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작은 꼬마 벨 이마주 40
데비 길로리 그림, 조이스 던바 글, 엄혜숙 옮김 / 중앙출판사(중앙미디어) / 2002년 11월
품절


앙증 그 자체의 귀여운 꼬마.

녀석과 놀아주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새로운 놀이기구를 제작해야 한다.

욕조 속에서도 녀석은 귀여웠다. 노저어가는 모습이라니.^^

에에취----! 저 멀리까지 날아간다. 그가 왔던 곳으로.

거미줄로 꼬마를 받아주는 엄마, 아빠.

꿈 속에서 다시 만날 테다. 착하고 마음 따뜻한 곰돌이 가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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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4-17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크기가 작다는 말인가요?
귀엽겠다.

마노아 2007-04-17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핫, 책은 커요^^ 저 꼬맹이가 정말 작아요^^

비로그인 2007-04-17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단풍잎 나오는 부분(2번째)의 색채가 너무 이쁩니다.
저런 강렬하고 고급스러운 색채를 너무나 좋아하거든요. ^^

마노아 2007-04-17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번째 그림이라구요??? 밑에서 두번째가 아니고요? 제가 좋아하는 붉은 빛은 로마 장군의 망토색깔인데요. 포도주로 물들인 것 같은 진홍색을 띠고 있어요. 쿼바디스에서 그 색깔을 본 듯 해요^^;;;

비로그인 2007-04-17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단풍잎이 나오는 부분에서부터 두번째' 라는 뜻이었습니다만. (긁적)
저도 겨울에, 긴 검은색 코트를 입고 맞바람을 맞으며 그것을 망토같이 휘날리며
걷는 것을 좋아합니다만, 그 다음날 찬 바람을 쐰 대가로 두통을 앓기도 합니다. (웃음)

마노아 2007-04-18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좋아하는 지인은 키가 굉장히 큰 편인데 첫 만남 때 긴 검은 코트를 입고 나오셔서 그때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해요. 작년 겨울엔 롱코트가 전혀 유행을 하지 않아서 좀체로 보지를 못했습니다. ^^;;;

비로그인 2007-04-18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언제나 유행과 상관없이 살고 있어서 그런 것은 모르겠습니다만.
지난 겨울에 몇번 롱 코트를 입었더니, 사람들이 "매트릭스~" 라며 놀렸었습니다.
마치 오랜만에 롱코드를 봐서 반가운 듯이 말이죠. (웃음)

마노아 2007-04-18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트릭스 패션 좋아해요! 울 언니 코트 중에 딱 그 분위기 옷이 있는데 저한테 안 어울려서 못 입었어요. 키도 좀 더 커줘야 하고, 머리는 커트를 해야 어울리는 옷이랄까..^^;;;
 

http://blog.yes24.com/document/652704
지금이야 '칼데콧 상 받은 작품이다'라고 이야기하면 모두가 감탄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지만 불과 몇 년 전만해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는 않았다. 그리고 케이트 그린어웨이 상도 마찬가지다. 어떤 면에서 보면 출판사들이 의도적으로 상을 내세우는 경우도 있어서 약간 꺼려지기도 하지만 일단 인정받은 책이라는 점에서는 눈길이 간다. 간혹 우리 정서와는 맞지 않는 책이 있기도 한데 그것을 가지고 상의 가치를  판단하는 일은 조심스럽다. 문화라는 것이 모든 나라에서 보편적으로 이해받는 것은 아니니까. 다만 나와 정서가 맞지 않다던가 우리와 정서가 맞지 않는 것은 내가 보지 않겠다는 결정이 필요할 뿐이다.
 
그럼 과연 랜돌프 칼데콧이라는 사람과 케이트 그린어웨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궁금해진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 두 사람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들이 남긴 작품은 여러 편이 있겠지만 우리 나라에 번역되어 있는 책은 한 권씩 밖에 없다. 작품이 여러 편이었다면 따로 소개를 하겠지만 어차피 한 편씩 밖에 없으므로 비교도 할 겸 같이 소개한다.
 
<<< 랜돌프 칼데콧(0846~1886) >>>
 
칼데콧은 윌터 크레인, 케이트 그린어웨이와 함께 빅토리아 시대 말기를 대표하는 영국 어린이책 일러스트레이터 3인방의 한 사람이다. 칼데콧의 그림책을 두고 모리스 샌닥은 '칼데콧은 그림과 글의 기막힌 조화를 처음으로 고안해 냈다. 글은 생략되고 그림이 말을 한다. 요컨대, 그것은 그림책의 창조였다."
 
돈과는 가장 무관할 듯 싶은 어린이 그림책. 하지만 그림책은 불행하게도 인쇄물 가운데서 돈, 그리고 기술과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는 물건이다. 인쇄 기술이 발달하기 전에는 컬러로 된 그림책 한 권을 만드는 데만도 천문학적인 경비와 기술이 드는 시대가 있었다. 어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차고 넘쳐 그림책으로 그 사랑을 표현하려는 화가가 있다 해도, 재력과 기술을 다 갖춘 '스폰서'를 만나지 못하면 화가의 재능은 세상의 빛을 볼 수가 없었다.

그토록 척박하던 시대에 숨은 공로자가 있었으니, 이름하여 에드워드 에반스라는 출판업자이다. 서민적인 화풍의 목판본 그림책으로 19세기 말엽에 이른바 '그림책의 황금시대'를 연 랜돌프 칼데콧도 이 에반스의 눈에 든 행복한 화가의 한 사람이다. 황금 시대의 또 하나의 거장인 케이트 그린어웨이가 귀족적인 화풍으로 어린이를 천사처럼 귀엽게 그려 내는 그림책을 보여 준 반면에 칼데콧은 웃음과 풍자가 가득한 서민의 모습을 주로 그려 당연히 대중에게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다.

칼데콧은 1846년 영국 중부의 아름다운 도시 맨체스터에서 태어났다. 정식으로 회화 수업을 받은 적이 없던 터라 은행원 생활을 하면서 습작을 하다가 1871년에 런던에서 발행되는 잡지에 풍속화를 그리면서부터 화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1878년부터 세상을 뜨기 전까지는 구전 동요와 민요를 바탕으로 하여 해마다 두 권씩 그림책을 내놓는 왕성한 창작 활동을 했다.

<칼데콧 상>
'근대 그림책의 아버지'로 불리는 랜돌프 칼데콧을 기념하기 위해 1938년 창설괸 그림책 상. 미국 도서관협회에서 주관하며, 전년도에 미국에서 출판된 모든 그림책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을 그린 화가에게 수여한다. 칼데콧 상은 1권의 최우수상에게, 칼데콧 아너 상은 1~5권의 우수작에게 준다.
 
