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티가 썩은 과학자, 이휘소 [제 524 호/2006-11-15]
비운의 천재물리학자, 이휘소 박사를 아는가? 1977년 교통사고로 42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이때까지 업적만으로 그는 물리학계에서 대단한 명성을 얻고 있다. 또 대한민국에서 그를 모르는 젊은이는 드물다. 그야 말로 스타과학자인 셈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풍문에 따른 일반인의 인식은 이휘소 박사가 박정희 대통령을 도와 우리나라 핵무기 개발에 앞장선 용감한 과학자이자 애국자이며, 그의 죽음은 미국 정보기관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이휘소 박사의 유일한 한국인 제자인, 고려대 물리학과 강주상 명예교수는 “이는 사실이 아니다”고 말한다. 핵무기에 개발에 대한 이론은 1970년대 미국 대학생의 졸업논문에 핵폭탄 설계도가 실릴 정도로 공개된 정보였다. 다시 말해 핵무기의 설계는 학부과정의 학생도 손쉽게 그릴 수 있었다. 만약 핵무기를 개발하려 했다면 원료가 되는 ‘농축우라늄’ 확보가 관건인데 이는 이휘소 박사 전공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이휘소 박사의 죽음에 미국의 정보기관이 관련됐다’는 식의 음모론은 그의 학문적 평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은 지난 4월 이휘소 박사를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했다. 하지만 이휘소 박사가 연구했던 주제나 연구내용을 아는 이는 드물다.

혹시 이런 동요를 아는가? “바윗돌 깨뜨려 돌멩이, 돌멩이 깨뜨려 조약돌, 조약돌 깨뜨려 자갈돌, 자갈돌 깨뜨려 모래알…” 이휘소 박사의 전공은 우주를 구성하는 가장 작게 쪼개진 알갱이, 즉 소립자가 무엇이며 또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가를 공부하는 ‘고에너지 소립자물리학’이다.

이휘소 박사의 업적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다. 1972년 미시세계의 현상을 근본적으로 설명하는 기초이론을 실험을 통해 검증해 낸 것이다. 이로 인해 미시세계의 현상을 의미있는 이론값으로 계산할 수 있었고 실험적으로 확인이 가능해졌다.

둘째는 ‘참’(Charm)입자주1의 탐색이다. 1970년대 K-중간자의 희귀붕괴 과정에서 새로운 참 쿼크가 예견됐는데, 이휘소 박사는 참 쿼크의 탐색방도를 여러 방면에서 제시하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그런데 1974년 11월 실제로 새로운 입자의 존재가 발견됐다. 이로 인해 이휘소 박사는 단순히 유명한 ‘이론 물리학자’에서 더 유명한 ‘현상론 물리학자’가 됐다.

이러한 업적 때문에 강주상 교수는 이휘소 박사가 생존했다면 1999년 노벨상을 수상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노벨상은 최대 3명까지, 2개 분야 이내에서 시상하는 제한조건이 있고 한번 수상한 주제는 다시 시상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다. 이 조건으로 볼 때 이휘소 박사는 참 입자 분야보다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로 노벨상을 탔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1976년 팅과 리히터는 참 입자의 질량을 계산한 공로로 노벨상을 수상했다. 참 입자를 제안한 글래쇼, 일리오폴로스, 마이아니와 참 입자의 존재 가능성을 예견한 이휘소는 이 분야의 이론적인 토대를 세운 사람이다. 만약 이휘소 박사가 노벨상을 받으려면 애초 참 입자를 제안한 글래쇼와 일리오폴로스, 마이아니까지 적용돼야 하기 때문에 최대 3명이란 수상규정에 제한받게 된다.

그러나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로는 노벨상 수상이 가능했을지 모른다. 강주상 박사의 설명에 따르면 게이지 이론 연구를 수행했던 벨트만과 토프트는 1999년에 노벨상을 받았기 때문에 이 이론의 논리체계를 확실히 한 이휘소 박사가 생존했다면 1999년 수상자 대열에 포함되어야 마땅했다는 얘기다. 소설 <핵물리학자 이휘소>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서 주장한 것처럼 사망 즈음에 노벨상 수상을 목전에 뒀던 것은 아니다.

물리학자가 아닌 인간 이휘소 박사의 모습은 평소 어떠했을까? 이휘소 박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물리학에만 매달린 사람’, ‘가정에 충실한 사람’으로 남아있다. 이휘소 박사의 동료들은 그를 ‘팬티가 썩은 사람’으로 불렀다고 한다. 한번 자리에 앉으면 엉덩이를 떼지 않고 학문에 매진하는 생활습관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한번은 이휘소 박사가 동료와 점심을 먹다가 아이디어가 떠오르자 연구실로 들어가더니, 이틀 만에 앉은 자리에서 한편의 논문을 완성했다고 한다. 실로 ‘대단한 집중력’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또 이휘소 박사의 좌우명은 “남이 아는 것은 나도 알아야 한다. 내가 모르는 것은 남도 몰라야 한다”였다. 그것은 단순히 남에게 뒤지고 싶지 않다는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남이 알아낸 것을 뒤쫓아 가는 연구가 아니라 스스로 물리학의 새로운 화두를 제시하는 선도적인 과학자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아쉽게도 이휘소 박사의 노벨상 수상은 사라졌지만 우리에게 희망은 있다. 이휘소 박사가 활약하던 시절과는 비교할 수없이 많은 한국 과학자가 세계적인 업적을 잇달아 내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최초로 과학 분야 노벨상을 수상해 이휘소 박사가 “허허~”하고 웃게 될 날이 머지않은 미래에 올 것이다. (글 : 서금영 과학전문 기자)


