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우리 역사 바로잡기 1
이덕일, 김병기, 신정일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6년 11월
품절


일제 식민사관이 단군조선을 부인하고 고조선의 강역을 평안남도 일대라고 주장했던 것은 한강 이북이 중국사의 영역이었다고 주장하는 중국 동북공정의 논리와 완전히 일치한다. 이런 점에서 두 사관은 일란성 쌍둥이이다. 일제 식민사관은 한국의 영토를 영구히 차지하기 위한 것이었고, 동북공정은 현재의 한강 이북을 차지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고조선사에서 한시도 눈을 떼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5쪽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기자가 동쪽으로 가서 조선을 건국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동쪽 조선으로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동쪽에 이미 조선이란 나라가 있었음을 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국사 교과서는 이런 기술을 외면한 채 단군조선도, 기자조선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국사 교과서는 위만조선이 사실상 고조선의 시작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22쪽

국사 교과서는 위만이 집권한 후 비로소 철기 문화를 받아들인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니, 결국 고조선은 기원전 3세기경에야 철기 문화를 받아들였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실증사학을 표방하지만 위만에 대해 전하는 그 어떤 사료에도 그가 철기 문화를 갖고 왔음을 추측하게 해주는 내용은 없다. 마찬가지로 고조선이 위만에 오기 전까지 철기 문화가 아니었다는 어떠한 증거도 없다. ‘고조선의 철기 문화는 당연히 위만이 중국에서 가져왔을 것이다’라는 사대주의적 고정관념 속에서 나온 기술일 뿐이다. 국사 교과서의 논리대로라면 위만은 고조선의 왕위 찬탈자가 아니라 철기 문명의 전달자가 된다. 일제 식민지 치하를 찬양했던 식민사학의 논리가 아니면 나올 수 없는 가치전도인 것이다.
-23쪽

진개가 "조선의 서쪽 영토 2천여 리를 빼앗았다"는 대목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고조선이 평안남도 일대에 걸친 작은 소국이었다는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좋은 자료이기 때문이다. 평안남도는 2백여 리에 불과하다. 2천여 리를 빼앗기고도 만번한을 경계로 연과 대치했다면 고조선은 매우 광대한 강역을 지닌 제국일 수밖에 없다. 이때는 부왕과 준왕이 등장하기 이전이다. 그러나 국사 교과서는 이런 내용은 모두 사장시킨 채 위만이 정권을 빼앗은 다음에 고조선이 강성해졌다는 식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30쪽

흔히 이성계가 세운 ‘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이라는 명칭을 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고조선이라는 표현이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처음 나온다는 사실을 몰라서 하는 소리다. 고려 사람인 일연은 훗날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리라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그럼 일연은 무슨 의미로 고조선이란 표현을 썼을까? 일연은 위만조선과 구별하는 의미로 고조선을 썼던 것이다. 일연은 단군조선, 기자조선을 고조선으로 인식하고 위만조선을 따로 인식했다.
-38쪽

서거정은 자신이 본 고기(古紀)에 "무진년(기원전 2333)에 건국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단군조선의 개국년으로 삼은 것이고, 이것이 현재의 단기이다. 일반의 예상과는 달리 일연이 본 고기(古記)가 아니라 서거정이 본 고기(古紀)가 단군조선의 건국년으로 통용된 것이다. 이처럼 조선 초만 해도 단군이 기원전 24세기에 조선을 건국했다는 것은 국가의 공식 역사관이었다. 조선 초만 해도 개국 시조였던 단군은 조선 후기 사대주의가 심화되면서 부인되기 시작해 일제가 대한제국을 점령하면서 말살되어갔다. -45쪽

기원전 2000여 년까지로 추정할 수 있는 현재까지의 청동기 발굴 성과만 가지고도 기원전 2300여 년이라는 <삼국유사>의 단군조선 건국 연대와 큰 차이가 없게 된다. 따라서 기원전 2300여 년이라는 고조선의 건국 연대는 <삼국지><<위서동이전>> 등의 문헌사료는 물론 고고학적 발굴 성과로도 뒷받침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인 것이다. 이는 또한 단군조선의 실재를 부정하고 위만조선을 최초의 국가로 보고 있는 남한 학계의 이른바 ‘통설’에 중대한 문제점을 제기하는 것이다. 참고로 북한은 우리나라 청동기 문화의 개시에 대해 최초의 국가이자 노예소유주 국가인 고조선을 중심으로 기원전 30세기에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55쪽

