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톱 시계+GPS 콘택트렌즈=주머니가 필요 없다 [제 808 호/2008-09-08]


한적한 공원에 한 여성이 앉아있다. 만나기로 약속한 연인이 오질 않는다. 공원의 다른 사람들은 즐거운 표정으로 맑은 공기를 즐긴다. 초조해진 여성은 약속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손목을 봤지만 시계가 없다. 공원 여기저기를 둘러봐도 시계는 보이질 않고, 아뿔싸! 휴대전화도 배터리가 다 되어 꺼져 있다. 이 여성은 고개를 숙이고 손바닥을 위쪽으로 한 다음 손톱을 들여다본다. 시간 보기를 포기한 것이 아니다. 얇게 붙어 있는 모조 손톱에 떠 있는 전자 액정의 시간을 읽는 것이다. 물론 배터리와 모든 부품들이 그 얇은 모조 손톱 한 장에 전부 들어 있다.

흔히 SF영화들은 배경이 미래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 각종 첨단 장비들의 모습을 보이곤 한다. 하지만 앞서 묘사한 장면은 영화가 아니다. 시계 제조업체 Timex와 디자인 전문 사이트 Core77은 시간의 미래 디자인 경진대회(The Future of Time design competition) 를 열었다. 손톱 시계는 이 대회의 출품작 중 하나이다. 수상작 중에는 영국의 빅벤(Big Ben)의 영상을 보여주는 손목시계도 있고 스티커 형으로 아무 곳에나 붙일 수 있는 시계도 있다.

이렇게 신기한 제품들은 새로운 디자인이나 장난감 같은 흥미를 돋우는 면도 물론 있지만 그 밑바닥에는 좀 더 근원적인 필요성이 놓여 있다. 극단적인 자연주의자가 아닌 한 우리는 기계와 떨어질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기계의 용도를 크게 둘로 나눈다면 물리적인 일과 정보의 전달이다. 물론 일을 하는 기계 역시 정보를 전달하기는 한다. 예를 들어 보일러도 사용자에게 온도를 알려주기 위한 화면이 필요하다. 컴퓨터도 스프레드시트를 이용한 회계업무 등 일련의 작업을 끝낸 후 그 결과를 사용자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최근 컴퓨터와 전자기술이 발달하면서 문자 그대로 정보의 전달만을 목적으로 하는 장비들이 속속들이 개발되고 있다. DMB가 좋은 예이다. 동영상 강의를 보고 인터넷 사이트를 돌아다니기 위해 사용하는 컴퓨터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기계들이 제공하는 정보가 많아지면 결국 사용자는 원하는 콘텐츠만을 골라보고 자신에게 맞게 편집해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방적으로 감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가 콘텐츠를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인터페이스라는 것이 필요하다. 사실 인터페이스란 아주 간단하고 기본적인 개념이다. 보일러를 켜고 끄며 온도를 조절하기 위한 스위치들 역시 인터페이스이다.

여기에 유비쿼터스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모든 곳에 컴퓨터가 존재하고, 그 컴퓨터를 어디서든 사용할 수 있다.라는 것이 유비쿼터스의 기본 정신이다. 먼 옛날에는 시계가 있는 곳까지 가서 시간을 확인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시계를 손목에 차고 다닌다. 그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손톱 위에까지 시계가 자리를 잡는다. 극장에 가야만 볼 수 있던 영화를 이제는 전철에 앉아서 손바닥 만한 화면으로 본다. 커다란 지하 연구실을 가득 채우던 컴퓨터가 여행가방 크기로 작아지고 이제는 UMPC라는 초소형 컴퓨터들이 생산된다. 이 모든 기계들은 휴대의 편의라는 목적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이러한 흐름을 가만히 살펴보면 당분간 생산될 첨단 기기들의 미래는 휴대성에 달려있는 것 같다.

기술자들과 인터페이스 디자이너들의 꿈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휴대의 종착점은 역설적이게도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는 것이다. 그럼 다시 과거로 돌아가서 시계가 있는 곳까지 걸어가자는 말일까? 아니다. 세계 곳곳의 전자업체와 연구소들은 사람의 몸 안에 컴퓨터와 전자장비들을 넣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워싱턴 대학의 연구팀들은 세계 최초로 전자 콘택트렌즈를 개발하고 있다. 바야흐로 기계가 눈앞에 다가온 셈이다. 이 콘택트렌즈에는 LED와 전자소자들이 들어 있다. 이 소자들은 그 크기가 매우 작으며 말랑말랑한 물질 속에 섞여 있다. 여기에 미리 회로의 모양새를 새겨놓은 콘택트렌즈를 덮어씌우면 모세관 현상에 의해 소자들이 위로 상승하면서 각각의 모양이 다르기 때문에 제 모양에 맞는 자리에 끼어들어 간다. 시야를 가릴 수도 있는 전자소자들은 눈의 동공에서 벗어난 바깥쪽에 위치하고 LED들은 반대로 동공 부분에 자리 잡는다.

연구팀들은 이 전자 콘택트렌즈의 동력원으로 집적 태양 전지를 생각하고 있으며 LED에 신호를 보내는 방법으로는 무선 라디오 주파수 수신기를 사용할 계획이다. 이 제품의 활용도는 생각보다 훨씬 크다. GPS에서 받은 신호를 3D영상으로 바꾸어 렌즈에 전송하면 문자 그대로 입체적인 길 안내를 볼 수 있다.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고도 실시간으로 주식 정보를 볼 수 있고 휴대전화를 손으로 열지 않고도 곧바로 메시지를 볼 수 있음은 물론이다. 군인들은 위성에서 보내온 작전 지역의 영상을 렌즈로 볼 수 있으며 컴퓨터 게임 분야에서도 다방면으로 활용될 것이다.

또한 영상의 확대 기술이 정밀하게 제공된다면 시력이 나쁜 사람도 이 렌즈를 통해 갖가지 혜택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본격적인 활용에 앞서서 장시간 착용해도 인체에 해를 주지 않는 안전성이 확보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아무리 기능이 뛰어나다 해도 신체와 직접 접촉하는 이상 거부 반응이나 새로운 질병을 유발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전자 소자가 박혀있는 틈새에 비위생적인 물질이 끼지 않도록 특수처리를 하는 것도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전자장치의 소형화를 위한 노력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마이크로의 세계에서도 이뤄지고 있다. 휴대용 장비를 위해 반드시 작아져야 하는 것은 배터리다. 노트북을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배터리가 전체 무게와 부피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MIT의 기술자들은 인간 세포의 절반 크기밖에 안 되는 마이크로 배터리를 개발하고 있다. 현재까지 개발된 기술은 마이크로 배터리의 전극을 만드는 것과 바이러스 (컴퓨터 바이러스가 아닌 생명체 바이러스)를 이 배터리에 이용하는 단계까지이다.

우선 매끈한 표면에 직경이 4~8백만분의 1미터 정도 되는 점들의 패턴을 찍어놓는다. 그리고 여기에 양극과 음극 그리고 배터리 셀 들을 분리시킬 물질들을 뿌린다. 그다음에 유전자를 변형한 바이러스에 특정 단백질을 입혀서 극히 미세한 전선으로 활용한다. 이것들을 결합하면 마이크로 단위의 배터리를 만들 수 있다. 이 배터리를 앞서 소개했던 전자 렌즈와 연결하면 그야말로 완벽한 휴대용 기기의 탄생이다. 개발자들은 여기서 한 술 더 떠 이 마이크로 배터리와 생체 조직의 유기적인 연결까지 꿈꾸고 있다.

이처럼 미래의 휴대용 기기들은 우리들의 살갗에 직접 접촉하고 있다. 기술이 더 앞으로 나아가면 콘택트렌즈도 필요없이 시신경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인터페이스들이 개발되고 나노기술들이 발달함에 따라 각종 센서가 우리 몸 안을 돌아다니며 신체의 이상 상태를 실시간으로 점검할지도 모른다. ‘인간과 컴퓨터 간의 인터페이스 (Human-Computer Interface; HCI)’ 는 이미 하나의 학문으로 자리 잡고 있다.

언젠가는 CPU를 비롯한 컴퓨터 전체가 우리 몸의 일부로 자리 잡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생체의 신경 및 감각과 컴퓨터 사이를 중계하는 인터페이스가 완벽하게 개발될 수도 있다. 물론 그 단계에 이르기 전까지 해결해야 할 각종 도덕적, 관습적, 기술적 문제들이 산적해 있겠지만 눈을 한 번 깜빡거리면 생활의 양상이 바뀌는 시대이니만큼 컴퓨터가 우리 몸속에 들어올 날은 생각보다 훨씬 가깝다.

글 : 김창규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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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칭기스칸 - 유목민에게 배우는 21세기 경영전략 SERI 연구에세이 2
김종래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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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혹독하게 추운 날 성인식을 치른다. 영하 40도, 눈을 뜨기 어려울 만큼 세찬 바람이 휘몰아치는 허허벌판. 두터운 가죽옷을 입고 털모자를 눌러 쓴 몽골 아이 10여 명이 말 위에 앉아 무언가를 기다린다. 신호가 떨어지면 소년들은 말을 내달린다. 왕복 80km에 이르는 눈보라 길의 출발이다. 소년들은 지평선 끝에서 사라졌다가, 두 시간이 지나서야 다시 지평선 위로 점점이 모습을 드러낸다. 눈보라를 뚫고 온 아이들과 말의 모습은 참혹하다. 하지만 소년들의 눈빛만큼은 형형하다. 흘린 땀이 온 몸에 얼음으로 붙어 있으면서도 뜨거운 김을 펄펄 내뿜는다. 말 고삐를 쥐었던 소년들의 손도 얼어 퍼렇게 동상을 입었다. 고삐를 놓치지 않으려면 동상 걸린 손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참고 견디는 수밖에 없다. 소년들은 돌아와서야 동상 걸린 손을 눈 속에 파묻고 비빈다. 이냉치냉. 동상 든 손은 비로소 다시 피를 돌리기 시작한다.
이렇듯 몽골 아이들은 시련의 들녘에서 강인하게 벼려진다. 절벽 아래로 새끼를 떨어뜨려 스스로 올라오는 새끼만 거둬 기르는 사자의 선택에 다름 아니다. 문명의 울타리 밖에서 인간은 스스로 강인해질 수밖에 없다.
-12쪽

매일 아침 아프리카에선 가젤이 눈을 뜬다.
그는 사자보다 더 빨리 달리지 않으면 죽으리라는 것을 안다.

매일 아침 사자 또한 눈을 뜬다.
그 사자는 가장 느리게 달리는 가젤보다 빨리 달리지 않으면
굶어 죽으리라는 것을 안다.

당신이 사자이건 가젤이건 상관없이
아침에 눈을 뜨면 당신은 질주해야 한다.

