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해결의 단서, 식물 [제 848 호/2008-12-10]


가을 서울 근교 야산에서 마을 주민이 풀로 덮여 있는 시신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하였다. 시신은 많이 부패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아 유기된 지 많은 시간이 지난 것 같지는 않았지만 많이 훼손되어 얼굴 형태 등을 확인할 수 없었다. 다행히 신분증이 있어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피해자가 발견된 곳은 풀이 사람의 허리까지 자라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피해자에 대한 부검 결과 교통사고에 의해서 사망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누군가 교통사고를 내고 피해자를 그곳으로 유기한 후 도망한 것으로 보였다.

주변을 지나던 목격자의 신고로 용의차량이 수배되었고 용의자가 잡혔다. 하지만 자신의 범행을 완강하게 부인했다. 그의 차량에 대한 감정과 동시에 그의 옷 등도 압수되어 정밀한 분석이 실시되었다. 감정 결과 그가 범인이라고 확신을 할 수 있었는데 물론 목격자의 신고가 큰 역할을 하였지만 더욱더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그의 옷과 차량에서 발견된 씨앗이었다. 그의 옷과 차량의 깔판에서 쇠무릎의 씨앗이 발견된 것이다. 그는 교통사고를 낸 뒤 피해자가 숨진 것으로 판단하여 사고 지점과 가까운 인적인 드문 곳에 피해자를 유기하고 도망친 것이다.

위의 사건과 같이 범인이 입고 있는 옷과 신발 또는 범죄에 사용된 차량 등에 식물, 식물편, 씨앗, 꽃가루, 이끼류 등 다양한 형태의 식물류 등이 부착될 수 있다. 피해자 또는 용의자와 관련된 물건에서 채취한 이런 증거물들을 분석하여 현장의 식물 등과 동일성 여부를 감정하거나 연구하는 분야를 수사식물학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이 분야의 전문가가 거의 없는 형편으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유일하게 감정을 하고 있다. 하지만 외국의 경우 오래전부터 활발하게 연구가 진행되었고 관련 전문 서적도 많은 편이며 다양한 사건에서 범죄를 입증하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위의 사건이 만약 봄에 일어났다면 범인의 옷에는 그 지역에 주로 분포하는 식물의 꽃가루 등이 묻었을 것이다. 꽃가루는 특히 봄에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관찰할 수 있다. 이들 꽃가루를 현미경을 통해 관찰하면 종에 따라 매우 다양한 모양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범인의 옷 등에 묻은 꽃가루를 채취하여 현미경으로 관찰하면 어떤 식물의 꽃가루인지를 판단할 수 있다. 이 관찰된 것을 현장에 주로 분포하는 꽃가루의 모양과 비교하면 범인이 그곳에 갔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또한 종자(씨앗)가 옷 등에 잘 달라붙는 경우도 많은데, 도깨비바늘, 도꼬마리, 쇠무릎 같은 식물들은 우리 주변에 흔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이들의 종자들은 옷 등에 쉽게 달라붙어 잘 떨어지지 않고 세탁을 하더라도 어딘가에 일부라도 남아 있기 때문에 좋은 증거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습한 곳이라면 이끼 등이 항상 존재하는데 범인이 그곳에 접촉을 하였다면, 신발의 틈과 옷 등에 이끼 등이 묻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따라서 이들을 채취하여 현미경으로 관찰하면 동일한 종류의 이끼인지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이끼와 관련해서는 이런 사건도 있었다. 야산에서 자살한 것 같은 시신이 발견되었는데 여러 가지 분석으로 보아서는 분명히 자살을 한 것 같지는 않았다. 수사관은 나무 밑동에 이끼가 자라고 있는 모습을 보고 변사자가 자살을 했다면 그 나무를 올라갔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렇다면 그 이끼가 변사자의 신발에 묻었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변사자의 신발에서 나무 밑동의 이끼와 같은 종류의 이끼가 발견되는지를 분석 의뢰했다. 감정 결과 그의 신발에서는 나무 밑동의 이끼가 전혀 검출되지 않아 타살로 확신하고 수사를 진행했다. 물론 자살 타살을 판단하는 여러 가지 다른 방법들이 있지만 이러한 감정도 수사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유용한 방법 중 하나이다.

