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젊은 날의 숲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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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해인가 김훈의 책으로 새해를 연 적이 있었다. 꽤 오래 전에 나왔던 그 책은 무척 어렵고 무거웠다. 한 권을 다 읽어내면서 숨이 가빴다. 그리고 그 해는 대체로 독서가 느리고 버거웠다. 그게 김훈 탓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나는 꼭 김훈 탓 같았다. 그래서 새해 처음 잡는 책은 지나치게 무겁지 않은 책으로 고르려고 한다. 이 책은 12월 초에 한 번 잡았었다. 절반 쯤 읽다가 잠시 덮어두었다. 답답했기 때문이다. 칼의 노래를 읽고 나서 빗살무늬 토기의 추억을 읽었더니 두 주인공이 똑같이 이순신의 목소리를 냈다. 이순신으로 느끼게 되는 김훈의 목소리였다.   

공기가 무거워서 꽃잎은 축축했고, 가벼운 것의 예기를 뿜어내지 않았다. 꽃잎에 이슬을 매단 채 아침햇살을 받으면 패랭이꽃은 이파리 끝까지 긴장하면서, 쟁쟁쟁 소리가 날 듯한 기운을 뿜어내는데, 흐린 날 아침에 꽃은 긴장하지 않았다. -163쪽


이 책의 주인공은 29살의 처녀다. 하지만 모든 목소리가 여전히 중후한 김훈의 것으로 들린다. 그 불협화음과 부조화를 견디기 힘들었다. 이런 느낌은 그 동안도 줄곧 느껴왔지만 주인공의 연령대와 성격이 크게 차별화되지 않아서 지나갈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몹시 반감을 느끼고 말았다. 이번 주인공도 과묵한 편이고 제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인물이니 '성격' 자체야 뭐라고 할 수 없는 부분인데도 캐릭터에 대한 몰입이 현저히 떨어졌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김훈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을 거둘 때가, 기어이 오고 만 것이다. 

김훈이라는 이름에서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문체와 문장이다. 그의 간결한 문체는 권위가 있어 보였고 근사한 무게감이 있었다. 그런데 오래 접하다 보니 이것도 지겨워진다. 작가 스스로도 매너리즘을 혹시 느끼지는 않는지 궁금하다.  

나는 어머니의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대답할 필요가 없고, 대답할 도리가 없는 말이었다. 대답을 할 수는 없었지만, 거기나 여기가 다 마찬가지라니, 어머니의 마음속에서 그 양쪽이 모두 다 위로받기를 나는 바랐지만, 거기나 여기가 다 마찬가지이므로 양쪽 모두가 더욱 쓸쓸해지는 것이나 아닌지를 생각하면서 나는 밥을 물에 말아서 넘겼다. -16쪽 

길고 긴 문장이었지만 내용은 하나다. 결국엔 문장의 구조만 바꿔놓은 동어 반복이다.  

거기서 북쪽으로 방향을 꺾자, 아득히 흐리고 빈 공간이 펼쳐졌다. 자동차가 단 한 번 우회전함으로써 그렇게 아무것도 들어서지 않은 막막한 세상이 전개될 수 있었다. 내가 면접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이 네거리에서 서울 쪽의 익숙한 일상을 향하여 좌회전할 때, 그때 내 앞에 전개되는 공간 또한 저렇게 아득할 수밖에 없겠지만, 익숙한 아득함은 익숙해서 아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좌회전과 우회전은 별 차이 없을 터이지만, 나는 한 번의 우회전으로 낯선 아득함을 향하고 있었다. -55쪽 

앞에 찾아놓은 문장과 똑같은 기분을 느끼게 한다. 앞으로 나아갔으면 하는데 하나마나한 똑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자꾸 멈칫거린다. 그게 숨이 막혔다. 여전히 범접하기 힘든 아우라를 뿜으며 멋진 문장을 곳곳에 배치하지만 이제는 그 문장들에 현혹되지가 않는다. 그보다는 이야기의 힘을 보고 싶었다. 그런데 이야기도 나를 끌어당기지 못했다.  1인칭 시점이 줄 수 있는 어떤 매력과 흡인력을 잘 살리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 '나'의 아버지는 하급 공무원으로 임직 중에 무수한 비리를 저질러 재물을 축적한 것이 발각되어 구속되었다. 아버지는 자신이 상납한 상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혼자 죄값을 치렀다. 엄마와 딸은 아버지를 견디기 힘들어 했고, 오욕을 느꼈다. 아버지가 원치 않기도 했지만 가족들은 옥바라지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무책임해 보였고 비겁해 보였다. 엄마는 가석방된 아버지가 머물 아파트를 따로 구입했다. 이혼을 한 것은 아니지만 이혼과 별반 다르지 않은 거주형태였다. 아비는 옥에서 병을 얻어 나왔고, 어미는 간병인만 붙였다. 밤이 되면 잠이 오지 않는다고 멀리서 근무하는 딸에게 전화해서 징징대는 엄마였고, 그것을 진저리나게 싫어하지만 성질은 내지 않는 딸의 건조한 대꾸가 오래도록 이어진다. 이들의 행보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도 별로 변하지 않는다.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가족들이 있을 수 있는 거지만 마주치자니 화가 났다.  

