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둥이 빌딩 사이를 걸어간 남자 - 2004년 칼데콧 상 수상작 I LOVE 그림책
모디캐이 저스타인 글 그림, 신형건 옮김 / 보물창고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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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쁘띠는 외발 자전거를 타고 묘기를 부리는 거리의 곡예사였다.
고향 노트르담 사원의 첨탑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춤까지 추었던 그는,
쌍둥이 빌딩 사이에 줄을 매고 묘기를 부려야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빌딩 사이의 거리는 대략 40미터. 친구들의 도움으로 줄을 매다는데,
한밤중에 시작된 이 작업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무거운 전선을 끌어당기는데 무려 세 시간이나 걸렸다.
그들이 준비를 다 마치기도 전에 동이 트고 말았다.

이 책의 기발한 편집이 도드라진 부분.
책 날개를 펴면 필립이 외줄을 건너는 장면이 작게, 대신 넓은 배경과 함께 깊게 드러난다.

책 날개를 접으면 필립이 크게, 돋보이게 눈에 들어온다.
원근법의 미학을 살렸다.

뒷장은 세로 그림이다.
지하철에서 나오던 어떤 여자가 빌딩 사이를 걷는 필립을 발견하며 화들짝 놀라고 있다.

책 날개를 펼치면 필립을 가리키는 그녀의 새빨간 손톱이 눈에 들어오고 신고하느라 분주한 경찰의 모습도 보인다.
역시 편집의 승리!

한 시간 동안의 곡예를 마치고 땅에 내려온 필립은 법정 앞에 서게 된다.
재판관이 그에게 내린 벌은 아이들을 공원에 모아놓고 줄타기를 하라는 것.
필립으로서는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달콤한 벌.

1974년에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엮은 모디캐이 저스타인의 감각적인 동화.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쌍둥이 빌딩.
그 날의 끔찍했던 기억을 안고 있는 독자들은 쓰리고 싸아한 마음으로 책장을 덮는다.
필립의 추억을 갖고 있는 시민들은 비어있는 그 자리에서 옛 기억의 흔적을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한 시대를 가득 채웠던 어느 여배우의 부재가 새삼 떠오른다.
저 외줄처럼 위태롭고 외로웠을 테지. 필립처럼 신명나는 마무리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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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8-10-08 02: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책 보고프고 갖고 팠는데 잠시 잊혀졌던 책.
상기시켜주셨네요

마노아 2008-10-08 03:05   좋아요 1 | URL
아까 중고샵에 나와 있는 걸 보았는데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어요.
이 작가 책을 세번째 만난 건데 갈수록 좋아져요^^
 
쓰쓰돈 돈쓰 돈돈돈쓰 돈돈쓰
박흥용 지음 / 황매(푸른바람) / 2008년 6월
품절


책보의 으뜸은 광목!
각 잡힌 모양새가 참 맘에 든다.
나 어릴 때는 분홍색 자석 박힌 곽 필통이 참 탐 났더랬다.
언니들은 꼭 내 필통으로 철제 필통만 사다줬는데 난 플라스틱 필통을 더 좋아했다.
누르면 지우개 칸도 나오고 연필깎이도 튀어나오는 그런...
요새 초등학생들도 그런 필통 쓰려나?

책보 메는 다양한 방법을 보여주었다.
머리에 이고 있는 녀석이 주인공이다.
이마에 누워있는 내 천자 골이 너무 깊어서 아이같지가 않다.

그래픽 붓으로 그린 배경에 만화 말칸이 풍선처럼 둥둥 떠 있다.
사진같은 배경이 이색적인데 그 안에 조화를 시킨 만화 그림이 멋지다.

고무신을 신어본 기억은 없는 듯하다.
어릴 때 한복을 입었을 때도 아마 신발은 운동화였던 듯.
고무신에 바람 안 들어가게 발로 입구를 막은 뒤 뻥 소리나게 하는 놀이의 재현.
친구 불러내는 신호가 되기도 한다.

