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에게 유용한 응급처치 법 [제 573 호/2007-03-09]
#3. 2007년 3월 26일 ‘한숨’
가슴이 울렁거린다. 병실 창밖으로 무심히 던진 시선에 ‘1학년’ 명찰을 붙인 ‘병아리들’이 송곳처럼 꽂힌 탓이다. 이젠 익숙할 법도 한데 하굣길에 나선 아이들의 맑은 얼굴은 언제나 영철이 엄마를 힘들게 한다. “그 일만 아니었으면 우리 애도 학교에 있을 텐데...” 다리에 깁스를 하고 누운 영철이를 바라보는 엄마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운다.

#2. 2007년 3월 19일 ‘부상’
“네? 뭐라구요? 어느 병원이에요?” 황급히 전화를 끊은 영철이 엄마가 짝도 맞지 않는 신발을 신고 정신없이 집을 나선다. 학교 다니는 재미에 한참 빠진 ‘즈믄둥이’ 영철이가 사고를 당했다는 느닷없는 전갈이다. 병원으로 달려간 엄마의 눈에 들어온 건 부러진 다리에 깁스를 하고 있는 영철이. 울기만 하는 영철이 대신 사고 당시 주변에 있던 친구에게 다친 이유를 물었다. “영철이가 미끄럼틀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걷다가 바닥으로 떨어졌어요.”

#1. 2007년 2월 27일 ‘징조’
“높은 곳에 올라가지 말라고 했지!” 엄마의 호통에도 영철이의 ‘슈퍼맨 놀이’ 는 그칠 줄을 모른다. 여덟 살짜리 남자 아이 대부분이 그렇듯 영철이도 높은 곳에 올라가 뛰어내리는 게 일상사다. 영철이 엄마는 아이의 이런 놀이 방식에 불안감을 느끼지만 잔소리를 쏟아내는 것 말고는 딱히 무슨 대책을 세워야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게 시급하다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서울시 학교안전공제회가 2005년 발표한 자료를 보면 영철이는 초등학생에게 가장 흔히 일어나는 사고를 당했다. 2005년 서울시내 학교에서 일어난 전체 안전사고 4617건 중 36.4%(1681건)가 초등학교에서 발생했다. 상처 유형도 골절(40.3%)이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열상(裂傷)(24.2%), 치아손상(21.0%), 염좌(7.9%), 뇌진탕(1.8%), 화상(1.4%)이 뒤를 따랐다.

영철이의 고통은 남의 일이 아니다. 학교에 다니는 이상 우리 아이도 언제든지 겪을 수 있는 일이라는 얘기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일어날 수 있는 사고의 유형과 대처 방법을 아이에게 알려줘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 초등학생에게 가장 많이 일어나는 골절과 열상, 화상에 관해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 차근차근 알아보자.

골절은 충돌이나 사고 등으로 몸에 큰 힘이 가해졌을 때 발생한다. 특히 아이는 가볍게 넘어지는 충격으로도 골절을 당한다. 계단, 책상, 철봉 등 학교 시설물과의 충돌, 친구와의 과격한 놀이 등 초등학생을 위협하는 요인은 많다. 쉴 새 없이 움직이기 마련인 초등학생은 항상 골절 위험에 노출돼 있는 셈이다.

예방이 중요하겠지만 일단 골절을 당하면 움직임을 최대한 억제하도록 교육한다. 골절상을 입으면 누구나 극도로 흥분하고 이때 일어난 불필요한 움직임이 추가 상처를 만들기 때문이다. 실제로 골절은 부러진 뼈 주위의 근육과 인대, 피부에 상처를 입힌다. 부러진 뼈가 혈관을 상하게 하면 내출혈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으므로 ‘부상 후 절대 안정’을 반드시 가르친다. 또 아이들끼리 우왕좌왕하다 상처를 악화시키지 않도록 ‘높은 곳에서 떨어져 다리가 아프다고 우는 친구는 억지로 일으키지 않는다’처럼 기본 상식을 가르쳐야 한다.

교사는 아이가 골절상을 입으면 ‘부러진 부위를 움직이지 않도록 한 뒤 병원으로 이송’의 원칙을 지킨다. 부러진 부위를 고정할 부목으로 교실에서 널빤지, 지휘봉, 우산, 단단한 표지의 책 등을 사용할 수 있다. 천이 없으면 속옷을 찢어 사용하면 된다. 상처가 심하면 직접 이송하지 말고 119에 도움을 요청한다.

다행히 뼈는 부러지지 않았지만 관절이 삐었을 때 팁 하나! 삔 곳은 찜질로 치료하면 되는데 냉찜질이 먼저다. 냉찜질은 상처가 붓는 것을 막아준다. 얼음, 학교 매점에 파는 빙과류, 차가운 물 등으로 신속하게 삔 부위에 대고 30분 이상 냉찜질을 한다. 하루 정도 지나면 뜨거운 수건 등으로 상처 부위를 감싸 온찜질을 한다. 온찜질은 긴장된 근육을 풀어주어 빨리 회복되게 해준다.

초등학생들을 괴롭히는 두 번째 부상은 열상이다. ‘찢어진 상처’인 열상이 나면 우선 세균에 감염되지 않도록 주의한다. 열상은 운동장과 같은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입는 경우가 많으므로 철저한 교육이 필요하다. 아이들의 손은 세균 투성이라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는 얘기다.

일단 열상을 입으면 깨끗한 손으로 지혈을 한 뒤 비누와 물로 상처를 닦는다. 더러운 헝겊으로 상처를 동여매거나 세척하지 않은 손으로 상처를 누르는 행위는 절대 금물이다. 상처를 조금만 건드려도 심한 통증이 오거나 다친 부위가 부으면 즉시 의사 처방을 받아야 한다. 특히 부모들은 아이가 최근 5년간 파상풍 주사를 맞지 않았다면 반드시 병원에 데려가야 한다.

발생 빈도는 높지 않지만 화상은 치명적 후유증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주의한다. 실험 시간에 사용하는 알코올램프, 식당, 학교 소각장 등에서 화상을 입을 수 있다. 상처 부위가 감염될 수 있고 완치 뒤에도 피부 변형을 동반할 수 있기 때문에 빠르고 신중한 응급처치가 필요하다.

화상을 입으면 상처 부위를 신속히 식히는 게 가장 중요하다. 화상을 입은 즉시 흐르는 수돗물에 상처를 20분 이상 노출시킨다. 이런 대처로도 화상으로 인한 피해를 크게 줄일 수 있다. 화상 연고를 찾는 건 그 다음이다. 약품을 찾으려고 시간을 지연하면 상처가 오히려 악화될 수 있다는 점을 아이에게 가르친다.

참기름, 된장, 감자를 화상 부위에 발라야 한다는 속설은 특히 경계한다. 이 같은 민간요법은 상처를 감염시킬 가능성이 높기 때문. 결론적으로 화상에 대비하는 최고의 응급약은 차가운 물이라는 얘기다. 아이에게 상처를 완화하고, 감염을 방지하며, 흉터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수돗가로 달려가야 한다는 점을 정확히 가르친다.

화상에 관련한 팁 하나! 심한 화상을 입으면 무리하게 옷을 벗지 않는다. 옷을 벗다 피부 조직이 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급식 도중 매우 뜨거운 음식물을 몸에 쏟으면 아이들은 당황해 옷을 급하게 벗는 경우가 많은데, 옷을 입은 채로 차가운 물을 흘려야 한다. 그 다음 신속히 병원으로 옮긴다.

바야흐로 취학 시즌이다. 초보 학부모들은 내 아이가 학생이 된다는 기쁨에 들뜬다. 그러면서도 부모들은 ‘아이가 학교에서 다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마련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간단하다. 아이 손을 잡고 학교를 둘러보자. 어디서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사고가 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가르치자. 그래야 아이가 자신을 지킬 수 있다. (글 : 이정호 과학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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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우리 박물관에서는 4월 7일 부터 6월 16일까지,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13시 3시간 동안 중학생을 대상으로 서울의 역사와 문화, 보존과학에 대해 쉽고 재미있게 접할 수 있는 체험교실을 마련하였습니다.
미래를 설계하는 청소년들이 박물관 전문인력이 하는 일에 대해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수강 신청은 우선적으로 학급 또는 단체로 받고, 둘째.넷째토요일에는 개인 접수를 병행합니다.

