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A씨는 지난달 26일 오후 8시쯤 서울시내 모 백화점 지하 식품매장에서 1만원권 백화점 상품권과 현금영수증 카드를 제시하고 빵 8000원어치를 샀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 현금영수증(www.taxsave.go.kr) 사이트에서 사용 내역을 조회해 보고 깜짝 놀랐다. 3시간쯤 뒤인 10시58분 가맹점에 의해 일방적으로 구매가 ‘취소’ 된 것으로 나왔기 때문. A씨는 다음날 업소 측에 항의했지만 돌아오건 상품권이 어쩌고저쩌고하는 횡설수설뿐이었고, 결국 국세청에 신고하고서야 구매 내역을 복원할 수 있었다.

연말이 다가오면 직장인들은 조금이라도 더 소득공제 혜택을 받기 위해 분주해진다. 하지만 세계 최초로 도입돼 성공적으로 정착했다고 평가받는 ‘현금영수증’ 제도의 허점이 곳곳에서 드러나면서 소비자들을 골탕먹이고 있다.

더구나 최근에는 세원 노출을 꺼리는 업체들의 현금영수증 거부 방법도 점차 복잡·다양화하고 있다. 현금영수증 발급기가 고장났다며 발급을 거부하는 것은 이제 고전적인 수법이다. 아무 혜택을 받을 수 없는 엉터리 영수증을 발급해주면서 현금영수증을 끊었다고 속이는가 하면, 고의로 휴대전화 번호 입력을 잘못해 효력을 취소시키는 사례도 빈번하다.

물론 A씨와 같은 사례도 드물지 않다. 현금영수증 사용 홍보가 한창이던 지난 1월에는 소비자가 돌아간 뒤 현금영수증 사용 내역을 임의로 취소하는 업소들이 있다는 전화 신고가 잇따르자 국세청이 “자체 분석 후 세무조사에 나서겠다”고 공표했다.

하지만 국세청은 10개월이 지난 지금도 “취소 건수가 많은 사업자를 대상으로 의도적인 취소인지, 단순한 입력 오류인지 분석하고 있다”고 밝혔다. 국세청 전산세원팀 김모 사무관은 “현실적으로 고의 취소 사례는 거의 없기 때문에, 신고를 받은 경우 소비자에게 다시 귀속시키는 절차를 밟고 있다”고 말했다. 세무조사에 착수한 업체는 아직 없다는 것이다.

국세청은 이와 관련해 카드로 현금영수증 서비스를 이용할 경우 가맹점의 임의 취소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소비자들은 “카드를 사용하더라도 카드를 읽는 리더기는 번호를 임시 저장할 수 있도록 설정할 수 있는 데다 POS(대형전자금전등록기)는 카드 번호를 자동 저장하기 때문에 이를 다시 불러내 얼마든지 취소도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실제로 보급형 카드리더기를 보급하는 한국정보통신 관계자는 사용자의 제휴카드 번호나 휴대전화 번호를 기억하면 따로 카드를 긁지 않아도 가맹점이 원하는 대로 발급내역을 취소할 수 있다고 답변했다. 대형 POS를 이용하는 패밀리레스토랑의 박모 부점장도 “카드를 입력해 현금영수증을 발급하더라도 POS가 자동적으로 카드번호를 저장하고 있기에 이를 다시 불러내 임의 취소하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다”고 말했다.

신아인 기자 freewill@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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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11-09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드내면 싫어하면서..ㅡ.ㅡ;;;;
 

동대문운동장도 사라지는가
[한겨레21 2006-11-07 08:03]    

[한겨레] 1925년 세워져 식민지 조선인들 울분 달래던 터에 다목적 공원 조성 계획… 잠실운동장 생긴 80년대 이후 기능 축소… 자리잡은 노점상과의 갈등 남아

▣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그 경기장은 이미 수명을 다한 것처럼 보였다. 푸른 잔디밭이 넓게 펼쳐졌던 축구장 터는 삭막한 아스팔트로 도배된 주차장으로 변했고, 야구장은 빛나던 고교야구 황금기의 추억을 뒤로한 채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진 퇴물로 전락했다. 그래도 야구장에는 이따금 경기가 열리긴 한다.

