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 정원의 이방인 1- 하츠 아키코 걸작선 01
하츠 아키코 지음 / 시공사(만화)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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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매완료


유치와 로맨스 사이의 작은 간격. 하츠 아키코 특유의 묘한 분위기가 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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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마중 - 유년동화
김동성 그림, 이태준 글 / 한길사 / 200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정말 만나고 싶었던 동화책을 드디어 보게 되었다. 요새는 나보다 더 중고샵에 올인하는 언니가 한밤중에 급하게 문자를 찍었다. 얼른 담아서 주문해 달라고. 그래서 부랴부랴 주문해서 받은 엄마 마중.

사실 글을 쓴 작가보다 그림을 그린 김동성 작가에게 더 관심이 가 있었다. 책을 펼쳐보면서 그 아련한 그림들에 얼마나 가슴이 훈훈하던지.


추워서 코가 새빨간 아가가 아장아장 전차 정류장으로 걸어 나온다.
전차가 등장하는 걸 보니 배경이 아주 오래된 옛날이다.

녀석이 '낑'하고 안전 지대에 올라선다.

저 높지 않은 안전지대에 낑하고 올라가는 모습에서 아이가 아주 어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 있는 사람들의 옷차림 등에서 추운 계절이라는 것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무채색 옷이 많았을 그 시대의 옷차림을 김동성 작가가 잘 잡아낸 듯 보인다.

책은 간결한 그림과 진한 풍경 그림이 교차되어 지나가는데 한컷한컷 넘길 때마다 짠한 감동이 밀려온다.



전찻길에서 하염없이 엄마를 기다리던 꼬맹이가, 이윽고 도착한 전차의 차장님께 묻는다. 
"우리 엄마 안 와요?"
차장은 "내가 너희 엄마를 아니?"하고 되묻지만, 그 냉랭함 속에는 '내가 어떻게 아니!'와 같은 질책이 느껴진다.

남겨진 아이는 지루함을 견뎌내며 다시 하염없이 전차를 기다리고, 다시 온 전차 차장님께 똑같이 질문한다.

"우리 엄마 안 와요?"

마찬가지로, "너희 엄마를 내가 아니?"하고 가버리는 차장님.


아이는 다시 기다린다. 쪼그리고 앉아서 다음 전차가 오기를...

그 사이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계속 변했다.

그들 모두 전차에 타거나, 기다리는 사람을 만나서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겨울 철새들을 배경으로 다시 꿈처럼 다가오는 노란 풍경 속의 전차.

아이는 다시금 고개를 빼꼼히 들고 묻는다.

"우리 엄마 안 와요?"

 

 



"오! 엄마를 기다리는 아가구나."

라고 말한 차장은 직접 내려와서 아이를 다독여준다. 다치지 않게 한 군데 서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차분하게 말씀해 주시는 차장님.






 

 







 

 

 

 

 

어째서일까. 아이는 그때부터 쓸쓸한 풍경을 배경으로 한 채 꼼짝않고 그 자리를 지킨다.
바람이 불어도, 전차가 다시 와도, 코만 새빨개진 채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이다.

눈이 오고 그 눈이 쌓이고, 계절이 깊어가는 건지, 몇날 며칠이 더 흘렀는지 모르겠다.
아이는 그날 밤 늦게까지 엄마를 기다렸을 수도 있고, 엄마를 만나지 못해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전찻 길에서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이후 책은 글자 없이  그림만 보여주다가 마무리를 짓는다. 눈썰미 있게 지켜보지 않으면 이야기는 너무 슬프게 끝난 듯 보인다.

도대체 이토록 기다리는데 왜 엄마는 아니 오시는지! 작가는 왜 엄마랑 아가를 만나게 해주지 않는지 원망이 생길 법도 하다.

헌데, 자세히 지켜보자.



저기 눈 쌓인 계단 앞에 엄마 손 꼬옥 잡고, 엄마가 주셨을 빨간 사탕(경단??) 들고 엄마 바라보며 신이 났을 아이의 모습이 보이는가.

엄마의 손에도 뭔가 잔뜩 들어있는 바구니가 들려 있다. 아이를 위한 먹음직스런 무엇이었을 수도 있고 장사하고 남은 떡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건! 엄마와 아이가 만났다는 것이다.

독자는 드디어 만난 엄마와 아가를 발견하고는 금세 쓸쓸한 마음을 밀어내고 기뻐한다. 이 아련한 이야기, 해피엔딩이구나!

작가에 대해서 검색을 해보았다. 악! 상허 이태준이 아닌가! 상허당의 그 주인!

게다가 '문장강화'의 이태준이 이 이태준일 줄이야. 신간이라 생각했던 그 책은 사실은 고전이었던 것이다.

사망 연도가 잘 나와있지 않은데 북한에서 숙청되면서 그 즈음에 죽었을 거라고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작품의 배경이 전차가 나오는 아주 오랜 옛날인데, 이 시대를 일제 치하라고 가정을 한다면,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의 고단함이 더 절실하게 느껴진다. 때맞춰 오는 전차의 차장에게 물어봐도 알 수 없는 엄마의 귀가. 광복을 기다리던 우리 국민들의 염원이 아니었을까.  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치고, 코가 새빨갛게 변하면서까지 기다린 엄마는, 마침내 눈 가득 쌓인 어느 밤에 돌아오신다. 우리가 그토록 기다렸던 그 광복의 날처럼. 아무리 추워도 아무리 코가 빨개져도, 발이 시려도, 엄마가 왔으니 그 길은 춥지도 어둡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가는 마냥 행복했을 것이고, 따뜻한 꿈을 꾸었을 것이다.

작가가 이 책을 썼을 때는 이런 염원을 담아 쓴 것이 아닐까. 동화책에서 기대 이상의 감동을 찾았다. 원래도 좋아했던 김동성 작가는 더 좋아졌다. 이태준 선생님 책은 좀 더 찾아봐야겠다.  이 책은 조카 책인데, 내 책으로 하나 더 구입하련다. 역시 소장용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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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Journey 2008-09-22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막 가슴이 아려요 ... 마노아님 리뷰 보고 이 책 찜~해 놓았어요. ^^

마노아 2008-09-22 19:59   좋아요 0 | URL
내용도 그림도 모두 너무 아름답고 아려요. 김동성 작가님 그림이 그런 느낌에 꼭 들어맞곤 해요. 너무 좋아요^^
 
몽골에 가면 초원의 향기가 난다
장장식 지음 / 민속원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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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말은 어깨 높이 120~130cm이며, 무게는 310kg으로 비교적 왜소한 편이다. 체격상으로 유럽 말에 비해 몸집이 작으며 순간 속력도 떨어지지만 인내력(특히 지구력)과 추위에 특히 강하다. 왜소한 몸은 초원의 바람을 덜 쐬는데 유리하며, 스스로 초원의 풀을 뜯어먹는 반야생 상태의 생활을 하기 때문에 초원지대에 적합한 말이라 하겠다.

