 아니었지만 가장 유능했던 투레게네에게 행정권을 점차 넘겨주었다. 1241년에 우구데이가 죽자 투레게네는 공식 섭정이 되었다. 1251년까지 이후 10년간 그녀는 다른 여자들 몇 명과 더불어 세계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관리했다. 이 여자들 가운데 몽골족 출신은 없었다. 모두 정복당한 초원지대 부족 출신으로 칭기스 칸 집안에 시집을 왔다. 또 이 여자들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다. 그러나 성도 종교도 권력투쟁의 장애가 되지는 않았다. 이들은 자신의 아들의 손에 제국 전체를 넘겨주려고 싸웠다. -240-241쪽

칭기스 칸 자신은 비교적 약하고, 술을 좋아하고, 자기중심적인 아들들만 낳았지만, 소르칵타니가 낳아서 훈련시킨 네 아들은 모두 역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기게 된다. 그녀의 아들들은 모두 칸이었다. 또 뭉케에 이어 아릭 부케, 쿠릴라이가 대칸 자리에 오르며, 나머지 아들 훌레구는 페르시아의 일칸이 되어 그곳에서 독자적인 왕조를 창건한다. 그녀의 아들들은 페르시아, 바그다드, 시리아, 터키를 모두 정복하여 제국의 규모를 최대로 키운다. 그들은 남쪽으로는 송나라를 정복하고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까지 밀고 들어간다. 또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던 아사신(Assassins-이들의 명성 때문에 훗날 유럽으로 건너와 암살자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일파를 없애고 무슬림의 칼리파를 처형한다.
-249쪽

아마 이스마일파가 대마초를 중시했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이 그들을 핫샤신, 즉 "하시시를 사용하는 사람들"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이름은 아사신이라는 말로 바뀌었다. 살인자들이 실제로 하시시에 취해서 행동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이 이름은 고관을 암살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여러 언어에 스며들었다.
-264쪽

몽골군은 불과 2년 만에 서쪽의 유럽 십자군과 동쪽의 셀주크 투르크가 200년 동안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였어도 하지 못한 일을 해냈다. 그들은 아랍 세계의 심장부를 정복했다. 그 이후 2003년 미군과 영국군이 들어올 때까지 무슬림이 아닌 부대가 바그다드나 이라크를 정복한 일은 없었다.
-271쪽

몽골 제국은 뭉케 칸 치세에 가장 넓은 땅을 차지했다. 뭉케는 칭기스 칸의 후손 가운데 몽골 제국 전체로부터 대칸으로 인정받은 마지막 칸이었다.
-276쪽

쿠빌라이는 교육을 잘 받았고 중국 문화가 지배하는 농경지역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황금 가족의 다른 구성원들로부터 전적인 신임이나 인정을 받은 적이 없었다. 쿠빌라이는 건물이나 도시를 더 좋아했다. 심지어 중국어도 조금 할 줄 알았다. 이렇게 몽골의 전통적 생활로부터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늘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277쪽

카라코룸은 불과 30년 동안 몽골 제국의 수도 역할을 한 뒤, 몽골인 자신의 손에 의해 약탈을 당하고 파괴되어버렸다. 쿠빌라이의 명령이었다. 그러나 짧은 기간이기는 했지만 카라코룸은 세계의 중심이고 축이었다.
-281쪽

쿠빌라이 칸의 천재성은 그의 군대가 아무리 크고 그의 무기가 아무리 세련되었다 해도 단지 힘만으로는 중국 전체를 정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한 데서 엿볼 수 있다. 그는 할아버지와 같은 수준의 군사적 기술을 갖추지 못했지만, 그의 집안 누구보다도 머리가 좋았던 것은 분명하다.
결국 쿠빌라이는 할아버지가 야만적인 힘으로 이루지 못했던 과업, 즉 지상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중국 전체를 정복하고 통일하는 과업을 대중정치를 통해 이룰 수 있었다. 그는 중국식 수도를 건설하고, 중국식 이름을 채택하고, 중국식 왕조를 창건하고, 중국식 행정부를 수립했다. 그는 중국인보다, 적어도 송나라 사람보다는 더 중국인처럼 보임으로써 중국을 통제할 수 있었다. -285쪽

