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8 제너시스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7
버나드 베켓 지음, 김현우 옮김 / 내인생의책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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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SF 소설이 많이 그렇듯이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인간과 인공지능을 가진 로봇의 대결구도를 다루고 있어 이제는 식상할 수도 있건만, 독특한 스타일로 그 식상함을 지혜롭게 비켜나간다. 주인공 아낙스(아낙시맨더)는 학술원에 들어가기 위해서 시험관들 앞에서 네 시간에 걸쳐 시험을 본다. 한 시간씩 지날 때마다 휴식시간이 주어지고 잔뜩 긴장해 있던 아낙스는 시험을 치르는 동안에 자신의 생각을 더 논리정연하게 정리할 수 있었으나 마지막 시험의 끄트머리에서 모든 인식을 뒤엎는 계기를 맞게 된다.  

199쪽의 비교적 짧은 페이지 안에서 미래 공화국의 모습과 대전쟁, 대역병의 창궐, 인간게놈지도 등등, 온갖 설정과 이야기가 난무하는 까닭에 1.2교시 시험을 마칠 때까지는 꽤 어지러웠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책소개를 먼저 읽고 나서야 생각이 정리될 정도로 말이다. 공개된 내용을 가져와보면 이렇다. 

소설 속 2058년에는 중동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강력해진 중국과 미국의 신경전이 치열하다. 유일신에 대한 신앙이 무너지고 언론이 공포를 유포하면서, 대중은 음모론에 마음을 빼앗겨 이웃조차 믿지 못하게 된다. 이때 전쟁의 먹잇감이 될 사건이 발생한다. 태평양 영공에서 미국이 중국 항공기를 격추하면서 3차 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여기에 전염병까지 대유행하면서 세상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런 위기에도 기업가 플라톤은 남태평양의 섬을 사들여 자신의 공화국을 축조한다. 플라톤은 섬 주위에 높은 해양방벽을 쌓아 전쟁과 전염병에 시달리는 외부세계에서 공화국을 보호했다. 주민들은 게놈 정보에 따라 신분이 나눠지고 이제 공화국에선 통제할 수 없는 위험이란 전혀 없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의 ‘이상 국가’가 완벽하게 구현된 셈이다. 주민들은 선택과 의지를 국가에 넘겨주는 대신에 안전과 풍요를 보장 받았다.

소설의 제목에도 들어간 2058년은 소설에서 액자식 구성으로 등장한 아담이 태어난 해다. 그의 이름이 '아담'인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이 소설의 제목 '제너시스'가 '창세기'를 뜻하고 있으니 제대로 짝을 맞춘 셈이다.  

플라톤이 구축한 이 세계에서 게놈지도에 따라 가장 우등 계급은 '철학자' 계급이다. 가장 영리한 아이들이 철학자 계급이 되고 여기서 강등된 그룹이 군인 계급이다. 아담은 철학자 계급이었지만 십대 때 분리 거주하고 있는 여자들의 영역에 잠입했다가 좌천되어 해안 경계를 서는 보초병이 된다. 스무 살이 된 아담은 뗏목을 타고 공화국으로 다가오는 소녀(이름은 이브다!)를 발견하고, 공화국의 법에 따라 전염병을 퍼트릴 수도 있는 외부인을 즉각 사살해야 했지만, 오히려 사격을 강요하는 동료를 죽이고 소녀를 피신시킨다. 이 사건이 발각되어 감옥에 갇히게 된 아담. 공화국은 그를 중요 범죄자로 다루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를 영웅으로 대접했다. 모두에게 노출된 상황에서 그를 죽일 수도 없게 된 난감한 상황!  

'변화란 곧 파멸이다.'라는 강령을 가진 공화국에서 아담의 돌발 행동은 큰 위험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인공지능 로봇 분야에서 문제가 있었던 로봇의 새 버전 실험이 필요했던 위원회는 이 로봇 아트와 아담을 한 공간에 붙여놓았다. 3교시부터 시작되는 문답에는 아담과 로봇 아트의 문답이 주 내용인데 이는 마치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을 연상시킨다. 1교시 시험 직후 쉬는 시간에 마주쳤던 또 다른 수험생의 이름이 '소크'였던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아담과 아트의 문답은 철학적 사유를 주로 담았지만 조금은 변죽만 울리는 기분이었다. 아트가 현 인간을 네 번째 창조물이라며 파격적 진화론을 펼친다. 아담의 주장도 옳았고 아트의 주장도 옳았다. 그랬기에 둘의 간극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마지막 시험 시간에 그동안 삭제되었다고 알려졌던 아담의 마지막 비공개 기록에서 아담은 아트를 끝내 인정하고 말았다. 사실 여태 버틴 게 용하기는 했다.  

