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제434호 2016.01.09
시사IN 편집부 엮음 / 참언론(잡지)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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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얇은데 이렇게 심도 깊은 기사로 충만할 수가 있나. 미용실에 가서도 잡지를 보지 않는데, 광고가 대부분이고 가십성 기사가 너무 많은 잡지가 흥미를 끌지 못하기 때문이다.(잡지는 오로지 사은품에만 관심을...ㆀ)

그런데 시사인은 밀도가 매우 높아서 보통의 인문학 서적을 읽을 때만큼의 집중력을 요했다. 심지어 공부하는 기분으로 읽어야 해서 잡다한 음악 같은 것은 꺼야 했다. 


표지를 장식한 소녀상의 처연한 표정 덕분인지, 김형민 피디의 딸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가 더 깊게 다가왔다. 내가 줄 그은 부분만 옮겨오면 이렇다.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군인은 한순간의 즐거움에 목숨을 거는 짐승이 되기 마련이야. 전쟁을 벌이는 지도부(라고 쓰고 윗대가리라고 읽어라)는 자신의 명령에 따라 기꺼이 죽어가야 하는 병사의 동물적 본능을 충족시킬 방도를 찾기 위해 분주했고 무슨 비인간적인 상황이 빚어지든 상관하지 않았지.

태평양전쟁이 벌어지고 미국이 참전을 선언하자 징집에 응한 신병들이 떼로 몰려들었어. 대규모 훈련소가 설치되고 그 인근에는 어김없이 ‘군대에 필요한’ 여자들이 몰려들었지. ‘점잖은’ 시민들이 이에 항의하자 미군 장교가 했다는 말은 전쟁의 단면을 마치 수박 속 보듯 드러내준단다. “안 그러면 여러분의 딸들이 다친단 말입니다.”

... 

1922년생 김학순 할머니라는 분이 계셨어. 그분은 독립운동을 하던 아버지를 여읜 후 어렵게 살다가 1939년 양아버지에 의해 일본군에 넘겨졌고 ‘위안부’ 생활을 하게 돼.

... 

소녀상은 전쟁에 내몰려 원치 않는 삶을 살아야 했던 그 모두의 기억과 눈물과 아픔의 상징이야.


김학순 할머니가 독립운동가의 자녀분인 것은 처음 알았다. 평범한 아버지의 딸이라고 덜 아플 리 없지만 기가 막힌 것은 사실이다. 지난 주에 '귀향' 시사회를 다녀와서 더 먹먹해진다. 영화 개봉은 아직 한달이 더 남았는데 꼭꼭 많은 분들이 찾아주셨으면!


파리협정에 관한 기사도 꽤 집중해서 읽었다. 도쿄의정서를 대체할 새 기후변화협약도 궁금했고, 선진국이 앞서서 망가뜨린 지구 환경에 대해서 똑같이 책임을 져야 하는 개도국들의 반발을 어떤 방향으로 끌어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눈길이 갔다. 


미국은 2001년 교토의정서 탈퇴를 선언했다. 미국의 도덕적 지도력에는 손상이 갔지만, 그게 다였다. 국제법 원칙으로 보면 조약의 가입과 탈퇴는 국가의 자유다.

 ...

2100년이 되기까지 기온 상승 폭을 적어도 2도 이내로 억제해야 한다는 과학계의 경고가 빗발치고 있었다. 이 기준을 맞추려면 2100년까지 탄소배출량을 275기가톤(Gt)으로 억제해야 한다. 현재 추세가 바뀌지 않는다면 2100년은커녕 앞으로 30년 안에 도달하는 수치다.

 ...

미국의 저널리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책 <코드 그린>에서 자신이 중국에서 겪었던 일화를 썼다. 프리드먼은 2007년 중국의 ‘그린 카 대회’에서 연설하기로 했다. 그는 중국의 산업 엘리트들이 환경 이슈만 나오면 ‘역사적인 책임’ 문제로 미국을 공격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프리드먼은 이렇게 연설한다. “저는 오늘 여러분이 옳다는 말을 하러 왔습니다. 여러분 차례가 맞습니다. 마음껏 환경을 파괴하세요! 중국이 오염으로 숨 막혀 죽는 걸 막는 데 필요한 모든 청정에너지와 에너지 효율 도구를 우리가 발명해 여러분에게 파는데 5년이면 족할 겁니다. 그쪽 산업에서는 우리가 여러분을 완전히 지배하게 되겠지요. 그러니 서두르지 말아주세요!

이 연설은 기후변화 이슈의 패러다임 변화를 포착한다. 탄소 감축 이슈는 거대한 새 시장을 창출할 것이고, 늦게 참가할수록 손해가 될 것이다. 이런 세계에서는 누가 더 의무를 지느냐로 다툴 이유가 없다.

 ...

청정 개발 메커니즘(CDM:선진국이 개도국에 기술과 자본을 투자해 온실가스를 줄이면 그를 선진국의 감축량으로 인정해주는 제도)

 ...

