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카의 방은 무척 편안했다. 그 깨끗한 침대 시트며 가만히 움직이는 흔들 의자가, 예쁜 스탠드 조명이, 멋드러진 상하이의 야경이, 너무도 독특한 디자인의 이중 커튼 등등이.  

아침에 일어날 때 참 개운했다. 잠깐의 독서를 마치고 굿모닝을 외치며 힘차게 하루를 시작~! 

그런데, 좀처럼 밥 먹자는 소리를 안 한다. 엄마와 새언니가 주방에서 뭔가 바빠 보이는데 밥 먹을 기미는 보이질 않고... 

오빠는 조카를 쫓아다니며 밥 먹이느라 애를 먹는다. 녀석은 아이답게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깔깔거리며 웃고 장난을 치는데, 밥 먹는 게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평소에도 밥 먹일라치면 한 시간씩 쫓아다니며 애를 설득해야 한다는 거다. 

오빠는 굉장히 자상한 아빠였다. 한 번도 화를 내지 않고 언성도 높이지 않고 끊임없이 아이를 설득하며 뭐가 필요한지, 뭘 원하는지 묻는다. 아이가 내내 튕기다가 한 숟가락이라도 먹으면 'You're good boy!' 'I'm happy.'를 외치며 아이를 칭찬하는 거다. 아이는 찬밥을 좋아하는데, 아침에 밥을 먹었으면 저녁엔 떡국을, 그 담날엔 빵을, 이런 식으로 메뉴를 계속 바꿔줘야 했다. 같은 메뉴를 두 번 먹는 걸 보질 못했다. 오빠 표현으로도 밥 먹는 게 너무 까다롭다고 한다.  

하여간, 굿모닝 이후 두 시간을 기다려서 드디어 식사 준비 완료! 식탁에 앉았다. 아이는 자기만의 식탁이 따로 있어서 거기 앉았고 우리 넷이서 둘러앉기엔 식탁이 너무 컸다. 그런데 그 큰 식탁 위에 올려진 게 밥이랑, 된장국(찌개가 아니라 국!)이랑 울 엄니가 아침에 급하게 묻힌 무 생채랑 김이 덜렁 놓여 있는 것이다. 헉! 이게 단가? 국이랑 무 생채를 아침에 어무이께서 급하게 만들었으니, 그렇다면 사온 김을 빼면 밥상에 남는 거라곤 달랑 밥 하나! 엄마의 전언으로는 냉장고에 먹을 게 암 것도 없었단다. 그래서 있는 재료 가지고 급하게 무 생채를 만들어서 김치를 대신 했다는 것.   

새 언니는 임신 5개월이었고, 상하이에 오기 전까지는 직장을 다녔으므로 요리를 배울 시간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렇긴 해도, 이 밥상은 좀 너무하지 않은가...ㅜ.ㅜ 조카 밥에는 에그 스크램블이 있던데 나도 그거 주지....;;;;; 

밥을 다 먹었는데 내 국그릇에 건더기가 아주 약간 남아 있었다. 국물도 약간. 새언니가 말한다. 아가씨 남겼냐고. 음식 남기면 안 된다고. 아, 남겼다고 하긴 좀 거시기한 분량이긴 한데, 어쩌랴. 마셨다...;;;;

그렇게 우리는 아점을 먹고(아침에 보낸 두 시간..ㅜ.ㅜ) 드디어 외출을 감행했다. 오빠는 나가면서도 어디 가고 싶냐고 묻고 나는 지도를 보며 사진을 보며 요런 데 보고 싶다고 쫑알쫑알. 그리하여 우리가 도착한 곳은, 인근 공원! 

헉, 공원???? 이 무슨 뭥미?! 



(햇빛을 등지고 찍어서 얼굴이 잘 안 보인다. 엄마 먄!) 

그리고 이때부터, 조카의 고모 사랑이 시작된다. 나 외에 다른 사람이 옆에 앉게도 못하고 오로지 나하고만 놀려고 하는 거다. 

물론 처음엔 이뻤다. 근데, 녀석이 사람 많은 곳에 가면 무서워 해서 꼭 안고 다녀야 한다는 게 문제였다. 유모차도 싫어한다. 무조건 내 팔에만 매달려 있다. 오, 갓! 녀석은 14kg이었다ㅠ.ㅠ 

호수 위에 둥둥 떠 있는 배가 있다. 공원에 상심하여서 저거라도 탈까 하는데, 오빠가 타기 싫다고 그냥 가버렸다. 엉엉..ㅠ.ㅠ 

상하이가 한국보다 많이 남쪽이지만 난방을 안 해서 무척 춥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서 겨울 옷 바리바리 싸들고 갔는데, 뜻밖에도 상하이는 몹시 따뜻했다. 특히 이 날은 햇볕이 종일 비쳐서 결국엔 외투를 벗어야 할 정도!  

중간에 오빠가 옥수수를 나무젓가락에 꽂은 것을 사들고 왔다. 그런데 중국 옥수수, 너무 맛 없더라. 음식 절대 안 남긴다는 새 언니와 오빠도 먹던 옥수수를 쓰레기통으로 골인! 엄마랑 나도 덩달아 골인!