자폐아를 두고 있는 자신도 한때 자폐아였던 안요한 실장은 주인공 '나'처럼 생기가 없었다. 너무 정적이어서 그 고요함이 독자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군 제대를 앞두고 있던 김중위가 그나마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가장 역동적인 인물이었다. 그래봤자 군인이기 때문에 행동반경과 행동의 표정이 한정되어 있지만... 

주인공 '나'는 세밀화를 그리는 화가인데 그녀의 입을 빌려 수목원의 나무와 벌레와, 한국전쟁의 흔적으로 발견된 뼛조각 등을 집중해서 설명한다. 그것은 두 계절 동안 여행을 다니면서 그것들을 관찰한 김훈의 눈과 입의 투영이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작가는 '내 젊은 날의 숲'을 열심히 말했겠지만, 내게는 잘 들리지 않았다. 들렸다 하더라도 별 의미가 없었다. '사랑'이나 '희망'같은 단어를 써보지 않았다는 작가. 그 부재와 결핍 때문이었을까. 독자가 읽는 내내 이리 답답하고 죽은 느낌이 들었던 것은...  

일신상조회의 조기는 빈소 맨 앞에 걸렸고 유흥업소 주인들이 보낸 조화가 그 옆으로 진열되었다. 최국장은 일신상조회가 걷어 모은 조의금 봉투를 누워 있는 어머니에게 전했고, 어머니는 돈봉투를 받아서 나에게 내밀었다. 아버지는 죽어서도 출소하지 못했고, 죽어서도 형을 면제받지 못하고 있었다.-328쪽 

죽어서도 출소하지 못하고 죽어서까지도 형을 면제받지 못하는 아버지의 죄업. 살아있는 인간이 모두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잠시 생각했다. 그 연결 고리에 적을 두고 있는 우리들이기에 사랑이나 희망같은 단어는 언감생신인 것일까.  

작가에겐 스타일이 있는 것이고 추구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독자가 감놔라 배놔라 할 수는 없는 노릇. 이제 김훈과는 잠시 거리가 필요하다. 여전히 새 작품이 나오면 눈을 반짝이며 잠시 달뜬 기분을 느끼겠지만, 과도한 기대치로 괜히 실망을 갖지는 말아야겠다고 다독여 본다. 공무도하에 이어 이번 작품은 나에게는 좋은 궁합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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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0-12-31 0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시 거리가 필요하다는 님의 말 수긍이 가는 걸요.

저는 김탁환도 그렇고 김훈도 그렇고...요즘 좀 우울했거든요.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들은 묵묵히 그대로 있는데, 우리가 변한 것 같기도 해요~ㅠ.ㅠ

마노아 2010-12-31 10:22   좋아요 0 | URL
저는 최근에 파울로 코엘료와 이제 김훈까지, 애정 전선을 좀 점검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김탁확은 사실 예전에 버린..;;; ㅎㅎㅎ
김탁환도 나오면 궁금하긴 한데 읽고 나서 역시... 이렇게 되곤 하거든요.
젊은 피의 공급이 필요해요. 우리 우울해 하지 마요!(>_<)

후애(厚愛) 2010-12-31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내년에 읽으려고요.
그러고보니 한국은 내년이 내일이군요.
해피 뉴 이어~~~ ^^

마노아 2010-12-31 10:23   좋아요 0 | URL
후애 님도 해피 뉴 이어~!
하루도 채 남지 않은 2010년이라니, 어쩐지 막 뭉클해요.^^

마녀고양이 2010-12-31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입니다.

김훈님의 신작으로 벌써 리뷰를 여러개 읽었네요. 읽을수록
아... 이번 작품은 보지 말아야겠어 라고 생각되니.. ㅎㅎ.
답답하고 죽은 느낌이라... 이그.

마노아 2010-12-31 10:24   좋아요 0 | URL
그래도 평점들은 엄청 좋더라구요. 저도 뭐 별점은 네 개지만..^^;;
공무도하에서 주춤거렸던 것이 이번 작품으로 제동이 걸렸어요.
역시 좀 서로 거리를 둬야 애정이 회복될 것 같아요.^^ㅎㅎㅎ
 
내 젊은 날의 숲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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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는 사십칠 일간 계속되었다. 이십 일째부터 신병들이 투입되었는데, 칠 일 이상 살아 있으면 고참병이 되었다. 대원이 다섯 명 남은 중대장에게 연대장은 고지를 가리키며 명령했다. "돌격하라우!"
시화평 전투는 쌍방이 모두 손실을 돌보지 않고, 죽음으로써 삶을 제거하고 죽임으로써 죽음을 갚는 무한소모전이었는데, 그 전략적 득실관계는 지금 분석이 불가능하다고 유해발굴단장 강중령은 전사戰史에 썼다.-150쪽

