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또 담배 피세요? 이제 그만 끊으시라니까요.”
이크, 철수 녀석 잔소리가 시작됐다. 난 계면쩍은 웃음을 지으며 담배 든 손을 황급히 밖으로 뻗었다. 가족들의 건강을 생각해서 꼭 베란다에 나와서 피고 있지만 그래도 담배에 관해 지적받으면 할 말이 없다. 샐쭉한 표정을 하고 째려보는 철수 녀석을 피하기 위해 난 말을 돌렸다.

“이 담배 연기 색이 어떻게 보이니?”
“어떻긴. 흰색이죠. 아빠, 말 돌리시지 마시고…”
“땡~! 정답은 ‘파란색’이야. 잘 보렴.”
“엑? 자세히 보니 그러네. 담배 연기 흰색 아니었어요? 아님 담배를 바꾸신 거예요?”
넘어왔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말을 이어나갔다.

“담배를 바꾸다니~. 원래 담배 연기는 파란색이야. 왜 이럴 것 같니?”
“글쎄요. 담배 안에 들어간 성분 때문 아닌가요? 몸에 안 좋은 그 뭐더라~. 니코틴에 타르에~.”
역시 우리 아들, 말꼬리를 늘려가며 비아냥대는 폼이 만만치 않다. 난 철수의 반격을 피해 90년대 히트 드라마 주인공마냥 손가락을 살짝 흔들며 재빨리 대답했다.

“니코틴이나 타르에겐 색을 변하게 할 재주가 없어. 탄소 입자와 빛의 산란의 만남이 바로 주인공이지.”
“산란은 배운 적이 있어요. 빛이 구 형태의 작은 입자에 부딪혀서 여러 방향으로 반사되는 현상이죠?”
“(요즘 초등학교에서는 그런 것도 가르치나) 우리 철수 똑똑한데~. 우리가 보는 빛은 파장과 주파수가 다른 여러 색으로 이루어져 있어. 무지개가 여러 색으로 보이는 이유지. 빛의 산란은 주파수에 비례해. 붉은색이나 노란색은 파장이 긴 대신 주파수가 작고 파란색이나 보라색은 파장이 짧고 주파수는 크단다.”
“그럼 파란색이 붉은색보다 더 잘 산란되겠네요?”
“그렇지. 담배 연기에 있는 탄소 입자가 빛을 통과하면 파장이 짧은 파란색이나 보라색이 산란돼. 그래서 담배 연기는 파란색을 띤단다. 연기 안의 탄소입자 크기에 따라서 짙은 청보라색이나 아주 밝은 파란색을 띠는 경우도 있어.”
담배를 한 번 빨며 철수를 보고 싱긋 웃었더니 녀석은 손사래를 쳤다. 담배 냄새 난다는 사인이다. 최대한 먼 방향으로 연기를 내뿜으며 난 말을 이었다.

“빨리 피고 끌게. 그건 그렇고, 내가 뿜은 연기는 어떠니. 흰색이지?”
“앗. 정말 그러네요.”
“왜 이런 것 같아?”
“글쎄요. 니코틴이나 타르 같은 나~쁜 성분들이 몸에 다 흡수돼서가 아닐까요.”
이 녀석, 말에 뼈가 있다.

“몸에 빼앗겨서가 아니라 무얼 하나 더 달고 나온 탓이지. 담배 연기가 지나가는 기관지나 폐에는 수분이 많아. 이 수분은 탄소 입자를 핵으로 삼아서 아주 작은 물방울을 만들어내. 작다고는 해도 가시광선의 파장보다는 크기 때문에 모든 빛을 다 반사하지. 빛이 다 합쳐지면 하얗게 되지? 그래서 한 번 빨아들였다가 다시 뿜은 연기는 흰색이란다. 구름이 하얀 것도 같은 원리야.”
“우와. 아빠, 과학 선생님 같아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끄덕이는 철수를 보며 난 다시 우쭐한 기분이 됐다. 너무 우쭐한 나머지 담배가 다 타들어간 것도 몰랐다가 손을 델 뻔 했지만. 담배를 황급히 비벼 끄고 손가락을 호호 불다보니 철수의 표정이 다시 ‘아빠 한심’으로 바뀌었다. 잔소리를 시작하려는 듯 입을 여는 녀석을 보고 난 황급히 말을 꺼냈다.

