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는 텍사스 주에서 나이키에 입사를 했고, 얼마뒤 오레건 주 본사로 들어갔다.
당연히 이사를 했고, 그곳 한인 교회에서 한국인 이민 3세인 새언니를 만나 결혼에 골인~!
이번에 상하이에 가서 결혼식 촬영 dvd를 봤는데, 너무 인상적이었다. 오후 5시에 시작된 결혼식은 피로연까지 해서 거의 7시간에 걸쳐 진행이 되었는데 그야말로 '페스티발'인 것이다. 우리네 결혼식의 그 30분 만에 뚝딱 해치우는 도매급과는 차원이 달랐던 것.
신부측 들러리 셋, 신랑측 들러리 셋. 그들 각자가 신랑 신부에게 해주는 덕담과 인사말들은 때로 하객들을 모두 눈물 적시게 만들기까지.
신랑 신부 가족이 다 함께 댄스 파티에 참가하고 신랑은 깜짝쇼로 섹소폰으로 익스트림의 'more than words'를 연주했다. 연습 많이 했다는데 실력은 그닥...;;;; 그래도 내가 신부라도 새언니처럼 울고 말았을 것 같다. 그건 감동과 마음의 선물이니까.
오빠는 마케팅 팀이었는데 주로 아시아 쪽을 분담했다. 그래서 이후로 출장을 겸해서 한국에 자주 나오게 된다. 어떤 해에는 일년에 세 차례까지 나오기도. 일본에서 중국으로 갈라치면 주말에 한국 찍고 중국 가는 식으로.
처음에 오빠가 들고 오는 나이키 운동화들의 샘플은 made in Korea를 달고 오더니, 지금은 모두 차이나로 바뀌었다.
그때만 해도 한국 시장의 수요가 좋았던 듯한데, 지금은 포화상태인지 더 이상 예전만큼 공을 안 들인다. 현재 전 세계에서 나이키 운동화를 가장 많이 팔아주고 있는 나라는 중국. 그래서 오빠는 중국으로 파견 근무를 가게 된다. 무려 3년 동안. 그게 작년 10월의 일이다.
3년씩이나 되니 이사를 해야 했고, 두돌을 갓 지난 아가를 데리고 오빠는 상하이에 정착.
그리고 해를 넘길 때 상하이 방문 요청이 들어온다. 오빠는 늘 우리 식구가 미국을 한 번도 방문해 주지 않는 것을 섭섭하게 여겼다. 자기가 '초대'를 했는데 왜 안 오냐는 것이다.
근데 말이다. 그 '초대'가 우리 집에 놀러 와~ 한 마디로 그래 갈게~가 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미국을! 비행기며 비자며. 도저히 갈 수 없는데 왜 안 오냐고 섭섭해 하면 어쩌란 말인가. 우리가 원하는 '초대'란 비행기표 보내주는 거였단 말이지비!
그런데 상하이다. 일단 가깝고, 당연히 비행기표도 좀 싸지고. 중국 설날은 일주일씩이나 휴일이니까. 이번엔 정말 갈만했다.
엄마는 미국에 가지 못하는 이유를 늘 '바빠서'인 척 했다. 사실은 그게 아닌데, 그렇게 말하니 정말 그런 줄 알더라.ㅡ.ㅡ;;;
그래서 까놓고 얘기하라고 엄마를 압박! 오빠가 비행기표 보내주는 조건으로 상하이 방문이 결정된다. 그땐, 비행기표만 있으면 다녀오는 건 식은 죽 먹기인 줄 알았다. 쳇, 진짜 그랬다니까.
일단 여권을 신청했다. 사진도 찍어야 했다. 비자도 신청했다. 돈이 막 나가더라. 그것도 현금으로만.
그 다음엔 선물을 사야 했다. 처음 만나는 조카에게 줄 전래동화랑 한글 책을 구입하고, 오빠랑 새언니가 사다 달라고 한 선물들을 준비하기 시작하는데, 이게 너무 많다는 것이다.
오빠네 역시 메이드 인 차이나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걸 다 '한국산'으로 못을 박았다. 고춧가루, 쥐포, 오징어, 아이 한복, 내복, 속옷 기타 등등. 그것만으로도 수트 케이스 큰 것 하나를 채우더라. 비행기표 값을 이미 넘어서 버린 선물 내역들.
솔직히, 좀 이해가 안 되긴 했다. 오빠는 억대 연봉을 넘어선 지 한참이었는데, 그 정도 재력이면 거기 백화점을 이용해도 되지 않을까? 백화점에서 양질의 내복, 속옷 못 구하나? 안 가봤으니 모르지만. 쩝!
그래도 시간은 차올라서, 드디어 지난 주 월요일, 상하이 행 비행기를 타게 된다. 으하하핫, 고생 시작이었다.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