여름의 숲은 크고 깊게 숨쉬었다. 나무들의 들숨은 땅속의 먼 뿌리 끝까지 닿았고 날숨은 온 산맥에서 출렁거렸다. 뜨거운 습기에 흔들려서 산맥의 사면은 살아 있는 짐승의 옆구리처럼 오르내렸고 나무들의 숨이 산의 숨에 포개졌다.
소나기는 산맥의 먼 끝자락부터 훑으며 다가왔다. 소나기가 쏟아질 때 안으로 눌려 있던 숲의 날숨이 비가 그치면 골짜기에 가득 차서 바람에 실려왔다. 비가 그친 한낮에 어린 벚나무 숲의 바람은 가늘고 달았다. 비가 그치고 해가 내리쪼이면, 잎이 넓은 떡갈나무숲의 바닥에는 빛들이 덩어리로 뭉쳐서 훝어져 있었고, 뭉쳐진 빛들의 조각이 바람에 흔들리는 잎그림자 사이를 떠다녔다.-177쪽

아이들에게도, 그들 나이의 고유한 더러움이 있다. 어른에게서 옮겨온 더러움도 있을 테지만, 아이들에게 자생적인 더러움이 있는 것이다. 그 더러움은 원색적이고 본래적인 것이어서 어른들의 더러움보다 훨씬 더 가여웠다.
(...)
-너네 집 몇평이니?
-우리 집 서른네 평이야.
-뭐? 우리 아빠가 너네 아빠보다 더 높은데, 왜 너네 집이 더 커?
-너네 아빠는 높아도 돈은 못 버니까 너네 집이 작은 거야.
-우리 아빠한테 일러서, 너네 아빠 혼내줄 거야. 너네 집도 뺏을 거야.-2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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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엔 볼 일이 있어 종로에 나갔다가 반디 서점에 들렀다. 추워서 안쪽을 서성이다가 동화를 몇 권 읽었다. 

 

 

 

 

 

 

책 읽는 여우도 나오고 도서관에 간 사자도 나오고, 책을 소재로 한 많은 이야기들이 탄생되고 있으니 책청소부도 마냥 생소하지는 않다. 하지만 소재가 재밌다고 해서 이야기도 재밌는 것은 아니다. 기대에 전혀 부응하지 못했다.  

그림이 인상적인 '너를 만나 행복해'는 이야기가 몹시 단순하다. 꽤 따뜻한 이야기지만 역시 기대치가 있어서 확 매력을 느끼지는 못했다.  

밥 한그릇 뚝딱!은 편식하지 말라는 의미로 만든 책인지... 그래서 추천도서인지는 모르겠다만, 그림이 너무 징그러웠다. 밥알마다 눈이 있는데 벌레 같아 보여서 식겁했다. 똑같이 음식에 얼굴이 있어도 김영진 작가의 그림은 징그럽지 않고 귀여웠는데 말이다.ㅜ.ㅜ 최인선 작가의 만화가 생각나는 그림체였다. 으... 

내 토끼가 또 사라졌어!는 '내 토끼 어딨어?'의 후속편인데 전편과 마찬가지로 재미와 감동을 준다. 성숙해진 아이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선물이 되어주는 이야기 구조가 마음에 들었다. 따뜻한 이야기다.  

화요일에는 저녁 약속이 있었는데 광화문에서 볼 일이 있어서 나간 김에 씨네큐브에서 영화를 봤다.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  

일랴 레핀의 '맨발의 톨스토이' 그림에서 보았던 톨스토이와 똑같은 모습의 톨스토이가 화면에 나온다. 어쩐지 반가웠다. 백작이라는 신분적 특권을 내려놓고 사유재산을 부정하며 자연인으로 살려고 했던 인물. 부인과의 마찰은 당연지사다. 자식들도 아버지를 지지하는 이와 어머니를 지지하는 이로 나뉠 수밖에 없다. 백작 부인 역을 헬렌 미렌이 했는데 '더 퀸'의 그 고고한 여왕님과는 180도 다른 모습의 연기를 볼 수 있었다. 역시 베테랑! 속물이기는 하더라도 사랑에 솔직했던 백작 부인이 톨스토이를 앞세워 목적을 달성하려고 애쓰는 체르트코프의 가식보다 훨씬 인간미 있었다. 숭고한 이상을 앞세우며 인간에 대한 기본 예의조차 지키지 않는 모습을 보자니 갑갑했다. 내 왼쪽의 커플은 너무 떠들었고, 오른쪽에 앉은 아주머니는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내내 코를 골며 주무셨다. 아, 난감하여라.... 

저녁에는 합정으로 넘어가서 나의 야곱을 만났다. 11월에 잠깐 만나 밥만 먹고 헤어졌는데 모처럼 길게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예전에는 내가 술을 전혀 먹지 않아서 야곱은 맥주를 마시고 나는 차를 마실 수 있는 곳을 찾느라 무지 애를 먹었는데 이젠 둘 다 맥주를 즐길 수 있는 곳에서 만날 수 있어 추위를 덜 타도 되었다. 아는 사람이 운영한다는 북 카페를 갔는데 문학과 지성사 팀이 행사 진행 중이어서 홍대 쪽으로 나와 흔한 호프집에 들어갔다. 오, 나는 지난 주에 마신 맥주 500ml가 내 인생 최고로 많이 마신 맥주였는데 이날 모두 합해서 1,330ml를 마셨다. 호가든하고 생맥주 합해서. 우리가 시간이 더 있었다면 좀더 마셨을 것 같은데 12시에 털고 일어났다. 알고 지낸지 10년 만에 술잔으로 건배했다. 다음엔 피쳐로 시키자고 약속했다.^^

야곱이 내게 전해준 멋진 책들은 아주 묵직했다. 내가 배낭 메고 가서 전해주고 온 무게만큼 다시 지고 돌아왔다. 우린 매번 그런다.  