이 책의 소갯말 중에서 마지막 반전이 주는 놀라움이 크다고 해서 읽는 동안에 계속해서 끝마무리를 상상했다. 아담이 사실은 알고 보니 진짜 로봇이었던 것은 아닐까, 아니면 아트가 인간이었던 것은 아닐까... 뭐 이런 식의 상상 말이다.  

미리 얘기하자면, 모두 어긋났다. 무언가 내가 상상했던 종류의 반전인 것은 맞지만 그 규격의 차이가 매우 컸다. 그리고 그 반전의 전율이 너무 커서 우왓! 소리가 다 나왔다. 상상 이상이었다. 별점으로 얘기하자면 앞 부분에서는 별 셋과 별 넷을 오가면서 시큰둥한 반응이었다면 마지막 반전의 정체를 알고서는 바로 별점 다섯으로 승격되는 느낌? 어쩐지 맥이 탁 풀리면서 조금 섬뜩하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한 느낌이었다. 미래 사회를 낭만적으로 상상해낼 수 없는 현실의 균열을 아는 까닭이다.  

책을 다 읽은 뒤 다시 표지를 살펴보았다. 바다 위의 경계막과 출렁이는 금빛 머리칼의 정체를 알아차리자 어쩐지 소름이 돋는다. 창세기, 아담과 이브, 그리고 원죄... 그 모든 상징들을 제대로 녹인 작가 버나드 베켓은 경제학 전공 출신에 과학 교사라는 독특한 이력을 지녔다. 비범한 소재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이과 스타일의 이 작가는 그러나 문학성도 함께 갖추고 있었다. 

   
  그렇게 둘은 지구가 태양을 향해 등을 돌리는 것을 지켜보았고, 신시가지로 내려오는 길을 함께 걸었다. (80쪽)  
   

지구가 태양을 향해 등을 돌리는 저 풍경은 해가 지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다시금 어린왕자가 떠올랐다.  

너무도 대단한 인공지능 로봇 아트가 계단은 올라갈 수 없는 다리를 하고 있다는 것은 좀 이해가 안 가는 아날로그였지만 그건 설정 때문이니 넘어가자.  

작가도 훌륭하지만 역자 칭찬도 아니 할 수가 없다. 번역을 매끄럽게 한 것도 그렇거니와 우리말 표현으로 자연스럽게 바꾼 문장들이 걸작이었다. 번번이 사전을 찾는 수고를 겸해야 했지만 이런 표현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기뻤다.

반면 몇몇 오타도 눈에 띄었다. 31쪽 밑에서 5줄. 그때 경계병 더 급박하게 움직여야 했습니다. 조사가 빠졌다. 

역자 후기의 맨 마지막 문장 담아낼 수 있었다는 건 분명 하나의 성취하고 해야 할 것이다.  ^^

뭐, 이 정도는 귀여운 옥의 티다. 책이 워낙 재밌으니 금방 다음 쇄를 찍으면서 수정 되겠지.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가장 열정적이었고 낭만(?)적이었던 부분을 옮겨본다. 아담이 아트에게 힘주어 얘기했던 내용이다. 

나는 기계가 아니야. 기계가 어떻게 아침의 풀잎 냄새와 아이의 울음소리를 알겠어? 나는 내 피부에 쏟아지는 따뜻한 햇살의 느낌이고, 나를 덮치는 차가운 파도의 감각이야. 나는 절대 가 본 적 없지만 눈을 감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장소이고, 다른 이의 숨결과 그녀의 머리카락색이야.
너는 인간의 수명이 짧다고 비웃었지만, 바로 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삶에 생명을 불어주는 거야. 나는 사유에 대해 생각하는 사상가지. 내가 호기심이고 이성이고 사랑이고 증오인 거야. 나는 무관심이기도 하고, 한 아버지의 아들이고, 그 아버지는 또 누군가의 아들이지. 나는 우리 어머니가 웃는 이유이고 또한 그분이 우는 이유기도 해. 나는 궁금함이고, 또 그 자체로 궁금함을 낳기도 하지. 그래, 세상이 네 버튼을 누르고 네 회로를 훑고 지나갈 수 있겠지. 하지만 세상이 나를 훑고 지나갈 수는 없어. 세상은 내 안에 머무르는 거야. 내가 세상 안에 있고, 세상도 내 안에 있는 거라고. 나를 통해 우주가 스스로 알아가고, 그 어떤 기계도 나를 만들어낼 수 없어. 내가 바로 의미야. – 1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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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lvia 2010-05-16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표지...처음엔 정말 제 스타일이 아니어서 책까지 기대가 떨어지던데
책을 다 읽고 난 후는..... 좀 ㅎㄷㄷ했죠...