주1) 1964년 물리학자 겔만과 츠바이히는 입자의 분수하전량이 1/3이나 2/3를 갖는 소재를 가정하고 ‘쿼크’라고 명명했다. 1974년 미국 스탠퍼드대 선형가속기센터(SLAC)의 리히터와 브룩헤이븐국립연구소(BNL)의 팅이 참 입자를 동시에 발견했다. 참 입자는 2세대 쿼크로 +(2/3)e의 전하량을 갖는다. 질량은 양성자보다 약간 더 무거운 1.3GeV정도다. 처음 발견 당시 BNL 연구진은 J입자로, SLAC 연구진은 ψ입자라 지었다가 J/ψ으로 일컬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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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

여기 나의 이 노래가 푸르른 그대들의
수줍도록 아름다운 추억이었음 해요
가장 행복한 순간에 그대 가장 소중한 사람과
나의 이 노래 같이 했음 해요
절대로 떨어지지 마요 사랑하는 사람끼린
영원이라 해도 모자라요
서로의 떨림이 멈추면 이 노래 불러봐요
그 순간과 그 사람에
다시 설레게 해요
여기 나의 이 노래가 새하얀 그대들을
행복했던 기억 앞에 서성이게 했음 해요
절대로 떨어지지 마요 사랑하는 사람끼린
영원이라 해도 아까워요
서로의 삶이 멈추는 날 두 사람 품고 떠날
한줌의 기억 안에 이노래... 살았음 해요

그늘

찬바람이 코끝을 스치는 여기 나 서있는 식어버린 자리
나만을 쏙 뺀 채 훌렁 저만치 달아난 저 햇살과 눈부신 그대와
예도 옛날부터 점쳐진 예언처럼 당신이 멀어지는 길을 끊을 수 없었네
그늘 밑의 나 아픈 표정도 눈물도 그저 까맣게 돌아볼 그대를
몰라야했어 세상은 하나도 나를 위해 변해갈 순 없다고
는 혼자여야 해 다짐만 하다마는
그게 다 그대 때문이에요
어떻게 나만을 쏙 뺀 채 훌렁 저만치 달아나
저 햇살과 눈부신 그대와
예도 옛날부터 점쳐진 예언처럼 당신이 멀어지는 길을 등지고 서있네
그늘 밑의 나 아픈 표정도 눈물도 그저 까맣게 여겨줄 그대를
몰라야했어 세상은 하나같이 나를 위해 변해줄 순 없다고
늘 혼자여야 해 다짐만 하다마는
그게 다 그게 다 그게 다
나를 위해 변할 순 없다고
늘 혼자여야 해 다짐만 하다마는
그게 다 그게 다 그대 때문이에요


건전 화합 가요

때론 정신 차리지 못 할 만큼 빠른 세상살이지
바쁜 와중에 체면을 차리지 몸을 사리지 너나 할 것 없이 누구나 말이지
왜 이리 빠듯해 왜 혼자 서있어 세상 끝에
여유와 함께하는 삶은 산뜻해 일상은 따뜻해
주윌 둘러보면 삶의 이유는 가득해
너와 나는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 이끌리고 사랑하고 이별하게 되지
쿨 한 척도 해보겠지만 혼자는 싫어
너와 나는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 믿을 사람 절대 없다고 늘 생각하지
살피고 또 살피겠지만 혼자는 싫어
아름다운 세상이네 또 다른 사람이, 사람이 우릴 기다려
너와 나는 어쩔 수 없는 속물이라 진실은 거짓보다 재미없어 흥미 없지
욕하면서 속도 풀어요 나만 아니면 돼
난 욕되지 안돼먹었지 난 어찌 아직까지 거짓 그리고 진실
몰라도 오늘도 내일도 사람 사는 거 모두 다 똑같은거겠지
잘난 이 못난 이 섞인 세상의 이치는 모두 불협화음 하모니
어차피 혼자가 아닌 세상 모든 사람들이 친구 되는 분위기
너와 나는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 벼랑 끝의 너를 구한 진심어린 위로
불쑥 내민 투박한 손길 혼자가 아냐
너와 나는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 위기는 더디 가고 평화는 쏜살같아
함께 울고 웃는 사람들 혼자가 아냐
아름다운 세상이네 또 다른 사랑이, 사람이 우릴 기다려
너와 나는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 아웅다웅 부대끼며 살아가야 하지
인생 뭐 그리 별 거 없어 함께 잘 살아보세
ahha ahha~~~~~~
1,2,3 & 4 같이 타 볼까 세상의 Floor, 1,2,3 & 4 같이 가보자 모두 Let's go
1,2,3 & 4 같이 타 볼까 세상의 Floor, 1,2,3 & 4
우리의 형제 우리의 친구에게도 우리라 말 해줘요
우리가 아닌 또 다른 우리에게도 우리라 말해줘요 * 3


어떻게 사랑이 그래요

사랑이 잠시 쉬어간대요
나를 허락한 고마움 갚지도 못했는데
은혤 잊고 살아 미안한 마음뿐인데
마지막 사람일거라 확인하며 또 확신했는데
욕심이었나 봐요
나는 그댈 갖기에도 놓아주기에도 모자라요
우린 어떻게든 무엇이 되어 있건 다시 만나 사랑해야 해요
그 때까지 다른 이를 사랑하지 마요
어떻게 사랑이 그래요
사랑한단 말 만번도 넘게
백년도 넘게 남았는데
그렇게 운명이죠 우린
악연이라 해도 인연이라 해도 우린
우린 어떻게든 무엇이 되어 있건 다시 만나 사랑해야 해요
그 때까지 다른 이를 사랑하지 마요
안 돼요 안 돼요
그대는 나에게 끝없는 이야기 간절한 그리움
행복한 거짓말 은밀한 그 약속 그 약속을 지켜줄 내 사람
너만을 사랑해 너만을 기억해 너만이 필요해 그게 너란 말야
너만의 나이길 우리만의 약속 그 약속을 지켜줄 내 사람


