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은 예전에 만화책 신간 업데이트가 참 늦었는데 요새도 그닥 빠르진 않지만, 어쨌든 출간 당일 검색은 된다.

근데 이미지가 안 뜨거나 상품을 페이퍼에 입력하는 것은 하루 늦게야 가능할 때가 있다.

그러니까 'feel so good'9권은 상품 정보를 뻔히 보면서도 여기에 추가는 현재 안 되는 상황이고, '꼴2'는 이미지가 안 뜬다.

뭐, 내일이면 가능하겠지.^^

궁 신간이 나왔다. 20권 안에는 끝이 나려나 싶지만 힘들 거라 사료됨. 이젠 거의 애증의 관계가 되어버렸다.

바람의 나라 스페셜 에디션2권이 나왔다. 난 1권 포장도 안 뜯었는데, 이 책이 현재 연재된 부분까지 나오려면 어마어마하게 기다려야 함을 알기 때문이다. 기다리는 묘미도 있고^^

어렵게 구한 바람의 나라 소설 버전을 먼저 읽어야 하는데 이번주부터 갑자기 너무 바빠쪘다. 바빠져서 얻은 소득 하나는 중고샵을 기웃거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더 이상 쟁여둘 데도 없는데 덕분에 미친 소비를 잠시 멈출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신간은 잽싸게 파악하고 있다는 거..;;;

담주면 바람의 나라를 드라마로 만난다. 제작진은 다소 신뢰가 가지만 주인공이 송일국이라는 것은 여전히 참 상상이 안 간다. 그건 길상 역에 유준상이 참 안 어울리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무휼의 유일한 사랑 '연' 역할을 최정원이 한다고 한다. 왈패 아가씨로 그린다는 기사를 언뜻 본 것 같아서 허걱 하는 중!

그러고 보니 작년에 가르쳤던 학생이 나만 보면 최정원 닮았다는 소리를 한 적이 있다. 나야 고맙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 닮았는 것을...;;;

심란한 마음에 자꾸 전화기만 매만지는 오후. 쇼윈도우 밖으로는 닭장차 지키는 전경들이 한가득이다. 광화문을 목전에 둔 이곳은, 경복궁 역 언니의 가게 매장 안. 언니야 휴가 빨리 끝내고 언능 온나. 나 너무 힘들다!

이키가미 5권 나왔다. 초반에만 출간이 지연됐고, 3권 이후부터는 규칙적으로 나오는 듯하다.

독자로서는 고마울 따름.

강렬한 설정만큼이나 작품의 매력도 강렬하다. 섬뜩하고 또 무서운 미래의 어느 자화상.

다음 번 주문에 꼭 포함시켜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김종배의 it] 부모 마음 '볼모'삼은 '평준화 허물기'

http://www.sslu.or.kr/bbs/board.php?bo_table=name&wr_id=103659

  
  * 이 글은 뉴스블로그 '미디어토씨(www.mediatossi.com)'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김종배/시사평론가

 ****

지난 주에, 서울시 어느 공고에 이력서를 넣었다. TO가 별로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일단 넣고 보자, 했는데... 이력서 보내고 걱정했다. 정말 오라고 할까봐.

공고 학생들이 머리에 뿔난 것 아닌데 많이 거칠까 봐 걱정이 되었다. 만나본 적도 없으면서 가진 선입견이 미안했는데, 난 연락이 오기를 기다렸고 또 동시에 연락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어제, 강남에 있는 모 사립 중학교에 면접을 다녀왔다. 오늘 연락을 준다고 했는데 아직 소식은 없다. 난 또 생각했다.

된다면 강남 아이들을, 그 학부모를 어떻게 감당할까. 아직 오지 않는 전화에 대고 안도를 해야할지, 한숨을 쉬어야 할지...

어제, 다음 주 개교하는 신생 학교에서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가겠다고 했는데 알겠다고 하고는 다시 연락 준다고 하고 오늘 이시간까지 소식이 없다. 어쩌라는 거냐? (ㅡ.ㅡ;;;)

칼럼에서 '특수학생'이란 말에 쓰게 웃는다. 특별한 학생이란 의미인가? 학교에 교실에서 평범하게 수업받기 어려운 학생들을 모아놓은 학급이 따로 있다. '개별학급'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특수학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한민국에서 학생으로 사는 일도, 학부형으로 사는 일도, 그리고 나같은 (비정규직) 교사로 사는 일도 참 벅차구나. 사실, '대한민국'에서 누구로 산들 힘들지 않을까. 저 위 꼭대기 1%를 제외한다면. 무엇을 상상해도 그 이상을 볼 수 있는 이곳에서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CSI 단골 등장 배우 - 루미놀 시험 [제 803 호/2008-08-27]


살인사건이 발생하면 우선 피해자 시신의 혈액과 사건현장의 혈액을 채취하여 연구실로 보내 조사를 한다. 만약 시신의 혈액과 일치하는 혈액이 사건현장에서 발견되고, 이 혈액을 제외한 다른 혈액이 발견된다면 일단 수사망은 좁아진다. 그러나 범인이 증거 은폐를 위해 사건현장에 남긴 혈흔을 모두 물로 지웠을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 또는 범인이 피해자를 살해한 후 시체를 옮겼거나 범인 자신의 물건에 묻은 피를 닦아서 지웠을 때는 어떻게 증거를 찾아낼 수 있을까.

2007년 12월 말 한참 크리스마스다 연말이다 하여 분주한 때 2명의 어린이가 실종되었다. 가족들은 두 어린이가 들어오지 않자 인근의 모든 곳을 수소문하고 찾아다녔지만 찾을 수 없었다. 결국 경찰에 신고하였고 경찰은 수사 인력을 집중 투입하여 집 근처 및 인근 야산까지 샅샅이 수색을 했으나 두 어린이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났고 수사는 장기화되었다.

이 사건은 한 예비군이 훈련 중 야산에 묻혀 있던 불상의 시신을 발견하면서 그 끔찍한 범행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시신을 수습한 결과 처참하게 토막이 난 채 살해된 것으로 보였다. 추정된 시신의 연령이 실종된 어린이와 비슷했고 발견 전후로 그 지역에서 실종 신고된 어린이가 없는 것으로 보아 두 어린이 중 한 명일 것으로 추정하고 유전자분석을 하여 실종 어린이 가족들과 비교한 결과 L양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실종되었던 어린이가 시신으로 발견됨에 따라 대대적인 수사가 진행되었다. 그 후 범인이 잡히고 W양의 시신도 처참히 살해된 채 하천에서 발견되었다. 이 사건이 얼마 전 세상을 놀라게 했던 안양 어린이 실종사건이다.

사건이 발생한 후 시간이 많이 흘러 모든 증거가 없어졌기 때문에 사건의 실마리를 찾는데 매우 애를 먹었다. 하지만 자그마한 단서가 이 사건을 해결하는 열쇠가 되었다. 경찰이 인근의 렌터카 업체에서 두 어린이가 실종된 날 차량을 사용한 사람들에 대해 조사를 하였는데 유력한 용의자를 발견한 것이다. 만약 그 범인이 차량을 사용했다면 차량 어디에선가 피해자를 살해하여 옮기면서 묻었을 혈흔 또는 피해 어린이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여 과학수사연구소에 의뢰한 것이다. 하지만 사건 이후 시간이 많이 흘렀고 세차도 여러 번 했을 것이고 그리고 많은 사람이 그 차량을 사용 또는 이용했기 때문에 그곳에서 유의성이 있는 증거물을 찾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러한 곳에서 과연 어떻게 결정적인 증거물(혈흔)을 찾을 수 있었을까? 바로 루미놀 시험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실험 결과 차량의 뒤 트렁크에서 소량의 혈흔을 검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검출된 혈흔에 대해 바로 유전자 분석을 실시하였고 이 유전자형이 피해자와 일치하는 것으로 밝혀짐에 따라 그 차량으로 어린이를 유기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었다. 따라서 실종 당일 날 그 차량을 사용했던 범인을 검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범인은 처음 자신의 범행을 완강히 부인하다 결국 자신의 소행임을 자백했고 W양의 시신도 그의 진술에 따라 찾을 수 있었다.

이 사건뿐만 아니라 몇 달 또는 몇 년 전에 일어난 사건으로 혈흔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경우, 용의자가 현장을 은폐하기 위해 물 등으로 사건현장을 닦은 경우, 넓은 사건현장에서 보이지 않는 혈흔을 찾아야 하는 경우, 범인이 범행 당시 입고 있었던 옷과 신발 등을 세탁한 경우 등에서 혈흔을 찾아야 할 때 루미놀 시험을 실시한다.

루미놀 시험은 루미놀의 용액과 과산화수소수 혼합액을 혈흔 추정 물질에 분무기 등을 사용하여 뿌려주면 혈흔인 경우 혈색소 헤민에 작용하여 그의 촉매 작용에 의해 강한 화학적 발광을 일으키게 되는 것을 이용한 실험 방법인데 범죄수사에서 극소량의 혈흔을 검출하는 데 사용한다. 루미놀 시험은 발광 여부를 관찰하는 실험이기 때문에 불빛이 없는 어두운 곳이나 암실 등에서 실험한다.

화학적 발광이 관찰되면 바로 발광된 부분을 채취하여 추가 실험을 실시해야 한다. 왜냐하면 일부 드라마에서 묘사된 것처럼 형광 빛이 오래가는 것이 아니라 금세 약해지고 불을 켜면 보이지 않기 때문에 혈흔이 있는 곳을 알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혈흔이 관찰되면 바로 채취를 해야 하며 신발자국 같은 경우 등 증거가 될 수 있는 중요한 혈흔은 특수한 촬영을 하여 모양 등을 기록해 놓아야 한다.

