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을 재현하라! 동물원의 생존전략 [제 931 호/2009-06-22]


할리우드 톱스타인 마이클 더글러스와 발 킬머가 주연한 1996년 작 ‘고스트 앤 다크니스’에는 거대한 식인 사자가 나온다. 1898년 동아프리카 철도 공사장에 자주 나타나 인부 140여명을 살해한 고스트(Ghost)와 다크니스(Darkness)라는 실제 사자 두 마리가 이 영화의 모티프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벌이는 사투는 당시 상황을 재구성한 것으로, 이 사건에서 발생한 대규모 인명 피해는 서구 사회에 널리 알려질 만큼 큰 충격을 던졌다.

이 영화는 개봉 이듬해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상을 받으며 괜찮은 흥행 성적을 기록했다. 아름다운 연인도, 신기한 로봇도 아닌 성난 사자에 관객의 눈과 귀가 집중된 이유는 뭘까. 그건 바로 야성이 현대 문명인들 사이에선 대단한 볼거리라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도심 동물원이 제공하는 안락함에 취해 늘어진 사자만 봐오던 사람들은 거칠게 포효하며 극단적 야성을 뿜어내는 사자를 보기 위해 기꺼이 영화표를 샀다. 이는 문명의 결과물인 동물원이 동물답지 않은 동물을 양산했다는 사실과 맥을 같이 한다.

광폭한 사자만큼은 아니지만 현대 동물원의 화두가 동물의 야성을 재연하는 데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야성은 단순히 사나운 동물이 아닌, 동물다운 동물을 만드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동물에게 원래의 서식 환경과 가까운 사육 공간을 제공하는 ‘생태주의 전시’는 이런 목표를 구체화한다.

동물원에 자연을 모방한 사육 공간을 만들고자 하는 노력은 오래되지 않았다. 그전까지 동물원은 동물을 가둬 두고 구경하는 공간에 불과했다. 기원전(BC) 1300년 경 이집트에서 출현한 인류 최초의 동물원은 희귀한 동물을 단순히 가둔 뒤 왕과 귀족들이 관람하는 곳이었다.

18세기 경 등장한 대중을 위한 동물원이라 할 수 있는 서커스단에서는 동물을 노골적으로 학대하기까지 했다. 조련사가 휘두르는 채찍에 따라 곰은 공을 굴리고 코끼리는 앞발을 치켜들었다.

1829년 문을 연 영국의 런던 동물원은 동물원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꾼 계기가 됐다. 당시 동물학계가 뜻을 모아 설립한 이 동물원은 동물의 기관, 조직, 세포의 기능을 연구하는 동물 생리학의 발전을 설립 이유 가운데 하나로 천명했다. 동물 생리학은 동물의 생사에 관심이 없다면 진척이 안 되는 학문이다. 런던 동물원의 설립은 동물을 인간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공개적 선언이었던 셈이다.

동물을 인간적으로 대하려는 노력은 1970년대 시작된 생태주의 전시 방식에서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인조 바위와 콘크리트 바닥이 난무하던 이전의 사육장 대신 실제 서식 지역의 기후와 흡사한 생활 조건이 동물들에게 주어졌다.

미국 우드랜드 동물원은 1977년부터 동물원 전체를 툰드라, 타이가, 산악지대, 온대 강우림, 온대 낙엽수림, 사막, 열대 강우림 등 10개 지구로 구분해 조성했다. 캐나다 토론토 동물원은 동물원 안에 초지, 숲 등을 만들어 각 동물이 자신의 습성에 맞는 곳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했다. 미국 뉴멕시코 주에 있는 살아 있는 사막의 동식물 공원에서는 멕시코 국경 주변의 건조한 고원과 초지를 모래 언덕, 석회암 언덕, 냇물 유역 등으로 나눠 동물이 각자 여건에 따라 살 수 있게 했다.

이는 1970년대 이전까지 고양이과에 속하는 동물, 또는 같은 대륙에 사는 동물을 집단 수용한 전시 방식에서 크게 진일보한 것이다. 생태주의 전시가 실행되기 전까지는 한 지역에서 같이 살 수 없는 원숭이와 북극곰이 지척에서 사육되는 일도 있었지만 이 같은 문제가 개선된 것이다. 철창이나 해자(관람객과 동물을 격리하는 도랑)를 통해 인간에게 구경 당하던 동물들은 이제 우거진 숲속에서, 두껍게 쌓인 흙속에서 자신의 삶을 살 수 있게 됐다.

동물에게 자연의 향기를 제공하는 또 다른 노력은 ‘동물행동 풍부화 프로그램’이다. 자연을 닮은 서식 환경을 조성해 줄 뿐만 아니라 동물원의 안락함 때문에 나태해진 행동 방식을 바꾸는 데 목적이 있다.



<서울대공원에 전시 중인 기린. 관객의 눈 앞에서 나뭇잎을 뜯어 먹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2003년부터 동물행동 풍부화 프로그램을 실행 중인 서울대공원에서는 다양한 조치들을 내놓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기린의 목 길이에 맞도록 먹이통의 위치를 높여준 것이다. 일견 단순한 조치처럼 보이지만 이는 기린의 습성을 정확히 인식한 것이다.

기린에게 다른 동물처럼 바닥에 먹이를 주면 앞 다리를 불편하게 구부리거나 극단적으로 고개를 숙여 먹이를 먹어야 한다. 자연계에서라면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동물행동 풍부화 프로그램으로 높은 나무 위에 달린 나뭇잎을 따서 먹도록 하는 효과를 내 기린의 야성을 살린 것이다.

미어캣 무리 위로 이따금씩 모형 비행기를 날려 주는 일도 이 프로그램의 일환이다. 본래 남아프리카의 건조한 평원에서 사는 미어캣은 독수리와 같은 포식자의 움직임을 경계하기 위해 초병을 세우는 습성이 있는데 이런 습성은 쓰지 않으면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사육사들이 날린 모형 비행기는 미어캣이 야성의 긴장감을 유지하도록 하는 효과를 만든다.



<모형비행기를 경계하고 있는 미어캣의 모습. 동아사이언스 자료사진>

동물행동 풍부화 프로그램은 번식에 실패했던 동물이 새끼를 낳게 하기도 한다. 2006년 새끼를 낳은 수달이 대표적이다. 수달은 천적의 눈을 피하기 위해 굴을 파 보금자리를 만들지만 이전까지는 이 같은 습성을 반영한 보금자리를 제공하지 못해 번식에 실패했다. 그런데 동물행동 풍부화 프로그램이 추진되면서 수달에게 굴이 파진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자 번식이 이뤄졌다. 자연의 분위기가 안긴 심리적 안정이 새끼의 탄생으로 이어진 것이다.

동물에게 자연과 닮은 환경과 생육 환경을 제공하는 것은 동물이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느냐하는 문제와 일맥상통한다. 서식지와 닮은 동물원 환경과 자신의 습성을 그대로 구현할 수 있는 사육장은 궁극적으로 동물이 그것의 가치를 간파할 때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많은 과학자들은 동물도 사람 못지않게 정교한 즐거움을 느낀다고 지적한다. 사람의 뇌에서 분비돼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화학물질인 도파민이 동물의 뇌에서도 분비되는 만큼 친구를 보고 귀를 펄럭거리는 코끼리의 감정이 사람과 별로 다를 게 없다. 동물을 향한 배려가 짝사랑이라는 의구심을 벗어던질 때 동물의 행복도 제대로 실현될 것이다.

