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 열리는 자리, 스위트 스팟 [제 813 호/2008-09-19]


스위트 스팟(Sweet Spot)은 스포츠 분야에서 나온 용어로 야구 배트나 테니스 라켓 등이 공을 맞힐 때 특별한 힘을 가하지 않고도 가장 멀리 가장 빠르게 날아가게 만드는 부분, 즉 공을 맞히는 최적지점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마케팅에서는 소비자가 기업에 대한 친밀감이 극대화되는 순간인 소비자 심리 타점을 일컫기도 하고 건축에서는 콘서트홀과 같은 곳에서 가장 소리가 잘 들리는 자리를 말하기도 한다.

이처럼 스포츠, 마케팅, 건축에서 다양하게 쓰이는 스위트 스팟은 단순히 적절한 위치라는 의미만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이번 북경 올림픽에서 이승엽 선수가 친 홈런들을 생각해 보라! 체구가 큰 서양의 야구선수들과 달리 이승엽 선수는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자연스러운 스윙으로 손쉽게 홈런을 만들어내어 우리 한국 팀에게 승리를 안겨 주었다. 바로 이승엽 선수의 배트가 투수가 던지는 공을 작용과 반작용이 가장 잘 일어날 수 있는 위치에 맞게끔 궤적을 그리며 회전하기 때문이다.

건축음향설계에서도 이승엽 선수의 배트에 맞는 공처럼 소리가 가장 잘 반사되는 위치들이 있다. 음향설계에 있어서 어쩌면 가장 이상적인 것은 음원에서 전해지는 직접음을 듣는 것일 수 있지만 실내공간이 되면 이는 도저히 바랄 수 없는 이상이다. 과거 그리스의 극장들이 다 외부라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기둥 하나만 세워도 벌써 멋진 가수의 목소리를 감아 왜곡을 시키는데 벽이랑 천장까지 생기면 진정한 라이브의 묘미는 물 건너갔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건축음향설계를 할 때 벽이나 천장에 반사음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객석 전체에 충분한 음압을 고르게 분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림 1>은 건축음향설계의 하나의 예로서 음원에서 나가는 직접음과 반사음이 골고루 객석에 전달되는 음선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정도로 건축음향설계가 끝났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만일 직접음과 반사음이 객석에 도착하는 시간이 다르다면 이것도 아주 곤란한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바로 소리의 간섭효과로 소리가 불분명하게 들리는 것이다. 또한 이들 음이 적정한 잔향시간을 확보하지 못해도 똑같은 문제가 생겨나게 된다. 이를 해결하는 곳은 객석의 측벽이다.

객석의 측벽은 음의 반사효과뿐만 아니라 음을 풍부하게 하는 확산효과와 적정실내잔향을 유지하기 위한 흡음성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콘서트홀의 경우 무대 쪽 전면의 경사진 측벽은 천장처럼 완벽한 반사재를 선택한다. 중간과 후면의 측벽에는 보통 사각뿔 형태의 구조물을 벽체의 중간높이를 중심으로 적절하게 설치하여 음을 확산시킨다. 콘서트홀의 맨 뒤쪽 벽은 유해한 에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서 넓은 주파수에 걸쳐 흡음성을 가지도록 처리한다. 이것으로 최적의 소리를 만들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콘서트홀은 필연적으로 관객이 앉을 수 있는 의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극장이나 음악당을 가면 우리는 푹신한 천으로 된 의자에 앉게 된다. 모르는 사람들은 관객들이 편하게 앉아 감상할 수 있게 쿠션을 넣어 만들었다고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사람이 없을 때 의자의 바닥이 올라져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들려져 있는 의자의 바닥은 흡음을 위해 타공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의자를 천과 쿠션으로 만든 것도 같은 이유이다. 만일 이 의자들이 소리를 반사하게 되면 멋진 소리를 귀에 닿기 위해 공들인 천장과 벽이 아무 소용없게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천장과 벽 그리고 의자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조화로운 역할을 조금만이라도 못한다면 그 공연장은 연극, 뮤지컬, 연주회 등에서 나오는 진정한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다.




<그림 2>는 한스 샤로운(hans scharoun)이 설계한 베를린 필하모니 음악당이다. 자유로운 지붕의 형태는 음악당에서 작용하는 소리의 궤적을 따라 모든 객석이 최적의 스위트 스팟이 될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다. 이승엽 선수는 멋진 홈런 한 방을 만들 수 있는 스위트 스팟을 찾기 위해 하루에 천 번의 스윙을 연습한다고 했다. 정말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최적의 음향을 위해 무수히 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해야 하는 건축가의 일 또한 그에 못지않을 것이다.

글 : 이재인 박사(어린이건축교실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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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8-09-19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 큰 공연은 죄다 체육관에서 하는구만. 체육관 의자는 딱딱한 플라스틱...ㅡ.ㅡ;;;
 
몽골 : 하늘과 맞닿은 바람의 나라 - 대구 MBC HD 기획 10부작
이른아침 편집부 엮음 / 이른아침 / 2008년 5월
절판


신발 코가 위로 향한 모습이 고무신과 사뭇 비슷한 몽골의 전통 신발 ‘구달’
양모와 가죽으로 만든 구달은 특이하게도 오른쪽 왼쪽 구분이 없다.
-22쪽

‘세걸음 이상은 승마’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늘 말을 타고 다니는 몽골인들에게 승마는 더없이 즐거운 놀이.

-35쪽

강수량이 부족한 몽골은 눈이든 비든 하늘에서 쏟아지는 것은 언제나 환영. 유목민 가정이면 집집마다 있다는 물 당번은 겨울이면 지천으로 널린 눈을 부지런히 퍼다 나른다. 녹이기만 하면 온 가족이 마실 물과 차, 먹을 음식을 만들 수 있기 때문

-36쪽

800년 전, 칭기즈칸과 함께 말을 타고 초원을 호령하며 세계무대에 등장한 몽골은 이제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말로 갈아타고 힘차게 달린다.

-47쪽

70여 년 동안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받아들여 국가가 주도하는 계획경제의 틀 안에서 생활했던 몽골은 공산권의 몰락으로 한때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하지만 재빨리 시장경제를 받아들였고, 평화적인 정권 교체를 성공적으로 이뤄내면서 해마다 6%를 웃도는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건국 800년을 맞는 지난 2006년을 몽골인들은 ‘칭기즈칸의 귀환’이라 불렀다. 구체제에선 금기시했던 칭기즈칸의 완전한 복권을 계기로 세계를 호령하던 옛 몽골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그 핵심은 경제성장이다.
-48쪽

몽골의 광업은 총 산업 생산의 65%를 차지하고, 국가 GDP의 17%를 담당한다. 광산을 끼고 있는 도시들이 새로운 성장 지역으로 꼽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50쪽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몽골 중산층의 최대 관심사는 바로 자녀교육. 시장경제 체제에서는 오로지 교육만이 더 많은 기회를 가져다준다고 믿기 때문.