2006년 10월25일, 야구장에선 2006년도 추계 서울시 중학교 야구대회에 참가한 배재와 경원중 학생들이 악송구와 데드볼을 주고받으며 명승부를 펼치고 있는데, 7-2로 앞서가던 배재중이 5회말 대거 6실점 하며 역전당하자 서른 명쯤 자리를 지키고 섰던 관중석에서 간간이 박수 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축구장은 2004년 1월16일 청계천에서 밀려난 노점상들이 모여든 풍물시장으로 변해 화려했던 옛 명성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갑자원 다음 규모의 종합운동장”

‘장소’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은 우리의 기대만큼 길고 끈끈하지 않다. 건물을 허물고 다시 지으면 그뿐, 사람들은 그곳에 깃들었던 삶의 추억들을 쉽게 잊는다. 개천 복원이라는 업적을 남긴 전임 시장을 따라잡아야 하는 새 서울시장은 지난 10월18일 기자실에 보도자료를 돌려 동대문운동장에 사형선고를 내렸다. “서울시는 시설이 노후하고 기능이 저하된 동대문운동장 터에 역사와 첨단, 물과 숲, 문화와 영상이 어우러지는 다목적 공원을 조성할 계획입니다.” 공원 옆에는 ‘세계적 디자인·패션 산업의 메카’가 될 6층 높이의 ‘디자인 월드플라자’도 건설된다.

동대문운동장이 우리 민족과 호흡을 같이하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81년 전인 1925년 10월15일이다. 그 무렵 지어진 건물로는 서울역사(1925년), 경성부청(서울시청·1926년), 동아일보사(1926년), 지금은 헐리고 없는 조선총독부(1926년) 등이 있다. 그 시절 동대문운동장의 이름은 ‘경성운동장’이었고, 경성부 토목기사 오모리의 설계로 경성부가 총독부의 지원을 받아 옛 훈련원 터 2만2700평에 15만5천원을 들여 지었다.

일어로 씌인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는 1925년 5월30일치에서 “운동장이 완공되면 고시엔(甲子園)에 이어 일본에서 두 번째 규모를 자랑하는 종합경기장이 된다”고 적고 있다. 식민지 반도의 옛 수도에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하는 새 운동장을 지었던 일본인들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경성부가 운동장 관리를 위해 만든 ‘조례’ 1조에는 “본 조례에서 경성운동장은 1924년 동궁(東宮)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설치한 운동장을 말한다”고 적혀 있다. 여기서 동궁은 영친왕 이은이 아닌 훗날 일왕의 자리에 오르는 히로히토를 뜻한다.

운동장의 설치 배경을 따지고 들자면 불쾌한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이후 경성운동장은 식민지 조선인들의 울분을 달래는 창구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운동장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조선에는 배재학당·경신학교·휘문의숙 등 민족학교들의 운동장을 빼놓곤 운동 경기를 펼칠 만한 체육시설이 없었다. 그 때문에 축구나 야구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민가의 담장을 넘어 장독대를 깨뜨리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30년쯤 앞선 시대긴 하지만 영화배우 송강호씨가 주연을 맡아 2002년 개봉된 영화 은 신식 경기시설이 없던 당시 조선의 사정을 사실감 있게 그리고 있다.


