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사람 비룡소의 그림동화 43
데이비드 맥키 글, 그림, 김중철 옮김 / 비룡소 / 199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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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리얼해서 잔혹한 동화다.

넓은 판형으로 되어 있는 그림책은 칼라가 없다.  흑백의 펜선이 있고, 면도 거의 채워지지 않은 채 오로지 날카로운 '선'으로만 그림이 구성되어 있다.

책의 첫머리에 여섯 사람이 등장한다.

이들은 한 마을에 정착했고, 땅을 일구며 살았다.  그러다가 침입자가 올까 두려워 망을 보았고, 자신들의 땅을 지키기 위해 군인 여섯을 고용했다.  그러나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고 군인들은 하는 일 없이 놀리게 되었다.  여섯 사람은 군인들을 보내어 이웃 마을을 공격하게 했다.  이웃 마을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갔고, 이들은 땅을 차지했다.

그렇게... 이들이 차지하는 영역은 점점 늘어간다.  누군가는 항복하고 누군가는 대항했다.  대항하던 사람들이 모여 다시 마을을 이루고, 그들의 마을을 지키기 위해 군사훈련을 한다.  강을 경계로 이들은 대치했고, 어느 날 물오리를 향해 서로 화살을 쏘았는데, 그것을 신호로 하여 전쟁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피터지게 싸웠고, 그 결과.... 모두 죽었다.  단 여섯 사람만 남겨둔 채.

이들은 다시 길을 떠난다.  그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곳을 찾기 위하여.

정말, 섬?했다.  굉장히 직유적으로 이야기를 끌어냈지만, 그 투박함을 외면할 수 없을 만큼 현실에 닮아 있었다.  왜 여섯 사람일까.... 여섯 대륙을 상징하는 것일까?

'평화'를 원한다면서 사실은 '전쟁'을 얘기하는 많은 사람들이 스쳐간다.  그 중에... 수풀인간이 제일 먼저 떠오르네...ㅡ.ㅡ;;;

아이들은 이 책을 이해할 수 있을까?  어른들에게 더 뜨끔한 충격을 주겠지만, 아이들은 이 이야기를 이해할 듯 싶다.  이렇게 적나라하게 이야기하는데... 처음부터 싸우지 말고 욕심내지 말고 서로 믿으며 살라고.. 아이들은 진지하게 우리를 충고하지 않을까 싶다.

정말, 무서운 책이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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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에타의 첫 겨울 비룡소의 그림동화 32
롭 루이스 글.그림, 정해왕 옮김 / 비룡소 / 199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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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잃은 헨리에타는 혼자서 맞는 첫 겨울을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친구들의 조언으로 겨울 양식을 미리 예비하지만 번번히 잃기 일쑤다.

한번은 비가 올 때 문을 열었다가 애써 모아놓은 양식이 쓸려나갔고, 또 다시 채워놓은 양식을 이번엔 벌레들이 모두 먹어버렸다.

다시 열심히 양식을 모으자니, 친구들이 안쓰러웠는지 도와준다.  그 바람에 기뻐서 진탕 잔치를 베풀었더니 역시 또 창고가 비어버렸다.

설상가상, 창밖에는 눈이 온다.  헨리에타는 당황한다.  어찌할꼬...

그래도 일단 오늘은 배도 부르고 따스한 곳에서 눈부터 붙이자...고 헨리에타는 생각한다.  잠에서 깨어 보니....

세상에... 이미 봄이 와 버렸다.  헨리에타는 겨울 양식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

헨리에타가 어떤 동물인지 정확히 모르겠다.  두더쥐? 들쥐?  다람쥐는 아니고...

아무튼, 홀로 맞는 겨울을 준비하는 그의 고군분투가 눈물 겹다.  좌절하고 낙심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모습은 눈부시다.

본인의 힘으로 어떻게든 해보려고 애쓰는 모습, 그리고 삶 속에서 부딪쳐 알아가는 삶의 지혜들....  헨리에타는 그렇게 어른이 되어갈 테지.  그리고 자신의 아가에게도 그리 가르쳐 줄 테지...

마음이 훈훈해지는 동화였따.  그림도 따스한 느낌이었고 계절이 변해가는 모습을 리얼하게, 그리고 환상적으로 묘사하였다.  마치 자연이 책 속에 고스란히 안긴 느낌이랄까.  그라데이션이 먹힌 하늘빛이 인상적이다.

