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52 호/2013-09-09

수명이 가장 짧은 곤충은 무엇일까?

곤충의 수명은 기온이나 먹이와 깊이 관련돼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한 세대가 가장 짧은 곤충은 진딧물이다. 1960년 일본 도쿄과학대학의 노다 박사가 발견한 한 진딧물은 섭씨 25도의 온도에서 4.7일 만에 한 세대가 사멸했다. 1971년 미국 플로리다대학의 구티에레스 박사에 따르면 20도에서 아카시아진딧물이 5.8일 살았다. 또 1989년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26도에서 기장테두리진딧물이 한 세대를 마치기까지 5.1일 걸렸다.

얼핏 수명이 가장 짧은 곤충으로 떠올리기 쉬운 ‘하루살이’는 실제로 1년 정도 산다. 그럼에도 하루살이라는 이름이 붙은 까닭은 물속에서 유충상태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기 때문이다. 성충이 되어 물 밖으로 나온 후에는 짝짓기를 하고 하루 안에 죽게 된다. 물론 종(種)에 따라 수일~일주일 이상 사는 경우도 있다.

 

출처 : 과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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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USION 과학

제 1949 호/2013-09-04

곰팡이가 질병으로부터 인류를 구해낸 사연

수백 년 전만해도 인간의 평균수명은 불과 20~30살에 불과했다. 태어난 아이 10명 중 3명은 1살도 되기 전에 사망했으며, 절반 정도는 10살 이전에 사망했다. 그 이유는 천연두, 홍역, 말라리아, 콜레라, 이질, 설사, 폐렴, 패혈증 같은 질병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인류는 질병의 원인을 알지 못했다. 기껏 귀신의 저주이거나 나쁜 공기에 의한 것이라고 짐작했을 뿐이었다. 인간이 걸리는 질병의 대부분이 미생물 때문이란 사실을 밝힌 사람은 파스퇴르와 코흐였다.

미생물에 의한 질병으로부터 인류를 구하기 위한 노력은 예방과 치료 두 가지로 형태로 발전했다. 이중 예방법은 좀 더 빨리 등장했다. 1796년 에드워드 제너는 천연두를 막기 위해 우두를 만들어 최초로 예방접종을 했다.

그러나 미생물을 직접 억제하거나 죽이는 항생제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먼저 특정 질병은 특정 병원균 때문에 생긴다는 이론이 확립됐다. 그중 독일의 에를리히는 매독균을 억제하는 특효약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무려 606번의 실험 끝에 비소화합물인 살바르산 606호를 만들어냈다. 당시 매독 치료제로 썼던 수은은 부작용이 많고 효과는 적었던 것에 비해, 살바르산은 화학요법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최초의 사례였다.



[그림] 페니실린을 찾아낸 알렉산더 플레밍. 사진 출처 : 위키미디어
그러나 여러 항생물질은 인간에게도 해롭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런 점에서 인류 최초의 항생제는 영국의 알렉산더 플레밍이 찾아낸 ‘페니실린(Penicillin)’이라 할 수 있다. 플레밍은 1881년 스코틀랜드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세인트 메리 의과대학에 들어가 미생물학자가 됐다. 그는 페트리접시라는 특수한 배양접시에 미생물을 키우면서 미생물의 성장을 억제하는 물질을 찾아내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연구를 통해 눈물에서 추출한 라이조자임(Lysozyme)이라는 효소가 몇몇 박테리아의 성장을 억제한다는 사실을 밝힌 바 있다.

종종 위대한 발견에는 행운이 따르는 법이다. 플레밍이 일하던 실험실의 아래층에서는 곰팡이를 연구하던 라투슈가 실험을 하고 있었다. 1928년 여름 플레밍은 포도상구균을 기르던 접시를 배양기 밖에 둔 채로 휴가를 다녀왔다. 휴가에서 돌아온 플레밍은 페트리접시를 확인하던 중 푸른색 곰팡이가 페트리 접시 위에 자라있고 곰팡이 주변의 포도상구균이 깨끗하게 녹아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냥 재수 없는 일이라고 넘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곰팡이가 포도상구균의 성장을 막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푸른곰팡이의 대부분은 페니실린을 만들지 못하고 오직 페니실리움 노타툼(Penicillium notatum)만이 페니실린을 만든다. 그리고 이 특별한 곰팡이는 아래층의 라투슈의 연구실에서 올라와 플레밍의 페트리 접시에서 자리를 잡고 자란 것이었다.

플레밍은 문제의 곰팡이를 배양했다. 그리고 배양된 곰팡이를 새로운 액체 배지에 옮기고, 다시 1주일이 지난 뒤 배양액을 1000분의 1까지 희석했는데도 포도상구균의 발육이 억제됐다. 이로써 곰팡이가 생산해 내는 어떤 물질이 강력한 항균작용을 나타낸다는 점이 확실해졌다. 그 곰팡이는 페니실리움(Penicillium)속에 속했으므로 그 이름을 따서 곰팡이가 만든 물질을 페니실린(penicillin)이라고 불렀다.

페니실린은 포도상구균 외에도 여러 종류의 세균에 대해 항균작용을 나타냈다. 특히 연쇄상구균, 뇌수막염균, 임질균, 디프테리아균 등 인간과 가축에 무서운 전염병을 일으키는 병원균들에 효과가 컸다. 이와 더불어 페니실린은 다른 약물들에 대체로 취약한 인간의 백혈구에 전혀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점과 페니실린을 생쥐에 주사해도 거의 해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플레밍은 이듬해인 1929년 연구결과를 ‘영국 실험병리학회지’에 발표했다.

그러나 페니실린 상용화에는 중요한 장애물이 있었다. 곰팡이를 직접 인간에게 투입할 수는 없기 때문에 페니실린을 약품으로 정제해야 하는데 플레밍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플레밍의 위대한 발견은 오스트리아 출신 플로리와 유대계 독일인 체인 덕분에 사장되지 않고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1935년 옥스퍼드 대학의 병리학교수로 발령받은 플로리는 곧 체인을 화학병리학 실험 강사로 채용했다. 플로리는 전부터 눈물과 침 등 점액에 들어있는 라이조자임에 관한 플레밍의 논문에 관심이 있었다. 플로리는 1937년 체인과 공동으로 라이조자임을 정제하는데 성공했다. 그들은 라이조자임을 연구하는 동안 항균물질에 대한 논문을 많이 읽었는데 특히 플레밍의 페니실린 논문을 읽고 흥미를 느꼈다.