글 : 이정호 과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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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09-06-22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에 우연히 티브에서 영화 '고스트 앤 다크니스'를 봤는데 재미있을 것 같아 DVD를 구입을 해 놓고는 아직까지 못 봤어요. 이번주에 꼭 봐야겠어요.^^ 동물원에 가 보면 죄인처럼 갖힌 동물들을 보면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자유가 없는 동물들... 얼마나 답답할까요. 거기다 공간이 좁아서 동물들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는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동물원을 좀 더 넓게 해서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도록 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마노아 2009-06-22 19:30   좋아요 0 | URL
동물 좋아하는 후애님께는 딱인 영화이겠어요.^^
전에 광수생각에서 어미 낙타가 아기 낙타에게 사막에 적응되어진 자신들의 굽과 등과 눈썹을 설명해주는데, 마지막에 아기 낙타가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왜 우린 여기에 있죠? 그때 둘 모두 동물원 우리에 갇혀 있었거든요. 인간의 욕심이 참 여러 생명에게 몹쓸 짓을 많이 해요.

같은하늘 2009-06-22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물원에 가서 유리벽 안이 갖힌 동물을 보면 정말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침에 뉴스에서 이런 내용을 보면서 정말 잘 한 일이라 생각했지요...
새끼의 번식능력도 좋아졌다고 얘기하는거 보면서 동물들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을까 생각되더군요...

마노아 2009-06-22 19:31   좋아요 0 | URL
예전에 에버랜드 갔을 때 사파리 투어 버스를 타니까, 꼭 우리에 갇힌 게 우리 인간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앤서니 브라운의 '동물원'도 꼭 그런 에피소드를 담고 있는데 말이에요. ^^

2009-06-22 17: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22 18: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22 2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22 22: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꿈꾸는섬 2009-06-23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가 너무 이기적이여서 그런거란 생각이 들어요. 현준이네 유치원도 생태라 동물들이 꽤 있는데 모두 철창에 갇혀지내요. 그런 거 보면 동물들에게 좀 미안하단 생각이 들더라구요. 우린 구경하고 아이들도 실제로 보니까 좋긴 한데 동물들은 얼마나 힘들까요? 야생을 재현한다는 건 정말 잘 하는 일이긴 하지만 울타리에 여전히 갇혀 지내는 건 달라지지 않는거죠.ㅠ.ㅠ

마노아 2009-06-23 09:20   좋아요 0 | URL
우리도 안전하면서 그네들의 자유도 보장해 주려면 야생으로 돌려보내야 하는데, 인간은 또 그걸 포기 못하잖아요. 절충해서 서로 만족스러운 과정으로 나가야 하는데 지금이 그 과도기였으면 좋겠어요. 점차 더 나아진다는 희망을 주는 쪽으로요.
 
Wink 2009.7.1 - No.13
윙크 편집부 엮음 / 서울문화사(잡지)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4일씩이나 기다려서 받은 윙크. 그래놓고 다시 사흘 지나서 볼 수 있었던 윙크다.^^ 

표지 그림이 멋지다. 배경을 모르면 이게 웬 코스플레? 하겠는데, 이번 마틴과 존 시리즈의 주인공 고양이와 강아지들의 인간 코스플레 되시겠다. 작가님 처음으로 컴퓨터로 컬러 작업을 하셨다고 했는데 손으로 작업할 때만큼 섬세해 보인다. 역시 무시 못할 내공!(그리고 나의 편애~) 



지난 회에서 '날아라 꼬맹아!'하고 멋지게 끝났는데, 그게 뭔 소린지 이 친구들이 알 길이 없다는 거다. 귀여운 척 말고 솔직히 말하라니까 바로 본색 드러내는 친구들. 그 중에서도 성깔 있는 강아지 친구 눈 모양 보면서 엄청 웃었다. 옆의 친구는 고양이인데도 생김새는 어째 강아지 같다.^^ 

코믹은 이 친구들이 담당하지만 인간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서글프고 공허하게 흘러갔다. 자꾸 엇갈리는 인연의 고리들이 안타까운데, 기다리면 잘 만나질 수 있겠지?  



코믹과 진지 모드를 잘 결합하고 있는 이은 작가. 한참 심각했는데 우리의 노휴진 샘, 막간을 이용해서 영업과 개그를 함께 뛰어주고 계시다.  

정말, 인상이 너무 사나운 사람은 쌍커풀 수술로 인상을 좀 부드럽게 바꾸는 것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아는 사람 중에 얼굴이 너무 길고 턱은 주걱턱이고 눈은 찢어진(게다가 너무 작은!) 사람이 있는데, 슬쩍 쌍커풀 해볼 마음은 없냐고 물었더니 절대 없단다. 생긴대로 살지 왜 칼을 대냐고. (아니, 칼까지 안 가도 그냥 집기라도 하면 좋을....;;;) 본인의 의사니 어쩌겠냐만, 나로서는 꽤나 아쉬웠었다..;;;; 그래서 이번 편 보면서 그 사람 생각이 났다.^^;;; 



서왕모야 화려하고 당당한 게 어울리지만(그러니까 김혜수 분위기와 포스?) 소아는 수수한 옷차림이 더 어울려 보인다. 화려한 머리 장식도 아예 없는 맨 머리가 더 이뻐보인다. 그래도 저 옷차림은 비천무를 떠올리게 해서 왠지 향수에 젖기도... 

박소희 작가의 '궁'에서 남발하는 개그를 싫어하지만 이번 편 개그는 적절한 타이밍에 효과 만점으로 쓰였다. 브라보~! 

춘앵전의 그 '피'는 너무 오버라고 생각하지만, 연출을 위해서는 뭐..^^ 

중학교 2학년 정도의 아이들이 '탐나는도다'를 전혀 모르고 있어서 놀랐다. 요새 아이들은 윙크를 보지 않는단 말인가? 아님 윙크가 그 정도로 대중적이지 않다는 소린가. 그래도 '하백의 신부'는 한 명 알더만...ㅜ.ㅜ 

사랑하는 '란제리'는 이번편에도 제대로 웃기고 궁금증을 유발시켰고, '우리는 가난하지만'은 너무 찡하다 못해 마음이 아팠다. 아, 아그들 엄니는 언제 나타나는겨!!! 

이색단편 '이웃에 관한 세 가지 이야기'는 무척 흥미로웠는데 마무리가 좀 약했다. 시리즈로 기획해도 미스터리하게 재미를 줄 듯 싶은데 작가님께 너무 큰 부담이겠지? 

다음 호는 윙크 창간호다. 그러니까 윙크는 1993년에 창간 되었는데, 벌써 몇 해가 지났는가. 그때 내 나이만큼의 시간이 흘러버린 청소년 윙크. 그래도 여전히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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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09-06-21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마노아님은 열렬한 만화 팬이시군요.^^
저도 마노아님처럼 만화 많이 읽어 보았으면 좋겠어요..

