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만드는 만능 인쇄시대 [제 592 호/2007-04-23]
대부분의 사람들은 “찌지직~”하는 소리와 함께 인쇄물을 토해내는 잉크젯 프린터보다 인쇄가 조용한 레이저 프린터를 더 선호한다. 시장점유율에서 잉크젯 프린터는 레이저 프린터에 뒤쳐진 지 오래다. 그러나 역사 속의 유물로 사라질 줄 알았던 ‘잉크젯 프린터’가 새롭게 각광받고 있다. 어떻게 ‘구닥다리’가 된 잉크젯 프린터가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 것일까?

그건 잉크젯 프린터가 영원한 파트너일 것만 같았던 종이를 떠나 전자산업과 생명공학으로 활동 영역을 넓혔기 때문이다. 휴대전화 같은 각종 전자제품을 한 번에 찍어내듯 만들고, 인체의 피부 조직을 인공적으로 만드는 데 잉크젯 프린팅 기술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핵심 아이디어는 바로 ‘젯’(jet)에 있다. 단어 뜻 그대로 잉크를 분사하는 기술을 활용한다.

잉크젯 프린터는 카트리지에 든 잉크를 분사시켜 이미지를 만든다. 프린터가 전기신호를 보내면 압전소자가 늘어나 주사기처럼 잉크를 노즐 앞까지 밀어낸다. 그 뒤 재빨리 전류를 차단하면 압전소자와 함께 잉크도 제자리로 돌아가지만, 노즐 앞까지 밀려났던 잉크는 작은 방울이 돼 떨어진다. 전류의 세기를 조절하면 분사되는 잉크방울의 크기와 양을 정밀하게 제어할 수 있다.

이 기술을 활용하면 DNA칩을 만들 수 있다. DNA칩은 유리 기판에 DNA를 촘촘히 심은 다음 혈액과 반응시켜 유전자의 발현 여부를 알아보는 장치다. DNA칩을 만드는 방법은 유전자 시료를 어떻게 심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그 가운데 잉크 분사 기술을 이용하면 DNA칩 표면에 나있는 미세한 홈에 원하는 양만큼 DNA를 뿌릴 수 있다. 전류의 세기를 변화시키면서 시료의 양을 매우 정확하게 조절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세계적인 프린터 제조업체 휴렛패커드(HP)의 자회사 애질런트테크놀로지는 2002년 모기업인 HP의 대형 잉크젯 프린터를 이용해 DNA칩을 대량 생산하는데 성공했다. 2005년 캐논 역시 자사의 잉크젯 프린터 기술을 이용해 DNA칩을 개발했다. 캐논에 따르면 한번에 4피코리터(피코리터=1조분의 1리터)라는 극소량을 분사하기 때문에 1000가지 시료를 동시에 기판 위에 뿌리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덕분에 검사에 필요한 시간과 비용을 대폭 줄였다.

잉크젯 프린팅 기술이 한 단계 더 발전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2002년 프랑스 니스에서 열린 국제 로봇 알고리즘 워크숍에서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존 캐니 교수는 ‘3차원 잉크젯 프린팅 기술’을 제안했다. 한 가지 색다른 점은 잉크젯 카트리지에 잉크가 아닌 전자제품에 쓰이는 고분자를 집어넣는 것이다.

지금까지 3차원으로 제품을 생산하던 기술은 리소그래피(lithography)다. 리소그래피는 실리콘 웨이퍼 위에 복잡한 회로의 설계 패턴을 옮기기 위해 짧은 파장의 빛을 이용해 서로 다른 회로로 모양을 층층이 쌓는다. 하지만 금처럼 값비싼 재료들을 웨이퍼 위에 뿌린 뒤 필요한 부분만 남기고 깎아내야 하기 때문에 비용 낭비가 심했다. 마치 바위를 정으로 깎아 조각상을 만드는 셈이다.

반면 ‘고분자 폴리머 카트리지’가 채워진 3차원 프린터는 나노 크기의 벽돌을 차곡차곡 쌓는 방식이다. 그만큼 제품을 조립하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다. 모든 제품을 한 번에 ‘찍어서’ 제작할 수 있다. 현재 고분자 폴리머 카트리지로는 수 nm(나노미터=10-9미터)크기에서 3차원 인쇄가 실험적으로 가능하지만 앞으로 5~6년 정도 지나면 수 cm 크기의 제품도 생산할 것으로 전망된다.