비운의 천재 이영민이 ‘본루타’를 날린 곳

식민지 조선의 가장 큰 체육행사는 연고전이란 이름으로 계속되고 있는 ‘연보전’(연희전문-보성전문)과 1929년 조선일보사의 주최로 처음 시작된 경평축구였다. 평양팀은 체력을 앞세운 육탄전이 트레이드마크였고, 서울팀은 연희전문과 보성전문 선수들이 주축이 돼 개인기 전술 위주의 경기를 펼쳤다. 1929년 10월8일 시작된 1회 대회는 서울 휘문중학 운동장(지금의 현대 계동사옥)에서 열렸고, 2회 대회는 1930년 11월28일부터 사흘 동안 경성운동장에서 열렸다. 당시 <조선일보> 기사를 찾아보면 “경기가 있는 날이면 시내는 거의 철시했으며 경성운동장엔 2만 관중이 운집,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고 적고 있다. 당대 축구계의 최고 스타는 경신학교를 거쳐 보성전문 선수로 활동했던 ‘한국 축구의 대부’ 김용식(1910~85)이었다. 그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반도 선수’로는 유일하게 참가해 스웨덴을 3-2로 이기는 결승골을 어시스트한다.

축구에 김용식이 있었다면 야구에는 ‘비운의 천재’ 이영민(1905~54)이 있었다. 그는 1930년대 척박한 한국 스포츠계에서 손기정과 더불어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했던 거의 유일한 선수였다. 옛 기록을 찾아보면 그는 말 그대로 종목을 가리지 않는 만능 스포츠맨이었던 것 같다. 그는 배재학당과 연희전문 시절 축구와 육상 선수로도 여러 대회에 출전해 우수한 성적을 거뒀다. 1928년 6월8일, 그는 경성운동장 역사에 길이 남을 대기록을 수립한다. 경성운동장 최초의 홈런 주인공이 된 것이다. 1928년 6월10일치 <동아일보>는 2면에서 “경성구장 설립 이래 초유의 대 본루타, 연전 이영민군이 담을 넘겨”(본루타가 무슨 뜻인지 몰라 사전을 찾아보니, 홈런이었다)라는 제목과 함께 그의 사진을 큼지막하게 싣고 있다. “그동안 동 구장에서 행한 경기에 출장한 인물에는 미국의 거인군이며 (중략) 일본의 제강군들이 개설 이래 4년간에 들고 낫스나 재작 8일에 연전군이 대 의전(경성의전) 야구전에 삼번타자 이영민군이 제1회 2사후 제2구 인코너를 스코어판을 념겨 (중략) 본루에서 370척을 거리한 판을 넘어 낙구했다.” 설립 당시 홈에서 좌우 펜스까지 거리는 108m, 중간 펜스까지의 거리는 111.6m였다. 그는 1934년 일본 요미우리신문사 주최의 메이저리그 올스타 일본 순회 경기엔 ‘조선의 대표선수’로 출전할 기회를 얻기도 했는데, 이때 베이브 루스와 어깨동무를 하고 찍은 사진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1954년 8월12일, 그는 아들의 친구가 쏜 총에 맞아 숨을 거뒀다.

해방된 조국에서 경성운동장은 서울운동장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해방에서 분단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혼란 속에서, 운동장은 경기장이 아닌 대규모 군중이 모여드는 집회 장소로 애용되기 시작했다. 모스크바 3상 회담으로 촉발된 찬탁과 반탁 논란 집회와, 1946년 노동절 집회, 좌절과 회한 속에서 숨진 몽양 여운형(1886~1947)과 백범 김구(1976~49)의 장례식이 이곳에서 열렸다(1926년에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의 노제가 열렸다). 몽양의 오랜 동지였던 독립운동가 유정 조동호(1892~1954)의 아들 조윤구(65)씨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몽양 선생의 장례식에 가기 위해 신당동 집을 나서던 기억이 선하다”고 말했다.