-52쪽

1921년 사회주의 혁명 이후 유목은 국가적인 탄압을 받았고 유목민들은 강제로 해체됐다. 전통적인 유목 생활이 중앙통제식 경제와 맞지 않았기 때문.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집단화 정책이 느슨해지면서 유목은 조금씩 다시 활기를 띠게 됐다. 시장 경제 전환 이후에는 집단농장에 속해 있던 가축이 개인 소유로 바뀌면서 대규모 목축업이 더욱 회복되는 추세다.

-55쪽

가축 수가 많은 유목 가정만이 초원을 지키고, 가축 수가 적은 목축 농가들은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유목 생활을 접고 도시로 떠난다.

-59쪽

젊은이들이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떠나면서 노인들만 남아 있는 유목 마을이 점점 증가.
가축이 아주 많은 집은 자식들이 초원에 남지만 가축이 적어 할 일이 없는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도시로 나가는 것.
시장경제는 이농 현상을 부추기고, 유목 마을의 빈자리는 더욱 커져만 간다. 모두가 떠나가고, 지금 남아있는 청년들마저 나이가 들면 그때는 누가 초원을 지키게 될까? 몽골의 정신적 뿌리이자 이 나라를 지탱해 온 가장 중요한 산업인 목축업이 지금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
-64쪽

울란바토르 외곽의 달동네, ‘야르막’은 최근 3,4년 사이에 울란바토르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생겨난 빈민촌 중 하나다. 이곳에 사는 주민들 대부분은 시골에서 일자리를 찾아 올라온 사람들로, 공장 직공이나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는 사람도 있지만 직업을 구하지 못해 실업자로 전락한 이들도 많다.

-67쪽

한정된 일자리 때문에 실업률이 7%를 웃돌고, 빈부격차가 커지는 등 새로운 사회문제들이 몽골에서 발생하고 있다. 눈부신 경제성장 뒤에는 도시의 팽창과 시골의 인력 부족, 실업 문제, 빈부의 격차 등 어두운 그늘이 뒤따르기 마련. 이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 시장경제를 선택한 몽골에게 또 하나의 숙제가 주어진 셈.

-68쪽

몽골 유목민의 하루는 노래로 시작된다. 이들은 소나 양의 젖을 짜면서도, 말을 타고 가축을 몰고 다니면서도 노래를 부른다.

-79쪽

만약 노래가 없다면 이른 새벽부터 시작하는 유목민의 노곤한 삶을 무엇으로 풀어야 할까? 가축이 깨어날 때부터 시작하는 유목민의 하루에 노래는 피로를 풀어주는 윤활유이자, 가축과 사람을 연결해 주는 가교 역할을 한다.

번잡스런 문명을 멀리한 유목민의 삶은 푸르른 초원만큼이나 단순하고 순박하다.
-91쪽

몽골의 역사 속에서 씨름, 활쏘기, 말달리기 이 세 가지 경기는 즐거운 놀이이자 효과적인 전쟁 연습이었다.

-100쪽

말을 훈련시킬 때 경기 도중 어떤 돌발 상황이 발생해도 멈추지 않고 끝까지 달리도록 가르치기에 몽골의 말 경주를 지켜보면 종종 낙마한 기수를 팽개친 채 결승점으로 달려오는 말들을 볼 수 있다. 몽골인들은 이처럼 뒤를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앞만 보며 달리는 말 경주를 기수의 용기와 인내심을 시험하는 좋은 기회로 여긴다.
(나담은 칭기즈칸 이전부터 전해진 전통적인 여름 축제다.)
-112쪽

나담 말 경주에서는 각 나이별로 몇 백 마리의 말들이 동시에 달리는데 기수가 너무 무거우면 말이 제 속도를 낼 수 없어 보통 세 살에서 열두 살 사이의 꼬마들이 출전한다. 조련사는 대부분 기수의 아버지인 경우가 많다.
-116쪽

울란바토르 근교에는 몽골인들의 여름 별장인 ‘조슬랑’이 밀집해 있다. 회계사인 간수흐는 양복과 자동차, 현대식 건물이 잘 어울리는 전형적인 도시 사람이지만 석달 남짓한 여름 동안엔 공기가 나쁜 도시를 떠나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조슬랑에서 생활하며 야과 말을 치는 몽골의 전형적인 유목민으로 살아간다.

-127쪽

가축들은 대개 봄에 새끼를 낳기 때문에 이 시기에 가장 젖이 많이 나온다. 이는 곧 유제품을 많이 만들 수 있다는 뜻과 같다. 여자들은 여름 내내 부지런히 젖을 짜서 겨우내 먹을 유제품을 만들어 비축한다.

-137쪽

몽골인에게 가축은 삶의 동반자이자 친구인 동시에 중요한 식량원이다. 그래서 몽골 남성들은 가축을 방목하는 일 못지 않게 양이나 염소를 도축하는 일에 신중을 기한다. 가축을 도축할 때는 고통을 주지 않으려고 최대한 빨리 숨을 끊고, 피를 땅에 흘리지 않게 한다. 도축은 집안의 어른인 가장의 몫이며 몽골 남자라면 자라면서 누구나 자연스럽게 체득하는 기술이다.

-141쪽

허르헉은 양이나 염소를 큼직하게 잘라 감자, 당근 등과 함께 푹 쪄서 먹는 몽골의 대표적인 요리로 과거 솥을 가지고 다니기 힘들던 유목민 시절에 가죽 부대에 넣고 끓여 먹던 방식에서 초래한 초원의 음식이다. 고기 요리는 보통 남자들이 맡는다. 먼저 아버지가 불을 피우고 작은 돌부터 달구기 시작한다. 그 사이 방금 잡은 염소를 먹기 좋게 잘라 양념과 함께 큰 솥에 넣고, 뜨겁게 달군 돌을 집어넣어 고기를 골고루 익힌다. 이 상태로 한두 시간 정도 푹 익히면 연하고 먹기 좋은 허르헉이 완성된다.

-142쪽

유목민은 거친 대자연과 그를 관장하는 영적 존재에 많은 것을 의지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샤머니즘은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야 하는 몽골 유목민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샤머니즘은 곧 몽골인의 삶, 그들의 정신적 뿌리인 것이다.

-171쪽

몽골에서는 한국어 자체가 한류의 상징이다. 몽골어에는 ‘으’ 발음이 없어 한국어를 읽고 말하기가 까다로운데도 자녀가 어릴 때부터 한국어를 가르치려는 학부모가 많다. 그래서 한국어 유치원에 들어가기 위해 1년 이상 기다리는 진풍경도 벌어진다. 몽골 학교에서도 예전에는 주로 러시아어를 가르쳤는데 요즘에는 영어와 한국어가 인기다.

-177쪽

해마다 10월이면 한글날을 전후해 울란바토르 대학에서 ‘한글 큰잔치’가 열린다. 말하기, 글짓기, 붓글씨, 한글 예쁘게 쓰기, 노래 경연 이렇게 총 5개 분야의 대회. 대상을 수상한 학생에게는 열흘간의 한국 연수 기회가 주어진다. 노래 경연 시상식을 끝으로 3일 동안 울란바토르를 뜨겁게 달군 한글 큰잔치는 몽골과 한국 사이를 한걸음 더 다가서게 하며 막을 내린다.

