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최면술사 “닭아, 잠들어랏!” [제 582 호/2007-03-30]
최면술사가 줄에 매달린 시계를 가져와 눈앞에서 천천히 흔들어 댄다. “당신은 이제 편안해집니다.” 대상자의 눈이 스르륵 감긴다. TV에서 연예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최면 시술 장면이다. 인터넷에는 “당신은 최면에 잘 걸리는 타입인가?”라는 문구로 ‘최면지수’를 테스트하는 사이트도 있다. 최면의 효과나 해석에는 신뢰할 수 없는 구석이 많지만, 어쨌든 사람이 최면에 걸릴 수 있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흔들리는 시계’에 대한 인식이 강하게 박혀서인지 최면은 고등 사고를 할 줄 아는 인간만 걸린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동물도 최면에 걸린다. 최면에 걸린 동물은 꼼짝달싹 못하거나 깊은 잠에 빠져들기도 한다. 그 범위도 다양해서 포유동물은 물론이고 문어, 갑각류, 전갈, 곤충, 불가사리 등 다양한 동물에서 일어난다. 재미있는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동물최면 중에 가장 잘 알려진 사례는 개구리다. KBS 교양방송 ‘스펀지’에 별 5개의 지식으로 소개돼 유명세를 탔다. 개구리를 뒤집어놓고 배를 살살 문지르면 개구리는 잠에 빠진다. 골쉬라는 의사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개구리 배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거나 개구리 위에서 ‘딱~ 딱~’하고 손가락을 반복적으로 튕겨 소리를 내도 잠들었다.

개구리의 배를 문지르면 잠든다는 사실은 개구리를 잡으며 놀던 과거에는 누구나 아는 상식이었다고 한다. 배를 문지르면 왜 잠이 드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근육을 이완하는 신경이 배에 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잠든 개구리는 손가락으로 톡톡 쳐 자극을 주면 깨어난다.

파충류 이구아나는 배가 아니라 이마를 문지르면 잠이 든다. 정확히는 이마와 눈 사이에 있는 ‘송과선’이란 부위를 문지르면 잠이 든다. 송과선은 이구아나가 밤과 낮을 구분할 때 쓰는 기관이다. 송과선을 문지르면 밤낮에 혼란이 찾아와서 이구아나가 잠든다고 알려져 있다. 재밌는 사실은 한번 잠든 이구아나는 시끄러운 괘종시계가 울려도 깨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손가락으로 건드려 자극을 주면 깨어난다.

새도 최면에 걸린다. 대표적인 예는 닭이다. 다니엘 슈벤터라는 수학자는 휘어진 조그만 나무토막을 닭의 부리에 묶어 최면에 걸리게 했다고 한다. 이렇게 하면 닭은 부리에 묶인 나무토막에 시선을 집중하게 되는데 몇 분이 지나면 최면 상태에 빠져 움직이지 않는다. 땅에 분필로 선을 긋고 그 지점에 닭의 부리를 땅에 대도 같은 효과를 볼 수 있다. 땅에 그은 선에 닭이 집중하기 때문이다.

닭은 다른 방법으로도 최면에 걸린다. 바로 닭의 머리를 날갯죽지에 파묻고 천천히 흔들어주는 것이다. 이 방법은 아타나시우스 키르테라는 수도승이 알아냈다. 프랑스의 농부들은 지금도 시장에서 살아있는 닭을 살 때 이 방법을 사용한다. 모든 새에 공통적으로 적용되지는 않지만 타조도 같은 방법으로 최면에 걸린다는 보고가 있다.

최면현상은 포유류에서도 나타난다. 얼마 전 미국의 한 토끼 애호가가 토끼 최면법을 알아냈다고 인터넷에 공개해 화제가 됐던 적이 있다. 토끼 배가 위로 향하도록 안은 뒤 흔들면서 귀를 쓰다듬으면 토끼가 잠든다는 것이다. 그는 토끼에게 약을 먹이거나 발톱을 손질할 때 이 방법을 쓴다고 했다.