1939년 플로리와 체인은 페니실린 연구에 착수했고 반년 동안의 노력 끝에 페니실린을 정제해 결정을 얻는데 성공했다. 그들은 정제된 페니실린으로 동물실험을 거듭해 1940년 의학 저널 ‘란셋’에 페니실린이 강력한 전염병 치료 효과를 갖고 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이제 남은 것은 인간 대상의 임상시험이었다. 이듬해인 1941년 인간에게 최초로 페니실린이 투여됐다. 패혈증으로 회복 가능성이 전혀 없는 앨버트 알렉산더에게 페니실린 200mg이 투여된 것이다. 페니실린은 3시간 단위로 투여됐는데 그 효과는 놀라웠다. 24시간도 안 돼 알렉산더의 상태가 눈에 띄게 좋아진 것이다. 체온이 정상으로 떨어지고, 곪아가던 상처가 낫기 시작했으며 입맛도 돌아왔다. 사람들은 기적이 일어낫다고 생각했다. 엿새 만에 임상약이 떨어지는 바람에 알렉산더는 사망했지만, 이 임상시험 페니실린의 효능을 세상에 확실하게 알린 사건이었다.

페니실린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상용화에 성공해 1943년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1944년부터는 민간에도 사용돼 수많은 전염병 환자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플로리와 체인은 페니실린의 개발자인 플레밍과 함께 1945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이렇듯 페니실린의 발견은 인간이 미생물과의 싸움에서 엄청난 무기를 획득하게 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글 : 서홍관 국립암센터 가정의학과 의사

 

출처 : 과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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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3-09-05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은 남이 만들어놓은것 가져다가 쓰는데 선수이지요 ^^

아무개 2013-09-06 08:04   좋아요 0 | URL
아..정말 그런거 같아요!

마노아 2013-09-06 08:45   좋아요 0 | URL
놀라운 재능이랄까요. ㅎㅎㅎ
 

알라딘 서재가 어느덧 10년이나 되었다. 내가 알라딘에 적을 둔 것은 2002년 부터이고 살림을 차린 것은 2006년 부터이니 나의 알라딘 세간살이가 이렇게 많아진 것은 자연스럽게 보인다. 


처음엔 서재라는 존재를 몰랐다. 리뷰를 하나 썼는데 이달의 마이 리뷰에 당선되었다는 이메일을 받고 나서 서재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때 그 인연을 만들어준 책은 가네시로 카즈키의 '스피드'다. 서재라는 존재는 알게 되었는데 여기서 뭘 하면 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고객센터에 질문도 남겼다. 페이퍼는 뭐에 쓰는 거냐고, 어떻게 사용하는 거냐고... 리뷰랑 리스트는 알겠는데 페이퍼는 생소했다. 요새도 가끔 그때 내가 했던 질문을 던지는 새내기 알라디너들을 보게 된다. 옛 생각이 나서 슬며시 웃게 된다. 



서재는 변신한다. 


지금은 '블로그'로 완전히 개편되었지만 초기 서재는 좀 더 아날로그적인 느낌이 있었다. 

 

 

 

 

 

 

서재 지붕은 820*50 사이즈로 얇고 길었다. 알라디너들의 서재 지붕을 만들어서 서로 교환해 걸던 소박한 재미가 있었다. 욕심내서 움직이는 파일로도 만들고는 했는데, 이젠 오래 되어서 어떻게 만들었던 것인지 방법도 잊어버렸다. 개편된 블로그에서는 버튼 몇 번 누르면 배경 화면이 다채롭게 깔리니까 이런 수고를 할 일이 없어졌다. 편해졌지만 내 손이 타지 않는, 남이 차려준 밥상 같은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서재 1,0이 사라지고 이제 2.0으로 바뀔 때엔 막내딸 시집보내는 것마냥 괜히 섭섭했다. 그러다가 알라딘 공지로 며칠 연기되어서 다행이다 싶어 했던 시절. 하하핫, 그러던 때가 있었다. 저 화면에서 서재 지붕도 굿바이 알라딘 서재 1.0이다. ^^ㅎㅎㅎ


지금과 달라진 게 있다면 그때는 '스크랩' 기능이 있었다. 이게 공개가 되어 있으면 서로 간의 소통을 좀 더 활발하게 만들어주기도 하지만, 비공개 폴더로 집어 넣으면 저작권 관련해서 불편한 일이 발생할 소지도 있었다. 요즘은 '별찜' 기능이라는 게 있지만, 찜해 놓은 글을 상대방이 숨기거나 지우면 고스란히 사라지고, 찜이 너무 많아지면 앞의 것을 찾지 못하는 불편함이 있다. 실제로 찜해 두고 다시 되찾아 보는 일이 드물어졌다. 나중에 봐야지~ 해놓고 잊기 일쑤.... 


스크랩 기능 있던 시절에 '차력도장' 서재가 무척 활발했었다 한달에 한권 돌아가면서 책을 추천하고 리뷰를 올리면 차력님이 스크랩해서 서재에 글을 모아주셨다. 나는 거의 마지막에 합류해서 같이 읽은 책은 몇 권 되지 않는다. 당시 나는 '천자의 나라'라는 책을 추천했는데, 두권짜리 책이었고, 무협과 역사와 추리와 팬픽이 결합된 복합적인 요소가 그닥 매력적이지 않았나보다. 아니, 어쩌면 당시 신생 회원이었던 나의 추천이 별로였을지도...;;;;; 아무튼, 마지막까지 다 읽으면 묵직한 감동을 주는 책인데 더 잘 소개하지 못해서 아쉬움이 크다. (이 책은 제목을 바꿔서 개정판이 나왔는데 내게는 첫 제목이 더 마음에 든다.)


서재는 나를 부지런하게 만든다.