- 리브로 작가소개와 시공주니어 도서목록에서 -
<<< 작품 소개 >>>
* 익살꾸러기 사냥꾼 삼총사(시공주니어)

이 시기의 작품을 보면 대개가 목판 그림책이다. 당시에는 다양한 기법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목판 그림책은 이상하게도 편안함과 푸근함을 준다.
 
이 이야기는 <마더 구즈 이야기>에 나오는 한 이야기를 재구성한 책이라고 한다. 사냥꾼이 사냥하러 나갔다가 사냥은 안 하고 거의 놀다가 오는 그런 이야기로 내용이 썩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하긴 요즘처럼 구성도 다양하고 이야기 구조도 튼튼한 책을 먼저 접했으니 그럴 수밖에. 그러나 이 책이 19세기에 나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책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냥꾼 셋이 사냥을 떠난다. 그러나 그들이 진짜 사냥을 하기 위한 것인지 의심이 간다. 들판에 서 있는 허수아비를 보고 한 명이 허수아비라고 하자 다른 한 명이 길을 잃은 농부라고 한다. 그야말로 익살스럽다. 이야기는 이런 식으로 반복되어 나타난다.
 

한 번은 칼라 그림이 나왔다가 다음 장에는 흑백 그림이 나온다. 그런데 사냥꾼이 들고 다니는 것은 사냥 도구가 아니라 악기다. 그것만 봐도 이들의 목적을 대충 짐작할 수 있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글 속에서는 나오지 않았던 이야기들이 나온다. 그제서야 모리스 샌닥이 이야기한 말이 실감난다. 글이 이야기를 끌고 가던 시절에 글에서는 나오지 않는 이야기를 그림으로 나타냈다는 것이 아마도 획기적인 방법이었을 것이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지금 기준으로 보지 말고 19세기라고 생각하고 봐 주길...
 
사냥을 하려면 숲이나 산으로 가야 하건만 이들은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니며 일을 저지른다. 남의 집에 있는 바퀴를 굴려보내지 않나 데이트 하는 연인을 놀래주질 않나... 그래도 그들은 마냥 재미있단다. 보는 사람도 재미있긴 하다.
 
<<< 케이트 그린어웨이(1846~1901) >>>
 
영국 그림책의 효시인 케이트 그린어웨이(1846∼1901)는 런던에서 유명한 조판사의 딸로 태어났다. <런던 화보>의 일을 하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그림 공부를 하였고, 딸의 그림 솜씨를 인정한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그린어웨이는 당대 인쇄계의 거장인 에반스를 만나게 된다.

현명한 에반스의 판단과 도움 아래 화가로서 뛰어난 재능과 문학적인 소질을 발휘하여 본격적인 그림책 작가로 활동하게 된 그린어웨이는 그림책뿐만 아니라 알파벳을 가르치는 ABC 북, 달력, 카드 등 여러 분야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녀의 은 조악한 흑백 학습지가 대부분이었던 당시 아동 출판 시장에 천연색의 다채로운 이미지와 그림들을 선보여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그녀가 만든 발렌타인 데이 카드가 연인들 사이에 크게 유행하였다.

그린어웨이는 꽃, 나무, 초목 등 전원 풍경을 배경으로, 천진스런 어린이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관찰하여 부드럽고 섬세한 필치로 그려내어 독자에게 현실감이 살아 있는 향수를 전해 주었다.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는 중세 독일의 전설을 소재로 삼아 유명한 낭만주의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이 글을 쓰고 케이트 그린어웨이가 그림을 그린 19세기의 귀중한 그림책의 하나로, 신의 뜰에서 노는 것 같은 어린이들의 묘사가 이채롭고 의상이며 배경 모두가 복고풍의 귀족적인 아름다움을 보여 준다. 초판을 목판 인쇄로 찍어 현대의 그림책에서는 느낄 수 없는 목판본 그림책의 고전적인 맛이 흠뻑 배어 있다.

어린이에게는 꿈과 환상의 세계를, 어른에게는 어린 시절의 환상을 회상시켜 주었던 그린어웨이는 어린이와 어른들 모두에게 폭넓게 사랑받는 대중적인 작가였다. 

- 리브로 작가파일에서 -

<< 케이트 그린어웨이 상 >>

케이트 그린어웨이를 기념하기 위해 1956년 영국 도서관 협회가 창설했다. 매년 영국에서 발행된 그림책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을 그린 화가에게 수여한다.
이처럼 칼데콧 상과 케이트 그린어웨이 상은 모두 일러스트레이터에게 수여하는 상이다. 그만큼 그림책에서 그림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고 하겠다. 칼데콧은 영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후에 미국으로 건너가 활동하는 바람에 상이 미국에서 제정되어 미국 사람 내지는 미국에서 출판된 책에만 수여한다. 아마 영국 입장에서는 억울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림책을 이야기할 때 항상 나오는 사람이 바로 에반스라는 편집자다. 어느 책에서건 에반스가 없었다면... 이라는 말을 할 정도다. 책에 있어서 편집의 역할과 중요성을 짐작하게 해준다.
 
<<< 작품 세계 >>>
*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시공주니어)

이 책을 처음에 보고 도저히 19세기 작품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아름답고 이렇게 멋진 책이 있다니... 그것도 19세기에 말이다. 지금 보아도 전혀 뒤지지 않는 그림이 감탄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 이 책 역시나 목판으로 그렸다. 위에 소개한 책도 목판이지만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등장인물들의 의상과 배경 모두 복고풍으로 고급스럽다.
 
독일 옛이야기를 바탕으로 영국의 유명한 시인인 로버트 브라우닝이 글을 썼다. 그래서일까. 읽으면 읽을수록 진한 맛이 우러나는 것이.

하멜른이라는 마을에서 가장 골칫거리인 쥐들. 고양이를 죽이고 개를 물고 심지어는 자는 아기까지 문다.
 

그런데 키 크고 마른 사람이 나타나 자신을 피리 부는 사나이라고 소개하며 쥐를 쫓아내겠다고 이야기한다.
 