남편

우리 서로 달리 된 지도 한참이 되었네요
착한 당신만 두고 오니 맘 편치 않았다오
함부로 당신 곁을 떠나 온 죄 갚을 길 없죠
뭐 하나 변변히 해 주지 못 해 마음이 쓰였다오
고우네요 당신 얼굴 주름 하나 없네요
설령 늙고 병든다 해도 내겐 그대로죠
원망도 참았죠? 미움도 참았죠? 나 이렇게 떠나와도 날 탓하지 않더군요
이제 그 원망도 이제 그 미움도 내가 모두 가져가요
당신은 행복해지기만 하면 돼요
자꾸만 당신이 울어서 달래줄 누군가를
보내달라고 빌었는데 그 뜻이 통했네요
지금 당신 옆의 그 사람 참 맑아 보이네요
좋은 사람 만나 하나 되니 마음이 놓이네요
축하해요 울지 마요 이렇게 좋은 날에
오늘 그대는 눈부시게 아름다우네요
원망도 참았죠? 미음도 참았죠? 나 이렇게 떠나와도 날 탓하지 않더군요
이제 그 원망도 이제 그 미움도 내가 모두 가져가요
오늘 당신 너무 이뻐요
당신이 행복해하는 걸 보니 기뻐요



달빛소녀

해님을 닮아 온 누리에
순수와 희망을 품은 아이
볕살이 고운 예쁜 날에
꽃의 노랫소리 들려
달님을 닮아 어둠에도
수줍은 빛을 띄고 있네
달빛 노을에 모든 시름
씻겨 내리면
가지리오 가지리오 하늘빛 날개
아니 되오 아니 되오 뜻은 꺾이지 마오
달님을 닮아 어둠에도
수줍은 빛을 띄고 있네
달빛 노을에 모든 시름 씻겨 내리면
가지리오 가지리오 하늘빛 날개
아니 되오 아니 되오 뜻은 꺾이지 마오
에헤야 데헤야 에라디야
에헤야 데헤야 에라나라디노
에헤야 데헤야 에라디야
에헤야 나라디노
가지리오 가지리오 하늘빛 날개
아니 되오 아니 되오 뜻은 꺾이지 마오


소통의 오류

오가는 대화 속에 움터가는
부지불식 소통의 오류
하늘과 닿으려던 오만함의
바벨탑 속 불통의 원류
나와는 다른 묘한 이해체계 모두들 사는 곳이 다른 외계
치명적 오류 인생을 망칠 지도
나만이 세상 축이 되는 시계 모두를 고립시키려는 흉계
너의 진실 한가운데 날 통과 시켜줘
관계는 소통불량 제 멋대로
듣고 싶은 말들로만 막혀
이해의 모든 앞은 오해일 뿐
판단유보 끝을 보고 난 뒤로
나와는 다른 묘한 이해체계 모두들 사는 곳이 다른 외계
치명적 오류 생사를 가를 지도
나만이 세상 축이 되는 시계 모두를 고립시키려는 흉계
너의 진실 한가운데 날 통과 시켜줘
아닌 것은 아니라고 그런 것은 그렇다고
왜곡보다 단절보다 더 무서우니
나와는 다른 묘한 이해체계 모두들 사는 곳이 다른 외계
치명적 오류 인생을 망칠지도
나만이 세랑 축이 되는 시계 모두를 고립시키려는 흉계
너의 진실 한가운데 날 통과시켜줘



울다

손톱을 깎다가 울음을 뱉었다
얼만큼 자랐는지 손 내밀어 보라하던 누군가 떠올라
더 자랄 때까지 내버려둘 것을
나의 몸이 나의 맘이 나를 낯설어 하지 않을 때까지
또 다시 울다 자꾸 약해지니 울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울다 그치질 않는다
그리워 울다 질리도록 사랑땜에 울다
눈물에 그녀 모습이 씻기어 없어졌으면 해
비우고 또 비웠는데 채워만 진다
샤워를 하다가 울음을 뱉었따
눈을 감지 말았어야 했는데 결국 그녈 보고 말았다
조금 쓰리다 해도 눈감지 말 것을
나의 몸이 나의 맘이 나를 낯설어 하지 않을 때까지
또 다시 울다 자꾸 약해지니 울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울다 멈추질 않는다
그리워 울다 질리도록 사랑땜에 울다 눈물에 그녀 모습이 씻기어 없어졌으면 해
후련해 지지않는다 바뀌는 건 결코...




이 손 절대 놓지 않을게 꼭 잡은 두 손은 운명이라 믿었었는데
수많은 인파속에서도 우리 둘 확인케 했었는데
너의 향기가 너의 온기가 식지도 않았는데
널 어루만지고 붙잡아도 보고 눈물 훔친 일조차 끄집어내는 손
너무 가벼워 오오 너무 헐거워 꽁꽁 묶어둬야 이젠 잊을까
이제야 실감이 나나봐 항상 네 오른 손은 내 차지였었는데
어디 둬야 할지 난감해 널 잡지 않은 손이 어색해
너의 향기가 너의 온기가 식지도 않았는데
널 어루만지고 붙잡아도 보고 눈물 훔친 일조차 끄집어내는 손
너무 가벼워 오오 너무 헐거워 꽁꽁 묶어둬야 이제 편할까
작고 따듯한 얇고 상냥한 네 손을 숨길 수가 없었는데
너의 향기를 너의 온기를 씻지도 않았는데
그래 넌 내게 최고였나봐 네가 내게 준 흉터가 부끄럽지 않아
네가 보고파 너의 손을 잡고서 너의 체온 안에 다시 잠들래
네가 보고파~~
네 손을 잡고서~~


rewind

정녕 우리가 옳다고 믿는건
과연 옳다고만 할 수가 있을까 Oh! Oh!
그들의 가치대로 통제하려 한다면 불편해 갑갑해 받아들일 수 없어
엉망진창이 된대도 처음으로 다시 되돌려
새로 시작하게 해줘
it's gonna be alright
it's gonna be alright
뭔가 억지로 비틀어놨던 걸
관습과 가르침 나를 망쳐 버렸어
충동이 욕망이 억눌려야 한다면 불편해 갑갑해 받아들일 수 없어
엉망진창이 된대도 처음으로 다시 되돌려
새로 살아 보게 해줘
we got to Rewind
It's time to Rewind
let me hear you Rewind
everybody Rewind
it's gonna be alright
it's gonna be alright
너를 위해 살기를... 희생은 말기를
안다고 믿는 건 다 아는 것이 아니니
엉망진창이 된대도 처음으로 다시 되돌려
내가 살아 있게 해 줘
we got to Rewind
It's time to Rewind
let me hear you Rewind
everybody Rewind
네 머릿속에 주입된 같은 삶을 사는 같은 미래의 너
네 가친 매겨지고 달아져 껍데기에 열중해하는 저급한 집착들에 빠져
Rewind~ Rewind~ Rewind~ Rewind~
it's gonna be alright
it's gonna be alright