헨리에타의 첫 겨울은 성공적이었다.  가을 지나 겨울이 닥쳐오면, 따스한 봄을 기다리는 것이 때로 두려워질 때가 있다.  봄이 시작이 아니라 추락이 될 수도 있는 사람이 많아진 세상이므로.

막연하고 추상적이지만, 또... 인생은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니지만.. 헨리에타의 첫 겨울처럼.. 희망을 품어보았으면 한다.  그렇게 노력하다 보면, 어느새 '봄'이 도착해 있을 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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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휴대전화가 내 몸안으로 들어왔다
[한겨레 2006-11-21 21:03]    

[한겨레]

자고 나면 새로워지는 휴대전화는 과연 어디까지 진화할까. 과학·인문학·예술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예견하는 휴대전화의 미래상을 바탕으로 그 진화의 한 극단을 그려봤다.

2016년 11월22일 아침 6시. 시신경으로 자극이 느껴진다. 눈을 떴다. 10년 전 유행했던 노래, ‘거북이’의 <비행기>가 귓속에서 메아리친다. 청각신경으로 들리는 알람벨 소리다. 처음으로 설정해 놓은 ‘체내 알람’의 느낌이 나쁘지 않다. 체내 알람은 시신경과 청각신경을 자극해 기상 시간을 알려준다. 어제 큰맘 먹고 몸에 심은 ‘바이오폰’ 칩 덕분이다.

눈동자만 굴리면 모니터 짠~

바이오폰을 설명하자면, 몸 안에 넣는 휴대전화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이미 1년 전부터 바이오폰을 통해 화상통신과 영화, 뉴스, 게임 등 모든 멀티미디어 서비스를 즐기기 시작했다. 몸속에 있으니 잃어버릴 염려 없고, 체온으로 전원을 삼으니 반영구적이다. 그래도 나는 몸에 기계를 심는다는 게 영 찜찜해 바이오폰을 쓰지 않았다. 며칠 전 회사에서 바이오폰을 통해 아침 동영상 회의를 하기로 결정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느낌이 나쁘지 않구먼.” 혼잣말을 하며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아내는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다. 바이오폰 알람은 내 몸만 자극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내에게는 어떤 소리나 진동도 전달되지 않는다.

어제 판매직원이 설명한 대로 눈을 감은 채 눈동자를 시계 방향으로 두 번 돌렸다. 눈앞에 자판과 모니터가 펼쳐진다. 물론 ‘진짜’는 아니다. 시신경의 조작을 통해 눈에서만 이미지가 나타날 뿐이다. 여기에 내가 ‘실제로’ 손을 뻗어 허공의 키보드를 두드린다. 이런 나의 손짓을 바이오폰은 타이핑으로 인식한다.

오늘 일정을 확인했다. 8시반 미팅. 오늘 아침은 눈이 오니까, 출근 시간이 10분 가량 더 걸릴 거라는 메시지도 함께 떴다. 그때 갑자기 청각신경 저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찍 일어났네? 오전 회의 때문에?” 동료인 박 과장이다. 당황스럽다. 이건 마치 예전에 컴퓨터를 쓰다가 누군가 메신저로 불쑥 말을 건네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그게 실제 목소리로 들리니 더 당혹스럽다. 박 과장이 바이오폰 메신저에 친구로 등록하자고 해 생각 없이 그러자고 한 기억이 났다. 대충 박 과장과 얘기를 접었다. 바이오폰 메신저의 친구 수를 많이 만들지 말아야겠다.

혈압등 주인 몸 상태도 확인

오늘 나머지 일정을 마저 확인했다. 저녁엔 가족들과 포항으로 과메기를 먹으러 갈 예정이었다. 모니터에 또 메시지가 떴다. “저녁엔 동해안에 강한 바람이 불 것으로 예상됨. 과매기 가격도 다음주에 하락할 확률 90%. 다음 8일 동안 동해안 날씨 맑음.” 포항 계획은 다음주로 미룬다고 가족들에게 문자 메일을 보냈다. “바이오폰이 똘똘하군.” 혼자서 중얼거렸다.

하기야, 더 똑똑한 바이오폰은 영화도 추천해 준다고 들었다. 주인이 영화를 보는 동안 바이오폰이 주인의 긍정적인 신체·정서 반응을 기억해 두었다가, 비슷한 장르나 같은 감독이 만든 영화가 나오면 알려준다. 주인의 혈압·혈당량 등 몸 상태를 확인하고 진단하는 ‘의사’ 바이오폰도 새로 나왔다.