정치적 혼란기에는 대규모 집회 장소

분단 이후 가난한 나라 백성들의 시름을 달래준 것은 스포츠 경기였다. 그 시절 운동장의 형편은 더할 나위 없이 나빴다. 스코어보드는 관중석 뒤쪽에 세워진 칠판이었고 조명탑이 없어 밤에는 경기를 열지 못했다(꼭 필요할 때는 군부대 지프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조명탑 역할을 했다). 서울운동장은 1960년 우리나라에서 처음 세워진 잔디구장인 효창운동장에 축구 메카의 자리를 내주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효창구장이 겨울엔 스케이트장으로 이용되는 혹사 끝에 개장 4년 만에 맨땅으로 변하자, 축구의 중심은 다시 서울운동장으로 돌아왔다. 이를 반기듯 운동장은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거쳐 2만5천 석의 스탠드를 갖췄고, 1968년에는 운동장 최대 숙원사업이던 조명탑과 전광판이 설치됐다. 그때 서울 인구는 380만 명, 소설가 이호철은 그해 2월부터 <동아일보>에 ‘서울은 만원이다’라는 소설은 연재하기 시작했다.


올드 축구팬들의 기억 속에 남은 서울운동장 최대의 ‘로망’은 박스컵(나중에 대통령배 축구대회와 코리아컵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999년 폐지됐다)일 것이다. 그 시절 ‘태극호’는 말레이시아, 타이 등과 엎치락뒤치락하는 아시아의 2류 팀이었다. 우리나라 축구팬들을 텔레비전 앞에 불러모은 3대 대회는 월드컵, 유럽축구선수권, 챔피언스리그가 아닌, 말레이시아의 메르데카컵, 타이의 킹스컵, 그리고 우리나라의 박스컵이었다.

1976년 9월11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말레이시아와의 박스컵 개막전에서 우리는 나중에 ‘차붐’이라고 불리게 되는 대스타의 탄생을 지켜보게 된다. 당시 ‘태극호’는 원정길에 나선 메르데카컵 개막전에서 홈팀 말레이시아에 1-2로 참패한다. 절치부심 이를 간 대표팀은 말레이시아를 홈으로 불러들여 설욕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태극호는 전반에만 내리 세 골을 내주는 졸전을 펼쳤고, 후반 들어 종료 7분을 남기기까지 한 골씩을 주고받아 1-4로 뒤지고 있었다. 그 순간 아시아의 영웅 차범근이 그라운드에 모습을 드러냈다. “센터 서클에 볼을 놓고 툭 밀어주는 것을 몇 번 치다가 슛을 때렸는데, 그게 골인이 됐다. 나중에 들어간 두 골은 어떻게 넣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한국축구의 영웅들>, 대한축구협회 엮음) 그는 7분 동안 내리 3골을 몰아 넣으며 극적인 무승부를 일궈냈다. 당시 녹화 필름은 남아 있지 않아, 차범근이 엮어낸 7분의 기적은 올드팬들의 입으로만 전해지는 전설로 남아 있다. 그사이 이웃한 야구장에선 70년대를 화려하게 수놓았던 고교야구 스타들이 저마다의 기량을 뽐내며 명멸했다. 고교야구의 마지막 불꽃은 최강 선린상고를 이끌던 두 기둥인 박노준·김건우가 줄줄이 부상으로 탈락한 채 경북고에 4-6의 패배를 당하던 1981년 8월26일 봉황대기 결승이다. 이듬해 프로야구와 그 이듬해 프로축구의 개막전이 열렸던 곳도 이곳 서울운동장이다.

문화연대, 반대 기자회견 열기로

‘대망의 80년대’가 밝아왔고, 운동장은 퇴물로 전락하는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여야 했다. 86 아시안게임과 88 올림픽을 대비해 1984년 잠실종합운동장이 건립되면서 서울운동장은 동대문운동장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그에 맞게 기능도 크게 축소됐다. LG와 OB의 ‘서울 더비’나 국가대표팀의 A매치는 더 이상 동대문을 찾지 않는다. 동대문운동장에서 마지막으로 열렸던 프로 경기는 2000년 10월22일 오후 3시15분에 열린 성남-수원의 ‘2000 아디다스컵’ 결승전으로, 날쌘돌이 서정원의 결승골로 수원이 성남을 1-0으로 이겼다. 아직 남아 있는 야구장에서는 2005년 189 차례 경기가 열려 9만6494명의 관객이 입장했다.