너무 인상적인 피리 부는 사나이 모습. 반면 앞표지는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살고 있는 모습이다. 같은 이야기를 소재로 하는 책들이 여러 권 있지만 이상하게 이 책이 가장 마음에 든다.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른 욕심 많은 인간의 마음을 꼬집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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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04-17 0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24에서 퍼옴. 둘 다 사람 이름이었구나...;;;;

하늘바람 2007-04-17 0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담아갑니다

마노아 2007-04-17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비로그인 2007-04-17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리부는 사나이]...어릴 때 모든 쥐들과 모든 어린이들이 숲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꽤나 충격을 받았던 동화... 내 딴에 따라해보겠다고 피리를 들고 나가 이 동네
저 동네 돌아다닌 듯한 기억이 납니다. (긁적) 그러나 따라오는 것은 쥐들이 아니라
호기심이 발동한 다른 어린이들이 피리를 가지고 와서 저를 따라다녔었죠.
리듬도 없이 마구잡이로 불어제끼던 다른 아이들의 피리 소리가 시끄러워 도망치듯
달려 집으로 돌아왔습니다만. 얘들은 전부 따라쟁이입니다. (웃음)

마노아 2007-04-17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하핫 정말 애들은 모두 따라쟁이였네요^^ 조카는 토요일에 음악회가 있다고 하는데 이제 피아노 학원에 다닌 지 한 달 반인지라 아마도 "떴다 떴다 비행기 날아라 날아라~"이걸 피리로 불듯 합니다. 유일하게 연주할 줄 아는 거거든요^^

비로그인 2007-04-17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릴 때 리코더를 유난히 좋아했었습니다만. 아직도 가지고 있어요. (웃음)

마노아 2007-04-17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버린 기억이 없는데 왜 없을까요? 좋아했는데...ㅜ.ㅜ

비로그인 2007-04-17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엿 바꿔 먹었죠? (웃음)

마노아 2007-04-18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케헥, 울 엄니가 강냉이랑 바꿨을 지도 몰라요.(속닥속닥..;;;)

비로그인 2007-04-18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풋-

마노아 2007-04-18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형부께 하드가 안 보인다고 문자를 날렸다.

네이트온 원격 조정 장치로 몇몇 점검을 해주셨는데, '포맷'을 해야한다고 나오는 거다.

일단 현재 상황은, 복구 프로그램으로 컴을 되살릴 수 있는지 알아봐야 하는데 그게 대략 22시간 걸린단다.  당장 오시겠다는 형부를 말려서, 내일 새벽에 오시겠다는 것도 말려서, 내일 저녁에 와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그런데 그걸 또 확인하는 과정에서 모든 프로그램이 중단되는 사태를 직면.

내컴퓨터도 안 열리고, 인터넷 창도 안 열리고, 네이트온 프로그램은 물론이요, '시작' 버튼도 안 먹히는 먹통까지 가버렸다.

강제종료를 두 번 하고 리부팅을 한 결과 지금 이렇게 글은 쓰고 있는데, 여전히 하드는 못 찾고 있다.

게다가 램이 1기가인데 부팅할 때 보니까 128이라고 나오더라.(그야말로 황당 세제곱!)

아... 나의 하드는 어디로 간 것일까. 복구해야 하는데...ㅠ.ㅠ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내 하드에 뭐뭐 들어 있더라.

수많은 영상 자료와 음악 파일이 있을 것이고 각종 수업자료와 개인 사진들이 있고, 나의 싸랑 이승환 자료도 엄청 많이 들어 있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정말로 없어지면 뜨악!하게 되는 것은 수년간 써왔던 소설 자료였다.

연재 중단한 지는 일년하고도 6개월이나 지났지만, 그래도 아직은 마음 한구석에 가장 중요한 부분의 하나였는데, 그게 통째로 날아갔다고 생각을 하니 불안감이 엄습하면서 좌절까지...

복구를 위해서 갖은 노력을 다 기울일 테지만... 엉엉.. 정말 안습이다.

형부 말로는 집 전체에 전기가 온댄다.  그래서 컴퓨터에도 전기가 먹혀 찌릿찌릿했다고...

엉엉... 이사를 가야한단 말이뇨...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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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04-17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일이 있었군요ㅠ.ㅠ 제가 2000년부터 컴퓨터를 사용했으니까 8년치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인데 정말 날벼락이에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ㅠ.ㅠ

비로그인 2007-04-17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문가분들은....포맷하기 전에 하드의 내용을 백업해주시던데....
그것도 힘들 정도로 심각한가요? 저도 가끔, 어릴 때 썼던 - 유치하지만 나름대로
자랑거리였던 글이 보고 싶어질 때가 있지만. 외장 디스크 등에 저장을 하지 않은
자신을 탓하며 가물가물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을 때는 솔직히 속상합니다.
부디, 좋은 결과가 있어서 원하시는 내용을 백업했으면 좋겠습니다.^^

마노아 2007-04-17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나 A드라이브 같은 경우는 불안하니까 다른 하드에 저장을 하는 식으로 보관에 안전을 기했다고 여겼는데 설마 제일 큰 하드가 덜렁 나갈 거라고 생각 못했어요ㅠ.ㅠ 일단 저녁에 형부가 오시면 좀 더 상황을 알 수 있을 듯한데 오늘 아침에 부팅해 보았을 때도 결과는 같았어요. 정말 암담합니다ㅠ.ㅠ
 
가로세로 세계사 3 : 중동 - 화려한 이슬람 세계를 찾아서 가로세로 세계사 3
이원복 글.그림 / 김영사 / 2007년 3월
구판절판


이슬람은 현대 유럽문명의 어머니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야. 십자군 전쟁을 치루면서 기독교도들은 훨씬 앞서 있던 이슬람 문명을 배워 유럽에 전했고 이로써 유럽은 중세의 어둠을 걷어내고 르네상스를 거쳐 근대로 접어들게 되지. 이슬람문화의 가장 큰 공로는 예술, 철학, 자연과학 등의 보존이었어.
서양 자연과학의 뿌리인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연구도 아랍인들의 기록이 없었더라면 영원히 망각의 세계에 묻혀버렸을 거야.
또 아랍인들이 '지구는 둥글다'는 사실을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콜럼버스는 신대륙을 찾아 항해에 나서지도 못했겠지. 고대 그리스의 학자들이 머릿속으로만 우주를 다루던 데 비해 아랍인들은 모든 것을 실험, 실습을 통한 증거에 바탕을 두고 연구했어. 그들의 과학적 방법은 현대과학의 기틀이 되었단다.
그들은 상업과 공업, 건축에 뛰어났고, 수학 분야에서도 큰 업적을 남겨서 기하, 대수, 삼각함수 등을 이미 사용해 현대수학의 기초를 이뤘어. 특히 복잡하고 불편한 로마의 숫자에 비해 아라비아 숫자는 대단히 간편하고 분명했지.
MCCXXXIII=1233
수많은 별들의 이름이 아랍어인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야. 또 거대한 이슬람제국을 지배했기에 지리와 측량에서 뛰어난 정확성을 자랑했지. 그러나 무엇보다 이슬람세계가 단연 앞선 분야는 의학이었어. 유럽인들이 병을 악마의 장난이나 운명의 탓으로 돌려 기도와 주술에 의존하고 있을 때 이슬람의 의사들은 이미 과학적인 치료제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세계를 휩쓴 흑사병이 세균에 의한 전염병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어. 유럽이 깊은 종교의 어둠 속에 파묻혀 있을 때 이슬람 세계는 앞선 문명을 이루어 세계의 중심이 되어 있었고 그 문명의 빛은 계속 서쪽으로 뻗어나갔지.

