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제리 蘭製里 1 - 꽃을 만드는 마을
서윤영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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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작년 가을부터 격주간지 윙크를 다시 사서 보고 있는 중인데, 그때 눈에 띄었던 작품이다. 몇 달 뒤 단행본이 단장해서 나왔다.  

란제리. 꽃을 만드는 마을이란다. 그런데 이 마을에는 속옷 공방이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는데, 이 이야기는 그 공방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에피소드들이다.  



배경은 마치 조선시대일 것 같은데, 이 작품 속에서는 그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임금이 있고 머슴도 있고 당상관도 있지만, 그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폐쇄적인 신분 속의 사람들이 아니다. 심지어 저렇게 대담한 속옷도 파는 전통 시대. 매력적인 설정이지 않은가? 



가장 최근에 나온 윙크에서 란제리 외전이 실렸는데, 거기서도 재출연한 임금의 모습이다. 어깨가 드러나는 아찔한 옷에 각선미를 보여주는 저 요염한 자세. 사내 후궁들이 줄줄이 있는 섹시 언니 임금이라니! 오, 흥미지수 200% 증가다.  

속옷 경연대회에서 나름 미인계(?)를 쓴 해강과 그의 식구들. 꽃미모를 자랑하는 어린 동생 원이는 임금의 후궁이 되고, 그 대신 받아온(?) 머슴 진무는 제 역할(!)을 충실히 잘해내고 있다. 이를 테면 이런 것! 



장작을 패는 것만으로도 비쥬얼로 손님을 끌어주니, 매출 200% 상승은 우습구나. 공방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주거니 받거니 말도 재밌다. 여름에 겨울 장작을 다 패놨으니, 이번엔 연못을 파는 거다. 도끼질이나 삽질이나, 어차피 울끈불끈 근육만 보면 되는 거니까! 그 다음엔? 풍수지리상 바람직하지 않으니 다시 연못을 메우는 거란다. 물론, 연못까진 아직 파지 않았지만, 저들의 집념어린 눈을 보면 불가능한 일은 아닐 듯 싶다.  

진무 역시 사내 후궁 출신인데 반항기가 만만치 않고 죽어도 궁궐로는 안 돌아가려고 하는 걸 보니 남다른 사연이 더 있는 듯하다. 근데 미모는 내 취향이 아니로구나.ㅡ.ㅡ;;; 



속옷 관련된 상식이나 팁이 가끔 등장하는데, 손빨래를 권장하는 것은 알았지만 저렇게 말려야 하는 지는 몰랐다. 호고고곡! 그냥 걸쳐 말리면 되는 게 아니었나???? 

작가분이 유머 감각이 탁월하다는 게 반갑다. 그림도 예쁘고, 소재도 신선하다. 나로서는 처음 만나는 작가님인데 앞으로의 활동이 무척 기대가 되고 있다. 이번 윙크의 외전으로 2권 분량도 완성되었다고 하니, 곧 란제리 2권도 선을 보이지 않을까. 2권의 내용은 이미 다 본 건데도 단행본으로 보는 맛은 또 다르다는 걸 알고 있으니 기대 중이다.  



쭉빵 언니들의 현대식 옷이다. 그런데 저 곳 란제리에선 저렇게 입고도 속옷이라 할지도 모른다. 불가능은 아닌 것 같다. ^^ 

선물 주신 날개님께 무한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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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노희경 지음 / 김영사on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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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아 드라마'라는 별명을 잉태시켰던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를, 나는 그리 많이 보지는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추억하는 거짓말도 보지 못했고, '꽃보다 아름다워'는 후반부를, '굿바이 솔로'는 뒤늦게 챙겨 보았고, 많이 보고 싶었던 '그들이 사는 세상'는 초반 2회까지 밖에 보지 못했다. 감동을 주는, 사람을 이야기하던 그 작가를 드라마 대신, 책으로 만났다.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라는 제목의 첫번째 글을, 오래 전 웹상에서 먼저 접했더랬다. 이 책에 실린 많은 글들은 작가가 오랜 기간 동안 끄적이던 것들을 모았기 때문에 시간 차가 많이 난다. 그래서 책과 동제목의 그 글도 내가 예전에 접할 수 있었던 것.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라고 했는데, 처음 그 글을 접했을 때는 그 사랑이 남자와 여자와 같은, 연인 사이의 사랑이라고만 생각했다. 바로 그 사랑이 연상되었고 다른 사랑을 떠올리지 못했다. 적어도 그때보다는 물리적 나이를 더 먹고, 세상살이를 더 겪은 나는, 이제 그 '사랑'이 꼭 그 사랑만은 아님을 알게 되었다. 나를 향해 '유죄'라고 외칠 그 이름들이 더 많아졌다는 것도.  