 

 

 

 

다음 약속은 1월인데 그때 들고 나갈 책 목록도 이미 생각해 두었다. 그 중 하나가 더블. 창비 어린이 정기 구독을 하는 동안에 40% 할인을 받았는데 며칠 전까지 유지되던 나의 40% 할인이 끝났다. 박민규 더블을 하나 더 사려고 했는데 그것 때문에 정기 구독을 연장해야 하나 고민 중이다. 정기 구독 연장은 3만원이고, 더블은 알라딘에서 사도 마일리지 빼면 대략 2만원인데.. 흐음.. 좀 더 고민을... 

수요일은 오래 전에 예매해 둔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를 보았다. 잠실 샤롯데 씨어터. 수요일 낮 공연이어서 할인을 받았고 좌석도 가장 낮은 등급의 A석이었는데 익숙한 내용인지라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다만 내 왼쪽의 모녀는 늦게 입장해서는 떠들고, 나중에 핸드폰까지 받아버려서 역시 식겁... 

2006년도에 처음으로 지킬앤하이드를 보았다. 류정한, 소냐, 김소현 주인공. 

그 다음엔 2008년도던가? 류정한, 김선영, 김소현 버전으로. 

그래서 이번엔 홍광호 버전으로 예매했는데, 김소현이 독감에 걸려 조정은으로 급하게 바꼈다. 루씨는 선민. 

홍광호는 스위니 토드에서 처음 보았고, 선덕여왕 ost로 기대를 모았던 배우다. 그런데 상당히 아쉬운 캐스팅이었다. 일단, 연기가 좀 안 된다. 지킬앤하이드는 잘만 소화하면 대박 스타가 될 수 있는 좋은 역할인데 1인 2역을 소화해야 하므로 꽤 연기력을 요한다. 노래만 하면 괜찮은데 대사를 잘 소화하질 못했다. 무엇보다 압도적인 카리스마가 부족했다. 조승우의 안정된 연기와 류정한의 카리스마에 익숙했던 나로서는 지나치게 아쉬운 지킬이었다. 그나마 가장 유명한 '지금 이 순간'을 부를 때 무리한 애드립으로 역시 실망실망...  

김소현은 다른 건 몰라도 '엠마' 역에는 딱인 배우였다. 그녀가 나오는 다른 뮤지컬에서는 맘에 들지 않을 때가 곧잘 있었지만 지킬-에서만큼은 딱 엠마 그 자체였는데 애석하게 배우가 교체되었고... 조정은 배우는 전혀 성에 안 찼다. 

오히려 너무 강렬한 소냐 덕분에 김선영 루씨도 별로였던 터라 전혀 기대를 모으지 않았던 선민 배우가 아주 열연을 해줬다. 소냐보다 잘 부르진 않았지만 김선영 버전보다도 훨 나았고, 무엇보다도 예뻤다. ㅎㅎㅎ 

잠실까지는 너무 멀었고, 2부 시작하고는 졸음을 참느라 애먹었다. 초등 아이를 데리고 온 엄마들이 종종 보였는데 사람 죽이는 장면이 여러 차례 나오는 이 뮤지컬은 아이들에게 조금 그렇지 않나? 내 왼쪽의 아이도 번개 치는 장면에서 엄청 크게 비명을 질러서 그 소리에 더 놀라고 말았다. 아이가 초등 저학년 쯤으로 보이던데 스릴러 장르는 좀... 

수영 강습 시간이 빠듯해서 포토존에서 사진 한 장 못 찍고, 프로그램 구경도 못하고 바로 뛰쳐나왔다. 정작 셔틀 버스가 늦게 와서 저녁도 굶고 기진맥진 재차 기다려야 했지만... 

집에 돌아와보니 택배가 한 상자 도착해 있다. 어제는 보리 특집이었는데 오늘은 문학동네 특집. 

 

 

 

 

역사 만화는 이제 슬슬 역사 공부 시작할 때인 큰 조카에게 맞춤형 책이다. 게다가 아이가 좋아하는 그림체. 알라딘 산타님 덕분에 이모는 또 생색낼 수 있게 됐다. 그밖에 다양한 소설과 만화 등등, 푸짐한 만찬 선물이 되어버렸다. 어이쿠, 과한 선물에 잠시 몸둘 바를 모르겠다.('' )( '') 이매지님 고마워요, 책 맛있게 읽을게요. ^^ 

 

지난 주에 이어 이번주까지 엄청 바쁘게 놀았다. 송년회라는 이름을 굳이 붙이지 않아도 꼭 보고 싶었던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한 시간이었다. 이제 이틀도 채 남지 않은 2010년을 차분하게 마무리 해야 하는데 스케줄이 조금 더 있는 것도 가....같고...;;; 

하여간! 2010년의 끝자락에서도 좋은 사람들의 따뜻한 온기가 마음으로 전해진다. 날씨는 찬바람 쌩쌩이지만 나누는 마음의 온도는 언제나 섭씨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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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30 0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30 0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sslmo 2010-12-30 0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톨스토이의 마지막인생, 헬렌 미렌이 나온다고 해서 저도 눈독 들이고 있었는데...
한팀은 시끄럽고, 한팀은 코골고... 저 봐도 되는 건가요?