수명을 다한 동대문의 축구장과 야구장은 경기장을 허물어야 하는 서울시와 그 안에 깃든 노점상의 갈등의 배경으로 역사에 마지막 이름 한 줄을 걸칠 것이다. 문화연대는 10월31일께 우리나라 근대 체육의 정신적 토대가 된 운동장을 함부로 허물면 안 된다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연다. 경기장이 없어져도 삶은 계속된다. 그저 조금 아쉬울 뿐이다.

ⓒ 한겨레(http://ww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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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11-08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운하네...
 

지하철 승객 94% “꾸벅꾸벅 졸려”… 다 이유 있었네∼
[쿠키뉴스 2006-11-08 18:14]

[쿠키 사회] 지하철 이용 시민 10명중 9명은 전동차 안에서 ‘참을 수 없는’ 졸음을 호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마른 기침이나 ‘가슴 답답’ 등 호흡기 질환을 호소하는 승객도 70%를 넘어 하루 평균 1000만명이 이용하는 수도권 지하철 객차의 공기질 개선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환경보건학과 박동욱 교수팀은 지난 5월 설문조사한 수도권 전철 이용객 5900명 중 1099명을 무작위 추출해 호흡기 질환 및 졸음 증상의 유병율을 분석한 결과 이 같은 결과가 나왔다고 8일 밝혔다.

지하철 승강장과 객차안 오염물질 농도 연구는 있었지만 승객의 호흡기 질환 원인과 체감 증상을 분석한 연구는 처음이다. 연구팀은 이같은 내용을 곧 발간될 한국환경보건학회지 최신호에 발표할 예정이다.

지하철에서 졸음을 호소한 사람은 1034명으로 94.4%를 차지했다. ‘자주’ 졸린다는 대답은 615명(56.2%),‘가끔’은 419명(38.3%),‘없다’는 61명(5.6%)이었다.

서울메트로 지하철 1∼4호선에서 졸음을 호소한 승객은 646명(59.0)%으로 2기 지하철 도시철도공사(5∼8 호선)의 289명(26.4%)보다 두배 이상 많았다. 변수별 상관관계를 분석한 결과 젊은 연령대의 여성이면서 ‘날마다’ ‘출퇴근 시간대에’ ‘환승 없이’ ‘지하구간’을 주로 이용하는 승객이 가장 졸음이 심했다.

기침을 호소한 승객은 832명(76.2%),‘가슴 답답’은 772명(70.6%),콧물은 540명(49.5%),호흡곤란은 475명(43.4%) 순이었다. 특히 호흡기 질환이 있는 집단에서는 정상인보다 기침은 2.8배,콧물은 3.4배나 높아 노약자나 호흡기환자 건강을 위한 대책이 필요한 것으로 지적됐다.

졸음은 이산화탄소(CO2) 때문이다. 실내공기질 관련 미국 기준인 SMACNA에 따르면 CO2농도가 1000∼2000ppm일 경우 “비활동적인 사람은 생산성이 떨어지며 민감한 사람은 답답함을 느낀다”고 설명하고 있다. 2000ppm 이상이면 졸립게 된다.

박 교수팀이 지난해 서울 지하철 2호선과 5호선을 대상으로 승객이 가장 적은 시간대인 겨울철 오후 1∼4시 CO2농도를 측정한 결과 평균 농도는 1775ppm였고 최대 3377ppm까지 나왔다.

서울메트로 박동필 환경관리팀장은 “객차 1량당 정원이 160명인데 출퇴근시간 때는 400명까지 이른다”면서 “ CO2기준을 맞추려면 열차 지붕을 뜯고 운행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메트로측은 구형 열차의 경우 환기시설 개변조가 불가능해 2조5000억원을 들여 열차 전부를 교체하지 않는 한 당장 개선이 불가능하다고 덧붙였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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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11-08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버스 안에서도 조는데...