* 교육일 및 교육내용 : 손끝에서 재탄생 문화재의 보존과 복원
- 교육일: 4.7/4.14/4.21/4.28/5.12/5.19/5.26/6.2/6.9/6.16
- 시 간 : 10시~13시
- 장소 : 2층 교육실
- 인원 : 1회당 30명
- 수강료: 무료 (단 , 입장권 구매- 300원)

* 접수 : 3월 12일(월) 09:00~ 3.16(금) 18:00 인터넷 접수
접수자는 단체일 경우 인솔자 선생님의 실명으로, 개인일 경우 수강자인 학생의 의사가 반영될 수 있도록 본인의 실명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부모님 성함으로 신청하셨을 경우에는 저희 박물관에서 임의로 취소시킨 후 다시 신청하실 것을 부탁드리겠습니다.

* 확정자 발표 : 3월 22일 17:00 홈페이지에 공지

* 연락처 724-0197

* 3월 12일 접수개시일 이후 예약창이 활성화됩니다.
  신청은 학습관 교육일정이나 어린이 홈페이지 배움터 또는 서울시 예약통합시스템(강좌/교육- 체험교실)에서 하실 수 있습니다. 이 교육은 날짜별로 신청을 받은
다음 접수 마감후 추첨하여 교육생을 선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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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03-09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흑... 이번에도 부럽당.
 

거침없이 캐릭터를 날리다
[OSEN 2007-03-09 08:26]    

캐릭터공화국, ‘거침없이 하이킥’

[OSEN=정덕현의 명랑 TV] 웬만해선 웃음을 참을 수 없다. 아무 생각 없이 보다가도 거침없이 날아오는 웃음킥에 실실 웃다보면, 어느새 이 유쾌한 하이킥에 중독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중독의 실체는? 바로 캐릭터공화국이라 할 만큼 다채로운 웃음의 개성을 지닌 폭소유발자들. 따로따로 떼어놓고 봐도 영 웃기는 캐릭터인데, 이들이 서로 얽히고 설키는 이야기에 어찌 웃지 않을 수 있을까. ‘거침없이 하이킥’, 그 속의 캐릭터에는 도대체 어떤 마력이 숨어 있는 걸까.

세대를 잇는 이 시대의 아버지, 야동+순재

이전까지 젊은 세대들에게 그는 좀 재미있는 기성세대로서의 ‘대발이 아빠’ 혹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높은 영원한 스승으로서의 ‘유의태’였다. 그러나 그가 노트북 앞에서 “야동”이라 외쳤을 때, 젊은 세대들의 가슴속으로 그는 단박에 들어갔다. 다음날 인터넷에는 그의 이름과 ‘야동’이란 단어가 합쳐진 ‘야동순재’라는 검색어가 떴다. 그런데 ‘야동순재’는 전날 시트콤에 나온 에피소드를 줄여만든 단순한 단어의 결합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꺼이 젊은 세대의 마음 속으로 파고든 일흔이 넘은 어르신의 표상이 되었다.

그것을 신호탄으로 이후에도 그의 이름 앞에는 새로운 단어들이 붙기 시작했는데 그 중 주목할만한 것은 ‘악플순재’이다. 인터넷 게시판에 독수리타법으로 계속해서 악플을 올리는 모습에서 비롯된 호칭.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순재라는 이름 앞에 붙은 ‘야동’과 ‘악플’이란 단어다. 이 단어들은 모두 인터넷과 연관된 것으로 네티즌들에게는 너무나 친숙해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 두 단어가 순재라는 이름 앞에 붙어버리자 이것은 순재와 네티즌 사이에 놓여진 길게는 오십 년, 작게는 사십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버린다. 이 시대의 아버지의 초상, 이순재라는 놀라운 캐릭터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이후에도 이순재라는 캐릭터는 당당하고 거침없어 보이며 자애롭기까지 해 도무지 이빨이 들어가지 않을 기성세대의 모습을 겉으로 내세우면서도, 그걸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역할을 한다. 방송에 나가 땀을 뻘뻘 흘리며 굴욕을 당하는 순재, 나문희에게서 S라인을 느끼는 순재, 멋진 골을 넣고 골 세레모니를 통해 나문희에 대한 사랑을 전하기 위해 달리고 또 달리는 순재의 모습은 우리가 아버지는 권위적일 거라는 피상적인 편견을 깨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렇게 어르신이 솔선수범해서 마음을 열어주자 그 속으로 들어온 다채로운 캐릭터들은 마음껏 기량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시집살이하는 시어머니 애교+문희

이 시대의 진정한 연기자 나문희. 다양한 스펙트럼의 어머니 연기로 정평이 난 그녀는 ‘거침없이 하이킥’에 와서는 ‘시집살이하는 시어머니’ 역할을 맡았다. 멋대가리 없는 남편과 제 주장만 펼치는 며느리 사이에서 제 영역이 불분명해진 요즘의 시어머니들을 대변한다. 겉으로 보기엔 무뚝뚝하고 세상 놀랄 것 없는 나이의 그녀. 그러나 찬찬히 면면을 살펴보면 놀랍게도 수줍은 소녀 티가 묻어난다. 캐릭터 상 아들 준하와 함께 ‘괴력’과 ‘식탐’으로 한 세트를 이루는 그녀에게서 언뜻 보이는 이런 면모는 ‘애교문희’란 호칭을 얻은 에피소드에서 극대화된다.

나이에도 불구하고 수줍기만 한 그녀가 자신의 나이 값을 하기 위해 취하는 의식적인 행동은 무뚝뚝함. 그런 그녀가 어느 순간 ‘애교’라는 닭살을 떨어보기로 한 것. 그것은 차마 보기 힘들 정도의 대변신이지만 한편으로는 앞치마에 휴대폰을 목에 건 채 늘 부엌떼기로 취급받는 자신에 대한 작은 반란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어머니들이 그렇듯이 그녀 역시 조그마한 일에서 기쁨을 찾아낸다. 자신을 왕 무시하는 며느리 앞에서 늘 입을 삐죽대다가도 며느리의 작은 실수에 쾌재를 부른다. 시청자들은 기꺼이 그녀의 작은 기쁨에 동참한다.

그런데 그녀의 ‘작은 기쁨’에는 묘한 페이소스가 숨어있다. 유난히 사소하고 작은 것에서 기쁨을 찾는 자는 슬프다. 울상의 얼굴을 하고 있다가 통닭 몇 마리에 환하게 웃는 얼굴에는 왠지 모를 가슴저림 같은 것이 숨겨져 있다. 그것은 그녀가 괴력의 소유자라는 것

는 것과 기묘하게 어울린다. 마치 엄청난 힘을 가진 거인이 그 힘을 모두 타인을 위해 쏟아 부은 후, 자신을 위해서는 작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모습. 그것은 바로 생각하면 유쾌하게 웃다가도 뭉클해지는 우리네 어머니들의 모습이다.

아귀가 되어버린 고개 숙인 가장, 식신+준하

그가 바보라는 편견은 버려야 한다. 그건 그를 두 번 죽이는 일이니까. 그는 오히려 기꺼이 웃음 없는 사회에 웃음을 주기 위해 바보가 된 천재다. 바보가 주목을 받는 건 그만큼 사회가 각박하고 힘들다는 반증이다. 너도나도 잘난 사회에서 그가 늘 도맡는 역할은 어눌하고 바보 같은 캐릭터. 준하는 그 같은 캐릭터로 오히려 사람들에게 때론 진한 공감을 때론 희망을 선사한다.


늘 손에 무언가 먹을 걸 들고 있는 그를 보며 순재는 “동물이냐 사람이냐”고 되묻는다. 하지만 그 질문은 “왜 버젓한 가장이 빈둥빈둥 집에서 어슬렁거리면서 늘 먹을 것만 찾는 동물이 되었는가”하는 사회적인 맥락으로 읽힌다. 그는 마치 자신을 끼워주지 않는 저 사회에 대해 반항하는 것 같다. 자신이 원한 것이 아닌데도 밥벌이를 못한다는 주변의 질책에 대해 오히려 먹을 것만 찾는 모습으로 말이다. 그의 식탐은 못 먹어 죽은 귀신이 아귀로 태어나는 것처럼 어쩌면 밥벌이에 대한 갈증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 아귀가 되어버린 고개 숙인 가장의 가족을 향한 마음은 애틋하기만 하다. 아내인 해미와 벌이는 닭살 애정행각은 ‘아내 자랑은 팔불출’이란 맥락과도 맞닿아있지만 또 한편으론 부부사이에도 쿨하기만한 세태에 가슴 뭉클한 따뜻함을 선사하기도 한다. 늘 인상을 쓰고 앉아 무언가를 먹으며 투덜대고 작은 것에 기쁨을 느끼는 괴력의 사나이. 그는 어머니인 나문희와 그대로 짝을 이룬다. 그래서 이 시트콤의 가장 억압받는 두 존재는 문희와 준하가 된다. 그래서일까. 그 둘이 함께 식탐에 빠지는 장면에서 늘 배꼽잡고 웃다가도 애잔한 감정이 남는 것은.