아침 뉴스를 봤다. 바이오폰에 주인의 신분을 입력하려는 정부 계획에 반대하는 시위 소식이 눈에 띄었다. 시위 주동자는 ‘반바이오폰 연대’ 회원들이었다. 화면 속의 한 시위 참가자는 “바이오폰이 장기적으로 몸에 어떤 영향을 줄지 검증이 안 됐는데, 이 ‘위험한 기구’에 담긴 개인의 정보가 네트워크를 타고 유출되기라도 하면 어떡하느냐”고 물었다. 이들은 바이오폰은 물론 체외 휴대폰도 쓰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타자기와 삐삐, 팩스 같은 추억의 기기들을 쓴다고 한다. “별난 사람들이야.” 혼자 중얼거렸다.

학교 수업도 ‘바이오폰’으로

바이오폰에 중독된 아이들의 뉴스도 나왔다. 바이오폰의 강력한 재생 기능 때문에 많은 청소년들이 현실과 가상 세계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한 국회의원은 바이오폰의 사용 연령을 20살 이상으로 제한하는 법률안을 낸다고 한다.

거실로 나왔다. 대학생인 아들이 소파에 앉아 눈을 감은 채 바이오폰에 접속해 있다. 게임에 몰두해 있는 듯하다. 학교엔 잘 안가고 걸핏하면 밤을 새우는 것이 영 못마땅하다. 아들놈의 어깨를 툭 쳤다. “학교는 안 가니?” “에이 아빠, 몇 번을 말씀드려야 해요? 이제 학교 가는 애들 별로 없어요. 다 바이오폰으로 수업 들어요.” 또 그 소리다. 그러고 보니 동영상 강의 덕분에 학교 강의실 수가 4분의 1로 줄었다고 한다. 아들놈은 대부분의 수업을 동영상으로 듣고, 친구들은 인터넷 힙합 동아리에서 사귀는 듯했다.

아침을 대강 챙겨 먹고 현관을 나섰다. 아들놈의 목소리가 귀로 흘러들었다. “안녕히 다녀오세요.” 뒤를 돌아보니 아들놈은 또 눈을 지그시 감고 게임에 빠져 있다.

‘뭐지? 내가 아들놈도 메신저 친구로 등록했나? 아니면 아들놈이 실제로 한 인사말이었을까? 아님, 환청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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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이동통신을 위한 시디엠에이(CDMA·코드분할다중접속) 기술의 상용화에 세계 최초로 성공한 한국은 10년만에 휴대전화 인구 4000만 시대를 맞았다. 그 사이 휴대전화는 개인의 일상과 사회의 관습에 스며들었고, 무수한 이들의 운명을 바꾸어놓았다. 미래의 휴대전화는 어떻게 진화하고, 어떻게 삶을 바꿀까? 각각 다른 배경을 가진 15명의 상상과 통찰을 들어보았다.

“휴대전화는 공간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가령 2008년부터 일반 대학에서도 사이버 학과를 둘 수 있는데, 곧 학생들은 휴대전화로 수업을 들을 수 있다. 말하자면 지하철도, 공원도 강의실이 되는 셈이다. 그렇게 된다면 강의실을 중심으로 생겨난 대학 캠퍼스의 개념도 바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사회적으로 경계가 그어졌던 공간들은 하나씩 작은 휴대전화 속으로 들어오고 있다. 빌 게이츠가 ‘손 끝으로 열리는 세상’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우리는 휴대전화 때문에 ‘손 안에 품은 세상’을 살고 있다.” (민경배·경희사이버대학교 엔지오학과 교수)

“미래 휴대전화 기술의 핵심은 배터리와 디스플레이다. 배터리는 주위의 가장 흔한 공기 중의 질소나 물, 혹은 체온을 이용해 충전하는 방식으로 발전할 것이고, 실제로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또 디스플레이에 관해 여러가지 연구가 있는데, 공중에 이미지를 투사하거나 안경을 쓰면 3차원의 이미지를 보는 등의 방법이 있다.” (이름을 알리지 말아달라는 ㄱ아무개씨·국책연구소 연구원)

“인터넷 네트워크 환경은 이제 숲과 빌딩처럼 주변을 둘러싼 자연스러운 환경이 될 것이다. 휴대전화는 ‘디지털 자연’과 인간을 잇는 가장 중요한 매개체가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미래엔 모든 다리와 도로, 건물마다 아르에프아이디(RFID·무선주파수인식) 칩이 설치돼 날씨와 교통량 등 주변의 정보를 인식하고, 그 정보가 일종의 ‘정보 중앙관제탑’ 같은 곳에 집중될 것이다.