Pray for me

맑은 눈을 가지게
바른 입을 가지게 하시고
뜨거운 가슴은 식지 않게
머리는 차갑게
용기와 지혤 품게
미소와 눈물을 담게
오롯한 마음의 그릇
가지게 하소서
for me pray for me 더 얻으려 하지 않게 하소서
나를 나의 노예로 부리지 않도록 하소서
생각은 생각을 낳아
여러 갈래의 끝에 이르니
선택을 그르칠 모든 것
내치게 하소서
for me pray for me 더 얻으려 하지 않게 하소서
나를 나의 노예로 부리지 않도록 하소서
나를 진실로 용서케 하시고
모둘 진실로 사랑케 하시고
for me pray for me 더 얻으려 하지 않게 하소서 나를 나의 노예로 부리지 않도록 하소서


WE ARE THE DREAMFACTORY

뭔가 조금 다르고 뭔가 조금 모르고
나일 수도 있고 너일 수 있는 곳
쓸쓸한 듯 위태로워 더욱 안쓰러운
우리 꿈을 지탱하던 공장 하나
멋진 음악과 좋은 사람들 그 걸로만 충분해
함께 하는 이 순간 넌 cause we are
the DREAMFACTORY
There's a place where you can live your dream 그 곳에서
Don't youknow that you will find peace of mind 우리 모두
Now's the time to tell the world we are all alive
그 마음과 힘을 지켜줘
the DREAMFACTORY
소리치고 솟구치고 벅차오르고
깎여지고 흔들리고 내몰린대도
멋진 음악과 좋은 사람들 그 걸로만 충분해
함께 하는 이 순간 넌 cause we are
the DREAMFACTORY
There's a place where you can live your dream 그 곳에서
Don't you know that you will find peace of mind 우리 모두
Now's the time to tell the world we are all alive
더 크게 외쳐 주겠니
the DREAMFACTORY
그 마음과 힘을 지켜줘
영원히
WE ARE THE DREAMFACTORY


NO PAIN NO GAIN

그 고통이 너를 면역케 하여 강하게 저항케 하는걸
그 숱한 역경이 환희의 찰라 한껏 만끽하게 하는걸
너의 두 눈 촛점은 조금씩 흩어져 결국 한계가 보이고 인낸 튿어져
무릎을 꿇고 눈물 떨구고 일어나 칠흙같은 어둠속을 뚫고 uh!
PAIN 함 삼켜 버려봐 함 질끈 참아봐 한계의 끝에서 모든 신경이 너를 자극해도
OH! PAIN 절대 져선 안 돼 무릎 꿇지 마라 네 삶의 끝까지 곧 승린 너의 차지
네 피와 땀으로 널 이기는 거야 고통 없이 얻어지는 건 없어
아무리 정도를 계속 따라가도 끝없이 나를 덮치는 성난 파도, 헤쳐 봐도 hut!
아무것도 보이지도 않는다고,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다가 아니라고 uh!
PAIN 함 이를 악물고 함 질끈 참아봐 한계의 끝에서 모든 신경이 자극해도
OH! PAIN 절대 져선 안돼 무릎 꿇지 마라 네 삶의 끝까지 곧 승린 바로 너의 차지
절대로 포기하면 안돼 만만하지 않은 자신이란 상대
포기하는 것에 절대 반대 어케 결심하고 실행했었던 난데
정신 찾고 목푤 잡고 그렇지 않으면 너는 바로 낙오
열정 갖고 아픔 참고 지금까지 너무도 나약했던 너를 바꿔
PAIN 함 삼켜 버려봐 함 질끈 참아봐 한계의 끝에서 모든 신경이 너를 자극해도
OH! PAIN 절대 져선 안돼 무릎 꿇지 마라 네 삶의 끝까지 곧 승린 너의 차지
PAIN 함 이를 악물고 함 질끈 참아봐 한계의 끝에서 모든 신경이 자극해도
OH! PAIN 절대 져선 안돼 무릎 꿇지 마라 네 삶의 끝까지 곧 승린 바로 너의 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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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11-15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싯적엔 가사 외우기 참 쉬웠는데, 이젠 들어도 들어도....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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씩씩하니 2006-11-15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아무리 들어도 몰라유~~
그나저나 다른 사람은 싫다는데..전 정형돈이 좋아요,,,이상하지요? 귀여운거 있죠...

마노아 2006-11-15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못 세겠더라구요^^ 정형돈 저도 나쁘지 않은데..^^;;;
 

'숨은 전두환씨 재산 찾기' 숨바꼭질
[한국일보 2006-11-14 19:12]    
檢, 추징금 납부시효도 연장… 작년엔 서초동 대지 드러나

전두환 전 대통령이 당초 국가에 내도록 선고된 추징금 액수는 2,205억원이다. 하지만 검찰이 전씨의 비자금 사건 확정 판결 이후 지금까지 거둬들인 돈은 532억원(24%)에 불과하다. 전씨는 “통치자금으로 모두 사용했다”고 주장하고 있고, 검찰은 추징금 납부시효(3년)를 세 차례 연장하며 전씨의 은닉 재산을 찾고 있다. 미납액 1,673억원이 추징될 때까지 전씨와 검찰의 숨바꼭질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비자금은 9,000억원대

검찰의 전씨 재산 찾기는 1995년 전씨가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되면서 시작됐다. 검찰은 전씨가 재임 중 기업 등으로부터 받은 비자금이 9,000억원대라고 밝혔다. 검찰은 이 가운데 2,259억원을 뇌물로 인정, 기소했고 전씨는 97년 4월 무기징역에 추징금 2,205억원을 선고 받았다.