루미놀 시험의 장점은 매우 적은 양의 혈흔도 검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보통 몇만 배에서 몇 십만 배 희석된 혈흔도 검출할 수 있다. 즉, 양동이 같은 곳의 담긴 물에 한 방울의 혈흔이 떨어져도 이를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루미놀 시험은 소, 돼지, 심지어 하루살이 등의 모든 혈흔에 반응한다. 따라서 차량 등을 실험하는 경우 매우 조심해서 실험해야 한다. 빛을 보고 날아든 하루살이 또는 길에 죽어 있는 야생동물의 혈흔이 묻어 있는 경우도 형광 반응이 일어나서 사람 혈흔으로 착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이 실험은 너무 예민해서 혈흔이 아닌 것, 예를 들면 녹, 구리 등에서도 반응하기 때문에 매우 주의를 요하고 전문적 훈련을 받은 사람이 실험해야 한다.

보통 CSI 등에서는 혈흔이 검출되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처럼 묘사되지만 혈흔의 발견은 이제 실험의 시작임을 알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렇게 발견된 혈흔은 복잡한 분석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된다. 발견된 혈흔이 정말 사람의 혈흔인지 여부 또는 유전자분석 등을 통해서 누구의 유전자형인지를 실험해야 하는 것이다.

범인이 아무리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해도 그리고 범행 현장의 흔적을 아무리 지우려 해도 반드시 흔적은 남는다. 그러한 작은 흔적들을 유능한 수사요원들이 찾아내면 수사의 결정적인 증거가 되어 범인을 잡을 수 있게 된다. 완전 범죄는 없다-해결되지 않은 사건은 단지 증거를 못 찾았을 뿐이다.

글 : 박기원 수사관(국립과학수사연구소 유전자분석과 실장)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몽골 CURIOUS 48
신현덕 지음 / 휘슬러 / 2005년 11월
절판


몽골에서 노란색은 신성한 색이므로 여성들은 허리띠를 제외하고는 함부로 노란색 옷을 입지 못했다.

델은 남녀구별이 없다. 단지 단추의 숫자가 많고 화려한 것이 여성용이고, 단추가 적으며 장식 없이 폭이 넓은 것이 남성용이다.

델 한 벌을 만드는 데는 손으로 꼬박 3일쯤 소요된다. 손바느질로 한 땀씩 떠서 만들기 때문에 기계로 한 것보다 훨씬 촘촘하고 여물다. -103쪽

가죽 장화는 오른쪽과 왼쪽 신발 모습이 같은 점이 특이하다. 전쟁 중 신발을 갖춰 신고 나가는 시간이라도 벌기 위해서 구별 없이 만들었다고 한다. -110쪽

몽골인 대부분은 지금까지도 천막집 게르에서 살고 있다. 우리에게는 영어의 유르트(yurt)로 소개된 집이다. 몽골인은 기후 여건에 따라 자주 이사하므로 이동이 간편하고 보온이 잘 되는 게르를 주거로 이용해왔다. 게르는 새로 짓거나 다시 조립하는 데 길어야 3시간을 넘지 않는다. 이처럼 게르는 영구성이나 외적으로부터의 보호기능보다 일시적인 추위와 햇빛 그리고 비바람을 차단하는 차양 목적이 주였다. -111쪽

게르를 새로 짓는 것은 새 며느리가 들어와 식구가 늘어난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아들이 장성한 집에서는 적당한 신부를 찾기 전에 게르 지을 준비를 서두른다. 신부가 나타나면 곧바로 예식을 올리고 살림을 내줘야 하기 때문이다.-113쪽

옛날 우리나라에서는 집의 크기를 말할 때 몇 칸짜리인가로 계산했지만 몽골에서는 벽이 몇 개인지에 따라 크기를 따진다. 일반인들은 보통 벽 5개로 게르를 짓는다.-114쪽

게르 안은 난로를 기준으로 남성구역, 여성구역, 신성구역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남성은 게르에 들어가면 곧바로 왼쪽으로 가고 여성들은 오른쪽으로 간다. 남성구역은 하늘이 보호하고 여성구역은 태양이 보살피기 때문이다.

남성구역은 게르의 서쪽으로, 정문에서 보면 왼쪽이다. 이곳 벽에는 주인의 말안장과 고삐, 아이락 주머니 등이 걸려 있다. 주인의 방어용 무기는 이보다 안쪽의 손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둔다. 손님을 우대하는 의미에서 주인의 오른쪽에 앉힌다지만, 여기에는 손님을 가장한 적이 들어왔을 때 오른손잡이인 가장이 방어를 하기 위한 모겆ㄱ도 내포되어 있다. 이 구역에서 접대하는 손님은 남자만을 의미하며, 여자 손님은 여성 구역으로 모신다. 여성구역은 게르의 동쪽 입구에서 볼 때 오른쪽이다. 안주인은 이곳에 주방용구와 생활도구를 비치하며, 아이들도 여기에 기거한다.

주인 내외의 침대는 여성구역의 벽에 붙어 있고 손님용 침대는 반대편 남성구역의 벽 쪽이다.-116쪽

게르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은 안팎 어디를 둘러 봐도 화장실이 없다는 점이다.


화장실에 간다는 표현도 재미있는데 "말(馬)을 본다"고 한다. 예전부터 말은 대부분 게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어 그곳에서 볼일을 보는 경우가 많았다. 여럿이 말떼 속으로 들어가 볼일을 볼 때 주위 사람에게 건넬 말이 없어 "말이나 보자"고 했는데, 여기서 유래된 말이라는 것이다. -119쪽

철저히 개방된 공간에서의 성생활은 어린아이들에게도 영향을 준다. 심한 경우 3대가 6~7평의 한 공간에서 살다보면 성에 대한 개념도 무뎌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성 풍습이 몽솔 사회의 개방과 발전에 긍정적인 작용을 했다는 견해도 있다. 몽골이 여타 공산국가보다 쉽게 개방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개방된 성 문화를 비롯한 서구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큰 거리낌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21쪽

몽골인의 성 풍속만큼 우리에게 잘못 알려진 것도 없다. 많은 사람들이 개방적이라는 말을 아무하고나 의미 없는 사랑도 가능하다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몽골인은 알려진 것보다 더 완고하고 합리적이다. 그들은 사랑도 가문의 유지와 종족의 번영을 위한 생활의 일부분이라고 말한다.-121쪽

학자들에 따르면 에스키모와 몽골인은 근친혼의 폐해를 경험으로 배워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근친혼으로 태어난 아이들은 장애아로 태어나거나 열성유전인자가 쉽게 발현된다. 그래서 이들은 늘 혈통이 근접한 사람과의 혼인을 피하는 방법을 찾고자 한 것이다. 결혼 상대자로는 가능하면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다른 부족을 선택하려 했다.



아내를 외간 남자와 동침케 하는 데도 법도가 있었다. 손님을 맞은 씨족장은 회의를 개최하여 전체 구성원의 의사를 물었다. 남자의 지적 수준 및 외모와 됨됨이를 보고 동침 여부를 결정했다. 지적 수준이 우선적인 선택 요건이 되자 웃지 못할 일도 일어났다. 공산혁명 이전 몽골에서는 승려들이 새 신부들의 초야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즉, 신부가 첫날밤을 승려와 보내는 것이다. 당시 지식인 계층은 승려뿐이라 그들이 정치, 사회, 문화 등 사회전반에서 지도자 역할을 했다. 그러므로 그들의 우수한 혈통을 이어받기 위해 이런 풍습을 만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얻어진 아이는 아버지가 누구인가를 묻지 않고 자식으로 키웠다.-123쪽

일부 지방에서는 남편이 집을 떠나면서 아내에게 출타한다는 것을 알리지 않고 떠난다. 아내에게 자유 시간을 허락하는 묵시적인 방법이다. 남편은 가문에 좋은 씨가 들어온다면 좋고, 아니면 말고 하는 식의 느긋한 태도를 보인다. 그렇다고 아내가 쾌락을 목적으로 다른 남자와 간통을 해도 용인하는 것은 아니었다. 출산 이외의 목적으로 간음한 자는 예부터 법으로 엄히 다스려 왔다. 칭기즈칸 시대 이후 시행된 법에 따르면 평민이 왕공의 부인과 간음하면 전 재산을 몰수하고 두 사람 모두 노예로 만들었다. 평민끼리 간통하면 가축 300마리와 귀중품 30개의 재산형에 처했다.
공식적으로 몽골인의 이러한 성 문화는 지금까지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고비 지방 혹은 북서부 산악지대 등 일부에서는 여전히 행해질 수도 있을 것이라 한다.-125쪽

몽골인은 친족에 의한 혈족은 인정하면서도 인척관계로 생긴 혈족은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동시에 두 명의 자매와도 혼인이 가능했다. 유목민의 이러한 풍습은 우리 역사에도 있다. 고려 초기 임금이 자매와 결혼한 경우가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여자는 자기가 현세에서 섬긴 자를 사후에도 섬긴다고 믿었다. 그래서 생모가 아닌 과부는 재혼하지 않고 막내아들의 아내가 되었다. 몽골인은 막내상속을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의 후처 중에는 나이가 아주 어린 경우도 있어 막내에게 가는 것이 오랫동안 보살핌을 받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사랑받을 시간이 적었던 막내에게 아버지의 사랑 대신 그의 사랑하는 여인과 물질로 대신한다는 뜻도 있다. -127쪽

신부들이 하던 화장술의 하나인 연지곤지는 우리에게도 전해져 전통혼례에서는 자주 쓰인다. 부녀자들이 가슴에 차던 은장도와 족두리, 원삼도 몽골에서 유래된 것이다.

몽골족의 결혼은 우리 상식에 견주어보면 대체로 조혼이다. 과거에는 10살 이전에 결혼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칭기즈칸도 아홉살 때 한살 연상의 여인이었던 웅기라드족 데이 세첸의 딸 부르테와 결혼했다.