-184쪽

울란바토르에서 420km 떨어진 돈드고비 아이막은 광활한 초지와 울퉁불퉁한 바위들이 산재한 곳. 이곳에 속한 델 올 지역은 몽골 최초의 미술 작품인 암각화로 유명. 날씨가 건조해서 암각화가 지금까지도 잘 보존되어 있다. 이 지역의 암각화는 약 3만 개로 추정. 소재의 종류 또한 다양. 델 올 지역에 암각화가 많은 것은 사냥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이 하계의 정설.

-197쪽

20세기 초반까지 불교는 몽골 최고의 종교였다. 하지만 1920년대 몽골이 사회주의 체제 국각가 되면서부터 종교는 곧 아편이라는 스탈린의 정책에 따라 국민이 불교를 믿는 것을 막고, 많은 사찰과 사원들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결국 10만여 명의 몽골인들이 내몽골이나 다른 나라로 도피했고, 수많은 스님과 승려들이 학살당했다. 당연히 불교미술도 몰락했다.

-213쪽

땅을 소유하고 영원히 정착하는 것을 꿈꾸지 않는 유목민들이야말로 몽골을 가장 몽골답게 보여주는 존재다.

-223쪽

길을 잘 기억하고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의 물 냄새도 찾아낸다는 명석한 가축 낙타는 유난히 정이 많고 감정이 풍부해 몽골인들의 오랜 벗이자 가족 같은 존재. 오축 중에서 가장 가벼우면서 뛰어난 보온력을 자랑하는 낙타의 털은 봄기운이 시작되는 이맘때쯤 깎아야 g나다. 낙타는 체구가 크고 강인해 추위에 강하지만 더위에는 유난히 약하기 때문.

-224쪽

매년 가을이 되면 새로 태어난 망아지와 나이가 적은 말들을 한 번씩 겪어야 하는 통과의례, 몸에 도장을 찍어야 한다. 여름에 도장을 찍으면 상처가 곪을 수 있기 때문에 도장 찍기는 주로 가을에 많이 한다. 방목을 하다 보면 다른 집 가축들과 섞일 수가 있어 찾기 쉽도록 찍는 것이다.
이맘때부터는 소똥 줍기도 소홀히 할 수 없다. 수분이 다 빠져 나간 소똥은 냄새도 없거니와 화력이 그만이어서 시골 유목민들의 겨울 난방을 책임지기에 안성맞춤이다. 모은 소똥을 1년 내내 말리면 그 다음 겨울쯤엔 태우기 딱 좋은 연료가 만들어진다.
-234쪽

유목민들은 일반적으로 여름에는 물이 풍부한 강 주변에, 겨울에는 뒤에 산을 낀 장소에 정착한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스며들지 않도록 게르 주변을 흙으로 꼼꼼히 막고, 펠트로 게르를 두 겹 세 겹 덮는다. 몽골의 겨울은 단순한 추위 문제가 아닌, 생존이 걸린 계절이기 때문이다.

-235쪽

자유화, 개방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꿋꿋이 이어가는 그들의 유목 생활은 자연과 인간이 하나 되는 신선한 메시지이자 몽골을 가장 몽골답게 만들어 주는 유목민의 삶이다.

-2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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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헨 2008-09-18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줄 ... 한 줄...의미 있게 들립니다.

마노아 2008-09-19 00:01   좋아요 0 | URL
몽골을 지켜보고 있자면, 때묻지 않았던 자연이 점차 오염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아무래도 자본주의의 속성은 그런 게 있으니까요.

노이에자이트 2008-09-18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몽골인들이 징기스칸 숭배하는 건 이해가 가는데 중국도 징기스칸을 굉장히 홍보하더라구요.중국은 이민족들이 세운 나라도 중국사라고 주장하니까 요,금,원,청도 자기나라 역사라고 합니다.그런데 여진인은 사실상 완전히 흩어졌으니 금,청에 대해선 그런다 쳐도 몽골은 엄연히 독립국가인데 중국이 몽골인인 징기스칸을 중국의 영웅으로 선전하는 데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요?

마노아 2008-09-19 00:02   좋아요 0 | URL
광개토대왕도 지네 임금이라고 할 애들이죠. 몽골은 중국 굉장히 싫어하는데 기분 나쁠 것 같아요.
티벳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고 다들 열받을 일이에요.ㅜ.ㅜ

달빛푸른고개 2008-09-18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의 '몽골'도 의미가 있겠지만, 이전 몽골의 역사가 갖는 의미가 참 크더군요. 한반도와의 관계도 그렇구요.

마노아 2008-09-19 00:03   좋아요 0 | URL
러시아와 중국 사이의 샌드위치 자리가, 우리가 중국과 일본, 그밖의 강대국 사이의 샌드위치 입장과 동질감이 느껴져서 더 눈여겨보게 되어요. 한국을 참 좋아하는 나라인데 요새는 이미지 완전 버려놔서 자꾸 싫어한다고 해서 걱정이에요.

노이에자이트 2008-09-19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엔 소련군 기지가 몽골에 있었는데 지금은 러시아 군기지가 있는지 궁금하네요.한국의 늙은 남자들이 몽골의 손녀뻘되는 처녀를 현지처로 거느리고 있는 데다가 매춘관광등이 말썽을 일으키더라구요.그런데 몽골에 나치주의자들이 있어요.요주의!!!나치 깃발을 차에 달고 시내에서 위력시위하는 사진을 본 적이 있어요.

마노아 2008-09-19 15:43   좋아요 0 | URL
몽골 안에서 나치주의자라니, 굉장히 이질감이 느껴지네요. 갑자기 오싹해져요!
그나저나 어디서든 똥물 튀기고 다니는 인간들이 있다니까요.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바깥에서도 새는 거겠지만, 꼭 저런 사람이 '대표'인 냥 전체 망신을 시키잖아요. 우호적이었던 한국에 대한 감정이 자꾸 나빠지는 게 안타까워요.

노이에자이트 2008-09-19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치주의는 예전 사회주의권을 중심으로 유럽에서도 굉장한 선풍이죠.이념의 공백을 메워주니까요.우리나라 남자들이 워낙 껄떡질을 하고 다니니까 아마 몽고의 네오나치들이 이를 갈고 있을 겁니다.

마노아 2008-09-19 22:20   좋아요 0 | URL
이념의 공백을 메운다고 하니까 분위기가 좀 수긍이 가네요. 어휴, 잘못하다간 국제 뉴스에서 끔찍한 소식을 들을지도 모를 일이군요. ;;;;

노이에자이트 2008-09-20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칼맞아 마땅한 놈이 당하는 거야 인과응보지만 무고한 사람이 단지 한국남자라는 이유로 봉변을 당할까봐 큰 걱정입니다.