뭉케가 아버지 톨루이에게 대칸의 자리를 추서했듯이 쿠빌라이는 그에게 중국 황제 자리를 추서했다.(툴루이는 예종이 되었다. 참고로 칭기스 칸은 태조, 우구데이는 태종, 구육은 정종, 뭉케는 헌종이며, 쿠빌라이는 세조가 되었다.) 쿠빌라이는 또 그들의 중국식 초상화를 그리라고 명령했는데, 그 결과 그들의 모습은 몽골의 전사라기보다는 중국의 현자를 닮게 되었다.
-288쪽

쿠빌라이 칸의 행정부는 지주에게 소유권을 보장하고, 세금을 낮추고, 도로와 통신을 개선했다. 몽골은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송나라의 가혹한 형법을 완화했다. 전체적으로 쿠빌라이의 치세 30여 년 동안 처형된 범죄자는 2500명 이하였다. 평균 사형 건수로 보자면 현대의 중국이나 미국 같은 나라의 사형건수보다 훨씬 적다.
-292쪽

몽골 법은 자백을 얻어낼 목적으로 고문을 하려면 그 전에 용의자가 특정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단순한 의심 이상의 실체적 증거를 쥐고 있어야 한다고 구체적으로 규정했다. 몽골이 고문의 사용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던 시기에 유럽의 교회와 국가는 이전보다 훨씬 더 다양한 범죄에 증거를 불문하고 고문을 시행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293쪽

과거의 행정제도는 보수를 받지 않는 학자 겸 관리들에 의존했다. 이들은 일을 해주거나 승인 도장을 찍어주는 대신 사람들한테서 돈을 강탈하여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몽골인은 일상적인 행정을 담당하는 하급직에는 보수를 주는 직원을 고용했다. 이들의 보수는 몽골 영토 전역에서 표준화되었으며, 다만 생활비 차이를 고려하여 지역마다 약간 다르게 지급했다.
합의를 전제로 한 회의체와 보수를 지급하는 공무원 제도를 만들려는 노력은 중국에서는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여 몽골 시대와 함께 막을 내렸다. 명나라는 위에서 아래로 다스리는 방식을 선호하여 권력을 잡자마자 회의제를 버리고 전통적인 관료제로 돌아갔다. 그 이후 중국 역사에서는 이러한 참여 행정 실험의 길이 막혀 있다가, 20세기에 이르러 공화국 창건자와 공산주의자들이 지방 회의체, 토론, 보수를 받는 행정가, 시민 참여 정부 등의 제도를 다시 도입하려고 노력했다. -296-297쪽

쿠빌라이는 제국 전역의 교역 속도를 높이고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지폐의 사용을 급격하게 확대했다. 마르코 폴로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지폐가 널리 통용되고 있었다. 마르코 폴로는 뽕나무 껍질로 지폐를 만든다고 묘사하는데, 오늘날 우리는 그것이 종이임을 알 수 있지만 당시 유럽에서는 몰랐다. 지폐는 다양한 크기의 사각형으로 잘라 그 가치를 기록하고 주홍색 도장을 찍었다. 지폐의 첫 번째 장점은 당시 사용되던 주화에 비해 다루거나 운반하기가 훨씬 쉽다는 것이었다.
-297쪽

몽골인은 유교나 전족 같은 일부 중국 문화는 일관되게 거부했다. 쿠빌라이는 실용적 가치가 있는 사상이나 제도를 찾아 오래 전 중국 역사까지 뒤지는 사람이었다. 쿠빌라이는 전통적인 중국의 학문과 문화 가운데 몇 가지 유형을 장려하기 위해 학교를 세우고 전국에서 가장 뛰어난 학자들로 이루어진 한림원을 재건했다. 그는 1269년에 몽골 언어 학교를 세웠으며, 1271년에는 칸발릭에 몽골 국립대학을 건립했다.
몽골 조정은 몽골어만이 아니라, 아랍어, 페르시아어, 위구르어, 탕구트어, 주르첸어, 티베트어, 중국어를 비롯하여 덜 알려진 언어들을 위한 서기도 두었다. -298쪽

