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TV 2006-10-30 22:42]    
<8뉴스>

<앵커>

마음 놓이지 않는 먹을 거리 소식 하나 더 전합니다. 인체에 치명적인 납에 오염 된 쌀이 은밀하게 유통되고 있었습니다. 폐광 근처에서 수확된 쌀인데, 당연히 소각돼야 할 쌀들이 어떻게 버젓이 유통될 수 있었는 지 정영태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기자>

경기도 광명시의 양곡창고.

올해 수확된 벼가 수북히 쌓여있지만 모두 소각처리 대상입니다.

지난 11일 기준치 0.2 ppm이 넘는 납이 검출됐기 때문입니다.

소각 대상은 경기도 광명과 화성의 폐광 근처 36개 농가에서 수확한 벼 15만2천kg입니다.

[광명시 담담 공무원 : 친척들한테도 줄 수도 있는 부분이니까. 계속 설득을 했어요. 다른 데로 유출된 것은 한마디로 없는 것으로 보고...]

하지만 일부 농민들은 아깝다는 이유로 공공연하게 납이 검출된 벼를 직접 먹거나 주변에 유통시킨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폐광지역 농민 : 20가마만 준다고 했어요. (20가마만 주고? 총 나온 게 몇 가마니인데요?) 그거는 내가 얘기 안 하고...먹고 죽는다고 해도 여태까지 살았는데.]

지난 3년 동안 광명과 화성에서 생산돼 유통된 벼는 45만kg.

80kg 들이로 5천6백여 가마 분량이나 됩니다. 모두 납 오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농림부는 추정하고 있습니다. 

지난 2천 2년까지는 카드뮴이 검출돼 모두 소각 처리했지만, 2천 3년부터는 카드뮴이 기준치 이하로 나오면서 판매가 허용됐습니다.

그러나 의사들은 납에 오염된 쌀도 먹어선 안된다고 말합니다.

[김동일/강북삼성병원 산업의학과 전문의 : 오랫동안 적은 양에 노출되는 경우라도 간이나 콩팥 뇌 심지어는 골수까지 영향을 미쳐서 빈혈 증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달 들어 중금속 실태를 조사하고 있는 전국 폐광지역 44곳 역시 비슷한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농림부는 그러나 몇 곳이나 기준치를 초과했는지는 공개할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폐광지역 농작물에 대한 정확한 오염과 유통 실태를 파악해 대책을 마련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정영태 jytae@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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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10-31 0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타깝다.ㅡ.ㅜ

하늘바람 2006-10-31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광명과 화성에서 나온 쌀은 먹음 안된다는 건가요? 흑

마노아 2006-10-31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 퍼졌을까요? 안심할 게 없어요. 자급자족 하며 살지 않는 한...ㅡ.ㅡ;;;;

비로그인 2006-10-31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품 쌀이라고 선전하는 브랜드 있는 비싼 쌀 소비자 대상으로 블라인트 테스트하면 일반쌀하고 구별 못한다던데요..

마노아 2006-10-31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품 쌀.... 트허..;;;;;
 

소파 위에서 퍼뜩 잠이 들어 두시간 가까이 지나버렸다.

오늘의 목표도 일찍 할 일 정리하고 12시 전에 자는 거였건만, 12시는 이제 지났고,

나는 할 일을 이제부터 해야 한다는 이야기.ㅡ.ㅡ

이래서 피곤의 악순환이 지속된다.  아... 졸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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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6-10-31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구 졸려서 어떻해요. 내일 아침에 출근하셔야 하시는데요.
정말큰일나셨네요(농담). 오늘 잘 지내셨지요. 내일 하루도 잘 지내시기를

실비 2006-10-31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피곤의 반복으로. ㅠ_ㅠ 자야하는데 자꾸 머가 일이 생기네요?!