졸려버린 조카는 잠투정을 엄청 했다. 이래도 싫고 저래도 싫고 내내 떼 쓰고 울고 하는데, 신기하게도 엄마도 아빠도 아무도 언성을 높이지 않는다. 이게 한국 상황이었으면 엉덩짝 한 번 맞았을 것 같은데 말이다. 사실 외출 준비할 때 아이 옷 입히는 데만도 30분이 넘게 걸렸다. 애가 내내 도망다녀서. 그런데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그게 정답이긴 한데, 바쁠 때 어디 그게 되는가? 신기하다 못해 경이로울 지경!  

아무튼 녀석은 그렇게 진을 빼다가 잠들었다. 아이를 차에 기사님과 혼자 둘 수가 없어서 오빠가 차에 남고 새언니랑 엄마와 나는 점심 먹으러 한인 식당을 갔는데, 언니가 처음 데려간 곳은 '분식집'이었다. 테이블이 달랑 두 개 있는 아주 작은 곳인데 밖에서 메뉴판이랑 가격표가 다 보인다. 떡볶이 김밥 등등인데 가격이 대략 한국돈으로 3천원 정도.  

부실한 아침을 생각하며 잠시 망연자실. 그런데 그 집은 명절이라고 문을 닫았고, 옆에 있는 설렁탕집을 갔다. 그치만 대따 맛 없고, 난방을 안해줘서 오지게 춥고, 그 다음에 후식으로 나온 콩차는 비려서 못 먹었다. (털썩!) 

다시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중 슈퍼에 들러서 저녁 먹을 찬거리를 준비했다. 오늘 저녁은 불고기! 오빠는 육식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한국식 음식을 무척 사랑한다. 그래서 한국에 올 때도 베니건스 가자고 하면 싫어한다. 불고기, 샤브샤브... 이런 것 먹어야 한다. 아님 설렁탕~ 

슈퍼는 한국 사람 전용인지 한국말로 원산지 표시가 되어 있고 비의 노래가 마트 전체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오빠도 비를 안단다. 호호홋, 섹시하다고 내가 말해줬다.ㅎㅎㅎ 

다음 식사를 위해 찌개용 뚝배기도 사고 찬거리를 열심히 사고서 집으로 직행. 한 것도 없는데 무척 피곤했다. 이유는 한가지다. 조카를 계속 안고 다녀서..ㅠ.ㅠ 

엄마랑 새언니는 저녁을 준비하고 나는 조카랑 놀기 시작했다. 잠에서 깨고부터는 계속 나를 부르느라 바쁘다. 고모 컴인~! 고모 컴인~! 

녀석은 둘째 언니 둘째 딸보다 한달 더 늦게 태어났지만 말이 엄청 빠르다. 외할머니가 한국어로 돌봐주셔서 한국말은 다 알아듣고, 지가 하는 말은 모두 영어다. 울집 다현 양은 문장은커녕 아직 단어 몇개가 전부인데...ㅡ.ㅜ 

한국에서 들고 간 동화책도 읽어주고 같이 만화영화도 보고(니모를 찾아서 광팬이다. 한국어 자막도 없는 영어 비디오를 내내 봐야 했다.ㅠ..ㅠ) 

빅 퍼즐도 맞추고... 



또 다시 두 시간을 기다려서 저녁 식사 타임! 

미니 가스렌지는 미국에서 배로 부친 물건이라고 한다. 식탁 위에 렌지를 올리고서 불고기를 굽는다. 오홋, 시장기가 도니 군침이 꿀꺽! 

그.런.데. 조카 녀석이 또 고모를 부른다. 고모가 자기 옆에서 먹어야 한다고 떼를 쓴다.  

결국 나는 식탁에서 지상으로 하강하여 조카 옆에 자리를 잡는데, 새언니가 내 반찬을 아래로 덜어주었는데 거기엔 고기가 없었다는 이야기! 내가 평소 고기에 환장하는 녀석은 아니었지만, 고기 없으면 반찬은 막 사온 김치랑 아침의 그 무 생채랑 김밖에 없단 말이다!  

그리고 밥 잘 안 먹는 조카 녀석을 따라다니며 밥을 먹이는 일이란, 녀석을 안고 공원 산책하는 것만큼이나 힘들었다.  

그나마 다행히도 녀석은 불고기를 잘 먹었다. 밥 한 술 먹으면 고기 한점 준다고 녀석과 딜을 해가며 한 시간 걸려 밥을 먹이고 나니, 내 밥은 어디로 삼켰는지도 모르겠더라.  

아무튼 밥을 먹고는 다음 스케줄이 있다고 기사님 대기 중. 우리가 간 곳은 상하이 밤거리였다. 춘절 기간 동안이라 사람들은 모두 들떠 있었고 거리 곳곳은 등불로 수놓아져 있었다. 





사람이 엄청 많다 보니 녀석은 또 아빠와 내 어깨를 번갈아 오가고, 길 가다가 커다란 만두에 빨대 꽂아서 파는 걸 새언니가 엄마와 나에게만 사줬다. 우리만 먹어서 미안한 걸~ 하는 마음이었는데 우리만 먹이다니! 이런 마음으로 급 돌변! 너무너무, 느끼한 거다. 전날 비행기에서 먹었던 멀미 기내식을 연상시킬 만큼. 엄마랑 나는 두 사람이 안 보는 틈을 이용해서 잽싸게 쓰레기통에 버렸다. 아, 뭐 이렇게 먹는 게 힘이 드는가! 

녀석이 또 잠투정을 하고 엄마도 다리 아프다고 하셔서 결국 얼마 구경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새언니가 조카를 재우러 방으로 들어가고, 오빠는 또 한국영화 보겠냐고 한다. 난 힘들어서 못 보겠다고 했는데 주방에 가보니 설거지가 한가득. 새언니는 식기 세척기가 있음에도 못 미더워서 쓰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 한 설거지는 돌아올 때까지 내 차지였다는 이야기.  