우리 여성의 평균 결혼 연령이 26.8세(2001년말 기준 남 29.6세)인데 반해 몽골은 15~16세에도 결혼한다. 물론 법적으로는 18세로 제한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더 어린 경우가 많다. 여자 나이 스무 살이면 벌써 아이를 두세 명씩 낳는다. 이런 실정이고 보니 생활에 대한 감각은 우리 나라 여성들보다 더 현실적이다.

유의할 것은 몽골인과 중국인의 결혼은 누구도 반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법으로 아예 금지시킨 적도 있었다.-130쪽

몽골 국민의 90% 이상이 라마불교를 믿는다. 불교는 몽골인에게 종교라기보다 생활의 일부로, 이들은 집안에 불상을 모셔놓고 지낼 정도로 적극적인 신도들이다. 한때는 국교로서 강요되었지만 최근에는 다양한 종교의 자유를 법적으로 보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는 여전히 불교만을 믿는다.

몽골인은 것든 것은 부처를 통해야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실제로 모든 일은 부처의 대리인으로 여겨지는 승려가 관장했다. 왕에서부터 말단까지 지배계층은 모두 승려였다. -138쪽

몽골인이 최초로 라마교를 받아들인 것은 원나라 태종 오고타이 때다. 세조 쿠빌라이가 중국 전역을 점령하고 티베트를 손에 넣었을 당시 라마교의 최고 지도자였던 파스파를 초청하였다. 그는 몽골불교의 수장으로 추대되었고 티베트어를 차용해 최초의 몽골 문자인 파스파 문자를 제정하였다. 이후 청나라는 몽골족의 사나운 기질을 완화하기 위해 라마교를 정책적으로 권장했고, 맏이를 제외한 나머지 아들은 라마승을 만들도록 법으로 정했다. 이로 인해 인구가 격감하자 몽골 공산당은 1921년 혁명 후 라마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당과 정부가 종교를 장악했지만 일반인의 신앙 생활만은 허용했다.


개방 이후에는 세계 각국의 기독교 선교사들이 몽골로 몰려들었다.-139쪽

몽골인은 경제적으로는 우리나라의 발전을 인정하지만 민족적 자부심에서는 늘 자신들이 앞선다고 말한다. 특히 몽골인은 21세기 초 우리나라 종교인들조차 해내지 못했던 일을 해냈다는 자부심이 강하다. 중국이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제14대 달라이 라마인 텐진 갸초의 방문을 허용했던 것이다. 2002년 11월 몽골 정부는 달라이 마라의 방문과 설교를 허용해 중국정부와의 외교적 마찰을 일으켰다. 중국은 티베트 독립을 꾀하는 정치지도자로서의 달라이 라마를 경계하는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몽골 정부는 종교지도자인 달라이 라마의 입국을 허용한 것이지 정치 지도자나 군사지도자로서의 입국을 허용한 것이 아니라며 중국에 당당히 맞섰다. 달라이 라마가 몽골에 입국했던 것은 4대 달라이 라마가 몽골인이었고 몽골에 머물렀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중국도 이 사실을 모른 것은 아니었지만 다른 나라들도 덩달아 그의 입국을 허용할까 두려워 선수를 쳤던 것이다.
-141쪽

한편 우리나라는 여전히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 달라이 라마의 방문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 이로 인해 헌법이 보장하는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달라이 라마는 이미 미국, 독일, 대만, 몽골 등지를 다니면서 깊은 정신세계의 진수를 가르치는데도 우리나라는 그의 입국을 허용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의 저서가 베스트셀러가 되어 국민의 사랑을 받는데 그를 한국 땅에서 보기가 이리 어려운가. 미국에는 할말을 한다면서도, 한때 한국을 침공해 '중공 오랑캐'라 불렸던 중국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정부의 태도가 다소 모순적이다.
달라이 라마라는 칭호에서 '달라이'는 몽골어로 '바다'라는 뜻이다. 이 명칭은 3대 쇠남 갸초가 몽골 지도자였던 칸을 방문했을 때 받은 칭호가 굳어진 것이다. 몽골 종교 지도자들은 이 이름이 '바다가 모든 것을 포용하는 것처럼 종교지도자도 그와 같이 넓은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의미라고 설명한다. -141쪽

몽골인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무당이다. 공산시절에는 국가가 무당을 모두 없앴으나 자유화 이후 다시 생겨나는 무당은 어쩔 수 없이 묵인하고 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다른 지역의 무당들이 외부에서 신을 불러들이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몽골 무당은 자신의 영혼을 몸 밖으로 내보낸다. -142쪽

몽골 초원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것은 '어버', 즉 성황당이다. 성황당은 미신을 억압했던 공산주의 시절에도 폐기되지 않고 전해질 만큼 몽골인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왔다. 몽골인은 학식, 사회적 지위, 나이에 관계없이 누구나 수시로 성황당을 찾아가고, 어디에서나 성황당을 만나면 예의를 갖춘다. 성황당은 마을의 수호신이요, 초원의 이정표이자 재앙을 막아주는 역할도 한다. -143쪽

몽골인은 전통적으로 하루에 한 번만 요리한다. 전쟁에 대비한 조상들의 습관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몽골 요리사들은 음식을 풍성하게 만들려면 많은 재료가 필요하므로 현지에서 약탈을 일삼게 되는 상황을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아침과 점심에는 차와 밀가루 튀김과자로 요기만 한다. 저녁에는 고기와 국수를 비롯해 쌀, 귀리 등 곡물이 든 묽은 죽을 곁들여 제대로 챙겨 먹는다. -152쪽

'순한 양'이라는 말을 몽골인이 양을 잡는걸 보고서야 확실히 이해하게 되었다. 이미 살 의지를 잃은 양은 죽어가면서도 비명 한마디 지르지 않고 사지만 잠깐 버둥거리다 만다. 시간은 고작 5~6분이 걸릴 뿐이다.
양이 죽으면 가죽을 가슴팍에서 사타구니까지 갈라 땅 위에 쫙 펼쳐 놓고 깔개로 사용한다. 우선 내장을 꺼내 큰 그릇에 담고 흘러나온 피는 다른 그릇에 옮겨 담는다. 그리고는 머리, 갈비, 다리, 엉덩이, 가슴팍, 어깨 부분을 따로 갈라내면 작업은 끝난다. 이 모든 과정은 길어야 30분을 넘지 않는다. 또한 피는 한 방울도 땅에 흘리지 않는다. 식량으로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짐승으로부터의 습격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배고픈 맹수와 맹금류가 피 냄새를 맡으면 사난ㅇ눠져 사람들을 해친다는 것이다. 또 피 냄새는 다른 냄새보다 멀리 퍼져 나가므로, 전장에서는 적에게 쉽게 노출되어 목숨을 잃기 때문이기도 하다.-153쪽

몽골인의 주식은 고기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 이들은 서구인처럼 고기를 많이 먹지는 않는다. 몽골인은 주로 젖을 섭취하며 고기는 부족한 젖을 보완하는 수준이다. 유목을 하는 몽골의 고기 생산량이나 육질이 목축을 하는 서구 국가보다 떨어지기 때문이다.

닭고기 값은 쇠고기의 5배, 돼지고기는 3배정도로 비싸다. 고기값이 비싼 것은 이들 가축이 사료를 먹기 때문이다.

몽골인은 죽은 가축의 고기는 절대 먹지 않는다. -155쪽

개고기와 새는 먹지 않는다. 옛날에는 죽은 사람을 산야에 내다 버리는 풍장이 있었으므로, 이때 조상의 시신을 들개가 뜯고 새들이 쪼아 먹었기 때문이라 한다. 국가 문양에 물고기를 그려 놓을 만큼 신성시하기 때문에 생선도 먹지 않는다.

기온이 낮은 겨울을 이겨내려면 고칼로리 음식이 필요하다. 그래서 몽골인은 우리는 먹을 수 없을 정도의 비계 덩어리를 가장 좋은 고기로 친다. -156쪽

몽골에서 가장 보편적인 유제품은 아이락이다. 말젖을 가죽부대에 넣고 나무 막대기로 밤새 휘저으면 아이락이 된다.
몽골인은 여름밤 내내 아이락을 젖는다. 게르 문 옆에다 가죽부대나 젖통을 놓아두고 오가면서 습관 삼아 나무 막대기로 휘휘 저어준다. -157쪽

아이락은 마유주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일본인들이 알코올 성분이 들어있다는 것만을 강조하여 번역한 것이며, 실제로 몽골인은 아이락을 전혀 술의 개념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아이락에는 우리나라 막걸리와 비슷한 6~7도의 알코올 성분이 함유되어 있다. 하지만 두세 잔 마시면 취기가 오르기 보다는 기분이 좋아지고 힘이 솟는 정도다. 그래서 아이락은 식사대용이자 최고의 영양식으로서 몽골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여름에는 한 사람당 매일 3~5리터의 아이락을 마신다. 허약한 아이에게는 아이락을 끊임없이 마시게 한다. 또한 목숨이 경각에 달린 중증 환자에게도 아이락을 먹인다. 아이락은 비타민 A.C.B 등을 포함하고 있고 병원체미생물의 성장과 증식을 억제한다. 아이락은 특히 폐나 위 질환에 효험이 있고 신경작용을 활성화 한다. 더불어 식욕과 소화력을 증진시킨다. -159쪽

소나 양, 염소 젖으로 만든 '타라크(요구르트)'는 발효식품이다.


필요한 비타민은 유제품과 날고기를 섭취해 보충하므로 몽골 요리에서 야채는 비교적 적게 사용된다. 야채는 동물들이나 뜯는 목초와 같은 개념으로 받아들였다.