대법원 선고 후 검찰은 전씨 예금 및 채권 312억9,000만원을 추징했다. 전씨는 97년 사면ㆍ복권 됐지만 법률 상 추징금만은 갚아야 했다. 이후 검찰은 전씨의 벤츠 승용차, 장남 재국씨 명의의 콘도 회원권, 연희동 자택 가재도구, 자택 별채 등을 경매로 팔아 19억원을 추가로 추징했다.

우연히 비자금 발견

검찰이 전씨 비자금 추적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2003년이었다. 불법 대선자금을 수사하던 대검 중수부는 사채업자의 계좌를 추적하다 우연히 전씨 차남 재용씨의 뭉칫돈 167억원을 발견했다. 검찰은 이 가운데 73억원이 95년 전씨가 은닉 비자금으로 구입한 채권임을 밝혀냈다. 검찰은 상고심에 계류 중인 재용씨의 조세포탈 혐의가 확정되는대로 이 돈 73억원을 추징할 예정이다.

당시 불법 대선자금 수사팀은 또 채권추적 등을 통해 전씨 측근들이 관리한 괴자금 100억원 등 200억원을 더 포착했다. 전씨 부인 이순자씨는 자기 돈이라고 주장했지만 2004년 5월 검찰의 설득으로 200억원을 추징금으로 대납했다.

가장 최근에 드러난 전씨의 은닉 재산은 서울 서초동에 있는 도로 등 대지 51.2평이다. 2005년 언론 보도로 정체가 드러나자 검찰은 경매에 부쳤지만 서대문세무서가 조세채권을 압류하는 바람에 추징금으로 처리하지는 못했다.

숱한 뒷얘기 만들어내

전씨가 추징금을 내지 않고 골프에 해외여행 등 호화생활을 하자 비난여론이 비등했다. 그러자 검찰은 2003년 전씨를 법정으로 불러내 실제 재산이 얼마인지 밝히도록 했다. 그러나 전씨는 “전 재산은 예금 29만1,000원뿐”이라고 말해 여론의 빈축을 샀다. 부인 이순자씨도 200억원을 대납하면서 “친정살이를 하며 어렵게 모은 알토란 같은 내 돈”이라고 주장했다. 재용씨는 2004년 조사를 받기 위해 대검찰청에 나오면서 단종된 지 10년된 구형 승용차를 타고 나오는 초라한 행색을 연출했다. 2003년에는 전씨가 애지중지 키우던 진돗개 2마리까지 경매에 부쳐져 관심을 모았다.

최영윤 기자 daln6p@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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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11-15 0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민 전체 대상 '대'블랙 코미디랄까... 지난 밤 꿈에는 박근혜가 나왔다. 헉... 왜 이래..ㅡ.ㅡ;;;

전호인 2006-11-15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9만원 밖에 없는 극빈자에게 횡재인건가? ㅎㅎㅎ

마노아 2006-11-15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홋! 그런 해석이 가능하군요. 그의 오묘한 신기에 감탄했어요..;;;;

씩씩하니 2006-11-15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이 *~~ 어제 신문 읽으면서 얼마나 열받든지....
제가 숨박꼭질 잘하는데....다 찾아내볼까봐요,,,,ㅎㅎㅎ

마노아 2006-11-15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탁합니다. 씩씩하니님, 역사에 길이 남을 족적이 될 거야요^^;;;
 

“이것이 우리나라 1호”
문화재청, 각종 1호 문화재등록 추진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 예고된 순종어차


현존하는 1호를 찾아라. 현존하는 최초의 승용차가 문화재로 재탄생한다.

이 승용차는 다름아닌 임금님 부부가 타던 어차(御車). 문화재청은 최근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인 순종(純宗, 1874~1926)과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1894~1966)가 사용하던 어차를 문화재로 등록 예고했다. 이번에 등록 예고한 어차는 미국 GM사의 1918년식 캐딜락과 영국 다임러사(DAIMLER)의 1914년식 다임러로 색깔도 비슷한 커플룩이다.

이밖에도 우리주변에는 문화재로 등록된 ‘1호 자장면집’을 비롯해 문화재로 등록은 되지 않았지만 당시의 사회와 문화를 조망해 볼 수 있는 ‘1호 도량형법’ ‘1호 등대’, ‘1호 자장면집’ ‘1호 대중가요’, ‘1호 다목적댐’ ‘1호 화폐’, ‘1호 선교사 묘지’, ‘1호 공원’등이 남아 있다.

◆ 순종황제와 황후가 타던 ‘외제승용차’

순종과 황후가 사용한 어차는 각각 1918년식 캐딜락과 1914년식 다임러로 차종은 다르지만 둘 다 고급스런 마론색(검붉은 색)의 7인승 리무진급 차량으로 비슷한 형태다. 특히, 이 두 차량의 옆문에는 황실의 상징인 이화문(李花紋/오얏꽃 무늬)의 금도금 장식이 붙어 있는데다 내부에는 이화문으로 된 황금색 비단이 붙어 있고 바닥에는 고급 카펫이 깔려 있어 누가 보아도 황실의 최고급 차량임을 한눈에 알 수 있도록 품위있게 제작됐다. 또한 차체 역시 현대의 자동차들과 달리 철재가 아닌 목재로 되어 있는데다 외부 도장도 칠(漆)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등 전체적으로 마차와 비슷한 모양의 초기 자동차 모델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두 어차는 원래 세월이 흐름에 따라 부품 일부가 없어지고 군데군데 녹이 스는 등 자연 부식과 훼손현상이 많아 1997년부터 국내외 전문기관의 복원 작업을 통해 원형을 되살리는데 성공했다. 복원된 어차는 지난 2001년도부터 항온항습 시설이 마련된 창덕궁 빈청에 전시되어 일반인들도 쉽게 관람하고 있다. 순종과 순종효황후가 탔던 승용차는 문화재청이 관장하는 동산(動産) 형태의 첫 등록문화재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 대한제국 법률 1호 ‘도량형법’과 ‘서양식 도량형기’