조선은 국호 자체가 기자 존숭을 의미했는데, 정도전이 <조선경국전>에서 기자조선의 계승자라는 의미에서 국호를 조선으로 정했다고 말한 점이 이를 말해준다. 그러나 정도전은 단군조선의 실재도 부정하지 않았다. 태종 3년(1403) 편찬된 <동국사략>이후 국가에서 편찬한 역사서는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으로 이어지는 상고사 체계가 확립되었다. 16세기 이후 사림파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기자 존숭은 한층 강화되었다. 청나라가 중원을 지배하면서 조선에서는 소중화 사상이 확산되면서 기자조선은 더욱 존숭되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학계에서는 기자조선의 실재를 부정하는 ‘기자부정론’이 통설을 이루고 있다. 이는 기자조선에 대한 엄밀한 학문적 연구 성과의 결과이기보다는 이민족인 중국인이 기자조선을 건국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감정적 차원이기도 했다. 또한 기자조선을 부정하는 것이 식민사학 잔재의 청산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 때문인데, 역사가 실재가 아닌 후대의 감정에 의해 부정된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의 소지를 안고 있다.-61-62쪽

이병도가 위만을 조선인 계통의 유민으로 보는 근거는, 그가 망명할 때 "북상투(추결)"에 "오랑캐 옷(만이복)"을 입었고, 준왕이 요지인 국경수비대장은 맡길 정도로 신임했다는 점, 그리고 나라를 차지한 후에도 조선이란 국호를 유지했다는 점 등이다. 그러나 <사기>나 <삼국지>에서 분명히 "연나라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위만이 ‘북상투’와 ‘오랑캐 옷’이라는 것만으로 조선인으로 볼 수 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실제로 <사기><<역생육가열전>>에는 남월왕 위타가 육가를 만날 때 역시 북상투를 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한서> <<식화전>> ‘정정조’에도 북상투를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한 최근 진시황릉에서 발굴된 도용은 대부분 상투머리를 하고 있다. 따라서 상투가 그때부터 조선인만의 것이었다고 볼 근거는 없는 것이다. -72쪽

준왕의 도주로가 중요한 것은 고조선 멸망 당시의 도읍지, 곧 최후의 도읍지가 어디인가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현재 사학계의 이른바 ‘정설’은 준왕의 도주 당시의 도읍지, 곧 고조선의 마지막 수도는 오늘의 평양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멸망 당시의 도읍지가 평양인지에 대해서는 정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이 부분이 중요한 것은 한나라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세웠다는 이른바 한사군의 위치와 연계되기 때문이다. 과연 통설대로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있었는지, 아니면 만주 서쪽에 있었는지를 결정짓는 관건이기 때문이다. <후한서>나 <삼국지>의 기록은 모두 준왕이 ‘바다를 경유해’ 도주했음을 전하고 있다.-73쪽

한사군 중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군현은 낙랑군이다. 바로 한사군의 수도이기 때문이다. 일제 식민사학자들과 그 한국인 제자들은 낙랑군이 오늘날 평양 지역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사기> <<하본기>>에는 "낙랑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으며, (만리)장성의 기점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곧 갈석산이 있는 곳이 낙랑군이며, 바로 만리자성의 기점이라는 것이다. 갈석산은 현재 하북성 창려현 북쪽에 있는데, 창려현은 만리장성의 동쪽 끄트머리인 진황도와 난하 사이에 있는 현이다.-105-107쪽

낙랑군이 고구려에게 멸망하는 것은 미천왕 14년(313) 때이다. 대무신왕 15년(서기 32)에 망한 낙랑이 어떻게 미천왕 14년에 다시 멸망할 수 있을까? 이는 한국 고대사에 낙랑이란 이름의 정치세력이 둘이 있었음을 뜻한다. 하나는 최리가 국왕으로 있던 낙랑국이고, 다른 하나는 한사군의 낙랑군이다. 그렇다면 낙랑국의 위치는 어디였을까? ‘대무신왕조’에서는 고구려를 ‘북국’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낙랑이 고구려의 남쪽에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유리이사금 13년의 "낙랑이 북쪽 변경을 침략"했다는 기록은 낙랑국이 신라의 북쪽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즉, 낙랑국은 고구려의 남쪽이자 신라의 북쪽에 있던 나라였다.-114쪽