몽골 말은 사료를 먹는 유럽의 말과는 달리 초원의 풀을 뜯어먹으며, 겨울철에는 눈 속에 파묻힌 마른 풀을 뜯어먹는다. 눈이 내렸을 경우 말굽으로 눈을 헤치고 풀을 뜯어먹는 모습은 흔히 이야기하는 '목가적' 풍경과는 거리가 멀다. 간혹 눈이 녹았다가 얼면 마른 풀을 뜯어먹지 못해서 아사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254쪽

말이 태어난지 3년이 되면 조련을 시작한다. 매일 10여 km를 뛰게 해 땀이 나게 하고 재갈을 물려 먹지 못하도록 한다. 10여 일의 조련이 끝나면 말은 어깨가 넓어지고 배가 홀쭉해져 위엄을 갖춘 모양이 된다. 이렇게 훈련을 받은 말은 물과 목초가 부족한 곳에서도 일주일 정도를 견딜 수 있는 강인한 말이 된다. -255쪽

측대보는 오른쪽 앞다리와 뒷다리가 동시에 올라가고 왼쪽 앞다리와 뒷다리가 내려가는 주법이다. 이런 주법을 가진 말을 '조로모리'라 했는데, 제주도의 조랑말이 이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또 조로모리 상태에서 뒤를 돌아 쏘는 활 솜씨는 기마술의 진수라 할 수 있는데, 이를 '파르티얀 샤프트'라 한다. 이것은 고구려 고분 무용총에 그려진 활 쏘는 기술과 같은데, 이란계 유목민이었던 파르티아 사람들(기원전3세기)이 이런 방식의 활을 잘 쏘았다 한다. 중형마가 주류를 이루는 북방 유목민족의 말들이 뛰어난 전마로서 명성을 떨치고 세계를 주름 잡을 수 있었던 까닭도 바로 측대보 주법에 있다고 할 정도이다.-255쪽

몽골인들은 다양한 유제품을 먹는데 이것들은 주로 양젖, 소젖을 이용한 제품이다. 이는 젖을 내는 가축으로서는 말이 소나 양에 비해 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몽골인에게 말은 식용의 개념보다 다른 용도로 쓰이는데, 1차적으로 탈것이라는 개념과 함께 주인과 생명을 같이 하는 동물로 사람과 같은 대우를 받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257쪽

우승자가 결승선에 들어오면 우승자를 기리는 찬시인 '홀치모리'라는 노래가 마두금 반주에 맞춰 연주된다. 내용은 우승자에 대한 찬양이라기보다 말에 대한 찬양이다. 우승한 말에게는 '투메니 에흐(만 마리 말의 으뜸')라는 칭호가 부여되며, 결승점에 도달한 모든 말들은 '모두 복 받은 말(부렌 자르갈)'이라는 칭호가 수여된다. 우승마를 비롯한 5등까지의 말은 광장을 세 바퀴 돌며 우아한 자태를 뽐낸다. 이때 기수와 말(머리와 엉덩이)에게 아이락을 뿌리며 축복해 주고 상을 준다. 우승마의 이마에 메달을 달아준다. -265쪽

1960년대 몽골은 선린외교의 이로한으로 베트남에 말을 선물한 적이 있다. 비행기에 의해 수송되었던 이 말은, 6개월 뒤에 홀몸으로 베트남을 탈출하여 몽골로 돌아왔다고 한다. 지금도 몽골 사람들은 이 전설적 이야기를 즐기며 몽골 말의 영리함과 강건함을 자랑으로 삼는다. 그들은 인마동체임을 꺼리지 않는다. 그만큼 말과 함께 생활하고, 말과 함께 흥망성쇠를 같이했다. 유목제국을 세웠던 기반도 말이었고, 전 세계를 정복하여 지구촌을 이룩했던 것도 몽골 말 때문이었다. 이런 까달게 말에서 태어나고 말에서 죽었던 몽골인은 가히 마상족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다. -266쪽

가을은 지나가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이내 겨울이 오고, 봄은 오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여름이 된다는 몽골의 겨울. 그렇기에 몽골 사람들은 겨울에 관해 매우 특별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몽골의 겨울 추위는 양력 12월 22일 동지부터 81일 동안 계속된다는 산술적 계산이 바로 그것이다. 이 사이에 추위가 그 강도에 따라 아홉 번 바뀌는데, 81일에 아홉이니, 한 추위가 9일간 지속된다는 계산이다. 몽골인은 이런 아홉 단위를 '첫 구일, 두 번째 구일...'식으로 표현한다.

몽골인은 3이라는 숫자를 길수로 여겨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3의 3배수인 9는 하늘의 수 내지는 인간에게 있는 하늘 힘의 최대치로 생각한다. 81은 9의 9배수니 세상에서 가장 큰 수요 완전한 수로 여기고 하늘 힘의 최대치를 상징한다.-285쪽

뭉치려 해도 잘 뭉쳐지지 않는 게 몽골 눈의 특성이다. 습기가 없기에 마치 밀가루처럼 손아귀를 빠져나가 바스락거릴 뿐이다. 분명 냉기에 눈의 결정마저 얼어버린 탓이리라. 그래서일가. 눈을 밟으면 바스락거리는 요란한 소리만 날 뿐 녹지를 않는다.-288쪽

몽골의 겨울은 9일 간격으로 추위의 강도가 더해져서 네 번째 9일을 정점으로 하다가 다섯 번째 9일에서 꺾이기 시작하여 마침내 아홉번째 9일이 지나서야 봄이 온다. -290쪽

(크리스마스 씨즌)칭기스칸 호텔 앞에도 나무를 세우고 얼음으로 만든 칭기스칸을 세워놓았다. 칭기스칸 호텔이니 칭기스칸을 조각하여 호텔의 이미지를 내세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21세기를 과거의 찬란한 영화와 함께하려는 의도도 담았을 게다.

