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구판절판


모든 사랑은 오해다. 그를 사랑한다는 오해, 그는 이렇게 다르다는 오해, 그녀는 이런 여자란 오해, 그에겐 내가 전부란 오해, 그의 모든 걸 이해한다는 오해, 그녀가 더없이 아름답다는 오해, 그는 결코 변하지 않을 거란 오해, 그에게 내가 필요할 거란 오해, 그가 지금 외로울 거란 오해, 그런 그녀를 영원히 사랑할 거라는 오해... 그런 사실을 모른 채

사랑을 이룬 이들은 어쨌든 서로를 좋은 쪽으로 이해한 사람들이라고, 스무 살의 나는 생각했었다. 결국 내게 주어진 행운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 서로의 이해가, 오해였음을 깨닫지 않아도 좋았다는 것... 해서 고스란히 서로가 이해한 서로를 영원히 간직할 수 있었다는 것... 아무런 내색 없이, 마음 놓고 그녀가 울 수 있도록 나는 스스로의 마음을 그녀의 눈물 밑에 펼쳐 주었다. 따뜻한 벽난로를 등지고서도, 해서 내 마음은 한 장의 손수건처럼 자꾸만 젖어들었다. 젖고, 젖었으며... 내가 젖을수록 조금씩

말라가는 그녀의 눈물을 느낄 수 있었다.
-15쪽

가능하다면 말이야... 언젠가 함께 저곳에 가보자구. 가능성이 전혀 없는 얘기를 잘도, 진지하게 그녀에게 건넸었다. 융프라우를요? 다보탑으로부터 그런 얘길 건네들은 석가탑처럼, 그녀는 표정 없이 커피 잔의 손잡이를 매만지기만 했다. 분명 우리보다는 탑들이 알프스에 오를 확률이 높을 정도로 우리는 가난했었다. 하지만 그 순간 누구도 그것을 농담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는 스무 살이었고, 이끼가 낀 탑보다는 확실히 푸른 인생의 가능성을 보유하고 있었다.
-20쪽

선빵을 맞아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떠오르는 달과 별이 주먹이 주는 선물임을... 그리고 어떤, 방어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특히 눈을 맞으면 그랬다. 말하자면 눈을 통해, 아버지를 처음 본 순간의 어머니도 그런 상태였을 거라 나는 짐작해 보았다. 알겠니? 아버지는 얘기했다. 절대 단련할 수 없는 급소가 몇 군데 있어. 그중 하나가 눈이야! 그중 하나가

눈이라고, 음악이 끝날 무렵 나는 다시 중얼거렸다. 이것은 너무나 불공평한 시합이다 첫눈에 누군가의 노예가 되고, 첫인상으로 대부분의 시합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 외모에 관한 한, 그리고 누구도 자신을 방어하거나 지킬 수 없다. 선빵을 날리는 인간은 태어날 때 정해져 있고, 그 외의 인간에겐 기회가 없다. 어떤 비겁한 싸움보다도 이것은 불공평하다고 나는 생각했었다.
-71쪽

결국 이 세상은 눈가림이야. 눈만 가려주면... 또 눈만 만족시켜 주면 지옥 끝까지라도 달려갈 바보들이지. 세상을 망치는 게 독재자들인 줄 알아? 아냐, 바로 저 넘쳐나는 바보들이야. 독재를 하건 누굴 죽였건... 여당이 돼야 이곳이 삽니다, 제가 나서야 집값이 오릅니다 하면 찍어주는 바보들 때문이지. 세상은 잘 살겠다고, 더 잘 살겠다고 하는 놈들 때문에 망하는 거야.
-155쪽

인간은 대부분 자기(自己)와, 자신(自身)일 뿐이니까. 그래서 이익과 건강이 최고인 거야. 하지만 좀처럼 자아(自我)는 가지려 들지 않아. 그렇게 견고한 자기, 자신을 가지고서도 늘 남과 비교를 하는 이유는 자아가 없기 때문이지. 그래서 끝없이 가지려 드는 거야. 끝없이 오래 살려 하고... 그래서 끝끝내 행복할 수 없는 거지.
-156쪽