식물의 잎 및 줄기 등의 일부가 발견된 경우는 어떡해야 할까? 가을, 겨울과 같이 잎이 없는 때 또는 이미 말라버린 낙엽 또는 마른 풀에서도 어떤 종류의 식물인지를 알 수 있을까? 이 경우도 어떤 종의 잎 또는 줄기의 일부인지 또는 마른 것일지라도 어떤 종류의 식물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봄, 여름뿐만 아니라 가을, 겨울에 일어난 사건에서도 이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최근에는 수사식물학에도 유전자분석 방법이 도입되어 활용되고 있다. 식물분류를 위해 DNA 분석이 사용되고 있긴 하지만 같은 종 내에서의 개체식별은 그렇게 많은 연구가 진행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유전자분석을 통한 개체 식별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실제로 범죄사건에 적용하기도 한다. 최근에 잃어버린 고가의 소나무를 유전자분석을 통해서 찾은 경우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수사식물학은 우리 주위에 매우 흔하게 존재하는 식물류들을 분석함으로써 과학수사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범행을 증명하고 범인을 확인하는 과학수사 분석 방법에는 제한이 없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증거와 모든 분석 결과가 과학수사에 이용될 수 있는 것이다.

글 : 박기원 박사(국립과학수사연구소 유전자분석과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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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투를 빈다 - 딴지총수 김어준의 정면돌파 인생매뉴얼
김어준 지음, 현태준 그림 / 푸른숲 / 2008년 11월
품절


이후 나이를 먹어 어느 순간부터 내 비겁함과 정면으로 마주 볼 수 있게 되고 마침내 그걸 넘어설 수 있게 되면서, 이제는 그때 일이 고맙다. 그로 인해 내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그 경계의 일부를 파악하게 되었으니까. 그렇게 내가 누군지 알게 되는 첫걸음을 떼게 되었으니까. 선택은 언제나 자신을 드러낸다. 선택이 곧 자신이란 말이다. 그리고 그런 선택은 친구와의 관계를 통해 가장 먼저 경험하게 되는 법이다.-136쪽

당신이 당신 스스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실제 당신은 딱 그 선택의 정도만큼 이기적이고 비겁한 사람인 거다. 자신은 그렇게 자기선택의 누적분이다.
하지만 그 선택으로 인한 비용과 대가를 기꺼이 지불하겠다면, 자신이 그 정도로 비겁하고 이기적인 사람이란 걸 스스로 인정하고 그에 따른 대가를 감수할 의사와 용기가 있다면, 그렇다면 당신은 나쁜 인간은 아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비겁하고 이기적이지 않은 인간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그러나 그런 선택에 마땅히 따르는 대가를 지불하려 하지 않는 자, 부지기수다. 핑계를 찾고 이유를 찾는다. 자신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거다. 결정적 차이는 거기서 만들어진다. 그 선택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갖가지 거짓과 사기는 결국 다른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좀먹는다. 비겁하고 이기적이면서 스스로 그걸 인정하지 않을 때 진정한 피해는, 그렇게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입게 된다.-138쪽

이 땅에서 이기적이란 판정은 곧 패배를 뜻한다. 해서 파업의 전위에는 항상 '민주'나 '인권'이 선다. 그러나. 그래 봐야 공격은 어김 없이 후방에 엄폐해둔 '정당한' 이기심에 곡사로 쏟아진다. 파업과 이기주의는 그렇게 도의어다. 그래서 더욱 죽어라 '민주'와 '인권'에 매달려본다. 하지만 소용없다. 서로 숨기고, 간파하는 지점이 뻔하다.

종교의 구속력은 그 목표의 도달 불가능성에서 기인한다. 누구도 거기 도달할 수가 없다. 모두가 죄인인 것이다. 그렇게 율법을 어기지 않는 자가 존재할 수 없어야, 종교가 산다. 많은 종교가 그렇게 돌아간다. 종교의 음모다. 우린 이기적인 건 곧 죄악이라 믿도록 훈육되었다. 하지만 이기심은 모든 생명의 존재 원리다. 배타적으로 삼투압하지 않는 나무는 말라 죽는다. 여기까진 기본이다. 사실은 어느 누구도 '이기적이지 말라'는 계명을 범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기심은 우리 모두의 원죄가 된다. 우리 사회는 그렇게 돌아간다. 이건 정치의 음모다.-143쪽

이기적 권리가 충돌할 때 그 갈등을 해결하라고 있는 게, 정치다. 이기적 욕구는 당연히 기본이라 인정하고 그로 인한 갈등을 어떻게 조절해 질서를 조직하느냐 고민하기보다, 욕구 그 자체를 공격해 전체의 자유도를 관제하는 방식, 이 근본주의적 통제 방식이 바로 우리 정치의 발명품이다. 중재의 수고를 덜고, 혹여 실패하는 무능을 은폐하기 위한. 우리의 그 분은 그렇게 오신 게다.