돌이켜보면, 알라딘 서재에 자리를 잡지 않았어도 독서는 꾸준히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알라딘에 내 집을 만들었기 때문에 나는 더 부지런해졌다. 내 공간을 알차게 채우고 싶었고, 재밌는 것도 담고 싶었고, 좋은 것이 있으면 나누고 싶었다. 그러니 부지런히 리뷰를 쓰고 페이퍼를 쓰고 리스트도 만들었다. 질문에 답해줄 것이 있을 때 기뻤고, 이벤트에 참여할 때는 재밌었다. 


동화책 읽어주는 여자 

마음의 치유가 필요한 사람에게

사랑을 말하다

신과 함께 가라


늘 참가상을 염두에 두었던 내게 뜻밖에 장원을 안겨준 것도 있었다. 알라딘이 TV 광고를 했던 시절, 패러디 광고 이벤트가 있었다. 당시 내가 참가했던 문구는 이것이다. 


"가령 당일 배송으로 책이 온다면 나는 주문한 12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하하핫, 요새는 아주 급하지 않은 이상 당일 배송으로 주문을 잘 하지 않는다. 그게 택배기사님께 혹여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근데 도움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알라딘의 당일 배송 서비스는 2시로 연장되었다. 


서재는 나를 흥분하게 만든다. 

리뷰 훌륭하기로 인터넷 서재에 소문이 자자한 알라딘 서재가 아니던가. 내가 즐겨찾기한 서재도 부지기수. 이들 무림 고수들이 깊은 내공을 펼쳐 책을 추천해 버리면, 귀얇은 나는 장바구니에 주워담기 바빴다. 서재 마실 다니면서 친해진 분들과 기념일을 챙기고, 또 건수 만들어서 이벤트를 자주 벌이던 시절, 일주일 내내 택배 기사님의 방문을 받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애인보다도 자주 보게 되는 기사님!(그러나 애인은 없었다는 게 함정!)










무수한 책 지름신으로도 모자라서 중고샵 오픈으로 더더욱 정신줄을 놓아버렸다. 등록해 놓은 책이 눈앞에서 사라질 때의 좌절감은 점점 더 빠른 클릭질을 유도했고, 가장 빨리 결제를 마치는 시스템(적립금으로 결제하기!)을 터득하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면 무수히 쌓여버린 책들에 질리는 패턴! 


연말이면 나오는 머그컵과 달력은 또 어떻던가. 한해의 마무리와 시작은 머그컵과 달력이 열어준다고 믿는 것만 같았다. 


'머그컵-이라고 쓰고 '집착'이라고 읽는다.'


해마다 만우절만 되면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바로 이것들 때문이다.


 

 

도대체 누구 머리에서 나오는 아이디어인지, 꾀돌이 상을 주고 싶다. 그러나 나는 매번 낙제점. 단 한번도 문제를 다 푼적이 없다. 심지어 올해는 한 개도 못 찾았다. 그런데 모범답안도 안 올려줘서 아직도 정답 모름...;;;;;;


서재는 나를 으쓱하게 만든다. 

서재 바깥 세상에서는 아무 의미도 없고 내세울 수도 없지만, 여기서는 왠지 어깨 으쓱하게 만드는 기록들이 있다. 


 

 


내 헤어스타일이 저럴 때였으니까 2년 전 여름이었나 보다. 서재의 달인과 리뷰의 달인과 리스트의 달인, 그리고 페이퍼의 달인까지 모두 종합 10위 안에 든걸 나름 자축하면서 캡쳐해 두었다. 사실 땡스투랑 태그도 모두 10위권 안이다. 하나도 안 중요한 거지만 나 혼자 좋아하는 숫자 놀이랄까. 


지금은 택도 없지만, 2007년도에는 한해 동안 서재에 가장 많은 댓글이 달린 서재로 알라딘이 결산해준 기록도 있다. 이 글 쓰느라고 옛 글 들춰보다가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랬던 적이 있단 말인가! 


지금은 영화 서비스가 종료되어서 뽑지 않지만, 영화 리뷰도 뽑던 시절에는 이달의 마이리뷰와 영화리뷰, 포토리뷰와 페이퍼까지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기록도 갖고 있다. 음하하하핫! 역시 아무도 모르고 전혀 중요하지 않지만 나혼자 으쓱해 하는 기록. 


서재에서 책만 보지 않는다.

서재에서 책만 오고 갔던 것은 아니다. 


 

 


멀리 미국에서 날아온 이 사진은 지금도 내 침대 머리맡에 붙어 있다. 하늘 바라보고 나무 쳐다볼 일이 그다지 없는 일상 속에서 내 눈을 쉬게 만들어주는 근사한 쉼터다. 턴님, 요새는 사진 안 찍나요?


 

 


엘신님이 열었던 와인 이벤트에 당첨되었더랬다. 내친 김에 대공원으로 소풍을 가서 알라디너들과 함께 마셨던 와인의 기억. 오프너가 없어서 터프하게 돌로 내리쳐서 병을 깨던 엘신님을 잊을 수가 없다! 


2008년에는 광주에서 알라디너들이 뭉쳤다. 난생 처음 KTX를 타본 날이기도 했다. 이날은 얼마나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또 맛나게 먹고, 그리고 마음 울컥했었던지... 518 국립 묘지를 들어설 때 가슴 터지게 울리던 임을 위한 행진곡... 그렇게 서럽고, 그렇게 아름답고, 또 그렇게 아픈 노래가 세상에 다시 있을까 싶다. 


광주이벤트, 우리의 소중한 시간


2009년에는 제법 어린이날 다운 어린이날을 보낼 수 있었다. 알라딘 파주 물류센터 투어를 다녀왔던 것이다. 해마다 어린이 날 즈음해서 열리는 파주 책잔치 시즌이면 이때의 즐거웠던 기억이 떠오른다. 


알라딘 물류센터 투어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내가 다녀왔던 곳 중에서 최고 정점을 찍은 것은 유홍준 교수님과 함께 한 부여, 완도 답사였다. 