화석연료는 결국 고갈된다. 중동 산유국이 돈은 정말 많은데, 미래 먹을 거리가 있어야 한다. 글로벌 저탄소 시장이 형성될 때 선제 투자를 하면 중동의 미래 전략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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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폰은 프레온 가스의 오존층 파괴 문제가 불거지자 대체물질 개발에 돌입했고, 몬트리올의정서 채택 시점에는 개발 직전 단계까지 와 있었다. 프레온 가스 사용을 규제하면 듀폰은 시장을 잃기는커녕 오히려 새 시장이 열릴 참이었다. 환경과 산업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몬트리올의정서는 성공적으로 작동했고, 국제 환경협력 사례로 손에 꼽힌다.

 ...

파리협정의 핵심 방향성은 탄소 감축에 인센티브를 주는 것이고, 바꿔 말하면 시장 메커니즘을 전면 도입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탄소 배출이 지금보다 비싸지게 만들고, 저탄소 에너지 사용이 화석연료보다 유리하도록 만들어줘야 한다.

 ...

파리협정은 2020년까지 연간 1000억 달러 규모의 기금을 모으기로 했는데, 기후변화로 피해를 입은 개발도상국 지원과 저탄소 에너지 기술의 초기 투자비용으로 들어가게 된다.

 ...

파리협정의 핵심 전략은 탄소 감축이 의무가 아니라 기회가 되는 세상을 디자인하자는 것이다. 


‘행복한 교육’을 입에 달고 사는 어떤 나라- 기사는 부러움과 안타까움이 크게 교차했다. 

 

핀란드 헬싱키 외곽의 어느 학교를 방문했을 때다. 11학년(고2) 교실의 영어수업을 지켜보았다. 평이한 수업인데도 학생들의 집중력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수업을 참관하다가 교사의 양해를 구하고 물었다. 학교에 오는 것, 공부하는 것이 즐겁고 행복하냐고, 그런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놀랍게도 30명 정도의 반 학생 전체가 이상한 질문이라는 뜨악한 표정을 하면서 손을 든다. 내친김에 이 공부가 여러분 인생에 꼭 필요한 것이냐는 물음에도 당연히 그렇단다. 학교에서 배운 것이 그대로 사회나 인생과 연결된다고 믿는 아이들이 보이는 신뢰다. 


부럽고, 부끄럽다.


기사들을 읽다가 관심이 가서 '찜'한 책들이 여럿 나왔는데 그중 가장 눈길이 간 것은 고종석의 독서한담이었다.


<아주 낯선 상식>의 핵심 메시지 가운데 하나는 호남의 세속화야. 왜 광주는 세속도시가 아니라 신성도시여야만 할까? 왜 호남 사람들은 제 세속적 욕망을 풀어놓으면 안 되는가? 왜 광주는 ‘민주주의의 성지’라는 ‘굴레’에서 해방되지 못하는가? 한번 생각해보자고. 호남 지역 사람들이 다른 지역 사람들에 견줘 정치적으로 더 윤리적이어야 할 의무가 있을까? 선거 때만 되면 이른바 개혁 정당에 몰표를 주고도, 그 몰표 때문에 지역주의자라는 조롱을 받아야만 할까? 심지어 다른 지역 출신의 개혁 정당의 지도자는 왜 꼭 영남 사람이어야 하지? 왜 호남 출신 정치인들은 대통령선거에 나가선 안 되지? <아주 낯선 상식>은 이런 당연한 질문들에 대한 저자 나름의 답변을 시도하고 있어. 


정말, 아주 낯선 상식이었다. 그러게... 왜 광주는 세속도시가 아닌 신성도시를 강요당해야만 하는 것일까. 이것도 참 미안하고 염치가 없게 느껴진다.


읽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이게 잡지라지만 글밥이 적은 책이 아니다. 게다가 주간지... 난 정기구독하면 200% 밀릴 거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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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vis 2016-01-21 0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행복하게 밀리고 있어요ㅠ

마노아 2016-01-21 13:00   좋아요 0 | URL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계시군요! (>_<)

순오기 2016-01-21 04: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녀상 표정은 정말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듯...
지난번 서울에서 이걸 사고 싶었는데 모두 반품돼서 다음 호를 샀어요!

마노아 2016-01-21 13:01   좋아요 0 | URL
연말에 교보문고 광화문 갔다가 뭔가 사고 싶어서 휙 둘러봤는데 이 책이 눈길을 끌더라구요.
사오기를 잘했어요. 정말 주옥같은 기사들!!