그렇다면 개인과 이 관제탑을 잇는 매개는 무엇일까. 바로 휴대전화가 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 이런 환경에서 미래에는 ‘휴대전화 없으면 인간도 아니다’라는 말은 수사적인 표현이 아닐 것이다.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조건으로서 휴대전화는 생필품 이상의 의미를 가질 것이다.

또 휴대전화의 미래를 예견할 때 인간의 진화 방향도 함께 생각해야 하는데, 인간은 이미 안경과 의족 등을 쓰면서 초보적인 ‘사이보그’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휴대전화는 미래에 인간의 몸에 들어올 첫 번째 기기가 될 것이다.” (고영삼·한국정보문화진흥원 박사)

“휴대전화는 앞으로도 모순적인 두가지 방향으로 발전할 듯하다. 첫째 경향은 일단 긍정적인 방향이고, 두 번째는 부차적이지만 부정적인 방향이다.

일단 휴대전화는 사람들 사이의 직접적이고 항구적인, 그리고 전지구적인 소통을 가능케하는 잠재력이 있다. 여기서 직접적인 것은 미디어가 매개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 대 개인의 소통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항구적인 것은 항상 갖고 다니기 때문에 항상 연결된 소통의 흐름을 만든다는 뜻이다. 또 휴대전화는 국경과 언어의 장벽을 넘은 소통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컴퓨터가 발전하고 휴대전화 안에 동시 통역기가 내장되면 다른 언어 사이에도 직접 소통이 가능한 시대까지 올 듯 하다. 이 세가지 특징은 크게 봐서 실질적인 ‘지구촌’을 만들 수 있는 중요한 장치가 되지 않을까.


원래 국가나 정당은 개개인의 수평적인 소통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차단하면서 생겨났는데, 앞으로 휴대전화는 국가와 정당을 불필요하게 하는 역할을 하지 않을까. 일방향적인 방송이나 신문도 부차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않을까. 지금과 상당히 다른 민주적인 재구조화가 휴대전화에 의해 초래될 수 있다. 사회운동의 경우에도 중앙의 집중적인 통제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생길 것이다.

부정적인 발전 방향은 정보 기술에 의한 감시의 증대다. 도·감청의 위험성이 항상 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소통 자체를 거머쥘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소통을 차단하고 소통 관계를 역이용해 더 거대한 권력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고 본다.

휴대전화의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경향 가운데 어느 쪽으로 귀결될까. 단기간에는 후자 쪽이 더 가시적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통제라는 것이 완벽할 수가 없다. 휴다전화의 소통 관계는 미시적이고 직접적이라 감시와 통제에 한계가 있다. 작은 소통의 승리를 예상한다.” (조정환·문학평론가)

“다양한 기능의 컨버전스(통합)로 인해 편리함을 추구할 수 있는, 패션 지향적인 디자인의 진화를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휴대전화의 기본적인 기능에 충실하면서, 감성적인 접근을 시도하는 복고적인 디자인도 있을 것이다.” (변상태·홍익대 디자인학과 교수)

“미래의 휴대전화는 주인의 주변 정보부터 혈당 수치, 혈압, 디엔에이(DNA) 정보까지 담을 것 같다. 사람이 휴대전화에 정보를 저장해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휴대전화가 주인의 정보를 관리하는 식이다. 또 사람들이 휴대전화와의 관계를 실제 사람과의 관계로 착각하는 경향도 보인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휴대전화에 정보 공급에서나 정서적인 측면에서 의존하고 예속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휴대전화가 주인의 말을 거부한다면 어떻게 될까. 실제로 휴대전화 안에 강아지를 키우는 프로그램에서 주인이 강아지를 삭제하면, 강아지는 주인에게 이별의 편지를 쓰도록 설정이 돼있다고 한다. 또 장기적으로는 휴대전화가 진화를 해서, 뇌 옆에 하나의 장기처럼 되는 것은 아닐까 상상해본다.” (안병기·영화 <폰> 감독)

“휴대전화가 모든 매체를 통합하면서 사람과 사람을 잇는 매개가 될 것 같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느낌, 타자기로 글을 찍는 느낌 같은 감각의 재미는 줄어들 것 같다.” (김중혁·소설가)

“세상의 원리가 한쪽으로 몰리면 다른 쪽으로 돌아오듯, 이제는 휴대전화의 기능이 간단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과잉수요와 과잉공급을 넘어서, 이제는 전화기의 기본적인 기능만 맡는 휴대전화가 나오지 않을까.” (구효서·소설가)