몽골인은 양념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몽골인 요리에는 간장보다는 소금을 많이 사용해 별다른 맛을 느끼기 어렵다. 하지만 기후가 건조한 탓에 음식을 매우 짜게 먹는다. 몽골 정부는 수돗물에도 의무적ㅇ로 요오드를 포함시켜 국민 건강을 보살피고 있다. -161쪽

건조기법으로 만든 음식으로 봄여름에 먹는 보르츠라는 고기가루가 있다. 보르츠는 가축들이 살찌는 가을에 잡은 고기로 만든다. 주로 쇠고기로 만들며, 살코기의 결을 따라 찢은 뒤 그늘에서 말린다.

보르츠는 소의 위나 오줌보를 깨끗이 씻어 그 안에다 보관한다. 이것들은 기후 변화에 적응하는 능력을 갖춘 최상의 자연 저장고이므로, 해가 바뀌어도 고기가루가 상하지 않는다.

보르츠를 뜨거운 물에 서너 숟가락 퍼 넣고 2~3분 기다리면 훌륭한 영양식이 된다. 외국에 가는 몽골인은 반드시 보르츠를 한 봉지씩 가지고 가 현지 음식이 입에 맞지 않을 때 이것으로 식사를 대신한다. -170쪽

수테 차를 만들 때 빼놓을 수 없는 것 하나가 소금을 넣는 일이다. 찝찔한 맛이 나지만 몽골고원에서는 염분 보충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기후가 건조해 몸에서 수분이 자주 발산되므로 몸속의 염분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고 한다. -175쪽

손님이 오면 주인은 술이기 보다 음료에 가까운 아이락을 먼저 내놓는다. 아이락으로 기분이 조금 얼큰해진 주인과 손님의 마음이 상통하면 아르히를 마시기 시작한다.

몽골에서 술을 마실 때는 만취하는 것이 에의다. 그래서인지 만취해서 저지른 행동에 대해서는 아주 관대하다.-176쪽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처럼 몽골인은 늘 차강사르(설날)처럼 풍요롭기를 기원한다. -181쪽

몽골인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음양오행과 십간십이지를 사용한다.

양의 해에는 좋은 일이 생기며가정이 화목해진다. 닭의 해에는 살림이 풍요로워지고 출산율이 큭 ㅔ늘어난다. 돼지해에는 음식 저장량이 크게 늘고 모든 것이 풍요로워진다고 한다.-183쪽

소련은 1921년 공산혁명 이후 몽골의 많은 전통 세시풍속을 없애면서 서구식 신년을 강요했다.

젊은이들은 소련의 본래 의도는 다른 곳에 있었다고 지적한다. 세시풍습에는 민족의 전통의식이 반영되어 있으므로, 풍습을 바꾸면 민중의 의식과 사고에도 변화가 오게 마련이다. 그래서 소련은 몽골인의 민족혼을 말살하거나 국민 단결을 약화시키기 위해 몽골 전래 풍습을 없애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몽골에서 신년은 서양풍속의 하나일 뿐이다. 이 날 모든 관공서는 휴무이다.-185쪽

몽골인이 '차강사르'라고 부르는 매년 음력 1월 1일은 거창하다. 3일간 모든 고나공서와 직장이 문을 닫고 집 안에서 식구끼리 지낸다. 한달 전부터 이날을 준비하느라 온 국민들이 분주하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이날에는 전 갖고이 모여 세배하고 성황당에 참배하는 등 새해맞이를 한다. 덕담도 어느 때보다 많이 주고 받으며 음식도 풍성한 명실공히 몽골 최대의 명절이다.

몽골 음력설의 역사는 쿠빌라이 칸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칭기즈칸의 손자인 쿠빌라이 칸은 중국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살며 한족으로부터 음력설을 도입해 왔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당연히 어른들로부터 세뱃돈을 받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몽골에서는 아래사삶이 웃어른에게 세뱃돈을 드린다. 그러면 어른들은 아랫사람들에게 선물을 주는 것이 관례다. 어른들이 준비하는 선물로는 초콜릿, 사탕, 학용품, 장갑부터 때로는 새로 나온 빳빳한 지폐 몇 장까지 다양하다. 또한 세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문간에서 하나씩 선물을 나눠준다. 통상 유제품을 싸주는데, 이는 세배를 갈 때 싸갔던 것 중 먹고 남은 것이다. -187쪽

6월 1일은 어린이날이다. 몽골에서는 이때가 되어야 겨우 나뭇잎도 제대로 피고, 어린이들이 밖에서 놀기 좋은 계절이 시작된다. 몽골 정부는 이날을 공휴일로 지정해 모든 관공서와 기업이 휴무한다. -193쪽

몽골 세시풍속 중에서 가장 이색적인 것이 가축의 거세다. 이 일은 유목민들이 가축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봄마다 하는 연례행사다. 지난해 태어난 수놈 중 좋은 종자를 제외하고 모두 거세하여 무차별적인 생식을 막는다. 또한 거세를 하면 발리 자라고 먹이를 적게 먹으며 온순해진다고 한다. -194쪽

몽골에서는 나담이 치러지는 매년 7월 11,12,13일에 국갖거인 축제를 벌인다. 나담은 '에른 고른 나담 (남성 3종 경기, 즉 씨름, 활쏘기, 말달리기')의 준말로 '남성축제'라는 뜻이다. 나담은 원래 '놀다'라는 뜻의 몽골어 '나다흐'에서 유래되었다. 이 말에서 볼 수 있듯이 몽골인은 경기의 의미보다는 놀이의 의미로 나담을 즐겼다. 이날은 또한 몽골 인민혁명 기념일이기도 하다. -195쪽

나담의 하이라이트인 씨름은 최고의 인기종목이다. 몽골에서 씨름의 인기는 캐나다의 아이스하키, 미국의 야구, 독일의 축구, 스페인의 투우 인기를 능가한다. 씨름 경기는 나담 축제의 첫째, 둘째 날에 벌어진다. 울란바토르 스타디움에는 전국에서 예선을 거친 512명의 선수가 참가해 토너먼트 방식으로 경기가 치러진다. 참가자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 예선을 치른다. 이들 중 9회 동안 연승한 선수가 우승자가 된다. 재미있는 것은 최고 타이틀 보유자나 최다승으로 지목받은 선수는 3회전부터 매회마다 경기 상대를 고를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들은 비교적 쉽게 경기를 치를 수 있다. -196쪽

몽골 씨름에는 체급 구분과 경기시간 제한이 없다. 선수들은 최선의 방법으로 상대선수를 물리치면 그만이다. 우리나라 씨름처럼 샅바를 잡지 않고 서서 경기를 시작한다. 경기가 시작 후 상대방의 무릎이나 팔꿈치 등을 땅에 먼저 닿게 하는 사람이 승자가 된다. -198쪽

활쏘기는 나담에서 두 번째로 인기를 얻고 있는 종목이다.

몽골인은 활을 쏠 때 과녁에 미치지 못하는 것보다 멀리 날아간 쪽을 선호한다. 물론 명중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과녁에 못 미치는 화살은 궁수의 약한 힘을 드러내므로 수치스럽다는 것이다.

궁술시합에는 남녀노소 모두 참가할 수 있다. 사수들은 꼭 몽골 전통복인 델을 입고 수술이 달린 모자를 써야만 한다.-199쪽

나담 마지막 날에는 시상식이 거행되며 이날의 주요 경기는 말달리기 시합이다. 4~7세읭 ㅓ린 기수들이 가문의 명예를 걸고 최장 약 30킬로미터를 달린다.

이밖에도 매년 3월 8일은 몽골의 여성축제일이다. 몽골에서는 세계 여성의 날인 이날을 국경일로 지정해 기념행사를 펼친다.-202쪽

몽골 여행의 진수는 철도편을 이용해 느낄 수 있다. 젊은이들에게는 인천에서 천진행 여객선을 타고 각서 북경-유라시아 간 철도를 이용하는 방법을 권하고 싶다. 시간이 많이 소요되지만 풍부한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30시간 이상이 소요되는 기차 속에서 만리장성 너머의 중국을 보는 맛도 추천할 만하다.

몽골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승마와 승마여행이다.-212쪽

몽골을 여행하면서 주의할 것은 공룡알 들의 자연유물을 절대 가지고 나올 수 없다는 점이다. 몽골 정부는 몽골의 자연 유산을 보호하기 위해 자연유물은 물론이고 가공되지 않은 동물 뼈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녹용 등의 반출을 금지하고 있다.

고비에서 주운 돌멩이 하나, 작은 나무 가지 등도 같은 취급을 받는다. 단, 공항이나 백화점 선물가게 등에서 구입한 선물은 인정된다.-216쪽

자본주의 사회와 70년이나 격리되었던 몽골에서는 영어보다는 러시아어가 더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다.

1920년대에는 라마승과 극히 일부의 지식인만이 몽골 문자를 읽고 쓸 수 있었다. 당시 각 종족별로 언어가 달라 몽골은 하나의 국가이면서도 여러 개의 나라나 다름없었다. 몽골 정부는 1921년 공산혁명 이후 국가 통합을 위한 각종 정책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정책적으로는 통합이 이루어졌지만 국민들의 의사와 사고를 통합하는 데는 늘 언어장애가 뒤따랐다. 1940년 몽골 총인구 74만 3800명 중 문자를 깨우친 사람은 5% 미만이었다. 1946년 몽골이 러시아 문자르 ㄹ빌려 사용하기 시작한 이후 상황은 변했다. 러시아의 지원으로 의무교육을 강화해 문맹률을 급격히 떨어뜨리는 데 성공했다. 1990년 민주화의 상징으로 러시아 문자를 폐지하고 옛 몽골 문자를 부활시켜 공식문자로 사용키로 결정했다. 이를 두고 많은 지식인들은 옛 몽골 문자를 다시 사용하는 것은 전 국민의 80% 이상을 문맹으로 만들려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 이들의 주장이 민주화 세력을 눌러 현재 몽골에서는 러시아 문자가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217쪽

고비 지역은 우리에게 사막으로 잘 알려져 있으나 사실 '고비'는 '황무지'라는 뜻의 몽골어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모래지형의 사막은 3%에 불과하다. 연중 6개월 이상 눈이 쌓여 있어 무성하지는 않지만 풀과 나무가 자라며 야생동물도 뛰어다닌다. -223쪽

아라비아의 낙타는 혹이 하나인데 반해 고비낙타는 둘이라서 혹 속의 지방질로 열악한 환경에서 잘 견딜 수 있다고 한다.