사진이 엄해서 잘 나오진 않았지만 화투장의 뒷장 그 질감까지 표현한 그림이 정성스럽다.
여자 인물만 3D로 그렸는데 2D그림에 3D얼굴이라니, 아이디어가 신선하다.
일종의 위화감까지 느끼게 하는 이 부조화의 조화라니!

바람 불어 나뭇잎 떨어지는 장면의 느낌을 화투 패의 그림을 활용해서 표현했다.
역시나 감각적이다.

춤추는 가얏고의 오연수가 떠올랐다.
숲과 마을, 한 마리 새,
그리고 춤추는 그녀와 장구치다 말고 넋이 나간 소년(..;;;)의 배치가 눈을 끈다.
꽉 찬 화면인데 그녀의 춤사위는 날아갈 듯 자유로워보인다.
실로 기예에 살아야 할 사람이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모스 부호다.
열심히 해석했는데 작가가 뒷장에 해답을 알려주었다.
의미심장한 뜻은 독자 개인의 해석에 맡기며...


양장본 표지가 두툼하고 고급스럽다. 출판사 이름의 글자 디자인도 맘에 든다.
책이 일반 단행본 만화보다 훨씬 비쌌는데 책장 가득 담긴 정성이 고가를 받을만한 이유를 설명해준다. 작품의 만족도와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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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1387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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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토요일 둘째 언니와 함께 큰언니가 5년 전 라식 수술을 받았던 병원에 가서 수술 관련 검사를 받았다.

둘 다 라식과 라섹이 가능한 수치지만 라섹을 권장한다고, 원장님은 말씀하셨다.

개인적으로도 라섹이 더 안전하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대로 수긍.

2. 그래서 어제, 언니가 먼저 수술을 받았다. 원래도 눈이 건조해지면 시리다고 했던 언니는, 오늘 눈도 뜨지 못하고 좀비처럼 누워지냈다. ;;;;

그래서 지금 고민 중이다. 다음 주엔 내가 수술을 받을 예정인데, 라식이 정말 라섹보다 불안전한 수술인가? 통증 없고 회복도 빠르다는데 그냥 라식으로 해달라고 우길까? 이거 진짜 고민 되네...

3. 용산 중앙 박물관에 강의를 들으러 갔다. 지난 달 셋째 주에 강의들으러 갔다가, 강의가 2째주랑 4째 주만 있다고 해서 헛걸음했었던 나는, 오늘이 둘째 주라는 것을 달력을 몇 번씩이나 보며 갔는데... 강의가 없단다.

이럴 수가! 황당해서 교수님께 전화를 드렸더니, 교수님도 황당해 하신다. 박물관 측에서 오늘 전화를 하더니 강의 시간이 다음주라고 했다고.

아니, 오늘이 그럼 둘째 주가 아니라 첫째 주란 말인가? 정말 황당하구나. ㅠ.ㅠ

4. 그저께, 한참 일하느라 머리 아플 시간 친구가 울먹이며 전화를 했다. 무슨 큰일이 났나 싶어 걱정했는데, 새로 산지 두달 밖에 안 된 컴이 망통이 되어서 스트레스 잔뜩 받은 이야기를, 무려 30분 간 늘어놓았다.  중간에 끊을 타이밍을 놓친 까닭이기도 했지만, 어머니가 중국 여행 가시고 혼자 심심하고 스트레스도 받았는데 털어놓을 데가 없었던 녀석이 많이 답답했겠구나 싶은 몹쓸 이해심 때문이랄까. 그 전화 끊고서 많이 짜증이 났더랬다. 난 왜 '거절'이 안 되는 걸까.