대한제국의 법률 1호는 무엇일까? 그것은 ‘도량형법’이다. 이 법은 근대기(1905년-1945년)에 국가 표준으로 제작·사용되었던 도량형기를 통용케하는 법적 근거를 제공한다. 이 당시 사용되었던 자 · 저울 등 154건 331점의 도량형기가 문화재로 등록예고된다. 도량형기(度量衡器)란 길이와 용량(부피), 중량(무게)을 측정하는 도구를 말한다.

지역마다 다른 도량형기를 국가표준으로 규정한 '도량형법'이 대한제국 법률1호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도(度)’란 자로 길이를 재는 것을 의미하며, ‘양(量)’은 되로 부피를 재는 행위, ‘형(衡)’은 저울을 이용해 무게를 재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것들은 사람들의 각종 생활에 큰 영향을 주며 기준이 없을 경우 사회적으로 큰 혼란이 발생한다. 그러나 과거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에는 도량형기가 지역마다 달랐다.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도량형을 정비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한제국이 성립(1897년)된 이후 근대적인 도량형을 도입하기 위해 1902년(광무 6년)에 평식원(平式院)이라는 담당 관청을 설립, 서양식 도량형제(미터법)를 일부 채택하고 1905년(광무 8년)에는 대한제국 법률 제1호로 도량형법을 정했다.

당시 고종은 법률 제1호로 도량형법을 제정할 만큼 이에 각별한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이번에 문화재로 등록 예고된 도량형기들은 도량형 제도의 변천을 실물(유물)로 한 눈에 보여주는 것들로 이 모두가 당시에 ‘국가의 표준 도량형 용기’로 또는 ‘도량형기 단속 표준기’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희소성이 크다.

◆ 국내 최초 자장면의 발원지 ‘공화춘’

인천시 중구 선린동 38번지에 소재한 공화춘은 1930년을 전후해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건물 전면에 타일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점, 평인방을 사용해 창들이 사각형으로 만들어진 점, 경사 지붕을 가리기 위해 외벽상부에 파라펫을 설치해 평 슬래브 건물처럼 보이게 한 점 등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언젠가 이 건물이 보존대상이 되어 수리를 하게 되면 상량문 등을 찾아 정확한 연혁을 알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참고.인천남부 종합학술조사 314쪽~315쪽 인천광역시립박물관 발간자료).

중국에는 없는 중국음식 자장면을 팔기 시작한 공화춘

자장면이 언제, 누구에 의해 처음 만들어졌는지를 밝혀줄만한 관련 자료는 거의 없다. 다만 화교들이 '청요리' 가 인기를 끌자 부두 근로자들을 상대로 싸고 손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생각하게 됐고 이렇게 해서 볶은 춘장(중국 된장)에 국수를 비벼서 먹는 '자장면' 을 만들어 팔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식으로 자장면이란 이름으로 음식을 팔기 시작한 곳이 1905년 개업한 공화춘이라는 것. 지금은 당시 화려했던 옛 건물의 자취만 남아있고 부근에 공화춘이란 신축건물이 들어서 있다. 이 곳에서 자장면이 성황리에 팔리고 있다. 구 공화춘 건물은 얼마전 등록문화재 246호로 등록됐다. 인천 중구청은 현재 화교 두명이 소유하고 있는 이 건물을 사들여 자장면 박물관을 건립할 계획이다.

◆ 인천 앞바다 내항ㆍ외항 구분하는 분기점 ‘팔미도 등대’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인 팔미도 등대. 인천광역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40호<그림 = 국정브리핑 블러그 '시나브로' 밝은 세상 blog.korea.kr/achang>
인천 앞바다 ‘팔미도 등대’. 우리나라 최초로 불을 밝힌 등대는 인천시 중구 무의동 374번지에 소재한 팔미도에 있는 등대다. 팔미도는 인천에서 남서쪽으로 8km 지점에 있는 바위섬이다. 서해안에 흩어져 있는 1백여 개의 무의도 가운데 인천항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다. 등대는 이 섬 해발 71m 정상에 하얀 몸매로 서 있다. 등대가 세워진 것은 1903년. 그 빌미는 인천항이 개항된 1883년 일본과 서구 열강 제국들이 인천항을 원활하게 이용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삼으면서부터 비롯됐다.

등대가 들어서기 전엔 물론 갈매기들만이 지키고 있던 작은 섬에 불과했다. 당시 인천항은 수심이 얕고 간만의 차가 심할 뿐만 아니라, 해안선이 복잡해 입출항 자체가 용이하지 않았다. 이에 일본인들은 프랑스 표지 회사의 기술을 이용해 착공 1년 1개월 만에 등대를 설치한 것이다. 일본사람들은 이 등대를 러일전쟁시 이용하기도 했다. 당시 이 등대는 내항과 외항을 구분하는 분기점 역할을 했다. 섬의 면적은 0.17㎢로 작은 섬에 불과하지만 이곳에 세워져 있는 등대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등대의 높이는 7.9m. 일본인들이 세웠을 당시 90촉광짜리 석유등으로 등대를 밝혔다고 한다. 일본사람들이 이 등대를 만든 궁극적인 이유는 선박들의 안전운행을 위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용 가치가 있는 인천항을 수월하게 드나들 수 있는 동서남북의 방향을 알리는 역할이 필요했던 것. 팔미도 등대가 규모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광복 후 교통부에서 인수하고 9년 후 렌즈의 내경이 300mm, 초점거리 150mm인 백열등이 자가발전 시설로 설치해 9천 촉광의 밝기를 보였다. 또 처음으로 안개 신호기를 설치함으로써 비로소 제대로 된 등대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후 1963년 이 등대에 무선표시국을 설치했고, 1967년에는 무선전화와 등명기를 백열등에서 수은등으로 교체 하는 여러 차례에 걸려 등대의 현대화를 위해 시설개조를 진행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처음에는 단순히 방향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설치되었지만 지금은 항로표시뿐만 아니라, 그에 따른 시설물이나 기기를 관리하는 기능까지 맡고 있다. 또한 기상 관측과 연안지역의 해양 관측까지 해 여객선은 물론 화물선, 어선 등의 입출항에 없어서는 안 되는 등대가 된 것이다. 이 등대는 인천상륙작전 수행에도 한몫을 담당했다, 등대수들이 피난을 가지 않고 석유램프를 켜놓은 채 등명기를 손으로 돌려 위치를 알려줌으로써 상륙에 도움을 준 것이다.