낙타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살아서는 젖을 짜기도 하고 운송수단으로도 유용하게 쓰인다. 낙타젖은 진하고 끈기가 있으며 영양분이 풍부해 최고 품질로 선호된다. 낙타털로 만든 캐시미어 실은 양모와 염소털실보다 4~5배나 비싸다. 값도 비싸지만 털 자체를 구하기가 어렵다. 낙타 고기도 고비에서만 맛볼 수 있다. -226쪽

극북 히스테리아-극지방과 그 주변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정신분열증. 옷을 찢는 등 과격한 반응을 보이며, 급격히 우울해지거나 정신을 잃기도 한다. 단조로운 기후와 고립된 환경에서 비롯된 스트레스성 질환으로 알려져 있다. -234쪽

옛 몽골 제국의 수도였던 하라호름(과거 우리나라에서도 카라코름으로 소개됨)은 울란바토르에서 서쪽으로 약 400킬로미터 떨어진 으브르항가이 아이막에 속해 있다. -238쪽

성곽 안에는 황제들의 집무실이었던 게르 터가 남아 있다. 황제들은 요란하게 치장된 건물이 아닌 일반 국민들과 같은 게르에서 살았다. 다만 왕의 게르는 일반 백성들이 구하기 어려운 호랑이나 사자 등의 가죽으로 실내를 장식했을 뿐이다. 이처럼 전통적으로 몽골 국민들은 가족 같은 유대와 계급차별 없는 공정한 통치 아래서 살았다.

이곳은 북경으로 옮겨 갈 때까지 148년간 수도로 사용됐다. 그 후 200년간 퇴락을 거듭해 이제는 주민이 한 사람도 살지 않는다.

몽골의 성은 방어용이 아니라 공격을 준비하는 장소였다. 특이하게도 성이 평지에 자리 잡고 있어 처음 접하는 관광객들은 의아하게 생각한다. 우리나라 성들은 산이나 언덕 등을 끼고 방어에 유리하게 지어졌다.-239쪽

바로 여기서 몽골인의 전술을 알 수 있다. 적들과 지구전이나 방어전을 치르다보면 숫자가 적은 몽골이 불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몽골인은 공격 전술을 채택한 것이다. 적이 침공해 오면 좁은 성벽에서 맞붙어 싸우는 것이 아니라 넓은 곳으로 유도해 전열을 정비한 뒤, 전격전으로 맞섰다. 몽골인들은 당시로선 가장 강한 무기와 기동력을 가졌다. 말은 지금의 탱크처럼 위력적이어서 보병 위주의 군대는 대적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현대에도 적용되는 말이지만, 화력이 우세한 군은 언제나 노출된 싸움을 원한다. 그래서 적을 먼저 발견하는 것이 유리하고 기마전을 원활히 수행할 수 있는 넓은 초원 한가운데 하라호름 성을 구축했던 것이다.-241쪽

하라호름에 도착한 유럽인들은 두 번 놀란다. 첫째는 대제국을 건설했던 몽골 제국의 첫 수도였던 하라호름 성이 너무 작고 보잘 것 없다는 것이다. 영국의 윈저,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오스트리아의 쇤부른은 말할 것도 없고 독일의 노이슈반슈타인과 비교해도 형편없다. 유럽의 성은 외국에서 잡아온 포로를 이용해 국력을 과시하기 위해 대규모로 지어졌으며 투입한 비용도 어마어마했다. 하짐나 몽골인은 으리으리한 성을 쌓는 데는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아마도 유목민의 기질 때문에 한 곳에 머물러 사는 데 집착하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
둘째는 전리품이 전무한 점이다. 세계에서 가장 넓은 유라시아 지역을 점령하여 많은 것을 약탈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실상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하라호름 성에는 만주족이 보낸 궁궐을 방비하기 위한 나무장애물이 있을 뿐이다. 몽골 군인들은 점령지에서 약탈하는 병사들을 즉석에서 참수했다. 엄정한 군기확립과 싸움에만 관심이 있었지 다른 것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예상 밖의 전리품이 생기면 부하들과 공평하게 나누는 것이 몽골인의 전통이었다.-247쪽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실자 발음은 울란바아타르)는 몽골어로 '붉은 영웅'이라는 뜻이다.-249쪽

몽골의 사회학자들은 사회가 국민의 생활을 보장하고 노후까지 책임지는 칭기즈칸의 정신에서 사회주의의 기본 이념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 증거로 1917년 러시아 공산혁명을 성공시킨 레닌을 든다. 레닌은 몽골족의 핏줄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몽골족의 생활방식을 잘 터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몽골족인 외할머니로부터 받은 가정교육에서 공동생산, 소유 및 분배의 정의와 인간다운 삶에 대해 감화를 받고 이를 실천했다고 한다. 더불어 1921년의 몽골 공산혁명이 거부감 없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사회적인 분위기가 이미 조성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분석이다. -259쪽

몽골처럼 교육열이 높은 국가도 찾기 힘들다.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몽골인의 문맹률은 비교적 낮다.
-264쪽

전통적으로 몽골인의 가장 큰 소망은 학식이 풍부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돈과 명예는 순간적이지만 인간적인 덕망과 지혜는 영원하다는 것을 믿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몽골이 가장 강성해 중국을 지배하던 때부터 몽골인은 학문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한 집안에서 한 명 이상의 학자를 배출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시대의 학자는 승려였으므로, 당연히 출가하는 사람이 늘어만 갔다. 승려들이 정치, 학문, 의술은 물론 예술분야까지도 이끌어 갔으며 이들은 전쟁보다 평화를 주장했고, 약탈보다는 자급자족을 강조했다. 그 결과 몽골군의 군사력은 추풍낙엽처럼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265쪽

서구의 많은 사람들은 물론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조차도 몽골을 망한 나라라고 여긴다. 원나라의 강성했던 힘은 사라지고 이제는 가난하고 볼품없는 나라가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몽골은 약해진 것이 아니라 강점했던 중국을 한족에게 돌려주고, 약탈했던 러시아 땅을 러시아인들에게 반환했을 뿐이다. 옛날 강성했던 터키, 로마,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 등도 몽골처럼 본래의 위치로 돌아와 오늘과 같은 국가르 ㄹ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 나라들을 대상으로 망했다는 표현을 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왜 몽골에 대해서만은 유독 망했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을까? 아마도 현재 경제적으로 빈곤해서, 즉 일반적인 부의 개념에 비추어 볼 때 보유하고 있는 달러가 적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몽골이 가난한 것만은 아니다. 그들은 원나라가 무너지고 공산혁명이 일어났어도 행복한 삶을 누려왔다. 몽골인은 어느 나라의 어느 민족보다도 더 예절을 찾고, 남을 위하며, 관용을 베풀 줄 안다. 몽골인은 지식인들의 덕목으로 꼽히는 관용과 상대방에 대한 배려를 어느 민족보다도 충실히 실천해 나가고 있다.-268쪽

영주권은 아직 쉽게 얻기 힘들다. 몽골인구가 너무 적어 영주권을 쉽게 주면 중국인이 몰려와 내몽고처럼 중국에 예속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281쪽

과거 소련은 몽골에 산업시설을 배치하지 않았고, 그 결과 몽골에는 공업제품을 생산하깅 ㅟ한 기반시설이 취약했다. -281쪽

술을 마실 때는 지대가 높다는 점을 감안해 적당히 마시는 것이 좋다. 고지대에서는 쉽게 취하기 때문이다.-288쪽

많은 몽골인은 중국을 매우 싫어하기 때문에 중국과 가깝다는 것을 내세우지 않는 것이 신상에 유리하다. 몽골인과 중국인의 어색한 관계는 역사적인 경쟁의식과 내몽고를 강탈해간 것에 대한 서운함 때문이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중국의 인해전술을 무서워하는 것이다. 중국과의 거래는 지형적인 요인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13억이 넘는 인구에 대한 이들의 두려움은 대단하다. 내몽고의 몽골인은 300만 명이지만 중국의 최대 민족인 한족은 2000만 명에 가깝다. 이제는 힘으로나 국민투표로나 어느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내몽고를 되찾기란 사실상 불가능해져 몽골인들은 이에 분해하고 있다. -291쪽

해도 되는 것!

-모자를 쓰고 있으면 게르에 들어갈 때 그대로 쓰고 있어도 무방하다. 인사를 할 때는 모자를 약간 들어올리면 된다.
-음식 선물 등 물건을 주고 받을 때는 양손이나 부득이할 경우 오른손을 사용하며, 걷어 올린 소매는 내린다.
-악수할 때는 아무리 추워도 장갑을 벗는다.
-게르 안에서 움직일 때는 시계 방향으로 이동한다.
-차나 음식은 조금씩 마시거나 뜯어 먹는다.
-물건을 받을 때는 두 손을 모아 바닥을 위로 향하게 한다.
-몽골인의 발을 밟았을 때는 상대방의 손을 잡고 진심으로 사과한다.
-바닥에 앉을 때 무릎을 꿇어도 된다.
-초대받았을 때 작은 선물이나 적은 현금을 놓고 오는 것이 좋다.-298쪽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감은빛 2008-08-27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재밌나요? 예전에 몽골에 갔던 기억이 나면서 왠지 읽고 싶어지네요.
아, 잠시 읽어보니 다시 가보고 싶어지네요!