5. 그 친구가 어제 병원에 있을 때 전화를 다시 했다. 병원이라고 빨리 끊었는데, 오늘 또 전화가 왔다. 컴이 없으니 심심해서 못 견디겠다고.  저녁부터 생긴 두통에 머리도 지끈거렸고, 하던 일이 잘 안 풀려서 속도 상한 터였다. 바쁘다고 하고 전화를 일찍 끊었는데, 혹 내가 너무 짜증스럽게 전화를 받은 건 아닌가 하고 좀 맘이 쓰인다.

6. 초등 저학년의 눈높이로 말하기. 그 아이의 심정으로 사물을 보기. 아, 어렵구나. 시골 생활 한 번 안해 본 서울 촌뜨기인 내가, 거친 자연 환경에서 사는 아이의 목소리를 어떻게 상상해야 할까? 아, 정말 어렵구나!

7. 그래서 '연구' 차원에서 서점에 들러 책을 한 권 읽었다.

책이 어찌나 먹먹하던지, 뭉클해서 혼났다.

찾아보니 어미 개도 있고 미친 개도 있더만...;;;;

암튼, 새끼 개라고 하니까 짠했는데, 어순만 바꾸면 욕이 되는구나...;;;;;

8. 중고샵에서 권정생 선생님 책이랑 동화책 몇권 골라 주문을 했다.

 핑계는 많아가지고, 수입은 없으면서 책은 거의 날마다 지르는구나. 얼쑤!(정신줄 놓는 소리??)

9. 알라딘 서평단 모집 글을 보고 순간 눈이 번쩍였지만, 급제동을 걸었다. 석달에 네 편이면 결코 많은 게 아니지만, 그 수십 배로 밀려있는 나의 책들을 생각하며 삼켰다. 잘했어!

10. 두통이 아니라 열이 있는 건가? 언니네 집 가서 책 좀 빌려와야겠다. 조카한테 준 어린이 국어사전도 챙겨와야지. 바람 좀 쐬면 머리 아픈 게 가시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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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지 2008-10-07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독증이 점점 심해지는듯;;
저 책을 강아지로 봤어요. (그러니까 개새끼-_-;;;)

라식이나 라섹은 저도 하고 싶은데 겁나서 못하겠어요.
(돈도 돈이지만 ㅎ)

마노아 2008-10-07 21:25   좋아요 0 | URL
으하핫! 느낌이 확 달라진다니까요^^ㅎㅎㅎ
평생 안경 쓰고 살 결심이라면 괜찮은데, 언젠가는 수술할 마음이라면 일찍 하는 게 좋다고 해요.
노안이 오기 전까지 맑은 눈으로 살 시간을 확보하는 거니까요.
결심을 하고 나니까 빨리 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요^^

전호인 2008-10-07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력이 아직은 쓸만한데 옆지기가 원하니 조만간 해결해줘얄 것 같아요
좋은 정보 좀 많이 주세염.
시원하게 바깥바람 한번 쐬고 오면 두통은 눈녹듯 사라질 겝니다.

마노아 2008-10-07 21:26   좋아요 0 | URL
시력이 크게 나쁘지 않으면 크게 손보지 않고도 좋은 시력을 가질 수 있으니 수술도 권할 만 할 것 같아요.
언니네 가려고 연락하니까 애들 잔다고 오지 말라네요. 아스피린 먹어야겠어요ㅠ.ㅠ

무스탕 2008-10-07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직까지 시력이 괜찮은 편이라서 안경이나 수술같은건 신경안쓰고 사는데 친구 하나가 눈이 워낙 나빠서 라식인지 라섹인지도 못한다고 한것 같아요. 강막인가요? 그것이 너무 얇다고 한다네요, 병원에서..
(저도 개쉐이로 읽었어요..;;)

마노아 2008-10-07 22:36   좋아요 0 | URL
고도근시인가봐요. 요샌 라식 라섹 말고도 에피나 아이라식 등등 기존에 수술 못하던 사람을 위한 새로운 시술이 많이 나왔더라구요. 제가 아는 언니도 십년 전에 수술을 받았는데 시력이 워낙 나빴던 터라 퇴행이 와서 다시 안경 써요. 하지만 기존의 두꺼운 안경이 아니라 얇아진 안경을 쓰게 되었죠.
저는 다행히 각막이 두꺼운 편이었어요. 라식을 하더라도 잔여 각막이 안전 수치 안이었거든요.
개쉐이.. 어쩜 좋아요6^^ㅎㅎㅎ

네꼬 2008-10-07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참지 말아요. 가끔 질러줘야 돼. 짜증 말이에요. (잘 하셨소!!)

