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카의 방은 무척 편안했다. 그 깨끗한 침대 시트며 가만히 움직이는 흔들 의자가, 예쁜 스탠드 조명이, 멋드러진 상하이의 야경이, 너무도 독특한 디자인의 이중 커튼 등등이.
아침에 일어날 때 참 개운했다. 잠깐의 독서를 마치고 굿모닝을 외치며 힘차게 하루를 시작~!
그런데, 좀처럼 밥 먹자는 소리를 안 한다. 엄마와 새언니가 주방에서 뭔가 바빠 보이는데 밥 먹을 기미는 보이질 않고...
오빠는 조카를 쫓아다니며 밥 먹이느라 애를 먹는다. 녀석은 아이답게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깔깔거리며 웃고 장난을 치는데, 밥 먹는 게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평소에도 밥 먹일라치면 한 시간씩 쫓아다니며 애를 설득해야 한다는 거다.
오빠는 굉장히 자상한 아빠였다. 한 번도 화를 내지 않고 언성도 높이지 않고 끊임없이 아이를 설득하며 뭐가 필요한지, 뭘 원하는지 묻는다. 아이가 내내 튕기다가 한 숟가락이라도 먹으면 'You're good boy!' 'I'm happy.'를 외치며 아이를 칭찬하는 거다. 아이는 찬밥을 좋아하는데, 아침에 밥을 먹었으면 저녁엔 떡국을, 그 담날엔 빵을, 이런 식으로 메뉴를 계속 바꿔줘야 했다. 같은 메뉴를 두 번 먹는 걸 보질 못했다. 오빠 표현으로도 밥 먹는 게 너무 까다롭다고 한다.
하여간, 굿모닝 이후 두 시간을 기다려서 드디어 식사 준비 완료! 식탁에 앉았다. 아이는 자기만의 식탁이 따로 있어서 거기 앉았고 우리 넷이서 둘러앉기엔 식탁이 너무 컸다. 그런데 그 큰 식탁 위에 올려진 게 밥이랑, 된장국(찌개가 아니라 국!)이랑 울 엄니가 아침에 급하게 묻힌 무 생채랑 김이 덜렁 놓여 있는 것이다. 헉! 이게 단가? 국이랑 무 생채를 아침에 어무이께서 급하게 만들었으니, 그렇다면 사온 김을 빼면 밥상에 남는 거라곤 달랑 밥 하나! 엄마의 전언으로는 냉장고에 먹을 게 암 것도 없었단다. 그래서 있는 재료 가지고 급하게 무 생채를 만들어서 김치를 대신 했다는 것.
새 언니는 임신 5개월이었고, 상하이에 오기 전까지는 직장을 다녔으므로 요리를 배울 시간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렇긴 해도, 이 밥상은 좀 너무하지 않은가...ㅜ.ㅜ 조카 밥에는 에그 스크램블이 있던데 나도 그거 주지....;;;;;
밥을 다 먹었는데 내 국그릇에 건더기가 아주 약간 남아 있었다. 국물도 약간. 새언니가 말한다. 아가씨 남겼냐고. 음식 남기면 안 된다고. 아, 남겼다고 하긴 좀 거시기한 분량이긴 한데, 어쩌랴. 마셨다...;;;;
그렇게 우리는 아점을 먹고(아침에 보낸 두 시간..ㅜ.ㅜ) 드디어 외출을 감행했다. 오빠는 나가면서도 어디 가고 싶냐고 묻고 나는 지도를 보며 사진을 보며 요런 데 보고 싶다고 쫑알쫑알. 그리하여 우리가 도착한 곳은, 인근 공원!
헉, 공원???? 이 무슨 뭥미?!