상하이에 온지 이틀 째. 가본 데도 먹은 것도 영 시원찮았음. 그래도 새언니가 서커스 알아봐 준다고 해서 나는 또 다음 날을 기다렸다는 이야기. 그래도 외국에 놀러왔는데, 뭔가 신나는 일이 있을 줄만 알아서.  정말, 그럴 줄 알았단 말이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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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9-02-04 0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참 우리네 식이라면 초대한 손님, 아니 가족이라도 이렇게 못하지 싶은데요.^^
결국 먹는 것도 시원찮고 설거지와 애보기만 하고 왔다는 건 아니겠죠~~ ㅜㅜ

마노아 2009-02-04 02:08   좋아요 0 | URL
빙고! 그리고 그게 무려 5박 6일이었다는 얘기지요! 엉엉, 내 첫 해외 여행 물리도...ㅜ.ㅜ

꿈꾸는섬 2009-02-04 0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너무 재미있어요. 조카도 너무 귀엽구요. 외국에 나가 식사하기 힘들고 게다가 설거지..뭔가 신나는 일이 많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래도 재미있었겠어요.

마노아 2009-02-04 02:09   좋아요 0 | URL
이럴 리가 없어. 내일은 달라질 거야... 뭐 이렇게 속으로 주문을 계속 외웠지요. 주문만 외우다 끝났다는...^^;;;

바람돌이 2009-02-04 0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문화의 차이일까요? 보통 동양쪽이나 유목민쪽이 손님접대를 중요시하는것 같은데... 이쪽은 손님접대라는 개념이 없는듯하네요. 보는 사람은 갈수록 흥미진진해지는데 정작 마노아님은 여행이라고 하기에는 이거 원...(그것도 해외여행인데 말이죠.)
밥그릇들고 한시간씩 걸려서 밥먹이는 것도 문화차이겠죠? 우리집은 저러다간 바로 밥그릇 뺏기는데 말이죠. 너 밥먹지마! ^^;;

마노아 2009-02-04 02:22   좋아요 0 | URL
문화 충격 여러 차례 받았어요.ㅎㅎㅎ
저도 그 이야기를 했답니다. '차라리 아이를 굶겨라!'란 책이 있다구요. 베스트 셀러였다고..ㅎㅎㅎㅎ

Kitty 2009-02-04 0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 기준으로 봐도 좀 심한거 같은데요 ^^;;
물론 우리나라처럼 손님 온다고 바리바리 상다리 부러지게 차리지는 않지만
여기 사람들도 손님 온다면 나름 신경 많이 써요.
새언니가 임신 중이라서 이것저것 만들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하다못해 장이라도 봐놨어야 하는 거 아닐까요;;
에구 그나저나 마노아님 신나는 관광 얘기는 언제 나오누 ㅠㅠ

마노아 2009-02-04 09:32   좋아요 0 | URL
미국 기준으로 봐도 심한 거군요! 돈 잘 버는 이유가 이렇게 악착같앙서 일까요? ㅠ.ㅠ
신나는 관광 얘기가, 과연 있을까요...^^;;;;

후애(厚愛) 2009-02-04 0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님이 계시는데 정성없는 밥상이라니 너무 심하네요. 평생을 같이 살아 갈 남편의 어머님과 누이동생이신데 어찌 그리 소홀하게 대접을 할 수가 있는지 저는 이해가 안 가네요.

마노아 2009-02-04 09:33   좋아요 0 | URL
두 사람은 아침에는 평소 빵으로 급하게 식사를 마치고 점심은 각자 회사에서 집에서 해결하고 저녁만 같이 먹는다는데, 평소에도 좀 부실하게 먹는 게 아닐까 의심 중이에요..;;;;

조선인 2009-02-04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국가면 음식 때문에 다들 고생하더라구요. ㅎㅎ

마노아 2009-02-04 09:33   좋아요 0 | URL
제 지인은 홍콩으로 음식 관광을 간 적이 있었는데 홍콩과 중국은 하늘과 땅 차이인가봐요..ㅜ..ㅠ

2009-02-04 1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4 14: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공지영 지음 / 오픈하우스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제목이 너무 길었고, 딱딱하게 느껴져서, 제목의 의미가 좋음에도 불구하고 선뜻 손이 가지 않았더랬다. 그러다가 묵혀둔 책을 꺼내든 것은 여행 때문이었다.

상하이 여행을 가기 전 어떤 책을 가져갈 것인가 행복한 고민을 했다.
앞서 상하이 여행을 여름에 다녀온 나의 지인은 가서 돌아다니기도 바쁜데 책을 왜 가져가냐고 짐만 된다고 했지만, 비행기 안에서 읽거나 자기 전에 읽거나 책 읽을 짬이 있을 것 같았다. 비록 비행 시간이 길진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안 가져갔음 큰일날 뻔 했다. 길고 긴 시간 동안 책 없이 어찌 버텼을까...ㅠ.ㅠ 

상하이 가면서부터 비행기에서 읽고 또 3일을 잡아 먹은 책은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이었다. 책이 길었고, 작가주와 번역자 주까지 합해서 술술 읽히는 책이 아니어서 오래 걸린 것이다. 그래서 머리도 좀 식히고 좀 더 빨리 읽힐 책으로 공지영의 책을 골랐다. 예상대로 술술 넘어가며 책장 넘기는 보람을 선사해 주더라. 