찢어지게 가난한 인간의 방에 엠파이어스테이트나 록펠러의 사진이 붙어 있다면 다들 피식하기 마련이야. 하지만 비키니니 금발이니 미녀의 사진이 붙어 있다면 다들 그러려니 하지 않겠어? 즉 외모는 돈보다 더 절대적이야. 인간에게, 또 인간이 만든 이 보잘것없는 세상에서 말이야. 아름다움과 추함의 차이는 그만큼 커, 왠지 알아? 아름다움이 그만큼 대단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그만큼 보잘것없기 때문이야. 보잘것없는 인간이므로 보이는 것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거야. 보잘것없는 인간일수록 보이기 위해, 보여지기 위해 세상을 사는 거라구.
-219쪽

인간은 아름다운 얼굴을 사랑합니다. 신께선 모두를 사랑하신다 하지만, 그 말을 전하는 인간은 결코 모두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아닙니다, 분명 그런 사람도 세상 어딘 가엔 존재하고 있겠지요. 하지만 적어도, 제가 아는 인간이란 그런 존재들입니다.
-276쪽

웃지 마, 웃으면 더 이상해. 면전에서 그런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런 말을 듣고 나면 누구라도 웃을 수 없을 거라 저는 생각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웃을 수 있겠어요?
-279쪽

말하자면 저는, 세상 모든 여자들과 달리 자신의 어두운 면만을 내보이며 돌고 있는 ‘달’입니다. 스스로를 돌려 밝은 면을 내보이고 싶어도... 돌지 마, 돌면 더 이상해...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는 달인 것입니다. 감춰진 스스로의 뒷면에 어떤 교양과 노력을 쌓아둔다 해도... 눈에 보이지 않는 달인 것입니다. 우주의 어둠에 묻힌 채 누구도 와주거나 발견하지 못할... 붙잡아주는 인력이 없는 데도 그저 갈 곳이 없어 궤도를 돌고 있던 달이었습니다. 그곳은 춥고, 어두웠습니다.
-283쪽

그렇습니다. 그 전까지... 저는 한 번도 뜨거운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습니다. 눈물은 더없이 차가운 것이었고, 그때의 제 마음도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알 수 있었습니다. 냉대를 받은 인간의 마음은 차가운 눈물을 흘린다는 사실을... 관심과... 사랑을 받은 인간의 마음만이 더없이 뜨거운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말하자면 당신은 한 여자의 체온을 바꿔주었고, 한 여자를 둘러싼 세상의 기후를 바꾸어주었습니다.
-285쪽

미녀를 바라보는 세상의 남자들은

마치 킹콩과 같은 존재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시키지 않아도 엠파이어스테이트를 오르고, 가질 수 없어도 자신의 전부를 바친다. 자신의 동공에 새겨진 한 사람의 미녀를 찾아 쿵쾅대며 온 도시를 뛰어다닌다. 어떤 악의도 없지만 그 발길에 무수한, 평범한 여자들이 상처를 입거나 밟혀 죽는다. 실제의 삶도 다를 바 없다. 빌딩을 오르고 떨어져 죽는다 한들, 미녀가 어깨를 기대는 남자는 따로 정해져 있다. 그것이 인간이 만든 세상이다. 전기와, 전파와, 원자력을 사용한다는... 게다가 민주주의라는... 인간의 세상인 것이다.
-306쪽

마침 <중산층>이란 단어가 한창 사회의 이슈가 되던 무렵이었고... 이 정도는 몰아야... 이 정도는 벌어야... 결국 이 정도는 살아야-사는 구나, 소리를 듣는 세상이었다. 평균을 올리는 것은 누구인가. 그것을 부추기는 것은 누구이며, 그로 인해 힘들어지는 것은 누구인가... 또 그로 인해... 이익을 보는 것은 누구인가, 나는 생각했었다. 자본주의의 바퀴는 부끄러움이고, 자본주의의 동력은 부러움이었다. 닮으려 애를 쓰고 갖추려 기를 쓰는 여자애들을 보며 게다가 이것은 자가발전이다, 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부끄러움과 부러움이 있는 한