21세이와 대정복자. 21년의 재위기간(1206~1227)에 50여 회의 전쟁을 벌여 40여 나라를 정복했다.-291쪽

나담은 '놀다'라는 뜻을 가진 '나다흐'에서 비롯된 단어인데, '축제' 또는 '놀이'라는 말이다. 본디 나담은 8월에 열었으나, 지금은 독립을 쟁취한 때를 기념하여 7월 11일에서 13일까지 3일간 거행하고 있다. 바로 이 나담때 씨름을 비롯하여 말타기와 활쏘기를 한다. 이 세 경기를 남성 3종 경기라 하는데, 씨름이야말로 나담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나담은 험난한 자연환경과 열악한 경제구조를 가진 몽골에서 군사적 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이를 통해 군사들의 힘을 기르고 전투력을 향상시키려는 상무정신과 관련이 있는 전통이 아닐 수 없다.-305쪽

굽이 없고 신발코가 우뚝 솟아오른 몽골전통 신발 몽골고탈. 두꺼운 통가죽으로 만들었는데, 맨땅에서는 자유로이 움직일 수 없는 단점이 있다. 신발코는 말등자에 발을 넣을 때 잘 빠지지 않도록 고안한 것인데, 기마 민족의 특성을 잘 드러내는 신발이라 하겠다. 몽골사람들은 고탈을 신을 때 양말을 신지 않고 긴 천으로 된 발싸개로 발을 둘둘 말아 싼다. 혹독한 추위를 막으려는 생활의 지혜가 담겨 있다.-305쪽

오늘날 몽골 씨름의 원형으로 간주되는 것은 거란족의 씨름이다. 1931년 요나라의 동경유지에서 팔각형 백색도관이 발굴되었는데, 이 유물의 8면에 씨름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금나라 때에는 여진족은 물론이고 중국인들도 씨름을 즐겨했다. 씨름 자체가 워낙 상무정신과 관련된 것인지라 한족의 발흥을 두려워한 금의 장종(1189~1208)은 1193년에 '여진 사람만 씨름을 하라'는 칙령을 반포했다. 그 결과 중국에서 씨름이 급격히 사라지게 되었다. 이런저런 사례를 볼 때 씨름이야말로 전통적으로 이어내려온 유목민의 놀이인 동시에 체력단련의 방법이 아닌가 한다.

돌궐의 후예인 터키에도 씨름이 있다. '40개의 샘물'이란 뜻을 지닌 키르크리나르라는 지역에서 행해지는 이 놀이는 '카라쿠삭'이라 불리는데, 팔이나 무릎이 땅에 닿아도 무방하나 양 어깨가 닿으면 진다. 씨름꾼들은 온몸에 올리브 기름을 바르기 때문에 서로의 몸을 쉽게 잡지 못한다. 기름을 바른다는 점에서 우리의 씨름과 판이하나 유목민의 씨름 전통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311쪽

비교컨대 한국의 씨름, 일본의 스모, 몽골의 부흐는 참으로 비슷하면서도 차이가 많은 경기라 하겠다. 한국의 씨름은 기술과 기법 면에서 '스모'나 '부흐'와는 완전히 다르며, 체급별이 아닌지라 체중이 많이 나가는 선수가 유리한 면에서는 '스모'와 '부흐'가 매우 흡사하다. 대결하는 방법에서는 '씨름'과 '부흐'는 비슷하고, 일본의 '스모'와는 판이하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우리의 씨름은 스모와 부흐의 중간 형태를 취한 듯하다는 인상이 든다.-311쪽

네르 : 이름
귀 : 없다
네르귀 : 이름 없음
다와 : 월요일의 아이
하과 : 수요일의 아이
바야르 : 막내
비 : 나
비비쉬 : 내가 아니다-313쪽

몽골 주부들의 하루 일과는 수테차이를 끓이는 것부터 시작한다.
음료로 뿐만 아니라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못한 사람은 수테차이 두어잔과 빵만으로 끼니를 삼을 정도다. -316쪽

음식을 마무리하는 것도 수테차이다. 그래서 수테차이가 나오면 식사가 시작되는 것이고, 식사 중에 수테차이가 나오면 식사가 끝난 것으로 생각해도 무방하다. 준비한 음식이 모두 나왔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318쪽

주부들은 아침에 차를 끓인 다음 반드시 우리네의 고수레와 같은 의식을 행한다. 수테차이를 끓인 다음 첫잔에 떠서 천신, 지신, 수신에게 고수레하는 신앙. 해가 뜨는 동쪽을 향해 선 다음 숟가락으로 차를 떠서 공중에 뿌린다. 이런 동작을 동서남북 방향에 각각 하는데, 제자리에 서서 시계 방향으로 돌면서 한다.

수테차이는 물론 젖을 신에게 바치기도 한다. 술이나 다른 유제품은 물론 심지어는 곡식까지 고수레한다. 방같은 좁은 데서 약식으로 할 때에는 약지에 묻혀 공중을 향해 3번 튕긴다.
동쪽을 바라보고 시작하는 것은 동쪽이 해가 뜨는 신성한 곳이기도 하며 울란바타르가 있는 방향이고 울란바타르를 둘러싼 네 개의 성산에 세운 어워가 있는 방향이기 때문.-318쪽

ㅁ오골인과 술을 나눌 때 첫잔의 술에 오른손 약지를 담가 물을 묻힌 다음 어깨 위로 손을 들고 튕기는 모습을 보는 것은 흔한 일. 천신과 지신 및 수신에게 바치는 고수레의 의미. 하지만 이동생활을 하는 유목민의 전통적 생활방식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다. 낯선 이를 비롯한 남의 술을 받을 때에 술에 독을 탔을 경우를 대비해서 고수레를 핑계 삼아 약지에 낀 은반지에 술을 흘려 독의 유무를 살핀다는 해석이 바로 그것.-318쪽

차를 뿌릴 때 마음속으로 기원을 한다. 기원문은 대체로 '모든 세계는 우리들이 잘 되도록 해 주시고 자손들이 안전하게 살도록 도와주십시오.'이다. 집안의 대소사를 위해서도 기원한다. 특히 양파와 당근을 심는 마당의 채마밭이 잘 되기를 바라는 기원을 하기도 한다. -319쪽