마노아 2008-09-20 19:27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그도 걱정이에요. 꼭 죽어 마땅한 녀석들은 명도 길더만 엄한 사람이 재수 없어 죽기도 하는 세상..ㅡ.ㅡ;;;
 


16세기 베네치아 화가들의 화려한 비밀 [제 812 호/2008-09-17]


16세기 초의 베네치아는 요즈음의 파리나 뉴욕이 그렇듯 미술의 메카였다. 당시 베네치아에는 근대 회화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티치아노, 풍부한 색채감의 화가 지오반니 벨리니, 수수께끼의 상징성으로 점철된 그림 ‘폭풍’을 그린 지오르지오네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 베네치아 화가들은 다른 유럽지역의 화가들보다 훨씬 더 다양한 색상과 재료를 사용했고, 그 결과 베네치아 화가들은 유럽의 회화를 선도하는 화가군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이 당시 베네치아 화가들의 활동과 관련된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미국화학회 소식지에 실렸다. 16세기 베네치아 화가들이 사용했던 환상적인 색상에 과학적인 비밀이 숨어 있었다는 것이다.

소식지에 따르면 당시 베네치아에는 벤데콜로리(Vendecolori)라고 불리는 물감 판매업자들이 성업하고 있었다. 벤데콜로리는 다양한 색상의 염료, 착색제, 물감 등을 직접 제작하고 판매하는 일종의 도매상이었다. 화가들은 벤데콜로리의 상점에서 물감을 구입하는 것은 물론이고 동료 화가들을 만나서 새로운 기법이나 재료에 대한 정보를 얻어갔다. 말하자면 벤데콜로리의 상점은 가게뿐만이 아니라 베네치아 화가들의 살롱 역할까지도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탈리아 또는 다른 유럽 국가들에는 이 같은 벤데콜로리가 없었던 것일까? 당시 대부분의 유럽 화가들은 물감을 약방에서 구해다 썼다. 벤데콜로리처럼 종합적인 화방이 있는 도시는 베네치아 외에는 없었다. 때문에 이탈리아 전역의 화가들이 벤데콜로리에서만 판매하는 다양한 물감과 재료를 구하기 위해 베네치아를 찾아왔다고 한다.

해상무역의 중심지였던 16세기 베네치아는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등 세계 각국과의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고 있었다. 이러한 해상무역로를 확보하고 있었던 벤데콜로리들은 다양한 물감과 그림 재료들을 어렵지 않게 수입할 수 있었다. 즉, 무역 강국이던 베네치아의 위치가 미술의 전성기를 이끄는 일등 공신 역할을 했던 것이다.

16세기 화가들이 사용한 안료, 염료, 착색제 등의 생산과정은 화합물 추출, 유기반응, 무기반응, 유기금속 반응, 산화환원 반응 등을 포함하는 종합화학이었다. 벤데콜로리들은 이 화학 반응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화가들은 벤데콜로리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재료와 기법을 회화에 적극적으로 응용할 수 있었다.

16세기 베네치아 화가들의 화려한 화풍에는 또 다른 비밀도 있었다. 유리와 도자기 제품들은 베네치아의 전통적인 특산물인데 이는 16세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당시의 화가들이 유리 세공의 기법과 재료를 정통 회화에 응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역시 벤데콜로리의 역할이 컸다. 벤데콜로리는 유리세공에서 필수적으로 쓰이는 재료인 분쇄한 모래도 판매하고 있었다. 베네치아 화가들은 당시 유화에는 사용되지 않았던 유리질의 착색제를 도입해서 한층 빛나고 생생한 색채감을 내는 데 성공했다. 또 당시 화가들이 물감이 마르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탄산칼슘이나 유리를 사용한 데 비해 베네치아 화가들은 물감에 분쇄한 모래를 섞어 덧칠했다.

베네치아 출신으로 이탈리아에서 활약한 화가 로렌조 로토는 물감을 덧칠할 때 투명한 효과를 주기 위해 레이크 안료를 사용했다. 로토의 그림을 엑스선으로 분석해보면, 연한 백색과 주홍색을 섞어 만든 핑크색 물감층과 투명한 적색 레이크 안료층이 교대로 칠해져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화학자들이 형광현미경으로 그의 그림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그림 표면에 최소한 5개 층 이상의 투명한 적색 레이크 안료층이 덧발라져 있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 황화비소로 만든 특이한 오렌지색상과 아프가니스탄에서 수입한 군청색 역시 베네치아 화가들이 즐겨 구사한 색상들이다.

로토가 사용한 기법은 베네치아 화가들이 즐겨 사용했던 방법이다. 즉, 투명한 색상과 반투명한 색상의 유화물감을 번갈아 덧칠해서 특별한 효과를 얻는 것이다. 베네치아의 화가들은 여러 새로운 안료를 시험한 끝에 각각의 물감층이 스테인드글라스처럼 아래층의 색상을 가리지 않으면서 새로운 색감을 내는 안료를 찾아낼 수 있었다. 벨리니는 하늘의 푸른빛에 노란빛이 나는 오렌지색을 조금씩 덧칠해서 미묘한 색감의 변화를 내기도 했다. 엑스분석법과 광학현미경 사진을 통해 화학자들은 벨리니가 사용한 주황색 물감이 안티몬과 철을 포함한 실리케이트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당시의 베네치아 화가들은 그림을 그리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 색채감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좋은 빛깔을 나타내기 위해서 다양한 시도를 했다. 그 가운데 과학적 노하우가 반영된 고유한 화법이 작품에 적용되었다. 그러한 노력이 마침내 예나 지금이나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베네치아의 미술문화를 꽃피우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글 : 이식 박사(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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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말로 '메마른 땅'이라는 의미를 가진 고비. 동서로 2천 킬로미터. 남북으로 천 킬로미터. 전체 국토의 1/4 차지합니다.(오늘 EBS 방송에서 김연수씨 나래이션에 의하면 1/3이라고 하더군요. 뭐가 맞을까요^^;;; 제가 본 책에서는 1/4이긴 했지만요). 그 면적이 점점 확대되는 중이라고 하니까 1/3도 틀린 표현은 아닐 것 같습니다. 

고비는 사하라와 같은 모래 사막이 아닙니다(근데 사하라도 완전 모래 사막은 아니지 않나요? 그랬던 것 같은데 기억이 가물가물...;;;;). 풀과 나무, 모래와 바위가 어우러진 독특한 공간의 고비. 혹이 두개인 쌍봉낙타는 이곳 고비가 고향이에요. 단봉낙타는 북아프리카 사막 지대에 살지요. 혹이 두개라는 것은 그만큼 고비의 황무지/사막이 살아남기 힘든 척박한 땅이라는 의미가 아닐까요. 영양분이 더 필요하단 얘기니까요. 무려 60일을 굶고도 사는 게 낙타라네요. 여름에 영양분을 비축해서 가을에 가장 혹이 높고, 겨울을 지나면 혹이 줄어들어 평평해진다고 합니다. 