“화상전화는 실패하거나, 일부의 사람들만 쓸 것 같다. 여자들은 화장 지우고 편하게 통화를 하고 싶어 한다. 화상전화를 통해 맨 얼굴을 드러내고 싶어하지도 않고, 사적인 공간을 보여주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예전에는 휴대전화와 카메라를 결합하는 것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앞으로도 말도 안 되는 것들이 휴대전화에 붙지 않을까. 예를 들면, 휴대전화가 물을 내뿜어서 급한 불을 끌 수도 있고, 치한 퇴치를 위한 전기 충격기로도 쓰일 수 있을 것 같다. 또 바꿔서 생각하자면, 휴대전화 안으로 다른 기능들이 들어왔던 것처럼, 휴대 전화 기능도 다른 기계 속으로 들어가지 않을까.” (이혜미·건국대 국문과 1년·2006년 중앙 신인문학상 시부문 당선자)

“휴대전화는 주로 개인적인 소통수단이다. 그래서 휴대전화를 많이 사용할수록 사적인 의미 세계는 넓어진다. 그런데 사적인 소통이 활발하다고 해서 문화가 반드시 성숙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소통의 남발은 문화의 빈곤으로 연결되는 경향이 있다.

물론 ‘나는 접속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대로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 자체에서 안정감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소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나 소통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공허한 메시지를 남발하는 가운데 의미 세계는 빈곤해질 수 있다. 또 정보의 발신 장치들이 발달하면서 주체적으로 소화되지 않은 언어들이 무분별하게 남용되면서 소통에 대한 냉소주의가 만연할 수 있다. 그럴수록 역설적으로 더욱 자극적인 소통을 추구하는 경향도 보인다.” (김찬호·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휴대전화는 장기적으로 개인의 복합적인 정보통신의 창이 될 것이다. 최근에는 휴대전화의 물리적인 한계에 도전하는 시도들이 보인다. 예를 들면, 휴대전화가 쏘아주는 레이저가 가상의 자판을 만들고, 자판을 치면 센서가 손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식이다.” (고재현·한림대 전자물리학과 교수)

“프랑스 혁명 이후에 신문이 대중적으로 읽히면서 <삼총사>나 <몽테크리스토 백작> 등의 연재소설이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중세 이후에 주류였던 시가 주변부로 몰렸고, 시는 끝났다고도 했다. 그러나 시는 다시 상징주의라는 고급스러운 모습으로 돌아왔다.

지금 휴대전화 때문에 수화와 발화의 양이 엄청나게 증가했다. 과연 그 컨텐츠를 무엇으로 메울까. 프랑스의 경험에서 배우듯, 가볍고 단순한 컨텐츠 뿐 아니라, 실존적인 고뇌나 깊이를 담은 컨텐츠가 휴대전화에서도 필요하다. 그 자리를 신화적이고, 고대사적이고, 중세적인 요소들이 메울 것이다. 휴대전화에서는 결국 고대적이고 신화적인 지향과 미래적이고 멀티미디어적인 지향이 섞일 것이다.

또 음성문자로서의 한글은 휴대전화에서 엄청난 확장을 할 것이다. 전파력과 해독력이 빠른 한글의 전세계적인 비중이 커질 것이다. 한편으로는 전지구적인 통신의 과정에서 회화문자와 암호문자가 언어를 대신하면서 등장할 것이다.” (김지하·시인)

“휴대전화를 통한 편리의 이면에는 단절과 파괴라는 암초가 도사리고 있다. 휴대폰이 소통을 원활히 할 것이라는 일반적인 기대와 달리, 사람들은 얼굴을 맞대고 말을 주고 받는, 본원적인 소통의 방식을 조금씩 파괴하고 있다. 기대와는 달리, 휴대전화가 인간 사이 커뮤니케이션의 애물단지가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동전화가 빚어내는 소통의 변화 양상에 대한 관심은 매우 저조하다. 그나마 있는 연구들도 생산자들이 시장 공략을 위해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휴대전화 이용자 중심의 문화에 대한 연구와 고민이 절실하다.” (김기태·호남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소니가 워크맨 개발을 통해 걸어다니면서 음악을 듣는 문화를 만들어 낸 것처럼, 모바일 아르에프아이디(RFID), 디엠비(DMB) 등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기반으로 휴대전화와 이종산업은 계속 결합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걸어다니면서 업무를 처리하고, 영화·음악 등 문화를 즐기며, 의사의 검진을 받을 수 있는 진정한 모바일 라이프의 문화를 만들어 낼 것이다.” (이주식·에스케이 텔레콤 컨버전스추진본부장)

“학생 때 길을 가다가 힘들면, 길이 움직여주었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이제는 실제로 길이 움직인다. 에스컬레이터를 보면 그렇다. 지금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것들이 미래에는 이루어진다. 많은 사람들이 휴대전화를 들고 다니기가 거추장스럽다고 생각한다. 곧 휴대전화를 몸 어딘가에 착용할 수 있을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몸 어딘가에 들어갈 수도 있다.