몽골은 모든 사람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한 방법으로 문맹 퇴치를 장려했다. 쿠빌라이 칸은 농민의 자식을 포함한 모든 아이들을 교육할 수 있는 공립학교를 만들었다. 몽골은 겨울에는 농민의 자식들도 배울 시간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교사들은 그들에게 고전 중국어 교육을 시키지 않고 구어를 사용하여 실용적인 교육을 했다. 몽골 왕조 기록에 따르면 쿠빌라이 칸의 치세에 공립학교가 2만 166개 세워졌다. 서구에서는 100년이 더 지난 뒤에야 작가들이 구어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정부가 보통사람들의 자녀에 대한 공교육 책임을 떠맡은 것은 거의 500년이나 지난 뒤의 일이다.
-299쪽

중국에서는 전통적으로 배우와 가수 같은 공연 예술가들이 매춘부나 첩처럼 존경도 받지 못하고 지위도 낮았다. 그러나 몽골 통치자들은 그들의 지위를 전문 직업인으로 격상하고 공연장이 장터, 매음굴, 선술집에 한정되지 않도록 극장 지구를 조성했다. 중국의 연극과 몽골의 음악 후원이 결합되면서 훗날 경극이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301쪽

쿠빌라이의 일본 침공은 실패했다. 그러나 일본의 사회적, 정치적 삶에는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몽골군의 압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문화적 통일을 이루고 군국주의적 정부를 세워야 했기 때문이다. 한편 몽골은 언제 그런 실패가 있었냐는 듯이 고개를 돌려 더 손쉬워 보이는 목표물을 찾았다.
몽골의 지상 정복은 계속되었다. 몽골군은 열대의 더위와 낯선 지형 때문에 큰 고초를 겪으면서도 미얀마, 베트남 북부의 안남, 라오스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베트남 남부의 참파나 인도 해안의 말라바르를 포함한 동남아시아 몇 개 왕국은 스스로 몽골 지배에 복종했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이런 복종은 현실적인 행동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의식이었다. 몽골에는 그들을 다스릴 인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307쪽

몽골인의 상업적 영향은 그들의 군대보다 훨씬 멀리까지 퍼져갔으며, 쿠빌라이 칸 치세에는 몽골 제국이 ‘몽골 회사’로 바뀌었다. 13세기 내내, 그리고 14세기 초에 몽골인은 제국 전체의 교역로를 유지했고 30 내지 50km마다 자리잡고 있는 대피소에 물자를 쟁여두었다. 역참은 운송용 동물만이 아니라 상인이 험한 지형을 헤쳐나가도록 도와주는 안내인까지 제공했다. -317쪽

몽골 엘리트가 교역에 깊숙이 관여하면서 전통과 뚜렷한 단절이 이루어졌다. 중국에서 유럽에 이르기까지 전통 귀족은 일반적으로 상업 활동을 불명예스럽고, 더럽고, 종종 부도덕하다고 멸시했다. 권력이나 신앙을 독점한 자들이 낮추어보는 육체노동 작업과 같은 급이었다. 나아가서 이 시대 봉건 유럽의 경제적 이상은 모든 나라가 자족적이어야 할 뿐 아니라, 각 장원이 최대한 자급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봉건체제에서 수입된 물자에 의존하는 것은 곧 국내 경제의 실패를 뜻했다.
그러나 몽골은 상인을 강도보다 겨우 한 단계 높은 지위에 놓는 중국의 문화적 편견을 정면으로 공격하여 상인의 지위를 모든 종교와 직업보다 높은 자리로 격상했다. 상인보다 높은 지위는 이제 정부 관리밖에 없었다. 대신 중국 전통사회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했던 유교 학자들을 아홉 번째 지위로 낮추었다. 거지보다는 높지만 매춘부보다는 하나 낮은 등급이었다.-323쪽