님의 페이퍼만 봐도 덩달아 따뜻해지는 걸요~^^

마노아 2010-12-30 01:54   좋아요 0 | URL
뮤지컬도 영화도, 자리 운이 좀 안 따라 줬어요.^^;;;
양철나무꾼님은 좋은 자리에서 꼭 재밌게 보셔요~
날이 너무 추워졌으니 우리 마음은 보다 따뜻해야만 해요.^^

귀를기울이면 2010-12-30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셀카로 찍은 '나의 하루'를 보는 것 같네요.^^ 책과 영화와 공연으로 가득한 서재.. 부럽습니다~~

마노아 2010-12-30 19:27   좋아요 0 | URL
백수가 되면 시간이 많아지기 때문에, 이런 나날도 연출됩니다. 반은 좋고 반은 좋지 않아요.^^;;;

비로그인 2010-12-30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헬렌 미렌과 바네사 레드그레이브를 보면, 늙는 게 꼭 나쁘지만도, 불행하지도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은 늘 그들 자신이었으니까요.

마노아 2010-12-30 19:29   좋아요 0 | URL
오오오, 정말 근사하게 나이 드신 배우 분들이지요. 늘 그들 자신이었던 사람들, 멋진 표현이에요. Jude님 다워요.^^

마그 2010-12-30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저도 지킬 보고 왔는데. 저는 홍지킬이 젤 좋던데..노래를 잘해서 ㅋㅋ
저랑 같이 본 사람이 노래와 목소리에 포인트를 두고 배우를 고르거든요. 조승우가 참... 연기 잘하고.
류배우께서도 연기되고 목소리 되시고... 그러고 보니 홍광호가 딸리는군요.
여튼. 저는 김소현이 너무싫어요 - - ;;; 노래못하고 연기못한다고 봄.
같은 걸 보고도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들~ 인가효~ ^^
그래도 즐거우셨겠어요. 저도.. 내년에 한번 다시 예매를 시도 하려구요. ㅋㅋ

마노아 2010-12-30 19:32   좋아요 0 | URL
연기는 조승우가 가장 안정된 것 같은데 노래가 약하고, 홍광호는 현재 연기가 많이 약하고, 지금은 류지킬이 가장 나은 것 같아요.^^ㅎㅎㅎ
김소현은 인물 때문인지 늘 주역인데 마음에 드는 역이 없었어요. 어제 조정은 엠마에서 실망을 많이 해서 엠마는 김소현이 낫구나 결론 지었지요. ㅎㅎㅎ
지킬앤하이드는 그래도 자주 볼 수 있는 편이어서 기뻐요.
해마다 가격이 갱신되는 게 불만이긴 해도요.^^

다락방 2010-12-30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읽고 나니 저 영화보러 가고 싶어졌어요. 영화 검색 좀 해봐야겠네요. :)

마노아 2010-12-30 19:32   좋아요 0 | URL
오늘 황해와 해리포터를 보았어요. 너무 오래 앉아 있어서 지금 허리가 뽀사질 것 같아요.ㅜ.ㅜ

2010-12-30 11: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30 19: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스탕 2010-12-30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발 날리는 중에 봄을 보시고 느끼셨으니 얼마나 뿌듯하세요!
내년엔 부디 술이 느는 한 해가 되시길. 흐흐흐~~~

마노아 2010-12-30 19:36   좋아요 0 | URL
밤새 함박눈이 내렸는데 낮에 해가 뜨면서 모두 녹았어요.
오늘 극장에서 나쵸와 맥주를 파는 것을 보고 오홋! 했답니다.^^ㅎㅎㅎ

마녀고양이 2010-12-30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마노아님 진짜 알찬 문화 생활을 즐기고 계시네요.
부럽부럽... 오늘 저는 과부인지라, 혼자 광화문의 전시회를 봐야겠다고 맘 먹고 있었는데
무지하게 춥다지요? 코 끝 한번 베란다 밖으로 내밀고... 그냥 쏙 들어왔습니다. ㅋ

마노아 2010-12-30 19:37   좋아요 0 | URL
오늘 추울 줄 알았는데 엄청 포근했어요. 해지니까 바람이 불었는데 낮에는 해 쨍쨍이어서 눈도 다 녹았지 뭐예요. 모처럼 자유부인이었는데 아쉬워요!

순오기 2010-12-30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특별시민이 부러운 이유는 바로 이런 문화생활 때문에~~
게다가 한겨울에 봄이라니~~~~~~~~왠지 흐뭇해지는 페이퍼!^^

마노아 2010-12-30 19:37   좋아요 0 | URL
이럴 때면 특별시가 실감 나긴 해요.^^;;
근데 과도한 문화생활이 건강에 적신호를 알려요.
지금 허리가 무지 아프답니다. 으하하핫^^

순오기 2010-12-30 22:22   좋아요 0 | URL
오잉~~~~따끈하게 지지고 자면 좀 좋아지지 않을까요?
광주도 종일 눈이 와서 엄청 쌓였는데, 방콕모드라 가늠이 안돼요.
심야에 쓰리데이즈 보러가면서 확인하려고요~~~ ^^

