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놀이, 그 화려함에 대하여 [제 818 호/2008-10-01]


2008년 10월 4일, 서울 여의도에서는 ‘서울세계불꽃축제’가 열린다. 2008년 베이징의 폐막식에서도 불꽃놀이가 전 세계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영화, 연극, 뮤지컬, 오페라, 발레 등의 공연은 취향에 따라 선호도가 갈리지만, 불꽃놀이만큼 문화의 차이나 연령의 고하를 막론하고 사람들에게 매력을 발산하는 공연도 없을 것이다. 평상시에는 하늘을 거의 올려다보지 않던 사람도, 마음속에 응어리진 고민 때문에 힘들어하던 사람도 펑펑 소리와 함께 밤하늘의 한구석을 형형색색으로 물들이는 불꽃놀이를 보면 넋을 놓게 된다. 이 불꽃놀이에는 어떤 과학적 원리가 숨어 있을까.

불꽃놀이의 요소는 크게 두 가지이다. 색과 모양이다.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름다운 색이다. 불꽃의 색은 ‘연소’와 ‘불꽃반응’이라는 두 가지 현상을 결합하여 만들어 낸다. 연소는 일반적으로 물질이 산소와 결합하면서 빛, 열, 불꽃 등을 내며 타는 현상을 가리킨다. 우리의 몸속에서 일어나는 느린 산화 반응 또한 연소로 보기도 하는데, 흔히 일상생활에서 연소라 하면 산화 반응 중에서도 고속산화 반응을 일컫는 것이 보통이다.

원소 중에는 연소하면서 특유의 불꽃색을 나타내는 것들이 있다. 이것을 불꽃 반응이라고 한다. 보통 불꽃반응은 해당 원소를 무색 불꽃 속에서 가열했을 때 나타나는 색으로 확인한다. 해당 원소의 원자가 에너지를 받으면 들뜬 상태가 되는데, 이렇게 들뜬 원자는 가시광선 중에서 특정 파장의 세기가 유난히 강한 빛을 발하고, 그 때문에 우리 눈에는 특정 색으로 보이게 되는 것이다. 본래의 불꽃반응은 정성분석, 즉 물질의 성질이나 원소의 종류를 확인하는 데에 쓴다. 이를테면 불꽃반응의 색이 백색이면 연소되는 물질 속에 알루미늄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노란색이면 나트륨, 청록색이면 구리, 빨강이면 스트론튬의 존재를 알 수 있다.

불꽃놀이는 이와 같은 불꽃반응을 실용적으로 활용하는 예이다. 우리가 흔히 보는 불꽃놀이의 기본 형태는 발사포에 화약을 채워놓고 이 화약에 불을 붙여 그 폭발력으로 화공품을 공중으로 쏘아 올리는 식이다. 이 화공품을 ‘연화(煙火)’라고 한다. 연화는 공 모양의 옥피, 즉 껍질 속에 할약이라는 이름의 화약과 ‘성(星. 또는 별이라고도 부른다)’을 채워 넣은 구조이다. 성은 한가운데에 핵 역할을 하는 무명씨 등을 넣고 발연제, 색화제 등의 여러 화학제가 혼합된 화약을 입혀서 만든다. 이 성의 구조에 따라 불꽃의 모양과 색이 결정된다.

성은 할약과 옥피 사이에 넣는다. 공중에 올라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높이에서 연소하기 위해서는 할약에 불을 붙일 도화선도 있어야 한다. 이 도화선까지 합친 것을 할물이라고 부른다. 이제 발사포 바닥에 발사용 화약, 즉 추진제를 넣고 그 위에 할물을 놓은 다음 점화하면 발사용 화약과 할물의 도화선에 동시에 불이 붙는다. 그러면 할물이 발사되어 일정한 높이에서 할약이 연소하는 것이다. 이때 성도 연소하며, 그 성분에 따라 다양한 색의 불꽃반응이 일어난다. 이렇게 발사해서 공중에서 태우는 구조를 타상연화 또는 발사연화라고 부른다. 발사연화는 꼭 밤에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주간용과 야간용이 모두 있으며 주간용의 경우에는 연기와 소리가 더욱 중요하기 때문에 색을 지닌 연기를 뿜어내는 발연제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발사연화의 단면 구조를 간단하게 정리하면 바깥쪽부터 옥피-성-할약의 순이다.

기본적인 연화에는 이 밖에도 장치연화와 완구연화가 있다. 장치 연화는 한쪽 끝에서부터 타들어가며 글씨, 모양 등을 이루는 것으로, 큰 틀에 색화제와 발연제 등을 일정한 모양으로 엮어놓는다. 완구연화는 이름 그대로 개인들이 장난감 삼아 쓸 수 있는 연화를 다 함께 이르는 말이다. 발사연화의 축소형으로 생긴 것도 있고, 철사 끝에 화약과 색화제 등을 소량 묻힌 것도 있으며 흔히 폭죽이라고 부르는, 불을 붙이면 지면을 휘저으며 큰 소리를 내는 것 등이 있다.