마노아 2010-05-16 12:50   좋아요 0 | URL
전 원래 상상력이 빼어난 작품을 좋아하긴 하지만 앞쪽에 철학적 질문과 답변은 내 스타일이 아니었어요. 머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근데 진짜 정체가 드러날 때쯤 되면 서늘해지더라구요. 진짜 후덜덜이에요.^^ㅎㅎㅎ

Sylvia 2010-05-16 13:35   좋아요 0 | URL
앗, 저 책표지 얘기한거예요.
진짜 저런 표지 별로다라고 생각했었거든요.
근데 읽고 난 후 책 표시를 다시 보니..엄마나! 싶더라고요^^

마노아 2010-05-16 13:45   좋아요 0 | URL
전 책 표지는 전혀 신경 안 쓰고 있었는데 다 읽고서 무심코 보니 아뿔싸! 싶은 거예요. 그래서 표지가 다시 보였답니다. 근데 다락방님 말씀처럼 진짜 영화 포스터 분위기가 나긴 하네요. 영화 2010도 있었고요.^^

다락방 2010-05-16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이 책 어떻게 읽게 된거에요? 리뷰를 읽어보니 그 안에 담긴 내용으로는 마노아님이 관심가질 만 하다고 보여지지만, 책 표지만 보면 음, 전혀 관심가지지 않을 종류인 것 같아서요. 전 영화 리뷰인줄 알았어요. 영화 포스터 같아요, 책 표지가. 영화 포스터여도 저는 보지 않았을 그런 영화요. 그런데 책을 읽고 다시 보면 적절한 표지인가 보군요!

아담이 아트에게 얘기했다는 인용구절이 정말 멋져요. 나는 우리 어머니가 웃는 이유이고 또한 그분이 우는 이유기도 해. 이 문장이 특히 더.

마노아 2010-05-16 12:52   좋아요 0 | URL
선물 받았어요.^^
페이지가 짧고 소재가 독특해서 흥미있겠다 싶었는데 앞에 상황 설정을 먼저 알지 않고는 몰입이 좀 힘들어요. 그러다가 뒤에 가면 쭈뼛 서는 반전이 기다리고 있어요. 영화로 만들면... 곤란할 것 같아요. 영상을 보여줘야 하는데 문답자의 모습을 보여주면 반전이 약해지거든요.^^;;;
아담의 답변이 인상적이지요? 번역하신 분이 대구를 잘 맞추어서 잘 해준 것 같아요. 원작도 좋았을 테지만요.^^

루체오페르 2010-05-16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금했던 책인데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내가 바로 의미야... 캬~ㅎㅎ

마노아 2010-05-16 23:42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
내가 바로 의미야... 정말 캬~ 소리 나오는 대사예요.^^ㅎㅎ

같은하늘 2010-05-20 0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책 리뷰어하라는거 리뷰 쓸 자신이 없어 패스했는데 아깝다. ^^

마노아 2010-05-20 14:54   좋아요 0 | URL
저는 페이지가 적어서 수락했어요.ㅎㅎㅎ
 
2058 제너시스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7
버나드 베켓 지음, 김현우 옮김 / 내인생의책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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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계가 아니야. 기계가 어떻게 아침의 풀잎 냄새와 아이의 울음소리를 알겠어? 나는 내 피부에 쏟아지는 따뜻한 햇살의 느낌이고, 나를 덮치는 차가운 파도의 감각이야. 나는 절대 가 본 적 없지만 눈을 감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장소이고, 다른 이의 숨결과 그녀의 머리카락색이야.-132쪽

너는 인간의 수명이 짧다고 비웃었지만, 바로 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삶에 생명을 불어주는 거야. 나는 사유에 대해 생각하는 사상가지. 내가 호기심이고 이성이고 사랑이고 증오인 거야. 나는 무관심이기도 하고, 한 아버지의 아들이고, 그 아버지는 또 누군가의 아들이지. 나는 우리 어머니가 웃는 이유이고 또한 그분이 우는 이유기도 해. 나는 궁금함이고, 또 그 자체로 궁금함을 낳기도 하지. 그래, 세상이 네 버튼을 누르고 네 회로를 훑고 지나갈 수 있겠지. 하지만 세상이 나를 훑고 지나갈 수는 없어. 세상은 내 안에 머무르는 거야. 내가 세상 안에 있고, 세상도 내 안에 있는 거라고. 나를 통해 우주가 스스로 알아가고, 그 어떤 기계도 나를 만들어낼 수 없어. 내가 바로 의미야.-1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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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산주의자다 1 평화 발자국 4
허영철 원작, 박건웅 만화 / 보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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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도에, 36년 동안 수감자 생활을 했던 비전향 장기수 허영철의 삶과 생각을 인터뷰 형식으로 끌어낸 책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를 읽었다. 벌써 4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는데, 그 책을 만화의 형식으로 담아낸 책이 새롭게 출간되었다. '나는 공산주의자다'라는 제목을 달고서.  