마노아 2010-12-31 00:14   좋아요 0 | URL
조조 영화를 보고 왔는데 집에 고모가 오신다고 해서 도망 나가느라 다시 영화를 예매했어요.
근데 시간을 잘못 알고 나가서 2시간 대기하고 2시간 반을 영화를 봤더니 허리가 너무 아픈 거예요.
게다가 생리통도 겹치고요. 으으... 정말 따끈하게 지지고 자야겠어요.^^;;;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 2 - 개정판
정은궐 지음 / 파란(파란미디어)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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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이 상콤 발랄했다면 2권은 긴장긴장 화르륵 활활~이었달까. 사람들이 드라마에서 아쉬워한 부분이 2권의 이 숨막히는 긴장감과 찐한 러브러브 장면이 아니었나 감히 짐작해 본다.  

드라마에서는 금등지사 이야기가 추가되면서 미스테리한 부분이 있었고, 이선준과 문재신, 그리고 윤희네 집안의 중첩된 은원 관계가 크게 자리했었다. 원작에서는 금등지사 이야기가 없고, 좌의정이나 병판이 등장은 하되 그리 무게감도 없어서 캐릭터도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그래서 걸오와 대사헌의 갈등은 드라마 쪽이 더 울림이 컸다.  

장치기 놀이는 소설 쪽이 훨씬 이야깃거리가 많았다. 여림이 단순히 옷버리기 싫어서 흙묻히기 싫어하는 위인이 아니라, 정말 운동에는 아무 소질이 없고 심지어 대물보다도 동재에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런데 대물과 여림 덕분에 기생들의 응원이 장난 아니게 되자 동재생들이 경기에 져도 좋으니 가랑이나 걸오 말고 대물과 여림을 달랠 걸... 하고 후회하는 장면이 재밌었다. 혈기왕성한 유생들의 거친 경기로 임금 앞에선 대사성은 안절부절이지만 임금의 말은 태평하다.  피 흘리는 당파싸움보단 철 있는 짓이라는 게 임금의 생각. 왜 아니겠는가. 이 정도면 훠얼씬 공정한 경기니까. 축국과 장치기, 게다가 줄다리기까지 진행되었는데, 마지막 줄다리기에는 임금도 직접 참가했다. 한쪽 팔을 쓰지 못하는 이선준 대신이었다. 임금이 동재 편에 서니 소론과 남인 편을 드는 것 같고, 이선준 대신 들어갔으니 노론 편을 드는 것도 같고... 확실히 한 번의 행보로 두 마리 토끼를 잡아채는 임금의 솜씨 답다. 임금이 상대 편에 있으니 서재 유생들이 난감할 법 하지만 일부러 져주는 일만 없으면 최고의 시합이 될 수 있다는 이선준의 명대답이 마음에 든다. 그 덕분에 대물 윤희가 맘 고생을 좀 했지만... 

시청자들은 걸오앓이를 했지만, 사실 걸오는 윤희 앓이를 제대로 했다. 내가 드라마에서 이선준 캐릭터를 더 좋아한 것에 비해 원작 소설에서는 걸오가 더 마음에 들었다. 거친 사내지만 배려가 늘 깔려 있었다. 창으로 윤희를 꺼내어서 맨발이 된 그녀에게 자기 신발부터 내민 장면이나, 말복 더위를 식히려 단체로 계곡에 갔을 때 여기저기서 술 권할까 봐 으름장으로 그녀를 지켜준 장면 등등 말이다. 가끔 이선준과의 사이를 알기에 질투를 섞어 둘만의 시간을 방해하기도 했지만, 그런 것도 없이 해바라기한다면 그건 걸오가 아니라 여림이지...  

여림 캐릭터도 참 안쓰럽다. 드라마에서는 그의 그늘이 신분을 숨긴 것에 대한 자격지심 정도인데, 원작에서 그의 가장 큰 가시는 마음 속 깊이 자리한 정인 때문이다. 이미 결혼도 했지만 우정같은 사이이고. 그의 마음에는 가질 수 없는 사람이 들어 있다. 설마 설마 했는데 그게 진짜 그 사람일 줄이야. 그 마음을 적절히 드러내면서 그 사람 곁을 떠나지 않는 방법이란, 지금의 그 과장되고 헤픈 캐릭터여야만 했던 것이다. 여림의 속내를 알고 나니 이 책이 얼마나 여자들의 입맛에 맞춤되어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이런저런 설정들은 대체로 여자들한테 먹히고 들어가는 것들이어서 말이다. 드라마 용은 결코 될 수 없는 설정들... 

지금의 우리나라에서도 동성애는 기피되고 마는데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에 동성을 사랑하는 이야기는 당연히 위험하다. 남색 소동은 꽤 긴장감을 주는 이야기였는데 계곡에서 이선준이 자신이 사랑한 사람이 남자 김윤식이 아니라 여자 김윤희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장면만큼의 흥분을 주지는 못했다. 드라마에서 단순히 물에 빠져서 젖은 옷을 벗겨주려다가 알아차리는 장면은 너무너무 심심한 표현이었던 것이다. 이 장면을 읽을 때 나는 크리스마스 콘서트를 보려고 객석에 앉아 있을 때였는데 얼굴이 후끈거려서 그 추운 날에 볼빨간이 되고 말았다.  