불꽃이 폭발하는 것을 꽃에 비유하여 개화라고 한다. 개화의 모양은 당연히 연화의 내부 구조에 따라 달라진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국화’는 불붙은 성 수백 개가 360도로 퍼져 나가며 구형으로 개화한다. ‘야국’은 들판에 국화 여러 송이가 퍼진 것 같은 모양으로, 연화 속에 성 대신에 소형 연화를 여러 개 넣은 것이다. 그러면 소형 연화가 시간차를 두고 터지면서 여러 송이의 국화를 밤하늘에 넓게 피운다. ‘휘슬’은 연화 안에 소리를 내는 휘슬소체를 넣어서 불꽃이 개화할 때 소리를 추가하는 것이고, ‘링’은 성의 배열을 조정하여 불붙은 성이 평면상의 원을 이루며 타오르는 것을 말한다.

불꽃놀이에도 연출이 필요하다. 성과 연화가 다양하다 한들 그것만으로는 관객들이 금세 식상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러 불꽃 제작자들이 경진대회를 하는 세계불꽃축제쯤 되면 개성 있는 연출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불꽃의 크기, 개화 시간 등도 정밀하게 고려해야 한다. 이 때문에 도화선의 길이를 계산하여 제작해야 하고, 연화의 크기도 헤아려야 한다. 정확한 수치는 제작자와 연출자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통 연화의 크기와 성의 양, 도달 고도, 개화 반경은 비례한다. 즉 큰 연화일수록 많은 성이 들어가고 더 높은 곳에서 터뜨리며 개화 반경 또한 커진다.

연화의 크기는 그 결과물인 불꽃의 모양새와 연출에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다. 불꽃놀이는 결국 화약과 불을 이용하는 공연이므로 불길이 남아 지상에 떨어질 경우 화재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따라서 안전을 보장하는 ‘보안 거리’의 확보가 중요하다. 연화가 클수록 개화 반경이 커지므로 보안 거리도 넓게 확보되어야 한다. 대도시 근교에서 공연과 발사 장소가 협소할 경우 연화의 크기에 한계가 있다는 얘기다.

21세기에도 많은 사람이 불꽃놀이를 즐기지만, 그 기원은 상당히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착상은 고대의 인도, 페르시아 등지에도 있었다고 하며 원시적인 형태의 연화가 등장한 것은 7세기 초 중국 수나라 양제 무렵이라고 한다. 13세기 화약발전 시기를 거쳐 15세기쯤에는 유럽 각지로 퍼지면서 연화가 일반화되었다. 그 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연화의 근본적인 구조에는 크게 변한 것이 없다.

하지만 최신 기술을 불꽃놀이에 적용하여 더 정밀하고 다양한 연출을 이뤄내려는 시도가 꾸준히 진행 중이다. 예를 들어 백금선의 저항열을 이용하여 점화약을 발화시키는 전기 점화장치를 점화옥이라 하는데, 현재에는 이와 같은 전기 점화방식이 주류를 이룬다. 이 백금선에 전류를 흘리면 전기저항으로 열이 발생하고 이 열이 화약을 점화한다. 그러면 도화선과 추진제 모두에 불이 붙는 것이다. 전기 점화방식의 이점은 많은 연화를 정밀한 계획에 따라 발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발사의 통제에는 컴퓨터를 이용하기도 한다. 이 경우는 미리 짜놓은 각본에 완벽하게 대응할 수 있으며, 수동 조작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짧은 시간 간격도 연출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연화 자체에도 컴퓨터 칩을 장착해 연화가 공중으로 올라간 후 개화하는 시간까지 제어하는 기술이 등장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도 이 기술이 일부 사용됐다고 한다. 이렇듯 개화 시간을 원하는 대로 조절할 수 있게 되면서 외부 조명, 레이저, 음악과의 협연 또한 정확히 구사하게 되었다.

밤하늘을 물들이고 사람들의 영혼을 붙들어놓는 불꽃은 전자 기술의 발달로 상상력의 벽을 넘어 더 기발한 방향으로 발전할지도 모른다. 비록 화약이라는 위험물질을 사용하는 기술이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자유롭게 구현할 수는 없는 예술이지만, 한 번이라도 불꽃놀이를 구경해 본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밤의 신비로운 들판에 파랗고 빨갛게 피어올랐다가 덧없이 사라지는 거대한 꽃이 언제까지고 지지 않을 것이다.

글 : 김창규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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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file.norara.com/game/gamefile/cameramind.swf

 

새로 추가되는 하얀 점을 찾아 클릭하면 된다.

틀리는 순간 게임 오버. 새로 시작하는 판이 열린다.

오기가 생겨 자꾸 클릭하게 만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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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1 2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01 23: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대한민국 '돼지들'

▲ 그림을 클릭하면 더욱 큰 화면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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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9-30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대한민국 돼지들~~~은 과연 누굴까?