-보스턴 컨설팅의 보고서
-15쪽

유목민은 지금껏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이유는 크게 둘이다. 우선, 그간 역사 서술이 기록 중심 사관에 편집증처럼 집착했기 때문이다. 유목민에게 문자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들의 문자 의존도는 매우 미약했다. 유목민에 관한 기록은 대부분 정착민 쪽에서 쓰여졌다. 그래서 기록된 것보다 기록되지 못한 것이 많았다. 기록된 부분들에도 오해와 곡필이 많았다. 기록하는 측은 이견의 여지 없이 자기들을 ‘문명인’으로 상정한다. ‘야만족’, ‘파괴자’, ‘비(非)문명’ 같은 단어를 붙이면서 기록자들은 유목민의 성격부터 악의적으로 채색했다. 유목민에게 공격-지배 당했던 사건의 기술에는 극도의 피해 의식이 가미됐다. 자기네가 유목민을 공격했던 시기에 관해서는 과도한 우월감을 드러냈다.
-16쪽

유라시아 유목민의 행적은 주로 중국 역사가들의 눈으로 관찰됐다. 그들의 편견은 호칭에서부터 시작한다. 흉노(匈奴)는 시끄러운 종놈, 돌궐(突闕)은 날뛰는 켈트족, 몽고(蒙古)는 아둔한 옛 것...... 명백히 문자의 폭력이다. 한자라는 상형문자가 사람들 마음에 심는 조형의 힘은 알파벳을 비롯한 표음문자와는 판이하게 강력하다. 아메리카를 똑같이 ‘미국’이라 부르더라도, ‘쌀미(米)’로 표기하는 것과 ‘아름다울 미(美)’의 나라라고 쓰는 게 전혀 다르듯.
-17쪽

둘째, 그간 역사가 오직 공간만을 중심에 놓고 관찰됐기 때문이다. 인간은 출현 이후 19만 년 동안 채집이나 수렵 생활을 하다 지금부터 1만 년 전에 하천을 중심으로 농업혁명을 일으켰다. 이후 잉여 생산물이 생겨났고, 그로부터 경제가 본격적으로 발전되고 정착생활이 시작됐다. 6,000년 전,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나일강, 인더스강, 황하 유역에서 도시 문명이 일어났다. 이후 산업혁명을 거쳐 지식혁명까지 인류는 특정 장소들을 중심으로 문명을 일궈왔다. 처음에는 하천 주변에서 인류 문명이 발달하다 지중해, 카스피해 같은 내해와 연안으로 옮겨갔고, 300년 전부터 대서양문명 시대가 계속돼온다는 식이다. 이런 역사 관찰방식은 거의 거부감 없이 받아 들여지고 있다.
-18쪽

그러나 이는 사실일지언정 진실은 아니다. 인류가 자랑해온 4대 문명 발상지는 다시 표현하면 4대 정착문명 발상지라 해야 옳다. 4대 정착문명 거점들은 자연환경과 역사 경험에 따라 매우 다른 개성들을 지니기도 하지만 상당히 공통된 특성도 보인다. 예를 들어 하나 같이 물가에서 출현했고, 식물을 중심에 두고 사고했으며, 오직 씨를 뿌려 거두기를 삶의 기본이자 세상의 표본적 질서로 여겼다. 그렇게 성을 쌓고 울타리를 늘리며 관료제를 발달시켰으며, 공간 이동을 꺼렸다.
농경 정착민들의 우선 관심 대상은 경작할 토지와 비를 내려 줄 하늘이다. 옆을 볼 필요 없이, 위(하늘)와 아래(땅)를 봐야 한다. 정착민들은 한 자리에 붙박혀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해결한다. 이웃 사람, 이웃 마을, 이웃 나라와 교류할 필요를 별로 느끼지 못한다. 그만큼 폐쇄적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소유 의식이 강해지고 관료제가 발달한다. 천자와 왕을 대신하는 관리가 나서서 사람들 사이 분쟁을 해결하고 세금을 징수하며 행정을 편다. 정착사회는 이처럼 수직 마인드를 기초로 삼게 된다. 잘만 운영하면 모든 것을 평생 보장하는 종신형 사회이자, 식물형 사회이며, 수직사회다.-18쪽

그러나 그 사회가 자기 정화력과 절제력을 잃어버릴 경우 온갖 폐해를 드러낸다. 제도피로 현상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계급과 계층들이 먹이 사슬처럼 생겨난다. 위에 있는 사람들은 군림하면서 아래를 착취하려 든다.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위에 아첨하면서 자기보다 더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군림하고 착취하려 한다. 그러면서 부정과 부패가 창궐한다.

그런 곳에서는 남에 대한 봉사, 효율, 생산성, 투명성 따위가 구호로만 떠돌아 다닌다. 수직사회에서 창의력 약화는 필연이다. 대신 기억력이 존중되고 발달한다. 모든 경쟁도 기억력 겨루기가 핵심이다. 기억력을 중시하는 사회는 미래를 사는 게 아니라 과거를 산다.
-19쪽

그에 반해, 유목 이동민들은 항상 옆을 바라 봐야 살아 남을 수 있다. 생존하려면 싱싱한 풀이 널린 광활한 초지를 끝없이 찾아 헤매야 한다. 그래서 더 뛰어난 이동 기술을 개발해야 하고 더 좋은 무기로 무장해야 한다. 그들에겐 고향이 없다. 한번 떠나면 그만이다. 초원에는 미리 정해진 주인도 없다. 실력으로만 주인 자리를 겨룰 뿐이다. 기회는 항상 열려 있다.
살기 위해 위가 아니라 옆을 봐야 하는 수평 마인드의 사회, 살기 위해 집단으로 이동해야 하는 사회가 유목사회다. 그 속에서 단 하루도 현실에 안주하는 게 허용되지 않는다. 끝까지 승부 근성을 놓지 않고 도전해야 한다. 그곳에서는 ‘나와 다른 사람’이 소중하다. 민족이, 종교가, 국적이 다르다는 것도 무시해 버려야 한다. 아니 다른 사람일수록 더 끌어들여야 한다. 사방이 트인 초원에서는 동지가 많아야 살아남고 적이 많으면 죽게 된다.
-20쪽

그런 사회에선 완전 개방이 최상 가치로 통한다. 모든 개인의 개방화는 사회 전체로 확산된다. 그렇게 해서 그 사회는 출신이나 조건에 얽매이지 않는, 능력에 따라 무한 가능성을 보장하는 사회가 된다. 그 속에선 효율과 정보가 무척 중요하다. 이동과 효율과 정보의 개념 속에서 시스템이 태어난다. 자리는 착취와 군림 수단이 아니라 역할과 기능을 발휘하는 곳이다. 최고 자리에 앉는 사람은 군림하는 통치자가 아니라 리더다. 그 자리에 누가 앉느냐는 것은 씨족이나 부족의 생사와 직결되는 문제다.
-20쪽

아침이면 달려야 하는 아프리카 사자와 가젤처럼, 인류에게 질주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유목민들의 생존을 위한 질주가, 21세기 초입에선 사람들의 일상이 됐다. 이제, 이동적인 관점이 모든 인간의 잠재적 자세이며, 인간 존재의 기본 범주들 가운데 하나라고 말해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
-22쪽

겔에서 잠을 자다 소변이 급해졌다. 하지만 겔 바깥을 사나운 개가 지키고 있어서 꼼짝할 수 없었다. 주인은 두 뼘도 안 되는 끈 하나를 챙겨 개를 불렀다. 정착민의 사고 속에서 개를 묶는 방법은 목에 올가미를 씌워 어느 한 곳에 구속시키는 것쯤이 유일하다. 그 유목민은 한쪽 앞다리의 무릎을 접더니 끈으로 칭칭 감아 개를 ‘절름발이’로 만들어 놓았다. 벙착민의 방식이 개의 활동 공간을 제한해 구속하는 것이라면, 유목민의 것은 시간(개의 속도)을 구속해 개의 활동력을 약화시키는 방식이었다.
-23쪽

정착문명 사람들이 만리장성을 쌓으며 제 이익과 기득권 보호에 혈안이 돼있을 때, 유목 이동문명 사람들은 길을 닦았다. 만리장성보다 더 소중한 인류 유산으로 일컬어지는 실크로드다. 실크로드는 유라시아 대륙 복판 초원 유목지대에 형성됐다. 유목 이동문명 세계의 인간들이 마침내 동․서양의 소통과 교류를 실현해 낸 것이다.
-24쪽

울란바토르 근교에는 돌궐제국을 부흥시킨 명장 톤유쿠크의 비문이 있다. 당시 유목민이 겪었던 눈물 겨운 사연들을 구구절절 기록하면서, 장군의 유훈을 새겨 놓았다.

성을 쌓고 사는 자는 반드시 망할 것이며
끊임 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 남을 것이다.

닫힌 사회는 망하고 열린 사회만이 영원하리라는 이 말은 글로벌 인터네티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매서운 교훈이 될 것이다.
-27쪽

칭기스칸의 선대 유목민들이 인류사에 일으킨 첫 파란은 기원전 1,400년쯤에 등장한다. 당시 중국 대륙에서는 은나라가 서고, 지중해에선 철기 문화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렇게 도시 국가가 발생할 즈음, 역사 바깥에 있던 유목민들이 갑자기 나타나 정착 세계를 정복해 나간다. 함무라비 왕조를 무너뜨린 히타이트인, 인더스강 유역을 침범한 아리아인, 이집트를 지배한 힉소스인이 그들이다. 그들에겐 ‘기껏 일궈놓은 고대 문명을 짓밟는 야만인’이라는 오명이 씌워졌다. 하지만 유목민들의 ‘파괴’는 새로운 문명 탄생을 불렀다.

-35쪽

기원전 8세기, 그들은 역사의 표면에 다시 얼굴을 내민다. 흑해 북동부 초원에 기마 문명권 사람들의 말발굽 소리가 진동하면서 그곳에 살던 키메르인을 쫓아 냈다. 사람들은 그들을 ‘스키트’ 또는 ‘사카’라고 불렀다. 그 후 500년 넘도록 그곳 러시아 초원을 지배할 주인공 ‘스키타이’였다.
헤로도투스는 저서 <역사>에서 스키타이를 매우 잔인한 종족으로 그리고 있다. 유럽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악마 그 자체였다.
-36쪽

서쪽에 스키타이가 있었다면 동쪽엔 흉노가 있었다. 동방 유목 국가의 원형을 만든 흉노는 기원전 9세기 이전에 험윤이라는 이름으로 중국 역사에 등장한다. 처음에 그들은 변방 약탈자에 불과했다.
기원전 3세기 말, 시도 때도 없는 돌풍 같던 흉노가 태풍으로 돌변했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장군 몽염을 보내 만리장성을 완성했다. 그러나 바람은 그치지 않았다. 항우를 물리치고 한(漢)을 건국한 고조(유방)는 흉노를 토벌하려고 30만 대군을 이끌고 나섰다. 그러나 백등산에서 흉노의 칸 묵특선우에게 포위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백등산 전투에서 참패하고 어렵게 도망한 고조는 황실 여자들과 막대한 공물을 주고 화해할 수밖에 없었다.
백등산 전투는 통일 유목국가와 통일 농업국가 사이의 싸움이었다. 국가 창시자끼리 직접 맞붙은, 세계사에 희귀한 전쟁이었다. 결말은 유목국가의 승리였다. 말 타기와 활 쏘기에 능한 기병들 앞에서 보병의 힘은 초라했다.
-37쪽

흉노는 400여 년을 존속한다. 그리고 내부 분열 때문에 해체된다. 기원전 43년, 선우(왕) 자리를 놓고 호한야와 질지가 싸웠다. 전투는 한의 도움을 얻은 호한야의 승리로 끝났다. 패배한 질지는 서쪽으로 달아났다. 그리고 그들은 역사의 무대에서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이들이 400년 뒤 모습을 다시 드러냈을 때, 서양인들은 그들을 훈족이라고 불렀다.