마노아 2006-10-31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도 알딸딸 졸린데, 잠이 깨면 더 큰일이에요. 어여 마치고 잠자리에 들기가 목표랍니다.^^
오늘 하루, 지난 주보다는 좋았어요. 내일은 더 멋질 거라고 기대해요. 님도 멋진 하루 보내셔요^^

마노아 2006-10-31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비님, 일짝 잠드는 게 피곤을 몰아내는 지름길 같아요. 그런데 이게 정말 힘들더라구요. 우리 노력해요ㅡ.ㅜ

실비 2006-10-31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찍 자야하는데 알라딘에서 저를 잡네요.ㅎㅎ

마노아 2006-10-31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핫, 맞는 말이에요. 또 다시 댓글 브리핑이 엄청 밀렸어요^^;;;

하늘바람 2006-10-31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피곤하시나요? 아자아자

마노아 2006-10-31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시간 자고 나왔어요. 피곤한 건 둘째 치고, 오늘의 복장에 너무 심난해요ㅡ.ㅡ;;;
 
플라이, 대디, 플라이 더 좀비스 시리즈
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가끔 이런 일이 생기는데, 분명 내가 리뷰를 썼다고 여긴 작품에 리뷰가 없다. 어라??

구판에 썼나...? 하며 찾아보았지만 역시 없다.  내 마이리뷰를 검색해 보아도 없다.  그러니까, 안썼다라는 말이다...;;;; 그래서 뒷북을 치기로 했다. ^^

가네시로 카즈키는 레벌루션 넘버 3로 만났는데, 그 작품의 뒷 이야기다. 더 좀비스의 활약이 여전히 눈부셨고, 이번엔 청소년뿐 아니라, 중년 아저씨도 나오니, 이미 영화로도 제작된 탓에 많이들 익숙할 것이다.

어찌 보면 스피드 하고 내용이 비슷하다.  어떤 일로 좌절을 겪은 새 주인공이 더 좀비스의 일원을 만나 자신을 단련하고 마지막에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통쾌하게 복수를 해주는 것..  다만 스피디는 여고생이 주인공이지만, 이 작품에선 여고생 딸을 둔 아버지가 주인공이라는 게 다를 뿐이다.

이번에도 박순신은 멋지게 아버지를 단련시켜 주었다.  이준기가 과연 어떻게 소화를 했을 지 궁금은 하지만 굳이 영화를 챙겨볼 마음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 때문에 책도 재미 없다고 사람들이 지레 짐작하지 않을까 조금 걱정....;;;;

일본의 아버지들도 우리나라의 아버지들과 비슷할 것 같다.  한 집안의 가장이지만 제대로 폼도 안 나고 위엄을 갖추기도 어렵고, 직장에서는 깨지기 쉬운... 일단 이런 이미지들이 떠오르는데, 자식 앞에서 당당한 아버지로 자리매김하지 못할 때에 갖게 될 치욕이 쉽게 예상된다.  작품 속 아버지는, 딸 아이를 폭행한 고등학교 권투선수에게 복수하기 위해 칼까지 갖추어 찾아가지만, 더 좀비스가 있는 엉뚱한 학교로 잘못 찾아가는 바람에 그들과 인연을 맺고 복수의 장을 만들게 된다.  박순신은 아버지를 날마다 운동으로 단련시키고, 아버지는 그 와중에 몸과 마음의 건강을 되찾는다.

준비한 과정이 다 끝나고 도전장을 내밀지만, 복수란 쉽지 않다.  한 발자국을 더 내딛을 것인가, 그대로 주저앉을 것인가의 중요한 순간에, 아버지는 전진하기로 결심한다.  그때에 복수는 완성된다.