다락방 2016-01-21 09: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호는 특별히 더 좋았어요. 그래서 그 주에 만난 친구들에게도 하나씩 사서 선물했답니다. 시사인은 정기구독의 충분한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마노아 2016-01-21 13:02   좋아요 0 | URL
그쵸? 정기구독을 해야 시사인에도 도움이 될 텐데 말입니다.
올해의 계약이 잘 끝나면 정기구독 하는 걸로...;;;;

책읽는나무 2016-01-21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구독하고픈데 밀릴까봐 주저주저하게 되네요ㅜ


마노아 2016-01-21 13:02   좋아요 0 | URL
밀려도 의미가 있는 구독이 되지 않을까... 지금 막 흔들리고 있어요.(>_<)

7tl40qns 2016-01-21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미있는 구독.. 구독전화 많이 받았었는데 오늘이라도 신청해야할 것 같아요. 첫창간 때 정기구독하고 몇년 뒤 해지했었거든요. 늘 죄송한 맘이었는데..
덕분에 의미있는 일을 햐야겠네요. 감사합니다

마노아 2016-01-22 01:29   좋아요 0 | URL
네네, 의미있는 구독이 분명 될 겁니다. 도라에몽 아이콘처럼 저도 방긋 웃게 되네요. 활짝~ ^^

초록장미 2016-01-21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귀향 개봉하는군요. 너무너무 마음 아플 것 같지만 꼭 보러 가야겠습니다.

마노아 2016-01-22 01:30   좋아요 0 | URL
적당히 거리를 두고서 영화를 찍은 것 같아서 더 좋았어요. 담담하게 말을 하니 더 아프긴 했지만요.
개봉이 기다려집니다.

꼬마요정 2016-01-23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밀리고 있답니다. 귀향은 스토리펀딩 때문에 알게 됐는데 너무 기슴이 아파서 못 볼 거 같아요. 표는 두 장 확보했는데 말이죠..ㅠㅠ

마노아 2016-01-24 01:50   좋아요 0 | URL
저는 더 뮤지컬 월간지도 밀리고 있는데 주간지의 압박이란...ㅜ.ㅜ
귀향은 참 아픈 작품이지만 그래도 꼭 보고 오셔요. 그래야 동행하시는 분도 덕분에 새기고 오실 테지요. ㅠ.ㅠ
 
뮤지컬 미스 사이공 O.S.T. [오리지널 런던 캐스트 레코딩][2CD]
에바 노블자다 (Eva Noblezada) 외 노래 / 유니버설(Universal)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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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사이공 넘버를 처음 들은 것은 윤도현의 러브레터였다. 당시 킴 역을 맡은 배우 김보경과 김아선이 출연을 했는데, 독특한 음색의 김보경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세계 4대 뮤지컬이라는 별명에 궁금하기도 했는데 공연을 보게 되지는 않았다. 어쩐지, 미화됐을 것 같다는 짐작이 들어서 말이다.

 

미스 사이공에 다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홍광호 때문이었다. 영국 무대에 캐스팅 되었다는 기사를 보았다. 오, 홍광호라면 웨스트엔드 무대에서도 먹힐지 몰라! 이런 기대를 가졌던 것이다. 처음부터 주역을 맡을리 없고, 외국어로 노래를 부르고 연기를 해야 하니 국내에서만큼의 반향을 불러오기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저절로 기대가 되었다. 이 음반이 나왔을 때도 현장은 가보지 못했지만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을 거라며 좋아했다. 그래놓고 일년 더 지나서 구입했지만..^^

 

대강의 내용은 알지만 넘버는 아는 게 몇 개 없어서 영어로 부르는 노랫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몰입도가 떨어진다. 그래도 홍광호 목소리가 들리면 다른 작업 중이었지만 고개를 번쩍 들고 아, 이 노래다!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첫번째 시디 하나가 다 돌아갈 동안 못 알아차려...ㆀ

그래서 해당 넘버를 꼭 집어서 다시 들어봤다. 여전히 홍광호 목소리인 줄 모르겠....ㆀ

비중이 워낙 작아서 그 짧은 시간 동안 홍광호의 매력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아마 공연장에서는 좀 더 얼굴을 내밀었겠지만 음반으로 만나는 건 무리가 있었다. 흠, 아쉽네.

 

근래에 뮤지컬 시디를 많이 샀는데, 내가 공연을 봤거나 영화라도 봤다면(맘마미아) 넘버들이 귀에 들어오는데, 공연을 보지 못한 건(그날들) 좀처럼 귀가 기울여지지 않았다. 이 작품도 그런 편이다.

 

작품을 무대에서 보고도 이런 느낌일지는 나중에야 확인이 되겠다. 여전히 궁금하긴 하니까.

 

기억을 더듬어 보니 예전에 불의 검에서 아라 역을 맡았던 이소정이 방송 인터뷰에서 미스 사이공 킴 역을 맡아서 브로드웨이 섰다고 했는데 맞나 모르겠다. 하와이까지 가서 오디션 봤다고 말한 것 같다. 까무잡잡한 피부도 그렇고 강인한 느낌의 음색이 킴 역에 잘 어울릴 거란 생각은 든다. 그나저나 이소정 씨는 요새 뭐하시나??

 

참, 불의검에서 정말 강렬한 느낌을 안겨준 진복자 배우는 그 후 한번도 만나보질 못했다. 뭐하십니까, 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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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두근거리는 중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예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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몹시 낭만적인 제목이다. 일본의 어느 정리의 달인은 해당 물건을 보고 설레지 않으면 과감히 이별하라고 하던데, 여전히 내 마음을 왈랑거리게 하는 그 무엇에 대한 이야기일 거라고, 멋대로 짐작했었다. 예상은 바로 깨졌고 마스다 미리에 대한 실망지수만 누적되는 중이다. 끙!