더 나아가 잉크젯 기술은 인체 조직을 만드는 데도 사용될 것이다. 영국 맨체스터대의 브라이언 더비 교수팀은 잉크젯 프린팅 기술로 인간의 섬유싹세포와 골아세포를 증식시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들은 각각 근육조직과 뼈를 형성하는 세포를 인쇄하듯 여러 겹의 얇은 층으로 쌓는데 성공한 것이다.

카트리지에 세포를 주입하고 이를 미생물에 의해 분해되는 무독성 젤 위에 분사해 원하는 형태의 세포층을 찍어냈다. 세포층 위에 다시 얇은 젤 층과 세포층을 반복해 쌓아올려 입체적인 구조를 만들면 젤 층은 시간이 지나면 분해돼 사라지고 결국 세포들이 서로 결합한 생체조직만 남게 된다. 이런 방법으로 인공 장기를 만들면 기존의 방법보다 시간이 훨씬 절약된다.

살아있는 조직 하나를 만드는데 하루면 될 정도로 세포 성장 속도도 빨랐다. 더비 교수팀은 인공피부뿐 아니라 연골 같은 골격을 만들 수 있도록 두께가 수 cm에 이르는 3차원 잉크젯 프린터를 개발하고 있다. 만약 이 기술이 상용화되면 화상을 크게 입더라도 허벅지나 엉덩이 살점을 떼어 이식하는 대신 주변의 피부세포를 ‘인쇄’하면 된다.

하지만 잉크젯 프린팅 기술의 한계와 위험도 있다. 잉크젯 기술로 찍어낸 전자제품은 한 번 고장나면 부품을 교체할 수 없기 때문에 수리할 수 없다. 전자회로를 대체할 고분자는 기존 실리콘보다 가격이 싸지만 반도체로서 성능이 떨어진다. 인체에 적용하려면 해결해야 할 문제가 더 늘어난다. 신장 같이 큰 장기의 조직을 만들기 위해서는 충분한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하는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 프린팅 기술로 세포가 빨리 증식할 경우 비정상적으로 성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이 무병장수와 영생(永生)을 꿈꾸는 이상, 머지않아 깨끗한 얼굴 피부를 인쇄해 하루를 시작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인체에 생기는 질병에서도 자유로워질 것이다. 주류에 밀려난 것처럼 보였던 잉크젯 프린터가 새롭게 보이지 않는가. (글 : 서금영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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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년 6월 권장도서 - 김훈의 (남한산성)
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핑크빛 표지는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산뜻하니 고왔으며 작품의 분위기를 망치지도 않았다.  그것은 김훈 자신이 이 작품을 쓰면서 철저하게 감정을 배제했기 때문일 것이다.

명을 버리고 청을 받들 것을 거부하며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항전하던 인조와 신하들의 그 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얼어죽는 병사들이 속출했고 굶어죽는 이들도 많았건만, 그 사실을 전하는 김훈의 목소리는 그저 담담할 따름이다.

화친을 말하는 최명길의 충절이 척화를 말하는 김상헌의 피끓는 외침과 크게 다르지 않고, 배삯을 치뤄주지 않은 임금의 일행을 보낸 뱃사공이 청군을 이어 나르겠다는 그 마음이나 사대부로서 임금을 버리고 도망친 유신들의 마음의 크기가 다르지 않았다.  김훈은 그저 담담히 적을 뿐이고, 그 행간에 감정을 실어 읽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김훈의 독특한 필체는 이 작품에서도 빛을 발하는데 굵고 강직한 그 목소리가, 때로 같은 문장을 비틀어서 다시 말하는 수법을 많이 사용해서 말들이 어지럽고 말장난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김훈의 문장이라면 언제나 흠뻑 취해서 갖고 싶어하던 나로서는 뜻밖의 반응이다.  이제 콩깍지가 조금 벗겨져서 약간의 흠이 보이는 것인지, 아니면 1급 요리도 자꾸 먹다 보면 질리는 것인지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그렇다 해도, 명문장은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칸이 보낸 문서라던가, 최명길이 임금을 설득할 때의 목소리는 김훈이기에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배어있는 깊은 울림이었다.   심지어 서날쇠가 김상헌의 쓰라린 양심을 찌르며 되묻는 장면도 백성의 골깊은 한과 진실을 관통해서 보는 총명함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개인적으로, 인조를 참으로 싫어한다.  현대인이기에 가질 수 있는 관점이기도 하겠지만, 광해군을 쫓아낸 그의 명분이 내게 설득력이 있지 않았고, 현군을 몰아내고서 인군이 되지 못한 그의 아둔함에 진저리가 났으며, 훗날 그가 아들에게 보여준 무서운 권력에의 집착이 치를 떨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그런 과오를 같이 보기는 어렵다.  다만, 그는 판단하기를 늘 유보했으며, 신하들에게 먼저 묻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신하들은 그런 임금에게 '책임'을 떠맡기며 역사의 심판을 같이 안으려 하지 않았다. 