기나긴 기간 동안 존속했던 고조선이 자국의 화폐를 만들지 않고 연나라의 화폐를 그냥 사용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것도 연나라는 존속 기간이 기껏해야 100여 년 정도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고조선은 연나라가 생기기 전이나 망한 이후에도 연나라 화폐인 명도전을 만들어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따라서 명도전을 무작정 연나라 화폐로 보는 현재까지의 시각은 수정되어야 한다.
-165쪽

현재 우리나라의 학교에서 고조선은 청동기 시대 때 개국했다고 가르친다. 이는 신석기 시대에는 국가의 성립이 불가능하다는 전제에서 나온 이론이다. 그리고 청동기 시대의 묘제인 고인돌의 등장을 지배계급의 성립과 국가의 시작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신석기 시대에도 국가가 존재했다고 보는 것이 현재 세계 학계의 흐름이다. 대표적인 예가 중남미의 잉카, 마야, 아스텍 문명 등인데, 이들 문명은 청동기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고대국가라고 인정하고 있다.
-187쪽

세형 동검은 기원전 300년경부터 주로 등장한다. 세형 동검은 한반도 전역에서 많이 출토되었다는 이유로 한국식 동검이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한반도뿐만 아니라 러시아 연해주 지역과 중국 요하 유역의 정가와자에서도 출토되었고, 일본 규슈 지역 야오이 시대의 독무덤에서도 출토되었으므로, 한국식 동검이라기보다는 그 형태를 따서 세형 동검이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196쪽

중국의 동북공정은 은나라 출신의 기자가 대동강 유역에 기자조선을 세웠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주장이 사실로 확인되려면 대동강 유역에 기자의 출신 지역인 은나라 유적들이 출토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재 은나라 유물들이 출토되는 지역은 산동성과 요령성이고 한반도에서는 전혀 출토되지 않고 있다.
-198쪽

대동강 유역이 낙랑군 지역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게 된 것은 이 지역에서 출토된 기와와 벽돌 중에 ‘낙랑(樂浪)’이란 명문이 새겨진 유물들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낙랑군이 고구려 미천왕 14년(313)에 고구려의 공격으로 멸망한 이후에도 낙랑에서 제작된 유물들이 다수 출토된다는 점이다. 특히 서기 407년에 만들어진 벽돌은 낙랑이 멸망한 지 무려 94년 뒤의 것이다. 멸망한 지 1세기 후에도 이 지역에 있던 낙랑군에서 유물을 제작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따라서 ‘낙랑’이란 명문이 있다고 해서 이 지역이 낙랑군 지역이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다. 봉니(封泥)는 고대 중국에서 문서나 귀중한 물품을 봉함할 때 쓴 점토다. 봉니에는 관직 이름이나 지명이 도장으로 눌려 있어 그 당시의 관직 제도와 출토지를 알 수 있다. 봉니는 1918년 대동강 남쪽 대동군 토성리에서 발견된 이래 대략 200여개가 발견되었다. 이중에는 낙랑태수장, 낙랑대윤장, 낙랑장사 등 낙랑군과 여러 관직 이름이 눌려 있는 봉니가 출토되었다. 이를 근거로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대동강 유역을 낙랑군 지역이라고 못 박았지만, 이는 오히려 대동강 유역이 낙랑군 지역이 아니라는 증거가 되고 있다. 왜냐하면 봉니는 발신자가 도장을 눌러서 보내는 것이므로 수신자의 지역에서 발견되어야 하는데, 발신자의 지역에서 다수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이 지역이 낙랑군이 아니라는 주장에서 더 나아가 누군가 의도적으로 봉니를 위조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까지 낳고 있다. 대동강 일대를 낙랑군 지역으로 만들기 위한 의도적인 조작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 또한 앞으로의 연구 과제가 아닐 수 없다. -206-209쪽