훈족은 서기 5세기 다뉴브강 동쪽, 오늘날 헝가리(Hub+Gary, 훈족+땅을 뜻하는 합성어, 즉 훈족의 나라라는 뜻에서 파생된 이름)땅에 근거지를 둔다. 당대 유럽에서 그들은 공포의 화신이 된다. 유럽인들은 ‘훈족이 문 앞에 와 있다’며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그들에게 훈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신의 채찍’이었다. 그 중심에 아틸라가 있었다. 아틸라는 지금도 우리의 환상을 자극하는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였다. 그의 전설은 <니벨룽겐의 노래>나 베르디의 오페라 <아틸라>, 프란츠 리스트의 오페라 <훈족의 전쟁>에 남아 전해 온다.
-38쪽

아틸라가 훈족을 이끈 세월은 8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는 다뉴브강을 건너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까지 육박하면서 동로마인들을 공황 상태에 빠뜨렸다. 이어 세계 15대 전투에 꼽히는 카탈루니아 전투에서 로마인과 치열하게 싸웠다. 극적인 행동, 검소한 생활, 뛰어난 지략과 탁월한 전술 구사, 무서운 인내심과 치밀한 외교술, 그의 카리스마는 유목민을 단순무지한 야만인으로 여겼던 유럽인의 편견을 말끔히 씻어냈다.

-39쪽

흉노가 사라진 뒤 몽골 고원을 다시 통일한 세력은 돌궐이었다. 6세기 초 돌궐은 유연에 예속된 부족이었다. 그들은 알타이 지역에서 대장장이 일을 하며 지내고 있었다. 탁월한 리더 부민칸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부민칸은 유연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패배한 유연의 지배자 아나괴는 자살했다. 몽골 고원은 돌궐족의 무대가 됐다.
그러나 부민칸이 제국을 세운 이듬해 급사하자, 돌궐은 동생 이스테미와 아들 무한의 세력으로 갈라졌다. 당 태종 때 돌궐은 붕괴된다. 정착국가가 강성해지면 주변 유목족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일종의 시소 효과다. 그러나 돌궐의 멸망 원인이 그것만은 아니었다. 유목은 유목의 정신을 잃으면 멸망한다. 돌궐을 다시 일으켰던 인물, 톤유쿠크 장군과 빌게칸의 비문이 그 점을 잘 말해준다.
-39쪽

비행기뿐이 아니다. 그들은 무엇이든 지상에서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것마다 그 이름을 붙여 둔다. 울란바토르에 도착하면 칭기스칸 호텔에 묵으며 칭기스칸 보드카를 마신다. 식당에서 밥값을 치르려고 지폐를 꺼내면 거기에도 칭기스칸이 있다. 그는 몽골인들이 하늘의 별처럼 숭모하는 영웅이다.

-41쪽

되찾은 아내 버르테는 이미 만삭이었다. 그렇게 태어난 적장의 아들이 조치. 칭기스칸은‘나그네’ 또는 '손님’이라는 뜻으로 조치라 이름 붙이면서도, 그를 기꺼이 장남으로 받아 들인다. 다만 제국을 이끌고 나가기 위해 후계구도에서 장남을 배제시킨다. 조치와 그 후손들은 새로운 영지 개척에 나서 유럽을 수중에 넣는다. 조치의 아들 바투칸이 유럽을 정벌해 세운 국가가 킵차크칸국. 17세기까지 명맥을 이어가는 킵차크칸국 말고도 칭기스칸의 차남 차가타이가 세운 차가타이칸국, 페르시아를 정복해 세운 손자 훌레구의 일칸국, 원나라를 세운 쿠빌라이의 본토까지 그의 제국은 전 지구적이었다. 1206년 부족을 통일하고 칸에 오른 이후, 20년에 걸쳐 칭기스칸은 서하와 서요를 정복하고 금나라를 멸망시켰으며, 페르시아에 있는 콰레즘 제국, 그리고 유럽과 러시아 일대까지를 점령했다.
몽골 고원에 흩어져 살던 수많은 부족, 아니 서로 약탈하고 약탈당하면서 잠시도 안정을 찾지 못하던 고원의 부족들을 통일시킨 칭기스칸! 당시 블라디보스톡에서 모스크바까지 마차로 달리면 2년이 걸렸다니, 칭기스칸은 거의 말 달리는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세계를 정복한 셈-45쪽

흔히 칭기스칸 요리로 알려진 샤브샤브는 몽골의 것이거나 칭기스칸의 유산이라고 생각한다면 오해다. 칭기스칸 요리는 소화(昭和)시대 일본인들이 고안해 냈다. 몽골에는 비슷한 음식조차 없다. 중국 베이징에는 산양 고기로 만드는 샤브샤브 요리가 있다. 독특하게 생긴 냄비에 산양고기를 끓여 장국에 찍어 먹는다. 하지만 유목민들은 양고기를 끓일 경우 별도 장국 없이 국물째 먹는다. 그들에게 샤브샤브 같은 요리법은 없다.
그런데도 왜 일본산 요리의 이름이 칭기스칸일까. 조심스럽게 내놓고 싶은 추측은 고기를 얇게 썰어 수없이 칼질해 놓은 게 마치 칭기스칸 같은 잔인함을 연상시켰던 탓이 아닐지.
-47쪽

적의 양자가 됐다가, 칭기스칸의 4준마가 돼 천호장까지 올라간 풍운아 보로콜은 세계 제국의 문턱 앞에서 주인의 곁을 떠나야 했다. 그의 딸 우시진은 원나라를 세운 칭기스칸의 손자 쿠빌라이칸의 아내가 됐다.

-57쪽

콰레즘의 수도 사마르칸트(지금의 우즈베키스탄 도시)는 1년 안에는 누구도 함락할 수 없다던 거대 요새였다. 그러나 칭기스칸의 푸른 군대는 단 사흘 만에 끝장내버렸다. 콰레즘의 지배자, 술탄 무하마드는 북으로 달아났다. 제베는 칭기스칸의 명을 받아 수베에테이와 함께 무하마드를 추격했다.
추격전은 1만 km 가까이 계속됐다. 지구 둘레가 4만 km이니 1/4바퀴를 돈 셈이다. 무하마드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자 카스피해 작은 섬으로 숨어들어 걸칠 옷도 없이 죽는다. 이 소름끼치는 추격전에 온 유럽이 경악했다. 제베는 칭기스칸에게 보고하려고 무하마드의 목을 들고 초원으로 귀환하던 1224년, 삶을 마쳤다.
-59쪽

당시 전쟁에서 승리한 부족은, 패퇴했거나 항복한 부족으로부터 우선 가축부터 빼앗았다. 경우에 따라 여자까지 취했다. 나쁘게 말해 약탈이고 좋게 얘기해 전리품을 챙기는 셈이다. 몽골인들에겐 그 전리품을 누가 얼마나 차지하느냐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칭기스칸이 전리품 획득과 배분에서 새로운 조치를 내리기 전까지는 일종의 선착순 약탈방식이 지배했다. 적이 달아난 뒤 적진에 먼저 도착한 순서대로 가축이든 여자든 취했다. 개인적 약탈이었던 셈이다. 이 방식에선 맨 앞에서 싸우는 사람만 득을 볼 수밖에 없다. 뒤에 서거나 간접적으로 전투를 도운 사람, 다른 사정으로 전투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돌아오는 게 없다.
칭기스칸은 이런 불공평을 해소하고, 조직 전체 전투력과 소속감도 높일 목적으로 혁신적 조치를 단행한다. 전리품을 공동 몫으로 두고 누가 얼마만큼 공을 세웠느냐에 따라 나눠 갖는 공동 분배제였다. 이 방식에선 선봉에 선 사람은 싸운만큼 자기 몫을 차지하고, 뒤에서 싸움을 도운 사람에게도 몫이 돌아간다.
-63쪽

원대한 비전 제시와 개별적 약탈 금지로 칭기스칸의 병사들은 성취욕에 불탔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기여한 만큼 대가가 반드시 돌아온다는 믿음도 갖게 됐다. 이는 숫자가 적은 칭기스칸 군대가 엄청나게 많은 상대방을 제압한 비결이기도 하다.
몽골 사회에는 지금도 이 전통이 남아 있다. 몽골에선 매년 7월 11일부터 13일까지 체력단련대회를 겸한 나담 축제가 열린다. 몽골 씨름과 활쏘기, 말타기 경주가 열리는데, 축제의 꽃은 역시 말타기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경주에서 우승하면 기수보다 말 조련사에게 더 큰 포상이 돌아간다는 것이다. 음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공을 잘 아는 탓이다. 더욱 놀라운 건 우승마에게도 똑같은 포상(일등표)을 한다는 점. 동물에게도 이익이 공평하게 분배돼야 한다는 유목민적 발상이다.
-63쪽

칭기스칸은 수많은 기득권층의 반대를 감내하면서도 구성원 전체에게 평등한 분배를 약속했다. 전쟁에 참여한 병사 모두가 자기 자신의 일로 여길 수 있는 제도를 만든 것. 그리고 이 힘은 전 지구적 영토 정벌이라는 놀라운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800년 전의 신경영, 이것은 칭기스칸 제국이 승리할 수 있었던 첫 번째 성공 비결이었다.

-66쪽

물리학에 E=mc2이라는 운동에너지 공식이 있다. 이 공식을 전쟁에 대입해보자. 에너지(E)는 군대 전투력, 질량(M)은 병력 규모나 투입된 예산, 속도(C)는 기동성쯤이 될 것이다. 전투력은 병력 규모나 투입된 예산에 정비례하지만 속도에는 제곱 비례한다. 따라서 몽골처럼 적은 병력으로 대병력을 무찌르는 지름길은 기동성을 높이는 것이다.
수적 열세에서 세계 정복에 나선 몽골 유목민들은 사람 수를 당장 늘릴 수는 없지만 속도는 늘릴 수 있다고 판단했다.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불필요한 것을 소유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축만 해도 오리나 돼지는 소나 말, 양과 달리 사람 손길이 많이 가는 동물들이다. 그래서 그런 동물들은 아예 기르지 않았다. 몸에도 꼭 필요한 것만 지니고 다녔다.
그들은 특히 말의 효용성에 주목했다. 유목민들은 ‘말의 가축화’를 이뤄냈다. 기차나 컴퓨터 발명에 비견할 수 있을 만큼 인류사에 획기적인 성과요 사건이다. 그들은 가축으로 키운 말을 이용해 보병과 보급선을 두지 않는 간편한 기병체제를 만들었다. 이 시스템은 놀라운 행군 속도와 신속한 명령체계를 창출해 농경정착문명의 군대를 제압했다.
-67쪽

유목군대는 군사 장비도 경량화해 속도를 늘렸다. 당시 유럽 기사단 갑옷과 전투 무기의 무게는 70kg이었지만 유목민 군장은 7kg밖에 되지 않았다. 몽골 군대는 갑옷 대신, 옷 속에 얇은 철사로 된 스프링을 넣고 다녔다. 몸이 가벼울 뿐만 아니라 화살도 웬만큼 튕겨내는 갑옷 효과를 냈다.
활과 화살도 ‘신소재’로 만들어 가볍되 멀리 날아가도록 고안해 냈다. 군량 무게를 줄이는 것도 행군 속도를 높이는 방법. 요즘 인스턴트 음식의 시초 형태로 전투 식량을 마련해 군수보급품 무게를 가볍헤 했다. 보르츠(육포)가 대표적인 예다. 소 한 마리 분의 고기를 말린 보르츠는 소 방광에 모두 들어가 운반하기 간편하고 가벼우면서도, 병사 한 명의 1년 식량으로 너끈했다.
몽골군대는 원정 전쟁을 치르려면 군대 이동은 물론, 군수 물자, 병참, 식량을 운반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간파했다. 그들은 전장까지 동물을 끌고 다니면서 보급 문제를 해결했다. 정착민들처럼 지켜야 할 근거지가 그들에겐 없었기 때문. 여자나 아이들은 병사들의 전선 후방에서 가축을 돌보며 방목과 군량 지원을 동시에 해결했다.
-68쪽

보급품을 실어 나르는 정착민과 현지 조달도 불사하는 유목민의 차이. 이는 근거지가 필요한 정착민과 살기 위해 움직이고 머무는 곳을 근거이자 고향으로 여기는 유목민의 마인드 차이에서 비롯한다.