자신이 이기적이란 사실 자체를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기심은 존재의 기본 권리다. 문제는 이기적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과연 어디서 그 한계를 긋느냐 하는 거다. 그 한계선을 이어 붙이면 그게 곧 자신이다. -144쪽

남을 기쁘게 하는 데 자기 인생을 다 쓰고 만다는 건, 멍청한 걸 넘어 슬픈 일이다. 그러니 거절하는 걸 두려워 마시라. 그 공포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자신이 뭘 원하는지도 모르고 사는 것처럼 삶의 낭비도 없다. -155쪽

모든 선택에는 반드시 리스크가 따른다. 모든 선택에 따른 위험부담을 제로로 만들어달라고 한다면 그건 삶에 대한 응석이다. 그러니 중요한 건 선택의 이유다. 나머지는 그 이유를 붙들고 감당하는 거다. 스스로 설득될 이유가 있는지 생각해보고, 만약 그런 게 있다면, 그럼 누가 뭐라고 하든 그 결과까지 자신이 감당하는 것, 그게 어른의 선택이다. -158쪽

양아치. 그들은 우선 욕망에 솔직하다. 사회는 개인의 욕망을 품위 있게 포장하고 조율하기 위해 오랜 세월 나름의 예법과 규범을 개발해왔다. 양아치는 이런 사회적 관례에 무심하다. 그래서 품위가 없다. 그러나 격식 대신 욕망을 선택한 양아치는 그 덕에, 이 땅 특유의 뒤틀린 도덕적 이중 잣대에 오랫동안 짓눌려왔던 대다수의 민간인들보다, 정신과적 차원에서 건강하다. 민간인들의 환호는 그러니까 그런 파격에 대한 카타르시스인 게다.

또한 양아치는 비장하지 않다. 비장하면 양아치가 아니다. 일상의 안위와 개인의 행복을 맨 앞에 높는 그들은 본질적으로 소시민이다. 너는 민족 중흥을 '위해서'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것이라고, 무섭게도 내 탄생의 목적을 못 박아주는 국가 앞에 '공익과 질서'를 지키고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반공정신이 투철한' '근면한 국민'이 되겠다고 선언해야 했던 과거의 민간인들과는 다르게, 그들은 그냥 태어났고 그냥 자신의 행복을 위해 자기 뜻대로 산다. 그들은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 안 띠고 태어났단 말이다. 제 인생의 주인인 것이다.-163쪽

그리고 양아치는 독립군이다. 양아치는 조직폭력배가 못 된다. 폭력을 못 해서가 아니라 조직을 못 해서다. 양아치가 조직을 한느 순간부터 그들은 이미 양아치가 아니다. 상명하달, 지배와 피지배를 기본 원리로 하는 조직에 무조건 충성하고 그 조직의 권위를 빌려서야 자존을 형성하고, 자신을 조직의 일부분으로 인식하고서야 자신의 존재 가치를 찾아내는 집단 정체성의 조폭보다는, 그렇게 철저히 개인으로 남는 양아치가 훨씬 더 근대적 자아에 가깝다.

한 방향으로 기울어져서 가던 차는 반대 방향으로 핸들을 충분히 틀어야 비로소 바로 간다. 충분히 엄숙하고 충분히 집단적이며 충분히 도덕적인 당신, 이제 양아치가 돼라. 개인과 조직 사이에서 갈등할 때, 가장 기본적인 기준은 언제나 그렇게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며 비장하지 않은 독립군인 채로, 당신 자신이어야 한다. 그렇게 독립된 개채로서의 자각 없이는 개인의 자존도 없다.
열심히 일한 당신, 이제 양아치가 돼라.-164쪽

사실 당신만 그러는 건 아니다. 사람들이 선택을 못 하는 진짜 이유는 답을 몰라서가 아니니까. 그에 따르는 비용을 지불하기 싫어서니까. -185쪽

자신을 가장 오해하는 자가 누구냐. 바로 자신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마음에 드는 자기만 자기라고 생각하고, 나머지 자기는 외면하거나 모른 척한다. 때론 남들은 다 아는, 명백히 나쁜 자기도 여러 방어기제를 동원해 부정해버린다. 주변 사람들은 다 아는데 자기만 자기가 그러는 줄 모르는 거지. 많은 사람들이 그러고 산다.
그런데 당신은 마음에 들지 않는 자신을 외면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직접 대면하려 하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큰 용기다. 그런 자만이 자신이 실제 어떻게 생겨먹은 인간인지 알게 된다. 자신에 대한 오해가 없어지는 거다. 그런 오해가 사라지고 나면, 그렇게 자신의 경계를 파악하고 나면, 쓸데없는 자기비하나 턱없는 과대평가는 더 이상 않게 된다. 그저 생겨먹은 대로의 자신으로 살기 시작한다. -204쪽

