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에 둥지 튼지 일년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몇 사람의 빈 서재를 보게 되었는지 모른다.

폐쇄되었다는 메시지를 보는 순간 덜컥, 숨이 멎어졌다.

누군가 말 없이 떠난다 할지라도 남겨진 사람들은 곧 아무 일 없었던 듯 잘 지내게 되는 게 평범한 일상이긴 한데,

어쩐지 조금, 아니 상당히 마음이 불편하다.

소통되지 않은 언어들은 어디를 떠다니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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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07-02-19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슬픈 일입니다. 님 설 연휴 잘 보내고 계시죠?

마노아 2007-02-19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실님, 평소와 다름 없는 평범한 일상으로 보내고 있어요. 세실님 새해 복 많이 받으셔요^^

마노아 2007-02-19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요. 파란여우님과 염소 소식을 계속해서 듣고 말 거예요(>_<)새해 복 담뿍 받으셔요^^

마노아 2007-02-20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멋! 그거 달콤한(?) 협박인걸요? 대신 댓글 달 수 있는 페이퍼 일주일에 두개 이상인 것 아시죠? ^^ 올해도 눈물 짓게 하는 명리뷰 부탁해요(>_<) 헤헷, 바람구두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셔요~ 음, 발걸음 해주셔서 무척 기뻐요^0^
 

약 22시간 전에 날벼락같이 내 홈의 아이디를 실수로 삭제하는 바람에 내 홈에 접근하지 못하는 불상사를 저질렀다.

내가 주인으로 있는데 '탈퇴한 회원'이 되어버린 망극한 사태에 상당히 당황하였다.

그러나, 역시 강호에는 고수가 많았다.

제로보드 게시판을 쓰고 있던 터라 엔지오에 문의했더니 누군가 삭제된 최고 관리자 아이디를 다시 생성하는 법을 일러주었다.

처음에는 제대로 따라하지 못해서 헤맸는데, 저녁7시 반쯤 아이디를 다시 생성해서 내 자리로 복귀하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내 아이디로 쪽지가 날아왔는데, 보낸 사람이 '마노아'로 되어 있는 것이다.

헉... 이게 뭔 일이라지? 하고 클릭해 보니, 답을 일러준 그 사람이다.

다음에는 실수하지 말라며 훈훈한 충고를 주었는데 어찌 내 이름으로 쪽지가 왔나 당황하여 답장을 보내니, 그 쪽지도 내게로 날아온다.

헉... 무섭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내가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내 아이디로 접근해서 비번까지 뚫고 내 홈에 들어왔다는 얘기다.

도움 받아 감사한데, 솔직히 놀랍고 무서웠다. 흑흑... 숨은 실력자가 너무 많은 게야...;;;

그나저나, 수만 점의 포인트는 다 날라가고 0포인트를 자랑하는 최고 관리자라니..ㅡ.ㅡ;;;;;

일단 서버를 쓰고 있는 카페24에 하루 전 날짜로 데이타 복구해달라고 의뢰는 해놨는데 결과가 어찌될지 모르겠다.  아무튼 복구되었으니 다행.

느즈막히라도 전체 메일로 명절 인사를 해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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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7-02-19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설 잘 지내고 계시죠. 저도 10시쯤에 내려왔답니다. 새해에도 복 많이 받으세요.

마노아 2007-02-19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어제 혜화동까지 집에서 걸어갔어요. 거기서 영화를 보았거든요. 산타님 생각이 났더랍니다. ^^ 먼 길 고생하셨는데 푸욱 쉬셔요~ 새해 복 담뿍 받으시구요^^

마노아 2007-02-19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서버 호스팅사로부터 연락 받았는데 복구 안 된대요..;;;; 그냥 아이디 회복한 걸로 만족해야겠어요. 밍크 곱창 잃어버린 것도 그렇고...액땜했어요^^;;;
 
프라미스 - 눈 많은 그늘나비의 약속
심승현 지음 / 예담 / 2006년 4월
평점 :
품절


카툰 에세이는 내 카테고리 안에서 만화로 분류하기도 수필로 분류하기도 조금 애매한데 심승현의 작품은 더더욱 애매하다.  에세이라기 보다는 동화같고 소설같은 내용이어서 그렇다.

파페포포 시리즈 때도 느꼈지만 지나칠(?) 만큼 그림이 곱다.  당장이라도 눈망울에서 물이 맺힐 것 같은 얼굴을 한 캐릭터인데, 그렇다고 곱기만 한 순정만화 같지는 않고, 감성 면에서도 남성 작가가 썼다는 게 신기하다는 느낌을 전해준다.

자신을 바라보는 상대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자신의 눈에 들어찬 상대를 끊임없이 갈망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불어 발음의 이름들을 가진 캐릭터들은 그 이름에 이미 성격과 상징이 담겨 있다.