또 사람들이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과 얘기하기 위해 휴대전화를 원했지만, 점차 휴대전화 그 자체와의 상호관계를 원한다. 일본에서는 이미 심장박동과 비슷한 주기로 빛을 내는 식으로 휴대전화에 감성적인 요소를 주입하고 있다. 점차 휴대전화는 하나의 ‘펫’(애완 동물)이 되고, 몸의 일부가 되고 있다. 디지털 기기가 통합되는 과정에서 휴대전화가 그 중심에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앞으로도 그 기기를 ‘폰’이라고 부를지는 모르겠다.” (김진·엘지전자 엠시디자인연구소 소장)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 도움말 주신 분: 고영삼(한국정보문화진흥원 박사), 고재현(한림대 전자물리학과 교수), 구효서(소설가), 김기태(호남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김중혁(소설가), 김지하(시인), 김진(엘지전자 엠시디자인연구소 소장), 김찬호(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조정환(문학평론가), 민경배(경희사이버대학교 엔지오학과 교수), 변상태(홍익대 디자인학과 교수), 안병기(영화 <폰> 감독), 이주식(에스케이텔레콤 컨버전스추진본부장), 이혜미(건국대 국문과 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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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11-21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십년 뒤의 휴대폰은 어떤 모습일까... 어쩐지 으스스하다.
그나저나 되찾은 내 휴대폰... 아까 저녁 때 알았다. 달려있던 장식물은 모두 떼어갔다는 것을...ㅡ.ㅡ;;;;;
 

펴들기만 하면 내 웃을 줄 알았지~
[한겨레21 2006-11-21 08:03]    

[한겨레] 이기호·박민규·박형서가 보여주는 한국소설 유머의 심상찮은 변화…질펀한 입담의 약장수, 고독의 복화술, 작두 탄 구라의 향연을 즐겨라

▣ 정여울 에세이스트

요즘 <개그야>의 ‘사모님’을 보며 한국 코미디의 경이로운 진화를 실감한다. ‘사모님’의 성공 요인 중 하나는 무대장치의 과감한 생략이다. 의자 하나 달랑 놓고 모든 무대장치를 제거하니, 그 텅 빈 암흑의 공간은 시청자에게 다채로운 상상의 여백을 제공한다. ‘운전해’, ‘어서’라는 짧은 대사는 그때마다 다른 뉘앙스로 변주되며, 화려함 이면에 도사린 사모님의 권태와 고독, 그녀의 못 말리는 백치미를 구현한다. ‘아마데우스’라는 코너는 더욱 놀랍다.

이 코너를 보면 인간의 표정 안에 숨겨진 소우주, 그 코믹성의 극치를 볼 수 있다. 언어도 무대장치도 그 무엇도 없이 오직 삼총사의 표정만으로 교향곡을 연주한다. 이 세 사람은 가히 얼굴 근육의 움직임 하나로 우주를 연주해내는 기막힌 내공을 보여준다. 이렇듯 무대 위의 개그는 표정만으로도 시청자를 무장해제시킬 수 있다. 이것은 스탠딩 코미디가 굳이 ‘의미’를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문학은 이런 표현의 경제성을 발휘하기 어렵다. 문학은 사소한 상황 설명이나 극적 암시조차 ‘문자’로 설정해야 하는 수공업적 장르인 탓이다. 그러나 최근 한국 소설의 유머도 드디어 심상치 않은 지각변동을 시작한 것 같다.

애들은 가라? 꼰대들은 저리 가!