싸우자고도 말하지 못하고 화친하자고도 말하지 못하면서 제 몸 사리기에 급급한 김류가 영의정 자리에서 몸보신을 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에도 비슷한 처세술로 고위공직자의 자리를 꿰차고 있는 어떤 인간들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여간 씁쓸한 것이 아니었다. 

이 책은 소설이며 오로지 소설로만 읽혀야 한다고 작가는 못을 박고 있지만, 실록의 해당구절을 통해서 이 정도로 펼쳐내 보이는 작가의 신들린 솜씨에 독자는 단순히 소설로만 읽혀진다고 생각하기 어려울 듯하다.  잘 모르는 단어들이 많이 나와서 사전을 끼고서 읽어야 했는데, 책의 맨 뒤에 용어 사전이 곁들여져 있다.  미리 살펴보지 못한 나의 탓이다ㅠ.ㅠ

책은 두께에 비해서 가볍고 딱딱한 표지를 쓰지 않아서 끄트머리가 약간씩 해어진다.  김훈의 책들은 대체로 비슷한 질감의 종이를 썼는데 책을 본 흔적이 책에 꼭 남는 것이 한 특징이었다.  개인적으로는 그 '닳아진' 느낌이 나쁘지 않다.

자전거 여행에서 남한산성을 보며 썼던 명문장을 다시 이 책에서 인용할 것인가 궁금했는데 나오지 않았다.  따로 옮겨둔 것이 있으니 그 메모를 다시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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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훈이 "남한산성"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from 風林火山 : 승부사의 이야기 2007-11-05 02:38 
    남한산성 - 김훈 지음/학고재 2007년 10월 31일 읽은 책이다. 올해 내가 읽을 책목록으로 11월에 읽으려고 했던 책이었다. 재미가 있어서 빨리 읽게 되어 11월이 아닌 10월에 다 보게 되었다. 총평 김훈이라는 작가의 기존 저서에서 흐르는 공통적인 면을 생각한다면 다분히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매우 냉정한 어조로 상황을 그려나가고 있다. 소설이기에 작가의 상상력이 개입이 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읽었음에도 주전파..
 
 
멜기세덱 2007-04-23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김훈의 소설은 <칼의 노래>를 읽은 게 전분데요..ㅎㅎ 개인적으로 그의 문장은 <자전거 여행>에 나오던가요? 여우치 마을도 나오고... 참 좋더라구요. 글 잘 쓰는 김훈이란 작가를 좋아하시는 마노아님 필치도 산뜻 발랄하네요.

마노아 2007-04-23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칼의 노래가 김훈의 팬이 되게 한 일등공신이었어요. 자전거 여행도 참 좋았습니다. 굉장히 독특한 성향의 작가 같아요. 누군가는 김훈의 문체를 흉내내는 것처럼도 보였습니다. 그만큼 강렬하다는 뜻이겠지요^^

홍수맘 2007-04-23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잘 읽었습니다. 김훈의 <자전거여행>을 멋있게 그러나 어렵게 읽은지라 아직도 고민중이랍니다.