풀벌레 보떼는 '미, 아름다움'을 뜻한다.  풀꽃 꾸르에게는 징그럽다고 구박을 받기 일쑤였지만, 내면의 아름다움과 사려깊음을 지닌 존재다.  그렇게 찬란한 보석을 속에 품고 있기에 아름다운 나비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모양이다.

꾸르는 아주 작고 귀여운 풀꽃인데 그 이름의 뜻은 '작은, 부족한'의 의미를 갖고 있다.  자신의 사랑을 알리는 데에는 적극적이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상대에 대한 배려는 부족하다.  그래서 작고 부족한 마음의 그는 조금은 이기적이기도 하고 어린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해바라기 플레르는 '꽃'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해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풀꽃 꾸르의 마음도 이해해주는 넓은 마음을 지녔다.  그래서 그의 꽃은 더 찬란하고 빛이 나나 보다.

눈 많은 그늘나비는 이 책의 제목인 프라미스, 즉 '약속'의 의미를 갖고 있다.  소중한 약속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한, 그래서 더 많은 이들에게 큰 기쁨을 전해준 존재다.

바람 엘랑스는 '방랑, 방황'의 의미를 갖고 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흔들리는 나뭇잎으로 그 존재를 드러내는 그는 보이지는 않는 곳에서 상처를 보듬어주고 격려해 주는 멋스러운 존재로 그려진다.

해님 프리조니는 '자유를 박탈당한 사람'이란 이름을 가졌다.  하늘 높은 곳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밝고 강한 존재로 보이지만 알고 보면 상처로 마음을 닫아버린 작은 꼬마에 불과하다.  그의 고독은 누구도 근접할 수 없는 그 뜨거움 만큼이나 깊다.

숲의 기억 마트리스는 '모태, 모체'의 의미를 갖고 있다.  각자의 섬들이 이곳에서 태어나고, 그 섬들에 살던 만물이 죽으면 다시 숲의 기억으로 돌아와 엄마의 품속에서 잠들듯 생을 마감한다.  이야기 속에서 가장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으로 그려진다.

글과 그림이 참으로 예쁘장하다.  다만, 박제화되거나 도식화된 느낌을 주기 때문에 창의력은 조금 부족하게 느껴진다.  별 셋 정도의 메시지를 주지만, 그림이 너무 곱고 감탄을 자아내어서 별 넷은 거뜬히 주고 싶다.

바람만 불어도 가슴이 왈랑거리는 '소녀'에게 주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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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미스 - 눈 많은 그늘나비의 약속
심승현 지음 / 예담 / 2006년 4월
품절


바람이 불어와 숲의 기억에 하얀 눈꽃을 날리면

작은 섬 하나는 숲의 기억을 떠나야 했다.

해님 프리조니를 바라보고 있는 해바라기 플레르.
그런 플레르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풀꽃 꾸르의 목마름.

또 그런 꾸르를 애타게 보고 있는 풀벌레 보떼의 갈망.

상처를 받고 돌아선 풀벌레 보떼는 구십여덟 개의 섬을 지났고
구십여‰h 번의 상처를 받았다.

너무 많은 상처를 입고 쉴 곳을 찾다가 도착한 곳은 숲의 기억.

풀꽃 꾸르는 눈 많은 그늘나비에게 자신의 마음을 해바라기 플레르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한다.

플레르의 마음을 해님 프리조니에게 전해주기 위해 태양을 향해 날아오른 그늘나비는 뜨거운 열기에 지쳐 정신을 잃고 마는데...
그런 그늘나비에게 휴식을 제공해 준 바람 엘랑스

프리조니에게 플레르의 부탁을, 그리하여 꾸르의 부탁까지 들어주기 위해 무리한 약속을 지키려던 그늘나비는, 뜨거운 태양열에 제 몸을 희생하고 만다.

꾸르에게 외면당했던 풀벌레 보떼는 나비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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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라미닌 > 마 6:25-34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나?

 

마 6:25-34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나?