-69쪽

칭기스칸이 승리할 수 있었던 또 하나 이유는 정보 마인드에 있다. 유목민들에게 정보는 생존을 위한 필수 과목이었다. 초원지대엔 험준한 산이 없다. 주로 호수와 강, 들판이라 천지사방이 평평하다. 이런 자연조건에선 언제 적이 들이칠지, 내가 어디에 숨어야 할이지 항상 경계하게 마련이다. 또 주변 사람들과는 많은 이야기와 의견을 나누게 된다.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지평선 너머 초원에는 적이 있을까 동지가 있을까. 가축들을 배불리 먹일 초지가 어디에 있을까. 바깥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유목민들은 끊임 없이 뭔가를 알아내야 했다.
그래서 그들의 인사말은 "안녕하십니까"가 아니라 "당신이 온 쪽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였다. 주변 사람과 정보를 교환하고, 정보를 많이 수집하는 것이 생존과 직결됐기 때문이다. 몽골인 시력은 평균 4.0 이상이라고들 한다. 몇 십 리 밖에서도 먹을 것 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얘기도 있다.
-73쪽

유목민에게 외지인은 정보를 가져다주는 사람이다. 그래서 외지인을 환대한다. 반면 정착민들은 자기 몫을 지키려고 외지인을 배척한다.
전쟁이 일어나면 정보는 더 큰 위력을 발휘한다. 칭기스칸의 주요 정보원들은 중앙아시아와 중원을 오가며 무역을 하는 대상(隊商)단이었다. 대상들은 실크로드를 대동맥으로 삼아 곳곳을 떠돌아 다니는 피 같은 존재였다. 고원의 칭기스칸은 주로 아라비아 상인들인 이들을 통해 바깥 세상에 대한 정보를 듣고 참고했다.
정보화 마인드로 무장한 칭기스칸 군대는 첩보전과 심리전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어떤 나라를 공격하기 앞서 그 나라에 고나한 정보부터 속속들이 수집 파악했다. 공격해 들어갈 때엔 5천 명이 나서도 5만 명이 공격하는 것처럼 루머를 퍼뜨렸다. 적군은 싸우기도 전에 사실상 무릎을 꿇었다.
-74쪽

칭기스칸 군대의 특징은 점령지의 종교나 문화 부문에 일체 관여하지 않는 데서도 찾을 수 있다. 그들은 하층을 그대로 둔 채, 상층부만 부수는 데 주력했다. 군대 조직도 천호제라는 이름으로 일종의 피라미드 형태를 갖췄다. 그래서 칭기스칸이 손을 한 번 들면 그의 군대는 10만이 됐다가, 한 번 더 들면 20만, 30만, 40만으로 얼마든지 변신했다. 군대 숫자가 고무줄처럼 신축적일 수 있는 비결은 어떤 병사를 충원하더라도 충분히 전술기량을 펼치는 호환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A가 하는 일을 B가 할 수 있고, 활을 쏘다가도 칼을 들고 진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착문명 군대는 활 쏘는 군사, 창 든 군사, 말 타고 진격하는 군사 식으로 나뉘어 있었다. 반면 칭기스칸 군대는 모든 군사가 기본 전술기능을 종합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더욱 놀랍게도 칭기스칸 군대의 호환성은 전쟁에서 이긴 뒤 포로들을 흡수 편입시키는 데까지 나아갔다. 칭기스칸은 적이든 아니든 쓸모있는 모든 사람을 확보하려 했다. 전쟁에서 승리할 때마다 기술자들을 따로 골라내고 부족한 군사들을 현지에서 충원하는 방식으로 항상 인력 풀을 운용하는 놀라운 지혜를 지니고 있었다.
-78쪽

칭기스칸 군대는 정규전, 게릴라전을 구분하지 않았다. 바둑에 비유하자면 반상의 돌들이 저마다 최선의 수를 이어낸 끝에야 승리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바둑은 가장 유목-이동 문명적인 게임이다. 장기나 서양 체스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이를테면 장기의 말들은 하나하나가 움직이는 방식이 ‘이미 정해져’ 있다. 포, 상, 마, 차, 졸의 기성 역할이나 정체성은 내내 바뀌지 않는다. 심지어 각기 말들이 갈 수 있는 길과 갈 수 없는 길까지 미리 정해져 있다. 농경-정착 문명의 신분 위계 질서를 닮았다. 바둑에선 모든 돌이 똑같고 평등하다. 더욱 의미심장하게도 그 평등한 돌들은 혼자만으로 생존할 수가 없고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 서로 연결되면서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상생으로 전체가 사는 방식이다. 기존 돌들이 형성하는 어떤 관계 옆에 새 돌이 놓이면서 다시 전혀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기도 한다. 게다가 놓이는 위치에 따라 그 역할도 시시각각 달라진다. 전형적인 유목-이동성이다.
-80쪽

바둑식 사고를 하는 몽골 군대는 체스식 사고를 하는 유럽 군대를 격파했다. 유럽군은 체스를 두듯 진을 짜고 대항했지만 몽골 기마병들은 정렬된 진지 없이 변화무쌍한 공격으로 상대를 유린했다.

카르피니 출신 수도사가 쓴 <카르피니의 몽골여행기>. 이 수도사는 칭기스칸 제국의 3대 칸인 구육칸의 즉위식을 참관하러 서양에서 파견됐었다.(카르피니는 원래 사람 이름이 아니라 지역 명이다.)
-81쪽

칭기스칸 군대가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절대 죽이지 않는 적진 사람들은 기술자들. 신기술을 지닌 자만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이는 테크노 헤게모니, 일종의 기술 패권주의다. 전쟁은 목청으로 하는 게 아니라 기술로 한다.
유목민들의 전투 기술 개발이 칭기스칸 시절에만 있었던 건 물론 아니다. 충격적 신무기를 대대적으로 세상에 선보인 것은 로마를 괴롭힌 대선배 훈족이었다. 훈족이 유럽에 선보인 무기는 대략 이런 것들이었다.
1. 안장(버팀목이 없는 둔중한 로마 기병들은 전투 중에 균형을 잃고 낙마하기 일쑤)
2. 등자(등자가 있으면 그걸로 발을 디디고 무게 중심이 아래로 내려가 고삐를 쥘 필요가 없다. 마상 쇼가 가능한 것도 등자 덕분. 앞, 뒤는 물론 옆으로, 밑으로도 탈 수 있다. 그러나 등자 없이 말을 탄 사람은 중심을 잡느라 고삐를 단단히 쥐어야 한다.)
3. 새로운 활
4. 삼각 철 화살(손잡이에 특별한 구멍이 뚫려 있어 날아가는 동안 공중에서 여러 소리를 낸다. 이 소름 끼치는 소리는 전투 중 유럽 병사들을 공황상태에 빠뜨리곤 했다. 파괴력 또한 치명적. 60미터 떨어진 목표물도 명중시킬만큼 고성능-86쪽

칭기스칸 군대의 칼은 직선형이 아니라 반달형. 반듯한 직선형 칼은 사람을 찌르거나 베는 수밖에 없으나 반달칼은 말이 달리는 속도에 얹어 살짝만 그어도 엄청난 파괴력을 낸다. 아랍인의 발명품을 칭기스칸 군대가 실전에 대량으로 도입해 효과를 거둔 것.
-86쪽

칭기스칸은 자기를 부를 때 칭기스칸이라 하지 말고 이름, 즉 테무친이라고 부르라 했다. 그는 사람들을 차별하는 것을 싫어했다. 리더와 구성원 관계에서도 공평을 추구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도 그것을 지켰다. 심지어 정복한 민족과 정복당한 민족 간에도 차별을 두지 않았다. 페르시아 지방에서 빚을 많이 진 몽골병사가 아랍인의 노예 생활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정복지에서 승자가 노예가 된다는 것은 지금 우리로선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칭기스칸은 자신부터 검소하게 살았다. 부하들과 똑같이 입고 먹었으며 자기 것을 부하들과 공유했다.
칭기스칸이 추진한 여러 개혁들은 당시 몽골 기득권 세력에겐 청천벽력과 같은 것이었다. 당연히 반발이 거셌다. 하지만 칭기스칸은 오갈 데 없는 이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겠다고 약속했다. 그들 또한 칭기스칸의 미래 청사진을 지지했다. 그래서 개혁은 성공할 수 있었다.
-91쪽

칭기스칸은 인치가 아니라 법치의 원리를 세운다. 제국 헌법이라 할 대자사크를 만든다. 몽골 최고(最古) 성문법전이다. 대자사크는 칭기스칸 제국이 출범한 1206년 코릴타의 승인을 거쳐 성립됐다. 대자사크의 특징은 최소로 정해 놓고 최대로 지켜야 하는 데 있다. 규칙은 최소화하되 어길 경우 최대한 엄하게 처벌하도록 해 놓았다. 칭기스칸은 단 36개 조항에 불과한 법으로 대제국을 무리없이 통치할 수 있었다. 인간사의 세세한 항목까지를 모조리 조문화하고도 지켜지는 것은 최소한에 그치는 우리 법 현실과 비교된다.