'꽃'으로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던 박건웅 씨의 그림으로 재탄생한 이 책은 제목부터 셌다. '나는 공산주의자다'라니...  게다가 표지도 빨간색이다(2권 표지)! 와우, 정공법이랄까. 초등 6년까지는 반공 포스터와 글짓기 대회를 해마다 겪으면서 컸다지만, 그닥 반공 세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런 제목들에서 한 번 더 눈길이 멈추게 되는 것은 참 씁쓸한 일이다. 그래서 '평화 발자국' 시리즈로 이 책이 나온 것은 오히려 더 큰 의미가 있다는 생각도 든다. ('평화 발자국'은 근현대사를 거치면서 우리 일상 속에 뿌리박힌 차별과 폭력, 우리가 지켜 나가야 할 자유와 인권에 대한 이야기까지 모두 아우르는 시리즈이다. 권정생 선생님의 곰이와 오푼돌이 아저씨, 내가 살던 용산, 파란집, 그리고 이 책이 평화 발자국 시리즈다.) 

몇 해 전에 몹시 감명깊게 읽었던 책이었는데도 만화의 형식으로 다시 만나보니 꽤 새롭게 다가온다. 당시 내 가슴을 울렸던 선생님의 고백들은 이번에도 역시 진한 감동으로 와 부딪쳤다. 겹쳐지는 밑줄들에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학습을 하는 데 중요한 것이 ‘호조반’이었어요. 수준이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이 짝을 지어 서로 돕는 것인데 좋은 성적을 내면 돕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모두 칭송받았지요. 그리하여 모두가 최우등이나 우등이 될 수 있었어요. 자신만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하는 자본주의 사회와는 달랐어요.
– 134쪽
 
   

1등 한 명을 빼고는 모조리 루저로 만드는 이 사회에선 모두가 승자가 되는 저 시스템을 부러워할지언정 감히 따라가질 못한다. 요네하라 마리의 '프라하의 소녀시대'에서도 같은 기술이 나오는 걸 보면 허영철 선생님의 과장은 결코 아닐 것이다.  

"서구로 와서 가장 힘들었던 것, 이것만큼은 러시아가 뛰어났다고 절실하게 느낀 게 있어요. 그건 재능에 대한 사고방식의 차이죠. 서구에선 재능이 자기 개인에 속하는 것이지만, 러시아에선 모든 이의 재산이랍니다. 그러니 이곳에선 재능 있는 자를 시기해서 어떻게 하면 끌어내릴까 안달이죠. 러시아에선 재능 있는 자는 무조건 사랑받고 모두가 받쳐주는데......" – <프라하의 소녀시대>180쪽

책을 읽으면서 자꾸 곱씹게 되는 부분들은 과연 우리가 사회주의에 대해서 공산주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냥 막연히, 추상적으로, 으레 그래왔던 대로 습관적으로만 상상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적어도 나는 그랬던 듯하다. 그래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가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라고 말씀하실 때는 뭔가 덜컹!거리는 기분마저도 느꼈다. 사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소련도 무너지고 동구권도 모두 무너졌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저토록 오랫동안 그 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힘이 분명히 있는 게 맞을 것이다. 그들이 모두 바보 천치도 아니고 우리에게 강요되어진 생각대로의 독재 체제라면 벌써 무너졌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에게 설명하지 않는, 혹은 차마 말하지 못하는 뭔가 다른 것들이 있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우린 그런 것들을 알지도 못하지만 관심도 없어한다.  

   
  -전에 비전향 장기수 선생님들이 하시던 말씀이 기억나요. “남파 ‘간첩’이라는 말은 옳지 않다. 간첩은 적국에서 활동하는 첩자를 말하는 것이지만 우리에게 남조선은 적국이 아니다. 그러므로 남파 ‘공작원’이라고 해야 옳다.” 선생님도 같은 생각이시겠지요?
-예, 간첩이란 국가 기밀을 빼돌리는 사람인데 우리는 통일 사업을 하러 내려온 것이니까요.
 