마노아 2008-08-27 17:52   좋아요 0 | URL
아악, 감은빛님! 몽골에 다녀오셨다구요! 만세!
제가 몽골에 대해서 공부할 일이 생겼거든요. 질문 생기면 달려갈게요^^
이 책 괜찮았어요. 아주 환상적으로 좋지는 않더라도 편안하게 유익했어요^^

감은빛 2008-08-28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갖다 오긴 했지만 아주 잠시였거든요.
8일이었던가 9일이었던가 그랬던 것 같은데요.
별로 도움이 안될 게 확실하지만,
혹 모르는 일이니 도움이 필요하시면 알려주세요!
근데, 몽골에 대해 공부할 일이 생겼다니, 무슨 일인지 궁금하네요. ^^

마노아 2008-08-28 16:10   좋아요 0 | URL
헤헤, 공부할 일이 드물게(?) 생기더라구요^^;;;
아직은 좀 막연한데, 궁금한 것 생기면 꼭 물어볼게요.
와, 그 멀리까지 다녀오시공... 대단대단...^^
 
몽골 CURIOUS 48
신현덕 지음 / 휘슬러 / 2005년 11월
절판


몽골은 '세상의 중심'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4쪽

몽골인은 광활한 대지를 발판으로 굳세게 살아간다. 몽골은 유라시아 대륙 중앙에 위치한 육지 속에 고립된 국가이다. 156만 제곱 킬로미터의 면적으로 한반도보다 7배 이상 넓은 국토를 자랑하지만, 인구는 270만 명(2005년 유엔 통계)으로 고작 대한민국의 20분의 1정도이다. 수도 울란바토르의 역사는 2005년 현재 366주년을 넘었으나 아직도 반 이상의 사람들이 13세기 생활양식을 고집하며 천막집인 게르에서 살고 있다.-12쪽

희귀한 식물이 많아 고비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해발 2000미터에 가까운 이곳은 국제기관들이 보호하는 야생동물의 보고이기도 하다.

고비는 중국과의 자연적인 국경선이다. 중국 한무제는 후손들에게 몽골을 침략하려면 군량조달이 어려우니 득이 없는 전쟁보다는 화해를 택하라고 지시했다. 고비를 지나 몽골까지 군량을 운반하려면 1석의 운반비가 18석이나 되니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점을 지적했던 것이다.ㅣ-16쪽

연교차가 70도가 넘는 몽골 전역은 그만큼 사람이 살기 어려운 지역이다. 그나마 연교차가 적은 지역이 울란바토르였다.-18쪽

우리에게 생각하기도 싫은 1960년대의 보릿고개가 있었던 것처럼 몽골의 시골에는 지금도 넘기 힘든 젖고개가 남아있다. 젖고개는 짐승들이 풀을 뜯어먹고 젖을 내는 5월말부터 6월초까지 계속된다. 양을 잡아봐야 겨울을 넘기느라 뼈만 앙상하게 남아 고기를 얻기도 어렵다. 더구나 갈무리 해둔 감자, 양배추 등의 야채는 벌써 바닥이 났다. 그야말로 생존을 위한 절박한 상황이 시작되는 시점이다. 이때가 되면 징기스칸 군대가 세계를 제패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했다는 전통 비상식량 보르츠(고깃가루) 주머니가 열린다. 보르츠가 구황을 한다고는 하지만 많은 가정에서는 굶기를 밥먹듯 한다. -22쪽

몽골의 여름은 노루꼬리처럼 짧지만 알찬 수확의 계절이다. 우리나라는 가을에 수확하는 전형적인 농업경제이지만 몽골은 여름 한철 가축을 이용해 수확하는 유목경제다.

농업이 태양의 에너지를 식물의 형태로 저장한다면, 유목은 동물의 형태로 저장하는 셈이다.-23쪽

겨울대비용 연료로 소나 말 등 가축의 똥을 가능한 한 많이 모아 놓는다. 여름내 주워 말린 똥을 높은 둑처럼 쌓아 바람막이 벽으로도 사용한다. 우리가 가을철 나뭇짐으로 겨울 땔감을 비축했다면, 몽골에서는 가축 똥이 이를 대신하는 셈이다. 마른 똥을 주워오는 것은 여성들이 할 일이다.-29쪽

양이 잠자는 바닥이 어는 추위(12월 31일부터 시작되어 다음해 1월 8일까지 계속된다.) 몽골인은 양을 우리에 넣어 재우지 않는다. 그만큼 양은 추위를 타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의 체온으로도 녹이지 못할 추위라 양이 잠자는 바닥이 얼 정도라는 것이다. -32쪽

유럽에서는 지금도 아이들이 울면 호랑이가 아니라 '훈이 온다'고 겁을 주어 울음을 그치게 한다. 호랑이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훈이라는데 도대체 훈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훈족이라는 말을 쓰지만, 나는 몽골에 가서야 그 말이 '사람'이라는 뜻의 몽골어임을 알았다. 또한 영어의 인간(human)이란 단어의 어원이기도 하다. 즉 이 세상의 인간은 몽골에서 시작된 셈이다.
사람보다 무서운 것이 없다고들 하지만 역사 속에서 정말 몽골인보다 무서운 사람들은 없었다. 한때는 유럽에 코란이냐 칼이냐를 선택하게 했던 페르시아인이 가장 두려운 존재였지만, 그를 뛰어 넘는 것이 몽골인이라는 것이다. 몽골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유라시아를 지배하는 대제국을 건설하여 아시아인의 긍지를 세계에 떨쳤다. -35쪽

몽골 국민 270만, 내몽고의 300만, 브리야트의 300만, 중국 신장 지방의 24만 등 전 세계 약 1000만 명 이상의 몽골족들은 칭기즈칸의 묘가 발굴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위대한 신 이상으로 추앙받는 칭기즈칸의 실체가 외국인들 손으로 까발려지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37쪽

몽골인은 1990년 자유화 당시 울란바토르 시에 있던 스탈린, 흐루시초프 등 옛 소련 지도자의 모든 동상을 파괴했다. 몽골의 것이 아닌 치욕의 러시아 역사라고 분노하면서 때려 부순 것이다. 그 와중에서도 레닌동상만은 울란바토르 중심 정부 청사 앞 광장 오른쪽에 그대로 남아 있다. 레닌의 피 속에 몽골인의 피가 섞여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몽골인의 동정을 받았던 것이다. -37쪽

몽골인은 최고라는 의미가 없는 곳에는 칭기즈칸의 이름을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 칭기즈칸 보드카, 칭기즈칸 호텔 등이 좋은 예다. 이처럼 몽골인 마음 속에는 칭기즈칸이 살아 있는 영웅처럼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돈을 벌거나 여업을 번창시키기 위한 허튼 수작으로 칭기즈칸이란 명칭을 사용하면 손가락질을 당하기 십상이며, 심할 경우 테러도 감수해야 한다.-39쪽

칭기즈칸이 몽골을 통일했을 당시 몽골에는 약 9만 5000가구가 살고 있었다. 대가족 제도임을 감안하더라도 몽골인구는 100만 명 정도였으며 병사는 10만 명을 넘지 않았다. 칭기즈칸의 전략은 현대전에도 적용될 만큼 기발했다. 그는 우선 한 집에서 병사 한 명씩만을 차출해 군대를 구성했다. 그래서 군대 조직 이름도 십호, 백호, 등의 집 개념을 사용해 전 국민이 병사라는 의식을 갖도록 유도했다. 병역의 의무보다 한발 앞선 국방의 의무를 전 국민에게 인식시키는 선진 방위 개념을 도입했던 것이었다.

칭기즈칸은 이 병사들에게 세계 최초로 근대적인 군 제도를 적용했다. 그는 군대를 10진법에 의한 단위로 조직하고 명령체계를 일원화했다. 10명을 1개 단위로 설정해 지휘자를 임명했던 것이다. 이 제도의 영향을 받은 청나라는 8기병 제도를 통해 원나라에 이어 또 다른 유목 국가를 세웠다. -39쪽

칭기즈칸은 진격하면서 300~400킬로미터 후방으로 가족들을 불러들였다. 정착 민족에게서 가족을 이동시키는 것은 삶의 터전 즉 병참기지를 포기하는 것이었지만, 유목민들에게는 평상시의 생활과 다름 없었다. 몽골군의 군량은 가족들이 후방에서 가축의 젖을 짜고 고기를 말려 보내는 것으로 완벽하게 해결됐다.
장기전에 대비한 비축식량도 양을 잡아 말린 고기가루 보르츠로 간단하게 해결했다. 보르츠는 가볍고 부피가 작아 군용식량으로 안성맞춤이었다. 양 한 마리로 만든 보르츠는 3~4킬로그램에 불과했으며, 두 스푼 가량을 더운 물에 불려 마시면 요기하는 데 충분했다.

몽골 병사들은 1인당 8~9마리의 말을 몰고 진격했다. 병사가 100여 명이면 말이 800~900마리가 되어 적들은 몽골병사들에게 접근할 수조차 없었다. 1시간쯤 달리다 말이 지치면 다른 말로 바꿔 탔다. 이렇게 해 진격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했던 것이다. -40쪽

일반 병사들이 칭기즈칸에게도 '너'라고 부를 만큼 형제 같은 관계를 유지했다. 상하관계는 엄격하되 친숙함을 유지했던 것이다. 또 병사들이 죽더라도 가족들의 생활은 걱정 없도록 준비해 주었다.