-82-84쪽

이슬람교는 알리 문제로 크게 두 파로 나뉘어 혈통과 정통성을 앞세워 알리가 칼리프가 돼야 한다는 무리와 알리가 아니더라도 무함마드의 언행을 따르는 훌륭한 인물이면 칼리프가 될 수 있다는 무리로 엄격하고 극단적인 알리 지지파를 시아파(이란), 보편성을 중요시하는 무리를 수니파(75% 이상 무슬림)라 하여 수니파와 시아파는 지금까지도 서로를 적대시하고 있는 거야.-93쪽

알리의 죽음은 이슬람교의 한 시대가 막을 내 리는 것이었어.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 알리 이 네 명의 칼리프들은 모두 무함마드의 친구이자 가족들로 최초의 무슬림들이며 무함마드를 통해 신의 계시를 직접 듣고 무함마드의 가르침을 직접 받으며, 그의 언행을 본받은 최초이자 최후의 정통 무슬림으로 이 네 명의 후계자 시대를 '정통 칼리프 시대'라고 해(632-661)-94쪽

옴미아드 왕가의 상징은 흰색 깃발이었어. 그런데 이란 북동쪽 호라산에서 일어난 아바스 가문이 검은 깃발을 내세우며 749년 허약해진 옴미아드 왕조를 공격해 쓰러뜨리지.
750년 아바스의 흑색군단은 옴미아드 일족을 모조리 색출해 살해했고 옴미아드 왕조는 채 90년도 안 되어 멸망해 아바스 왕조가 탄생한 거야.
모조리 살해당한 옴미아드 가문에서 단 한 사람의 왕자가 생명을 건져 도망쳤는데 그가 바로 아브드 알라흐만이었어. 그는 스페인 땅으로 피신하는데 성공. 이슬람 군대를 규합해 스페인 최강의 군대로 만들었는데 756년 수도 코르도바를 정복하고 전 스페인의 통치자가 되어 後 옴미아드 왕조를 열고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란 칭호에 대항해 스스로 '에미르'라 칭하니, 드디어 동 칼리프, 서 에미르 시대의 막이 열렸던 거야.-99-100쪽

이슬람 세계가 아바스 왕조의 등장과 함께 둘로 나뉘어 동쪽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와 서쪽 아프리카와 스페인에 세워진 후옴미아드 왕조의 에미르는 대립하고 반목했어도 집안끼리의 원한 때문이지 종교적인 이유는 아니었어.(우리는 수니파!)
그런데 이 두 왕조 사이의 북부 아프리카 이집트 지방에서 알리의 후손임을 내세우며 스스로를 칼리프라 칭한 세력이 등장했으니 이들이 바로 시아파가 세운 파티마 왕조였지.-105쪽

재미있는 사실은 십자군전쟁이 유럽에서만 큰 사건이었다는 거야. 이슬람의 역사나 아랍의 역사에선 아주 작은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지. 당시의 서유럽은 이슬람세계에 비해 극히 뒤떨어진 후진세계였고 동로마제국보다 의미가 작은 야만적인 변방에 지나지 않았거든. 그래서 이슬람 역사에선 십자군 전쟁을 셀주크튀르크와 기독교도들의 싸움으로 작게 취급해. 그러나 서유럽은 십자군 전쟁을 통해 동방에서 '가져온'(뺏어 온, 또는 훔쳐 온...;;;;)문화와 기록으로 중세를 벗어나 르네상스로 접어드는 결정적 계기를 맞게 돼.

우리가 배운 역사에는 십자군전쟁이 엄청나게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돼 있는데 그건 서유럽 중심으로 본 세계사이기 때문이지. -117쪽

인도 북부는 일찍이 이슬람세력이 뻗어오긴 했으나 몽골계 티무르제국에 속했다가 1405년 티무르가 죽은 뒤 그 자손들에 의해 여러 지역으로 갈라졌지. 거의 100년이 지난 뒤인 1496년 티무르의 손자를 자칭하는 바부르가 강력한 정복자로 떠오르는데, 1526년 파니파트 전투에서 힌두교도 연합군을 무찌르고 인도 땅에 이슬람제국을 건설하니 이것이 바로 19세기 중엽까지 북부 인도를 지배했던 무굴제국이야. 그의 손자가 악바르. 무굴제국의 기반을 탄탄하게 다졌지.

악바르의 손자는 샤자한. 예술을 사랑하고 문화를 꽃피운 명군이지만 1631년 사랑하는 왕비 뭄타즈 마할이 세상을 떠나자 끝내 그 충격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어. 샤자한은 아내의 넋을 달래기 위해 아름다운 묘지 건설을 명령했지. 뭄타즈 마할은 열네 번째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이 묘지가 남아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자 인도 이슬람 건축의 최고봉이라는 타지마할이야. -136-139쪽

샤자한의 두 왕자 다라시코와 아우랑제브는 왕위 계승권을 놓고 전쟁을 벌이고 말아. 1658년 동생 아우랑제브가 승리하자 아버지인 샤자한을 체포해 가두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 르지. 아버지 샤자한은 끝내 감옥에서 숨을 거뒀고, 형 다라시코도 끝까지 추격해 죽이고 말았어. 아우랑제브는 인도를 엄격한 이슬람법 지배체제 아래 두고 비이슬람교도들을 법으로 혹독하게 다스렸으며 음악을 금지시켰고 모든 역사 기록을 금지시켰지. 이때부터 무굴제국은 급격하게 무너져 내리기 시작, 1738년 멸망하고 말았어. 힌두교의 나라 인도에서 이슬람제국은 멸망했으나 인도인 무슬림은 인도 전 지역에 퍼져 힌두교도와 대립하게 됐어. 수억의 신을 지닌 대표적 다신교인 힌드교와 오직 하나의 신을 믿는 엄격한 유일신교인 이슬람교의 대립은 결국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인도가 독립하면서 힌두교도와 무슬림이 수천만 명씩 고향을 떠나 민족대이동을 한 끝에 동 서 파키스탄과 인도로 분리되면서 끝나. 오늘날 서파키스탄은 파키스탄이 되고 동파키스탄은 방글라데시가 됐지. -139-141쪽