이 세상에서 제일 바보가 해보고 싶은 게 명백하게 있는데 그걸 시도조차 안 해보고 접는 거야. 몰라서 못 하면 할 수 없지. 근데 당신은 알잖아. 그 자체가 행운이야. 자기가 뭘 원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거든. 당신 690년쯤 살 건가. 22세기에 한번 시도해보려고? 어차피 앞으로 한 50년 살면 기력 떨어져요. 기력 있을 때 하고 싶은 거 다 도전해봐야지. 아직 20대에 불과한데 괴로운 걸 왜 억지로 하고 앉았어. 해보고 싶은 것만 해도 시간이 모자라는 판국에. 왜 사나. 행복하려고 사는 거잖아. 불행하면 관두는 거야. 대신 가이드가 당신한테 무한한 행복만 가져다줄 거라곤 기대하지 마. 그런 건 없으니까. 세상에 좋기만 한 건 없잖아. 그건 당신도 알지? 가이드가 재미없으면 또 다른 거 하는 거지 뭐. 직업 하나만 가지고 평생 사는 거 그거 요즘은 자랑 아냐. 겁내지 마. 질러.-2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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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2-10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엔 양아치를 무소속 주먹이라고 했지요.

마노아 2008-12-10 21:26   좋아요 0 | URL
여하튼 '무소속'은 맞군요. 굿바이 솔로의 이재룡이 떠올랐어요.

비로그인 2008-12-11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소속 주먹, 너무 재밌는 표현이네요 ㅅㅅ

마노아 2008-12-11 08:19   좋아요 0 | URL
창의력이 넘치는 표현이었어요^^ㅎㅎㅎ
 


지구-태양 간 우주고속도로, 승차간격은? [제 847 호/2008-12-08]


그리스로마 신화에 의하면 태양신 아폴로는 매일 태양 마차를 몰고 다닌다. 이 마차를 운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어서 제우스조차도 끄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한다. 태양의 마차가 너무 높게 날면 대지가 얼어붙고, 너무 낮게 날면 대지가 불바다가 되기 때문이다. 아폴론을 태운 말들은 궤도를 따라 얌전하게 돌지만, 다른 사람이 마차를 타게 되면 궤도를 벗어나 제멋대로 달린다. 실제로 아폴론의 아들 파에톤이 아폴론 대신 태양 마차를 끌다가 세상을 온통 아수라장으로 만들면서 제우스에게 죽음이라는 벌을 받는다.

인류가 다른 행성에 대한 탐험을 시작하면서 찾기 시작한 것도 이런 ‘안전한 길’이었다. 그 결과 지구와 탐험하려고 하는 행성의 공전궤도를 타원으로 연결하는 길 즉 호만 궤도라는 ‘우주고속도로’를 찾아냈다. 탐사선이 이 길로 움직이면 행성의 공전에너지를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연료 소모량을 최소화하면서, 탐사선을 띄울 수가 있다. 실제로 보이저나 파이오니아 등이 목성이나 명왕성을 탐사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우주고속도로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우주고속도로는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던진 공이 정지한 상태에서 던진 공보다 더 빨리 날아가는 원리다. 즉 지구에서 화성까지 가기 위해서는 초속 32.73km/s의 속도가 필요한데, 이때 29.78km/s는 지구 공전속도에서 얻을 수 있다. 우주선에 지구의 공전방향과 같은 방향으로 초속 2.95km의 속도만 주면 초속 32.73km의 속도로 화성으로 갈 수 있는 셈이다.

태양에너지가 지구로 오는 데도 이런 길이 있다. 태양의 흑점이 이동하거나 서로 충돌하여 발생하는 플레어(태양의 표면에서 축적된 에너지가 갑자기 폭발하는 현상)는 열과 전자, 양성자 등 무수한 고에너지 입자들을 쏟아낸다. 이것은 통신위성이나 우주정거장 등에 혼란을 일으키고, 지구 상의 생물들을 다량의 방사능에 노출되도록 하는 입자다. 이 고에너지들이 지구로 이동하는 통로가 바로 자력선(Earth’s bar magnet influence)이다.

자력선은 쉽게 말해 자기력이 작용하는 선의 흐름이다. 이러한 자력선은 입자들이 지구를 둘러싼 자기거품, 즉 자기권을 뚫고 들어오는 길의 역할을 한다. 우주에는 지구뿐만 아니라 화성, 목성, 토성 등 대부분의 태양계 행성에서 자력선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태양풍이 지나가는 곳에 자력선이 있으면 태양의 고에너지 입자가 자력선에 끌려오는 것이다.

자력선이 발생하는 이유는 지구가 하나의 거대한 막대자석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지구 내부의 핵은 금속성 액체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금속이 자성체 역할을 하기 때문에 지구 주위에는 자기장이 형성된다. 지구 하나만 놓고 보면 원형의 자기장을 형성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길쭉한 모양을 하고 있다. 지구자기장은 태양을 향한 쪽의 부분은 압축되고, 그와 반대되는 쪽에서는 꼬리를 늘어뜨린 모양이다. 태양으로부터는 항상 전도성이 강한 플라스마의 흐름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고, 지구 자기장은 그 안에 갇혀 있다. 지구입장에서 보면 전리층 바깥 외기권에는 지구 반지름의 10~15배 높이까지 자력선이 형성되어 있는 형태다.