마노아 2007-04-23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전거 여행보다는 쉽게 읽혔던 것 같아요. 김훈의 문장은 힘이 팍! 들어가 있는데, 그게 또 매력이에요^^

잉크냄새 2007-04-23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님의 문장이 김훈의 그것과 많이 닮아있는듯 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마노아 2007-04-23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모르게 김훈의 문체를 따라했을까요? 중독성이 강한 김훈의 문체이기는 해요^^;;;;

마노아 2007-04-23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훠! 친절하신 님! 덕분에 오타 수정했습니다. 아이 참 쑥스러워요^^;;;;

마노아 2007-04-23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칼의 노래가 워낙 깊은 인상을 주어서 그때의 느낌을 뛰어넘지는 못했어요. 그래도 역시 '김훈'이란 말은 나오던걸요. 역사소설 많이 써주셨음 해요^^

마노아 2007-04-23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호불호가 좀 나뉠 것 같아요. 스타일이 워낙 강하잖아요. 거부감이 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전 '점층 대구'를 잘 쓰는 문장을 아주 싸랑하거든요6^^

역전만루홈런 2007-04-24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김훈을 좋아해서 책을 거의 다 소장하고 있는데, 마노아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다들 닳아지더군요, 빳빳한 표지가 아니라서 그런 것 같은데..닳아진만큼 다시 생각하게 되는 책이 되는 것 같습니다..

역전만루홈런 2007-04-24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보니 사진이 이승환이군요, 이승환 좋아하시나봐요..저도 참 좋아하는데..ㅎㅎ

마노아 2007-04-24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까망이님. 반갑습니다~ 책의 표지와 종이의 재질마저도 작가의 느낌을 고려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어요.^^ 완소승환, 너무너무 싸랑해요^^

프레이야 2007-04-24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벌써 읽고 쓰셨네요. 흠,,
여기 춤추는인생님 말고 또 다른 김훈팬을 만나게 되네요. 위에 계신 까망이님..
저도 책표지가 맘에 들었어요. 책의 내용에 비해 물리적으로 가벼운 무게감이
묘한 대칭을 이루었구요. 책 뒤에 낱말풀이와 지도를 전 먼저 보았지요.
사전을 끼고 보셨다니 마노아님, 대단하십니다.^^

마노아 2007-04-24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훈팬이 많을 것 같아요. 한 번 몸을 담그면 헤어나기 어려운 중독성이 있어요. ^^
표지마저도 무거웠다면 선뜻 책장을 펴기가 힘들었을지도 모르겠어요. 탁월한 선택이었죠.
사전은, 독서 삽질이에요ㅠ.ㅠ

2007-07-02 16: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노아 2007-07-02 17:02   좋아요 0 | URL
트랙백 주소를 달았는데 제가 맞게 한 건지 모르겠어요. 아직 2.0이 익숙하질 않아요..;;;;
 
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구판절판


칸은 명의 변방을 어지럽히는 다른 부족장들의 목을 베어 명 황제에게 바쳤고, 명 황제가 상을 내리며 마음을 푼 사이에 발 빠른 군사를 휘몰아 명의 따뜻한 들판을 빼앗았다. 칸은 충성과 배반을 번갈아가며 늙어서 비틀거리는 명의 숨통을 조였다. 칸은 말뜻에 얽매이지 않았다. 본래 충성의 뜻이 없었으므로 명의 변방 요새들을 차례로 무너뜨려도 그것은 배반이 아니었다. 그에게 충성과 배반, 공손과 무례는 다르지 않았다. 칸은 그의 족속들과 더불어 죽이고 부수고 빼앗고 번식하는 일에 거리낌이 없었다. -22쪽

내가 이미 천자의 자리에 올랐으니, 땅 위의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나를 황제로 여김은 천도에 속하는 일이지, 너에게 속하는 일이 아니다. 또 내가 칙으로 명하고 조로 가르치고 스스로 짐을 칭함은 내게 속하는 일이지, 너에게 속하는 일이 아니다.
네가 명을 황제라 칭하면서 너의 신하와 백성들이 나를 황제라 부르지 못하게 하는 까닭을 말하라. 또 너희가 나를 도적이며 오랑캐라고 부른다는데, 네가 한 고을의 임금으로서 비단옷을 걸치고 기와지붕 밑에 앉아서 도적을 잡지 않는 까닭을 듣고자 한다. -25쪽