“손가락은 괜찮으니 걱정마라. (‘걱정 안 해요’ 철수가 툴툴거렸다) 어쨌든! 이런 산란 현상은 우리 주변에서도 볼 수 있어. 대표적인 것이 하늘색!”
“아, 그건 저도 학교에서 배웠어요. 태양빛이 공기 중의 먼지나 작은 입자들 때문에 산란되죠. 이 가운데 파란색이 가장 산란되기 쉽기 때문에 우리 눈에 가장 잘 들어와요.”
“이야~ 우리 아들 만물박사! 대단해!”
박수를 치며 칭찬해주자 철수 녀석은 부끄러운지 “에이 참, 학교에서 배운 거라니까요”라며 고개를 숙였다. 이 녀석, 수줍음이 많은 건 날 닮았다니까.

“하지만 아침이나 저녁에는 붉게 물들잖니. 그건 왜 그럴까?”
“그것도 산란 때문! 이라고 말씀하시고 싶은 거죠? 저녁에는 산란되는 색이 바뀌는 건가요? 이유가 뭐죠?”
“낮에는 해가 머리 위에 있지만 아침과 저녁에는 지면 근처에 있어. 이때는 태양빛이 공기를 통과하는 거리가 길기 때문에 여기저기로 산란되는 파란색보다 산란되지 않고 직진하는 붉은색이 눈에 더 잘 보인단다. 노을이 아름다운 붉은색을 띠는 이유야.”
담배 한 대를 더 꺼내서 무심코 입에 물었다. 시선을 느껴 돌아보니 철수가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 고개를 붕붕 젓고 있다. 차마 불을 붙이지는 못 하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도시의 밤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봐. 지금 보는 하늘은 뿌연 붉은색이지? 저건 산란 때문에 일어난 ‘광공해’ 현상이야.”
“밤에도 산란이 일어나요? 해도 없는데?”
“하늘이 아니라 땅에 있는 불빛 때문이지. 밤에도 꺼지지 않는 도시의 빛이 하늘로 향하다가 공기 중의 먼지를 만나면 산란된단다. 이렇게 산란된 빛이 모여 만든 거대한 막은 수천~수억 년을 날아온 별빛을 희미하게 만들거나 아예 막아버려. 보통 대기오염 때문에 도시에서 별을 보기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광공해도 큰 몫을 한단다.”
어린 시절 고향집에서 본 밤하늘을 떠올리며 난 감상에 젖었다. 온갖 풀벌레 소리가 들리던 마당의 작은 평상. 시원한 수박을 먹고 드러누워 하늘을 빼곡하게 메운 별을 보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하나 없었는데…. 난 한숨을 내쉬며 담배에 다시 불을 붙였다. 이것만 피고 들어가야겠다.

“아빠, 오늘 정말 재미있었어요. 저도 답례로 중요한 거 하나 알려드릴게요. 사실 이거 말하려고 나왔던 거였는데, 아빠 얘기에 정신 팔리는 바람에….”
“에끼 이 녀석아, 날 핑계대면 안 되지. 어쨌든 고맙다~.”
“들으시면 별로 안 고마우실 건데…. 담배 안 끊으실 거면 아예 들어오시지 말래요! 엄마 전언!”
뭐, 뭐라고?! 망연자실한 날 남겨두고 철수 녀석은 “전 먼저 들어갈게요~”하며 쪼르륵 가버렸다. 그래. 생각해보니 담배 때문에 아내나 철수에게 계속 걱정만 끼친 것 같다. 이게 마지막 한 대다. 이후부턴 눈 딱 감고 끊는 거야! 광공해로 덮인 밤하늘에 파란 담배연기가 피어올랐다. 내 몸으로 들어갈 마지막 파란색이다. 내일 밤하늘엔 하얗게 반짝이는 별이 가득했으면 좋겠다. (글: 김은영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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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약속 기다리다가 서점에 잠깐 갔는데 '대무신왕기'라는 제목이 눈에 확! 박혔다.