이 책은 그녀의 첫째 딸 위녕에게 보내는 편지글 모음이다. 얼마만의 간격으로 보낸 건지 몰랐는데 책의 말미를 보니 일주일에 한통씩 쓴 것이었다. 그 딸이 고3이 되었을 때, 그리고 스무 살이 되었을 때 보낸 편지들. 아무리 작가 엄마라고는 하지만 그 세련된 소통이 어찌나 부럽던지! 

이 책이 더 매력적인 것은 엄마가 딸에게 보내는 충고이자 연서이기도 하지만 책 속에 책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그때 작가 공지영이 만났던 책, 필요했던 책, 그리고 되새겨본 책들에 대한 이야기가 꼭 한 꼭지 이상씩 등장한다. 그 책들을 찾아보는 재미 또한 무시 못한다. 책 제목을 일일이 적을까 하다가 검색하면 분명 누군가 리스트로 만들어뒀을 것 같았는데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미리 리스트를 작성해주신 분들께 감사! 

무거운 책가방을 메고 힘들게 공부하느라 지친 딸에게 보내는 격려, 사랑과 이별에 흔들리고 떨고 있는 딸에게 보내는 위로, 그리고 딸과 싸운 날 보내는 화해의 악수까지. 이 책의 편지글들은 다양한 상황 속의 그네들 이야기, 결국엔 우리네 사는 이야기들을 하면서 독자들을 안으로 안으로 끌어들인다. 책은 너무 무겁지도 않고 지나치게 가볍지도 않고 딱 필요한 만큼의 진지함을 보여주는 매력을 갖고 있는데, 마무리는 언제나 수영 얘기로 웃음을 준다.  내일은 수영을 가야지. 오늘은 수영을 가야지. 오늘은 날씨가 너무 좋아서 수영을 못 갔고, 오늘은 시골에 다녀오느라 수영장이 문을 닫았고, 오늘을 설레어서, 오늘은 마음이 아파서 기타 등등. 작가 공지영은 수영을 못 가는, 혹은 가야 할 이유들을 대면서 꼭 마무리를 하지만 당최 수영장에 갔다는 얘기는 없다. 이거 설정인가? 그럴 수도 있겠다. 어찌 보면 좀 유치하고, 어찌 보면 좀 귀여운 책 속 인사.  

'즐거운 나의 집'은 위녕의 시각에서 쓰여진 소설인데, 이 책은 위녕에게 보내는 편지 글로 모여진 책이다. 작가 엄마를 둔 모든 딸들이 그렇게 책 속 주인공으로서, 게다가 실명으로 등장하며 활개를 치며 살지는 않을 텐데, 참 특별한 경험이리라 생각된다. 그건 엄마처럼 작가의 꿈을 꾸는 딸로서는 선택이기도 하고 부담이기도 할 특별함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책의 말미에는 딸이 엄마에게 보내는 답신이 한 통 실려 있다. 고백하건대, 프로 작가 엄마의 기나긴 글보다, 딸의 짧은 답신이 나는 더 마음에 와 닿았다. 그 글에는 아직 짜여진 틀도 정형화된 표현도 없기 때문이다. 역동적인 삶을 살아낸 공지영의 딸 위녕이, 이후 어떤 글쟁이가 될지 기대가 되는 부분이다.  

나는 아직 엄마가 되어보질 못해서, 네가 '어떤' 삶을 살아도 너를 응원할 것이라고 당당히 말하는 용기를 갖지 못하겠다. 모든 엄마들이 자녀가 어떤 길을 간다고 해도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신다고도, 말은 못하겠다. 그렇지만, 그 마음들에는 모두 자녀들을, 손주들을 한껏 지지하고 지켜봐주고 싶은 사랑이 담겨 있음을 의심치 않는다. 인생에 있어서 나의 삶을 온전히 긍정하며 지지해주는 한 사람을 얻는 것, 무한한 축복일 것이다. 또한, 그러한 지지를 대가 없이 보낼 수 있다면, 그것 역시 값으로 셀 수 없는 축복일 거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 모든 성실한 삶들을 향해 건강한 지지를 보내고 싶다. 건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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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9-02-04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읽었군요~ 축하해요.
작년에 우리 큰딸 생일선물로 산 책, 나에겐 우수리뷰를 안겨주었던 책이죠.^^
민주는 이번 방학에 봤을 뿐이고...

마노아 2009-02-04 02:03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덕분에 읽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요~ 딸을 향한 그 연서를 어찌 잊겠어요.
전 여행 가서 읽었는데 책 안 들고 갔음 어쩔뻔 했는지...ㅠ.ㅠ
민주양의 반응은 어때요? 책속에서 어떤 책을 건졌을까요?

메르헨 2009-02-04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가...땡기는걸요.흠..고민되는걸요...흠...^^
마노아님, 올만에 인사하고 가요.
상하이에서 즐거운 시간 보내고 오셨네요. 부럽습니다~~~

마노아 2009-02-04 14:10   좋아요 0 | URL
메르헨님, 바쁜 와중에 들러주셨군요. 반가워요!
상하이 여행은 별로 즐겁지 않았어요. ㅎㅎㅎ
 

오빠가 검색해서 알려준 아시아나 항공기는 엄마와 나, 두 사람 왕복 티켓 비용이 77만원이었다.
아무래도 가격이 세다고 오빠가 주춤하는 눈치이기에 저가 항공을 알아보니 중국 남방 항공기는 두 사람 왕복 비용이 319,500원. 이야, 절반 값이 안 되는 거다.  