(햇빛을 등지고 찍어서 얼굴이 잘 안 보인다. 엄마 먄!)
그리고 이때부터, 조카의 고모 사랑이 시작된다. 나 외에 다른 사람이 옆에 앉게도 못하고 오로지 나하고만 놀려고 하는 거다.
물론 처음엔 이뻤다. 근데, 녀석이 사람 많은 곳에 가면 무서워 해서 꼭 안고 다녀야 한다는 게 문제였다. 유모차도 싫어한다. 무조건 내 팔에만 매달려 있다. 오, 갓! 녀석은 14kg이었다ㅠ.ㅠ
호수 위에 둥둥 떠 있는 배가 있다. 공원에 상심하여서 저거라도 탈까 하는데, 오빠가 타기 싫다고 그냥 가버렸다. 엉엉..ㅠ.ㅠ
상하이가 한국보다 많이 남쪽이지만 난방을 안 해서 무척 춥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서 겨울 옷 바리바리 싸들고 갔는데, 뜻밖에도 상하이는 몹시 따뜻했다. 특히 이 날은 햇볕이 종일 비쳐서 결국엔 외투를 벗어야 할 정도!
중간에 오빠가 옥수수를 나무젓가락에 꽂은 것을 사들고 왔다. 그런데 중국 옥수수, 너무 맛 없더라. 음식 절대 안 남긴다는 새 언니와 오빠도 먹던 옥수수를 쓰레기통으로 골인! 엄마랑 나도 덩달아 골인!
졸려버린 조카는 잠투정을 엄청 했다. 이래도 싫고 저래도 싫고 내내 떼 쓰고 울고 하는데, 신기하게도 엄마도 아빠도 아무도 언성을 높이지 않는다. 이게 한국 상황이었으면 엉덩짝 한 번 맞았을 것 같은데 말이다. 사실 외출 준비할 때 아이 옷 입히는 데만도 30분이 넘게 걸렸다. 애가 내내 도망다녀서. 그런데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그게 정답이긴 한데, 바쁠 때 어디 그게 되는가? 신기하다 못해 경이로울 지경!
아무튼 녀석은 그렇게 진을 빼다가 잠들었다. 아이를 차에 기사님과 혼자 둘 수가 없어서 오빠가 차에 남고 새언니랑 엄마와 나는 점심 먹으러 한인 식당을 갔는데, 언니가 처음 데려간 곳은 '분식집'이었다. 테이블이 달랑 두 개 있는 아주 작은 곳인데 밖에서 메뉴판이랑 가격표가 다 보인다. 떡볶이 김밥 등등인데 가격이 대략 한국돈으로 3천원 정도.
부실한 아침을 생각하며 잠시 망연자실. 그런데 그 집은 명절이라고 문을 닫았고, 옆에 있는 설렁탕집을 갔다. 그치만 대따 맛 없고, 난방을 안해줘서 오지게 춥고, 그 다음에 후식으로 나온 콩차는 비려서 못 먹었다. (털썩!)
다시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중 슈퍼에 들러서 저녁 먹을 찬거리를 준비했다. 오늘 저녁은 불고기! 오빠는 육식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한국식 음식을 무척 사랑한다. 그래서 한국에 올 때도 베니건스 가자고 하면 싫어한다. 불고기, 샤브샤브... 이런 것 먹어야 한다. 아님 설렁탕~
슈퍼는 한국 사람 전용인지 한국말로 원산지 표시가 되어 있고 비의 노래가 마트 전체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오빠도 비를 안단다. 호호홋, 섹시하다고 내가 말해줬다.ㅎㅎㅎ
다음 식사를 위해 찌개용 뚝배기도 사고 찬거리를 열심히 사고서 집으로 직행. 한 것도 없는데 무척 피곤했다. 이유는 한가지다. 조카를 계속 안고 다녀서..ㅠ.ㅠ
엄마랑 새언니는 저녁을 준비하고 나는 조카랑 놀기 시작했다. 잠에서 깨고부터는 계속 나를 부르느라 바쁘다. 고모 컴인~! 고모 컴인~!
녀석은 둘째 언니 둘째 딸보다 한달 더 늦게 태어났지만 말이 엄청 빠르다. 외할머니가 한국어로 돌봐주셔서 한국말은 다 알아듣고, 지가 하는 말은 모두 영어다. 울집 다현 양은 문장은커녕 아직 단어 몇개가 전부인데...ㅡ.ㅜ
한국에서 들고 간 동화책도 읽어주고 같이 만화영화도 보고(니모를 찾아서 광팬이다. 한국어 자막도 없는 영어 비디오를 내내 봐야 했다.ㅠ..ㅠ)
빅 퍼즐도 맞추고...

또 다시 두 시간을 기다려서 저녁 식사 타임!
미니 가스렌지는 미국에서 배로 부친 물건이라고 한다. 식탁 위에 렌지를 올리고서 불고기를 굽는다. 오홋, 시장기가 도니 군침이 꿀꺽!
그.런.데. 조카 녀석이 또 고모를 부른다. 고모가 자기 옆에서 먹어야 한다고 떼를 쓴다.
결국 나는 식탁에서 지상으로 하강하여 조카 옆에 자리를 잡는데, 새언니가 내 반찬을 아래로 덜어주었는데 거기엔 고기가 없었다는 이야기! 내가 평소 고기에 환장하는 녀석은 아니었지만, 고기 없으면 반찬은 막 사온 김치랑 아침의 그 무 생채랑 김밖에 없단 말이다!
그리고 밥 잘 안 먹는 조카 녀석을 따라다니며 밥을 먹이는 일이란, 녀석을 안고 공원 산책하는 것만큼이나 힘들었다.
그나마 다행히도 녀석은 불고기를 잘 먹었다. 밥 한 술 먹으면 고기 한점 준다고 녀석과 딜을 해가며 한 시간 걸려 밥을 먹이고 나니, 내 밥은 어디로 삼켰는지도 모르겠더라.
아무튼 밥을 먹고는 다음 스케줄이 있다고 기사님 대기 중. 우리가 간 곳은 상하이 밤거리였다. 춘절 기간 동안이라 사람들은 모두 들떠 있었고 거리 곳곳은 등불로 수놓아져 있었다.


사람이 엄청 많다 보니 녀석은 또 아빠와 내 어깨를 번갈아 오가고, 길 가다가 커다란 만두에 빨대 꽂아서 파는 걸 새언니가 엄마와 나에게만 사줬다. 우리만 먹어서 미안한 걸~ 하는 마음이었는데 우리만 먹이다니! 이런 마음으로 급 돌변! 너무너무, 느끼한 거다. 전날 비행기에서 먹었던 멀미 기내식을 연상시킬 만큼. 엄마랑 나는 두 사람이 안 보는 틈을 이용해서 잽싸게 쓰레기통에 버렸다. 아, 뭐 이렇게 먹는 게 힘이 드는가!
녀석이 또 잠투정을 하고 엄마도 다리 아프다고 하셔서 결국 얼마 구경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새언니가 조카를 재우러 방으로 들어가고, 오빠는 또 한국영화 보겠냐고 한다. 난 힘들어서 못 보겠다고 했는데 주방에 가보니 설거지가 한가득. 새언니는 식기 세척기가 있음에도 못 미더워서 쓰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 한 설거지는 돌아올 때까지 내 차지였다는 이야기.
상하이에 온지 이틀 째. 가본 데도 먹은 것도 영 시원찮았음. 그래도 새언니가 서커스 알아봐 준다고 해서 나는 또 다음 날을 기다렸다는 이야기. 그래도 외국에 놀러왔는데, 뭔가 신나는 일이 있을 줄만 알아서. 정말, 그럴 줄 알았단 말이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