유홍준 선생님과 함께 한 부여 답사


그밖에도 많은 공부를 하게 된 각종 강연회가 있었고, 큰 즐거움을 갖게 한 여러 공연들도 있었다. 생각해 보면 나의 하루는 알라딘 서재에서 시작해서 알라딘 서재로 마무리하는 궤도를 갖고 있다.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을 지금도 가슴 두근거리며 교제하고 있고, 여기서 산 책들을 읽고, 그 감상을 이곳에 적는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일상들이 이곳에 가득히 스며들어 있다. 시간이 더 흘러서 찾아 보면 얼굴 빨개질 수도 있고, 어이 없어 웃을 수도 있는, 그러면서도 즐겁게 추억할 수 있는 많은 추억들이 이곳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그러니 이곳 서재는 내게 앨범이고 일기장이며 거울이다. 


내게는 알라딘 폴더가 있다


내 컴퓨터 하드에는 '알라딘' 폴더가 있다. 가장 많은 것은 '밑줄긋기'를 적어 놓은 한글 파일이고, 그 다음에는 내가 좋아하는 알라디너들의 이름이 담긴 폴더가 있다. 그 안에는 사진도 있고, 노래도 있고, 기억도 있다. 누군가 결혼을 하고(알라디너 커플도 있고!) 아기를 낳고, 또 그 아이들이 학교를 졸업하는 일련의 삶이 담겨 있다. 컴퓨터 하드를 여러 차례 날려 먹은 내가 이제는 백업까지 해두는 소중한 폴더가 되었다. 


물론, 긴 시간 이곳에 있으면 늘 즐겁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지금도 이름만 떠올리면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불쾌함을 넘어서 증오를 갖게 하는 인물도 이곳에서 만났다. 그러나 시간은 놀라운 치유력을 가져서, 애써 떠올리지 않는다면 이제는 그다지 자주 떠올리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내게 아픈 손가락으로 자리한 분도 계신다. 미안함과 아쉬움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차차 옅어지고 있다. 그 모든 감정들이 모두 이곳에 녹아 있다. 그러니까 알라딘 폴더는, 내 마음에도 있는 것이다. 자주 열지 않지만 가끔 열어서 먼지도 털어내고, 기억도 환기시키는...... 


서재 10년, 나의 서재 생활은 8년. 앞으로도 어깨동무하며 잘 지낼 것이다. 좋은 책 보며, 좋은 사람 만나며, 그렇게 좋은 기억 담아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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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3-09-03 0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 알라딘 역사가 한눈에 보입니다. 감동하면서 읽었습니다.
이런 추억이 있으셨군요. 하긴 저도 서재'가 뭐하는 곳인가 했어요...
최근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은 책 검색하고 나온 링크 타고 가는 수준이었지.
요렇게 마을이 있다는 사실은 잘 몰랐습니다.

마노아 2013-09-03 13:00   좋아요 0 | URL
'마을'이라는 이름이 제법 잘 어울리는 알라딘 서재가 참 정겨워요.
예전 달동네 느낌의 서재가 제법 추억을 자극하지요.
지금은 어딘가 아파트스러워졌지만요.^^;;;

hnine 2013-09-03 0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뭉클합니다. 알라딘 서재는 이제 헤어지기 어려운 친구가 되었네요.
저 나무 사진도 생각나요.
그런데 알라디너 커플도 있어요? 전 모르고 있었네요 ^^

마노아 2013-09-03 13:01   좋아요 0 | URL
일상사가 모두 이곳에서 이루어지고 진행되는 느낌이에요.
하루의 시작과 끝도 모두 여기서 이어지니, 정말 뗄 수 없는 가족이자 친구가 되어버렸어요.
하하핫, 알라디너 커플이 있습니다. 지금은 아기도 있어용(>_<)

프레이야 2013-09-03 0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근조근 마노아님이 눈앞에서 이야기 들려주시는 것 같아요! 턴님의 저 사진도 엘신님의 아르헨티나 비노 이벤트와 공원에서 마노아님을 비롯해 여러 분들이 찍은 사진도 기억나요. 추억을 부르는 페이퍼^^ 가을바람결 느껴지는 오늘아침 선물이네요. 이렇게 잘 기록해서 모아두고 백업까지 받아놓으시고, 마노아님~~♥

마노아 2013-09-03 13:02   좋아요 0 | URL
이렇게 한번 추억을 되새김질 하는 것도 참 즐거워요.
오랜만에 예전 글들 들춰보면서 이게 벌써 몇 년이나 지났다니...하면서 놀랐답니다.
'알라딘' 카테고리가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찾을 엄두가 안 났을 거예요.^^ㅎㅎㅎ

마립간 2013-09-03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알라딘 폴더가 있어요. 제가 쓴 글을 비롯해서 알라디너의 사진들. 선물을 주고 받았을 때 메모해 놓았던 주소록 등.^^

서제 버전이 upgrade되고 알라디너끼리 머쓱했는데, 서재의 낯설음이 알라디너 사이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마노아 2013-09-03 13:03   좋아요 0 | URL
그쵸! 우리 서로 어색하하고 머쓱해하던 기억 나요. 그 낯설음이 이제는 또 익숙함으로 가라앉았어요.
당연한 거지만요. 알라디너의 이름으로 우리 참 많은 것들을 공유하며 살아온 것 같아요. 이렇게 한 시절을 보냈네요.^^

아무개 2013-09-03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조목조목 꼼꼼하게도 쓰셨네요. 마치 옆에서 그전엔 이렇고 저렇고 그랬어~라고 이야기 해주는듯 해요. ^^

마노아 2013-09-03 13:04   좋아요 0 | URL
하하핫, 어젯밤엔 시간이 좀 많았어요.^^ㅎㅎㅎ
몇 개 더 쓰고 싶어서 리스트 적어놨다가 덜어놨어요. 너무 길더라구요.;;;;

다락방 2013-09-03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는 상반신욕] 보고 완전 뿜었네요. ㅎㅎㅎㅎㅎ
저 사진은 너무나 근사한걸요! 저였어도 침대 머리맡에 붙여두었을 것 같아요. 좋으다..
턴님이 다시 사진을 찍으셔서 올리셨으면 좋겠네요. ㅠㅠ