사실, 바람의 나라가 아니었다면 대무신왕 무휼에 대해서 그토록 관심을 갖게 되지는 않았을 테지?

워낙에 알려진 내용들이 적다 보니 더 그렇다.

정말로 보고 싶은 책은 소설 바람의 나라인데, 이 책은 절판이다.  여러 곳 수소문했지만 결국 못 구했다.

 

 

 

 

딱 한 곳 있어서 결제하고 일주일을 기다렸는데, 재고파악의 실수였다고 이주 뒤에 환불 받은 기억도..ㅡㅡ;;;;;

관심의 곁가지로 대무신왕기에도 흠칫 눈길을 주었다.

10권짜리 책을 시작하는 통에 당분간 보기 힘들겠지만, 일단 눈도장을 찍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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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올리려고 하면 여기에 체크가 되어 있는데 이게 어떤 의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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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2007-06-15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블로그 유저로써 말씀드리자면...올블로그라는 블로그메타사이트가 있는데..
독립블로그들의 사용자가 신청을 해 놓으면 그 블로그에 올라온 글을 자동으로 수집하는 사이트입니다.. 올블로그 유저들이 많이 본 글은 더욱 눈에 띄는 페이지에 올라서 더 많은 방문자가 찾아오게 되구요... 예를 들면 기존서재의 '알라딘마을' 첫페이지라고 보시면 되요.
알라딘서재에서 새로 올라온 글이 쭉 뜨고.. 옆에 추천글이었나? 암튼 좀 더 눈에 띄는 쪽에 추천많이 받은 글이 계속 노출되어 있듯이..... 올블로그라는 사이트에서도 그런 식입니다.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올블로그에는 어느 사이트에 만든 블로그에 상관없이 자기가 등록만 하면 그곳에 뜨는 거구요. 서재2.0부턴 RSS발행과 트랙백기능이 추가되기 때문에..그곳에 등록할 수 있는데...이렇게 글 올릴때마다 기본으로 체크란이 있는 걸로 보아서 아마 제 생각으로는 다음블로그와 올블로그가 제휴하면서 기본체크되어 있듯이...알라딘과 올블로그도 제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Heⓔ 2007-06-15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암튼 한줄로 요약하면 올블로그에 발행체크하면...
알라딘 말고 다른 사이트(올블로그)에 자신의 글이 올라갑니다...

요새는 저도 올블로그에 잘 안 가서 새로 추가된 기능은 모르겠고...

암튼 이상으로 무명블로거의 부실한 댓글 마치겠습니다~

마노아 2007-06-15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홋, 그런 거군요. 그럼 굳이 체크를 해제하거나 부러 체크할 필요는 없이 내비둬도 되겠네요. 뭔가 하고 좀 걱정했거든요. 트랙백이 이 기능으로 필요한 거군요. 희님, 설명 고마워요. 궁금증이 풀렸어요^^

비로그인 2007-06-15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옷. 나도 궁금하던 차인데.희님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마노님,배경이 시원하고 상큼해졌는데요. 마노님과 어울립니다.

마노아 2007-06-15 13:25   좋아요 0 | URL
앗, 상큼합니까? 기분이 마구 좋아집니다^^
매일 밤 12시에 뭐로 바뀔까 새로 고침하는 재미가 제법 있어요~ ^^

비로그인 2007-06-15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안보내려고 해요 알라딘 글은 알라딘 내에서 소화하자는 생각 ^^

마노아 2007-06-15 13:26   좋아요 0 | URL
본인이 체크 해제를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지극히 개인적인 얘기는 저도 해제하려구요. 동네방네 소문은 싫어요..;;;;;
 

http://dory.mncast.com/mncHMovie.swf?movieID=10016770220070611123531&skinNum=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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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06-14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원시원하게 부른다!
 

* 한겨레 21에 쓴 글입니다.