문헌상 낙랑군의 존속 기간은 기원전 108~서기 313년으로 400년이 넘는다. 식민지 통치기관으로서는 장구한 세월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장구한 존속기간뿐만 아니라 모국인 한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오랫동안 존속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낙랑군이 고구려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했던 만주 서쪽 끝에 존재했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한반도의 한복판인 평양부근에 있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한나라는 멸망하기 전에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식민지는 긴장이 높은 지역이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본국에서 즉각적인 정치, 군사적 지원이 뒤따라야 한다. 그러나 한나라는 존속했을 때도 국내의 여러 문제 때문에 낙랑군을 제대로 지원하기 어려웠다. 하물며 한나라가 멸망한 다음에는 말할 나위가 없다.
고구려의 미천왕은 재위 12년(311) 8월 요동으로 진격해 서안평을 차지하고, 2년 후(313)에는 낙랑군까지 멸망시킨다.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면 미천왕은 요동을 공격하기 전에 낙랑군을 먼조 공격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미천왕이 요동을 공격할 때 남쪽의 낙랑 군에서 고구려를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대동강 유역에서 출토되는 중국계 유적과 유구 그리고 유물들의 존재는 그 지역에 중국계 세력이 장기간 거주했던 사실만을 확인시켜줄 뿐이다. 대동강 유역의 중국계 주민들이 한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고구려와 공존할 수 있으려면 비정치적, 비군사적 성격의 집단이어야 한다. -210-212쪽

치우는 <환단고기>나 <규원사화>가 창작해낸 인물이 아니라 중국 고대의 사서인 <사기>와 <한서>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이다. 중국인들은 전통적으로 염제 신농씨와 황제 헌원씨는 한족(漢族)의 조상으로 추앙했으나 치우는 그러지 않았다. 그들은 치우를 한족에게 도전한 이민족의 조상으로 여겼으나, 최근 치우도 중국인들의 조상이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231쪽

치우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주요한 대응책의 하나로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치우천을 찾다가 우연히 만난 중국 치우학회 회원이라는 사람의 말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는 우리가 어떤 정치적 의도를 갖고 왔는지 캐묻더니 정치적 의도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함나디 덧붙였다. "치우는 한국, 일본, 만주족의 조상이다."
우리는 툭하면 위서(僞書)다 뭐다 해서 부인하려고 애쓰는 동안 중국인들은 치우의 진실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2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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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석진환 기자
[육아 ‘낑낑’ 백서] 1. 워킹맘 ‘공포의 시각’

세계에서 가장 낮은 한국의 출산율이 가까운 미래에 ‘재앙’으로 다가오리란 전망을 부정하는 이는 없습니다. 하지만 결혼을 꺼리는 사람들은 늘어만 가고, 신혼부부들 역시 점점 아이 낳기가 두렵다고 합니다. ‘자녀의 수가 부의 척도’라는 우스개소리가 더는 우습지 않은 게 현실입니다. 이런 문제를 앞장서 풀어야 하는 곳은, 결국 정부입니다. 아이는 부모가 낳지만 키우는 건 사회의 몫입니다. 하지만 정부의 출산장려정책은 육아 현장에서 부모들이 느끼는 어려움을 해결하기엔 턱없이 부족합니다. <한겨레>는 요즘처럼 아이 키우기 힘든 시대의 풍경들을 들여다보는 기획 연재를 시작합니다. 아이를 키우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이야기들, 또 조금만 바꾸면 아이 키우기가 훨씬 편해지는 제안도 담을 예정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경험담과 참신한 아이디어를 기다립니다. 편집자 soulfat@hani.co.kr

승연엄마 “5시 넘어선 누가 이름만 불러도 가슴이 덜컹”