문득 정신을 차렸다.

이걸 사서 어쩌려고?

머리에 반짝거리는 머리핀을 꽂아서, 그래서 뭐하게?

...

그러나 나는 이제 곧 중년이랄까, 이미 중년의 범주에 한 발을 들이밀고 있다. 머리에 무슨 장식을 하든 남성들의 연애대상에서 멀어져 가는 몸. 설레는 사랑의 예감을 가슴에 담고, 귀여운 머리핀을 고르는 처녀 마음을 내려놓을 시기가 된 것이다. 앞으로는 그저 내 즐거움을 위해 머리핀을 골라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반짝반짝 빛나는 머리핀을 사는 게 뭐가 즐겁다는 거야?

하는 삐딱한 마음이 들었다. -42쪽


이 부분을 쓸 때 마스다 미리는 서른 아홉이었다. 아무리 유치한 걸 해도 이쁜 나이는 분명 아닐 것이다. 근데 이건 얼마든지 상대적이다. 이제 열한살이 된 다현양도 큼지막한 핀을 꽂으면 이제 어릴 때처럼 안 예쁘다. 이제 좀 더 차분한 디자인이 어울릴 때가 된 것이다. 그러니까 서른 아홉의 작가도 그녀에게 잘 어울리는 다른 디자인이 얼마든지 있을 터인데, 이 양반이 실망하는 포인트는 나이보다 '남자'에 있는 것 같다. 내 즐거움을 위해 머리핀을 고르는 게 뭐 어때서! 이상은, 이틀 전 나를 위한 머리핀을 하나 고르고 내 기억보다 600원이 더 나온 것 같은데 카드 영수증을 안 받아온 게 실수였다고 방금 생각한 사람의 입장이다.


조금씩 몸에 걸치는 것들의 선택 범위가 좁아져 간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던 민소매 옷도 지금 입으면 어깨에 기합이 들어간 것처럼 보인다. 뭐랄까, 탐욕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아마 민소매와의 이별도 그리 멀지 않은 날이 아닐까. 무릎이 보이는 스커트와도 슬슬 결별할 때일지 모른다. -44쪽


어깨 뽕도 아니고 민소매 옷이 기합이 들어간 것처럼 보인다고라?? 게다가 '탐욕'까지? 이봐요 마작가님! 너무 오버하십니다.


 올해는 남자들한테 좋아하는 연예인이 누구냐는 질문을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다. 이제 내년이면 마흔, 점점 더 그런 질문을 받지 않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는 여자끼리 모여도

“요즘 연예인 누구 좋아해?”

이런 화제를 올리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나도 별로 내 친구가 지금 어떤 연예인을 좋아하는지 전~혀 관심이 없어졌다. 어느 샌가 끝났다. -49쪽


일본에선 남자들이 저런 화제를 많이 올리는 건가? 남학생들의 경우 어느 연령대가 되면 더이상 연예인 얘기 하지 않는 때가 있다. 관심사가 쉽게, 빨리 변한다. 저건 일본의 특징인지 마스다 미리 작가의 개인 스타일인지 모르겠다. 욘사마 열풍이 한참 불 때 중년 여인들의 애정이 얼마나 크게 넘쳤던가. 한류 열풍을 생각해도 나이 좀 먹어도 좋아하는 연예인 얘기 할 것 같은데 말이다. 설령 관심가는 연예인 없으면 얘기 안 하면 되지 걱정도 참 많다.


이제 반짇고리를 챙겨서 다녀봐야 소용이 없다. 그런 것은 어차피 어린 아가씨들이 이성의 마음을 끌기 위한 소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심술궂게 생각하는 것은 ‘동경’만 하다 말았던 청춘의 결과물이다. -52쪽


반짇고리가 실용성이 아니라 이성의 마음을 끌기 위한 도구였다고라? 1969년생인데 1949년생 같은 느낌!


이십 대가 돼서야 남자 친구 자전거에 함께 타보긴 했지만, 그건 이미 때늦은 ‘청춘’이다. 꺅꺅 즐거워하며 남자 친구의 자전거를 같이 탄들, 남들이 보기엔 ‘순수함’을 어필하여 남자를 유혹하려는 여자 그 자체.... 어차피 이십 대, 삼십 대의 순수함에는 누런 얼룩이 묻어 있다. -58쪽


이십 대가 때늦은 청춘입니까? 이십 대, 삼십 대는 순수할 수 없습니까? 이 정도면 병 아닙니까??


나는 수제 초콜릿을 만들어 주지 못한 채 어른이 돼버렸다. 그래서 수제 초콜릿을 선물한 청춘이 있는 동 세대 사람들에게 언제까지고 패배감을 느낀다. 설령 그 사람이 지금의 나보다 늙어 보이거나 나보다 더 아줌마 같다고 해도... -66쪽


좋아하는 사람에게 수제 초콜릿을 만들어주는 로망은 이해할 수 있다. 근데 그거 못해본 사람은 해본 사람에게 패배감까지 느껴야 하는가. 참, 딱하다.