알라딘에서는 뭐니뭐니해도 사람들 만난 게 제일 좋았어요, 저는. 좋은 사람들이요. 계속 계속 만나고 싶어지는 그런 사람들.
헤헷 :)

마노아 2013-09-03 13:06   좋아요 0 | URL
아, 정말 아이디어 최고예요. 매해 뿜으면서 상품을 보는데 올해는 정답을 못 봐서 즐거움을 놓쳤어요. 크흑!
저 사진을 고르길 참 잘 했어요. 아, 저게 커다란 사진이면 액자에 박아서 거실에다가 둬도 좋겠어요. 우리집의 보물이 될지도 몰라요. 나중에 턴님께 해상도 좋은 파일로 달라고 하면 주실까요? 프리미엄 붙기 전에 선수를....ㅎㅎㅎ
좋은 사람들을 참 많이 만났어요.
아, 다락방님 폴더는 알라딘 폴더 말고 따로 특별히 만들어 두었답니다. 으캬캬캬!! ㅎㅎㅎ

saint236 2013-09-03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의 글을 읽다가 반가운 이름 두개에 화들짝합니다. 턴님과 엘신님!!! 이분들 요즘 너무 조용하시네요. 건강하게 잘 살고 계신 것인지...

마노아 2013-09-03 13:06   좋아요 0 | URL
엘신님이 몇달 전에 잠시 지구 불시착 했는데 또 출타를 가셨네요. 턴님도 너무 뜸하구요.
못 찾겠다 꾀꼬리!!! 모두들 어여어여 다시 오셨으면 좋겠어요. ^^

찌리릿 2013-09-03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감회가 새롭네요. ^^ 2004년 만우절에 제가 낸 1집인가 2집 앨범도 캡처에 묻어있군요. 아~ 옛날이여...네요.

마노아 2013-09-03 13:07   좋아요 0 | URL
예전 글 보다가 찌리릿님이 그림책 소개에 리플 단 것 보면서 배시시 웃었어요. 아가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어요.
전설의 만우절 기획 상품의 아이디어 창고가 여기 있었군요! ^^

잉크냄새 2013-09-03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 지붕과 서재 1.0 ... 기억이 새록새록 나네요.
게으른 알라딘 1세대이지만 님의 기억을 통해 저도 그 시절을 아주 잘 돌아보게 되었네요.

차력독토가 차력도장 이야기 하는 건가요? 그 예전에 복돌이 님이 날라댕기던 시절의 그 차력도장인가요?

마노아 2013-09-03 13:08   좋아요 0 | URL
저는 완벽한 1세대는 아니지만, 1세대의 한부분을 공유한 것 같아요.
차력도장으로 고쳤어요. 근데 왜 저는 차력독토로 기억할까요? 그렇게도 불렸던 것 같은데 어떻게 활용된 건지는 모르겠네요.^^;;;;

라주미힌 2013-09-03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와... 옛날 앨범 보는거 같아요..

마노아 2013-09-03 16:33   좋아요 0 | URL
라주미힌님도 몇 컷 찍으셨어요.^^

순오기 2013-09-04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이 10주년 인터뷰에 안올라와서 이상했어요? 바빠서 인터뷰 답을 못했나 생각했는데....
알라딘서재 증인의 꼼꼼한 페이퍼~ 최고예요!!
우리는 광주이벤트와 유홍준 선생님과 함께한 부여, 완도 보길도 답사까지 함께 해서 즐거웠어요!

마노아 2013-09-04 13:37   좋아요 0 | URL
아, 저한테 인터뷰 요청이 안 온 거예요. ㅎㅎㅎ
광주이벤트와 유홍준 선생님과의 답사 여행까지, 우리가 같이 한 시간이 참 많아요.
이번에 페이퍼 작성하면서 좋은 추억이 참 많았구나... 떠올리며 즐거웠어요.
짧지 않은 시간이에요.^^

2013-09-04 19: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9-04 2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코코죠 2013-09-04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그립다. 우리 그럴때가 있었죠 정말. 그랬었는데, 좋았었지요. 네 참 그랬어요...

마노아 2013-09-05 15:19   좋아요 0 | URL
그리운 오즈마님! 오즈마님 이름을 다시 볼 수 있는 이곳 서재가 좋아요.
글도 자주자주 올려주세요. 오즈마님 글이 고파요!!!

세실 2013-09-04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꼼꼼하기도 하셔라~~~ 알라딘 추억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네요^^

마노아 2013-09-05 15:19   좋아요 0 | URL
추억의 파노라마~ 책갈피 같은 알라딘이에요. 세실님도 그 한장을 장식하고 계셔요.^^

네꼬 2013-09-06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휴 알라딘님아 마노아님한테 절해라!

마노아 2013-09-06 17:17   좋아요 0 | URL
알라딘은 저 안 좋아해요. ㅋㅋㅋ

무스탕 2013-09-10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없는 알라딘, 알라딘이 없는 마노아님은 생각할 수가 없군요 ^^

(요렇게 늦은 댓글 보시려나? ㅎㅎㅎ)

마노아 2013-09-11 08:49   좋아요 0 | URL
우앙, 무스탕님! 왜 이렇게 오랜만에 알라딘에 나타나신 건가요!
그동안 보고 싶었어요. 부빗부빗(^^ )( ^^)

희망찬샘 2013-10-19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알라딘의 산 증인이시군요.

마노아 2013-10-19 14:54   좋아요 0 | URL
연차가 길지는 않지만 나름 오래 있었네요. 하하핫, 애증의 세월이 흘렀어요. 연인을 지나 신랑 같아요. ㅎㅎㅎ
 

명백한 2학기. 그리고 선명한 추석이 들어 있는 계절!

가을이 깊어가는 만큼 독서의 깊이도 더 성숙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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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화요일에 역사박물관을 다녀왔다. 보고 싶은 전시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접힌 부분 펼치기 ▼

 

동농 김가진과 며느리 수당 정정화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김갑수의 부킹 정치 때문이었다. 정정화의 '장강 일기'를 텍스트로 잡고 팟캐스트를 진행했는데 일가족의 헌신과 조국애가 먹먹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찰나에 이 전시회를 알게 되었다. 광복절을 끼고서 진행하기 좋은 주제였다. 