   

'간첩'이란 단어 대신 '공작원'이란 표현을 써야 한다는 지적도 신선했다. 무심코 쓰는 말이지만 합당한 용례가 아니었다. 통일 사업을 하러 내려왔고, 비록 그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36년이나 옥고를 치렀지만 뜻을 굽히지 않은 허영철 선생님. 그는 스스로에게 당당했기 때문에 가족 문제에 있어서도 담담한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가족들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았어요. 근본적으로 내 탓이 아니라 세상이 그런 상황을 만든 것이라는 마음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나는 역사의 정당한 편에 섰던 것 뿐이었는데 일이 그렇게 되어 버렸다, 그것을 어찌할 것인가? 내 신념은 그때나 지금이나 바뀌지 않았는데 말이지요. 사람들은 나에게 물어요. 여전히 사회주의가 좋으냐고. 그럼 나는 대답하지요. 그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라고. 나는 자본주의 사회가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반드시 새로운 사회가 오는데 어떤 사회가 올 것인지를 모를 뿐이지요. 그것은 우리가 창조해 가는 과정이에요. 332쪽

솔직히 이 부분은 꽤 충격적이었다. 연좌제의 굴레 속에서 가족들의 고통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는데, 다 합해봐야 6개월도 같이 살지 못한 남편을 가슴에 담고 그 부인은 얼마나 고생을 했을지 독자인 나도 헤아려지는데, 바로 그 당사자인 그가 미안하지 않다고 하니 말이다. 그런데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부모는 당연히 자식을 책임져야 하고 자식에게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해주지 못하면 죄인 취급 받는 걸 인지상정이라고 여기던 사고가 더 위험하다는 생각이 불쑥 들어버린 것이다. 물론, 내가 그 가족이라면 어찌 원망이 없겠냐마는, 가족들의 편지와 인터뷰 내용을 보면 그들 역시 선생님이 개인의 욕심과 이기심으로 그리 긴 시간 동안 뜻을 굽히지 않고 살아온 게 아님을 인정하고 있다는 게 보인다. 내가 그리 살수는 없을지라도, 이런 삶을 살아온 외로운 혁명가를 향해 숙연해 지는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이런 삶을 살아야 했던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자리하고 있는 이 땅의 역사가 아프게 밟힌다. 

박건웅 씨의 그림은 판화 기법으로 선이 굵고 큼직하다. 그래서 섬세한 느낌은 받기 힘들지만 매우 극적인 연출이 잘 잡혀 있으며 이 책의 분위기에는 몹시 잘 어울렸다. 종종 보이는 오타와 띄어쓰기 실수 등은 다음 쇄에서 고쳐졌으면 한다. 많이 읽혀져서 책을 곧 다시 찍을 기회가 왔으면...... 

길었던 책의 내용을 모두 옮긴 것같지는 않았다. 적당히 생략의 절차를 밟은 것으로 보인다. 나를 마지막에 울렸던 우리 모두의 소원은 통일이 아닌가요? 라는 질문이 빠진 것을 보면 말이다.  

가벼운 책은 결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한없이 우울해지는 책도 결코 아니다. 한 번쯤은 생각해보고 고민해 볼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좀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되기를 원한다면, 그런 세상을 꿈꾸면서 평생을 바쳐온 이런 투사의 삶의 이야기도 한 번쯤 귀기울여 봤으면 좋겠다. 단 한 번도 역사가 비껴가지 않았던 노 혁명가의 고백처럼, 우리 역시 그 역사에서 단 한 순간도 비껴갈 수 없으니 말이다. 역사의 중심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었다. 결국, 우리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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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0-05-14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분은 일종의 낭만주의잡니다.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위해 열정을 불사르지만 결국은 뒤에 오는 정치 권력가에게 모든것을 빼앗기게 되지요.이런 류의 사람들이라면 체게바라나 트로츠키등이 있지요.

마노아 2010-05-15 09:03   좋아요 0 | URL
이 간단한 평가는 노혁명가에겐 좀 송구하군요.

2010-05-15 0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15 09: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16 1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16 1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는 공산주의자다 2
허영철 원작, 박건웅 만화 / 보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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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을 하는 데 중요한 것이 ‘호조반’이었어요. 수준이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이 짝을 지어 서로 돕는 것인데 좋은 성적을 내면 돕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모두 칭송받았지요. 그리하여 모두가 최우등이나 우등이 될 수 있었어요. 자신만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하는 자본주의 사회와는 달랐어요.
-134쪽

모택동 주석이 처음 농민군을 조직할 때도 가장 중요하게 강조한 것은 수준 높은 이론이나 교양 같은 게 아니었어요. 그보단 실제적인 행동 수칙, 이를테면 인민에게 절대 피해를 주지 마라, 바늘 하나라도 빌리면 갚아라, 대소변은 장소를 가려서 보아라, 같은 것이었지요. 그런 일상적인 것들이 훨씬 더 사람들 마음에 와 닿았어요. 그래서 짧은 시간에 모택동을 지지하는 홍군들이 엄청나게 모였던 것이지요. 조선에 와서도 마찬가지였지요.