그래서, 작품을 다 보고 나면 제목을 참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개정판은 참 참 참... 디자인이 꽝이다.ㅡ.ㅡ;;;;

더 좀비스가 활약한 책이 레벌루션과 스피디와 플라이... 등등이 출간되었는데, 워낙 재밌는 캐릭터들이어서, 이제 그들이 사회에 나가서 활약하는 모습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언제까지나 고등학생일 수도 없고, 발생하는 사건의 종류도 확연히 다를 테니 말이다.  어디 끝까지 날아봐, 플라이 플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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씩씩하니 2006-10-31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 스토리...알아요,,,그냥 아,,감동적이겠다,생각했어요...
아버지가,,그렇게...딸을 위한 복수를 실행에 옮긴다는 것이 모든 것을 떠나,,그냥,참 슬프고 아름답게 느껴져서요...
님 별 갯수 찾아보구,,,얼른 담아둡니다,,추천 꾹~

마노아 2006-10-31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헷, 가네시로 카즈키 작품이 굉장히 유쾌해요. 슬픈 내용도 그는 즐겁게 얘기한답니다. 추천 고마워요^^

비로그인 2006-11-01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작의 빛이 너무 강해서 ..박민규도 삼미수퍼스타즈..그 책이 너무 강열해서 후속작들이 평가가 별루였죠.

마노아 2006-11-01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오쿠다 히데오도 공중그네가 너무 재밌으니까 인더풀도 걸도 별로였어요. 남쪽으로 튀어로 만회했지만요.^^
 

http://www.hani.co.kr/arti/cartoon/100tech/16802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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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독도수비대, '영웅'은 없었다
[오마이뉴스 2006-10-30 11:07]    
한국전쟁의 혼란 속에서 사재를 털고 목숨을 걸며 3년 8개월간 독도를 지킨 것으로 알려진 독도의용수비대. 하지만 최근 이들의 활약이 과장·왜곡됐다며 "이제는 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습니다. 당시 독도 수비는 독도의용수비대가 아니라 국립경찰이 도맡아했다는 것입니다. <오마이뉴스>는 바른 '독도수호사(獨島守護史)'를 후세에 남기기 위해 3차례에 걸쳐 이같은 사실을 보도합니다. <오마이뉴스 편집자 주>
[오마이뉴스 김영균 기자] - 취재 : 김영균 기자
- 동영상 : 김호중 문경미 기자


▲ 1954년 8월 28일 독도 동도에서 열린 경비초소 기념 사진촬영. 독도의용수비대는 1953년부터 활동했다고 기록돼 있으나 실상 1954년 4월부터 1954년 12월까지 8개월간 미역을 채취하면서 독도경비를 병행한 것으로 밝혀졌다. 아래쪽 붉은원이 고 홍순칠 대장.
ⓒ2006 독도박물관

"1953년 4월 20일 창설. 미군으로부터 소총과 기관총을 훔쳐 독도 경비. 일본 수산고등학교 실습선 하도마루호 나포.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순시선 해구라호, 오키호 등과 수차례 총격전 격퇴. 일본 항공기와 대공전투. 독도 동도에 '한국령(韓國領)' 암각. 1956년 12월 국립경찰에 독도방어 임무를 넘겨주기까지 3년 8개월간 독도 수호."

독도박물관과 국립경찰사 등의 기록에 남아있는 '독도의용수비대(대장 홍순칠·작고) 33명'의 활약상은 이처럼 눈부시다. 하지만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던 이 영웅들의 이야기가 사실과 다른 것으로 밝혀진다면 어떨까.

지난 9월말 <오마이뉴스>는 "독도의용수비대의 활약상이 왜곡·과장됐다"는 제보를 받았다. 이 제보를 근거로 20여 일에 걸쳐 경북 포항과 경주·울릉도, 그리고 울산광역시에 흩어져 살고 있는 독도의용수비대원과 전직 경찰관들 10명을 추적해 만났다. 아쉽게도 '왜곡·과장'이 사실로 확인됐다.

재향군인들 달래려 '독도 미역 채취 3년' 독점권

가장 먼저 확인된 점은 독도의용수비대의 영웅담은 창설 시기부터 활동 기간, 활동 내용이 과장되거나 왜곡됐다는 것이다.

지금껏 알려진 공식 기록에는 독도의용수비대가 1953년 4월에 창설됐고, 3년 8개월 동안 독도에 상주하며 수차례 전투를 치러온 것으로 돼있다.