현재 몽골인이 입고 다니는 델이 중국의 영향으로 거의 한 종류로 통일되기는 했지만, 전통적인 델은 종족마다 다르다. 델의 문양과 양식이 다르기 때문에 델만 보면 그 사람이 어느 종족에 속한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재 도시의 몽골 처녀들이 델을 입은 모습을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운 일이다. 델을 입는 것 자체를 '촌스러운' 것이라 여기는 게 요즘 도시 젊은이들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도 여학생들은 델을 입고 등교했다는데, 지금은 그 자취를 찾을 수 없다. 자유화 바람이 세긴 센 모양이다. -321쪽

양궁은 서양 활이기는 하지만 활쏘기는 타민족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우리 민족이 자랑하는 고래로부터 이어온 장기이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 등장하는 활쏘기는 분명 사실이다. 뿐아니라 고구려는 세운 건국주의 이름이 '선사자'라는 주몽이니, '활을 잘 쏘는 사람'이란 뜻이다. 유목민족의 하나인 몽골족도 활을 잘 쏘았으며 '메르겐(가장 뛰어난 궁사)'이라는 칭호가 여전히 남아 있다. 고구려의 특산물 중 하나가 대궁이었고, 중국인은 우리를 동쪽의 오랑캐라는 뜻으로 '동이'라 하지 않았던가. 활과 그만큼 가까웠고 활 다루기를 잘 했다는 뜻. 올림픽의 양궁 솜씨도 그 유전적 형질이 남은 건 아닌지?-352쪽

바둑은 놀이의 성격상 유목적 성격이 짙다. 장기나 체스는 위계적 질서가 강조된 신분사회의 정치 논리가 반영된 놀이이다. 그러나 바둑은 왕과 병졸의 구분이 없이 구성원 각자가 동등하며 구성원 하나하나가 균질적인 구실을 한다. 유목사회란 개개인의 능력이 철저하게 중시되는 사회다. 우리가 장기보다 바둑을 더 좋아하고, 중국이나 일본보다 잘 두는 것은 바로 이러한 유목적 성격을 반영한 놀이에 원초적으로 익숙해 있음을 나타낸 것이라 해석할 수 있따. -353쪽

이동통신 보급률 1위. (2위 핀란드, 3위 노르웨이)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몽골리안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점. 일찍이 유목생활을 체험했던 민족인 것. 이동통신의 장점, 무한 접속과 원거리의 단거리화라는 기능을 가진 새 이기가 어느 민족보다도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것. 인터텟 구축 제1위라는 우리네 현실과 IT산업의 선두주자라는 점과도 상통한다. 수도권의 이사율, 다른 말로 하면 이동율이 세계 1위라는 점도 유목민의 이동적 특성과 관련이 있다.-354쪽

술잔을 돌리는 문화. 대체로 농경정착민족은 제 것의 술잔을 준비해서 술을 마시는 문화를 가졌다. 즉 술잔을 돌리지 않는다. 하지만 유목민은 술잔 하나를 준비해서 이를 돌리는 음주문화를 가졌다. 이동성이 강조되는 문화인지라 간편성이 으뜸가는 생활방식으로 굳어진 것이 바로 술잔 하나를 여러 사람들에게 돌리는 관습이며 간접 접촉을 통해 일체성을 가지려는 몸짓인 것. 우리의 음주 방식은 농경과 유목문화의두 형태가 합쳐진 것. 제 잔을 가지면서 이를 돌리니 말이다. 술자리가 1차에 끝나지 않고 2,3차로 이어지는 것도 유목성, 이동성과 관련이 있는 관습. -354쪽

고스톱이 인기를 끄는 것. 이동성과 초지 확보라는 절체절명의 특성이 반영된 놀이가 바로 고스톱. -355쪽

봄맞이 관광이나 가을맞이 관광의 열풍. 수천 년의 정착농경생활에서 이미 이동성은 자취를 감추었을 선싶은데, 우리네 여성들은 끊임없이 나들이를 실행했다. 삼월삼짇날의 답청 풍속이 그렇고 9월 9일 중구일의 단풍놀이가 그렇다. 우리네 여인들은 어디론가 떠나지 않으면 안 되는 숙명을 지녔다. 그래서 화전을 부치고 약수를 찾으며 물맞이, 단풍맞이를 해야만 했다. 공간의 문화에 실현된 시간의 문화이고, 농경문화에 투영된 유목성인 것이다. 이러한 관습과 체질이 구현된 것이 고나광버스놀이다.
버스 안 막춤은 유목민이 말을 타고 이동할 때 나타나는 몸동작과 같다. 유목민의 민속무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춤사위가 어깨춤이다. -3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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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장미 2008-09-20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몽골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아요. ^^

마노아 2008-09-20 23:11   좋아요 0 | URL
요새는 어디서 '몽골' 소리가 들려도 귀가 번쩍 트이는 경지에 이르렀지요^^ㅎㅎㅎ

마노아 2008-09-20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맨 아래 여섯 단락은 우리 안에 있는 유목성의 증거로 제시된 것들인데 좀 억지스런 부분이 있다. 역동성을 강조하고 싶은 마음은 알지만.

순오기 2008-09-21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밑줄 긋기는 타이핑하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겠어요~~ 그래서 나는 책에 밑줄은 그어도 서재에 옮기지는 못해요.
손가락 좀 주물러 줄게~ 이리 와요!!^^

마노아 2008-09-21 12:17   좋아요 0 | URL
쭈르륵 올렸는데 간혹 알라딘이 날려먹으면 분노게이지 급 상승이지요. 페이퍼와 리뷰와 달리 밑줄긋기는 임시저장 기능이 없거든요.(몇 번 문의했는데 만들기 어렵대요ㅠ.ㅠ) 그걸 방지하려면 한글에 미리 써서 다시 옮겨와야 하는데 그건 또 많이 귀찮지요^^;;;
책을 반납해야 하기도 하고, 워낙 페이지가 많으니까 일일이 찾기 어려워서 대체로 밑줄긋기를 선호해요. 일종의 저장 기능이죠. 앙, 손에 호~ 해주세요^^

노이에자이트 2008-09-21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계에서 가장 엄한 위계질서가 자리 잡힌 나라인 우리나라가 수평적 질서를 중시하는 유목적 기질과 어디가 닮았다는 건지...우리나라 사람이 유목민 기질을 좋아하는 이유가 뭘까요? 개고기를 옹호할 땐 우리는 유목민족이 아니기 때문에 개는 식용 외엔 쓸모가 없다고 하더니...