이기호식 유머의 키워드는 친밀성이다. 그의 유머는 흔히 구어체적 현장성에서 발원한다. 그는 ‘독자와 작가 사이의 거리감’을 ‘이야기꾼과 청자의 온기’로 극복하곤 한다. 그의 문체는 강한 구어성을 지니고 있기에, 독자는 머릿속에서나마 묵독의 폐쇄성을 지우며, 동네 남녀노소를 잔뜩 모아놓고 질펀한 입담을 풀어내는 이야기꾼의 과장된 몸짓과 신명난 목소리를 상상하게 된다.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는 이기호식 유머의 에너지를 명쾌하게 보여준다. 의도와 목적과 진심을 매번 배반하는 시트콤적 상황의 무한 연쇄들. 이기호의 인물들은 우연의 퍼레이드에 온몸을 맡긴 채 기꺼이 ‘하느님의 코미디 채널’이 될 수밖에 없다. 이기호는 작품에서 ‘독자의 상상력’을 유난히 강조한다. 옛날옛적 입담 좋은 약장수들은 온갖 구라를 읊조리며 ‘애들은 저리 가!’라고 외쳤지만, 우리 시대의 새로운 약장수 이기호는 ‘꼰대들은 저리 가!’ 혹은 ‘애들만 이리 와!’라고 외치는 듯하다. 여기서 꼰대와 애들을 가르는 기준은 ‘상상력’이다. 이 대목에서 상상력을 바쁜 일상에 저당 잡힌 어른들은 주눅들기 쉽다. 그러나 그 상상력의 울타리가 그다지 높지 않다는 것에 이기호식 유머의 ‘친밀성’이 자리한다. 이기호의 소설을 읽다 보면, 좀처럼 걷지 않던 후미진 샛길을 문득 걸어보고, 평소에는 서먹한 사람에게 실없는 농담을 훌쩍 건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상상력의 코마 상태를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다.


박민규 소설의 독자는 가끔 자신의 ‘조로’를 의심하게 된다. 박민규의 주인공들은 애어른 할 것 없이 대책 없는 유아적 순수로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소설 앞에서 우리는 매번 ‘너무 닳고 닳은 어른들’이 되어버린다. 읽을 때는 키득키득 웃지만 읽고 나면 문득 자신의 길들여진 일상이 부끄러워지는 것, 그것이 박민규식 유머의 빛깔이다. <핑퐁>의 왕따 소년은 이렇게 말한다. “다음엔 못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 못이라면, 일생에 한 번만 맞으면 그만일 테니까.” 그의 유머는 동화적 무구함과 아릿한 슬픔에 물들어 있다. 그러나 이 유아적 순수에는 왕따 아닌 모든 인간들을 향한 서늘한 저주가 묻어 있다. 핼리혜성이 지구에 와서 충돌해주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임, 그곳에 드나들며 왕따 소년은 교실에서만 ‘다수결로 묵인되는 왕따’가 자행되는 것이 아님을 배운다. “인류라는 인스톨을 유지할 것인가, 언인스톨할 것인가. 결정은 승자의 몫이란다.” 이 중차대한 인류의 운명을 왕따 소년들에게 맡기는 것이야말로 박민규식 유머의 메커니즘이다. 이러한 설정은 단순한 유아적 상상력이 아니라 인류가 내팽개친, 인류가 ‘깜빡’한 존재들의 필연적 복수혈전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박민규의 유머는 정서와 문체 사이, 욕망과 표현 사이의 미묘한 거리감에서 탄생한다. 그의 작품 표면에 드러난 유머가 빙산의 1%라면, 독자는 보이지 않는 99%의 빙산, 그 거대한 스케일의 고독과 슬픔의 복화술을 읽어낸다. 그의 유머는 일단 독자를 웃겨놓은 다음 그 웃음을 애도하게 만드는 성찰적 유머다. 상큼한 유머 뒤에 드리운 짙은 비애의 그림자를 상상하게 만드는 것이다.

더 없이 이지적인 블랙유머

아마 한국 독자들에게 가장 낯선 유머는 박형서식 유머일 것이다. <자정의 픽션>에 실린 <‘사랑손님과 어머니’의 음란성 연구>는 박형서식 유머의 코드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엄격한 먹물적 수사학을 노골적으로 조롱하면서도 능란하게 이용하는 이중적 태도가 유쾌상쾌통쾌하다. 화자는 선행연구에 대한 분노를 무시무시한 공격적 수사학으로 과격하게 표현하는가 하면(“그는 가금류의 뇌를 가진 비평가이며 문장은 흑사병 수준이라 별로 언급하고 싶지 않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리카르도 호킨스의 <못된 유전자>라는 식으로 패러디하기도 한다.

수많은 탁상공론에 맞서는 더 많은 탁상공론을 조롱하는 이 작품은 그 어디에서도 통과될 수 없는 ‘논문’이지만 더없이 이지적인 블랙 유머로 가득한 흥미만점의 ‘소설’이다. “필자와 같이 잘난 연구자”가 “요새 좀 바쁘긴 하지만” 써낸 이 장대한 스케일의 논문은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로 범람한다. ‘닭알’을 ‘불알’과 동격에 놓은 다음, <사랑손님과 어머니>에 수십 번 등장하는 달걀의 상징을 해석하기 위해, “남근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불알 중심적 사고로 옮겨가야 한다”는 식이다. 이렇듯 천연덕스레 자신의 ‘독창적’ 학설을 읊어대는 능청이 배꼽을 잡는다.