마노아 2008-10-07 23:53   좋아요 0 | URL
너무 소심하죠? 그 친구는 잊었을 것 같은데 말이에요^^;;;
 
유목민 이야기 - 유라시아 초원에서 디지털 제국까지
김종래 지음 / 꿈엔들(꿈&들) / 2005년 1월
품절


고비 사막의 기온은 겨울에 섭씨 영하 50도에서 여름에 115도까지 올라간다.-20쪽

위성 안테나를 설치해 두고 CNN 방송을 시청하는 몽골의 겔.
천창(겔의 지붕에 난 창)을 통해 별자리를 읽는 유목생활과 묘한 조화를 이룬다.-24쪽

70년 간의 사회주의도 몽골 유목민의 문화를 없애지 못했으며, 초원의 귀족이라는 자부심과 세계의 절반을 공포에 떨게 했던 민족 자존심을 몰아내지 못했다.-253쪽

'몽골족의 세기'에 대륙간 교역은 번성했고, 대상들의 통로는 이전보다 더욱 안전해졌으며, 더욱 빈번하게 이용되었다. 이는 동서간의 개인적인 접촉으로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접촉은 결코 마르코 폴로 한 사람에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개인적인 접촉은 수천 년 역사 속에서 영원한 타자로서만 존재하던 동과 서가 서로를 정신적으로 이해하게 만드는 데 기여했다.-28쪽

실크로드가 로드(도로)가 아니라는 사실은 역사의 중대한 비밀 하나를 추적하게 만든다. 그곳은 도로가 없기 때문에 통행세를 받는 사람도 없고 또 그같은 권리 행사를 어느 나라가 해야 마땅한지도 알 수 없다. 진정한 주인이 익명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실크로드의 명성이 높아짐에 따라 이 지역은 유럽과 중국의 통로 구실을 한 도로라는 인상이 강하게 새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곳이 지금의 중앙아시아인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중앙아시아는 무엇보다도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 존재했던 것이지 유럽과 중국을 위해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중앙아시아는 동서 문화의 통로로서 동과 서의 문물을 중개하는 역할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중앙아시아는 어디까지나 중앙아시아에 사는 사람들에 의해 고유한 사회와 독자적인 문화, 주체적인 역사가 만들어진 곳이다. 모든 중요한 교역로는 중앙아시아 사람들에 의해, 또는 그들의 참여 하에 개척되었다. -46쪽

뮬란의 적들에 대해 이 애니메이션이 가르쳐주는 것은 그들이 막무가내의 저돌성을 지닌 불멸의 악마라는 점과, 이름이 훈족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마치 저주에 찬 존재들처럼 뮬란의 적들은 아무 이유없이 사람들을 괴롭히고 침략과 파괴를 감행한다. 충돌의 원인은 한편은 선인데 한편은 악이라는 것밖에 없다.-63쪽