먼저 OK할 수 있는 그녀, OK+해미

‘하늘이시여’에서 자신의 딸에게조차 시어머니 역할을 했던 해미는 ‘거침없이 하이킥’에 와서는 자신의 시어머니에게조차 시어머니(?)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다만 확연히 달라진 것은 ‘하늘이시여’의 방식이 부정(NO)의 방식이었다면, ‘거침없이 하이킥’의 방식은 긍정(OK)의 방식이라는 것. 당당한 이 시대의 며느리들이라면 해미의 OK 방식에 마음을 빼앗겼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거침없는 OK가 매력적인 것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자신감에 있다. 사회생활을 하는 워킹우먼이라면 선택의 기로에서 그녀처럼 명쾌하게 답을 내려주는 자신이었으면 할 때가 얼마나 많을까. 해미 캐릭터의 핵심은 바로 ‘능력’이다. 그녀는 사회생활에서도 가정사에서도 자신감이 넘치는 여성의 표상이 되고 있다. 하지만 아마도 이건 이상일 뿐 현실은 아닐 것. 그런 점에서 그녀는 이 시대의 여성상을 대변하는 동시에 여성들이 희구하는 하나의 환타지가 된다.

“남이 당신에게 OK라 하기 전에 당신이 먼저 OK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그녀의 대사 속에는 누구에게 규정되기보다, 스스로 자신의 길을 선택하는 능동적인 여성상이 반영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적극적이고 심지어는 공격적으로 느껴져 사육해미가 되기도 하는 그녀의 캐릭터는 그녀 주변에 있는 소심한 캐릭터들(가장 중심에 있는 나문희와 준하 같은)과 명쾌한 대비를 이루며 웃음을 유발한다. 나문희와 준하 같은 소심한 우리네 소시민들에게 늘 시원시원한 해답을 내주는 그녀가 소중하게만 느껴지지 않을 까닭이 있을까.

이 시대가 요구하는 까칠남, 까칠+민용

요즘은 까칠한 남자가 뜬다는데, ‘거침없이 하이킥’에도 ‘까칠’하면 빠지지 않는 이민용이란 캐릭터가 있다. 까칠남이 이렇게 주목을 받는 이유는 과거의 이상적인 남성상으로서의 로맨티스트가 이제는 느끼남이 되어버렸기 때문. 즉 까칠한 건 참아도 느끼한 건 못 참는다. 물론 드라마 캐릭터로서(아마 실제는 다를 지도 모른다) 말이다. 까칠남의 매력은 늘 까칠하다가도 어느 순간 잠깐 보이는 부드러움에 있다. 본래는 부드러운 사람이지만 무언가 상처 같은 것이 그를 까칠하게 무장시킨 탓이다. 이민용은 이 복합적인 까칠남의 성격을 모두 갖고 있는 인물이다.

그가 까칠해진 이유? 그건 아마도 27살이란 젊은 나이에 이혼남에다 아이까지 갖고 있다는 데서 오는 게 아닐까. 그 정도 되면 이제 현실의 각박함은 이미 벌써부터 겪어왔을 터이지만, 그럼에도 젊은 나이가 갖는 풋풋함 역시 갖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젊은 나이에 젊음을 누리지 못하게 된 상황을 자초한 그는 지금 자신을 벌주는 중이거나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해 잔뜩 웅크리는 중이다. 어찌 보면 배배 꼬여버린 성격의 그에게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런 사심 없이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밖에 없다. 바로 꽈당민정이다.

울면서 웃기는 그녀, 꽈당+민정

그녀는 왜 아무 이유 없이 ‘꽈당’ 넘어지는 걸까. 그 행위 자체는 바보스럽다 할 수 있겠지만 그 이미지가 민정과 연결되자 거기에는 순수함과 더불어 묘한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구석이 생긴다. 작고 약하기만 할 것 같은 그녀. 하지만 그녀의 솔직함은 그대로 까칠한 민용의 마음에 꽂혀버린다. 그녀는 늘 진지하다. 좋다면 “정말 좋아요”라고 거침없이 말하고, 아이들을 꽉 잡기 위해 단호한 목소리로 사랑의 매를 들고 호통을 친다. 하지만 진지한 그녀가 하는 행동은 늘 어색하다. 이 마음을 몸이 따라가지 않는 상황이 그녀로 하여금 웃음을 유발시킨다.

그렇지만 그 어색함은 기분 좋은 어색함이다. 마치 어린이가 어른 흉내를 내다 들킨 것 같은 유쾌함. 그래서 그녀가 웃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웃게 된다. 또 그녀가 진지해질 때도 우리는 웃게 된다. 심지어 때로는 그녀가 울 때조차 우리는 웃음을 짓게 되는데 그것 역시 그 울음 속에서 과장된 응석의 귀여움이 포착되기 때문이다. 사정없이 귀여운 그녀. 넘어질 때도, 화를 낼 때도, 심지어는 울 때조차도.

모성애로 돌아온 철없는 이혼녀, 신지


신지란 극중 캐릭터는 억울하다. 그것은 최초 설정에서 얄팍하고 깨지기 쉬운 가족의 모습을 구성하다 보니, 신지란 캐릭터가 ‘자신의 꿈을 찾아’ 철없이 이혼하고 러시아로 떠나는 설정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가 러시아에서 얻은 것은 결국 사기. 그리고 돌아온 그녀의 모습에서 먼저 여타의 캐릭터와 달리 신지는 진지함이 사라졌다.

여기에 돌아온 이혼녀가 이제 막 러브라인을 만들어가는 민용과 민정 사이에 끼어 삼각관계를 이루자 캐릭터에 대한 호감마저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신지란 신인연기자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애초 캐릭터 설정에서 생겨난 문제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신지는 러브라인에서 빠져나와 적극적으로 민용과 민정을 밀어주는 조력자가 되면서 캐릭터에 대한 존재감이 살아나고 있다. 또한 아무 대사는 없지만 늘 온 가족을 울리고 웃기는 아기, 준이의 도움을 톡톡히 받고 있다. 준이를 통해 신지는 철없는 이혼녀에서 모성애로 귀환하고 있다.

톰과 제리, 이윤호와 이민호

우리는 이윤호와 이민호, 이 두 캐릭터를 보면서 좀 헷갈리게 된다. 겉으로 볼 때 전교 꼴등에 오토바이를 몰지 않나, 툭하면 패싸움에 휘말리고, 툭하면 자습시간에 도망치는 윤호는 전형적인 꼴통이다. 반면 늘 일등에, 탁월한 언어능력과 논리력, 심지어는 여자친구까지 뭐하나 빠지는 게 없는 민호는 모범생으로 보인다. 그런데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 아닌 속까지 이 두 캐릭터의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본 시청자들이라면 이 전형적인 사고의 틀에 균열을 일으키게 된다.

모범생으로만 보이는 이민호는 사실 그 얄미울 정도의 똑똑함으로 철저히 이득만을 챙기는 인물이다. 청소년으로서의 풋풋함보다는 일찍 어른의 세계에 도달한 캐릭터. 그래서 그는 오히려 꼴통으로 보인다. 반면 완소윤호라는 호칭을 얻고 있는 윤호는 거칠고 때론 모자란 듯하지만 정이 가지 않을 수 없는 인물. 그런데 재미있는 건 힘으로는 형인 민호를 동생 윤호가 제압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자 전형적인 톰과 제리의 재미가 이어진다. 힘은 세지만 어리숙해 매일 당하면서 “억울해”를 연발하는 윤호는 톰의 역할을, 힘은 약해도 비상한 머리를 굴려 윤호를 골탕먹이는 민호는 제리의 역할이

다.

하지만 때론 제리의 영리함이 바보스러움을 만들기도 한다. 설익은 카리스마를 보여주며 일약 ‘카리스마민호’란 호칭을 얻는 민호를 윤호를 위시한 가족들은 보기 좋게 한방 먹인다. 그래서일까. 공부만 잘했지 다른 방면에는 영 무지한 민호의 모습을 보면서 대학입시 교육의 희생자로서 윤호뿐만 아니라 민호까지 생각하게 되는 것은.