고향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은 전 세계로 디아스포라(분산)됐지.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고향 잃고 쫓겨 온 이들을 반겨주지 않았어. 특히 기독교 세계가 이들을 천시하고 박대하여 이들이 자기네 터전에 뿌리내리고 살지 못하도록 절대 토지를 가질 수 없게 했고 직업도 못 갖게 해 오래 머물지 못하게 한 거야. 자연히 유대인들은 기독교도들이 기피하는 돈놀이, 즉 금융업을 주업으로 하게 됐고 금융업으로 돈을 번 유대인들이 늘어나면서 기독교도들의 미움은 더욱 커졌어. 유대인은 돈을 '상품'으로 본 자본주의 사상을 가진 최초의 민족으로 오늘날의 세계, 특히 초강대국 미국의 금융계, 언론계를 장악하고 있는 실력자들이지. -173쪽

영국 총리로 전쟁을 이끌던 처칠이 강력한 시오니즘의 지지자였고 유대인 지도자 차임 바이츠만에게 유대인 구 ㄱ가 건설 지원을 약속한 바 있었거든. 그러나 전후 1945년 7월, 영국의 총선거에서 처칠의 보수당이 패하고 애틀리 총리가 이끄는 노동당 내각이 출범하면서 시오니즘에 대한 영국 정부의 입장이 크게 달라졌어. 독립국이 된 아랍국가의 수가 많은 데다 석유의 힘이 막강했던 만큼 중동에서의 영국의 주도권을 잃지 않기 위해 외무장관 베빈이 아랍을 지지하며 유대인 국가 건설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선 거야.

그러나 유대인 국가 건설은 영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후원자를 얻게 돼. 1945년 4월 12일 갑자기 세상을 떠난 루스벨트의 뒤를 이어 미국 대통령이 된 트루먼이 바로 그였지.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고 세계최강대국으로 떠오른 미합중국의 대통령. 그의 영향력은 영국 외무장관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막강한 것이었어.

1945년 7월 포츠담회담에서 트루먼은 유대인 피난민에 대한 긴급 구호를 역설했어. 영국을 대신해 이제 유대인 문제의 중심에 서게 된 거야. 이때부터 미국은 전 아랍세계와 적이 됐던 거지. -182-184쪽

UN은 영국이 팔레스타인에서 아무런 문제 해결 없이 물러날 경우 유대인과 아랍국가들의 전면전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1947년 4월 2일,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내놓았어. 팔레스타인을 3지역으로 나누어 유대국가와 아랍국가를 세우되 예루살렘은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국제 지역으로 만들자는 아이디어로 1948년 5월 영국 철수 이전에 평화적 분할로 문제를 해결하자는 거였어. 유대인들은 당연히 대환영이었지. 그러나 아랍권은 결사반대했어. 영국과 미국 국무부도 반대했지만 미국의 경쟁자 옛 소련이 이 안에 찬성하자 미국 트루먼 대통령도 지지했어. 유대국가 건설에 미, 소 두 나라가 지지하자 아랍국가들은 긴장하여 아랍국가들의 동맹체 아랍연맹은 급격하게 군사력을 강화하기 시작했지. 팔레스타인 분할안은 1947년 11월 29일 UN에서 가결됐어. -186-188쪽

1948년 5월 14일, 영국 국기가 내려가자 즉시 뒤를 이어 이스라엘 국기가 게양되고 초대 총리 벤구리온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언했지. 이로써 2,000년 만에 유대인 국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탄생했고 미국의 국무장관 마셜은 석유와 아랍세계와의 외교관계를 우려해 이스라엘 인정을 반대했지만 트루먼 대통령은 이스라엘을 즉각 주권국가로 인정했고 소련과 영국이 그 뒤를 이었다. 그러나 신생국가 이스라엘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희망이 아니라 전쟁이었다.-190쪽

이스라엘 건국이 선포된 그 날, 이집트 전투기들이 즉각 텔아비브를 폭격하고 전 아랍은 전쟁 물자와 군대를 동원해 전시체제에 돌입했어. 이 전쟁이 '이스라엘 독립전쟁', 또는 제1차 중동전쟁이야.(1948.5.16-1949.2.24)

총 인구 1억 4천만 명에 달하는 5개 아랍국이 연합하여 고립된 65만 명의 유대인을 상대로 벌인 전쟁이고 영국식 교육을 받은 아랍 정규군에 비해 유대인은 대부분이 민간인이었어. 처절한 전투가 20일 넘게 계속됐지만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텔아비브를 끝내 지켜냈고 전 세계는 크게 경악했어.

1948년 6월 11일 스웨덴의 중재로 휴전 협상이 시작됐지. 잠시 휴전이 되자 이스라엘에는 미국과 유럽에서 무기와 군수품이 대거 유입. 이스라엘군은 단시간 내에 강력한 현대적인 전투 군대로 변모했어. 평화협상이 타결되기도 전에 선수를 쳐 카이로, 다마스쿠스, 암만(요르단 수도)을 폭격하고 육군은 탱크를 앞세워 아랍 영토를 정복해나가자 아랍권은 물론 전 세계가 크게 당황했고 7월 18일 두 번째 평화 협상이 영국의 주재로 다시 시작됐어. 1949년 2월 이집트에서 평화조약이 조인된 후 이스라엘은 세계 각국의 인준을 받았어. 이로써 UN이 인정해 팔레스타인 지방에 세워지기로 했던 아랍국가는 물거품이 되고 이 지역 주민은 하루아침에 옛 유대인처럼 난민으로 전락한 반면 오로지 유대인의 국가 이스라엘이 모든 ㄴ영토를 차지하게 됐지. -191-193쪽

1952년 7월 이집트에 쿠데타가 발생해 청년 장교 나세르가 이집트의 통치자로 떠올랐어. 1954년 대통령이 된 그는 1970년까지 16년간 이집트를 통치했는데 이스라엘을 돕는 미국에 앙심을 품고 중동 진출을 노리는 소련과 손잡아 아랍연맹의 통일을 꾀하자 미국과 영국은 아스완댐 건설 등 나세르의 지원 요청을 거절했지. 이에 나세르는 이집트 영토에 있지만 소유권은 영국과 프랑스에 있던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했어. 영국과 프랑스가 가만있었을 리 없었고 이 기회를 틈타 이스라엘은 이집트 시낭니 반도를 침공했어. 그리고 2일 후에는 영국과 프랑스 공군이 수에즈를 공격했어. 전세는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에게 유리했지만 자칫 이 전정은 세계대전으로까지 번져갈 조짐이 보였던 거라고. 당황한 미국이 이들에게 압력을 가하고 소련도 위협하여 세계여론까지 이들에게 불리해지자 UN도 긴급총회를 소집해 철군안을 채택했어. 이에 따라 사태는 진정돼 모든 외국 군대가 철수했는데 이를 제2차 중동전쟁, 또는 시나이전쟁이라고 하지. -194-195쪽

세 번째 다윗과 골리앗의 전쟁이 이스라엘의 기습 공격으로 시작됐지. 이 전투에서 아랍권은 전투기 716대를 잃고 이스라엘은 26대를 잃었어. 공군이 무력화된 아랍권은 불과 이틀 만에 패색이 완연했어. 공중전에 이은 탱그전에서도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군은 밀리기만 했고 결국은 이 전쟁은 6일 만에 아랍권의 패배로 끝나 제3차 중동전쟁을 '6일전쟁'이라고 불리지.