마노아 2008-09-21 16:34   좋아요 0 | URL
고구려 때문이지 싶어요. 그 광대한 땅의 주인공이었던 조상. 그들이 기마민족이었으니 우리 안에 그 유전적 형질이 있을 것이다!라는 주장을 하고 싶은 거겠죠. 어느 책에서 보았는데 우린 북방계보다 남방계에 더 가까운 사람들인데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면 싫어한다는 거예요.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 거죠. 그래놓고는 기를 쓰고 북방계의 흔적을 찾으려고 용쓴다구요. 얼마 전에 면접자리에서 교감샘이 그런 질문을 했어요. 과거 우리 땅이었던 만주 땅을 찾아올 수 있느냐고. 찾을 수도 없고 찾는 게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했더니 뭐 씹은 표정 되시더라구요..;;;; 이궁... 아무튼 갖다 붙이는데 뭐 일가견 있어요. 무슨 유목기질이래요.(ㅡㅡ;;)

노이에자이트 2008-09-21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구려도 조공 바친 나라였다고 교과서에 명기를 하든지 해야지 원...우리나라는 크고 강한 것에 대한 집착이 유달리 강하고 정복자인 척 하고픈 욕구도 유독 강해요.그래서 남자들이 해외에 나가 외국여성들을 정복대상으로 삼으며 매춘관광에 집착하는 것 같아요.그렇다고 그 나라 사람들이 우릴 존경하는 것도 아닌데...오히려 현지인들 반감만 잔뜩 사지요.

마노아 2008-09-21 22:24   좋아요 0 | URL
컴플렉스가 너무 심한 것 같아요. 큰 것 강한 것에 집착하지 않아도 아름답고 좋은 전통이나 역사도 많을 텐데 그런 것을 찾을 생각은 않고 이미 없는 것에 집착하고 뜬구름 잡고요. 해외 나가서 어글리 코리안 소리 듣는 것도 정말 망신스러워요. 되먹지 못한 마초 근성. 강한 자에게 굽신거리고 약한 자에게 큰소리치는 나쁜 습관 중 하나이기도 하구요.

노이에자이트 2008-09-22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나치게 고집세고 자존심 강한 인간들은 열등감도 강하죠.그런데 우리나라에 마초가 있나요? 우리나라엔 아들은 많지만 남자는 드물죠.

마노아 2008-09-22 22:26   좋아요 0 | URL
아들은 많지만 남자는 드물다. 아, 아픈 진실이군요...!
 
칭기즈 칸과 몽골제국 - 정복과 관용의 두 얼굴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124
장폴 루 지음, 김소라 옮김 / 시공사 / 2008년 5월
품절


근대에는 몽골제국만큼 방대한 식민 제국들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 곳도 몽골제국처럼 서로 인접한 한 덩어리의 땅은 아니었다. 구세계에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태평양에서 발트 해와 지중해에 이르는 거의 모든 땅이 같은 통치권 아래 놓이게 되었다. 북쪽의 경계가 불분명함에도, 몽골제국은 프랑스의 50배, 미국의 3배가 넘는 3,000만 제곱km이상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 나아가 인접한 수많은 지역에 어느 정도 직접적인 통치를 실시했고, 인도 남부까지 영향력을 행사해 그곳의 왕들로 하여금 제국의 권력을 인정하게 했다. 1260년 쿠빌라이가 쿠데타를 일으켜 제국이 네 개의 나라(울루스)로 나뉨으로써 정치적 단일성은 유명무실해졌지만, 동일한 이데올로기와 문화가 오랫동안 이 나라들의 근간을 이루었다.-41쪽

처음에 칭기즈칸이 세계 정복을 위해 통일된 유목 국가를 세웠을 때 몽골어를 말하는 사람들은 겨우 수십만 명을 넘지 않았다. 이후 몽골을 통일하고 메르키트, 나이만, 타타르, 옹구트족 등 온갖 민족을 흡수했을 때도 인구는 100만에서 150만 명 정도였다. 몽골제국 군대의 실제 인원을 알고자 하는 사람은 많지만 정확히 파악하기는 힘들다. 단지 칭기즈칸이 사망했을 때 병력이 12만 9천명 정도였다는 것만 알려져 있다. 이 숫자는 물론 중국에서 전투 중이던 군대는 합치지 않은 것이지만, 그들도 기껏해야 수만 명에 불과했다. 이 숫자는 미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엄청난 것이었다. 제국의 인구 열 명 중 한 명이 군인이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어떤 나라도 이 정도 비율의 군대가 그토록 오랫동안 유지된 경우는 드물었다. 군대의 중핵을 이루는 이 수에다, 원정에 계속되면서 자발적으로 또는 강제로 징병된 군인들이 더해졌다. 이들은 헤아릴 수 없는 무리를 형성했다. 그 수는 아마도 몇 십만 명에서 최대 백만 명에 달했을 것이다. -60쪽

칭기즈칸은 점령한 지역에서 열 명 중 세 명의 남자를 징집했다고 한다. 정말로 놀라운 것은 탈영하거나 도주하거나 반항했을 법한 이 신병들이 아주 드문 예외를 빼고는 늘 충성스러웠다는 사실이다. 나약함이나 배신의 대가로 가해질 형벌이 무서웠기 때문일까? 아니면 위대한 군대에 속해 있다는 소속감에서 비롯된 자부심 때문이었을까? -60쪽

스텝의 말인 조랑말은 유럽의 말에 비해 작았지만 등허리가 단단하고 힘이 넘쳤으며 강인하고 빨랐다. 아무것이나 먹었고 쌓인 눈 아래서도 풀을 찾아낼 수 있었으며, 염소처럼 바위 위로도 뛰어다녔다. 잘 먹고 잘 쉬면 하루에 100km도 이동할 수 있었다. 그래서 몽골군은 말이 여름풀을 먹어 상태가 좋은 겨울에 원정을 나서는 것을 더 좋아했다. 전장에 나가는 남자들은 언제든 갈아 탈 새 말이 있어야 했으므로 적어도 세 마리의 말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그 대여섯 배의 말을 데리고 다니기도 했다. 몽골족은 말과 한 몸이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말을 탄 그들은 말에서 먹고 자는 데도 익숙했다. 여러 가지 점에서 그들은 최고의 기병이었다. -62쪽