마노아 2008-09-30 23:42   좋아요 0 | URL
너무 많아요..;;;;

가시장미 2008-10-02 0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이 그림 정말 슬프면서도 화나게 하는군요. -_ㅠ

마노아 2008-10-02 21:33   좋아요 0 | URL
무식한 것들! 저 대사에 어찌나 화르륵 열불이 나던지...ㅠ.ㅠ

bookJourney 2008-10-04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먹을거리 양극화 ... 핵심을 짚었네요. 우리들의 우울한 현실인 것 같아 속상해요.

마노아 2008-10-04 21:41   좋아요 0 | URL
채소에서도 멜라민이 검출되고...ㅜ.ㅜ 온통 우울한 뉴스만 가득해서 속상해요. 즐거운 소식도 제발 들렸으면 좋겠어요(>_ㅜ)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80928221238&S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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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장미 2008-09-30 0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엇이 소중한지.. 생각하지 않는 편이 이 사회를 사는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해요.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간다면- 너무 억울하고 어처구니 없는 일 투성이라.. 살고싶지 않아질지도 모르잖아요 -_ㅠ
그래도 무엇이 소중한지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소중한 것이라고 말하지 못 한다면, 그것도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요즘..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아서.. 조금 부끄럽네요.

마노아 2008-09-30 20:16   좋아요 0 | URL
소중한 것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지키고 보호하며 살아가는 게 마땅한 일인데,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방해하는 세상살이가 참 고달프지요. 결국에 가장 소중한 것은 사람인 것인데, 같은 사람이면서 종을 달리하고 싶은 종자가 참 많기도 합니다.

순오기 2008-09-30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이거 넷째 문단에 붙여넣기가 잘못 되었어요. 확인하고 수정해야 할 듯... ^^
목적이 다르면 결과도 다르지요. 사람을 살리려는 은행과 돈벌이만 하려는 은행의 차이처럼~~

마노아 2008-09-30 23:42   좋아요 0 | URL
ctrl+v를 두번 해서 수정을 했었는데 세밀하게 보질 못했네요.
덕분에 제대로 수정했어요^^

노이에자이트 2008-10-01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길가다가 고양이나 개를 보면 안녕! 하고 인사한답니다.

마노아 2008-10-01 23:29   좋아요 0 | URL
살아있는 생명을 반갑게 알아봐주고 인사해주는 마음이 참 좋아요^^

노이에자이트 2008-10-02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다지 반갑지 않다는 듯 도망가는 친구들도 있지요.

마노아 2008-10-02 21:39   좋아요 0 | URL
까칠한 녀석들이 꼭 있어요^^ㅎㅎㅎ

노이에자이트 2008-10-03 00:26   좋아요 0 | URL
그래도 귀여워요...

마노아 2008-10-03 02:25   좋아요 0 | URL
오늘 지인을 만났는데 십년 간 함께 한 개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여러모로 죽음을 많이 듣게 된 하루여서 더 기억에 남네요.
귀여운 반려 동물들, 좋은 친구들이지요.

노이에자이트 2008-10-03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쯧쯧...그런 사람들에겐 개나 고양이가 단순한 동물이기 이전에 마음을 주고 기댈 수 있는 언덕같은 존재죠.

마노아 2008-10-03 22:50   좋아요 0 | URL
친정 어머니 마음 무너질까 봐 3박 4일을 친정에서 보내고 왔다는 얘기 들으니까 더 짠했어요.
십년이면 강산이 변할 시간인데 정말 가족을 잃은 느낌이었을 거예요.
 
몽골의 초원
시바 료타로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1993년 10월
절판


유목은 이동이다. 이동이라 해서 제멋대로 아무데나 가는 것은 아니다. 부족에 따라 가야 할 초원이 정해져 있으며, 그 장소는 여름과 겨울에 따라 다르다. 타부족이 자신들의 목초지를 침범하면 전쟁이 일어난다.

-22쪽

유목에도 적지가 있다. 반드시 초원이어야 한다. 초원이라 할지라도 일본의 산이나 들, 도시의 빈 뜰에 돋아나는 잡초는 양이 날것으로 먹기에는 너무 거칠다. 양이 좋아하는 풀은 실처럼 가늘고 부추 계에 속하는, 은은한 향내를 풍기는 풀이다. 그러한 풀이 나는 장소는 그 생육에 알맞은 기온과 건조함을 필요로 한다.
지구 규모에서 볼 때, 유라시아 대륙에서도 몽골 고원의 초원이 최고의 적지였다. 면적이 넓을 뿐만 아니라 기복이 완만하다. 이러한 기복도 유목에 알맞은 조건 중 하나이다. 여름에는 산 위에서 방목하고, 가을이 되어 산을 내려오면 저지에는 가을이 늦게 찾아오기 때문에 목초가 아직도 푸른빛을 띠고 있어 안성맞춤이다.
-26쪽

몽골에 라마교라는, 속칭 티베트 불교가 전해진 것은 이 민족의 힘이 쇠약해지는 16세기 말부터이고, 17, 8세기에는 청나라가 몽골인의 강인하고 활달한 풍골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이를 크게 장려하였다.

-46쪽

‘체베쿠마’라는 말은 티베트어로 꽃을 뜻한다고 한다. 몽골어로는 ‘치칫크’라고 한다.