이 전쟁에서 아랍군 1만 5천 명이 죽거나 다친 반면, 이스라엘군 피해는 사망 777명, 부상 2,186명이었어. UN안전보장이사회가 결의한 정전안을 6월 9일 양측이 받아들여 중동엔 다시 불안한 평화가 찾아왔지. 이스라엘이 새로 점령한 땅은 약 7만2천 km2였다.-197-198쪽

1973년 10월 5일, 이집트군의 기습 선제공격으로 제4차 중동전쟁이 터졌어. 이날은 이스라엘의 종교 축제일인 욤키푸르(속죄의 날)이었고 그래서 이 전쟁을 '욤키푸르 전쟁'이라 부르지(1973.10.6-1974.1.18). 이스라엘의 병력은 이집트군의 1/3, 무기는 반도 되지 않았지. 패전에 패전을 거듭, 개전 48시간 만에 17개 여단이 전멸, 대부분의 병력을 잃고 포위되어 이제 이스라엘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과 다름이 없었어. 이 화급한 상황에서 미국은 대대적인 이스라엘 지원에 나섰는데 욤키푸르 전쟁에 소련이 35억 달러, 미국이 22억 달러를 쏟아 부음으로써 이 전쟁은 미국과 소련의 대리전쟁으로 성격이 변하고 말았지. 미국은 30일간 포위됐던 이스라엘에 군수물자를 운반하기 위해 무려 5.566번의 비행 수송작전을 펼쳤어. 미국의 지원으로 전력을 정비한 이스라엘은 반격에 나서 비교적 허약한 시리아군이 포진한 골란 고원을 집중 공격했지.

북부 전선에서 승리한 이스라엘군은 이집트와의 전선에 총력을 집결하여 이집트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대공세를 퍼부어 또다시 이집트는 패전의 피눈물을 삼켜야 했어. 결국 네 번째 도전도 실패로 끝났어. 그러나 승리한 이스라엘도 상처투성이였지. 이스라엘군은 이 전쟁에서 점령한 골란 고원에서 철수를 거부하고 계속 점령지에 머물며 UN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니 세계 여론이 좋지 않았어. 또 날이 갈수록 석유의 중요성이 커져 이스라엘에 지지를 보내는 나라들이 줄어들어 이스라엘은 예전과 같은 국제적 동정도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단다.

네 번에 걸친 중동전쟁에 모두 패한 아랍권은 1973년 10월 17일, 아랍 산유국 석유장관들이 모여 '석유의 무기화'를 결의했지. 유가는 폭등하고 세계경제는 대혼란에 빠져들었어. 이것이 1973-1974년에 터진 이른바 제1차 석유파동(오일쇼크)이고 또 한 번 1978-1980년 제2차 석유파동이 일어나 석유 무기화가 얼마나 무서운가 절감케 했단다.-200-203쪽

제4차 중동전쟁 이후, 중동의 분위기는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어. 1977년 11월 이스라엘 수도 텔아비브의 벤구리온 공항에 이집트 비행기가 착륙했어. 그 비행기에서 내린 사람은 바로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 여기에서 사다트 대통령과 베긴 총리가 포옹을 한 거야.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극적으로 화해하는 순간이었지.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는 이집트 영토에서 물러나는 대신 이집트는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조건이었어.

이들은 1978년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의 초청으로 캠프데이비드에서 만나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에 조인함으로써 이 두 나라 사이엔 평화가 정착됐으며 그해 노벨평화상의 수상자가 됐단다. -206쪽

유일한 해결책은 팔레스타인인들의 완전한 독립국가의 건설이야. 그러자면 이스라엘이 웨스트뱅크에서 완전히 철수해야 하는데 절대 그럴 리 없는 데다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의 요구 조건을 받아들이지도 않을 테고 주변 아랍국가 또한 새 아랍국가가 생기는 걸 반기는 분위기도 아니며 이스라엘 점령지에 정착한 유대인들의 철수 거부도 또 하나의 걸림돌로 등장했어. 그러나 모든 문제의 실마리는 이스라엘의 존재를 아랍세계가 인정하느냐에 달렸어. 현재 이스라엘을 인정하는 아랍국가는 이집트와 요르단뿐.
(이집트 : 1967년 점령된 시나이 반도 반환조건/요르단 : 1967년 점령된 영토반환조건)-2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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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4-16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음. 세계는 역시 '역사'라는 길고 긴 시간을 들여 서로 서로 인간들이 문화를
주고 받으며 진보되어 왔고, 앞으로도 그러하겠죠.
과거에 영광을 누렸던 나라들의 선진 문화가 다른 나라의 문화를 발전시켰고, 그 후엔
반대로 현재의 영광을 누리는 나라가 선진 문화를 과거의 '선배'에게 되돌려 주고
있는 셈이랄까요. 또 미래의 영광은 어디에게로 향할지는 모릅니다만.
서로 이어달리기의 바톤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작업중"이란 제목에 처음엔 엉뚱하게, 두번째에는 '하드 고치는 중' 이라고
생각하고 들어왔습니다만. 완전히 예상 밖의 결과입니다. (웃음)

마노아 2007-04-16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쓰다가 하드 고치는 것 때문에 급하게 나가느라고 저장할 틈이 없었어요. 일부는 글 쓰던 게 날라갔고, 처음 것만 살린 건데 그래서 제목도 급히 '작업중'이 되어버렸죠. 그나저나 심각해요. 흑흑..ㅠ.ㅠ
 
아주 작은 꼬마 벨 이마주 40
데비 길로리 그림, 조이스 던바 글, 엄혜숙 옮김 / 중앙출판사(중앙미디어) / 2002년 11월
평점 :
품절


내가 본 책은 영어동화로 페이퍼북인데 알라딘에서 검색이 되질 않아 한글판 책에다가 씁니다.

책도 예쁘장하지만 글속에 담긴 마음들이 더 예쁘네요.

아기 곰은 숲에서 아주아주 작은 무언가를 발견해요. 사람 모양을 하고 있지만 정말 사람인지는 모르겠어요. 발이 아주 길거든요. 호빗을 연상케 하는 요정같기도 하구요.