어른이 되어 수영장으로 데이트를 하러 간 적은 있지만, 자동차로 시작해서 자동차로 끝나는 데이트에서는 상큼한 청춘의 바람이 불지 않았다. -97쪽


수영복과 샤워용품, 갈아입을 옷과, 혹은 간식까지, 나올 때는 젖어서 무거워진 가방까지! 그 모든 걸 차 없이 진행하자니 그냥 다른 데 가서 데이트하는 게 낫지 않을까? 보통은 수영복 몸매나 수영복 디자인을 더 고민할 것 같은데...


지금의 나는 맛있어 보이는 사과구이를 전부 그에게 바치는 인생은 싫다.

맛있어 보이는 것이 있으면 둘이 반씩 나누어 먹는 게 좋다. 때에 따라서는 혼자 몰래 먹을 수도 있다.

그를 놔두고 여자들끼리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가는 것도 즐겁다. 갈 때마다,

“다녀와도 돼?”하고 물어야 하는 인생이라면 정말 싫다.

젊을 때는 요리로 남자에게 인기를 얻으려고 시도한 적도 있다. 그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루어지지 않길 잘했구나 생각한다. -109쪽


진심임? 앞에서 내내 징징댔던 맥락과 통하지 않는다. 


연습 중에 빈혈로 쓰러지려면 역시 눈부시게 활약하는 아이가 아니고서야.... -116쪽


어릴 때야 빈혈로 픽 쓰러지는 아이에게서 낭만을 찾을 수 있겠지만, 아직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니 혀를 차게 된다. 더구나 눈부시게 활약하는 아이가 쓰러져야 그림이 된다고까지. 하아.... 답 없네요.



내 생각에는 스스로 청춘을 쫓아내는 것 같다.



요건 공감이 간다. 정말 참석하기 싫고 축의금도 아까운 그런 결혼식 말고, 축하해주고 싶은 친한 지인의 결혼식에 한껏 멋내고 참석할 때의 설렘 같은 것. 확실히 2014년을 끝으로 친구들 결혼 소식은 못 듣고 있다. 이제 돌잔치나 둘째 돌잔치 같은 연락만 온다. ㅠ.ㅠ


근데 일본에서는 신랑 신부에게 인사하러 손님이 가나 보다. 우린 식사하고 있으면 신랑 신부가 테이블 돌면서 인사를 하는데 말이다. 



생각해 보지 못한 부분인데, 정말 그럴 수 있겠단 생각이 살짝 들었음 ㅎㅎㅎ



저런 걸 '공주님 안기'라고 하는구나. 웬만큼 가볍지 않으면 남자 허리 나가지 않을까? '미남이시네요'란 드라마에서 장근석이 쓰러진 박신혜를 저렇게 안고 차에 태우는 장면이 있었는데 정말 안습이었다. 지금처럼 젖살 빠지기 전 신혜 양은 여전히 예뼜지만 공주님 안기는 다소 무리. 비쩍 마른 장근석이 막 휘청였던 기억이 난다. 천둥의 신 토르같은 근육남이 아닌 이상 웬만해선 힘든 설정이지 싶다. 


 

 어려보이는 것도 탈인감? 괜찮다는 것도 싫으면 뭐라고 해?? 

 

마스다 미리는 '주말엔 숲으로'가 최고였다. 그밖의 여러 작품을 읽었는데 다 고만고만하다. 특히나 이 작품의 경우 이런 걸 책으로 내는 건 종이 낭비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나도 소심한 편이라 생각하고 남의 시선 당연히 신경 쓰일 때 많지만 이 작가님은 중증인 듯. 읽으면서 갑갑해서 혼났다. 


내 멋대로 제목에 감정이입하자면 여전히 나를 두근거리게 하고 설레게 하는 것들은 참 많다. 너무 많아서 다 쓸 수가 없네. 

집에 아직 비닐도 안 뜯은 마스다 미리 작품이 많은데 미간이 절로 찌그러지고 있다. 부디 '주말엔 숲으로' 때의 애정으로 다시 회복될 작품들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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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6-01-19 0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일전에 이야기 했지만 주말엔 숲으로 만 좋았음요.
그다음은 참....킁!!

