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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막상 리뷰를 쓰려고 하니까 제일 먼저 떠오르는 영상이 안녕 프란체스카에서 두일이가 맛있게 먹던 치킨이 비둘기 요리라는 것을 알고서 한강변을 달리며 외치는 장면이었다. "비둘기야, 비둘기야, 평화의 상징 비둘기야...." 라며 한탄하는 장면이지만, 시트콤에서 그 장면은 엄청 코믹했었다.
깊이에의 강요를 워낙 재밌게 읽어서 비슷한 두께의 이 책도 비슷한 분위기나 느낌을 받지 않을까 기대했었는데, 책을 펼쳐보니 분위기가 영 딴판이다. 한 마디로, 황당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황당한 이야기를 작가는 썼을까 생각해 보게 한다.
은행 경비원 조나단의 인생은 파란만장했다. 그러나 파란만장한 자신의 인생을 그 자신은 그닥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30년 동안 한 직장에서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며, 결혼도 않고 자식도 없이 그렇게 살아온 자신이지만 불만도 없고, 그렇다고 크게 서러울 일도 없다. 그는 그냥 자신의 그 똑같은 패턴의 하루하루를 자족(?)하며, 혹은 자족한다고 믿고 살고 있다. 그런 그의 일상에 파란을 몰고 올 존재가 등장하니, 바로 비둘기 한마리다.
어느날 아침, 자신의 집 앞 복도에 비둘기가 똥을 싼 채 어슬렁거리고 있다. 조나단은 충격을 받았다. 비둘기가 너무 무서운 것이다. 무섭고 불결하고, 곁에 스치기만 해도 하늘이 두조각날 것처럼 큰일이 발생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화장실 가기도 포기하고 방안 세면대에서 볼 일을 해결한다. 한여름에 한겨울 복장을 한 채 도망치듯이 집을 빠져나온다. 은행에서는 실수 연발이다. 모든 것이 불안하고 또 불안하다. 저녁이 되어서는 집으로 가지 못한다. 가장 싼 호텔을 찾아가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 지 계산한다. 그렇게 비둘기 한 마리로 야기된 그의 일상은 폭풍이라도 만난듯 쑥대밭이 되어버리지만, 끝내 인생 마칠 결심까지 할 정도로 흔들린 조나단이지만, 어느 날 그 같은 폭풍우는 언제 그랬냐는 듯 사악 사라진다. 돌아간 집에 비둘기는 없었고, 녀석의 영역 표시도 사라졌다.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나는, 비둘기 한마리로 야기된 이 황당한 이야기도 놀랍지만, 이렇게 작은 에피소드에서 크게 확장되는 이야기를 구성해 낸 파트리크의 감각도 참으로 놀라웠다. 얼핏 느끼기에 조나단은 너무 한심하다. 헌데 책을 읽어보면 그의 공포와 두려움이 내게도 그대로 전달되어, 마치 나라도 그 집에 못 돌아갈 것만 같은 착각이 인다.
이 비둘기로 인해, 조나단은 자신의 인생에 어떤 변화를 맞게 될까. 지극히 단조롭고 똑같았던 일상의 특이한 소동으로 받아들일까. 자신의 인생도 좀 더 동적으로 살아야겠다고 결심할까. 아니면 다시는 비둘기의 침입을 받지 못하게 만반의 준비를 할까. ^^;;;
어찌 보면, 그런 일들이 생기는 것도 같다. 누군가에게는 너무도 큰일이고 엄청난 일이, 남이 보기에는 아무 것도 아닌 일일 수도 있는 것.
또, 평화의 상징이라 일컬어지는 비둘기가 누군가에게는 너무도 추하고 무섭고 불길한 존재로 보일 수도 있다는 야유로도 들리고,
또 한편으로는, 만물의 영장인 척 하는 인간도 한낱 미물로 취급하는 동물에게서 이만큼의 위협을 받을 수 있는 것... 비둘기는 조나단의 공포는 아랑곳않은 채 유유히 제 갈 길을 가는데, 혼자 무한 삽질을 한 조나단0인간에 대한 또 다른 야유...
그러나, 사실 이도 저도 아니라, 그저 작은 에피소드 하나로 큰 이야기를 재밌게, 엽기적으로 꾸려간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장난질일 수도.
어느 쪽이든, 그저 읽고 즐겼으면 사실 아무 이상 없는 것...(ㅡㅡ;;;)
그래도, 깊이에의 강요보다는 창의력에서 조금 떨어지므로 별 넷. 게다가 읽는 동안 같이 찝찝했으니 역시 별 넷.(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