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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툭 ㅣ 그림책 보물창고 2
요쳅 빌콘 그림, 미샤 다미안 글, 신형건 옮김 / 보물창고 / 2004년 8월
평점 :
절판
중고샵에서 찜해두었던 책을 발견하면 쾌재를 부르기 마련이다. 이 책도 그렇게 해서 내 손에 들어온 고마운 선물!
표지의 그림이 어둡다. 책의 거의 대부분이 이런 그림체다. 아마 표지만 보고서 이 책을 속단한다면 아이들 용이 아닐 거라고 지레 짐작하기 쉬울 것이다. 게다가 툭 내뱉는 듯한 느낌의 저 제목도 낯설기 그지 없다.
주인공 아툭은 에스키모, 아니 이누이트 족 소년이다. 번역을 할 때 '에스키모'라는 익숙한 명칭 대신 '이누이트'라는 올바른 표현을 써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유일한 아쉬움이다.
아무튼, 이 이누이트 소년 아툭이 다섯 살이 되었을 때 멋진 친구가 생긴다. 아빠가 주신 작은 갈색 개 한 마리와 알록달록 예쁜 색들이 칠해진 썰매 하나.

아툭은 몹시 기뻤다. 개 이름을 타룩이라 지어주고 무척 사랑해 주었다.(타룩이 그들의 언어로 어떤 뜻인지 알면 좋을 텐데...)
둘은 늘 함께 지냈고 눈밭 속에서 행복해 했다. 타룩의 저 둥그렇고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몹시 사랑스럽다.
아툭의 눈매도 옆으로 길다란 것이 동양인스런 느낌이 나는 게 자연스럽고 보기 좋다.
온통 눈발이 날리느라 회색빛까지 도는 눈천지. 그곳의 푸르고 까만 겨울이 손에 잡힐 것만 같다.

사냥철이 돌아왔고, 사냥 여행을 떠나시는 아빠께 타룩을 데려가 달라고 부탁하는 아툭.
아툭은 타룩이 먼 여행에 익숙해져서 큰 개들과 함께 썰매도 끌 수 있게 얼른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랐다.
인내를 배우고 나면 타룩은 더 용감하고 힘센, 멋진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이게 불행의 시작이었다.
여러 날이 지나 사냥터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타룩과 함께가 아니었다.

타룩이 그만 푸른 늑대에게 물려 죽었다는 믿어지지 않는 소식!
아빠는 아툭을 위로하기 위해서 가장 아끼는 개를 선물해 주려고 했지만, 아툭에게 타룩을 대신할 수 있는 개란 없었다.
화면 가득 차지한 푸른 늑대의 형형한 눈빛이 매섭다. 그에 비하면 썰매를 끌던 개들은 너무 작고 약해 보인다.
아빠 키의 절반 밖에 되지 않는 아툭 역시 한없이 작은 존재에 불과했다.

아툭은 분노했다. 당장 푸른 늑대를 잡아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은 것.
아빠는 산비탈의 꼬마 자작나무 만큼 작은 아툭에게는 무리라고 하셨다.
복수를 다짐하는 아툭에게 아빠는 비법(?)을 알려주신다. 창과 활을 갖고 연습할 것. 썰매와 카약을 타는 법을 익힐 것. 그렇게 연습에 연습을 거듭핟바 보면 키가 커지고 힘도 세질 테니까, 그때 가서 늑대를 죽이라는 것이다.
두 주먹 불끈 쥔 아툭! 이제부터 나름의 극기 훈련 시작이다. 푸른 늑대에게 복수할 그 날을 기다리며 열심히 훈련에 훈련을 거듭하는 아툭. 그렇게 아툭은 무정하고 매정한, 조금은 차가운 느낌의 그런 소년으로 자라간다. 어린아이 책에 복수와 응징이 나오다니, 독자는 어리둥절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 더 지켜보자. 작가가 어떤 말을 하고자 하는지 들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시간은 흘러 아툭은 이제 산비탈의 자작나무보다 키가 커졌다. 어깨에 활을 메고 툰드라로 나가 토끼와 꿩들을 쓰러뜨렸다. 사람들은 이제 아툭을 힘이 센 젊은 사냥꾼이라고 부른다.
눈과 물과 하늘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은 그 높고 깊은 북쪽 땅끝 마을의 풍경을 섬세하게 잘 묘사했다. 그림의 터치는 거친데 아툭의 마음이 그만큼 거칠고 황량한 것이 아닐까. 그가 지켜보는 풍경은 저렇게 메마른 푸른 색일 것이다.

그리고 눈 내리는 계절에 맞닥뜨린 푸른 여우 한 마리.
아툭이 찾고 있던 것은 푸른 늑대였는데, 먼저 마주친 것은 여우였다.
놀랍게도 여우는 사냥꾼의 발소리를 듣고도 도망치지 않았다.
긴 세월 사람들을 따돌리고 승자의 입장에서 내려다보던 여우는, 이제 외로움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하늘의 반짝이는 별 하나를 친구로 삼아 행복감을 느끼고 있다.
아툭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들!
둘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친구가 된다는 것인데 아툭은 알 수가 없다.
목표는 푸른 늑대이고, 그 늑대를 이길 만큼 충분히 힘을 기른 터라, 더 이상의 연습은 필요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별을 바라보며 친구가 생긴 것에 기뻐하는 여우의 모습이 밟혀서일까. 아툭은 여우를 내버려둔 채 집으로, 이글루로 돌아간다.
이제 아툭은 산비탈의 꼬마 자작나무보다 무려 두 배나 키가 커버렸다. 정말 푸른 늑대를 죽일 차례가 된 것이다.