## 승연(4살)이 엄마 최지영(33)씨의 혼잣말(최씨 인터뷰를 재구성한 글임)

오후 5시. 지금부턴 박 부장의 시선을 피하는 게 상책이다. 사소한 지시라도 받게 되면, 제 시간에 퇴근하기 힘들어진다. 남의 자리에서 울리는 전화도 되도록 대신 받지 않는다. ‘애 키우는 내 사정 이해한다’던 동료들의 시선이 점점 싸늘해지는 것 같다. 낮에 더 열심히 일하겠다고 맘을 다잡지만, 젠장, 몸은 왜 이리 피곤한지. 새벽에 일어나 아이 밥먹이고 어린이집 등원시킨 뒤 출근하면 오전부터 졸음이 쏟아지는 걸 어떡하냐고~. 5시50분이 가까워 오면서, 누가 이름만 불러도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

오후 6시. 도망치듯 사무실을 뛰쳐나간다. 7시까지는 어린이집에 도착해야 한다. 지하철역까지 5분, 지하철 30분, 마을버스 10분. 부리나케 달려도 6시50분 도착이다. 마을버스가 조금 늦거나 차가 막히면 7시 넘기기 일쑤다. 어린이집 교사들에겐 난 상습적인 ‘지각생’이다.

밤 12시. 저녁 내내 아이와 씨름했는데, 남편은 술에 취해 들어왔다. “저녁 6시에 퇴근하면 회사에서 짤린다”는 게 남편의 항변이다. 술 취해 자는 남편을 보면 안쓰러울 때도 있지만, 요즘엔 엉덩이를 패주고 싶을 때가 훨씬 많다. 집안일을 더 많이 도와달라고 남편을 설득하는 건 포기했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요즘엔 둘째 낳자는 소리는 안한다.

워킹맘(일하는 엄마, working mom)에게 오후 5시는 고통의 문이 열리는 시간이다. 대부분의 워킹맘들은 최씨처럼 오후 6~7시면 아이를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의 종일반에서 데리고 와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퇴근시간과 어린이집 끝나는 시간은 비슷하다. 퇴근한 워킹맘들은 ‘축지법’을 쓰거나 ‘공간이동’을 해야 할 판이다. 집 주변에 아이를 데려다 보살필 친지나 도우미가 없다면, 단 30분의 오차도 허락되지 않는다.

남편과 아내에게 중요한 일이나 약속이 겹치는 일이 왜 없겠는가? 당연히 신경전이 벌어지고 부부싸움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양보는 대부분 엄마의 몫이다. 워킹맘이 직장에서 설 자리가 점차 작아진다. 아예 오후 5시~8시 사이에 아이를 돌봐주는 별도의 보모를 구하는 워킹맘도 많다. 당연히 돈이 2배로 들어가고, 월급 받아도 남는 게 없다.

공립이나 시립유치원 가운데 밤 10시 정도까지 야간보육을 하는 곳이 있긴 하다. 하지만 숫자도 많지 않을 뿐더러, 대기자가 많아 좀처럼 자리를 비집고 들어가기 어렵다. 경기도와 서울시가 맞벌이를 위한 시간연장형 보육시설을 2010년까지 대폭 늘리겠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당장 급한 워킹맘들에겐 아직 먼 얘기다. 무엇보다 엄마들은 “아이한테 미안해서 도저히 보육시설에 12시간 가까이 맡겨둘 수가 없다”고 토로한다.

어린이집 종일반 대부분 오후 6~7시엔 문 닫아

워킹맘을 위해 국내에서 논의되는 모성보호 장치는 육아휴직이나 수유실 설치 등 기본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다. 출산 전후로 짧게는 6개월, 길게는 1년을 배려하는 것일 뿐, 이후 7~8년 동안 이어지는 험난한 육아 과정은 오로지 부모가 해결해야 한다.