마노아 2009-06-21 22:56   좋아요 0 | URL
한국에 오시면 천정까지 쌓아놓고 보시는 겁니다.^^
후애님 다시 보니까 반가워요~

2009-06-22 1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22 1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같은하늘 2009-06-22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의 만화사랑은 어디까지일까요? ^^
부럽부럽~~~~

마노아 2009-06-22 19:31   좋아요 0 | URL
윙크 사랑은 보름마다 부활한답니다. 한 달에 두 번 나오거든요.^^;;;
 






전시 기간이 좀 남았으니, 갈 수 있겠지? 꼭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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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희망꿈 2009-06-21 0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은 만화도 참 좋아하시는것 같아요.
시간내서 꼭! 다녀오세요.^^

마노아 2009-06-21 10:23   좋아요 0 | URL
헤헤, 만화를 무척 좋아한답니다. 레드문 원화가 걸려있다는 소리에 가고 싶은 마음이 충동적으로 생겼어요.^^

무해한모리군 2009-06-21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오늘 갑니다~~ 다녀와서 괜찮은지 알려드리겠습니다 ^^

마노아 2009-06-21 10:23   좋아요 0 | URL
오, 꼭 말씀해 주세요. 제가 다 기대가 됩니다.^^

무해한모리군 2009-06-23 08:33   좋아요 0 | URL
못갔습니다.
다리 근육이 갑자기 말썽을 --;;
이번주 토요일에 가야징..
마노아님은 언제?

마노아 2009-06-23 09:21   좋아요 0 | URL
에고, 아파서 어째요. 이번엔 무사히 다녀오셔요.^^
저는 방학하면 가려고 해요. 7월 말이나 8월 초 생각하고 있답니다.^^

후애(厚愛) 2009-06-21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가고 싶네요.^^

마노아 2009-06-21 22:57   좋아요 0 | URL
제가 다녀오면 후기 남길게요.^^

무스탕 2009-06-21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갈 수 있겠찌? 꼭 가고 싶다. 2

멀지도 않은 과천에서 하네요. 저거 놓치면 정말 땅을 칠것 같아요. 꼭 가야지.. (불끈!!)

마노아 2009-06-21 22:57   좋아요 0 | URL
가깝기도 하니 꼭 가셔야 해요. 불끈!!!

같은하늘 2009-06-22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꼭 가보셔야겠네요...ㅎㅎ

마노아 2009-06-22 19:32   좋아요 0 | URL
십여 년 전에는 해마다 8월에 Sicaf를 관람했는데 못 본지 오래되었어요. 올해는 여길 다녀와야겠습니다.^^
 
심리학자, 정조의 마음을 분석하다 - 심리학자가 만난 조선의 문제적 인물들
김태형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9년 4월
품절


아버지와의 관계가 좋은 자식들은 기존 체제를 송두리째 변혁하려는 경우에도 그 행동이나 언어가 그리 공격적이지 않다. 비록 자신이 타도하려는 체제 안의 인물들을 상대하더라도 가능한 한 예의를 지키면서 침착하게 정확하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한다. 또한 날선 비난과 공격보다는 설득과 교양을, 적을 많이 만들기보다는 적을 최소화하는 연합을, 폭력적인 방법보다는 비폭력적인 방법을 선호한다. 그리고 조직에 충실하며 지도자를 한번 정하면 거의 배신하지 않는다. 반면에 아버지와의 관계가 나쁜 자식들은 체제 내의 개혁을 추진하는 경우에도 그 행동이나 언어가 상당히 과격하고 공격적이다. 정치적 반대자들이나 윗사람을 대할 때는 지나치게 흥분해 예의를 지키지 않고 무례하게 행동하기도 한다. 또한 설득보다는 제압을 앞세우고, 타인들과의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에 주목해 적을 지나치게 많이 만들며, 비폭력적인 방법보다는 폭력적인 방법을 선호한다. 그리고 조직을 자주 옮겨 다니거나 배신을 잘 하는 편이다.

-211쪽

아버지 세계에 화가 나 있는 청소년들은 자신과 뜻이 맞는 소수의 불량스러운 친구들과만 아주 가깝게 지내면서 패를 모아 깡패처럼 세상에 눈을 흘기며 다진다.

-220쪽

이이를 탄핵했다가 귀양을 가게 된 허봉은 인생 최대의 시련을 겪게 되었지만 어머니를 애타게 찾는 대신 끝없는 유랑을 선택했다. 나아가 그는 젊은 시절부터 폭음을 하거나 찬 음식을 많이 먹는 등으로 자기를 학대했다. 이는 그가 몹시 우울했으며, 세상을 살아갈 의욕을 상실함으로써 ‘점진적 자살’의 길에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어머니가 두 눈 뜨고 어엿이 살아 있는데도 말이다.
허난설헌의 남편 김성립은 열등감이 있고 똑똑하지 않았으며, 기생집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당연히 그녀는 그런 남편을 좋아할 수 없었기에 부부 사이는 나빠졌다. 허나설헌은 만만찮은 성품을 가진 시어머니와도 갈등을 겪었다. 여기에 더해 두 아이가 연달아 사망했고 임신 중인 태아까지 유산했다. 아이들의 사망에는 여러 원인이 있었겠지만 임상심리학적 견지에서 보면 허난설헌이 ‘어머니 역할’을 원하지 않았거나 두려워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어머니 역할을 힘들어했기에 아이들을 건강한 상태로 출산하지 못했고 뱃속의 아이도 잃은 것이다. 이는 허난설헌 자신의 어머니 관계가 무척이나 나빴을 거라는 사실을 시사해준다. 물론 그녀의 결혼 생활이 행복했다면 조금 다른 결과가 나왔을 수도 있다. 그러나 스트레스가 심한 결혼생활은 그녀의 심리적 상처를 더 악화시켰고 그것이 아이들의 사망으로 나타나 그녀를 더 절망하게 했을 것이다.
-221쪽

허균은 계속 기생들에게서 위안을 구했다. 어머니 관계가 나쁜 아들은 연애결혼을 할 경우 좋은 배우자를 선택하지 못하며, 부부관계를 원만하게 풀어가지 못해 여러 여성들에게 연연하는 편이다. ‘방치’형 어머니 밑에서 자란 아들은 애정결핍을 주된 증상으로, 어머니에 대한 분노를 무의식적 감정으로 간직하고 있다. 따라서 대체로 자신을 추어올려주는 여성들 속에 있기를 즐긴다. 허균이 기생들과 놀기를 좋아한 것은 단순한 정력 문제가 아니라 여성들에게서 사랑받기를 간절히 원하는 그의 무의식적 소망과 밀접히 결부되어 있다. 허균은 자신이 색을 밝히는 걸 하늘이 준 천성 탓으로 치부했지만, 기본적으로 색탐이나 식탐은 타고난 욕망이 아니라 심리적 상처에서 비롯된다. 이이나 정조 같은 사람들이 색을 과하게 밝히지 않은 것은 끓어오르는 욕망을 억지스럽게 억누른 결과가 아니라 생에 초기의 만족스러운 어머니 관계가 낳은 필연적 결과일 뿐이다.

-224쪽

아버지와 어머니 그 어느 쪽과도 건강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 강릉 김씨의 삼남매는 자기들끼리 똘똘 뭉치는 길을 선택했을 것이다. 맏이인 허봉이 부모 역할을 하고 허난설헌과 허균이 그에게 의지하며 살았으나 허봉과 허난설헌이 모두 사망함으로써 허균은 심리적 고아가 되어버렸다. 이후 그는 이복형제이자 큰형인 허성의 후원을 받으며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텅 빈 부모자리는 그에게 쉽사리 메울 수 없는 공허감을 안겨주었다.