그래서 그걸로 예약했다. 비행기가 떨어지면, 그건 운명이지 뭐... 이러면서!  



비행기는 꽤 좁고 별로 깨끗하지 않았고, 좀 흔들리기도 했지만, 그건 뭐 참을만 했다. 사실 비교 대상이 없으니 다른 비행기보다 얼마나 못한지는 모르겠다. 다만, 기내식은 인간이 먹을 맛이 아니었단 것만은 확신한다. 

평소, 비위가 강하다고 자부했던 나는, 그 약품 냄새가 나는 밥을 무려 세번이나 떠먹고는 그대로 멀미했다ㅠ.ㅠ
어무이께서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설사 작렬! 대단하다, 남방항공의 기내식! 쿠헤엑..! 

입국확인서를 제출하는데, 친지 방문이라 체크해 뒀는데 주소는 내가 알 길이 없어서 공란으로 했더니, 공항에서 직원이 솰라솰라, 막 뭐라뭐라 하는데, 알 길이 있나.(ㅡㅡ;;)  

Can you repeat that? 했는데, 이럴 때 쓰는 표현이 아닌감? 직원이 한숨과 함께 웃더니 그냥 가랜다. 칫, 똑같이 써낸 엄마는 안 붙잡혔는데 왜 나만 갖고 그러는감? 왜 중국에 왔냐고 해서 친척 집에 온 거고, 공부하러 왔냐고 하길래 아니라고 했는데 그 다음 질문은 통 모르겠다. 아무튼 패스! 

중국에 도착할 때는 공항이 한산했다. 저녁 시간이어서 그랬을까? 오빠와 새언니가 조카를 안고서 우리를 반겨준다. 호호홋, 드디어 내가 해외에 도착했구나!  푸동공항에서 오빠 집까지는 대략 40분 거리. 기사님이 짐을 받아주신다. 중국에서는 외국인이 차를 직접 운전할 수가 없기 때문에 회사에서 전속 운전 기사를 붙여줬다고 한다. 차는 BUICK. 색깔은 별로 안 이쁘다. 회사에서 준 거라 고를 수 없었단다.  

기내식으로 하도 혼이 나서 다시 저녁을 먹을 엄두가 안 나고, 오빠네는 이미 먹었다고 해서 바로 집으로 직행.  

황푸 강을 중심으로 동쪽이 푸동, 서쪽이 푸시. 오빠 집은 푸시에 있었다. 아파트에 들어서는데 집이 겁나 좋더라.  

정원이 호텔 정원처럼 이쁘게 꾸며져 있었고 로비는 실내 거실보다 안락했고, 인사하는 안내 언니들은 또 어찌나 이쁘던지. 

오빠 집은 21층이었는데, 중국에선 4라는 숫자를 싫어해서 4층과 14층은 없다. 그러니까 사실은 19층.  

보안 키가 없이는 엘리베이터도 탈 수 없고 아파트 안으로도 들어갈 수가 없는데, 그 키를 가진 사람도 자기 집이 있는 층의 엘리베이터만 누를 수 있다고 한다. 흐음... 경비가 철저하구나! 

도곡동 사는 내 친구 집도 참 좋았었는데, 오빠 집을 보니 비할 바가 아니다. 면적은 대략 80평 정도 되는 것 같았다. 우리랑 세는 단위가 다르기 때문에 물어보진 못했지만 눈 짐작에.  

천정 높이가 3.4미터 정도 되는 것 같았는데 천정이 높은 게 난 참 맘에 들었다. 우리 집은 화장실 갈 때 파카를 입고 가야 하건만, 여긴 화장실 바닥에도 온돌이 깔려서 맨발로 들어가는구나. 거 참 비교되게시리. 

아파트도 역시 회사에서 제공하는 거였다. 날마다 4시간씩 주방 도우미가 방문을 하고 그 도우미가 이틀에 한 번 침대 시트를 갈아준다. 그리고 청소 도우미가 또 일주일에 세 차례 방문을 해서 온통 반딱반딱하게 닦아준다. 헉, 뭐가 이렇게 편한 거야? 

오빠의 미국 집은 3층 집이라는데 상하이 집보다 크다고 한다. 허걱! 그 집 임대해 놓고 나왔는데 살림살이는 모두 창고에 장기 보관. 창고 사용료는 역시 회사에서 지급. 운전기사가 휴가를 받아서 운전을 못해줄 때는 택시를 이용, 영수증 첨부하면 역시 회사에서 지급. 두돌 조금 넘은 조카는 (미국인)학교에 다니는데 학비가 일년에 만달러 지불된다고 한다. 무슨 회사가 봉인가! 대접이 놀랍도록 훌륭하다. 우리나라 삼성, 현대, 엘지도 해외 파견 근무 나가면 이렇게 대접 받을까?   

(사진 펑!)

조카 녀석은 공항에선 낯설어서 안으려고 하면 막 도망갔는데, 집에 도착할 즈음엔 벌써 친해져서 이후론 내 옆에서 절대 안 떨어지려고 했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궁금한 것들을 질문하고 대답하고, 한국에서 바리바리 싸들고 온 선물 증정식(?)을 마친 후, 가볍게 과일을 먹고 나니 어느새 잠잘 시간. 오빠가 묻는다. 한국 영화 보겠냐고. 거기선 짝퉁 dvd를 한 장에 1달러에 구입할 수 있다고, 자기가 사 모은 한국 dvd를 보여준다. 헐리웃 영화는 한글 자막이 없기에 영어 자막에 한글 대사가 나오는 한국 영화를 권한 것.  