인간은 결코

자본주의의 굴레를 빠져나가지 못한다.
-307쪽

누군가의 외모를 폄하하는 순간, 그 자신도 더 힘든 세상을 살아야 한다. 그렇게 예쁜가? 그렇게 예뻐질 자신이... 있는 걸까? 누군가의 학력을 무시하는 순간, 무시한 자의 자녀에게도 더 높은 학력을 요구하는 세상이 주어진다. 아, 그렇겠지... 당신을 닮아, 당신의 아들딸도 공부가 즐겁겠지 나는 생각했었다. 사는 게 별건가 하는 순간 삶은 사라지는 것이고, 다들 이렇게 살잖아 하는 순간 모두가 그렇게 살아야 할 세상이 펼쳐진다. 노예란 누구인가? 무언가에 붙들려 평생을 일하고 일해야 하는 인간이다.
-310쪽

미녀가 싫다기보다는

미녀에게 주어지는 세상의 관대함에 나는 왠지 모를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뭐랄까, 그것은 부자에게 주어지는 세상의 관대함과도 일맥상통한 것이란 기분이 들어서였다. 관대함을 베푸는 것은 누구인가, 또 그로 인해 가혹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누구인가... 나는 생각했었다. 나 역시 무작정 그들에게 관대했던 인간이었고, 그로 인해 가혹한 삶의 조건을 갖추어야 할 인간이었다.
-315쪽

부탁이야... 같이 가지 않겠어? 라고 요한이 물었다.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은 채, 그녀는 텅 빈 시선으로 창밖을 응시할 뿐이었다. 식탁 위의 잔은 모두 비었고, 평소보다 더딘 걸음으로 창밖의 어둠속을 밤이 서성이고 있었다.
-398쪽

부와 아름다움에 강력한 힘을 부여해 준 것은 바로 그렇지 못한 절대 다수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는 끝없이 욕망하고 부러워해왔습니다. 이유는 그것이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뭐래도 그것은 좋은 것입니다. 누가 뭐래도 우리는 그런 세상을 살고 있으며, 누가 뭐래도 그것은 불편의 진리입니다. 불변의 진리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시시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물론 그것은 <좋은 것>이지만, 그것만으론 <시시해>. 그것만으로도 좋았다니 그야말로 시시한 걸. 이 시시한 세계를 시시하게 볼 수 있는 네오 아담과 네오 이브를 저는 만들고 싶었습니다. 두려울 것은 없습니다. 가능성의 열쇠도 실은 우리가 쥐고 있습니다. 왜?

바로 우리가 절대다수이기 때문입니다.
-416쪽

우리는 진화의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재능은 자기 자신, 즉 자기의 힘을 믿는 것이라 고리끼는 말했습니다. 굳이 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인간은 그런 재능을, 힘을 지닌 존재라 저는 믿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개인처럼, 이제 인류도 스스로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할 때입니다. 이 진화의 계단을 밟고 올라서며 저는 아름다움에 대해, 눈에만 보이는 이 아름다움의 시시함에 대해 말하고 싶었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책임져야 할 인간의 얼굴에 대해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손에 들려진 유일한 열쇠는 <사랑>입니다. 어떤 독재자보다도, 권력을 쥔 그 누구보다도... 어떤 이데올로기보다도 강한 것은 서로를 사랑하는 두 사람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417쪽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더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부러워하지 않는
당신 <자신>의 얼굴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저는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운 얼굴이라고 생각합니다.
-4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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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09-08-03 0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해 주셔서 목록에 추가했어요. ㅋㅋㅋ
글들이 마음에 들어요. ^^

마노아 2009-08-03 11:22   좋아요 0 | URL
헤헷, 추천 목록이 빠방해지니까 왠지 배가 부른 거 있죠.^^

꿈꾸는섬 2009-08-03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박민규...얼른 읽고 싶어요. 저도 장바구니에 담아요.