◆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가요 ‘희망가’

“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이 앉아서 생각하니 / 세상만사가 춘풍 중에 또다시 꿈같도다.” 너무나 유명한 이 대중가요는 실은 외국곡. 단지 우리의 노래로 알고 있는 것은 그 곡과 가사가 한국인의 정서에 맞게 바뀌어 불렸기 때문이다. 흔히 대중가요로는 1925년 발매된 ‘조선 소리판’에 실려 있는 도월색의 '시들은 방초', 김산월의 '장한몽', 그리고 1926년에 윤심덕이 불러 크게 히트시킨 '사의 찬미' 등이 있다.

그러나 '희망가'는 이보다 수년 전부터 대중 속에 급속히 퍼졌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3ㆍ1만세운동의 물결이 지난간 뒤인 1923년 무렵. 당시 대중의 마음은 허탈감과 죄절감 그 자체였다. 민족의 염원은 수포로 돌아갔고, 일제는 문화정책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으로 겉과 속을 달리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이런 시대상황에서 애조 띤 노래가 유행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그 노래를 '희망가'라고 했다. 가사가 한국어로 되어 있으니까 그 작사자와 작곡자가 분명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누가 지은 것인지도 알려지지 않은 채 널리 불려졌다.

우리나라 최초의 다목적댐 '섬진강 댐'<사진 = 한국수자원공사 섬진강댐관리단>

◆ 국내 최초 다목적댐 ‘섬진강 댐’

다목적댐으로 국내 최초로 건설된 댐은 섬진강댐이다, 공사가 착수된 것은 1940년, 그리고 준공한 때는 1965년. 25년 만에 준공된 섬진강댐은 격동기의 시대상을 그대로 반영하면서 건설된 댐이다. 이 댐이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댐은 관개용으로 건설됐다. 가뭄에 대비해 미리 물을 가두어두었다가 필요할 때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

이때의 댐은 대부분 흑으로 막은 것이었고, 그래서 높이는 높지 않았다. 그러나 인구가 증가하고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물은 관개용만이 아닌 식수, 공업용수 등으로 이용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댐이 다목적용으로 건설되기 시작한 것. 댐 높이 64 m. 제방길이 344.2 m. 저수용량 4억 6600만 t. 동진강(東津江) 하류지역의 수리불안전답과 계화도(界火島) 간척지에 관개용수를 공급하고, 호남지방의 전력난(電力難) 해소에 도움을 주고 있는 댐이다. 이 댐의 완공으로 연간 1억 6634만 7000 kWh의 전기와 연간 2억 2500만 m3의 각종 용수를 공급하게 되었으며, 초당 1,400 m3의 홍수조절 능력을 가지게 됐다.

1백원짜리 조선은행권
◆ 수염 긴 노인이 도안된 국내 최초 지폐

우리나라에서 맨 처음 사용된 지폐는 어떤 것일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우선 고종 30년 1893년에 만들어진 지폐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바로 호조태환권이라는 지폐. 지폐 제조를 관장했던 부서가 호조였다는 것을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는데, 50냥ㆍ20냥ㆍ10냥ㆍ5냥짜리가 있었다고 한다. 정부에서 이 지폐를 만든 것은 당시 화폐로 쓰고 있던 엽전을 회수하여 새로운 화폐제조를 정착시키기 위해서였다. 태환(兌換)이라는 말은 바로 그렇게 통용되고 있는 화폐와 바꾸는 일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지폐는 만들어놓기만 했지 공식적으로 사용되지 못했다. 화폐 업무를 담당한 일본인들의 운영권 다툼 때문. 만약 그 문제가 해결돼 새로운 화폐로 쓰였다면 호조태환권이야말로 한국 최고의 지폐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이 지폐는 한 장도 사용되지 못한 채 모두 소각되고 말았다.

이후 나온 지폐는 모두 식민지 시대에 발행된 것이었다. 따라서 그때의 지폐는 우리나라의 돈이라 할 수 없다. 한국의 지폐로 최초인 것은 당연히 광복 이후 맨 먼저 한국인들이 화폐로서 사용한 것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때 맨 먼저 사용된 지폐는 1백 원짜리 조선은행권. 1945년 9월 1일부터 사용됐다. 광복이 된 나라에서 발행하여 사용한 지폐이기 때문에 이 돈은 분명 우리나라의 돈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화폐업무를 담당했던 사람들은 모두 일본인들이었다. 일제는 한국인들에게 그런 일을 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광복이 되었을 때 우리의 손으로 그 일을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던 것. 광복이 된 상태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지폐는 그렇기 때문에 액면도, 모양도, 도안도 모두 일본사람들의 주도하에 만들어졌다. 액면 1백 원은 고액이었다. 통화 조절을 명분으로 남발한 것이었다.