작가는 대본에도 '건조하게' 연기하라는 주문을 넣을 때가 있다던데, 이 눈물 빼게 만드는 책도 뜻밖에 '건조하게' 읽히곤 했다. 신기한 경험이다. 가슴 짠하게 하고, 눈물 아릿하게 만드는 명문장들이 곳곳에 포진되어 있고, 그녀 자신의 신산스러웠던 삶의 기억과 여정도 모두 진실되건만, 그건 노희경의 경험이고 추억이고 삶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내 마음을 크게 움직일 수는 없었다. 나는 다만 작가의 경험과 회고를 들여다 보며, 그 놀랍고 멋진, 아름다운 대본을 쓰는 작가도 이런 심상을 갖고 사는구나... 하며 약간의 위로와 연민을 느낄 뿐.  

그런 아버지, 그런 어머니를 둔 작가 노희경. 순탄치 못했던 성장 과정이, 그녀의 반항들이 모두 삶 속에 녹아, 다시 글 속에서 살아 움직여 '드라마'로 재현될 때, 나는 독자보다 시청자로서 더 반갑고 찐한 감동을 느낄 수 있는 듯하다. 그녀의 무수한 파트너였던 표민수 피디, 그리고 동반자였던 윤여정, 나문희 선생님 같은 연기자들. 그들과의 흔적을 들여다 보는 게 기뻤다. 이 사람들, 드라마를 통해서 비쳐지던 그 모습들이 모두 연기는 아니었구나. 그네들의 삶과 성격과 인성이 모두 드러나는구나. 그리고 그걸 잘 드러나게 해주는 노희경 작가와의 만남은, 시청자에게도 축복이구나... 라는 생각.  

책이 참 예쁘다. 많지 않은 페이지를 메꾸기 위해 많은 일러스트가 동원되었는데, 글을 좀 더 가볍게 만들고 산뜻하게 보이게 하는 효과를 톡톡히 준다. 노희경스러움의 장점과 단점을 함께 고민한 흔적이기도 할 것이다. 장과 장을 나누는 기름 종이 위의 검은 글씨, 그리고 작가 노희경의 이름 석자가 한 템포 쉬어가는 흐름을 만든다. 예쁘고, 곱다.  





 

 

 

 





 

 

 

 

책의 맨 마지막 글은 또 지난 해 나를 울렸던 북한의 굶주리는 어느 모녀에 대한 글이었다. 이번에도 역시나 나를 잔뜩 울리고 말았다. 그랬다. 그게 노희경의 힘이기도 했다. 다른 구구한, 예쁜, 아름다운 글보다도, 삶을 제대로 직시한, 그 서러움과 신산함과 버거움을 표현해줄 때, 그녀의 진심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더 절절하게 느껴진다.  