마노아 2016-01-20 21:33   좋아요 0 | URL
이분에게 페미니즘 책 한권 소개해 주고 싶더라구요. ㅎㅎㅎ

치니 2016-01-19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허, 이 작가님 큰일 날 분이네요. 거 참. (참고로 저는 마스다 미리 작품 한 권도 안 읽었는데, 이 글 읽으니까 앞으로도 걍 읽지 말까 싶어지네요. -_ㅠ)

마노아 2016-01-20 21:33   좋아요 0 | URL
홀딱 깨지요? 근데 또 `주말엔 숲으로`는 드물에 아주 좋았답니다. 딱 하나 보신다면 이것만 보셔요^^ㅎㅎㅎ
 

이녀석 사이즈 아시는 분 계신가요?
써있지도 않고 상품 페이지도 찾을 수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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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6-01-15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50이에요~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69540027

마노아 2016-01-15 13:43   좋아요 0 | URL
오, 감사해요! 보기보다 작네요. 400은 나올 줄 알았어요. 요새 애용하고 있는 알라딘 텀블러예요.^^

비연 2016-01-15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거 좋아해요!^^

마노아 2016-01-16 17:24   좋아요 0 | URL
보기보다 가벼워서 좋더라구요. 요새 격하게 애정하는 중입니다.^^

꿈꾸는섬 2016-01-15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제것도 빨강인데~ 머그잔 딱 한잔이더라구요.

마노아 2016-01-16 17:24   좋아요 0 | URL
꽤 커보여서 많이 들어간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350 분량이어서 놀랐어요. 어쨌든 1인용으로 적격입니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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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책상을 마주하고 앉은 선생님은 우리 학교에서 가장 젊은 선생님이다. 1학기 때 학부모 상담 시간에 아버지가 한분 오셨는데, 언뜻 언뜻 듣기에도 이분이 자꾸 말이 짧아지는 거다. 눙치고 들어가는 말투를 쓰는 많은 분들이 그렇게 말이 짧아지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자식 담임 선생님께 그러는 건 좀 아니다 싶어서 신경이 쓰였다. 이분은 2학기 상담 때도 또 오셨는데 이번에도 역시나 말이 자꾸 짧아지곤 했다. 상대가 거의 자식 뻘에 가까울 만큼 젊디 젊긴 했지만, 그것보다는 상대가 '여자'라는 게 이분의 말이 짧아지게 한 동력이 아니었을까, 나는 생각했다. 마주보고 앉은 상대가 젊디 젊은 '남자' 선생이었다면 그렇게 수시로 말을 잘라먹지는 않았을 거라고.


그런 사례는 정말 비일비재하다. 아마 남자로 살고 있다면 잘 못 알아차렸을 수 있겠지만, 그런 취급을 늘 당하곤 하는 여자로 살다 보니 자주 목격하고 또 당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다. 이 정도야 뭐... '귀여운' 수준이다. 이 책에서 통계로 말해주는 그 숱한 강력범죄와 비교한다면 말이다.


미국이라는 '제국'이 전 세계에 드리우는 그림자를 생각하면 참으로 무섭다가도, 그럼에도 자국 국민들에게 하는 걸 보면 그래도 제 식구들은 감싸는구나... 싶다가도, 그런 미국조차도 여자와 남자는 이렇게 다른 대접을 받는구나 싶어서 적이 놀랐다.


중동 국가에서 여성의 증언은 법적 효력이 없다. 따라서 여성은 남성 강간자의 주장을 반박할 다른 남성 증인을 확보하지 못하는 한 자신이 당한 강간을 스스로 증언할 수 없다. 당연히 그런 증인은 드물다. -17쪽


그러니까 이런 중동 국가와 비교가 되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미국에서는 매일 약 세명의 여자가 배우자나 옛 배우자에게 살해당한다. 미국에서 임신부의 주요한 사망 원인 가운데 하나도 바로 그것이다. 강간, 데이트 강간, 부부 강간, 가정폭력, 직장 내 성희롱을 법적 범죄로 규정하려고 애써온 페미니즘의 투쟁에서 핵심 과제는 우선 여성을 신뢰할 만하고 경청할 만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었다. -19쪽


이 나라에서는 9초마다 한번씩 여자가 구타당한다. 확실히 짚어두는데, 9분이 아니라 9초다. 배우자의 폭행은 미국 여성의 부상원인 중 첫 번째다. 질병통제센터에 따르면, 매년 발생하는 그런 부상자 200만명 가운데 50만명 이상은 의료 처치를 받아야 하고 145,000명 가량은 입원해야 한다. 사후에 치과 치료를 받아야 하는 여성이 얼마나 되는지는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낫겠다. 미국 임신부의 사망원인 중 수위에 꼽히는 것 또한 배우자 폭행이다. -49쪽 


이런 숫자는 경악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미국에서조차도!!


물론, 반대 사례도 있다. 전 IMF 총재 스트로스 깐 사건의 사례 말이다. 한국에서 사회적으로 이렇게 압도적인 권력과 명성을 가진 남성을 상대로 훨씬 가난하고 힘없는 여자가 고발을 한다면.... 언론에 나오기나 할까 모르겠다. 