-226쪽

임진왜란이 일어나 허균 일가가 북쪽으로 피난을 가던 중에 그의 첫째 부인은 단천에서 첫아들을 낳고는 허약해진 몸을 추스르지 못해 스물두 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연이어 젖을 먹지 못한 첫아들도 죽었다. 차마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상실감과 절망감에 휩싸인 허균은 피난길에 타고 다니던 소를 팔아 관을 사고 자신의 옷을 찢어 염을 했건만, 죽은 아내의 몸이 아직도 따뜻해서 차마 땅에 묻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왜적은 허균이 마냥 슬퍼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기에 그는 아내를 근처의 산에 가매장한 채 서둘러 자리를 떠야만 했다.

-228쪽

허균은 외향감정형(EF)이어서 언어나 감정표현이 아주 풍부했는데, 그것을 제대로 절제하지 못해 많은 비난을 들었다. 외향감정형의 특성이 감정통제 능력이나 충동조절 능력의 결여와 결합된 것은 그가 생애 초기에 어머니에게서 건강한 양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부모에게 화가 나 있는 아들인 데다 감정표현이 풍부한 외향감정형이므로 타인들에게 자신의 분노를 쉽게 그리고 강하게 표출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외향감정형다운 낙천성도 있어서 임진왜란 시기 왜군에게 쫓기면서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경치를 즐겼고 누정들마다 걸려 있는 시판들을 평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감정에 도취되어 무아지경 상태로 들어가기도 했다.

-231쪽

허균은 일을 맡아 할 때는 그 처리 속도가 빨랐고 대단한 집중력을 발휘했다. 1606년(선조39)에 중국의 사신인 주지번이 허균에게 신라시대부터 당시까지의 시 가운데 가장 좋은 것들을 추려서 책 한 권으로 엮어달라고 부탁한 일이 있다. 그러자 허균은 사신을 접대하는 바쁜 일과를 수행하면서도 밤마다 옛 사람들의 시를 선별해 베껴 썼다. 그래서 8일 만에 124명의 시 839편을 네 권으로 엮어 주지번에게 주었다. 이렇게 자신이 의도적으로 기피하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허균은 자신에게 할당된 업무를 실수 없이 그리고 빈틈없이 수행했는데, 이는 그가 실천형(J)이라는 강력한 증거들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허균의 성격은 ‘지도자(ENFJ)'로 추정된다. 지적인 지도자는 학문이나 예술에 뛰어나고 언어능력이 출중하다. 다만 이공계 쪽에는 별 흥미가 없는 편이다. 비상한 기억력과 천재적인 두뇌를 가지고 태어난 허균은 학문 수준도 높았고 예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는 시나 소설을 직접 창작했을 뿐만 아니라 타인의 작품들을 높은 안목으로 비평했다.
-232쪽

‘지도자’는 열정적이고 창조적이며 온화하고 동정심이 많다. 타인의 동기나 의도를 탁월하게 간파하여 적절한 정서반응을 할 수도 있다. 따라서 지적인 지도자는 현란한 지식과 언변, 적절한 감정반응을 통해 상대방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완전히 녹일 수 있다. 허균이 탁월한 외교관으로 맹활약하며 중국의 사신들을 능란하게 상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성격특성의 덕을 톡톡히 봤을 것이다. 또한 지도자에게는 일종의 ‘포스’와 차으이력, 사람들의 마음을 잘 다독이고 용기를 북돋워주는 능력이 있어 이들은 지도자로 맹활약한다. 하지만 허균은 분노감정이 많고 자제력이 부족했으므로 상대방의 좋지 못한 동기나 의도를 읽어내면 바로 공격을 퍼부었을 것이다. 반면에 그의 성격적 온화함이나 공감능력은 자신이 좋아하는 부류에게만 선택적으로 작용해 그들에게는 지도자로 추앙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허균이 양반 지배층과는 격렬하게 충돌하면서도 서얼 출신이나 중하층 계급에서는 추종자들을 확보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233쪽

허균은 청소년기인 열두 살에 아버지를 여의었고 청년기인 이십대 초반에 둘째 형인 허봉과 누나인 허난설헌을 연속해서 잃었으며, 스물 네 살에는 첫 번째 부인과 첫 아들을 상실했다. 커다란 비탄과 고독에 잠길 수밖에 없었지만 어떻게든 세상을 살ㅇ가야만 했던 허균은 스물여섯 살이 되던 1594년(선조27) 2월에 문과에 급제해 관직의 문을 두드린다. 그러나 세상을 향한 그의 발걸음은 같은 해에 어머니가 사망함으로써 처음부터 순탄하지 못했다. 비록 큰형인 허성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외톨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었던 그는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면서 마음을 추스른 다음 다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235쪽

인생에서 승리하는 핵심적 요인은 삶에 대한 의욕 곧 생의 에너지다. 이러한 생의 에너지는 기본적으로 부모에게서 받는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건강한 사랑, 자식에 대한 부모의 일관성 있는 격려와 지지야말로 생의 에너지를 이루는 원천이다. 이 점에서 허균은 참으로 불행했다. 허균에게 절대 밀리지 않을 천재인 이이는 어머니인 신사임당에게서 건강한 양육을 받았고 아버지에게서도 신뢰와 지지를 받았다. 반면에 허균은 놀라운 천재성을 타고 났으나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에게서 제대로 사랑을 받지 못했고 충분한 격려와 지지도 받지 못했기에 생의 에너지가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허균은 한창 왕성해야 할 이십대 후반의 나이에 벌써 인생의 허무함을 읊조리게 되었다. 그가 불교나 도교에 빠져든 것도 이러한 심리상태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239쪽

허균은 세상살이에 지치더라도 최후의 보루인 어머니의 품으로는 돌아갈 수 없었으므로 그의 누나인 허난설헌이 그랬듯이 자연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의 시 중에서 ‘도피’와 ‘은둔’을 담은 시가 가장 많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산속에 파묻혀 사는 신선이 되고 싶어 한 허균은 홀로 자급자족할 수 있는 농사법을 몸소 시험하기도 했고 신선같은 생활에 필요한 지침서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생의 에너지가 부족해 끊임없이 세상에서 물러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지만 정작 허균은 은둔할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세상의 사랑과 인정을 처절하게 원했기 때문이다.