누군가를 정기적으로 후원하는 일이 나에겐 주제 넘은 짓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내 앞가림도 못하면서 무슨. 이런 말들로 불편함을 대신했었다. 정규직이 되면 제일 먼저 굶주리는 어린 아이들을 도와야지... 이런 다짐도 했더랬다. 그 마음들이 자기 기만이라는 생각을 하며 부끄러워졌다. 누굴 돕는다는 것이 정기적인 수입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던가. 굶주리는 사람이 눈 앞에 있는데, 가진 빵 한쪽, 밥 한 그릇을 나눌 수 없다면 어찌 인간된 도리라 할 수 있을까. 보장된 수입이 없어도 나는 사고 싶은 책을 기어이 사고서 자기만족과 혐오를 동시에 느낄 터인데, 누군가를 돕는 손길에 자발적 클릭 한 번이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유죄라고 하였는데, 그 말이 도움의 손길 한 번에도 그대로 적용됨을 느낀다. 알라딘에서 책 살 때마다 보내주는 유니세프 봉투를 뜯었다. 크지 않은 액수라도 기꺼이 도움 될 것을 알고 있으니, 보람이 차오른다. 금년 한 해를 시작하며 내가 했던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행보가 아니었을까. 성실히, 마음을 담아 후원해보자. 그 행보를 열게 해 준 노희경 작가. 그녀의 책이 이룬 또 하나의 성과가 아닐까.  

그리고 사랑, 사랑을 하자. 연인이든 가족이든 벗이든, 세상이든, 후회없이 아낌 없이 사랑을 하자. 적어도, 미워는 하지 말자. 미움이 옅어져 무관심으로 변하게도 만들지 말자. 기꺼이, 사랑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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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9-01-09 0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벤트 당첨선물로 이 책을 고를까 망설이다가 워낙 본 드라마가 없어서 다른 걸 찍었는데...
리뷰를 읽으니 기어이 봐야겠단 생각이 드네요.
기꺼이 사랑해야죠, 우리 모두~~~ 굶주린이들을 돕는 일에도!

마노아 2009-01-09 11:07   좋아요 0 | URL
매니아 팬들은 드라마 속의 대사를 기억하면서 감탄할 것 같아요. 근데 꼭 사서 볼 정도는 아니고 빌려서 보셔도 무방해요. ^^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노희경 지음 / 김영사on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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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여,
이제 부디 나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나라. 사랑에 배신은 없다. 사랑이 거래가 아닌 이상, 둘 중 한 사람이 변하면 자연 그 관계는 깨어져야 옳다. 미안해할 일이 아니다. 마음을 다잡지 못한 게 후회로 남으면 다음 사랑에선 조금 마음을 다잡아볼 일이 있을 뿐, 죄의식은 버려라. 이미 설레지도 아리지도 않은 애인을 어찌 옆에 두겠느냐. 마흔에도 힘든 일을 비리디 비린 스무 살에, 가당치 않은 일이다. 가당해서도 안 될 일이다. 그대의 잘못이 아니었다. 어쩌면 우린 모두 오십보백보다. 더 사랑했다 한들 한 계절 두 계절이고, 일찍 변했다 한들 평생에 견주면 찰나일 뿐이다. 모두 과정이었다. 그러므로 다 괜찮다. -24쪽

나는 요즘 청춘들에게 이런 말을 자주한다.
"나는 나의 가능성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섣불리 젊은 날의 나처럼 많은 청춘들이 자신을 별 볼일 없게 취급하는 것을 아는 이유다. 그리고 당부하건대, 해보고 말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해도 안 되는 것이 있는 게 인생임도 알았음 한다.
근데 그 어떤 것이 안 된다고 해서 인생이 어떻게 되는 것은 또 아니란 것도 알았음 싶다. 매번 참 괜찮은 작품을 쓰고 싶고, 평가도 괜찮게 받고 싶어 나는 애쓰지만, 대부분 내 기대는 허물어진다. 그런데 나는 100%가 아니지만, 70%는 괜찮다고 생각한다. 뭐 어쨌건 밥은 먹고 사니까. 그리고 그 순간엔 나름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니까. 자기합리화라 해도 뭐 어쩌겠는가. 자기학대보단 낫지 않은가.-38쪽

참 묘하다.
살아서는 어머니가 그냥 어머니더니,
그 이상은 아니더니,
돌아가시고 나니 그녀가
내 인생의 전부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그녀 없이 세상이 살아지니 참 묘하다. -64쪽