이 모든 잡설·요설·독설들이 논문의 테마를 요리하는 데 너무나 ‘논리적으로’ 복무한 나머지, 독자들은 깜빡, 혹은 기꺼이, 이 ‘논문’에 자발적으로 속아 넘어가고프다. 이 논문의 핵심 가설은 옥희가 6살이 아니라 가임기의 “처녀애”이며 아저씨와 옥희의 성교로 인해 질투에 눈먼 어머니가 아저씨를 내쫓는다는 것. 결국 외할머니-어머니-옥희는 “음란삼각편대”이며 옥희의 집은 “한 남성을 두고 아귀다툼을 하는 매음굴”이란다. 박형서는 우리가 가장 도전하기 어려운 습속과 제도와 상식들을 한낱 유희의 장난감으로 만듦으로써, 사소함과 중요함이 서로 전복된 ‘픽션 언리미티드’의 세계를 창조한다. 모든 진정성의 강박이 사라진 세계, 진실은 몽둥이와 발길질과 전기고문으로 조작되는 세계, 존재나 고통이나 사랑 따위는 “시시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 되어버리는 세계. 여기서 박형서적 그로테스크 유머가 탄생한다.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이 악동적 기괴함이 가득한 문체에 강력한 거부감이 들면서도 이상하게 그 ‘싸가지와 재수가 동시에 외출한’, 잘난 척하는 말투를 모방하고 싶어진다. 그의 주인공들은 메피스토펠레스의 이지적인 악마성과 <사탄의 인형> 주인공 처키의 악동적·요괴적 이미지가 교차하는 캐릭터들이다. 박형서 유머의 핵심은 갈 데까지 간다는 것, 한없이 막 나간다는 것이다. 끝간 데 없는 기괴한 허구의 파노라마가 박형서식 유머를 수놓는다. 그의 소설은 인과성의 제어로부터 완전히 탈주한, 작두 탄 구라의 향연이다. 게다가 그는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유머를 구사한다. 자신의 두뇌 속 주름 하나하나까지도 독자들에게 거의 MRI 촬영의 해상도로 보여주는 뻔뻔함이 그의 매력이다.


진정한 공통분모는 ‘상상력’

최근의 단편소설 중에는 김중혁의 <유리방패>가 새로운 유머의 경지를 보여준다. 김중혁은 읽는 이를 공격적 웃음의 수혜자로 만들지 않는다. 그는 등장인물의 천진함 앞에 독자를 뼛속 깊이 무장해제시킨다. 그의 유머는 공격성도 방어성도 없으며, 이 질긴 생의 링 밖으로 잠시 뛰쳐나와 마음의 모든 매듭을 잠시나마 풀고, 소설 속 주인공들과 소주 한잔 나누고 싶어지는, ‘비움’의 유머다.

그러나 위의 작가들의 진정한 공통분모는 ‘상상력’ 자체이지 유머코드는 아니다. 이들의 발랄한 상상력이 독자의 영혼에 유쾌하게 물들 때 거기서 유머라는 스파클이 발생하는 것뿐이다. 상상력이 뜻하지 않게 유머를 낳을 수는 있지만 유머 자체가 상상력을 낳을 수는 없다. 그 어떤 마음의 파문도 일으키지 않는 말초적 유머는 가독성의 도구로 전락할 뿐이다. 유머의 첫맛과 뒷맛이 일치하는 유머는 독자의 상상력을 간질이지 못한다. 복잡미묘한 뒷맛을 남기는 유머, 짠하고도 애잔한 뒷맛을 남기는 유머는 언제나 감동의 원천기술이다.(그래서 나는 아직도 박완서의 걸쭉하고도 새침한 구식 유머가 좋다.) 문학의 유머는 <개콘>이나 <웃찾사>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지식과 세상의 모든 역사와 세상의 모든 억압과 경쟁한다. 문학적 유머의 원천기술은 의미를 삭제한 쾌락이 아니라, 의미 자체와 질펀하게 놀아나는, 예술과 지성과 상상력의 비빔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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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장의 어색한 립싱크를 볼 수 있다. 뭐... 로봇이니까... 난 그래도 멋지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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