 



 미국의 슈퍼맨은 지구를 구한다. 하지만 한국의 금나라(박신양)는 사채 빚에 시달리는 서민을 구한다. 물론 금나라는 하늘을 날지는 못한다. 그는 배가 고파 쓰레기를 뒤져 먹고, 돈을 돌려받기 위해 조폭들에게 얻어맞아 피투성이가 된다. 그러나, 금나라는 그렇게 몸을 굴려 신용불량자와 노숙자들이 드글거리는 '낮은 곳'으로 임하여 슈퍼맨도 해결 못할 사채 빚을 대신 갚는다. 엄밀히 말해 SBS <쩐의 전쟁>은 사채에 관한 드라마가 아니다. 사채 빚을 진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종의 '슈퍼 히어로'물이다. 잘나가던 펀드 매니저 금나라가 사채업자 마동포(이원종)에 의해 부모가 죽고, 전설적인 사채업자 독고철(신구)의 지도를 받아 뛰어난 능력의 사채업가 되는 과정은 곧 슈퍼 히어로의 탄생 과정과 일치하고, 육체적인 초능력은 없지만 악성 채무자에 대한 가짜 장례식을 치러 부조금을 받아 빚을 해결할 정도로 뛰어난 금나라의 두뇌와 조폭들의 폭력에 꺾이지 않는 불굴의 의지는 '사채업자 버전'의 초능력이다.




 그래서 <쩐의 전쟁>의 재미는 금나라가 자신의 개인사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뛰어난 능력으로 어떻게 '악당'들을 때려잡고, 서민들을 구하느냐에 있다. 매 회 사채 빚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구원하거나, 가진 자들에 맞서 싸우는 금나라의 활약상은 에피소드마다 문제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는 미국식 슈퍼 히어로물의 구성과 닮아 있다. <쩐의 전쟁>은 한국 드라마가 미국식 장르 드라마에 접근하는 또 다른 방법을 보여준다. MBC <히트>와 SBS <외과의사 봉달희> 등 일련의 전문직 장르 드라마는 설정의 디테일과 이를 뒷받침하는 전문성에 승부를 걸었다. 그래서 의사들은 더 이상 '병원에서 연애'하지 않고 병원에서 메스를 들 수 있었고, <히트>는 남녀 주인공의 멜로드라마보다 개성있는 캐릭터들이 땀을 흘려가며 증거를 수집하는 과정이 더욱 재미있었다. 반면 <쩐의 전쟁>은 사채업계의 디테일을 깊숙하게 파고들지 않는다. 금나라를 제외한 사채업자들이 돈을 돌려받는 방식은 폭력이나 신체 포기각서 등을 이용한 협박 밖에 없고, 조폭으로부터 돈을 돌려받기 위해 조폭에게 가짜 정부 요원을 등장시키는 설정은 현실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만화적이다.




 대신 <쩐의 전쟁>은 서민들과 떨어져 있는 전문직 대신 서민들 중에서도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진 사람을 내세워 그들에게 밀착, 서민과의 정서적 공감대를 끌어낸다. 노숙자 분장을 하고 거리를 굴러다니고, 쓰레기를 주워먹는 박신양의 연기가 화제가 되는 것은 단지 연기력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드라마가, 그리고 회 당 몇 천만원을 받는 톱스타가 지금 서민들이 가장 공포스러워하는 현실들을 보여준다는데 있다. 언제 어떻게 금나라처럼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공포감을 가진 서민의 정서가 몸을 사리지 않는 박신양의 연기를 통해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 시청자들은 금나라가 독고철에게 얼마 안되는 시간동안 수업을 받고 곧바로 초인적인 사채업자가 된 것에 대한 현실성을 따지는 대신, 박신양에게 감정 이입 돼 그가 여러 사람을 구원하는 과정을 응원하기 시작한다. 이는 한국 드라마의 '대중성'의 기준에 대한 흥미로운 변화다. 같은 시간대에 방영하는 MBC <메리 대구 공방전> 역시 돈 없는 청년 실업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러나, <메리 대구 공방전>은 그 백수의 시절을 그들이 다음 단계로 발전하기 위한 유쾌한 시간으로 바라보고, 상식을 뛰어넘는 재치있는 대사와 상황 설정으로 그려낸다. 그것은 <메리 대구 공방전>이 다른 한국 드라마와 차별화되는 빛나는 부분이지만, 지금 다수의 시청자들이 선택한 것은 백수의 즐거운 언어유희대신 신용카드로 자기 손목을 긋고, 금나라가 동생에게 "돈 벌어서 반드시 구해줄께"라고 말하는 독하고 절절한 정서다. 드라마에서 지금까지 좀처럼 드러나지 않았던 '밑바닥'의 정서가 공중파 드라마에 등장한 것이다.