과학자들은 오래전부터 태양으로부터 나오는 입자들이 태양풍을 통해, 때로는 태양 대기권과 지구표면을 연결하는 자력선을 따라 바깥쪽으로 방출된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 길을 통해 아무 때나 태양입자가 들어올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흥미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태양과 지구 사이에는 거대한 길목과 같은 자기(磁氣) 문이 있어 8분마다 열린다는 새로운 연구결과가 나온 것이다. 태양을 향한 지구 표면에서 지구의 자장이 태양의 자장을 압박하여 8분 간격으로 두 개의 자장이 재연결되고 입자가 흐를 수 있는 통로를 형성한다는 내용이다. 올해 11월, NASA 고다드 우주비행센터의 과학자들은 이 문이 열릴 때 고에너지 입자가 태양과 지구를 연결하는 1억 5천만㎞의 길목으로 쏟아져 나온다고 한다. 이것이 FTE(Flux Transfer Event, 빛다발 이동) 현상이다. 태양의 고에너지가 이동하는 ‘우주고속도로’가 생기는 셈이다. FTE의 길이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폭은 지구 지름의 최고 5배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FTE 현상은 동시에 한 개 이상 생길 수도 있고, 한번 열리면 최대 15~20분까지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NASA 고다드 우주비행센터의 데이비드 사이벡 박사에 따르면 FTE들은 반죽 밀대처럼 보이며 이들은 태양을 마주 보는 자기권 끝에서 작은 밀대 모양으로 형성되지만 점점 커지다가 붕 떠서 마치 밀가루 반죽을 치대는 것처럼 소용돌이 모양으로 지구의 자기권을 따라 돌게 된다고 한다. 또한 그는 FTE 현상에는 능동, 수동형의 두 가지 형태가 있다고 말했다. 원통형의 통로가 능동적인 경우 입자들을 쉽사리 통과시켜 지구 자기장에 에너지 통로를 형성시키지만, 수동적인 경우 원통형 통로가 지나가는 입자들의 통과를 저지시킨다고 덧붙였다.

아직 풀리지 않은 점도 많다. 연결로가 왜 8분마다 형성되는지, 원통 구조 안의 자기장이 어떻게 뒤틀리고 회전하는지에 대해서는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실망은 아직 이르다. 현재 유럽우주국(ESA)은 4개의 고공위성으로 구성된 클러스터 선단을, NASA는 5개의 위성으로 구성된 테미스 선단을 이런 원통 구조 둘레로 띄워 크기와 입자 성분을 조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우주를 관찰하고 연구하여 우주 탄생의 비밀을 알아내려고 노력하고 있는 한 비밀 문은 언젠가는 인류에게 열리기 마련이다.

글 : 유상연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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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HIN 2008-12-09 0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에-
우주여행 패키지 상품이 뜰 날이 멀지 않았다!

[빨강머리 앤]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는데, 그것은 앤이 학교에서 먹을 우유병을 흐르는 시냇물에
담가놓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앤이 알록달록한 사탕을 먹으며 좋아서 몸서리 치는 장면도.(웃음)
마노님은 어떤 장면이 인상 깊습니까? ^^

마노아 2008-12-09 08:58   좋아요 0 | URL
음, 책은 최근에 다시 읽어서 인상 깊은 장면들을 밑줄긋기로 남겼는데 한참 좋아했던 애니를 떠올려 보면, 매슈 아저씨가 앤에게 어깨에 퍼프가 들어간 드레스를 사다주는 장면이 인상 깊었어요. 앤은 그 옷을 정말 입고 싶어했는데 엄격한 마릴라 아주머니는 그런 걸 용납 못했죠. 차마 표현하지 못했지만 진짜로 그 옷들이 부러웠을 앤의 마음을 늘 수줍어하기만 하는 매슈 아저씨가 제대로 간파하신 거예요. 그 장면이 참 예뻤어요. 앤의 소원 성취 하나가 이뤄졌다~하면서요.
그리고 다이애나랑 숲에서 소꿉놀이 하는 장면도 참 이뻤고요. 다이애나 머리 스타일 완소예요!

L.SHIN 2008-12-10 07:21   좋아요 0 | URL
아아~ 그러고보니 그런 장면도 있었죠. (웃음)
숲 속에서의 이쁜 모습들, 정말 좋죠.
참, 머리 색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믿기지 않겠지만 저도 앤처럼 아주 새빨간 머리색을
한 적이 있답니다.^^

마노아 2008-12-10 09:56   좋아요 0 | URL
그 새빨간 머리 색을 제가 본 적이 있지 않나요?
본 것 같다는 기시감이 마구 들고 있습니다.
아무튼 엘신님에겐 무척 잘 어울리는 머리라고 생각해요.
저는 와인 색 머리카락을 갖고 싶어요. 하지만 그러려면 탈색부터 해야겠지요?
쿠훗...!
 