너희의 두려움을 내 모르지 않거니와, 작은 두려움을 끝내 두려워하면 마침내 큰 두려움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너는 임금이니 두려워할 것을 두려워하라. 너의 아들이 준수하고 총명하며, 대신들의 문장이 곱고 범절이 반듯해서 옥같이 맑다 하니 가까이 두려 한다.
내 어여삐 쓰다듬고 가르쳐서 너희의 충심이 무르익어 아름다운 날에 마땅히 좋은 옷을 입혀서 돌려보내겠다.
대저 천자의 법도는 무위를 가벼이 드러내지 않고, 말먼지와 눈보라는 내 본래 즐기는 바가 아니다. 내가 너희의 궁벽한 강토를 짓밟아 네 백성들의 시체와 울음 속에서 나의 위엄을 드러낸다 하여도 그것을 어찌 상서롭다 하겠느냐.
그러므로 너는 내가 먼 동쪽의 강들이 얼기를 기다려서 군마를 이끌고 건너가야 하는 수고를 끼치지 말라. 너의 좁은 골짜기의 아둔함을 나는 멀리서 근심한다.-26쪽

그해 겨울은 일찍 와서 오래 머물렀다. 강들은 먼 하류까지 옥빛으로 얼어붙었고, 언 강이 터지면서 골짜기가 울렸다. 그해 눈은 메말라서 버스럭거렸다. 겨우내 가루눈이 내렸고, 눈이 걷힌 날 하늘은 찢어질 듯 팽팽했다. 그해 바람은 빠르고 날카로웠다. 습기가 빠져서 가벼운 바람은 결마다 날이 서 있었고 토막 없이 길게 이어졌다. 칼바람이 능선을 타고 올라가면 눈 덮인 봉우리에서 회오리가 일었다. 긴 바람 속에서 마른 나무들이 길게 울었다. 주린 노루들이 마을로 내려오다가 눈구덩이에 빠져서 얼어 죽었다. 새들은 돌멩이처럼 나무에서 떨어졌고, 물고기들은 강바닥의 뻘 속으로 파고들었다. 사람 피와 말 피가 눈에 스며 얼었고, 그 위에 또 눈이 내렸다. 임금은 남한산성에 있었다.-31-32쪽

밝음과 어둠이 꿰맨 자리 없이 포개지고 갈라져서 날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었다. 남한산성에서 시간은 서두르지 않았고, 머뭇거리지 않았다. 군량은 시간과 더불어 말라갔으나, 시간은 성과 사소한 관련도 없는 낯선 과객으로 분지 안에 흘러 들어왔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었다. 쌓인 눈이 낮에는 빛을 튕겨 냈고, 밤에는 어둠을 빨아들였다. 동장대 위로 해가 오르면 빛들은 눈 덮인 야산에 부딪쳤다. 빛이 고루 퍼져서 아침의 성 안에는 그림자가 없었다. 오목한 성 안에 낮에는 빛이 들끓었고 밤에는 어둠이 고였다. 짧은 겨울 해가 넘어가면 어둠은 먼 골짜기에서 퍼졌다. 빛이 사위어서 물러서는 저녁의 시간들은 느슨했으나, 어둠은 완강했다. 먼 산들이 먼저 어두워졌고 가까운 들과 민촌과 행궁 앞마당이 차례로 어두워졌다. 가까운 어둠은 기름져서 번들거렸고, 먼 어둠은 헐거워서 산 그림자를 품었다. 어둠 속에서는 가까운 것이 보이지 않았고, 멀어서 닿을 수 없는 것들이 가까워 보였다. 하늘이 팽팽해서 별들이 뚜렷했다. 행궁 마당에서 올려다보면 치솟은 능선을 따라가는 성벽이 밤하늘에 닿아 있었고, 모든 별들이 성벽 안으로 모여서 오목한 성은 별을 담은 그릇처럼 보였다. 별들은 영롱했으나 땅위에 아무런 빛도 보태지 않아서, 별이 뚜렷한 날 성은 모든 별들을 모아 담고 캄캄했다. 어둠 저편 가장자리에 보이지 않는 적들이 자욱했다. 이십만이라고도 했고, 삼십만이라고도 했는데, 자욱해서 헤아릴 수 없었다. 적병은 눈보라나 안개와 같았다. 성을 포위한 적병보다도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면서 종적을 감추는 시간의 대열이 더 두렵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아무도 아침과 저녁에서 달아날 수 없었다. 새벽과 저녁나절에 빛과 어둠은 서로 스미면서 갈라섰고, 모두들 그 푸르고 차가운 시간의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임금은 남한산성에 있었다.-179-180쪽