솔직히 난 좀 피곤했고, 오빠가 사둔 영화는 거의 내가 보았거나 아니면 볼 마음이 없는 것들이었는데, 아 오랜만에 만나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거구나! 싶어서 같이 영화를 보기로 했다. 이때 고른 영화가 '괴물' . 

이 영화를 한국 사람 무려 천만 명이 넘게 보았다고 했는데, 말하면서 좀 챙피하긴 했다. 그렇다고 한국 사람들의 몰개성과 획일화를 내가 영어로 설명할 수는...;;;; 뭐, 나도 그 네 명 중 한 명이 본 영화를 꼬박꼬박 보기도 했었고. ^^ 

근데 이게 짝퉁 영화라서인지, 아님 워낙에 한국말 옮기기가 힘든 건지 오빠는 좀처럼 재미를 못 느끼는 것 같았다. 중요 대목에서 막 졸아서 내가 흔들어 깨우기도. 골뱅이 모양이 괴물 모양이랑 비슷한 것, 그리고 미국에서 수입한 그 가스...이름 뭐더라? 옐로우 어쩌구가 달려 있는 모양도 괴물 모양하고 비슷하다고 설명하니 비몽사몽 간에 고개를 끄덕끄덕.  

그리고 새벽 한 시가 되어서야 영화는 끝. 감상이 어땠냐고 하니 영 아닌 눈치다. 굿나잇~ 인사를 하고 나는 조카 방으로 고우~! 

어무이께선 이미 잠드신 지 오래. 상하이에서의 하루는 그렇게 끝나갔다.  

어디어디 가보고 싶냐고 물었을 때 난 미리 책 보고 찾아본 곳을 줄줄줄 읊었다. 그 중에 몇 군데는 가겠지 싶어서. 

난 서커스도 보고 싶었고, 동물원에서 자이언트 팬다도 보고 싶었고, 88층 전망대까진 아니더라도 54층 하야트 호텔 라운지에서 커피를 마시며 상하이의 놀라운 야경을 보고 싶었다. 뿐인가? 황푸강을 건너는 유람선에서 야경을 즐겨도 훌륭할 것 같았고, 피곤이 다 풀리게 맛사지도 받고 싶었다.  

그리고 명색이 중국인데, 맛난 것은 또 얼마나 많을까 잔뜩 기대했다. 내가 아는 정도는 가볍게 딤섬이지만 말고도 환상의 요리가 곳곳에 있지 않을까 싶었다. 원래 관광이란 게 그런 것 아닌가? 볼거리, 먹거리로 신나는 것. 5박 6일의 일정인데 서울에서의 고민이나 근심은 잠시 접어두고, 여기선 그저 신나게 즐겁게, 멋진 추억을 잔뜩 쌓는 거라고! 나는 부푼 기대를 안고 있었단 말이다. 정말로, 그날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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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9-02-03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소설을 읽는 것같은 느낌이에요. 이렇게 말해도 될까요?
님이 정말 실감나고 재미나게 써 주셨네요 고생많이 하시고 힘드셨을텐데요

마노아 2009-02-04 00:54   좋아요 0 | URL
하하핫, 소설 같은가요^^;;;
고생은 별로 안 했는데 실망을 좀...ㅎㅎㅎ

바람돌이 2009-02-04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도 일단 해외파견근무 같은거 하고 싶어요. 집이랑 월급만 줘도 되는데... ㅎㅎ
전 중국 음식에 대한 기대는 없습니다. 예전에 중국갔을때 도대체가 북경오리구이 빼고는 뭐 하나 입에 맞는게 없더라는... ㅠ.ㅠ 근데 그것 말고도 뭔가 대단한 고행담이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 두근두근하네요. ㅎㅎ 앗 조카랑 어머님이랑 마노아님이랑 모두 정말 닮았어요. ^^

마노아 2009-02-04 00:55   좋아요 0 | URL
대단한 고행담까지는 아니지만 제가 생각했던 여행의 묘미와는 좀 거리가 멀었어요.^^;;;
우리 셋이 닮았나요? 전 엄마보다 아빠를 많이 닮았고, 조카는 제 아빠를 쏙 빼닮았는데, 오빠는 엄마랑 또 별로 안 닮았더라는...;;; 그래도 우리의 유전자는 섞여 있어요.

순오기 2009-02-04 0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외파견 근무를 그렇게 지원해주는 나이키가 좋은 회사인 건 확실하군요.
중국은 인건비가 싸니까 같은 돈이어도 받는 혜택이 클 거 같아요.
그런데도 오라버니가 꽤 근검 혹은 인색하게 느껴지는데요~ㅎㅎㅎ

마노아 2009-02-04 02:06   좋아요 0 | URL
나이키가 대기업은 대기업이구나, 제대로 느꼈어요. 인건비가 싸니가 그렇게 기사에 도우미 둘에 다 쓸 수 있었겠죠. 미국에선 자기네도 그렇게는 못한다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울 오라버니와 새언니가 짠돌이 짠순이라는 걸 이후로 우린 뼈저리게 느낀답니다. 억대 연봉 소용 없어요ㅠ.ㅠ