마노아 2009-08-03 11:22   좋아요 0 | URL
이 작가 너무 좋아요. 꺄우~!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연극 '완득이'를 관람했던 공연장은 무대 오른쪽에도 좌석이 있어서 90도 각도로 앉은 관객을 볼 수 있었다. 한 여성 관객의 옆 얼굴을 보았는데 '손담비'라 착각할 정도의 빛나는 외모였다. 어찌나 눈이 부시던지 한참을 연극 대신 그 사람의 얼굴을 보며 부러워 했다. 연예인이 예쁜 건 연예인이어서라고 납득하고 넘어가지만, 일반 대중이 그렇게 예쁘면 배가 아파지는 것이다. 뭘 먹고 저렇게 예쁠까? 하며... 어쩌다가 그 관객이 고개를 틀었고, 그 바람에 정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실망과 안도를 동시에 느꼈다. 정면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인공의 기운이 확 끼치면서 어색한 부조화가 깔렸던 것이다. 아, 얼굴에 손을 댔구나... 다시금 연극에 눈길을 돌리면서 나도 참... 했었다.  

많은 소설과 만화와 드라마와 영화에선 멋진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들은 가난하거나 신분이 낮거나 아니면 원수 집안이라는 등 서로의 사랑을 방해하는 조건들을 두루 갖추고 등장하지만, 어쨌든 선남선녀였다. 설령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에 비해 못 미치는 외모라는 '설정'은 갖고 있어도 실제로 별로 안 이쁜 주인공을 내세우는 경우를 본 일이 없다. 시청률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보통 대중의 속성이 '예쁜', 혹은 '아름다운' 그녀를 원하기 때문이다.(당연히 아름다운 '그'도 원한다.) 

그렇기에, 이 책은 아마도 잘 생긴 남자주인공과 지나치게 못 생긴 여주인공을 내세운 첫번째 소설이 아닐까 싶다. 그것도 그냥 못 생긴 게 아닌 '얼어붙을 만큼'의 못 생긴 여자 주인공 말이다.  

사람들은 우스개 소리로도 말을 한다. 못 생긴 여자가 잘 생긴 남자와 연애를 한다면 그 여자가 돈이 많은 걸 거라고. 이러저러한 이유를 다 대서라도, 못 생긴 그녀가 연애를 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하려 든다. 예쁜 그녀가 연애하는 건 아무도 의아해하지 않으면서.  

그러니, 이 소설 속의 잘 생긴 남자주인공이 어떻게 못 생긴 그녀를 사랑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궁금해 할 것이다. 그녀는 가난했다. 여상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번번이 면접에서 탈락되어질 외모였고, 정규직으로 입사한 백화점에서 점차 사람이 아닌 화물을 상대하는 직종으로 좌천되고 미끄러지던 입장이었다. 남달리 착하거나 인류 구원의 상징이 될 만큼 정의로운 인물이었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굳이 설명하자면, 이 남자 주인공에게 상처가 있었다. 예쁘고 잘났던 무명의 배우였던 아버지가 어느 날 뜨기 시작하면서 지금껏 기생해왔던 튼튼하고 못생긴 엄마와 자기를 버리고 딴 살림을 차렸으니까. 적어도 그는 미모를 무기로 사람을 짓밟고 이용하고 또 홀리는 것에 대한 혐오를 알고 있는 사람이기는 했다. 그래도, 그게 다는 아니었다. 정말로 그는, 그녀를 사랑했다.  

작품은 독특한 구조를 취한다. 스무 살의 그가 스무 살의 그녀와 해후하던 어느 겨울 밤의 카페에서 시작되고, 그 날의 이별 후 찾지 못한 그녀를 십 여년 세월 지나서 다시 찾아 헤매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다시 처음 만났던 열 아홉의 그 때로 돌아가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재수를 하면서 백화점에서 주차 안내요원으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거기서 독특한 사내 요한을 만나고 또 그녀를 만났다. 진심으로 마음에 들어했다는 것을 그녀가 믿기까지는 꽤 오랜 진통이 필요했다. 그러기에는 그녀의 상처는 만만치 않았으니까. 그래서 요한의 짧은 귓속말이 인상적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 하지만 쟤는 
진심(眞心)이야. 