실비 2006-11-08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하철 버스 시도때도 없이 졸려요.ㅠ

마노아 2006-11-08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가끔 제 때 못 내리기도..ㅡ.ㅡ;;;

BRINY 2006-11-08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쩐지 정신없이 졸리면서도 제대로 잔 기분은 없고 더 몸 무겁고 피곤하더라니요.

마노아 2006-11-08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학적인 이유가 있었던 거야요ㅡ.ㅡ;;;;
 
오디션 10 - 완결
천계영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천계영 작가는 데뷔 시절부터 쭈욱 지켜보게 되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내가 애독하는 윙크에서 데뷔를 했으니까. ^^

첫 작품에서부터 그녀는 좀 남달랐다.  그림도 감각적이었고, 팬들의 인기몰이도 기성 작가 못지 않았다.

그랬음에도 그녀의 히트작 "언플러그드 보이"는 내게는 좀 약했다.  청소년들에게는 폭발적인 반응을 받았지만, 이미 그 학창시절을 지나온 내게는 그저 '만화 속 환상'에 가까웠다.  마치 트랜디 드라마를 보는 기분으로.

그랬는데, 내게 트랜디 작가처럼 가벼웠던 그녀가 아주 진지하게 다가온 것은 바로 이 작품 "오디션" 때문이었다.  여전히 감각적이고 화려한 그림과 깨는 설정, 독특한 장치들이 그녀를 장점을 잘 살렸지만, 그것들 위로 그녀의 열정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때로 자료 조사를 위해서는 과감히 연재를 쉬면서까지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그런 땀방울 덕에 작품은 엄청난 호응을 받으며 완결할 수 있었다.

음악에 천재적 소질을 가진 네 명의 소년을 찾아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며 동시에 유산을 물려 받기 위해 애쓰는 명자.  수퍼모델을 뺨치는 미모와 몸매를 지녔지만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이름(그건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들에게도 해당한다), 자존심 빼면 시체인 그녀가 재활용 밴드를 일으켜 가는 모습은 장하고 기특했지만 또 동시에 너무 코믹했다.  그렇게 진지함 속에 유머를 잘 녹이는 것이 작가 천계영의 특기이기도 했다.

리그전으로 올라가는 승부의 끝은, 어느 정도는 예상이 되기는 했지만, 그 이상으로 감동적이기도 했다.  심지어, 그들이 승부를 펼치는 라이벌들의 이야기, 혹은 롤모델로 삼는 음악인들의 설정은 모두 픽션이었는데도 대단히 사실적으로 보여서 마지막 즈음의 흑인 벙어리 가수의 노래 장면은 검색을 동원해서 이런 사람이 있는가 찾아볼 정도였다.

요새는 찾기 어렵지만, 오디션의 캐릭터를 이용한 팬시 노트를 애용하기도 했다.  지금도 내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공책들이다.(그 안에 적힌 컨텐츠가 아주 중요하므로..^^;;;)

필연적으로 '승부'를 가려야 하는 내용이었지만, 그 승부는 지극히 인간적이다.  승부를 넘은 가치가 이 안에는 있다.  게다가 어찌나 그림들이 이뻐주시는지 눈의 즐거움도 결코 무시하지 못하겠다.  이런 작품이 영화로 만들어지면 아이돌 스타 여럿 나오지 싶다.  뭐, 일본의 "나나"처럼 독자들을 실망시킬 수도 있겠지만...;;;

이 작품과 함께 DVD(작품 제목이다)도 같이 소장했는데, 이 작품은 아직 보질 못했다.  아무튼 기대 중.

언플러그드 보이보다 훨씬 더 재밌고 더 우수한 작품으로 천계영의 대표작 중 하나가 될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  뭐, 이미 그렇게 알려져 있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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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지... 죄송합니다... 라는 말이, 그렇게도 안 나올까?