허균은 모순으로 가득 찬 세상을 증오하면서도 그 세상에서 인정받기를 원했다. 이는 어린 허균이 자신을 사랑해주지는 않고 단지 엄하게만 대한 아버지를 미워하는 동시에 그 아버지에게서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 한 마음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사실상 사회개혁을 위해 반항한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인정받고 싶어 반항한 것이다.
-240쪽

보통 자기과시는 열등감을 방어하고 보상하려는 동기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허균은 자신의 괴팍한 성품 탓에 갖게 된 열등감보다는 타인들의 주목을 끌고 그들에게서 인정받고 사랑받기를 원하는 무의식적 욕구가 자기과시의 주된 원인이었다. 곧 타인의 사랑과 관심을 독차지하고 싶어 하는 히스테리적 성향이 강했다. 서얼인 홍길동이 아버지에게서 ‘이제부터 아버지라고 불러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내고 왕에게 인정받아 병조판서가 된 것도 이런 무의식적 소망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41쪽

허균이 서얼 출신들과 소탈하게 어울리고 그들의 운명에 깊게 몰두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첫째, 허균의 무의식은 스스로를 서얼처럼 느끼고 있었다. 천재적인 재능을 갖고 있으나 아버지에게서 인정받지 못한 어린 허균의 처지는 뜻과 재능은 있으나 단지 서얼이라는 이유로 양반계급 아버지에게서 인정받지 못하는 서얼들의 처지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비록 허균은 서얼 출신은 아니지만 서얼들과 유사한 심리를 갖고 있었으므로 그들과 자신을 강력하게 동일시하게 된 듯하다.
둘째, 허균은 양반 주류사회에서는 받을 수 없었던 사랑과 존경을 받을 곳이 필요했다. 허균은 어차피 별 가망이 없는 제도권을 과감하게 포기하는 대신, 그 대안으로 불우한 이들과의 결합을 선택했다. 서얼들 입장에서는 허균처럼 재능이 뛰어난 양반 집안의 적자 출신이 자신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자신들과 허물없이 어울린다는 사실에 커다란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244쪽

그러나 불우한 이들에 대한 허균의 사랑과 관심은 본질적으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위안의 성격을 띠고 있었으므로 그의 비판의식은 제한성을 면치 못했다. 그는 서얼들에 비하면 여성, 평민 나아가 노비 같은 천민들의 권리나 해방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는 개인적 소망의 제약을 받아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이 거침없이 발전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245쪽

그는 스스로 유자(儒者)로 지칭하고 <홍길동전>에서도 홍길동이 양반의 후예임을 굳이 밝혔듯이, 서얼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자고 주장하면서도 양반계급을 인정했다. 홍길동이 세운 율도국이 신분제도가 철폐된 사회가 아니라 그저 착한 왕이 다스리는 신분제 국가인 것, 그리고 홍길동이 스스로 율도국을 조선의 속국으로 만든 것도 양반계급을 격렬하게 욕하면서도 그곳에 소속되기를 원하는 허균의 이중적인 심리와 연관이 있어 보인다.

-246쪽

반체제 인사처럼 행동했지만 실제로는 사회의 인정에 목말라 있던 허균은 벼슬을 얻거나 승진을 하면 매우 뿌듯해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는 중앙의 높은 관직보다는 다소 지위가 낮더라도 마치 율도국의 왕처럼 일정 지역을 다스리는 수령이 되기를 원했다. 그렇게 안 될 때에는 지방을 돌아다니며 감독하는 지방관이 되기를 바랐다. 왜 그는 용의 꼬리보다는 뱀의 머리가 되고 싶어 했을까? 일반적으로 아버지 관계가 나쁜 아들은 윗사람의 간섭이나 충고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기 때문에 사회생활을 힘들어한다. 적어도 수령이 되면 자기 옆에는 이래라 저래라 하는 상관은 없으므로 아버지 관계가 나빴던 허균은 그 자리를 그토록 원했을 것이다.

-247쪽

허균이 지방관이나 수령직을 수행하는 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허균은 실천적인 애민정치가가 아니었다. 조선시대의 개혁적인 인사들은 수령직을 얻으면 최우선적으로 백성들을 보살폈다. 그런데 허균은 수령이 되었을 때 백성들의 고통을 먼저 다독이지 않고 오히려 그들에게 사용해야 할 돈을 자신의 유흥비로 탕진했다. 그것은 허균에게는 진심으로 백성들을 사랑할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제대로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심리적 상처가 깊은 인물이므로 무엇보다 자신을 돌보는 데 여념이 없었다.
-249쪽

허균이 수령직을 원한 것은 신나게 놀기 위해서였는데, 그가 놀이에 집착하고 몰두한 것은 정서적 불안정 때문이었다. 마음이 편안치 못해 가만히 있으면 고통스러운 감정이 물씬물씬 올라왔으니 그것을 잊기 위해서는 뭐라도 해야 했고 그러려면 술을 마시며 진탕 노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었을 것이다.

-250쪽

둘째, 공적인 수령직을 사적이고 개인적인 욕구를 실현하는 데 이용했다. 허균은 수령직을 자기 친구들을 접대하거나 부양하는 기회로 적극 활용했다. 죽을 때 장례를 치를 비용조차 없을 정도로 청렴하게 산 이이는 대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대장간을 차려 직접 노동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가난한 친구나 친인척들을 불러 수령직을 이용해 그들을 부양한 적은 전혀 없다.
허균은 뇌물을 받아 부정축재를 하는 식으로 아주 큼지막한 부도덕은 범하지 않았으나, 자잘한 도덕들은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어겼다. 그는 자존심을 팽개친 채 주변에 관직을 청탁했고, 과거의 시험관이 되어서는 권력자들과 결탁해 시험부정을 저질렀으며,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오는 길에 책을 수천 권이나 사들였는데 이는 공금을 횡령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특히 수령직에 있으면서는 공과 사를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는 부도덕성을 모나게 드러냈다.
-251쪽

허균 인생의 두 가지 기본 동기는 ‘아버지 세계의 인정(공명)’과 ‘세상에서의 도피(은둔)’였다. 물론 이 두 가지는 서로 모순되었기에 허균은 이리저리 방황하기만 하다가 어느덧 중년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한 가지를 선택해야만 했다.

-255쪽

귀양지의 수령이 기생까지 보내줄 정도로 생활을 보살펴준 점을 고려하면, 그의 유배생활이 극단적인 궁핍을 강요하지는 않았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도 허균은 지난 시절 맛보던 산해진미를 생각하며 군침을 흘렸으니 그에게 애초부터 신선이 될 만한 자질이 없는 것은 아닐까? 어쨌든 책까지 지을 정도로 음식을 사무치게 그리워했다는 것은 그의 애정결핍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256쪽

중년기에 들어서면서 몸과 마음이 옛날 같지 않음을 부쩍 느끼고 있던 허균은 난생 처음 곤장을 맞고 귀양살이까지 했다. 여기에 더해 체제비판에 아주 민감한 광해군이 왕이 됨으로써 친구인 권필이 불시에 죽임을 당했고 조정의 유일한 버팀목인 큰형 허성까지 곁을 떠났다. ‘칠서의 옥’이 터지자 이이첨에게 몸을 맡겨 목숨은 부지했으나 허균은 여전히 안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허균은 더 이상 주저할 수 없었다. 그는 이왕 ‘공명’의 길, 공포와 불안에서 벗어나는 길을 선택할 바에야 아예 확실하게 해두고 싶었다. 그러려면 광해군의 신임을 얻어 최고 실력자가 되어야만 했다.