내일 신촌 리브로에 다녀올 생각인데 이 전시회는 그 담날부터 하는구나.(ㅡㅡ;;;;)

한 번 더 다녀오란 소리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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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08 1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08 20: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스탕 2008-12-08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헙-! 울 린님 그림이당당당~~~ @_@
팬 사인회 그런거 하면 좋을텐데 말이에요.. ㅠ.ㅠ
다음주에 한 번 나들이 해야겠어요 ^^

마노아 2008-12-08 20:57   좋아요 0 | URL
무스탕님 보라고 올렸지용. 전 내일 가는데 저도 한 번 더 가야지 싶어요. 6^^

바람돌이 2008-12-08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나저나 김혜린씨는 이런거 하지말고 빨리 광야나 다시 그려주면 안될까요? 혹시 가셔서 김혜린씨 만나면 제발 좀 부탁한다고 말좀 전해주실래요? ㅎㅎ 김혜린씨 아직도 부산 사시나? 집으로 쳐들어가서 농성이라도 할까요? ^^

마노아 2008-12-08 23:47   좋아요 0 | URL
특별히 새 작품이 나오는 건지 아니면 기존 그림들 전시회인지 모르겠어요. 아마 섞이지 않았을까요.
저도 광야가 너무 궁금해요. 이 훌륭한 작품이 끝내 연재 중단되는 건 아닌가 조바심도 나구요.
기다리면 언젠가는 나오는 거라면 차라리 다행이구요ㅠ.ㅠ
작가님 행보는 무스탕님이 알고 계시지 않을까요? ^^;;;

무스탕 2008-12-10 13:54   좋아요 0 | URL
응? 저요? +_+
혜린님, 서울 올라오신지 오래에요. 지금 상계동쪽에 사신다고 알고 있어요.
이사가셨다는 말씀 못들었으니 아직 그쪽이실거에요.

글구.. 아마도 혜린님 머리속에선 광야가 이미 마무리 됐을거라 전 생각해요.
그걸 제대로 그리지 못하고 계실거라 믿어요.
왜내고 물으면 그저 웃기만 하지요..
라고나 할까나...;;;

마노아 2008-12-10 21:27   좋아요 0 | URL
오옷, 울 집에서 멀지도 않군요!
아, 광야가 못 나오는 건 출판 문화의 현실 때문일까요. 다른 또 어떤 문제가 있는 걸까요.
안타까워요. 광야는 그야말로 대하사극 수준이 될 텐데 말입니다.

희망찬샘 2008-12-10 0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서재 처음 만났을 때 만화광이시구나, 하고 느꼈던 기억이 있습니다. 여전히 만화를 엄청 좋아하시는 꿈많은 소녀님 같아요. 저는 만화계를 떠났는데... 아마도 그렇게 썩 즐기는 쪽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혹시 만화 따라 그리기도 엄청 잘 하시는 거 아니세요?

마노아 2008-12-10 09:53   좋아요 0 | URL
으앗! 만화광이란 느낌을 폴폴 풍겼군요! 선수는 아니지만, 무척 즐기고는 있어요. 어릴 적 꿈은 만화가였구요. 딱 십 년 전에 이 실력으론 만화가가 될 수 없구나...라고 주제 파악을 한 뒤로 강호(?)를 떠났어요^^;;;
 
건투를 빈다 - 딴지총수 김어준의 정면돌파 인생매뉴얼
김어준 지음, 현태준 그림 / 푸른숲 / 2008년 11월
품절


기본부터 되짚자. 자, 대체, 결혼이 뭐냐. 두 어른이 하나의 독립 채산 가족, 창설하는 거다. 부모 가족에 인수합병, 아니라고. 그런데 언젠가부터, 우리 가족 시스템, 이 ‘어른’ 육성에, 실패하고 있다. 삶의 불확실성, 제 힘으로 맞서는 어느 순간, 아이는 어른이 된다. 그런데 우리 시스템, 그 대면, 부모가, 최대한, 지연시킨다. 부모의, 내가 널 어떻게 길렀는데-채권, 그리 확보된다. 그리고 그렇게 삶 자체를 위탁한 아이들, 결혼하고도, 평생 누군가의 자식으로 산다.

그래서, 이 땅에서 효도는, 채무다. 허나, 삶 자체의 변제, 애당초, 불가능한 거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에서, 효도, 죄의식이 되고 만다. 명절은 그 죄의식 탕감받으러 가는 날. 길이 막혀 다행이다. 갇힌 시간만큼 속죄의 진정성은 입증되니. 반면 그 죄의식이 버거운 자들, 그 대리 지불, 자식된 권리로 합리화해 버린다. 유학도 결혼도 자식된, 합당한 권리. 그거 풀서비스 못하는 부모는 자격 미달자. 이들에게 부모는, 유산이다.