-다녀오겠느냐?
-조정의 막중대사를 대장장이에게 맡기시렵니까?
-민망한 일이다. 하지만 성이 위태로우니 충절에 귀천이 있겠느냐?
-먹고 살며 가두고 때리는 일에는 귀천이 있었소이다.
김상헌이 엉덩이를 밀어서 서날쇠에게 다가갔다.
-이러지 마라. 네 말을 내가 안다. 나중에 네가 사대부들의 죄를 묻더라도 지금은 내 뜻을 따라다오.-227쪽

최명길이 말했다.
-전하,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는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치욕은 죽음보다 가벼운 것이옵니다. 군병들이 기한을 견디듯이 전하께서도 견디고 계시니 종사의 힘이옵니다. 전하, 부디 더 큰 것들도 견디어주소서.-249쪽

임금이 먼저 말을 꺼냈다.
-칸이 오기는 왔다는 것인가?
김상헌이 말했다.
-칸이 여기까지 오기도 어렵거니와 칸이 왔다 한들 아니 온 것과 다르지 않사옵니다.
-다르지 않다니? 같을 리가 있겠는가?
-우리의 길은 매한가지라는 뜻이옵니다.
최명길이 말했다.
-제발 예판은 길, 길 하지 마시오. 길이란 땅바닥에 있는 것이오. 가면 길이고 가지 않으면 땅바닥인 것이오.
김상헌이 목청을 높였다.
-내 말이 그 말이오. 갈 수 없는 길은 길이 아니란 말이오. -269쪽

그러나 알 수 없는 것은 조선이었다. 송파강은 날마다 부풀었다. 물비늘 반짝이는 강물을 바라보며 칸은 답답했다. 저처럼 외지고 오목한 나라에 어여쁘고 단정한 삶의 길이 없지 않을 터인데, 기를 쓰고 스스로 강자의 적이 됨으로써 멀리 있는 황제를 기어이 불러들이는 까닭을 칸은 알 수 없었고 물을 수도 없었다. 스스로 강자의 척이 되는 처연하고 강개한 자리에서 돌연 아무런 적대행위도 하지 않는 그 적막을 칸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압록강을 건너서 송파강에 당도하기까지 행군대열 앞에 조선 군대는 단 한 번도 얼씬거리지 않았다.-280쪽

도성과 강토를 다 비워 놓고 군신이 언 강 위로 수레를 밀고 당기며 산성 속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걸고 내다보지 않으니, 맞겠다는 것인지 돌아서겠다는 것인지, 싸우겠다는 것인지 달아나겠다는 것인지 주저앉겠다는 것인지, 따르겠다는 것인지 거스르겠다는 것인지 칸은 알 수 없었다. -2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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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4-23 0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벌써 읽으셨군요. 전 받아두고 아직 못 읽었어요.
179쪽의 시간에 대한 긴 글,, 특유의 냄새가 나네요..

마노아 2007-04-23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훈 특유의 필체가 보이죠. 다시 읽다가 오타 수정했어요^^;;;
 
호문쿨루스 6
야마모토 히데오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첫장을 열면 온통 까맣게 덮인 색깔 위로 하얀색 글씨가 대각선으로 놓여 있다.

"나는, 너다"

주인공 나코시가 호문쿨루스가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과 맥락을 같이 하는 문장이다.

지난 이야기에 이어 기호 소녀가 계속 나온다.  소녀와 나코시의 접촉은 소녀의 완승이다.  책의 내용만을 가지고서는 아직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어쨌든 모래처럼 보였던 기호 소녀는 생살이 돋은 사람으로 돌아갔지만 나코시의 왼팔은 여전히 로봇의 강철 팔로 싸여 있고, 소녀에게서 옮아버려 왼쪽 다리는 기호로 무장되어 있었다.

실수로 물에 빠진 나코시는 물 속에서 자신을 둘러싼 기억의 잔재들 속을 유영했고, 또 다시 엄마의 자궁 속 태아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그에게 있어 현실에서 도망치는 일종의 도피처가 되는 것인지, 다른 더 큰 이유가 있는 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이번 이야기에선 그가 노숙자의 생활로 접어들기 전 모습이 잠깐 나왔는데, 기대 이상으로 대단(?)했었던 샐러리맨이었나 보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문란한 생활을 했었던 것도 아마도 맞을 듯.