'너무 잘난 사람들하고만 어울려 놀지 마, 희경 씨.'
'책 많이 읽어, 희경 씨.'
'버스나 전철 타면서 많은 사람들을 봐, 희경 씨.'
'재래시장에 많이 가, 희경 씨,
그곳에서 야채 파는 아줌마들을,
할머니들 손을, 주름을 봐봐, 희경 씨,
그게 예쁜 거야, 희경 씨.'
'골프 치지 마, 희경 씨. 대중목욕탕에 가, 희경 씨.'
'우리 자주 보지 말자, 그냥 열심히 살자, 희경 씨.'
'대본 제때 주는 작가가 돼, 희경 씨.'
-136쪽

애정결핍이란 말은
애정을 받지 못해
생기는 병이 아니라
애정을 주지 못해
생기는 병.
-144.5쪽

그 누구도, 친구 아니라 부모와 형제도
나 자신만큼 소중할 순 없고,
목숨을 담보로, 재물을 담보로,
그 어떤 것을 담보로 의리를 요구하는
친구는 친구가 아니다.
늘 친구의 편에 선다는 것이 반드시 옳진 않다.
주고도 바라지 않기란 참으로 힘이 들다.
살다 보면 친구를 외롭고 괴롭게 버려둘 때가
허다하게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가 되는 것이 친구다. -1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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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09-01-09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에 와닿는 것만 잘도 골라놓으셨어요. 마노아님^^
일찍 변했다한들 평생의 찰나, 맞아요. 게다가 어머니...참 많이 공감이 되네요.

마노아 2009-01-09 01:58   좋아요 0 | URL
드라마 작가니 달필인 것은 당연한데도, 여전히 감탄스러워요.
그리고 노희경 작가인 만큼 더 공감도 가구요. ^^

프레이야 2009-01-09 0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정결핍의 정의가 와닿네요.^^

마노아 2009-01-09 01:58   좋아요 0 | URL
그 의미를 되새겨 보아요. 스스로에게 주어야 할 메시지들이에요. ^^
 


암모니아 합성법의 두 얼굴 [제 860 호/2009-01-07]


미국 맨하탄프로젝트의 수장이었음에도 원폭 투하 후 참회의 인생을 살았다는 오펜하이머, 그와 함께 맨하탄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세계 물리학계의 거장 닐스 보어의 이야기를 들으면 과학은 누가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서 이중적 모습을 보이는 야누스의 얼굴이라 할 수 있다. 산업혁명 후 인구 증가에 의한 식량 부족을 해결하고 동시에 제1차 세계 대전 때 독일을 위해 독가스 개발에 참여했던 과학자 프리츠 하버 또한 그러했다.

19세기 유럽의 폭발적인 인구 증가는 자연스레 유럽에 기존 농업 방식으로는 해결하지 못한 식량문제를 야기했다. 땅속의 질소 화합물은 식물이 자라는 데 필수요소인데, 식량이 더 필요할수록 자연스레 질소 화합물의 양은 줄어들게 된다. 그 시기 이를 대신할 질소화합물은 칠레산 초석이었으나 대부분 수입에 의존했고 그나마도 고갈되어 가고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선 과학자들은 산화질소라는 화합물을 만들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번개가 칠 때 우연히 산화질소(NO)가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즉, 전기를 이용하면 질소 화합물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필요한 전기 스파크 온도가 2,000도~3,000도의 고온이었기에 현실성이 없었다.

이때 과학자들은 공기의 약 80%를 차지하는 질소를 수소와 반응시켜 암모니아로 합성하는 방법을 그 대안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많은 연구가 있었지만 공기 중의 질소를 이용해 비료를 만드는 방법은 대부분 개발한다 해도 경제성이 없거나 실현 불가능한 것들이었다. 다른 한 편에서는 질화 칼슘과 수소를 고온에서 반응시켜 암모니아를 생산해 내는 방법이 연구 중이었지만 투입되는 양에 비해 생산량이 너무 적어 이 또한 큰 반향을 얻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1995년 하버가 1,000도에서 철을 촉매로 사용해 질소와 수소로부터 암모니아를 합성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은 대단한 발견이었다. 처음에 하버도 산화질소를 만드는데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그런데 그 방법이 앞서 말했듯 현실성이 없어서 암모니아를 만드는 쪽으로 선회한 것이다.