우리 사회, 이 과도 사육과 성장 지체를, 효와 사랑이라 부른다. 이 병든 패러다임에선, 자식은, 자식인 게 유세가 된다. 미친 거지.
-91쪽

자식이 부모에게 갖춰야 할 건, 효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예의 그리고 애틋한 연민이다.
-93쪽

결혼날짜 정해 졌다면 알고 있었겠네, 동생도. 그 돈, 형 결혼자금이란 거. 근데 신나한다고. 이런 씨바. 돈, 주지 마. 자기 위해 형의 삶이 통째로 지체되는 걸, 당연할 걸로 치부하는 정도의 싸가지 위해, 당신 인생 유보할 필요, 뭐 있나. 그래봐야 겨우 공부 좀 잘한다는 게 남 밟고 서도 좋단 허가증이라도 되는 줄 안다. -99쪽

존재를 질식하게 하는 그 어떤 윤리도 비윤리적이다. 관계에서 윤리는 잊어라. 지킬 건 인간에 대한 예의다.-100쪽

인류 역사에서 가족이 종교 교리에 버금가는 신성함을 획득하고 사회보편적 가치가 된 것은 바로 그렇게 20세기에 이르러서의 일이다. 가족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하려는 건 결코 아니다. 가족이 중요한 건 너무 당연하다. 하지만 가족이란 단어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신성함은 그렇게 최근에야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인간이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모든 사회규범은 언제나 그 방향이 옳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압력의 도가 결국 인간의 존재 자체를 질식케 하는 데까지 이른다는 게 문제다. 가족이라는 규범이라고 해서 거기서 예외일 수는, 결코, 없다.-102쪽

우리는 부모를 욕망을 가진 한 사람의 독립된 여자와 남자로 바라보지 못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런 시각은 불경스럽거나 외람되다. 부모는 사람이 아니라 부모다. 부모와 자식이 인간 대 인간으로 연민하고 신뢰하는 대등한 동지적 연대는, 자식이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성립될 수 없다. 이 전복 불가능한 절대 위계 위에 가족이 구축된다. 그리고 그 질서에 따라 각자 자신의 고정 배역만 연기한다. 이 질서를 교란하는 건 패륜이다. 패륜, 사람으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지키지 않는 것. 본능이 아니라 도리를 지키지 않는 거다. 그러니까 생물학적으로 자연결속된 생활 결사체이기만 한 것으로 오인되는 가족은 사실은 그렇게 사회적 역할극이다.-107쪽

한국 남자들, 아시아에서 가장 체격 좋고 교육 수준도 세계 톱클래스다. 근데 한 항목이 다 까먹는다. 독립지수. 우리 남자들, 평생 누군가의 아들이다.
최소한의 사회 안전망조차 작동하지 않았던 탓도 크겠다. 대한민국의 20세기는 개인이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을 때 국가 복지도, 지역 사회도 아닌 오로지 가족이 마지노선이었다. 오로지 비빌 데라곤 가족 밖에 없었던 게다. 가족 구성원 간 과잉 감정은 이 자폐적이고 방어적인 가족주의의 필연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과도하게 기대하고 요구하며 또 그로 인해 과도하게 상처 받고 실망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정도 이상의 감정 비용을 지불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바가지를 쓰고 있다고 여긴다. 모두가 모두에게 그렇게 채무관계로 결박되어 있다. -108쪽

명절은 이제 씨족 행사도, 집단 귀향도 아니다. 평소 마땅한 분량의 가족 의무를 수행하지 못한 자들이 그 죄의식을 탕감받으러 가는 날. 그러니 길이 막혀 다행이다. 차에 갇힌 시간만큼 속죄이 진정성은 입증된다. 도착한 자식들이 부모와 대화의 절반을 얼마나 길이 막혔는지에 소비하고 나머지 절반을 언제 가야 안 막히는지에 쓰는 건 그 번제의 의례다. 명절은 그렇게 죄의식만으로 작동한 지 오래다. 즐거울 리 없다. 명절이 다시 즐거워지는 길은 미풍양속 따위와는 상관없다. 부모는 신분이 아니라 실체다. 가족극의 배역이 아니라 구체적인 여자와 남자다. 그들은 숭고한 효의 대상이 아니라 애틋한 관심의 대상이다.
독립하자. 어른이 되자. 그래서 빚 없는 가족을 만들자. 명절이 즐거워지는 건 그 덤이다. -109쪽