서기 350년에 극악한 인종 박해를 받고, 벌써 몇 세대를 그 땅에 살았던 흉노는 사라지고 만다. 이때 중원의 정착민들에 의해 그들 중 20만 명이 남녀노소 지위고하에 상관없이 살해되는데, 그것이야말로 한때 절대적인 지배자였던 흉노로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살아남은 흉노는 우선 북쪽으로 도망친다. 그들의 이동을 가속화시킨 것은 끔찍한 기후 변화였다. 혹독한 겨울 추위를 만나면 초원은 황폐해진다. 유목민은 생사의 기로에 서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373년, 유목민들은 북쪽 피난민이 늘어 초원에서의 삶을 지탱하기 어려울 만큼 인구가 최대로 증가한 상태에서 몹시 추운 겨울을 맞고 처참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흉노는 식량 부족과 인구 과잉으로 대이동을 감행한다. 남쪽은 만리장성과 중국 때문에 내려갈 수 없어, 서쪽으로 가는 길을 택한다. 알타이 지역을 지나 아랄해와 카스피해 그리고 흑해를 지나 유럽의 카르파티아 산맥 분지까지 쭉 뻗어 있는 초원지대를 따라간다. 이렇게 해서 서쪽으로 떠난 흉노를 훈족이라 한다는 설이 있다. 그리고 유목민이 그 훈족이라는 이름을 달고 유럽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시기가 열리는 것이다.-68쪽

유목민의 정체를 불확실한 것으로 만든 가장 큰 요인은 유럽인들의 종교였다. 당시 로마인들은 북아프리카로부터 골란 지방까지 종말론에 사로잡혀 있었다. "로마의 멸망은 곧 세계의 멸망"이라는 생각과 로마의 분열, 수많은 황제들의 쿠데타 등 정세 불안으로 모두가 위기감을 감추지 못하던 때였다. 그들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곡과 마곡(세상의 종말을 가져올 종족)을 각각 고트족과 마사게타이족으로 여겼으며, 당시에는 마사게타이족이 사라진 뒤였음에도 불구하고 훈족이 바로 그들이라고 믿었다.
로마인들은 훈족을 악마가 보낸 군대라고 믿었기 때문에 굳이 훈족의 유래에 대해 연구할 필요가 없었다. 유목민의 이미지는 그만큼 유황 냄새와 지옥의 화염에 휩싸여 있었던 것이다.-69쪽

서양 사람들은 결국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훈족의 생업은 전쟁이었고 그들의 일자리는 말의 등이었다."
이 놀라운 사태를 경험한 유럽인들은 작은 소규모 전투를 하더라도 훈족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소위 '용병'이라는 희한한 군사 영업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제 훈족은 거액의 몸값과 스카우트비를 받으면서 유럽의 곳곳으로 팔려다니기까지 한다.
그들은 말을 팔아서도 많은 이익을 거두었다.
-79쪽

유럽의 정착민들은 훈족이 자기네가 정복한 지역을 계속 유지하려는 집착을 보이지 않는 까닭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다. 훈족은 자신들이 직접 경작하기 위해 농부를 밭에서 쫓아내지 않았고, 도시의 건물에서 편하게 살기 위해 도시 사람들을 몰아내지도 않았으며, 특권을 누리기 위해 정복 지역의 정통 정부를 해체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그저 닥치는 대로 훔치며 약탈하고 죽이면 그만이었다.-80쪽

두개골이 길게 늘어난 훈족의 우골. 이는 당시 유목민들의 전통이었다고 전해진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러한 문화가 신라의 유물인 금관에서도 나타난다는 점이다. 둘레가 약 45cm(7~8세 어린아이의 두개골 크기)인 신라의 금관은 머리를 훈족처럼 길게 늘이지 않고서는 착용이 불가능했을 것이다.-84쪽

오늘날 유목민의 빈곤을 퇴치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경작을 가르치고 건초 사업을 권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는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유라시아 유목민이 겨울 식량으로 건초를 만들지 않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라고 한다. 하나는, 초원은 한 번 벌초를 하면 다시 풀이 자랄 때까지 수년이 지나야 하고 그러는 사이에 벌판은 덤불이 무성해져 목초지로서의 가치를 상실하는 까닭이요, 다른 하나는 노동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탓이다. 100마리의 말을 방목하는데 1년 내내 한 사람이면 족하지만 100마리를 겨울 동안 먹이기 위해서는 건초가 24만 5천 7백 킬로그램이 필요하다. 차라리 풀이 있는 겨울 영지로 이동하는 것이 몇백 배 효율적인 것이다.-98쪽