꿈꾸는섬 2009-02-04 0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정말 재미있는 여행기에요.
근데 마노아님 너무 예쁘세요.^^ 전 또 마노아님께 반했어요^^

마노아 2009-02-04 02:23   좋아요 0 | URL
재밌게 보아주시니 감사해요. 당최 하고 온 게 보고 온 게 먹고 온 게 없어서 지루할까 봐 걱정이었거든요. 엄훠, 제 사진 첨 보시는군요! ^^ㅎㅎㅎ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주노 디아스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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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이 생판 남도 아니잖은가. 자식은 내가 '몰래 섹스'를 했던 여자의 동생이란 말이다. 그전 두어 해 동안 롤라와 같이 있는 오스카를 캠퍼스에서 몇 번 보았지만, 자식과 롤라가 오누이라는 게 전혀 믿기지 않았다.(나는 요한계시록이고, 누나는 창세기야. 녀석의 표현이었다.)-201쪽

롤라에게 녀석을 지켜보겠다고 약속은 했지만 첫 두 주 정도는 녀석과 같이할 게 없었다. 사실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나도 바쁘단 말이다. 주립대 다니는 대학생치고 안 그런 놈이 있나? 아르바이트도 해야 하고 운동도 해야 하고 친구도, 여자친구도 만나야 하고 디저트로 다른 계집애도 만나야 하는데.-203쪽

요즘 난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뭐가 날 더 화나게 했을까? 오스카, 그 뚱뚱한 찌질이 녀석이 그만뒀다는 거였을까, 아니면 오스카 그 뚱뚱한 찌질이 녀석이 내게 도전했다는 사실이었을까? 그리고 생각한다. 무엇이 그에게 더 상처를 줬을까? 내가 그의 진정한 친구가 아니었다는 거였을까, 아니면 내가 친구인 척했다는 사실이었을까?-2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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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공지영 지음 / 오픈하우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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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말이야. 그래도 모두가 살아내는 또 하나의 이유는 오르막은 다 올라보니 오르막일 뿐인 거야. 가까이 가면 언제나 그건 그저 걸을 만한 평지로 보이거든. 가까이 있다는 이유로 눈이 지어내는 그 속임수가 또 우리를 살게 하는지도 모르지.-15쪽

상처 받을까 하는 두려움은 잠시 미뤄두자. 예방주사도 자국이 남는데 하물며 진심을 다하는 사랑이야 어떻게 되겠니. 사랑은 서로가 완전히 합일하고 싶은 욕망, 그래서 두 살은 얽히고 서로의 살이 서로를 파고들어 자라는 과정일 수도 있단다. 그러니 그것이 분리될 때 그 고통은 얼마나 크겠니? 내 살과 네 살이 구별되지 않고 뜯겨져 나가며 찢어지겠지. 비명을 지르고 안 지르고는 너의 선택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픈 게 당연한 거야. -25쪽

(안소니 드 멜로 신부님)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대로 내 삶을 사는 것, 그건 이기적인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대로 남에게 살도록 요구하는 것, 그것이 이기적인 것입니다. 이기심은 남들이 나의 취향, 나의 자존심, 나의 이득, 나의 기쁨에 맞추어 살도록 요구하는 데 있습니다. -35쪽

중요한 것은 네가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넌 스무 해를 살았니? 어쩌면 똑같은 일 년을 스무 번 산 것은 아니니? 네 스무살이 일 년의 스무 번의 반복이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야. -37쪽

(앨런 맥팔레인)
우리는 나이 들수록 의문을 품지 않고 질문을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자신이 배운 삶의 가치를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그렇게 되면 어느 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는 것이 된다. 절대적이고 당연한 가치들이 존재하는 곳에서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네가 온전히 너의 삶을 살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너와 네가 사는 세상을 낯선 시선으로 볼 필요가 있다. 좀 더 객관적인 눈으로 인생을 멋지게 설계하기 위해서 말이다. -64쪽

(앨런 맥팔레인)
누군가를 호감을 갖고 조아하는 것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과는 다르다. 흔히 사람들은 부모나 형제를 사랑하지만 좋아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흔히 있는 일이다. 호감과 사랑이 모두 중요하기는 하지만 같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정은 정적이지 않다. 우정은 마치 강물과 같아서 어떤 방향으로건 흐를 때만 의미가 있다. 언제나 발전하고 변화하고 넓어지고 새로운 경험을 흡수해야 한다. 누군가 말했듯이 잉글랜드 사람들은 친구가 아니라 무엇인가에 대한 친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친구는 결코 배타적인 소유물이 될 수가 없다. 인생을 살면서 가장 어려운 일이 친구를 나누거나 잃는 일임을 배우게 될 것이다.-66쪽

(앨런 맥팔레인)
우리는 쉽게 냉소주의자가 될 수 있다. 세상에 진실이란 없으며 공정함이란 허구에 불과하고 관찰은 철저하게 편파적이며 모든 이론은 정치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절반은 옳다. 진리를 발견했다고 주장하거나 올바른 길을 찾았다고 주장하는 사람 또는 삶의 중요한 목적을 찾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의심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진리나 정의 혹은 목적을 발견할 수 없다거나 추구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한다면 의미 없는 인생이 되고 만다. -69쪽

(앨런 맥팔레인)
지금까지 이 지구상에 너와 같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적용된다. 하지만 그로 인해 너의 특별함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릴리야, 사랑한다. 나는 네가 어떤 인생을 살든 너를 응원할 것이다. 그러니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고 네 날개를 마음껏 펼치거라. 두려워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 뿐이다.-71쪽