-95쪽

대자사크 제1조. 간통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
칭기스칸은 공동체의 내적 결속을 이완시키는 행위가 가장 큰 범죄라고 생각했다. 유목민은 고립되면 생존을 보장 받을 수 없다. 그러니 신뢰의 공동체가 모든 것의 선행조건이다. 간통은 융합집단의 내적 연대를 파괴한다. 부부로 이뤄진 가족 가치가 무너지면 그 사회가 무너진다는 걸 칭기스칸은 알았다. 그만큼 남녀 간의 신의, 인간관계를 중시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칭기스칸이 적장의 자식을 잉태한 아내를 아무 조건 없이 받아 들였다는 사실. 아내의 잉태는 간통이 아니라 강간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 약속의 파기는 중형에 처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저질러진 실수나 잘못은 간단하게 용서된다. 유목민 관습인 형사취수도 당시 열악한 환경에서 남자를 잃은 여인네들을 살리는 방법이었던 것.
-96쪽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 칭기스칸은 대자사크 외에도 수많은 제도 개혁에 나선다. 그 중 하나가 개인의 능력을 최대화시킬 수 있는 사회 행정조직 천호제이다. 천호제를 통해 몽골인들은 노예도 능력이 있으면 리더가 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몽골 사회는 씨족 사회로 편제된 봉건사회였다. 김씨는 김씨끼리, 이씨는 이씨끼리 살았다. 칭기스칸은 씨족사회를 10진법으로 와해했다. 씨족과 관계 없이 가까운 10가구가 모여 살고, 다시 100가구, 1,000가구, 1만 가구 단위로 모여 살게 했다. 지연과 혈연, 학연은 무시됐다. 각 단위 조직의 리더, 즉 십호장, 백호장, 천호장은 조직원들 스스로 뽑도록 했다. 그리고 리더의 능력이 부족하면 조직원들 스스로 결정해 교체할 수 있게 했다.
-109쪽

천호제를 기반으로 조직한 군대는 그 자체사 사회이자 국가였다. 군사조직 개편을 넘어 국민을 하나로 묶는 정치, 군사, 사회의 종합 통치 시스템이자 총력 동원체제였다. 기득권 세력이던 씨족장과 부족장들 사이에선 원성이 자자했다. 반면 일반 백성과 병사들은 대환영이었다.
-110쪽

칭기스칸 제국의 성격 중 또 하나의 핵심은 합의제 사회였다는 것.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칸의 천막(겔)이 거대한 도시와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천막 한 가운데에 칸이 앉았고, 옆으로 참모와 아내들까지 함께 자리해 손님을 맞았다고 한다. 이는 칭기스칸에게 ‘독대(獨對)’가 없었음을 말한다. 독대가 없는 사회는 야합이 없다. 칭기스칸은 모든 문제를 독단 아닌 합의에 따라 처리했고, 이를 제도화했다. 특히 전쟁이나 후계구도 같은 중대 정책은 유력 지도자 회이에서 통과된 뒤에야 집행했다. 이 회의가 코릴타다. 신라 화백제, 고구려 합좌제, 백제 정사암과 비슷하고, 지금으로 치면 제국의회라 할 수 있다.
-111쪽

코릴타에는 국가 원로와 칭기스칸 가문인 이른바 ‘황금씨족’ 그리고 천호장들이 구성원으로 참여한다. 이들은 몇 달 동안씩 모여 회의를 했다. 코릴타의 결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칭기스칸이 사망한 뒤 곧바로 증명된다. 칭기스칸은 죽기 직전 셋째 아들 어거데이를 후계자로 지명한다. 그는 아들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남기고 있다.
‘차가타이(차남)는 군대를 아끼지만 교만하고 호전적이다. 톨로이(4남)는 훌륭한 전사지만 인색하고 잔인하다. 어거데이(3남)는 어릴 때부터 남에게 잘 베풀고 도량이 넓다. 누구든 부귀를 찾으려면 어거데이에게 가라.’
칭기스칸은 아들들의 시대가 전쟁 아닌 제국 경영의 시대가 되리라 예상했다. 그런 시대에선 지도자가 덕을 갖추는 게 중요하다고 봤다. 그래서 어거데이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죽었다. 하지만 어거데이가 칸에 즉위하기까지는 2년 반이나 걸렸다. 코릴타에서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거데이칸이 사망한 뒤 제국의 3대 칸인 구육칸은 무려 5년에 걸친 코릴타를 거쳐 칸이 된다. 이 또한 코릴타 구성원 전원의 합의와 동의가 이뤄지지 않아서였다. -112쪽

여기서 또 하나 놀라운 사실! 칸이 없는 상황이 2년, 5년씩 이어지는데도 제국은 분열되기는커녕 더 발전했다. 모든 제도도 정상적으로 운영됐다. 끊임 없이 전쟁을 치르는 국가가 최고 지도자를 두지 않아 권력 공백이 지속됐다니. 몽골 유목제국의 시스템이 얼마나 단단한지 알 수 있다. 이는 몽골제국이 인치국가가 아니라 법치국가, 시스템국가였음을 뜻한다.

-113쪽

칭기스칸 제국에는 정보와 기동성을 상징하는 역참제가 있었다. 당시 몽골 유목민들은 말(馬)을 통한 정보 전달시스템을 구축한다. ‘800년 전 인터넷’이라 할 역참제다. 역참제는 지금으로 치면 정보 인프라이자, 물류 시스템이며, 군사 고속도로라 할 수 있다. 역참의 형태는 촘촘한 거미줄 모양 그물을 연상하면 된다. 수도를 중심으로 각 지방으로 뻗어나가는 주요 도로에 40~50km마다 역참이 설치됐다. 일종의 말 정거장이다. 그리고 그 사이 5km마다에 칸의 소식을 전달하는 파발이 살았다. 파발들은 방울을 울리며 전속력으로 질주했다. 5km만 내달려, 만반의 채비를 갖추고 기다리는 다른 파발에세 서장을 건넸다. 이리하면 한 달 걸릴 지방의 보고라도 1주일이면 전달된다.
역참망을 달린 것은 파발들만이 아니었다. 군대나 외교관도 역참을 따라 이동했다. 물자까지 달리는 수송로이기도 했다.
-114쪽

역참제는 프로토콜 방식, 이른바 릴레이 전달 방식이다. 정보를 말에 싣고 달리는 전달자는, 최종 전달지가 1만 km 떨어져 있다 해도, 다음 역까지만 전달하면 그만이다. 그래서 각 전달자는 전속력으로 달릴 수 있다. 수 천 개 역이 점점이 흩어져 있어서 가장 빠른 길을 찾아 전달 경로를 바꿀 수도 있다. 최종 수신자가 이동 중일 땐 그 전달 경로 역시 이동한다.
-115쪽

제국 성립 후 170여 년, 칭기스칸 사후 150여 년 만에 몽골제국은 몰락했다. 그러나 일반국가의 흥망성쇠를 논할 때 쓰는 말뜻 그대로의 멸망은 아니었다. 칭기스칸의 나라는 멸망한 적이 없다. 요, 금, 남송과 달리 원제국이 쇠퇴한 뒤에도 왕조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다. 굳이 말한다면 그들은 점령지 중원에서 물러나 카라코롬으로 철수했을 뿐이다. 그들이 출발했던 곳, 양치고 말 기르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지금까지도 줄곧 국가를 유지하고 있다.
몽골제국은 많은 후계 국가들도 남겼다. 대표적인 것이 무굴제국이다. 무굴은 힌두어로 몽골을 뜻한다. 타지마할 궁전도 몽골인들이 세웠다. 무굴제국은 1562년 유목민인 티무르의 손자 바베르가 인도에 세운 나라로, 1858년까지 계속됐다. 오스만 투르크제국 또한 몽골의 제국 성격을 이어 받은 후계국가로 꼽힌다. 킵차크칸국의 한 갈래인 크림칸국은 1783년까지 계속됐다.
-118쪽

몽골제국이 쇠퇴한 결정적 이유 가운데 하나는 소모적인 후계자 경쟁이었다. 유목 기마민족은 예외 없이 여러 부족의 연맹체였다. 권력 중심부가 흔들리면 해체 속도도 빠를 수밖에 없었다. 원나라를 비롯한 몽골 칸국들 역시 계승 분쟁에 휘말려 들었고, 이는 결국 제국을 분열시키는 치명적 결과를 낳았다.
테크노 헤게모니의 상실도 한 이유가 됐다. 그 옛날 총은 칼을 능가하지 못했다. 그것은 불편하고 시끄럽고 무거운 무기였다. 머스킷이 그랬다. 머스킷이란 대체로 구식 소총을 가리킨다. 지금처럼 탄피와 탄두가 결합된 실탄을 총구 후방으로 장전하는 게 아니라, 총구를 통해 화약 가루와 납구슬 탄환을 쑤셔 넣고, 총구 후방의 점화 화약접시에 불을 붙여 총탄을 발사한다.
-119쪽

머스킷의 기원은 대포다. 인간은 대포를 먼저 발명했고, 이를 좀 더 줄여 손에 들고 쏠 수 있게 만든 게 총이다. 쇠로 만든 통에 화약과 동그란 탄환을 밀어 넣고 불을 붙여 발사하는 대포 방식을 그대로 총에 적용했다. 모양도 총이라기보다 휴대용 축소판 대포에 가까웠다. 그래서 핸드 캐넌, 즉 손 대포라고도 불렸다. 머스킷은 이 핸드 캐넌이 진화하고 진화한 끝에 16세기쯤 등장했다. 초기 형태는 불을 붙여 심지를 화약접시에 닿게 해 발사하는 화승총이었다. 화약과 총알을 총구 쪽으로부터 장전한 뒤 심지에 불을 붙여야 한다. 방아쇠를 당기면 불 붙은 심지가 총구 후방의 화약 접시로 내려가 닿으면서 점화용 화약을 터뜨린다. 그리고 순식간에 총열 후방 안쪽에 쑤셔 뒀던 추진용 화약이 터지면서 탄환이 발사된다.
그러나 화승총은 현대식 총과 비교해 보면 사용하기가 너무 불편했고 성능도 보잘 것 없었다. 150cm나 되는 긴 총신 끝에 화약과 탄환을 넣고 불을 붙여 발사하는 복잡한 사용법 탓에 2분에 한 발 쏘기가 고작. 그나마 비라도 오면 심지가 물에 젖어 제대로 발사할 수 없었다.
-120쪽

알렉상드르 뒤마 소설 ‘삼총사’. 원제 ‘Three Musketeers'는 세 명의 머스킷 소총수라는 뜻. 그러나 소설 어디서도 삼총사들이 머스킷을 들고 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영화 삼총사에서도 달타냥이 임금을 호위하는 정식 총사로 임명되는 마지막 대목에야 머스킷 총이 등장할 정도. 이는 당시 총이 실용 무기라기보다는 공을 세운 사람에게 하사하는 일종의 상징물이었음을 보여준다.
-120쪽

초기의 총이 이처럼 우스꽝스럽긴 했어도, 총의 발명이야말로 몽골제국의 퇴각을 알리는 신호탄이 됐다. 머스킷이 출현하면서 유목 군대는 스피드를 놓쳐버렸다. 유럽인들은 이 신무기 덕분에 몽골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기동성의 근원인 말이 신무기의 총알에 맞아 고꾸라진 탓이 아니다. 말들은 처음 듣는 총소리에 놀라 겁을 집어먹고는 병사들 지시에 따르지 않고 도망치거나 대오를 흐트러뜨렸다.