 









개화기 지식인이자 관료였던 동농 김가진은 서얼 출신이었다. 그는 서얼치고는 대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시기에 태어났지만, 그가 태어난 시대는 '기회'의 시기가 아니라 나라를 빼앗기고 수모를 겪고, 그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 모든 걸 내던지게 했던 격동의 시기였다. 


젊은 시절엔 시를 통해 많은 이들과 교류를 나누었고, 글씨(독립문 현판의 한글과 한문 글씨가 정정화의 기록으로는 김가진의 글씨라고 하고, 동아일보 기사로는 이완용의 것이라고 한다. 김가진의 글씨였으면 한다.ㅜ.ㅜ)로도 이름을 날렸던 김가진이었다. 일본어, 영어, 중국어에 능통했던 그는 외교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냈고, 오랜 외교관 생활로 선진 문물도 일찍 접할 수 있었다. 김가진은 갑오개혁의 주체세력으로 참여했으며, 독립협회 운동에도 가담했다. 평균보다 열린 시각을 갖고 있었을 테지만, 1908년, 망국 즈음에 그가 가졌던 국제 정세 인식은 한계가 있었다. 대한협회 회보에 실린 글이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병탄을 두려워하는 것은 기우이며 어리석은 것이다."


1910년 8월 29일,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03년 전, 대한제국이 강제로 일본에 병합되던 그 해에 그는 남작 작위를 받았다. 치욕스런 작위를 그가 뿌리치고 독립운동의 길로 나아가게 된 것은 3.1운동 때였다. 그의 나이 74세였고, 대한제국의 대신으로는 유일하게 상하이 임시정부로 망명한 독립지사다. 


비록 서얼로 태어났지만 안동 김씨 명문가 출생이었다. 신분에서 빚어진 사상적 한계라던가, 나이에서 오는 건강의 한계를 핑계로 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작위를 공식적으로 반납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독립 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한 것은 애석한 일이다. 정식으로 작위를 반납했다면 그가 상해까지 갈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대한제국의 대신이었고 명망 있는 인사가 상해 임시정부로 갔을 때 일제는 무척 타격을 받았을 테니 말이다. 


1910년, 수당 정정화는 동농 김가진의 아들 성엄 김의한과 혼례를 치렀다.  두 사람은 1900년 생으로 동갑내기 부부였다. 1910년이면, 어휴, 꼬마 신랑에 꼬마 신부였다. 어리기도 했지만 시절이 엄혹하니 신혼의 즐거움을 챙기긴 어려웠을 것이다. 남편은 1919년, 아버지 김가진을 따라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로부터 두달 뒤, 정정화 역시 그들을 찾아 상하이로 떠났다. 연로한 시아버지를 봉양한다는 일념으로 시작된 여정은 이후 26년 간 임시정부의 안살림꾼 역할을 하게 만들었다. 

 


(이 시절 한국인의 사진을 보면 대체로 5등신인 듯...)

 


상해로 떠나기 전까지의 일생에 대해서는 여느 전시회에 다름 없이 평범했다. 그가 살았던 곳, 행적들, 남긴 글씨와 유물 등등...


그러다가 상해로 공간이 바뀌면서 전시장의 분위기도 달라졌다. 보다 동적으로, 입체적으로 느낌이 바꼈다. 안동에서 경성으로 향하는 열차가 재현되어 있고, 창밖에 걸려 있는 스크린에서는 황량한 풍경이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스피커에서는 차분한 목소리로 장강일기가 울린다. 기차 안 노란 호롱불은 어둡지만 한가닥 희망도 느끼게 했다. 상해까지 향하는 그 먼길, 충분히 어렸던 정정화는 그 험한 길을 어떤 마음으로 달려갔을까.


거룻배 공간도 인상적이었다. 여전히 장강일기의 한대목이 울리고, 어둑한 공간 안에서 산너머 뿌옇게 밝아오는 태양(조명) 빛에 조국이란 과연 무엇일까 잠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들에게 조국은 어떤 존재였던 것일까. 


정정화가 김구에게 밥을 차려주던 초라한 부엌 공간도 재현되어 있었다. 밥 차려 달라고 청하는 김구의 목소리와, 아이를 잠시 봐달라고 넘겨주는 정정화의 목소리가 이어서 들린다. 한쪽 공간에는 김구의 소지품도 전시되어 있었다. 구두가 어찌나 크던지 사이즈가 300은 되어 보였다. 체격이 큰 만큼 발도 무척 크셨나 보다. 좁은 골목 길에는 빨랫줄이 얽혀 있고, 옷가지도 걸려 있었다. 실감나는 재현이다. 


윤봉길의 도시락 폭탄과 물통 폭탄도 같이 만날 수 있었다. 거사 직전 김구와 바꿔 찬 회중시계도 보였다. 자신의 시계는 이제 하루면 멈춰야 하는데 훨씬 비싼 시계이니 선생님의 시계와 바꾸자 했던 청년 윤봉길의 모습이 겹쳐졌다. 이 시계를 보는 내내 김구 선생님은 얼마나 가슴이 저몄을까. 그의 거사가 성공하고, 선생님은 정정화에게 신문과 술 한병을 사오라고 시켰다. 슬프되 기뻐해야 할 아픈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공존하기 힘든 두 가지 마음을 얼마나 오래 품고 살아야 했던 것일까. 그 시절의 그분들은......


임시정부가 끊임없이 이동하는 동안 정정화도 이동해야 했다. 시아버지는 1922년에 이미 돌아가셨고, 그녀는 남편과 함께 임시정부의 살림을 계속 도맡았다. 전시장에는 이들이 숨어 지내야 했던 방공호도 재현해 두었다. 이리 어지럽고 황량한 시절에도 아이들은 뛰어 놀고 거침없이 웃기도 했을 것 같아서 슬며시 지어지는 미소가 조금은 아팠다. 보답을 바라고 했던 조국 해방 운동이 아니었겠지만, 그럼에도 보답 없고 대답 없는 역사의 흔적에서 이분들의 헌신에 죄스럽기까지 하다. 