<너 자신을 아프게 하지 마라>
고통 당하는 사람은 자신의 고통을 자신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고통과 작별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고통은 그가 알고 있는 것이지만, 그 고통을 놓아버린 후에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가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100쪽

위녕, 엄마가 나이 들어 얻은 선물이 있다면 위대하다는 것이 단순하다는 것을 깨달은 거야. 그 중의 하나가 사랑이야. 그걸 진부하다고 하면 안 된다. 너희들이 엄마, 엄마 부르는 소리가 인류가 탄생한 이래 수천만 년 동안 계속되었지만 누구에게든 가슴이 미어지고 절절한 그런 소리였듯이. 그렇게 너와 나도 헤어져 있다가 다시 만났잖아. 그리고 너의 두 동생들과 엄마는 서로를 꼭 붙잡았잖아. -120쪽

<피에르 신부>
고통 받는 자들에게 충고를 하려 들지 않도록 주의하자. 그들에게 멋진 설교를 하지 않도록 주의하자(...) 다만 애정어리고 걱정 어린 몸짓으로 조용히 기도함으로써, 그 고통에 함께 함으로써 우리가 곁에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그런 조심성, 그런 신중함을 갖도록 하자. 자비란 그런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경험들 중에 가장 아름답고 가장 정신을 풍요롭게 해주는 것이다.-144쪽

(피에르 신부님)
희망과 소망을 혼동하지 말자. 우리는 온갖 종류의 수천가지 소망을 가질 수 있지만 희망은 단 하나 뿐이다. 우리는 누군가가 제 시간에 오기를 바라고, 시험에 합격하기를 바라며 르완다에 평화가 찾아오기를 소망한다. 이것이 개개인의 소망들이다.
희망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그것은 삶의 의미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만약 삶이 아무런 목적지도 없고, 그저 곧 썩어질 육신을 땅 속으로 인도할 뿐이라면 살아서 무엇 하겠는가? 희망이란 삶에 의미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146쪽

운명에 대해 승리하는 단 하나의 방법은 그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말을 말이야. 거대한 파도에 휩쓸린 배가 파도를 넘어가는 유일한 방법은 파도 자체를 부정하며 판자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파도를 넘어 휘청대면서 앞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는 비유를 하면 좀 이해가 될까.-161쪽

네 아빠를 만났을 무렵이었을 거야. '사랑을 하고 싶어'라고 친구들과 이야기했지만 실은, '사랑을 해야만 해'라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하며 시집을 끼고 다니던 시절이었던 것 같아. -174쪽

명심해야 할 일은 우리는 언제나 열렬히 사랑하기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서둘러 사랑하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는 거야. -177쪽

진정한 자존심은 자신에게 진실한 거야. 신기하게도 진심을 다한 사람은 상처 받지 않아. 후회도 별로 없어. 더 줄 것이 없이 다 주어버렸기 때문이지. 후회는 언제나 상대방이 아니라 자신을 속인 사람의 몫이란다.믿는다고 했지만 기실 마음 한구석으로 끊임없이 짙어졌던 의심의 그림자가 훗날 깊은 상처를 남긴단다. 그 비싼 돈과 그 아까운 시간과 그 소중한 감정을 낭비할 뿐, 자신의 삶에 어떤 성장도 이루어내지 못하는 거지.
더 많이 사랑할까봐 두려워하지 말아라. 믿으려면 진심으로, 그러나 천천히 믿어라. 다만, 그를 사랑하는 일이, 너를 사랑하는 일이 되어야 하고, 너의 성장의 방향과 일치해야 하고, 너의 일의 윤활유가 되어야 한다. 만일 그를 사랑하는 일이 너를 사랑하는 일을 방해하고 너의 성장을 해치고 너의 일을 막는다면 그건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그의 노예로 들어가고 싶다는 선언을 하는 것이니까 말이야.-178쪽

엄마는 슬프고 기쁜 사랑들을 했다. 그러나 사랑했던 기억은 엄마를 따뜻하게 한다. 엄마를 후회하게 만드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아마도 욕심과 집착과 질투 그리고 미움 같은 것들이었어. 이제 엄마의 나날은 이렇게 저문다. 그게 꼭 젊은 너희들의 상상처럼 나쁜 것은 아니야. 때로는 쓸쓸함 속에서 지난날을 떠올리며 유혹당하고 상처받았던 나 자신을 용서하고 다독이며 위로하는 것도 또 다른 사랑의 일부니까 말이야. -184쪽

'인생에서 상처 받은 사람들이 한 둘이야?' 엄마는 이런 어법을 아주 싫어한다. 암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너의 후두염이 경시 받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니까. 인생은 고통 콘테스트가 아니잖아. 엄마의 고통도 너의 고통도 모두가 존중 받아야 하니까.

고통에, 고뇌에 너무 많은 시간을 내어주지는 말자. 대신 하늘을 향해 한번 기도하렴. 현명하게 처리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그리고 잠시 다른 일을 하는 거야. 엄마랑 수영을 하던가 말이야.-190쪽

바람이 거세다는 사실보다 바람이 거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 더 힘들다는 것을 엄마는 절감하며 산다. 사람이 저마다 외롭다는 사실보다 사람이 저마다 외롭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 더 힘든 것을 말이야.
하지만 우리는 가끔 순응하며 더 거대한 것들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네가 힘들다는 사실보다 힘들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어떻게든 너 자신과 화해해야하겠지.-2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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