-259쪽

그는 광해군과 교감하며 인목대비를 폐하는 작전을 선두에서 이끌었고 이런 허균을 광해군은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지지했다. 어쩌면 이 시기 허균의 무의식은 처음으로 아버지에게서 사랑받는다는 즐거움에 도취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허균의 세력이 점점 커지고 마침내 그의 딸이 세자의 후궁으로까지 내정되자 조정의 실력자인 이이첨은 커다란 위협을 느껴 허균을 제거하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당시 세자빈은 이이첨의 딸인데 아이를 낳지 못했다. 따라서 만일 세자의 후궁으로 들어가는 허균의 딸이 아들이라도 출산한다면 허균은 명실공히 최고 실권자로 부상하게 될 것이었다.
이이첨은 수하들을 총동원해 허균을 탄핵했고 그를 반역 죄인으로 몰아붙였다. 이 과정에서 허균은 자신을 해칠 만한 빌미들을 제공했는데, 그중 가장 큰 실수는 인목대비 폐비에 반대하던 문창부원군 유희분, 병조판서 박승종, 영의정 기자헌이 반란을 꾸미고 있다고 모함한 것이다. 이는 조정의 다수 실권자들과 신하들을 한꺼번에 철천지원수로 돌아서게 만드는 자충수였다. 기자헌은 단박에 범인을 간파하고는 자신들을 모함한 사람이 허균이라고 주장했으며, 그의 아들이자 허균의 제자인 기준격은 아버지를 구원하기 위해 허균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때 허균을 크게 신임하던 광해군은 이이첨을 비롯한 신하들과 맞서면서 허균을 보호하려 했으나 그에게는 적이 너무 많았다.
-261쪽

일각에서는 허균이 실제로 혁명을 추진하다 죽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지나친 억측으로 보인다. 그가 혁명을 준비하지 않았으며, 이이첨의 계략에 걸려들어 죽었다는 게 훨씬 설득력이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 때문이다.
첫째, 허균의 인생과 심리의 흐름은 혁명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생의 에너지가 부족하고 정서가 불안정했으며, 자아가 약해 공포와 불안을 감당하지 못한 인물이다.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의 "혁명가다운 강한 의지보다 시인으로서의 감상이 더 앞선 사람"이라는 평은 정곡을 제대로 찌른 것이다. 다시는 시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조차 가볍게 번복한 그의 행동을 보아서는 그가 혁명을 계획했다는 것을 믿기 어렵다.
-262쪽

허균은 성격적으로도 혁명을 지도할 만한 인물이 못 되었다. 정서가 불안정한 외향감정형(EF)인 허균은 담대한 전략가나 강인한 의지를 지닌 혁명가와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다. 그는 분노나 충동을 거의 억제하지 못했는데, 이런 허균이 광해군과 조정의 관리들을 완전히 속여 넘기면서 프락치활동을 하고, 비밀유지와 규율 엄수가 생명인 혁명을 설계하고 이끈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둘째, 혁명을 준비하는 과정이 없었다. 거창한 혁명이 아니라 단순한 무장반란인 임꺽정의 봉기를 보더라도 그들에게는 허균보다 더 치밀하고 범위가 넓은 조직망이 있었고 무장투쟁을 할 수 있는 근거지와 무기, 재물이 있었다. 그러나 허균은 양반계급 내에 어떤 조직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조직망도, 항쟁의 근거지도, 무기나 자금도 준비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자신을 따르던 서자나 하층계급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하는 소수의 추종자들만 있었을 뿐이다. 게다가 그는 공무시간을 뺀 나머지 인생을 대부분 기생이나 친구들과 떠들썩하게 놀고, 글을 쓰고 시를 지으며 책을 만드는데 소비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언제 혁명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뺄 수 있었을까?
-263쪽

왕인 정조는 규장각을 설치해 개혁세력을 키우고 장용영ㅇ을 통해 친위부대를 육성하는 등 치밀하게 개혁을 준비했다. 그런데도 기득권세력의 격렬한 반발에 밀려 성공하지 못했는데, 허균의 무리들만으로 어떻게 혁명을 성공시키고 설사 성공한다고 해도 그것을 무슨 힘으로 지킬 수 있었겠는가. 적어도 허균은 그렇게까지 무모한 타산을 할 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서변비로고’에서 오랑캐의 침략을 정확히 예언하면서 그들이 쳐들어올 통로와 그들이 열흘도 못 되어 평양에 이를 것이라고 족집게처럼 맞추지 않았던가. 실제로 그의 예언 그대로 20여 년 후 청나라 군대는 허균이 방비를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한 서쪽 길을 따라 열흘 만에 서울까지 진격했다.

-264쪽

셋째, 이이첨과 허균의 기묘한 행동을 들 수 있다. 만일 허균이 정말로 혁명을 계획했다면 이이첨은 조사할 수 있는 시간을 최대한으로 연장해 명백한 증거들을 찾아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허균에게 "조금만 참으면 풀려날 것이다.", "당신 딸이 후궁으로 뽑혔다"며 안심시켰는데, 놀랍게도 허균은 이 말을 철석같이 믿고 전혀 반격을 시도하지 않았다.

-265쪽

이이첨이 허균을 끌어내라고 하자 비로소 허균은 자신이 속았음을 알아챘다. 그는 다급하게 "할 말이 있다"고 외쳐댔으나 그의 목소리는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추측건대 그것은 아마도 자신이 한 모든 행동은 이이첨 일당과의 긴밀한 협의 아래 인목대비를 시해하려는 작전의 일환이었음을 폭로하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2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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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자, 정조의 마음을 분석하다 - 심리학자가 만난 조선의 문제적 인물들
김태형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9년 4월
품절


아버지가 사회생활을 잘 하지 못해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자란 아이들은 사회에 대해 막연한 불안감을 갖게 된다. 이는 아버지가 반드시 고관대작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아버지가 노동을 하든, 농사를 짓든, 날품팔이를 하든 상관없다. 단지 아버지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맞서나가는 태도만 갖고 있으면 된다. 그러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사회생활을 힘들어하고 두려워하며, 위축되고 비겁한 자세로 세상을 대하는 아버지를 둔 아이들은 자기도 모르게 사회를 두려워하게 된다.
-150쪽

새장가 문제에 대해 끝까지 확답을 하지 않았던 이원수는 신사임당이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새장가를 들었는데, 그는 양반 출신의 정식 후실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상민 출신의 여자를 첩으로 들였는데, 이는 자신이 조금도 꿀릴 위험이 없는 배우자를 선택한 것이니 그는 그동안 신사임당에게 눌리면서 살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이이의 계모인 권씨는 변덕이 심하고 화를 잘 냈으며, 술을 좋아해 아침부터 해장술을 마시기도 할 만큼 품행에 문제가 있는 여자였다. 그러나 이이는 이 계모를 조금도 업신여기지 않고 정성을 다해 효도했다.
-155쪽

이이는 화목한 대가정에 대한 소망을 마음속 깊이 간직했다가 마침내 마흔두 살이 되었을 때 그것을 현실에 옮겼다. 그는 과부가 된 맏형수 곽씨와 둘째 형 부부, 동생네 가족 그리고 가난한 친척 등 모든 피붙이들을 끌어 모아 대가족을 이루고 함께 살았다. 노비까지 합치면 거의 백여 명에 이르는 대가족이었으니 당나라의 장공예(9대를 모아 한 집에 살았다. 참을 인자가 그의 가족의 화목 비결이었다 한다.)가 과히 부럽지 않았을 것이다.