수천 년의 역사를 동물과 함께 살아온 그들은 지금도 동물을 죽일 때에 자신이 갖출 예를 모두 보여줌으로써 동반자임을 확인한다. 비가 오는 날에는 절대로 동물을 죽이지 않는다든가, 날이 어두워지면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고 해도 양을 잡아주지 않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다. 어떻게 이런 날씨에 내 양을 먼 길 가게 만들 수 있느냐고 물어오는 유목민들에게 이방인이 내미는 돈 뭉치는 참으로 부끄러운 문명의 부스러기일 뿐이다. -111쪽

당시 대륙의 심장부는 건조 지대가 아니었다. 타조나 코끼리가 살 수 있을 정도로 따뜻하고 비도 많이 내렸다. 우량이 풍부하여 초목이나 동물이 번식하고 그 전역은 원시림에 뒤덮인 습윤 지대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이 땅에다 수수를 심었다. 그리고 청동기에 이르기까지 번영을 지속한다. 그러나 빙하의 후퇴와 함께 북극 고기압이 수축해서 이 지대에 비를 몰아오던 온대서 저기압이 차츰 북방으로 이동을 개시한다. 그 결과 이상 건조가 시작되었다. 그것이 바로 고비의 사막화 현상이었다. 지금도 고비 사막에는 그 건조화가 가져다 준 경악할 만한 재앙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운이 좋은 여행자들은 종종 모래 사막에 드러난 공룡의 뼈를 보게 된다. -123쪽

스키타이, 그들은 누구일까? 이 난감한 질문에 가장 먼저 손을 들 사람은 페르시아의 대왕 다리우스일 것이다. 페르시아 제국의 세 번째 왕인 그는 몸소 70만 대군을 이끌고 원정길에 올랐다. 그러나 그가 싸울 상대는 초원 위의 바람과 허공뿐이었다. 괴상하게 생긴 기마유목민들은 바람처럼 나타났다가 안개처럼 사라졌다. 다리우스가 가는 곳은 도시도 없었고, 건물도 없었으며, 아무런 전리품도 거둘 수 없었다. 단지 끝없이 펼쳐진 초원뿐이었다. 유령과의 싸움에서 대왕은 자신의 완벽한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스키타이의 남하가 멈춘 것 또한 사실이다.-134쪽

세상의 모든 강한 집단이 그러하듯이, 스키타이도 소멸되고 있었다. B.C4세기부터 그랬다.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조도 같은 운명의 길을 걷고 있었다. 다리우스는 알렉산더에게 패했다. 그러나 스키타이는 알렉산더의 북방 정벌군을 겨고티시켰다. 스키타이를 멸망시킨 것은 세계의 패자 알렉산더가 아니라 같은 유목민 사르마트였다. 그들은 스키타이와 같은 이란계 북방 유목민이었다. 칼 대신 창을 사용하는 기마민족인 사르마트는 기원전 3세기 후반에 볼가강을 건너왔다. 원래 그들의 고향은 아랄해 북방이었다. 스키타이는 사르마트에 쫓겨 서쪽으로 피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38쪽

서쪽에 스키타이가 있었다면 동쪽에는 흉노가 있었다. 흉노는 투르크-몽골계였다. 그들은 중국의 역사에서 기원전 9세기에 이미 험윤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그후 서양에서는 야만인을 뜻하는 훈으로 불리웠다. 기원전 4세기 이전의 흉노는 중국 변방의 약탈자에 불과했다. 중국 사람들은 그들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틈틈이 성을 쌓았다. -139쪽