드문드문 자라는 풀들이 양이나 염소 낙타들의 먹이원이 되어줍니다. 유목민들은 물이 적어서 풀이 잘 자라지 않는 지역을 통칭해 고비라 불러요.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남쪽으로 300km 떨어진 곳에 자리한 고비. 유목 생활을 할 만한 최소한의 풀들이 자라기에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칭기스칸 시절엔 고비 안에 사는 유목민이 고비 바깥보다 많았다고 하네요.  아마도 환경이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듯 싶네요.

아이들은 낯선 방문객을 경계하는 대신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봅니다. 바위 산의 정상에서 바라본 풍경은 아무 것도 살지 않을 것은 황량함, 온통 그 뿐이지요. 이리저리 둘러보기를 한참. 마침내 바위산을 올라가는 한 무리의 동물 발견! 주변의 바위 색과 비슷해 눈에 띄지 않는 아르갈리 산양(아르갈)이었어요. 몽골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멸종 위기에 처한 귀한 녀석들이지요. 뿔이 둥글게 자라는 아르갈리 산양.



녀석들의 둥글게 감기는 커다란 뿔을 가진 이유는 서로 뿔싸움을 할 때 둥근 부분이 부딪쳐서 치명상을 입지 않을 수 있게 해준답니다. 이 뿔은 죽기 전까지 계속 자라요. 그래서 뿔의 주름을 세어 대략적인 나이를 추정하기도 하지요. 아이벡스 산양(양기리)도 보호색을 띠어서 움직이지 않으면 존재를 알기 어렵습니다. 아르갈리 산양보다 덩치가 작고 다리도 짧은 편이에요(너도 숏다리냐!). 잘 발달된 발굽으로 아르갈리 산양보다 더 높고 험준한 지대에서 살아가지요.


보통 알을 하나만 낳는 독수리(타스). 알이 깨어나는데 50-60일이 걸립니다. 다른 조류에 비해서 오래 걸리는 편이네요.  대부분 암컷이 둥지를 지킵니다. 동작이 느려서 둔해 보이고 사체만 찾아먹는다 하여 몽골인들은 독수리들을 '바보 독수리'라 부른다네요. 독수리의 굴욕입니다. ^^;;;  녀석들이 늘 사체만 먹는 것은 아니에요. 새끼를 낳으면 드물지만 직접 사냥을 해서 먹이기도 하지요.

독수리는 몽골에 서식하는 맹금류 중 가장 큰 새라지요. 펼친 날개 길이가 최대 3미터. 몸무게도 10kg 가까이 되어요. 몸집 하나는 헤비급이군요.  죽은 동물을 먹어치우는 자연의 청소부 독수리. 초원이든 사막이든 유목민이 사는 곳엔 독수리도 함께 살아갑니다. 대부분의 독수리들은 바위산의 절벽에 보금자리를 마련해요. 튼튼하고 커다란 둥지를 지을 만한 나무가 없기 때문이지요. 시야가 탁 트이고 전망이 좋은 곳에 자리한 독수리 둥지. 녀석들은 매년 같은 둥지를 고수합니다. 오래 사용한 둥지는 사람이 올라가도 될 만큼 크고 튼튼해요. 우리나라의 철원으로 날아 들어오는 독수리들의 고향이 이곳 몽골이라고 하는군요.

바람이 만들어낸 땅 고비. 빙하기 이전에는 무성한 산림지대였지만 오랜 세월 깎이고 남은 것은 황량함 뿐이군요.

아이벡스 산양, 아르갈리 산양... 고비에서 녀석들의 천적은 늑대, 스라소니. 그리고 눈표범이에요.

아르갈리 산양의 사체가 촬영팀에게 포착! 갈비뼈까지 부숴먹은 흔적이 보이네요. 녀석들의 천적 중에서도 뼈까지 먹는 포식자는 늑대뿐.  하지만 아이벡스, 아르갈리 산양의 가장 큰 위협은 가축들과의 경쟁이라고 합니다. 녀석들이 사는 고지대까지 풀을 찾아 올라오는 가축들 때문에 살아가기 점점 힘들다고 해요. 어디서나 '경쟁'은 참 힘든 거지요^^;;; 

 고비에서는 허투루 버릴 게 하나도 없습니다. 나무가 없는 지형인지라 가축의 배설물을 연료로 써요. 소똥은 연기도 없고 화력도 강하지요. (낙타의 배설물도 마찬가지에요.)



고비의 아이들은 친구가 많지 않습니다. 사람이 적게 살기 때문이지요. 형제 자매가 곧 친구에요. 그 다음엔 가축들이 친구. 조녁이 되어 가축들이 모두 돌아오면 아이들도 한몫 거듭니다. 낙오된 녀석이 없는지 다시 수를 세고 어린 새끼들은 부모들과 분리해서 우리에 넣지요. 하지만 호락호락하지 않아요. 저녁마다 지나가는 이 소란이 아이들에겐 익숙한 일과가 되었습니다.

손님에게 먼저 코담배를 권하는 몽골인들의 풍습. 손등에 묻혀 들이마시는데 양 조절을 잘못하면 너무 매워서 눈물 흘리기 일쑤지요. 저녁 메뉴는 랍샤. 고비에서는 낙타 고기를 끓여 랍샤를 만듭니다.

소박하지만 즐겁기만 한 저녁 식사. 그동안 야채를 거의 먹지 못한 유목민들은 촬영팀이가져간 김치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반응도 좋았구요.

몽골인들은 술대접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깁니다. 손님이 오면 준비해둔 보드카나 전통술을 내옵니다. 손님 대접이 극진하기로 유명한 몽골인들. 그것은 이토록 황량하고 텅 빈 공간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찾아오는 사람에 대한 짙은 그리움의 표현일 테지요.

고비 지역은 몽골에서도 특히 비가 적은 지역이에요. 비가 올 듯 구름이 몰려와도 실제 비가 내리는 경우는 드물다고 하지요. 눈도 비도 안 오는데 집들이 한곳에 모여 있으면 더 힘들 거예요. 고비의 유목민들은 우물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생활합니다. 물 긷는 시간을 알고 기다린 듯 사람이 나타나자 우르르 나타나는 가축들. 강수량이 턱없이 부족한 고비에서 유일한 물 공급원인 우물은 생존의 절대 조건이지요.

여전히 겨울처럼 메마르고 척박한 4월의 고비. 하지만 가축들은 이 무렵 새끼를 낳아 기르기 시작합니다. 동물들이 봄에 새끼를 낳는 것은 나름의 지혜를 발휘한 거예요. 봄이 지나면서 기온이 서서히 오르고 먹잇감이 더 풍부해거든요. 겨울이 오기까지 충분히 자랄 수 있는 시간을 버는 것이지요.

5월. 고비에는 모래바람이  여전히 거셌습니다. 고비는 우리나라의 봄을 뒤덮는 황사의 주요 발원지이기도 하지요ㅠ.ㅠ
모래바람은 유목민에게 더 큰 시련이에요. 차가운 바람에 실려온 모래는 대지를 뒤덮어 풀을 죽게 하고 모든 물길을 말려버려요. 사람도 가축도 모두 힘겨운 봄. 우리에게 봄은 패션이 바뀌고 새 각오 다지게 하는 생동감 있는 계절인데 몽골에선 너무나 다른 이미지군요.