-157쪽

이이는 평생 동안 왕과 신하, 신하들 사이, 조정과 백성들 사이, 가족들 사이를 화목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이를 위해 그는 대가족을 모으고 자신이 훌륭한 아버지가 됨으로써 그 꿈을 기어이 실현하려고 동분서주했다. 나아가 그는 가족들을 화목하게 만드는 것에 기초해 이상촌을 건설하려고 했다. 폐습을 시정하고 마을의 자치를 위해 향약회집법을 만들고 빈민을 구제하기 위해 쌀을 대여해주는 사창을 세운 것도 그 일환이다. 그는 심지어 대가족을 유지하기 위해 당시 양반으로서는 좀처럼 하기 힘든 일을 하기도 했다. 대장간을 차려 직접 풀무질을 해 호미를 만들어 판 것이다.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투철한 이이는 이런 필사적인 노력으로 아내와 가족들에게서 절대적으로 존경받는 아버지가 되었으니 화목한 대가정에 대한 그의 꿈은 적어도 가족 차원에서는 실현된 셈이다. 그러나 이이는 국가 차원에서도 화목한 대가정을 간절히 건설하고 싶어 했으나 그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의 가족 특히 아버지가 남겨준 숙제가 그의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158쪽

이미 열 살 때 이이는 아버지처럼 세상에서 도망치지 않고 나아갈 것이라는 현실참여 의지를 피력했다. 그가 열세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과거시험인 진사 초시에 당당히 합격한 것도 자신의 이런 꿈을 앞당기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신사임당이 한창 나이에 사망함으로써 그의 기대는 무참하게 꺾이고 말았다. 이이가 열여섯 살 되던 해에 일어난 이 비극적인 사건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댔다.

-159쪽

이이는 어머니의 3년 상을 마친 열아홉 되던 해에 금강산으로 들어가 1년 정도 머물며 불교를 깊이 연구했다. 이 기간은 크게 요동치는 마음을 다잡으며 사회불안과 싸움으로써 아버지를 극복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아버지가 안착하지 못한 사회, 아버지가 두려워한 사회에 대한 불안감을 아들인 자신은 반드시 이겨내야만 했다.

-161쪽

이이는 청년기의 심리적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하산하게 되는데 이는 사상적으로는 불교에서 유교로, 정치적으로는 은둔에서 현실참여로, 심리적으로는 내면의 사회 불안에서 외부 사회로 방향을 돌리는 과정이었다.
이듬해 봄 서울로 돌아온 이이는 한성시에서 장원급제를 한다. 그 후 그는 아홉 번이나 과거에서 장원급제를 해 구도장원공으로 불렸다. 어떤 이들은 이이가 과거시험을 지나치게 많이 본 것을 출세욕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는 초점이 빗나간 추측이다. 물론 그가 과거를 어느 정도까지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이의 빈번한 과거응시를 단지 그것만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만일 출세가 목표라면 과거를 아홉 번씩이나 볼 게 아니라 하루라도 빨리 관직에 나가 승진을 노리는 게 나았을 것이다. 그보다는 그에게 과거시험은 사회불안을 극복하는 하나의 방편이었을 것이다. 사회불안에 시달리던 이이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데 필요한 자신감을 축적하기 위해 과거시험을 자주 본 것이다. 이는 그의 아버지가 사망하여 3년 상을 치른 뒤에, 그가 무려 네 번이나 과거에 응시해 장원급제를 한 데서도 뚜렷이 알 수 있다. 아버지의 죽음은 어머니가 사망했을 때보다 그의 사회불안을 더 크게 자극했을 테니, 이이는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 과거시험을 네 번이나 보았고 그때마다 장원급제를 해 ‘나는 할 수 있다’는 확신을 다진 것이다.
-162쪽

이이는 후에 관직에 나갔을 때 과거제도가 효과적인 인재등용 방법이 아니라면서 과거제도를 반대하는 소신을 피력했다. 과거에 한 번도 합격하지 못한 사람이 이런 주장을 했다면 ‘실력이 없으니 괜히 저런 소리를 한다’는 핀잔을 들었겠지만 구도장원공이 그런 얘기를 하니 누구도 시비를 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과거시험에서 아홉 번이나 장원급제를 한 전무후무한 천재라는 ‘공식인증서’를 받게 되었고, 이는 사회생활에 대한 그의 막연한 불안감을 억누르고 자신감을 드높여주는 큰 무기가 되었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사회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구도장원공’이라는 눈부신 휘장을 가슴에 달고 사회에 나가야만 한 것이다. 아버지 세계에 대한 탐색전이자 사회진출의 첫 관문인 과거시험 무대를 천재성으로 제압한 이이는 드디어 국가를 화목한 대가족으로 만드는 대장정에 들어섰다.

-163쪽

이이는 수많은 이들에 대한 날카로운 인물평을 통해 그 누구도 봐주지 않는 자신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그가 타인들에게 가한 비판은 주로 ‘경연일기’에 수록되어 있다. 이이는 막역한 친구인 송강 정철에 대해 "정철 같은 이는 충청, 강개하여 오직 한 마음으로 나라를 근심합니다."하고 칭찬하면서도 "도량과 식견이 편협하고 고집스럽다"고 비판했다. 유성룡에 대해서는 "재주와 식견이 뛰어나다"고 하면서도 "이해관계를 살피는 뜻이 있었다."면서 그의 기회주의를 비판했다. 또한 자신과 가깝게 지냈고 선조에게서 박학하다고 인정받은 유희춘에 대해서는 "단지 고서를 많이 읽었을 뿐 실제로는 식견이 없고 옳고 그름에 어두우니 이것이 진실로 한탄스럽다"며 직설적으로 비판했다. 물론 비판의 화살은 가족이나 친인척이라고 해서 비켜가는 법이 없었다. 이이는 친인척인 이기를 을사사화의 주모자라고 격렬히 비판하기도 했다.

-167쪽

이황의 낙향으로 이이는 마음속에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 진심으로 존경하던 대학자요 정신적 아버지로 간주하던 이황의 은퇴는 세상에서 도피한 아버지에 대한 영상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이에게는 용감하게 세상과 맞서 싸우는 아버지의 역할 모델이 필요했다. 개혁정치를 추진하다 쓰러진 조광조를 이이가 높이 평가한 것도 그가 이런 아버지의 역할모델에 들어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172쪽

이황의 은둔과 사망은 이이에게는 커다란 불운이었다. 그는 이황의 사망으로 상당한 정신적 충격을 받은 듯 약 2년 6개월 동안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물론 중간에 반년 조금 넘게 청주목사로 일하기는 했으나 그것도 병을 이유로 중도에 그만두었다. 이후에도 서른여덟 살이 될 때까지 이이는 계속 관직을 사양했지만 선조가 허락하지 않자 할 수 없이 조정에 나가게 되었다. 3년 상에 비견될 만한 기간 동안 은둔했던 이이가 조정에 나가서 한 행동은 그동안 그의 가슴속을 지배한 고뇌가 무엇인지 짐작하게 해준다. 이황이 사망한 뒤 한동안 은둔했던 이이는 조정에 복귀하면서 선조에게 ‘이황에게 시호를 내려달라’고 요청했다. 결코 미워할 수는 없었던 정신적 아버지 이황과 화해하고 그에게 효를 다하기 위해서였다.