도안도 1915년부터 일제가 각종 지폐에 공용으로 쓰던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 크기는 가로가 162mm, 세로가 93mm, 조선서적주식회사에서 옵셋 인쇄로 제조되었다. 화폐를 인쇄할 수 있는 시설은 일본에 있었는데, 그렇게 국내에서 인쇄한 것은 일제가 전쟁 말기 수송상태가 마비될 것을 염려하여 시설을 서울로 공수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지폐는 아직까지도 수집가들 사이에 논란이 되고 있다. 다름 아닌 탐스러운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어느 노인의 모습이 인쇄되어 있는 도안인데, 그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 때문이다. 화폐 도록에는 이 노인이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으로 되어 있고, 그렇게 알려져 왔다. 그는 한일합방 후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벼슬을 받은 반면, 조선 독립의 청원서를 보내기도 한 인물이다. 실제로 그의 사진을 보면 도안의 노인과 비슷하다.

그러나 한 가지 이상한 점은 관보에 그 도안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 1947년도 이런 논란 때문에 한 시민이 중앙방송국에 문의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조선은행 영업부 부지배인 최기룡 씨는 그 도안의 주인공이 운양이 아니고, 가공적인 수복신(壽福神)이라고 해명해주었다. 이런 사실은 그 프로그램의 질의응답 내용을 책으로 엮은 ‘상식독본’에 실려 있다. 위조 방지를 위해 수염이 있는 인물화를 도안으로 사용하는 것은 흔한 방법이라는 설명을 했던 것. 즉 수염 긴 노인 도안은 수복신 상징. 이 지폐는 정부수립 직전까지 사용되었다.

◆ 국내 최초 근대묘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마포구 합정역 근처 바른 편에는 천주교 절두산 기념교회가 왼쪽에는 개신교 외국인 연합교회가 소재해 있다. 두 교회는 공히 양화진이라고 하는 한국적 역사와 맞물려 고난 속에서 역사의 분수령을 넘다가 붉은 태양처럼 몸을 태우며 숨을 거두고 잠들었다는 특징을 간직한 곳이다. 합정동 2호선 전철이 지나는 육교 옆 바른쪽으로 넓게 트인 공원이 있는데, 외국인 묘지다. 100여년이 넘는 시간동안 성장위주의 개발논리에 밀려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온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을 우리의 소중한 근대문화유산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묘지인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사진 = 한국기독교선교 100주년 기념 교회 www.yanghwajin.net)

마포구 양화진 선교사 묘원에는 우리나라의 근대화에 앞장섰던 많은 저명한 외국인들이 그들이 자녀와 함께 안장되어 있으며, 17개국의 약 430여기의 묘가 조성되어 있어 근대 묘지 형성 과정 및 비문의 변천사를 연구할 수 있는 역사 학습의 장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묘원들은 서양 영화 속에서 쉽게 보이는 묘지 형태와 별로 다르지 않다. "여기 주를 사랑하는 종이 세상의 삶을 마치고 누워있다" "한국을 사랑하여 한국인의 영혼을 어루만지다 숨진 아무개가 여기 누워있다“ 어느 묘지 뒷면에는 “우리는 결코 한국인을 위해 쏟은 당신의 사랑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글귀도 새겨져 있다. 하나같이 평토장이고 희미한 봉분이 형태만을 드러낸 애장도 꽤 많다. 일반적인 묘지와는 차별성이 있는 이 묘원은 외국인 선교사로서 고향을 떠나 낯선 이국의 땅에서 옳은 신념을 위해 묵묵히 봉사하다 순교한 순교자들의 숭고한 정신이 깃들어 있기에 가치가 높은 유산이다.

◆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 '자유공원'

인천광역시 중구 송학동1가·전동·북성동3가에 걸쳐 있는 공원.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이다. 인천 앞바다와 인천항, 인천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응봉산에 조성된 공원으로 면적이 6만4480㎡ 에 이른다. 1883년 인천의 개항과 함께 응봉산 일대에 일본·청나라를 비롯한 미국·영국·러시아 등 여러 나라들이 어울려 형성한 '만국지계'가 들어서게 되자, 5년만인 1888년 11월 이들에 의해 만국공원이 공동명의로 조성됐다. 그러나 일본 세력의 확장으로 각국 거류지가 철폐되고 공원 관리권이 1914년 인천부로이관되어 서공원이라 불렸다. 그후 1957년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한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세워지면서 자유공원으로 개칭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 '자유공원'<사진 = 한국관광공사 www.visitkorea.or.kr>

인천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자유공원은 민족상잔의 뼈아픈 기억을 되살리며, 인천시민의 안식처로 각광을 받고 있다. 공원 정상의 맥아더 동상과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을 비롯해 자연보호헌장탑, 충혼탑, 자유의 여신상, 연오정, 석정루 등이 세워져 있으며, 학익동 언덕에 묻혀 있던 선사시대의 유물인 지석묘를 옮겨놓았다. 그밖에 1000여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인천시립박물관과 교육청·측후소 등의 문화기관이 들어서 있다. 각종 시민을 위한 행사도 열리고 있다. 또 매년 4월이면 자유공원으로 오르는 길은 벚꽃으로 만발한다. 이를 기념해 벚꽃축제가 이곳에서 열린다.

공원 정상에서 인천항과 월미도를 바라보는 맛도 그만이다. 늦은 밤 이곳에서 바라보는 인천항의 밤 경치는 연인들의 데이트코스로도 유명하다. 인근에 중국인촌, 신포동시장, 인천백화점, 올림포스관광호텔 등이 있다. 약간 멀리는 연안부두, 월미도가 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내려오는 길에 홍예문을 보고 오는 것도 좋다. 일본인들이 자국의 조계와 축현역(현 동인천 역)을 연결시키려고 응암산 줄기를 뚫어 1905년착공했다. 1908년 준공했는데 고개문의 형태가 무지개와 같아 홍예문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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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6-11-15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봤습니다. 문화재 등록이 속속히 되가고 있는 것을 보니 기쁩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가 되시기를.......

마노아 2006-11-15 0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헷, 저도 기뻤답니다^^ 사진까지 같이 나와서 기사가 보기 좋아요.
산타님 이 주의 서재의 달인에 계시더군요. 축하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