-161쪽

-지도부가 권력을 누리는 게 아니라 그 자리에 맞는 존중을 받을 뿐이라구요? 가능한가요?
-역사를 보면 권력을 가진 자가 그 힘을 누리지 않고 그저 자신의 역할만 충실히 수행한다는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으니까요. 지도부가 권위를 가지기는 해요. 하지만 이론과 실천에서 모범이 될때 주어지는 것. 제대로 인민을 위하지 못한다면 절대 권위를 가질 수 없는 겁니다. 남쪽처럼 사람들에게 군림하는 지위가 절대 아니라는 거지요. 오히려 정책을 마련하고 집행하는 과정에서 어려운 일은 당원들이 맡아요.
-그렇다면 정책 결정과 집행이 결국 당원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절대 그렇지 않아요. 당에서는 어떤 문제든 반드시 회의를 거치지요. 처음에는 이런 문화들이 정착되는 시기였으니까 회의를 참 많이 했어요. 여기서는 북한이 무조건 독재를 한다고만 하는데 그렇지가 않아요. 사회주의 국가들 중에서도 북조선은 상당히 민주적인 편이죠. 전쟁때도 해마다 당 대회를 열어서 중요한 문제를 토의하고 그랬거든요. 공개회의 같은 것을 열어 충분히 정책을 알려주니까 인민도 정책과 법령의 내용을 다 알고 기꺼이 받아들이게 되는 거죠.-178쪽

-사람들은 자꾸만 남조선은 민주주의 국가고 북조선은 독재 국가라는 식으로 말을 해요. 그런데 자본주의 국가에서 민주주의란 부르주아 독재를 말하는 것이거든요.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하는 것이구요. 민주주의와 사회주의가 서로 반대되는 뜻이 아니예요.
-다 같은 민주주의지만 자본주의는 부르주아 독재를, 사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하는 것이라고요.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그것이 민주주의냐가 아니라, ‘누구를 위한’ 민주주의냐겠네요.
-바로 그거예요. 그런 점에서 볼 때 제대로 된 민주주의는 북조선에서 이뤄진 것 같아요. 예, 맞아요. 나는 이미 북에서 민주주의를 경험했다고 생각해요.
-184쪽

-그래서 여전히 저쪽의 민주주의를 더 신뢰합니다. 민주주의의 기본이 백성을 하늘처럼 떠받드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건 바로 저쪽에서 그렇게 했거든요.
-마지막 말씀, 한 번만 더 해주시겠어요? 어쩌면 그것은 선생님의 이상향일 뿐만 아니라, 힘 없고 가난한 백성이,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역사의 주체인 백성이 정치에 대해서 갖고 있는 가장 근본 생각이 아닐까 싶으니까요.
-백성을 하늘처럼 떠받드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라는 거 그거 말인가요? 그렇다면 그건, 내가 북에서 다 경험한 것입니다.
-185쪽

-전에 비전향 장기수 선생님들이 하시던 말씀이 기억나요. "남파 ‘간첩’이라는 말은 옳지 않다. 간첩은 적국에서 활동하는 첩자를 말하는 것이지만 우리에게 남조선은 적국이 아니다. 그러므로 남파 ‘공작원’이라고 해야 옳다." 선생님도 같은 생각이시겠지요?
-예, 간첩이란 국가 기밀을 빼돌리는 사람인데 우리는 통일 사업을 하러 내려온 것이니까요. 정전협정이 조인되고도 미국 때문에 통일 문제는 한 번도 제대로 거론되지 않았어요. 국제회의에서 여러 번 정당한 남북통일 방안들을 제기했지만, 남쪽에서는 보도도 안 되고 잘 알려지지 않았지요. 그래서 남쪽에 알릴 필요가 있어서 내려왔지요. 그게 1954년이었어요.
-259쪽

세계의 주인은 인간입니다. 인간의 주인은 자신이고요. 그러므로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며, 스스로가 주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노동자가 혁명을 하는 것도 다 주체이기 때문에 가능한 거지요. 그러므로 주체사상의 가장 기본은 내가 나의 주인이라는 ‘자주성’, 그러기 위해서 창조적인 활동을 하는 ‘창조성’, 거기에 주요하게 작용하는 것이 의식이라는 ‘의식성’ 이렇게 세 가지를 듭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공화국이 처한 현실에서 나온 겁니다.
-268쪽