고비의 가혹한 환경은 그곳에서 살아가는 모든 것들을 강인하게 만듭니다. 6월과 8월 사이의 짧은 여름은 자연이 주는 축복이에요. 한낮이면 최고 40도까지 올라가는 고비의 여름은 밤이 되면 다시 기온이 뚝 떨어지는 극단적인 기온을 자랑하지요.



여름 집터로 옮기고 게르를 세우는 가족. 게르는 운반이 간편하고 조립과 해체도 쉽습니다. 천정은 펼쳐진 우산 형태의 둥근 뼈대로 되어 있고 양털로 된 두겹의 펠트를 걸치고 끈을 이용해 단단히 묶으면 이사는 끝이에요. 책에 따라 설명이 다르긴 한데 어른 3,4명이 한시간 안에 짓고 해체가 가능하다고 하네요. (어떤 책은 3시간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는데 아무튼 우리네 이사와는 판이하게 다르지요) 촬영팀이 본 가족은 한 시간 내에 집을 지었습니다. 이 여름집은 10월까지 살게 될 곳이에요.

게르의 출입문은 항상 태양이 있는 남쪽으로 냅니다. 가운데에는 반드시 난로가 있고요. 이 난로가 하늘과 자신들을 연결시켜준다고 생각해서 굉장히 신성시해요. 막내 상속제인 몽골에서는 막내 아들에게 이 난로를 물려주지요. 그리고 난로를 중심으로 남자의 영역과 여자의 영역을 좌우로 또 구분하구요.

척박한 돌산에도 꽃은 피는 법! 고비의 식물들은 서둘러 잎을 내고 꽃을 피웁니다. 여름이 너무도 짧기 때문이지요. 바위산에도 초록이 피어나는 여름. 아르갈리 산양도 열심히 먹이를 먹습니다. 먹이를 두고 신경전을 벌이기도 하지요. 다 자란 경우 몸무게가 200kg 에 달하는 대형 포유류 아르갈리 산양. 건조기후에 잘 적응한 녀석들은 특별히 물을 먹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먹이에 포함된 소량의 수분만으로 생존이 가능한 것이지요. 아르갈리 산양은 보통 한 마리의 새끼를 낳아요. 새끼를 키우는 건 전적으로 암컷의 몫. 녀석들은 짝짓기를 할 때 외에는 암수가 분리되어 다닙니다.

9월, 고비 구르반사이항 국립 공원을 향해 촬영팀이 떠납니다. 몽골에서 인구 밀도 가장 낮은 지역이에요. 알타이 산맥의 끝자락에 자리한 곳으로 몽골에서 가장 외지고 단절된 지역이지요. 그중에서도 산세가 워낙 깊어 여름에도 얼음이 그대로 있다는 욜린암. 수염수리가 사는 계곡이란 뜻이에요. 넓게 펼쳐진 모래 언덕 홍고린 엘스.

폭 12km. 높이 200m. 길이는 180km에 이른다는 고비에서 가장 큰 모래 언덕. 바람에 날리는 모래 알갱이가 서로 부딪혀 소리를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몽골인들은 이곳을 노래하는 언덕이라 부르지요. 저런 풍경은 멋진 풍경이 가득 담긴 달력 속에서 자주 보던 모습이네요^^

구르반사이항은 바위산과 모래 언덕, 초원으로 이뤄진 독특한 풍경을 갖고 있습니다. 모래 언덕과 바위산 사이 초지대에는 드문드문 유목민들이 살고 있지요.



원래 이 지역은 야생 당나귀의 주서식지로 알려진 곳이에요. 풀이 잘 자라지 않는 거친 땅이라는 의미의 고비.

그러나 뜻밖에도 다양한 식물들이 자랍니다. 부족한 물과 많은 초식동물들 때문에 더 강인해진 식물들은 대부분이 키가 작고 줄기는 나무처럼 단단해져서 염소나 양은 잘 못 뜯어요. 잎대신 가시를 내는 것도 고비에서의 생존 방식이지요.

몽골에서도 멸종 위기종이 되어버린 야생 당나귀. 말에 비해 덩치가 작지만 지구력이 좋고 건조에 강하지요(한 마디 더 보태야지요. 너도 숏다리! ^^;;;).  녀석들은 땅속에 흐르는 물을 잘 찾아내며 땅을 파서 물을 먹기도 합니다. 행동반경이 넓어 먹이를 찾아 중국까지 내려가기도 한다네요.(그러고 보니 우리나라에는 자기 집 찾아온 진돗개가 유명하지만 몽골에선 중국에 보낸 말이 찾아온 일도 있다더군요. 세상에!)  

생의 의지를 시험하게 하는 땅 고비. 메마른 땅 고비에는 자연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인간이 감히 범접하기 힘든 포스와 함께요!

5부도 보았는데 5부는 촬영팀이 반 년 동안 얼마나 고생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엄살이 아니라 정말 고생 많이 했더라구요. 우리가 보는 다큐 한 편에는 무수한 땀이 어려 있겠지요. 다른 많은 것들도 물론 그렇겠지만, 낯선 환경에서 그야말로 '야생'을 체험한 제작진에게 박수를!( 1박 2일에서 외치는 그 '야생'과는 너무 격이 다르달까요^^;;;)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81세의 사냥꾼 직지트 할아버지였는데, 촬영팀과 합류한 야생동물 연구가가 3년 전에 6개월 간 신세진 일이 있었어요. 다시 만나자 할아버지는 눈물까지 흘리며 반가워 하더라구요. 손주들을 위해서 유목생활을 접고 도시로 가서 아이들을 돌봐주는 동안 할아버지는 몹시 답답해 하셨지요. 촬영팀은 그 할아버지와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일부러 그 지역에 다시 갑니다. 그때 할아버지는 한쪽 볼에만 뽀뽀를 해주었지요.




나머지 한쪽은 나중에 와서 다시 받으라는 말. 사람을 그리워하는, 사람을 애틋해 하는 그 마음이 찐하게 전해졌어요. 그 척박한 환경에서 드물게 보는 사람이란 얼마나 반갑고 그리운 존재일까요. 우리는 너무 좁은 공간에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 사는지라 그 적막과 고요는 오래 상상을 해야 연상이 될 것 같아요. 물론, 우리는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지만 말입니다.

명절 마지막 연휴를 몽골 다큐와 함께 보냈네요. 김연수씨 기행까지 합하면 오늘 하루에 6편을 보았어요. ㄲ ㅑ ㅇ ㅏ!