후천적으로 획득한 ‘시누이’ 유전자. 그게 뭐냐. 전통적 의미에서 우리네 고부갈등의 본질은 가부장 가족체제 아래서 육아에서 봉양까지 담당하며 착취당하던 여성들이, 가부장이 취하고 남긴 자투리 권한을 놓고 벌였던 권력투쟁이야. 그리고 그 쟁투에서 승리한 유사가부장-시어머니의 후광 업고 섭정 권력을 후천 학습한 이가 시누이고. 시누이의 가학성은 개인 품성이 아니라 그렇게 권력구조의 소산이라고. 그 구조가 유효한 한 그 가학성은 사회적으로 유전되어 왔고. 시누이는 그래도 되는 법이란 집단유전자가 후천 획득되는 거지. 그러니까 고부 올케시누이 갈등을 개인 품성 문제로 죄다 환원시키는 티브이 아침상담 프로들은 모다 쉣인 거고. 이건 탓해봐야 뭔 소린지도 몰라. 지가 당해보기 전엔.
-111쪽

다 큰 어른들이 비루한 자신의 삶을 부모 탓으로 돌리는 것처럼 꼴불견도 없다. 그러니 떠날지 말지는, 그런 기준으로, 스스로에게 물어보시라. 당신이 감당할 수 있는 선택만 하라는 거다.
당신은 지금 한 인간으로서의 바닥을 드러내는 선택의 순간을 맞이했다. 그러니까 당신이 어떤 결정을 하든, 그 결정이 곧 당신이다. -117쪽

가족 간 문제의 대부분은 그렇게 서로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조차 지키지 않아 발생한다. 존재에 대한 예의란 게 친절하고 상냥하다고 지켜지는 게 아니다. 아무리 무뚝뚝하고 불친절해도 각자에겐 고유한 삶에 대한 배타적 권리가 있으며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그 경로를 최종 선택하는 것이란 걸 온전히 존중하는 것, 그게 바로 인간에 대한 예의다. 그 어떤 자격도 그 선을 넘을 권리는 없다. 가족 사이엔 아예 그런 선이 없다는 착각은 그래서 그 자체로, 폭력이다.-120쪽

당신은 이제 '누군가의 아들'이 아니라 '누군가'가 되어야 할 나이다. 만에 하나, 당신이 아무리 요청해도 걱정된다며 당신들이 계속 통장을 쥐고 있겠다면, 그땐 월급이 문제가 아니다. 집, 나오시라. 당신이 지금 위탁 관리하고 있는 건 월급이 아니라 당신 삶 자체니까.-123쪽

당신 삶의 기준은 부모의 기대가 아니라 당신 욕망이어야 한다. 부모에 대한 예의로, 기왕이면 그들 기대치를 반영하려고 노력할 순 있다. 하지만 당신, 부모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난 거 아니다. 자기 인생, 남의 기대를 위해 쓰는 거 아니라고. 그것이 부모라도 마찬가지다.-125쪽

책임질 순 없지만 개입할 순 있다 생각하나. 책임 못지면 권리도 없다. 게다가 형수는 당신 집안에 들어가는 게 아니다. 당신은 그녀가 당신 집안에 소속될 사람인데 결격 사유가 있어 합류시킬 수 없단 툰데 그녀가 왜 당신 집안에 들어가나. 그녀는 당신 형과 함께 당신 집안과는 별개의 독립적 가족관계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거다. 당신 가족만의 영역에 그녀가 유입되는 게 결코 아니라고. -1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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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2-08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원하게 잘 썼네요.특히 영원히 아들기질을 못버리는 한국남자 이야기는 사실 정신분석 쪽에선 상당히 많이 지적해왔지요.

마노아 2008-12-08 21:01   좋아요 0 | URL
읽을수록 팬이 되어가요. 어찌나 지당한 얘기만 쏙쏙 집어주는지요.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어요. 물론, 싫어하는 사람도 많을 거예요. 하도 옳은 얘기만 해서요.;;;

네꼬 2008-12-08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하도 옳은 얘기만 해서"요? 나 올해에 김어준 아주 좋아하게 된 글이 있었어요. (우리집 냉장고에 오려붙여 뒀음.) 이거 보니까 이 책도 만만치 않겠는데요!

마노아 2008-12-08 22:43   좋아요 0 | URL
오옷, 냉장고에 붙여지는 그 명예를 얻은 글이 뭘까요? 공개해 주세요! ^^

노이에자이트 2008-12-09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영희 씨는 단칸방 시절부터 노모를 모시고 살았는데 <우상과 이성>에 그런 말을 썼죠.부모 모시지도 않은 사람들이 효도에 대해 이러니 저러니 고상한 말들을 많이 하더라 진짜 부모 모시는 사람은 남 얘기하듯 효도에 대해 그런 고상한 말을 할수 없는 법이다..

마노아 2008-12-09 12:27   좋아요 0 | URL
연말에 기부하는 행위에 대해서 이맘 때면 생색낸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자기 주머니를 절대 털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요. 비슷한 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