흉노의 월지에 대한 공격은 그 파장이 대단했다. 아시아에서 최초로 민족 이동이 일어난 것이다. 월지는 감숙을 떠나 서쪽으로 향했다. 그들은 다시 이식쿨에서 오손에게 쫓겨나 또다시 서쪽으로 향했고, 파르가나의 시르다리아강 상류에 도착하였다. 그곳은 박트리아 왕국의 국경이었다. 월지는 그곳에 살고 있던 '스키타이인' 사카족을 건드렸다. 사카족은 소그디아나를 침압하고 박트리아로 들어갔다. 월지는 옥서스의 북부에 있다가 박트리아에서 사카인을 몰아낸 뒤 1세기에 쿠산 왕조를 세웠다. 이처럼 흉노의 월지에 대한 공격은 아시아의 판도를 바꾸었다. 초원의 작은 진동이 끊임없는 파장을 일으키며 인도와 서아시아까지 간 것이다.-140쪽

흉노는 400년 간 존속한다. 그들의 해체는 내부분열 때문이었다. 또 한과의 오랜 전쟁으로 인한 국력의 손실을 회복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은 이를 어렵지 않게 보충했다. 기원전 1세기 중반에 한은 흉노로부터 비단길의 지배권을 탈취하였다. 흉노 안에서는 선우의 자리를 놓고 호한야와 질지가 싸웠다. 기원전 43년, 한나라 선제의 도움을 받은 호한야가 승리했다. 호한야에게 쫓겨난 질지는 새로운 땅을 찾아 서쪽으로 향했다.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흉노의 동서 분열이었다. -146쪽

유라시아 각지에서 일어나는 흉노나 훈 또는 후나는 과연 동일한 종족일까?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 아니면 찬란한 흉노 제국의 이름을 도용하였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침략을 받은 피해자들이 무서운 흉노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았을 수도 있다. 자칭, 타칭, 참칭을 막론하고 여기서는 흉노가 당시 유라시아 세계에서 태풍의 눈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흉노의 흥기와 해체가 유라시아의 대변동을 가져왔고, 그 와중에서 한과 로마라는 동서의 고대 대제국이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149쪽

여러 민족의 고대 장군들이나 일본의 사무라이 복장 등을 보면 치마처럼 밑이 터진 옷을 입고 있다. 그로부터 점점 바지를 입는 사람이 늘어나는데 이것이 바로 유목민의 영향이었다.
유목민의 의복 중 주변 민족의 주목을 가장 크게 끈 것은 바지였다. 바지는 달아날 데 없는 기마족의 의복으로써, 말을 달리기에 편하며 추위도 막아준다.
상의는 허리까지 덮거나 아니면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자켓이며 오른쪽으로 여민다.-156쪽

유목민이 생태계의 흐름에 순응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정착문면의 사람들이 생태계의 명령을 더 이상 거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20세기 후반이 되어서이고, 초원의 사람들은 사회주의 정부가 계몽정책을 쓰기 전까지는 대부분 문맹으로 살았던 까닭에 생태계의 인식에 대한 그들의 능력은 무시되어 왔다. 그러나 그들의 생활 문화는 그 진가를 다 판독해내기 어려울 만큼 생태계에 대한 높은 수준의 인식력을 반영하고 있다. -158쪽

유목민이 오랜 세월동안 쌓아 온 경험과 지혜가 집약돼 있는 것은 지금도 2천년 전의 것과 똑같은 형태로 남아 있는 그들의 집 '겔'이다. 겔의 가장 큰 특징은 계절에 따라 이동할 수 있도록 분해 조립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창은 하늘을 향하는 천창인데, 그곳에 들어오는 햇빛으로 시각을 안다. -158쪽