"홍순칠씨가 독도에 처음 들어간 것은 1954년 5월이다. 군에서 제대한 홍씨가 울릉도 재향군인회를 결성하자 당시 울릉경찰서장이던 구아무개씨가 울릉군수, 어업협동조합 이사와 협의해 울릉도 최대 이권사업인 독도 미역채취권을 3년간 맡긴 게 독도의용수비대가 시작하게 된 계기다."

지난 9월말 경북 포항시에서 만난 김산리(78세)씨는 당시 상황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1954년 당시 경사 계급으로 울릉경찰서 병사계장을 맡았던 김씨는 의용수비대가 "원래는 미역을 채취하러 들어간 사람들"이라고 확인했다.

"당시 일본 순시선이 자주 출몰하고 하니까 위험하다고 총기를 달라고 했는데, 경찰에서는 민간인에게 총기를 그냥 줄 수 없어 처음에는 의용경찰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무기를 대여해준 것이다. 미역을 채취하는 김에 경찰에 협조해 독도경비도 같이 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홍순칠 대장을 비롯한 재향군인회에 독도 미역채취권 3년을 보장한 이유에 대해 김씨는 "당시 재향군인회의 행패가 이만저만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회고했다. 이권사업을 줘서라도 상이군인들을 달래야 했다는 것이다.

전 수비대원 "길게 잡아야 8개월 경비했다"

▲ 단기 4287년 8월 28일 독도경비초소 건립 기념 사진. 서기로 환산하면 1954년 8월 28일이다. 사진 오른쪽과 아래 경찰관들이 보인다. 독도의용수비대는 경찰이 아닌 자신들이 독도를 지켰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 때부터 독도는 민간인이 아닌 경찰관이 경비임무를 맡고 있었다.
ⓒ2006 독도박물관
홍 대장을 비롯한 민간인들이 독도의용수비대란 이름을 달고 독도에 처음 상륙한게 '1954년 봄'이었다는 점은 전직 수비대원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독도의용수비대 제1전대장으로 이름이 올라 있는 서기종(78세·울산광역시)씨는 "1954년 4월 홍순칠 대장과 6명이 처음 독도에 들어갔다"고 전했다.

"1954년 8월 제대하니까 홍순칠씨가 불러서 '독도의용수비대를 같이 할 생각이 없느냐'고 했다. 그래서 얘기를 들어보니까 좋은 뜻 같아서 같이 하기로 했다. 나는 나중에 합류했는데 그 몇달 전에 벌써 몇명이 다녀왔다."

독도의용수비대 활동이 1953년이 아니라 1954년부터 시작됐다는 점은 1978년 출판된 <다큐멘터리 독도수비대>란 책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홍 대장은 이 책 서문에서 "우리가 1954년부터 3년간 무인고도 독도에서…"라고 썼다. 스스로 독도의용수비대의 결성 시기를 1954년으로 인정한 셈이다.

작고한 고 홍순칠 대장의 딸인 홍연순씨도 "정부가 독도의용수비대 활동 시작을 인정하는 시기는 1954년이 맞다"고 전했다. 다만 홍씨는 "민간인이던 아버지(홍순칠)가 독도에 처음 상륙한 의미있는 날짜는 수기(홍순칠 저, <이 땅이 뉘 땅인데>)대로 1953년 4월 20일이라고 알고 있다"고 말했다.

독도의용수비대의 해산 시기도 사실과는 크게 다른 것으로 확인됐다. 현재 정부는 독도의용수비대가 1956년 12월까지 활동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생존 수비대원의 증언에 따르면, 독도의용수비대는 결성된 그 해(1954년) 12월 사실상 활동을 중단했다. 독도의용수비대원 중 일부가 경찰로 특채되면서 경비업무 자체가 경찰로 넘어간 것이다.