그렇게 몇 번이 확인이 필요할 만큼, 누군가 자신을 사랑해 주는 일을 믿을 수 없고 납득할 수 없는 그녀의 신산한 삶은, 다가온 사랑을 두고서 떠나는 행로를 취하게 만든다.  

안타깝지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강풀 작가의 '그대를 사랑합니다'에서 송이뿐 할머니가 생애 끄트머리에 찾아온 소중한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할아버지의 곁을 떠나는 마음에 견줄 수 있겠다. 그렇다면 여기서 끝인가? 그럴리가... 

없다. 

작가 특유의 줄바꾸기 신공을 따라해 보았다. 쉽게 읽혀서 빨리 빨리 넘어가게 하는 책장이 있는 반면, 박민규 작가의 문장은 한 줄 한 줄 천천히 따라가며 입속의 울림을 되새김하게 만든다. 그 호흡을 놓치면 문장의 참맛을 읽기 어렵다. 그 호흡 그대로. 그 느낌 그대로 따라가야 한다. 

작품의 엔딩은 놀라운 구조를 취하고 있다. 두 개의 결말은 세 개의 결말로도 읽히고, 그 이상의 상상의 여지를 남긴다. 뿐아니라 그보다 진한 여운을 남긴다. 촉촉하게 눈도 젖고 마음도 젖게 해주는 작가의 고마운 선물.  

작가는 외모 지상주의가, 물질 만능주의가 얼마나 사람을 피폐하게 만들고, 모두의 불행을 가져오는 지를 소설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설명했다. 그것들을 함께 지적해왔던 우리들이 사실은 제일 먼저 그렇게 살아왔다는 부끄러움도 함께 안겨주었다. 동시에, 그것을 떨쳐낼 수 있는 힘도 절대 다수인 우리에게 있다는 진실도 함께. 작가의 표현을 빌자면 이렇다.  

   
 

부와 아름다움에 강력한 힘을 부여해 준 것은 바로 그렇지 못한 절대 다수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는 끝없이 욕망하고 부러워해왔습니다. 이유는 그것이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뭐래도 그것은 좋은 것입니다. 누가 뭐래도 우리는 그런 세상을 살고 있으며, 누가 뭐래도 그것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불변의 진리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시시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물론 그것은 <좋은 것>이지만, 그것만으론 <시시해>. 그것만으로도 좋았다니 그야말로 시시한 걸. 이 시시한 세계를 시시하게 볼 수 있는 네오 아담과 네오 이브를 저는 만들고 싶었습니다. 두려울 것은 없습니다. 가능성의 열쇠도 실은 우리가 쥐고 있습니다. 왜?


바로 우리가 절대다수이기 때문입니다. (416쪽)

 
   

책 속에는 CD가 한 장 들어 있다. 네 곡의 노래가 담겨 있다. 이 작품을 위해서 만들어진 곡이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들었지만, 아쉽게도 내가 원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지금 듣고 있는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더 마음에 와 닿는다. 벨라스케스의 그림도 다시 쳐다보게 된다. 왕녀 마르가리타가 아니라, 그 옆에 서 있는 작고 예쁘지 않은 그녀에게 시선이 간다. 아마도, 앞으로도 쭈욱 그럴 것이다. 이 그림에서 파생된 라벨의 곡도 더 특별해질 것이다. 책의 구성과 느낌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음악의 제목이 이 소설의 제목에 꼭 맞는 까닭을 결말까지 다 읽고서야 이해했다. 아, 박민규 작가가 너무 대단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작가의 전작들도 사랑해 왔다. 그의 작품에선 자본주의의를 비판하는 서늘함을 촌철살인의 유머와 함께 만날 수 있었다. 그는 가지지 못한 자들을, 낮은 곳에 위치한 사람들의 입장을 품어주는 따뜻한 속내를 보여주는 작가였다. 그리고 이젠 절절한 '사랑'을 얘기하면서 삶을, 세상을, 인간을 노래한다. 가장 좋아하는 한국 작가가 누구냐고 물으면 이제는 주저 없이 '박민규'라고 말하겠다. 여전히 김훈의 문장을 사랑하지만, 그래도 박민규의 따스함을 더 사랑하노라고. 