현대에도 이런 전통은 그대로 전해져 몽골에는 상류층이라는 개념이 전무하다. 다른 공산국가들에는 지배계층을 위한 비밀 오락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몽골에는 전혀 없었다. 1980년대부터 옛 소련과 루마니아 등 40여 개국이 자유화 과정에서 엄청난 피를 흘렸으나 몽골에서는 이처럼 전통적인 민족의 결집력 덕분에 유혈사태가 벌어지지 않았다.
또한 칭기즈칸은 항복한 군사들과 정복지의 국민을 자국민과 동일하게 대우했다. 적군도 항복하면 몽골군에 편입시켜 응분의 직책과 계급을 부여하는 동화정책을 사용했다. 그러나 지휘자로는 기용하지 않았다.-42쪽

역사상 이라크를 침공한 외세는 몽골군와 미국뿐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몽골군은 단숨에 이라크 병사를 무력화시키고 점령에 성공했지만, 미국은 장기간에 걸쳐 전쟁을 해야만 하는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는 점이다. -42쪽

대제국을 건설했던 몽골도 이국적인 문화를 잘못 받아들여 쇠퇴하고 말았다. 대표적인 것으로 라마불교의 도입을 들 수 있다.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 전성기에 몽골인은 한 집에서 한 명의 병사를 배출하는 대신 한 명 이상씩 라마승으로 출가시켰다. 몽골인이 라마승을 많이 배출했던 것은 지식인을 숭상하는 당대의 풍토와 그 당시 지식인이 모두 승려였던 점에 기인한다. 그 결과 병사가 모자라 몽골의 군대제도는 와해됐다. 이후 국방을 외국인 병사에게 맡겼으며, 이 때문에 대제국은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한족에게 국가를 고스란히 바치고 만 것이다.
제국이 쇠퇴하기 전 몽골은 기회 있을 때마다 그들의 세력을 밖으로 펼쳐나가려고 몸부림쳤다. 그 결과 몽골의 흔적은 세계 곳곳에 남아 있다. 현재 중국 수도인 북경은 몽골인이 처음 수도로 정했던 곳이다. 덕택에 중국영토가 북쪽으로 확장되는 부수효과를 얻기도 했다. 모스크바도 몽골인이 건설한 뒤 러시아인에게 물려준 것이다. 이란 북부의 이즈파한은 몽골족이 세운 일칸국의 수도였다. 당시 이주한 몽골인 후손들이 현재까지도 남아 몽골어를 사용하고 몽골 문자로 된 신문과 잡지를 발행하고 있다.-44쪽

1921년 세계에서 두 번째로 공산혁명에 성공한 몽골은 70년 동안 옛 소련의 지배를 받아왔다.

국내 총생산의 30% 이상을 러시아가 무상으로 지원했던 덕분에 몽골인은 자국 경제 상황보다 높은 수준의 경제생활을 해왔었다.

모든 학교는 거의 무상에 가까운 교육을 실시했고, 당에 대한 충성심과 어느 정도의 학습 능력만 있으면 대학 진학 자격이 주어졌다. 최우수 학생으로 선발되면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식 교육을 받을 수도 있었다. 곡물 생산량이 전 국민을 먹여 살리기에는 턱 없이 부족했음에도 배급표만 있으면 언제나 배고프지 않을 만큼의 음식을 확보할 수 있었다.-45쪽

몽골은 1990년 자유화 과정에서 한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아 동구 국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하지만 몽골은 민주화와 자본주의를 선택한 뒤 경제적인 어려움과 사회보장제도의 몰락을 동시에 경험하게 되었다. -48쪽

정확한 수는 매번 바뀌지만, 대체로 몽골인구의 1%가 한국에 불법체류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49쪽

몽골인의 1인당 국민소득은 480달러(세계은행 2005년 통계 기준)에 불과하지만 심리적인 만족감은 여전히 상위국가군에 속한다. 몽골인에게서는 저개발국가에서 흔히 드러나는 지도자의 신격화나 그가 유일한 대안이라는 식의 극단적인 사고방식은 찾아볼 수 없다.

몽골의 정치체제는 이원집정제로, 대통령은 국방에 관한 결정권과 법률안 거부권만을 지닌다. 실질적인 경제나 치안 등 국내 통치권은 의회에서 선출되는 총리가 가지고 있다.-51쪽

몽골은 21개 종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이다.-61쪽

우리나라 사람들의 시력이 1.0~1.5 정도인데 반해 이들의 시력은 때에 따라 5.0까지도 측정된다고 한다. 푸른 초원에서 적을 발견하기에 적합한 눈이다. 늑대나 여우가 아무리 빨리 달려와도 양떼를 몰고 도망가기에 충분할 정도로 훌륭한 눈이기도 하다. -63쪽

몽골인은 자기 신분증에 종족과 집안을 밝힌다. 인구 대다수가 할흐족인 몽골에서 소수민족임을 밝힌다면 불리하지 않겠느냐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소수민족이라 정부의 보호가 필요하므로 종족을 밝힌다는 것이다.

카자흐족은 중국 신장성에 살다가 1870년대부터 20세기 초까지 알타이 산맥을 넘어 몽골로 이주했다. 몽골 정부는 1917년 공산혁명 당시 노동력을 확보한다는 명분 아래 카자흐 사람들에게 국적을 주고 몽골국민으로 편입시켰다. 카자흐족은 이주 후에도 자신들의 종교인 이슬람교는 물론 방언 및 관습, 의복, 주거문화 등을 유지해왔다.-64쪽

오이라트는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초 흡스골 호수의 타이가지대에서 서쪽으로 이동하여 알타이산맥 부근에 자리잡았다. 17세기 초에는 그 일부가 러시아의 볼가 강변에 새로이 정착했다. 이들이 세운 나라가 오늘날 러시아 연방 내의 칼무크자치공화국이다.


청나라는 1757년부터 1758년 사이 준가르제국을 정복하여 오이라트족 대부분을 중국 신장성으로 이주시켰으며, 이들이 지금까지도 신장성의 터줏대감 노릇을 하고 있다. - 65쪽

몽골리안이라 불리는 몽골 북부지역의 브리야트 몽골인과 중국 내몽고의 몽골인들은 본국의 몽골인보다 훨씬 숫자가 많다. 내몽고에 300만, 브리야트에 300만이 포진해 몽골을 감싸 보호하고 있는 형상이다. -66쪽

몽골반점을 지닌 종족을 언급한다면 에스키모와 아메리카 인디안까지도 몽골인의 범주에 포함된다. 반면 이들은 생활방식이 워낙 달라 모든 동질성을 상실한 상태다.-68쪽

초원의 작은 부족이었던 몽골인들은 종족의 번영과 지속을 위한 방어과정을 통해 세계에서 가장 넓은 국가를 성립할 수 있었다. 적을 무찌르지 않으면 종족이 멸망한다는 강박감에서 공격을 최고의 방어책으로 삼아온 것이다. 이와 더불어 제국 건설 과정에서 점령지의 문화나 종교를 인정하는 유화정책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몽골족이 피해를 당하면 반드시 보복을 하는 강력한 자민족보호주의를 내세웠다.

인구가 많은 주변 국가들로부터 늘 위협을 받아온 몽골인은 아이를 많이 낳아 인구를 증가시켜야 한다고 배워왔다. 지금도 러시아와 중국 사이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살지 않으면 언제 나라가 송두리째 없어질는지 모르는 상황이다. -68쪽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지라 몽골에는 태아숭배사상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아이를 위한다. 덩달아 임산부도 그에 버금가는 대우를 받는다.




태어난 아이들의 엉덩이에는 푸른 반점이 있다. 이것이 '흐흐 민지' 즉 몽골반점이다. 이 점은 3~4살이 되면 자연스레 없어진다. 몽골족만이 갖는 특징이므로 몽골인은 이 점을 가진 민족을 동계혈족으로 여긴다. 그런 연유로 몽골인은 우리나라 사람에게 형제 같은 느낌을 갖는다고 말한다. 한국인에게는 특히 우호적이며 모든 면에서 편의를 베풀려고 노력한다.-69쪽

1921년 당시 40만이 채 되지 않았던 몽골 인구는 곧 300만 명에 다다를 전망이다.
현재 몽골인구의 65%가 30세 미만이며, 45.2%가 16세 이하의 어린이들로 구성되어 있다.-70쪽

몽골인은 개를 지저분한 가축으로 여겨 개고기는 먹지도 않는다.-70쪽

몽골인에게는 가문을 나타내는 성씨가 없고 이름만 있다. 물론 몽골인에게도 성이 있었으나 옛 소련의 배후 조종을 받던 당시의 몽골 정부가 공산혁명 이후 성 제도를 폐지했다. 성을 없앤 것은 소련이 몽골족의 기상을 꺾어 놓기 위해 취한 여러 수단 중 하나였다. 소련은 몽골영토의 일부인 브리야트 지방을 자국령에 귀속시키고, 중국이 몽골 남족지방(현재 내몽고)을 접수하는 것을 방치해 몽골인의 근거지를 가급적 척박한 지역으로 한정시켰다. 또한 몽골 가족의 단합을 분열시키기 위해 성 대신 아버지의 이름을 쓰도록 하는 편법을 가르쳤다.-71쪽

몽골에서 매장이 일반화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전통적으로 푸장 또는 조장이라고 불리는 장례법이 전승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후가 건조하여 부패가 되지 않으므로 시체를 들판에 벌려 새와 들짐승이 뜯어먹게 하는 원시적인 방법이었다. 흔히 말안장에 시체를 앉혀 놓고 말을 마을과는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게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시체가 말에서 덜어지면 그곳에서 짐승들의 먹이가 되는 것이다. 잔인한 것 같지만 자연 조건에 실질적으로 순응하는 장례문화였다. -74쪽

몽골인의 가장 특징적인 성격으로는 독립심을 들 수 있다. 그들은 활과 칼, 말 한 마리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살아남을 수 있다. 자신의 힘과 지혜만으로 세상을 살아왔기에, 그들에게 협동이나 단결이란 말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 -75쪽

개개인의 독립심이 투철했기 때문에, 몽골인은 지도자가 백성들을 책임지지 못하면 지도자를 심판해 목을 쳤다. 그러므로 몽골의 지도자는 늘 국민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며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백성에게 보여주려 했다. 반면, 우리 지도자들은 언제나 말만 앞섰지 진정으로 국민과 함께 한 경우는 드물었던 것 같다. 국민을 위해 목숨을 내던지던 몽골 지도자 같은 사람을 고르는 혜안이 우리 국민들에게도 필요한 때이다.-76쪽

몽골인들은 그들만의 풍부한 감성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웬만한 사물을 詩로 묘사할 수 있으며, 그들 사이에서는 시를 아는 사람이 가장 환영받는다. 우리나라 사람이 모이면 노랫가락이 퍼지지만 몽골인이 모이면 시가 흘러나온다.-77쪽

모린호르는 말의 머리처럼 생겼다고 해 마두금으로도 불린다. 모습이나 소리가 우리나라의 해금과 매우 유사하다.