가족보다 가족다운 그, 김 범

가족 바깥에 존재하지만 더 가족 같은 인물이 있다. 그는 신비롭기까지 한 김 범이란 캐릭터. 민호와 단짝을 이뤄 거의 매일 이 가족들 주위를 배회한다. 식신준하보다 민호네 냉장고 사정에 더 정통하고, 애교문희보다 더 가족사에 민감하다. 그러니 하숙범이란 호칭으로 불릴만하다. 그가 하숙범이라 불릴 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이 김 범이란 캐릭터가 그저 자주 놀러오는 친구 정도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캐릭터가 배신범으로 불리기 시작하자, 갑자기 이 캐릭터에 매력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것은 그만큼 가족의 결속이 약해져만 가는 시대에 가족들보다 더 가족 같은 김 범의 존재 때문이다. 민호의 가족들이 김 범을 배신범으로 놀리는 장면들에서 ‘이건 너무 한다’싶은 마음이 들다가 그가 눈물을 흘리며 “그래요 전 가족은 아니에요. 하지만 단 한번도 가족이 아니라고 생각한 적 없어요.”라고 하는 장면에서는 왠지 모를 감정이 솟구쳐 오른다. ‘하숙생’이란 음악이 흘러나오며 리어카에 민호네 집에서 나온 자신의 물건을 싣고 떠나가는 장면에서는 웃음이 터지면서도 동시에 각박해진 현실의 씁쓸함이 느껴진다.

진지한 캐릭터들, 그 조합이 유발하는 웃음

이상에서 본 것처럼 ‘거침없이 하이킥’의 캐릭터들은 그저 희화화된 캐릭터로만 보기 어렵다. 그들은 과장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틀 안에서 진지하다. 그들은 억지로 웃기기 위해 과장된 몸짓을 보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그들이 웃음을 유발하는 것은 특정 성격으로 극대화된 캐릭터들이 서로 조합을 이루면서이다. 캐릭터들의 수로 미루어보면 그 조합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주어진 상황에서 웃음과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 시트콤의 성공이 결국 그만큼 생산된 캐릭터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거침없이 하이킥’의 보기만 해도 공감이 가고 웃음이 터지는 캐릭터들은 중요한 성공의 기반이다. 이것은 캐릭터 조합의 수를 1:1, 1:2, 2:2, 2:3…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변주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런 점에서 이 시트콤은 지금까지 그 재미의 반도 보여주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우울한 시대, 불륜 코드까지 시청률이란 명목으로 방영되는 저녁 시간대, 가족이 둘러앉아 유쾌한 웃음을 웃게 해준 ‘거침없이 하이킥’의 롱런을 기대하게 하는 요인이 아닐까.

☆ 캐릭터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웃음들

▶ 야동순재 + 윤호민호 : 노트북을 사기 위한 윤호민호의 거짓말에 속은 순재가 노트북 앞에서 ‘야동’을 외치는 이야기.

▶ 순재 + 애교문희 : 모임에서 자신과 달리 애교를 떠는 여자(김애경)를 본 문희가 순재 앞에서 애교를 떨기 시작하는 이야기.

▶ 식신준하 + 문희 : 문희의 먹는 양이 줄자 울면서 “왜 밥이 줄어!”하고 준하가 오열하는 이야기.

▶ 순재 + 식신준하 : 늘 식충이로 순재의 주식만 날리던 준하가 갑자기 몇 일 동안 계속 상한가를 치다가 결국 작전주로 밝혀지는 이야기.

▶ OK해미 + 까칠민용 : 사사건건 간섭을 하는 해미를 호시탐탐 노리던 민용이 해미의 실수(변기물이 막힘)를 찍기 위해 달리는 이야기.

▶ 까칠민용 + 꽈당민정 : 학생들에게 매일 당하기만 하는 민정에게 민용이 학생들 다루는 법을 가르쳐주지만 영 안 되는 민정의 이야기.

▶ 순재가족 + 배신범 : 민호의 여자친구 유미를 꼬드겼다는 사실로 순재 가족에게 집단 따돌림을 당하는 범이가 민호네 집에서 이삿짐만큼의 자기 짐을 챙겨 떠나는 이야기.

▶ 순재 + 준하 + 민용 + 윤호 + 민호 + 범 : 순재에게 쫓겨 민용의 옥탑방으로 들어간 그들이 오히려 거기 갇히는 이야기

▶ 이외 거의 대부분의 이야기들.

/정덕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mansuri@osen.co.kr 블로그 http://thek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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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03-09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월 되고부터는 잘 못 보고 있다. 그래도 가급적이면 저녁 식사 시간을 거침없이 하이킥 하는 시간으로 맞추려고 함.6^^
 


한국 문학의 아름다운 산맥, 박완서를 만나다

- 박완서
게재일 : 2007-03-08 조회수 : 100
글 / 류화선yukineco@gmail.com
한국 문학의 가장 아름다운 산맥, 소설가 박완서 선생을 만났다. 일흔보다 여든이 더 가까운 나이에 여전히 왕성하게 글을 쓰는 현역 소설가 박완서 선생은 ‘아, 나도 일흔이 넘어서 저런 얼굴을 갖고 싶다’라고 소망할 만큼 담박하면서도 꾸밈없는 따스함을 지닌 분이었다. 또, 이런 자그마한 체구 어디에 그렇게 큰 힘이 있기에 지금까지 쉬지 않고 문학의 길을 달려올 수 있었을까 하는 마음도 들었다.

구리 아치울 마을에 박완서 선생 댁이 있다. 버스 정류장에서 아차산 쪽을 바라보면 나지막한 산 아래에 해가 숨어있는 듯한 노란색 집이 있다. “정류장에서 내려서 노란색 집을 찾아오면 돼요. 쉽게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선생은 차분하게 집으로 찾아오는 방법을 설명했다. 그 설명만으로 집을 찾아갈 수 있을까 했는데 고만고만하게 생긴 전원주택 중에서 선생의 노란색 집은 확실히 눈에 띄었다.

노란색이 눈에 띄는 박완서 선생의 집

“집 색깔이 굉장히 특이해요.”
“색깔 이름이 스패니쉬 옐로우라고 하는데, 햇빛이 강한 스페인에서 많이 쓰는 색이래요. 고흐가 그림 중에 이런 노란색으로 그린 집이 있어요.”

지하에는 서고가 있고, 1층에는 서재와 천장이 높은 마루, 식당과 부엌이 있다. 우편물 정리를 하느라 편지 봉투와 서류 봉투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서재의 테이블을 제외하고는 어느 곳 하나 흐트러진 곳이 없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부엌과 식탁 위 유리 꽃병에 꽂힌 꽃을 보고 있으니 어떤 사람이 선생에게 ‘나이가 많은데 혼자 어떻게 사느냐’라고 걱정하는 소리에 ‘내가 글도 쓰는데 혼자서 밥도 못 해먹을까 봐’라고 했다는 일화가 생각났다.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은 매서운 바람에 숨이 넘어갈 만큼 땡그랑거렸다. 산사에 있는 풍경과는 사뭇 다른 소리다.

여든이 가까운 나이에도 왕성하게 글을 쓰는
현역 소설가 박완서
“풍경 소리가 시끄럽진 않으세요?”
“매일 듣고 사니까 잘 안 들려요. 여기가 워낙 바람이 강한 동네예요. 오늘 아침에는 풍경이 거꾸로 뒤집혔는데 지금은 바람이 덜 부네요.”

“요즘 새로 쓰시는 소설이 있나요?”
“아뇨, 올해는 쉬려고 해요.”

“올 초에 벌써 책이 두 권이나 나왔네요.”
『호미』는 여기저기 연재하던 것을 추린 것이고, 『대화』는 이해인 수녀님하고 재미나게 수다 떤 이야기예요. 어쩌다 보니 책이 두 권이나 나왔네요. 정말.”

『호미』의 표지에 쓰인 제목 말인데요. 혹시 선생님이 직접 쓰신 글자인가요?”
“아뇨, 디자이너가 한 거예요. 책 나온 후에 보니까 꼭 내가 쓴 글씨 같더라고요.”

마당에는 복수초가 고개를 내밀었고, 산수유가 솜털 같은 노란 꽃을 피웠다. 봄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소설가의 작은 마당은 황량했다. 봄이 오면 마당은 노작가의 손길을 재촉할 것이다.

아침 해가 일찍 뜨는 아치울 마을. 아침에 마당에 나가면 금빛으로 부서지는 한강을 볼 수 있다. 한옥에 살 때는 시멘트를 발라놓은 마당을 뜯어서 화초를 키울 만큼 흙과 가까이 사는 것을 좋아하는 작가는 아치울로 이사 와서는 마당을 가꾸는 것이 주요한 일과가 되었다. 생명과 가장 가까이 살면서 자연의 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가는 듯한 평온함과는 거리가 멀다. 살고자 하는 아우성에 가깝다. 박완서 선생은 마당에서 시간을 보내며 자기도 모르게 꽃과 나무에 말을 건넬 때가 많다고 했다.

박완서 선생이 소일하는 마당

“하루를 어떻게 보내세요?”
“별다를 것 없어요. 서울서 대학 다니는 손녀와 같이 살거든요. 손녀딸 보살피면서 할머니 노릇을 하고, 마당 돌보고, 산책하고, 글 쓰고… 그러고 살아요. 이제 봄이 되면 마당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길어지겠지요.”