사람들은 누구나 인생의 목표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분야에서 성공하고 싶어 합니다. 성공하면 이름이 알려집니다. 유명해지면 인기 연예인을 섭외해가듯이 여기저기서 모셔갑니다. 보통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귀를 기울입니다./ 성공하면 부자가 됩니다. 부자가 되면 더 넓은 아파트로 이사를 가고, 더 큰 차로 바꿔 타고, 더 맛있는 음식을 골라 먹고, 더 비싼 옷을 쇼핑하러 다닙니다. 보통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며 부러워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공하려고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 다닙니다. 사람들은 성공 병에 중독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성공 병에 중독되었으나 예수님은 성공이 우리 인생의 목표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살던 당시 사람들은 너무나 가난하여 오늘 먹을 양식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를 보면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6:11) 라고 나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너무나 가난하여 내일까지 쌓아놓고 먹을 양식이 아니라 오늘 당장 허기를 채울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살던 당시 사람들은 사막에서 살다보니 실컷 마실 물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물배라고 채우고 싶어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살던 당시 사람들은 입을 옷도 없었습니다. 옷이라고는 달랑 속옷과 겉옷 한 벌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제비를 뽑아 옷을 나눠가졌습니다.(마27:35) 예수님이 살던 당시 사람들은 오늘 먹을 양식과 오늘 마실 물과 오늘 입을 두벌 옷이 있다면 성공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목표를 먹고 마시고 입는 것-현세적인 성공에 두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공 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푸른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는 새를 바라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6:26) 예수님은 새는 봄에 씨를 뿌리지도 않았고, 여름에 땀을 흘려서 가꾸지도 않았고, 가을에 추수를 하여 창고에 쌓아놓지도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먹여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혹시 새가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죽었다는 기사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새가 농부들이 뿌려놓은 농약을 먹고 죽었다는 기사는 있었고, 사냥꾼들이 쏜 총에 맞아 죽었다는 보도는 있었지만 굶어죽었다는 뉴스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한갓 새조차도 하나님께서 먹이시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을 먹이지 않겠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공 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들에 피어있는 한 송이 백합화를 살펴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 하고 길쌈도 아니 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마6:28-29) 예수님은 들의 백합화는 예쁘게 차려 입으려고 꾸미지도 않았고, 옷을 만들어 입으려고 길쌈도 하지 않았지만 온갖 명품을 차려 입은 솔로몬 왕보다 아름답게 차려입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가장 아름다운 것은 무엇입니까? 자연미가 아닙니까? 예수님은 한낱 들풀도 아름답게 입히시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을 입히시지 않겠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성공 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와 같은 현세적인 것에 집착하지 말고 한 차원 높은 것에 집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오늘 먹을 양식도 없고 오늘 마실 물도 없고 오늘 입을 두벌 옷도 없는 사람들이 염려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정은 어떻습니까? 우리나라는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오늘 먹을 양식이 풍족히 있습니다. 라면을 먹느냐 스파게티를 먹느냐가 다르지 내일까지 먹을 양식이 냉장고에 가득 들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오늘 마실 물이 넉넉히 있습니다. 생수를 마시느냐 델몬트 주스를 마시느냐가 다르지 내일까지 마실 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오늘 입을 옷이 쌓여 있습니다. 시장 브랜드를 입느냐 백화점 브랜드를 입느냐가 다르지 사시사철 입을 옷이 옷장에 쌓여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 차원 높은 것을 멀리하고 현세적인 것에 집착하다 보니 40대와 50대의 여성대비 남성사망률이 세계 1 위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 차원 높은 것을 외면하고 현세적인 것에 얽매이다보니 해마다 기독교 인구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현세적인 성공에 집착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이나 하는 행동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생의 목표를 무엇에 두어야 할까요? 현세적인 것보다 한 차원 높은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처럼 인생의 목표를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현세적인 성공에 두지 말고, 우리 인생의 목표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하나님의 영광에 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현세적인 성공 문제)을 해결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현세적인 성공에 집착하면 어느 정도 성공을 이룰 수 있지만 하나님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하나님의 영광에 두면 하나님을 얻을 수 있게 되고 하나님께서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현세적인 성공도 해결해 주십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우화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겨울이 다가오자 철새들은 따뜻한 남쪽 나라로 날아갔습니다. 한참을 가다보니 옥수수 밭이 보였습니다. 철새들은 옥수수를 먹으며 휴식을 취하였습니다. 철새들은 기운을 차리고 다시 남쪽 나라로 날아가려고 채비를 차렸습니다. 그러나 철새 한 마리는 옥수수를 두고 떠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다른 철새들이 겨울이 다가온다고 설득했으나 소용없었습니다. 다른 철새들은 하는 수없이 남쪽 나라로 날아갔고 철새 한 마리는 옥수수를 배불리 먹으며 여유를 부렸습니다. 날이 추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철새 한 마리는 다른 철새들처럼 남쪽 나라로 날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옥수수를 두고 떠나기가 아까워 하루하루를 미루었습니다. 그러다 눈이 내렸습니다. 철새 한 마리는 그제야 남쪽 나라로 날아가려고 날개를 퍼덕였으나 옥수수를 먹고 너무 살이 찐 나머지 날아오를 수가 없었습니다. 철새 한 마리는 결국 눈에 파 묻혀 얼어 죽고 말았습니다. 철새 한 마리는 눈앞에 있는 옥수수에 집착했습니다.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현세적인 성공에 연연했습니다. 그러다 얼어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철새들은 저 너머에 있는 따뜻한 남쪽 나라를 바라봤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하나님의 영광에 집중했습니다. 당장은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먼발치를 내다봤습니다. 그러다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겨울을 나면서 새끼도 낳고 봄이 찾아오자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철새 한 마리처럼 눈앞의 성공에 얽매인다면 하나님도 잃고 자신도 불행하게 되지만 다른 철새들처럼 먼발치를 내다본다면 하나님도 얻고 자신도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현세적인 성공에 집착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하나님의 영광에 집중하시겠습니까? 현명한 판단을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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