마침내 아툭은 창을 집어들었다. 거센 바람이 벌판을 울리고 있었고, 부엉이는 소리 없이 날고 있던 그날, 폭풍이 불어도 아툭은 두렵지 않았다. 어둡고 캄캄한 툰드라를 찾아 헤매던 끝에 아툭은 푸른 늑대를 발견하다. 그리고 수년 간 벼르고 별렀던 그 감정 그대로 늑대를 죽이고 만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일까. 조금도 기쁘지가 않다. 속이 시원하지도 않다. 그토록 원하던 일을 성취했는데, 어째서 이런 감정을 느껴야 하는 것일까.
늑대를 죽였어도 사랑하던 타룩이 살아돌아오지 않는다. 복수의 끝은 희열이 아닌 허무함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 감정의 정체를 알지 못했을지라도.
지난 날 화면을 가득 채우며 공포를 느끼게 했던 늑대는 이제 너무나 초라한 모습으로 죽어 있다. 아툭의 마음은 그렇게 얼어 있는 채 계절은 바뀐다.
툰드라에 색동 여름옷을 입혀준 여름 날. 흔치 않게 맞을 계절의 축복이건만 아툭의 마음은 여전히 겨울이다. 친구도 없고 짐승들도 아툭을 피해 다닌다. 아툭은 모두에게 두려움을 주는 존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툭은 뜻밖의 존재를 만난다.

가냘픈 꽃 한 송이. 그러나 꽃은 아툭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무덤덤해 보이던 꽃은, 그러나 지금 이 상태로 있는 것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꽃이 바란 것은 동무 하나. 오래오래 눈덮인 땅속에서 지내야 할 때 나를 기다려줄 한 사람이 있다면, 꽃의 외로움도 달래질 수 있을 것이다.
늑대를 죽이기 전엔 외로워하던 여우에게서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던 아툭인데, 이제 아툭은 자신의 마음 속에서 무언가 하나 떠나가고 있음을 느낀다. 미움과 원망, 분노의 감정 대신 밝고 따뜻한, 사랑스런 어떤 감정들. 오래도록 기다려왔던 그리워했던 그 감정 하나가 아툭의 표정을 녹여버린다.
꽃이 원했던 기다려주는 그 친구 하나. 이제 아툭이 되어줄 차례다.
책의 마무리를 보면서, 어릴 적 좋아했던 노래가 생각난다. 아마도 부른 이가 사랑의 듀엣이었던 듯. 제목은 '꽃과 어린 왕자'
꽃을 사랑했던 어린왕자의 마음을 몰라주던 장미 한 송이, 왕자는 장미꽃을 떠나 먼 여행을 떠나는데, 뒤늦게 어린왕자의 진심을 알아차린 꽃이 오랜 시간 왕자를 기다리다가 왕자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는 그대로 시들어버리던 모습. 어린 마음에, 그 모습이 너무 슬펐다. 이제 오래오래 행복해져야 하는데 말이다. 다행히 왕자의 눈물을 받고 꽃은 다시 살아나고 둘은 그 먼 우주에서 아름답고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밤하늘에 빛나는 수많은 저 별들 중에서
유난히도 작은 별이 하나 있었다네
그 작은 별에는 꽃이 하나 살았다네
그 꽃을 사랑한 어린 왕자 있었다네
꽃이여 내말을 들어요 나는 당신을 사랑했어요
어린왕자 그 한마디 남기고 별을 떠나려 하였다네
꽃은 너무나 슬퍼서 울었다네 꽃은 눈물을 흘렸다네
어린 왕자는 눈물을 감추며 멀리 저멀리 떠났다네
한 해 두 해가 지난고 어린왕자 돌아왔다네
하지만 그 꽃은 이미 늙어 버렸다네
왕자여 슬퍼하지 말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렸어요
꽃은 그 말 한 마디만 남기고 그만 시들어 버렸다네
어린 왕자는 꽃씨를 묻었다네 눈물을 흘렸다네
어린 왕자의 눈믈을 받은 꽃씨는 다시 살아났다네
랄랄랄랄랄랄랄라 꽃은 다시 살아났다네
랄랄랄랄랄 하늘가에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그때 그 꽃이 꼭 아툭에게 기다림을 원하는 이 꽃 같고, 먼 길 돌아온 어린왕자가 꼭 아툭처럼 느껴진다.
내내 어두웠던 배경이 모처럼 밝아지고 눈발에 가려 있던 태양도 모습을 드러냈다. 아툭의 마음처럼 밝아진 풍경이다. 이제 아툭은 마음으로부터 타룩과의 이별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성장할 것이다. 진짜 어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