부끄러워하지 않고, 부러워하지 않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 그 사람들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보다 아름다운 세상을 이제 함께 꿈꾸어보련다. 자기만 있고, 자신만 알고, 자아는 모르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끝끝내 행복해질 수 없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더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부러워하지 않는

당신 <자신>의 얼굴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저는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운 얼굴이라고 생각합니다. (4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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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09-08-03 0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글이 마음에 와 닿아요.^^

마노아 2009-08-03 11:22   좋아요 0 | URL
작가님은 분명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을 믿는 분이라고 믿어요.^^

바이런 2009-08-03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부터 정말 좋은리뷰 잘 읽고가요. 끝까지 읽는데 어느새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저도 이 책 꼭 읽어봐야겠어T_T

마노아 2009-08-03 11:23   좋아요 0 | URL
칭찬 감사해요. 좋은 책은 널리널리 소문내야죠.^^

라로 2009-08-03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아름다운 리뷰에요,,,,,,,,,박민규의 책인가봐요,,,제목이 엄청 특이하네요,,,,
그런데 책이 무척 두꺼운?????정말 마노아님의 독서력에 입이 딱 벌어진다는~.와

마노아 2009-08-03 12:32   좋아요 0 | URL
앗, 저는 방금 나비님 서재에 다녀왔는데 찌찌뽕이에요!
제목이 독특하지요? 인터넷 연재로 안 보고 기다린 보람이 있어요.
책이 419페이진가 그래요. 몇 시간 동안 주구장창 읽었는데 지치지도 않을 만큼 재밌었어요. 으하핫^^

글샘 2009-08-03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박민규가 다시 삼미슈퍼스타즈 수준으로 컴백한 모양이군요. ^^

마노아 2009-08-04 00:07   좋아요 0 | URL
삼미만큼 유쾌 상쾌 발랄하진 않지만 곱씹어볼 대목들이 많았어요. 이런 글도 쓰는구나...했죠.^^

kleinsusun 2009-08-10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Thanks to를 꾸~욱 누르고 가요.^^

마노아 2009-08-11 01:5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클라인수선님^^
오늘 이 책을 소중한 이에게 빌려주고 왔어요. 땡스 투 감사해요~
 

밀리지 않고 여유롭게 읽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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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추억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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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식 대장 냠냠이- 잔소리 없이 편식 습관 고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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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09-08-02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표지가 너무 아름다워요~~
이 책도 시리즈로 나오는건가요?^^

마노아 2009-08-02 14:32   좋아요 0 | URL
단편집 시리즈 중 한 권이에요. 이 책 안의 내용들은 저마다 연결이 되어 있는데 다른 권으로 넘어가면 아마 서로 다른 이야기일 거예요.. 이마 이치코는 글도 그림도 참 수작이에요.^^
 
도적의 물병
이마 이치코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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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귀한 사람들의 물을 찾아가는 네 가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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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커, 학교 가기 싫을 때 쓰는 카드 - 2단계 문지아이들 8
수지 모건스턴 지음, 김예령 옮김, 미레유 달랑세 그림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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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은 아무리 지루해도 개학보다 좋았는데, 이 책 속의 아이들은 방학을 어서 끝내고 학교에 오고 싶어하는 아이들이었다. 새 학년이 시작되었고, 초등학교 마지막 학년이어서 더 기대에 차 있었다. 그런데 새로 부임해 오신 할아버지 선생님은 아이들을 실망시켰다. 젊고 건강한 선생님을 기대했던 아이들로서는 성에 차지 않았던 것이다. 새로 오신 노엘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선물 꾸러미를 안겨주셨다. 선물 속에서 나온 것은 갖가지 카드들. 



잠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지 않을 때 쓰는 조커, 학교에 가고 싶지 않을 때 쓰는 조커, 지각하고 싶을 때 쓰는 조커 등등등. 

선생님은 장난으로 이것들을 주신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다. 이 낯설고 독특한, 황당하기까지 한 선생님을 아이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하기만 하다. 카드를 좀 더 보자. 