역사상 대부분이 제국은 정복한 땅에 자신의 문명을 강요했다. 로마는 라틴어, 신, 와인, 올리브 기름, 밀농사를 강요했다. 밀농사에 적합하지 않은 지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터키의 에페소스에서 독일의 쾰른에 이르기까지 로마의 모든 도시는 도시 설계와 건축양식이 똑같았다. 시장과 목욕탕으로부터 기둥이나 문간의 아주 미세한 곳까지 마찬가지였다. 다른 시대로 가면 영국은 봄베이에 튜더 왕조식 건물을 지었고, 네덜란드는 카리브 해에 풍차를 세웠고, 스페인은 멕시코에서 아르헨티나까지 자신의 양식을 적용한 성당과 광장을 만들었고, 미국은 파나마에서 사우디아바리아에 이르기까지 그들만의 독특한 주거단지를 건설했다. 따라서 고고학자들은 어떤 장소에 남아 있는 물리적 흔적을 연구하기만 하면 힌두, 아스텍, 말리, 잉카, 아랍 제국의 성정을 추적할 수 있다. -325쪽

그러나 몽골은 자신이 정복한 땅에 가벼운 몸으로 왔다. 그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건축양식을 가져오지 않았다. 정복당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언어나 종교를 강요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외래 작물의 경작을 강요하지도 않았고 주민의 집단적인 생활방식을 갑자기 바꾸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몽골은 대규모의 사람들을 움직이고 전쟁을 목적으로 새로운 과학 기술을 활용하는 솜씨가 뛰어났기 때문에 몽골 평화 기간에도 똑같은 관행을 유지하여 유목민 사회의 이동 원칙을 생활과 문화가 매우 보수적인 지역에 적용했다. -325쪽

전통적인 제국은 한 도시에 부를 축적했다. 모든 길은 수도로 통했고, 늘 가장 좋은 것은 수도에 이르렀다. 한 도시가 제국 전체를 지배하다 보니 로마나 바빌론 같은 이름은 제국 자체의 이름이 되었다. 그러나 몽골 제국에서는 주요한 도시 하나가 전체를 지배한 적이 없었다. 제국 내에서 물자와 사람은 늘 이곳저곳으로 이동했다.
-326쪽

몽골은 문화를 휴대 가능한 형태로 바꾸었다. 단순히 물자를 교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모든 형태의 지식은 상품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328쪽

유럽은 몽골의 직접 지배를 받은 적은 없지만 여러 면에서 몽골의 세계체제로부터 가장 많은 이득을 얻었다. 유럽인은 몽골 정복이라는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교역, 기술 이전, ‘세계 인식의 대전환’에 따른 모든 혜택을 입었다. 몽골은 헝가리와 독일에서 기사를 죽였지만 도시를 파괴하거나 점령하지는 않았다. 로마 멸망 이후 문명이 주류와 차단되었던 유럽인은 열심히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고, 새 옷을 입고, 새 음악을 듣고, 새 음식을 먹었다. 그들의 생활수준은 거의 모든 면에서 급속하게 높아졌다.
-333쪽

몽골이 위대하다는 이미지는 1390년 경 제프리 초서가 가장 분명하게 표현했다. 초서는 외교적인 일로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광범위하게 여행했으며 자신의 독자들 다수보다 훨씬 더 국제적인 안목을 갖추고 있었다. 영어로 쓰인 첫 책 <캔터베리 이야기>에서 가장 긴 이야기는 칭기스 칸의 생애와 모험을 로맨틱하고 환상적으로 묘사한다.

이 고귀한 왕의 이름은 칭기스 칸이었으니
그는 당대에 큰 명성을 떨쳐
어느 지역 어느 곳에도
만사에 그렇게 뛰어난 군주는 없었다.
그는 왕에게 속한 것은 하나도 부족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이 태어난 신앙에 따라
스스로 맹세한 법을 지켰다.
게다가 강인하고, 지혜롭고, 부유했으며,
누가 보아도 정이 많고 의로웠다.
그는 약속을 지켰고, 자비롭고, 명예로웠으며,
그의 감정은 중심이 잡혀 흔들림이 없었다.
그의 집의 어떤 젊은 남자 못지 않게
젊고, 생기있고, 강하며, 전투에서 앞서고자 했다.
그는 잘생긴 사람이고 운도 좋았으며,
늘 왕의 지위를 잘 유지하여,
그런 사람은 달리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 고귀한 왕, 이 타타르의 칭기스 칸.-3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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