-121쪽

정체성 상실도 몽골제국 멸망에 큰 원인으로 꼽힌다. 칭기스칸은 이렇게 경고했다. ‘내 자손들이 비단옷을 입고 벽돌집에 사는 날 내 제국이 망할 것이다.’
그러나 몽골제국의 후대 지도자들은 끝내 이 충고를 되새기지 못했다. 소수인 몽골 사람들은 다수의 피정복민을 지배하기 위해 정착 지역에 생계 근거를 뒀다. 그 결과 그들의 존재 기반인 수렵과 유목성을 스스로 거세하고 현지에 동화돼 버렸다. 그것은 결국 정체성 상실로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덜 중요한 이유는 조정 재정의 고갈이다. 몽골제국은 창업 초기부터 창업 공신들에게 엄청난 지분을 할당했다. 그러고도 예속민이나 대상(隊商)들에게 무한한 재산 축적을 허용하다 보니 막상 대칸은 대주주로서 지분을 잃어버렸다. 원나라 마지막 칸인 순제 토곤 테무르칸이 대도를 버리고 카라코롬으로 철수할 때 황실의 지분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막강한 부의 근원이었던 운남의 은광 채굴권은 주원장을 비롯한 한족 반란군 손아귀로 떨어져 나갔다. 소금 전매권을 비롯해 황실이 쥐고 있던 권한마저 분산되기 시작했다. 지방 각 군-현의 세금은 제후들이 차지해 대칸의 몫까지 오지 않았다.
-122쪽

고인 물은 썩는다. 그러나 흐르는 물은 쌓이지 않는다. 로마제국이나 중국 왕조가 무너진 이유를 설명하려면 ‘고인 물은 썩는다’는 격언이 적합할지 모르나 유목국가의 멸망에는 다른 설명이 필요하다. 그들은 끊임없이 이동해야 했기에 ‘쌓을’ 여유가 없었다. 흐르는 물이 쌓이지 않듯. 축적이 되지 않으면 세월이 흘러도 남는 것이 없다. 군대도 각 제후와 토호들에게 분산돼 칸의 명령이 먹혀들지 않았다. 설령 군대가 있다 해도 군량과 전비를 댈 수 없었으니 결론은 번했다. 고향 카라코롬으로 돌아가야 했다.
-123쪽

1995년, 미국 일간지 워싱턴포스트가 기획 기사를 냈다.
-지난 1,000년(서기 1001년에서 2000년까지) 역사에서 가장 중요했던 인물은 누구인가. 1,000년 전 세계 인구는 3억 명쯤이었다. 문명은 극소수 지역에만 존재했다. 당시 인간은 자신들이 어디에 사는 지도 몰랐다. 오늘의 세계를 보자. 조그맣다. 지난 1,000년 동안 지구가 축쇠된 것이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이것이 우리가 지난 1,000년의 인물을 찾는 배경이다. 이 세계를 작게 만든, 인간과 기술이 지표면을 가로질러 이동하도록 만든, 그래서 전 지구에 인간이 지배력을 펼칠 수 있도록 만든 누군가를 찾는 작업이다.

이 개념에 꼭 들어맞는 인물이 있다. 크리스터퍼 컬럼버스는 유럽과 아메리카 두 대륙을 연결시켰다. 컬럼버스는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심각하고도 파괴적인 영향을 가져다줬다. 각종 질병과 낯선 동식물이 대서양을 건너왔고 야만적인 노예 무역시 시작됐다. 컬럼버스식 모험은 유럽이 세계를 식민지화할 수 있는 문을 열었다.
-124쪽

컬럼버스는 단지 다른 사람들이 동쪽으로 떠날 때 서쪽으로 떠났을 뿐이다. 왜 그는 대양을 가로지르면 중(원나라)에 도착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지구 크기를 잘못 생각한 것 말고도 그는 이미 쿠빌라이칸의 궁전에 관해 엄청나게 묘사해 놓은 2세기 전 마르코 폴로 여행기를 읽었던 것이다. 만약 이슬람이 동서양 사이에 철의 장막을 치고 있었다면 마르코 폴로는 그런 여행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나침반이나 화약, 인쇄술 같은 중국 기술도 유럽에 들어올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1,000년 전 지구를 지배하는 두 문명이 이슬람과 중국 문명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기독교 문명의 유럽은 고인 물과 같았다. 봉건 장원, 주교령, 귀족 영지 따위가 모여 있는 곳일 뿐이었다. 1,000년 전에는 아무도 유럽 기독교도들이 이 지구를 식민화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 모든 것을 뒤흔든 게 완전히 새로운 제국의 출현이었다. 그것은 몽골제국, 즉 칭기스칸의 제국이었다.
-126쪽

칭기스칸은 최초의 지구촌 시대를 만들었다.
1. 중세 자유 무역지대 구축-대몽골제국은 한반도와 중국, 아랍, 유럽, 러시아, 중앙아시아를 하나의 정치-경제-문화권으로 묶는 글로벌 체제였다. 워싱턴 포스트는 이렇게 말한다.
"칭기스칸의 제국은 13세기 말까지 태평양에서 동유럽까지, 시베리아에서 페르시아만까지 팽창을 거듭했다. 그와 그의 후손들은 유라시아 대륙을 아우르는 광대한 자유 무역지대를 만들어냈고, 동서양 문명의 연결을 강화했다. 이는 중세의 GATT 체제라 할 수 있다. 그는 끝없는 범위의 잠재적 자유 무역지대를 마들어냈다. 외교관에게, 용병에게, 상인에게 그곳은 처녀지였다.
2. 단일지폐권 창출
칭기스칸이 정복한 지역과 나라는 인종도 다르고 종교도 다르며 언어, 문화, 생활 모든 것이 각양각색이었다. 이 피정복 국가들을 하나로 통합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칭기스칸 제국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단일 지폐를 유통시켰다. 유럽보다 무려 400년이나 앞서 만든 지폐였다. 원나라 지폐는 오늘의 달러처럼 세계의 기축통화였다.
-128쪽

3. 다민족 다종교 국가의 건설
이질적인 사람이나 사회를 수용하면서 그 어떤 차별도 하지 않는 정책을 펼침으로써 칭기스칸은 광활한 지역에 걸친 다민족, 다종교, 다문화의 대제국을 경영할 수 있었다. 칭기스칸은 자기 생명을 위험에 빠뜨린 적의 장수를 받아들여 동지로 삼았다. 전사한 적장의 딸을 며느리로 맞았고, 적장 아들을 양자로 삼아 자신의 보호 아래 두기도 했다. 심지어는 적에게 빼앗겨 적장의 아들을 임신한 자신의 아내와 그 아들(장남 조치)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다. 칭기스칸과 몽골인들은 대체로 샤머니즘을 믿었으나 칭기스칸의 며느리이자 원나라 창업자 쿠빌라이칸의 어머니인 소르카크타니는 기독교도였다.
-130쪽

그들은 항상 동물과 함께 살아오면서도 양을 더 키우거나 종을 더 번식시키거나 하지 않는다. 사자와 호랑이를 교배해 탄생시킨 라이거처럼 새로운 종은 정착문명적 사고에서나 나올 수 있다. 동물들 속에서 동물과 몇 천년을 살아가야 하는 유목민에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결국 종자 변이와 생태계 파괴라는 참혹한 오늘의 현실이 유목민의 현명함을 증명하고 있다.
유목민의 생존 방식은 동물을 기르는 게 아니라, 동물들이 이동하는 경로를 따라가는 것이다. 풀을 먹는 동물이 움직이면 그 동물을 쫓아가면서 사는 방식, 즉 생태계 자체를 ‘산업화’해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다.
-136쪽

‘잡 노마드(job nomad)'는 직업을 따라 유랑하는 유목민이란 뜻의 신조어로 과거의 직업 세계에 등을 돌린 사람들을 일컫는다. 그들은 평생 한 직장, 한 지역 그리고 한 가지 업종에 매여 살지 않는다. 잡 노마드는 승진 경쟁에 뛰어들지도 않고, 회사를 위해 목숨 바쳐 일하지도 않는다.

필자가 펴낸 ‘밀레니엄맨(1998)’에서 ‘칭기스칸의 편지’라는 대목
한국의 젊은이들아!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고향에서 쫓겨났다. 가난하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고, 내가 살던 땅에서는 시든 나무마다 비린내만 났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탓하지 말라. 내가 세계를 정복하는 데 동원한 몽골 병사는 적들의 100분의 1, 200분의 1에 불과했다. 나는 배운 게 없어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지만, 남의 말에 항상 귀를 기울였다. 그런 내 귀는 나를 현명하게 가르쳤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안에 있다. 나 자신을 극복하자 나는 칭기스칸이 됐다.
-139쪽

이태준 선생은 몽골의 마지막 칸이었던 잡잔단바보그드칸의 주치의로 일하며 독립운동을 벌이다 처형됐다. 1883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난 선생은 세브란스 의학교에 들어갔다. 재학 중 고문 후유증으로 세브란스에 입원한 도산 안창호 선생을 치료하면서 조국의 비참한 현실을 깨닫는다. 1911년 졸업한 선생은 이듬해 중국으로 망명, 남경의 ‘기독회 의원’이라는 병원에서 의술을 펼친다. 그는 4촌 처남 김규식 선생의 권유로 울란바토르로 건너가 항일단체를 도우며 ‘동의의국’이라는 병원을 열어 몽골인들의 질병을 치료한다. 김규식 선생은 몽골에 비밀 장교 양성소를 세울 계획이었다. 그는 몽골인들에게 ‘신통한 의술을 지닌 까레이 의사(고려인 의사)’로 알려지면서 보그드 칸의 주치의가 됐다. 1919년에는 몽골 최고 훈장 ‘에르테닌오치르’를 받았다. 선생은 의열단에 가입해 독립운동 자금을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하는가 하면 항일운동을 위한 무기를 만들려고 헝가리 출신 폭탄제조 기술자와 접촉하기도 했다. 그는 일본과 협력관계를 유지해온 러시아 백군에 붙잡혀 38세(1921년)에 처형당했다.
-1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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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헨 2008-09-08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 얇지만 굉장히 파워 있어요.^^신선했구요.기억나네요.^^전 사무실로 누군가 보내줘서 봤었었어요.

마노아 2008-09-08 23:30   좋아요 0 | URL
경제경영 책에서 뜻밖에 좋은 정보들을 얻었어요. 마무리는 좀 맘에 안 들지만 전반적으로 참 유익했어요^^
 

아, 제가 오늘... 아니지 어제... 무려 석달이나 지난 지인의 생일 축하를 해주고 왔는데,

지금 다이어리를 보고 화들짝! 어제, 두분 생일이었군요(>_<)

미안해요! 며칠 전까지는 기억하고 있었다구요!(이런 때늦은 변명을!)

음력 8월 7일 맞지요? 제가 7수랑 안 친한가봐요. 어제 축하해 주고 온 지인은 음력 5월 7일 생일이었거든요^^;;;;;

앙, 저의 무심함을 용서하시어요!

집에라도 일찍 들어왔다면 12시 전에라도 글을 썼을 텐데 컴퓨터에 앉은 시간이 지금이네요. 크흑!

늦은 밤 어디서 케이크를 구해오나요! 급조한 축전입니다. 조오금 늦었지만, 두분 생일 축하해요.

가을의 문턱에서 낭만과 행운이 깃들기를 소망할게요!

(사진 펑!)

켁! 알고 보니 혜경님 생일은 목요일이었어요. 앙, 죄송해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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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8-09-07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음력 8월 7일! 저희 엄마와 같은 날짜에요 ^_^

마노아 2008-09-07 01:15   좋아요 0 | URL
실은 제 친구도 이날이 생일인데 그 친구에게도 전화 못한....ㅜ.ㅜ
웬디님 맛난 저녁 먹었겠군요! 어무이 생신 듬뿍 축하해 드린 거죠?