-47쪽

시베리아는 고대로 갈수록 높은 문명을 소유하고 있었던 듯하다. 또 기후도 따뜻했다고 한다.

-52쪽

스키타이라는 고대민족은 세계사에 빛나고 있다. 기원전 7세기로부터 3세기에 걸쳐, 흑해 북안의 초원에서 활약하고 유목문명을 발명한 것으로 보이는 기마민족이다. 인종상으로는 백인종이었다. 그들은 금속품에 독특한 동물 의장을 새겨 넣는 것을 좋아했고, 또 황금 세공을 몹시 사랑하였다. 흉노가 스키타이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54쪽

헤로도투스, 그는 ‘역사’ 속에서 흑해 연안의 초원을 발판으로 하는 스키타이라는 이국풍의 문화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였다. 그들은 말 등에 올라타고, 양 떼를 따라 이동하고, 집도 이동식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중국문명권으로부터는 사마천이 ‘사기’의 <흉노열전>에서 그들의 기이한 풍속을 기술하였다. 양자의 관찰은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똑같다. 이 두 사람의 기술의 동일성을 근거로 해서도, 스키타이와 흉노는 하나의 문화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마음에 걸리는 것은 흉노가 어떤 인종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유목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스키타이와 마찬가지로 백인이었다는 기설이 있는데, 나는 멋대로 황인종일 것이라고 믿고 있다. 즉, 흉노는 터키인 또는 몽골인으로 모두 우랄알타이 어족에 속하고, 얼굴은 지금의 몽골인이나 중국인 혹은 일본인과 닮았으리라고 생각한다.
-55쪽

한 무제 때는 청동기 무기에서 철기로 바뀌는 과도기였다. 곽거병의 한군은 화살 끝에다 끌처럼 무겁고 날카로운 철제 촉을 달고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여기에 반해 흉노의 청동 화살촉은 철제보다 가볍고, 따라서 멀리까지 날아가지 못했으며, 더욱이 철제만큼 적의 갑옷을 잘 뚫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태어날 때부터 바람처럼 달리던 흉노의 기병들이 젖비린내 나는 곽거병이나 그 보병단에게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졌을 리가 없다.

-58쪽

이릉은 끝내 한나라 땅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흉노의 땅에서 존경받으며 선우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고 우교왕이 되어 이후 20여 년을 더 살았다.

-60쪽

몽골의 아기들은 대부분 얼굴이 놀라울 정도로 하얗다. 물론 성장해 가면서 검게 변하여, 결국에는 평균적으로 일본인의 피부와 그다지 다르지 않게 된다. 이처럼 몽골인은 형질적으로 일본인과 흡사하지만, 단지 아기의 얼굴색만은 분처럼 새하얗다.
키르키즈는 현재 터키화되었고 언어는 우랄알타이어인 투르크어를 사용하며, 소련의 키르키즈 사회주의 인민공화국에서 살고 있다. 거기에다 이슬람교를 믿고 있다. 고대 이래, 혼혈을 거듭했기 때문인지 피부가 흐릿하고 얼핏 보면 지중해인처럼 보인다. 기원전에는 이 민족의 조상이 시베리아에 살았다. 한대에는 이 시베리아 백인종을 ‘견곤’이라고 불렀다. 견곤이란 ‘키르기즈’의 한자표기이다. 당대의 기록에서는 그들에 관해, 머리카락은 노랗고 눈동자는 녹색이며 얼굴은 하얗다고 설명하고 있다. 몽골인 아기의 피부가 하얀 것은 먼 옛날 흉노가 ‘견곤’과 혼혈한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61쪽

원래 몽골인은 붉은색을 좋아한다. 아무래도 초원은 푸른색 하늘과 초록색 땅, 계절에 따라 땅이 회백색이 되는 단순한 색채 구성의 세계이기 때문에 대지에 뚜렷하게 표시를 하기 위해서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원색이 좋다.

-68쪽

검은 모래땅의 ‘검은’은 카르(kar)라는 말로 표기한다. 몽골 고어와 같은 어족에 속하는 터키어에서도 카라(kara)는 흑(黑)을 뜻한다. 일본어의 구로(黑))도 어쩌면 우연이 아니지 않은가라고 나는 학생시절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69쪽

몽골인은 마음속 깊이 초원을 사랑하고 있다. 유목을 좋아해서 울란바토르에 있는 관리나 학자도 여름이 되면 야생마처럼 초원으로 달려나가는 것이다. 여름을 게르에서 지내는 것이다. 유복한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다.

-72쪽

유목경제가 시대에 잘 맞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인구가 겨우 2백 몇 십만에 불과하므로 타국에 모피나 모직물, 육류를 어느 정도만 팔 수 있으면, 먹고 사는 데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는 것이다. 즉, 국가적인 체면을 위해서 필요할 뿐이라는 도시에 대한 희미한 의식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안개가 걷히듯이 도시가 사라져 원래의 초원으로 되돌아간다고 한들, 그들에게는 아무런 미련도 불편도 없는 것이다.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울란바토르의 본질은 이것이 전부다.