그런데 사실 이 방법은 오래전부터 토끼 애호가 사이에서 공인받은 방법이었다. 미국 수의사 매튜 존스톤은 자기도 토끼 응급 치료를 할 때 자주 사용한다면서 “이 방법을 쓸 때는 토끼를 길이 방향으로 흔들어야지 직각 방향으로 흔들어서는 효과가 없다”고 했다.

최면과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갑각류도 최면에 걸린다. 날카로운 집게로 위협하는 게를 다루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때 최면이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 게의 등껍질을 머리부터 꼬리 방향으로 천천히 쓰다듬는 것이다. 게의 움직임이 느려지다가 결국 멈춘다. 최면에 걸린 것이다. 다시 깨어나는 방법도 간단하다. 이번에는 꼬리에서 머리 방향으로 문지르면 된다.

이런 동물최면은 왜 일어날까? 정확한 메커니즘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몇 가지 추측은 할 수 있다. 동물최면은 공통적으로 몸의 일부를 일정시간 동안 압박하거나 문지르거나 흔들거나 해서 일어난다. 최면에 걸린 동물은 공통적으로 수의근이 정지돼 압박을 풀어도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 뇌를 제거한 동물에서도 최면이 일어났다는 보고에 따르면 대뇌가 관여하는 사람의 최면과는 달리 중추신경의 흥분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드레날린과 같은 신경전달 물질이 관여하는 경우도 있다. 새장 속의 새를 갑자기 움켜쥐거나 소리를 지르면 그 충격으로 최면에 걸린다. 예전에 참새를 잡을 때 산탄총을 쏘면 절반은 총알에 맞아서 떨어지고 절반은 소리에 놀라서 떨어졌다. 즉 충격에 의해 다량의 아드레날린이 분비돼 흥분의 정도가 지나치게 되면 몸이 굳는다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극도의 긴장 상황에서 몸이 굳는 현상과도 일맥상통한다.

동물최면은 잘 알고 이용하면 동물을 길들일 때 유용할 수 있다. 서커스단에서 난폭한 동물을 처음 훈련시킬 때 종종 최면을 이용한다고 한다. 그러나 초기의 난폭함이 진정된 뒤에는 최면을 사용하지 않고 조련사와 동물 사이의 신뢰관계로 훈련한다. 동물에게나 인간에게나 가장 강력한 최면법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과 신뢰’가 아닐까? (글 : 김정훈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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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03-30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이 너무 재밌어^^ㅎㅎ

비로그인 2007-03-30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면에 한번쯤 걸려보고 싶습니다만, 왠지 -
"꼭 그렇게 라이터 불을 켜야만 해요?" "그 시계 저한테 파실래요?" 라고 할 것만
같습니다. 역시 '최면'이란 - 도구 없이 '기'로 한번에 상대를 쓰러트려야 멋이 있죠.
마치, 마법사처럼 말입니다. 기절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요? (웃음)

마노아 2007-03-30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절해보면 압니다. 죽을 맛이에요ㅡ.ㅡ;;;

비로그인 2007-03-31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기절해보셨군요. '정신을 잃는다...' 라는 기분은 정말 잠을 깨고 일어난 듯한
'무기억' '무의식'의 상태일까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고 씩은 땀이 나고,
일어서기만 해도 진짜 눈 앞이 깜깜해질 정도로 일산화탄소에 중독된 적이 있었습니다만,
그 때도 저는 기절하지 않아서 말이죠...(긁적) 그 때가 13살 때의 일입니다.

마노아 2007-03-31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그게 산소부족으로 넘어가는 건데, 뇌에 산소가 들어가지 않을 때의 느낌이란, 미치기 일보 직전이거든요. 감당이 안 되니까 정신을 놓는 거죠. 전 빈혈이 심해서 이년에 한 번 꼴로 쓰러진 적이 있어서 그 끔직함을 알아요. 아흑... 철분약 열심히 먹고 있어요ㅠ.ㅠ

비로그인 2007-03-31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악성 빈혈이군요. 이거 실례했습니다. (긁적)
그럼, 여름 날에 외출할 때는 특히 조심하셔야겠습니다.