몽골군은 큰 전투는 피하고, 적을 기진맥진하게 만들어 사기를 떨어뜨리는 전술을 자주 썼다. 너무 강한 군대를 만나면, 도망치는 척해서 전투에 적합한 장소로 그들이 쫓아오게 만들었다. 이렇게 하면 적은 대오가 흐트러지고 쉽게 함정에 빠졌다. 적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몽골군은 뒤로 돌았다. 특히 기병들은 몸을 돌리면서 어깨 위로 활을 쏘았는데, 이 자세를 '스키타이식 또는 파르티아식 활쏘기'라고 한다. -64쪽

1220~21년 칭기즈칸은 아프가니스탄과 호라산의 오지에 길을 냈다.
오고타이는 몽골과 다른 지역들 사이에 역참망을 확립했다. 또한 천천히 이동하는 대상들을 위한 우물을 파라고 관리들에게 지시했으며, 교역품에 부과하는 세금을 폐지했다. 다만 사치품은 예외로 해 상품 가격의 1/30을 세금으로 책정했다.
중국에서는 오래된 길들을 보수하고 가로수를 심고 숙박 시설을 갖추었으며, 베이징과 항저우를 연결하는 대운하를 완전히 재정비했다. 이렇게 해서 제국의 상업 및 금융 활동은 대단히 활발해졌고, 문화융성의 원동력인 富가 제국에 집중되었다. 이는 전쟁의 재앙을 겪은 후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실로 모든 것이 재건의 대상이었다. -67쪽

1260년 쿠빌라이는 나이 든 지식인과 고아, 병자들을 돕는 조치를 취했다. 1271년에는 구빈원의 설치를 명했다. 모든 도시에 빈민을 위한 식량 배급 시설이 세워졌다. 마르코 폴로는 매일 3만 명의 극빈자에게 음식을 제공했다고 썼다.
몽골제국은 관용의 나라였다. 다양한 종교 공동체를 위해 수많은 칙령이 공포되었고, 왕들은 종교 간 토론을 열었다. 유교와 도교의 나라에서 불교가 융성하고, 그리스도교가 사방으로 전파되었다. 이슬람의 나라에 수많은 탑과 교회가 세워졌다. 이 모든 것이 몽골의 종교적 관용을 증명한다.
몽골제국에서는 모든 인종이 평등했다. 특정 인종을 찬미한 흔적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이 유일하게, 지속적으로 찬미한 것은 바로 칭기즈칸이었다. 몽골족은 다른 인종을 몽골화하기는켜녕 황금 오르도나 차가타이한국에서는 오히려 투르크화되었다. 또한 그들은 어디에서도 라틴족이나 아랍인, 투르크족, 영국인들처럼 자신들의 언어를 강요하지 않았다.-69쪽

서민층의 생활수준이 향상되고 몽골족인 민중 예술, 특히 금과 송나라에서는 매우 천시되던 연극을 좋아한 덕에, 연극은 높은 위치를 차지했다. -74쪽

몽골제국은 전례없는 민족의 혼합을 유도했다. 제국은 서로 모르는 사람들을 접촉케 했다. 아마 투르크족, 몽골족, 이란인, 중국인들이 유럽으로 갔을 것이다. 이주자들 혹은 망명자들은 고국의 문화도 함께 들여갔다.

아시아로 간 유럽인들은 네스토리우스교도들을 보고 강한 거부감을 느꼈다. 그들이 네스토리우스교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관점은 동방정교회와도 달라 '우상숭배'의 집단으로 보였다. 유럽인들은 또한 이슬람교도들처럼 단순한 이단자로 치부해버릴 수 없는 불교도들과도 논쟁을 벌였다.-89쪽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은 별개라고 생각하는(따라서 성모 마리아가 신의 어머니임을 부정하는) 네스토리우스교의 교리는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이 교리는 아시아로 전파되어 셀레우키아와 바그다드에 정착한 총대주교의 권한 아래 새로운 독립 교회를 탄생시켰다. 이란에 굳건하게 뿌리내린 네스토리우스교는 군데샤푸르 의학교와 더불어 이슬람 과학의 탄생에 큰 역할을 했다. 이 종교는 소그디아나, 세린디아, 중국까지 퍼져나갔다. 중국에서 네스토리우스교 수도원은 '페르시아' 수도원으로 불렸다. 네스토리우스교는 몽골 시대에 번성했다.-91쪽

이집트나 페르시아 만에서 중국의 항구들까지 바닷길로 가려면 적어도 8개월을 항해해야 했다. 하지만 2년 혹은 그 이상이 걸릴 때도 있었다. 발두치 페골로티는 크리미아에서 중국의 대운하까지 육로로 265일이 걸린다고 했다. 그의 계산은 정확했다. 모든 것이 순조로울 경우 공적인 여행자들(황제의 행렬이 아닌)이 아시아를 횡단하는 데 5~7개월이 걸렸기 때문이다. 상인이나 평범한 개인들은 이보다 더 걸렸다. -92쪽

1182년 출생한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도사 조반니 데 피아노 카르피니는 예순이 넘은 나이에 교황이 몽골로 보내는 최초의 선교사절단 중 하나를 지휘하는 임무를 자진해서 맡았다. 그는 1245년 4월 리옹을 떠나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볼가 강을 지나서 1246년 7월 몽골에 도착해 구유크의 즉위식에 참석했다. 그리고 한겨울에 귀로에 올라 1247년 5월에 키예프에 다다랐다. 그는 자진해서 아시아 대륙을 횡단한 최초의 유럽인이다. -92쪽

1368년 몽골족이 중국에서 쫓겨나면서 유럽인들의 몽골 모험도 막을 내렸다. 하지만 그들의 모험은 문학을 통해 이어졌다. 상인들은 거의 글을 쓰지 않았지만 사절단은 많은 글을 썼다.-95쪽

이리하여 사실상 1260년 이후 몽골제국에는 네 개의 독립적인 국가(울루스)가 존재하게 되었다. 두 국가는 짧게 존속했지만 대단한 번영을 누렸다. 세 번째 국가에서는 14세기 말 티무르 왕조가 탄생했다. 황금 오르도라 불린 네번째 국가 킵차크한국은 250년간 러시아를 지배했으며, 그 마지막 후손들은 20세기 초에도 군림했다.-97쪽

일한국(이란)에서는 이미 1300년대 초에 몽골족이 배제되었다. 훌라구(1265년 사망)와 아바카(1265~1282재위), 아르군(1284~91재위)의 통치 이후, 가이하투(1291~95재위)와 가잔(1295~1304재위)의 집권 아래 이슬람의 영향력은 저항할 수 없을 만큼 거세졌다.