-73쪽

유목민은 고래로부터 물자를 저장하지 않았다. 가구나 의류를 필요 이상으로 가지면 이동이 불가능해진다. 이러한 옛날부터의 습속 때문에 대부분의 몽골인은 물건을 탐내는 마음이 없고, 오히려 가볍게 이동하는 것을 귀히 여기는 생활을 해 왔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역사적으로 몽골인은 돈이 되는 보석이나 금,은 장신구를 즐겨 몸에 지녔다. 그런 물품이라면 이동하는 데에도 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73쪽

이미 칭기즈칸의 몽골은 세계제국을 건설한 터이다. 그 제국 최대의 회의 장소가 풀이 돋아있는 좁은 삼각지였다는 것만큼 유목민족의 특질을 잘 표현해 주는 것은 없다.

-74쪽

오고타이는 바다처럼 스케일이 큰 데다가, 산처럼 총명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아버지 칭기즈칸이 못다 이룩한 정복사업을 보완하여 그 영역을 더욱 넓혔다. 물론 이 사업은 처절하고 피비린내 나는 것이었다. 즉, 호라즘국을 완전히 파멸시키고 이란을 평정한 후, 몸소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였다. 중국의 금왕조를 멸망시킨 후, 일군은 더욱 서방으로 향하여 러시아에 새로운 정복사업을 개시하였다.

-75쪽

몽골의 대정복에 의해 세계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전하게 되었다. 그들이 출현하기까지의 세계는 무수한 장벽으로 가로막힌, 작은 부분들이 할거하는 모습이었다. 몽골의 대정복에 의해 그러한 세계에 커다란 바람이 관통하여 사방팔방으로 통상로가 열리고, 또 문화적인 측면에서 보아도 여러 문화가 타지역으로 흘러 들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세계는 일변하였다.

-76쪽

오고타이칸은 왕자이긴 했지만, 뿌리깊은 초원의 아들이었다. 그는 이동이야말로 생산이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전투가 생산이며, 인생 그 자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제국의 제왕이 된 이상, ‘나 자신은 이동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농경제국의 예를 본떠서 움직이지 않는 지휘소인 제도(帝都)를 세우기로 하였다. 그 움직이지 않는 장소를 현재의 몽골 인민공화국의 거의 중앙을 흐르는 오르혼 강 유역의 한 지점에 정했다.

-77쪽

몽골인의 특이한 점은 타민족의 직인들이 만들어 낸 것을 사들이기는 했지만, 자신들이 그 기술을 배우려고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귀찮고 자질구레한 일을 싫어하는 유목민의 자부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공예는 직인들을 왕창 잡아들이면 가볍게 해결된다.

-80쪽

오고타이 칸만큼 몽골적인 인간은 없다. 욕망이 없는 그의 모습은 전형적인 몽골인의 초상을 보는 듯하다. 물론 욕심이 적다는 것은 어느 민족에게나 미덕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사에 있어서는 근대가 물욕에 대한 긍정으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결국 이 미덕은 몽골의 근대사에 부정적인 작용을 했다. 즉, 물욕이 적기 때문에 가내공업도 하지 않았고 자본 축적도 하지 않았다. 결국은 그것을 기반으로 해야 할 근대는 이 초원 위에 나타날 수 없었다.

-83쪽

청나라가 겨우 60만 인구를 가지고 만리장성 안쪽을 장악하여, 약 3백 년 간 중국 전토를 지배했다는 것은 명의 부패가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던가를 상상할 수 있게 한다. 청나라가 이민족의 왕조임에도 불구하고 역대 중국왕조사에 있어 희귀할 만큼 뛰어난 통치능력을 보여주었던 것은, 원래 그 민족이 조잡하긴 해도 농업을 겸비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들이 영위했던 농업의 측면에서 중국이라는 농업세계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점이 예전의 원과는 다르다.
또 청왕조는 원래 수렵민족이었기 때문에 몽골의 유목에 대해서도 다소 이해가 있었다. 거기에다 청은 그 발흥기에 몽골의 원조를 받은 적이 있어서 제국이 성립된 후 몽골인을 우대했다. 예를 들면 몽골 팔기라 불리는 특권적인 무인집단을 기관으로 설치하고, 또 내몽골의 초원을 보호할 것을 조정의 명령으로 하달하기도 했다.
이루 인하여, 한인이 제멋대로 초원에다 괭이질을 하거나 경지를 만들 수 없게 되었다.
-98쪽

그러나 청조도 중기에 이르면 양상이 달라진다. 황제와 황족이 이민족이라는, 조금은 켕기는 점도 있고 해서 오히려 역으로 심하게 유교화되어 버리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유교는 농업을 기반으로 하고 유목인들을 오랑캐로 취급한다. 이윽고 청조는 한인 ‘침입자’들이 초원을 경작하는 것을 보고서도 모른 척하고, 마침내는 앞장서서 농민들을 부추기기까지 했다. 이후, 중국인들이 ‘내몽골’이라고 부르는 이 지역은 거의 남김없이 괭이 맛을 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단지 몽골인에게 다행스러웠던 것은, 험준하고 메마른 고비 사막이 내몽골과 외몽골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는 것이다.