마노아 2007-03-31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악성 빈혈 소리는 못 들었는데 하여간 상태가 안 좋은 것은 맞아요..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에 약 먹는 것을 잊었네요. 저녁 땐 제대로 먹어야지..;;;
 

★★★ 사기를 당했을 때 긴급대처법 ★★★

http://www.thecheat.co.kr

(출처 : 인터넷 사기피해 정보공유사이트 더치트 http://www.thecheat.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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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03-30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월 환타스틱 공연이 워낙 대규모다 보니까 좋은 자리를 두고 사기표가 판을 친단다. 사지도, 팔지도 말자!

뽀송이 2007-03-30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좋은 정보 고마워요.^^ 조심조심!! 담아가요.^.~

마노아 2007-03-30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 뽀송이님^^
 
 전출처 : 잉크냄새 > 영혼도 영양실조에 걸릴 수 있어

전신마비 장애인이 뇌성마비 장애인에게 보내는 편지


http://bbs2.ruliweb.daum.net/gaia/do/ruliweb/default/181/read?bbsId=G005&itemId=55&articleId=5426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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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3-30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이런. 저는 '만성 영양실조'였던 셈이군요. 담아가겠습니다. ^^

마노아 2007-03-30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퍼온글인데 너무 인상적이었어요. 우리 어여 영양보충해요(>_<)

홍수맘 2007-03-30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맘이 짠 하네요. 저도 '지독한 영양실조' 상태라는 생각이 들어요. 얼렁 보충해 줘야할텐데...

마노아 2007-03-30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컥!하게 만들었어요. 우리, 영혼의 비타민을 섭취해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7 - 연산군일기, 절대권력을 향한 위험한 질주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7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앞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시리즈가 모두 내게 깊은 인상을 주기도 했지만, 연산군일기는 가히 충격 그 자체였다.  내가 알고 있던 모습에서 가장 비켜 간 모습이었고, 통설과도 전설과도 매우 다른 모습에 흥분이 일 정도였다.

뭐랄까.  연산군에 대한 감정은 늘 가여움과 안타까움, 측은함 같은 것이었다.  폐비 윤씨가 절대 잘했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죽을 정도의 죄를 지은 것은 아니었는데, 그렇게 황망히 어미를 잃고 외롭게 자랐을, 그의 고독과 그의 보상받지 못한 유년에 대한 내 나름의 '이해'였다.

그런데 이 책을 보다 보니, 연산군은 짐작했던 것과는 너무도 달리 매우 냉정하고 차가운 이성을 지닌 사람이었다.  적어도 갑자사화 때까지의 연산군은 말이다.

갑자사화의 경우도 어머니의 복수가 목표이긴 했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오히려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기 위해서 어머니의 일을 도구로 사용했다라는 짐작이 더 맞아 떨어진다.  그가 초기에 신하들을 휘어잡는 모습은 카리스마 그 자체였는데, 도를 넘어서니 부족함만 못해서, 그의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 권력으로 변질되기 시작한다.

단순히 버릇 없는 신하들의 버릇을 고쳐준 것이라면 모를 테지만, 그의 이글이글 타오르는 카리스마에는 너무도 많은, 무고한 희생자들의 눈물과 한숨이 숨어 있다.  지금도 박정희, 전두환 시대를 그리워하고 예찬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불시에 스친다고나 할까..;;;;;

작가가 지적했듯이, 그가 보여준 잔인함을 훨씬 더 능가한 중국 황제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성군;으로 칭송받는 이들도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이 백성들을 살폈기 때문이다.  연산군이 초심을 잃지 않고(초기의 모습이 진심이었다면!) 계속해서 애민하는 마음을 품었더라면, 그의 말년이 그토록 비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반정의 명분은 다른 누구도 아닌 연산군이 쥐어준 셈이니까.

이번 이야기에선 아무래도 살벌한 내용이다 보니까 유머러스한 장면은 많지 않았다.  그렇지만 오히려 진지하게 탐독하는 것이 제 맛을 더 잘 살린 듯하다.  연산군 일기는 편찬자의 의도에 의해서 강조되거나 누락된 부분들이 분명 있을 거라고 예상되는 바, 실록의 내용을 100% 사실로 믿기는 어려울 수 있지만, 그래도 내가 몰랐던 연산군에 대한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간 느낌이다.  앞으로 두 권 남았는데 빨리 선조실록과 광해군 일기를 보고 싶다.