“마당 돌보는 것이 많이 즐거우신가 봐요.”
“예전부터 흙과 가까이 사는 걸 좋아했으니까요. 서울살이를 오래했지만 아파트에 산 건 얼마 안 돼요. 저 마당이 저렇게 손바닥만 해도 잔디가 고르게 나게 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벅찰 지경이에요.”

“마당 일은 언제 하세요?”
“이 나이가 돼도 얼굴 타는 게 싫어서요. 해 뜨기 전에, 해 지고 나서 마당에서 일해요.”

박완서 선생의 글은 선생이 살아온 세월과 함께했다. 단편집 『너무도 쓸쓸한 당신』에서부터 작가의 시선은 노년의 삶을 향해 있었다. 『호미』에서도 노년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 시선은 이전의 작품보다 좀 더 푸근하고 인생을 끌어안는 넉넉함이 있다. 박완서 선생에게 노년은 어떤 의미인지 궁금했다.

“우리 사회가 노년을 천시하는 그런 분위기가 있잖아요. 다들 어떻게 하면 젊어 보일까 고민하는 사회가 아닌가요?”
“나는 손자가 많아서 그런지 노인 대접을 받는 게 그렇게 싫지 않았어요. 오히려 노인 대접 받기 싫어하는 것이 이상해요.”

“언젠가 일흔 이후의 삶은 덤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요. 어떠신가요?”
“일흔 이후의 삶도 나름대로 즐거워요. 많이 가벼워지죠. 젊었을 때, 왕성하게 작품 쓸 때는 나를 유지하려고, 남들에게 욕먹지 않으려고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할 때도 많았는데 지금은 그러지 않아도 되니까요. 가족 관계에서도 그래요. 지금 내 나이 정도가 되면 의무적으로 싫어도 해야 하는 일에서 많이 벗어나 있어요. 하기 싫은 일을 안 해도 되는 것이 얼마나 편한지 몰라요. 인터뷰만 해도 잘 안 해요. 아마 『호미』 내고 처음 인터뷰하는 것 같은데…”

“인터뷰가 싫으세요?”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왜곡이 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차라리 내가 쓰는 게 낫지’ 생각할 때가 많아요. 옛날에는 인터뷰도 꼬박꼬박 했지만 요즘은 될 수 있는 대로 안 하려고 해요.”

“스트레스 받을 일이 없을 것 같네요.”
“그렇죠. 삶을 가볍게 살다 보니 건강에도 좋은 것 같아요. 그리고 걱정이 없어요. 요즘 환경 파괴와 지구 온난화 때문에 야단이잖아요. 근데 나 죽은 다음의 일이니까 솔직히 별로 걱정이 안 돼요.”

“그렇지만 선생님 연배의 어른은 환경 문제에 대해서는 후대에 당당하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자연스럽게 아껴 쓰는 것이 몸에 밴 분들이니까요. 또 어려운 시절을 겪고 풍요로운 사회를 물려줬다는 자부심도 분명히 있을 것 같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나는 아껴서 풍요롭게 살 자신은 있어요. 신용카드 대란 같은 걸 보면 정말 걱정을 넘어 이해가 안 되는 일이 너무 많아요.”

“어디서 ‘자본주의에 적응하는 것이 참 힘들다’라는 말씀을 하신 게 기억나네요.”
“결국 그 포장을 만드는 사람도 먹고살아야 하잖아요. 그래서 함부로 포장 같은 거 줄이라는 말 못 하겠어요. 밥벌이가 쓰는 것에 달렸으니까. 아, 여전히 어려워요, 그런 건. 친구 중에 오히려 IMF 터졌을 때 좋았다고 한 이도 있었어요.”

“어째서요?”
“그때는 아껴 쓰라고 해도 잔소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요.(웃음) 우리 또래가 뭐든 잘 못 버리고 아껴 쓰잖아요. 그래서 자식들한테 아껴 쓰라는 소릴 많이 하는데 다들 잔소리로 들으니까.”

박완서 선생이 작품을 구상하고 집필하는 서재

1970년 마흔이라는 늦은 나이에 『나목』으로 소설가의 길을 가기 시작한 박완서 선생은 지금까지도 소설을 쓰는 현역 소설가다. 그렇게 쓸 이야기가 많은 사람이 어떻게 마흔까지 참았느냐고 주변에서 말할 만큼 소설을 줄줄이 이어 발표했다. 한 번도 쓸 거리가 없어서 고민해 본 적이 없을 만큼 쓰고 싶은 것이 내부에 가득 차 있었다.

“글을 쓴다는 건 선생님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내게 글을 쓴다는 건 내 고통의 일부를 독자에게 나누는 거예요. 내 고통을 글로 옮기면서 내가 조금씩 자유로워지고 가벼워지죠. 글쓰기를 통해 마음의 짐을 하나씩 놓아버릴 수 있었어요. 힘들 때를 살아갈 힘도 글쓰기에서 얻었죠.”

“어딘가에서 선생님은 극복이라는 말을 싫어한다고 하신 것이 기억나는데요.”
“아픔과 슬픔은 전혀 극복할 수 없는 거예요. 슬픔을 어떻게 이길 수 있나요? 참고 견디고 사는 문제죠.”

“그럴 때 글을 쓰면 그런 아픔이 사라지게 되나요?”
“여전히 내 안에 남아있지만 무게가 한결 가벼워지죠.”

“그럼 선생님은 독자에게 고통을 나누어주는 셈이 되나요?”
“책을 읽으면서 그 고통을 가진 사람도 나처럼 가벼워질 수 있겠죠.”

“보통 작가가 된 사람은 청소년기부터 작가를 꿈꾸고 문학작품을 읽는데 선생님은 어떠셨나요?”
“책 읽기는 좋아했어요. 제가 중학교 때 해방이 되었는데 그 이후에도 우리말로 된 책은 구하기가 어려웠어요, 우리 세대는. 우리말로 된 책이 없어서 일본어로 된 세계문학전집을 많이 읽었죠. 그때는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친구들은 제가 글 쓰는 사람이 될 것 같았다고 말했지만요.”

“문학소녀셨네요.”
“문학작품만 읽은 건 아니고 기쿠치 간이 쓴 얄팍한 연애소설도 많이 봤어요. 그때는 책이 워낙 귀해서 누가 이광수의 『무정』을 구했다고 하면 반 전체가 돌려서 읽을 정도였죠.”

“우리말을 쓰는 것을 금지당하던 시절이었기에 우리말이 더 애틋하게 다가왔던 걸까요?”
“우리 세대는 완벽한 이중 언어였어요. 집에서는 조선말을 쓰고, 학교에 가서는 일본어로 말하고. 그래서 해방 후에 우리말만 사용하라고 했을 때 쉽게 거기에 적응했죠. 좀 어리둥절한 건 있었어요. 며칠 전만 해도 조선말을 하면 혼이 났는데 이제는 일본말을 하면 혼이 났으니까요.”

“그럼 언제쯤 작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셨나요?”
“6·25를 겪고 나서였어요. 그때 이 모든 것을 잊어버리지 말고 기억해 두었다가 소설로 쓰자고 생각했어요. 나는 경험으로 글을 썼어요. 고통스러운 경험은 글을 쓰기 전까지는 내게서 물러나지 않아요. 전쟁이 끝나고 결혼해서 평온하게 살아갔던 몇십 년은 오히려 짧게 느껴지고 6·25 때 겪었던 몇 달간의 경험이 더 길게 느껴져요. 아이를 키우며 평온하게 살 때도 잠이 들면 그때의 일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거예요. 그 기간이 굉장히 길게, 내 삶 전부처럼 느껴졌어요.”

“특히 6·25를 배경으로 쓰신 작품을 보면 살아남은 사람의 죄책감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프리모 레비도 그랬지만 덜 선한 사람이 살아남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요.”
“그런 죄책감도 많이 있었어요. 그것 때문에 썼을지도 모르죠. 평화로울 때보다 빈한할 때 인간의 악이 더 잘 드러나잖아요. 굶어 죽지 않으려고,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려고 남을 구렁텅이로 밀어넣은 자를 단죄할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이 있었어요. 잊어버려야지, 잊어버려야지 하면서도 계속 그때 이야기를 쓰게 되네요. 손자는 저보고 요즘 누가 6·25 때 이야기를 읽느냐고 ‘할머니 그만 쓰세요’ 그러지만요. 그런데 저는 어떻게 다들 그렇게 과거를 금방 잊을 수 있는지 그게 더 신기해요.”