계절마다 이동하는 장소의 범위를 영지(사람이 사는 장소)라고 한다.-160쪽

'경계'의 습성을 유목민적인 것이라고 하는데 이는 동물에게서 배운 것이다. 예컨대, 말에게 다가갈 때는 절대 뒤쪽으로 접근하면 안 된다. 실수로 뒤에서 다가가면 말이 놀라서 차 버리기 때문이다. 말에 다가갈 때는 말의 시야에 잘 들어오도록 비스듬히 옆쪽에서 다가가 안심시켜야 한다. 동물의 삶은 언제나 사방팔방에서 기습해 오는 위험과 대결하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움직이는 것을 기겁을 하듯이 싫어한다.-165쪽

연평균 강우량이 140~320mm에 불과하고 가혹한 기후 조건을 지닌 몽골 고원에서 유목말고는 그 어떤 다른 유형의 경제 행위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문제는 가혹한 겨울의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겨울 방목지의 확보이다. 눈이 쌓이지 않고 풀이 풍부하며 바람도 막을 수 있는 곳, 그러나 이러한 곳은 한정되어 있다. 역대 유목민족들간의 전쟁 원인을 분석해 보면 대부분 겨울 방목지의 확보 때문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173쪽

칭기스칸은 공동체의 활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제도를 창안했다. 개인 약탈의 금지가 대표적인 예였다. 약탈은 당시의 유목민들로서는 생산 활동이었으므로, 개인적인 약탈은 개인 생산이었다. 그러니까 개인적 약탈을 금지시킨 것은 개인 생산을 공동 생산으로 바꾼 셈이다.-198쪽

몽골 치하의 항주는 크게 번영했던 남송 시대와 별로 다를 바 없었다. 몽골의 타격을 전혀 안 입었던 것이다. 실제로 몽골군은 항주에서 거의 약탈을 하지 않았다. 진주 과정에서 있었던 약간의 피는 오히려 남송의 병사들간에 발생한 충돌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항주성 일대에는 40만에 이르는 병력이 주둔해 있었는데, 남송정부가 무조건 항복을 결정하자 실직을 두려워한 일부 부대가 폭동을 일으켰기 때문이다.-301쪽

칭기스칸을 이은 어거데이칸, 구유크칸, 멍케칸은 칭키스칸과 다름없는 유목군주였다. 그러나 쿠빌라이칸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할아버지의 정복지 관리시스템을 전면 수정했다.
쿠빌라이는 제국의 창업자 칭기스칸과는 또다른 창업자였다. 쿠빌라이는 금나라와 남송을 몰아낸 중원 대륙에 원나라를 세웠다. 원나라는 몽골 제국 자체가 아니라 몽골 제국의 중앙 부대였다.
쿠빌라이칸은 몽골 제국을 한화시킨 첫 번째 인물이라는 점에서 할아버지 칭기스칸의 실망을 사기에 충분한 후예였다. 반대로 할아버지의 제국을 더 크게 완성시켰다는 점에서는 얼마든지 창찬받을 만했다. 칭기스칸이 뿌리이자 씨앗이었다면 어거데이칸과 멍케칸은 줄기였고, 쿠빌라이칸은 열매였다. -302쪽

쿠빌라이칸에 이르러서야 일칸국의 페르시아 정벌이 완료됐다. 킵차크칸국도 강력한 주권 국가로서 유럽을 향해 포효했다. 중원을 석권한 쿠빌라이는 베트남, 미얀마 등 동남아시아와 대만 오키나와 고려 등을 장악했다.
몽골 제국의 영토는 쿠빌라이칸 대에 사상 최대가 된다. 그런 그에게도 뼈아픈 아킬레스건이 있었다. 형인 멍케칸이 사망하자 정식 코릴타를 열지 않고 중원 땅에서 기습적으로 대칸에 즉위해 버린 사실이다.
당시 몽골 고원에는 쿠빌라이의 막내동생 아리크 버케가 주둔하고 있었다. 멍케칸의 친위대도 그의 휘하에 있었다.-304쪽

쿠빌라이칸과 아리크 버케칸은 형제 전쟁을 벌였다. 몽골판 남북 전쟁이었다. 결과는 쿠빌라이칸의 승리였다. -3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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