서울 노원구에서 12년째 어린이집을 운영하는 송아무개(56) 원장은 “직장 여성들이 버티지 못하고 그만 두는 시기를 보면, 출산 전후보다 아이가 4~5살로 한창 자라는 때가 훨씬 많다”고 말한다. 영아기 때는 외부 도움으로 어떤 식으로든 버틸 수 있지만, 아이가 자라서 부모의 손길이 더 필요한 시기가 되면 워킹맘들의 고민이 극에 달한다는 설명이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해도 워킹맘들의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오후 1~2시에 학교가 끝나 학원을 3~4개씩 보내도 결국 오후 6~7시면 아이들은 갈 곳이 없고, 워킹맘의 고단한 ‘퇴근 투쟁’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한국여성개발원 서문희 박사도 “대부분의 워킹맘들이 절실한 것은 오후 7~8시의 한 시간 안팎”이라며 “하지만 이 짧은 시간을 위해 따로 보육교사를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한국여성단체연합 박차옥경 복지부장은 “정부나 지자체 차원에서 야간보육 시설을 꾸준히 늘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부모들도 이를테면 공동육아처럼 주변 부모들과 공동체를 형성해 육아부담을 나누는 방법을 찾아 볼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극소수이긴 하지만 기업이나 직장 단위로 문제를 해결하는 사례도 참고할 만하다. 이지선(31·성남시 분당구)씨는 자신의 회사를 포함해 몇몇 회사가 공동으로 출자해 운영하는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낸다. 6개월이 지난 영아 때부터 아이를 맡길 수 있고, 밤 10시까지 아이들을 돌봐준다. 이씨는 “10시까지 아이를 맡기는 부모는 거의 없고 대부분 8시 전후에 데려간다”면서 “결국 1시간 정도 더 여유를 주는 셈인데, 부모가 느끼는 혜택의 크기는 1시간 이상”이라고 말했다.

<한겨레> 온라인뉴스팀 석진환 기자 soulf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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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01-28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심각한 사회문제다. 조카는 종일반에 다니는데 그 어린이집은 오후 5시면 차량운행으로 아이를 데려다 준다. 더 늦은 시간까지 봐주는 일은 없다. 아니, 그럼 직장 다니는 엄마는 어쩌라고? 이제 일곱살이 되는 딸아이랑 이제 네살이 되는 딸 아이를 키우는 친구를, 정말 오랜만에 만났다. 잠시의 짬도 낼 수 없었던 친구는 신랑의 협조(?)로 모처럼 나들이를 했다. 대한민국의 어머니들... 너무 힘들다.

짱꿀라 2007-01-28 0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한민국의 엄마들 아직도 유아 맡아주는 시설이 잘 되어 있지를 않아서 힘든 것 사실이죠. 저는 여은이 하나 키우는데도 제 옆지기가 너무 힘들었답니다. 직장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가 잘 돌볼 시간이 많이 나지를 않더라구요. 저 같은 경우는 경주, 광주, 이런 곳에서 근무를 했기 때문에 아이에게는 신경을 정말 못섰구요. 아무튼 신랑의 협조가 적극적으로 필요한 시대이기는한가 봅니다.

마노아 2007-01-28 0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대는 울트라 우먼을 원하고 수퍼 아빠를 요구하는데, 그게 어디 뜻대로 되냐구요. 출산률 저하를 걱정하기 이전에 대책부터 세워야겠지요.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전부 위대해 보여요(>_<)

BRINY 2007-01-28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옳소! 옳소!

마노아 2007-01-28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의합니다!!!
 
난 이제 누구랑 살지? 마음과 생각이 크는 책 7
에밀리 멘데즈-아폰데 지음, R. W. 앨리 그림, 노은정 옮김 / 비룡소 / 200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이혼을 통한 편부/편모 가정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아마, 더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 것 같지는 않다.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이별을 경험해야 하는 아이들이 생겨난다.  쉬쉬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 아이도 그 현실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 책은, 이혼으로 인해 혼란을 겪는 아이들을 위한 도우미 역할을 해 준다.

아이의 연령대에 따라서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 많이 다를 테지만, 그들이 상처를 받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수순이다.  그럴 때에, 무조건 숨기는 것은 올바른 처사가 아니다.  아이가 더 큰 혼란과 무서운 상상으로 힘들어 하기 전에, 그들에게 어떤 일이 생겼는지, 어떤 변화가 생길 것인지, 아이에게 일러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렇게 된 것은 아이의 탓이 아님도 반드시 주지시켜 주어야 한다.  비록, 부모님은 이혼을 해서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될 테지만, 그 부모님은 여전히 아이를 사랑하고 있음을 아이가 이해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혼란과 슬픈 마음을 아이가 달랠 수 있는 통로도 필요하다.  가까운 친구에게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거기에도 일종의 용기가 필요할 테지만, 알고 보면 같은 아픔을 겪은 이들도 생각 외로 많을 것이고,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보듬어 주는 따스한 시간을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혼을 결정한 것은 부모님이지만, 두 분 역시 슬퍼한다는 것도 아이가 알아야 한다.  이금이씨의 소설 "너도 하늘말라리야"를 보면 이혼을 한 엄마를 미워하며 엄마에게 애써 상처를 주려고 하는 어린 딸의 상처입은 모습이 나온다.  이혼을 결정한 것은 엄마지만, 그 엄마도 넘어야 할 힘든 고개가 있음을 딸은 꽤 시간이 흘러서야 겨우 깨닫게 된다.  서로의 마음을 전해주고,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일은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시간이다.