 

 

강물을 재현해 놓은 공간이 있는데, 돛대 위에 뮤지컬 영상을 보여주었다. 제목은 '아, 정정화'다. 반복되어 나오는 노래가 울컥하게 만들었다. 압록강 건너 님 따라가네.... 


김갑수 선생님의 책 '압록강을 넘어서'도 같이 떠올랐다. 이 책은 일반 서점에서는 구입할 수가 없다. 전업 작가에게 도저히 먹고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지 않는 출판 유통 문화에 저항하는 의미로 자신의 책만 취급하는 독자 경로를 만들어 두신 것이다. 오마이 뉴스에 연재할 때는 제목이 '제국과 인간'이었는데, 책으로 출간된 줄 모르고 그걸 다 출력해 두었다. 2부와 3부도 곧 나올 예정이라고 하니 함께 사든지, 복사본으로 읽을 것인지 조만간 결정을 해야겠다. 


김의한이 갖고 있던 한국 광복군 대원증이 신기했다. 오른쪽 위쪽에는 김구의 사진이, 왼쪽 아래에는 본인 사진이 대각선으로 놓여 있었다. 한국 광복군에서 김구의 위치가 보인다. 


1946년 1월, 정정화와 그녀의 가족은 중국을 떠나 조국으로 향했다. 얼마나 고대하던 조국이었을까. 그러나 부산항에서 그들을 맞은 건 차가운 난민수용소와 미군 병사들이 뿌려대는 DDT뿐이었다. 뿐이던가. 1951년에는 간첩혐의를 받고 있는 한 여인을 만났다는 죄로 종로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게 되었다. 왜놈 경찰의 손에 붙잡혀 왔었던 바로 그 종로 경찰서 말이다. 조국의 해방을 위해 헌신에 헌신을 거듭했던 그녀는 해방된 조국에서 '요시찰인'이 되어 있었다. 약산 김원봉이 떠오르는 순간이다.ㅜ.ㅜ


결국 옥살이까지 해야 했던 수당 정정화. 영상은 백발의 노인이 된 그녀가 백범의 묘소를 찾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얼마나 자그마한 체구이던지, 저 작은 어깨로 얼마나 많은 짐을 짊어지고 여기까지 왔는지 숙연해지고 말았다. 


 





 

 



한국 광복군 서명이 담긴 대형 태극기다. '조국'이라는 두 글자에 눈시울이 뜨거워졌을 조상님들을 생각하니 내 마음도 뜨거워진다. 

 

 


연극 장강일기와 뮤지컬 아 정정화! 보지 못한 게 아쉽다. 다시 재연한다면 꼭 보고 싶다. 손수건 준비하고 가리라. 

 

 

동농 김가진전과 상하이 일기, 그리고 장강일기다. 상하이 일기는 정정화의 아들 김자동의 책이다. 자료 중에 김의한의 작사집도 보였는데, 명필 달필 아버지에 비하면 그의 한자 쓰는 솜씨는 음....;;;;;;


그렇지만 한글 글씨는 매우 단정했다. 아마도 한자 쓸 일이 별로 없었나 보다. 그럼 그럼....


전시를 다 보고 나올 즈음 갑작스럽게 친구와 약속이 잡혀서 조금 더 머물고 싶은 마음을 떨치고 나와야 했다. 정말 좋았더라고, 감동적이었다는 메시지를 남기기 위해 방명록으로 향하는데,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 즈음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씩씩 대면서 자기가 쓴 방명록의 문구를 가리켰다. 

 

 

헐, 돈이 뎀벼도 이런 짓 자꾸 하지 마라!고 써 놨다. 한마디 해주고 싶었다. 시간이 덤벼도 이런 데 나다니지 말라고!


보통은 9월로 넘어가서야 8월에 다녀온 곳을 정리할 텐데, 경술국치일이었던 오늘 굳이 이 날의 기록을 남기는 것은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사태를 보면서 이 아저씨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인생을 다 바쳐서 힘들게 조국을 찾아준 조상님들께 면목 없는 하루다. 


작금의 대한민국을 보면 이런 조국을 어찌 해야 하나 한숨이 나온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굶주리고,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고, 사람 대접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대한민국, 친일파의 후손이 자손 대대로 떵떵거리며 살고 있고, 권력과 재산을 손에 틀어쥐고 호령하는 세상, 통일된 조국을 갈망하는 이들에겐 가차 없이 '종북'이라 일컬으며 마녀사냥을 해대는 이 땅, 광복절도 모르고 삼일절도 모르는 중학생이 영어 단어 외우기에 급급한 이 나라. 


이런 열패감과 이런 상실감, 이런 좌절감이, 임종국 선생님을 친일 연구에 목숨 걸게 했던 저들의 I'll be back! 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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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으로 가는 길'의 연계 전시로 S.Y. 또까레프의 '독립운동가 초상전'이 같이 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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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화가가 그린 우리 독립운동가의 초상화라니, 이질적이면서 어쩐지 어울린다는 느낌도 든다. 연해주에서 우리의 독립운동은 또 얼마나 열심이었던가.



초상화의 주인공들이다. 윤봉길이 빠진 게 아쉬웠고, 이승만이 끼어 있다는 것에는 분노를 금할 수가 없었다. 버럭!! 하긴, 그렇게 따지다 보면 적절해 보이지 않다고 여겨지는 이름이 더러 있다. 끙!

 


역사. 국혼. 이런 이름들은 오늘날 무척 낯설거나 혹은 생뚱맞기까지 하다. 아니면 국수주의자라고 괜히 지레 짐작으로 불편한 시선을 받기도 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플래쉬를 끄고는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왼쪽이 사진이고 오른쪽이 초상화다. 김구와 박은식 

 


신채호와 안중근. 안중근 초상화를 보면서 안재욱이 떠올랐다. 생김새 때문이었는데 성도 같네. 혹시 한 집안일까??

 


양기탁과 이동녕. 두분 눈매가 어쩐지 비슷. 푹 들어간 눈이 김민종을 떠올리게 했다. 옴팡눈이라고 해야 하나...;;;;;

 


이회영과 한용운. 한용운은 좀 안 닮았다. 젊었을 적 사진을 보고 그린 걸까? 