서기종씨는 "1954년 12월 독도의용수비대원 중 9명이 울릉경찰서 경찰관으로 특채됐다"며 "그 이후에는 독도의용수비대가 아니라 경찰관으로서 독도 경비 업무를 했다"고 밝혔다. 독도의용수비대 제2전대장이었던 정원도(78세·경북 울릉군)씨도 "1954년 12월에 경찰관으로 특채됐다"고 회고했다.

전직 독도의용수비대원들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자료는 오래된 을릉경찰서 배명기록(근무명단)에도 남아있다. 1955년 울릉경찰서 배명기록에는 1954년 12월 독도의용수비대원에서 순경으로 특채된 9명의 명단이 그대로 나와있다.

당시 순경으로 채용된 9명은 서기종(제1전대장)·정원도(제2전대장)·김영복(제2전투대원)·이규현(제2전투대원)·김영호(제2전투대원)·황영문(수비대 부대장)·이상국(제2전투대원)·양봉준(제1전투대원)·하자진(제1전투대원)씨 등이다.

반면 홍연순씨는 "1956년 12월 독도의용수비대가 경비 임무를 국립경찰에 넘겨주면서 15명이 한꺼번에 경찰관으로 특채된 것으로 들었다"고 말했다. 이는 홍순칠 대장의 수기에 나와 있는 내용 그대로다.

▲ 알려진 사실과 다르게 독도의용수비대원 중 9명은 1954년 12월 정식 울릉경찰서 경찰관으로 발령받았다. 독도의용수비대는 이때부터 사실상 해체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서기종, 하자진, 정원도 씨(오른쪽부터) 등 독도의용수비대원의 명단이 당시 울릉경찰서 근무자 명단에 올라 있다.
ⓒ2006 독도박물관
증언과 기록을 종합하면, 독도의용수비대의 실제 활동은 1954년 4월부터 같은 해 12월까지 단 8개월뿐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울산에서 만난 서기종씨도 "독도의용수비대로 활동한 것은 길게 잡아도 8개월 밖에 안 된다"는 직접적인 증언으로 이를 뒷받침했다.

전직 경찰들 "고작 2~3개월 경비... 미역 캐러 가놓고 경비라니"

그렇다면 독도에 상주하며 경비했다고 알려진 나머지 기간 동안의 독도의용수비대의 활동은 무엇일까. 당시 상황을 기억하는 울릉도의 노인들은 "제주도 해녀들과 함께 미역을 채취했던 게 고작"이라고 입을 모았다.

1953년부터 울릉경찰서 경사로 10여 차례 독도 경비대장을 맡았던 최헌식(85세·경북 울릉군)씨는 "홍순칠 대장이 미역캐러 다닌 것은 나이든 울릉도 사람들이 다 안다"고 말했다.

"홍 대장이 남긴 다큐멘터리 수기를 봤는데, 3년 8개월 동안 독도를 지켰다는 기록은 95%가 거짓말이다. 울릉도 사람들한테 물어보면 '자기(홍 대장)가 언제 독도 지키러 갔느냐, 미역캐러 다녔지'라는 말이 대부분이다. 순 엉터리다."

최헌식씨는 "1954년 7월 울릉경찰서가 예산을 들여 독도 초소를 짓고 8월 말부터 경비를 시작했다"며 "독도의용수비대가 경비를 했다고 주장하더라도 고작 2~3개월 밖에 안했다"고 지적했다.

울릉도 등에서 경찰관 생활을 한 뒤 경북 포항시에서 은퇴 생활을 하고 있는 박병찬(79세)씨도 "홍 대장은 독도 서도에 30여 명을 데리고 가서 미역을 캐는 일을 했다"고 전했다.

결국 홍순칠 대장이 1953년 4월 20일부터 독도의용수비대를 창설해 1956년 12월까지 3년 8개월 동안 독도를 지켰다는 지금까지의 기록은 사실과 많이 달랐던 셈이다.

그나마 독도의용수비대가 독도를 지키며 경비업무에 도움을 준 것은 길게 잡아도 8개월. 나머지 기간은 울릉도 최대 이권사업인 미역채취에만 전념했다는게 생존자들의 증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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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10-30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슬프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