작은 꼬맹이는 길을 잃었다며 울었죠. 엄마를 찾았어요.

아기 곰은 꼬맹이의 엄마가 어디 계신지 알 수 없죠.  하지만 네가 괜찮다면 우리 엄마를 네 엄마 해도 돼~라며 따뜻하게 말해 줍니다.  아기 곰의 엄마 곰도 큰 이를 드러내며 친절하게 웃어주었지요.   꼬맹이는 아빠를 찾으며 또 울었어요.  아기 곰은 네가 원한다면 우리 아빠를 네 아빠해도 돼~라며 역시 친절을 베풀지요. 

아기 곰의 가족들은 숲속에서 만난 꼬맹이를 정말 가족처럼 대해 주었어요. 함께 놀아주구요.  식사도 같이 하고 목욕도 하게 했죠.  연필과 실패를 이용한 시소놀이, 성냥갑을 이용한 그네놀이, 빨대를 이용한 미끄럼틀 놀이도 아주 재밌었어요.  완두콩이 얼굴만한 꼬맹이는 실컷 먹고 따스한 물에 목욕도 했더랬죠.  칫솔로 노저어가며 노는 모양새가 아주 귀여워요.

아기 곰 옆에서 꼬맹이는 잠을 자려고 했지만 아기 곰의 코고는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잠들 수가 없었어요.  아기 곰의 코를 살짜쿵 꼬집었더니 에~취~하고 재치기를 하네요.  그 바람에 꼬맹이가 휘익 날아가버렸어요.  처음 길을 잃었던 그곳으로요.  그곳에서 엄마와 아빠가 진주구슬 같은 거미줄로 아가를 받아주네요.  그들은 다시 만나서 함께 기뻐했더랬죠.  새근새근 잠이 드는 꼬맹이의 손에는 아주 작은, 정말 작은 아기 곰이 쥐어져 있었어요.

이야기가 참 독특하네요.  길 잃은 친구에게 대가 없는 친절을 베푸는 아기 곰과 그 가족들의 모습이 예쁘구요.  그 작은 누군가가 또 다른 작은 누군가와 잠이 드는데 자신에게 친절을 베풀어준 아기 곰이라니요.  누가 누구의 꿈을 꾼 것일까요.  큼직한 그림들이 정겹고, 아기 친구 때문에 벌어지는 해프닝들이 재치있게 그려졌어요.  한글판 책은 어떨지 궁금합니다.  벨 이마주 책이라니 더 호감이 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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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4-16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두콩이 얼굴만한' 이라는 부분에서 - 어릴 때 너무나 재밌게 읽었던 동화가
떠올랐습니다. 제목은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아마도 두더지 대식구가 주인공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어느 날, 그 두더지 대식구들은(아마도 수십마리가 넘은 듯)
우연히 숲 속에서 정말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밤 한알을 발견합니다. 그 크기가 정말
4층짜리 집채만했죠. 두더지들은 이런저런 의논 끝에 그 밤을 다가구 주택으로 짓기로
합의하고 열심히 밤 속안을 팠죠. 짜잔- 멋있게 3층 집이 완성되었습니다 !!!
속을 판 밤들은 두더지들의 겨울 식량이 되어서 스프도 해 먹고, 쩌 먹기도 했죠.
(그 때는 샛노란 밤의 속을 보고 '익은 밤'이라고 단정했습니다. 웃음)
어쨌든, 모두 욕심부리지 않고 사이좋게 잘 살았다는 헤피앤딩이 주 내용이었지만.
저는 그 거대한 밤집이 가지고 싶었습니다. 밤도 실컷 먹을 수 있고, 집도 상당히
아늑해 보였기 때문이었거든요. (웃음)

비로그인 2007-04-16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또 하나, 이것도 어릴 때 읽은 동화입니다만. 역시 먹는 이야기입니다. (웃음)
어떤 소년이 사과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사과를 먹고 싶어 했죠.
하지만 그 소년은 너무나 욕심이 많아서, 모든 사과를 자기 혼자 다 먹었죠.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은 정말 거대한 빨간 사과를 보게 됩니다. 당연히, 소년은 미친듯이
사과를 파먹었어요. 이리 저리 동굴을 만들며 -
그런데 갑자기 정신을 들어보니, 자신이 어느새 사과 애벌레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소년은 그 끔찍한 상황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다가 잠에서 깨어났는데.
그것은 꿈이었습니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도 결론은 소년이 깨달음을 얻고나서
그 다음부터는 욕심부리지 않는 착한 소년이 되었다..뭐 그런 내용이었겠죠.
그러나 여전히 제 관심사는 그 거대하고 빨간 껍질, 하얀 속살의 상큼한 사과가
탐이 났었습니다.
마치, 어릴 때 '헨델과 그레텔'의 '과자로 만든 집'을 누구나 갖고 싶어했던 것처럼 말이죠.

마노아 2007-04-17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왓, 동화들을 상세히 기억하고 있네요. 그때의 느낌도 그대로 간직하고 계시구요. 그만큼 인상 깊었다는 얘기겠죠^^
두번째 동화는 저도 읽었던 기억이 나는 것 같은데 자신은 없네요. 어느덧 자신이 애벌레가 되어 있더라는 설정이 익숙해요. 그치만 역시 내가 보았다라는 확신은 들지 않는군요. 저는 밤나무 집이 참 탐이 나네요. 스머프들의 버섯 집이 정말 아늑해 보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

비로그인 2007-04-17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보통 어릴 때의 기억은 아주 깊숙한 '뇌 기억창고'에 먼지 쌓인 채 있다가.
어떤 것을 계기로 이렇게 선명한 사진처럼 끄집어 나오기도 합니다만.
그게 또 흔치 않습니다. (웃음) 그런 면에서 이번 것은 아주 멋진 '건짐'입니다.
한번 꺼내어져 먼지를 깨끗하게 닦아 '대뇌피질 방' 테이블 어딘가에 액자를 끼워
놓으면 다시는 '장기-기억창고'에 들어가지 않거든요. ^^

마노아 2007-04-17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들이 너무 어려워요^^;;;; 아무튼 엘신님의 기억창고 참으로 멋진걸요^^

비로그인 2007-04-17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나름대로...상당히 풀어서 썼다고 생각했는데...(털썩)

마노아 2007-04-17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는 '장기-기억창고'에 들어가지 않거든요<<< 요 문장이 어려웠어요. 저는 다시는 사라지지 않는다..라는 문맥으로 이해하려고 했는데 다시는 들어가지 않는다고 해서....아, '장기'라는 말은 '잊혀진'의 의미였나요? 나 왜 이렇게 의사소통이 안 될까요..ㅜ.ㅜ