마침내 올제이투 시대(1304~16)에는 이슬람 세력이 모든 것을 장악하기에 이르러, 이란은 과거를 되찾고 몽골족의 나라가 아닌 이슬람 국가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1317년 네스토리우스교 총대주교인 옹구트족 마르 야발라하 3세가 불행하게 사망함으로써, 몽골 역사의 중요한 인물뿐 아니라 몽골의 한 시대가 송두리째 사라졌다. 개종한 유대인으로 훌륭한 정치가이자 뛰어난 역사가였으며 강력한 권력을 소유한 재상 라시드 앗 딘이 불행하게도 1년 후(1318) 처형된 사건 역시 우연은 아니었다. 무력한 왕 아부 사이드의 시대(1317~36)에 사회와 국가는 붕괴되었고, 이 일한국의 칸이 지계 후손 없이 사망하자 아무도 그의 뒤를 이으려 하지 않았다. 이렇게 일한국은 완전한 무질서 속에 해체되었다.-98쪽

국경이 불안정하고 유동적이었던 차가타이한국은 이슬람 세력과 몽골족인 쉽게 융합하지 못했다. 북부에는 칭기즈 칸의 법인 '야사'에 충실하고 토착신앙을 믿는 가난한 유목민이 살았고, 남부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 중 하나에 뿌리를 둔 부유한 이슬람 정주민이 살았다. 그 까닭에 나라는 이해 관계와 문화, 사상의 대립 및 서로에 대한 멸시로 인해 분열되었다. -100쪽

티무르(1336~1405)는 몽골제국을 완벽하게 재건하고자 했던 인물로, 유럽인들에게는 칭기즈칸보다 더 큰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그는 많은 성공을 거두었으나, 정복한 나라들을 지속적으로 통치하는 데는 실패했다.-100쪽

차가타이한국과 마찬가지로, 킵차크한국(황금 오로도)을 이끈 몽골족도 급속히 투르크화했다. 이란의 일한국에서처럼 몽골족은 일찌감치 이슬람교를 받아들여, 베르케의 치세(1257~66)에 일시적이었던 이슬람교의 영향이 우즈베크의 통치시대(1312~40)에 킵차크한국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킵차크한국의 통치자들은 러시아의 여러 공국들을 멀리서, 그러나 강경하게 다스렸다.-102쪽

1348년에는 페스트가 엄습하여 서아시아 전체를 집어 삼켰다. 페스트는 크리미아 반도에 상관을 세운 이탈리아인들을 통해 서유럽으로 퍼졌다. 게다가 황실마저도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1360년에서 1380년까지 14명의 칸이 왕좌에 올랐을 정도로 칸들은 권력을 두고 서로 다투었다. 그 혼란을 틈타 러시아인들은 과감히 반기를 들었다. -102쪽

칭기즈칸의 마지막 후손들은 볼셰비키 혁명 때까지 중앙아시아에서 지배를 계속했다. 망기트 왕조의 지배는 1920년에 끝났다. 칭기즈칸이 정복자로 부하라에 입성한지 정확히 700년 후의 일이었다. -104쪽

한국들은 서로 반목했다. 황금 오르도와 차가타이한국은 호라즘의 소유권을 두고 다투었으며, 둘 다 일한국과 싸움을 벌였다. 복잡한 동맹 관계가 형성되었다. 일한국과 아르메니아, 십자군, 유럽의 왕들이 동맹을 맺었고, 황금 오르도와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가 동맹을 형성했다. 후자는 맘루크 주민의 많은 수가 킵차크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1299년, 일한국이 시리아 재정복에 실패한 것도 호아금 오르도의 공격 때문이었다. 1290년부터 1304년까지 차가타이한국이 인도 정복에 계속 실패한 것 역시 황금 오르도의 공격이 원인이었다. 또한 오고타이 일족은 1260년부터 1306년경까지 원나라와 반목을 거듭했다.-104쪽

그러나 몽골제국은 세계 도처에 강렬한 발자취를 남겼다. 이란과 중국에서 단명했건 킵차크에서 장수했건, 몽골제국은 크고 작은 일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중국에서는 북쪽으로 중심이 이동하여 북경이 시안과 난징을 대체했다. 또 아직 편입되지 않았던 윈난이 한족의 세계에 통합되었다. 몽골과 만주, 티베트, 신장, 인도차이나도 원의 지배를 받음으로써 하나의 세력권에 편입되었다. 예술과 사상도 혁신되고 풍부해졌다. 몽골족은 종교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그리스도교, 마니교, 불교 같은 외래 종교를 보호했다. 몽골인은 박해받고 내몰렸던 이 종교들 중 적어도 두 종교에 경도되었기 때문이다. -105쪽

도시화와 기초적인 산업화를 이루고 곡물과 콩재배를 장려하며 근대화를 추구하고 유목 새오할에 적대적인 정권아래서 몽골족은 여전히 조상 전래의 생활방식을 고수했다. 공산주의가 붕괴하자 몽골족은 숨겨온 바람을 이루고 과거를 되살릴 수 있었다. 불교와 칭기즈칸주의, 유목생활 같은 지배적 이데올로기뿐 아니라 전통과 관습이 부활했다. 고립된 지역에서나 볼 수 있었던 남녀 공통 전통 의상 '델'이 도시의 전 계층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명절에 군인들은 13세기 전사 차림을 했다. 1992년에는 야크나 말의 꼬리로 만든 중세 깃발 '투그'가 다시 군대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불사가 다시 열렸고, 전통적인 종교적 관용을 지키기 위해 그리스도교 선교사들도 불러들였다. 유목민들은 다시 여러 가축을 키우고, 스텝에는 생활하거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말 그대로 유르트 마을들이 조성되었다.-109쪽