수면 아래에는 세상이 없었다. 세상이 없으니 윤리도 없었다. 그 좁은 곳에는 두 사람만이 있었다. 겹쳐진 입술과 입술만이 있었다. 차가운 물속에 잠겼어도 서로의 입술은 따뜻하였다. -198쪽 

이 부분은 아직 이선준이 윤희가 여자라는 것을 모를 때다. 물속에서 충동적으로 입술을 훔쳤을 뿐이다. 이제 자신의 감정을 더 이상 속일 수 없게 된 그는 성균관을 나갈 것이라 말한다. 윤희는 그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을 한다. 그가 대답한다. 

"귀공에게는 잘못하지 않았소. 허나 귀공을 제외한 모든 세상에 나는 잘못하였소."-200쪽 

상대를 남자로 알고 있는 그가 자신이 사랑하는 감정에는 잘못이 없다고 말을 한다. 그 사랑만큼은 진실이라고 얘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성을 사랑하는 것을 인정받지 못할 세상에 그는 죄인이라고 고백한다. 윤희가 어찌 그를 죄인으로 남겨둘까. 그리하여 마침내 스스로 자신이 여자임을 밝히는 장면은... 다른 독자분을 위해서 생략한다. 아주... 에로틱했다.^^ 

한 문장만 공개해 보자.  

빗물을 마시듯 그녀의 몸을 마셨다. -207쪽 

얼마 전 친구는 내게 동화책만 많이 봐서 연애를 더 못한다고, 당장 끊으라고 했다. 그리고 대신 찐하디 찐한 책을 대량 보내주겠다고 했는데, 그리고 나서 그 다음 날 이 장면을 본 것이다. 으하하핫, 정말 동화책을 끊어볼까? 뭐 이런 생각이 막 지나갔다. 2011년에는 독서 연령대를 좀 높여야겠다. ^^ 

초선과 부용화 캐릭터는 상당히 아쉽다. 초선은 너무 허망하게 작품에서 사라졌고, 부용화는 옹졸하게 그려졌다. 변명하기에 급급하고 자신의 감정에 책임을 다하지 못했던 그녀는 윤희의 캐릭터와 대조되면서 지나치게 주인공만 빛내주는 역할을 했다. 어쩌면 드라마 작가도 그런 것을 읽었기 때문에 드라마에서는 두 사람의 캐릭터를 좀 더 다듬지 않았을까.  그 부분은 좌의정과 병판, 대사헌과 대사성 등도 마찬가지다. 드라마 마지막 회에서 캐릭터들이 갑자기 너무 착해진 것이 상당히 흠이긴 한데, 원작에서처럼 과거급제를 두고서 윤희와의 혼인을 허락하는 내용은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생각할 때 쉬이 용납되지 않는다. 해피 엔딩을 위해서 감수하는 작품의 질적 하락이랄까. 

그래도 잘금4인방을 자연스럽게 규장각으로 이끄는 정조의 행보는 참 좋았다. 이선준이 개유와의 서책을 읽고 싶어하자 과거에 급제해서 규장각에 들어와 보라고 하는 임금의 짓궂은 답변. 유생으로서 대꾸할 말이 없다. 게다가 훌륭한 인재를 탐내는 임금의 그릇은 또 얼마나 크던가.  

"성균관 유생은 제아무리 뛰어난 인재라도 고작 물고기에 지나지 않음을 모르느냐. 집춘문 너머에는 물고기가 새겨진 연못인 부용지가 있고, 그 위에 바로 어수문과 규장각이 있다. 물고기가 물을 만나 용이 되는 곳, 그곳이 규장각이란 의미다. 내가 너희들이 용이 되어 마음껏 노닐 수 있는 물이 되어 주겠노라. 더 크고 강한 용이 되고 싶다면, 나는 더 깊고 넓은 물이 되어 줄 것이다. 그러니 더 이상 기다리게 하지 말고 어서 와라. 나를 기다리게 만드는 것도 불충이다. 멀리 떨어져 있으면 지켜 주기도 힘들다." -337쪽 

임금 자신이 곧 용이면서 신하를 용으로 만들고 스스로 물이 되어 주겠다고 하니, 이런 말을 들은 신하라면 어찌 충성을 맹세하지 않을까. 윤희의 고백처럼 그런 임금을 만나는 것 또한 축복일 것이다. 그리고 이럴 때에 여인인 자신이 끝까지 같이 갈 수 없는 한계를 바라보며 안타까워하는 것도 실감이 났다. 그래서 그녀가 여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어이 규장각으로 끌어주는 이 멋진 임금님과 그런 그들이 나오는 이 이야기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인생의 성찰을 엿보게 하는 그런 성숙한 이야기는... 사실 별로 없다. 그게 목적인 소설이 아니니까. 그저 들끓는 피를 가진 아름다운 청춘들이 있다. 그들도 고민을 하고 그들도 성장한다. 이들이 아니었다면 굳이 그렇게까지 궁금하지 않았을 성균관 유생 이야기. 과거 이야기. 장치기 놀이 등등... 재미난 이야기 꽃밭을 만나서 신나게 노닐다 온 느낌이다. 게다가 그 꽃밭에는 꽃유생들이 있더라는...! 