내일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이평래 교수님 몽골 강의를 들으러 갑니다. 실은 강의 신청한 게 아니라서 청강하는 거예요^^;;; 설마 내쫓으려구요. 지난 주에도 무사히 듣고 왔는데요 뭘^^ㅎㅎㅎ 7주짜리 강의인데 수강생 연령대가 아주 높았어요. 교수님은 그게 불만이라고 하시더군요^^;;;

지난 해에 직장인을 위한 역사 강의를 서울 역사 박물관에서 들었는데 그때도 연령대는 꽤 높았지만, 이번 몽골 강의가 한 수 위더군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참 많았어요. 떠들지 않아서 나름 수업 분위기가 좋지만, 활기가 부족해서 수업에 재미가 덜한 게 확실히 흠이긴 합니다만, 청강생인 저로서는 투덜거릴 입장이 아니지요^^;;;

뒷수다가 길었습니다. 연휴는 끝나가지만, 그래도 날마다 파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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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헨 2008-09-16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휴가 알차게 느껴지셨겠어요.^^전 자다 일어나서 시골 다녀오고 다녀와서 피곤해서 또 자고...
그런 날들이었답니다.ㅋㅋ며느리지만 뭐 저희집은 일이 없기 때문에 한가했어요.
왔다갔다 차 조금 밀려주고..그랬죠.^^
한쪽에만 뽀뽀해주고 나중에 와서 다른 쪽도 받으라는 말이 인상 깊네요.
몽골인들에겐 뭔가...우리와 다른 구조가 있는거 같아요.^^
깊이감...삶에 대한 그런게 있네요.^^

마노아 2008-09-16 11:05   좋아요 0 | URL
집에서 콕 박혀서 음식 조금 하고 조카들하고 놀아주고 그리고 다큐보고요, 그런 연휴였어요^^
몽골인들의 삶의 모습을 보면 뭔가 굉장히 치열한 느낌이 들어요.
우리도 대단히 바쁘게 아등바등 살고 있긴 하지만 자연과 동떨어진 듯 살고 있는데, 저 사람들은 자연에 기대어, 의지해서, 또 수긍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모습에 좀 숙연해지는 느낌이기도 하구요. ^^
 

늑대를 막기 위한 사냥꾼을 둘 만큼 헨티에는 많은 늑대가 살았다고 합니다. 이제는 옛 얘기로 기억될 뿐이지만요.

칭기즈칸의 고향으로 알려진 몽골 동쪽의 헨티산맥 일대는 1992년 자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어요. 헨티지역은 넓게 펼쳐진 야생화 군락으로도 유명하지요.



이곳은 1200여 종의 다양한 식물이 자라고 있다고 합니다.
헤를렝강(케룰렌강)은 1000km 넘게 흘러갑니다. 헨티 산맥은 여러 크고 작은 강들이 시작되는 수원지이기도 하지요. 강 주변은 새들에게 이상적인 서식지에요.


8월. 여름의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기온이 낮아지고 산 높은 곳은 이미 단풍이 물들기 시작했지요. 날이 추워지면서 집집마다 늑대로 인한 가축의 피해가 심해지고 있어요. 늑대에게 물려죽은 동물은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강가에 버린다고 합니다. 몽골인들은 직접 잡은 가축이 아니면 먹지 않거든요. 가까운 곳에 사체를 놓아두면 늑대가 또 올 수 있으므로 마을에서 4km 떨어진 강변까지 가서 송아지를 버렸대요. 촬영팀이 찾아가 보니 이틀이 지났을 뿐인데 이미 앙상한 뼈만 남아있었지요. 

기온이 낮은곳부터 물들기 시작하는 단풍. 산 정상에서 아래로 번져가는 단풍을 따라 늑대도 인가 근처로 내려옵니다. 숲속에서 다른 야생 동물을 사냥하는 것보다 유목민들이 기르는 가축을 노리는 게 훨씬 편하다는 걸 녀석들도 알고 있거든요. 해질녘부터 활동을 시작하는 늑대. 무리 생활을 하는 녀석들은 함께 울부짖으면서 영역을 확인하고 동료들의 결속을 다집니다.  방송에선 늑대 울음소리를 한동안 들려줬는데 여기에 함께 담을 수가 없네요.^^;;;; 

초원의 일과는 이른 새벽부터 시작됩니다. 젖을 짜기 전 반드시 새끼에게 젖을 물리는 유목민들. 자연을 숭배하는 풍습이 하나나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하면 젖을 짜기도 훨씬 수월해지거든요. 일종에 모성애를 이용한 수법이랄까요.

물이 풍부해 초지가 발달한 헨티는 다른 지역보다 소가 많습니다. 방목해 키우기 때문에 종종 늑대의 습격을 받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안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지요. 혹독한 겨울을 대비하기 위해 하루 한 시가 아쉬운 계절인 이때, 사람에게도 자연에게도 가을은 턱없이 짧기만 하지요.

초원의 대표동물 타르박도 겨울 준비에 한참 바쁩니다. 긴 겨울을 버티기 위한 녀석의 전략은 동면이에요. 엄청난 양의 먹이를 먹으며 지방을 비축하지요. 겨울잠을 자지 않는 생토끼도 바쁘기는 마찬가지에요. 겨우내 먹을 수 있도록 많은 풀을 모아야 하거든요.  건초 더미는 굴에서 가까운 데에 둡니다. 눈이 쌓여도 길을 내고 풀을 먹을 수 있어야 하니까요. 문득 울릉도의 우데기 집이 생각나네요^^;;; 

죽음을 찾아다니는 새 독수리. 녀석들이 날던 곳에는 피비린내 가득하지요. 죽어간 것은 송아지였는데 녀석을 해친 것은 늑대로 보입니다. 덤불까지 5,60m를 끌고 간 뒤 배를 채우고 사라졌군요.  자기가 사냥한 먹이에 집착이 강한 늑대는 다시 나타날 것으로 예상, 촬영팀은 100m 밖에서 잠복촬영을 시도합니다. 5부에서 일지를 보니까 잠복촬영은 인내와의 싸움이더군요. 텐트 안에 혼자 들어가서 하루 온종일 기다리기도 하구요. 그 사이 문을 열 수가 없어서 안에서 모든 것을 다 해결해야 한다고 하네요. 그러니까 모든 생리 욕구를 다....(고생에 묵념을...!)

늑대는 후각과 청각이 예민합니다. 가까이 있는 것엔 청각을, 1,2km 떨어진 곳에는 후각이 민감하게 반응하지요. 걸음 한 걸음 옮길 때에도 조심스러워하는 녀석. 주변에서 들려오는 새소리에도 걸음을 멈춥니다. 늑대의 출연에 놀란 까마귀들이 경계음을 냈어요. 잔뜩 겁을 먹은게지요.  늑대에게도 매순간이 긴장의 연속이에요. 그 와중에도 제 영역표시를 잊지 않는 녀석은 배설물로 확실한 흔적을 남깁니다. 결국 먹이 근처엔 와보지 못하고 숲으로 돌아가버려요. 보통 예민하고 조심스러운 게 아닙니다. 무리 생활을 하며 강력할 결속력을 자랑하는 게 늑대인데 이 녀석은 왜 혼자일까요?  야생동물 전문가의 얘기로는, 늑대무리는 강력한 순위제 계급사회라고 합니다. 보통 두 번째 순위가 리드를 잡기 위해 대장 늑대한테 도전을 하는데, 도전에 성공하면 다행이지만 실패하게 되면 무리에서 축출된다고 해요. 이땐 홀로 다니는데 몹시 위험해진다고 합니다. 눈치를 보면서 혼자 먹이를 구해야 하는데 송아지를 노렸던 저 늑대도 그런 케이스겠지요. 고독을 씹으며 살고 있는 늑대를 보니 좀 짠하기도 하네요.