순오기 2008-09-07 0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의 지인들은 모두 행운의 7이 들어가는 생일인가요?ㅎㅎ 나도 17이라고 한자리 낄려고요.^^
남 생일 챙기느라 본인 생일 까먹는 거 아닌가~~ 승연님, 혜경님 생일도 축하합니다!!^^

2008-09-07 04: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8-09-07 19:53   좋아요 0 | URL
오기 언니 고맙습니다.^^

2008-09-07 2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08-09-07 0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분 생일이시군요. 축하드립니다.
두분 모두 알라딘 제 또래 친구들이신데 (^^) 마노아님 덕분에 인사드릴수 있게 되어 다행이네요.
풍성한 계절에 태어나신 혜경님, 승연님, 앞으로도 계속 풍성한 삶을 이루어나가시옵소서~
(그리고 마노아님, 위의 사진 정말 멋진걸요!)

프레이야 2008-09-07 19:52   좋아요 0 | URL
님, 축복의 말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정말 위의 사진 속 마노아님 사랑스러워요.^^

마노아 2008-09-07 21:18   좋아요 0 | URL
나인님,혜경님, 사진 멋진가요? 아유 두분 좋은 말씀만 해주셨네요^^;;;

하늘바람 2008-09-07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축하드려요 참으로 마노아님꼐 묻어가는 하늘바람입니다

프레이야 2008-09-07 19:53   좋아요 0 | URL
하늘바람님 고마워요^^

마노아 2008-09-07 21:18   좋아요 0 | URL
근데 하늘바람님, 제가 날짜 잘못 알았던 거 있죠. 흑흑...ㅠ.ㅠ

프레이야 2008-09-07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이 페이퍼를 못 볼 뻔했어요. 제가 요새 알라딘에 영 무심하고 성의 없죠? ^^
님 사진 속 얼굴이 너무 예뻐 가슴이 콩콩 뛰어요. 너무나 고맙구요.
전 승연씨보다 이틀 앞이에요. 서로 문자와 전화로 축하인사 주고 받고 했지요.
올해엔 조용히 지나고 싶은가 봐요. 둘다요.
어쩜 다이어리에 적어두고 이렇게 챙겨주시다니요. 정말 감사해요^^
그리고 행복합니다. 와락~

마노아 2008-09-07 21:21   좋아요 0 | URL
혜경님! 지금 완전 얼굴 빨개졌어요. 공개적으로 큰소리 탕탕 쳤는데 알고 보니 날짜도 막 틀리고..ㅠ.ㅠ
작년에 두 분 생일 날짜가 같았던 걸로 기억해서 음력생일로 다이어리에 표시해 두었는데 작년부터 잘못 알고 있었나봐요. 세상에 일년씩이나....ㅜ.ㅜ
부러 조용히 지나고 싶었던 날에 제가 호들갑 떤 것은 아닌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혜경님 품 속에 와락 안겨봅니다!
올해는 얼굴도 보았던 터라 상상같지 않고 진짜 가까이 있는 것 같아요.
내년에는 날짜 꼭 제대로 맞출게요. 앙, 바보 마노아에요(>_<)

세실 2008-09-07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사진 분위기 있어요.
저두 승연님, 혜경님 생일 축하드립니다~~~~

마노아 2008-09-08 10:53   좋아요 0 | URL
촛불 때문에 은은하게 보여서 그런가봐요^^

뽀송이 2008-09-08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 승연님^^ 늦었지만 두 분 생일 축하드려요.^^
저도 요즘 알라딘에 들어오는 날이 뜸해서... 이 페퍼 보게 되어 다행이예요.^^
마노아님~~ 이 사진 참 이뻐요.^^

마노아 2008-09-08 10:54   좋아요 0 | URL
소싯적 사진이랍니다^^ㅎㅎㅎ
요새는 많은 분들이 바쁘셔서 알라딘 서재가 옛날 같지 않아요^^;;
 

먼 여행길을 걸어

피곤에 지친 나는 한 잔의 차를 갈망하여

끝없이 광활한 고비의 인가를

보석 찾듯 살피며 갔다.

한참을 헤매다 어느 집에 이르니

게르 문이 자물쇠로 채워져 있지 않았다.

주인 목자는

먼 초지에 가축 떼를 방목하러 간 듯

오 한의 게르 안에는 가구며 그릇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다.

원하는 어떤 이를 위해 준비해 놓은 뜨거운 차

갈증으로 찾아온 어느 누군가가 차를 마시고 갔다면

집 주인이 기뻐하는 고대 풍습을 나는 안다.

태양과 바람이 스며든 육포로

체력을 보충하고 떠난 이가 있다면

이생에서 해야 할 일을 이루었다 자랑하는

소중한 풍습을 나는 안다.

진한 향기의 차로 갈증을 풀고

의심 없는 믿음의 깊이에서 나는

마음의 갈증을 풀었다.

펠트 게르 문은 자물쇠가 채워지지 않은 채

믿음을 잃지 않은 주인이

가축 떼를 이끌고 초지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우리의 광활한 고향을 찾는다면 당신은 잘 안다, 어려움이 없다는 것을!

‘사구가 펼쳐진 고비, 몽골인의 마음에는 인색의 자물쇠가 없다.’



"몽골 현대 시선집"

-"몽골인의 생활과 풍속" 중에서, 이 안 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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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8-09-05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색의 자물쇠가 없다'
이 표현 참 마음에 든다.

메르헨 2008-09-05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정말 그러네요. 인색의 자물쇠가 없다...그 말을 제 맘에 담아두고 싶네요.^^

마노아 2008-09-05 20:48   좋아요 0 | URL
인색의 자물쇠를 채우지 않고 살면 우리네 삶이 보다 풍요로워질까요? 더불어 넉넉해지는 우리가 되었음 해요^^

순오기 2008-09-05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심없는 믿음의 깊이에서 나는 마음의 갈증을 풀었다.'
그리고
'인색의 자물쇠가 없다'
참 좋아요~ 비록 이렇게 살지 못하고 있을지라도...

마노아 2008-09-06 10:27   좋아요 0 | URL
싯귀가 참 좋았어요. 비록 저 시가 실린 '몽골인의 생활과 풍속'은 몹시 지루했지만요^^;;;
굉장히 아득한 경지지만 그래서 더 귀한 것 같아요.

무스탕 2008-09-06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넓은 땅에 사는 사람들이라서 그럴까요?
마음이 참 넉넉해요..

마노아 2008-09-06 10:52   좋아요 0 | URL
탁 트인 느낌이 나요. 저 사람들 시력도 엄청 좋은데 저 멀리까지 내다보는 사람들인지라 마음도 더 클까요..^^
 

요새 몽골에 대한 공부를 하고 있어요. 책도 찾아보고 다큐도 찾아보고 있었죠. 아무래도 최근 것을 먼저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한몽 합작 '하늘의 땅 몽골'1부부터 4부까지를 먼저 보았습니다. 국내엔 개봉하지 않은 영화 '몽골'(2007)도 비슷한 때에 보았는데 다큐 쪽이 훨씬 재밌더라구요^^

 

몽골 공부하면서 느낀 건데 우리나라랑 유사한 것들이 참 많더라구요. 몹시 신기했어요. 사실 생김새도 엄청 닮았잖아요. 그래서 한민족의 '시원'이란 얘기가 곧잘 나오나봐요.

 

다큐는 1부 초원의 전설 토올,

          2부 자연과 인간의 매개자, 버

          3부 아름다운 동행 야탁과 가야금

          4부 바다흐 가족의 외출

 

이렇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1부는 좀 지루한 편이었는데 4부로 갈수록 점점 더 재밌어졌어요. 






토올은 꼭 우리나라 판소리 하는 사람과 비슷했는데, 영웅서사가라고 하면 될까요? 전통 악기를 연주하면서 문서 없이 구전되어 온 설화/신화 등의 이야기를 연주하고 또 노래하는 거예요. 그것을 하는 사람들을 토올치라고 부르구요. 너무 길어서 며칠을 불러야 끝이 나기도 한답니다. 우리나라도 판소리 한마당 전부 다 들으려면 엄청 오래 걸리잖아요.(사실 들어본 적이 없네요ㅠ.ㅠ)

사회주의 시절에는 핍박을 많이 받았고 악기도 빼앗기고 막 그랬는데, 그럼에도 면면히 그 전통을 이어왔대요. 대를 이어서 가르치기도 하고 스승과 제자로 이어지기도 하구요. 몽골 사람들에게는 많은 사랑을 받는 음유시인이랄까요.

 

2부는 샤머니즘을 다뤘어요. 지금도 몽골에서는 샤머니즘이 굉장히 강력해서 무당이 많다고 하네요. 남자 무당을 버라고 하고 여자 무당을 오트강이라고 합니다.

몽골인들은 90%가 라마 불교를 믿지만 사람들 마음 속엔 이 샤머니즘이 생활의 일부로서 자리하고 있대요.

스님 역시도 성직자라기보다 마음의 고민을 들어주는 '상담자'로 자리했구요. 

 



 

역시 사회주의 시절에 핍박받았던 샤머니즘. 그래서 많은 버들이 주술 도구를 빼앗기기도 하고 직업을 바꾸기도 했대요. 그럼에도 당연히 그 맥은 이어져왔구요.

워낙에 넓은 땅 몽골이지만 인구 밀도가 작고 의료 혜택을 받기가 쉽지 않으니 더더욱 주술에 의존하는 성향이 강한 듯합니다.

외과적 수술과 같은 효과를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마음을 다스려서 위로해 주고 걱정을 덜어주는 역할은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극한의 기후와 험한 자연환경 속에서 살아온 몽골인들인지라 우리나라에서 느껴지는 '샤머니즘'에 대한 통속과 달리 몹시 자연스런 조합인 듯해요. 그러니까 '미신'이라기 보다 '소통'에 가까운 어떤 것이요.

 

3부는 음악을 소재로 했기 때문에 일단 귀가 즐거웠습니다. 

 



 

우리나라의 가야금은 12줄인데, 몽골의 야탁은 13줄이에요. 둘은 굉장히 흡사하게 생겼어요. 가야금은 바닥에 앉아서 뜯지만 야탁은 의자에 앉아서 바닥에 기울여 세운 채 뜯더라구요. 소리는, 가야금은 좀 더 낮고 중후한 맛도 나고 깊이가 있다면, 야탁은 좀 더 높고 경쾌하고 발랄한 느낌을 주더군요.

 

현대 가야금은 현이 18개, 22개, 25개까지도 있고, 야탁도 21현 짜리가 있으니 더더욱 둘은 닮은 꼴이에요.

놀랍게도, 몽골 연주가가 '아리랑'과 '도라지'를 연주하는 겁니다. 가사까지 넣어서요!

알고 보았더니 그들의 스승 김종암 선생님이 북한 사람이었어요. 

 



가야금 교사였던 그가 1961년부터 1967년까지 몽골에서 가야금을 지도한 겁니다.

역시나 사회주의 시기에 '전통'을 배제하던 분위기에서 야탁 역시 위기를 맞았지만 그래도 잘 살아남은 게지요.