비로그인 2007-04-17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은 께어 있는 동안 얻은 수 많은 정보를 자는 동안 '기억 창고'에 정리, 분류하면서
저장을 합니다. 그것이 오래된 것일수록 새로운 것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더욱 깊숙이 저장을 하는데, 우리는 종종 '잊는다' '잘 기억나지 않는다'라는 말로
대체하면서 '쓸데없는 용량 늘리기'를 뇌가 하지 않습니다. 나름대로의 '포화 상태'를
조절한다고나 할까요. 컴퓨터는 '용량 초과'로 다운되어버리거나 완전히 죽어버리기도
하는데, 인간의 뇌는 끊임없이 '압축 폴더'를 만들어 '지금 꼭 필요하지 않은 부분'은
꺼내기도 힘든 구석진 곳에 넣어버리기 때문에 우리는 '잊었다'라고 종종 착각을
합니다만. 사실 일부러 '삭제' 하지 않는 이상은 모두 살아 있는 '기억'들입니다.
그것이 어떤 매개체로 인해 꺼내지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이 '새로운 현재의 기억'으로
잘못 인식되어 당분간은 '장기-기억창고'에 들어가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누구나 한 두살의 영아기 때의 기억들도 살아있는 셈입니다만,
자라는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정보를 얻기 때문에 대부분은 영아기-유아기 때의 기억은
재빨리 뇌가 깊숙한 곳에 '망각' 이라는 폴더 안에 넣어버립니다.
뇌가 한번 흡수한 '기억'은 왠만해선 '삭제'를 하지 않습니다만, "이것은 정말로 기억하고
싶지 않아" 라고 강한 자의식이 명령을 내리면 - 정말로 그에 대한 기억을 삭제해
버리기도 해서,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 경우가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삭제'는 상당한 정신적 고통을 수반하며 '노르-아드레날린'이 다량 분비되어
신체를 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뇌가 그다지 동의하는 부분은 아닙니다만. (긁적)

저는 예전에, '삭제' 작업을 하다가 한달 동안 죽음의 문턱까지 가본 적도 있습니다.

마노아 2007-04-18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커헉, 무슨 논문 읽는 줄 알았어요. 저는 가장 어릴 때 기억이 고작 7살 정도때의 일인데 그 이전은 생각이 거의 안 나요. 단편적인 영상만 남아 있구요. 그 이전 기억도 어느 때가 되면 떠오를 수도 있겠군요. 자신은 없지만. 그나저나 '삭제'도 보통 일이 아니네요. 죽음의 문턱이라니 무섭습니다. 연인이 헤어지면 그 기억을 잊기 위해 술을 진탕 마신다든지 하면서 제 몸을 상하게 하는, 그런 영상이 떠올라버렸습니다. 암튼, 살아 계셔서 다행이에요ㅠ.ㅠ

비로그인 2007-04-18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핫. 이런. 제 표현이 너무 거칠었군요. (웃음)
음...단순히 어느 한 가지나 한 면을 '삭제'하는데는 그다지 힘든 과정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정신적 쇼크로 인해, 세상 자체를 '삭제'하려다가. 그야말로 "살아있는 채로"
몸이 죽어가는 것을 느꼈었습니다. 오장육부가 기능을 정지하자 혀가 하얗게 변하고
아무것도 (물조차) 섭취할 수 없는 패닉 상태에 빠졌었죠. 이 정도의 '삭제'는 -
'자살'이나 '절망'에 가까운 수준입니다만. 몸에 상처 하나 내지 않고 정신력으로만으도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달은 경험입니다. 그것은 세상에 대한 분노 표출
이었을 뿐, 다른 이유는 없었습니다. (웃음)
그런데 신기한 것은 '다시 일어서자' 라고 생각을 고치자마자 거짓말같이 몸이 다시
빠른 속도로 회복하는 것도 경험했습니다. '삭제'는 한달이 걸렸지만, '회복'은 단
며칠만에 이루어졌으니 인간의 '살겠다'라는 의지가 훨씬 더 강한 것은 진리입니다.

마노아 2007-04-18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엘신님, 뭔가 도통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혹시 인도에 다녀오신 경험은...;;;;;;
인간의 살고자 하는 의지가 더 강렬하고 더 크다는 것에 안도의 숨을 쉽니다. 그러니 세상이 유지가 되는 것인가 봐요. ^^

비로그인 2007-04-18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자신이 겪은 고통과 시련 등을 마치 제 3자가 보듯 생각하기 때문에 -
제가 신통해 보이는 것 같습니다만. 겪어보면 그냥 제멋대로이고 어린애같은 평범한
사람입니다. (웃음)

마노아 2007-04-18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미지 때문인지 자꾸 데스노트의 L이나 N이 떠오릅니다^^ 까드득 초코렛을 먹진 않나요? ^^;;;;

비로그인 2007-04-18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이미지는 그렇지 않다..라고 생각하지만. 성격은 ..비슷할 수도 있습니다만.(웃음)
당분이 필요할 때, 큰 초콜릿을 연속 2개 씹어 먹습니다.
하루종일 일하면서, 결명자차, 둥글레차, 복숭아 홍차, 호두-율무-아몬드차, 코코아,
커피 등 달작지근한 차들을 입에 달고 삽니다. 하지만 음료수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 바닐라, 프렌치바닐라, 딸기, 쵸코 - 밀크 아이스크림도 좋아합니다. (웃음)

마노아님은 ?

마노아 2007-04-18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몬홍차보단 복숭아 홍차를 더 좋아해요. 마실 기회는 많지 않지만요. 오늘 아침엔 율무차를 마셨어요. 별로 어울리는 날씨는 아니었지요. 아이스코코아를 사랑합니다. 여름에 카페를 가게 된다면 단골메뉴죠. 아이스크림은 좋아해요. 파르페도 사랑하지요. 하지만 서비스 안 되는 곳이 많더군요. 과일쥬스를 마시게 되면 대개 딸기쥬스를 마십니다. 그렇지만 가장 사랑하는 음료는 '우유'인 것 같아요. 그보다 더 아끼는 음료가 있다면 그저 '물'이겠지요. ^^ 오늘은 우울 바이러스가 퍼져 초코렛이 필요해요ㅠ.ㅠ

비로그인 2007-04-19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컴퓨터 하드가 속을 썩여서 우울 바이러스가 생겼나요? 큰일이군요 -
그럴 땐 무조건 당분을 섭취해주어야 합니다. 암, 그렇고말고요. 그래서 드셨습니까?

생과일 쥬스라면, 저는 토마토주스, 키위주스가 고작입니다만.
아, 참. '베스킨 라빈스 31'의 치약맛 나는 연두색 아이스크림도 좋아합니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