덧글, 영화 "왕의 남자"에서 반말 찍찍 뱉던 장녹수가 거슬렸는데, 실제 장녹수가 그랬었다는 기록을 보니 어쩐지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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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3-30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왕의 남자]에서 실제 캐릭터의 성격을 잘 살린 것이군요.
'장녹수'라. 어찌 보면 정말 대단한 여자인 것은 사실입니다. 물론, 시대가 맞았지만.

마노아 2007-03-30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장녹수라는 드라마가 있었는데 박지영씨던가? 하여간, '색기' 흐르는 요부 연기를 아주 잘 소화했던 기억이 나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7 - 연산군일기, 절대권력을 향한 위험한 질주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7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12월
구판절판


'무오사화'로 명명된 이 옥사의 승자는 누구일까? 외형적으론 상을 받은 훈구파들로 보인다.

주연이 유자광이었던 것은 맞지만, 진정한 승자는 따로 있다. 사건의 총감독, 바로 연산이다. -78쪽

취향에 관해서 연산은 부왕인 성종과 많이 닮았다. 시를 좋아했고, 그림 애호가였으며, 사냥도 좋아했다. 그러나 둘의 기질은 결정적으로 달랐으니...

연산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다 했다.
성종은 시를 쓰고 싶어도 쓰지 못하고, 신하들의 시를 감상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지만, 연산은 지어 올리게도 하고 지어 내리기도 했다.

성종은 좋아하는 매를 기르는 것도 대간의 눈치를 봐야 했지만, 연산은 매에다 사냥개까지 맘껏 길렀다. 심지어 개들이 조회하는 내정을 뛰어다니기도 했다.

이 시대의 유학자들은 임금의 모든 것은 정치이고, 따라서 일거수일투족이 다 기록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연산은 정치와 자신의 사생활을 엄격히 구분하려 했다. -90-91쪽

실제 진행과정을 보면, 갑자사화의 임상홍에게선 무오사화의 유자광 같은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갑자사화는 연산이 각본, 감독, 주연까지 겸한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연산은 그 과격함과 갑자사화의 시작에 대한 <일기>의 오보로 인해 매우 충동적이란 인상을 주지만, 사실 꽤나 냉정한 성격의 소유자다. 힘이 약할 땐 다른 힘을 빌릴 줄 알았고, 속내를 숨긴 채 때가 무르익기를 언제까지나 기다릴 줄 알았다. -118-119쪽

연산은 그동안 자신의 행동을 비판했던 신하들을 생각나는 대로 잡아들였고 어머니의 추숭을 반대했던 이들도 예외일 수 없었다. 감옥이 모자라 잡아온 이들을 바깥에 둘 수밖에 없을 정도였고 고문으로 인한 비명소리는 그치지 않았으며 날마다 새 얼굴이 장대에 걸리었다. 대신도 대간도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이런 것뿐이었다.

"지당하신 분부이옵니다."

"상교가 참으로 지당하시옵니다."

모두들 제 한 목숨 건사하기도 힘든 시절이었다.

"휴~오늘도 살아남았구나!"-134쪽

유교정치는 왕권의 지나친 확대를 견제하는 장치를 담고 있어서 유교정치가 자리잡을수록 군약신강의 양상이 나 타나게 된다. 때문에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던 태종이나 세조는 신하들의 견제장치를 크게 제한했다. 경연을 정지시키고 대간들의 활동도 위축시켰다. 하지만 태종조, 유교보다 불교를 더 숭상했던 세조도 대간 그 자체를 폐지하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대간을 없애버린다는 것은 국시를 거스르는 반체제적인 행위라 하겠다. 그러나 연산은 달랐다.

연산은 유교식 견제장치들을 제거해나갔다. 임금에게 간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는 사간원이 폐지되고 사헌부도 축소시켜 조사들에 대한 감찰기능만 남겨놓았으며 홍문관도 폐지되었다.