근동에서는 몽골에 예속되어 모욕받고 그리스도교에 의해 저울질 당하고 존재 자체가 위협받아 사라진 것으로 여겨졌던 이슬람교가 눈부신 설욕을 이루었다. 그리고 협력자로 여겨지던, 또한 실제로도 그랬던 그리스도교도들은 의심을 받았으며 아랍 정복 이후 누리던 상대적인 평화를 잃어버렸다. 한창 번영을 누리고 있었으나 이미 초기의 십자군에 의해 약화된 투르크족은 서진을 제지당했다. 그리고 다시 서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을 때 힘의 균형은 유럽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유일하게 전장에서 몽골족을 무찌르고 이후에도 의기양양하게 그들에게 대적하여 대단한 명성을 누리던 맘루크 왕조는 거의 고대 이집트에 비견할 만큼 이집트를 눈부시게 부흥시켰다.
유럽에서는 강대국으로 가는 길목에 있던 헝가리가 쇠퇴했다. 인구가 감소한 슐레지엔은 독일의 식민지가 되었다. 러시아의 예속 상태는 한없이 계속되어, 몽골족이 남긴 많은 흔적이 소비에트 체제에서까지 발견되었다. 무엇보다도 몽골제국은 극동으로 향하는 닫혀 있던 길을 다시 열거나 또 다른 길을 찾아내겠다는 욕망을 부추겼다. 콜럼버스와 마젤란을 낳은 것은 바로 몽골이었다.-110쪽

몽골족은 16세기에 제국의 부활을 시도했지만, 이제 유목민들은 열외자였고 말이나 활로는 전투에서 승리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이 완벽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몽골제국의 재현에 성공했다. 티무르(1370~1405재위)와 그의 뒤를 이은 티무르 왕조의 왕들이 인도 땅에 '몽골'의 이름을 간직한 무굴제국을 세운 것이다. 이 제국은 나중에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계승했다. 그리고 만주족은 중국을 정ㅂ고하여 최후의 왕조인 청나라를 창건하기 전, 몽골족에게 와서 칭기즈칸의 정통 왕위 계승자임을 승인받았다(1634). 세계 정복자의 자손들은 이 기회에 만주족을 통해 위대한 과거를 재현하길 바라며 이를 승낙했다. 그러나 만주족은 몽골족을 예속하여 거의 소멸 상태로 몰아가고 말았다.-111쪽

몽골 군대는 그 누구보다 흔쾌하고 용감하게 전쟁 또는 다른 목적을 위해 떠난다. 그들은 기꺼이 고된 일을 하며, 필요하다면 암말의 젖이나 활로 잡은 짐승의 고기만 먹고도 너끈히 한 달 동안 전진하거나 버틴다. 게다가 말은 걷다가 길가에 보이는 아무 풀이나 먹으므로, 귀리나 건초, 짚을 가져갈 필요도 없다.(...) 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심하게 일하지만 피로를 견디며, 가장 적게 소비하고 소식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이다. -마르코 폴로, L.앙비 번역, <동방견문록>, 클랭크시크 출판사, 파리, 1955년-116쪽

여성들의 지위 : 스텝 유목민들의 사회에서 여성은 상당히 자유와 높은 지위를 누렸다. 전형적ㅇ니 보수주의 이슬람교도였던 모로코 여행자 이븐 바투타(1304~77)는 이를 보고 분개했다. -116쪽

몽골족 대침입 시기에 생겨난 공포로 인해 몽골 사람과 그 나라에 대해 무시무시한 이야기들이 생겨났다. 몽골족을 직접 본 사람들과 이야기만 들은 사람들 모두 공포에 휩싸였다. 유달리 극적인 서양의 연대기들은 마치 훈족 침략기에 쓰인 연대기들을 베껴놓은 것 같다. -125쪽

몽골족의 문명 단계는 아직 매우 원시적이었다. 그들은 정착 농경 문명을 전혀 몰랐으며,(당시에)아는 것이라곤 파괴뿐이었다.(...)그러나 이처럼 한정된 여건 속에서도 칭기즈칸은 완벽한 인간이자 공정한 지도자의 면모를 보였으며, 그의 우정은 신뢰할 수 있었다. 그는 열심히 싸운 적에게 관용을 베풀줄 알았고, 충성심을 소중히 여겨 배신자들을 혐오했다. 그는 훌륭한 통치자이자 현명한 정치가였다. 그의 출현으로 몽골사회는 혼란과 해체의 단계를 통과했다. 그는 몽골 사회에 질서와 가정의 미덕, 도덕, 규율을 정착시켰다. 이 야만족 사람은 몽골족을 문명의 길로 이끌었다. 이를 위해 그는 이미 문명화된 여러 투르크 몽골 민족의 도움을 받았는데, 중국 문화를 흡수한 거란족과 투르판의 위구르 투르크족, 그리고 불교와 네스토리우스교의 지식인들을 등용한 카라샤르와 쿠처의 도움이 컸다. 위구르 문자는 몽골의 외교 문자가 되었다. 오래전에 아시아 내륙의 투르크족 사이에 뿌리내린 네스토리우스교는 칭기즈칸 가문 내에서 특혜를 누렸으며, 거란족의 불교와 더불어 몽골족의 풍속을 빠르게 순화하는데 기여-르네 그루세<아시아의 역사>1950-132쪽

칭기즈칸이 추구한 권력의 길은 외적인 상황과 표면적인 힘의 균형만을 고려한다면 이유있는 허세나 기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논리적이고 선견지명이 있었으며, 모든 계획은 가능성을 고려하여 수립하고 실행했다. 초기에 그는 권력과 배경이 거의 없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자들을 부유한 백성으로 거듭나게 했다. 그는 기존의 군대나 국가 체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가 무에서 창조를 이룬 것은 아니었다. 칭기즈칸은 분명 역사를 만든 사람 중 하나이며, 어쩌면 그 중 가장 위대할지 모른다. 그가 역사를 창조했기에 그는 그렇게 될 수 있었다.(...)그는 전통을 부정한 찬탈자가 아니었다. 역사가 그의 안에 살고 있었기에, 그 자신보다 큰 뿌리가 그의 힘을 기러주었다. 전통과 꿈은 그의 뛰어난 정책의 수단이었고, 그는 그것을 현실로 만들었다. 몽골족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다섯 세대에 걸쳐, 그들은 역사의 연단을 차지했다. 한 세기 반동안 세계의 운명이 그들의 손안에 있었다. 그들은 지구 반 바퀴에 걸친 파란만장한 모험을 마치고, 영광만을 짊어진 채 출발점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다시 펠트 천막에 살게 되었다.-133쪽

(윗글과 이어서) 사람들은 인류가 얼마나 많은 경이를 잃어버렸는지 이야기한다. 위대한 과거는 곧 꿈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몽골족은 다시 가난한 유목민이 되었다. 그들의 조상이 그러했듯이.
-
요아힘 바르크하우젠, <칭기즈칸의 황색 제국>, 파이요 출판사, 파리, 1935년-1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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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강특고 아이들 1
김민희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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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괴한 초능력자 학교에서 벌어지는 독특한 코믹 일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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