 

 

펼친 부분 접기 ▲



돌아나오는 길, 하늘은 청명했고, 날씨는 푹푹 쪄서 아주 더웠다. 땅을 적시는 저 물줄기 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한양전도를 바닥에 깐 아름다운 분수다. 야간에 보아도 아주 멋질 듯! 

 

전시회는 10월 13일까지 이어진다. 더위도 많이 가셨으니 시간 내어서 많이들 다녀왔으면 좋겠다. 입장료는 무료다. 전에 없던 카페테리아도 생겼다. 쉬어갈 공간도 충분하다. 


저리 방명록을 어지럽히는 인사 말고, 고마움과 자랑스러움을 담뿍 담아갈 가슴 따뜻하고 생각 바른 분들이 많이 오셨으면 좋겠다. 이 나라가 어떻게 지켜졌는지,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가슴 깊이 새겨갈 그런 뜨거운 심장을 가진 분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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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년 8월의 문화생활
    from 그대가, 그대를 2013-10-01 22:33 
    접힌 부분 펼치기 ▼ 54. 더 테러 라이브 장소 변화가 거의 없고, 등장인물도 거의 없는 이런 영화에서 주연 배우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그런 면에서 하정우란 배우를 선택한 것은 탁월했다. 영화를 한번에 몰아 찍는 것이 아니니 순간순간의 감정의 변화를 잘 조절해야 했을 텐데, 그걸 위해서 감독은 주인공의 감정 변화를 그래프로 보여줬다고 한다. 오, 현명해! 생각해 보니 하정우가 전도연과 함께 출연한 '멋진 하루'에서 전도연이 그랬다. 거의 두 사람만
  2. 팟캐스트 전성시대(역사 편)
    from 그대가, 그대를 2014-03-01 17:16 
    새학교는 공업 고등학교다. 실업계 근무는 처음이어서 옆자리 선생님이 자동차 과목이라는 것이 여전히 적응이 안 되고 있고, 학급 이름에 건설, 설비... 이런 이름이 들어가는 것도 많이 낯설다. 금세 익숙해지겠지만.제일 아쉬운 대목은 역사 수업이 4시간이고 법과 정치가 16시간이라는 것. 최근 수년 동안 내 전공으로는 계속 수업하기 힘들었다. 역사가 훨씬 재밌는데 아까비~아무튼, 날이 날인 만큼! 내가 즐겨듣는 역사 관련 팟캐스트 몇 개 정리해 보련다.가
 
 
transient-guest 2013-08-30 0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으로 의미있는 시간이었네요. 정말이지 광복과 건국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해서 첫 단추를 잘못 끼운 민족의 운명이 오늘의 우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정재계에 골고루 퍼지고 혼사를 통한 합종연횡으로 사실 정파와 계파를 초월하여 나라를 지배하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는 친일-->반공-->군사독재-->정재계로 이어지는 나라 지배층의 계보가 마냥 안쓰럽기만 합니다. 그나저나 그 방명록에 미친 글을 써놓은 사람은 가스통 할배라도 되나요? 저였다면 한 마디 해주었을 것 같아요.

마노아 2013-08-30 08:49   좋아요 0 | URL
첫단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 역사가 제대로 보여주고 있어요.ㅜ.ㅜ
정신 나간 그 아저씨는 가스통 할배라고 생각하기엔 지나치게 젊더라구요.
방명록 글 자기가 썼다고 말하곤 가버렸는데 글 보고서 식겁했어요.
전 무슨 좋은 얘기 써놓은 줄 알았죠. 황당 경악이에요..;;;;;;
근데 대한민국에 이런 사람도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공포스러워요.
나라가 미쳐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transient-guest 2013-08-31 03:37   좋아요 0 | URL
광기가 장기화 되는 것 같아요. 부정선거로 대통령이 된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면, 의외로 이 어려운 시절은 좀더 길어질 지 모르겠습니다.

마노아 2013-08-31 12:07   좋아요 0 | URL
간을 봤던 거겠죠. 이 정도도 넘어갈 거야... 계속 그런 식으로 국민이 마지노선을 열어줬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서늘하게도 말이죠.

꿈꾸는섬 2013-08-30 0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시간내서 가보고 싶네요. 근데, 멀다는 생각에 주춤, 그래도 기간이 여유 있으니 가보도록 노력해야겠어요.

마노아 2013-08-30 08:49   좋아요 0 | URL
아이들과 같이 다녀오셔요. 종로니까 교통은 좋을 거예요.
명절에는 이것저것 행사도 많으니까 연휴 끼고 오셔도 좋구요. 사진 찍을 좋은 자리가 아주 많답니다.^^

아무개 2013-08-30 0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국이 시국인지라 한숨이 푹푹 나오네요. 에혀..

마노아 2013-08-30 08:49   좋아요 0 | URL
이것이 진정 말세가 아닌가 싶습니다..;;;

Mephistopheles 2013-08-30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돈이 덤벼도 이런 짓 자꾸 하지 마라."

방명록 남긴 분 앞에서는 요즘 드라마에 나오는 소지섭처럼

손을 펄럭펄럭 빠르게 두번 흔들어주면서

"꺼져"...이거 한마디 해줘야 합니다...ㅋㅋㅋ

마노아 2013-08-30 12:52   좋아요 0 | URL
제가 드라마는 보지 못했지만 소지섭의 썩소 표정은 충분히 짐작이 가는군요.
차갑게 한마디 던졌어야 옳았어요. ㅋㅋㅋ

BRINY 2013-08-30 1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월 13일까지이군요. 꼭 가봐야겠습니다. 좋은 전시회 소개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몇년전부터인가 가끔 동생과 얘기합니다. 이래서 우리나라가 식민지가 되었구나하구요.

마노아 2013-08-30 23:57   좋아요 0 | URL
추석 연휴에 집에 다녀가실 때 한번 가보셔요. 사람은 좀 많을 수 있겠지만 겸사겸사 좋을 것 같아요.
작금의 상황을 보다 보면, 말씀해 주신 이야기도 수긍이 가네요. 이 나라 어쩝니까...ㅜ.ㅜ