하버는 암모니아를 만들 때 높은 압력을 가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는 ‘르 샤틀리에의 법칙’에 따른 것이다. 어떤 반응이 진행된 후 평형상태에 도달하면 더 이상 반응은 일어나지 않는데 이 평형상태에서 어떤 교란 요소를 가미하면 그 교란 작용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반응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압력이 증가하면 반응은 압력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일어난다. 이때 질소와 수소가 차지하는 부피가 암모니아가 점유하는 부피보다 2배가 더 크다. 그러므로 반응은 부피를 줄여서 압력을 줄이는 방향 즉 암모니아가 생성되는 방향으로 일어나게 된다. 즉 높은 압력을 가해서 암모니아의 생산량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하버가 생각해 냈다.

이런 결과에 대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부단한 연구 끝에 촉매를 오스뮴 가루로 바꿔 1,000도에서 500도로 생성 온도를 낮춰 암모니아를 생성할 수 있게 되면서 하버는 경제성과 현실성 있는 암모니아 합성법을 완성시켰다.

이에 힘입어 하버는 한 비료회사와 합작해서 하루 20t 이상의 암모니아를 생산하기에 이르렀고 그에게는 인간의 식량난을 해소한 위대한 과학자라는 칭호도 따라 붙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18년에는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물론 그에게는 부도 따랐다. 엄청난 기술료를 비료회사로부터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암모니아 합성법은 또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무기 개발에 활용된 것이다. 핵이 원래는 인류를 위해서였지만 핵폭탄으로 인간에게 해를 주듯 암모니아 합성법도 그러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길어지자 독일은 탄약 원료인 니트로글리세린이 부족하게 되었다. 이때 하버의 암모니아 합성법을 활용해 대량의 질산을 생산함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전쟁이 나자 하버는 전쟁을 지원하는 화학부서의 책임을 맡아 무기 개발 연구를 시작했다. 그의 부서에는 TNT 원료와 고성능 수류탄 연구, 탄약의 원료인 질산염 연구 등 다방면에 걸친 연구가 진행되었다. 말 그대로 살상용 무기를 만드는 과학자로 변신을 하게 된 것이다.

즉, 인류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암모니아 합성법이 오히려 인간에게 해를 주는 살생용 무기로 탈바꿈한 것이다. 하버는 이에 그치지 않고 염소를 이용해 독가스를 개발했는데 그에게 ‘독가스의 아버지’라는 오명은 여기에서 기인한 것이다. 독가스 사용은 고착 상태에 빠진 전쟁을 전환하려는 수단으로 독일이 생각해 낸 악수였다. 물론 이 독가스 개발에도 하버의 능력과 조직이 필요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염소는 독성이 강한데다 널리 퍼뜨릴 수 있고 영하 32도가 되어야 액체로 변하기 때문에 추운 날씨에도 투입이 가능한 강력한 무기다. 이후 하버의 연구진은 포스겐과 비소, 청산을 함유한 유기화합물을 독가스로 활용했는데 이는 염소보다 독성이 훨씬 강했다.

이러한 독가스로 인해 연합군 병사들은 무수히 죽어갔고 전쟁의 향방은 독일의 승리로 매듭짓는 듯했다. 그러나 독일의 바람대로 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연합군 측에서도 이에 대응하는 독가스와 보호 마스크를 개발하여 전투에 임했기 때문이다. 결국 독가스 전쟁은 양측 모두에게 큰 피해를 가져다주었다.

암모니아 합성법이 두 얼굴을 가진 것과 마찬가지로 개발자인 프리츠 하버 또한 두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원래 유대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리고 독일인보다 더 독일인답고 싶어 했다.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출세에 장애가 된다는 이유로 기독교도가 되었고 독일 국민임을 스스로 자부하며 살았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그의 아내는 자살을 했고 향후에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독일로부터 배신을 당하기도 했다. 또한 ‘독가스의 아버지’ 답게 향후 전범자 명단에 올라 숨어다니기까지 했다.

