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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여행자의 아내 - 전2권 세트
오드리 니페네거 지음, 변용란 옮김 / 미토스북스 / 2006년 2월
평점 :
절판
추천 음악 : 이승환 5집 "애원" (가사를 염두에 두면서 들을 것)
추천 만화 : 박희정 "호텔 아프리카"
모두들 너무 떠들썩 해서 괜히 심드렁하게 책을 펴들었다. 마치 '얼마나 대단한 지 한 번 읽어봐 주겠어' 라는 심정으로... 책을 덮고, 그 자만했던 마음이 미안하고 이렇게 내게로 와 준 책이 고마워 찡-한 느낌에 잠시간 침묵을 지켰다.
시간 일탈 장애라는 판타지적 소재를 갖고 있지만 '사랑'이라는 지극히 고전적인, 그리고 영원한 주제를 다룬 이 책은, 떠미는 것도 없이, 강요하는 것도 없이, 올곧이 그 진솔함으로 독자에게 감동을 선사한다. '사랑'이라고 하는 말이 진부하지도 가식적으로도 보이지 않고, 가슴을 울리는 절절함으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독자에게 있어 최고의 선물이었다.
너무도 다양하고 이색적인 재미가 많은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인데, 웬만한 걸로는 눈물 한방울 안 흘리고, 감동도 없다 하고 괜히 안티짓이나는 하기 일쑤인데, 그 건조한 감정을 갖고 사는 메마른 우리에게 '일생에 걸친 기다림=사랑'을 보여준 두 주인공의 '삶' 이 너무도 먹먹하여 참으로 오랜만에 눈물도 흘려보았다.
마치 거대한 퍼즐의 조각 하나하나씩을 짜맞춰가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는 과거와 미래 현재가 중첩된 시간의 전개는 흥미와 재미를 떠나서 독자에게 그들의 운명을 선고하는 것 같아 절박한 긴장감마저 갖게 한다.
영화 '나비효과'에서도 시간을 이탈하여 운명을 바꾸고자 하는 주인공이 나오지만, 그가 바꿔버린 운명은 그가 원했던 숙명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같은 자리를 맴돌며 오히려 더 나락으로 빠질 뿐이었다. '시간 여행자의 아내'에서 시간 일탈 장애를 겪고 있는 헨리는 '나비효과'의 주인공보다 소극적일지언정 훨씬 겸손하다. 그는 바꿀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기에 무리하지 않고 억지를 부리지도 않는다. 닥쳐올 미래가 끔찍하고 감당하기엔 벅찬 시련이 몰려와도 절망 속에 허우적거리기 보다 그 안에서 숨쉴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하기 위해 애를 쓴다. 재빨리 도망칠 수 있게 달리기를 연습하고 자물쇠 따는 법, 소매치기, 심지어 적절한(?) 폭력까지도 익히는 그의 모습에, 도덕성의 잣대를 들이밀 수 없는 것은 그에게는 치명적인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심지어 그는 과거의 자신에게 찾아가 그 기술을 가르치고, 미래의 딸을 위해 영상으로 남겨놓는 주도면밀?까지 보여준다.) 노력하고 애쓰지만 그에게 닥쳐온 미래란 너무 가혹했지만. 그러나 또 생각해 보면, 그의 운명은 그가 만들어 간 운명인 것도 사실이다.
그가 클레어와 현실의 시간에서 만난 것은 클레어가 그를 알고 지낸 지 14년이 지난 후(1991년)였지만, 그녀가 그를 만날 수 있는 필연을 준비한 것은 미래에서 온 그가 알려준(1989년) '시카고'라는 단서가 큰 몫을 해냈다. 그는 이미 14년 전1977년)부터 그녀와 만날 조건을 만들어 온 것이다. 또 친구 고메즈가 미래에서 주식으로 큰돈을 번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그에게 주식 정보를 귀띔해 주지만, 그것은 그가 주가가 오를 종목을 알려주었기에 닥쳐오는 미래의 결과이다. 그에게는 미래와 과거가 시간과 공간의 구분을 떠나 공존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의 삶에는, 그리고 그를 둘러싼 주변인들의 삶은 '원인'과 '결과'과 순서 없이 뒤섞여 있다. 원인이 곧 결과이고, 결과가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 모두의 만남은 곧 숙명이고 운명이 된다.
사람이 미래를 모르고 살면 불안할 수는 있으나 불행하지는 않다고 홍세화씨의 글에서 본 기억이 난다. 역사 교육의 문제를 얘기하면서 나온 화두였는데, 이 작품을 보면서 '미래'를 안다는 것이 미칠 수 있는 영향을 보며 오싹해지는 서늘함을 느꼈다.