-99쪽

시베리아에서의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죄인을 많이 만들어 내는 것이 가장 빠르고 정확한 방법이었다. 특히 도시 거주자들 중에서 대량으로 정치범을 만들어 내서 유형을 보내는 것이다.

-103쪽

여러 형태의 인류사회에-이를테면 유럽이나 중국, 또는 일본-화폐경제(유통경제)는 인지(人智)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그 사회에서는 화폐경제가 서서히 발전했기 때문에 사회 전체에 면역이 생겨 해악보다는 이익이 많았다. 한편 자급자족경제를 영위하는 사회에 갑작스럽게 유통경제가 들어가면 극약이 들어간 것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신을 잃어버린다. 19세기의 몽골 유목사회가 바로 그런 경우로, 빈곤이 초원을 뒤덮음과 동시에 매매성의 청나라 상인은 살찌고, 많은 몽골인은 목축이라는 유일한 보루를 잃어버리고 유랑의 길을 떠났다.

-106쪽

몽골인의 반항이 거세지자, 청나라는 군대를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였다. 20세기 초엽 청나라 정부의 용어로는, 이 작전을 ‘몽비변환초정’이라 하였다. 이 탄압이 외몽골의 몽골인을 제정러시아 쪽으로 기울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1911년 가을에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쓰러지자, 몽골인들은 독립을 선언하였다.

-109쪽

러시아에 혁명정권이 일어나고, 그 혼란을 틈타 중국이 다시 초원에 통치권을 행사하려 하였다. 몽골인에게 한인은 모두 고리대금업자로 보였다. 우여곡절을 거쳐 1924년, 소련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다. 그들이 사회주의를 선택한 것은 마르크스가 말하는 역사 발전의 결과가 아니라, 단지 한인으로부터 초원을 지키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110쪽

원래 중국 및 중국인에 관해서는 민족적 범칭을 정하기가 어렵다. 일본에서는 에도 시대가 끝날 때까지 당인(唐人)이라 불렀다.
반면, 몽골어에서는 단호하게 지금도 중국을 거란이라 부른다. 거란은 몽골민족이다. 단지 한화(漢化)되었다는 점이 몽골인과 다를 뿐이다.
중국을 ‘거란’이라 부르는 몽골인의 오해가 그냥 그대로 러시아로 흘러 들어가, 러시아에서는 지금도 중국을 ‘키타이’라 부른다. 이 오해는 나아가 유럽에까지 영향을 끼쳐, 캐세이(영어에서 문어의 cathay)라는 명칭이 되었다. 간단히 말해 거란이다.
-117쪽

만주라는 지명은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 원래 지리적인 호칭이 아니라 민족의 호칭인 것이다. 만주란 여진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진인은 우랄알타이 어족이라는 커다란 틀 속에서는 몽골인의 친척이다. 그러나 그들은 유목을 하지 않았다. 고래로 만주 남부의 산림지대에 살면서 말을 타고 수렵을 했고, 때에 따라 소규모의 농업을 경영했다. 이들이 명 말에 크게 융성하여 만리장성 밖에서 명이 쇠퇴하기를 기다리다가, 명의 황실이 내란으로 무너지자마자, 곧바로 장성을 건너 화북 평야로 들어왔던 것이다. 이들은 또다시 북경을 제압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세워진 청제국은 그 전성기에는 중국 역사상 가장 안정된 왕조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한인의 입장에서 볼 때, 청은 왕조 그 자체가 오랑캐였다. 이 때문에 청조로서는 자신들이 종전에 여진이라 불렸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스스로의 민족명칭을 붙였다. 즉, 만주는 민족명이다. 청조가 자신들의 옛 땅을 만주라 부른 적은 없다. 동삼성, 또는 단순하게 동성이라 불렀다.
-137쪽

그러나 청 말의 19세기가 되어 열강이 이 노(老)제국과 접촉하면서 구미인들은 어떤 착오에서인지, 그 땅을 ‘만추리아(manchuria)’라 불렀다. 이 명칭이 메이지시대의 일본에0이른바 서구를 거쳐 수입되어-들어와 만주라 불리게 된 것이다.

-138쪽

청조가 자신의 옛 땅을 부를 때는 또 하나의 다른 말을 쓴다. ‘관동(關東)’이라는 말이다. 장성의 관문인 산해관 동쪽이라는 의미다. 청조의 경우, 관동삼성(요령성, 길림성, 흑룡강성)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러일전쟁 이후 일본은 만주에 주둔시킨 작은 부대를 정식 명칭으로 ‘관동군’이라 부르게 되었다. 만주와 관동이 지명으로 병용되었던 것이다.

-139쪽

7세기 후반의 당의 기세는 대단했다.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두었을 때는 상주하는 병력이 2만이었다.

-145쪽

기(旗)란 몽골어로 호슌이라 하고 15세기경부터 천 호 단위의 호칭이 되었다. 맹(盟) 역시 몽골 특유의 행정단위로 기보다 위에 해당한다. 청조 때 외몽골은 86기가 네 개의 맹으로, 내몽골은 49기가 네 개의 맹으로 나뉘어 있었다.