야타크라는 악기는 우리나라의 가야금과 비슷하게 생겼으며 음색도 비슷한 편이다. 현을 튕겨서 소리를 내는데, 경쾌한 음률이 실내악으로서 손색없다.-79쪽

없는 사림에도 불구하고 몽골인의 손님 대접은 극진하다. -81쪽

손님과의 안면 유무에 관계 없이 장황한 인사말을 주고 받는데, 인사는 적어도 5분 이상 걸린다.


코담배를 상대방에게 줄 때는 반드시 오른손을 사용해야 한다. 왼손은 불결하다고 생각해 타인과의 접촉을 꺼리기 때문이다. -84쪽

몽골에서는 어른들이 물건을 주면 아랫사람들은 황급하게 소매를 풀어 내리고 두 손을 내밀어 받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맨살을 보이거나 팔뚝을 드러내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몽골인이 겉으로는 험악해 보일지 몰라도 예의 면에서는 어느 민족에게도 빠지지 않는다.

몽골인은 또한 외국인들에게 호의적이다. 자연환경이 척박해 외부인을 쉽게 접할 수 없었던 몽골인은 외국인을 외부 소식을 전해주는 전령이자 새로운 문물을 소개하는 선구자로 여겨 반긴다. 그러나 몽골인의 호의적인 태도는 사실 도시지역에 한정된 말이다. 지방을 여행할 때 전통과 예절을 잘 알지 못하면 봉변을 당하기 일쑤다. 수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더 배타적이며 관습을 중시한다. 그러나 외국인들이 잘 몰라서 그렇다는 것을 모든 몽골인은 잘 알고 있기에 크게 걱정할 것은 아니다.-85쪽

손님은 음식을 먹고 포식했다는 표시로 트림을 한다. 그리고는 감사하다는 말을 한다. 10분은 족히 넘을 시간을 할애하여 주인에게 감사와 고마움을 나타낸다.

예부터 잔칫날에 귀한 손님이 오면 몽골인은 말고기를 대접한다는 중국 사신의 기록이 있다. 그러나 몽골 학자들은 이 말이 잘못됐다고 지적한다. 손님에게 새로 잡은 고기를 대접하는 관습에 따라야 했지만, 당시 사신이 방문한 전쟁터에서는 가축을 구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가장 구하기 쉬운 말을 잡아 잔칫상을 차렸던 것이었다. 이런 모습을 두고 몽골의 풍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중국 사신은 몽골인이 미개하고 무식해 말고기도 먹는다는 투의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말고기는 그저 운송수단으로 사용하다 수명ㄷ이 다하면 잡아 먹을 뿐이다.-86쪽

난로에 물을 붓거나 쓰레기를 넣어서는 안 되며, 불을 쑤시는 것과 난롯불에 발을 쪼이는 것은 금기시 된다. 난로를 타 넘는 것도 삼가야 한다. 난로를 모독하는 모든 행동은 죄악이며 주인을 모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우유를 땅바닥에 쏟아도 곤란하다. 게르 기둥에 몸을 기대면 불길한 징조로 받아들인다. 게르 안에서 휘파람을 불면 게르 외부에 있던 불순 세력들이 침입해 온다는 옛말 때문에 몽골인은 이를 몹시 꺼린다.-86쪽

몽골인에게 풀은 생명과 직결된다. 초원의 풀을 이용하기에 따라 젖의 생산량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조상대대로 비법이 전수되므로, 그들은 가축에게 포원의 풀을 효과적으로 뜯게 한다. 가능하면 풀을 짧게 듣어먹을 수 있게 가축을 순서대로 몰고 다니는 것이 그 방법이다. 소와 양을 같이 모는 목동은 소 다음 양이 풀을 뜯도록 하기 위해 소가 앞서 가게 몬다. 소는 풀뿌리 근처까지 뜯어먹지 못하므로, 어느 정도 남은 풀을 양은 샅샅이 헤쳐 먹는다. 마찬가지로 낙타와 양을 동시에 유목하는 고비 지방에서는 양을 먼저 뜯긴다. 양은 가시가 있는 거친 풀을 먹지 않기 때문에 거친 풀을 잘 먹는 낙타를 양 뒤에 세우는 것이다. -92쪽

몽골여성들은 빨래에서 해방된다. 칭기즈칸은 그의 법전으로 불리는 <대야사>에서 천이 완전히 해어지기 전까지는 의복을 세탁하는 것을 금하였다. 날씨가 추워 빨래를 하다보면 사람이 다치는 것은 물론 의복이 상하기 쉬워 백성들의 노고를 덜기 위해서였다. 역으로 생각하면 빨래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땀의 분비가 적고 건조하여 생활에 별 지장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발상이 가능했던 것이다.-93쪽

몽골인은 물 대신 눈으로 빨래한다. 눈이 날리기 시작하면 털옷과 양탄자 등을 챙겨들고 밖으로 나온다. 빨랫감을 눈밭에 던져두고 그 위에 눈이 2~3센티미터가량 쌓이기를 기다린다. 눈이 쌓이면 빨랫감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눈이 골고루 묻게 한 뒤 바위나 나무 등걸에 대고 패기 시작한다. 이렇게 2~3번하고 훌훌 털어 버리면 끝이다. 털옷을 세탁하는 모습은 한 마리 늑대가 눈밭에 굴렀다가 일어나는 것처럼 보인다.-94쪽

몽골에서는 기후가 민족의 생활환경이나 성격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는 인류학자들의 말을 실감할 수 있다. 몽골인은 혹독한 추위를 이겨 생존하기 위해서 게르를 지었고, 가축에게 풀을 먹이기 위해 일 년이면 네다섯 차례 이사한다. 이사라는 것이 지어진 집 사이를 옮겨다니는 것이 아니라 살고 있는 집 자체를 뜯어 세간과 함께 옮기는 것이므로 우리의 이사 개념과는 판이하다. 이사는 일 년에 4~5번씩 하며 봄 이사가 그 시작이다. 겨우내 매서운 바람을 피했던 좁은 지역에서 벗어나 햇빛이 비치는 평지로 집을 옮긴다. 시골에서는 훈훈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4월말부터 봄맞이 이사를 서두른다. 겨우내 굶주렸던 가축에게 한시라도 빨리 새 풀을 뜯기려는 안타까운 심정에서다.-96쪽

우리가 농사를 지을 때 같은 땅에 연작을 하지 않듯 몽골인도 같은 장소에 터를 잡지 않는다. 같은 장소로 오는 데는 적어도 4~5년이 지나야 한다. 그 이전에 가면 지난해 뜯어 먹은 풀뿌리가 제대로 자라지 않아 그 해 가축 농사는 실패한다고 한다. -97쪽

한여름에도 낮에는 27~29도의 뜨거운 햇볕이 대지를 달구지만 그늘에서는 서늘함을 느껴 별로 땀이 나지 않는다. 밤에는 기온이 4~5도까지 급격하게 내려가 곧바로 두꺼운 옷이 필요해진다. 그러니 유목민들은 두꺼운 옷 한벌이면 대충 사철을 견딜 수 있는 셈이다.



개방의 바람을 탄 집안에서는 최근 텔레비전과 냉장고 등의 가전제품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것을 갖춘 집들은 유목에서 벗어나 반정착상태의 생활을 영위하는 경우에 국한된다.-98쪽

영하 40도 이하인 외부와 단절된 게르 내부에서 열기를 더하는 것은 오직 난로뿐이다. 아낙네들이 여름내 모아 말린 소똥을 연료로 사용하는데, 이는 나무가 희귀한 초원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연료이기 때문이다. 소는 사료 대신 풀만 먹어 똥에는 섬유소가 그대로 남아 있으며, 냄새나 분진이 거의 없는 편이라 생각보다는 위생적이다.


모든 것을 신에게 의존하는 몽골인은 난로 연통을 게르 안의 자신들과 신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로 여긴다. -99쪽

난로는 가문의 유일한 상속물로 여겨질 만큼 재산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자식들에게 물려줄 것이 별로 없는 몽골인이지만, 전통적으로 난로에는 큰 의미를 두고 막내에게 상속해 왔다. 몽골인은 가장 최후까지 남아 가문을 지킬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장남이 아닌 막내아들을 상속자로 택한다. 칭기즈칸은 전쟁에 나설 때마다 막내 아들에게 집안의 모든 관할권을 위임하고 출정했다. 가족보호는 물론 城의 관할조차도 나이 어린 막내에게 맡겼던 것이다. 그리고는 "만약 이 애비와 너의 형들이 전장에서 돌아오지 못하면 가문과 나라를 일으켜 원수를 갚아 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그와 더불어 하는 말이 바로 "난로를 지키라"는 것이었다.
몽골인이 난로를 특별히 여기는 것은 불을 곧 조상으로 여기기 때문이다.-101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