어려서부터 산타클로스라고 불렸다는 노엘 선생님은 제시하는 모든 것을 '선물'로 둔갑시키는 재주도 갖고 계셨다. 학과 수업 선물, 책선물, 기술 선물, 동사 변화법 선물, 수학선물, 과학선물... 

아이들은 놀랐지만 적응도 빠르고 호기심도 풍부하다. 당장 카드를 제시하며 노래도 불러보고 춤도 춰보는 아이들. 선생님은 수업을 하다가도 그 카드에 맞춰 춤을 배우는 시간, 노래 부르는 시간으로 변신완료 뚝딱 하신다.  

이제 아이들이 선생님께 푹 빠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학교의 교장 선생님은 근엄, 엄숙, 히스테릭!이라고 얼굴에 쓰여 있는 여자 선생님. 이런 선생님을 소화시킬 리가 없다.  

이 책이 외국 작가의 책인지라, 혹 노엘 선생님과 비슷한 마인드를 가진 교장선생님이 등장하거나, 그렇게 바뀌어 가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그렇게는 되지 않았다. 조금 아쉽고, 또 그건 현실적이란 기분은 든다.  

비록 교장 선생님은 조커를 이용해서 더 즐겁고 재밌게, 효과적으로 수업과 교육이 이뤄질 수 있다는 데에 결코 공감하지도 동의하지도 않았지만 아이들의 적응력과 응용력은 훌륭했다. 교장샘께 혼이 나서 돌아온 노엘 선생님을 위로하느라 뽀뽀를 해주고 싶을 때 쓰는 조커를 다 함께 내미는 사랑스러운 아이들.  

새로운 조커를 만들자고 제의했을 때 학생에게서 나온 아이디어는 이렇다. 



'자신을 기쁘게 하고 싶을 때 쓰는 조커'가 눈에 띈다. 설탕이 잔뜩 들어간 달콤한 커피 한 잔을 망설이지 않고 마실 수 있는 것도 여기에 속할 수 있겠지?  

'조커'는 원래 위기에 빠졌을 때 그 순간을 모면시켜주는 기회를 주는 카드다. 아이들이 처음에는 숙제 하기 싫고 공부하기 싫고 학교 가기 싫을 때 이 카드를 썼지만, 점차 서로를 더 가깝게, 따뜻하게 묶어주는 데에 쓰여졌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선생님은 학교와 집에서 아이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선물'로 '기회'로 바꿔주는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내신 것이다. 비록 아이들과 끝까지 함께 계셔주시진 못했지만 이제는 아이들도 선생님께 '선물'이 되어 있기 때문에 노엘 선생님은 행복하고 영예로운 은퇴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읽고 싶은 박민규의 신작을 펼쳐들 수 있는 조커를 꺼내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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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09-08-01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갖고 싶어요. 현준이 현수에겐 미안하지만 하루정도 떨어져서 자유롭게 지낼 수 있는 조커가 필요해요.^^

마노아 2009-08-02 00:49   좋아요 0 | URL
아, 공감할 수 있어요!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할 자유가 절실히 필요하지요..(>_<)

순오기 2009-08-02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처음 보고 우와와~ 했었죠. 오래돼서 잊고 있었는데 다시 봐야겠어요.
나는 지금 가족을 팽개쳐(?^^)두고 완벽한 휴가를 즐기고 있어요.
강연 끝나고 엄마집에 갔다가 어제는 형제들과 모여 저녁 먹고, 엄마랑 같이 우리고향 당진 언니집으로 왔어요.
사진을 올릴 수 없어 '한비야 후기'는 못 쓰지만 컴터 접속만으로도 행복하죠.ㅋㅋ
이런 조커라면 어떤 것에도 뒤지지 않는 완벽한 조커겠죠?^^

마노아 2009-08-02 14:33   좋아요 0 | URL
완벽한 휴가 근사해요. 질적으로 너무 훌륭한 거 있죠. 오늘 돌아가시니 양적으로는 좀 부족해 보여요.^^
나름의 완벽한 조커를 사용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