하룻밤 사이 헨티는 눈보라 휘말리는 겨울로 뒤바뀌어 버렸습니다. 9일 간의 맹추위가 9번 계속된다는 몽골의 겨울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법! 시베리아 낙엽송들은 단풍든 잎들을 채 떨어뜨리기 전에 눈으로 뒤덮이고 말았어요.

겨울은 독수리에게도 녹록치 않은 계절입니다. 영하의 날씨 속에 눈이라도 쌓인다면 먹이 찾기가 어려워지지요. 먹잇감이 생겼을 때 최대한 배불리 먹어둬야 해요. 독수리는 번식기 이외에는 늘 무리지어 살기 때문에 다른 동료들의 움직임으로 먹이 있는 곳을 알아차리지요. 하지만 우선권은 역시 힘 있는 놈이 갖기 마련.

11월 말. 검독수리를 만나기 위해 촬영팀은 울기로 이동을 했습니다.  헨티에서 2,000km 이상. 꼬박 5일을 달려가야 하는 먼 길. 몽골의 서쪽 끄트머리 땅이에요. 워낙 먼 데다가 추위까지 더해 유목민들에게 신세를 지며 갈 수밖에 없었지요. 찻잎을 끓인 물에 우유를 넣어 만든 수테채를 건네며 잠시 들러가는 이방인들을 따듯하게 맞아주는 사람들. 유목민들에게 손님은 언제나 그립고 반가운 친구같은 존재입니다. 게르 주인은 자신이 사냥한 붉은 여우 모피를 자랑삼아 보여주기도 했어요. 울기에 가까워지면서 사람들의 옷이며 분위기, 그들을 둘러싼 풍경까지 이전과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몽골의 소수민족 카자흐족이 살고 있는 곳이거든요.  (요즘 '생 배노?몽골'이란 책을 읽고 있는데 책 속에 등장한 몽골 서쪽 끝 카자흐족이 많이 사는 쳉겔마을이 이 근처일 듯 싶네요)

2000여 km에 달하는 거대한 산줄기 알타이. 우리말로는 황금산이라고 합니다. 알타이 지방의 황량한 풍경에는 신비하고 오래된 삶의 흔적이 남아 있었어요. 어렵지 않게 발견되는 알타이의 암각화는 석기 시대부터 이곳에 인류가 살았다는 흔적을 보여주지요. 험준한 알타이 산맥 한자락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카자흐족. 몽골인들과 마찬가지로 유목 생활을 하지만 최근엔 많은 수가 정착해 살아가고 있다 합니다. 몽골인들의 게르와 달리 알록달록 장식된 집안 풍경. 몽골인들은 주로 불교를 믿는데 이들은 이슬람교를 믿고 있지요.

몽골인들의 게르와 달리 흙으로 지은 집은 언뜻 우리나라의 온돌을 떠올리게 합니다. 



여우의 앞다리 털로만 만든 겨울모자 부쉬파크마흐. 이 모자 하나 만들어지는데 11마리의 여우가 필요하다고 하네요. 사냥한 여우의 가죽은 시장에 팔거나 집에서 모자로 만들어 씁니다.

사냥을 나가는 날 아침은 식구들 모두가 분주해지지요. 

사람의 다섯 배 이상의 시력을 갖고 있는 검독수리. 맹금류의 사냥 비결은 이 눈에 있습니다. 사냥에는 암놈만 사용한다고 해요. 수컷보다 힘이 세고 훈련에도 빨리 적응하기 때문이지요. 목덜미에 금빛 털 때문에 골든 이글이라 불리는 검독수리는 맹금류 중에 가장 용맹합니다. 우리에서 꺼내올 때는 제일 먼저 눈가리개를 씌우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가축들을 노리기 때문이에요. 



사냥을 시작하기 앞서 눈가리개를 벗겨주자 검독수리는 무서운 속도로 여우를 향해 날아갔다. 녀석은 단숨에 머리를 움켜쥐고 사냥감을 제압하지요. 한쪽 발톱으로 목덜미를 누르고 다른 한쪽으로 주둥이를 눌러 숨통을 조여 가는데 정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어요.


사냥에 성공한 뒤에는 재빨리 검독수리를 떼어내야 합니다. 가죽이 망가지면 안 되기 때문이지요. 사냥한 여우의 가족은 시장에 내다팔고 고기는 검독수리의 먹이로 써요. 사냥에 나오기 몇 주 전부터 먹이를 주지 않고 굶기는데, 사냥에 성공한 뒤 먹이를 주는 것도 계속되는 훈련의 과정이랍니다. 현지인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어요.

“몽골의 카자흐족은 옛날부터 검독수리를 길들여 사냥을 하며 살아왔어요. 아이들도 한겨울에 검독수리로 여우를 잡아서 생활합니다. 우리 부족에게 가장 소중한 동물이 검독수리입니다. 몸이 아프거나 병들었을 때 검독수리와 함께 초원에 나가 여기저기 구경하다 보면 몸이 낫는 것 같아요.“

그야말로 생활의 일부분이 되어버린 검독수리에요. 몽골인들이 말을 그렇게 느끼는 것처럼 말입니다.

촬영팀이 떠날 때가 되자 집에 있는 모든 음식을 내놓고 손님을 대접하는 순박한 사람들. 이웃들까지 모두 모여 떠남을 아쉬워했습니다. 넘치도록 정이 많은 카자흐 사람들. 결국엔 집집마다 들러 대접을 받고서야 마을을 떠날 수 있었지요. 사냥꾼들은 돈버린(? 기타처럼 생겼네요.)이란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습니다. 제목은 크란부르크트. 최고의 검독수리란 뜻이에요. 카자흐족 남자들에게 검독수리란 자부심과 용맹의 상징이지요. 가사가 정해진 것이 아니라 부를 때마다 다르게 부른답니다.  그야말로 느끼는 대로 즉석 작사가 되는 거지요. 자기 검독수리가 최고의 검독수리란 내용의 가사는 모두 같지만요.

척박하고 거친 땅에서 더욱 혹독한 계절을 보내는 생명들. 자연이 그들에게 보내는 시련은 삶을 단련시키는 축복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지요.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영역의 축복이지만, 분명 그들은 자연을 정복하기보다 순응하며 거스르지 않고 어우러져 사는 사람들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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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9-17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자흐에도 몽골인들이 살까요?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마노아 2008-09-17 17:43   좋아요 0 | URL
아마 거의 없지 않을까요? 일단 거기는 유목이 안 된다고 하던데요. 십년 전에도 이미 유목민이 거이 사라졌다고 하는 걸 보면 지금은 더 그럴 것 같구요. 유목을 포기한 몽골인이라면 가능할지도요. 샌드위치가 되어버린 카자흐 출신의 유목민들이 좀 안쓰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