-남에서 주체사상이란, 객관적으로 연구되기보다 이데올로기 힘 겨루기 과정에서 왜곡되고, 과장되고, 폄하되었다고 보여집니다. 또 최근에는 주체사상 논쟁 자체가 허구라는 시각도 있고요. 왜냐하면 결국 주체사상이란 북한 체제의 역사적인 형성물이자 체제 정당화의 이데올로기인데 그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논리를 정당화할 수가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그건 허구라기보다는 회의론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모든 사상이 역사를 떠나서는 이루어질 수 없잖아요. 주체사상을 흔히 ‘우리식 사회주의’라고 하는 것도 다 구체적인 우리 나라 역사 상황에서 나왔기 때문이에요. 사상이란 게 본디 실제 역사에서 만들어지고 보편화되는 것인데, 어떻게 그걸 떼놓고 말할 수 있겠어요.
혁명이란 과거의 제도를 바꾸는 거예요. 왕이 하는 일을 ‘天命’이라고 했어요. 천명은 사람이 고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사람이 고칠 수 있다, 그렇게 보는 것이 바로 ‘革命’이에요. 여기서 ‘革’은 사람의 손질이 가해진 가죽을 뜻해요. 자연 그대로의 가죽인 ‘皮’와는 다르지요. 곧 천명을 손질할 수 있다, 천명을 바꿀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혁명인 것입니다.-269쪽

한 가지 짚을 것은 자본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이 다르다는 겁니다. 자본주의는 봉건제도를 무너뜨리고 혁명을 이뤘지만, 그 혁명은 거기에서 멈춘 채 권력을 교체하는 것에서 끝났어요. 자본주의가 자랑하는 삼권분립이라는 것도 봉건 군주들, 승려들, 신생 부르주아지들이 야합한 결과물일 뿐입니다. 의회는 신생 부르주아지들이 차지하고, 행정은 봉건 군주 치하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차지하고, 사법은 승려의 몫이 되고 말았어요.

민중은 혁명에 동참했지만, 열매는 돌아오지 않았어요. 혁명이 일어났다고 해도 결국에는 상층부만 교체된 것에 불과하니까요.
-270쪽

사회주의 혁명은 권력을 쟁취한 다음에 비로소 새로운 생산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하니까요. 사유재산을 국유화한다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도대체 상상도 할 수 없는 제도 아닙니까? 바로 거기에서 새로운 체제를 시작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정권을 빼앗아서 그것을 국유화한다는 것은, 권력을 쟁취함으로써 모든 것이 완료되는 것이 아니라 그때서야 비로소 모든 것이 ‘시작’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회주의 혁명도 권력을 쟁취한 뒤에 이루어졌지만 그렇다고 하나의 사회가 완성됐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에요. 인간 의식을 바꾸면서 좀 더 높은 사회로 전진해야 하죠. 더 높은 사회로 전진해야 하죠. 더 높은 수준의 사회는 있을망정, 완성된 사회는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 거예요.
-271쪽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좀 더 높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그 점에서 나는 ‘인간의 의식 개조’가 가장 중요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인간은 오랫동안 사유제도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욱 의식을 바꾸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물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언제나 인간의 정신이에요. 미국이 쿠바같이 작은 나라도 어쩌지 못해서 쩔쩔매고 있는 것을 보아요. 50년 동안이나 온갖 모략과 압박을 가하면서 북조선을 없애려고 하지만 북조선은 여전히 건재하잖아요.
-그 이유를 사람에게서 찾으시는군요.
-예, 그 사회의 인민들이 당과 수령, 곧 지도자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있기 때문에 못 없애는 거지요. 북이 아무리 독재 사회라지만, 인민들의 저항이 거세다면 저렇게 유지될 수가 없지요. 남에서도 박정희 독재를 겪지 않았나요? 그때 학생들이 끊임없이 일어나서 항거했습니다. 북이 미국에 대해서 아직도 저렇게 당당한 것은 그 사회가 독재체제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옳기 때문에, 옳다는 것이 북의 인민들에게도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272쪽

-그러니까 선생님 사상의 핵심은 바로 ‘사람’이군요. 노동력의 핵심, 역사의 주체, 그러나 완전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의식 개조를 해야 하는 존재. 그것을 이른바 ‘민중’이라는 말로 표현해도 괜찮을까요? 전에 선생님이 하늘처럼 떠받들어야 한다고 한 바로 그 ‘백성’이라는 표현으로 바꾸어도 되는 거지요?
-허허. 그렇게 보아도 되겠지요. 진정한 혁명이란 바로 백성, 사람, 민중에게서 시작된다고 나는 믿어요. 그리고 그 믿음이 나의 바탕이라고 생각해요.
-273쪽