결국 그는 스위스의 어느 초라한 호텔방에서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했다. 엄청난 부와 명성, 명예를 얻은 과학자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프리츠 하버의 말로는 초라했다. 제1차세계대전 이후 하버는 전범으로 이름이 올랐고, 인류의 기아를 해결한 위대한 과학적 발견의 공은 전쟁이라는 그늘에 묻혀버렸다. 두 얼굴의 과학자 프리츠 하버의 일생은 우리가 과학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한다.

글 : 임성아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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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나무 풀빛 그림 아이 15
숀 탠 글 그림, 김경연 옮김 / 풀빛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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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으로 알게 된 이름 숀 탠. 1974년 호주 태생. 생각보다 젊은 작가군요. 그가 쓴 어른들을 위한 동화.  

중고샵에서 날 보고 손짓하던 빨간 나무를, 냉큼 집어 올렸지요.

표지에는 빗물이 주룩주룩 내리고, 종이로 만든 조각배 위에 침울한 얼굴로 들어가 있는 아이의 모습이 보입니다. 아이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어른인지도 알 수 없고,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구분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누구나 침울해질 수 있고 고독해질 수 있고, 외로워질 수 있는 거니까요. 조각배에는 여러 글씨가 어지럽게 적혀 있는데 그 중에서 'nothing', 'don't', 'dark', 'trouble', 'worse', 'nobody', 'fate'... 이런 단어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림 속 사람의 마음을 담은 것일 테지요. 조각배의 그림자가 물결 속에 드리워져 있는데, 검은 그림자 중에 유독 빨간 단풍잎 하나가 반짝이네요. 저 붉은 단풍잎 한 장을 따라가 봅시다.



때로는 하루가 시작되어도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 날이 있습니다.  

부옇게 날이 밝았는데도 집안은 어둡다. 그림 속 주인공의 표정도 어둡다. 저 문을 열어도 아무 것도 없을 것 같은 그런 울적하고 피로한 날. 모든 것이 점점 더 나빠지기만 한다. 



어둠이 밀려오고...    

마치 영화 '괴물' 속 그 괴 생명체를 보는 듯하군요. 그 녀석에 비하면 많이 슬퍼 보이지요. 저 끔찍한 얼굴을 한 저 생명체가, 사실은 우리의, 나의 마음일 수도 있는 겁니다. 저렇게 고통스럽게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아무도 쳐다보질 않네요. 모두들 자기 마음 속의 상처입은 괴물은 감당하기도 힘이 들거든요. 어깨가 축 처져서 땅만 보고 걷는 저 아이.



아무도 날 이해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귀머거리 기계 

마음도 머리도 없는 기계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세상. 단절된 관계. 끊어진 소통. 저 막막한 곳에서 유리병에 갇힌 채 세상을 바라보고 있네요. 투명한 유리 너머 세상을 바라볼 수는 있어도 다가갈 수도, 만질 수도 없다면 얼마나 아프고 서러울까요.  

그런데 세상만 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게 아닙니다. 나 역시,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때가 많지요. 우리는 그렇게 서로가 귀머거리 기계로 전락해가고 있어요.



때로는 기다립니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립니다. 

그러나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책 속 글씨가 점점 작아지고 옅어집니다.) 

기다림으로 쌓은 희망이 바뀐 절망의 무게가 거대한 산으로, 움직일 수 없는 짐이 되어버렸어요. 저 광막한 곳에서 어디로 갈까요. 어떻게 움직일 수 있을까요...... 

그리고 모든 일은 한꺼번에 터집니다. 

아름다운 것들은 그냥 날 지나쳐 가고 

끔찍한 운명은 피할 수 없습니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한꺼번에 나를 몰아쳐 세우는 세상사가 참 야속하지요. 왜들 그렇게 잔인해지지 못해서 안달인 걸까요. 진정, 모두가 나를 버린 걸까요. 행운은, 행복은 어디서 내게 손짓을 해줄까요? 이렇게 열심히 기다리는데 말입니다.



때로는 자신도 모릅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디 있는지  

끊임 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지만 해답을 모를 때가 더 많지요.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는데 답은 더 미궁 속으로 빠져서 수렁 속을 헤매이게 됩니다. 저렇게 한치 앞도 밝혀지지 않은 어둠 속에서 말이에요.