-150쪽

중국에 프롤레타리아 문화혁명이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정치적 폭풍이 휘몰아쳤다. 모택동이라는 영웅이 신과 같은 대접을 받은 다음 은퇴하여 소를 키울 생각은 하지 않고, 예전의동료들이 만들어 가고 있던 현실주의적 정권에 불만을 품고, 이를 타도하기 위하여 천 만이라는 소년 소녀를 부추겼다. 홍위병 운동이라 불리는 이 정치적 광기는 공자 등의 고전적 권위를 끌어내리는 한편, 19세기 말의 의화단처럼 국내의 친외국분자를 격멸하고, 소수민족의 한 사람인 체베쿠마 씨의 생을 고통스럽게 했다.

-162쪽

고대 중국에서는 투르크를 정령, 돌궐, 철륵, 그리고 칙륵 등으로 표기했다.

-164쪽

몽골 고원의 여름은 해지는 시각이 늦어 하루가 길었다. 오후 다섯 시 반이나 되었는데도 경마는 시작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경주가 시작되는 시각은 오후 일곱 시 반이었다.

-193쪽

이 부근은 움푹 패인 땅으로 바람이 부드러웠다. 움푹 패인 땅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고급관리의 여름 휴양지로 사용되었다.

-199쪽

‘부른사인’이라는 말은 ‘모든 것이 좋다’라는 축복의 말이다.

-201쪽

모택동의 중국이 성립한 것은 일본이 패전한 지 4년 후인 1949년의 일이다. 그 직후에 모택동의 중국은 소련과 우호동맹조약을 맺는다. 그러나 양국의 관계는 끊임없이 삐걱거리다가 이윽고 국교를 단절한 것이나 다름없이 되었다가, 1956년 직후 모택동은 소련식의 사회주의 건설과 인연을 끊고 중국의 독자 노선을 표방했다. 독자노선이라고는 하나, 그에 부합될 만한 구체적인 안은 없었다. 우선 기존의 촌락을 그대로 ‘인민공사’로 바꾸는 것과, 생산을 장려하여 ‘대약진’시키는 것이 모택동 노선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207쪽

그녀는 소련이라는 나라의 이름을 ‘모스크바’라고 부른다. 나는 그때마다 13세기 말 킵차크 한국의 지배하에 세워진 ‘모스크바 공국’이라는 나라 이름이 떠오른다. 또는 15세기의 모스크바 대공인 이반 3세나 16세기의 이반 뇌제 때까지는, 모스크바가 도시 이름인 동시에 나라 이름이었다는 것을 생각함녀 시베리아에서 비슬라브인으로 태어난 그녀로서는 모스크바가 나라 이름이 되는 쪽이 훨씬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214쪽

귀국 후, 닥치는 대로 말에 관한 책을 읽었다. 그러나 어디에도 말에게 귀소본능이 있다고는 씌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표고 1,000~3,000미터의 이 고원에 사는 말들에게만 이런 이상한 습성이 있다고 한다면, 이 고원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그런 이상한 습성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24쪽

(역자 후기)냉전체제는 단순히 우리 민족을 남북으로 단절시켰을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저 북방의 몽골이나 시베리아, 만주, 실크로드 등을 단지 지도책이나 역사책에서 보는 것으로 만족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일본은 메이지 이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저 북방에 대한 자신들의 관심을 표출할 거의 완벽한 자유를 구가하였다. 당연히 학문적인 연구도 두텁게 축적되었다. 그들의 동양학이나 북방에 관한 사유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고 넓다. 일본은 거기에 관해 근대사의 백 년을 전통으로 가지고 있다. 그것뿐이 아니다. 그러한 북방적인 사유가 일상화되어 있다.

-229쪽

즉, 일본은 역사 이래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거의 중국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지 않다. 말을 바꾸면,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사고가 없는 것이다. 일본은 그 자신이, 중국과 조선이 야만족(오랑캐)이라 부르던 그런 문화를 영위한 나라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시바 료타로가 이 소설에서 말하듯이 스스로가 오랑캐(비문명국)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230쪽

그러나 조선은 달랐다. 유학(주자학)적인 상상력 때문에 예의(유학의 경전에 맞는)라는 ‘문명’이 없는 일본과 만주족 그리고 그 외의 오랑캐들을 자신과 구별하였다. 스스로를 중국이라는 중심에 포함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심한 착각일 수 있다. 우리 민족은 누가 뭐라 해도 우랄알타이어를 구사하는 몽골계통의 민족이다. 샤머니즘과 애니미즘의 문화적인 특질이 강하고, 고구려를 비롯한 역대의 왕국 모두가(조선은 제외) 문화적으로 중국과는 판이한 그런 민족이다. 우리는 중국이 말하는 그대로 ‘동쪽 오랑캐’이다. 대한민국은 오랑캐의 나라인 것이다.