“선생님 글을 읽다 보면 참 꼬장꼬장하고 결벽에 가까울 만큼 구질구질한 것을 싫어하신다는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타고나신 성격인지 항상 궁금했습니다. 아니면 개성 사람의 기질인가요?”
“우리 집안 내력이에요.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소리는 다 하는…. 개성 사람 중에 그런 사람이 많죠. 제가 서울에서 학교에 다녔는데 창씨개명(일본식 성명 강요)을 거부했어요. 그때는 독립투사 자녀도 혹시 표적이 될까 봐 창씨개명 할 때였는데 제 할아버지가 죽어도 창씨개명은 안 된다고 하셨죠. 그런데 그건 우국충정과는 또 다른 거였어요. 우리 집안이 독립운동을 하는 그런 집안은 아니었거든요. 평범한 소시민 집안이었는데 창씨개명을 절대 안 했어요. 해방 후에도 거기에 대해 한 번도 내세운 적이 없었으니까요.”

“선생님이 정치적인 것에 항상 비판적인 것은 그런 반골 기질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반골 기질이긴 한데, 좀 이상한 반골 기질이죠. 운동권도 없으면서 항상 반체제적이었으니까요.(웃음) 진보가 정권을 잡으면 보수적이 되고, 보수가 정권을 잡으면 진보를 지지하니까요. 반골이라는 말이 딱 맞아요.”

“항상 선생님 작품은 개성에서 보낸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가 짙게 느껴집니다. 지금은 맛볼 수 없는 넉넉함과 따스함이 있는 시절이었는데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미망』을 썼어요. 저는 초등학교 때 개성에서 서울로 유학 왔어요. 그때만 해도 굉장히 드문 일이었죠. 아들자식도 아니고 딸자식을 공부시키려고 서울로 온다는 건 상상도 하기 어려울 때였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서울생활이 처음에 너무 고달팠어요.”

“어떤 점이 가장 힘드셨는데요?”
“인간이 빈부로 나누어지는 것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저는 서울에 와서야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있고, 가난한 사람이 그렇게 비참하게 산다는 걸 알았어요. 개성에서 살 때는 제 고향 마을이 시골이긴 했지만 한 번도 가난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거든요. 번지를 모르면 집도 못 찾아가는 것도 충격이었어요. 시골에서는 누구네 집이라고만 하면 편지가 갈 정도인데 도시는 번지를 알아야 하잖아요.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긴 번지를 외우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그래서 지금 사는 마을을 좋아하는 건지도 모르죠.”

박완서 선생은 여성주의라는 말이 낯설었을 때부터, 한국에 여성학이 뿌리내리기 전부터 여성 문제에 관심을 두고 거기에 대해 줄기차게 소설을 써왔다. 작업실에서 글을 쓰는 모습보다 앞치마를 두르고 집안일을 하는 주부의 모습을 요구하는, ‘여성 소설가’에게 가하는 무언의 압력에 대한 저항이기도 했다.

“제가 데뷔했을 때는 남녀평등이라는 말조차 낯설었을 때였어요. 갈등이 많았어요. 신문에 연재소설을 쓸 때는 집안일을 완전히 팽개치고 썼거든요. 아이들에게 죄책감이 많이 들었죠. 또, 그 시대적인 분위기를 거스르는 것이 힘들었어요.”

“그때는 여성 소설가에게 어떤 것을 요구하는 분위기였나요?”
“여성 소설가뿐만 아니라 일하는 여성에게 살림도 일도 모두 잘하기를 요구했어요. 그런 전체적인 분위기를 개인이 무시하기 어려워요. 부담이나 압박으로 작용하죠.”

“어떤 식으로 그런 압박을 받으셨는지요?”
“제가 데뷔를 늦게 한 여성 소설가라 그때는 꽤 희귀한 케이스였어요. 그래서 여기저기서 취재를 많이 했는데 작가로서의 모습보다 주부로서의 모습을 부각하는 거예요. 작가로서의 제 포부를 묻기보다는 집안일을 얼마나 잘하면서 글을 쓰나, 그런 면만 주목했던 거죠. 저는 여성 작가로서 후배들의 길을 열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집안일도 잘하고 글도 잘 쓰는 작가로 부각되는 게 싫었어요. 사실도 아니고요. 그런 걸 보고 좌절하는 사람이 있을 게 아니에요? 저는 슈퍼우먼은 없다고 생각해요.”

“집안일을 하시면서 이 일이 아니면 더 작품에 매진할 텐데, 하는 생각을 하신 적이 있나요?”
“많죠. 집안일을 하면서 이런 소모적인 일을 언제까지 계속 해야 하나 화가 나기도 했어요. 이 시간에 글을 쓰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지만 뾰족한 해결책은 없었어요. 늘 그런 갈등과 죄책감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글을 썼던 것 같아요. 끝까지 거기서 자유롭지 못했어요.”

“여전히 지금의 직업여성은 거기에서 자유롭지 못한데요.”
“그래도 지금은 많이 좋아졌잖아요? 저는 일과 집안일 사이에서 고민한다면 일을 더 존중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남편에게 당당하게 분담을 요구하세요. 그리고 둘 다 잘하려는 욕심은 버려야겠죠.”

“항상 어려운 건 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의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박완서 선생은 여전히 글쓰기가 어렵다고 했다. 1970년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오래, 그렇게 열심히 글을 썼는데도 한 번도 쉬웠던 적이 없었다고…. 이유를 물었다. “창조에는 숙련이 없으니까요. 항상 어려운 건 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의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힘들지만 그것이 재미있어 소설을 써온 세월이었다.

박완서 선생은 『호미』의 어느 구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칠십 년은 끔찍하게 긴 세월인데, 거기서 건져 올릴 수 있는 장면이 고작 반나절 동안 대여섯 번도 더 연속상연하고도 시간이 남아도는 분량밖에 안 되어 눈물이 날 정도로 허망했다고…. 그렇지만 좋은 기억도 나쁜 기억도 하나씩 놓고 점점 가벼워져 모든 것이 다 지나가고 나서 찾아오는 위안과 평화를 맛보는 소설가의 표정은 아름다웠다. 삶은 재능을 소진하고 시간을 소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것을 비워내 거기에 평화와 위로를 담는 것임을 느끼게 하는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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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03-09 0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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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07-03-09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제가 이곳 다녀왔다는 거 아닙니까~~(뿌듯^*^)
햇살 가득한날 선생님댁 마당에서 함께 간 주부독서회원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 나누던 그때가 아련히 떠오릅니다....꿈만 같았어요~~~

마노아 2007-03-09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마낫! 멋진 시간 보내고 오셨군요. 부러워요(>_<) 선생님 정정하시죠? ^^
 
 전출처 : 바람구두 > 1년 365일이 여성의 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1년 365일이 여성의 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 99주년 세계여성의 날과 KTX 승무원들


오늘은 세계 여성의 날 99주년입니다.
직원들이 다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가서 우리 국장님에게 뜬금없이 오늘이 무슨 날인 줄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여성인데도 잘 모르시더군요. 제가 “오늘은 세계여성의 날입니다.” 했더니 함께 식사하시던 다른 분이 “요즘은 365일이 모두 여성의 날인데, 별도로 여성의 날이 필요하냐?”고 하더군요. 연세 많은 분들이 요즘 대한민국 사회와 여성들을 보고 있노라면 1년 365일이 매일 여성의 날이란 표현이 전혀 이상할 게 없어 보일 수도 있단 생각은 저도 합니다.

2004년 9월에는 “성매매방지와 피해자 보호에 대한 법률과 성매매알선 처벌에 대한 법률”이 시행되었고, 지난 2005년 2월 3일 헌법재판소는 “호주제 규정 민법 781조 1항 및 778조”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습니다. 여성계의 50년 오랜 숙원이었던 호주제 폐지가 이루어졌던 같은 해 6월, 여성정책과 가족정책을 총괄 기획하는 정부부처로 여성가족부까지 출범하면서 우리 사회 여성의 지위가 한층 더 강화된 것처럼 보입니다. 대중문화가 표상하는 여성의 이미지도 이전과 달리 훨씬 더 건강해지고 당당해졌습니다. 연상녀와 연하남 커플은 물론, 이혼녀에 대한 표현도 어느 때 보다 긍정적으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요즘 같으면 365일 여성의 날이라고 부를 만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습니까? 올해로 99주년을 맞은 세계여성의 날은 지금은 세계 최고의 산업도시이자 문화적으로도 첨단을 달린다는 뉴욕의 섬유산업 여성 노동자들의 시위를 기념하여 만들어진 행사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에도 교과서나 다른 책들을 통해 방적기 앞에 서 있는 작은 소녀의 사진을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이 사진은 루이스 W. 하인(Lewis Wickes Hine)이 1908년 미국의 공장 모습을 촬영한 사진입니다. 이 사진 속의 소녀는 과연 몇 살이었을까요? 그녀의 어머니는 어째서 이렇게 어린 딸을 공장에 보냈을까요?