이제 무대는 그나마 안전했던 성균관이 아니라 프로의 세계 규장각으로 옮겨간다. 거길 나서면 청나라 사신 이야기까지 나오겠지. 남은 이야기가 많아서 기쁘다. 이들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아서 행복하다. 독자를 행복하게 하는 작가라니, 얼마나 재주 많은 문학의 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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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28 14: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9 1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0-12-28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휴, 공개한 한 문장이 아주 그냥.. ㅎㅎ

마노아 2010-12-29 10:17   좋아요 0 | URL
피를 확 끓어오르게 하더라고요. ㅎㅎ

따라쟁이 2010-12-29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흐흐, 저는 이 글 드라마 되기 전에 다 읽었는데, 성규관도 좋고, 이 뒷편이 뭐드라.. 그... 규장각 각신들의 나날인가,, 생활인가.. 그것도 좋았어요.

마노아 2010-12-29 13:00   좋아요 0 | URL
규장각 각신들의 나날이요~ 읽을 게 더 남아서 아주 기뻐요. 두 권짜리 책 안 좋아하는데 이 책은 예외예요.^^ㅎㅎ
 
란제리 蘭製里 7 - 꽃을 만드는 마을,완결
서윤영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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윙크를 구독할 때 참 재밌게 봤던 란제리가 끝난 지도 한참인데, 구입해 놓고도 내내 들여다보질 못했다. 오늘 만나기로 한 사람에게 이 책을 빌려줄 마음으로 부랴부랴 읽었다. 살펴보니 1권 이후로 리뷰를 쓰지 않았다. 그 말은 2권부터 연재본으로 봤다는 얘긴데 나는 어제 5.6.7권을 보았고, 5.6권 리뷰까지 쓰기에는 지금 시간이 좀 모자란다. 그리하여 7권 리뷰로 몽땅 모은다. 어쩐지 작가님께 미안하다..;;; 

란제리라는 마을에 속옷 전문 공방이 있다. 디자인을 하시는 아버지와 경영에서 마각을 드러내는 큰딸. 예쁘장한 아들은 여왕님의 사내 후궁으로 들어갔다. 이 지점이 바로 내가 혹!했던 부분이다. 포도청이 나오고 상선 영감이 나오고 대사헌이 나오는 등, 조선 시대 관직이 나오고 대국 사람도 등장하지만, 시대물이나 과거 배경으로 고정된 틀을 잡지 않는다. 현대인들이 있는 과감한 속옷이 지체 없이 등장하고, 여왕님의 고혹적인 패션도 남다르다. 무엇보다 유머가 살아 있다.   

민 공방은 전문 장인의 손길로 훌륭한 속옷을 만들어내지만 대량 생산이 가능한 더 싼 가격의 경쟁업체 니아메가 들어서는 바람에 큰 위기를 겪는다. 아무리 과감한 시도를 하더라도 자본과 물량 앞에서 속수무책. 그리하여 해강은 진무와 함께 니아메의 공장에 잠입해서 그들의 비밀을 캐내고 그로 인해 또 여러 난관을 거친다.  

니아메가 심어 놓은 끄나풀로 인해 민 공방의 디자인이 유출되는 사고가 일어나고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로 움직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심하지 않은 것은 속옷 디자인 때문이었다. 여기서 진무가 크게 성장하는 것도 보기 좋았고, 영아와 선의의 경쟁을 하게 된 것도 좋았고, 사랑 문제에 있어서도 해강이가 끝까지 카리스마를 잃지 않아서 좋았다. 

다 읽고 나서 1권을 한 번 스으윽 넘겨 봤다. 그림체가 조금 달라진 게 눈에 띈다. 1권 때에는 눈이 좀 더 커서 보다 순정만화스러웠다. 뒤로 갈수록 그림이 더 자연스러워진다. 아직은 근육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인지 몸이 부자연스럽게 보이기도 하는데 그래도 기대가 큰 작가님이시다. 전에도 얘기한 것 같은데 란제리는 영화 소재로 아주 좋은 만화다. 드라마는 노출 때문에 곤란하고, 영화로는 정말 재미나게 나올 법한데 다들 잘 몰라서 눈독을 아니 들이시나? 나라도 인맥이 있으면 소문 좀 내주고 싶다.  

독서클럽은 사두고 아직 못 읽었는데 무척 무섭다는 소문을 들었다. 아, 긴장 되네. 그래도 조만간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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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스탕 2010-12-28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란제리가 이런 내용이었군요. 책 제목은 알았는데, 제목을 봐서 뭔가 속옷을 다루는 내용인가 했었는데 배경이 현대물이 아니라니 신선해요 :)

마노아 2010-12-28 12:40   좋아요 0 | URL
배경이 식상하지 않아서 신선해요. 게다가 속옷이 주요 소재라고 하니 또 신선하고요.^^

산사춘 2010-12-28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자제목 때문에 한참을 웃었어요.
진짜 상상력이 대단하네요.
'니아메'도 뭔가 의미심장해 보이는데 무슨 뜻일까요.

마노아 2010-12-29 10:17   좋아요 0 | URL
니아메는 생각을 안해봤는데 어제 책을 빌려주어서 확인도 못하고 있어요.
저도 갑자기 막 궁금해져요.^^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