아무튼, 여성을 하나의 인격체로 보지 않거나 혹은 남성보다 못한 존재로 보는 그런 시각은 인류 역사 내내 있어 왔고, 21세기에도 사실 만연해 있다.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투쟁해 오고 목숨 바쳐 싸워온 덕분에 겨우 이정도 왔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일 것 같다. 그렇게 피흘려서 온 게 여기까지라는 것.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남자들은 볼멘 소리로 난 그렇지 않은데... 라며 불쾌해 한다. 싸잡아 욕먹는 불쾌감을 당연히 이해한다. 일면 억울하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기분이 들 때마다 한번씩 생각해 줬으면 싶다. 어디서나 언제나 위험과 공포에 노출되는 불안함과 비교해서 어느 쪽이 더 슬픈 일인지. 가수 김범수가 어릴 적에 골목길을 걸을 때 앞에 여자가 있으면 일부러 발소리를 더 크게 내는 장난을 쳤다 라디오에서 얘기한 기사를 보았다. 그렇게 큰 소리를 내면 앞에 가던 여자가 도망치듯 뛰어갔다고. 철없던 어린 시절의 장난임이 분명하겠지만, 그걸 방송에서 이야기할 정도면 아직도 골목길에서 불안감에 심장 펄떡이며 뛰어야 했던 여자의 공포 따위는 모르는 사람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런 무심함이 돌멩이 하나로 개구리를 죽이는 것이다. 당신은 이해하지 못하고 공감하지 못하고 납득하지 못하지만 여자들이 늘 노출되어 있는 세상의 돌멩이를 말이다. 


시사인 434호에 신윤영 씨가 쓴 글이 인상 깊었다. 늦은 밤 자신의 뒤에서 걸어오던 남자가 갑자기 자기의 어깨를 덥석 잡았던 것이다. 여자는 공포에 질려 뭉크의 '절규' 같은 표정으로 보았고, 남자는 "동네에서 몇 번 봤는데 혹시 시간 있으시면..."


하아, 센스 없는 건 둘째 치고 이건 인간에 대한 예의가 없다고 일갈하고 싶다. 필자는 이렇게 썼다.


너무 화가 나서 무서운 것도 잠시 잊었다. 으슥한 밤길에서 이따위 묻고 거친 방법으로 모르는 여자에게 말을 걸다니, 당신은 당신과 다른 처지의 사람들이 어떤 공포와 불안감을 참으며 사는지 전혀 모르지? 그런 건 관심도 없지? 왜 허락도 없이 남의 몸에 다짜고짜 손부터 대냐고! 


하지만 필자는 화를 낼 수 없었다. 그러다가 무슨 해코지라도 당하면 어쩌라고. 나름의 임기응변으로 그 자리를 피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어서 말한다.


여자들은 철이 들기 전부터 '낯선 남자'에 대한 공포를 집요하게 교육받는다. 밤늦게 다니면 위험하다, 노출이 심한 옷을 입으면 성범죄의 표적이 된다, 남자는 성욕을 제어할 수 없다 등등. 뼛속까지 스민 교육의 결과로 뒤에서 걸어오는 낯서 남자를 불안하게 돌아본다든가 계단에서 가방으로 스커트를 가리기라도 하면 '왜 가만히 있는 남자들을 치한 취급을 하느냐'며 볼멘소리를 듣는다. 몸을 드러낸 옷을 입으면 '헤픈 여자' 취급을 받고 몸을 꽁꽁 싸매면 '수녀원에서 나왔느냐'며 비웃음을 받는다. (...) 사실 성범죄의 원인은 여자의 옷차림도, 여자의 '평소 행실'도 아니다. 원인은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 단 하나다. 그렇다면 여자아이들에게 두려움을 주입하며 마치 통제 안 되는 짐승("남자는 다 늑대야")인 양 남자 전체를 매도하는 것보다는 남자아이들에게 '허락 없이 남의 몸에 손을 대면 안 된다' '상대가 싫다고 하면 정말 싫은 거다'라고 가르치는 게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분명 대부분의 남자는 선량한 사람들일 것이다. 하지만 남자의 99%가 좋은 사람이라 한들, 그렇지 않은 나머지 1%의 파괴력이 너무 크다. 결국 그 1% 때문에 나머지 99%까지 경계하게 된다. 혹시 늦은 밤 눈에 띄게 불안해하며 종종걸음으로 당신 앞을 걸어가는 여자를 보게 되더라도 너무 기분 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만약 그녀가 당신을 겁내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건 당신이 인상이 나쁘다거나 뭘 어떻게 해서가 아니라 그냥 당신이 남자여서 그런 거니까. 그날 밤 이후 나는 해가 지면 무조건 택시를 탄다. 


비슷한 이야기가 이 책에도 나온다. 


내가 지금보다 젊었을 때, 드넓은 캠퍼스에서 여학생들이 강간을 당하자 대학 측은 모든 여학생에게 해가 지면 밖에 나가지 말라고, 아니면 아예 나돌아 다니지 말라고 일렀다. 건물 안에 있어라. (감금은 호시탐탐 여성을 감싸려고 대기하고 있다.) 그러자 웬 장난꾸러기들이 다른 처방법을 주장하는 포스터를 내붙였다. 해가 진 뒤에는 캠퍼스에서 남자를 몽땅 몰아내자는 처방이었다. 그것은 똑같이 논리적인 해법이었지만, 남자들은 겨우 한 남자의 폭력 때문에 모든 남자더러 사라지라는, 이동과 참여의 자유를 포기하라는 말을 들은 데 대해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111쪽


겨우 한 남자의, 그러니까 1%의 나쁜 새끼 때문에 대부분의 여자들이 겪으며 감수해 오며 살아왔던 그 숱한 시간들을 한번쯤 생각해 봤으면, 충격이나 억울하다는 표정 대신에!