사진출처 : bowdoin 대학 art-museum

1870년대 이후 서구 자본주의는 커다란 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 시기의 변화 양상은 마치 오늘날 세계를 휩쓸고 있는 신자유주의 열풍과 다르면서도 흡사한 일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가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도시와 농촌간의 인구 비례가 역전되고, 임금 노동자들이 도시는 물론 농촌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됩니다. 이런 현상이 빚어진 것은 당시의 자유주의, 자본주의에 의한 자본 축적, 생산의 집적이 대기업, 대자본에 집중되면서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계급에게 압력이 가중되어 오늘날 우리가 중산층이라 부를 만한 부르주아지, 도시와 농촌의 중간층이 몰락하여 임금노동자로 전락한 결과였습니다. 1900년대 접어들어 미국의 노동자는 1,000만을 넘어서게 되는데, 이것은 30년 전의 수준과 비교해보면 세 배에 이르는 수치였습니다.

이런 현상 가운데 여성노동자도 함께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게 됩니다. 1908년 즈음에는 섬유산업 분야에서 남성노동자보다 여성노동자의 비율이 앞서는 역전 현상이 빚어졌습니다. 이 같은 일이 빚어진 까닭은 당시 섬유산업이 과당경쟁 상태에 놓이면서 남성노동자 보다 강도 높은 노동을 싼 임금으로 부려먹을 수 있는 여성노동자를 다수 고용한 결과였습니다. 산업혁명과 자본주의는 여성들을 빅토리아 시대의 엄격한 가정에서 해방(?)시켰습니다. 그러나 해방된 여성들은 비인간적인 작업장 속에서 하루 12시간 노동, 심지어는 16시간까지 일해야 했고, 집으로 돌아가서는 여전히 가사노동과 육아노동에 종사해야 했습니다.(여성들 뿐만 아니라 아동노동에 대해서도 최소한의 연령 제한조차 없었습니다. 1880년 당시 미국의 공장에는 18만2천 명의 어린이가 일했는데, 이 수치는 산업노동자 총수의 6.7%에 해당합니다. 1895년 독일의 조사에 따르면 14세 이하 어린이 21만 5천 명이 노동자로 살았습니다.) 여성들은 장시간 노동과 가정에서 시달리면서 억압과 빈곤을 극복하고, 스스로의 족쇄를 깨뜨리기 위해서는 자신과 같은 다른 여성들과 연대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우쳤습니다. 노동자계급의 성장과 함께 남성노동자들에게도 선거권이 주어지기 시작했으나 여성들은 여전히 선거권조차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이자 모든 노동자의 어머니이기도 한 이소선 여사가 계시다면, 미국에는 또 한 명, ‘어머니(Mother)’라 불리는 메리 존스(Mary Jones)가 있습니다. 하워드 진의 『미국민중사』에는 1910년 당시 80세였던 메리 존스가 밀워키의 한 양조공장에서 일하며 당시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에 대해 묘사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상스러운 욕을 퍼부어대는 야수 같은 십장들에게 둘러싸여 신발과 옷은 흠뻑 젖은 채 세척실에서 노예처럼 일하도록 운명지어진 …… 불쌍한 소녀들은 시큼한 맥주의 고약한 냄새를 맡으면서 45킬로그램에서 70킬로그램의 무게가 나가는 술병 상자를 옮기는 일을 한다 ……. 류마티즘은 만성병 중 하나이고 으레 폐병이 뒤따른다……. 십장은 심지어 여자애들의 화장실 사용시간까지 통제한다……. 여자애들 대부분이 집도 없고 부모도 없이 …… 일주일에 3달러로 …… 의식주를 해결해야만 한다.

1908년 미국의 한 블라우스 공장에서 일하던 어린 여성노동자 146명이 불에 타 죽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분노한 만 오천의 여성노동자들이 뉴욕의 거리로 쏟아져 나와 노동조건 개선과 여성참정권 인정 등을 내걸고 격렬한 시위를 벌였습니다. 당시 이들은 “노조 결성의 자유를 달라!”, “여성에게 참정권을!”, “미성년자의 노동을 금지하라!”, “10시간 노동제!”,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무장한 군대와 경찰과 맞섰습니다. 이날의 투쟁은 전 의류노동자의 총파업으로 번졌고 마침내 1910년 ‘의류노동자연합’이라는 조직을 탄생시키게 됩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10년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 열린 국제사회주의여성회의에서 독일의 사회주의운동가 클라라 제트킨은 이들을 기념하고 세계여성의 지위향상과 여성노동자를 위해 ‘세계여성의 날’을 제안하였고, 전세계 17개 국가에서 모인 100여 명의 여성들이 만장일치로 제정되었습니다.

‘세계여성의 날(International Women's Day)’은 해마다 세계적으로 중요한 이슈들을 내걸고 시위를 계속해왔습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반대하고, 물가안정을 요구하는 시위를, 1915년 멕시코와 노르웨이에서, 1917년 이탈리아에서, 1918년 오스트리아에서, 그리고 1936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80만 명의 여성들이 모여 군부독재정권에 반대하여 “진보와 자유”를 외쳤습니다. 1974년에는 베트남에서, 1979년엔 칠레에서, 1981년엔 이란에서 5만 명의 여성들이 부르카 착용에 반대하는 시위를 열었고, 1988년엔 필리핀에서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는 여성들의 촛불 행렬이 있었습니다.

이제 내년이면 ‘세계여성의 날’도 100년의 역사를 갖게 됩니다. 물론 그 사이 세상은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1977년 유네스코는 3월 8일을 세계여성의 날로 선포했고, 1985년 아프리카 나이로비에서 개최된 제3차 세계여성대회에서는 20세기말까지 국제사회와 각국의 정부들이 성취해야할 성평등 행동지침을 채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2005년 UN에서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빈곤 인구 12억 중 70%가 여성과 어린이며, 취학연령에 이르러서도 학교에 갈 수 없는 여자 어린이는 8천 5백만 명에 이릅니다. 이 수치는 학교에 갈 수 없는 남자 어린이 4천 5백만 명의 두 배에 이르는 수치입니다. 세계 빈곤인구 중 적절한 음식, 물, 위생, 건강,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남성의 숫자는 4억 명입니다. 그러나 여성의 경우엔 그 두 배에 달하는 7억 명에 이르며 성인 여성의 문맹률은 67%입니다. 이것이 지구라고 불리는 이 작은 별에서 여성들이 처한 현실입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선 몇 가지 사건들로 인해 그간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던 일부 사람들이 여성과 여성운동, 여성주의 일반에 대해 공공연히 말도 안 되는 분노를 내뱉습니다. 사실 여성가족부는 처음 출범 과정부터 많은 비아냥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여성부가 존재한다면 남성부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단순한 이분법적 논리로부터 여성계 내부에 이르는 우려 섞인 걱정까지 참으로 다양한 것이었습니다. 지난 연말 여성가족부가 성매매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남성들에게 회식비를 지급하는 이벤트를 기획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저 역시 황당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여성가족부라는 명칭이 이미 다양한 한계를 노정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성가족부가 앞장서 출산장려운동을 하는 등 이른바 혈연 중심의 정상가족에 대한 국가주의적 관리 태도를 버리지 못하고, 그간 여성운동 내부에서 논의되고, 힘써왔던 다양한 가족 공동체에 대한 사회적 인정과 복지, 인권 문제에 대해선 무관심한 편입니다. 지금과 같은 흐름으로 보았을 때, 여성가족부는 우리 사회 전체적으로 만연해 있는 '운동의 관료화'라는 암초를 피해가기 어려울 듯 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최근 모 대학의 여성총학생회가 보여준 성급한 문제제기와 미숙한 대응 방식으로 인해 여성계 전체가 매도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에 있는 문제점이 여성계라고 빗겨갈리 없습니다. 그러나 유독 여성부만을 대상으로 부처 폐지를 거론하고, 그 예산을 국방비로 전용하라고 주장하거나 같은 여성 의원이 여성부가 이 나라 남성들을 모독했다고 나서는 모습들을 바라보노라면 우리 사회에서 양성평등이 이루어지기 까지 얼마나 더 먼 길을 가야할지 고민하게 됩니다. 지난 해 3월 8일. 어쩌면 기억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못한 분들도 계시겠지만 세계여성의 날이었던 이 날, KTX 여 승무원 90여 명은 문자 메시지 한 통을 받습니다.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였던 이들을 직위해제하겠다는 철도공사의 문자메시지였습니다. 이들이 새로운 서울역에서 시위를 벌인지 어느새 만 1년이 되었습니다. 지난 2월 24일은 술자리에서 동아일보 기자를 성추행한지 만 1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1심 재판에서 최 의원은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 선고와 사회지도층으로서 부적절한 범죄행위라는 여론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지만 국회의원 자격을 유지한 채 여전히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의 피해자였던 기자는 사건 발생 5개월 후 국제부로 자리가 바뀌었다고 합니다. 술집 여주인인 줄 알고 그랬다는 국회의원은 1심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하였고, 최근 삼성 에버랜드의 전환사채 불법증여사건이 여러 가지 석연치 않은 이유를 들어 7년간 계속 연기되어온 것처럼 그 역시 임기를 모두 채우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기자라면 일반인들에게는 그 어렵다는 언론고시를 통과해 우리 사회의 최고 엘리트에 속한다고 인정받는 이들입니다만, 그 같은 이들을 생각하는 국회의원의 의식 수준이 그 정도입니다. 그러니 우리나라 전체 노동자의 60~70%가 비정규직 노동자이고, 그 가운데 70%가 여성인 현실이 별다르게 느껴질리 없습니다. KTX 여 승무원들이 모 대학에서 헸던 강연을 동영상으로 한참을 다시 보고 들었습니다. 예쁘냐고요? 물론 예뻤습니다. 그들의 얼굴도, 몸매도 참으로 예뻤습니다. 그러나 얼굴이나 몸매 보다 그들의 마음이 예뻤고, 그들의 의연한 태도가 아름다웠습니다. 이제 스물 대여섯의 젊은 처자들이었습니다. 다들 제 막내 동생 보다도 한참 어린 친구들이었습니다. 장장 1년여에 걸친 투쟁이었고, 언제 해결될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싸움입니다.