 <쩐의 전쟁>의 원작이 되는 동명의 만화도 대본소 만화를 주로 작업하던 박인권 작가가 스포츠 신문을 통해 발표한 작품이었다. 대본소와 스포츠 신문에서 남성들을 상대로 펼쳐지던 거칠고 질퍽거리던 세계가 공중파 드라마로 치고 올라온 것이다. <쩐의 전쟁>에서 조폭이나 어쩔 수 없이 돈을 빌릴 수 밖에 없었던 서주희(박진희)를 제외하고 금나라가 돈을 돌려받는 사람들이 구걸로 돈을 벌며 사채 빚은 일부러 갚지 않는 거지, 명품에 중독된 여성 등 서민의 시선에서 '얄미워' 보이는 유형의 사람들이라는 점은 <쩐의 전쟁>이 누구의 시선에 초점을 맞추었는지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쩐의 전쟁>이 6회만에 시청률 30%를 넘기는 인기를 모으고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그것은 시청자들, 더 넓게는 한국인의 정서가 지금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보여주는 증거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대중은 강남의 고급 의류 매장에서 마음껏 옷을 갈아입는 신데렐라를 꿈꾸는 재벌 2세의 이야기를 지나, 이제 그들을 구원해줄 '사채 히어로'의 등장에 열광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쩐의 전쟁>의 대중성을 돕는 요소지만, 반대로 <쩐의 전쟁>의 완성도를 저해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원작의 금나라는 가난한 사람을 구제해주는 슈퍼 히어로라기 보다는 기발한 방법으로 돈을 돌려받는 피도 눈물도 없는 비정함이 더 돋보이는 캐릭터였다. 반면 공중파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 금나라는 자신이 사채 업자라는 사실 자체에 대해 고민할 수 밖에 없는 '착한 사람'이다. 그래서 금나라는 사채 빚에 시달리는 사람을 구해주려면 사채업자가 돼야 하는 딜레마를 가지고 있다. 이 현실적인 딜레마는 금나라가 사채 빚에 시달리는 채무자들을 멋지게 구해주는 비현실적인 쾌감과 상충된다. 그래서 <쩐의 전쟁>은 금나라의 고민을 깊게 다루는 대신 금나라가 해결하는 개별적인 에피소드에 초점을 맞추고, 금나라에게 돈을 갚도록 요구하는 악덕 사채업자도 현실적인 위협을 가하기 보다는 가끔씩 나타나 폭력을 휘두르는 존재 정도로 묘사한다. 그래서 개별적인 에피소드는 흥미롭지만 드라마 전체에 흐르는 캐릭터의 스토리는 힘이 약하고, 금나라와 라이벌 관계를 이루는 하우성(신동욱)은 금나라와 대립하는 장면 외에는 자체적인 생명력을 갖지 못하고 작품에서 겉돈다.




 <쩐의 전쟁>은 사채업에 대한 유혹에 흔들릴 수 밖에 없는 요즘 서민들의 고단함을 드라마에 끌고 와서 성공했지만, 사채업의 현실을 단순화시켜 '정의로운 사채업자'를 정당화 시킨다는 점에서 조폭을 미화시켰던 기존의 조폭 코미디가 가진 한계를 넘어서지는 못한다. 과연 한국 드라마는 이 한국적인 '사채 히어로'를 통해 단순한 분풀이성 쾌감을 제시하는 것을 넘어 지금 한국의 '처절한' 현실을 반영하는데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




글 : 강명석(lennonej@freech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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