기사를 쓴 피터 베이커가 우리에게 환기해준바, 제노비스가 강간당하고 살해되는 광경을 자기 집 창문으로 목격한 이웃들 중 일부는 낯선 남자가 저지른 야만적인 폭행을 남편이 ‘자기’ 여자에게 권리를 행사하는 장면으로 오해했을지도 모른다. “당시에는 남자가 아내나 연인에게 가하는 폭력은 대체로 사적인 일로 치부되었던 것, 그것이 분명 중요한 문제였다. -188쪽


이 부분을 보면서 또 다시 소환된 기억이 있다. 1989년이다. 이모가 강도를 만나 돌아가셨고, 형사들은 이모부를 용의자로 지목했다. 새벽에 화를 당했는데, 비명을 지르는 여자 목소리가 이웃들이 듣기에 '부부싸움'하는 것처럼 들렸다는 증언이 나온 것이다. 이모의 시신은 연쇄살인범의 짓답게 참혹했다. 그 지경이었는데도 누군가는 그걸 남편이 ‘자기’ 여자에게 권리를 행사하는 장면으로 오해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이 책은 읽는 내내 무한공감에 빠져들기 때문에 무한좌절에 빠지기도 쉽다. 그렇지만 한숨부터 쉴 필요는 없다. 꽤 슬픈 이야기지만, 이 기막힌 이야기를 저자 리베카 솔닛은 제법 유쾌하게 풀어나가고 있으니까. 원래 투쟁에는 유머가 필요한 법. 심각하기만 하면 이 길고 지루한 싸움을 버텨낼 수 없다. 


여기 그 길이 있다. 천 마일은 될지도 모르는 기나긴 길이다. 이 길을 가는 여성은 채 1마일도 걷지 못했다. 그녀가 얼마나 더 가야 할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되돌아오진 않으리란 것은 안다. 그리고 그녀는 혼자 걷지 않는다. 수많은 남자, 여자 들, 그보다 더 흥미로운 다양한 젠더의 사람들이 함께할지 모른다. 여기 판도라가 손에 들었던 상자와 지니가 풀려난 호리병이 있다. 지금 그것들은 감옥과 관처럼 보인다. 이 전쟁에서 사람들은 죽을지언정, 생각들은 지워지지 않는다. [2014] -227쪽


'페미니스트' 혹은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쓰기 불편했다. 잘 모르기도 하거니와 이 단어에 씌어진 이미지가 말하는 사람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역자가 지적했듯이 그러나 젠더를 빼고서 젠더를 말할 수는 없다.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는 선언은 무엇보다도 페미니즘에 씌워진 부정적 의미를 걷어내고 현재에 필요하며 바람직한 방향으로 그 용어를 되찾겠다(reclaim)는 뜻이다. 용어가 문제적 현상을 호명함으로써 변화를 돕는 도구라고 할 때, 날이 너무 무뎌서 아무것도 벨 수 없는 도구는 쓸모가 없다. 휴머니즘이나 평등주의라는 대체 후보 용어의 경우가 그렇다. 젠더의 문제를 다룰 때 젠더를 빼고 말할 순 없다.  -232쪽


이 책을 읽으면서, 저 키링을 달면서 한 번 더 곱씹고 한 번 더 되새기며 페미니즘을 상기했다.  

설치고, 떠들고, 말할 것이다. 더 크게, 더 힘차게!



GO WILD, SPEAK LOUD, THINK H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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뽈쥐의 독서일기 2016-01-15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하면서 읽다가 이모님의 사연은 너무나 마음이 아프네요. 게다가 부부싸움으로 오해받은 이모부의 일이나... 정말 부부나 연인관계는 그럴 수 있다고 치부하는 거 넘 화나요. 그것 때문에 죽는 사람이 얼만데...
남초 회사에서는 재가 담당잔데 사장없어요? 라고 묻는 인간들이나 여자만 있는 여초 회사에 가도 담당자보다 외부 남자들 얘기를 더 신뢰하는 사장한테서 유리천장을 경험하고 멘붕에 빠질 지경입닏다

마노아 2016-01-16 17:23   좋아요 0 | URL
고문이 여전히 실행되던 시절인지라 당시에 이모부가 열흘 간 잠을 안 재우는 고문을 당했는데, 더 있다가는 너무 힘들어서 자기 짓이라고 거짓 자백을 할 지경이었대요. 다행히 열흘 째에 진범이 잡혔지만요. 참 소설 속에서나 낭놀 법하 일이죠.ㅜ.ㅜ
남초 회사건 여초 회사건 어디나 여자들의 위치가 참 갑갑하지요. 이놈의 유리천장! 그래도 꾹꾹 버텨냅시다. 꼭이요.(>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