 

몽골의 대표 악기 마두금은 남성 연주자들이 많이 쓰는데, 야탁은 주로 여자 연주자들이 한답니다. 현 위에서 춤추는 그 손가락들은 어찌나 아름답던지요. 

 






몽골의 야탁 연주자가 한국에서 가야금을 배우기 위해서 열심히 한국말을 공부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꿈이 있기에 더 아름다운 노력이었지요.

 

4부는 현대 몽골의 유목민의 한 모습을 보여주는 내용이었어요. 전통적으로 유목만이 생존의 방법이었는데, 이제 자본주의 물결 속에서 유목 이외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거죠.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몽골 역시 '교육'에 올인을 하고 있었어요. 그러니 양을 팔아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대학 공부를 시키려고 하죠. 그런데 모든 자식을 다 그렇게 키우기는 힘들어서 공부 잘하는 누군가는 대학을 나와서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일을 하고 다른 자식들은 유목 생활을 하며 뒷바라지를 하는, 그런 모습들이 보이네요. 마치 우리가 예전에 소팔아서 자식 대학 보내고 장남이 공부할 때 그 아래 동생들이 희생했던 모습을 보는 듯해요.(물론 요새는 소팔아서는 대학 공부를 시킬 수가 없지만...;;;;)

 









 

초등 6년에 중등3년까지가 의무교육입니다. 아이들을 도시에 보내어 공부를 시키는데 기숙사 생활을 해야 해요. 그게 안쓰러울 땐 조부모가 근처에 게르를 짓고 아이를 돌봅니다. 초원에서 넓게 살던 노인들이 손주들을 위해서 희생을 하는 모습이지요. 방학이 되면 아이들은 기숙사를 떠나 유목 생활로 잠시 돌아가구요. 

 

 

몽골에도 한류 열풍. 배우들이 좀 많이 젊었을 때 사진들이군요^^

 





기숙사에서 생활하다가 가족들이 보고 싶을 때... "그냥 울어요......"

 




울란바토르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 호텔에서 근무하는 큰 딸

 



 

큰 딸이 사준 휴대폰. 울란바토르에 도착해야 사용이 가능해진다.

 
 






백화점에서 동생의 화장품을 사주고 난 뒤. 

 


선명한 화질의 LCD TV에 놀라고, 그 가격에 더 놀라고!

 


 

바다흐 가족 중 아버지와 둘째 딸과 아들 하나가 울란바토르에 있는 큰 딸의 직장으로 방문을 합니다. 양을 팔아서 여비를 마련했지요. 딸은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 호텔에 근무하고 있었어요.  사실, 둘째 딸은 늘 찬바람 맞으며 초원 생활을 한 터라 솔직히 얼굴에서 좀 촌티가 흘렀습니다. 근데 큰 딸은 대단히 도시적이더라구요. 소니 디카를 들고 가족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면서 그 격차에 잠시 아찔하기도 했구요. 몽골이 지금은 전통을 등지지 않고 현대화의 물결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본주의의 특성상 양극화 현상으로 몹시 힘들어질 날이 오지 않을까 싶어서요. 사실 우리도 그랬으니까요.

 









둘째 딸도 도시에 나가서 살고 싶지만 물어보면 아니라고 합니다. 하지만 얼굴엔 아쉬움이 가득해 보여요. 

 





선진국민이 되려면 컴퓨터 교육이 필수라며, 2006년에 컴퓨터 수업을 개설하고 2008년엔 인터넷 도입 예정이라고 했어요. (작년에 촬영했더라구요. 방송은 올 봄.) 지금쯤 몽골 아이들도 학교 수업에서 인터넷을 쓰고 있겠네요.

 

과거와 미래가 함께 공존하는 몽골 땅. 유목과 정착이 공존해 가는 몽골 땅. 참 신선하고도 애틋한 느낌으로 시청했어요.

아직 자본의 때가 그리 많이 묻어있지 않기에 좀 더 오래오래 그 모습이 남아있었으면 싶고, 그러나 또 도시 생활 외에는 모르는 나로서는 저 아이들이 좀 더 많은 기회를 가질 수 있었으면 싶기도 하구요. 결국 그 모든 것은 제 일방적인 기준이지만 말입니다.

 

태고의 땅 몽골도 있던데, 그것도 차차 감상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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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9-05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큐 4부작 시청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수고를 요구하지요~ 애쓰셨어요.^^
몽골은 언젠가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에요~ 사실 가보고 싶은 곳이 한두곳이 아니지만요.ㅎㅎㅎ

마노아 2008-09-06 10:55   좋아요 0 | URL
한편,한편,두편, 이렇게 끊어서 시청했어요.
어제는 몽골에서 시집 온 신부들을 한국 신랑과 중개인이 얼마나 짐승 취급했는가를 다룬 추적 60분을 보았는데 챙피해서 얼굴이 화끈 거리더라구요.
저두 나중에 몽골 꼭 가보고 싶어요. ^^

하늘바람 2008-09-06 0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덕분에 저도 몽골 구경을 하네요 님이 보여주신 다큐 덕을 톡톡히 보면서요
그런데 궁금 몽골 공부를 왜 하시게 되었나요? 난 왜 이런게 궁금할까

마노아 2008-09-06 10:56   좋아요 0 | URL
처음에 글 쓸 때는 사진이 없었는데 심심해서 다시 캡쳐해서 포함시켰어요. 눈으로 보는 게 확실히 더 와 닿죠.
나중에 몽골 가보려구요. ^^ㅎㅎㅎ

무스탕 2008-09-06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에서 울란바토르 직항이 있다고 해서 놀란적이 얼마전이에요;; (이렇게 촌시러울때가..)
억지로 꿰 맞추자 하면 저도 울란바토르에 놀러갈 기회가 있었는데 원초적으로 기회가 붕괴되서 이젠 언제나 가볼까나~ 에요.

마노아 2008-09-06 10:56   좋아요 0 | URL
경의선도 완공인데, 기차 타고 북경 찍고 울란바토르, 러시아, 그리고 유럽까지 갈 수 있는 세상이 곧 오지 않을까요. 기술적인 문제는 별로 없을 텐데 말예요. 무스탕님 아까운 기회를 놓쳤군요ㅠ.ㅠ

노이에자이트 2008-09-06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몽골과 우리나라가 비슷한 점도 많지만 음식은 완전히 딴판이죠.내몽고 자치주에는 산에서 순록 키우며 사는 부족이 있는데 중국 정부가 산 아래에 내려오라며 정착생활을 강요하니까 굉장히 힘들어 하더라구요.몽고공화국에도 순록 키우는 부족이 있어요.유목생활하는 몽고족은 돼지와 소를 안 키우는데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어요.

마노아 2008-09-07 01:12   좋아요 0 | URL
기본 생활이 너무 판이하니까 식문화는 닮기 어려울 것 같아요.
순록 키우는 부족을 찾아보니까 헙스골의 차퉁족이라고 나오네요.
소는 오축에 포함되는데 돼지는 포함시키지 않네요. 순록도 포함되지 않구요.
아, 낙타를 만나고 싶어요. ^^ 말은 타보고 싶구요.

노이에자이트 2008-09-07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란은 몽고족이고 금나라 청나라는 여진족인데 이 두 민족이 사이가 굉장히 안 좋았잖아요.몽고족이 금나라 공격할 때 완전히 박살을 냈구요.그런데 여진족은 사냥을 주로 하면서 정착생활도 하니까 돼지를 키워요.몽고족은 돼지 키우는 종족을 야만인이라고 해서 되게 멸시했대요.당연히 여진족은 뭐야...하는 반응.저는 두 민족을 다 유목족으로 알았는데 여진이 수렵족이라고 따로 분류한다는 사실을 알았어요.이제 여진족은 완전히 한족에 동화되어가고 있고 여진 말을 하는 사람이 없어서 중국에선 청나라 문헌 번역하려고 여진어하는 사람을 구하는데 영 힘들다고 합니다.

마노아 2008-09-07 21:30   좋아요 0 | URL
여진족을 수렵족이라고 하는군요. 딱히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그러고 보니 확실히 성격이 다르네요. 만주족이 흥했다가 망한 게 불과 백 년 전인데 벌써 그 나라 말을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게 놀라워요. 무서운 한화군요. 몽골족이 돼지를 마땅찮아 하는 것이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이 돼지를 혐오하는 것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몽골땅이 모두 사막은 아니지만 남쪽으론 사막이 넓은 편이고 그런 땅에선 돼지를 키우기 힘들잖아요. 그냥 퍼뜩 생각이 들었습니다. 노이에자이트님 덕분에 눈 반짝일 얘기를 많이 듣게 되네요. 제가 수지 맞았어요^^

노이에자이트 2008-09-07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양이나 말타고 다니는 민족이 돼지를 데리고 다니지는 않죠.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이 돼지 키우며 돌아다니는 장면은 본 적이 없어요.그런 면에서 여진족은 좀 특이하죠.여진이 수렵족이라는 이야기는 시바 료타로의 소설 <달단 질풍록>에서 얻었어요.달단은 타타르의 한자음이예요.청나라 초기의 이야기예요.지금은 절판이구요.시바가 대학에서 몽골어과를 나왔어요.

마노아 2008-09-07 22:51   좋아요 0 | URL
시바 료타로를 검색해 보니 책이 아주 많이 나와요. 알라딘에서 달단 질풍록은 안 뜨네요. 절판이라고 하니까 더 궁금해지기는 합니다^^;;
노이에자이트님이 희귀 도서를 많이 알고 계세요.

노이에자이트 2008-09-08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바 책 중에서 절판된 것이 많아요.굉장히 해박한 역사 소설가인데 기행문이나 역사평론도 많이 썼죠.저는 헌책방에서 책을 사니까 희귀도서를 꽤 소장하고 있죠.절판된...새 책도 헌책방에서 사요.광주는 서울보다 헌책이 싼 편이죠.가끔은 고물상이나 우리 아파트 폐지수거일 날 구하기도 하죠.

마노아 2008-10-13 02:09   좋아요 0 | URL
헌책방에도 좀 격이 있는 듯합니다. 제가 중고샵에서 구해들이는 책들은 거의가 '욕심'일 거란 생각이 많이 들어서 잠깐 반성을... 그러면서 어무이 화장품 사면서 중고샵에서 몇 권 더 포함시킨 나는...;;;;
아파트 폐지수거일은 뜻밖의 횡재수군요! 아파트 안 살아서 잘 그림이 안 그려지지만, 하여간 좋은 책을 찾아내는 노이에자이트님의 안목이 대단해요!

노이에자이트 2008-09-08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헌책방보다 고물상은 더 싸구요.아파트 폐지 수거일에 얻은 책들은 공짜!!! 헌책 속에서 옛날 껌종이,우표,원로 연예인 사진 등을 찾아내는 재미도 구수하지요.100원짜리 지폐도 있어요.

마노아 2008-09-08 23:32   좋아요 0 | URL
우와, 신기하고 흔치 않은 것들을 많이 득템하시는군요! 헌 물건으로 얻을 수 있는 기쁨! 뭐 이런 분야의 달인 되실 것 같아요^^

노이에자이트 2008-09-09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기쁨이라도 있어야죠.번뇌가 108개나 되는 세상에서...

마노아 2008-09-09 17:49   좋아요 0 | URL
지당하신 말씀입니다^^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