한국여성민우회 회장,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를 역임했던 한명숙 전 총리가 다음 대선에서 유력한 대권 주자 중 한 명으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한명숙 총리는 30여년간 민주화운동과 환경운동, 여성운동을 해온 훌륭한 여성의 표본이었고, 대한민국 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였습니다. 한명숙 총리 지명자는 방송인터뷰를 통해 “여성 총리가 나온다면 정치 발전에 새 지평을 열고, 여성과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지명자로 내정되었단 소식이 전해졌을 때, KTX 승무원들은 한명숙 총리 지명자와의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이들이 한명숙 총리에게 받은 화답은 경찰에 의한 강제연행이었습니다.

한명숙 의원님께 드리는 편지

새벽부터 비가 천막을 내리쳤습니다. 비는 그쳤지만 하늘은 여전히 비를 머금고 울컥이고 있었습니다. 파업농성 50일째인 4월 19일 우리는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민주노동당 주최 비정규직 관련 토론회를 마치고 ‘국무총리 내정자’인 의원님께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의원님이 여성민우회 출신이고 여성노동자의 압도적인 지지가 있었으며, 개인적으로 KTX 승무원 문제에 대해 해결의지를 보이셨다고 해서 한편으로 무례할 수도 있지만, 다음날 새로운 자회사인 KTX관광레저의 신규승무원 합격자 발표와 24일 승무사업개시라는 일사천리의 계획 앞에 더 이상은 지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국무총리실 노동사회수석 비서관이 와서는 철도공사가 합리적인 안을 내놓았는데 왜 승무원들이 그걸 받지 않아서 이렇게 하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으며, 대우자동차 파업 때도 300명만 정리해고 하자고 했는데 그걸 받아들이지 않은 노조집행부 때문에 1700여명이 해고돼서 죽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국무총리실의 노동사회수석이라는 분이 우리가 왜 이렇게 싸우고 있는지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면서 양보, 잘못된 집행부 운운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관광레저가 감사원에서 지분매각하라는 부실 자회사라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이긴 하나, 근본적인 원인은 문제를 일으키는 장본인은 있지만 그 문제를 법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당사자가 없는 위탁방침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철도공사의 직접고용을 주장하고 있고, 말 잘 듣고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아무 때나 해고해버리겠다고 하는 일들이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정규직을, 그래서 공사의 직접고용 정규직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얘기를 한참을 하니 노동사회수석님의 자세도 조금은 숙연해지는 듯 느껴졌습니다. 그리고는 정중히 좀 전에 자신이 한 얘기는 잘 몰라서 한 것이니 취소하겠고, 자세한 얘기를 좀 들어봤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철도노조를 통해서 초기에 들었던 내용밖에 몰랐고 그 이후에는 우리 소관이 아니기 때문에 관심 갖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소관이 아니라고? 노동사회수석의 소관이 아니라고요?
노동자의 문제가 소관이 아니라는 노동사회수석님께서는 당장 면담을 잡기는 어려우니 자신과 다시 한 번 만나고 다시 면담을 잡아보자고 했습니다.

한명숙 의원님! 여성노동자의 차별에 누구보다 애쓰고 계시다는 것을 알기에 총리로 임명되신 걸 그 누구보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하지만 지금 이 나라에서 노동자가, 특히 힘이 약한 여성노동자로서는 총리님을 비롯한 저희 노동자의 문제를 같이 풀어주실 분들을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저희 20대 여리고 여린 승무원들이 경찰에 연행되는 것까지 각오하고 국회까지 들어오기란 정말 무서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과연 아무것도 모르는 여성 노동자들이 왜 자꾸 투사처럼 변해 가는지, 이런 투사를 양산하는 장본인이 과연 누구인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봐 주시기 바랍니다. 총리로 임명되시면서 바로 이런 어려운 문제를 안겨드려 죄송하기 그지없지만 제발 이 나라의 총리로써 저희를 외면하지 않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2006년 4월 20일
한명숙 의원님 면담을 요구하다 경찰서로 연행된 80여 명을 면회하러 떠나며 정지선 올림


사진출처 : 전국철도노조

이들을 해고한 철도공사 사장 이철은 또 어떤 사람입니까? 그래서 KTX 승무원 사태는 현재 대한민국 사회의 비정규직 노동자, 여성들이 처해있는 현실을 극명한 상징으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어떤 이들은 KTX 승무원들을 집단이기주의로 매도합니다. 바로 위의 편지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대우자동차의 예를 들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은 얼마 전 해고되었던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이 희망자에 한해 전원 복직되었다는 뉴스를 들으셨을 겁니다. 그날 KTX 승무원의 강연 내용을 들었습니다. 한 대학생이 "법률적인 절차를 밟아 합법적으로 투쟁하면 되지 않느냐?"고 묻자 승무원은 '자신은 인천에서 학교를 다녔지만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는 지도 몰랐다. 법대로 하라는데 법대로 하면 3년, 5년, 8년이 걸린다. 어느 사업장에서 노동자가 무임금으로 그렇게 오래 버틸 수 있겠어요. GM대우의 파업이 5년을 끌었는데 마지막까지 남은 20명이 1,700명을 복직시킨 겁니다. 하지만 그 때는 이미 많은 수가 다른 곳에 취직을 한 상황이라 실제로 오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는 아이 젖 달라고 우리가 삭발하고, 점거하고 불사르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한 승무원은 “다른 작은 노동조합에 비하면 그래도 우리는 언론과 전문가들이 관심을 가져주니 행복한 편이다”라고 말합니다.

앞서 저는 이 분들, KTX 승무원들이 참으로 예쁘다, 참으로 아름답다고 말했습니다. 처음 380명으로 시작된 KTX 승무원들의 싸움은 1년여가 지나는 동안 100명 정도의 승무원들만 남아서 싸움을 계속 해나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처음 철도공사가 지상의 스튜어디스를 뽑는다며 선전해 고시를 치르듯 어려운 시험을 통과한, 아리따운, 젊은(현재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모든 미덕을 갖춘) 아가씨들입니다. 지금이라도 다른 직장을 알아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한 학생이 “모두 능력 있는 분들인데 지금이라도 다른 직장을 찾아가지 않고 계속 싸우는 이유가 뭐냐?”를 묻자 “그렇게 하면 저 한 사람의 문제는 해결될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우리 후배들, 동생들, 이 땅의 800만이 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이 다음 세상에 태어날 우리의 아이들은 또다시 우리처럼 불행한 일들을 계속 겪을 수밖에 없을 거예요.” 이런 사람들에게 감히 ‘집단이기주의’를 말하는 당신이 바로 이기주의자입니다.

오늘은 99주년을 맞이한 세계여성의 날입니다. 저는 이 날이 투쟁이 아닌 축제의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해마다 발렌타인데이, 화이트데이, 뻬빼로데이라는 정체불명의 상업 파티들은 온갖 뉴스와 상업 자본의 호사를 누립니다. 그러나 철모르는 눈발이 펄펄 날리는 대한민국의 봄, 끝나지 않은 엄동설한이 지속되는 한, 이 땅의 여성들은 여전히 비정규직, 이등시민의 굴레를 뒤집어쓴 채 투쟁의 현장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1년 365일 중 하루만 여성의 날이 아니라 1년 365일이 여성의 날이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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