아이는 착한 일을 한다든지, 열심히 기도를 한다든지, 어떤 노력을 통해서 두 분이 다시 같이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라기도 하겠지만, 현실적으로 그렇게 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그러한 아이의 노력과 애쓰는 마음은 알아주어야 한다.  이 책은 이혼한 가정의 아이에게도 필요한 책이지만, 그들의 부모에게도 필요한 책이다.

이제 서로의 가정에는 변화가 생길 것이다.  새로운 가족이 생길 지도 모른다.  그같은 변화를 다 수용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마음 문을 꽁꽁 닫아 걸고 무조건 외면해서는 상처만 깊어질 뿐이다.   이혼은 아픈 일이지만, 결코 회복될 수 없는 불행은 아닌 것이라고, 아이에게 설명해줄 수 있어야 한다.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결국에 아이와 부모, 서로에게 행복한 길을 가기 위한 노력을 촉구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시리즈의 다양한 접근에 대해서 뒤로 갈수록 감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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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7-01-28 0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가정에 관한 동화책인 것 같습니다. 화목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는 온 가족이 노력해야 한다는 것 무척 중요합니다. 부모와 자식이 함께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이죠. 주일 잘 보내세요. 하나님의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마노아 2007-01-28 0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모와 자식이 함께 만들어가는 가정, 그것이 진정 아름다운 가정일 테죠. 산타님도 주일 은혜 많이 받으셔요~ 주님의 평강을 저 역시 기원합니다. ^^
 

실수로 페이퍼를 지웠다.ㅠ.ㅠ

마이리뷰에 써 놓은 것을 페이퍼로 옮겼는데, 리뷰에도 그대로 남아있길래 지웠는데,
어머나, 둘 다 지워버렸네ㅡ.ㅡ;;;;

뭐라고 썼더라??? 흑흑...

 

 

 

 

 

지인이 이번 일요일... 내일이구나. 이사한다. 집들이 선물로 미리 장만한 것.



세장을 붙여놓고 찍었는데, 아래 흙더미의 높이가 안 맞는게 약간의 옥의 티다.

같이 온 팸플릿을 보니 딱 저만큼의 크기로 한 장짜리도 팔던데, 기프트 샵에서 아직 발견 못했다.  좀 더 찾아봐야지.  클림트의 그림은 화려해서 눈을 사로잡는다.  같이 붙여놓으니 확실히 생명의 나무가 웅장해 보인다.



같이 도착한 사은품인데, 아주 작은 액자다.

원래 그림은 어떤가 찾아봤다.  오옷, 뽀대난다!



설명도 옮겨본다.  짐작대로 종교적 의미가 들어 있었다.

철도업과 은행업 등으로 많은 재산을 모은 벨기에의 실업가 아돌프 스토클레는 1903년에 건축가 요제프 호프만에게 저택 건축을 의뢰한다.
 
1905 년에 짓기 시작해 1911 년에 완성한 스토클레 저택은 요제프 호프만의 대표작이다.
 
그는 클림트에게 스토를레 저택의 식당을 장식하는 모자이크 장식화를 의뢰한다.
 
클림트의 모자이크화는 빈공방이 제작한 작품 중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클림트는 후원자의 풍부한 제정 덕분에 값비싼 재료를 이용하여 모자이크를 완성했다.
 
1910 년 유리, 산호, 자개준보석 등을 사용한 클림트의 모자이크 도안이 완성되고 빈 공방이 이를 제작한다.
 
식당 양쪽 긴 벽면에 장식된 생명의 나무는 구성적 표현이 전혀 없는 추상적인 형태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크림트 회화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작품이다.
 