견제장치들을 제거한 연산은 한 걸음 더 나간다. 성균관과 사학의 활동을 사실상 정지시켰으며, 과거도 경전 대신 율시로 대체했다.

연산은 유교식 장례나 제례도 못마땅했다. 어머니를 죽인 할머니 인수대비가 미워서 그녀의 장례절차를 대폭 축소해버리는 패륜을 저질렀다고 <일기>는 쓰고 있지만, 이보다 앞서 죽은 예종비 안순왕후(인혜대비)의 장례 또한 그랬다. 친모인 폐비 윤씨의 제삿날엔 후원에서 여럿이 보는 가운데 성관계를 갖기도 했다. -146-148쪽

연산은 폭압을 통하여 황제적 권력을 구축하였다. 그런데 중국의 경우를 보면 연산군보다도 더 가혹한 정치를 하고도 후세에 명군으로 평가받는 이들이 있다. 그런 황제들의 공통점은 신하들에게 가혹했지만, 나라를 튼튼히 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켰다는 점이다. 그러나 연산에겐 그렇게 강화시킨 왕권을 가지고 나라와 백성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설계가 없었다. 넘볼 수 없는 왕권을 구축하는 것 그 자체와 강력한 왕권을 마음껏 누리는 것만이 지상목표였다. -150-151쪽

연산은 예술 방면이 발달한 사람이다. 시를 좋아했고 노래와 춤을 즐겼다. 특히 처용무를 즐겼는데 연산이 처용무를 추면 모두들 넋을 잃고 바라보았고, 죽은 자의 우는 연기라도 할라치면 기생들도 모두 따라 울어 연회장이 통곡의 자리로 바뀌곤 했다. 그의 미의식은 웅장 화려함을 추구했다. 새롭게 짓는 이궁의 정전은 청기와를 덮도록 했으며, 규모도 크게 지었다. 기생들은 물론 궐 안의 노비들도 깨끗한 옷을 입도록 명했고, 서민들에게 넓은 소매를 권장했으며, 품계가 낮은 신하들에게도 흉배를 달게 하고 비단옷을 장려했다. -155-156쪽

연산의 최측근 인물은 바로 장녹수. 집안이 가난하여 여러 번 시집을 갔는데 마지막으로 결혼한 이는 제안대군 집의 가노였다. 가의 아들을 낳은 뒤에야 노래와 춤을 배워 창기가 되었다. 연산을 만났을 때의 그녀를 사관은 이렇게 묘사한다.

"나이는 서른, 얼굴은 보통!"

비천한 신분에다 이렇듯 내세울 것 없는 그녀가 어떻게 연산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그녀는 열여섯으로 보였다고 할 만큼 피부가 고왔고, 동안이었던 모양. 그리고 견줄 이 없을 정도의 빼어난 교태가 그녀의 무기였다.

'더 중요한 것은 상대에 대한 파악이지. 나는 주상의 기질, 취향, 버릇, 약점까지 다 꿰고 있걸랑.'

때론 어린아이 다루듯 조롱하고 반말을 일삼았으며 심지어 종 부리듯 하였다. 연산은 이에 대해 화를 내기는커녕 아무리 화가 났다가도 그녀만 보면 눈 녹듯 풀렸다. 연산은 때때로 그녀와 함께 그녀의 친정을 찾곤 했는데, 둘의 모습은 여느 부부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니 그녀의 세도가 오죽했을까?-169-1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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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3-30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나치게 강한 카리스마는 스스로를 '혼자'라는 고독속에 갇히도록 하지.
그러니까, 세상 모두가 자신의 옷자락 밑에서 벌벌 떨기를 원하면서도 - 한편으론,
자신에게 엄하게 대하고, 자신을 자식처럼 편하게 대해 줄 '절대적인 누군가'를
원한 것은 천재적이지만 불쌍한 독재자들의 공통점인 것 같습니다.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장녹수'에게 꼼짝못했던 것은 당연한 심리 현상이라고
여겨집니다만. (웃음)

마노아 2007-03-30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해주신 그대로 같아요. 불쌍한 느낌이 없진 않지만 그가 광해군과 동급으로 취급되는 것은 열받아요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