그렇게 본인의 의지와 아무 상관 없이, 또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맞닥뜨리는 미래의 '진실'에 늘 무방비 상태의 헨리는 힘없는 약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헨드릭 박사를 설득해 내었고, 치료에 응했으며, 본인은 실패했을지언정 딸에게만은 희망을 주고자 안간힘을 쓴다. 그런 그의 노력의 결과가, 그가 버겁다고만 느끼게 했던 시간 여행을 앨바에게는 '재미'를 주는 여행으로 느끼게 한 것이 아닐까. 그가 딸을 위해서 준비한, 그가 해낼 수 있는 최고의 선물도 그것이 아니었을까.
재미로도, 막연하게나마 누구나 '타임머신'으로 과거든 미래든 어디로든 갈 수 있다면... 하는 상상을 해보았을 것이다. 그 심심풀이 상상조차도 꽤 미안해질 만큼 '시간 여행자의 아내'는 진지하게 그들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단 한번도 서두르지 않고.(그래서 1권에서 아주 가끔 지루하기도 했지만) 고른 호흡을 유지하는 작가의 솜씨는, 첫 작품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섬세해서 2권에 이르면 오히려 가빠지는 호흡으로 다음 장을 넘기기 힘들어하는 내가 약오를 지경이었다.
배달 받은 책 2편에 제본 오류가 있어서 8장이 누락되는 바람에 클라이막스 앞에서 좌절한 경험이 나를 아프게 했지만...;;;; (책 다시 오기를 못 기다리고 교보문고에서 재빨리 8장을 읽어주는 센스ㅡ.ㅡ;;;;) 오히려 그렇게 한템포 쉬어갈 수 있어서 작품에 더 몰입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결과가 좋으니 과정도 좋았다는 망각이^^;;;;)
책을 읽는 동안에는 왜 제목이 시간 여행자의 '아내' 일까 생각했다. 주인공은 헨리이고, 시간 일탈 장애를 겪는 것도 그이고, 그로 인해 모든 사건이 일어나는데, 그만큼 비중이 있지만 조금 더 부수적인 역할을 한 아내 클레어가 제목이 되었을까... 그 이유를 책을 다 덮고 알 것 같았다. 헨리는 '사랑해'라는 한 마디로 그의 아내에 대한 마음을 모두 표현해낼 수 있었지만, 그 '사랑'을 받고 또 그 이상으로 내준 클레어에게는 '사랑해' 라는 말만으로는 그 마음이 다 표현되지 않는다. 그녀에게는 매번 예고 없이 사라지고 언제 돌아올 지 모르는 남편을 향한 끝없는 '기다림'이 요구된다. (호텔 아프리카에서 아델라이드가 남편과의 짧았던 행복과 긴 기다림을 회상하며 울던 장면이 오버랩된다.) <그러나 또 동시에 헨리가 그 위험천만한 시간 여행 중에서도 계속해서 현실로 돌아올 수 있고, 또 돌아가고프게 만드는 것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아내의 존재감이다. 나중에 그녀가 헨리의 오랜 부재를 버티게 하는 힘도 장차 만날 수 있는 헨리의 '존재' 때문이라는 것은 몹시 아이러니하며 또 필연적이다. > 그녀에게는 결국 "자신=남편"이었고, "그녀의 삶=남편의 삶"이었다. 그래서 동시에 그녀에게는 "사랑=기다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그들의 사랑을 온전히 완성시키는 것은 클레어의 대가 없는 '기다림'인 것이다. 아마 결과를 알고 다시 태어난다 할지라도, 그녀는 같은 삶의 과정을 밟아나가리라.
작품의 엔딩에 나오는 영상을 머리 속에 그려본다면(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그녀가 그토록 오래도록 기다려온 남편과 재회할 때의 그 표정, 주변 배경과 그녀의 달라진 모습까지도 모두 세밀하게 상상을 해본다면, 이 슬프고 감동적인 작품을 우리는 박수를 치면서 덮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로 만들어진다는 소식에 조금은 긴장이 되고 또 기대가 된다. 기네스 펠트로의 분위기는 클레어와 잘 맞아떨어질 것 같다. 몹시 섬세해야 할 이 작품을 감독이 얼마나 훌륭한 요리로 만들지 궁금하다. 혹여 작품의 묘미를 반감시킬까 조금 걱정도 되지만, 감독도 똑같은 감동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되는 바 믿고 기다리는 게 좋을 듯 하다.
작품에서 또 한가지 좋았던 점은, 미국인들의 생활, 그들의 삶, 문화, 가족 등등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 같아 이것 역시 작가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녀가 몸 담고 있는 그 종이 예술의 맛보기도 흥미로웠음은 물론이다.
덧붙여, 표지 그림도 참으로 따스하고 이뻤다. 겉표지에서 한지의 느낌이 났는데, 지극히 서양적인 책에서 동양의 향기를 느꼈달까.
정말정말 오랜만에 300% 만족의 책을 만나 먹지 않고도 배부른 뿌듯함이 넘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접하기를 바라며...
그러나 절대로 그런 장애를 겪는 사람은 나오지 않기를 바라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