-231쪽

이러한 시각, 즉 조선 이전의 민족의식을 회복하지 않는 한 북방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지는 현대를 우리 민족은 합당하게 살아갈 수 없다. 우리 민족이 중국대륙을 지배했던 위대한 민족일 수는 있다. 그러나 중국 그 자체는 아니다. 그보다는 만리장성의 바깥에서 가끔씩 안쪽을 드나들었던 자유분방한 민족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멋지지 않은가. 동시에 역사적 사실에도 맞지 않은가.

-232쪽

조선이 중국이라는 큰 집에 빌붙어 산 것은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어서일 것이다. 대한민국이 미국에 빌붙어 살 듯이. 그러나 그것은 극복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시대와 의식의 문제이다. 이제 시대는 전환점에 달했다. 우리의 의식의 문제가 남았을 뿐이다.
-2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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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0-01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사셨군요.양억관 씨가 일본어 전문 번역가예요.
홍콩의 항공회사 케세이 패시픽이 키타이에서 어원이 유래했다고 하죠.일본은 만주사변 이전부터 중국을 하나 하나 분리할 계획을 세우고 그대로 실행에 옮겼어요.내몽고도 관동군 특무기관이 나서서 분리독립하려는 공작을 했죠.라마 불교 성직자들을 회유하기도 하구요.

마노아 2008-10-01 23:28   좋아요 0 | URL
양억관씨 번역이라서 더 반가웠어요. 마지막에 옮긴이 글도 참 인상적이었구요^^
일본의 계획력과 추진력은 모두 무서워요. 독한 놈들 사이에 어리버리 대한민국이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요..;;;;

노이에자이트 2008-10-02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가 번역한 <일본이 일어선다>는 한일외교막후의 괴물 세지마 류조 이야기입니다.5,18직후 전두환과 일본우익을 연결해준 사나이죠.삼성과 민정당을 디딤돌로 전두환에게 접근한 뒤 나카소네의 방한을 이뤄냈습니다.

마노아 2008-10-02 21:38   좋아요 0 | URL
일본이 일어선다로 검색하니까, 고려원에서 나온 김경민씨 책만 나오네요. 이건 번역서가 아닌데 이 책이 아닌가봐요. 아무튼 절판이네요.
양억관 씨 이름으로 검색해 보니까 번역서가 무려 178권이에요. 대단하군요!
세지마 류조, 무서븐 사나이군요!

노이에자이트 2008-10-03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마자키 도요코<불모지대>가 세지마 류조를 모델로 한 대하소설이에요.70-80년대에 삼성에서 사원들에게 필독서로 읽혔다고 합니다.야마자키 작품은 제 또래들만 해도 거의 안 읽죠.그러다가 드라마 하얀 거탑 덕에 반짝 그 원작이 팔리는 듯 했지만 역시 빤짝이로 끝났죠.대단한 소설가입니다.세지마 류조의 이토추 상사는 우리나라에서도 열심히 영업을 하고 있죠.
김경민 씨는 이라크 파병 논쟁 때 라디오나 텔레비전에 자주 나와 열심히 파병을 찬성해서 기억에 남습니다.그가 쓴 일본이 일어선다는 일본 자위대에 관한 이야기죠.이 책 통해 이지스 함대를 알게 되었습니다.그리고 1990년 이라크 전 때 미국 첨단무기 핵심부품이 일제였던 것까지.

마노아 2008-10-03 02:24   좋아요 0 | URL
야마자키 도요코가 하얀거탑의 원작을 쓴 사람이군요. 드라마를 엄청 재밌게 보았는데 원작 소설 역시 강렬할 것 같군요. 책들을 찾아보니 역시나 절판이 많지만 여러모로 관심이 갑니다. 세지마 류조가 작년에 죽었군요.
김경민씨 책도 역시나 관심이 가네요. 문득 침묵의 함대가 떠올랐습니다. 굉장히 인상적으로 보았거든요.

노이에자이트 2008-10-03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마자키 것도 그렇고 일본 역사소설이나 기업소설의 분량은 정말 어마어마하지요.김경민 책은 자위대 무기 성능,일본의 안보정책을 보고서 형식으로 썼어요.침묵의 함대 같은 책에 관심이 있다면 아예 군사분야 책을 직접 독파해 보심이 어떨른지...야마오카 소하치의 태평양 전쟁은 절판되었으니 <미드웨이>라는 책을 읽어보세요.군사분야 전문 출판사인 플래닛 미디어에서 나왔어요.태평양 전쟁 최대의 일본과 미국의 항공모함 해전을 다뤘어요.사진도 많고 읽기도 쉬워요.

마노아 2008-10-03 23:06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진짜 분량 보고 화들짝 놀랐어요. 어찌나 길고 시리즈도 방대하던지요^^;;;
미드웨이란 책으로 검색을 해보니까 미드웨이 1942라는 제목이 뜨네요. 우와, 무려 올해 나온 책이군요! 사진 많은 책 원츄에요!
침묵의 함대가 재밌어서 같은 작가의 '메두사'도 사두었는데 아직 보진 못했어요. 원래도 읽기보다 책사기에 더 열심이었던 저지만 금년엔 더더욱 쌓이는 책들이 많군요. 갑자기 머리가 지끈!
지금 보니 열이 있네요. 호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