-174쪽

선조는 이이의 아버지 이원수와 여러 가지 점에서 아주 비슷했다. 선조는 성품이 착하고 영리했지만 국가 일에 별 뜻이 없고 의지가 박약해 도무지 실천력이 없는 인물이었다. 또한 그의 성격조차 아버지 이원수처럼 내향직관감정형(INF)이니 선조를 볼 때마다 이이의 무의식은 그를 아버지로 인식했을지도 모른다. 결론적으로 말해 선조는 이이가 자신의 아버지 상을 투사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을 두루 갖춘 운명적인 인물이었던 셈이다.

-175쪽

이이는 아량 부족, 불공정성, 지나친 승벽이 선조의 세 가지 심리적 병(그의 표현을 그대로 따르면 기질의 병)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신하들 중 의지하고 믿을 만한 사람이 적은 것은 스스로 자초한 일이며, 선조가 무사안일에 빠져 국가를 통치하려는 뜻을 세우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나아가 ‘만언봉사’ 등에서는 선조가 덕이 없고 의심이 많으며 일관성이 없다고 했고, "전하의 좌우에는 오직 내시들과 궁녀들만이 있을 따름"이라는 무서운 말을 하기도 했다. 그는 이런 식으로 단순히 통치행위만 문제 삼는 데 그치지 않고 선조의 행실에 대해서도 직접적으로 비판했고 마치 심리학자처럼 그 마음속 원인까지도 밝혀내 꾸짖었다.

-178쪽

선조는 비록 열등감 때문에 과시욕이나 승벽이 심하고 속이 좁았지만 그리 악한 인물은 아니었다. 이이처럼 뛰어난 통찰력을 가진 사람이 이를 몰랐을 리 없다. 그는 선조가 ‘군자도 사귀기 어려우나’ 소인들에게 휘둘릴 정도로 아둔하거나 악하다고는 보지 않았다. 그래서 선조가 나라가 망하는 걸 두 손 놓고 지켜볼지언정 이전의 왕들처럼 신하들에게 휘둘려 사화를 일으키는 일은 없을 것이라 단언하기도 했다. 어쨌든 선조는 적어도 폭군은 아니었으므로 이이는 그를 비판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179쪽

이이의 사회생활을 들여다보면 그가 아주 빈번하게 조정을 들락날락거렸음을 알 수 있다. 이황이 사망한 뒤에 은거한 2년 6개월과 선조의 비난에 충격을 받고 낙향해 은거한 5년 여의 기간을 제외하더라도 그는 틈만 나면 병을 비롯해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낙향했다. 그리고 선조가 자신에게 벼슬을 내릴 때마다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고 사직을 요청했다. 그런데 이이의 사직 요청은 단지 의례적으로 사양하는 수준을 넘어섰다. 만일 선조가 이이의 사직 요청을 모두 받아줬다면 그는 거의 평생을 은둔자로 살았을 것이다.
이이의 반복되는 진퇴는 당연히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졌다. 자신을 심하게 비판하는 데다 관직을 거부하고 자꾸 낙향하려 하자 선조는 이이가 왕을 섬기려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이이의 이런 모습은 다른 동료 신하들에게도 좋게 비치지 않았기에 그것은 그에 대한 신뢰를 깎아먹는 원인이 되었다.
이이는 왜 나쁜 결과를 초래할 것이 예견되는데도 진퇴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을까? 여기에는 크게 보아 두 가지 원인이 있다.
-183쪽

첫째, 이이의 사회불안 때문이다. 이이는 선조를 볼 때마다 뜻을 세우지 않고 세월만 축내다 간 아버지가 되살아났고 그것은 이이의 사회불안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만약 선조가 이이의 충고를 받아들여 훌륭한 군주로 거듭났다면 이이의 사회불안은 치유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 이원수에게 그랬듯이 선조에 대한 충고도 거대한 벽에 가로막혀 번번이 좌절되었다. 선조는 아버지 이원수보다 한 술 더 뜨는 인물이어서 이이를 비난하고 조롱하기도 했다. 선조와 갈등을 겪을 때마다 고개를 뻣뻣이 쳐들던 극심한 사회불안과 좌절감은 이이에게서 사회와 맞서 싸울 용기를 송두리째 뺐어갔다. 이런 이이의 심리상태는 후퇴를 선택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을 것이다.

-184쪽

둘째, 무의식에 각인된 이원수-신사임당의 관계 때문이다. 신사임당은 이원수에게 충고와 비판을 하다가 그것이 도무지 통하지 않으면 마음을 가라앉힐 때까지 한동안 냉전상태를 유지하며 거리를 두고 지내는 책략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녀가 남편과의 불화로 금강산에 들어갔다 돌아온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이도 선조에게 충고와 비판을 하다가 그것이 도무지 통하지 않으면 후퇴하여 마음을 정리한 다음에 다시 달려드는 패턴을 반복한 것이다.
그러나 부부관계에서는 이런 진퇴를 거듭하는 책략을 사용해도 그다지 문제될 것이 없지만 그것을 사회생활에서까지 사용하는 것은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185쪽

타인의 마음을 잘 배려하지 못한다고 볼 수 있는 이이의 용맹한 비판은 분명 긍정적인 점도 있었으나 그의 사회생활을 방해하는 주요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모름지기 선조를 비롯한 신하들은 이이를 상당히 어려워하고 그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졌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193쪽

사고형(T)은 타인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고 사리에 맞는 말을 직설적으로 하는 경향이 강해서 남들한테 차갑고 냉정하다는 인상을 주는 편이다. 물론 건강한 사고형은 감수성이 풍부하고 공감능력도 있지만, 다른 변수와 결합될 경우에는 본래의 특성을 확연히 드러낼 수밖에 없다. 아버지에 대한 분노감정과 남자들에 대한 어머니의 거침없는 비평을 들으며 자란 사고형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이이는 타인에 대한 비판을 주저하지 않음으로써 남자들 사이에서 고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194쪽

이이가 성인(聖人)에 가까운 인물이고 대학자라는 것은 확실하나 그는 노련한 정치가는 될 수 없었다. 이런 점에서 정치가로서의 이이는 마음 속 깊이 존경하면서도 지나치게 과격하다고 비판한 조광조를 넘어설 수 없었다. 어쩌면 사회불안이 심한 이이는 개혁정치가 조광조가 왕의 신임을 잃었기에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 때문에 선조에게 더욱 집착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록 왕의 신임을 받더라도 개혁세력을 육성하지 못한다면 한 사람의 힘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196쪽

이이는 화목한 대가정이라는 자신의 무의식적 소망이 개인의 범위를 넘어서 사회적으로 승화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200쪽

이미 세상은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나빠져 있다는 선조의 넋두리에 대해 이이는 "그 자리에 맞는 임금이 있고 그 자리에 맞는 재상이 있으면, 이는 회복할 수 있는 때입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또 말했다. "진실로 그 일을 하면 반드시 그 공이 있으니, 일을 하는 데도 공이 없는 경우는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아직 못 보았습니다." 두 손 놓고 비관에 빠지기 전에 이이의 간곡한 호소에 귀를 기울여 보자.
"하나의 옳지 않은 일을 해서 천하를 얻더라도 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서 온 세상을 얻더라도 이를 해서는 안 된다."는 맹자의 가르침을 한 치도 어기지 않으며 살았던 이이가 참으로 그리워진다.
-2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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