「스토클레 프리즈」의 ‘생명의 나무’ 아래에는 연인뿐만 아니라 춤을 추는 이집트풍 무희도 있습니다.
 
 ‘기다림’을 은유하는 무희는 춤을 추면서 생명의 나무와 융합하고 있습니다.
 
이 생명수는 『창세기』에서 에덴 동산의 ‘선악과 나무’ 바로 옆에 있던 나무로, 『요한묵시록』에 의하면 이교도에게 구원을 가져다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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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7-01-27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뻐요~

마노아 2007-01-27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있죠^^ 울 어무이께서 탐내시더라구요^^

마노아 2007-01-27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흑... 메피스토님이 저더러 이미 말기래요. 어쩜 좋죠..ㅠ.ㅠ
 
 전출처 : 로쟈 > 나는 왜 '책선전'을 멈추지 않는가

알라딘의 서재를 블로그로 쓰게 되면서, 거기에 서재의 꼴이 좀 알려지게 되면서 이런저런 불편한 의견들도 직간접적으로 전해듣게 된다. 이곳에서 주로 하는 일이 '책 선전'이거나 책읽기에 관한 '공치사'인지라 "돈을 얼마나 받길래 그렇게 열성이냐?"는 핀잔에서 "꽤나 잘난 체/아는 체한다"라는 비아냥까지가 그 의견들의 스펙트럼이다. 게다가 둘러보면 알라딘에서조차도 이런 일에 '극성'인 이들이 몇 명 되지 않는다(그런 와중에 최근에 몇 분이 또 활동을 그만 두셨고). 조만간 1000명에 이를 것 같은 즐찾에도 불구하고 자주 회의감을 갖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이번에 페이퍼의 달인 1위에 며칠 올라 있었는데 내가 갖게 되는 느낌은 부듯함이 아니라 배신감이다. 아무도 이런 일을 하지 않는구나!).

책읽는 걸 좋아하고 그게 또 밥벌이와도 무관하지 않아서 그와 관련한 수다들을 늘어놓는다. 거기에 이왕이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고 더 나아가 인문학에 관심을 갖도록 유도하는 것이 나대로의 '사명'이라고 여기는 편이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실효적인가는 늘 의문이며 결국엔 자기 알리바이에 불과한 게 아닐까라는 의혹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다. 설상가상으로 이제 발을 빼기에는 너무 깊숙이 들어와 버린 게 아닌가도 싶고('보이지 않는 조직'의 압력도 느낀다!). 어떻게 할 것인가? 도서관련 정보를 주로 싣고 있기에 종종 드나드는 '북데일리'에서 한 기자의 고백을 읽으며 다시금 생각해본 것들이다.

북데일리(07. 01. 26) 책 기사=책 광고? 황당한 공식 이제 그만!

http://www.bookdail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727

P.S. 기자의 말을 다시 반복하자면 "살아가면서 내 인생을 밝혀준 책을 만나는 일은 얼마나 큰 행운인가. 그 책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함께 읽게 하는 일은 또 얼마나 뜻 깊은가. 책에 대한 이야기가 영화나 드라마에 대한 수다처럼, 지천에 널리고, 반갑고 익숙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상황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한 바램일까." 푸념과 결의는 그렇게 한 통속이 되어 나를 결박해놓는다. 잠시 딴생각을 했다. 마저 노를 저어야지. 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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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07-01-27 0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선전 좀 많이 해 줬으면 좋겠어요 워낙에 관심들이 없잖아요 대신 수준있는 선전으로 말이죠 내 인생의 책, 해 놓고서 마시멜로 이야기, 대한민국 재테크에 미쳐라, 나는 남자보다 적금 통장이 좋다, 이 따위 책들 얘기하는 거 말고요 로쟈님 수준이면 정말 허걱 할 정도로 너무 좋고 늘 감사드리죠

마노아 2007-01-27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같은 책꾼(!)이 많았음 좋겠어요. 더불어 우리도 같이 공부가 되잖아요^^
전반적으로 책 많이 읽는 문화가 조성이 되어야 하는데, 읽는 사람만 계속 읽어서 평준화가 잘 안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