하루가 끝나가도 아무런 희망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문득 바로 앞에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망각의 동물. 끊임없는 희망 고문으로 더 힘들어져도, 끝내 포기하지 못하는 끈질긴 생명체지요.  

그리고 정말로 희망이 우리 눈앞에 도착해 있을 때도, 가끔은 있다는 것을 알지요.  

혹시 아나요. 한 잎으로 피었던 단풍잎이, 저렇게 풍성하게 열리는 거대한 빨간 나무로 바뀔 지도요.



밝고 빛나는 모습으로  

내가 바라던 바로 그 모습으로 

각 그림마다 꼭 한 장 씩 숨어 있던 빨간 나뭇잎. 그 나뭇잎들을 따라오다 보면 저렇게 커다란 빨간 나무를 만날 수 있지요.  

희망의 크기도 더불어 같이 커졌나요?  활짝 웃는 웃음이 아닌, 살짝 미소 짓는 저 아이의 소박한 행복이 눈에 그려집니다.  

우리에게도 소박한 행복이 날마다 조금씩 커 가기를 소망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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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숀 탠 展
    from 그대가, 그대를 2009-09-27 16:32 
    그림을 그린 작품은 더 되지만 온전히 숀 탠만의 작품만 고른다면 이렇게 네 작품. '먼 곳에서 온 이야기들'은 사계절 신작이다.               글 없이 그림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는 이런 스타일의 작품이 참 좋다.   아이들이 보아도 무방하지만, 어른이 본다면 더 마음에 들어할 그의 작품들.  그 숀 탠의 전시회가 열린다.  출
 
 
아키타이프 2009-01-07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안녕하세요. 그간 별고없었죠. 여전히 활발하시고 활력이 넘치시네요.
해도 바뀌었는데 저도 부지런 좀 떨어야될텐데ㅋ
그나저나 이 작가 저랑 동갑이네요. 74년 범띠...
근데 동화책을 많이 보시는 것 같아요.
중학교 이후로 딱 끊어버린 저랑 대조적이네요.
이 많은 책을 다 사서 읽으시는건가요?
수입의 반이상이 책값으로 나가는건 아닌지...
자주 오도록 노력할게요. 종종 뵈요.

마노아 2009-01-07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키타이프님! 하핫, 여전히 수다스럽게 살고 있답니다. ^^
중학교 때까지 동화책 보셨어요? 전 동화책 다시 보기 시작한 지 몇 년 안 되었어요.
은근히 중독성이 있더라구요.
워낙에 그림을 좋아하니까, 만화처럼 동화책도 자꾸 보게 되나봐요.
아, 수입의 절반까진 아니어도 너무 많이 지출하고 있어서 날마다 반성하고 있답니다.
이제 좀 절제해야지요.
헤헷, 우리 자주자주 만나요, 새해 복 많이 받으셔요. ^^

꿈꾸는섬 2009-01-07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일을 저는 잘 못해요. 그런데 그렇게 기다리고 나니 거대하고 풍성한 빨간 나무가 되었군요. 기다림을 배워야겠어요.

마노아 2009-01-07 21:58   좋아요 0 | URL
누구에게나 기다림은 힘든 것 같아요. 기다리고 또 기다려서 결국엔 저리 아름다운 빨간 나무가 될 거란 결과만 우리가 알고 있더라도 기다리는 게 훨씬 수월할 텐데 말이에요.

네꼬 2009-01-08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휴, 숀탠은 너무 어려운 것 같아요. 다들 '도착'을 참 좋아하는데, 나는 어렵고 무섭더라고요. 이렇게 웃기는 것만 좋아해서 나도 참 큰일. -_- 하지만 마노아님 얘길 보고 있노라니 살짝 보고 싶네요.

마노아 2009-01-08 23:59   좋아요 0 | URL
도착은 두껍고 무거워서 선물만 받아놓고 아직 못 들여다봤어요. 그런데 표지만 봐도 막 설레이는 느낌이에요. 난 글 없는 그림이 참 좋던데 빨간 나무는 글이 적어서 좋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