아님 전혀 미안하지 않고 죄송하지 않아서 그럴까?

퇴근길, 버스를 기다리는데, 유모차를 끌고 가던 아주머니께서 그 바퀴로 내 발등 위를 밟고 지나가셨다.

헉!  황당 시츄에이션!  내가 보도 위에 발을 쭉 내밀었던 것도 아니고 이게 어찌 가능할까.

이 아주머니 반응이 더 웃기다.

"어머나!"

하더니, 그냥 가신다.

지금, 사람 발을 바퀴로 깔아버렸다니까요, 아주머니??? 라고 물론, 말하진 못했지..ㅡ.ㅡ;;;;

그저 황당해 했을 뿐...;;;;

그리고 이틀 걸러 한번씩 발생하는 일.

잘못 걸려온 전화에 잘못 거셨다고 알려주면, 원래 전화 예절은 "죄송합니다~"하고 끊어야 맞지 않은가.

열에 여섯은 "네"하고 끊어버린다.  아니, 이보세욧(ㅡㅡ;;)

그리고 열에 셋은 "잘못 걸려..." 하는 순간 뚜뚜뚜뚜....;;;;;

그리고 열에 하나 정도가 "죄송합니다"라고 말을 한다.

기초 예절을 못 지키는데, 더 큰 것은 지키며 살까 싶다.

학생들의 경우는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잘 못한다.

무언가 도움을 받았거나, 아니면 무언가 혜택을 입었어도 그냥 그걸로 끝이다.

처음엔 그냥 보냈는데, 아니다 싶어서 이젠 다시 부른다.  인사를 받아야 맛이 아니라, 그게 기본 예의니까.

때로 아주 미안하거나 혹은 아주 고마운 일이 생기면, 감동이나 먹먹함에 그 말이 잘 안 나올 때가 있다.

그렇지만 그런 경우가 아닌 사소한 경우에는 바로바로 입에서 튀어나오는 훈련도 필요하지 않을까?

그걸 누가 굳이 가르쳐줘야만 안단 말인가... 체쳇..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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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 2006-11-08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럴때 정말 웃겨요. 자기가 전화해놓고 아닌데요 하면 죄송합니다. 잘못걸었네요 하고 끊으면 될걸. 아닌데요 하면 갑자기 뚝 아니면 아니..라고 말하기도 전에 뚝 끊어 버리구요. 먼가 부딪치거나 먼가 있으면 죄송합니다. 그말 한마디가 머가 어렵다고.. 기분 푸셔요~~~ (같이 흥분해버렸네요.^^;;)

마노아 2006-11-08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깐 기분 무지 나빴지만 지금은 또 뭐... 좀 지났으니까요...^^ 근데 저렇게 기초적인 것을 왜 모를까 답답해요. ㅡ.ㅡ;;;

물만두 2006-11-08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토바이가 발등을 밟고 간 적도 있었는데 마치 니가 발을 댄게 잘못이야 이런 표정이두만요 ㅡㅡ;;;

마노아 2006-11-08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허허허허!!! 그런 일이 있었단 말예요? 그런 놈은 잡아야 되는데... 발은 무사하셨어요? T^T

2006-11-08 2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노아 2006-11-08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열혈 팬인 거죠. 제가 관계자면 얼마나 좋겠어요^^ㅎㅎㅎ

치유 2006-11-09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정말 기분 나쁘셨을것 같아요..발 다치진 않으셨나요?/

마노아 2006-11-09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괜찮아요. 전 제 귀를 의심했어요. 황당해서요^^;;;;

marine 2006-11-17 0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 가 완전히 입에 딱 뱄어요 그래서 어떨 때는 내가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해요^^

마노아 2006-11-17 0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뻔뻔한 것보다 훨씬 좋아요^^ 당연한 거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