생명보험 회사에서 인간의 가치를 값으로 환산하는 일을 했다던 그는, 노숙자들 사이에서 한 남자의 현재 값어치를 계산하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보통 긴장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의 값어치를 값으로 매긴다는 것에 심정적으로 반발감이 들지만, 자신의 값어치에 대해서 자신만만하게 결과를 기대할 수 없는 사회적 약자의 땀방울이 남의 일 같지 않다.

모처럼 빌딩숲이 보이지 않는 하늘을 올려다 보며 누워버린 나코시.  그의 과거와 그의 머리 속, 그리고 마음 속은 여전히 멀게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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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4-23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초에 - 인간이 인간의 값을 매긴다는 것 자체가 오만이며, 성립되지 않는 공식입니다.
그러므로 '나코시'가 계산한 점수는 틀린 것이며 그에 따라 땀방울을 흘리는 사람 또한
상대의 페이스에 말려들 필요는 없는거죠. 문제는 '자존감' 입니다.
스스로가 자신의 값을 어떻게 매기냐에 따라 '나코시'의 발언에 보이는 반응이 다르겠죠.
스스로를 높게 매기고 자긍심, 자애심이 강한 사람은 '나코시'의 말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테니까요. '사회적 약자'라는 기준은 역시 권력과 경제적인 잣대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모든 권력과 엄청난 부를 가지고 있음에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한 채 불행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영혼의 영양실조'에 걸린 '기아' 아닙니까.

누군가, 마노아님을 무시하면 - 빙그레 미소지으며 고개를 흔들어 보십시오.
당황하고 무안해지는 것은 상대방일겁니다. (웃음)

마노아 2007-04-23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은 원래 오만한 존재 아니었던가요? 여러번 지적하셨던 것 같은데^^
사회적 약자라는 말을 쓸 때 대개는 정치 경제적 잣대를 이야기하겠죠. 엄청난 부와 권력을 지닌 사람이 모두 행복한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의 경제적 자유가 보장되지 않은 사람이 행복하기 어려운 사회인 것도 맞습니다. 그렇지 않은 사회를 만드는 것이 모두의 책임일 뿐이지요. 영혼의 영양실조와 마찬가지로 육신의 영양실조도 가엾기는 마찬가지예요.
아무튼, 자긍심과 자애심은 모두 필요한 덕목이에요. 기왕이면 나와 남에게 모두 평등하게 말입니다. ^^

비로그인 2007-04-23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제가 지적했던 것입니다만...(뜨끔)
예...이번엔, 제가 반론을 제기할 여지가 없습니다. (웃음)

마노아 2007-04-23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6권에는 왜 리뷰 안 쓰셨어요? 기대했는데..^^

비로그인 2007-04-23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하나의 이야기가 7권까지 이어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만 쓰면 될 것 같았습니다. (긁적) 음.....배고픕니다.......(꼬룩꼬룩~)

마노아 2007-04-23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제 7권 읽으려구요^^;;;
식사는 하셨어요? 전 고생했어요ㅠ.ㅠ

비로그인 2007-04-23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엥~? 왜 고생을 하셨습니까?

마노아 2007-04-23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아셨죠? ^^;;;;
 
어린이 첫 그림한자사전 1단계 글송이 어린이 첫사전 시리즈 5
글송이 편집부 엮음 / 글송이 / 2001년 12월
구판절판


뫼와 메는 같은 말이래요.
뫼 산을 아주 잘 표현한 그림이죠.

흙 토.
땅을 뚫고 식물이 돋아나오는 모양이랍니다. 영차!

햇빛이 문 사이로 들어오는 모습을 표현했어요.
앗, 눈부셔라(>_<)

십대씩이나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라니, 정말 오래되었죠.

칼로 물건을 자르는 모양을 본떴어요.

인체의 부분과 네 방향을 일러주고 있어요.
정말 쉽게 설명해 주고 있죠?
조카가 아주 좋아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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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4-23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책 읽으시는 것 보면. 집 안에 서점하셔도 되겠습니다..(웃음)

마노아 2007-04-23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카 책인데 제가 같이 들여다 보았어요. 재밌더라구요^^ 처음엔 조카를 위한 동화책을 보다가 요새는 제가 동화책의 마력에 빠져든 것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