-지금껏 선생님의 수감 생활을 듣다 보니 두 가지 생각이 떠오릅니다. 하나는 그 안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낭만도 웃음도 모두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것. 또 하나는 그 안에서도 "역사는 흐른다"는 거예요.
-327쪽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가족들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았어요. 근본적으로 내 탓이 아니라 세상이 그런 상황을 만든 것이라는 마음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나는 역사의 정당한 편에 섰던 것 뿐이었는데 일이 그렇게 되어 버렸다, 그것을 어찌할 것인가? 내 신념은 그때나 지금이나 바뀌지 않았는데 말이지요. 사람들은 나에게 물어요. 여전히 사회주의가 좋으냐고. 그럼 나는 대답하지요. 그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라고. 나는 자본주의 사회가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반드시 새로운 사회가 오는데 어떤 사회가 올 것인지를 모를 뿐이지요. 그것은 우리가 창조해 가는 과정이에요. 공산주의 사회가 좋다고 단번에 완벽한 공산주의 사회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지요.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면 허무주의에 빠지게 돼요. 그리고 그건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지요.
-332쪽

우리는 먼저 현실을 인정하는 데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어요. 좀 더 높은 사회가 분명히 있고, 또 그곳으로 가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러려면 많은 장애들을 겪어야 하지요. 그 장애를 제거하는데 5년이 걸릴지, 10년이 걸릴지, 혹은 1세기가 걸릴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지요. 그러므로 모든 것은 현실을 살아가면서 극복해 가야만 하는 것이지요. 더 높은 사회를 향하는 꿈을 잃지만 않으면 되요. 이런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면서도 얼마든지 미래를 지향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지요.
-334쪽

모든 역사의 발전 과정에는 특수한 계기가 있어요. 좀 더 높은 사회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더 많은 준비를 해야 할 것이구요. 나는 그 과정을 살아가는 사람이지요. 그 과정을 만들면서 바꾸고 나아가는 사람……. 나는 그렇게 살아 있어요. 하하하.
-336쪽

선생님은 오래된 기억들도 마치 앨범을 넘기듯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십 년 전 일도 희미한데, 사람 이름이나 지명까지도 정확히 기억해 내셨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선생님은 항상 사람을 먼저 떠올리고 그 뒤에 상황을 정리하셨습니다. 기억의 힘은 바로 사람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박건웅)
-345쪽

생각이 다르다는 것은 세상을 다양하게 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우리와 다르게 살아온 한 사람을 그 사람이 살아온 삶 그 자체로 인정하고 역사의 기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적어도 이 땅이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고 서로 다른 생각들이 공존하며 자유롭게 사는 민주주의 사회라면 말이지요.(박건웅)
-3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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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산주의자다 1 평화 발자국 4
허영철 원작, 박건웅 만화 / 보리 / 2010년 5월
구판절판


자꾸 6월 25일만 강조해서 남침이냐 북침이냐를 묻는데, 그러면 내가 말해요.
"전쟁의 처음은 당신도 나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다. 누가 평화정책을 추진했는지 누가 도발정책을 추진했는지 그것을 먼저 물어봐야 한다."라고요.-267쪽

감옥에서도 비슷한 말 많이 들었어요. 그리고 꼭 묻지요. 자유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중 어느 것이 좋냐고. 지치지만 그래도 대답은 해요.
"공산주의는 우리가 이상으로 삼고 지향하는 사회다. 그러나 아직까지 건설되지 못했다. 우리가 지금까지 실시해 온 경험은 모두 그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다."라고요. 또 자유 민주주의라고 할 때 과연 그 자유가 뭘까요? 자유를 위해 한없이 경쟁해야 하는데 결국 자기가 살아남으려고 다른 사람을 눌러야 하는 거 아닌가요?-276쪽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는 한 집단에 딱 한 사람만 일등이 될 수 있어요. 그러려면 나머지 사람들을 모두 이겨야 하지요. 하지만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집단에 속한 모두가 최우등생이 될 수 있어요.-277쪽

-선생님께서 당을 비난할 때도 있으시군요.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잡는 것도 당원의 책임이니까요.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사업을 조직한 중앙당보다 실천을 담당했던 지방당에 더 큰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요.

-어쨌거나 지도부 잘못으로 민중들이 고통을 겪은 것은 사실이겠지요. 게다가 민중들이 그렇게 지지했는데도 결국 투쟁은 실패했거든요. 그 까닭은 무엇으로 보시나요?

-군중을 동원하면서 바로 그 군중을 속였다는 게 문제예요.-2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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